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올라프 스태플든] 시리우스

일루젼 2022. 7. 11.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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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올라프 스태플든 / 이영기
출판 : 오멜라스 
출간 : 2008.09.30 


       

'이상적인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삶에 매몰된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가진 개 '시리우스'의 시각을 통해 바라본 인간과 생(生)은, 인간 대 인간으로 바라본 것보다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그가 가진 본능적 충동과 신체적 한계, 사회적 부존재에 대응하는 방식은 같은 상황에 처한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자세이기도 하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한 열망과 좌절,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이자 영원히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자각은 시리우스가 개이기 때문에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누구나 가지는 보편적 두려움이자 열망이다. 독자는 이것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플렉시-시리우스라는 복합적 개념은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핵심이 된다. 그녀와 그의 관계는 '사랑'이지만, 그것은 그들 자신조차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일종의 '쌍'에 가깝다. 그들 자체로서 가지는 종의 차이, 그것을 다시 묶어주는 정신적 교감, 나눠가진 성별의 차이, 그리고 공통적으로 느끼는 어떤 초월적 가치에 대한 추구는 미움과 증오, 그리움과 애정 사이를 오가며 이들을 단단하게 결속시킨다. 비록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을 지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가지는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이는 일종의 스펙트럼적인 문제이다. 플렉시 안에도 야생성과 본능은 존재하며, 시리우스 안에도 이성과 지성, 정신적인 욕구는 존재한다. 플렉시는 인간에 속하고 여성으로 인식되지만 그녀에게서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야생적 -이질적- 매력이 느껴진다. 시리우스와 플렉시의 차이는 각자 안에 무엇이 어떤 비율로 섞여있느냐에 따른 차이일 뿐이다. 그들 안에서도 때에 따라 변화하는, 한 개체로서 유지되는 극과 극의 차이, 그 연장성. 그렇다면 과연 '인간성'이란 이성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인류가 가진 망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독자는 시리우스를 자신과 거리를 둔 개로만 선을 긋고 바라볼 수도 있고, 그의 정신적 고뇌에 이입해 외피만 다른 인간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시리우스가 말한 '개 혐오가'와 '개 애호가'가 될 뿐이다. 그의 삶을 진정으로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와 인간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면서도 그를 '동등한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경계는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지 확신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렴풋하고 모호하게 존재한다. 

 

시리우스와 플렉스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이와 같다. 저자는 '한 번쯤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어?'라고 조롱하듯이 그들의 관계를 질타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빌어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란, 이렇게 생각할 텐데'라고 말하는 듯이.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냐는 듯이. 조금은 그 결이 다르지만 '폴 고블'의 <야생마를 사랑한 소녀>가 떠올랐다. 플렉시의 선택은 그 소녀와는 달랐지만, 나는 이 두 작품이 비슷한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이끌리는 자연적 생명력이나 소녀/젊은 여성이 가지는 순수한 어떤 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까지 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플렉시와 토머스, 플렉시와 엘리자베스를 대비시켜 그런 해석의 틀을 씌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보다는 시리우스의 아니마로서 존재하는 '플렉시'로 접근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플렉시는 그와 다른 종에 속하기에, 그의 아니마적 환상은 부서지지 않는다. 다른 암캐들에게서 벗어나기 힘든 육체적 매력을 느끼면서도 그들에게 겨우 남은 정신의 흔적에 만족해야 하는 아쉬움을 경험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의 관계를 "플라토닉의 영역에 남아있기 때문에 더욱 '존재적 본질'로 교감하려 할 수 있고, 많은 부분을 함께 공유하며 자라왔기에 쌓아온 '유대감'을 기반으로 한 '반려적 사랑'"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자신들의 관계를 일관되고 단호하게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설명했다면, 상당수의 독자는 오히려 그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정체성적 혼돈을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플렉시와 시리우스의 모습에서야 비로소 독자는 안전한 거리를 두고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그 관계의 존재 가능성을 느끼게 된다. 

 

이 책에 관한 리뷰를 쓰면서는 유독 '나의 생각'을 '독자들'이라는 집단적 허상 뒤에 숨겨 조심스럽게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것이 내 감상이 아직 제대로 정제되지 않았음을 가리고 싶음인지, 혹시라도 내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공감 지점을 노출시킬까 걱정이 되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유령해마>를 읽고 연이어 <시리우스>를 읽고 나니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이런저런 충동들이 인다. 

 

사실, 압도된 것 같다. 실컷 떠들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도 제대로 전달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마음, 그리고 누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최고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라는 마음이 빙글빙글 돌며 가라앉지 않는다. 이 책은 사람 속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읽을 수 있어서 기뻤다. 

이 책을 구매해둔 과거의 나에게 깊은 감사를.   

 


   

- 이런 기록과 대화를 통해서도 흐릿한 윤곽밖에 그릴 수 없는 사건은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해 세부적인 사항을 채워나갈 생각이다. 나는 공무원이지만 한편으로는 소설가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 신념인데, 나는 상상력과 자기비판 정신만 있으면 인간은 누구라도, 자료가 아무리 표면적이고 피상적일지라도 사건의 본질을 향해 파고들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시리우스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내 방식대로 풀어나갈 것이다. 

