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데이비드 가드먼] 자유의 불꽃 - 빠빠지와의 삿상

일루젼 2022. 7. 18.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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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데이비드 가드먼 / 김병채

원제 : The fire of freedom - Volume 01 : Satsang with Papaji
출판 : 슈리크리슈나다스아쉬람 
출간 : 2014.11.30 


여유를 두고 읽었음에도 몇 장 읽지 않아 졸음이 쏟아져 자주 쉬어가며 읽어야 했다. 한 번에 많은 양을 읽어나가지 않도록 조절 당하는 느낌이었는데, 덕분에 생각할 시간을 가져가며 천천히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빠빠지와 사람들이 나눈 삿상을 채록해 정리한 책이다. 사람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빠빠지의 반응과 대답을 함께 접할 수 있어, 글로 읽고 있지만 함께 그 대화를 듣고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빠빠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당신은 이미 그것이다'.      

참나를 찾기 위해 수행에 매진할 필요도, 은둔을 위해 틀어박힐 필요도 없다. 당신은 언제나 진정한 자신이었고, 그와 함께였음을 '집중해서' 감각하기만 하면 된다. 빠빠지는 때로는 노력을 말하고 때로는 노력을 부정하지만, 그가 선택한 단어들은 항상 질문과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가 주문한 노력은 고요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것, 외부에서 답을 찾으려하기보다 모든 것이 가라앉은 다음에도 남아있는 것을 마주할 것이다. 즉 진지한 의도를 가지고 내부로 시선을 돌릴 것, 이것을 노력하라고 말한다. 

 

그가 부정한 노력은 그외의 모든 것이다. 명상, 호흡 수련, 수행, 은둔 등 모든 것들은 진정한 자유를 위한 답은 아니다. 그러나 자유를 갈망케 하기 위한 하나의 길이 될 수는 있다. 공중에 몸을 띄우고 사람의 마음과 미래를 읽어내는 신통력을 얻게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은 싯디로 진정한 자유를 위한 힘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붓다의 딸 세상을 비추다>에서 디파 마가 했던 이야기와 상통한다.) 그것들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이 모든 관계를 녹여내고 진정한 자유를 주는가?

 

신을 섬기고 헌신하는 것도 하나의 길이지만, 그가 외부의 신으로 존재하는 한 끝은 마음이 만들어낸 세계로 갈 뿐이다. 그의 굴레는 아직 벗겨지지 않았다. 진정한 자유는 이원성이 사라지고 단일성마저도 사라진, 공허조차도 사라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참나만이 존재하는, 있음과 없음의 존재함조차 사라진 어떤 상태.

 

빠빠지는 그런 상태 -참나- 는 사실은 항상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하고 있는 집이며, 고개를 돌려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최고의 연인이라고도 말한다. 고통이나 두려움은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지표라고 설명한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단순명쾌한 만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지난한 과정은 청자의 몫이다. 사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인지,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마음의 기꺼운 죽음과 텅빔으로 완성되는 온전한 자유- 그것은 원하고 갈망하게 되는 지점이지만 동시에 두려운 지점이다. 가짜 '나'라도 '나'는 내가 아닌가? 탈피된 껍질은 다시 먹힐 수 있는가? 내가 사라지고 전체가 되는 것이 아직까지는 '나'의 죽음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참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빠빠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하며 더듬어가라고 조언한다. 모든 것을 거부하고 거부조차 거부하며 거슬러가다보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진리에 다다르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에 달하면 그 진리가 언제나 함께 해왔던 것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깊게 읽었다. 

끝.  

        

 


   

 

