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지니 게인스버스] 성소수자 지지자를 위한 동료 시민 안내서

일루젼 2022. 8. 1.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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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지니 게인스버스 / 허원
출판 : 현암사
출간 : 2022.05.02


       

 

타인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닿길 바라는 노력과 의지,
거기서 오는 용기,
용기 있는 목소리만이 갖는 프라이드.     

내 목소리가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당신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당신은요, 필립.
당신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많나요?  

- <Pride 中>

 

 

 

대다수의 매체에서 비추는 성소수자들의 모습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사람들과 너무도 달라서, 그를 접하는 이들에게 손쉽게 선을 긋게 만든다. 그러나 왜곡된 모습의 한켠에는 그들을 제대로 담아낼 만큼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담겨있다. 

 

내가 '나'임이 당연하고 자랑스럽다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내게 낯설다고 해서 이미 존재하는 이들을 '나에게' 맞추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은 다수의 폭력이며, 사실 언제까지 다수일지 알 수 없는 일시적인 권력이다. 이런 의견은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적어도 한 번 정도는 내가 무엇을 불편해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내가 싫은 행동을 '이성'이라는 이유로 타인에게 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나에게 괜찮지만/당연하지만 타인에게는 그렇지 않은 언행에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예민하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왜 그렇게 따지고 드냐' 등의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렇게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낀다는 -실제로 그들이 특혜를 받고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의미이므로 타인이 의식의 변화를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상대의 의사 표현에 '상대를' 탓하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자각을 해야 할 부분이고, 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에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면 그 지점부터는 폭력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 '나는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걸 느낄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걸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섬세함이 '공감력'이라고 생각한다. 또 타인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에게 여유가 있다는 반증이라고도 생각한다. 그것이 '나만을 위한' 선택이 아니며 동시에 '나에게도' 의미가 있는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여유.

 

타인을 위한 배려가 나에게 손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 누군가가 나와 다르다는 것만으로 그에게 공격성을 내보여도 된다면, 타인이 같은 이유로 나에게 그런 행동을 해도 된다고 허용하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사람이고, 자신만의 일상이 있다. 오이를 좋아한다고 해서 당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돌을 던질 자격은 없는 것이다. 대부분은 둘 다 별로 안 좋아하겠지만.   

 


   

- 당신의 정체성들을 모두 더하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다. 지구 역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자기 자신이라는 수프에 들어가는 재료 구성이 당신과 똑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 그럼에도 살면서 당신은 한 가지 재료만으로 구성된 요리로 오인된 적이 여러 번 있을 것이다.

- 샘 킬러먼

 

 

- 그러던 어느 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남편이 선물한 책 <우리 자신만을 위한 일은 아니다 Not for Ourselves Alone>를 읽고 있었다. 켄 번스가 연출한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연계해 출간된 책으로, 미국 여성 참정권 투쟁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는 나보다 앞서 내 투표권을 위해 싸워준 위대한 여성들에게 경외감과 감사의 마음이 들었고 이 책에 무척 감명을 받았다. 역사책을 읽을 때의 내 버릇대로 내가 그 시대를 산다고 가정하고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상상해보았더니, 나도 수전 B. 앤서니와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과 싸웠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이 책은 어떻게 하면 성소수자와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서 앨라이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지, 왜 앨라이가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LGBTQ+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이라든지 LGBTQ+ 차별의 역사, 앨라이가 중요한 이유 등을 조명한 많은 훌륭한 책과 영화, 영상, 블로그 등이 있다. 그것들은 LGBTQ+가 아닌 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하는 목적에서 만들어진다. 이 책에는 그런 목적이 없다. 나는 여러분이 세상은 지금보다 더 성소수자에 포용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이미 공유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자신이 그 일을 도울 수 있을지 알고 싶어 이 책을 집어 들었기를 바란다. 

 

- 젠더 규제가 없을 때 우리 모두가 훨씬 더 자유롭고 진정성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책은 각각 다음을 주제로 한 네 개의 파트로 나뉘어 있다. (1) 앨라이로서의 식견 쌓기, (2) 존중을 기반으로 대화하는 기술, (3) LGBTQ+에 포용적인 공간을 만들기 위한 행동들, (4) 책임 있는 앨라이 되기. 

 

- '앨라이'는 특정 소수자 집단에 당사자로서 속하지는 않지만 그 집단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사람을 뜻한다. 전형적으로 LGBTQ+ 옹호의 맥락에서 '앨라이'라고 하면, 우리는 이성애자이면서 트랜스젠더가 아닌 사람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LGBTQ+ 공동체의 일원이라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LGBTQ+의 앨라이가 될 수 있다. 여러분이 만약 레즈비언이라면, 바이섹슈얼 혹은 팬섹슈얼 커뮤니티의 앨라이가 될 수 있다. 여러분이 만약 백인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면, 유색인 트랜스젠더 여성들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앨라이가 될 수 있다. 