 

-  물론 개의 사회적 의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노예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그도 알았다. 하지만 지능이 발달하면 개는 자존심과 함께, 인간과 비판적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도 획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물론 시리우스를 마찬가지 방식으로 키우려는 것은 아니었다. 개를 인간 아이처럼 키우면 개의 천성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개의 신체 구조와 작동 방식은 인간과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토머스가 원했던 것은, 시리우스가 사회적으로 플랙시와 같은 존재라고 스스로 믿게끔 하는 것이었다. 인간과 다르게 취급하고 대접함으로써 시리우스가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신이 인간과 다른 존재라고 의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토머스는 엘리자베스가 그동안 아이들을 이상적으로 잘 키워왔다고 말했다. 아내는 관용과 사랑으로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봤고, 덕분에 아이들은 자기가 사랑받고 소중하게 대접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으며 독립심을 기를 수 있었다. 또한 아내는 아이들에게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토머스가 시리우스를 위해 만들어주고 싶은 분위기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아내가 훌륭한 가정 분위기를 통해 자신에게 매우 귀중한 진실을 가르쳐주었다고 고백했다. 토머스는 어린 시절에 겪은 불행한 경험 때문에 가족이라는 것은 절망만을 안겨주는 나쁜 제도이며 결국은 폐지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도 남편의 그런 광기 어린 태도를 잘 알고 있었다. 토머스는 첫 아이와 둘째 아이를 아내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남편의 생각에 강하게 저항해 결국 자기 입장을 관철시켰다. 그 결과 토머스는 훌륭한 가정환경이야말로 성장하는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셋째가 태어나기 전에 충분히 납득하게 되었다. 물론 아내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또 토머스도 분명 많은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다. 두 사람이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을지 모른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나타나는 탬지의 고집불통 같은 성격이나, 모리스의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세 아이는 대체로 온화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독립적이고 사물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다.

 

- 엘리자베스는 남편의 제안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책임은 주로 그녀에게 지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당연한 생각이지만 이 실험이 자기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나 않을까 불안하기도 했다. 어떤 형태로든 귀여운 플랙시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 그리고 가장 가치 있는 사회적 관계는 서로 다른 정신을 가진 두 존재가 서로에게 공감할 때 생긴다고 주장했다. 자라면서 타인과 교감하는 능력을 개발하지 못했던 토머스가 지성을 통해 사회적 관계의 핵심을 꿰뚫어 본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의미 깊은 교우 관계를 맺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가 바라는 식으로 둘 사이의 관계가 발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다. 엘리자베스는 아이가 인간이라는 강점을 이용해 개를 지배하지 않도록 여러모로 손을 써야 할 것이다. 양손을 쓸 수 있고 시력도 개에 비해 훨씬 좋다는 점은 개로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아이만의 유용한 자질일 것이다. 또한 아이로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적인 환경이 개에게는 어색하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결국 인간에 가까운 감수성을 가진 개가 정신적인 노이로제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열등감에 빠진 인간에게 흔히 나타나듯이, 의기소침하고 불필요할 정도로 순종적이거나 과격하게 공격적인 성향을 시리우스가 보이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할 터였다. 

 

- 또 하나의 원칙을 마음에 새겨두라고 토머스는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시리우스의 천성이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며 어쩌면 인간의 높은 지성에까지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준비는 그 단계로 발전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해야만 한다. 따라서 그를 애완견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활동적이며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한 개인으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의 특별한 능력을 키워주지 않으면 안 된다.

 

- 시리우스도 그다지 늦지는 않았다. 플랙시가 말을 시작했을 때, 시리우스도 자주 묘한 저음을 내곤 했다. 사람의 말을 흉내 내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기가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종종 불쌍할 정도로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두 다리 사이에 꼬리를 끼운 채 고통스럽게 낑낑거렸다. 의사소통을 하고자 하는 시리우스의 애타는 노력을 처음 이해하기 시작한 것도 플랙시였다. 

 

- 시리우스의 발성 기관은 사람과 달랐기 때문에 언어 기술을 아무리 연마해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음을 인간의 말이라고 여길 사람은 플랙시 가족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사람이 저마다 고유한 발성을 가진 것처럼 자신만의 독특한 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음 중에는 구별하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대체로 가족들은 큰 어려움 없이 시리우스의 언어를 이해했다. 나는 그가 낑낑거리거나 신음하거나 짖음으로써 말을 한다고 묘사했지만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는 대단히 부드럽고 정확하게 말을 했으며, 목소리에는 흐르는 물과 같은 음악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 플랙시가 소문자를 다 익히는 단계가 되자 시리우스와의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졌다. 시리우스의 지력이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자주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무리 플랙시와 시리우스를 동등하게 대한다고 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에는 당연히 플랙시가 더 나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실제로 남편에게 시리우스는 결국 인간 가운데서도 가장 지능이 낮은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겠느냐고 편지에 쓰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와는 반대로 시리우스가 딸보다 더 뛰어나기를 은근히 갈망했던 토머스는 엘리자베스에게 보낸 답장에서 개가 원래 시력이 좋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그런 약점이 있음에도 읽고 쓰기를 익히려는 시리우스의 노력은 대단한 것이며 다른 분야에서는 인간보다 뛰어난 점이 많다며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라고 충고했다. 그렇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자 시리우스 안에서 잠자던 근성이 놀랍도록 되살아났다. 그는 하루 몇 시간씩 혼자서 읽기 연습을 계속했다.

 

- 그런 식으로 일주일이 조금 지나자 시리우스의 실력이 괄목상대했다. 하지만 무리한 탓인지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다.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다고 느낀 엘리자베스는 시리우스에게 지금보다 공부를 덜 해야 더 빨리 배울 수 있고 공부한 것이 오래갈 수 있다고 설득해 겨우 진정시켰다. 시리우스는 신체적 결함 때문에 쓰기 능력에서 플랙시를 따라잡을 수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유용한 기술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겠다고 결정했다. 

 

- 시리우스는 색의 차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시리우스는 처음에는 굉장히 낙담했다. 그러나 토머스는 개는 모두 색맹이며, 인간과 원숭이를 제외하고는 포유류는 모두 색맹이라며 위로했다. 대신 개는 청각과 후각에서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히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했다. 시리우스도 인간의 코가 얼마나 둔한지 익히 알고 있었다. 마당에서 엘리자베스의 흔적을 찾지 못한다고 플랙시를 얼마나 놀려먹었던가. 또 발자국 냄새를 맡고서 그것이 게럴트의 것인지, 다른 개의 것인지 구별하지 못한다고 얼마나 구박했던가. 더 어릴 때에는 비가 온 뒤에 시골 마을에서 나는 신비하면서도 자극적인 냄새들을 그녀가 전혀 맡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라고 실망했던가. 플랙시가 막연하게 향기를 맡고 신선한 냄새를 즐기는 데 반해, 시리우스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면서 산들바람에 실려 오는 메시지를 분석했다.  