- 내 온몸은 덜덜 떨리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경 에너지의 전율이 내 몸을 뚫고 지나갔다. 내 신경 말단은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머리카락은 곧추섰다. 내 안에서 나는 영적인 가슴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가슴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면서 지주이다. 그 가슴속에서 나는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 같은 것을 보거나 느꼈다. 그것은 매우 빛나면서 푸르스름했다. 마하리쉬가 나를 쳐다보고 있고 나 자신은 내적 침묵의 상태에 잠겨있을 때, 나는 이 봉오리가 열려 꽃피는 것을 느꼈다. 나는 '꽃봉오리'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이 말은 정확한 묘사가 아니다. 꽃봉오리 같이 느껴지는 어떤 것이 가슴속의 내 안에서 열리고 꽃피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 그리고 '가슴'이라고 말할 때, 나는 꽃이 몸의 특정한 곳에 피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가슴, 즉 내 가슴의 이 가슴은 몸의 안에도 몸의 바깥에도 없었다. 나는 일어난 일을 더 정확하게 묘사할 수가 없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마하리쉬의 면전에서 그리고 그의 응시 아래에서 가슴이 열리고 꽃이 피었다는 것뿐이다. 그것은 놀랄 만한 경험, 내가 이전에 결코 겪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나는 어떠한 종류든 경험을 찾으려고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하리완쉬는 슈리 라마나에게 크리슈나의 형상이 나타나고 있었다고 말했지만, 슈리 라마나는 다시 또 그 형상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것 같았다. 형상이 왔다가 간 것을 확인한 후에, 슈리 라마나는 "나타나고 사라지는 신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그분이 진정 신이라면 당신과 항상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 빠빠지는 그가 어떤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항상 부인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가지고 있는 것은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참나를 직접 언뜻 보게 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었다. 이 책의 여러 페이지에서, 단지 알아봐 주고 인정 받기만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내부에 항상 있다고 빠빠지가 말하는 그 참나에 대한 원래의 경험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그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그들의 내부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거듭 부추기고 강하게 권유하는 그를 볼 수 있다. 그의 방법은 어떤 위대한 영적인 경험을 얻기 위하여 장기적인 목표를 세워 사람들을 멀리 보내어 명상하고 수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에게 마음과 개인적 정체감이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참나 깨달음을 찾으면 지금 여기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대화는 빠빠지가 1991년 자신의 인디라나가르 집에서 방문객들과 함께 나눈 대화를 옮긴 것이다. 

 

- 2007년 띠루반나말라이에서 데이비드 가드먼 

 

- 저는 꿈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상태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저는 깊은 수면의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 인도에서는 깨어 있음, 꿈꾸는 상태, 잠, 뚜리야, 뚜리야띠따와 같이 다섯 가지 상태가 있다고 말합니다. 

 

- 깨어 있음, 꿈, 잠은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 이후에 네 번째 상태인 뚜리야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전의 세 개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상태입니다. 그 너머에는 뚜리야띠따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네 번째의 너머'라는 것입니다.

 

- 그러자 그는 "제가 정원에 물을 주고 있는 동안에 당신의 줄들을 부착해도 됩니다. 저는 명상하기 위해 앉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과학자들은 그의 머리에 줄을 부착하였는데 그 스와미가 말한 바와 같이 그가 일상적인 정원 일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감명을 받았으며, 심도 있는 실험을 하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당신이 알고서 그 바탕에 자리를 잡는다면, 수많은 활동이 진행되더라도, 그 활동을 할 마음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참나가 이 모든 것을 돌볼 것이고 당신은 늘 평화 속에 있을 것입니다. 

 

- 깨어 있음, 꿈, 잠과 같은 세 가지 상태와 텅 빔의 바탕이 되는 네 번째 상태로 돌아가 봅시다. 세 가지 상태는 바탕에 투사된 것입니다. 그 바탕은 잠이 오고 가고, 꿈이 오고 가고, 깨어 있음도 오고 가는 그 배경인 것입니다. 어떤 바탕, 즉 어떤 근본적인 토대가 있어서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갑니다. 그 토대, 그 현존, 그 공간은 항상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외부의 일들에 너무 몰두해 있으면 그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 그런데 사람들은 세 부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절대로 잊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그들은 모든 것이 이 바탕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압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반묵따입니다. 지반묵따는 그들이 몸을 가지고 여전히 살아 있는 동안에 완전한 해방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때로는 기억하고 때로는 잊어버리기 때문에 스스로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텅 빔에 대한 자각은 잠시 동안 일어나지만, 죽은 친구에 대한 기억이 일어나 갑자기 슬픔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들은 어떤 생각에 집착함으로 텅빔에 대한 자각을 잃습니다. 이런 종류의 텅 빔은 영속적이지 않고, 정신적인 활동의 변덕에 의존해 있습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원래의 공간, 그 텅 빔을 잠시라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습니다.

 

- 당신은 망각하거나 기억하는 이 실체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망각하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잊어버렸든 기억했든지 간에 동일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억과 망각의 전 과정을 통해서도 그 사람은 동일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망각하는 '나'를 찾아내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절대 망각하지 않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나'는 의식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존 그 자체입니다. 그 현존 안에서는 당신은 어떤 것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빛이 사방에 있다면,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물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영역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의식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은 아주 선명해질 것입니다. 어떤 것도 잊혀지거나 감추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 꿈을 꾸는 수면의 상태가 있습니다. 깨어있는 상태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당신에게 알려져 있는 것이지만, 그 너머에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의식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참된 본성입니다. 그것을 획득하거나 쟁취하거나 달성하거나 성취하거나 열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결코 잃은 적이 없으므로 그것을 다시 얻기 위해 그것을 향해 쫓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으며, 늘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지금 여기에 없다면,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무엇이든지 새롭게 얻는 것은 언젠가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잃지 않는 것, 즉 영원하며 영속적이고 자연스러우며, 지금 이곳에 늘 있는 것을 찾으십시오. '지금'을 보십시오. 현존을 보십시오. 공간을 보십시오. 당신 자신의 텅 빔을 보십시오. 모든 것은 티끌만 한 이 텅빔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온 우주는 거기에 있습니다. 온 우주는 그곳으로부터 나옵니다. 그곳으로 돌아가 이 모든 현상계의 근원을 보십시오. 그러고 난 뒤에 삶을 즐기십시오. 

