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하즈랏 이나야트 칸] 소리와 음악의 신비

일루젼 2022. 7. 2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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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하즈랏 이나야트 칸 / 황정선 / 이정은

원제 : The mysticism of sound and music
출판 : 슈리크리슈나다스아쉬람
출간 : 2012.03.01 


       

<떨림과 울림>과 <소리와 음악의 신비> 사이에서 어떤 책을 먼저 읽을지 고민하다가, 결국은 이 책을 선택했다. 전혀 다른 분야의 두 책 같지만 놀랍게도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는 떨림과 울림, 즉 진동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빛, 색, 소리는 모두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원자들의 진동수와 그것이 일으키는 파동들이 구체화될 때 조밀한 것은 소리가 되고 거친 것은 빛이 된다고 설명한다. 어느 쪽을 조밀하다고 볼 것인가는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만, 간단히 접근하더라도 물체에 빛이 닿으면서 생기는 진동이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설명은 맞는 말이다.

 

저자는 음악과 소리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의 감정과 행동, 생각과 물질의 생성 원리까지 모든 것을 소리와 파동으로 설명해나간다. 그러나 과학적인 시각이 아니라 신비주의적인 시각 -특히 이슬람교와 힌두교적인 접근- 으로 풀어나가므로 이런 설명이 불편하신 분들께는 권하지 않는다. 그의 설명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한번 생겨난 생각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는 모든 순간이 빛으로서 영원히 진행되고 있다는 가설과도 연결된다. 사람들은 대개 그 반향으로 일어나는 특정 사건, 결과만을 인식하기에 그 파동이 태동한 순간과 결과를 연결 짓지 못하지만 사실은 단일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삶과 죽음은 더 큰 진동으로의 흡수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이 여전히 진동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가짜 자아의 소멸을 두려워하는 것은 더 큰 시야를 가져보지 못해서이며, 마치 잠든 채로 '이 꿈이 좋으니 깨우지 말라'라고 손을 휘젓는 것이나 매한가지라는 부분이 눈에 걸렸다. 얼마 전 읽은 <자유의 불꽃>에서 고민했던 부분이라. 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따르기는 어렵다. 모든 것의 최우선에 영성적인 삶을 둔다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내려놓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최근 나의 새로운 도피처는 그림 그리기이다. 마음처럼 나와주는 그림도 있고, 표현법을 참고하는데도 잘 되지 않는 그림도 있다. 화실 선생님께서 '취미로 이렇게 열심히 하는 분은 처음 봤어요'라고 농담을 하셨는데,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뭔가 '노력할 것', '재미있는 것'을 찾고 있을 뿐은 아닐까. 이렇게 노력하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는 자기 위안의 대상이 독서에서 그림으로 바뀐 것뿐이 아닐까. 사실은 하나도 바뀐 건 없는 게 아닐까. 

 

조금씩이라도 나아가려면, 가려는 방향성을 잃어서는 안되는데. 지금의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만족스럽고 평온한 일상인지, 되풀이되는 반복으로부터의 자유인지 잠시 멈춰 바라봐야 할 때인 것 같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스스로에게 솔직한 선택이라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책을 읽는 것이 즐겁고, 이제는 끄적이는 것도 즐겁다. 

 

밤비 소리가 듣기 좋다.

좋은 밤이다.  

 


   

- 우리가 일상적인 언어로 음악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나에게는 건축도 음악이고, 정원을 가꾸는 것도 음악이며, 농사도 음악이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음악이며, 시를 짓는 것도 음악이다. 아름다움이 영감이 되고 신성한 포도주가 부어진 삶의 모든 직업들에는 음악이 있다. 그러나 모든 예술 가운데에서 음악이라는 예술은 특별히 신성하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음악은 우주 전체에 작용하는 법칙의 정확한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 자신에 대해 연구한다면, 맥박과 심장 박동, 호흡의 들이쉼과 내쉼 등이 모두 리듬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생명은 몸의 메커니즘 전체의 리듬에 따른 작용에 달려있다. 호흡은 목소리로, 단어로, 소리로 나타난다. 그 소리는 계속해서 들을 수 있다. 우리의 안과 밖의 소리, 그것이 음악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안에도 음악이 있고, 밖에도 음악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 그렇다고 해서 음악이 종교를 대신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영혼이 음악의 혜택을 진정으로 입을 수 있는 수준에 반드시 조율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모든 음악이 다 숭고하여 그것을 듣는 사람을 종교보다 더욱 고양시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인 승배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음악은 그들의 영적 발전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진리를 찾는 영혼은 형태가 없는 신을 찾기 때문이다. 분명히 예술은 사람을 가장 고양시키는 것이지만 저기에는 형태가 있다. 시에는 형식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이나 제목들이 있다. 아름다움과 힘, 매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형식 너머로 영혼을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음악뿐이다.

 

- 미세한 진동들은 행위를 통해 더욱 거친 수준의 진동으로 변하고, 다양한 존재계를 이루며, 결국 물질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물이 얼음으로 변하듯이, 더 많은 활동은 진동들을 물질화시킨다. 더 적은 활동은 진동들을 에테르화 시키며, 높은 의미에서는 영과 물질이 같은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영은 진동의 법칙에 의해 물질로 내려오고, 물질 또한 진동의 법칙에 의해 영으로 올라간다. 위대한 요기들과 수피들은 지고의 완전한 상태로 나아가는 수행에서 항상 진동에 관한 지식을 이용한 에테르화를 통해 더욱 진보했다. 악기의 물질적인 소리와 인간의 발성 기관을 통한 목소리는 실제로는 어떤 존재계들의 우주적인 소리의 결과이며, 그 소리는 그것과 일치하는 상태의 사람들만 들을 수 있다. 

 

- 변동성과 규칙성이 상충하는 무질서한 세 번째 움직임이 일어난다. 신비가는 그 리듬을 인식함으로써 모든 행위의 특성으로부터 그 특정한 행위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한다. 리듬의 첫째 요소인 변동성은 부드럽고, 생산적이며, 창조적이고, 진취적이다. 둘째 요소인 규칙성은 활동적이고, 뒷받침하며, 지배적이다. 이것은 또한 사물들의 더욱 진보한 상태 안에서 생산적이고 창조적이다. 그리고 지속된다. 셋째 요소는 비활동성, 쇠퇴, 파괴 그리고 죽음으로 인도한다. 신의 세 가지 측면을 가리키는 삼위일체(Trimurti)라는 개념은 힌두교인들에게는 삶의 주요 원리로 작용하는 이 세 가지 힘의 상징이다. 그들은 각기 창조자 브라마(Brahma), 유지자 비슈누(Vishnu), 파괴자 쉬바(Shiva)라고 불린다. 

 

- 모든 활동, 행위와 결과에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 활동은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결과들은 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경에는 이것에 관한 구절이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뒤에 빛이 나왔다." 이와 관련하여 코란에서도 "처음에 말이 나왔고, 그 뒤에 모든 것이 나타났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보이는 것으로 내려오는 모든 활동 안에서 이런저런 형태로 보인다. 모든 것의 준비 단계는 들을 수 있으며, 완료되면 보이게 된다. 바꿔 말하면, 소리의 세계로부터 형상들의 세계가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힌두교인들은 나다 브라마 즉 소리 신, 창조자라고 불렀다. 

 

- 모든 것은 소리의 힘, 진동의 힘에 의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모든 것은 그것의 한 부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사람은 같은 힘으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지식의 모든 측면 가운데 소리에 대한 지식이 으뜸이다. 왜냐하면 지식의 모든 측면이 형상을 아는 것에 의존하지만, 모든 형태 너머에 있는 소리에 대한 지식만은 예외이기 때문이다. 소리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사람은 창조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되며, 그러한 지식에 통달하면 형상 없는 존재로 상승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지식은 사람에게 날개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지상에서 천상으로 상승하도록 도우며, 그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다. 

 

- 드러난 세계 전체가 소리의 결과인 현상이므로 소리에 관한 지식은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소리에 관한 지식은 이름과 형상의 미로에서 안내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요기들이 만트라 요가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만트라 요가를 수피들은 디크르(dhikr;zikar)라고 부른다. 만약 디크르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며 어떤 목적으로 이용하는지를 알면, 디크르의 힘으로 이루지 못할 일은 없다. 소리 안에는 창조력이 있듯이 파괴적인 힘도 있다. 성경에 있는 "최후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짐" 같은 표현 역시 소리의 파괴적인 힘을 나타낸다. 

- 소리와 색은 하나이다. 그것들은 삶의 두 가지 측면이다. 삶과 빛은 하나이다. 삶은 빛이며, 빛은 삶이다. 또한 색은 소리이고, 소리는 색이다. 그러나 소리가 색인 곳에서는 대부분 볼 수 있고 거의 들을 수 없다. 반대로 색이 소리인 곳에서는 대부분 들을 수는 있으나 거의 볼 수 없다. 호흡의 과학을 연구하고 실천하면 소리와 색의 하나 됨을 발견할 수 있다. 수피와 모든 신비가들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창조의 본래 상태는 진동이며, 진동은 두 가지 형태 혹은 단계로 나타난다. 본래 상태에 있는 진동은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하지만 나타나는 첫 단계에서는 그것이 들리게 되고, 다음 단계는 보이게 된다.