 

- 가족들이 시리우스의 후각 능력보다 더 놀랐던 것은 그의 예민한 청각이었다. 그가 소리에 반응하는 것을 보노라면 불가사의했다. 그는 가족들이 알아채기 훨씬 전에 먼 곳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으며 게다가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아맞혔다. 인간은 박쥐가 내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청각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박쥐 소리가 어떠냐는 질문에 예리한 바늘과 같다고 표현했다. 엘리자베스와 플랙시는 자기들 목소리에 시리우스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민감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칭찬의 말을 듣더라도 그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것인지, 그저 의례적으로 하는 것인지를 분간할 줄 알았다. 꾸짖는 소리를 들을 때도 정말 화가 치밀어서 하는 말인지, 장난기가 섞인 말인지를 식별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분 변화를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집어내어 깜짝 놀라게 했다. 예를 들어 그는 불쑥 "엘리자베스, 왜 슬퍼하고 있죠?"라고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아니, 나 슬프지 않아. 빵이 잘 구워져 기쁜걸." 하고 말했다. 그는 "그래요. 하지만 저한테는 마음 깊은 곳에서 슬퍼하는 것처럼 보여요. 저는 당신 마음이 잘 들려요. 당신은 그저 겉으로만 기뻐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 잠깐 시간을 두고 그녀가 고백했다. "그래, 그런 것 같기도 해. 나 자신도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 그는 냄새로도 사람들의 감정 상태를 알아차렸다. 그는 자주 '심기가 불편한 냄새', '기분 좋은 냄새', '무서운 냄새', '지친 냄새' 등에 대해서 말했다. 

 

- 모든 것을 뒤에 두고 떠나는 슬픔을 가리려는 가면임이 분명했다. 그녀가 좀 더 어렸다면 이 같은 급격한 변화에 그 정도로 심각하게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떠나는 날 아침, 그녀는 층계참에 혼자 앉아 있는 시리우스와 마주쳤다. 그를 보자마자 플랙시는 들고 있던 옷 바구니를 던지고는 무릎을 꿇고 시리우스를 포옹했다. 그리고 소녀적인 감상과 진지한 감정을 담아 말했다. 
"내가 앞으로 무엇이 되든, 난 언제나 네 것이야. 내가 너한테 못되게 굴 때조차도 난 네 것이야. 만약... 만약 말이야, 내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해도, 그때도 난 네 거야. 난 왜 이걸 여태까지 몰랐을까?" 
그러자 시리우스가 말했다.
"나야말로, 죽을 때까지 네 거야. 난 그걸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네 다리를 물었을 때부터 알았어."
그녀는 시리우스의 회색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어깻죽지에 빽빽하게 자란 털을 애무하며 말했다.
"우리는 앞으로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도록 운명 지어졌어. 그건 우리 둘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야."
"맞아."
시리우스가 받았다.
"하지만 다르면 다를수록 서로 사랑하는 두 존재는 더 아름다워지는 거야." 

 

- 시리우스는 인간을 판단할 때 개를 대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삼았다. 이런 기준은 그 이후로도 쭉 인간의 성격을 판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우선 인간 중에는 개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개와는 어떤 상호 관계도 맺으려 하지 않는다. 그다음으로는 '개 애호가들'이 있다. 시리우스는 이런 부류를 혐오했다. 이들은 개를 감상적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개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들은 개의 지능이 얼마나 높은지, 개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과장되고 호들갑스럽게 얘기하면서, 개를 지나치게 귀여워하고 맛있는 것을 먹인다. 그러면서도 개가 지닌 성적 욕구나 야성, 본능적인 사냥의 충동 등은 거세해버린다. 이런 인간들에게 개는 단지 살아 있는 인형, 가련할 정도로 인간적인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 그다음으로는 '개 혐오가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을 너무나 지적인 인간으로 여기기 때문에 말을 할 줄 모르는 우둔한 짐승과 함께 어울릴 수 없다고 여기거나, 개에게서 자기가 가진 동물적인 속성을 발견할까 봐 두려워하는 부류이다. 마지막으로 '개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개와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개를 개 자체로서, 즉 인간과 비슷한 정신을 가진 동물로서 존중한다. 푸는 바로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 노래를 하는 것 같은 웨일스 억양으로 푸가 말했다. 

 

- 시리우스가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은 곳은, 엘리자베스가 끈질기게 노력한 끝에 시리우스에게 출입 허가증을 얻어준 거대한 도서관 내부였다. 벼을 따라 진열된 책들은 인간의 지적 전통이 얼마나 방대하며 얼마나 정교하게 나뉘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앞에서 시리우스는 말을 잃고 그저 감동에 젖을 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시리우스의 머리는 단순했기 때문에, 그 많은 책 중 태반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는 모든 책이 깊은 의미를 담은 줄 알았다. 그래서 저 수백만 권의 책을 모두 읽지 않으면 지혜를 얻을 수 없다고 여겨 지레 절망감에 빠졌다. 