 

- 침묵의 공간은 '나'가 일어나는 발원지입니다. 이 '나'의 근원을 찾아 거기에서 고요해지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것의 지리적인 위치를 확정하십시오. 어떤 것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알게 된다면, 그다음 그곳에 도착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을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어딘가로 여행해야 할 때 비행기나 배나 차와 같은 교통수단을 결정하기 전에, 당신은 목적지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 목적지는 얼마나 멀리 있습니까? 출발의 지점은 어디입니까? 이 두 가지 질문에 만족스럽게 답한다면, 여행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쉬워질 것입니다. 

 

- 이제, 이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몸 그 자체에서 시작하십시오. 몸 안의 누군가가 '나'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전 생애에 걸쳐서 이 '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먼저 "나는 깨어 있다.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잠들었다."와 같은 이 모든 세 가지 상태에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이 모든 세 가지 상태에 지속되고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의 거주지는 어디입니까? 그것의 거주지를 발견하기를 원하는 자, 이 자는 누구입니까? 이 자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탐구의 목적, 탐구의 대상이 '나'라면, 그는 그것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발견되고 명확해져야 합니다. 

 

- 구도자는 구도를 통하여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탐구는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이것도 역시 분명히 해야만 합니다. 구도자가 있고, 탐구가 있으며, 탐구의 대상이 있습니다. 먼저 탐구하기를 원하는 자를 찾아내십시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 앎이 아직 온전하게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에 탐구가 있습니다. 구도자는 이 앎을 찾기 위하여 느리게 움직입니다. 자신을 알아보기 위해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거울을 찾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기 자신을 인식합니다. 일단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거울과 탐구, 탐구할 어떤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습니다. 앎의 과정에서 아는 '누구'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이들은 명상을 하고자 끊임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앎의 과정과 그것의 필요성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사원에서 행해지고 명상은 수도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 많은 사람을 만나지 말고, 은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매우 가벼운 음식으로 된 특별한 다이어트를 해야 하고, 하루 종일 이러한 수련들을 해야 합니다. 이 수련들은 종일 매달릴 때만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 수련들을 하면서 얻는 경험들과 자유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이 수련들을 하면 모든 종류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공중부양,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하기, 사물 발현시키기 등등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투시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 힘을 통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특별한 힘들은 자아를 통해 기능합니다. "나는 이 묘기를 하고 있다.", "나는 공중부양을 하고 있다." 등 말입니다. '나'가 여전히 거기에 있습니다. 종종 이 힘들 중 어떤 것들은 그것을 위해 어떤 수련도 하지 않았는데도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 사람들은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망들과 다음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망, 그리고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것이 당신을 자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합니다. 당신은 자유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이 세 가지를 포기한다면, 자유에 대한 욕망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면 자유 그 자체만이 남을 것입니다. 

 

