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정보라] 여자들의 왕

일루젼 2022. 7. 3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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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보라 / 박인주
출판 : 아작 
출간 : 2022.07.07 


       

한여름의 중간, 한 단위의 마무리로 좋은 책이었다. <저주토끼>가 퍽 마음에 들어 이번에 나온 신간은 주저없이 읽어보았는데, 표지부터 수록작 하나하나가 모두 만족스럽다. 표제작이 <여자들의 왕>이라 '남자 죽이는 여자들 이야기'라는 오해를 받았다는 작가의 말이 웃펐다. 주 화자들이 여자인 경우가 많았을 뿐, 이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죽고 죽이고 그냥 죽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미지는 남았다. 

 

또한 아마노 요시타카 분위기의 표지 일러스트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작업을 하신 박인주 일러스트레이터의 다른 작품들을 살펴보니 결은 조금 다르지만 아주 매력적인 화풍을 가진 분이었다. 나는 이런 우연한 확장들을 통해 좋은 것을 만날 때 무척 기쁘고 감사하다. 언젠가 더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더라도, 그 순간의 강렬한 '좋음'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이하의 리뷰는 스포일러가 다분할 예정이므로, 책을 다 읽어보시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하신 분들께서만 더보기를 열어주시길.

<여자들의 왕>은 꽤 매력적인 사랑과 죽음과 전쟁과 삶 이야기였다. 추천.

 

 

 

 

더보기

<높은 탑에 공주와>



옛날 옛날에... 갇혀 있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공주를 용감하고 지혜로운 기사가 구해내는 이야기들. 이 이야기 속에 녹아든 여성과 남성은 실제 성별보다는 힘의 원리를 상징하는 것에 가까우며 영원한 이상, 내면의 원리에 대한 메타포라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그렇더라도 조금 다른 공주 이야기는 즐겁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더라도 계속 기존의 틀을 깨는 낯설고 특이한 것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사실은 어릴 때 충분히 보수적이었기에 점점 나이브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장검과 단검을 각각 한 손에 들고 자세를 잡는 공주, 붉은 용의 응원을 받으며 맨손으로 칼날을 쥐어 막아내기도 하는 공주는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조금은 가볍고 발칙했던 그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달빛 아래 기사와>

 


보물을 깔고 앉은 용도, 사로잡힌 공주도, 그리고 그 공주의 어린 시절 왕과 왕비를 대신해 공주를 키웠을 누군가에게도 각자의 삶과 사연은 존재할 것이다. 그저 영광의 순간 그 자리에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모든 것들이 삭제되고 트로피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작가는 이 단편을 통해 각 캐릭터들에게 돌려주었다.  

 

왕자와 결혼하게 된 다분히 현실적인 사유와 있을 법한 권력 투쟁과 그럴 법한 풋사랑의 아스러짐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어서,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서, 살아남기 위해서 붉은 용을 불러들인 그녀는 마녀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죄를 짓지는 않았다. 그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소녀는 자신의 절망을 실체로 구현했을 뿐이다. 

 

 

<사랑하는 그대와>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감정들이 존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것이 가장 진실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한꺼풀만 벗겨보면 그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감정인 경우가 태반이다. 혹은, 그 순간에는 그럴 가능성이 있었으나 변해버렸거나. 

 

그런 점에서 영원한 순간의 반복만이 가능한 유일한 해피엔딩일지도 모른다. 연을 다한 홍연은 깨끗하게 불살라 사라져버리길.

 

 

<사막의 빛>

 

서양의 붉은 용이 활약했으니 동양의 푸른 용인가? 긴가민가 했으나 큰 물고기(비슈누)가 될 줄 알았지 수룡이 될 줄은 몰랐다. 개인적으로는 촉룡 같은 유려하고 긴 형태의 동양적인 용의 형태에 더 매력을 느끼는 편이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의 연을 다한 후 제 자리로 돌아가는 이야기라니... 이 이야기야말로 진정한 행복에 관한 동화라고 생각했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외부의 의견들을 주워와 꿰입은 선입견을 벗어버리고, 어디나 사람이 사는 곳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여자들의 왕>

 

말을 아끼게 되는 단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서사나 묘사에서 강렬한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내가 치인 부분은 '그'다. 

그가 풀어내지 못하고 삼켜야 했던 이야기만큼이나 그를 품고 말았다. 나는 이런 반듯하고 배려심 넘치는, 비틀림없는 맑음을 만나면 반하고 만다. 닮고 싶은 건지, 사랑하게 되는 건지, 둘은 사실 같은 것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만>, <루>가 생각났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아픔이 있었다. 가족과 동족들이 갈려 칼과 총을 겨눴던, 그리고 어느 편도 들지 못하고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이들의 삶이 있었다. 한 세대의 소멸은 그 세대만이 품고 있던 이야기들의 소멸이다. 피에서 피로, 입에서 입으로, 글에서 글로 이어져가는 이야기들. 그런 것이 존재했다는 것조차 잊혀지고 그 잊혀짐조차 잊혀지는 그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져가는 이야기 속에 당신과 내가 살고 있다. 사실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이다. 