 

- 시리우스도 지배 종족 가운데 우수한 축에 속하는 이들과 만나면서 조금씩 어떤 결론에 이르렀다. 이 뛰어난 사람들이 가진 특징 중 하나가 특히 시리우스를 당혹스럽게 했다. 워낙 뿌리가 깊어서 그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들이 가진 손을 과소평가하거나 그 가치를 잘 몰랐다. 외과 의사와 조각가, 화가, 실험 연구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손을 사용하는 데 서툴렀고, 그 점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직업상 정교한 손 기술을 요하는 외과 의사나 조각가 등도 자기 전문 분야에서는 숙련된 손재주를 지녔지만, 분야를 벗어나면 손놀림이 서툴렀다. 그 점에서 그들은 무력한 존재였다. 그들에게 손은 새의 날개나 바다표범의 지느러미처럼 고도로 분화된 도구일 뿐, 특정 행위에는 뛰어날지 몰라도 그것을 벗어나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도 펑크가 나면 자기 손으로 고치지 못했다. 혼자 힘으로 단추를 달거나 구멍이 난 양말을 꿰매지도 못했다. 손으로 하는 작업을 멸시하는 풍조는 오래전부터 특권 계급이 자신들의 나태함을 감추기 위해서 만든 것이었다. 특히 작가나 학자, 변호사, 정치가들이 보여주는 손재주에 대한 경멸은 놀라울 정도였다. 심지어 작가가 손으로 쓴 글씨는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타자기를 두드리는 조잡한 운동에 의존하거나, 그것도 귀찮으면 구술하는 대로 다른 사람이 받아 적게 했다. 시리우스는 옛날 중국에서 학자들(지식계급)이 자신들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손톱을 환상적으로 길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수많은 손들이 아무런 쓸모없이 내버려졌다는 걸 생각해보라! 인간이 가진 기관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창조의 도구인 손을 무시하고 발육을 정지시키는 이 퇴보적인 인간들을 시리우스는 경멸했다. 지배계급이 손을 무시하는 태도는 숙련된 손기술을 갖춘 노동자, 기술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자기들 기술 덕분에 인간이 오늘과 같은 문명을 형성할 수 있었는데도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해 자부심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기술자나 노동자들이 자기 자식만은 '출세' 해서 손기술이 필요 없는 '화이트 컬러'가 되기를 바라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리우스는 자기에게 인간의 손은 고사하고 원숭이의 서투른 손이라도 주어졌다면 도대체 못할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라며 안타까워했다. 

 

- 토머스는 시리우스가 케임브리지에서의 첫 학기에 잘 적응하는 걸 보고는 대견스럽고 기쁘게 생각했었다. 이전의 낭만적인 열정을 다스리고 영구적으로 연구소의 소유물이 되는 데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학기에는 겉으로는 자기 일을 즐기는 것 같아도, 깊이 들여다보면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고 반항적으로 변한 듯했다. 안락하고 자기만족으로 가득 찬 생활은 시리우스의 애초 '의도'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운동 부족은 시리우스를 더욱 볼품없게 만들었다.

 

- 시리우스도 자신이 도덕적으로 퇴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다. 하기 싫어도 해야 될 일이 있는데, 그런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그가 정신적인 노력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지적인 일은 완벽하고 성실하게 수행했다. 단지 자기가 좋아하는 경우에만 그랬다. 그의 문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기적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데 있었다. 무엇보다 자기 존중의 정신이 결여돼가고 있는 게 큰 문제였다. 

 

- 이 사건은 누구보다도 시리우스 자신에게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 일 이후 그가 변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는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다 불현듯 나타나 자기 행동을 지배하는 '어두운 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장 케임브리지를 떠나 웨일스에서 양을 돌보겠다고 결심했다. 

 

- 또 시리우스가 생각했던 것만큼 늘 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종종 인간 이하의 우둔함으로 빠져들곤 했다. 그들은 시리우스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만큼도 스스로에 대해 알지 못했고, 시리우스가 인간에 대해 아는 것의 절반만큼도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했다. 시리우스는 토머스 가족처럼 비교적 뛰어난 축에 드는 인간 손에서 자랐지만, 그들조차 우둔하고 둔감하게 굴 때가 자주 있었다. 심지어 플랙시도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다. 자신에게 워낙 빠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셈이다. 하찮은 자존심과 이기심 때문에 판단력을 잃거나 독선에 빠지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플랙시가 놓치고 마는 것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때때로 잔인하게 굴기도 했다. 자기 기분이 나쁘거나 울적하면, 시리우스가 버림받았다거나 벌레처럼 취급받는다고 느끼게 만들 수도 있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 그러나 인간에 대해서, 특히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우수한 인간에 대해서 그가 가장 분노했던 점은 그들의 자기기만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세상에 대해 서로 다른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맥베인을 예로 들어보자. 그가 과학에 헌신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어느 한도에서만 그렇다. 실제로는 자기 자신한테 더 헌신한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 무척 이기적인 면이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대신, 양치기 개처럼 과학에 절대적이고 순수하게 충성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사실 그는 과학 자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지는 않았다. 어쩌면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 토머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어쩌면 언젠가는 과학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돼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사 만에 하나 그가 과학을 위해 죽더라도 그건 절대적이고 순수하게 과학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헌신적인 과학자라는 명성을 얻기 위해 죽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오, 신이여! 왜 저런 종족에게 한 행성을 지배하도록 하셨나이까! 자기 외에는 모든 것에 무관심한 종족에게! 자기 외에는 어떤 정신에 대해서도 상상력을 발휘할 줄 모르는 종족에게 말입니다! (플랙시조차도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던가?) 잔인하고, 심술궂고(실은 플랙시조차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를 '한 마리 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자기만족에 빠져 사는 (플랙시조차도 그를 아프게 공격하지 않았던가?) 그런 종족에게, 왜 이 세상을 맡기셨나이까! 

 

- 그러나 도대체 우주란 무엇인가! 인간이 그렇게 생겨먹은 꼴을 비난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만물은 다른 어떤 존재를 괴롭히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리우스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개는 토끼나 아르헨티나 소고기를 먹고, 인간은 거의 모든 것을 먹고, 세균과 미생물은 인간에게 기생하고, 그리고 인간은 다른 인간을 먹는 것처럼(어쨌든 저 역겨운 고양이를 제외하면 인간만큼 잔혹하고 무자비한 것은 없다) 자연의 질서가 그렇게 돼 있다. 거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이 없다. 모든 존재는 힘이 다 빠져 다른 것들 아래에 눌려서 가라앉기 전에, 코를 물 바깥으로 내밀고 얼마간의 공기를 마시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다. 

