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요네자와 호노부] 왕과 서커스

일루젼 2022. 7. 2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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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출판 : 엘릭시르 
출간 : 2016.06.27 


       

독서를 며칠 쉬었더니 읽는 감이 무뎌진 게 느껴진다. 당연한 듯이 이어서 읽을 때는 느끼지 못하는데, 잠깐 텀을 두었다가 읽으려고 하면 눈이 슬며시 헛돈다. 이럴 때는 약간 가벼운 소설로 눈을 푸는 게 좋다. 

 

'사람은 자신에게 익숙한 불행을 선택한다.'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 이 문장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힘들고 고단한 환경 속에서도, 좋은 결과가 보장되지 않은 변화보다는 익숙한 고통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괴롭지만, 지금은 적어도 예측이 가능하니까. 지금보다 더 나빠질지도 모르는 일은 피하고 싶으니까. 

 

대개 같은 가치라도 새롭게 얻는 이익보다 이미 가졌던 것을 잃는 손실을 더 크게 느낀다는 연구 결과도 봤었지만, 그것이 사람을 무기력에 길들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크게 하지 못했었다. 사람들은 '보장'된 결과를 따르고 싶어 한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사람은 떠나도 돈은 남는다 등은 일견 변화를 위해 투자하는 자신의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장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기저에서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나는 옳은 선택을 하는 사람'임을 보장받고 싶은 심리마저도 느껴진다. 결과가 기대와 다르다면 그건 '내 잘못'이 아닐 것이라는. 

 

그렇기에 판을 뒤엎는 변화는 대개 극단적인 곳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 시작이 자발적이지 않을 때, 타인으로부터 시작된 변화는 손쉽게 지옥이 되곤 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그것은 개개인에게 모두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답이 상대의 답이 아닐 수 있음을 아는 것, 그렇기에 최대한 넓고 멀리 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각자의 입장에서의 최선의 영역을 치열하게 찾아내는 것. 그 자체가 삶인 것일까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과연 이 과정이 지난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은, 즐겁고 경이로운 과정일 수가 있을까. 

 

체중 감소를 위한 절식은 신체의 입장에서 생존을 위협하는 기아가 될 수 있다. 체형의 변화라는 나의 목적이 감소되어야 할 지방층에게는 사형선고라는 상상까지 뻗어나가보면, 문득 하나의 가치가 다른 가치에 우선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아마도 여러 가치들에 관한 자신만의 우선순위를 '신념'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누구나가 하나쯤 가지는. '무엇을 하고자' 하느냐에 따라 '옳기도 그르기도' 한.

 

지구 상에는 다양한 종들과 천적 관계가 존재한다. 그 복잡한 관계들이 맺어내는 균형, 그것들이 '공존'하는 상태를 인간은 '생태계'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경이로움을 찬양하지만, 과연 그 '공존'은 영원한가? 개별적인 종의 생존보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여러 '종'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이 끝없는 지난함.

이것을 피할 수 없다면, 이 또 하나의 서커스를 가장 즐겁게 즐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즐겁게 읽었다. 

 

 


   

 - "미국인은 음식에 집착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건 편견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이 많지. 하지만 나는 달라. 뜨거운 건 뜨겁게 차가운 건 차갑게 먹고 싶어. 마치, 이 가게만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이틀 전에 이 나라에 왔지만 아직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구경을 못 했어." 
그 말을 들으며 스푼으로 수프를 떠서 하얀 채소를 입에 넣었다. 그제야 겨우 깨달았다. 이 채소는 무다. 적어도 무와 근접한 식감과 맛을 가진 무언가다. 네팔에서 무 수프를 먹게 될 줄은 몰랐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음식이 뜨겁든 차갑든 잘 모르고 그냥 넘어갈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어떤 일도 놓치고 싶지 않거든." 
그렇게 말하며 롭은 씨익 웃었다. 나는 가만히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침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롭은 내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지만 딱히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스푼을 쓰지만, 저 사람들은 손으로 먹고 있어. 이 나라에서는 그게 일반적인 것 같아." 
"그건 물론 알아. 언젠가 나도 도전해볼 생각이지만 지금은 아직 결심이 안 서."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약간 망설이다가 그릇에 조금 남은 수프 건더기를 손가락으로 집어 씹어 먹었다. 한번 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니이 채소는 이제 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만약 뜨거운 수프를 내놓으면 손님이 손가락을 데겠지. 뭘 먹어도 미지근하게 느껴진다면 분명 그게 이유일 거야." 
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행지에서 스쳐 지나가는 인간관계에서 그의 자그마한 발견은 '그러네' 하고 흘려들어도 될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이 가게에 데려와준 덕분에 아침 식사를 먹을 수 있었다. 내가 그의 견해에 다른 해석을 제시한 것은 그 보답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 잠자코 앉아 있을 때면 그는 사람들의 접근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입을 열자 금세 살가운 아저씨로 변했다. 그 변모는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온화하게 웃으며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돌렸다. 
"당신이 다치아라이 씨로군요."

