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디팩 초프라] 디팩 초프라의 완전한 행복

일루젼 2022. 7. 2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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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디팩 초프라 / 이상춘

원제 : The ultimate happiness prescription : 7 keys to joy and enlightenment 
출판 : 한문화 
출간 : 2013.10.24 


       

얇지만 울림이 있는 책이었다. 일상적이고 담백한 설명들이지만 찬찬히 읽다보면 어떤 부분을 놓치고 있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 

 

이해한 바대로 실천하고 싶은데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앗 하면서도 정제되지 않은 반응이 튀어나올 때가 있어 고민이라고 몇 차례 말해왔는데 이 책에서 하나의 답을 얻었다. 행동을 고치려고 억제하는 것은 해답이 되지 못한다. 생각만으로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없다. 애써 노력을 하려할 것이 아니라 되고자 하는 바에 대한 순수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했다. 무형의 것을 유형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감정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행동을 통제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순간 일어나는 나의 감정을 빠르게 인식하고 바라보는 것이 필요했다. 나는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가를 생각하다보면 곧바로 반응하지 않을 여유가 생긴다.

 

완전한 실천을 이루었다고 느낄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이 되었다.

모두에게 기분 좋은 순간들이 찾아오길 바라며. 

 


   

우리에게 행복이 필요하듯, 
행복에게도 우리가 필요하다

 

- 나는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 번역을 하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물음이다. 일상에 쫓겨서 하루를 넘기는 데 급급하다 보면 한 달이 지나고, 그렇게 몇 번 지나면 또 일 년이 가고... 우리는 행복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간이라는 덫에 걸려 하루하루 끌려가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행복을 염두에 둔 선택을 무수히 하지만, 막상 내가 정말 행복한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다. 삶의 목표가 행복해지는 것이고 매일 행복해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막상 행복이 어떤 것인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 긍정심리학을 주도하는 핵심인물로는 소냐 루보머스키, 에드 디너, 마틴 셀리그먼 등이 있다. 이들은 연구결과를 통해 다음과 같은 행복방정식을 고안했는데, 이에 따르면 행복지수는 세 가지 요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H = S + C + V 

Happiness = Set Point + Conditions of Living + Voluntary Activities
행복 = 세트 포인트 + 삶의 조건 + 자발적인 행동

 

- 게다가 지나친 행운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스트레스 전문가들은 극도로 행복한 경험으로 인해 생성되는 스트레스를 '유스트레스 eustress' 라고 부르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절정 경험을 갈망한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스트레스와 유스트레스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 경우 모두 몸에서 같은 스트레스 반응이 나타난다. 만일 스트레스 대처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면, 좋은 경험을 할 때도 나쁜 경험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심장이나 내분비계, 신체기관이나 조직에 과도한 부담을 느끼게 된다.

 

- 비극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평상심을 회복하는 능력인 '정서 회복력'도 누가 더 오래 살 수 있느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 인생이라는 험난한 여정에서 비극적인 일들을 피해 갈 수는 없지만, 이에 대처하는 능력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소중한 특성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적응력이야말로 왜 삶의 조건이 행복지수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지를 설명해주는 설득력 있는 이유다. 

- 행복지수의 절반은 세 번째 요인인 V, 자발적인 행동이 좌우한다. 자발적인 행동이란 우리가 매일 행하는 크고 작은 선택을 말한다. 과연 어떤 선택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까. 연구결과, 일상의 자잘한 즐거움은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행복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지는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샴페인을 마시고, 성관계를 즐기고, 영화를 보는 등의 소소한 즐거움은 순간적으로 기분전환을 가져오지만 그 효과는 몇 시간이나 며칠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잠시의 달콤함은 아침이슬처럼 곧 사라진다. 반면 우리의 어떤 선택은 다른 사람의 행복이나 창조적인 사고를 촉진하면서 보다 깊은 내면의 행복감을 안긴다.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자신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며, 그 유효기간도 제법 길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또한 자신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다정한 다짐도 삶을 변화시키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 다행스럽게도 고통의 다섯 가지 요인과 모두 씨름할 필요는 없다. 언뜻 다른 듯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모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한다'라는 공통분모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면, 모든 고통은 한순간에 마무리될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약속임이 분명하지만, 사람들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세대가 그 비법을 발견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3,000년 이상을 기다려왔다. 그러나 이 탐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뤄야 할 개인적인 과업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관심을 보다 발전시켜 내면을 깊이 탐구하면, 참자아가 둥지를 튼 은둔처를 발견할 것이며 더불어 행복의 비밀도 풀릴 것이다. 