 

 

<어두운 입맞춤> 

 

'여성이 귀신이나 괴물이 되어야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작가의 표현이 아팠다. 나는 아직 '이것이 나의 답이다'라고 할 만한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지만, 전체의 괴로움이 줄어들 수 있는 방향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답이 없는 이상론이다. 가능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가 더 익숙할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하는 정도의 바람은 있다. 아마 그 세상에서는 '나와는 생각이 다르지만'을 굳이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나오기도 전부터
"남자 죽이는 여자들 이야기"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는데,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읽어주시면 좋겠다.  

 

 

 

- 여기 어떤 높은 탑 속에 한 공주가 있다. 그리고 그 탑과 안에 든 공주는 사나운 용이 지키고 있다. 용은 불을 뿜고 사람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존재다. 그리하여 한 용감한 기사가 나선다. 기사는 몇 날 며칠을 말을 달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사나운 용이 사는 곳으로 찾아온다. 그곳은 산꼭대기라도 좋고 깊은 계곡 밑바닥이라도 좋고 혹은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섬이라도 좋다. 어쨌든 기사는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 끝에 멀고 먼 장소에 외따로 떨어진 용의 보금자리를 찾아낸다. 그리고 용의 눈을 피해 높은 탑을 올라가서 창문을 통해 공주의 방으로 숨어든다. 공주는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다. 눈부신 하얀 뺨은 탑에 갇힌 채 용에게 시달려서인지 조금 여윈 듯하고, 붉은 입술도 약간은 파리해진 것처럼 보인다. 기사는 아름다운 공주의 잠든 얼굴을 말없이 들여다보다가 침대 위로 몸을 숙인다. 공주의 귓가에 속삭인다. 공주님, 제가 왔습니다. 공주님을 구해드리겠습니다. 

- 그 목소리를 듣고 입맞춤을 느끼고 공주가 눈을 뜬다. 기사의 얼굴을 본다.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뛰어 일어난다. 그리고 앵두 같은 입술을 열어 말한다.
"뭐야, 너? 여기까지 왜 또 왔어?"
기사의 표정이 구겨진다. 아아 기사님을 기다렸습니다, 라든가, 이렇게 위험한 곳까지 찾아오시다니, 라든가, 뭐 이런 종류의 대사를 기대한 것이 틀림없다. 기사가 설명한다. 그러니까 공주님, 나쁜 용에게 붙잡혀 이 높은 탑에 갇혀 있는 공주님을 구출하기 위해서 제가... 
"구출 좋아하네." 
공주가 말허리를 자른다.

 

- "옛정을 생각해서, 살려주시면 안 됩니까?" 
공주는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입 끝을 한쪽만 올려 씨익 웃는다.

"옛정이라..."
그리고 공주는 왼손에 쥐었던 단검을 침대 쪽으로 내던진다. 바닥에 내리꽂았던 장검을 양손으로 잡아 뽑는다. 다행이다, 생각하며 기사는 몸을 조금 일으킨다. 
"네가 말을 꺼냈으니 말인데." 
공주가 양손으로 잡은 검의 칼끝이 다시 기사의 목을 향한다.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 칼끝에 밀려 기사는 옆으로 구른다. 얼굴을 위로 하고 똑바로 드러눕는다. 공주는 똑바로 누운 기사 위로 다가와 다시 칼을 겨눈다.
"아무래도 죽여야겠다." 
공주는 아까처럼 입 끝을 한쪽만 올려서 씨익 웃는다.
창밖에서 이 모든 광경을 용의 커다란 짙은 보라색 눈동자가 지켜보고 있다. 공주는 잠깐 고개를 돌려 용의 눈동자를 쳐다본다. 공주와 시선이 마주치자 용은 마치 격려하듯 새빨간 눈꺼풀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 뜬다. 

 

- 그러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옛정으로 따지자면 공주와 기사는 철 모르던 어린 시절 한때 연인이었다. 공주는 공주니까 대부분의 시간을 시녀들한테 둘러싸여서 갇혀 지냈고, 기사는 기사니까 대부분의 시간을 땀내 나는 남자들한테 둘러싸여 지냈고, 그래도 이차 성징이 발현하고 이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성호르몬이 넘실거리는 이팔청춘 좋은 나이는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여차여차했으므로 서로 주위에 눈 맞을 이성이 달리 없는 상황에서 무슨 행사에 기사가 공주를 호위한다고 한 번만 따라가기라도 하면 그대로 눈은 맞게 마련이다. 그러나 또한 서로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하여 연애편지 한 번 못 쓰고 손 한 번 못 잡고 그저 다음번에 서로 호위하고 호위당하는 '무슨 행사' 같은 건 또 언제 한 번 일어나나 그런 것만 목 빼고 기다리는, 순진하다면 순진하고 멍청하다면 멍청한 연애였다. 

 

- 그러다가 연애편지는 여전히 안 썼지만 손도 잡고 뽀뽀도 해보게 된 것은 순전히 공주의 유모 덕이었다. 공주라면 누구나 마법을 쓸 줄 아는 요정 대모라든가, 뭐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특출나게 지혜롭고 현명한 유모가 하나쯤은 딸려 있게 마련이다. 