 

- "왕족들은 매달 세 번째 금요일에 한자리에 모여요." 
어제는 6월 1일이었다. 어느 달력을 보아도 어제는 세 번째 금요일이 아니다. 차메리는 그 의문을 한발 먼저 풀어주었다. 
"말이 매달이지, 서력하고는 달라요. 네팔 달력... 비크람력으로 헤아리는 거지요. 어제는 비크람력으로 두 번째 달, 제트의 세 번째 금요일이었어요. 세 번째 금요일에는 왕족들이 모여서 식사를 함께 한다고 들었어요." 
"식사? 만찬회가 아니라?"
"왕족의 식사 만찬회처럼 호화롭겠지요. 하지만 제가 아는 건 단순히 식사를 한다는 것뿐이에요."
말하자면 가족 모임에 가까운 자리인 걸까? 그렇다면 타국 사람이 휘말렸을 우려는 적다.

 

- "황태자가 쏘았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바이 티카를 해준 여동생을 죽이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군요." 
"바이 티카?"
"아아. 이렇게."
남자는 자기 이마에 손가락 끝을 댔다.
"붉은색이나 노란색 가루로 표식을 하는 걸 티카라고 합니다. 바이 티카는 티하르 축제 마지막에 여성이 자기 오빠나 남동생에게 티카를 해주는 걸 말해요. 네팔 사람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의식입니다. 바이 티카를 해준 상대를 죽이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 네팔의 실권을 쥐고 있던 것은 왕이 아니라 재상가였다. 라나 가문이라는 일족이 재상을 세습하면서 중요한 직위도 차지했고, 왕가와 혼인을 거듭했다. 네팔 국기의 삼각형 두 개 중 하나는 왕가, 다른 하나는 라나 가문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 정도로 라나 가문의 영향력은 강했다. 마키노가 보내준 자료를 읽다 보니 에도 시대에 비유한다면 네팔 왕가는 천황 가문, 라나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에 가까울 것 같았다. 1951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라나 가문은 정치의 중추에서 밀려났다. 그 후 국왕의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이윽고 국민들은 민주화를 제창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것이 이번에 사망한 비렌드라였다.

 

- "기자가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봐도 되는 거야? 이거, 다른 사람이 이미 조사한 거잖아? 이런 거나 읽고 있어서야 앞지를 가망이 있겠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어렸을 때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찾아내는 게 '뉴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실은 취재할 수 없다. 누군가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건져내고 정리해서 전달하는 게 기자의 역할이다. 그리고 기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속도가 전부가 아니야.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는 사건이 발생한 당일에 소식을 전하지만, 신문은 반나절 늦지. 주간지라면 일주일, 월간지라면 한 달씩 늦을 때도 있어. 서두를 필요가 없는 만큼 충분히 조사해서 잘 만들어낸 기사를 쓰지. 난 그런 일을 하고 있어." 

 

- 사가르는 얕잡아보는 투로 웃더니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말은 멋지지만 결국 텔레비전은 못 당해낸다는 소리잖아?"
"분명 속도로는 당해낼 수 없어. 하지만 내가 하는 일도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야. 역할이 다를 뿐이지." 

 

- 네팔은 힌두교 국가다. 힌두교에서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모든 것은 윤회하며, 죽음은 끝이 아니다. 그렇기에 힌두교를 믿는 사람은 오히려 웃는 얼굴로 죽은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것이다. 그게 거짓말이었거나, 적어도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분명 왕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민주화 운동을 수용하고, 의회를 만들고, 신헌법을 공포한 왕의 예기치 못한 죽음을. 
탄식은 점점 커지고 왕의 관에 조화가 쏟아졌다. 왕이 죽는다는 게 이런 것일까? 

 

- 머리를 박박 민 남자가 보여 승려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치고는 수가 너무 많았다. 사가르에게 물어보니 당연하다는 듯이 조의를 표하는 거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옆모습은 태연해서, 어른들의 비탄을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너는 슬프지 않니? 그렇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슬픔은 개인의 감정이다. 