 

- 자원 활동을 시작할 당시 LGBTQ+ 친구나 지인도 없었다. 이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참여하게 된 계기를 묻곤 한다. 이 질문이 촉발한 강력한 명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자신이나 자기 가족, 친구의 문제가 아니라면 특정 사회정의 이슈에는 관심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내게 LGBTQ+인 가족이 없어서 환영받지 못할 거라고 걱정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 사실을 공유하는 것이 LGBTQ+에 대한 형평성과 포용력을 위한 투쟁 그 자체가 지닌 가치를 승인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일반적으로 성적 끌림은 우리가 성적 활동(열정적인 키스, 성관계, 구강성교 등등)을 함께하고 싶어 하는 사람과 관련 있다. 낭만적·애정적 끌림은 우리가 정서적이고 애정적인 행동(손잡기, 끌어안기, 전화로 장시간 수다 떨기 등등)을 함께하고 싶어 하는 사람과 관련 있다. 만약 여러분이 같은 유의 사람들에게 성적으로도 낭만적으로 끌리며 두 끌림의 종류를 정확히 구분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이 두 가지 끌림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끌림과 행위를 구분하는 것은 보건의료 관련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매우 중요하다. 보건의료계 종사자가 사람들을 돌보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 질문을 해야 한다. 따라서 성 매개 감염질환을 검진할 때의 질문은 당사자의 성적 행위에 관한 것이어야지, 그가 자신의 지향을 어떻게 정체화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보건의료계 종사자들이 이런 질문 자체를 건너뛰거나(모든 사람이 이성애자라고 가정한다) 환자의 지향에 대해 묻는("당신은 LGBT인가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남성과 섹스를 하는 남성'을 뜻하며 주로 유색인 커뮤니티에서 사용되는 MSM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성애자로 정체화하지만 남성과 섹스를 하는 남성들은 의료 기관에서 그들의 성적 행위를 파악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 보건의료계 종사자들은 환자를 온전히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입원 수속 양식을 만드는 데 그 정보를 활용해야 한다. 끌림과 행위의 차이를 이해하고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더 포용적이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있어 앨라이가 맡을 수 있는 효과적이고도 중요한 역할이다. 

 

- 우리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추측은 위험하다. 타인에 대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거나 아는 것은 그들의 '젠더 표현'일 뿐이다. 나머지, 즉 생물학적 성, 젠더 정체성, 끌림, 친밀한 행위 등에 관해 추측하려 하지 말자. 앨라이로서 우리가 상대방을 존중하려면 그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들 -그가 어떻게 불리거나 지칭되고 싶어 하는지- 등에 집중해야 한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커밍아웃을 했다는 것은 거짓말하거나 기만적으로 살고 싶지 않고 진정성 있게 살고 싶다는 뜻이다. 성적 행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르다. 커밍아웃은 절대 '침실에 관한' 주제가 아니다. LGBTQ+들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언제나 LGBTQ+다.  

 

- 몇 달 전, 나는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여성과 각자의 목적지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저는 덴버로 가요. 제 딸이 결혼을 하거든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우와! 축하드려요! 따님이 선택한 파트너가 마음에 드세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네,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파트너'라는 말을 써주니 기분이 참 좋네요. 딸애가 여자와 결혼하거든요."

- 만약 내가 "사위가 마음에 드세요?"라고 물었다면 그녀는 내 질문을 바로잡아주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네, 뭐"라고 간단히 답하고 고개를 돌려 좌석 등받이에 꽂힌 비상시 착륙 안내문을 읽는 시늉을 했을 수도 있다. 요컨대 나는 '파트너'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녀에게 자신의 딸이 누구와 결혼하는 것이든 내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언어적으로 알려준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성애자일 거라는 가정(즉, 이성애 규범성)은 매우 흔하며, 반드시 상대에게 상처를 주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이에 관해 떳떳하지 못하다.  

 

- 3장에서 언급한, 식료품점에서 남편에게 줄 꽃을 사던 내 친구 조너선을 기억해보자. 계산원이 "꽃이 참 예쁘네요. 아내분 선물인가 보죠?"라고 말했을 때의 상황을 좀 더 들여다보자. 만약 조너선이 아내를 위해 꽃을 사는 것이었다면 그저 "네"라고 대답하고선 이 질문이 누군가에게 어떤 스트레스 혹은 공포를 줄 수 있는지 전혀 모른 채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을 위해 꽃을 사는 것이었던 조너선은 계산원의 언어 때문에 궁지에 몰린다. 그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거짓말하기 : "네, 아내에게 주려고요."