- 당신의 참자아는 사고나 지성, 자의식 너머 깊은 심연에 존재한다. 평화와 사랑, 충만함을 애타게 갈구하는 제한된 자아의 울타리 너머로 시야를 넓히면, 진정한 자아로 통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 우리는 누구나 우주의 근원적인 창조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다. 고대의 현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했다. "인간의 깊은 내면에는 작은 성전이 있고, 그 안에는 영원히 타오르는 작은 촛불이 있다. 그 성전의 문을 열고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게 할 수만 있다면, 의심과 분노, 두려움과 무지 같은 내면의 어둠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 많은 사람이 흔히 깨달음을 '고립'과 동일시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일상의 즐거움을 포기한 채 독야청청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을 느낀다. 만약 이들에게 굳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깨달음보다는 일상의 즐거움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참자아를 깨닫는 것은 세상과 격리되거나 일상의 행복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삶이라는 텃밭을 더욱 비옥하게 만들 저수지를 찾는 것이다. 

- 참자아에 접근하면 우리는 모든 존재를 하나로 연결하는 고리를 발견하게 된다. 참자아는 개인의 한계를 초월하여 존재한다. 즉, 존재는 개인이라는 한계를 넘어 확장되고 팽창한다. 이때 '개인의 한계를 초월한다(transpersonal)'라는 말은 종종 '개별성을 버린다'라는 뜻으로 오인되어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안기곤 한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다. 덕망 높은 인도의 한 영적 지도자는 깨달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의 사랑은 모닥불처럼 사방을 비춘다. 그 빛은 어느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도 않고 어느 한구석을 그냥 지나치지도 않는다."

 

- 참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깔린 프로그램이다. 일단 올바른 길로 들어서면 어떤 스트레스나 부담도 느끼지 않고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처음 걸음을 내딛을 때 품어야 할 작은 믿음뿐이다. 서구 문명에서 자란 우리는 '불행에서 영원히 벗어날 길은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다행히 스스로 이 경지에 도달할 능력을 갖고 있다. 일단 올바른 진리의 길을 발견하면, 그곳에 첫걸음을 딛기만 해도 마음을 짓누르던 고통이 가벼워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한순간에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획기적인 치유를 경험할 수도 있다.   

 

- 당신은 평소 사물이나 사람, 사건과 같은 외부 자극에 관심을 기울이며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사물과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을 보도록 노력하라. 지금 당신이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놓인 공간에 눈을 돌려라. 열린 장은 우리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곳, 생각과 생각 사이, 사물과 사물 사이, 호흡과 호흡 사이,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에 놓여있다. 그곳은 모두 같은 공간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은 의식이 다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의식을 부여하기만 하면,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던 공간은 가득 차고, 충만하고, 역동적인 곳으로 변할 것이다. 그곳은 순수한 에너지가 잠자고 있는 필드이며, 미래의 순간과 사물이 출현할 미지의 영역이다. 
 
- 공간은 언제나 고요하다. 따라서 당신이 공간에 관심을 기울이면 당신의 마음도 고요해진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그동안 쌓아두었던 긴장과 절망, 상처를 밖으로 내뿜기 시작한다. 그런 깊은 이완상태로 돌입하면 치유활동이 왕성해진다. 당신의 몸은 오랜 세월 쌓아두었던 감정과 기억, 상처를 내보낼 필요가 있다. 부정적인 과거의 찌꺼기를 일일이 확인하고 씨름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거듭하며 살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몸에 지나친 요구를 가하면서, 몸이 편안하게 이완되고 활짝 열릴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 있다. 

