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팀 교양만두] 교양이 쌓일 만두 하지?

일루젼 2022. 6. 1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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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팀 교양만두
출판 : 다산북스 
출간 : 2022.04.18 


     

가끔 추천 피드에 뜰 때마다 한 두 개씩 눌러보던 것이 어느새 구독까지 하게 되었던 <교양만두>.

해당 제작팀이 쓴 책이 나왔다는 걸 알게 되어 읽어보았다. 

 

기본 구성이 대화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다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만화나 요약 자료들이 본문 중간중간에 들어가 있어 읽고 있던 흐름이 자주 깨지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가장 적절한 지점에 이해를 돕기 위해 넣고 싶었을 테니 어쩔 수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짤을 패러디한 것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어 웃느라 그런 것도 있었다)

 

처음에는 에피소드들을 동서양이나 시대순으로 정리하지 않은 점이 조금 의아했는데, 다 읽고 보니 정말 의문이 떠오르듯 배치한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아직 왜 이 순서로 배치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처음 알게 된 내용들도 많았고, 적절하게 들어간 농담과 현대적 예시들이 꽤 유쾌했다.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통상적으로 알려진 것 한 꺼풀 아래의 지식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다.

 

전 연령대에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재미가 있어야 조금이라도 흥미가 생기게 마련이고, 언급되고 있는 내용들은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인물/사건들이니 학업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런 것과 멀어진 성인들에게도 흥미롭고 재미난 내용들이니 일독을 추천한다.     

 

재미있게 읽었다.  

 


   

 

- 공주라도 호칭이 다 다른데, 왕의 정실이 낳은 딸은 공주, 후궁이 낳은 딸은 옹주, 세자의 딸은 각각 군주나 현주라고 불러. 원래 조선 초기에는 대군의 부인이나 왕의 후궁, 서녀, 종친의 딸 등을 두루 옹주라 불렀는데, 세종·문종 이후 제도가 정비된 뒤부터는 왕실의 딸만을 부르는 호칭이 됐지. 

 

- 다시 간택 제도 얘기로 돌아가면, 태종은 자기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당시 춘천 부사 이속에게 중매쟁이를 보냈어. 근데 이 사람의 반응이 문제였지. 왕이 결혼하자는데 정색하면서 이렇게 말한 거야. "내 아들은 이미 죽었는데? 뭐, 상대가 정혜 옹주라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지만." 

 

- 우린 뭐 다 비슷하지. 그런데 그랜드 투어에서 하고 싶은 것만 하다간 여행을 망치기 정말 쉬웠어. 당연한 말이겠지만,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유학의 결과가 아주 많이 달라졌지. 심한 경우 성병에 감염되어 고생하며 돌아오는 이도 많았고, 겉멋만 잔뜩 들어서 주변 사람을 촌스럽게 여기는 철부지도 있었지. 이렇게 겉멋만 든 젊은이들을 마카로니라고 불렀어. 그들을 풍자한 그림도 남아 있지. 

 

- 1442년 한 신하가 세종에게 "사역원의 학생들이 10년 동안 외국어 공부를 해봤자, 두 달 정도 현지에 다녀온 사람보다 못합니다. 사역원 안에서는 무조건 전공 언어로 대화하고 우리말을 쓰면 벌을 줘야 합니다"라고 건의했지. 이에 세종은 마치 영어만 써야 하는 '영어마을'처럼 사역원을 '중국어마을'로 만들어버렸어. 

 

- 소설처럼 역관 중에는 부자가 꽤 많았어. 주로 중계무역으로 돈을 벌었지. 당시 사신단은 한번 외국 출장을 가면 6개월에서 1년 이상 걸렸는데, 이때 조정에서는 별도의 출장비를 지급하는 대신 역관 한 사람당 인삼 80근을 주고 현지에서 팔 수 있는 무역권을 보장했어. 근데 이 사업이 아주 쏠쏠했지. 역관들은 인삼을 판 돈으로 중국의 사치품을 직구해서 국내나 일본 등지에 되팔기도 했다고 해. 

