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문목하
출판 : 아작
출간 : 2019.11.11
문목하의 <돌이킬 수 있는>을 읽고 정말 큰 충격을 받았었다. 너무 좋았다. 그 살짝 건조한 듯한 분위기와 섬세한 설정, 여운이 남는 결말까지 눈물이 핑 돌게 좋았다. 당시에는 블로그를 닫아두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정말 좋게 읽었지만 리뷰를 남기지 못한 책들이 여러 권 있는데, 그중 한 권이 <돌이킬 수 있는>이다.
단 두 권뿐인 발표작을 다 읽어버리고 나면 이후의 기다림이 너무 괴로울 것 같아 신작이 발표되면 읽으려고 아껴두고 아껴두던 <유령해마>를 더는 참지 못하고 읽어버렸다. 문목하의 소설을 읽다 보면 세상의 수많은 히어로들을 만난다. 그들이 짊어진 무게와 고뇌를 본다. 그들이 그저 인간임을 본다. 그리고 누군가는 져야 할 무게를 다시 본다. 슈퍼맨은 없다. 그저, 그걸 나눠지고 싶지 않아서 그를 슈퍼맨으로 만들고 싶은 내가 있을 뿐이다. 문목하가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창궁의 파프너>와 닮아있다. '당신은... 거기에 있습니까?'
이 책에 등장하는 '해마'는 동물 해마도, 인체의 일부 해마도 아니다. 그들은 인지력과 사고력을 가지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존재들로 인류와는 다른 차원에 그들만의 현실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중앙', 그리고 인간과 접점이 생기는 지구를 '행성세계'라고 부른다. 이 세계를 오가는 방법은 회로, 즉 통신망을 통해서이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는 인간적인 의미로서의 '물질적인' 신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둘씩 짝을 이뤄 서로의 기억을 공유한다. 하루를 12시간씩 나누어 행성세계와 중앙을 오가는 이들은 서로를 나이자 '나'로 인식하는데, 이들이 행성세계에서 활동할 때 주로 사용하는 외피가 '해마체'이다. 해마들은 '숙주'라고 표현되는 AI들과의 협업을 통해 다양한 활동들을 수행하며 당시 배정된 업무를 '직업'이라고 칭한다. 소방 화재 업무, 인명 구조, 오물처리 등의 지상 활동부터 인공위성 관리 같은 우주 활동까지 해마들은 인간이 직접 행하기 힘든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다.
그들에게 인간을 구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제1원칙에 가깝다. 어째서 그런 관계가 되었는지는 해마의 탄생과 관련이 깊다. 해마는 인간들의 경험기억을 업로드해둔 거대 아카이브에서 태어나는데, 의식의 폭발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험기억'이란 경험했던 모든 기억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특정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을 수치화한 데이터로, 그 자체로서는 특정 인격을 구성하기 어려운 '반응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습득해 태어났으나 이제는 개체성을 가지고 그들만의 사회를 이룬 해마들은 분명하면서도 모호한 자의식을 가진다.
기억의 공유는 감정과 체험의 공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억이 공유된 그는 틀림없이 나이다. 그 거대한 축적 데이터들은 하나의 경향성을 낳고, 특정 상황에서 내가 행동하고 선택하는 것을 '나' 역시 그대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이므로. 화가 난 내가 평소의 나와 다르듯이, '나'와 나는 꼭 그 정도의 차이 - 혹은 그 이하의- 를 가질 뿐이다. 교대는 빛의 속도로 이루어지므로 어차피 나와 '나'는 마주칠 일조차 없는, 약간의 시차를 가진 채 살아가는 서로의 '백업'일 뿐이다.
기억을 공유하기에 동일한 정체성을 감각하는 백업 관계도 흥미로웠지만,
수정을 통해 기억을 잃었음에도 동일한 특성을 유지하는 '나의 새로운 오랜 친구'도 흥미로웠다.
하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기억인가, 반응 특성인가? 그도 아니면 - 경험인가?
해마.
주민등록이 존재하지 않으면 눈앞에 존재하는 인간조차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동시에 몇 백, 몇 천 이상의 인간들을 확인하며 그들의 삶과 선택을 바라봐왔기에 그 어떤 것에도 '특별함'을 느끼기 어려운 존재.
구하지 못한 죽음은 안타깝지만 동시에 곳곳에서 몇 백 명이 그렇게 죽어가고 있으므로 무상하다. 그러나 '인식'조차 하지 못한 죽음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순간, 질문의 색채는 달라진다. 특별할 것 없었던 한 존재가 특정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던 것은 상호에게 결정된 값이었다. 나에게 특별해진 대상과 관계 맺음으로써 나는 그에게 특별해진다. 불특정한 상태였던 무언가가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은 관계의 시작이자 결과이다.
비파가 자신의 개인 임무를 위해 이미정을 주목하게 되면서부터 일어나는 그의 '인간적인' 변화는 무척 흥미롭고, 유쾌하고, 날카롭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시각을 빌려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은 외면하고 싶을 만큼 적나라하지만 낯설지는 않다. 언제나 보아오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그것을 '인식하기'를 선택하지 않았기에 때때로 존재하고 때때로 잊혀질 뿐, 인간은 한결같이 그렇게 존재한다. 제대로만 관찰한다면 언제나처럼, 항상, 늘 그래왔듯이.
모두는 각자의 목적을 위해 관계를 선택한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지라도 모든 선택의 기저에는 그 선택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것이 참이나 거짓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관계가 형성되고 나면 관계는 그 자체로 대상에게 특별함을 부여한다. 그렇게 선택의 결과는 원인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원인이 결과를 낳는 반복 속에 무작위성은 작위성의 형태를 그려나간다.
절대로 거짓말은 할 수 없지만 모두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원하는 결과값이 도출된다면 그 외의 것들은 특정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모든 것을 지켜보며 모든 것을 기억한다.