말 돌리기 : "방금 제 토마토 떨어뜨리셨어요."

커밍아웃하기 : "아뇨, 실은 제 남편에게 줄 거예요."

 

- 많은 LGBTQ+들에게 매우 불안한 순간이다. 만약 친구들에게는 커밍아웃을 했지만 부모님에게는 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님도 아직 모르는 자신의 지향을 식료품 직원에게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만약 극도로 동성애 혐오적인 사람이 바로 뒤에 줄 서 있어 이 대화를 듣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 젠더를 걷어낸 언어를 사용할 경우 우리는 누군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상황을 피할 수 있고, 더 안전한 환경을 만들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시스젠더 이성애자로 살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 아님을 우리가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다. 

 

- "꽃이 참 예쁘네요. 받으시는 분은 참 좋겠어요." 누구에게 줄 선물인지 손님이 이야기하고 싶으면 할 수도 있으면서, 공적인 공간에서는 밝히지 않을 여지 역시 두는 말이다. 그저 미소 짓고 "네"하고 말아도 되는 것이다.

 

- '덧붙이기' 기법은 대화 시에도 자주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상대방의 젠더에 관한 가정을 하면서 살아간다. 젠더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이미 그런 가정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시스템을 아직 만들지 못했다면 우리는 어색하게 '덧붙이기'를 하곤 한다. 옆 사람에게 슬쩍 "저 사람 남자예요, 여자예요?"라고 물어보고야 마는 것이다. 젠더가 불명확해 보이는 이와 함께 있는 상황에서는 먼저 이렇게 자문해보는 게 좋다. '내가 저 사람의 젠더를 알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저 사람의 젠더가 이 대화에 중요한 정보인가?' 많은 경우 답은 '아니요'다. 상대방의 젠더를 모르더라도 대부분의 상황에서 대화를 순조롭게 이어나갈 수 있다. 

 

- 여러분의 작은 말실수가 엄청나게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때, 정확하게 말하고자 했다는 의도는 존중 없는 언어 사용에 대한, 혹은 누군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 논바이너리들은 '그 he/그녀 she'라는 잘 알려진 대명사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이분법적이지 않거나 젠더 중립적인 대명사를 사용할 수도 있다. 여러 가지 비이분법적, 젠더중립적 대명사들이 있지만 미국에서 현재 가장 자주 사용되는 대명사는 단수형의 '그들 they'이다. 만약 여러분에게 문법 강박증(나는 이 말을 애정을 담은 용어로써 사용한다)이 있다면, 고개를 내젓거나 심지어 몸서리를 칠지도 모르겠다. 그런 고통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정보가 있다. '단수형 그들' 즉 they는 이제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두 번째 단어 정의로 이렇게 등재되어 있다. "불특정적 젠더를 지닌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 예컨대, "Ask a friend if they could help(친구에게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보라)." 

 

- 2019년 9월 미리엄웹스터는 온라인 사전에 they의 정의에 논바이너리를 지칭하는 대명사라는 설명을 추가했다. 그러니 문법 강박증자들이여, 여러분도 이 대명사를 사용해도 된다! 우리 대부분은 내내 they를 일상에서 부지중에 자주 사용해왔다. 예컨대, 'Oh shoot! Someone left their cell phone. I hope they get it back(저런! 누군가가 휴대전화를 두고 갔네. 그 사람이 와서 찾아가야 할 텐데).' 누군가의 젠더를 모를 때는 경험을 토대로 추측해서 말하기보다 they를 대명사로 사용하는 게 어떨까. (비이분법적 대명사의 효과적인 용례에 관해서는 5장을 보라.) 
 

-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면 가급적 타인을 존중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많을 것이므로, 실수를 했을 때 굉장히 괴로워하며 본능적으로 장황하게 사과를 하기 쉬울 것 같다. 보통은 그럴 경우 상황이 더 안 좋아지는데, 이는 대화의 초점을 당신 자신에게로 가져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실수한 상대방은 자신이 당신을 달래줘야 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니 자신의 실수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말도록 하자. 담백하게 사과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단, 실수를 했다면 바로잡도록 노력해야 한다. 

 

- 자, 여러분이 실수를 해버렸다. 사과를 했다면(울지 않고 이상적인 방식으로), 이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낼 차례다. 이따금 실수로 타인의 젠더를 잘못 말하는 일은 당황스럽지만 종종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 모두가 저지르는 일이다. 잘못을 바로잡지도, 더 신경을 쓰지도 않고 반복해서 고의로 젠더를 잘못 말한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다음은 실수를 바로잡기 위한 몇 가지 조언이다. 