 

- 말 안 들을 나이의 왕자를 제 치마폭에 감싸고 주무르는 것도, 그게 다 마녀라서 남들은 알지 못하는 무슨 술수를 쓰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는데, 공주는 결혼식 전에 자기만 빼고 다들 무지무지 바쁜 모양이라 챙겨주는 사람도 없고 심심하고 또 드디어 결혼이라는 걸 한다니까 여러모로 싱숭생숭하고 그래서 고국에서 유모가 잘 때 종종 그랬듯이 뭐나 좀 얻어먹을 거 있나 하고 부엌에 내려가서 왔다 갔다 하다가 시녀들이 이러고 수군거리는 얘기를 듣고는 앞뒤 없이 유모가 달빛 아래 매듭을 지으라던 게 생각이 나서 여자들은 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그런 비법이니 술수 같은 걸 하나둘쯤 알게 되는 걸까 뭐 그런 궁리를 좀 했었다.

 

- 여기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효하게 약발이 먹혔던 게 바로 공주가 처음 기사를 살짝 불러낼 때 들입다 떨어뜨린 다음에 그대로 버려버리고 두 번 다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이때의 여자들이 쓰는 이런 비법이나 마법이라는 게 결국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한다는 목적인데 그런 술법을 행할 때 가장 유용한 것이 내가 움직이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스민 물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왕비의 경우 같으면 움직이고자 하는 사람과 그 사람을 움직여 없애버리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조금씩이나마 동시에 스며 있으니 이 아니 좋으냐 말이다. 뭐 왕비야 처음에는 그런 자세한 속사정까지 몰랐지만 어쨌든 적당한 인물로 기사를 점찍은 후에 가만히 보니까 어째 여자 손수건같이 생긴 레이스 달리고 수 놓인 물건을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신줏단지 모시듯 하길래 손수건이라는 건 아무리 잘 모셔도 더러워지면 빨아야 하는 물건이니 빨랫줄에 널렸을 때 시녀 하나를 시켜서 슬쩍 집어오게 해서는 보통 마녀들이 하듯이 개구리 뒷다리와 생쥐 꼬리와 까마귀 깃털과 기타 등등 구역질 나는 재료를 부글부글 끓는 재료 미상의 약물 속에 던져 넣고 마지막에 문제의 손수건도 처넣은 뒤에 수리수리 마하수리를 외운 결과 울긋불긋한 연기가 폭폭 피어오르고 그 뒤로 기사는 손수건을 주웠을 ...

 

- <높은 탑에 공주와>

 

- 어느 순간 하늘이 새까맣게 어두워져서 올려다보니까 엄청나게 커다란 그림자가 하늘 전체를 막 전부 다 뒤덮었어. 그래서 뭔지 몰라서 어, 어, 하면서 보고 있는 사이에 활활 타는 새빨간 게 쏜살같이 내려와서는 사방에 지옥의 불꽃을 흩뿌리고 유황 냄새를 풍겨 가면서 마차 주위에 수행하던 시종이니 무사니 하는 사람들을 다 때려눕히고는 공주만 홀랑 데려가버린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까까지 공주가 타고 있던 마차는 싹 다 태워먹었고,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기절했거나 무서워서 넋이 나가버렸고, 그 꼴을 보고 나니까 기사는 이 공주가 진짜로 마녀라는 사실에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게 되어버렸고, 그러므로 기사 된 자의 명예를 걸고 정의의 이름으로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붙잡아다가 그분이 보는 앞에서 처단을 하고야 말겠다고 맹세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렇게 말하는 기사를 사랑과 존경으로 가득한 그 반짝반짝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황홀하고 달콤하게 입을 맞추고는 기사의 귓가에 붉은 용의 탑을 찾으려거든 달의 북쪽으로 가라고 속삭였던 것이고 그런데 그분이 누구였지? 

 

- 입 맞추고 나서 기사는 품에 안긴 왕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마법이 풀렸는데도 기사의 눈에 왕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마법이 풀렸는데도, 왕비는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버터로 빚은 것 같은 외모의 왕비는 온통 금빛이었다. 머리카락은 달빛으로 물든 듯이 거의 은색으로 보이는 아주 옅은 금빛이었고, 매끄러운 피부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수줍은 햇살을 받은 듯한 황금빛이었으며, 커다란 눈은 어두운 곳에서 때로 투명한 갈색으로도 보이는 짙은 꿀 빛깔을 띠어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깊은 금빛으로 반짝였다. 

- 그리고 그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황금빛 눈동자에 왕비는 역시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행과 고독을 담고 있었다. 더할 수 없는 미모에, 마음속에는 불행과 고독을 안고 깊은 우수에 찬 연약한 여성은, 남자도 마찬가지지만, 말하자면 이성의 보호본능에 호소하는 매력이 있는 법이다. 기사도 마찬가지라서, 직업도 기사인 데다 성격도 워낙 그렇다 보니, 게다가 마법에도 좀 걸리고 해서, 그냥 홀라당 넘어가버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손수건까지 왕비의 손에 넘어온 뒤로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돼서, 드디어 왕비는 기사가 품은 첫 여자,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사를 안은 첫 여자라는 명예로운 자리에 영원토록 등극하고 말았다. 이런 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사람에 따라서는 의외로 중요한 법이다. 

