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조지 맥도널드] 공주와 고블린

일루젼 2022. 7. 3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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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조지 맥도널드 / 제시 윌콕 스미스 / 최순희
출판 : 시공주니어 
출간 : 2019.02.20 


       

고전 중의 고전 '조지 맥도널드'를 이제야 읽게 되었다. 수많은 환상 문학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그의 작품은, 주체적이고 바른 캐릭터와 섬세하고 아름다운 묘사, 지나치게 두렵게 만들지는 않지만 긴장할 수 있는 서사가 잘 녹아들어 반짝인다. 당연한 것은 없는 듯이 신비롭다가도, 등장인물들의 언행을 통해 인간으로서 꼭 갖추어야 할 미덕에 관해 슬쩍 비춰주고는 다시 아름다운 환상 속으로 쏙 사라진다.

 

완전히 매끄럽게 완결되지 않는 점도 큰 매력이라고 해야겠다. <공주의 고블린>은 사실 크게 분류하자면 액자식 구성으로,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조지 맥도널드의 목소리로 시작과 끝을 맺는다. 저자는 자기 자신을 잊고 공주다운 품성을 잃어버린 공주들에게, 자신이 공주라는 걸 일깨워주어 공주다운 모든 아름다운 점들을 부여할 수 있어서, 즉 '어린 소녀는 모두 다 공주'라서 공주 이야기를 즐겨한다고 말한다. 그에 더해 자신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소녀들은 결코 거만해지거나 우쭐해하지 않을 거라는 첨언에서조차 작가가 딸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느껴진다. 

 

동화와 동화가 아닌 이야기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만약 아이들에게는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동화가 아닌 이야기'라면,

'동화'는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일까, '아이들에게도 들려주어도 되는 이야기'일까?

 

나는 '모든 이들이 꿈꿀 수 있는 환상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사족. 메이저 아르카나의 흐름대로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 조지 맥도널드 (George MacDonald, 1824~1905)

조지 맥도널드는 1824년 스코틀랜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드넓은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맥도널드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7년 뒤에 새로운 부인을 맞았다. 새어머니는 맥도널드와 다른 형제들을 사랑해 주는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도시 생활을 시작한 맥도널드는 공부는 뒤로한 채 방탕한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어느 귀족 저택의 서재에서 책을 정리하는 일을 했는데, 이때 읽은 신비로운 낭만주의 작품들의 영향으로 그의 상상력은 눈을 뜨게 되었다. 또한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을 것만 같은 대저택의 꼬불꼬불한 복도와 수많은 방, 어두운 다락과 지하실에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훗날 맥도널드가 쓴 작품을 보면이 저택과 비슷한 배경이 많이 나온다.  

대학으로 돌아간 맥도널드는 화학과 물리학으로 학위를 받았지만, 학문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철학적, 형이상학적 의미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1848년 하이베리에 있는 회중교회 대학에서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3년 뒤에는 자신보다 두 살 많은 루이자 포웰과 결혼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성직자가 될 준비를 하던 맥도널드는 결핵에 걸리고 만다. 어머니를 빼앗아 간 병은 맥도널드를 평생 괴롭혔다. 그러나 오히려 믿음과 정신력은 강해져, 스물네 살에 성직자가 되었다. 하지만 신도들은 불신자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파격적인 맥도널드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그는 1853년에 성직자 생활을 그만두었다. 

맥도널드는 성직자 생활을 그만둔 뒤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무렵 맥도널드는 열한 명이나 되는 자녀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신에게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짓는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맥도널드의 친구이자 당시 유명한 동화작가였던 존 러스킨과 루이스 캐럴도 맥도널드의 자녀들에게 자신들이 쓴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세계적인 명작도 출판되기 전 맥도널드의 자녀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1868년 어린이를 위한 새로운 잡지 <어린이를 위한 좋은 글(Good words for the young)>이 창간되었다. 이 잡지에 <북풍의 등에서>, <공주와 고블린>을 차례로 연재하면서 맥도널드는 독자와 평론가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맥도널드는 그 뒤로도 열정적인 작품 활동으로 세계 어린이 문학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길 명작들을 발표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자신을 괴롭혔던 결핵 때문에 세 명의 자녀를 잃었다. 특히 가장 아꼈던 큰딸 릴리아가 세상을 떠나자, 너무나 깊은 슬픔에 잠긴 나머지 아예 말문을 닫아 버렸다. 그 뒤로 비극적인 작품을 펴내던 맥도널드는 침묵 속에서 살다가 1905년에 세상을 떠났다.