 

- "내 몸은 그렇게 억압돼 있지 않다"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확인할 손쉬운 방법이 있다. 조용한 곳에 편히 앉아 자기 몸에게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말해보라. 여러 가지 반응이 나타날 것이다. 깊은 한숨이 나거나, 갑자기 졸리거나, 여러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나거나, 예상하지 못한 신체적 반응(대개 불편하거나 경직된)이 나타나거나, 감정이 북받치거나, 눈물이 흐르거나,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몸 안에 치유의 공간이 필요하거나 변화를 원한다는 신호다. 하지만 당신의 몸이 자연스럽게 자기 치유가 이루어지는 편안한 상태에 있다면 정반대의 반응이 나타날 것이다. 깊은 평화와 안정감을 느끼거나, 가볍게 흥분되거나, 홀가분해지거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기쁨이 샘솟거나, 세상의 가면 너머로 얼핏 스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경이로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 행복은 애초부터 우리에게 속한 것이기에 우리가 행복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알게 될 때 진정한 행복은 더욱 가까워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이미지와 참모습을 혼동하곤 한다. 자기 이미지는 주로 외적인 요소에 따라 결정된다. 이 요소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건이나 상황, 물리적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돈은 거의 절대적인 잣대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해진다고 믿으며 무작정 돈을 쫓는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이야기를 누누이 들었는데도 끝내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얼마나 돈을 많이 벌고, 얼마나 좋은 직업을 갖고, 얼마나 값비싼 물건을 소유하느냐와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전문용어로 이를 대상 조회(object referral)라고 하는데, 외부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뜻이다. 

 

- 나는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나를 관찰한다. 나는 압박감이나 걱정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내면을 지켜본다. 나의 거짓 자아는 진정한 참모습의 경직된 형태이기 때문에 몸의 긴장감과 위축을 유도한다. 증상은 주로 가슴과 심장, 위, 명치, 어깨, 목 부위에서 나타난다. 거짓 자아가 상황을 해결하려고 노력할수록 나는 이들 부위에 불편을 느낀다. 그럴 경우 거짓 자아가 어떤 감정을 만드는지를 의식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거짓 자아가 하는 일을 가만히 관찰하기만 하면 나에게서 떼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나는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동기를 자문한다. 거짓 자아의 동기는 언제나 힘과 지배, 미래에 대한 보장이나 갈채에 집착한다. 반면에 참자아는 언제나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다. 나는 늘 선택 동기에 사랑이 많은지 욕심이 많은지를 의식함으로써 참자아로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 나는 밤마다 자기 전에 공정한 관찰자 입장에서 그날의 모든 사건을 관찰하고 정리한다. 나는 오 분 정도 시간을 투자해서 필름을 돌리듯이 하루 일과를 되돌려본다. 필름을 감상하는 동안 나는 거짓 자아가 한 일은 무엇이며 참자아가 행한 일은 무엇인지를 확인한다. 

 

- 의식을 통해 감정을 방출하라. 삶을 오염시키는 독소를 정화하는 당신만의 특별한 의식을 만들어라. 이로써 당신은 어떤 문화권에나 존재하는 초월적인 힘에 호소하는 것이다. 의식을 거치는 동안 당신은 그런 감정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해로운 감정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나중까지 기억에 남을 수 있고, 당신에게 의미 있는 특별한 의식을 고안해보라. 분노를 적은 종이를 강물에 던지면서 당신의 짐을 동정녀 마리아에게 대신 맡길 수도 있고, 슬픔을 적은 종이를 조약돌에 감아 바다에 던지는 방법도 있다. 어떤 의식이든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자유다"라고 외치며 속이 후련해질 수 있으면 된다. 이런 의식은 혼자 할 수도 있지만 당신의 해방을 인정하고, 필요할 때마다 그것을 일깨워줄 증인 앞에서 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 나는 몸속에 무언가를 들여보내기 전에 먼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확인한다. 몸에 좋은 것이란 정갈한 음식을 비롯해서 순수한 감정, 치유효과를 지닌 모든 것이다. 나는 변화라는 미명 아래 몸과 마음에 억지로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는다. 혹시 내가 해로운 무엇인가를 물질과 감정, 인간관계 등의 형태로 삶에 첨가할지라도, 그것에 맞서는 대신 근본적인 원인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 그 원인은 감정의 통제다. 