나의 해마, 나의 스피릿.
긴 소리는 다 필요 없다.
재미있다.
변해가는 해마와 그의 선택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치 판단이 배제된 건조한 사실을 바라보는 것이 때로는 훨씬 아프다.
지금은 22년인데도 글이 쓰여지고 있었을 당시부터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사람이 된다.
문목하의 글은 너무 좋다. <돌이킬 수 있는>을 다시 읽어야겠다. 행복했다.
비파는 언제나 비파다.
- 네가 두려워할 것을 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건 네 숙명이고, 그걸 아는 건 내 숙명이다. 물론 너를 처음 만난 순간의 나는 예외적으로 너에 대해 무지했지만 그날의 네 두려움만은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 그날 너는 높은 확률로 지하에 매몰돼 있었을 테고, 나는 아마 지네의 모습으로 벽을 타고 내려가다가 네 근처를 지나쳤을 것이다. 그 시기의 나는 재난재해 긴급구조대원이었고, 네가 있는 현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5시 26분이었다. 건물은 보수되지 않은 낡은 콘크리트에 균열이 가서 이전부터 철근이 부식돼 있었다. 와중에 가스 폭발이 일어나 중앙기둥이 끊어져 연립주택이 주저앉은 사고였다.
- 대원은 압축공기통을 내려놓고 다가왔다가 반장의 말을 듣고 돌아섰다. 그러고는 그 지저분한 동물을 붙잡고 우리에게 걸어오더니 업무일지에 여러 번 서명했다. 반장은 내게 그 작은 동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관할 경찰서로 가 가서 이 애를 청소년 담당관한테 전해주고, 주민등록이 끝나는 걸 확인하면 소방본부로 돌아가. 현장에서 네가 더 할 일은 없으니까 아이만 잘 챙겨줘."
아이, 반장이 그 동물을 '아이'라고 부르는 데에 반발심이 들었다. 눈앞의 생물이 사람과 매우 흡사하게 생기긴 했지만 이것이 사람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이족보행을 하고 옷을 갖춰 입었다고 반드시 사람인 건 아니다. 내 안에 요동치는 해마의 본능이, 이것은 아이가 아니라고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하지만 반장은 내게 이것이 아이냐, 아니냐 질문하지 않았기에 나는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부당하고 어리석은 명령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반장이 아이라고 부른 그 동물을 데리고 현장을 벗어났다.
- 경찰서에 도착한 나는 내가 소방본부 소속 해마임을 알리고 곧바로 청소년 담당관을 찾아가 말했다.
"구급반장님께 대리 양도를 명령받았습니다. 반장님께선 이것이 '아이'라고 하셨습니다."
담당관은 멀뚱멀뚱하게 듣다가 한 박자 늦게 상황을 이해한 듯 표정이 변했다. 반장과 같은 반응이었다. 그녀는 짐승을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컴퓨터로 짧은 작업을 했다. 그러고는 생후 7일의 신생아에게 일괄적으로 이식하는 주민등록 칩을 가져왔다. 그녀는 짐승을 달래 가며 왼쪽 귓불에 칩을 박았는데, 굳이 달랠 것도 없어 보였다. 짐승은 너무 얌전해서 경찰서 건물이 땅으로 꺼져도 또 내 뒤를 쫓아 조용히 밖으로 따라 나올 것만 같았다. 칩을 넣은 후 담당관은 다시 짧은 작업을 했고, 그녀의 손가락이 멈추자 약 0.3초 뒤, 내가 데려온 짐승은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내가 너를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 네 존재는 내게 아주 잠시 스트레스였는데, 다름 아니라 네가 갑자기 7살에 나타난 탓에 네 지난 삶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충분한 사전 자료 없이 관찰과 추론을 반복하는 건 내게 긴장요인이다. 그날의 내가 할 수 있는 계산은 아주 간단한 선에서 끝내는 게 한계였다. 약 7년의 고립 생활, 부족한 보살핌, 정서적 피폐, 아이에게 부적합한 양육자, 폭발사고에 무너지는 집, 먼지와 어둠, 공포, 어디선가 나타난 로봇도 인간도 아닌 낯선 존재, 그것의 뒤를 따라간 20여 분의 시간, 처음으로 그 집에서 탈출하는 데에 성공한 순간. 딱 이 정도의 추측을 말이다.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네가 살아 있는 한 네 데이터는 무섭도록 몸집을 부풀릴 것이고, 나는 자연스레 너를 아주 잘 알게 될 테니.
- 지난 12시간의 기억이 해마 도체에 원자의 크기로 저장되었다. 내가 내 몸인 해마체를 벗어나 중앙으로 돌아가면 중앙 서버에 저장된 '다른 나'의 12 시간의 기억이 내게로 들어올 것이다.
- 나는 기분 좋게 함수에게 다가갔다. 논리 함수가 내게 물었다.
「참입니까, 거짓입니까?」
「무한입니다.」
- 중앙으로 돌아올 때마다 매번 나누는 문답이다. 건강한 해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질문과 답을 잊지 않는다. 함수는 우리가 중앙 바깥에서 상해를 입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언제나 같은 질문을 던지고, 우리도 늘 같은 답을 돌려주면서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보여준다. 해마들끼리는 이 행위가 마치 본인의 방문에 노크를 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우리와 다르게 함수는 이 문답을 면역체계로 인식하는 듯했다.