-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고, 당신으로 하여금 이런 욕망들을 가지도록 창조한 그 존재조차도 포기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제가 말하는 바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자유는 스스로 나타날 것이며, 당신은 자유를 더 이상 갈망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 그래서 당신이 쌓은 공덕이 히말라야보다 더 높을 때라야 이 욕망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나로부터 온 은총의 작용입니다. 이 은총은 당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며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힘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것이 당신에게 말하려고 하는 언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갈망이 일어나면, 참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을 만나도록 준비를 하는데, 이 어떤 사람은 당신 자신의 언어로 당신에게 말을 걸어, 참나가 당신의 내면에 있다는 사실과 당신은 내면에서 참나를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려 줄 것입니다. 이것이 구루의 은총입니다. 은총이 분명히 '외부'의 근원인 구루의 형상으로부터 온다고 하더라도, 그 은총은 여전히 내면에 있는 참나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며, 그 참나의 힘이 당신을 참나 안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 은총은 당신이 그것을 찾도록 항상 격려합니다. 은총으로 인하여 자유에 대한 갈망이 당신에게 일어났습니다. 은총을 통하여 당신은 여기로 올 수 있었습니다. 은총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 질문을 하도록 합니다. 이 질문 자체도 은총입니다. 이 은총 너머에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노력도 은총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신이 이와 같은 노력을 할 수 있고, 이런 노력을 하기를 원한다는 것 자체가 모두 은총의 표시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내겠다고 결심함으로써 당신은 노력하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탐구에 대한 노력입니다. 이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내겠다."라는 결심으로부터 일어납니다. 또 다른 길은 "이것은 모두가 당신의 은총입니다. 저는 당신의 손안에 있습니다."라는 복종의 길, 은총의 길입니다. 이러한 길이나 태도는 당신을 돌보고 당신을 참나에게로 인도하는 힘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 여러 성향들은 서로 다른 길로 인도합니다. 여기 인도에서는 그것을 원숭이의 방식과 고양이의 방식이라고 부릅니다. 원숭이 새끼는 꽉 잡으려는 노력으로 어미에게 붙어 있습니다. 어미 고양이는 새끼 고양이를 물고서 어미가 원하는 곳으로 데리고 갑니다. 당신이 어떤 길을 선택하든지 그것은 모두가 은총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자유를 얻겠다."라는 결정은 모든 것을 신에게, 즉 참나의 힘에게 맡기겠다는 결정만큼이나 은총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 당신의 성향이 당신을 위해 선택할 것입니다. 당신의 성향과 반대되는 선택을 하려 한다면, 그것은 올바르게 작용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뼈 안에 있습니다. 당신이 따르려고 선택한 길은 당신 성향의 결과일 것입니다. 성격과 인성을 지배하는 마음의 속성들이라고 하는 세 가지 구나, 즉 삿뜨바(순수, 조화), 라자스(행동), 따마스(둔함, 게으름)가 있습니다. 이 구나들이 당신이 행위를 하도록 충동질할 것입니다. 그것들이 당신의 성향에 가장 맞는 길을 따라가도록 지시할 것입니다.

 

- 당신은 끝없이 물건들을 모을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머리에 부담만 지우는 그런 물건들을 말입니다. 그 짐들을 없애기 위하여 새로운 짐을 떠안을 필요는 없으며, 그냥 이미 갖고 있는 짐들을 놓아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 노력하는 일은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신에게 익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노력을 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당신은 수백만 년 동안 노력을 해왔기에 이 조언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노력이라는 측면에서 훈련을 받아 왔으며 당신이 할 줄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이기에 이 노력을 계속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영적인 길로 접어든 뒤에도 당신은 여기에서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노력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유를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 없으며 단지 침묵만이 필요합니다. 지금껏 익혔던 모든 것을 잊으십시오.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듣거나 읽었던 모든 것을 잊으십시오. 사람들이나 예언자들이 지금까지 말해 주었던 어떠한 조언도 잊으십시오. 모든 것을 다 잊고 자신의 참나만을 보십시오.

 

- 마음은 당신을 위해 여러 가지 속임수를 만들어 놓았는데, 이런 일시적인 희열의 상태들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경험들은 당신 자신의 내적 소망들, 영적인 경험은 이러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 관념들에서 나옵니다. 당신은 이것이 영적인 길에서 당연히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희열을 원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당신에게 강요를 하고 당신이 즐길 어떤 희열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모두 속임수입니다. 이 속임수에 속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것들이 속임수들임을 안다면, 당신은 그것들 안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일시적인 모든 것, 즉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모두 속임수라는 것만 알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지식으로 당신은 일시적인 것들에 가까이 가지 않는 식별력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즐겁다 하더라도 그것에 상관없이 영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거부는 쾌락과 희열을 좇는 마음의 습관에 맞설 것이고, 그렇게 하면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본래의 상태로 데려다줄 것입니다.

 

- 알다시피 마음은 계속 바쁘게 움직이기를 좋아합니다. 마음은 당신을 위한 목표를 세워 놓고 그것을 달성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마음은 이러한 일시적 희열의 상태들을 당신의 목표로 만들고, 그러고 나서 그것들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하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무엇인가 대단한 것, 영적인 어떤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미룸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깨달음을 내년으로 또는 다음 생애로 미루는 것입니다. 

 

-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은 당신이 모든 활동을 없애고자 결심하는 그 순간이나 찰나의 결과입니다. 그때, 그 순간에 평화와 행복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당신에게 행복을 주는 순간입니다. 

 

- 마음의 활동과 대상들이 소멸되는 상태입니다. 수면의 경험은 마음이 그 활동을 멈출 때 평화가 퍼진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마음이 깨어 있는 상태의 대상들과 갈망으로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멈출 때, 당신은 완전한 자각으로 있는 평화와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최고의 초월적인 상태입니다. 

 

- 그것은 어떻게 얻어질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루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요가, 사마디, 명상 등을 통해 얻으려 노력해 왔으나, 어느 누가 영구적인 결과를 얻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수단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입니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 어떠한 책도 당신을 위해 이 관념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우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속박되어 있다고 누가 나에게 말했는가?" 속박이 어디에 있습니까? 속박 그 자체를 탐구하십시오. 속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누구인지 조사해 봄으로써 그 속박을 문제 삼으세요. "누가 속박되어 있는가?"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그것은 당신을 속박의 개념이 존재하게 된 곳으로 데려다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책이나 스승도 말해 줄 수 없는 그곳으로 데려다줄 것입니다. 