 

- 이번엔 동양 쪽 인물을 살펴볼까?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반전 이미지를 지닌 인물이 있어. 바로 퇴계 이황이야. 

 

- '부동심(不動心)에 이르러야 부귀가 마음을 음탕하지 못하게 하고, 빈천이 마음을 바꾸게 하지 못하며 (…) 도가 밝아지고 덕이 세워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반전이 있지. 이황은 그런 글을 남기긴 했지만, 사실은 투자에 엄청난 관심이 있었어. 그가 자식에게 물려준 땅만 36만 평 정도라고 해. 대략 여의도의 절반 가까이 되는 면적인 거지.

 

- 이황이 아들에게 남긴 편지들을 보면 재산을 늘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어. 조선시대 양반의 재산은 크게 땅과 노비였거든. 그중에서도 이황은 노비를 늘리는 데 굉장히 관심이 많았어. 그래서 자신의 노비와 평민(양인)을 결혼시키려고 애썼지. 조선은 일천즉천에 노비종모법까지 채택하고 있어서 노비끼리 낳은 자식은 어머니 쪽에 '소유권'이 있었지. 그래서 남자 종을 가진 집안은 어떻게든 노비가 아닌, 양인 처자와 결혼을 시키려고 했어. 그래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어머니 쪽이 아니라 자신의 노비가 되니까. 앞에서 말한 편지에서 이황은 그런 방법들로 '재산'을 늘리는 데 신경을 쓰라고 말한 거야. 사실 당시로서는 크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 이황이 가지고 있는 고고한 학자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굉장한 반전이지. 
 

- 인류 역사상 최고의 위작 화가, '위작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벨트라키 부부의 얘기예요. 남편이 위작을 그리면 아내가 그걸 정품으로 속여서 비싸게 팔았다고 하는데, 제작부터 판매까지 부부가 한 팀이 된 거죠. 특히 수법이 굉장했는데, 원작이 그려진 시대의 재료를 사용한 것은 물론이고, 원작자가 그림을 그렸을 법한 장소를 찾아가서 그가 그리던 순서나 기법을 따라 그림을 그렸다고 해요. 작가가 원작을 그리는 데 2박 3일이 걸렸다면 위작도 2박 3일 걸려서 완성했고, 원작자가 비 오는 날에 그림을 그렸던 작가라면 자신도 비 오는 날까지 기다릴 정도였다고 하죠. 

 

- 다른 의미로 세상을 놀라게 한 위작 사건도 있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독일의 한 소금광산에서 명화 6750여 점이 발견됐지. 나치의 이인자로 군림했던 헤르만 괴링의 사유지였는데, 그중에는 다들 잘 알고 있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미공개 작품들도 있었지. 그 작품은 바로 <간음한 여인과 그리스도>라는 작품인데, 놀라운 건 그게 결국 위작으로 밝혀진 거야! 재미있는 건 그 사실이 들통난 과정인데, 잘 들어봐.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은 대화가인 페르메이르의 미공개 작품을 찾아냈다며 열광했고, 이내 그림이 나치에 흘러들어 간 과정을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해. 그리고 판매이헤런이 그 작품을 반출한 범인이라는 게 밝혀졌지! 재판정에 불려 간 그는 국보급 화가의 작품을 적에게 넘긴 셈이니 매국 행위로 사형까지 받을 수 있었어. 그런데 거기서 그는 놀라운 말을 해. <간음한 여인과 그리스도>는 페르메이르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그린 위작이라고 말이야. 처음에는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 결국 법원은 그에게 위작 사실을 증명해 보이라고 했고, 판매이헤런은 엄중한 감시 아래 페르메이르 스타일의 새로운 작품들을 그려냈어. 그리고 그 그림은 전문가들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지! 최종적으로는 사기죄로 2년 형을 선고받았긴 했어. 그런데 판매이헤런은 매국노라는 비난에서 벗어나서 괴링에게 한 방 먹인 민족 영웅으로 대스타가 되었지. 판매이헤런의 다른 위작들도 가격이 뛰어서 미친 듯이 팔려나갔다고 하고.