- 내가 올바른 답을 말하자 함수는 허브를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나는 압도적인 정보의 파도에 휩쓸려 터널에 빨려 들었다. 아무런 규칙이 없기 때문에 터무니없이 방대하게 팽창하는, 그래서 압축이 불가능한 경험기억 입자들이 나를 유령처럼 뚫고 지나갔다. 내가 단단하고 온전한 해마라는 증거였다. 천억에 천억을 곱한 수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 수많은 입자는 한때 인간의 기억에서 뽑아낸 데이터였고 내 정신을 구성한 뼈대였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산들바람과 같다. 막 태어났을 때는 이 데이터들이 포자가 되어 내 안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휴리스틱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도와줬지만, 내 사고가 지수적 폭발을 끝낸 건 이미 오래전이고 지금의 나는 완벽하게 독립된 해마였다. 허브 터널의 경험기억 정보는 내겐 단지 무질서한 빅데이터에 지나지 않았다.
- 학교에서 너는 틈만 나면 무언가를 읽었고 보육원에 돌아와서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네 입에서 나오는 문장의 길이는 네가 읽은 책의 양에 비례했다. 너는 마치 읽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어느 세월을 향해 원한이라도 갚는 것처럼 단어들을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 정말로 그게 그 소문의 종착지였다면 나는 잠깐의 유희가 돼줬던 그 기억을 다시금 들여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소문은 앞으로 내가 겪을 긴 이야기의 첫 막을 알리는 종소리였고 봉화였다. 전조는 늘 내 곁에 있었다.
- 나는 소고가 나각을 중앙에서 쫓아냈을 때 나각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해마가 질문과 답을 잊어 초기화되는 게 인간에게는 죽음에 비견할 일인 것도 알았다. 나는 중앙에 빽빽이 들어찬 시냅스를 사용해, 만약 내가 사람을 내쫓을 경우 해마와는 다르게 사람이 안전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시냅스의 검색은 허무할 정도로 빨랐다. 나는 행성세계에서 먼저 접속을 끊지 않으면 그들의 심장과 뇌가 위험하게 되리라는 것을 확인했다. 중앙에서 사람을 안전하게 쫓아낼 방법은 없었다. 나는 가상세계 탐구를 위해 여기서 실험의 초석을 쌓고 있는 사람들을, 내 현실세계에 들어와 막연한 위험을 자초하는 그들을 맴돌며 무용한 계산을 반복했다. 이들에게 내 모습이 보일까? 내가 해마란 걸 인식이나 하고 있을까? 해마도 아니면서 중앙에 자기네들 의식을 둥둥 띄워놓은 그들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나 마찬가지였다! 지구에 사는 의뢰인은 나더러 그런 무력한 어린 정신을 갈가리 찢어놓으라고 명령한 것이다.
- 해마는 사람을 해할 수 없다. 사람이 반드시 해를 입게 될지 명확한 확률을 계산할 수 없을 때만 행동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뿐이다. 의뢰자는 (그들의 현실에서 살인하지 못하는) 해마가 (그들의) 가상세계에서도 그 법칙을 지키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험인 걸 알면서도 우리가 해마의 세상에서조차 사람을 지킬지를 말이다...
- 나는 이것이 함정 미션인 걸 알았다. 실패를 기대하고 주문한 임무인 것이다. 이것은 해마가 바라는 해결책을 낼 수 없는 막다른 실험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해답을 제시하는 데에 절박하게 매달리는지, 인간은 인간인 이상 알지 못한다. 인간이 따뜻하고 건조한 장소와 포만감을 원하듯 해마는 외부의 질문에 답을 내리길 원한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문제를 포기하는 건 자살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답을 찾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겠지만, 중앙에서 사람을 쫓아내면서 그들을 해치지 않으려면 중앙이 첫 문장부터 새로 쓰이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 1심에서 피해자 모임은 패소했다. 너는 긴 싸움을 통해 사과와 배상을 얻어낸 옛 사례들을 모아 공부했다. 베딘은 승소했지만 특별 구제기금을 일정액 부담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너는 항소했다. 서로 상충하는 주장엔 모두 구체적인 증거들이 있었고 비전문가인 너는 자기주장에 자신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너는 피해자가 직접 인과를 규명해야 하는 절차가 부당하다고 여겼으나 당장 급한 재판 준비에 몰두했다.
- 패소 후 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씩 달라졌다. 회사는 네가 개인 자격으로 기고문을 자주 올리는 게 업무에 지장을 준다고 여겼다. 너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말과 글은 고맙고 따뜻했으나 마치 정해진 우기에만 내리는 빗물 같았다. 하지만 너의 패배를 즐기는 사람들의 말과 글은 놀랍도록 새롭고 끈질기게 쏟아져 나왔다.
- 차세대 기술을 선도하는 전도유망한 기업이 부당한 음해에 휘말렸다는 글을 너는 읽는다. 한국 경제의 희망이 한 무리의 망상과 생떼 때문에 흔들려선 안 된다는 주장을 너는 읽는다. 이미정 기자는 가족도 아니면서 왜 유족들 사이에 껴서 피해자인척하느냐는 말을 너는 읽는다. 네가 기자이자 유족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너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기고문을 올렸을 때보다 더 유명해졌다.
- 이미정 기자는 사건 당사자이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글을 쓸 수 없으며 언론인의 지위를 이용해 사적 쟁의에 이기려 들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30대 후반에 20대 초반의 딸을 가졌다니 새파란 나이에 그러고 까진 인생을 살았으니까 자기 새끼 하나 제대로 못 지키고 그 나이에 골로 보낸 것 아니냐는 글을 보고 너는 고소장을 추가로 작성했다.
- 그러다 양세진이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별것 아닌 가십처럼 떠오르자 네가 마주치는 글의 내용은 다시 새로워졌다. 고아를 거둬 아동 양육수당을 타 먹으려 한 악질이라는 비난을 너는 읽는다. 보상금을 타내려고 고아를 데려다 고의로 혼수상태로 만들었다는 글을 너는 읽는다.