- 당신이 해야 할 일이란 오로지 이 장애물을 없애는, 다시 말해 속박되어 있는 누군가가 있어, 이 속박을 초월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이 관념을 없애는 것입니다. 빛이나 지혜를 찾기 위해 열심히 애쓰는 대신에, 이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즉 처음 당신을 영적인 길로 들어서게 한 "나는 속박되어 있다."는 이 관념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십시오. "나는 묶여 있다."는 관념은 깨달음과 영적 수행에 관한 당신의 모든 관념들이 세워져 있는 마음의 토대입니다. 당신은 이 토대 위에 굳건히 자리 잡고, 거기로부터 모든 방법들과 수행들을 발전시키고 추구합니다. 만약 이 최초의 장애물, 즉 "나는 묶여 있다."라는 관념을 없애지 못한다면, 당신의 수행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나는 묶여 있다."라는 이 생각을 조사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을 투자하십시오. 이것에 대해 작업하십시오. 

 

-  프랑스 여성 니콜이 보낸 편지를 제가 읽어 주는 것을 들어 보셨습니까? 그녀는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속임수에 대해 말했습니다. 다시 들어 보십시오. 

저 자신의 참나이신 영적 스승님, 저는 현재 니콜에게 하루에 일어나는 어떠한 일이라도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만 해야 한다고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 자신을 제가 만지고, 보고, 느끼는 모든 것 안에 있는 유일한 존재 원리로 보는 것을, 특히 저 스스로 유일한 원리 그 자체로서 살아가는 것을, 제가 여전히 타인들이라고 부르는 존재 안에서도 그 원리 자체를 보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이 사실을 잊어버리는 망각이 일어나면, 망각 또한 존재 원리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그 답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것입니다. 

 

- 무엇을 경험하든, 그것을 거부하십시오. 당신 자신을 발견하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거부하십시오. 당신이 지각하거나 상상하거나 보는 것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을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거부하십시오. 자신을 이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시키십시오. 결국 당신은 어떤 곳, 즉 어떤 지식에, 다시 말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지식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 지식을 거부하는 일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구별적인 지식을 통해, 당신은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지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떠날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그 지식과 마주해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실재입니다. 

- 당신이 동일시하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거부하십시오. "나는 육체적 몸이 아니다. 나는 정신적 몸이 아니다. 나는 지적 몸이 아니다. 나는 희열의 몸이 아니다." 이 모든 동일시가 더 이상 없을 때 '나' 자체가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로지 다른 실체와 관련된 실체로서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개별적인 '나'는 그 밖에 어떤 것과도 연관을 맺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다 그 뒤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원성이 그것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이 '나'가 사라지는 곳, 그곳에서 참지식이 일어납니다. 

 

- 그 '나'라는 것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지요. 그렇죠? 그 '나'라는 것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들과 연관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여 마음은 모든 것을 나타나게 합니다. 이것이 나타남의 세상이 매일 일어나는 방식입니다. 이 '나'에 의문을 제기할 때, 나타남의 세상은 '나'자체와 더불어 끝날 것입니다. 그 뒤 다른 어떤 것이 남을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나타남뿐만 아니라 그 '나'의 소멸을 지켜보는 어떤 것입니다. 

 

- 두려움이란 곧 다가올 용해에 대하여 반응하는 자아인 '나'의 경험입니다. 두려움은 진정한 자각의 경험이 아닙니다. 자각 속에서는 신체 개념이 사라지고, 감각들이 사라지고, 마음이 사라지고, 지성이 사라지고, 자아도 사라집니다. 모든 것이 붕괴되고, 당신은 최종적으로 자유로워집니다. 

 

- 당신은 집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때의 느낌, 즉 불안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안전에 대한 욕구를 느낍니다. 당신은 항상 집에 있습니다. 집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도 있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당신은 진정한 자각의 중심에 있습니다. 바로 지금 당신은 모든 주제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돌아올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것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그것입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출발하여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십시오. 이곳에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단 하나의 생각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어떤 생각도 일어나게 하지 마십시오. 즉 그냥 이 근원을 바라보십시오. 그냥 깨어 있으십시오. 방심하지 마십시오.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의식하고 있으십시오. 

 

- '아이 엠 I am'으로부터 생각들이 일어난다고 스승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제가 존재하지 않을 때 모든 생각이 멈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생각 없음은 '제가 존재하지 않는 I am not' 상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조차 사라져야 합니다. 이 생각조차도 없어져야 합니다. 