 
- 이 모든 것이 너무 새롭고 낯설 수 있다. 당신은 벌써 조금은 압도당한 기분으로, 분명히 실수를 하고 말 거라고 걱정할지도 모르겠다. 아마 실수는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실수를 한다. 결코 실수하지 않아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압박을 내려놓는 것이 관건이다. 실수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이되, 만약 실수했을 경우 먼저 인정하고 상대방에게 사과를 한 후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 안드레아 에이바지언 Rev. Dr. Andrea Ayvazian 목사는 <대화 만들기: 백인 앨라이 되기>라는 강의 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잘못할 겁니다. 그래도 하세요. 그래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해낼 수 있는 기여보다 여러분의 두려움이 더 커지게 두지 마세요."

 

- 레즈비언들은 전부 짧은 머리카락에, 플란넬 셔츠를 입고, 운동경기를 즐기며, SUV 차량을 몬다? 게이들은 전부 패션 감각이 좋고, 드라마틱한 노래를 즐겨 부르고, 꾸준히 몸을 만들며, "어머, 자기야!"라는 말을 많이 한다? 틀렸다. 물론 확실히 그러는 이들이 있긴 하다.  

 

- 내가 워크숍에서 이성애자/시스젠더 앨라이에 관한 신화와 스테레오 타입을 열거해보라고 하면 참가자들은 전부 멍하게 나를 바라본다. 이성애자/시스젠더 앨라이에 관한 신화와 스테레오 타입도 있냐고 물으신다면, 물론이다!

 

- 막간 퀴즈!  LGBTQ+ 커뮤니티의 이성애자/시스젠더 앨라이들에 관한 가장 흔한 '신화나 스테레오 타입'은 무엇일까? 해당되는 것을 모두 고르시오.

A. 앨라이들은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중에 LGBTQ+가 있다.

B. 앨라이들 본인이 실제로 LGBTQ+이다. 아직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을 뿐.

C. 앨라이들은 멋지다!

정답: A 그리고 B (C는 팩트다)

 

- 내 경험상 앨라이에 관한 가장 흔한 두 가지 신화는 그들의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중 LGBTQ+가 있거나 그들이 거기에 개입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개인의 사적인 문제니까'라는 신화), 그리고 앨라이 본인이 커밍아웃만 안 했을 뿐 실제로 LGBTQ+라는 것('벽장일 뿐’이라는 신화)이다. 

 

- '교차성'은 1989년 킴벌리 크렌쇼 kimberlé Crenshaw가 고안한 단어다. 2016년 테드 강연 "교차성의 역설 The Urgency of Intersectionality"에서 크렌쇼는 이 단어를 만드는 데 소송 한 건이 매개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자동차 제조 공장에 취업하고자 지원했지만 고용되지 못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인 에마 드그래펀레이드 사건이다. 드그래펀레이드는 이것이 인종 및 젠더 차별 사건이라고 판단했지만 판사는 기각했다. 판사의 근거는 그 회사가 흑인 남성을 생산직과 관리직에 다수 고용 중이므로 회사는 인종에 기반해 차별하지 않음이 증명된다는 것이었다. 또 회사가 백인 여성을 비서직에 다수 고용하고 있으므로 젠더에 기반해 차별하지 않음 역시 입증된다고 했다. 다음은 크렌쇼의 말이다. 

- 나는 이 사건에 매우 충격받았다. 부정의가 제곱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첫째, 흑인 여성은 그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둘째, 법정은 법적으로 이를 하찮게 만듦으로써 이 배제를 더욱 강화했다. 게다가 이 문제를 지칭하는 이름도 붙어있지 않았다. 모두가 잘 알다시피 '이름이 없으면 그 문제를 알아볼 수가 없고, 문제를 볼 수 없으면 그걸 해결할 수도 없다.' 

- 이것은 산수 등식처럼 정체성들을 덧셈해 답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드그래펀레이드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을 위한, 그리고 백인 여성을 위한 법적 보호의 틈새로 미끄러졌다. '교차성'이라는 용어는 우리의 여러 가지 정체성이 여러 겹의 차별을 불러올 수 있음을 인식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 능력 있는 앨라이 겸 교육자로서의 여정을 이어나갈 때, 중요한 것은 학습자였던 우리의 경험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만약 지금 내 머릿속의 지식들이 도전을 받고 있다면, 어떤 경우 대화를 그만두고 싶을 것이며, 어떤 경우 새로운 생각들에 귀가 열릴 것인가?' 하고 자문해보자. 

- 누군가 여러분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무언가를 지적했을 때, 즉 여러분의 말이나 행동이 다른 이에게 공격적이었다고 당신에게 표현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때의 의사소통이 효과적이었는가? 그 소통에서 무엇이 효과가 있었고, 무엇이 그렇지 않았는가? 내가 사람들에게 그런 상황에서 효과가 있었던 것과 없었던 것을 물어보면 주로 다음과 같은 답을 얻을 수 있었다. 