 

- 그래도 시리우스는 늘 자기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속삭이는 소리를 듣곤 했다.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너에게는 너만의 독특한 힘이 있다. 너는 이 세계에 공헌하기 위해 존재한다. 너는 소명을 타고났다. 그러니 네일을 찾아라. 결코 쉽지 않지만 반드시 해야만 한다." 
어떤 때는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너는 인간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 너는 그들의 일원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너를 만들었고 너는 그들을 위해 존재한다. 너는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비전을 그들에게 줄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음악이 천직일까? 음악을 통해 인류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러자 거대한 환상이 밀려들었다.

 

- 연구소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 친숙한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목소리는 시리우스에게 스스로의 '정신'을 표현하라고 부추겼다. 시리우스는 의기소침해서 이렇게 답했다. 

'도대체 내가 뭘 할 수 있지? 아무것도 없어.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난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는 거리를 미친 듯이 질주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삶은 자기에게 공평하지 않았다. 삶을 내던져버리고 싶었다. 어리석고 교만하고 잘난 체 하는 원숭이(인간)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버리고, 결국 그들의 손에 자신도 죽고 싶었다. 

'안 돼, 안 돼, 그러면 안 돼.'

그는 자신을 다잡았다.

'설사 그들이 원숭이라고 해도, 아니면 네 발 달린 곤충이라고 해도 그래서는 안 돼. 결국 그들도 나와 똑같지 않은가.'

 

- 결국 우리는 지성을 가진 동물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우리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숙명을 가진, 서로 다른 종족이었다. 필연적으로 서로 화해할 수 없고 별개로 지낼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미래의 빛 속에서는 그토록 아름답고 달콤하게 보였던 것들이 현실에서는 이토록 쓰라린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  사실 그때 나를 찾아온 것이 감각적으로 완전히 새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식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일이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만약 그것이 어떤 향기였다면, 그 향기는 사랑과 지혜와 창조의 향기였다. 성공이나 행복과는 무관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향기였다. 너무나 강렬하고 신선해서 새롭다고 느껴지는 그런 향기였다. 그것은 우주를 떠도는, 우주의 모든 틈새를 통해 들고 나는 향기로서, 자주 내 마음을 유혹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흥분한 내 심리 상태 속에서 선명하게 나타났으니 나는 그것을 새로운 것, 냄새도 아니고 소리도 아니고 구체적인 모습을 띤 것도 아닌, 그러나 추적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향기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 그래서 그 향기를 계속 쫓아가 보기로 했다. 나는 방을 오락가락하던 것을 멈추고 앞발을 쭉 뻗고 그 위에 얼굴을 얹은 모양으로 엎드렸다. 기억에 떠오른 다른 냄새는 모두 무시하고 모든 주의력을 모아 이 기묘하고 새로운 냄새를 좇았다. 그러자 그 냄새는 더욱 강하고 명료하고 예민해졌다. 가끔 나에게서 벗어나기라도 하면 얼른 되찾아왔다. 가끔 기력이 떨어져 냄새가 희미해지면 다시 힘을 모아 사냥감과 거리를 좁혔다. 그러면 향기가 더욱 분명해지면서 흥미를 돋웠다.  

 

- 마침내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냄새나는 대상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자 이성스러운 사냥감의 성질이 바뀌는 것 같았다. 여전히 감미롭지만 톡 쏘고 신랄하고 숨 막히고 쓰라린 향기가 섞여 있었다. 거기에는 클로로포름처럼 현기증을 일으키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호랑이나 사자에게서 나는 강력한 냄새를 닮았지만, 이 세상의 냄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으스스하고 잔인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렇더라도 나는 추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집요하게 추적했다. 내가 쫓던 냄새는 이 우주 모든 냄새의 근원이고, 모든 공포의 근원임이 분명했다. 그건 바로 내가 찾고 갈망하던 것이었다. 나는 반드시 그것을 찾아야 했다. 결국에는 내가 그 사냥감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냥감에게 내가 먹혀버릴 것이다. 내가 미친 듯이 쫓는 그것은 자상하면서도 아름답고 그러면서도 공포스러운 것, 바로 인간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 마침내 사냥감이 나타나 나를 압도한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 보아도, 그 고통스러운 싸움과 지복의 순간을 그대로 재현해내기는 쉽지 않다. 싸움의 과정에서 만신창이가 된 내 자아의 고통스러움과, 내 안에서 자유로워진 정신의 그 행복했던 순간을 어떻게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처음에는 맛있는 먹이가 될 거라고 덤벼들었던 사냥감이 시간이 지나면서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적으로 바뀌고, 최후에는 그것이 만인의 '주',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절대적인 충성과 헌신을 바칠 만한 대상으로 드러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엄청난 순간이 지나갔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건, 그 순간이 지나갔을 때 이전에는 결코 몰랐고 앞으로도 결코 잊을 수 없을 평화를 느꼈다는 사실뿐이다. 이 세계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띠고 나타났다. 

 

- 아무튼 그날의 신비로운 체험은 시리우스에게 종교에 대한 흥미를 일깨웠다. 토머스에게 부탁해 신비주의에 관한 문헌이나, 시에나의 성 카테린, 요한네스, 야곱 뵈메, 베단타 등에 관한 책을 구해서 읽었다. 시리우스는 토머스가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신비주의와 종교에 빠져드는 자신을 마땅치 않아한다는 것을 냄새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시리우스는 신실하게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꼈다. 토머스의 주변 인물 중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좁은 의미의 과학에만 매달려 종교를 아예 부정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종교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사람들과 만나면 종교에 관해 알고 싶은 욕망이 더욱더 부풀어 올랐다.

 

(역자 주 :

St. Catherine of Siena(1347∼1380). 이탈리아 시에나 출신으로, 열아홉 살에 신비체험을 한 후 빈자와 병자를 돌보다 간 신비주의자. 
St. John of the Cross(1542~1591), 에스파냐 시인이자 교회 박사, 신비주의자. 명상 수도회인 맨발의 카르멜회의 공동 설립자이며 에스파냐 수도원 개혁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Jacob Boehme(1575~1624). 독일의 개신교 신비주의 사상가.)