 

- 예술계를 비판하기 위해 일부러 위작을 그렸던 작가도 있었어. 톰 키팅은 화가로서 자신의 작품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크게 실망한 뒤 위작을 미술관에 판매하기 시작했어. 소위 미술계에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속아 넘어가는지를 폭로하려고 한 거지. 위작을 만든 혐의로 재판을 받기도 했지만, 톰 키팅은 자기 작품이 위작이라는 증거를 그림 곳곳에 남겼기 때문에 사기죄는 성립되지 않고 무죄 판결을 받았어. 그의 작품에는 조금만 들여다보면 쉽게 위작임을 알 수 있는 장치들이 있었거든. 

- 벼루 꾸미기 모르니? 시대가 달라도 '덕후'의 마음은 다 똑같지 않겠어? 18세기 조선에는 벼루 꾸미기에 진심이었던 덕후가 있었거든. 당시엔 잘 나가던 선비라면 그가 꾸민 벼루 하나쯤은 꼭 갖고 있어야 할 정도로 인기였던 인물, 바로 '벼루 덕후' 정철조야. 관심이 좀 생기니? 정철조의 벼루는 돌의 원형을 살리면서 국화나 귀뚜라미 같은 문양으로 포인트를 줬다고 해. 밋밋하고 상투적인 벼루 디자인계에 혁명을 불러일으켰다고 할까? 평소에도 작은 칼을 하나 갖고 다니면서 쓸 만한 돌만 있으면 즉석에서 벼루를 조각했다고 하는데, 그걸 또 아무한테나 가져가라고 했지. 
 

- 정철조는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냥 벼루 깎는 게 좋았으니까! 오죽하면 자신의 호를 '석치'라고 지을 정도였는데, 석치는 돌에 환장한 어리석은 자라는 뜻이야. 요즘 어떤 분야의 마니아들을 부를 때 '덕후', '오타쿠', '빠'라는 접미사를 붙여 부르는 것처럼, 조선시대엔 마니아들에게 어리석을 치(痴)나 미칠 광(狂), 버릇 벽(癖)을 붙였어. 약간 자조적이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느껴지는 뉘앙스랄까. 조선 후기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던 박제가는 화가 김덕형의 책 <백화보(百花譜)>의 서문을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해. 

- '사람이 벽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다. 벽이라는 글자는 질병(病)과 치우침(偏)으로 구성되어, '한쪽으로 치우친 병을 앓는다'라는 의미가 된다. 고독하더라도 독창적인 정신을 갖추고 전문 기예를 익히는 것은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 
 
- 이들은 미쳤다거나 바보 같다는 말을 오히려 명예롭게 여겼어. 미치지도 못하고 그럭저럭 사는 건 죽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한 거지. 
 
- 이처럼 새로운 정보가 넘쳐나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 것 같니? 정보의 양보다 질이 더 중요해졌고, 지식을 편집하고 재배열하는 일이 중요해졌지. 이제 어떤 정보를 아느냐 모르느냐보다는 '누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느냐가 중요해진 거야. 당시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라서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돈을 쓰거나 몰두할 수 있는 취향을 기를 수 있었어. 그리고 다들 자신이 전문가라고 과시할 수 있는 분야를 찾으려 했지. 당시의 조선은 그야말로 '대오덕시대'였다고 할까? 

 

- 조선시대에 어떤 덕후들이 더 있었는지 궁금해지지? 실학자 이덕무는 평생 책을 2만 권 가까이 읽은 책 덕후였어. 그가 스스로 지은 별명은 '간서치'였는데 바로 '책만 읽는 바보'라는 뜻이야. 생계를 잇기 힘들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데도 책에 대한 애정으로 모은 책이 수백 권, 읽은 책은 2만 권에 달했다고 해. 