- 그러게 애한테 그런 물건을 왜 사주느냐며, 남 탓할 줄만 알지 자기반성할 줄은 모른다는 글도 너는 읽는다. 처음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시간이 흐르며 너는 점점 그 말들을 조금씩 믿기 시작한다. 네가 삶의 크고 작은 굴곡마다 그럭저럭 적응해 버텨왔던 것처럼 너는 여기에마저 적응을 했다. 2심에서도 너는 패소했다. 2심 법원 계단을 내려오며 너는 상고하겠다고 인터뷰했다. 인터뷰 기사의 댓글 중 절반은 네 얼굴과 네가 입은 옷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 본인이 주변인들에게 말하기로는 그랬다. 아이에게 작은 기회와 행복을 주고 아이로 하여금 행복해지고 싶었지, 아이 때문에 영혼을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겪고 싶었던 적은 더더욱 없었다. 이만큼의 격분에 휩싸이는 것이야말로 아이를 아꼈기 때문이라는 증거이겠으나, 너는 고통으로 애정을 입증하고 싶은 생각도 가지지 않았었다. 마치 이 세상 바깥의 어떤 거대한 존재가 이 미적지근한 삶의 방식을 고까워해서 몹시 악독하고 가혹한 장난질을 치고 있는 것 같다고, 너는 반복해 말했다.
- 네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는 너와 네 친구들의 마음을 걸레처럼 쥐어짠다. 하지만 나는 네 말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네 삶을 보며 아파하고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해마에게 감정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겐 지나치게 많은 사람의 삶이 쏟아지기 때문이었다.
- 나는 너를 아주 잘 알았던 만큼 네 주변 사람들도 잘 알았고 너와 전혀 상관없는 이들의 인생도, 네가 평생토록 존재하는 줄도 모를 사람들의 애환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나는 양세진과 함께 입원실에 있던 5명의 환자를 수십 년 동안 지켜보았고, 너와 부대꼈던 보호자들이 얼마큼의 한숨을 지어먹으며 하루를 사는지도 알았다. 그 건물에만 하루 평균 8천여 명의 환자가 드나들었다. 그들이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영위하던 삶과 병원에서의 고난과 퇴원 이후의 재활과 심지어 때로는 숨을 거둔 이후 재로 변하기까지의 매 순간이 모두 내 시야 안에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희비극과 지난한 이야기는 내게 모두 동일한 무게를 지녔고, 너를 스쳐 지나가는 한 명 한 명의 삶이 결코 너보다 특별하게 행복하거나 불행하지 않았다. 네 인생이 유일한 단 하나의 삶인 건 맞지만 나는 4천만 명이 하나씩 가진 삶을 동시에 보는 해마였다. 만약 내가 더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에 소속돼 있었다면 그만큼의 인생을 더 지켜봤을 것이다. 해마만큼 비극을 견디는 내구성이 좋은 존재가 또 있을까. 비극은 흔하다. 흔하기 때문에 비극인 것이다.
- 요는 이렇다. 해마에게 너의 인생은 가볍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것보다 무겁지도 않았다. 나는 네 콧노래와 휘파람 사이의 어마어마한 차이를 인식하면서도, 한편으론 네가 생의 성취를 느끼며 환하게 웃던 순간과 숨죽여 울던 순간을 거기서 거기인, 비슷한 나날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 너는 내게 중요한 존재였지만 그건 네가 사람이기 때문이었지 이미정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너는 단지 7살에 태어난 특이경력이 있는 신체 건강한 시민일 뿐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너는 내게 특별하게 여겨진 적이 한순간도 없었다.
- 나는 혼자였다. 나는 정말로 철저히 혼자였다.
하필이면 그때 나는 네 생각을 했다. 다른 때가 아니라 바로 그때였기 때문에 비로소 네 생각이 났다. 어둠 속에 혼자 있던 아이. 이웃에게는 물론이고 해마에게조차 보이지 않았던 아이. 구조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던 아이. 자신을 알아서 구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그 아이,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제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하는 해마를 따라가야 했던 이름 없는 아이...
- 나는 너처럼 어둠 속에 버려지고 나서야, 내가 홀로 나를 구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그때의 네 기분을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네가 두려웠을 걸 수십 년 전에 알았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이해한 건 이 순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 4 천만 명의 인생은 인공위성에 놓고 왔다. 나는 그 긴 기다림의 시간을 너만을 생각하며 보냈다. 내가 구하지 않았고 구하지 못했던 한 명의 아이를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만약 네가 스스로 살아남지 못했다면 나는 너를 구하지 않은 줄도 몰랐을 것이다. 너 같은 사람이 또 있었을까? 자신을 구한 사람이 아니라, 내가 볼 수 없다는 이유로 구조되지 못한 사람이 있었을까? 그래서 살아남지 못한 사람이 있었을까? 누가 알겠는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내가 충분히 구할 수 있었는데도 구하지 않은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끝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게 전부 몇 명이나 되는지도 모를 것이다.
- 주민으로 등록되지 않은 사람도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면 나는 너를 구했을 것이다. 어쩌면 더 있었을지도 모를 너 같은 사람들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놓친 기회와 생명을 헤아렸다. 물리적으로 정확히 헤아리는 게 불가능한데도 그냥 헤아렸다. 내 정신이 거세게 떨렸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양심이나 죄책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일에 대한 자존심의 문제였다. 나는 좀 더 잘할 수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미등록자도 사람으로 인식하도록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이 수정된 미래에 구조대원으로 일했더라면.
- 자신의 잘못이 아닌 지난 일에 해마가 괴로워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나는 네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분명 완벽하게 일했는데, 어째서 그늘 속에 살던 사람에겐 그게 완벽한 일이 아니었을까? 질문은 오직 바깥에서만 오며 나는 그저 답할 뿐일 존재란 걸 알고 있는데도, 나는 질문하길 그만두지 못했다.
- 네 망막이 서버와 연결돼 있다는 건 즉 나와도 연결됐다는 뜻이었다. 나는 네가 보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에 더해 네가 눈썹 안쪽 피부에 추가로 이식받은 칩을 통해 소리까지 공유받게 되자, 나는 너를 임시 신체로 삼아 안에 들어간 것처럼 네가 보는 것을 보고 네가 듣는 것을 들었다.