 

- 장례 행렬이 바그마티 강으로 다가갔다. 어제 사가르와 함께 왔던 장소다. 이곳에서 오늘은 국왕이 다비를 치른다. 시간대도 다르고,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수도 전혀 다르다. 하지만 강가에서 시신을 태우는 과정은 똑같다. 새삼 죽음의 공평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젠장! 이런 뉴스는 내 집 소파에서 봐야 하는데! 흥미진진한... 너무 가까워!" 
그는 이국적인 정서를 찾아 동양에 왔지만 살인 때문에 이 나라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사자를 보려고 동물원에 갔다가 사자 우리에 갇힌 기분일 것이다. 너무 가깝다는 말에는 그런 실감이 깃들어 있었다.

 

- 나는 롭의 상기된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이 사건을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일본의 독자들에게 보여줄 기사를 쓰려고 취재를 하고 있다. 지금 이곳에는 뉴스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있는 셈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독자는 과연 롭 같은 사람이었을까? 문득 깨달았다. 육 년이나 기자 생활을 했는데 어떤 사람이 내 기사를 읽고 기뻐하는지, 진정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지 않았나?

 

- 신문사에서 나온 뒤로 프리랜서로 먹고살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정 수입이 없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불안한 일이다. 회사에서 일하면 비록 내키지 않는 일을 한 달에도, 이렇다 할 실적 없이 통상 업무만 하면서 보낸 달에도 통장에 월급이 들어왔다. 그 무렵이 좋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때는 매달 내야 하는 월세가 발밑을 조금씩 좀먹어가는 오싹한 기분은 느끼지 않았다. 왕궁 사건의 진상을 특종으로 터뜨릴 수만 있다면 내 명성은 단숨에 올라간다. 십 년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륙 년은 일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책도 낼 수 있을지 모른다. 돈은 중요하다. 수입이 없으면 생활이 막막한 것은 물론이고, 내가 하는 일은 아무 가치도 없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 한편으로 나는 다른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이토록 과열되었으니 군중들 앞에서 사진을 찍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래도 카메라를 들고 몇 장 찍었다. 뒤통수만 나온 사진은 쓸모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찍은 이유는, 미련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 용기를 내기 위한 의식이 필요했다. 지금까지는 그런 건 필요하지 않았다. 취재 중에 위험을 느끼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장이나 열띤 취재 경쟁 속에서 취재 대상이 격앙하는 경우는 일상다반사였지만, 그것을 무섭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노성의 대상은 나라는 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는 혼자다. 이 계단을 내려가려면 뭔가가 필요했다. 
무엇을 위해 계단을 내려갈 것인가? 
어째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치아라이 마치가 이곳을 내려가야만 하는가?
"그게 내 일이니까..." 
그렇게 중얼거려보았다.
'앎'이란 고귀하고, 그것을 널리 알리는 일에도 긍지가 깃든다. 그렇게 믿기에 퇴직한 뒤에도 기자로 살아갈 결심을 한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나니까, 내가 해야만 한다. 

그것뿐?

오싹한 한기가 발밑에서, 지금 바라보고 있는 지하에서 덮쳐왔다. 눈을 감고 두어 번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온몸을 뒤덮었던 한기는 사라졌다. 방금 이 감각은 무엇이었을까? 

 

- "즉 당신은 진실을 위해, 이유도 모른 채로 쫓겨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거로군."
대답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듣는 것이 진실과 중요한 상관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방금 세상을 방패 삼아 나를 정당화하려 했다. 이번에는 진실을 방패로 삼을 수 없다. 준위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 이 나라에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진실이 그 도움에 유효하다고도 가정해보지. 하지만 왜 당신이어야 하지? 차메리에게 듣자 하니 당신은 일본인이라면서?" 
"그렇습니다."

"당신이 내 이야기를 듣고 그걸 글로 쓴다면, 일본인이 네팔 왕실에, 이 나라 자체에 가질 이미지를 혼자서 결정하는 입장에 선다는 뜻이 돼. 아무 자격도 없고, 어떤 선택도 받지 못했지만, 덜렁 카메라를 들고 여기에 왔다는 이유만으로. 다치아라이,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목소리가 메아리쳤다가 사라졌다. 계단 위에서 망설였던 대로 클럽 재스민은 위험했다. 하지만 그 위험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그는 내가 믿어온 가치관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 

 

- "분명 신념을 가진 자는 아름다워. 믿는 길에 몸을 던지는 이의 삶은 처연하지. 하지만 도둑에게는 도둑의 신념이, 사기꾼에게는 사기꾼의 신념이 있다. 신념을 갖는 것과 그것이 옳고 그름은 별개야." 
나는 또다시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맞는 말이다. 신념을 갖고,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뱉어내는 거짓말은 나도 몇 번이나 들어왔건만. 
"당신 신념의 본질은 뭐지? 당신이 진실을 전하는 이라면 무엇을 위해 전하고자 하는지 알려줘."

