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손원평] 튜브

일루젼 2022. 7. 20. 12:08
728x90
반응형

저자 : 손원평
출판 : 창비 
출간 : 2022.07.22

이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당신이 가장 마지막으로 크게 변했던 건 언제입니까?"

 

매일매일의 비슷한 일상.

출근하고 퇴근하는, 아이를 데려가고 데려오는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나날들. 

그런데도 조금씩 나빠지는 상황과 아무 걱정 없이 해맑아 보이는 과거 어느 순간의 나. 

 

손원평의 신간 <튜브>는 겹겹이 밀려드는 파도에 휩쓸려 떠돌다 자기도 모르게 가라앉아가는 이들에게 가느다란 지푸라기를 보여준다. 당신이 잊고 있을 뿐, 누구에게나 지푸라기는 있다고. 그것 하나로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지푸라기를 모아 엮어 나가다 보면 튜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소설의 주인공인 김성곤 안드레아는 몇 차례나 거듭되는 사업 실패 끝에 이혼을 목전에 둔 중년 남성이다. 한때는 모든 걸 가진 것 같았던 때도 있었는데, 다 잘 될 것 같았는데, 지금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아득하기만 하다. 포기하지 말아라,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라, 변화해라 같은 입에 발린 소리는 항상 들어왔는데, 어쩐지 이번만큼은 뭔가 될 것도 같다. 아니, 이것 하나만은 해보고 싶다. 그러면 모든 게 좋아질 것만 같다. 

 

김성곤은 평범하고 흔하다. 유별난 정의로움을 가진 것도 아니고, 딱히 눈살을 찌푸릴 만큼 모나거나 악하지도 않다. 무색무취의 불행함을 견디고 있고, 그저 그런 미래가 예상되고 있다. 어쩌면, 그렇기에 누구나가 몰입할 수 있는 캐릭터일지도 모르겠다. 진석의 독백처럼, 측은하지만 딱히 나도 그보다 썩 나은 것 같지는 않아서 복잡해지게 되는 그런. 

 

이 책은 한 남자의 인생역전 성공 스토리는 아니다. 뭔가 바꿔보고 싶었고, 그래서 노력했고, 그 결과가 어렴풋한 형체로 보이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이 지점까지는 여러 번 도달해보았다. 뭔가를 시도해볼 때마다 단번에 포기하게 되지는 않는다. 조금쯤은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이래서 사람들이 하는구나 싶기도 하다가, 어떤 계기로 그것을 잠시 멈추게 되었을 때 진짜 시험을 마주한다. 한 번 깨진 루틴을 다시 이어가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들다. 익숙한 관성에 이끌려 '좋긴 했는데...'라고 그만두고 만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인가?

 

김성곤이 꾸었던 '지푸라기 프로젝트'의 꿈은 그 하나 하나는 지푸라기일지라도, 그것들이 모였을 때 만들어질 튜브를 상상한다. 나 혼자만의 의지로 어려울 때는 다른 이들의 응원에 힘입고, 그래서 한 발을 내딛은 뒤에는 나 역시 누군가의 한 발을 응원해주는 선순환. 

 

튜브는 파도로부터 건져 올려 하늘로 띄워주지는 않는다. 가라앉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파도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진정으로 꿈꾸어야 할 변화는 흔들림 자체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오고 가는 흐름의 변화를 매 순간 즐기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박신영에게서 김성곤의 미래를 보았다.         

 

 

 

 


   

 

- 더럽게 차갑군. 

그는 생각했다. 아주 기분 나쁜 차가움이야. 물맛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데도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강물에 몸을 던진다니. 자신도 그중 하나라는 사실을 잊은 채 김성곤 안드레아는 생각했다. 죽음 직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인 느낌이었다. 하긴. 김성곤은 생각을 고쳤다. 이건 현실이 맞았다. 아주 냉혹하고 더러운 기분이라는 점에서 이보다 더 현실적일 수 없었다. 폐로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어오는 물을 반사적으로 뱉어내며 김성곤 안드레아는 2년 전에 강 위에 서서 똑같은 결심을 했던 때를 떠올렸다. 차라리 그때 몸을 던졌더라면 지난 몇 년의 수고를 절약했을 텐데.