 

- 또 애연가였던 이옥은 연초, 즉 담배에 관한 책인 <연경(烟經)>을 집필했어. 당시에는 이미 담배가 들어온 지 200년이 가까이 돼서 애연가들이 많았어. 하멜의 표류기에는 조선에선 아이들도 담배를 피운다는 얘기도 있었고, 정조 역시 엄청난 골초였다고 해. "담배처럼 유익한 게 없다. 담배가 아니면 답답하고 꽉 막힌 심정을 풀지 못한다. 이런 담배를 백성들에게도 베풀어서 혜택을 함께 나누려 한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왕과 백성이 다 같이 즐기는 기호품인데도 그에 대한 저술은 하나도 없었지. 그래서 이옥은 담배 농사부터 시작해 이를 둘러싼 문화까지 상세히 분석했어. 가짜 담배 식별법, 담배에 얽힌 전설, 담배 피우는 12가지 도구도 설명하고 있지. 이옥은 또 <백운필>이라는 책도 남겼는데, 짐승, 벌레, 꽃, 곡식, 과일, 나무 등 열 가지 주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어. 예를 들어, 꽃을 설명할 땐 당시 서울 지역에서 원예 분야가 활황 중이라는 정보나 꽃시장의 위치, 각종 화훼의 품종과 재배 방법까지 상세히 적어놨어.

 

- 마리 앙투아네트의 헤어스타일을 푸프라고 해요. 머리를 위로 높이 부풀린 뒤, 여러 가지 장식을 단 스타일이죠. 이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비제 르 브륑인데 대부분 남성이던 당대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여성 작가로서 명성을 떨쳤어요.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아서 왕실 초상도 많이 남겼고요. 옷의 질감, 주름의 음영, 프릴 장식 같은 걸 얼마나 섬세하게 묘사하는지도 당시 초상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요인이었거든요. 사진이 없었던 시대이니, 화려하고 섬세한 초상화가 더더욱 필요했던 거죠. 

- 너희들 조선시대 남자들도 이발을 했다는 거 아니? 아까 만두가 말한 것처럼, 조선시대라고 하면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들지 않았을 것 같잖아? 그런데 실제로 머리숱이 너무 많고 무거우면 상투를 틀 때 스타일이 잘 살지 않거든. 그래서 머리 가운데 상투를 틀 부분에 동전만 한 크기로 숱을 쳤다고 해. 그러면 그 부분이 좀 가라앉겠지? 이걸 배코치기라고 해. 

 

- '변발'이랑 '촌마게' 말하는 거지? 사실 소화하기 어려운 스타일이지. 그런데 두 헤어스타일엔 공통점이 있어, 모두 전쟁과 관련돼 있다는 점이야. 먼저 변발은 본래 중앙아시아와 동북아 북방민족의 전통 헤어스타일이야. 물이 귀한 유목민들의 환경 특성상 머리 감기가 어려웠고, 긴 머리는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릴 때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에 이런 스타일이 등장했어. 유목민들은 식량을 얻기 위해 약탈과 전쟁을 자주 일으켰는데, 투구를 쓰면 머리가 쉽게 뜨거워졌지. 머리카락이 있으면 보온 효과가 있어서 체온이 떨어지기 어렵고. 그래서 아예 위쪽 머리카락을 밀어서 체온을 빨리 떨어뜨리려고 한 거야. 
 
- 영국이 18세기 중반부터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미친 전성기를 달린 건 알고 있지? 그때 출간된 책 중에서 그야말로 초대박을 친 게 있어. 자, 과연 어떤 분야의 책이었을까? 상류층 귀족들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에티켓 책이야! 당시 영국에선 급격한 기술과 산업 발달로 신흥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어. 자산가, 장교, 의사, 금융업자, 법률가 등 전문직 중산층이 많아졌지. 그런데 갑자기 돈을 번 중산층이 상류층의 교양까지 갖춘 것은 아니었지. 이들은 상류층들의 '인싸 파티'인 사교계에 들어가고 싶어 했거든. 상류층의 행동 습관이 아직 몸에 배지 않은 이들에게 에티켓 책은 좋은 교과서가 되었어. 