- 나는 여태껏 보도의 이유를 깊이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일부러 그래 왔다.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손을, 발을 움직이는 게 프로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묻는다. 생각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이유로,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를 묻고 있다. 

 - "자기가 처할 일 없는 참극은 더없이 자극적인 오락이야.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 끔찍한 영상을 보거나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말하겠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그런 오락인 거야. 그걸 알고 있었는데도 나는 이미 실수를 저질렀다. 되풀이할 생각은 없어." 
오락이라는 말이 가슴을 도려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오락거리로 기사를 써왔던 건 아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쪽은? 정보는 거센 물살이다. 일일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령 내가 왕족들의 시체 사진을 제공하면 당신의 독자들은 충격을 받겠지. '끔찍한 일이야'라고 말하며 다음 페이지를 넘기겠지. 더 충격적인 사진은 없는지 확인하려고." 
그건 그럴 것이다. 
"혹은 영화로 만들지도 몰라. 그럭저럭 볼만하면 두 시간 뒤에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비극을 동정하겠지. 하지만 그건 진실로 슬퍼하는 게 아니라 비극을 소비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나? 질리기 전에 다음 비극을 공급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라제스와르는 나를 손가락질했다.
"다치아라이, 당신은 서커스의 단장이야. 당신이 쓰는 글은 서커스의 쇼야. 우리 왕의 죽음은 최고의 메인이벤트겠지.” 

 

- 집어 말할 수 없이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야쓰다는 자기가 걸친 가사를 굽어보며 중얼거렸다. 
"아아, 뭔가 했더니. 역시 기자의 눈은 예리하군요. 다르다는 걸 알아차리셨습니까?" 
"느낌만이지만요."
야쓰다는 가사 자락을 살짝 흔들었다.
"평소 입던 가사가 맞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걸쳤을 뿐이죠. 몸에 두르는 건 똑같지만, 이쪽이 조금 더 방법이 복잡해요. 오랜만에 해봤는데 한번 배운 기술이라 그런지 몸이 기억하더군요." 
"이쪽이 정식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컵을 어루만졌다.
"미약하지만 제 나름의 조의입니다."
왕의 죽음에 당황하고 혼란에 빠진 카트만두에서 일본인이 굳이 가사를 매만져 조의를 표한다는 사실에 왠지 엄숙함을 느꼈다. 


- 어째서 나는 전달하는 걸까? 
내 일은 알아내는 일과 퍼뜨리는 일로 이루어진다. 그중 알아내는 일은 바로 내가 알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반하장일지도 모르지만 그럼 어떠랴 싶었다. 하지만 퍼뜨리는 일은 또 다른 문제다. 

- 나는 정보를 선별한다. 어떤 매체는 무한한 시간과 지면을 가진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을 쓴다는 것은 동시에 어떤 것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느 곳의 누군가가 궁금해 바라 마지않는 것을 쓰지 않을 때도 있다. 물론 어딘가의 누군가가 더는 퍼뜨리지 말길 바라는 이야기를 쓸 때도 있을 것이다. 소문을 좋아하는 악의 없고 무책임한 사람들처럼. 

- 궁금하다는 생각은 이기적일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일말의 고귀함이 있다고 믿는다. 그저 궁금하다는 이유로 일심불란하게 무엇을 조사하고 배우는 사람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퍼뜨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걸까? 

 

- 경제적인 이유... 그것도 물론 있다. 큰 부분이다. 방송권료, 원고료, 그리고 광고 수입도, 누군가가 뭔가를 퍼뜨림으로써 발생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슬픔을 그저 그것이 돈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조사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인 동기만으로 잊어주길 바라는 가만히 내버려 두길 바라는 바람을 무시해왔던 것은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은 타인의 비극을 구경거리로 삼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해야만 한다는 철학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 '언젠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나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다. 라제스와르의 사진을 잡지에 실으면 사람들 마음속, 필연적으로 내 마음속에도 깔려 있는 안전한 장소에서 잔혹한 현상을 보고 싶다는 근본적인 욕구에 응하게 된다. 반면에 정말로 언젠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는 의심스럽다. 입을 다물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내가 궁금한 거라면 나만 알면 된다. 만일 어딘가의 누군가도 궁금해한다면 그것은 그 혹은 그녀 자신의 문제이지 않을까... 