 

- 사실 뭔가를 나쁘게 바꾸는 건 아주 쉽다. 물에 검은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쉽고 빠르다. 어려운 건 뭔가를 좋게 바꾸는 거다. 이미 나빠져버린 인생을 바꾸는 건 결국 세상 전체를 바꾸는 것만큼이나 대단하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 삶도 그랬다. 인생에는 더러 반짝이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삶은 어둡고 차갑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려다보이는 강물은 삶이 종착할 장소로 딱 알맞았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이 노력과 행운의 결합이라 생각하겠죠.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항상 말하죠. 우린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요. 하지만 우린 변하지 않아요. 그냥 변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결코! 변하지 않아요. 어떻게 변할 건지 매번 찾아 헤매지만 결국은 결코, 전혀 변하지 않죠. 최근 당신이 겪은 일 중에 이건 정말 획기적인 변화였다고 자부할 만한 게 있나요? 아마도 많지는 않을 겁니다.

 

- 따분하고 흔해빠진 얘기였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을 주고, 스스로를 바보라고 생각하게 만들면서 너희들은 진정한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방식의 화법. 이미 성공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결과론적인 말들과 어쭙잖은 여유. 어차피 남들은 안 될 걸 알면서 헛된 꿈을 꾸게 하는 달콤한 사탕 같은 위로. 김성곤 안드레아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물론 김성곤에게도 그런 말들이 먹히던 때가 있었다. 그는 자기 계발서와 트렌드 분석 책을 탐독했으며 마음에 힘이 되는 영상이라면 무조건 클릭하고 구독했다. 김성곤은 영양제나 수액을 맞듯 일정하게 동기부여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았고 실제로 그런 것들은 잠깐이나마 그에게 불끈 힘을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그것들이 제시하는 바도 대부분 비슷해서 하나의 패턴으로 외울 수 있을 지경이었다. 꿈에 대한 집념을 형상화하고 이미 꿈을 이룬 것처럼 행동하라는 말들. 그런 마음의 다짐으로 소기의 성과를 이룬 듯 보이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늘 같았다. 

 

-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변한다니 말이 쉽지. 어디서부터 뭘 바꿔야 하는데? 미안하지만 제가 그것까지 말씀드릴 수는 없겠네요. 본인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설마, 그 정도 성찰도 없이 뭔가를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말이죠.
글렌 굴드가 목을 가다듬더니 둘째 손가락을 들어 화면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정말로, 진짜로 행동해야 해요. 언제까지요? 변할 때까지 말이죠. 세계가 변할 거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변할 수 있는 건 세계가 아닙니다. 당신은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어요. 그런 거짓말에 속지 마세요. 하나만 말씀드리죠. 당신은 오직 당신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모든 게 변할 때까지요. 

 
- 사실 무언가를 바꾸거나 개선하려는 시도가 처음은 아니었다. 김성곤은 동기부여 영상이나 자기 계발서에서 본 지침들을 여러 차례 따라 한 적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부터 개라거나 책상 정리부터 시작하라거나 윗몸일으키기를 딱 한 개만 해보라거나 새벽 네시에 일어나야 세상을 가질 수 있다는 조언들을 실제로 삶에 적용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심의 지속시간은 짧았고 그는 언제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김성곤일 뿐이었다. 

- 이불을 개자니 밤새 땀과 노폐물로 습해진 이불속에 세균이 많으므로 개지 말고 두라는 헬스 전문잡지의 기사가 핑곗거리로 떠올랐고, 책상 정리를 하고 나면 진이 빠져 업무를 시작할 수 없던 차에 우연히 '아인슈타인의 책상'을 검색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에 위안을 얻었다. 윗몸일으키기는 말 그대로 딱 한 개를 하고 나면 더 이상 할 생각이 들지 않았으며, 몇 차례 새벽 네시에 일어난 뒤에는 아무 소득도 없이 비몽사몽 깨 있다가 해가 뜨기 직전 다시 잠드는 바람에 오히려 하루 일정이 다 꼬였다. 다시 말해 그런 방법은 그에게 전혀 맞지 않았다.

- 마음가짐이나 결심처럼 막연한 것보다 실존하는 것, 그러니까 신체의 무언가를 먼저 바꾸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늘 해왔다. 하지만 그조차 김성곤에겐 멀게만 느껴지는 시도였다. 살아오면서 끊어놓고 가지 않은 헬스클럽 회원증만 다섯 장이 넘었고 운동이라는 단어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벌써 숨이 찼다. 괜스레 원대한 계획을 세워봤자 부질없는 작심삼일짜리 새해 계획처럼 될 게 뻔했다.

 

- 남들의 조언은 그에게 맞는 퍼즐 조각이 아니었다. 자신만의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했다. 