 

- 음악가들은 7 음계를 고려하지만, 신비가들은 소리와 리듬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5개의 타트바(tatwa) 즉 원소들을 알았다. 신비가들에게 알려진 본래의 음계에는 5개의 숫자들이 있었고, 고대인들 사이에는 5가지 종류의 리듬과 더불어 5가지 음계가 있었다. 그들은 5가지 원소를 상징하기 위해 5가지 색깔을 사용했다. 

- 목소리는 사람의 특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의 표현이다. 목소리는 듣는 것이지만,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보인다. 목소리는 에테르 차원에 자국들을 남기는데, 그 자국들은 들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볼 수도 있다. 소리로 실험을 하고 소리의 자국들을 특정한 접시들에 형태들로 나타나게 하는 실험을 하고 있는 과학자들은, 언젠가는 목소리의 자국이 더욱 생생하고 더욱 깊고 더 큰 효과를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소리는 목소리보다 더 클 수 있지만 목소리보다 더 생생하지는 않다. 

- 이것을 안 고대 힌두인들은 음악의 세 분야 가운데 노래하는 것이 첫째 예술이고, 연주하는 것이 둘째 예술이며, 춤추는 것이 셋째 예술이라고 말했다. 음악의 이 세 가지 측면을 통하면 다른 방법을 통하는 것보다 더 빨리 영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힌두인들은 영적 숭고함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 목소리에는 주요한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제랄(jelal) 목소리, 제말 (gemal) 목소리, 케말(kemal) 목소리가 그것이다. 제랄 목소리는 힘을 가리키고, 제말 목소리는 아름다움을 가리키며, 케말 목소리는 지혜를 가리킨다.

-그리고 호흡이 이 형태를 통해 나타날 때 몸도 의식을 갖게 된다. 한 개인의 몸속에는 수많은 미세하고 작은 존재들이 피 속에, 뇌세포 속에, 피부 속에, 그리고 그의 모든 존재계 안에 감추어져 있다. 개인의 육체적인 존재 안에서 수많은 미생물들이 태어나고 자라듯이, 그의 정신적인 세계 안에도 많은 존재들이 있는데, 이것을 무와칼(muwakkal) 즉 원소의 정령들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인간의 생각에서 태어난 좀 더 미세한 존재들이며, 미생물들이 육체 안에서 살듯이 이 정령들은 정신적인 세계에서 산다. 사람들은 대체로 생각을 생명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생각들이 육체의 미생물보다 더 활동적이고, 탄생, 유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그리고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생각들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사람에게 유익하게나 불리하게 작용한다. 수피는 그것들을 창조하고 변화시키고 제어한다. 또한 평생에 걸쳐 그것들을 훈련시키고 다스린다. 그것들은 그의 군대를 이루며 그의 소망들을 성취한다. 미생물들이 사람의 육체적 존재를 구성하고 정령들이 그의 정신적인 삶을 이루듯이, 천사들은 그의 영적인 존재를 구성한다. 이들을 파리슈타(farishta)라고 부른다. 
 

- 진동들은 대개 길이와 폭을 가지며, 아주 짧은 순간만 지속될 수도 있고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 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 그것들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다양한 형태와 모양들, 색깔들을 만들고, 하나의 진동이 다른 진동을 창조하며, 그리하여 하나의 진동에서 무수히 많은 진동들이 생기게 된다. 이런 식으로 진동 집단들 밑에 다른 진동 집단들이 있고, 진동 집단들 위에 다른 진동 집단들이 있게 되며, 그 모든 것이 ...

 

- 사물들과 존재들이 다양하고 특성들도 제각기 다른 까닭에 이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름은 사물들과 존재들의 형태, 모양, 색, 크기, 성질, 양, 느낌과 감각의 그림을 만들어 낸다. 지각되고 이해될 수 있는 사물과 존재뿐 아니라 지각되거나 이해될 수 없는 것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름은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다. 이름 안에는 큰 비밀이 숨겨져 있으며, 사람의 이름이건 사물의 이름이건 이름은 그 대상의 과거, 현재, 미래 상태들과 관련하여 만들어져 있다. 올바른 천궁도 역시 한 사람의 상태들에 대해 당신에게 말해 준다. 

 

- 모든 신비는 이름 안에 숨겨져 있다.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은 먼저 그것의 이름을 아는 것에 있으며, 이름이 빠진 지식은 완전한 지식이 아니다. 다스림은 지식에 달려 있다.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다스릴 수 없다. 지상과 천상에서 나오는 모든 축복과 은혜는 다스림에 의해 얻어지며, 다스림은 지식에 좌우되고, 지식은 이름에 좌우된다. 사물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무지하며, 무지한 사람은 힘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타고난 지식의 범위 때문인데, 그것의 모든 신비는 사물과 존재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안에 있다. 이것은 인간이 지상의 어떤 생명체보다 더 우월한 이유일 뿐만 아니라, 천상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천사들보다도 더 뛰어난 이유이다. 

 

- 각각의 이름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를 예언자에게 드러낸다. 이름은 형태뿐 아니라 특성까지도 나타낸다. 이름의 의미는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름의 소리와 모음, 이름을 구성하는 글자들의 리듬, 숫자와 성질들, 신비적인 숫자들, 상징과 행성, 이름이 나온 근원과 그것이 낳는 효과, 이 모든 것은 그들의 비밀을 예언자에게 알려준다. 이름의 의미는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신비가들은 이름을 구성하는 글자들의 소리와 단어를 통해 그 사람의 성격과 운명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지성적인 사람은 대개 이름을 구성하는 글자들의 소리에서 그 소리가 아름다운지 추한지, 부드러운지 강한지, 조화로운지 조화롭지 않은지 등을 이해한다. 그러나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지는 모른다. 이해하는 사람은 안다. 
  
- 글자의 수는 사람의 이름에서 큰 역할을 한다. 짝수는 아름다움과 지혜를 나타내고, 홀수는 사랑과 힘을 나타낸다. 숫자는 삶에서 큰 역할을 하는데, 특히 이름에서 그렇다. 이름을 구성하는 각각의 글자는 숫자 값을 가지며, 동양의 과학에서는 이것을 자프르(jafr)라고 한다. 이러한 체계에 의해 건물, 사물과 사람에 시작과 끝의 기간을 알리는 이름이 붙여지며, 예언자들은 이 숫자의 조합을 통해 그것의 신비한 영향을 알게 된다. 
이름은 이름의 소유자뿐 아니라 그 환경에 심리적인 영향을 미친다. 숫자 값의 법칙에 따라 쓰인 정령들과 진(jinn)의 이름들, 신의 신성한 이름들, 예언자와 성자들의 거룩한 이름들은 삶에서의 다양한 목적을 이루는 데 마법적인 힘으로 작용하며, 숫자 형태로 쓰이거나 반복되는 이름들의 조합에 의해 경이로운 일들이 일어난다.

 

- 어느 차원의 세계에 존재하건 모든 형태는 친화력의 법칙에 따라 형성된다. 모든 원자들은 자기와 동일한 원소의 원자들을 끌어당기며, 모든 양 원자는 자기와 동일한 원소의 음 원자를 끌어당기고, 음원자는 양 원자를 끌어당긴다. 이러한 모든 끌림은 서로 다르고 독특하다. 이러한 원자들은 서로 결합하여 빛과 색을 형성한다. 현자들은 이러한 미세한 생명력의 형태와 모든 다양한 형태들을 본다. 정신적 세계의 형태들은 그 세계의 원자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것들은 마음의 눈에만 보이며, 상상이라고 불린다. 물질세계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더욱 구체적인 형태로 보일 수 있다. 

 

- 수피는 소리의 방향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며, 삶의 모든 것에 대해 안다. 내면에서 소리가 나타나는 존재의 모든 측면은 삶에 특유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진동들의 활동은 모든 방향에 독특한 효과를 미치기 때문이다. 소리의 신비를 아는 자는 모든 우주의 신비를 안다. 이 소리의 선율을 따른 자들은 누구든지 속세의 구별과 차이를 모두 잊고서 신의 모든 축복받은 이들이 합일하는 진리라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 공간은 몸 주위뿐 아니라 몸 안에도 있다. 달리 말하면, 몸은 공간 안에 있고 공간은 몸 안에 있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소리는 늘 인간의 내면과 주변에서 계속되고 있다. 보통 인간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의 의식이 물질적인 존재에 완전히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육체를 매개로 한 외부 세계의 경험들에 너무나 몰입되어 있어서 빛과 소리의 모든 경이로움으로 차 있는 공간은 그에게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이것은 색깔의 성질을 연구함으로써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 자체로 뚜렷이 구별되는 색깔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 색깔들은 더 밝은 다른 색깔들과 섞여도 모두 어두워진다. 심지어 밝은 색깔의 천이라도 금이나 은, 다이아몬드나 진주로 장식되면 단지 눈부신 장식품의 배경이 될 뿐이다. 추상적인 소리도 외부 세계의 소리와 비교되면 이와 같다. 