 

- "제가 이걸 드린 날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손수건은 왕비의 하녀가 훔쳐온 거지 기사가 왕비한테 드린 적이 없으니까 기억할 리가 없지만, 기사는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당히 꾸며댔다. 
"달빛 아래에서, 평생 왕비님을 지켜드릴 것을 맹세하고 왕비님의 손등에 입 맞추었던 것, 기억하십니까?"
"그걸 어떻게 잊겠어요."
왕비가 그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인 우수에 찬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그때, 밤하늘에 반달이 떠 있었죠?" 
기사가 손수건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구름에 달이 반쯤 가려서, 마치 수줍어하는 소녀의 얼굴처럼 보였죠. 기억하십니까?" 

 

- 부드럽게 하늘을 가로질러 가던 오래전 어느 밤의 둥글고 환한 보름달 아래에서 자신의 약지에 붉은 실을 묶고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했던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기사는 보름달 아래에서의 그 맹세가 지금 눈앞에 서 있는 황금빛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에 비하면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때 기사는 어렸고, 그의 세상은 무척 좁았으며, 그 좁은 세상 안에 바라볼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단 한 명 공주뿐이었고, 그런 공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데 대한 자만심이 공주에 대한 사랑 자체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공주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그 뒤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쳐서 이제는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이 되어버렸다. 

 

- 그에 비하면 자신이 눈앞에 붙잡고 있는 이 황금빛 왕비는 진짜였다. 기사는 왕비와 수많은 밤을 함께 보냈고, 왕비의 이야기를 전부 들었다. 몰락한 귀족의 딸에서 일약 왕비로 등극했으나, 나이 많은 바람둥이 왕에게 싸구려 장난감 취급을 당하며 달리 의지할 곳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이, 지난 십수 년의 세월 동안 인생의 유일한 낙이자 희망이라고는 오로지 아들뿐이었던 사연을 왕비는 조용히 담담하게 중얼거리듯이 털어놓았다. 마녀라고는 해도 왕비는 진실로 외롭고 슬픈 사람이었고, 왕비의 악의에는 낭떠러지 끝에 몰려 오랫동안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쳐온 인간의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던 왕비의 몸, 버터로 빚어 벌꿀을 뿌린 듯한 그 몸은 더할 나위 없이 매끄럽고 달콤하고 끈적하고 황홀했다.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기사가 여전히 왕비의 손을 꽉 쥔 채로 속삭였다.
"굳이 그렇게 하시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 그 기사라는 인간이 어디서 뭘 한 건지 나는 여기서 기다리느라 일각이 여삼추 같아서 애간장이 다 녹아버릴 지경이건만 혼자서 늑장을 부리면서 소식 한 줄 없다가 또 갑자기 돌아와서는 그래서 어쨌다는 건지 말 한마디 듣기도 전에 어머니가 덜렁 옥에 가둬버렸으니 저간의 사정이 어찌 된 노릇인지 답답해서 돌아버릴 지경이 된 것이다. 하여 왕자는 기사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어머니 몰래 찾아갔다. 그리고 기사에게 꼬치꼬치 캐물어서 어떻게 된 일인지를 전부 알아내고야 말았다. 물론 기사가 설명한 버전에 따르면 공주하고 칼싸움에 져서 쫓겨난 게 아니고 붉은 용이 무시무시하게 불을 뿜고 발톱으로 공격을 해서 범접할 수가 없었던 거고, 밖에 매뒀던 말을 잃어버리고 혼자 헤맨 게 아니라 그 말을 멀쩡하게 타고 가다가 좀비 기사 떼한테 공격을 당해서 불쌍한 말이 주인을 위해 장엄하게 그 한 몸 희생한 거라고 했지만, 어쨌든 그런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러니까 사실은 좀 중요할 수도 있지만 기사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위해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세부사항을 빼놓고 상황의 요점은 제대로 정리를 해서 보고를 한 셈이라고 보아야겠다. 

 

- 그래도 어쨌든 명령을 받았으니까 기사는 감옥에서 풀려나 왕자의 뒤를 쫓아서 붉은 용의 탑으로 다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게 공주를 되풀이해서 찾아가는 걸 보면 그 붉은 실이 정말로 평생 이어진 것 같긴 하지만, 그게 사랑이나 무슨 좋은 인연 때문이 아니라 매번 왕비의 명으로 죽이러 찾아간다는 형식이고 보면 이건 참 꼬여도 엉망진창으로 꼬인 관계인 것이다. 

- 그래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모두 그렇듯이 이 이야기도 결국은 해피 엔딩이다. 다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종류의 해피 엔딩이 되는지는 끝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본시 이야기라는 건 결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과정이 재미있는 법이니까. 