 

- 뭐든지 한 번에 한 가지씩만 하는 겁니다. 밥 먹을 땐 먹기만, 걸을 땐 걷기만, 일할 땐 일만. 그렇게 매 순간에 충실하게 되면 쓸데없는 감정 소모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 마지막으로 하나. 생각의 스위치는 끄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보세요. 우린 항상 무언가를 판단하느라 에너지도 감정도 너무 많이 쓰고 있잖습니까. 그러다 보면 자꾸만 소모적인 생각이 날아들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보거나 이해하지 못하게 돼요. 생각이란 건 자신만의 선글라스 같은 거니까요. 그러니까 생각의 스위치부터 꺼야 하죠. 그다음은 쉽습니다. 낙엽은 낙엽으로 보고 전봇대는 전봇대로 보는 겁니다. 빨간 건 빨갛게 노란 건 노랗게 받아들이면 되죠.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어요. 저기 가로등 보이죠. 무슨 색 같습니까. 



 

 

 

더보기

 

- 죽으려고 하는데 몸뚱이는 왜 몸부림을 칠까. 마치 어떻게 해서라도 살고 싶다는 듯이. 물론 그 생각들은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워져 갔다. 죽음을 향한 감각과 최후의 감정만 남았다.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웠다. 

 

- 그렇다면 사회적으로는 어떤가. 이런 사람을 떠올리면 된다. 매번 어떤 일을 호기롭게 벌이고 뒷수습은 남들이 하게 만드는 사람, 좋게 말하면 사업가 기질이 있으나 나쁘게 말하면 일단 호언장담으로 무장해, 진격해야 할 때 돌격하고 한발 물러서야 할 때 위로 껑충 뛰고 신중하게 지켜봐야 할 땐 누구보다도 빠르게 도망치는 사람. 그리고, 아니 그래서, 매우 애석하게도, 결과적으로는 한 번도 인생에서 큰 성공을 맛본 적이 없는 사람.  

 

- 가정으로 향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가족에게 하는 칭찬이 매우 인색한 사람. 자신은 칭찬이라 생각하고 던진 말이 상대에겐 칭찬으로 전달되지 않는 사람, 사소한 일에 핀잔을 주고 성이 나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제일 먼저 감정을 드러내는, 밖에서보다 조금 더 별로인 아버지이자 남편.

김성곤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 바에서 칵테일을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그 돈을 모아서 간 유럽 배낭여행에서도, 파란 바탕화면의 나우누리 게시판에서 밤새도록 RPG 게임의 시삽으로, 영화 퀴즈방, 일명 영퀴방의 죽돌이로 지내면서도 그는 늘 안드레아였다. 안드레아로 불릴 때면 김성곤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에 착 달라붙어 있던 삶에 한줄기 자유로운 바람이 불어 드는 것 같았다.

 

- 하지만 거듭된 재기에는 함정이 숨어 있었다. 김성곤에게는 핵심적인 반성이 없었다. 그는 실패에서 얻은 게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기필코, 어떻게 해서든, 이번에는 반드시, 같은 말로 스스로를 다잡고 채찍질했을 뿐 지긋이 반성하고 돌아보기에 김성곤은 너무 성급했다. 어디서 어떤 정보를 들으면 와다다 달려들었고 안되면 어쩐지 찜찜했다고 위안 섞인 변명을 둘러댔다. 

 

- 그러나 빛이 꺼진 것처럼 보이는 인생에도 기회가 다가와 문을 두드릴 때가 있다. 그 두드림은 너무 작고 은근해서 예민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놓치고 만다. 김성곤 안드레아의 경우 기회의 속삭임은 그날 한강에서 나와 서울역에서 들은 '변화'라는 단어였다. 수없이 들은, 흔하다 못해 귀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 발에 챌 만큼 평범한 단어는 그날 밤, 왜인지 족쇄처럼 그의 귀 안에 철썩 들러붙어 작은 뿌리를 내렸다. 

-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김성곤처럼 둔하고 불만투성이인 사람이 기회의 미세한 노크를 어떻게 감지할 수 있었을까. 그냥 우연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의 심연에서 김성곤 자신이 동시에 안드레아가 외치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 성곤은 웃통을 벗고 꿀벌 인형을 안은 채 다시 12년 전의 사진과 비슷한 포즈를 취했다. 비슷할 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시도했다. 눈 씻고 들여다보니 적어도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나이도 외모도, 안고 있는 대상도 애처로워졌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며 김성곤은 과거의 자신과 조금이라도 비슷해질까 싶어 등을 곧추세웠다. 사진 속 남자는 젊고 재산이 있었고 친절했으며 가족의 사랑을 받았다.  