- 수백 년 전에 제랄우드딘 루미는 불과 물, 흙과 공기가 사람들에게는 사물이지만, 신에게는 그의 명령에 따라 일하는 살아 있는 존재들이라고 말했다. 루미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사물과 장소는 축음기의 음반과 같다는 것이다. 음반은 입력된 것을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발전 정도에 따라 그것을 영혼으로 듣거나 마음으로 듣는다. 사람들은 이제 신비력이라고 하는 것을 믿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이 말하는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하나의 사물이 가진 색깔이나 형태와는 별개로, 그 안에는 우리에게 말하는 어떤 것이 있다. 이것이 그 사물에 속하건, 그것을 이용한 사람에 속하건, 그것은 그 사물 안에 있다. 때때로 어떤 물건을 집 안으로 가져올 때, 그것을 들여오는 순간부터 다른 물건들이 부서지기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그 물건이 그곳에 있는 한, 늘 어떤 형태로든 손실이 있다. 그것은 그 집에 부조화를 가져올 수 있다. 하나의 물건이 질병을 가져올 수도 있고, 불운을 가져올 수도 있다. 

- 그러므로 사물로부터 오는 심리적인 영향을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아름답고 귀중해도 오래된 물건을 얻는 것을 자제한다. 그들은 새 물건을 사서 사용한다. 물론 보석에 대해서는 이렇게 할 수 없다. 보석은 오래된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석들이 사람과 그의 성격, 그의 삶, 그리고 그에게 일어나는 일들, 그의 환경에 그 어느 것보다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어떤 진주는 사는 순간부터 온갖 행운을 가져올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의 영향은 항상 같다. 그것은 계속 되풀이된다. 이 밖에도 입는 옷이나 몸에 걸치는 것도 그 사람의 건강이나 마음 상태, 감정 등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보석이라면 수천 년 동안의 음성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보석은 오래된 만큼 그 뒤에 수많은 전통이 있으며, 그것이 그 이유를 설명한다. 예민하며 잘 느끼는 직관적인 사람들은 오래된 돌의 진동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마치 진동들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 같다. 
 
- 이것은 다시 또 다른 생각의 영역으로 우리를 일깨우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교제, 즉 슬픈 사람이나 행복한 사람과의 교제, 바보 같은 사람이나 현명한 사람과의 교제, 고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과의 교제 등의 교제가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제하는 사람의 상태를 함께 나누게 됨으로써 그 상태로 함께 진동한다. 우리는 그 사람의 분위기, 표현, 생각,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진동이 표현하는 것을 웬만큼 알 수 있다.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행한 사람과 교제를 한다면 불행의 선율을 한 곡조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계속되며 교향곡 전체와 동떨어진 노래를 부른다. 그것은 특유의 음조를 가지고 있어 쉽게 구별될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과 교제하는 현명한 사람은 또 하나의 선율을 간직하게 된다. 그것은 그의 본래 노래와는 선율도 무척 다르고, 음조와 음역도 매우 다르다. 고귀한 마음을 가진 사람, 품성이 뛰어난 사람과 교제하는 사람에게서는 그의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경청하는 가슴에게는 뚜렷이 들릴 수 있는 두드러진 선율이 보일 것이다. 교제를 고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하다. 교제는 모든 것을 바꿔 놓을 수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에게 늘 긍정적인 것은 아니며,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늘 긍정적인 것도 아니다. 긍정적인 사람이 언제나 긍정적인 것도 아니다. 그에게도 변화를 위해 부정적으로 바뀌는 시기들이 있다. 그러므로 교제는 분명히 접촉에 의해 받게 되는 것을 전달하며, "사람을 보려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라."는 말에는 큰 지혜가 담겨 있다. 
 

- 동양에서는 이 점에 대해 특히 영적인 관점에서 많은 생각이 이루어졌다. 영적인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는 같은 길을 걷는 친구들과의 교제가 세상 어느 것보다 더 귀중하다. 그 교제로 인해 나머지 모든 것은 뒤따라온다. 그래서 교제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 어느 날 내 친구는 그녀의 남편이 그린 그림을 보여 주기 위해 나를 데려갔다. 그 그림들은 그 사람의 모든 역사를 말해 주었고, 그가 이미 겪은 고통들을 어떻게 하여 평생 되풀이했는지를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 그림의 소유자의 상태는 어떠하였는가? 오직 슬픔과 침울함뿐이었다. 시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인도 사회에는 시의 심리학이 있으며, 어떤 사람에게 시를 쓰도록 허용하기 전에 이것을 먼저 가르친다. 시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은 마음과 생각의 리듬과 음률뿐이 아니며,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을 세우는 것, 즉 어떤 것을 만들거나 망쳐 놓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는 때때로 시에서 찬미하는 대상이 되는 위인들에게 번영이나 쇠퇴를 가져오는 효과가 있다. 여기에는 과학이 있다. 시인은 그의 시에서 어떤 사람을 높이 칭송할 수 있지만, 그의 말들의 조합이나 그 뒤에 있는 생각은 해로울 수 있다. 그것은 찬미하는 대상에게 해를 끼칠 뿐 아니라, 때로는 대상이 되는 사람이 강하면 그 효과가 시인에게 되돌아가고, 그리하여 시인을 영원히 파괴할 수 있다. 

- 음악도 마찬가지다. 음악가가 일종의 마법적인 음악을 만들면서, 홍수가 밀려와서 도시 전체가 파괴되고 그 도시에 살던 사람이 모두 익사한다는 내용을 상상하는 것은 아주 좋은 생각처럼 보인다. 그런 상상은 그에게는 한동안 재미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자체의 영향력이 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예술이나 시, 음악, 또는 어떤 사람이 춤출 때 취하는 동작을 통해서 하나의 생각이나 느낌이 창조되며, 그것의 효과는 모든 행위의 결과라는 것이다. 예술은 말하자면 하나의 포장이다. 예술은 그 모든 면에서 살아 있는 어떤 것이며, 말하고 있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좋건 나쁘건 간에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 이 삶은 하나의 수용 시설이며, 그 안에서 한 번 태어난 모든 것, 모든 생각과 말, 행동, 느낌은 돌보아지고 자라나며 열매를 맺게 된다. 우리 대부분은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는 한때 뱉은 말은 가 버렸고, 한때 행해진 일은 끝나 버렸으며, 한때 느껴진 것은 이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변화일 뿐이며, 우리가 의식하는 것의 변화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알며, 그 뒤에 그것은 우리 앞에 더 이상 없다. 우리는 그것이 가 버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그것은 생명이기 때문에 여전히 남아있으며 자신의 진로를 찾아간다. 모든 것에는 생명이 있으며, 생명은 살아간다. 모든 것은 생명이므로 죽음이 없다. 

- 탄생과 죽음, 시작과 끝은 이 우주 전체가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다양한 측면들의 이름들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은 시작하는 것과 끝나는 것이라는 개념을 우리에게 주는 일종의 자동적인 작동이다. 우리가 종을 울릴 때, 그 행동은 짧은 순간밖에 걸리지 않지만 울리는 종소리는 지속된다. 그것은 들리는 동안은 우리의 인식에서 지속되고, 그 뒤에 더 멀리 나아가며 우리에게 들리지 않게 된다. 그래도 그것은 존재한다. 그 소리는 어딘가에 존재하며, 계속된다.

- 이러한 개념은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동,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 우리의 마음이나 가슴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느낌에 책임을 지게 만들지 않는가? 만약 우리가 우리의 활동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는지, 어떻게 그것을 우리의 행동과 함께 진전시키는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아서 그것으로 하여금 자기의 분위기를 만들게 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삶에서 낭비되는 순간은 없다. 우리의 책임이란! 우리 모두가 맡은 책임은 왕의 책임보다 더 크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왕국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왕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왕국보다도 작지 않으며, 지상에 있는 왕국들보다 비할 수 없이 크다. 이것은 우리에게 모든 행동에 책임감을 느끼며 사려 깊고 성실하도록 가르친다. 이렇게 느끼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모르며, 삶의 비밀을 모른다. 그는 시내를 걸어가는 주정뱅이처럼 살아갈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 이제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어떻게 생각이 살아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사는 것일까? 생각에도 몸과 마음, 호흡이 있을까?" 그렇다. 우리가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곧장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호흡은 자신이 기능할 수 있는 수용체, 즉 몸을 찾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생각은 하나의 몸과 같다. 근원에서 나오는 호흡은 태양에 비유할 수 있는 영의 광선과 같고, 생각을 실체로 만든다. 그것은 실체로서 살아 있다. 