 

- 지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아이린 공주와 커디, 북풍 뒤편의 세계를 경험하는 다이아몬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네버랜드의 피터 팬, 시공간을 넘나들며 거대한 세계의 창조와 종말을 경험하는 나니아 나라 아이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한 환상 세계의 공간과 인물들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이유는 이것이 흥미를 위해 창조된 허상이 아니라 현실의 삶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환상 세계는 피하고 싶은 삶의 괴로운 면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힘을 보태 줄 이상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조지 맥도널드는 현실을 바탕으로, 어른들이 만들어 낸 세계에서 어린이 다운 용기를 시험하며 자기 손으로 세계를 구원하는 어린 주인공들을 그렸다. 그래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모험에 담아 보여 준다. 

맥도널드의 견고하고 흥미로운 판타지는 이후 에디스 네스빗, C. S. 루이스, J. R. R. 톨킨, 모리스 샌닥 같은 후대 작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톨킨은 어린 시절 맥도널드의 작품을 읽으며 <반지의 제왕>의 무대를 구상했고, <나니아 연대기>를 쓴 루이스는 맥도널드가 그린 신비주의적 환상 세계가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이야기했다. 조지 맥도널드의 판타지 문학은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많은 어린이와 어른의 마음에 힘을 주고 작가들에게 건강한 상상력을 불어넣고 있다. 

 


- '아이린'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평화'라는 뜻입니다. 고조할머니는 국왕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공주의 이름을 짓도록 허락했는데, 이 사실을 아이린 공주에게 설명하면서 '이름이란 자기 것은 그대로 두고도 얼마든지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거든. 내겐 이런 것들이 아주 많아'라고 말합니다. 즉, 평화란 나 혼자 움켜쥐고 독점하는 게 아니라 남에게 주고 나누어 쓰는 것이란 이야기이지요. 평화는 나눠 가지면 가질수록 더 커질 테고요. 결국 평화란 이름을 지닌 아이린은 같은 이름을 가진 고조할머니의 도움으로 땅 위와 땅속 왕국 간에 대통합을 이룹니다. 

- 조지 맥도널드는 '나는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 같은 모든 사람을 위해 쓴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작품에 불어넣은 평화와 화합, 용기와 배려는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삶의 소중한 가치들을 일깨워 줍니다. 조지 맥도널드가 이 책을 썼을 때는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동화책을 읽을 능력도 여유도 없는 시대였어요. 오늘날엔 모든 어린이들이 이런 재미난 판타지 동화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기쁘고 즐겁게 여겨지지 않나요?

 


-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안개가 산봉우리를 뒤덮으며 계속 뭉쳐 들더니 빗방울로 변했다. 빗방울은 크고 낡은 저택 지붕에 장대비가 되어 쏟아졌다. 지붕에 둘러친 처마마다 빗물이 뚝뚝 떨어졌고, 공주는 물론 밖에 나갈 수 없었다. 공주는 따분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장난감도 이젠 심드렁할 뿐이었다. 만약 내가 공주가 가진 장난감의 절반만이라도 그려 내 보인다면, 여러분은 공주가 왜 그리 심심해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긴 여러분이야 그런 장난감을 가져 보았을 리 없으니, 이해 못 하는 것도 당연하다. 뭐든 가져 보기 전에는 싫증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 공주는 그 할머니가 몹시 나이 많은 파파 할머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렸을까? 그녀는 할머니치고는 상당한 미인인 데다 피부도 백옥처럼 희고 고왔는데 말이다. 그뿐인가. 뒤로 빗어 넘겨 이마와 얼굴을 훤히 드러낸 머리는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전혀 할머니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 머리칼만은 눈처럼 새하얀 은발이었다. 피부는 주름살 없이 매끈했지만, 지혜가 가득 깃든 눈빛에서 지긋한 나이가 드러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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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하세요?"