 

- <달빛 아래 기사와>

 

- 높은 탑의 창문을 통해서 희고 찬란한 달빛이 흘러들어왔다. 공주는 붉은 실을 든 손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실은 달빛을 받아 은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였다. 공주는 그 모습을 잠시 홀린 것처럼 바라보았다. 
"예쁘지유?"
유모가 옆에서 말했다. 공주는 조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어유?"
공주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공주는 다른 한 손에 단검을 들고 창밖으로 내밀었다. 환하게 떠오른 보름달 아래, 엉켜버린 붉은 실을 칼날에 걸고 당겨서 끊었다. 조각조각 끊어진 실은 하얀 달빛 속에 둥실 떠서 마치 붉은 꽃잎처럼 천천히 탑 아래로 떨어져서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왕자는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공주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 공주를 따라서, 왕자는 태양의 남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몇 날 며칠 말을 달리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 공주와 왕자는 붉은 용의 탑을 둘러싼 황무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공주는 말을 멈추고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 
서쪽으로 저물어가는 둥글고 붉은 불덩어리를 바라보면서 공주가 왕자에게 물었다.
"나, 원망하지 않아요?"
왕자는 대답하지 않고 의아한 표정으로 공주를 쳐다보았다.
공주가 말했다.
"내가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붉은 용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이 황무지로 오지 않았더라면,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고 운명에 모든 것을 맡겼더라면, 그랬더라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고, 왕자님은 지금쯤 어머니와 함께 왕궁에서 평온하게 지내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날, 원망하지 않아요?" 
왕자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해가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고, 마침내 짙은 쪽빛 어둠이 사방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공주는 다시 말에 올랐다. 왕자도 말없이 따라서 말에 올랐다. 그리고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점점 짙어지는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며 한동안 북쪽으로 말을 몰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새까만 하늘이 갈라지며 하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달은 망망대해를 비추는 등대와도 같이 진하고 투명하고 차가운 빛을 사방에 흩뿌렸다. 

공주가 말을 멈췄다. 말에서 내렸다.

왕자도 따라서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기다렸다.

- 달은 검은 하늘을 한가롭게 떠갔다. 천천히 여유롭게 흘러서 달은 하늘 한복판에 이르렀다. 새하얗고 둥근 얼굴이 죽음과 삶의 경계에 띠를 두른 황무지를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황무지에 두 개의 창백한 형상이 나타났다.

 

- 왕비는 달빛 아래 서서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흔히 하듯이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왕비에게 기사가 다가갔다. 왕비는 조금 놀랐다가 기사를 알아보고 이내 안심하는 것 같았다.

기사는 왕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가슴에 뚫린 구멍에 한 손을 넣어 심장을 꺼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왕비 앞에 내밀었다.

왕비는 기사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심장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먹기 시작했다. 

 

- 그 광경을 바라보던 왕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공주는 차가워진 왕자의 손을 꼭 잡았다. 

왕비가 기사의 심장을 다 먹고 나자 기사는 일어섰다. 손가락으로 왕비의 입가에 묻은 피를 부드럽게 닦아냈다. 그리고 기사는 왕비에게 입 맞추었다. 새하얀 달빛 아래에서 기사는 창백했다. 왕비만이 이전과 같은, 다만 이전보다 조금 옅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 <사랑하는 그대와>

 

- 수도에서 상인들은 눈길을 끄는 여러 가지 신기한 물건들을 젖혀두고 별로 쓸모가 없어 보이는 평범하고 조그만 단지를 하나 샀다. 소녀를 등 뒤에 숨겨주었던 상인이 그 단지를 소녀에게 내밀며 뭔가 말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표정과 손짓으로 소녀는 그 단지를 잘 지키라는 뜻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 그날 밤은 오랜만에 들판이 아닌 여인숙에서 묵었다. 상인들이 모두 잠들고 나서 소녀는 단지 뚜껑을 몰래 열어보았다. 단지 안은 겨울인데도 얼지 않은 물로 가득 찼고, 그 물 속에서 소녀의 새끼손가락만 한 조그만 물고기가 열심히 헤엄치고 있었다. 여인숙은 어두웠지만,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희끄무레한 달빛 아래서 물고기의 비늘은 푸르스름한 은색으로 빛났다. 그 비늘이 예쁘고 처음 보는 물고기가 신기해서 소녀는 단지 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 땡볕 아래에서 흙과 먼지뿐인 바위 땅은 화덕처럼 달아올랐다. 그리고 상인들이 땅바닥에 깔아둔 천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이 떠오르자 상인들은 유목민과 함께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물과 음식이 든 자루를 천 위로 옮겨 실었다. 소녀도 상인들이 시키는 대로 조그만 물고기가 든 단지를 소중하게 안고 올라탔다. 상인들까지 모두 올라탄 후에도 낙타털로 짠 천은 햇빛을 받으며 땅 위에 둥실 떠 있었다. 그리고 평탄한 흙먼지투성이 고원을 미끄러지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 낙타털 양탄자를 타고 가는 여행은 걸어서 갈 때보다 쉬웠지만 결코 편하지는 않았다. 양탄자는 뜨겁고 메마른 대기를 가르며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그 서슬에 일어난 흙먼지와 모래 섞인 바람이 눈으로, 코로, 입으로, 귀로 날아들었다. 따가워서 눈을 똑바로 뜰 수 없었고, 코와 입 안에서 모래가 서걱거렸다. 그래서 소녀는 한구석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상인들이 준 천으로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될 수 있는 대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렇게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소녀는 물고기가 든 단지를 안은 채로 더위에 못 이겨 꾸벅꾸벅 졸거나 잠이 들어버리기도 했다.  