- 일단 영국 사교계에는 모임이 활발하게 열리는 사교 시즌이란 게 따로 있었어. 런던을 중심으로 3~4월에 시작해서 무려 7~8월이 되어서야 끝나는 일정이었는데, 주로 오후부터 시작해서 새벽까지 진행되는 경우도 많았지. 흔히 사교 파티라고 하면 그냥 모여서 먹고 떠드는 일만 할 것 같지만, 스포츠·예술·학문 등과 관련한 여러 모임도 열렸어. 

 

- 보통 세 시즌이 지나는 동안에도 청혼을 받지 못하면, 사교계에서 '퇴물'로 여겨졌지. 그래서 다들 물이 들어왔을 때 정말 열심히 노를 저어야 했어. 최단 시간 내에 서로의 매력, 지위, 재산, 장래성을 평가하는 자리이자, 특히 결혼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던 당시 여성들에게는 거의 살벌한 취업 면접장이나 다름없는 자리였지. 
 
- 살롱 문화는 원래 그리스에서 시작됐는데 17세기 프랑스 사교계에서 크게 유행했어. 이탈리아 출신 랑부이에 후작부인이 1608년 파리에 연 살롱이 프랑스 최초의 개인 살롱이라고 해. 거기서 귀족과 지식인들이 모여서 역사·철학·과학·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지. 볼테르, 루소, 디드로, 홈 등 유명한 사상가들도 이런 살롱 문화의 영향으로 성장했어. 
 

-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무도회는 13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부터 시작됐고, 차츰 프랑스나 영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게 돼. 17세기 프랑스에서는 귀족들이 화려한 가면을 쓰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무도회를 열었고, 영국에서도 궁정 가면극이 유행을 했다가 17세기 중반 청교도혁명 이후에 쇠퇴하게 되지. 자, 그럼 이제 무도회에서 춤추는 예절을 알려줄게. 무도회가 시작되면 주최자는 무도회장 입구에서 손님들을 맞이해. 무도회는 밤 10시쯤 사람들이 오기 시작해서 새벽 4시까지 계속됐고 출입도 자유로웠어. 초대손님 중 가장 고위층 사람이 도착하면, 주최자와 처음으로 춤을 추면서 댄스 타임이 시작되지. 
 

- 댄스 신청은 여성이 먼저 할 수 없었거든. 남성의 신청을 기다려야 해. 남성은 여성 본인 혹은 보호자인 샤프론에게 허락을 받아서 춤을 한 번 추고, 서로 맘에 들면 따로 티룸으로 이동해서 얘기했어. 만약 별로면 여성을 본래 자리에 다시 데려다주고 다른 파트너를 찾으러 떠났지. 당시엔 춤을 잘 출 수 있는 남성의 숫자가 만성적으로 부족했거든. 같은 사람과 두 번 이상 춤추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지. 게다가 상류계급이 아닌 중류 계급 남성들은 사교댄스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고. 

- 그 사교 코스 중에 오페라 관람도 있었거든. 당시의 오페라는 지금으로 치면 마블 영화나 BTS 콘서트랑 비슷한 정도의 인기였다고 할까? 처음 오페라가 등장한 곳은 1597년 이탈리아 피렌체였어. 바르디 백작가에서 후원하는 예술가, 지식인 집단이 스터디를 하던 중 누군가 이런 제안을 던졌지. "야, 우리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로 '꿀잼' 음악극 한번 만들어볼래?" 그렇게 만들어진 최초의 오페라는 바로 야코포 페리의 <다프네>라는 작품이었어.  최초의 오페라 <다프네>는 아쉽게도 기록만 남아 있고, 악보는 남아 있지 않아. 지금까지 악보가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는 <에우리디체>야.   

 

- 초기 오페라는 귀족을 포함한 몇몇 소수를 위해 제작됐어. 왕족이나 귀족의 축하 행사에서 연주되는 고급 유흥거리였거든. 하지만 점차 모두를 위한 예술이 되어갔지. 1637년 베네치아에서 세계 최초의 대중 오페라 극장이 오픈됐고, 그때부터 평민들도 오페라를 볼 수 있게 됐지. 