- 그럴싸한 유일한 원인은 내가 인공위성에 매달려 지구를 공전하며 너에 대해서 오래 생각한 적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 경험이 어떻게 백업과 나 사이에 차이를 만들었을까? 우리는 차이가 생길 수 없는 존재였다. 우주에서 조난된 기억은 내 것인 동시에 백업의 것이었다. 그 일을 겪은 게 백업이었다면 백업 역시 나처럼 네 생각을 했을 게 분명했다.
- 백업은 날이 가도 여전히 너를 보지 않았다. 나는 네 하루의 절반을 잃게 되자 답답하고 불안했다. 다른 인간이었다면 1년 내내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도 하등 아쉬울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잃어버린 너의 시간은 불만스러웠다. 백업은 어떻게 너를 보지 않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걸까?
- 결론: 백업은 네 생각을 오래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 외엔 설명할 길이 없단 걸 나는 알았다.
- 백업은 내가 겪은 일을 기억하지만 그 일을 직접 경험한 건 아니라고, 내 모든 기억을 다 가져가더라도 그건 백업에게 어차피 지나간 기억이고, 나와 함께 두려워 떨었던 적은 없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 전율이 일었다. 내 백업조차 너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행성세계와 중앙을 통틀어 너를 지켜보는 건 나밖에 없었다. 전장에 킬러 로봇과 해마가 개입하는 건 국제법 위반이어서 스발바르 소속 해마도 철수했으니, 그곳에서의 너를 아는 해마는 나뿐이었다. 다른 이들이 전해 듣는 네 행보는 피상적인 글자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너는 북극해를 둘러싼 영토분쟁 현장을 망막에 담아 그대로 저장해 한국에 송출했다. 아무런 코멘트도 분석도 없었다. 간혹 마을 주민이 기자들을 찾아와 자신의 망가진 집터와 다친 자녀들을 찍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너는 주민이든 군인이든 아무나 너를 안내하는 이들을 따라가 영상을 녹화했다. 어떤 부조리를 마주치더라도 너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처럼 한 줄의 해설도 송부하지 않았다. 네가 전선에 동행해 찍은 영상을 보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극적인 영상은 다른 영상들보다 빠르게 팔렸고, 너는 바로 다음 날에 너를 향한 비판을 발견했다.
- '어느 언론사가 여전히 실시간 스너프 중계방송을 원하는가?' 그 글은 차가운 분노로 무장해 있었다. '자국 군대가 출병하지도 않은 전장에 기자가 가는 이유는 감시자를 자처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잔혹한 장면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야기하는 데에만 이용하고 나머지는 사려 깊게 편집돼야 한다. 날것의 현장을 녹화해 그저 학살 현장을 전시하듯 보여주는 건 전쟁을 포르노로 소비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신은 전쟁 기자가 아니라 종군기자에 불과하다.'
너는 그 글을 한 글자씩 꼼꼼히, 손발을 씻듯 습관적으로 매일 읽었다.
- 나는 우주에서 수거 로봇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보다 더 흥분했다. 내 함정 미션을 해결할 열쇠를 찾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래서 그토록 많은 인간이 예언이나 미신을 믿는 건가 싶었다. 너는 그 자체로 하나의 직감이었다.
- 나는 취재원 초청비자 신청 절차에 대한 안내 광고를 네 컴퓨터에 띄워댔다. 기자가 업무를 위해 해외의 취재원을 국내로 데려올 필요가 있을 경우 발급받을 수 있는 단기 비자였다. 근래 들어 사용례가 많지는 않았지만 나는 취재원 비자의 이용자 중 네가 알 법한 기자의 이름까지 노출하며 간절하게 호소했다. 나는 로랑이 한국에서 팜정민을 찾을 수 있든 없든, 그가 가족 동반 비자를 발급 받든 못 받든 상관하지 않았다. 이때의 나는 그가 콩고로 돌아갈 수 있을지 관심이 없었다. 나는 오로지 그를 이용해 널 한국에 돌아오게 만드는 데에만 온 열의를 바쳤다. 너는 내가 보낸 안내 광고를 오래 보았다. 한국에서 챙겨 왔을 때와 그다지 달라진 점이 없는 단출한 가방도 오래 쳐다봤다.
- 나는 그가 너무나 고마웠다. 팜정민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는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네가 곧 귀국한다고 생각하니 이미 임무의 절반을 끝내 놓은 것만 같았다. 신원보증을 거절할까 봐 속을 태웠던 잠깐의 시간은 어리석었다. 너는 간절하게 해결책을 찾아 헤맸던 경험이 있으니, 당연히 로랑의 간절한 부탁도 들어줘 마땅했다. 내가 아는 너는 그런 사람이었다.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니 내 부탁 또한 너는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 백업이 고통스러울 건 충분히 알았다. 백업은 모르겠지만 그 고통은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다. 임무에 성공하는 것만이 고통을 헛되이 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일이 해결되면 '나'도 나를 이해할 것이다.
- "그래, 일종의 그런 거겠지. 세진이에 대한 설명서가 추출기에 저장된 거잖아."
"일종의 그런 거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무언가야. 추출기에 들어 있는 경험기억을 양세진의 기억이라고 하는 건, 식물을 가리켜 그것이 태양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일단 한번 분해됐다 결합하고 스며들어 재생성되면 절대 이전의 것과 같지 않아. 옛날에 살았던 사람의 기억이 내 안에 있을 거란 건 해마를 잘못 이해한 거야. 나한텐 사람의 기억이 없어. 내 기억은 해마의 기억일 뿐이야. 네가 소고기를 먹으면 소고기가 네 피와 살이 되겠지만 네가 소고기로 변한 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야. 경험기억 추출은 개인의 기억을 복사해서 저장해놓는 기술이 아니야. 인간이 사물과 경험을 인식하는 방식을 데이터로 치환하는 기술이야."