 

- 소녀는 잠들지 않았다. 겨울에 쓰던 털가죽을 꺼내 두르고 밖으로 나와 타다 남은 깜부기불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이국의 달을 바라보았다. 사막의 밤은 차갑고 맑고 고요했다. 별이 촘촘히 뜬 쪽빛 밤하늘은 얼음으로 빚은 것 같아서,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쨍, 소리를 내며 갈라질 것처럼 투명해 보였다. 

 

- "빛이라는 뜻이야." 
소년이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았지만 어쨌든 소녀는 말했다. "나는 미르노에 뽈레(평화로운 들판)라는 마을에서 왔어."

그리고 상인들이 말하던 것이 생각나서 소녀는 덧붙였다. "거기는 멀리 서쪽, 루시의 땅이야." 
소년은 마치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뭔가 말했다. 그것이 소년의 이름이라고 생각해서 소녀는 아까 소년이 했던 것처럼 되풀이했다. 코, 료오? 코, 랴아? 소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팔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키며 상인들의 언어로 서투르게 설명했다. 소녀는 알아들었다. 소년은 세상의 동쪽 끝에서 왔다. 

 

- "이교도들의 왕은 정교를 믿는 사람의 눈알을 뽑고 혀와 귀를 잘라서 사막에 버린대. 정교를 믿는 여자들은 높은 탑에 갇혀서 죽을 때까지 술탄의 노리개가 된대. 나도 그렇게 되는 걸까?" 
소년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소녀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엄마의 모습을 생각했다. 자비를 베푸소서. 신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 소녀는 언젠가 오래전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소년에게 들려주었다. 현명하신 볼로디미르 왕이 루시의 사람들도 신을 믿고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해서 세계 곳곳으로 신하들을 보냈다. 남쪽 나라의 종교를 보고 온 신하들은 "그들은 일어섰다 앉았다 한 뒤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사방을 둘러보는데, 그 눈빛에는 슬픔만 가득할 뿐 아무 즐거움이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서쪽 나라의 종교를 보고 온 신하들은 "그들의 의식은 딱딱하고 무의미하여 아무런 광영도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리스에 가서 정교의 의식을 보고 온 신하들은 "그들은 아름다운 성전에서 향을 피우고 노래를 부르며 엄숙하고 호화로운 예배를 거행하니 이곳이 천상인지 지상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황홀하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현명하신 볼로디미르 왕은 크게 기뻐하여 신하들 모두에게 상을 내린 후 정교를 루시의 신앙으로 선포하였다. 후에 볼로디미르 왕은 죽음을 맞이하여 영혼이 하늘로 떠난 후에도 시체가 썩지 않고 신비로운 향기가 나며 그 시신에서 나온 기름을 바르면 병든 자는 병이 낫고 눈먼 자는 앞이 보이는 기적이 일어나 루시의 첫 성자로 추대되었다... 

 

- "정말로 기적이라는 게 있을까?" 
이야기를 마친 후에 소녀가 물었다.
"너의 신과 나의 신과 저 상인들의 신은 모두 같은 신일까, 아니면 세상에는 나라와 부족의 수만큼 여러 신들이 있는 걸까?"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광대뼈 부근이 통통해지고 눈이 가늘게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는 그 특유의 웃음을 얼굴 하나 가득 웃었다. 
소년의 다정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소녀는 고개를 들어 수정처럼 단단하고 무심하게 투명한 밤하늘의 별빛 가득한 정적을 올려다보았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 정적 속에 홀로 깨어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자에게 살며시 다가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곁에 있으니,라고 위로해줄 것만 같았다. 그런 정갈하고 조용한, 마지막 밤이었다.

 

- <사막의 빛>

 

- 그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찾아내기 위해 그의 망설임 너머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그가 눈을 들어 나를 마주 보았다. 목검을 들었다. 그의 칼은 반듯했고 어깨는 차분했으며 몸에는 한 점의 빈틈도 없었다. 그가 진심을 다해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나는 쉽게 막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그가 첫 공격을 시도했다. 매우 실험적이고 망설임이 가득한 시도였다. 나는 쉽게 목검을 들어 그의 나무칼을 가볍게 옆으로 흘렸다. 멈출 새 없이 그가 다시 공격했다. 이번에는 진짜였다. 그의 목검이 내 목검을 부러뜨릴 듯 강하게 내리쳤다. 나는 나무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움켜쥐어야 했다.  
"나를 믿어달라고 한다면, 무리입니까."
칼과 칼이 떨어진 뒤에 서로 마주 보고 숨을 고를 때 그가 나에게 불쑥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공격했다. 

 

- 그는 빠르고 강하고 반듯하게 칼을 썼다. 나는 그보다 약했고 나의 칼은 종종 흔들렸다. 나를 향하는 그의 칼끝에서나 표정에서나 내가 그토록 흔하게 보았던 조롱이나 경멸은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상대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의 칼을 좋아했을 것이라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그의 칼날을 받아내며 아주 잠깐 생각했다. 