 

- "그 부분은 제가 각색한 겁니다. 쉽게 말해 부처님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설파할 뜻이 없었던 겁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렵사리 얻은 깨달음을 세상에 알린들 무슨 소용이랴... 자신의 깨달음은 섬세하고 이해하기 어려워, 들은 사람들이 멋대로 곡해할지도 모릅니다. 그걸 하나씩 정정하고 꼼꼼하게 설명하고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 어떤 것인지 차근차근 전하는 작업은 부처님께는 딱히 즐거운 일이 아니지요. 괜히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다, 내 깨달음은 내 안에만 담아두고, 중생들에게는 전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파되었잖아요..." 
"예. 깨달음을 누군가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부처님 앞에 나타난 게 범천이었습니다. 범천은 끊임없이 부처에게 깨달음을 전파하기를 권했다고 하지요."
"어떻게요?"
"유감스럽게도 상세한 과정은 전해 내려오지 않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평온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지, 삶의 고통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고민하고, 설파해왔습니다. 부처님이 침묵했다면 다른 가르침이 퍼졌겠지요."  
그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 범천의 설득은 헛수고였다는 말씀인가요?"
야쓰다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험담을 하면 마음이 허해진다고 했습니다. 자고로 말이란 경시와 비방, 오해와 곡해의 원인이었습니다. 옥상가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미 좋은 시가 있는데 비슷한 시를 짓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조롱하여 쓰는 말이지요.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시, 수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어떻게 하면 고통으로 가득한 이 삶을 견뎌낼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기 과시욕 때문에? 생활을 위해서?
물론 그것도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본질도 아니다. 나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세상에 다양성을 부여하기 위함일까요?"
야쓰다의 표정이 다정하게 누그러졌다.
"그렇군요. 좋은 대답입니다. 하지만 다양한 게 곧 좋다고는 할 수 없지요."

 

- "제 생각은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저는 완성을 원합니다. 시든 그림이든, 가르침이든, 인류의 예지가 응축된 완성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저마다 노력하고, 지혜를 짜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부처님은 철학 분야에 한 조각을 덧붙였습니다. 굉장히 크고, 중요한 조각을 더한 거지요. 그렇다면 범천의 설득은 헛수고가 아닐 테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수긍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곡해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글쎄요,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 
야쓰다는 턱을 어루만졌다.
"부처님이 처음에 설법한 내용과 다르다는 말은 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철학이 완성품일 필요는 없어요. 부처님은 힘이 닿는 데까지 고민했고, 커다란 조각을 만들었습니다. 그 조각을 이어받아 용수 대사가, 달마 대사가, 홍법대사와 전교 대사, 이름 없는 이들이 그들이 살았던 세상에 맞도록 온 힘을 다해 다듬었어요. 방금 전 우리는 완성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나 기술의 진보에 부합하여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완성이라는 형태라고 할 수는 없을까요?" 

 

- 나는 침묵했다. 야쓰다는 불교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고작 한두 마디 나눈 것뿐인데 마음속을 들킨 것 같았다. BBC가 전하고, CNN이 전하고, NHK가 전하는 소식을 나도 전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야쓰다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BBC가 전하고, CNN이 전하고, NHK가 전하고, 그리고 내가 전함으로써 완성에 다가가는 것이다. 

 

- 그렇다면 무엇이 완성된다는 말인가? 시도, 그림도, 철학도 아니다. 아마 '뉴스'도 아닐 것이다. 나는 무엇의 완성을 꿈꾸는 것일까? 
그것을 야쓰다에게 물어볼 수는 없다. 그 답을 원한다면 내가 고민해야만 한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할 일이므로.

 

- "제 기사와 부처님의 가르침은 격이 너무 달라요."

야쓰다는 몸을 뒤척였다. "뭘요. 결국 '간시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컵에 남은 녹차를 쭉 들이켰다. 

- 짧은 숨을 내뱉었다. 내 감을 믿고 각오를 다질 때, 나는 늘 가볍게 숨을 내뱉는다. 어렸을 때부터 치러온 나만의 의식이었다. 