"나는 새를 기른단다. 닭이나 오리처럼 말이야."

"어디서 기르시는데요?"

"나중에 보여 줄게."

"닭고기 수프는 누가 끓여 드리는데요?"

"닭고기 수프? 난 절대 내가 기르는 새들을 잡아먹지 않아." 

 

- 공주는 눈물을 닦았다. 화가 나서 얼굴이 어찌나 홧홧하게 달아올랐는지 눈물도 금세 말라 버렸다. 식탁에 앉기는 했지만 아이린 공주는 음식에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자기 말을 믿어 주지 않는다는 건 공주로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진짜 공주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주는 오후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유모가 말을 붙일 때만 짤막하게 대꾸했다. 진짜 공주는, 비록 기분이 상했더라도 절대 무례하게 굴지 않는다. 

- 공주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창문으로 달빛이 가득 쏟아져 들고, 할머니는 흰 레이스가 달린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그 달빛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할머니의 은빛 머리칼에 달빛이 뒤섞여, 어느 것이 달빛이고 어느 것이 머리칼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 "아뇨, 할머니가 무슨 실을 잣고 계신지 모르겠는데요. 사실, 저는 할머니를 꿈에서 만난 건 줄 알았어요. 고조할머니, 왜 제가 저번에는 할머니를 못 찾았을까요?" 
"그건 네가 아직 어려서 좀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하지만 네가 나를 꿈에서 봤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일찍 나를 찾아올 수 있었겠지. 그래도 한 가지 이유는 말해 주마. 그건 네가 찾아오는 걸 내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야."

 

- "그랬지. 그래도 루티가 네 말을 믿지 않을 줄 난 알고 있었단다. 여기서 물레를 돌리는 내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본다 해도, 루티는 믿지 않았을 거야." 
"왜요?"
"믿기지 않으니까. 루티는 눈을 비비고는 헛것이 보인다고 말했을 거야. 그러고는 눈앞에서 본 것도 말짱 잊어버리고 모두 꿈이었다고 말했겠지."

 

- "아니. 매일 밤 일하지는 않아. 달이 뜨는 밤에, 달빛이 물레를 환히 비출 때까지만 일하지. 오늘 밤은 이제 곧 접어야 할 것 같구나." 

 

- 할머니가 공주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하필 다친 손을 잡는 바람에, 아이린 공주는 "아야!"하고 조그맣게 비명을 질렀다. 

"아니, 아가야, 왜 그러니?"

공주가 달빛에 손가락을 쳐들어 할머니에게 보인 다음, 어쩌다가 다쳤는지 자세히 털어놓았다. 할머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공주에겐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다른 손을 잡자." 

 

- 할머니는 공주를 놔두고 야릇하게 생긴 장롱 쪽으로 갔다. 그러고는 문을 열어 은으로 된 작은 상자를 꺼냈다. 할머니는 나직한 의자에 앉아 공주를 불렀다. 공주가 앞에 와서 무릎을 꿇자, 할머니가 공주의 다친 손을 들여다보았다. 이어 상자를 열고 안에서 작은 연고를 하나 꺼냈다. 할머니가 공주의 부어오른 손가락에 연고를 살살 바르자, 온 방에 장미와 백합 향이 섞인 향기가 가득 찼다. 언제 아팠냐는 듯 통증과 열기가 싹 가시는 기분 좋고 상쾌한 손길이었다. 

 

- "오늘 밤엔 너를 안 보내고 싶구나. 할미랑 같이 자는 거 어떻겠니?"
"아, 좋아요, 좋아요, 할머니!"
아이린 공주가 기뻐서 소리쳤다. 만약 손가락을 다친 걸 깜빡했다면 손뼉도 쳤을 것이다.

 

-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일은 백 년에 다섯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이야. 혹시 누가 본다고 해도 별똥별인가 하고 눈을 껌벅거리다가 곧 잊어버리지. 게다가, 내가 원치 않으면 누구도 이곳에 찾아올 수 없어. 할미가 비밀 하나 말해 줄까? 만약에 저 등불이 꺼진다면, 너는 네가 텅 빈 다락방의 낡은 짚 더미 위에 누운 줄 알 거야. 너를 둘러싼 이 모든 것들을 하나도 못 보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지."