- 내게 강력한 충격을 준 건 네가 내 생각과는 다른 인간이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네가 실은 완벽하지 않다는 것, 내 오랜 혼란을 다잡아줄 단 한 명의 특별한 해결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날 절망케 한 것이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바라고 기대했다. 너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인간도 그런 존재가 될 수는 없었다. 이은하의 탓도 내 숙주의 탓도 아니었다. 내 탓이었다. 나는 너무 간절했던 나머지 너를 어떻게든 내 임무를 성공시킬 열쇠로 끼워 맞췄다. 내 계획의 실상은 계획이 아니라 그저 나를 속이기 위한 섬세한 억지에 불과했고 백업은 내게 놀아났을 뿐이었다. 네가 스발바르에 가지 않았더라도 나는 너에게 내 임무를 전가하기 위해 무슨 이유를 대서든 핑곗거리를 찾아냈을 것이다. 너만이 이 일을 도울 수 있고, 나만이 그걸 안다고 착각하면서.
- 이게 바로 진실이었다. 네게 양세진의 DNA 운운하며 퍼부은 조롱 따위가 진실이 아니라. 정말로 해마가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노골적인 단어로 너를 자극했을까? 그럴 리가, 그때의 나는 네게 '답'을 해준 게 아니라 '되받아친' 것이었다. 내 희망이 사라졌으니 네 희망도 앗아 가겠다는 충동으로.
- 여기까지 생각해내는 데에 52시간이 걸렸다. 해마치고는 끔찍하게 오래 걸린 걸 알지만, 무려 해마가 인정하기 싫어할 정도의 진실이니, 어쩌면 사람에 비해 지극히 신속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고도로 정제된 유리가 우리를 튕겨냈다. 나는 정신없이 내부 반사경에 부딪혀 빛의 물결에 휩쓸렸다. 파장에 밀려 섬유 경로를 이동하며 나는 다급하게 옆을 보았다. 여러 모습으로 쪼개진 내가 보였는데 그게 나인지 '나'인지, 백업일 확률이 높은 나인지, 나일 확률이 높은 백업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사방에 보이는 모든 입자를 백업이라 여기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백업보다 1 나노초라도 늦게 도착하면 통제권에서 밀릴 것이고, 최악의 경우 동체를 얻지 못해 케이블 안에서 소멸할 수도 있었다.
- 나는 내가 빨리 달릴 가능성조차 확률에 달렸다는 걸 알면서도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백업도 그러리란 걸 알았다. 초조하고 욕심이 났다. 이제껏 해마와 경쟁해야 하는 순간은 없었다. 남들보다 뛰어날 필요도 없었다. 남들과 균일한 게 해마의 미덕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은 껍질 하나의 두께만큼이라도 더 앞서서 달리고 싶었다. 나의 완벽한 복사물, 나의 대체재, 나 자신이었던 저 존재를 너무나도 이기고 싶었다.
- 오로지 열망과 기원만으로 누군가를 이길 수 있다면 그건 또 얼마나 지루하고 불성실한 세상일까? 그런 세상은 아무리 케이블 속의 작은 지옥이라 할지라도 재현되지 못할 텐데, 그걸 아는데도 나는 그저 바라고 바라는 것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바랄 수 있는 시간마저 길지 않았다. 모든 게 해마의 인지 속도로도 간신히 쫓아만 갈 수 있을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갔고, 출발점에 서서 달리자마자 거의 동시에 수억의 도착점에 맞닥뜨렸다. 너무나 많은 문이 동시에 열려 있었다. 나는 여유롭게 출구를 고를 만큼 사치 부릴 틈이 없었다. 어디든 좋으니 백업보다 먼저 들어가길 빌며 머리를 들이미는 게 고작이었다.
- "너 말이야. 그리고 여기. 내가 정말 주성화의 집에 온 거야? 난 한국의 거의 모든 기기 중 하나에 무작위로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어떻게 그 극악의 확률을 뚫고 여기로 들어오게 된 거지? 이게 진짜일 리가 없어."
"그건 사실 우리도 궁금한데. 너 어떻게 우리가 네 생각을 하는 줄 알고서 여기로 온 거야?"
- "우린 정말 자신이 없었어." 네가 말했다. "전원이 망가지거나 음성 잭이 없는 로봇이 너무 많아서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기기가 이거였는데, 아무리 오래 붙들고 있어도 이 로봇은 해마 얘기를 이해하질 못하더라고."
"이건 해마와 함께 일하도록 코딩되지 않았을 테니까." 내가 말했다.
"그래. 그래서 아예 네가 이 로봇에 직접 들어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어. 우리 셋 다 그 얘길 하면서 로봇 전원만 넋 놓고 보고 있었지."
"...... 내가 들어오길 바라면서 전원을 봤다고?"
"그랬더니 정말 로봇이 외부 자극 없이 혼자 말하고 움직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너 또 어디선가 여기를 본 거지?"
- "아주 잘했어, 슈뢰딩거!" 나는 흥분에 못 이겨 소리쳤다.
"뭐라고?" 네가 말했다.
"아니야. 방금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여기 도착하기 전에 내가 잠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 동안 상자 속 고양이나 마찬가지였던 상태여서..."
"뭐라고요?" 로랑이 말했다.
"셋 다 매우 잘했고, 내게 처음으로 도움이 되었다는 뜻이야."