- 마른 경관이 지금까지 그랬듯 변함없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한 여자야. 안색 하나 변하지 않다니."
"칭찬으로 듣지요."
기자 일을 시작한 뒤로 가장, 아니 인생의 기억을 통틀어 가장 동요했는데 그런 말을 듣고 말았다. 속마음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 체질이라는 건 자각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 마른 경관이 농담을 할 줄은 몰랐다. 지금이라면 몇 가지 물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거울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거울 속의 나는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수많은 의견을 바탕으로 판단하건대 다치아라이 마치의 속마음이 표정에 드러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절대 질 수 없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을 때, 나는 아무래도 이런 표정을 짓는 모양이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 이것들은 모두 사실이고, 그 사실들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건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상상이다. 하지만 나는 '독자가 아마도 그렇게 상상할 것'임을 안다. 그런데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모르는 척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태도다. 하나, 둘, 셋까지 나왔는데 다음이 넷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신의 자유로운 상상이라고 주장한다면 일처리를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야 알았다. 그래서 나는 라제스와르의 사진을 쓰는 게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 이것은 처음부터 생각했던 의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까지 기사로 쓸 수 없는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나는 그 사진의 완성도에 어지간히 넋이 나가 있었던 모양이다. 마키노가 작게 웃었다.
"그렇군. 자네, 용케 거기서 브레이크를 걸었네." 
"아니요. 반성하고 있습니다. 좀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 "다치아라이 씨, 보아하니 취재도 큰 고비는 넘긴 모양이군요."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요. 아직 아무 고비도 못 넘었습니다."

"뭘요. 고비가 있다는 걸 깨닫고 나면 그다음은 대개 잘 풀립니다. 그렇게 되도록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 그는 내게 무척 친절했다. 취재는 거절당했다. 그런 서릿발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 취재를 거절하는지 설명해주었고, 내 사고방식의 어느 부분이 안일한지 지적해주었다. 이것은 어지간한 친절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때, 아무런 대가 없이 야단쳐주는 것은 가족 아니면 기껏해야 학교 선생님 정도다. 그 외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그냥 화를 내거나, 아무 말 없이 앞으로 상종하지 않는 길을 택한다. 그는 내게 친절했던 것이다. 

- "그 말이 거짓말이었을 리는 없어요."
"거짓말이 아니었겠지."
바란이 말했다.
"군인도 밀매꾼이 될 수 있어. 밀매꾼도 긍지를 가질 수 있지, 입으로는 당당하게 떠들면서 손은 얼마든지 입을 배반할 수 있어. 오래도록 손을 더럽혀온 남자가 물러설 수 없는 한 지점에서는 놀랍도록 청렴해지는 거지. 당연한 일이잖아. 당신, 몰랐어?
알고 있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그렇기에 이토록 마음이 제자리에 멈춰 있는 것이다.

-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너무나 중요한, 하지만 정체는 확실치 않은 무언가가 뇌리를 스쳤다. 지금, 진실의 끝자락이 보이지 않았던가? 재빠르게 사라지려는 사고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는 방금 막 물어보았던 질문을 되풀이했다. 

 

- 기사 작성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취재, 설계, 집필. 취재할 때는 언젠가 그것을 기사로 쓰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의식하면 상정한 결론에 맞는 사실만 취재하기 십상이다. 무조건 폭넓게 듣고, 폭넓게 읽고, 폭넓게 찍는다. 이번에는 언어의 장벽 때문에 더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후회가 남는다. 하지만 마감을 몇 시간 앞둔 지금 상황에서 취재 분량은 그만 체념해야 한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위대한 일을 해내려면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나는 계획, 또 하나는 약간은 촉박한 시간. 
 
- 무엇을 쓸지 결정하는 작업은 무엇을 쓰지 않을지 결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진실은 항상 복잡하고, 여러 입장이 저마다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모든 주장을 병기하는 것은 공평한 태도가 아니다. 거의 틀림없어 보이는 정설과, 한두 사람이 주장하는 새로운 가설에 똑같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을 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것이 정설이고, 어느 것이 근거 없는 낭설인지 판단할 때, 전문가의 의견은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마지막 판단을 내리는 것은 기자다.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 기자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중립이라고 주장할 때, 기자는 덫에 빠진다. 모든 사건에서 모든 이들의 주장을 제한 없이 다루기란 불가능하고,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기자는 항상 취사선택을 한다. 누군가의 주장을 글로 씀으로써 다른 누군가의 주장을 무시한다. 그 과정이 지면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 선택으로 기자의 견식이 드러난다. 주관으로 선택하면서 중립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집필 방법도 문제다. 신문이라면 비교적 정해진 틀이 있지만 내 기사가 실리는 매체는 잡지다.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쓸 수도 있고, 소설처럼 쓸 수도 있다. 신문 기사나 다름없이 쓴다는 선택지도 있다. 나는 글재주는 있는 편이다. 어떤 스타일에도 맞출 수 있다. 그런 만큼 프리랜서가 된 지금 '다치아라이 마치의 문장'을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 "뭐든 유심히 보는 아이입니다. 경찰이 당신에게 심술을 부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더군요." 