- 수피 용어로 정령을 뜻하는 무와칼은 이런 존재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살아가며, 이루어야 할 어떤 목적이 있다. 그들은 사람에 의해 태어나며, 그들의 뒤에는 그들의 삶을 인도하는 목적이 있다. 한 사람이 잠깐 몰입하여 분노와 울분, 증오를 표현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해 보라! 그 순간에 표현된 말들은 살아야 하며, 그것의 목적을 달성해야만 한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주변에 적들의 군대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아마도 어떤 생각은 다른 생각들보다 더 오래 살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떤 몸이 그것에게 주어졌는지에 달려 있다. 몸이 튼튼할수록 더 오래 산다. 그 생각의 몸이 얼마나 강한지는 마음의 에너지에 달려 있다.

- 이제 의지의 힘이 무엇으로 만들어지는지를 알아보자. 시적인 단어로는 의지의 힘이 사랑이며, 형이상학적인 용어로는 사랑이 의지의 힘이다. 만약 누가 "신은 사랑이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실상 신이 의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의 사랑은 창조 뒤에 나타났지만, 신의 의지는 창조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love)의 가장 근원적인 측면은 의지(will)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I love to do it)."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는 그렇게 하겠다(I willto do it)."는 의미인데, 이것은 더욱 강한 표현이며,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다(I fully love to do it)."는 뜻이다. 

- 코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되어라(Be)'고 말하자 그렇게 되었다." 이것이 현상 세계의 열쇠다. 이것은 진행되고 있는 세계, 진보한 생각의 열쇠이며, 현상계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현상계는 "되어라, 그러자 그렇게 되었다."라는 말에서 스스로 표현된 그 '의지'에 대한 응답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물들의 기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전 존재, 현상계의 전체 과정에 속한다.

- 우리는 이 모든 창조를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메커니즘이 기술자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메커니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 메커니즘을 만든 기술자의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앞에 있는 기술자는 보지 않고 오직 메커니즘만 보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 메커니즘의 작동 법칙 안에 우리 자신을 가두어놓고서 이 모든 메커니즘이 돌아가게 하는 기술자는 잊어버린다.

 

- 위대한 사상가이며 철학자인 루미는 '마트나비'에서 이렇게 말했다. "흙, 물, 불, 공기는 우리에게는 사물들과 대상들로 보이지만, 신 앞에서는 살아 있는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신의 충직한 하인들이며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 우리는 그 의지의 일부를 신성한 유산으로 물려받았으며, 우리가 그 의지를 인식한다면 그 의지는 더욱 커진다. 우리가 그 의지를 인식하지 못하면, 그 의지는 작아진다. 그 의지를 발달시키는 것은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이다. 
 

- "이것이 '나의' 의자라면, 내가 나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은 나에게 속하지만, 그것들이 진짜 나 자신은 아니다." 그 뒤에 그는 또한 보기 시작한다. "나는 나 자신을 이 몸과 동일시하지만, 내가 나의 책상 또는 나의 의자라고 말하듯이 이것은 '나의' 몸일 뿐이다. 따라서 '나'라고 말하고 있는 존재는 실상 별개의 것이다. 그것은 이 몸을 사용하고 있는 어떤 무엇이다. 이 몸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몸이 내가 아니라면, 내가 나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어떤 것을 나 자신으로 동일시해야 한다는 것은 나의 상상일 뿐인가?" 하지만 그것조차 '나의' 상상, '나의' 생각, 혹은 '나의' 느낌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생각이나 상상, 느낌마저도 진정한 '나'가 아닌 것이다.'나'를 긍정하는 것은 그릇된 동일시를 발견한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 10세기 수피의 사상에 따르면, 거짓 자아가 소멸되어야 완성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거짓 자아는 진정한 자아에 속해 있지 않으며, 자아가 자기 존재라고 그릇되게 인식한 것이 거짓 자아이다. 삶을 잘 분석한 결과로 그것이 분리되면, 거짓 자아는 소멸된다. 이것을 위해 죽을 필요는 없다. 이 몸과 마음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분석하고 알아야만 한다. "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혼자서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인가? 만약 그것이 혼자서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라면 발견되어야만 한다." 모든 영적인 과정은 이것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일단 이것을 깨닫게 되면, 영적 여정은 완수된다. 눈이 자기를 보게 하려면 눈을 반사하여 보여 줄 거울을 만들어야 하듯이, 이 진정한 존재가 드러나게 하기 위해 이 몸과 마음은 거울로 만들어졌다. 이 진정한 존재는 이 거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고 자기 존재를 독립된 것으로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입문의 길에 의해, 명상의 길에 의해, 영적 지식에 의해 이루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완벽한 거울로 만들어 이것을 깨닫는 것이다. 

- 직관은 초감각이다. 그것은 여섯 번째 감각이라고 불릴 수 있으며 모든 감각의 본질이다.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감지했다고 할 때, 그것은 그렇다는 것을 증명할 객관적인 이유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외부적인 이유나 객관적인 표시 없이 그가 그것을 감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상과 별개인 직관은 더 깊은 본성에 속한다. 그것은 어떤 것을 시작하려 하기 전에 찾아오며, 그래서 그는 어떤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 결과를 감지한다. 직관은 때로는 내적인 안내자이며, 때로는 내면에서 나오는 경고이다. 

- 우리는 어떻게 직관을 지각하는가? 처음에는 느낌의 언어로 표현된다. 마음의 범위 안에 퍼져 있는 그런 느낌은 그 자체를 형성하며, 그것의 생각을 더욱 표현하게 된다. 그 뒤에 마음은 그것을 하나의 형태로 바꾸며, 그러면 언어는 그것을 해석해 준다. 따라서 직관은 느끼는 가슴에 속한다. 직관은 좀 더 분명해지고 식별될 수 있도록 세 가지 상태로 바뀐다. 즉 느낌으로, 상상으로 또는 말로 바뀌는 것이다. 첫 번째 전개 과정에 있는 직관의 음성까지 듣는 사람은 직관을 더욱더 지각할 수 있으며, 그는 직관적인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다. 다음 단계의 사람은 직관이 생각으로 표현될 때 식별한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의 사람은 직관이 말의 형태로 표현될 때만 식별할 수 있다. 직관적인 사람은 친절하고, 사랑이 넘치고, 가슴이 순수하며,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다. 직관은 학습과는 상관이 없다. 배우지 못한 사람이 박식한 사람보다 훨씬 더 직관적일 수 있다. 직관은 지식의 다른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다른 영역에서 나온다.

 

- 꿈은 또 하나의 경이이며, 마음의 놀라운 현상이다. 꿈속에서는 상상이나 생각뿐 아니라 직관도 작용한다. 깨어 있을 때 일어나는 직관은 꿈을 꾸고 있을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꿈을 꾸고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더욱 집중되고, 눈이 바깥세상에 대해 닫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꿈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다. 깊은 곳으로부터 직관이 올라오자마자 표면에서 상상이 일어나며, 우리는 어떤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수많은 꿈들이 혼란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꿈의 어떤 부분은 진실을 표현하고, 어떤 부분은 혼란스럽다. 

- 의미가 없는 꿈은 없다. 만약 꿈이 직관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모두 낮 동안에 행한 일들에서 마음이 경험한 것들의 자동적인 활동에 불과하다. 똑같은 활동이 눈앞에서 상영되는 영화처럼 자동적으로 계속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도 의미가 있다. 가슴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것은 어느 것도 마음의 커튼에 투사되지 않으며, 비슷한 꽃들을 피우고 열매들을 맺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직관이 두뇌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면, 꿈은 과거나 현재, 아니면 미래에 올 어떤 것을 얘기해 준다.

 

- 비전이라고 불리는 꿈들이 있다. 그런 꿈들은 반영들이다. 마음이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반영, 그들의 마음의 반영, 세계들의 반영, 차원들의 반영인 것이다. 만약 마음이 어떤 특정한 세계에 집중하고 있다면, 꿈은 그 세계에 관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다면, 그 자신의 생각들이 그에게 나타난다. 만약 마음이 어떤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면, 그 사람과 그의 내면이 꿈에 반영된다. 만약 마음이 특정한 존재 차원에 집중되어 있다면, 그 차원의 상태가 마음에 반영된다. 이 주제를 더 깊이 파고들수록, 꿈의 성질과 신비, 특성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며, 이런 이해를 통해서 삶 전체의 비밀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 직관적인 사람의 충동은 직관에 의해 안내되는 경우가 많지만, 직관이 부족한 사람의 충동은 다른 방향에서 온다. 그것은 표면에서 나올 수 있다. 직관에 의해 인도되는 충동은 바람직한 것이다. 충동은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지푸라기와 같다. 이 지푸라기는 뒤에서 밀려오는 물결에 밀릴 때 충동이 된다. 사람은 올바른 충동으로 신용을 얻고, 잘못된 충동으로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충동 뒤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주제에 대한 견해를 쉽게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 현대에 영적이고 물질적인 사람들이 둘 다 말의 힘을 깨닫는 때가 오고 있다. 예를 들면, 영적인 사람들과 물질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쿠에이즘(Coueism, 자기 암시 요법)이 이야기되고 있고, 그들은 말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는 신성한 말에는 대단한 중요성과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새로운 착상을 발견한 사람이라면 그 당시 자신이 최초 발견자라고 느낄 수 있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세계의 역사에 이미 그런 것이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솔로몬의 말을 깨닫고 믿게 된다. 