- 놀랍게도 초밥이 두 개씩 짝을 지어 접시에 오르는 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비밀이 있거든. 바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것과 관련이 있지.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미국이 던진 원자폭탄을 맞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건 알고 있지? 우리나라의 광복절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전쟁에서 패한 일본은 그동안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식민지에서 가져오던 식량이 끊기면서 대규모 식량 부족 사태를 맞게 돼. 일본 내의 쌀 공급이 무려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지. 

- 쌀값은 패망 전보다 130배가 뛰었고, 어획량이 절반으로 줄면서 일본인의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었던 생선 가격도 금값이 되었어.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일본 정부는 모든 음식점 영업을 전면 금지했고 일반 국민의 외식 또한 금지했지. 먹을 것이 너무 귀하다 보니 도입된 긴급 조치였어. 정부 차원에서 모든 식재료를 공공재로 취급해서 배급만 가능하도록 묶어버렸고, 돈을 받고 상업적으로 음식을 판매하는 행위를 막았지. 하지만 늘 간절한 사람에게 길은 열리는 법! 상황을 순식간에 극복하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나오게 돼. 초밥을 아무리 '미스터 초밥왕' 수준으로 맛있게 만들어도 이걸 돈을 받고 팔면 불법이 되니까, 쌀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약간의 돈을 받고 쌀을 초밥으로 가공해 주자는 의견이었지. 개념을 살짝 바꿨다고 할까? 돈을 받고 음식을 파는 게 아니라, 손님이 가져온 쌀을 초밥으로 바꿔주는 거지. 이렇게 되면 초밥을 만드는 기술에만 수수료를 주는 셈이니까, 요식업이 아니라 위탁가공업에 해당한다는 주장이었어. 

- 1인당 가공할 수 있는 초밥의 양을 쌀 한 홉으로 제한하는 조건으로 수락했어. 대충 우리가 먹는 밥 한 공기 정도의 분량이야. 이 정도의 양으로 초밥을 만들면 대략 초밥 열 개 정도가 나와. 게다가 당시 일본은 어획량이 줄어서 여러 종류의 생선을 초밥에 얹을 수 없었어. 그래서 초밥집 주인들은 대략 한 종류당 두 개씩, 네다섯 종류의 초밥을 가공해 접시에 담아 판매했지. 

- 물론 지금에야 그렇지만, 분유의 기원에는 전쟁과 관련한 사연이 있어. 분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찾아볼 수 있거든. 거기에는 13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누비며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 기병들이 말린 우유를 발명했다고 적혀 있어. 러시아는 매서운 추위 때문에 나폴레옹과 히틀러 모두 정복하지 못했던 곳인데, 몽골 기병대는 겨울철에 러시아를 공격해 점령할 정도로 신속한 기동력이 있었거든. 그 중심에는 가볍게 휴대할 수 있으면서도 높은 열량을 보유한 분유가 있었던 거지. 

- 유행이나 트렌드의 첨단에 있는 패션 분야에서는 특히 적극적으로 색을 활용해 특정 색이 정체성을 견고히 해주고 자신의 가치까지 높여줄 것이라는 인식을 적절히 이용하는 거지. 분홍이 여성성을 강조하는 색이 된 것도 그래. 사실 분홍색은 상남자의 색이었거든! 기본적으로 성별에 따라 옷을 입는다는 생각이 오늘날만큼 일반적이지는 않았지만, 1897년 <뉴욕 타임스>의 기사를 보면 "분홍은 대개 남자아이의 색으로, 파랑은 여자 아이의 색으로 간주된다"라고 적혀 있어. 분홍은 피를 연상하게 하는 붉은빛에서 파생되었으니 대체로 대담한 남자아이들의 색이라 생각했어. 반면 성모 마리아의 색으로 여겨졌던 파란색은 차분한 느낌 때문에 얌전한 게 미덕이었던 여자에게 주로 요구되었고, 그 생각은 20세기 초반에 점차로 뒤집혔어. 