 

- 반대되는 관점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정중하고도 유용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수년간 나는 이에 관해 고민해왔고, 모두가 덜 방어적인 태도로, 새로운 생각에 더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데 도움이 되는 효과적인 팁의 목록을 만들어왔다. 나는 루와의 대화에서 이 기술을 거의 모두 사용했다.  

 

- 만약 상대방이 기분 나쁜, 구식 용어를 사용하거나 여러분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을 한다면, 그 의도가 일부러 상처를 주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라고 가정하자. 이렇게 간단하게 가정함으로써 여러분은 존중에 기반한 대화를 해나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내가 하는 모든 교육 활동의 토대가 되는 근본 원칙이기도 하다. 상대방이 최신 버전의 올바른 용어를 머릿속에 아직 넣지 못했을 뿐이라고 가정하기만 해도 -대개는 실제로 그렇다- 훌륭한 상호작용을 하기에 적절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 

 

- 명심할 것은, 상대방이 좋은 의도일 거라 가정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용인하고 진지한 대화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가정하는 건 오히려 중요한 대화를 위한 초석일 뿐이다. 선한 의도를 가정한다고 해서 무례한 행동을 용인하거나 상처 입히는 말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서 무심하고 폭력적인 언행에 면죄부를 줄 순 없다. 대화의 초점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의 의도가 아니라 그 말과 행동이 미치는 영향에 맞춰져야 한다. 그렇지만 만약 어떤 어휘와 정보에 대해 질문하거나 그 개념들에 대해 논하지 못하게 한다면 사람들은 무안하고 당황해 아예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 자신이 어느 지점에서 예민해지는지 인식하자. 개인적으로 여러분이 어떤 질문과 주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아는 것은 능력 있는 교육자가 되는 데 중요한 과정이다. 자신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점을 파악하고 나면, 혼자 있는 공간에서 침착한 상태에서 적절한 반응을 연습해볼 수 있다. 자신의 민감한 지점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발언이나 질문을 접하고는 귀와 코에서 김이 뿜어져 나온다면, 일단 시간을 버는 게 좋은 전략이다. "그에 대해 생각해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라든가 "아이고, 내 정신! 오븐에 피자가! 잠시 있어봐요. 곧 돌아올게요!"라든가. 

 

- '나는 웬만하면 어딜 가든 안전하고 편리하게 용변을 볼 화장실을 찾을 수 있다.' 
'내 남편과 나는 웬만하면 어디서든 안전을 걱정하지 않은 채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다.'
'나는 의료적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부적절하게 다뤄지거나 내 젠더 정체성과 다른 병동에 배치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자라면서 나는 나처럼 시스젠더 이성애자들이 학교 교과 과정에서, 책에서, 영화에서 재현되는 모습을 끊임없이 봐왔다.' 

이러한 일상적인 현실은 LGBTQ+에게 더 포용적인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작업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앨라이로서 바람직한 활동은 자신의 일상에서 스스로 이렇게 자문해보는 것이다. "만약 내가 ['유색인 트랜스 여성', '청각장애를 가진 동성애자 남성', '16세의 에이섹슈얼 소년' 등으로 빈칸을 채워보자] 라면, 이 상황이 어떻게 다를까?" 이런 예시를 사용해 여러분은 쉽게 할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럴 수 없는 것들을 파악해보자. 

 

- "그냥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많은 사람들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데 모든 이를 똑같이 대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공정하고 정당하게 대하기 위해 다양한 집단에 대해 배워야 할 필요를 못 느낀다. 이것은 마치 "저는 피부색을 보지 않아요”라는 말과 비슷하다. 주변화된 커뮤니티의 사람들에게 이런 발언은 매우 민감하게 작용한다. 이럴 때 앨라이들은 거기에 개입해, 상대의 선한 의도를 가정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우리가 아는 것을 공유하고, 진실을 밝힐 안전한 공간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질문을 들었을 때 앨라이로서 접근하기 가장 좋은 출발점은 심호흡을 하고 그 질문이 친절함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질문을 한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그는 모든 이를 똑같이 대하는 것이 불공정하고 편파적인 세상을 바로잡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일은 그들의 선의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그들의 기여에 감사하고, 그들이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 나는 그저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함을 이해시키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사용한다. 하나는 동등함 equality과 형평성 equity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 모두가 교차적 존재로서 고유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것은 잘해야 비생산적이고 자칫 모욕적일 수 있음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 동등함은 모든 이가 같은 것을 얻거나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인데, 이것은 모두가 같은 출발점에 있고 같은 필요를 가질 때에만 공정하다. 형평성은 개인들에게 각자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 동등함은 모든 병사에게 270 사이즈의 신발을 제공하는 것이고, 형평성은 각자의 발에 맞는 치수의 신발을 제공하는 것이다.