 

- 만약 자유를 원하면, 달리던 일을 멈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머무르는 법을 배워 당신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 자각은 깨어 있음, 꿈, 잠의 세 가지 상태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네 번째 상태인 뚜리야와의 미묘한 접촉으로부터 옵니다. 네 번째 상태로부터 우리는 세 가지 상태 중의 하나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다음의 깨어 있음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당신이 옮겨 다니느라 시간을 쓰는 이 네 가지 상태를 완전히 초월하는 곳이 있습니다. 너머의 어떤 것, 그곳은 변화하는 상태나 과정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개념을 초월해 있는 본래 토대이고,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그것은 모든 상태를 초월해 있기 때문에, 다른 네 가지와 같은 상태는 아닙니다. 

 

- 네 번째 상태인 뚜리야도 여전히 개념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마음으로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것일 수 있습니다. 마음은 세 가지 다른 상태 아래에 있고, 깊은 수면 동안 자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남겨진 자각 너머 혹은 그 배후에 있는 것은 관념이나 개념을 전혀 가질 수 없습니다. 

- 날카로운 지성은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으며,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지만, 이 뚜리야띠따를 접촉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경험들을 합니다. 지성은 그 경험을 파악하고 그것을 '깨달음'이라 부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들은 선명한 지적 이해를, 어떠한 이해도 불가능한 그 본래 상태의 진정한 경험과 혼동합니다. 진정한 경험은 이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뚜리야띠다는 절대적으로 순수한 경험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것을 설명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입니다. 모든 수뜨라는 그것에 대해 침묵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말한 적이 없습니다. 

 

- 박따의 깨달음과 갸니의 깨달음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박띠에서는 이원성에 대한 어떤 지속하는 관념이 항상 있습니다. 신성한 개인적 신에 대한 헌신의 개념은 이원성의 요소를 유지합니다. 이 이원성이 유지되면, 그것은 당신이 죽은 후에 당신을 신들의 나라로 데려갈 것입니다. 이 천상의 세계들에 대한 많은 묘사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모두 마음의 것입니다. 그것들은 개념들이고 마음의 창조물들입니다. 헌신자들은, 몇몇 위대한 성자들조차도, 이런 개념들을 믿고 그들의 개념과 일치하는 천상으로 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이 죽으면 가게 될 바이꾼따와 같은 천상의 영역들을 믿도록 조건 지어져 있기 때문에, 이 생에서의 진정한 자유를 열망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힘은 이 로까(세계)들을 창조하고, 육체적인 죽음 이후에 마음은 그것들을 즐기기 위하여 그곳으로 갑니다. 사람이 죽으면 갈 수 있는 여러 다른 세계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마음의 창조물들입니다. 당신은 그런 곳들에서 항상 스스로를 즐기면서 수백만 년을 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진정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이 자유는 이 세계들 중 어느 곳에서 다시 태어날 숙명으로부터 당신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그곳에서는 말해지지 않습니다. 

 

- 이것들은 저의 경험입니다. 당신은 생각 없이 살거나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바깥세상을 전혀 자각하지 않고 살거나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 당신을 돌보아 줄 것입니까? 당신이 몰입해 있을 때의 힘이 당신을 돌보아 줍니다. 그것이 지시를 내리면 몸은 그것의 지시를 따릅니다. 이것은 당신 스스로 경험해야만 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것은 연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뱀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 사람이 취하는 반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또는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옳은 반응은 자연스럽고 자동적으로 나올 것입니다. 의심이나 생각들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 저는 물었습니다. "주머니 속에 종이를 한 장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말할 수 있습니까?" 
망설임 없이 그 소년은 그가 모르는 언어인 페르시아의 시를, 그것도 꽤 훌륭한 페르시아 억양으로 암송했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까?"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저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단지 제가 이러한 것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런 말들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어떤 일에 대해 물으면 말은 제 입에서 나오고 그것들은 항상 맞습니다." 
이것들은 마음의 트릭들, 싯디 siddhi들입니다. 이것들은 자연적으로 나타나든지 아니면 노력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제가 이야기한 무념 상태의 결과가 아닙니다. 

- 자유가 오면 그러한 모든 것은 꿈과 같고, 실제로 당신과 접촉되지 않는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과 같이 보일 것입니다. 어떤 반응들은 있을 것이며, 문제들도 생길 것이고 다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당신에게 고통을 일으키거나 미래의 반응들을 일으킬 그런 깊은 뿌리들을 만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 행위자가 없을 때, 고통 또한 없어질 것입니다. 행위자는 자유가 일어나는 순간에 없어질 것입니다. 