 

- "표정이 변했습니다."
"표정에 드러났나요?"

"아니요. 하지만 역시 변했습니다."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다. 눈치챘다. 
"하지만 당신은 어젯밤, 당신의 일을 우선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고단해서 느긋하게 잠들었다가, 오늘 아침 손이 비고서야 비로소 제게 고빈의 안부를 물었지요." 
"그렇지 않아요..."
"잘못된 판단은 아닙니다. 제가 만약 고빈을 처치했다면 어젯밤에 아무리 법석을 떨어봤자 이미 때는 늦었으니까요. 당신은 그 올바른 판단에 몸을 맡길 수 있었어요. 하지만 무서운 판단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다치아라이 씨. 당신은 차가운 태도 밑에 순수한 마음을 숨기고 있어요. 그건 고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밑바닥에는, 살인자인 저도 전율할 만큼 차가운 마음이 있어요." 

 

- "부디 명심하십시오. 고귀한 가치는 연약하고, 지옥은 가깝습니다." 

 

- BBC가 전하고, CNN이 전하고, NHK가 이미 전했더라도 내가 글을 쓰는 의미는 거기에 있다. 몇 명, 몇백 명이 제각각의 시점으로 전하는 글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아간다. 완성에 다가간다는 것은, 내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인식하는 일이다. 만찬회에서 국왕과 왕비가 총에 맞을 때도 있다. 긍지 높은 군인이 밀매로 손을 더럽히고, 온화한 승려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겁 많은 학생이 총 한 자루에 용기를 얻고, 기자가 길을 잃고 방황할 때도 있다. 이 세상은 그런 곳임을 깨달아가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우리의 고통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거야?"
사가르가 그렇게 물었다. 후회로 가득한 하나의 답밖에 없다.
"고통을 낳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할게." 

 

- "조심?"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결국 당신은 보는 것도, 쓰는 것도 그만둘 생각은 없다는 말이네."
"그래, 없어."

 

- "오래 계신 손님께 드리는 서비스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장식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받을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가르에게 이 나라에서 겨우 찾아낸 결의를 전했다. 누가 미워하고 누가 경멸해도, 나는 지켜보겠노라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마음속으로 각오를 굳혀도, 백만 마디 말을 늘어놓아도, 네팔의 비극을 내 생활비로 바꾼 것은 사실이다. 그러겠노라 결심했다고 해서 떳떳하지 못한 마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 아주 잠깐, 많은 사람들이 불속으로 사라진 파슈파티나트 사원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금방 한 덩어리의 도시의 일부로 동화되었다. 타멜 지구의 요시다에는 한 번 더 가고 싶었다. 그 기가 막히도록 평범한 맛의 튀김이 왠지 그립다. 차메리가 끓여주는 치야의 맛도 잊을 수 없다. 그건 지독히도 달았다. 사가르가 데려가 주려 했던 가게의 셀 로티는 어떤 맛이었을까. 

 

- 기내 어디선가 누가 탄성의 휘파람을 불었다. 고개를 들자 히말라야 산봉우리가 햇빛을 받아 눈높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저 멀리까지 이어진 산과는 너무나 웅장해, 신비하리만치 아름다웠다. 압도적인 존재감에 엔진 소리도 기체의 진동도 잊어버렸다. 위대함에 마음과 눈을 빼앗겼다. 

 

- 하지만 나는 믿는다.
눈 밑에 펼쳐진 자그마한 카트만두에도, 지구 상의 모든 곳에서 펼쳐지는 사람들의 생활에도, 위대함은 공평하게 깃들어 있다.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 창밖이 부예졌다.

- 좌석 등받이를 조금 눕히고 창문 덮개를 내렸다. 기도하듯 두 손을 깍지 끼고 가슴 위에 모았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 의식은, 나선을 그리며 녹아내렸다.