- 이 같은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당신은 점차 남을 비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지 않을수록 당신의 마음은 평온해질 것이다. 세상에 대한 이해심은 보다 깊어질 것이며, 의식은 보다 확장될 것이다. 당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과 공존하는 지혜도 얻게 될 것이다. 마음의 여유를 찾고 방어적인 태도를 버리면 규정, 낙인, 설명, 분석, 평가, 비판 등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모두 거짓 자아의 방어부대로, 논쟁이나 전쟁상황에서는 활개를 치지만 평화를 가져오는 데에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작아지면 세상의 슬픔과 분노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이런 감정은 누군가를 옳지 않다고 몰아갈 때 파생되는 결과물이다. 그르다는 낙인은 희생양을 만든다.

 

- 희생양은 비난의 대상이 되어 혹독한 불의와 부당함에 시달리는 한편, 낙인을 스스로 내면화하며 상처를 키운다. "내 삶은 고단해. 나는 상처투성이의 불쌍한 영혼이야. 나에게 이런 아픔을 준 사람들을 증오해. 불평은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었어." 희생양을 자처하는 행위는 자기 비난의 한 유형이다. 상처받았다는 핑계로 희생양 역할을 즐기면서 스스로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행위를 중단하라. 그것만으로도 분노와 적대감의 늪에 빠진 당신을 구원할 수 있다. 분노는 영혼으로 통하는 문을 닫아버린다. 분노하는 자신을 정당화하면 할수록 당신은 상처를 입힌 사람과 더 깊이 연결된다. 이런 연결고리가 당신의 발목을 붙잡아 영혼과의 거리를 점점 멀게 만든다. 심연을 들여다보지 말라. 그것은 해답을 주기보다는 더 깊은 심연으로 당신을 끌어들인다. 

 -  따라서 어떤 종류의 분노와 원망, 적대감도 여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분노는 행동하지 않는 자의 변명이다. 세상의 불의에 맞서고자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은 분노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똑똑하고 침착하며, 가치를 둔 일에 확고한 믿음을 보인다. 손댈 수 없는 과거와 바로잡을 수 있는 현재를 구별할 줄 안다. 분노를 합리화하고 싶을 때마다 "어떤 문제든 의식 차원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떠올리라. 의로움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은 분노에 불을 붙이고 보다 깊은 반목을 초래할 뿐이다. 무엇보다 "문제가 해결되는 차원은 언제나 문제가 발생한 차원과 분리되어 있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법칙에 위배된다. 

 

- 중요한 것은 애써 노력하거나 고군분투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든, 그것이 당신을 현재의 순간으로 인도하여 '현존'의 경험을 일깨울 것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거룩한 사람과 가까이하는 것만으로도 지극한 단순하게 거룩함을 경험할 것이다. 이는 '함께 존재함'에서 비롯된다.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평온과 사랑, 기쁨, 안정 같은 감정을 누리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런 경험을 놓치곤 한다. 어떤 생각이나 감각이 떠오르자마자 그것을 평가하거나 분석하려고 무턱대고 덤빈다. 그럴 때마다 현재라는 순간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잡다한 생각이 차지하게 된다. 

 

- 현재에 존재하는 것과 현존을 경험하는 것은 같은 뜻이다. 둘 중 어느 쪽도 별다른 노력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존재하고자 어떤 노력도 할 수 없으며, 그저 존재할 뿐이다. 당신이 마음 챙김을 익히면, '행복한 존재함을 가능하게 하는 자질'이 평생 당신과 함께 할 것이다. 당신은 마음이 산만해질 때마다 산만해졌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만으로 현재로 돌아올 수 있다. 마음 챙김은 마음을 비우는 것과 무관하며 무언가를 점검하는 것도 아니다. 지나친 집중이나 긴장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것은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런 상태로써, 당신의 본질보다 더 편안한 상태는 없다. 당신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행위를 관찰하고 그것을 떠나보내는 것만으로 간단하게 본질로 들어갈 수 있다. "쉽게 오는 것은 쉽게 간다"라는 속담은 참으로 심오한 영적 의미를 갖는다. 오가는 것은 진정한 당신이 아니다. 진정한 당신은 시간의 덫을 넘어 존재하는 희열이다. 
 