 

- 1937년 초현실주의 디자이너였던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여성용 향수 패키지에 '쇼킹 핑크'라고 이름을 붙였던 게 대표적인 일화 중 하나야. 이 제품이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분홍과 여성용 제품의 연관성이 생기기 시작했지. 점차로 여성성을 강조한 분홍의 콘셉트 광고가 대량으로 퍼지면서 분홍에는 '아름답고' '예쁜' 이미지가 씌워지게 되었어. 



 


 

혹독한 시집살이가 일반화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인데요. 사실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는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았습니다.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때에도 성별과 관계없이 똑같이 상속받았으며, 재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죠. 게다가 우리 민족에게는 고구려의 '서옥제'나 고려의 '서류부가혼'처럼 신랑이 신부 집에서 사는 처가살이 풍습이 오래 이어지고 있었죠. '장가 들다'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신사임당(1504~1551년)과 이원수 부부와 그 아들인 율곡 이이(1536~1584년) 역시, 신사임당의 친정인 강릉에서 생활했죠. 이런 경향은 조선 후기 성리학 질서가 강화되면서 달라졌습니다. 결혼한 부부가 시댁에서 사는 '친영제'가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유산도 남성 특히 장남에게 집중적으로 상속되기 시작했죠. 또한 여성은 외출할 때 쓰개치마나 장옷으로 얼굴을 가려야 하는 등 일상생활의 규제도 생겨났고 재혼도 금지되었습니다.  

 

- 도공 이삼평은 일본 아리타 도자기의 기반을 닦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건너간 그는 아리타 마을에 자리를 잡았고, 그곳은 일본의 대표적 자기 생산지가 되었죠. 조선 도공들이 만든 자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등을 통해 유럽에도 수출, 18세기 유럽에 불어닥친 유행인 '자포네스크'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아리타에서 활동한 또 다른 도공으로 백파선도 있습니다. 여성 도공으로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간 그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도공들을 이끌며 존경을 받았고, '흰머리 여자 신선'이라는 뜻의 백파선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지금도 규슈 서북쪽 사가현의 호온지에는 그를 기리는 탑이 있고, 1998년에는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작가 무라타 기요코가 그의 이야기로 용비어천가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 '사대부의 나라' 조선 선비들이 가장 귀하게 여긴 대표적 예술품이 바로 백자입니다. 백자를 만드는 사람들을 사기장(沙器匠)이라고 불렀는데요. <승정원일기>에는 "그릇을 구워 만드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으니, 반드시 대대로 익혀야 그 기술이 비로소 완성된다"라고 적을 만큼 사기장은 국가 차원에서 최고의 기술 장인으로 관리했습니다. 사기장들은 도자기 제작의 각 단계별로 분업을 했는데요. 흙을 그릇 모양으로 만드는 조기장(造器匠), 그릇 모양을 다듬고 미적인 감각을 부여하는 마조장(磨造匠), 흙을 곱게 거르는 역할을 하는 수비장(水飛), 가마에 불을 때는 화장(火匠)과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화청장(靑靑匠)이 각자 분야에서 수십 년간 기술을 가다듬어야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죠. 예나 지금이나 장인의 경지에 오르기 어려운 일일수록 배우는 사람도 드뭅니다. 최고 기술직이라는 명예가 있었지만 일의 강도가 너무 세서 지원자가 적었죠. 사기장들은 기능 전수를 위해 아들이나 제자를 두고, 각 제조과정에서 업무와 교육을 병행해야 했습니다.

 

- 사화(士禍)란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는 뜻으로, 조선에서는 4대 사화(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1519년 기묘사화, 1545년 을사사화)를 손꼽습니다. 특히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돼 많은 이가 죽음을 맞은 사건인데요. 연산군은 이 사건을 통해 사림과 훈구 여러 대신을 숙청하고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습니다. 