 

- 페르시아의 어느 위대한 시인은 신성한 이름의 반복이 그 신성한 존재에 신성함을 더하지는 않지만 자기 자신의 영혼을 신성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자기 암시와 반복의 가치,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심리학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것의 기초적인 측면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아직 닫혀 있는 거대한 소리와 신비의 세계가 있다. 그들은 하나의 단어나 어떤 것을 반복하는 것이 특정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 우리가 오늘날 세상에서 보는 모든 언어에는 그 모든 언어의 어머니 언어로 추정되는 중심적인 언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언어의 비밀이다. 그 언어를 어떠어떠하다고 구별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지만, 언어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처음에는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하나의 언어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많은 언어학자들은 그것이 산스크리트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산스크리트 전에 다른 언어가 있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역사학자들은 다른 견해들을 갖겠지만, 형이상학자들은 사람에게는 본래 하나의 언어가 있었고 여기에서 다른 언어들이 나왔다고 가르친다. 역사학자라면 어떤 언어를 첫 번째 언어로 지정해야 하겠지만, 형이상학자의 경우에는 이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에 하나의 언어만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고 알 뿐이다. 그들은 그 언어의 이름이 무엇인지 몰라도 개의치 않는다. 

- 어떤 것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희생을 해야 하며, 영적인 성취에서 우리가 진정한 자신으로 오는 것은 거짓된 자아의 희생을 통해서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두려워하며 말한다. "만약 우리 자신을 잃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얻겠는가? 그것은 단지 손해일뿐이다." 그것은 진정한 자신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잃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사람과 같다. 그는 그 꿈이 너무나 좋아서 만약에 누군가가 그를 깨우러 오면, "아니, 깨우지 마, 나를 자게 내버려 둬."라고 말한다. 그는 깨어나는 것이 또 다른 경험이라는 것을 잊는다. 그의 가장 큰 흥미는 꿈 안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들이 잃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라는 것을 잊는다. 

- 많은 사람들은 영적인 이상을 상상하며 두려워한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높은 산꼭대기에 서서 광활한 공간을 내려다보면서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까닭은 항상 좁은 시야만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넓게 펼쳐진 수평선은 그들에게 충격을 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 익숙해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자아를 잃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떠한 신성한 말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거짓된 자아의 개념을 점차적으로 잃게 되며, 동시에 진정한 자신의 개념을 표현하게 된다. 이 진정한 자신이라는 기반 위에 삶은 영원히 세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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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의 모든 형태, 완벽한 모양과 색깔을 갖추고 있는 꽃들, 행성과 별들, 지구 등등 이 모든 것은 조화와 음악에 대하여 인식하게 한다. 자연 전체가 숨을 쉬고 있다. 단지 살아 있는 생명체만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온 자연이 그렇게 하고 있다.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구별하는 것은 우리의 습성 때문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모든 사물과 모든 존재들이 하나의 완전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살아 있는 아름다움이 주는 삶의 상징은 바로 음악이다. 

- 무엇이 시인의 영혼을 춤추게 하는가? 음악이다. 무엇이 화가들에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게 하고, 음악가들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하는가? 그것은 아름다움이 주는 영감이다. 수피(sufi)는 이러한 아름다움을 사키(saqi), 즉 모두에게 생명의 포도주를 주는 신성한 '주는 자'라고 불렀다. 수피의 포도주는 무엇인가? 선과 색깔, 형태, 상상, 정취, 양식들 안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이다. 그는 이 모든 것 안에서 하나의 '아름다움'을 본다. 이 모든 다양한 형태들은 배후에 있는 생명이며 언제나 축복하고 있는 아름다움의 영의 일부이다.

 

우리가 음악에 이끌리는 까닭은 우리의 전 존재가 음악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마음, 우리의 몸,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우리를 만든 자연, 우리의 근원에 있고 주위에 있는 모든 것, 그것이 모두 음악인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음악에 가까이 있고, 음악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므로 음악은 우리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음악은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왜냐하면 음악은 우리 전존재의 메커니즘인 리듬 및 음조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드로잉, 그림, 조각, 건축, 조소 혹은 어떤 예술이건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 그리고 시에서 우리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것들의 배후에 있는 조화 즉 음악이다. 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음악이며, 시의 리듬 또는 생각과 구절의 조화가 그것이다. 

- 이밖에도 우리가 그림과 드로잉을 비롯한 예술 작품을 보면서 감탄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균형 감각과 조화 감각 때문이다. 자연에 가까이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자연의 음악이며, 자연의 음악은 예술의 음악보다 더욱 완전하다. 숲 속을 거닐고, 초원을 바라보고, 자기의 리듬과 음조와 화음을 가지고 흐르고 있는 물가에 서 있으면 스스로 고양되는 것을 느낀다.

 

- 만약 당신이 꽃, 꽃, 꽃 하고 반복하여 말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꽃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수피들이 신에 대해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이름을 반복하여 암송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99가지 신의 이름을 반복하여 암송하는 수피들이 있다. 와지파(wazifa)가 있고, 나마즈(namaz)가 있다. 즉, 신의 이름을 반복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이다. 그 효과는 그 소리가 나오는 영혼과 가슴에 따라 다르다. 비록 네 명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똑같은 곡을 똑같은 기간 동안 연습한 뒤 차례로 연주하더라도, 그들은 저마다 매우 다르게 연주할 것이다. 각자 자신의 음악적 기질, 자신의 가슴과 영혼에 따라 연주할 것이다. 그러므로 음악가는 가슴과 영혼이 잘 훈련되어야 한다. 

 

- 들을 수 있는 단계에 있는 그것은 베단타 용어로 소리를 뜻하는 단어인 나다(nada)-혹은 창조자인 소리, 창조의 영(靈)인 소리를 나타내는 나다 브라마라고 불린다. 다음 단계는 빛을 뜻하는 단어인 자타나다(jatanada)라고 한다. 그 빛의 다양한 정도 그리고 서로에 대한 그들의 대비가 다양한 색깔들을 낳는다. 색들은 빛의 다양한 명암들일 뿐이다. 그것들이 서로 대비될 때는 색이지만, 실제로는 그 빛이 모든 색을 만든다. 태양의 빛은 특정한 색을 갖고 있지 않지만, 식물들이 그 빛의 일부를 받아들이면 제각기 서로 다른 꽃의 색깔로 나타난다는 것이 이 점을 보여 준다. 

 

- 조화롭지 않은 색깔 역시 바람직하지 않은 효과를 준다. 이것은 바람직한 효과를 주는 것이 특정한 숫자나 소리가 아님을 보여 준다. 소리나 색깔, 숫자에 대해 잘 안다고 해도 자기 안에서 조화에 대한 감각이 향상되지 않으면 충분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감각이 향상되어야만 이것들의 조화로운 효과를 이해할 수 있다. 

 

-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이 색깔은 행운이 있고, 저 색깔은 행운이 없어. 이 숫자는 행운의 숫자고, 저 숫자는 불운의 숫자야." 그러나 행운이 있거나 불운한 것은 특정한 숫자나 색깔 자체가 아니라 상황의 조화 여부이다. 그 특정한 색깔과 숫자는 당신의 삶의 사건들과, 당신 자신의 성질과, 당신의 성숙 단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만약 당신의 삶과 조화롭다면, 그것들은 행운이 있고 조화로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조화롭지 못하고 불운하다. 이것은 그 특정한 색깔이 조화롭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이 조화로운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당신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소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소리의 힘은 색깔의 힘보다 훨씬 강하다. 왜 그런가? 소리는 인간 존재의 심연에서 나오며, 또한 인간 존재의 심연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만약 고통이 없다면, 기쁨이라는 경험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기쁨을 경험하도록 돕는 것은 고통이다. 모든 것은 그것의 반대편에 의해 식별된다. 고통을 깊게 느끼는 사람은 기쁨을 더 잘 경험할 수 있다. 만약 내게 개인적으로 물어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약 고통이 없다면, 삶은 내게 전혀 흥미롭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슴을 꿰뚫는 것은 고통이며, 고통의 느낌은 깊은 기쁨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었다면 위대한 존재들, 위대한 음악가들, 시인들, 공상가들, 사상가들은 그들이 도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며, 세상을 감동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항상 기쁨만 있었다면, 삶의 심연에 닿지 못했을 것이다. 고통은 무엇인가? 진정한 의미에서 고통은 가장 깊은 기쁨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상상을 한다면, 그는 희극보다는 비극을 더 즐길 수 있다. 희극은 어린아이를 위한 것이며 비극은 어른을 위한 것이다.  

 

- 영적인 성취의 길을 걷는 것은 국가가 아니다. 영적인 진보는 개인의 진보다. 모든 개인은 저마다 자신의 길이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개인에 대한 것이다. 