 

- "나는 항상 싱글인 내 동료가 좋은 여자를 만나도록 도와주려고 하거든. 오늘 내가 그에게 내 이웃을 소개하려고 했더니 그가 내게 '나 게이야! 됐냐?'라고 소리를 지르지 뭐야." 
"어젯밤에 바에서 정말 멋진 여자를 만났어. 자기가 바이섹슈얼이라길래 나는 그게 엄청나게 섹시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더니, 나보고 개자식이래." 

이것들은 모두 미묘한 차별에 해당한다. '미묘한 차별 microaggression'은 하버드대학교 교수 체스터 M. 피어스 Chester M. Pierce가 처음 사용한 용어다. 미묘한 차별은 일상적으로 흔하게 사용되어 인식조차 하기 어려운 상처와 모욕을 주거나 비하하는 발언이나 행동으로, 의도적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위에 소개한 사례들 중 어느 경우도 일부러 비하하거나 상처 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실제로 두 번째 사례는 동료에게 데이트 상대를 소개해주려는 명백히 친절한 의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의 화가 난 반응을 맞닥뜨렸을 때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앨라이로서 우리는 그들의 친절한 의도를 인정하되, 그들이 자신의 말이 갖는 효과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내 친구 모어는 일상에서 반복되는 미묘한 차별이 마치 반복해서 팔에 딱밤을 때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 할 일을 지시받기를 싫어하는 것 할 일을 지시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PC함, 즉 정치적 올바름을 이유로 무언가를 바꿔야 한다고 압박받을 때 특히 그래야 할 이유가 납득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불만, 분노, 저항감을 느끼기 쉽다. 도움이 될 만한 한 가지는 PC함이 그들의 머릿속에서 의미하는 바를 바꿔보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PC를 'politically correct(정치적 올바름)' 대신 'pleace consider(한번 생각해봐 주세요)'를 뜻하는 머리글자로 바꿔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언어를 바꿀지 말지는 그들이 선택할 것이다. 그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단속하는 경찰에 딱지라도 끊길 것 같다는 걱정은 그만하고 언어를 바꾸라고 요청하는 이유를 생각하는데 에너지를 쓰게끔 하자. 그들도 이해가 된다면 바꿀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잘 알고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고, 시간을 갖고 선택하거나 선택을 변경할 수 있도록 여유를 주자. 어린아이일 때 무심코 사용했지만 이제는 모욕적이라고 생각하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하자. 이를 통해 그들 자신이 이미 단어를 선택하면서 살고 있으며, 평생 의도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우리가 LGBTQ+ 커뮤니티를 위해 가시적인 지지를 문 앞에 내보이면, 그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지지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LGBTQ+들에 대해 잘 알게 된다. 하지만 LGBTQ+에 대한 가시적 지지는 그 문을 열고 들어오지 못하는 이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눈에 띄게 LGBTQ+를 지지하는 것은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 일이다. 

 

- 실제로 알아야 할 정보가 무엇인지 숙고해본다. 그런 다음 기존의 질문이 그 대답으로 인도하는지 살펴본다. 환자의 생물학적 성별을 알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의 젠더를 알아야 하는가? 환자의 성적 지향을 아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기 위해 성적 행동을 알아야 하는가? 환자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아야 하는가, 아니면 뭐라고 칭해야 할지를 알면 되는가? 양식은 해당 기관의 실제 필요에 맞게 변형되어야 하며, 주기적으로 수정 및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 

 

- 프로그램 제작 업체에 연락해 더욱 포용적인 범주를 만들 것을 촉구한다. 유나이티드항공은 최근 젠더 선택지에 바이너리 항목을 추가했고 페이스북은 젠더 항목과 대명사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게 했다. 

 

- 나는 포용적 공간 만들기 워크숍을 열었던 기관에 들어갈 때 트랜스인 공동 진행자의 젠더가 오인되고, 그가 '실명'으로 명부를 작성해야 하며, 예전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모두 앞에서 착용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항상 아이러니함(그리고 기분 나쁨)을 느낀다. 좋은 일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지만 학교와 의료 기관, 회사 등에서 대개 큰 그림은 건드려지지 않으며 목표로도 설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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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나는 유년기 환경 덕분에 내가 관용적인 아이로 자랐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어릴 적 쓰던 책상을 치우면서 8학년(대략 1977년경) 과학 수업 시간에 단짝 친구와 주고받은 쪽지를 찾아냈는데 거기엔 동성애자들에 대해 나눈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친구는 동성애자들이 "역겹다"고 썼고, 나는 단호히 반박했다. "야, 정신 차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은 다 달라!" 