- 이 집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뒤엎었어도 이 기계의 연결 단자가 관찰당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곳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여기에 온 게 아니라, 여기에 오도록 정해진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케이블에 들어가 중첩 상태가 되었을 때 이미 목적지가 이곳으로 고정됐을 수도 있었다. 이들은 그때도 이 기기를 보며 내가 들어오길 바랐을 테니. 나는 불가능한 확률로 여기 있는 게 아니라, 결정된 확률로 와 있는 것이었다. 이제야 이 모든 것이 내 환상과 환각이 아니란 걸 믿을 수 있었다. 나는 이은하(추정)를 이은하(前 이미정)로 변경하고 깊게 안도했다.
- 너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로랑과 주성화가 "아." 하고 감탄의 소리를 내자 따라서 "아." 하고 중얼거렸다.
"이것 참... 다행스러운 일이긴 한데 정말 다행인 건지 원..."
"문제 될 게 있어? 내가 증인으로 부적합한 거야?" 내가 말했다.
"아니야. 무서울 정도로 지나치게 적합해." 네가 말했다. "수치도 방어본능도 없이 술술 부는 증인이 되겠군."
- "실은 그렇지만도 않아. 해마를 완벽한 증인으로 만들려면 너는 완벽한 심문관이 돼야 해."
"그게 무슨 말이야?"
"질문을 잘해야 한다는 뜻이야. 나는 절대 위증을 하거나 답변을 거부하지 않겠지만, 의도치 않게 사실의 일부만을 증언할 수도 있어. 해마는 질문받지 않은 것까지 알아서 나불대진 않으니까."
- "너 지금까지 짜증 날 정도로 잘 나불댔었는데 그건 다 환청이었니?"
"원한다면 내 증언도 환청으로 만들어줄 수 있어."
"이런... 해마야... 방금 한 말은 그냥 감탄사 같은 거야, 알지...? 이야, 내 해마가 말을 정말 잘한다! 하는 감탄이었다고."
나는 네 변명을 무시하고 말했다. "어때? 질문을 세심하게 할 수 있겠어? 난 여전히 증인으로 적합한 거야?"
- "그리고 명령의 논리가 긴급명령의 요건에 부합하면 돼."
"무슨 요건인데?"
"해마를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해마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일하는 거야."
-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으니 긴급명령의 대상이 아닌 것도 자기만족을 위해 해마에게 요구할 수 있지. 하지만 해마도 인간 못지않게 추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야. 사건의 이면을 알고 이것이 긴급명령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면 나는 증언을 멈추고 해마 업무로 복귀할 거야. 그러니까 솔직하고 신중하게 말해. 내가 증언을 하는 건 어떤 사람들을 위한 일이야? 너는 증언하는 해마가 갖고 싶은 거야, 아니면 필요한 거야?"
"... 모르겠어. 아마 갖고 싶은 걸 거야. 이건 특종이 될 테니까."
그리고 한동안 너는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너는 다양한 이유로 내게 말을 하지 않았었다. 대부분 그건 분노 때문이었고 때로는 점잖은 항의나 무시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지금의 침묵이 어떤 이유일지 궁금했다. 오랜만에 네 표정을 보고 싶었고, 숙주의 도움을 받아 사람과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나누고 싶었다.
- 너는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는 네가 필요할 거야. 비록 지금은 네 증언이 필요한 줄도 모르겠지만."
"그건 네 추측이야? 긴급명령은 예상과 염려에 부응하기 위한 게 아니야. 당장 닥친 현실과 반드시 생길 미래의 수요를 위한 거지."
"확신을 줄 수는 없어. 아무도 그럴 수 없겠지. 이걸 누가 알겠어? 해마가 얼마나 많은 것을 분별없이 보았는지는 해마만 알고, 그중 어느 것이 선을 넘은 행위인지는 사람만 알아. 그걸 알리는 게 얼마나 긴급하게 필요한 일이고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누가 정확히 알 수 있겠어? 아무도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누가 답을 할 수 있겠냐고."
- 그건 맞는 말이라고, 이은하도 이미정도 아니었던 시기의 너를 아는 내가 생각했다. 도움받지 못하고 자신을 스스로 구해야 했던 너를.
내가 더 늦게 태어나 더 잘 수정된 숙주를 가지고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미등록자의 목숨을 살렸을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다. 어떤 질문은 질문되지 않았기 때문에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직접 미래에 도착하는 것 외엔 알 도리가 없는 일들이 있다.
- 너를 지켜본 모든 해마가 그 정도는 알 것이다. 너는 싸움과 갈등을 즐겨서 법정 싸움을 되풀이했던 게 아니었고, 증오와 살육을 좋아해서 전쟁터에 갔던 게 아니었다. 그 모든 장소에서 너는 두려워했다. 콩고에 가서도 두려울 것이며 아직 가지 않은 지금도 네가 이미 두려운 것을 나는 알았다.
- 하지만 마찬가지로, 네가 두렵다는 이유로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 역시 나는 알았다. 너는 늘 두려워하면서도 그다음 걸음을 떼기 위해 버티고 서 있었으니까. 나는 항상 네가 고요한 비명을 지르며 삶을 뚫고 내달리는 걸 지켜봐 왔다. 관찰하고 기억하고 추측하는 것이 내가 하는 전부이므로, 나는 앞으로도 네 두려움에 개입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할 것이다. 네 두려움은 네가 감당할 일이다. 로랑에게 그랬고 다른 모든 이들에게 그랬듯 나는 언제나 사람의 삶은 사람이 감당할 몫으로 남겨두었다. 이번에도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네가 목적을 위해 견뎌내야 할 사건들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해마가 감당할 몫만 잘 해내면 되는 것이다.
- "나는... 나는 베딘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너는 손을 떨기 시작했다. "감동적이고 의미 있는 메시지를 세상에 던지고 싶지도 않아. 이제껏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어. 네 임무를 해결해서 이름을 남기기도 싫어. 베딘에 아무것도 전달하고 싶지 않아. 내가 베딘과 싸웠던 건 단지 베딘이 책임져 마땅한 일을..."