 

- 그래서 시리우스는 가끔 교회 근처에 가서 신도들이 건물 안으로 들고나는 것을 바라보거나, 교회당에서 퍼져 나오는 음악 소리, 기도 소리, 성경봉독 소리, 설교 등을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기도 했다. 개에게는 그 성스러운 건물에 입장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자 인간으로부터 배제된다는 느낌과 열등감이 한층 강해졌고 동시에, 비판하는 사람들 말과는 달리 저 벽 안에 인간이 얻어낸 최고의 경험이 존재하리라고 믿게 되었다. 

 

- 한 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한여름 찌는 듯 더운 날이었다. 그는 감리교도들이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때와는 달리 예배가 시작됐는데도 문이 열려 있었다. 감동적인 기도 소리와 우렁찬 찬송가 소리가 퍼져 나왔다. 그의 세련된 감수성에는 찬송가는 조잡하고 연주는 저속했다. 그러나 교회 음악은 내면에 감추어진 종교적 열정을 상징하기 위한 것으로, 그 열정을 성급하게 표현하려다 보면 다소 유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솟아오르는 격정을 서둘러 표현한 시라고 해서 진실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조잡한 찬송가 소리에 귀를 막고 싶은 동시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시리우스는 한 발 한 발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기도가 진행 중이었다. 목사의 눈은 경건하게 닫혀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감동에 젖은 체하고 있었고 자기만족적이며 가식적이었다. 진부한 억양으로 회개와 숭배를 말하고 있었지만 진정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의 죄를 인정하면서, 그 죄를 사해주시고 자신과 신도들을 위해 영원한 행복을 달라고 기도했다. 머리를 숙인 채 긴 의자에 줄지어 앉아 있는 신도들 뒷모습이 우리에 갇힌 양의 뒷모습 같았다.

 

- 또 한 번은 구세군 악단을 따라서 행진을 했다. 트럼펫 소리에 맞춰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 야외 포교 활동은 시리우스에게 구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그는 '어린 양의 피로 죄를 씻고'라는 찬송가의 가사에 감동받아 기쁜 마음으로 찬송가를 따라 불렀다. 후렴구의 이미지가 사랑의 종교와 어떻게 부합하는지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그 구절은 그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찬송가가 자기 안에 있는 부드러움과 늑대의 기질을 통일시킨다는 것을 희미하게 느꼈다. 자기가 죽였던 숫양과 어린 조랑말에게서 맡았던 황홀했던 냄새를 다시 떠올렸다. 연민과, 피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벌어졌던 집요한 투쟁이 다 해결된 것 같았다. 그의 죄는 씻겼다. 왜 그런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여간 그렇게 느꼈다. 시리우스와 인간들은 자기 죄를 어린 양에게 양도하고서, 서로가 하나가 되는 공동체적인 열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집단의 정신 속으로 자신들을 내던졌다. 몽롱하게 취한 정신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정확하게 느끼려는 시도를 포기한 채 공동의 심리 상태 속에 자신을 맡겼다. 개별적인 정신들이 집합적인 것으로 나타난 그 심리 상태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것으로 보였다. 아무튼 저속한 음악이 머리를 가득 채운 사이에 그는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정신의 다른 한쪽에서는 트럼펫 소리와 북소리, 원기 왕성한 인간의 노랫소리가 정글에 사는 이름 모를 동물이 포효하는 소리처럼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이 저항하는 정신은 명료한 사고의 과정 없이 단지 다 함께 있다는 편안함에만 의지해서는 정신의 본질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몽롱하게 취한 상태가 아니라, 명료하고 엄밀하게 자기와 타자를 의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플랙시와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었던 그 드문 순간들 같은 것 말이다. 그때 그들은 둘 사이의 차이를 통해서 그들 사이에 놓인 동일성을 발견했다. 토머스와 토론을 할 때도 그랬다. 토머스와 함께 모든 지성을 동원해 한 단계씩 논의를 진행해 나가다 보면, 마침내 전우주를 내려다보는 절정에 이르렀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바로 그런 순간이 정신의 본질을 발견하는 때가 아닐까. 집단적인 황홀함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통해서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그 절정의 순간 말이다. 

 

- 가슴이 답답했다. 런던 중심부에서 보았던 인간의 욕망이 뿜어내는 악취 때문에, 또 이스트엔드에서 보는 절망과 근심에 빠진 인간들에게서 나는 악취 때문이었다. 런던 중심부 군중에게서는 화장품, 향수, 비누, 트위드, 담배연기, 나프탈렌, 모직 코트의 동물 냄새가 주로 났다. 물론 이 밖에 땀 냄새, 특히 여성의 땀 냄새와, 성적 흥분의 냄새를 풍기는 체취도 떠돌았다. 그러나 이곳 이스트엔드에서는 인간의 냄새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했다. 이들의 냄새는 런던 중심부 사람들의 체취와 비교하면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부유한 지역에서는 건강한 육체의 냄새가 났지만, 빈곤한 지역에서는 병에 걸린 불쾌한 냄새가 많았다. 또 다른 점이 있다. 부유한 지역에서도 불만과 불평에 가득한 냄새가 났지만, 욕구불만이 훨씬 심한 동부 지역에서는 같은 불평불만이라도 그 냄새가 훨씬 강할 뿐 아니라, 만성적으로 억압된 분노의 악취까지 섞여 있었다. 

 

- 시리우스는 이전에도 비천한 도시를 지나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대영제국에서 인간이 이 정도까지 타락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이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한 것이고, 이런 상태야말로 오만하고 잔혹한 종족이 처한 평균적인 삶의 조건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중심적인 지성과, 공동체에 대한 잘못된 감정들이 이런 상황을 초래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부유한 웨스트엔드 지역에서는 이스트엔드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들은 각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좌절감과 욕구불만에 빠져 있었다. 