 

- 어원에 관심 있는 '용어 덕후'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접두사 cis와 trans는 원래 라틴어로, cis는 '이 편'을, trans는 '다른 편' 혹은 '건너편'을 뜻한다. 따라서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출생 시 지정받은 성별이 당신의 젠더 정체성과 들어맞거나 같은 편에 위치한다면, 여러분은 시스젠더다. 만약 그 둘이 서로 들어맞지 않거나 서로 건너편에 위치할 경우, 당신은 트랜스다.

 

- 여러분은 아마도 LGBTQ+ 머리글자 표기의 다양한 버전들을 보았을 것이다. 이 머리글자들과 관련한 내 과거 경험을 간략하게 짚어본 후 이 책에서 LGBTQ+라는 용어 표기를 채택한 이유를 설명하겠다. 이 책이 출판된 2020년 현재 뉴욕주 북부의 관점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정식 머리글자는 LGBTQQIAA2SPP다. 즉,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퀴어, 퀘스처닝, 인터섹스, 에이섹슈얼, 앨라이, 투스피릿(두 영혼), 팬섹슈얼, 폴리아모리'의 머리글자다(이중 익숙하지 않은 정체성이 있다면 책 뒤편의 용어해설을 보고 오면 된다). 그런데 현실은 LGBTQQIAA2SPP라는 머리글자가 너무 길고, 다소 위압감을 주는 데다, 무엇보다도 계속 바뀐다는 것이다. 

 

- 끌림 (혹은 지향). 끌림은 (만약 있다면) 어떤 이가 자신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지에 관한 것이다. 때로 이 범주는 '성적 지향'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모든 지향과 끌림이 성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냥 '끌림'이라고 부르겠다. 우리의 끌림은 성적일 수도 있고 낭만적(혹은 '애정적 affectional') 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낭만적 끌림과 애정적 끌림을 별개의 것으로 느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둘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 이 책에서는 모호함을 피하기 위해 그 둘을 같은 것으로 여기고,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용어로 사용하려 한다. 

- 일반적으로 성적 끌림은 우리가 성적 활동(열정적인 키스, 성관계, 구강성교 등등)을 함께하고 싶어 하는 사람과 관련 있다. 낭만적·애정적 끌림은 우리가 정서적이고 애정적인 행동(손잡기, 끌어안기, 전화로 장시간 수다 떨기 등등)을 함께하고 싶어 하는 사람과 관련 있다. 만약 여러분이 같은 유의 사람들에게 성적으로도 낭만적으로 끌리며 두 끌림의 종류를 정확히 구분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이 두 가지 끌림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실제로는 그에게 별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은 꽤 큰 문제다. 내가 진행하는 워크숍에서 이 팁에 대해 반발한 참가자 중 한 명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나는 학교라는 배경 속 어린아이의 경우로 각본을 바꿔 '역지사지' 기술을 적용해보려 했다. 겨울방학을 맞은 반 학생들에게 그가 인사말로 "연말연시 잘 보내렴" 대신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한다고 가정해보라고 했다. 그중에는 무심히 손을 흔들며 "저희 가족은 '하누카'를 기념해요"라고 말하는 학생도 있겠지만, '선생님은 모든 사람이 다 크리스마스를 챙긴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어쩌면 하누카는 크리스마스보다 덜 중요하거나 덜 가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선생님은 유대인들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지도. 나는 하누카를 기념한다고 말하지 않는 게 낫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나는 그에게 이야기해주었다. 

- 때때로 '역지사지' 기술은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하며 순간적으로 깨닫게 해 준다. 불행히도 위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다. 이 교사는 그럼에도 대개의 학생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므로 자신은 반 학생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겠다고 말했다. 실망이었다. (변화의 씨앗을 심고 사람들이 배우도록 하는 과정에 관한 7장의 논의를 참고하라.) 

 

- 여기 LGBTQ+ 커뮤니티 내에서 볼 수 있는 교차성의 예가 있다. 83세의 게이 남성이 요양시설에 거주하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30대 게이 남성의 경험과 83세 이성애자의 경험을 그저 합친다면 이 남성의 삶과 경험, 그리고 그가 맞닥뜨리는 독특한 고난에 대해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게이 남성인 동시에 노인이기 때문에, 성적 지향을 이유로 체포되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다는 이유로 정신장애를 진단받고, '교정'한다는 명목으로 전기충격 치료를 강제로 받아야만 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이런 삶의 경험들 때문에 의료 및 정신건강 전문가들에 대한 불신이 커졌을 수 있다. 이 사람은 새로 입소한 요양시설에서 사회적 관계를 덜 맺으려 할 것이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지금껏 누구와 함께 살아왔는지를 숨기려 하기 쉽다. 단편영화 <가시성 프로젝트 Project Visibility>에서 노인 요양보호 전문가인 마샤 로빈슨 Marsha Robinson이 말하듯, 이런 사람의 이야기는 누락되기 쉽다. 