 

- <여자들의 왕>

 

- "신의주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다 도로 후퇴했거든? 일월 사일에 후퇴했다고 그게 일사 후퇴야. 그때 그렇게 후퇴하다가 많이 포로로 잡히고 그랬어. 그래 잡혀서 끌려가는데 그 공산군 부대가 가다가 평양에서 한 번 멈춰서 포로들을 다 어느 민가에다 가둬 뒀대요. 그런데 거기서 너희 외할아버지랑 딱 만난 거야. 그래 외삼촌이 우리 아버지한테 같이 도망치자고 그랬는데, 외삼촌은 그때 군화 신고 있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게다짝을 신고 서울에서 평양까지 걸어갔으니 그 발이 성했겠니? 그래 발이 다 해져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니까, 아버지가 외삼촌한테 그냥 혼자 가라고 그랬대. 그래서 외삼촌만 도망 온 거야. 
아버지 소식을 들은 건 그게 끝이란다."
탈상을 한 후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 "그때 우리 집이 그 동네에서 제일 컸어. 그 집을 우리 엄마가, 그러니까 외할머니가, 이렇게 무릎 꿇고 앉아서 마룻장을 하나하나 다 닦아서 기름 먹이고 그런 집이거든. 그런데 동네에서 제일 큰 집이니까 국군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우리 집으로 와서 사령부로 쓰고, 또 공산군이 들어오면 또 제일 먼저 들어와서 사령부로 쓰고 그랬어. 그런데 공산군이 들어와서 자기네 사령부라고 군홧발로 막 방 안에 들어오고 그러니까 할머니가 그 사람들한테 신발 벗으라고 그랬대. 그랬더니 공산군이 총부리를 이렇게 할머니 목에 들이댔는데, 아유, 그때 어떻게 해서 살아났다더라?" 
할머니가 어떻게 해서 살아나셨는지 나는 아마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는 그때 세 살이었다.

- 할머니는 잊힌 이야기들을 남긴 채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그 시절에 그 정도 사연 없는 집은 없지."

세대의 교체는 세대의 상실을 의미한다.

...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잊혀버린 이야기들은, ... 잊혔다는 사실조차도 잊히고 만다. 

 

- 입관식에서 할머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할머니는 잠든 듯이 평온한 표정이었다.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생명이 떠나간 할머니의 피 묻은 입술은 참혹한 시옷자로 굽어지고 얼굴에는 무시무시한 고통의 표정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할머니의 굽어진 입술을 펴고 핏자국을 닦아내고 소리 없이 괴로운 비명을 평온히 잠든 얼굴로 바꿔준 장례지도사는 직업적 본분을 다했을 뿐이었겠지만 나는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 그리고 한동안 나는 할머니의 피 묻고 굽어진 입술이 떠오를 때마다 혼자 울었다. 

- 인간은 타인의 죽음을 공유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 육신의 얼굴은 타인의 손으로 근육을 주물러 표정을 바꿀 수 있지만 그 안의 존재가 무엇을 느끼는지는 확인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 고통을 느낄 육신을 잃어버리고 할머니가 자유로워졌을지, 고통을 치유할 신체를 영원히 잃고 단지 그 고통만이 영속되는지, 종교나 무속에 의지하지 않고 경험적 사실로서 확인할 방법은 없다. 할머니의 피와 살로서, 나는 그 절대적 단절이 너무나 억울했다. 

 

- 철학자들은 여기에 관하여 여러 가지 책을 썼다. 도서관의 서가에는 그런 책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나는 단지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을 뿐이었다. 그런 단절의 밤에 나는 오래전 잊혀버린 언어로 기록된 누군가의 잃어버린 이야기들을 읽었다. 조각난 시간의 연대기를 한 단어씩 나의 언어로 바꾸었다. 죽음과 시간과 망각 앞에서도 어떤 이야기들은 살아남는다. 시간이 흐르면 죽어 잊힐 인간에게, 그것은 커다란 위로가 된다. 


- 공주가 열여덟 살이 되자 어머니인 여왕은 공주의 혼처를 구하기 시작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은 모두 여왕이 남편의 나라를 침략하여 왕위를 차지한 사실과 공주의 왼손에 손가락이 여섯 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라 안에서 감히 공주의 남편이 되겠다고 자청하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여왕은 그리하여 외국으로 사신을 보냈다. 때로는 이국의 왕자가, 때로는 귀족이 공주를 만나러 찾아왔다. 때로는 공주가 사신을 따라 외국으로 나갔다. 

- 헛된 일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연대기>가 살아남아 후대에 전해졌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 문학은 역사보다 우월하다고, 오래전 서양의 누군가가 말했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역사와 문학의 경계는 시간 속에서 지워진다. 그러므로 모든 이야기는 평등하다. 이미 일어난 사건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던 사건도, 직접 겪지 않은 후대의 인간에게는 모두 이야기일 뿐이다. 그중 어떤 이야기들은 살아남아 핏줄과 함께 전해진다. 

- 내게는 이야기를 전해줄 핏줄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써야만 했다. <연대기>가 핏줄의 도움을 빌지 않고 살아남았듯이, 나의 이야기도, 내 할머니의 이야기도 살아남기를 희망하면서. 그러나 이야기가 살아남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모두 그러하듯이 시간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공정하다. 헛되고 헛되지 않고는 결국,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아닌 전해받는 사람이 결정할 몫이기 때문이다. 