 

- '관여'란 것은 과거에 속하는 어떤 것에 대한 것입니다. 당신의 현생에 원인이 되는 이러한 인상들은 모두 당신의 과거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들은 당신에게 고통과 행위자라는 끊임없는 느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당신은 자유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 자리에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매우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당신에게 많은 전생들로부터 쌓은 수백만의 공덕들이 없다면, "나는 자유롭고 싶다."라는 생각은 당신 안에서 일어날 수 없을 것이고,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질문을 던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수미 Meru 산만큼의 많은 공덕이 있어야 이러한 갈망이 당신 안에서 일어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자유롭고 싶다."라는 이런 갈망이 어디에서부터 일어났습니까? 이 갈망은 아름다운 갈망입니다. 그것은 거의 표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말을 하지만,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어려운 목표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 내면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까? 그것은 너무너무 드물고, 너무너무 귀한 것입니다. 이런 갈망은 마음에 의하여 통제되지 않는 곳에서 나옵니다. 마음은 이와 같은 갈망을 흡수하거나 소화할 수 없지만, 그와 동시에 마음은 갈망이 일어나서 당신의 주위를 끄는 것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자유에 대한 이런 갈망이 그것을 향한 동경과 함께 당신을 아프게 할 때, 그 갈망은 그것이 그토록 갈구하는 그 자유를 가져다줄 힘을 가지게 됩니다. 다만 자유를 몹시 갈구하십시오. 당신은 진지해야만 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제외하고 자유를 원해야만 합니다.

 

- 비데하와 지반묵띠의 차이점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지반묵띠는 육체의 죽음 전에 오는 자유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당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알고 경험합니다. 과업이 끝나면 당신은 여생을 자유롭게 살 것입니다. 비데하묵띠는 신체가 죽는 그 순간에만 오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저는 까비따 Kavita와 함께 경향성들과 그것들에 대한 전념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때때로 그것을 직접 경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성들이 때때로 당신을 괴롭히고 사로잡게 된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죽는 그 순간까지 애착에서 애착으로 편승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나머지 애착이 강하지 않다면, 당신의 삶 속에서 의식적으로 참나를 직접 경험했다면, 당신이 죽는 순간에 충만한 자유의 상태에 이르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이 비데하묵띠로 알려져 있습니다. 

 

- 지반묵따가 되어버린 이 사람들은 아주 적은 까르마를 가지고 그들의 마지막 삶에 이르렀음에 틀림없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같은 지반묵따들은 그들의 까르마를 재빨리 다 써 버린 후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갑니다. 까르마는 자유와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까르마를 끝내는 것은 자유입니다. 까르마는 어떠한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조금씩 조금씩 소비되는 것이 아닙니다. 까르마에 끝은 없습니다. 해방이 오면, 모든 지나간 까르마와 미래의 그 모든 결과를 태우는 커다란 화톳불이 있습니다. 자유, 즉 지반묵띠에 도달하면, 인상들은 더 이상 저장되지 않고, 인상들이 더 이상 저장되지 않을 때, 새로운 까르마는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남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반묵따는 그가 자유롭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그의 삶에서 그가 행한 것에 상관없이 항상 자유로울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 상태를 잃어버릴 가능성은 없습니다. 


- 다른 사람들도 참나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망각이 오면 그는 잠시 동안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다음 다시 자신의 참된 본성을 회상하고는 다시 참나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지반묵띠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에서는 마음과 그것의 경향성들이 영구히 근절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마음과 참나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은 죽을 때 비데하묵띠는 될 수 있으나, 살아 있는 동안 지반묵따는 아닙니다. 

 

- 노력을 통해서 지반묵따의 상태에 도달했든지, 아니면 노력을 하지 않고도 지반의 상태에 도달했든지 간에, 그는 자신이 까르마의 속박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압니다. 더 이상 속박도 없고 무지도 없습니다. 까르마는 육체로 하여금 계속 활동을 하도록 하겠지만, 그것이 속박의 원인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고, 이 까르마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나 안에 완전히 자리 잡지 않은 사람들에게, 미결정의 까르마는 미래의 삶으로 이동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반묵따는 이러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의 뜻은 그가 마지막으로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아야 할 운명에는 흔히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겪지 않으면 안 될 여러 가지 일들을 다음의 내생으로 연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최종적인 해방에 도달한 후에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모든 까르마가 과거의 행동과 사건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까르마가 당신을 사로잡으면 당신은 견뎌야만 합니다. 

 

- 자유가 찾아오면, 당신은 때때로 어떤 문제가 왜 일어났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자유가 올 때, 고통을 겪는 신체와 시하는 '나'라는 존재가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진정한 고통은 없습니다. 그러나 신체는 여전히 이러한 사건들을 겪어야 합니다. 