 

- 목사는 시리우스의 종교적인 호기심에 대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통역으로 시리우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에는 태도를 바꾸었다. 특히 시리우스가 종교의 핵심은 사랑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자 목사 쪽에서 더 흥미를 보였다.  

 

- 시리우스는 이런 남성 전용 클럽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제프리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곧 알아차렸다. 어떤 이들은 목사에게 의혹에 찬 시선을 보내거나 적대적으로 대했다. 이들은 목사의 눈을 피해 시리우스를 괴롭히며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제프리의 친절과 성실성을 존경하면서도 목사라는 직책과 그의 종교를 선사시대 유물쯤으로 깎아내렸다. 또 어떤 이들은 진심 없이 말로만 신앙을 믿는 것처럼 굴면서 그에게 아첨을 떨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제프리를 무신론자로 '개종'시키려고 들기까지 했다. 시리우스는 종교에 대해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이 지배 종족(인간)의 지적인 성실성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굉장히 실망했다. 상대를 설득하는 논리가 얼마나 허술하고 빈약한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들은 논리적인 타당성 같은 건 아예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논리로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이미 자기 마음은 굳혀놓은 상태에서 상대가 뭐라든 자기주장만 펼쳤다. 클럽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제프리가 말하는 의미에서 진정한 기독교도는 단 한 사람도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제프리의 인격에는 많은 사람이 깊은 감동을 받는 것 같았다. 

- 애초에 시리우스가 제프리를 찾아온 것은 참된 종교를 찾고자 하는 희망에서였다. 케임브리지에서는 자유롭고 대담무쌍한 지성이 존재하는데도 분명히 뭔가가 결핍돼 있었고, 그는 그 결핍된 것을 무엇보다 갈망했다. 케임브리지의 지성인들은 시리우스가 찾는 것을 하찮은 것이라며 폄훼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그것이 바로 '종교'라고 믿고 그것을 찾기 위해 런던까지 왔던 것이다. 그리고 제프리에게서 그것을 발견했다. 제프리는 케임브리지 지성인들이 결여한 것을 확고하게 거머쥐고 있었다. 제프리가 살아 있는 '종교'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제프리의 종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케임브리지에서 배운 모든 것과 케임브리지에서 최고의 가치로 치는, 지성에 대한 영원한 충성을 부정해야만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앙에 매달리고 지성을 배반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물론 제프리처럼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반대로 맥베인처럼 신앙을 버리고 지성에 매달리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쉬운 일이다. 그러면 신앙과 지성, 둘 다 만족시키는 길은 없는가? 시리우스는 그런 길이 있으리라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예민한 지성과 풍부한 종교적 감수성이 필요하다. '정신'을 향한 열정, 늘 깨어 있는 삶. 열정 그 자체가 주는 희열 외에는 어떤 신념과 위안도 거부하는 '정신'을 향한 열정. 제프리의 헌신적인 삶에서 드러나는 바로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진실한 종교이다. 시리우스는 자기 힘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우울해졌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는 지성도 열정도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정신'이 자신을 휘어잡고 불태워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쉽게 불타오를 수 있는 유형이 아니었다. 습한 안개가 너무나 많이 그를 휘감고 있었다. 

 

- 그러나 음악에 식견이 높았던 제프리는 다른 모든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악의 최고 기능은 종교적 표현이라고 하면서, 거기에는 저마다 자유로운 해석이 담겨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시리우스 스스로 해석한 노래를 신도들에게 들려주도록 했던 것이다. 시리우스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다만 불완전한 음악을 하게 되면 그런 해석이 우스꽝스러워진다고 말했다. 시리우스는 음악에는 소리의 패턴이 만들어내는 즉각적이고 우아한 가치를 넘어서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정서적인 틀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음악은 객관 세계나 '존재의 본질'에 관해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대신 객관 세계의 어떤 특질이나, 우주 전체에 어울리는 복합적인 감정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음악은 종교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로 음악을 해석하는 작업은 그런 종교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우주의 특질을 묘사해야 한다.

 

- 전쟁이 시작됐을 때 시리우스는 컴벌랜드의 목장에 있었다. 호수 지방의 양치기 방식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여기 수업은 아주 귀중한 경험이었지만 대단히 고통스럽기도 했다. 컴벌랜드 목장주인 트웨이츠가 굉장히 잔혹한 데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를 통해 시리우스는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접해본 적이 없는 인간성의 또 다른 측면을 보았다. 처음부터 시리우스는 트웨이츠가 괴상한 인간이 아닐까 짐작했다. 그가 기르는 로이라는 보더 콜리가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틈만 나면 슬슬 피했을 뿐 아니라, 주인이 부르기라도 하면 깜짝 놀라면서 움찔움찔 겁먹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시리우스에게도 극도의 증오심을 드러냈다. 시리우스가 보통의 슈퍼 양치기 개가 아니고, 성격도 굉장히 냉혹할 거라고 자기 멋대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시리우스를 함부로 대했다. 나는 토머스가 왜 그런 인간에게 시리우스를 맡겼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토머스는 시리우스의 심리적인 면에 늘 둔감했다. 둔감했다기보다 상상력이 부족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그 결과가 어찌나 엄청나던지, 토머스가 계획적으로 그런 인간에게 맡긴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시리우스가 인간성의 잔인한 면을 직접 경험하도록 의도적으로 그런 환경에 몰아넣은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고도 남았다고 하겠다. 