 

- 여러분이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배우가 언제 데뷔했는지 아시나요? 어떤 사람이 특정 분야에 처음 등장하는 것을 뜻하는 데뷔라는 단어는 '첫선을 보이다'라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후반, 상류층 집안 딸들은 17~18세가 되면 버킹엄 궁전에 가서 여왕이나 왕태자에게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렇게 궁정용 드레스를 입고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면, 비로소 사교계에 데뷔한 것으로 인정됐죠. 이와 같은 알현식은 처음엔 귀족과 지주에게만 허용됐으나, 점차 중상층 계급 부인과 딸에게도 기회가 열렸습니다. 물론 화려한 궁정용 드레스나 예법 레슨 등 '데뷔 비용’을 쓸 수 없는 경우엔 퇴짜를 맞았지만요. 사교 시즌이 시작되면 다양한 파티가 열렸습니다. 전람회·음악회·오페라나 연극을 감상하기도 했고, 경마·폴로·크리켓·요트 등 스포츠 관람도 모두 사교의 일환이었습니다. 사교계 행사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때로는 국외 여행이 포함되기도 했습니다. 8월에는 새 사냥이 가능한 스코틀랜드로, 11월부터 4월까지는 말을 타고 사냥개와 달리며 여우 사냥에 나섰죠. 상류층 사람들에게 이런 행사는 그 자체보다 다른 상류층 사람과 교류하고 자신을 어필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 18세기에는 오페라 극장에 박스석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상류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스석도 높이에 따라 위계질서가 있었습니다. 2층 박스석에는 귀족 가문의 여성과 동반 가족이, 3층 박스석에는 장교, 법조인, 종교인, 4층 박스석에는 중소기업인과 공무원이 앉았습니다. 왕실이 건립을 주도한 극장의 경우 왕실에서 소유하는 '로열박스’석도 있었는데, 로열박스석은 샹들리에, 천장 벽화, 대형 거울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졌습니다. 

-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부활을 의미하는 르네상스는 고대의 오랜 문화적 유산이 남아 있는 이탈리아에서 먼저 시작됐습니다. 게다가 당시 이탈리아는 동방무역의 중심지로서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바 등의 도시가 성장하면서 문화가 발전하기에도 유리했죠. 프랑스와 영국이 백년전쟁(1337~1453년)을 치르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수 없고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중부 유럽 전체가 고통받을 때,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들은 지중해 무역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한편,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와 알프스 너머 유럽 대륙의 르네상스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문학, 회화, 건축 등 문화예술 방면으로 발전했다면, 16세기 유럽 대륙의 르네상스는 정치·사회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바로 중세의 끝을 알리는 사건, 1517 년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며 게시한 '95개 조 반박문'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이었죠.  

 

- 조선 후기 한양 장터에서 인기 있었던 국밥은 주로 소고기 혹은 개고기를 푹 고아서 간장이나 된장으로 간을 한 장국밥이었습니다. 이들 국밥집 중에서는 다른 국밥집보다 가격이 세 배 가까이 비싼데도 손님이 넘쳐나고, 심지어 임금인 헌종도 민정 사찰 나간다고 둘러대고 몰래 방문했을 정도로 맛을 인정받은 '무교탕반'도 있었죠. 고기로 우린 뽀얀 국물의 설렁탕은 근대에 들어서 장국밥을 밀어내고 폭발적인 인기를 끈 음식입니다. 설렁탕이 폭발적으로 확산한 데에는 시대적 이유가 있었죠.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자국 군대에 보급할 소고기 통조림을 만들기 위해 조선의 소고기 생산을 늘리면서 통조림에는 쓰이지 않는 부속 고기가 남아돌았습니다. 때마침 서울에 인구가 급격하게 몰리면서 먹을 사람도 증가했고, 이 시기에 설렁탕집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됩니다. 돼지국밥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모여든 전국 각지의 피란민들이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돼지 뼈를 우려서 국을 끓인 게 원형입니다. 피란민들은 생계를 위해 장사를 시작했고 바쁜 와중에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돼지국밥에다가 온갖 반찬을 넣어서 먹기 시작했죠. 그렇게 밥 위에 부추, 마늘, 땡초, 양파, 김치 등을 얹어 먹는 돼지국밥이 탄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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