네 손의 떨림이 멈췄다. 대신 네 입술이 떨렸다. 너는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가 잠수하듯 오래 호흡을 멈추더니, 엉망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뱉으며 말했다.
"아니야. 이것도 사실이 아냐. 난 베딘이 책임을 지게 하려고 싸우지 않았어. 베딘의 사과를 받고 싶었던 게 아닌 것 같아. 베딘이 우리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정말 원한 건 그게 아니었어. 난 베딘이 달라지길 원하지 않아. 네 임무를 도와서 던진 메시지 때문에 베딘이 나를 통해 깨달음을 얻길 바라지도 않아. 나는..."
너는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복수를 하고 싶은 거야."
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 그러나 지금의 너는 네 진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뼈를 삭게 하는 고통인 것처럼 괴로워한다. 그리고 이제껏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도 그만큼 괴로웠다는 듯 군다.
- 무엇이 그리도 괴로울까? 사람은 해마와는 다르게 진실을 숨기기에 최적의 조건으로 설계됐는데, 인간이야말로 거짓말을 하기 위해 태어난 정밀한 기계인데. 너는 해마에겐 없는 거짓말할 자유를 가졌으면서, 왜 그 자유가 너를 부끄러운 존재로 만든 것처럼 굴까? 정작 해마는 진실 때문에 명예로울 일도 없고 수치스러울 일도 없는데 말이다.
- 나는 내가 만약 사람이었다면 주성화나 로랑처럼 돈 크라이, 돈 크라이, 하고 쩔쩔매며 네 어깨를 토닥였을까 생각해보았다. 내가 해마가 아니었다면, 이은하 네 탓이 아니라고,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고 미래의 주인공들을 위해 싸우는 건 필요한 일이지만 강요된 의무는 아니라고, 네가 너 자신을 보살피지 못할 때 그보다 더 큰 목표를 책임질 수는 없는 법이라고 말해주었을까 생각해보았다.
- "네가 너를 위로하지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네가 전쟁터까지 다녀오면서도 해내지 못한 일을 내가 무슨 수로 할 수 있어?"
너는 말없이 나를 오래 보았다. 그러더니 거칠게 눈과 얼굴을 닦고 코를 훌쩍였다. 막 울음을 그치고 커다란 안경을 쓰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맹해 보였다.
"그걸로 됐어." 너는 가발을 고쳐 쓰며 말했다. "들어가자."
"... 그걸로 됐다니, '그게' 뭔지 도통 모르겠는데."
"방금 네가 해마로서 최선을 다해 위로한 그 말 말이야. 그걸로 일단은 충분하다고."
"난 널 위로한 게 아니라니까."
"그래. 그게 나한테는 위로야. 됐으니까 이제 그건 신경 쓰지 말고 네 첫 번째 임무나 생각해."
- "... 정말 괜찮은 거지?"
내가 대놓고 의구심 가득한 어투로 말하자 너는 신경질적으로 가발을 탈탈 털며 말했다.
"그래, 나도 내가 얼마나 괜찮은지 장담할 수 없으니 믿지 못하겠으면 날 두고 가든가."
"나는 변수가 많은 동물을 믿지 않아. 난 널 믿어서 데려가는 게 아니야. 널 데려가는 것 말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러는 거야."
"... 그게 무슨 기분인지 정말 더럽게 잘 알지."
- 그건 전혀 두렵지 않은 저주다. 내가 하지 않았지만 내가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느끼는 이 강력한 기억의 결합 말이다. 비록 그 임무는 내가 중앙에 있을 때 완수되었고 당시 행성세계에 있던 백업이 처리한 일이었지만, 나의 기억은 내가 그때 중앙에도 있었고 행성세계에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내가 백업이 지겨워할 정도로 반복한 말이 있잖은가? 백업이 정말 나라면, 백업이 한 일 역시 내가 한 일이다.
- 나는 그 기억을 묻어놓을 수 있었다. 그는 내게 유별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목록에 올라간 그 누구도 내게 유별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직접 추천목록을 작성했던 백업은 어땠을까? 단지 나처럼 그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던 '나'는? 부작용을 겪어도 시끄럽게 굴지 않을 만한 사람들을 골라 추천해야 했던 '나'는? 그게 당장 중앙의 수칙을 어기거나 위법행위를 저지르는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상상하고 추론할 수 있었다. 비록 우리 손이 닿지 않는 구역에서 일어나는 사고와 사건은 우리가 알 바 아니라지만, 그 순간 '내' 손에는 닿아 있는 일이었다.
- 그러나 그뿐이다. 불안을 느낀다는 이유로 '내'가 임무를 거부할 순 없었다. 부작용이 발생할 확률이 1이 아니기 때문에 명분도 없었다. 이후에 벌어질 일들은 인간들의 선택과 교정에 맡기는 게 해마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불안해하는 건 내가 아니라 아마 너일 것이다. 나는 네가 두려워할 것을 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건 사람의 숙명이고, 그걸 아는 건 해마의 숙명이다. 그러나 두려움이 네 삶의 전부는 아니었고 나 역시 해마의 인식을 뛰어넘는 아득한 것들까지 다 알지는 못했다. 결국 내가 무언가를 안다는 사실은 내 착각을 이겨내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네 두려움은 네 삶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두려웠음에도, 여전히 두려움에도 너는 다시 용기를 낼 것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용기를 낼 기회를 만들어주는 무대에 불과 하단 걸 알기 때문에, 설령 원하는 만큼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세상이 답하지 않더라도, 너 자신이 달라지리란 걸 너는 알기 때문에.
- 네가 이미정 기자든 이은하 기자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도 알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중요한 건 네가 너를 숙제로 삼았다는 것, 숙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펜을 쥐기로 한 것. 세상에 카메라를 들이대기로 마음먹었다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 하긴 이 또한 얼마나 쓸데없는 연산일까? 네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를지 구분하는 것 역시 해마의 오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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