- 당신의 삶이 왠지 모르게 삐걱거린다고 느낄 때, 당신은 외부환경이나 인간관계 중에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상황을 최대한 좋게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지극히 피상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다. 그것이 발생한 근원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는 시도가 스트레스를 높이고 상황을 되레 악화시킬 수 있다. 진정한 해결책은 내부와 외부의 현실을 함께 바꾸는 것이다. 의식은 모든 곳에 침투해서 존재, 감정, 사고, 행동 등 근원적인 네 가지 차원의 변화를 창조한다. 

 

- 아이에게는 자연스러움과 경이로움, 즐거움, 쾌활함이 있다. 당신이 이런 수준의 의식을 지니면, 당신의 생각이나 행동은 자연스럽게 그 자질을 반영한다. 순수함은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있는 어떤 특성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비어 있는 것도 아니다. 고요하게 정지된 상태에서만 우리는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기저 상태에 접근할 수 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것을 '정돈된 순수함'이라고 표현했다. 순수함이 삶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힘을 지녔다는 뜻이다. 이런 순수함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은 무엇이든 창조할 능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자연법칙은 우리가 '의도의 힘'을 발휘해 부를 때마다 언제든지 달려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 의식은 개인의 정체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순수함의 차원에서 살아가는 삶은 보다 깊은 가치를 맛본다. 다음은 동양의 지혜가 인간 존재와 가장 조화를 이루는 덕목으로 꼽은 네 가지 가치다. 모두가 최고 수준의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 사랑이 담긴 친절함 / 동정심 /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하는 마음 / 침착함, 평화로움 ]

 

- 우리는 모두 이런 자질을 갖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한 인간이 최고 수준의 사고를 이룰 때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감정이다. 고차원적인 사고는 감정의 바탕 위에서 완성된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온갖 자비롭고, 친절하고, 평화로운 생각을 떠올리지만, 실제 모습은 아직 거기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런 생각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세계에는 여전히 삭막한 모습만이 반영된다. 그러나 당신의 사고가 깊은 심연에서 솟아난 순수한 감정과 결합할 때, 그 결과물로서 세상을 향한 당신의 행동은 충만함으로 가득할 것이다. 

 

- 사고의 최종 결과물은 행동이다. 어느 누구도 갈등, 스트레스, 불안, 우유부단, 의심에서 벗어난 행동이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올바른 행동을 방해하는 정신적 장애물이라는 것만큼은 알고 있다. 최고 수준의 행동의 의미는 명확하다. 그것은 개체를 초월하는 차원에서 행해진다.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당신의 가족부터 온 세상까지, 주변의 모든 것에 유익함을 건넨다. 만약 당신이 인류에 도움이 되는 존재이고자 한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순수함에 뿌리내린 행동을 하는 것이다.
 

- 반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당신이 자유의지로 변화를 이끄는 일이다. 단순한 행복감을 추구하는 대신 보다 깊은 행복인 지복을 탐구하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깨달음에 따른 변화를 극단적이고, 생소하고,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깨달음에 대한 전통적인 지혜가 쇠락하고 그 자리를 잘못된 믿음이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 깨달음은 포기, 희생, 궁핍, 격리라는 단어와 동일시되고 있다. 

- 그러나 생각해보라. 어떻게 희생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거짓자아는 '눈앞에 보이는 모습 이외에 다른 자아는 없다'라는 생각을 심어주면서 위와 같은 오해를 이용해 당신을 조종하려 든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는 것은 당신의 몫이다. 마음을 집중하면 당신의 내면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할 수 있다. 관찰자는 거짓 자아가 무엇을 숨기려고 애쓰는지 알아챌 수 있으며, 내면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일상이 결코 충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의식의 메커니즘이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것만은 아니다. 당신은 일상생활에서 이것을 체험할 수 있다.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때, 당신의 내부와 외부세계는 이미 혼란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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