 

- 덜 발달된 사람의 경우, 영혼의 말없는 갈망이 그를 불쾌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든다. 그는 삶의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며, 다투고 싸우고 싶어 진다. 이와 달리 미묘하게 느끼는 사람의 경우에는 영혼의 배고픔이 우울함이나 절망으로 표현된다. 그는 독서나 예술에 대한 사랑에서 어느 정도 만족을 찾는다. 외부의 물질적인 세상 속에 빠져 있을 때 영혼은 매몰되었다고 느끼며, 미세한 진동들과 접촉하면 만족감과 살아 있음을 느낀다. 가장 미세한 물질은 영이며, 가장 거친 영은 물질이다. 가장 미세한 예술인 음악은 영혼이 다른 것들 위로 솟아오르도록 돕는다. 그것은 영혼들을 하나로 결합시킨다. 말조차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음악은 말 너머에 있다. 

- 인도 음악은 그 성질이 독특하다. 왜냐하면 모든 연주자나 가수는 그의 예술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표현하는 완벽한 자유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인도의 특성은 개인주의 정신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교육 전체가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어떠한 형태로든 그 자신을 표현한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유리하고 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지만, 그들은 이런 자유를 표현해 왔다. 획일성은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종종 예술적 발전을 저해한다. 삶에는 획일성과 개인주의라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획일성은 나름의 힘이 있고, 개인주의는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인도 음악의 가수나 연주가의 음악회에 가 보면, 그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은 하나의 화음을 낼 수 있도록 탐푸라(tampura)를 조율하는 것이다. 탐푸라를 조율하면서 그는 자신의 영혼도 조율한다. 

 

-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때때로 당신은 어떤 사람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짜증이 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어떤 말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 때문이다. 또한, 날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 누군가 한 어떤 말이 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아름다운 느낌을 선사하며, 언제나 진정시키고 치유하고 고양시키며 영감을 불어넣는다. 환자를 진찰하러 온 의사의 목소리가 조화롭지 않다면 환자를 겁먹게 하고 병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반면에 다른 의사는 목소리만으로도 환자를 치유할 수 있으며, 환자는 약을 복용하기도 전에 이미 좋아졌다고 느끼게 된다. 그 의사도 약을 준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환자에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인 것이다. 

 

- 신체적 차원 전체에서 지각되는 바와 같이 신체의 형태 안에 있는 생명은 산스크리트 어로 프라나라고 한다. 이 생명은 음식과 약에 의해 유지된다. 또는 몸은 더 건강한 상태에 있기 위해, 완벽한 건강을 경험하기 위해 어떤 음식이나 약에 의해 이 생명 자체 안에서 호흡할 수 있도록 준비된다. 허브와 식물, 꽃, 열매들이 자기와 동일한 원소를 우주로부터 끌어들이듯이, 호흡을 뜻하는 이 프라나는 우주로부터 모든 원소들을 끌어들인다. 이 모든 원소들은 호흡에 의해 이끌린다. 따라서 그리스나 페르시아, 인도의 위대한 신비가들에게는 영적 진보의 기초로서 호흡의 과학, 호흡의 문화가 있었으며, 모든 치유의 근원은 호흡의 과학이었다. 심지어 지금도 동양에서는 물이나 음식, 분위기를 끌어당기는 치료사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끌어당기는 힘의 비밀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들의 호흡에 있다. 그것은 물이나 음식 속에 있는 그들의 호흡의 영향력인 것이다.

 

- 인도의 종교인들은 신성한 사람이 병자에게 성찬과 같은 것을 주는 의식을 치른다. 그것은 병자에게 도움이 된다. 신성한 사람의 호흡의 힘은 아주 조화롭고 순수하며 발전되어 있어 모든 원소를, 허브와 꽃과 열매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모든 원소를 끌어당긴다. 그러므로 그의 호흡은 약보다 천 배나 더 많은 효능을 발휘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영적인 말을 중얼거리는 치료사들이 있다. 중얼거림이 무엇인가? 그것은 호흡이다. 호흡을 통해 인도되는 말을 동반한 호흡인 것이다.

 

- 진동들로 이루어진 현상계에서 행성들은 가장 원시적인 현상들이며, 각각의 행성들은 특유한 음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음은 하나의 행성을 대표하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탄생 행성에 따라 고유의 음을 가지며, 성장 단계에 따라 특정한 음조에 끌리는 것이다. 

- 모든 원소들은 고유의 소리를 갖는다. 미세한 원소 안에서는 소리의 파장이 확대되고, 거친 원소 안에서는 좁아진다. 그래서 전자에서는 분명하고 후자에서는 불분명하다.

- 흙은 그 소리의 다양함과 아름다움의 다양한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흙의 음역은 표면에 있고, 그 형태는 초승달 모양이며, 색깔은 노란색이다. 흙의 소리는 흐리고 둔하며, 몸에 전율과 활동 그리고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북이나 심벌즈 같은 타악기, 줄이나 동물의 내장으로 만든 모든 현악기는 흙의 소리를 대표한다.

- 물의 소리는 깊고, 모양은 뱀과 같으며, 색깔은 녹색이다. 바다에서 파도가 노호할 때 가장 잘 들을 수 있다. 흐르는 물소리, 계곡물소리, 보슬비 내리는 소리, 후두두 떨어지는 빗소리, 주전자에서 항아리로, 수도꼭지에서 물통으로, 물병에서 컵으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 이 모든 소리는 부드럽고 활발한 느낌이 있으며, 상상과 변덕, 꿈, 애정, 감정을 유발하는 성향이 있다. 잘라타랑(jalatarang)이라 불리는 악기는 원하는 음계에 비례하도록 물을 채운 도자기나 컵들을 조금씩 큰 순서로 일정하게 배열한 것이다. 물의 양이 많을수록 낮은음을 내고, 적을수록 높은음을 낸다. 이런 악기들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효과가 있다.

 

- 불의 소리는 높고, 형태는 말린 모양이며, 색깔은 붉은색이다. 그 소리는 벼락이 칠 때, 화산이 폭발할 때, 불길이 타오를 때, 폭죽이나 총 또는 대포를 쏠 때 나는 소리에서 들을 수 있다. 이 소리들은 모두 두려움을 유발시키는 경향이 있다.

- 공기의 소리는 너울거리고, 형태는 지그재그 모양이며, 색깔은 파란색이다. 그 소리는 폭풍 속에서, 바람이 불 때, 아침에 부는 산들바람의 속삭임 속에서 들린다. 그 효과는 부수고, 휩쓸며, 꿰뚫는 것이다. 공기의 소리는 나무와 황동, 대나무로 만든 모든 악기로 표현되는 소리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루미가 피리에 대하여 그의 '마트나비(Mathnavi)'에 쓴 것처럼 가슴에 불을 붙이는 경향이 있다. 크리슈나는 인도 미술에서 항상 피리를 들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공기의 소리는 살아 있으며 모든 면에서 무아경을 낳기 때문에 다른 모든 소리를 압도한다.

- 에테르의 소리는 스스로 완비되어 있으며, 모든 형태와 색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모든 소리의 기초이며, 저변에서 언제나 계속되는 배음(倍音)이다. 에테르의 악기는 인간의 몸이다. 왜냐하면 그 소리는 사람의 몸을 통해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모든 곳에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들리지 않는다. 인간이 물질적 속성으로부터 자기 몸을 정화하면 그 소리가 드러나게 된다. 인간의 몸은 내면의 모든 공간이 열리고 모든 기관과 혈관이 자유로워질 때 적당한 악기가 될 수 있다. 그러면 공간 안에 영원히 존재하는 그 소리가 내부적으로도 나타나게 된다. 무아경, 깨우침, 평온함, 용감함, 환희, 기쁨, 환희, 계시 등은 이 소리의 효과들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소리가 저절로 드러난다.

- 코란은 그것을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한다. "신이 천사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지상에 대리인을 둘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사들이 말했다. '신이시여, 저희가 신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동안, 지상에 악을 행하고 피를 흘리게 할 사람을 두시렵니까?' 이에 신이 대답했다. '진실로 너희가 모르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은 아담에게 만물의 이름을 가르쳐 준 뒤, 천사들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너희가 진리를 말한다면 이것들의 이름을 나에게 말해 보거라.' 그들이 대답했다. '신을 찬양합니다. 저희는 당신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밖에 모릅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현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이 말했다. '아담아, 그것들의 이름을 불러 보거라.' 그러자 아담이 가까이 와서 그것들의 이름들을 말하였다." 
 
- 언어 특히 이름은 사람의 계급과 가족, 국가, 민족의 특징을 보여준다. 모음은 이름과 그 이름이 갖는 영향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에(e)와 이(i)는 우아함, 지혜, 아름다움, 수용성 등 여성적인 성질인 제말을 나타내고, 오(o)와 우(u)는 힘과 표현 등 남성적인 성질인 제랄을 나타낸다. 아(a)는 이 두 가지 성질이 하나로 통합된 완전함을 의미하는 케말을 나타낸다. 이런 모음들은 이름을 지을 때 이름의 앞에 있는지, 중간에 있는지, 끝에 있는지에 따라서 다른 영향을 미친다. 