- 내 예상대로 우리 중 누구도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사실상 매우 즐거운 식사 자리였고, 헤어질 때 포옹을 나누면서 루는 다음에 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겠다고 말했다. 아마도 내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우리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뿐, 둘 다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 같은 것을 원하고 있었다. 둘 중 누구도 자신의 핵심적 신념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지만(무엇보다 우리는 웬만해선 잘 배우려 하지 않는다), 서로에 대해 아주 존중하게 되었고 상대방의 관점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잠재적 변화의 씨앗을 심었을지 누가 아는가? 

 

- 때때로 누군가의 발언이나 걱정은 자기 아들이 동성애자 교사에게 배우는 것을 꺼렸던 아버지의 경우처럼 미묘하다. 만약 이 아버지가 여러분에게 걱정을 털어놓았는데 여러분이 이렇게 반응했다고 생각해보자. "흠.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아들이 동성애자 교사의 수업을 듣는 데 아무 이의 없어요." 이것은 LGBTQ+ 커뮤니티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지만, 실질적으로 관건인 '걱정'을 다루지는 못한다. 

 

- 더 나은 방법은, 이 아버지가 아들이 동성애자 교사에게 배우는 것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무엇이 걱정인지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독려해 그것을 경청한 후 그 두려움 이면에 있는 신화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사회사업분야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밟는 동안 내가 깨달은 한 가지는 다른 질문보다도 '왜'로 시작하는 질문을 먼저 던질 경우 사람들은 더욱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나요?" 대신 "당신이 그렇게 말하도록 만든 건 무엇일까요?"가 낫다. 아니면 그저 "당신이 걱정하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주세요"라고 해도 좋겠다. 

 

- 그렇게 해서 문제의 근본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이 사람이 갖고 있는 지식에 동성애자 남성에 대한 몇몇 혹은 여러 신화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동성애자 남성이 소아성애 경향을 갖고 있고, 소년들에게 나쁜 역할 모델로 작용할 수 있으며, 소년들을 게이 '라이프스타일'에 물들게 만들려 하고, 극도로 문란하다고 실제로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 이제 여러분이 선택할 차례다. 속으로 '와! 이 남자 완전 동성애 혐오자잖아!' 하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면 공감하며 이 사람이 부모로서 마땅히 그럴 수밖에 없는 행동을, 즉 잠재적으로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으로부터 자기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행동을 하는 거라고 인정할 수도 있다. 이 사람을 동성애 혐오적인 멍청이가 아니라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을 뿐인 걱정 많은 좋은 아버지로 생각하는 것이 존중에 기반한 대화를 시작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 이제 이러한 팁들을 활용해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존중에 기반한 대화를 시작해 서로의 생각과 경험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자신이 동성애자 남성에 관한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 이야기할 수 있고 여러분도 자신의 경험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만약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동성애자 교사에 대한 좋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자. 만약 여러분이 실제로 신화가 틀렸음을 증명하는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도 공유하도록 하자. 

 

- 여러분이 모든 신화와 스테레오 타입과 오해에 대해 언제든지 반박할 수 있는 팩트들을 모조리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밖으로 나가 대화를 하기 전부터 반드시 모든 반박 자료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모두 해나가면서 배운다. 끊임없이 스스로 배우고, 팩트에 익숙해지고, 더 잘 알게 되면 다시 대화의 현장으로 돌아오는 것을 잊지 말자. 

- 몇 년 전 내가 필라델피아에서 진행한 워크숍에서 한 시스젠더 게이 남성이 굉장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미국에서 LGBTQ+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는 지역의 대학생이었던 그는 자신이 혼자이고 지지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자신이 게이임을 겨우 용인하고 있었고,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대학 2학년 때, 그가 수업을 듣는 건물에서 LGBTQ+들에게 안전한 공간임을 뜻하는 무지개 스티커를 문에 붙여둔 교수 연구실이 두 곳 있었다. 그는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아무도 없을 때 그 스티커가 붙은 연구실 앞 복도에 가서 '힘을 얻으려고' 그 앞을 왔다 갔다 했다고 말해주었다. 교내에 동성애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교수가 두 명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었다. 그는 그 스티커들이 자신을 살렸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그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지는 않았기에, 두 교수는 자신이 한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는 걸 지금까지 알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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