 

- "아아, 참 좋다! 정말 포근해요! 이렇게 편안하고 기분 좋은 건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언제까지나 여기 이렇게 누워 있었으면 좋겠어요."
“원하면 그렇게 하려무나. 하지만 할미가 먼저 너를 한번 시험해 봐야겠다. 어려운 건 아니야. 이번 주 금요일 밤에 여기 오너라. 만일 안 오면, 네가 언제 다시 나를 만날 수 있을지 나도 모른단다. 머잖아 네가 나를 애타게 찾을 일이 생길 거거든."
“제가 절대 잊어버리지 않게 해 주세요."
잊지는 않을 거야. 문제는,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네가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거지. 나를 만난 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걸 네가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게 중요한 거야. 물론 할미는 네가 나를 찾아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하지만 그건 사실 네게 달린 문제거든. 돌아오는 금요일 밤, 이 할미에게 꼭 와야 한다. 알겠지?"

 

- 잠시 후, 공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달빛 비치는 여름 바다와, 이끼 낀 옹달샘과, 바람에 잎이 살랑거리는 나무들과, 향기 그윽한 들꽃 방석들이 나오는 꿈이었다. 그러나 잠들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그 어떤 꿈보다도 멋졌다. 

 

- 나로선 앞서 말한 것처럼 아주 모호하게 묘사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 짐승들에겐 딱히 무슨 종이라고 분류할 만한 특징이 없어서, 원래는 어떤 동물이었는데 지금은 저렇게 변했나 보다, 하고 막연히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나마 그 둘 사이의 유사점도 딱히 닮아서라기보다는 그저 일반적인 느낌과 인상 때문이었다. 더한층 소름 끼치는 점은, 오랜 세월 고블린에 의해 길들여지고 함께 지내 왔기 때문인지 이 짐승들의 얼굴이 인간과 섬뜩할 정도로 흡사해졌다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모든 동물들은 아주 조금이나마 인간과 닮은 점이 있다. 하다못해 물고기조차도 그러하다.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동물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볼 수 없다. 여하튼 그 짐승들의 얼굴은 인간의 얼굴을 점점 더 많이 닮아 갔다. 주인인 고블린들이 짐승들을 닮아 갔다면, 짐승들은 거꾸로 그 주인들을 닮아 간 것이다. 

 

- 아아, 컴컴한 어둠을 뚫고 그토록 무서운 길을 지나온 뒤 도착한 이곳은 얼마나 포근한 안식처인지! 은은한 방 안 불빛이 마치 한없이 보드라운 우윳빛 진주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을 주었다. 푸른 벽지와 은빛 별무늬가 박힌 천장을 보니, 방금 전 비구름에 가렸던 바깥 하늘이 사실은 저랬나 싶어 공주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아가야, 할미가 너를 위해 불을 피워 놨단다. 이런, 몸이 차고 옷도 다 젖었구나." 

 

- 공주는 눈을 깜박거렸다. 벽에 붙여 놓은 나지막한 탁자 위에 커다란 붉은 장미 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것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붉은 장미 모양의 불꽃이었다. 장미 불꽃은 두 은빛 천사상의 머리와 날개 사이에서 이글이글 타올랐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향긋한 장미 향이 공주의 온몸을 휘감았다. 난로 위 장미 불꽃에서 피어오르는 장미 향이 온 방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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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는 아름다운 연하늘색 벨벳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 위로 은발 대신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이 서서히 한데 모였다가 부드럽게 반짝이며 굽이치는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공주가 입을 벌리고 쳐다보는 중에도, 할머니의 머리칼은 정수리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서는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금빛 안개가 되어 사라지는 듯했다. 할머니는 진주와 오팔이 빙 돌아가며 박힌 은빛 관을 쓰고 있었다. 드레스에는 장식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손에도 반지를 끼지 않았고, 목걸이도 하지 않았다. 다만 슬리퍼에는 자잘한 진주와 오팔이 알알이 박혀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할머니 얼굴은 스물셋 처녀처럼 젊고 아리따웠다. 