 

- 산스크리트로 운명을 카르마(karma)라고 하는데, 그것은 과거 행위의 리듬이라는 뜻이다. 이름에 암시된 리듬은 그 이름의 소유자뿐 아니라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리듬이 고르면 균형이 있고, 리듬이 고르지 않으면 균형이 없다. 아름다운 리듬은 그 사람의 품성을 아름답게 한다. 리듬이란 이름이 어떻게 시작하고 끝나는지, 고른지 고르지 않은지, 악센트가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를 의미한다. 악센트가 앞에 있는지 중간이나 끝에 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품성과 운명에 작용하는 효과가 다르다. 이름의 리듬은 삶에서 중요한 것, 즉 균형 및 균형의 결여를 암시한다. 균형의 결여는 품성에서 결핍된 것이며 인생에 역경을 초래한다. 

 

- 그러나 언어는 스스로 모순되지 않으며, 이 세 가지 모두는 빛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 하나의 빛의 이 세 가지 형태는 가톨릭의 삼위일체 교리와, 역시 삼위일체를 의미하며 가톨릭이 생기기 전 힌두교인들 사이에 수천 년 동안 존재했던 트리무르티(Trimurti) 교리의 배경이 되는 개념을 이룬다. 그것은 유일자의 세 가지 측면, 즉 셋인 유일자를 나타낸다. 

- 본질은 빛에서 원자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진동으로 존재한다. 사람은 자신이 보는 것은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보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느끼고, 보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물질이며, 모든 것의 근원이자 원인은 영이다. 보이지 않는 생명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과정을 공부하면 아마도 형태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진동의 미세한 파동들은 소리를 만들고, 거친 파동들은 빛을 만든다. 보이지 않고 인식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생명은 이런 방식으로 점차 알려지게 된다. 처음에는 들리게 되고, 다음에는 보이게 된다. 이것이 모든 생명의 기원이자 유일한 근원이다. 

- 따라서 태양은 눈에 보이는 첫 번째 형태이며,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형태의 기원이자 근원이다. 이런 까닭에 고대인들은 태양을 신으로 숭배했으며, 우리는 모든 종교의 기원을 그 어머니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샴즈 이 타브리즈의 말에서 이 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 "태양이 얼굴을 드러내자, 모든 세상의 얼굴들과 형태들이 나타났다. 태양의 아름다움은 그들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었고, 태양의 광채는 그들을 빛나게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태양의 빛으로 그것들을 보았고 알았으며,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 우주의 무수한 색깔들은 단지 빛의 다양한 정도와 명암일 뿐이다. 빛은 모든 원소들의 창조자이며, 태양과 달, 행성과 별들로 하늘을 더없이 아름답게 꾸몄고, 땅과 물을 만들었고, 낮은 차원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도 함께 만들었다. 어떤 부분은 밝고 어떤 부분은 어두웠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빛과 그림자라고 이름 붙였다. 태양, 달, 행성과 별들, 전기의 밝은 빛, 이보다 덜 밝은 가스, 램프, 촛불, 석탄과 나무의 빛, 이 모든 것은 태양이 다른 형태들로 다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태양은 모든 사물에 반사되는데, 흐릿한 자갈의 빛이건 다이아몬드의 반짝이는 빛이건, 사물들이 반사하는 빛은 그것들의 반사 능력에 따라 다르다. 이것은 빛이 모든 창조의 유일한 근원이며 원인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코란에서는 "신은 천상과 지상의 빛이시다."라고 하며, 성경의 창세기에는 "신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라고 쓰여 있다. 

 

- 종종 우리는 어떤 장소에서는 매우 고무되고 어떤 장소에서는 우울해지는 것을 느낀다. 어떤 곳에서는 혼란스러워지고, 또 어떤 곳에서는 둔감해진다. 그런 곳에서는 흥미로운 것도 없고 매력적인 것도 전혀 없다. 이것이 기후의 영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외부적으로는 무척 자연이 아름답고 기후가 훌륭하면서도 영감을 주지 못하는 곳들이 있다. 죽은 나라에서 예술가가 태어난다면, 그는 그곳에서 재능을 발전시킬 수 없다. 그곳에는 어떠한 자양분도 없으며, 그의 예술적인 욕구는 메말라 버릴 것이다. 심지어 식물조차 스스로 자랄 수 없다. 식물은 공기와 태양과 물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예언자가 그곳을 지나간다면 죽은 땅에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 

-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음식, 사탕, 음료, 과일 또는 꽃의 형태로 어떤 것을 줄 때 그것과 함께 자신의 생각, 느낌을 준다. 그것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동양의 수피들 사이에는 다른 사람에게 천 조각이나 꽃, 과일 또는 옥수수 알갱이들을 주는 관습이 있다. 여기에는 의미가 있다.

 

- 만약 바다에 던져진 작은 자갈 하나가 물을 움직이게 한다면, 이 파동은 바다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줄 것인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 자갈이 우리 앞에서 만들어 내는 물결과 원들이다. 우리는 그것밖에 볼 수 없지만, 바다에 생긴 파동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멀리까지 닿는다. 우리가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훨씬 더 미세한 세계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바다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가장 미세한 유동체이다. 우리가 그것을 땅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비옥한 땅이다. 이 땅은 모든 것을 그 안에 품고 키우고 기르고 자라게 한다. 우리의 눈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우리의 귀는 그것을 듣지 못한다.    

 

- 상습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모욕을 주고 욕설을 퍼부어서 아무도 그의 근처에 가까이 가려하지 않았다. 그렇게 욕설을 퍼붓는데도 어떤 남자가 용기 있게 그에게 다가갔다. 마드저브가 그에게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말했다. "저의 재판이 6일 뒤에 열립니다. 저는 돈도 없고 재산도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드저브가 대답했다. "나에게 그 상황을 말해라.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그래서 남자는 모든 상황을 사실대로 얘기했다. 마드저브는 그 말을 듣고서 땅바닥에 이렇게 적었다. "이 사건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따라서 기각되어야 한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가라, 다 되었다." 그 남자는 6일 후 재판정에 섰다. 원고측에는 많은 변호사들이 있었지만, 가난했던 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판사는 양쪽으로부터 그 사건에 대해 듣고서 마드저브가 땅에 쓴 것과 똑같이 말했다.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수가 한 말을 설명해 준다. "신의 왕국에 들어가라." 그것은 모든 영혼이 자기 안에 신의 왕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의 비밀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신의 왕국에 눈을 떠야 하며, 그러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의미와 영향력을 갖게 된다. 그것은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 그것은 영화(化)되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고, 여기 있는 어떤 것도 상실되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이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이 차원에 반영된다. 왜냐하면 두 차원 사이에는 언제나 작용과 반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 행하는 것이 이 차원에서 실현되지 않는다면, 다른 차원에서 이 차원으로 반영되고, 그 뒤에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해 왔지만, 그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지 시간과 상황이 아직 그것이 실현되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단 이것이 밖으로 나가면, 그것은 언젠가는 틀림없이 실현된다. 

 

- 각각의 색깔은 마음의 상태에 상응한다. 그것은 그 생각이 속해 있는 원소를 보여 준다. 그 생각은 불 원소에 속할 수도 있고, 물 원소 또는 흙 원소에 속할 수 있다. 이것은 생각 주위에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로서 색깔을 만들어 내는 것이 생각 뒤에 있는 느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통찰력 있는 사람들이 생각의 모습을 색깔의 형태로 볼 때, 그것은 그 생각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고 그 생각의 분위기이며, 이것은 그 생각에 속하는 원소에 따른다. 

- 세속적인 이득과 관련된 생각은 흙 원소에 속한다. 사랑과 애정의 생각은 물 원소를 나타내며, 이것은 연민을 퍼뜨린다. 복수와 파괴, 상처와 해악의 생각은 불을 나타낸다. 열정, 용기, 희망, 염원의 생각은 공기를 나타내며, 물러남과 고독, 고요함과 평화는 에테르를 나타낸다. 이것들은 다섯 가지 원소와 연관된 생각의 주된 성질들이다.

- 어떤 생각의 형태는 또한 그것의 영향이며, 한 사람의 표현과 모습에 대한 영향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생각은 읽을 수만 있다면 일종의 글자로 표현되는 특정한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언어는 한 사람의 얼굴과 모습에서 읽혀질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이것을 어느 정도까지 읽는다. 하지만 그 글자들을, 이 언어의 알파벳을 분명하게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생각의 언어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한 가지 비밀이 있는데, 그것은 진동이다. 그 진동들이 택하는 방향인 것이다. 하나의 생각은 사람의 모습과 주위에서 작용하며, 그의 존재 위에 나타나 보이게 된다. 그 작용을 주재하는 어떤 법칙이 있는데, 그 법칙은 방향의 법칙이다. 힘은 오른쪽이나 왼쪽, 위나 아래로 갈 수 있다. 그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생각의 진동들이 향하는 이러한 방향이다.