 

- 그를 보자 복잡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약간 짠했지만 내면의 방어벽이 동정심을 막았다. 자신도 누굴 애처로워할 만한 여유가 없다는 자각이 일었다. 더구나 같은 구역에서 일하는 라이더라니, 진석에게 이 일은 지나가는 일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사장에겐 이게 사실상 마지막 직장이 아닐까. 더 나이가 들어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안쓰러웠고 불편했다. 

 

- 진석은 생각에 잠겼다. 이런 경우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솔직하게, 라는 말에 진짜 솔직하게 답해서 곤란해진 경우를 얼마나 많이 겪었던가. 숫기도 눈치도 없는 아싸의 서글픈 숙명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는 익숙한 함정에 빠져드는 중이었다. 이렇게 되받아치면서 말이다.

진짜 솔직하게요?

 

- 사실 의미 없이 지내는 걸로 따지면 진석도 할 말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진석은 매일매일 시간을 삭제하며, 현재를 잊은 듯 지내고 있었다. 물론 깊은 마음속에선 자신도 지금 같은 상태에 머물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난 뭘 하고 있지? 진석은 아주 오랜만에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떠올릴 때마다 절망감과 패배감이 몰려들었기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자동으로 피했던 질문이었다. 그는 불현듯 스친 생각을 지워버리듯 제로콜라를 들이켰다. 그리고 콜라의 따끔거리는 기포가 뺨 안쪽에 닿자마자 머릿속에 갑자기 전직 사장의 이름이 띵 하고 떠올랐다. 맞아. 김성곤 안드레아.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다니, 원래부터 이상한 사람이긴 했어. 진석은 생각했다. 

 

- 오랜만에, 살아 있다는 게 느껴졌다. 

 

- 저도 뭐든 시작해보려고요. 처음엔 사장님의 자세 교정이 우습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사진을 찍다 보니 작은 일도 그 자체를 목표 삼아 하시는 게 대단해 보여서... 

 

- 생각만 바꿔선 안 돼, 아빠.
아영이가 엄숙하게 말했다.
행동까지 바꿔야지.

 

- 다른 이들처럼 눈을 감고 있거나 하품을 하며 휴대전화를 보는 대신 남자는 화초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가식적인 행동으로 보이진 않았다. 성곤은 자신이 왜 그 남자를 바라봤는지 깨닫지 못한 채, 음식을 받으러 온 학원 선생에게 두툼한 비닐에 싸인 쌀국수 5인분을 건네고 돌아섰다. 언뜻 유리창 너머로 방금 그 남자가 사람 좋은 선한 얼굴로 면접장에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언뜻 보아도 태도에서 소탈함이 배어 나왔다. 저런 분위기는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  잠깐 한눈파는 사이 아이들이 위험해질 요소가 많이 보였다. 그러나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남자의 평화로운 태도는 여전했다. 그는 아이들을 침착하고도 빠르게 인솔했고, 눈이 네 개라도 달린 듯 대열을 이탈한 아이를 안전한 쪽으로 부드럽게 이끌었으며 도로 위를 아슬아슬하게 붕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기억해두겠어'라고 말하는 엄격한 상사를 연상시켰다. 성곤은 실망했다. 그는 남자에게서 피곤과 짜증 어린 얼굴을 기대했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누구나 지을 그런 표정 말이다. 

 

- 벌써 아이들의 마음을 얻은 모양인지 막 사춘기에 접어든 남자아이들조차 그에게 깍듯하게 인사했고 남자는 아이들의 존재가 끼니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부서지지 않을 단단한 미소였다. 성곤이 생각하기에 그런 미소는 그걸 가지고 태어난 사람만, 애초에 그런 성정을 타고난 사람만 지을 수 있었다. 

- 김성곤은 남자와 비슷한 사람을 삶에서 딱 두 명 알았다. 한 명은 어린 시절 성당에 새로 부임한 젊은 신부였고 다른 한 명은 중학교 때 자주 가던 분식집 사장님이었다. 그들은 세상이 어떤 고난을 선사해도 그저 미소로 품어 안았다. 그리고 그 선함 때문에 피해를 봤다.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젊은 신부는 여성 신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추문에 견디다 못해 본당을 떠나야 했고, 외상과 진상 손님에 늘 시달리면서도 넉넉한 인심을 잃지 않았던 분식집 사장은 믿었던 친구의 보증을 섰다가 결국 가게 문을 닫고 화병으로 앓아누웠다. 착하면 당하고 당하면 패배하고 패배하면 도태된다. 그게 김성곤 안드레아의 지론이었다. 그 생각을 품고 그는 남자를 다시 바라봤다. 저 사내도 그런 걸까. 그 어떤 과정을 겪고 또 겪다 보니 저 나이에 학원 버스를 몰며 아무런 욕심 없이 초연할 수 있는 건가. 성공의 상상과 관계없이 오늘도 남자의 얼굴은 마냥 따사롭기만 했다. 