 

- 시리우스는 처음 얼마 동안은 잔인한 성격을 가진 인간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오히려 기쁘게 생각하기도 했다. 사실 그동안 그가 접촉한 인간이나 환경은 지나치게 온화하고 쾌적해서 인간 전체를 공평하게 이해하기는 부족했다. 훨씬 가혹한 조건에서는 인간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주인이 명령을 내려도 로이와는 달리 겁먹은 표정을 짓지 않고 당당하고 침착한 태도로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트웨이츠의 신경에 거슬렸다. 그는 말도 안 되는 갖은 구실을 대며 시리우스를 괴롭혔다. 그럴 때면 시리우스는 차가운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물론 이런 반응은 사태를 악화시켰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리우스도 트웨이츠의 거친 목소리나 농장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참기 힘들었다. 웨일스나 케임브리지, 런던에서 만났던 따뜻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점점 사라지고, 트웨이츠야말로 인간의 전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폭군 같은 인간 종족으로부터 자신의 종족(개)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비장한 생각까지 들었다. 트웨이츠의 인정사정없는 손길은 인간이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게 된 과정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지구 상의 모든 약자를 대신해 인간 종족에 대항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 이스트엔드에서 보낸 시간들이 혁명의 필요성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생산수단의 공유나 창조적인 사회 개혁에 대해 마음 깊은 곳에서 근본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보살펴야 할 재산이 생기면서 자신도 놀랄 만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모두 맞는 말이지만, 네가 말하는 새로운 질서가 조금 걱정스러운 건 사실이야. 농장을 다 합병해서 집단농장을 만드는 게 바람직한가? 약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현실을 무시한 너무 이론적인 생각 아닐까? 그런 사회에서 토머스 같은 창조적인 과학자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와 같은 기형적인 존재는 어떻게 되겠어? 문제는 사회 개혁의 주체가 누구냐에 달려 있어. 민중이라고? 그럴듯하지만 민중은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해. 현재로서는 소수만이 그것을 해낼 수 있어. 단순한 선동가나 우두머리 말이야. 내 생각에는 사회 개혁은 보다 크게 깨어 있는 사람들이 주도해야 한다고 봐, 실제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니까. 나머지는 단지 양 떼 같은 존재일 뿐이야." 

 

- 플랙시는 되받았다.

"하지만 모든 개혁은 보통 사람을 위한 것이야. 따라서 보통 사람이 목표를 정하고 통제 해나가지 않으면 안 돼. 깨어 있는 사람은 공동체의 심부름꾼일 뿐이야. 양치기 개가 양을 위해 일하듯이 말이야."
"바보같이."
시리우스는 말했다.
"양치기 개는 주인을 위해 일하고, 그 주인은 양을 이용하고 개도 이용하는 것뿐이야."
플랙시가 대들었다.
"하지만 자유로운 민중에게는 자신들이 곧 주인이고, 섬겨야 할 다른 주인이란 없어. 민중 전체가 곧 주인인 거야." 
"아니, 그건 달라!" 
시리우스는 소리쳤다. 
"그럼 양 떼 자체가 주인이라는 것과 뭐가 달라. 나는 어찌 됐든 단 한 사람의 주인밖에 인정하지 않아. 그리고 단순하면서도 절대적인 정신만을 주인으로 모셔."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정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누가 알아내지? 정신을 해석하는 것은 누구냔 말이야?" 
"물론 정신 그 자신이지. 지도자들과, 양치기 개들과, 깨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정신 그 자체 말이야." 
"바보, 그건 파시즘으로 통하는 지름길이야. 모든 것을 아는 한 사람의 지도자가 나머지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지시하는 거잖아." 
시리우스는 항의했다. 
"하지만 파시스트 당은 깨어 있는 사람들로 조직되어 있지 않아. 그 당원들은 정신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른다고. 그러니 정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지. 기껏해야 미쳐서 날뛰는 양치기 개들이나 늑대 무리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시리우스, 그건 그자들이 우리를 향해하는 말이나 같아. 우리 둘 중 누가 올바른지를 판단하는 것은 누구지?" 
시리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그리스도와 제사장 중 누가 옳은지를 판단하는 것은 민중이 아니야.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라고 했어. 진실을 재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인, 즉 그리스도 자신의 마음 안에서 속삭이는 정신이야. 그러니 네가 정신을 섬긴다면 다른 주인은 절대 섬길 수 없지. 정신이 추구하는 것은 사랑이며 지성이고, 강한 창조적 활동이야. 사랑, 지성, 창조야말로 정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어." 
플랙시는 비꼬듯이 말했다.
"시리우스 신부님께서 매우 심원하고 유익한 설교를 해주셨습니다."

- 1940년 가을이 되자 시리우스는 푸의 농장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목초지를 개간하거나 양의 품종을 개량하는 일을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이웃 사람들에게는 '푸의 인간견'으로 불렸지만, 시리우스의 지적인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푸는 시리우스에 대한 진실을 전부 털어놓음으로써 거꾸로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해 버렸다.  

 

- 그녀는 시리우스가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불러주었던 기묘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는 시리우스가 일생을 통해 싸워야 했던 개와 인간 사이의 갈등을 상징했다. 거기에는 개가 짖는 소리와 인간의 목소리가 함께 녹아 있었다. 또 플랙시를 상징하는 따뜻하고 밝은 주제와 시리우스 자신을 상징하는 혼란스러움이 함께 들어 있었다. 그 노래는 흥겹고 기쁨에 찬 선율로 시작하지만 조금 지나면 비극적인 곡조로 바뀌었다. 그래서 플렉시는 좀 못마땅해하곤 했었다. 그의 죽은 몸을 내려다보며 그의 비극은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녀는 그의 음악을 통해 시리우스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다.

 


 

- 과학소설은 기본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벗어남을 추구한다. 그러나 인류 대다수는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도 상당수는 힘든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대안적 판타지 차원으로만 추구할 뿐이다. 하지만, 현실이 주는 안온함에 한 점 욕구불만이 없는 이들 중에도 본능적으로 다른 세계, 다른 존재를 꿈꾸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판타지가 아닌 현실에서 인간의 지성과 야수의 본성을 동시에 지닌 개 시리우스와 마주친다면, 나는 설렘과 두려움을 가라앉히며 그와 진지한 대화를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가치 있다고 믿기에, 같은 인간들끼리도 진지하게 공통의 희망적인 미래상을 모색하는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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