-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 본래 인도에는 커다란 뱀 혹은 도마뱀이 신화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그래서 러시아어나 폴란드어에서 "용"이라는 단어는 (커다랗고 신화적인) "뱀"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다 인도에서 원시 불교가 발생하면서 당시 불교와 경쟁했던 조로아스터교에 용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숭배하는 종교였기 때문에, '불을 뿜는 악한 용'이라는 형상이 생겨났다. 원시불교의 여러 설화에 따르면 이 불을 뿜는 악한 용이 석가모니의 말씀을 받아들여 불교에 귀의하면 불법을 지키고 석가모니를 보호하는 선한 호법용(護法龍)으로 변하기도 한다. 

- 서양 영웅담에서는 용이 종교에 귀의하는 부분이 빠지고 용감한 기사가 불을 뿜는 이교도의 악한 용을 물리치는 부분만 남아 있다. 용이 저지르는 나쁜 짓 목록에는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공주를 납치하는 상황이 반드시 포함되고, 특히 서유럽 영웅담에서는 그래서 용감하고 기독교를 수호하는 선한 기사가 연약한 공주를 용에게서 구출한다. 용도 사실은 다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사연이 있고, 공주도 사람이니까 평생 마냥 저렇게 연약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 천편일률적인 구도를 좀 뒤집어보고 싶었다. 

- <사막의 빛>은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한 뒤에 쓴 이야기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와 문화의 충돌은 여러 가지 갈등을 낳고 있으며 이슬람교는 무조건 악하고 폭력적인 종교로 매도되고 있다. 내가 가서 직접 본 중앙아시아는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공부하면서 확실히 알게 된바, 중앙아시아는 이슬람교 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실크로드의 후예들답게 특유의 융통성 있고 조금은 유머감각 있는 사고방식과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건강하고도 풍성한 상인 문화를 일으킨 지역이다. 그래서 이 지역을 배경으로 전혀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주인공이 신비로운 여행을 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내가 한국인이니까 고려의 용도 하나쯤 넣어주고 싶었다. 위에서 말한 서양의 불 뿜는 용과 반대로 동양의 용은 물을 다스리는데 이런 정반대의 특징은 중국을 통해 불교가 한국과 일본에 전해지면서 생겨났다고 한다.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쌀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민족이라 날씨, 특히 비가 얼마나 오느냐가 국가 경제에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고 그러므로 농민들은 비를 지배하는 토착신을 이전부터 믿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불교가 전해지면서 이 비를 지배하는 신에 선한 호법용의 형상이 합쳐져서 물을 지배하는 용신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용 얘기는 다 재미있는데 동서양의 정반대 되는 형상 부분이 특히 재미있다. 
 
- 표제작 <여자들의 왕>은 아주 농염하고 화끈한 여자들의 관능적 권력투쟁을 과가 괜찮아서 만족한 이야기이다. 성경에 나오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다윗 이야기는 사실 나는 잘 모르는데 옛날에 트위터에서 누군가 언급했던 걸 본 적이 있다. 사울, 요나단, 다윗 전부 남자들이라서, 마찬가지로 주인공을 전부 여자로 바꾸기로 했다. 이야기를 쓰다 보니까 요나단과 다윗보다는 살로메와 세례자 요한에 더 가까운 줄거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화자인 "나"만 생각하고 쓰기 시작했는데 다 쓰고 보니까 "누이"가 대단히 위험하고 음험하고 그러면서도 예쁘고 그래서 더 위험한, 일종의 '여자 낚는 팜므파탈'로 묘사되어 만족스럽다. 

- <어두운 입맞춤>은 흡혈귀 이야기인데,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내 멋대로 적당히 섞어서 만들었다. <벙어리 삼룡이>에서 주인공 삼룡이는 남성, 삼룡이가 사랑하는 안방마님은 여성, <드라큘라>에서도 흡혈귀는 남성이고 흡혈귀의 사랑의 대상은 여성인데 이런 구도를 뒤집고 싶었다. 그런데 <벙어리 삼룡이>의 구도 속에서 삼룡이는 신분과 외모로 인해 권력이 없는 취약한 인물이고 안방마님은 가부장제 하에서 남편에게 학대당해도 저항할 수 없는 성별 권력적으로 취약한 인물이라서 이 두 인물의 취약성을 바꾸거나 없애서 더 좋은 이야기를 만들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구도는 그대로 두고 여성 주인공을 인간이 아니도록 바꾸어서 권력을 주었다. 여성이 귀신이나 괴물이 되어야만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슬프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 마지막에서 두 번째에 수록된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는 대학원에서 배운 동슬라브 원초 연대기와 외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보고 들은 집안의 역사를 바탕으로 썼다. 동슬라브 원초 연대기에는 유일한 여성 군사령관 올가 공주가 등장한다. 남편 이고리 왕자가 외적에게 살해당하고 올가 공주 본인은 어린 아들과 둘만 남은 상태에서 적군의 지배자에게 강제로 시집갈 위험에 처한다. 그러자 올가 공주는 여러 가지 꾀를 써서 적들의 군대를 생매장하기도 하고 태워 죽이기도 하고 나중에는 적들의 본진으로 쳐들어가서 완전히 섬멸시킨다. 그러나 올가 공주가 유일하고도 처음이자 마지막 여성 군사 지휘관이며 이후 동슬라브 중세 역사에 이런 진취적인 여성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게 슬퍼서 내 상상 속에서라도 올가 공주의 대를 이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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