 

- 그 장면을 본 김성곤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부아가 치밀었다. 저런 건 할 수 있는 사람만 하는 거잖아. 기질이 원래 저렇게 태어난 거라고.
 

- 제가 어떤 말씀을 해드리면 될까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말투는 날카로웠다. 헛소리할 거면 얼른 가 달라는 경고가 느껴지는, 안에 곧은 심지가 숨어 있어서 잘못하다가는 크게 다칠 것 같은, 정곡을 찌르는 기술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항상 해맑으시냐고요.

 

- 그녀들의 말투는 공통적으로 '네'라는 감탄형 어미로 끝났다. 구름이 양탄자 같네. 꽃이 빨갛네. 딱딱한 빵이 참 고소하기도 하네. 두 사람은 어떤 현상을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감각 그 자체로 서술했다. 

 

성곤의 발화는 주로 '대'와 '야'로 끝났다. 이게 돈이 된대. 이번엔 대박이 날 거야. 이 투자처가 정말 믿을 만하대. 꽃 한 송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조차 그의 머리는 그 꽃의 노랗거나 빨간 부분에서 추출한 어떤 성분인가가 투자가치가 있다는 말에만 반짝 반응했다. 사업가적 마인드에서는 필요한 관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효용과 쓸모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태도는 그에게서 점차 중요한 어떤 것들을 퇴화시켰다. 

 

- 김성곤 안드레아는 차츰 감탄하는 법, 놀라는 법, 사물과 세상을 목적 없이 지그시 바라보는 법을 잊어갔다. 그런 걸 잊은 사람에게서 진정한 미소나 여유 같은 게 우러나올 리가 없었다. 

 

- 성곤은 주름진, 엄격한 평생 많은 말을 나눠본 적 없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규칙을 위해 규칙 안에서 살아온 아버지. 그런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뭔가를 하나씩 끊었다. 가장 먼저 호루라기를 끊고 그 뒤 담배를 끊고, 술을 끊고, 말을 끊고, 마지막으로 생각을 끊었다.  

 

- 먹고 싶은 것들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 걷고 싶고, 뛰고 싶었다. 느끼라고 느껴서 무언가를 하라고 주어진 몸뚱이였다. 돌처럼 가만있지 말고 세상을 향해 얼른 뛰쳐나오라고 온몸의 세포들이 부르짖었다. 그렇게 김성곤은 48시간을 꼬박 버텼다. 잠과 꿈의 중간 상태를 오가며, 스스로가 만든 감옥에 자발적으로 갇힌 채. 그리고 드디어 해방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는 순간, 김성곤은 귀마개를 빼고 안대를 벗어던졌다. 눈이 부셨고 여기저기서 팡팡 터지는 소음이 불꽃놀이처럼 고막을 때렸다. 견디기 힘든 폭력처럼 한꺼번에 느껴지는 감각의 소용돌이가 충격적이었다. 김성곤은 용수철처럼 위로 튕겨 오르듯 벌떡 일어났다. 불과 이틀 동안 믿을 수 없을 만큼 뻣뻣해진 허리와 굳은 다리로 인해 엉거주춤했지만 말이다. 

 

- 두 발 위로 육중한 무게가 느껴졌다. 이렇게 무거운 몸을 지탱해준 다리와 발이 고맙고 대견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이틀이나 놓여 있던, 그래서 간간이 그의 코를 자극했던 사과를 급하게 집어 들었다. 색이 바래고 이미 푸석해져, 쥐자마자 손톱자국이 푹 패는 사과를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하고 따뜻한 즙이 입안을 적셨다. 이틀 만에 식도를 타고 내려온 음식물을 반기는 장기들이 꼬륵꾸륵 끼르륵 꺄르륵 함성을 질러댔다. 