 

-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몸의 힘이 아니라 의지의 힘 때문이다. 몸을 유지하고 가게 하는 것은 의지의 힘이다. 그러므로 실상 새들은 날개로 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힘으로 난다. 물고기들은 몸으로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힘으로 헤엄친다. 사람이 헤엄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물고기처럼 헤엄친다. 

- 사람들은 의지의 힘에 의해 이제까지 굉장한 일들을 이룰 수 있었다. 성공과 실패는 의지의 현상들이다. 누군가에게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의지이며, 의지가 없다면 아무리 유능하고 지성적인 사람이라도 실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신의 힘이다. 마음과 함께 하면 의지의 작용이 더욱 커진다. 왜냐하면 생각을 유지할 의지의 힘이 없다면, 우리는 그 생각을 마음속에서 한순간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집중할 수없고 한순간도 생각을 고요히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에게 의지의 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생각을 유지하는 것은 의지이기 때문이다.

- 수피들은 체계적으로 의지의 힘을 계발한다. 처음에는 몸을 어떤 방식으로 훈련시킨다. 몸은 규정된 방식으로 앉아야 하고, 서 있도록 지시받은 곳에 서 있어야 한다. 몸은 지시받은 것에 의해 불안정하거나 피로하거나 지쳐서는 안 된다. 몸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야만 한다. 몸을 훈련시키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그 몸이 항상 얼마나 복종해 오지 않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면 그는 이제까지 이 몸을 나의 것' 또는 나 자신'이라고 불러왔고, 이 몸에게 편안함과 휴식과 양식을 주기 위해 다른 모든 것에 눈을 감으면서 이 몸의 안락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했건만, 이 몸은 몹시 신의가 없고 몹시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몸은 신체 운동을 통해서, 앉는 것, 서 있는 것, 걷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익숙하지 않지만 신체를 더 나아지게 하는 일들을 함으로써 훈련을 받는다. 

- 그 뒤에는 마음의 훈련을 시작한다. 이것은 집중을 통해 이루어진다. 마음이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당신이 마음으로 하여금 다른 한 가지에 대해 생각하기를 바라면, 마음은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마음은 한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은 훈련받지 않고 언제나 떠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당신이 훈련시키려 하자마자 마음은 야생마처럼 변한다. 사람들은 흔히 내게 말하기를, 집중하는 것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어렵다고 한다. 집중하려 하자마자 마음은 뛰어오르거나 움직인다고 한다. 그것은 마음이 하나의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다루기 힘들어진다. 마음은 마치 야생마처럼 "왜 내가 당신 때문에 불편을 겪어야 하는가?" 하고 느낀다. 동시에 이 마음은 복종하는 하인이 되기로 되어 있다. 이 몸은 삶을 경험하는 당신의 도구가 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몸과 마음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진정한 안락과 진정한 행복을 바랄 수 없다. 

 

- 집중은 명상의 시작이며, 명상은 집중의 끝이다. 명상은 집중의 발전된 형태이다. 마음의 미묘한 작용은 명상이라고 불린다. 명상은 집중보다 더 심오한 것이지만, 일단 집중이 완벽히 이루어지면 명상을 하기가 쉬워진다. 

- 직관적인 사람은 올바른 직관을 포착하는 데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직관은 한쪽에서 나오는 반면, 그의 마음은 반대편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그는 어떤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마음의 행위를 직관으로 착각하게 되면, 그는 즉시 실망하게 되며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자연히 그는 더 이상 직관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며, 그 능력은 매일 점점 감소한다. 직관을 포착하는 것은 가장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한순간에 두 가지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직관이, 다른 한편에서는 마음이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막대기 위에 중심을 잡아 다른 막대기를 올려놓고 위아래로 움직이면, 이 막대기의 어느 쪽 끝부분이 먼저 올라갔고 어느 쪽 끝부분이 나중에 올라갔는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음의 행위를 매우 예리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며, 그것은 집중의 완벽한 실천을 통해 얻어진다. 

- 우리는 자기 앞에 놓인 석판을 바라보듯이 마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어디도 바라보지 말고 오로지 자신의 내적 존재에만 마음을 고정시킬 수 있어야 한다. 집중력을 향상시키고 마음을 고요히 함으로써 우리는 직관을 지각하는 데 필요한 음역에 조율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직관을 지각하는 데 실패해 왔더라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계속하여 실수하더라도 직관을 따라야 한다. 만약 자신의 직관을 계속하여 따른다면, 그는 직관을 바르게 지각하게 될 것이다.

 

- 오늘날과 같은 삶에서는 돈 없이 살기가 힘들다는 것은 상당히 맞는 말이다.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영적인 것들조차 돈 없이는 할 수가 없다. 똑같은 강의를 하더라도 만약 강의실에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강의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신문에 광고를 내거나 광고물을 인쇄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오직 두세명 정도만 찾아와서 나의 강의를 들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는 비난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영적인 성취를 기다리는 사이에 허비된 모든 순간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손실이라는 것을 여전히 알 수 있다. 게다가 어떤 사람은 "언젠가는 내가 내 삶을 바꾸고, 더 높은 것, 더 영적인 것에 전념하는 날이 올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내일 그렇게 할 거야."라고 말하는 대신에 오늘, 바로 지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된다. 

- 삶은 흡수되고 있다. 시간은 흐른다. 시간은 사람들이 지나갔다는 것을 미처 깨닫기 전에 지나가 버린다. 시간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먼저 영적인 성취가 온다. 예수가 말한 대로 "신의 왕국을 먼저 찾아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 나는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영적인 성취는 물질적인 것들을 앗아가지 않는다. 단지 영적인 것을 가장 우선하기만 하면 된다. 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하여 세속적인 것들을 버릴 필요가 없으며, 물질세계의 관점에서 볼 때 좋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솔로몬은 대단히 부유했지만 여전히 현명했다. 

- 당신은 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만약 당신이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배가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 뒤에 영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 배가 언제 올지 그 누가 알겠는가? 언제이건 영적인 길을 따르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으며 너무 이른 때도 없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은 당신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시작하고 이 길의 모든 시험과 시련을 거쳐 가는 것이며, 일단 영적인 길을 가기 시작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 말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는 고대의 믿음이 있다. 이러한 믿음은 큰 신비를 낳았고, 그 신비는 오래된 문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존재한다. 지금까지 그들은 잃어버린 말을 찾고 있으며, 그 말을 찾으면 삶이 성취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신비화하려고 너무 애쓰는 바람에 결국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진실은 신비화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진실은 단순성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궁극적인 진실보다 더 단순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단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말에서 나왔고 말로 돌아가며, 모든 것은 자체의 존재 안에서 하나의 말이라는 것이다. 

- 여기에서 말이란 귀에만 들리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말은 당신에게 전달되는 모든 것, 계시로서 당신에게 다가오고 표현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 우리가 다양한 감각들과 자신에게 이해되는 모든 것을 통해 지각하는 것들이 바로 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에게 어떤 것을 전달하는 것은 삶의 임무이며, 삶이 당신에게 전달하는 모든 것은 말이다. 당신이 어떤 감각을 통해서 그것을 경험하든지, 어떤 감각을 통해서 그것이 당신에게 전달되든지, 그것은 말이다.

- 말이 의존하는 것은 미각, 청각, 시각, 후각, 촉각 등 오감만이 아니다. 그것들을 오감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우리가 그것들을 다섯 가지 다른 감각 기관들로 느끼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오직 하나의 감각만이 있다. 그 감각은 다섯 가지 외부 기관을 매개로 삶을 경험한다. 삶이 이 다섯 가지 다른 방향들로 경험되므로 삶의 경험은 다섯 가지 다른 경험들로 나뉜다. 왜냐하면 말 또는 삶은 우리에게 보이고 만져지고 들리게 되며, 냄새 맡아질 수 있고 맛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말을 듣는 데 익숙한 이 다섯 가지 측면 외에도 말을 듣는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 이것은 다섯 감각으로부터 독립적이며, 이러한 방식으로 말을 듣는 것을 직관적인 방식이라고 한다. 

-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왔을 때 당신은 그를 보거나 듣는 것만으로 그를 알아보았고, 그가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다고, 혹은 그에게 호의를 느끼거나 적대감을 느낀다고 말할 수 없다.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사람에게서 어떠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감각들 너머에 어떤 언어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며, 이 언어는 내부 감각이 어느 정도까지 열려 있으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더 많이 경험했고, 어떤 사람은 덜 경험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의식적이고 다른 사람은 무의식적이지만, 재앙이나 슬픔, 실패, 성공이 찾아오면 어떤 느낌이 온다. 물론, 부드러운 가슴을 가지고 있고 큰 연민과 사랑이 가슴속에서 일깨워진 사람은 이러한 감정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다. 감각에 의존하지 않으며 직관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느낌이다. 대체로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이런 느낌을 더 많이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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