 

- 아이들이 대개 그렇겠지만, 일상 속에서 작은 위화감을 찾아내는 것을 좋아했다. 조금 이상한데 이건 왜 그런 거야, 하고 어리석은 질문을 어른들에게 던지곤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꽤나 귀찮은 아이였던 것 같다. 스스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알아가는 기쁨이 커졌다. 호기심이 탈이었는지, 아니면 글을 쓰는 기쁨에도 빠져 있었기 때문인지, 배움은 학문이라 부를 만큼 깊어지지 않고 잡학을 주워 담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나의 지식이 사물의 견해를 근본부터 뒤집고, 다른 지식이 새로운 수정을 가한다. 이윽고 축적된 지식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 타당하지만 예상치 못한 견해로 수렴된다. 그 역동성이 좋았다.  

- 천진하게 '앎'을 즐기다 보니 어른이 되었다. 한때 나는 서점에서 일했다. 도저히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책에 둘러싸여 뒤늦게 깊고도 넓은 인간의 활동 분야에 압도되기도 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구였는지 잊어버렸지만 유명인이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그녀?)는 자서전이 있었는데, 그것이 갑자기 눈에 띄는 판매대로 옮겨졌다. 안다는 쾌락에 작은 그늘이 드리운 것은 적어도 그것을 자각한 것은 그때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왕과 서커스>라는 하나의 이야기에 도달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 이 책에는 졸작 <안녕, 요정>의 등장인물이 나오지만 내용면에서는 연결되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속편'은 아니므로 <안녕, 요정>을 읽지 않아도 문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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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게 처마 밑에 작은 노점상이 나와 있었다. 젊은 여자가 풍로와 냄비를 얹어놓고 도넛을 튀기고 있다. 자세히 보니 도넛보다 조금 가늘고 고리도 어중간하게 붙어 있다. 그런 음식인 듯했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롭이 설명해주었다.
"셀 로티라는 거야."
뜨거운 기름 냄새와 뒤섞여 시나몬 향기가 풍겨 왔다.

 

- 나는 학창 시절에도 친구를 잃었다. 그녀의 죽음을 지켜볼 수도 없었고, 이날까지 묘소도 찾아가지 못했다. 나는 그 친구의 죽음을 이해하려고 기자가 될 결심을 한 게 아니었던가? 지금 이런 방식으로 나는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은 마음속 어딘가에 작은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그렇지만 그뿐이라면 퇴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문기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를 그만둔 가장 큰 이유는 동료가 자살한 원인이 저 때문이라는 소문 탓이었지만요." 
"허어." 
"억울한 노릇이었지만, 자꾸만 수군대서 난처했어요. 남의 눈을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지만 정보를 공유해주지 않아 일에도 지장이 생기기 시작해서 이거 어쩐다 싶었죠. 동기에게도 의논해보고 많이 생각해봤지만 길은 하나가 아니니, 굳이 신문사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그만두었습니다." 
끈기가 없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만두면 소문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고 말리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미련은 없었다.

 

- "이 마을에는 꼭 찍어야 할 아름다운 것들이 많습니다.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길 희망한다. 다만 카메라는 짐 속에 있고, 아직 렌즈 캡도 열지 않았다. 찍어야 할 대상을, 나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 "비렌드라 국왕과 아이슈와리아 왕비가 디펜드라 황태자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황태자는 그 후 자살한 것으로 보입니다." 
킬드,라고 들렸다. 혹시 내가 영어 속어를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어제 나라얀히티 왕궁에서 정례 행사인 궁중 만찬회에 참석한 두 폐하는 황태자 전하에게 사살당했습니다. 두 폐하 외에도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황태자 전하는 그 후 자살한 것으로 보입니다."

 

- 나갈 채비를 마치고 도쿄 로지 4층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사진의 진위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했지만 최소한 방송되는 뉴스만큼은 체크해야 한다. 식당에는 오늘도 하얀 셔츠를 차려입은 수쿠마르가 있었다. 물이라도 끓이려고 부엌으로 들어가려는데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카스트가 다른 사람이 부엌에 들어가는 건 실례입니다. 거기는 숙박객 용 부엌일 것 같지만, 차메리 씨에게 먼저 허락을 구하는 게 나을 겁니다.
"미처 몰랐네요.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다가 문득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야쓰다 씨가 여기서 차를 끓여주었는데 괜찮았던 걸까요?"
수쿠마르는 웃으며 말했다.
"야쓰다 씨는 단골이랄까, 여기서 사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게다가 외국인이라고 해도 불교 승려니 특별 대접하는 걸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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