- 김성곤은 숨을 몰아쉬며 거리로 나섰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움직임, 표정이 생생하게 시야를 메웠다. 뒤집어 들어 올린 손바닥 위로 태양의 열기가 느껴졌고 수많은 사람과 사물, 자연과 인공물의 냄새가 뒤섞인 바람이 뺨을 때리고 지나갔다. 세상은 다양하고 끊임없는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혼돈으로 가득 찬 어지러움의 다른 말은 살아있음과 움직임이었다. 김성곤은 군중에 섞여 이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의 폭풍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이런 총천연색의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는 걸까. 눈으로 본 걸 피부로, 귀로 들은 걸 발끝으로, 심장의 울림을 지구의 흔들림으로 느끼고 싶어서 말이다. 

 

- 성공이 꼭 대단한 결과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우린 성공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면 지레 겁을 먹게 되죠. 작은 한걸음을 내딛고 거기서부터 힘을 얻어 걸어가면 됩니다. 그 자체가 이미 성공일 수 있어요. 사실 여기까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제안하는 건, 함께하자는 겁니다. 어떤 인생이든 그 안엔 절망과 희망이 함께 깃들어 있고 작든 크든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게 도와줄 지푸라기를 잡고 싶어 하는 건 모두가 똑같아요. 하지만 어떤 지푸라기를 쥘 건지는 스스로 정해야 하죠. 누군가가 대신 쥐여주는 지푸라기는 잡아봤자 금세 가라앉을 테니까요. 이 프로젝트는 여러분이 스스로 만든 지푸라기에 바람을 넣어줄 겁니다. 지푸라기가 엄청나게 커다란 튜브가 될 때까지, 그래서 여러분이 당당하게 수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 말입니다. 

 

- 영감님이 큰 힌트를 주셨거든요. 그래서 감사하다고요. 
박실영은 더 묻지 않고 다행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엄격한 선생님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런데 하나만 더 얘기해드릴까요. 그럴 때 조심해야 됩니다. 
뭘요?
사람은 자꾸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거든요. 돌보다 더 단단하고 완고한 게 사람이죠. 바뀌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 원래 모습대로 되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왜, 그게 편하니까. 그 단계에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은 정말 드물죠. 그 시간까지 온전히 겪고 나서야 비로소 원래의 자기 자신에서 한 발자국쯤 나아간 사람이 되는 겁니다. 

-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박신영은 막 건물에서 나오기 시작한 아이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김성곤은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박신영에게 흥분한 마음을 표현한 것을 후회했다. 오늘만큼은 그저 기쁨에 취해 있고 싶었다. 

 

- 운명의 여신은 김성곤이 얼마나 버티나 시험하듯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김성곤은 아무렇지 않게 하루하루를 같은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조금씩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 끝이 언젠데요. 
알게 돼.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상황이 끝나든 네 마음이 끝나든, 둘 중 하나가 닥치게 돼 있으니까. 

 

- 되는 것부터. 너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중 되는 것부터, 운동이든 공부든, 책을 읽는 거든. 하다못해 나처럼 등을 펴는 게 됐든. 너 혼자 정해서 너 스스로 달성할 수 있는 것부터. 

 

- 어떤 복잡한 기분이 순간적으로 비친 헤드라이트처럼 김성곤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김성곤의 표정은 그 순간에도 변하지 않았다. 마냥 피로했다. 지금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고단함 뿐이었다. 

- 이 일련의 사건을 통해 성곤이 깨달은 건 삶의 불가해함과 고정성이었다. 행운이 사고처럼 다가와 누군가를 마취시키면 불행이 여기 내가 있다고 선언하며 닥쳤다. 행운이 수고했지, 애썼어라고 짧은 위로를 건네고 나면 불행이 그럼 이건 어때, 라며 단계와 강도를 높여 삶이라는 벽을 넘으려는 자들을 깊은 골짜기 아래로 떨어뜨렸다. 

 

- 그거 알아? 정말 어려운 건 힘든 상황에서도 어떤 태도를 지켜내는 거야. 난 당신이 그걸 해낸 줄 알고 응원했어. 정말 노력해서 결국 바뀌었다고 생각했지. 근데 당신은 허영에 빠져 자만한 거였고 나도 내가 믿고 싶은 대로 착각한 것뿐이었어. 잠깐은 모든 게 잘 돼간다고 생각했겠지. 상황 좋고 기분 좋을 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쉬워.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데 바쁘고 여유 없고 잘 안 풀리니까, 당신은 바로 예전의 당신으로 되돌아갔지. 그러니까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은 거야. 넌 끝까지 그냥 원래의 너 자신일 뿐이라고.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