 

-  현재의 상태, 즉 당신이 현실이라 부르는 이 세상이 단지 신화, 허구임을 알 때, 그것은 끝날 것이고, 마치 그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될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의 진리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제가 이와 같이 말할 때, 당신은 제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한 것의 어떠한 것도 당신 경험의 일부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저는 당신이 실재라 여기는 이 신화의 영역에서 살고 있는, 지금 당신이 있는 이곳에서 당신에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지금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출발한다면, 당신이 끝낼 필요가 있는 곳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당신이 신화를 믿을 때는 그 신화와 함께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러고 나서 신화로부터 멀어져 가야 합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이 꿈의 세상은 신화이고 환영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그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불평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고통을 끝내고 자유로워지는 방법에 대해서 조언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모든 말을 하는 동안, 저는 실제로 당신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한 순간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당신이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 세상이 실재라고 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이 신화는 진실입니다. 삼사라, 창조, 모든 신들, 그들은 모두 당신에게 실재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에게 부과한 신화를 꿰뚫어 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은 심지어 비데하묵띠의 후보자도 못 됩니까? 

그렇습니다. 못 됩니다. 자유를 향한 욕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욕망 없이는 자유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은 그러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나 대개 약한 욕망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욕망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출 정도로 충분히 진지하거나 성실하거나 정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약간의 발전을 하다가, 어떤 욕망에 굴복하게 되고 마음이 산란해지고,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런 일이 반복하여 일어납니다. 앞으로 몇 발자국 나아가다가 그다음 몇 발자국 물러서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설 때 당신은 마음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됩니다. 수많은 생들이 진정한 발전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이처럼 왔다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 확고하게 목적을 향해 다가가는 단호한 사람일지라도 여정의 마지막에 가서는 주저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여전히 있을 것이고, 계속해서 마음을 사용하고 싶은 강한 욕망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참나와 대면하게 되겠지만, 마음은 여전히 거기에 있으면서 평가하고 계획할 것입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나는 나의 노력에 의해 이렇게 멀리까지 왔다. 이제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준 이 똑같은 마음을 사용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고, 또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그들은 머뭇거리게 될 것이고, 목표로부터도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 꼭 같은 마음은 그것이 원하는 것을 왜 얻지 못하는지를 해결하려고 더욱 분주하게 움직일 것입니다. 평가하는 마음을 놓고, 어떤 식으로든 생각함이 없이 그 '무 nothingness'의 상태로 바뀔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 당신은 진지해야만 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제외하고 자유를 원해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이 "나는 자유를 원한다."고 생각하고, 그다음 모든 옛날의 습관들로 돌아간다거나, 아니면 하루에 30분 동안 명상을 함으로써 그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농담에 지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나는 자유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목적에 주의를 오래 집중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어딘가에 가려고 마음먹고, 길을 따라 걸어가지만, 가는 도중에 길가에서 춤을 추는 공연을 보면 그것을 보기 위해 멈춥니다. 몇 분 안에 당신은 여정의 목적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나는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방식입니다. 목적에 집중하고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으려는 결심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매우 교활합니다. 마음은 여정의 어떤 단계에서 당신을 속일 수 있습니다. 마음은 당신이 자유를 위해 노력하려고 결심할 때, 당신의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참나와의 만남에 가까이 다가갈 때, 마음은 당신을 속여 당신이 환각을 일으키고 있다고 믿게 하고, 당신이 보고 경험하는 것이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믿게 할 수도 있습니다.  

 

- 당신이 자신의 참나를 만나려 다가갈 때, 다음은 당신이 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할 뿐만 아니라, 당신을 다른 방향으로 빗나가게 하여, 어떤 정신적 미궁에 빠뜨려 길을 잃게 만들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마음은 당신이 좋아하는 신의 비전을 만들어내어 그 신과 사랑에 빠지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은 당신의 주의를 무형의 참나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다음은 어떻게 하면 당신을 속일 것인지도 압니다. 그래서 당신이 자유에 가까이 다가가면 마음은 그것이 갖고 있는 엄청난 현현의 힘을 이용하여 당신을 속여 참나로부터 떼어 놓을 어떤 것을 만들어 올 것입니다. 

- 이것이 마음입니다.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은 바로 이 마음입니다. 모든 현현,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신들, 천국과 지옥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졌는지요! 마음은 당신에게 비전들이나 즐거운 내적 상태들을 줌으로써 당신을 돕는 척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당신이 자신의 참나와 생각 없이 만나는 것을 떼어 놓기 위하여 마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것입니다. 생각이 없을 때는 마음은 당신을 딴 곳으로 돌리는 힘이 없습니다. 생각들이 있을 때는 당신은 불가피하게 생각에 기만을 당할 것입니다. 당신은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있고, 당신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그 마음을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마음이 당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치명적인 힘으로 가득 찬 위험한 호랑이입니다. 당신은 그 호랑이에게 죽임 당하지 않고, 이 거대한 힘을 가진 호랑이를 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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