 

- "왜 그러니, 얘야? 마치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 같구나. 얼굴이 좀 안돼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니?"

"할머니, 잘못이 없는 게 맞는지 전 잘 모르겠어요. 다리 길쭉한 꺽다리 고양이가 창문으로 들어왔을 때 전 당장 할머니께 달려왔어야 했어요. 그런데 엉뚱하게도 산으로 도망쳤지 뭐예요.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너무 놀랐으니까 그랬지. 다음엔 안 그럴 거잖아. 같은 잘못을 또 저지르면 그때는 고의가 되는 거지만 말이야. 자, 이리 온."

 

- 공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타원형 욕조가 등불 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가서 들여다보렴."

욕조로 다가갔던 공주가 눈을 빛내면서 조용히 돌아왔다.

"무엇이 보이던?"

"하늘과 달과 별요. 욕조에 밑바닥이 없는 것 같았어요."

할머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할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든 목욕이 하고 싶으면 할미를 찾아오너라. 네가 매일 아침에 목욕한다는 건 나도 안다만, 때로는 밤에 하고 싶을 때도 있지 않겠니."

 

- "손을 내밀어 보렴."

공주가 오른손을 쳐들었다.

"그래, 바로 이 손이야."

할머니가 공주의 집게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우아, 참 예쁜 반지예요! 이건 무슨 보석이에요?"

"불꽃 오팔이란다. 불꽃처럼 노랑, 빨강, 귤빛이잖니."

"제가 가져도 돼요?"

"그럼, 늘 끼고 있으렴."

"아, 고마워요, 할머니! 이렇게 예쁜 보석은 처음 봐요. 할머니가 쓰신 은관에 박혀 있는 오색찬란한 보석들이 더 예쁘지만요. 그거 할머니 은관 맞죠?"

"그래, 그렇단다. 네 반지에 박힌 보석도 같은 종류야. 뭐, 이것만큼 좋은 건 아니지만. 네 것은 빨간색이고, 은관에 박힌 보석들은 무지갯빛이란 것만 다를 뿐이지."

 

-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의 아름다운 등불을, 그 불빛만이 아니라 커다랗고 둥근 은빛 등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걸 봤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제가 본 게 할머니 등불 맞죠?" 
"그렇단다, 아가야. 내 등불이야." 
"어떻게 하신 거예요? 이 방엔 창문도 없잖아요." 
“나는 등불 빛이 벽을 뚫고 나가도록 할 수가 있단다. 빛을 아주 강하게 만들면 벽이 녹아서 눈에 보이지 않게 돼. 그렇게 해서 네가 불빛을 볼 수 있었던 거야. 하지만 내가 말했듯이, 누구나 다 그걸 볼 수 있는 건 아니란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볼 수 있었죠?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할머니." 
"네가 축복을 타고난 덕분이지.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축복을 누리게 되었으면 좋겠구나." 

 

- 공주는 장미 불꽃과 별이 총총 박힌 벽, 은은한 등불에 번갈아 눈길을 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 순간 세상의 모든 꺽다리 고양이가 떼로 달려든다고 해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어째서 마음이 이토록 편안하고 용기가 샘솟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모든 것이 완벽하고 안전해서 두려움 따위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 공주는 한동안 그렇게 아름다운 등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눈을 돌려 보니, 구름 낀 어두운 밤이 내다보였다. 벽이 사라진 것이다. 바람 소리가 윙윙 들리는데도 공주에게 불어오지는 않았다. 다음 순간, 구름이 흩어진 걸까, 아니면 벽처럼 사라진 걸까? 공주는 짙푸른 밤하늘에 영롱하게 반짝이는 별무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구름이 다시 모여들더니 별을 밀어냈다. 이어 벽이 다시 닫히고 구름도 물러났다. 어느덧 할머니가 인자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띤 채 공주를 내려다보며 옆에 서 있었다. 할머니는 비둘기 알만 한 크기의 은은한 실 몽당이를 들고 있었다. 

 

- 공주는 그것을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그대로 몸을 돌려 장롱으로 가더니, 서랍을 열고는 실 몽당이를 그 안에 넣었다. 아이린 공주가 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할머니, 제가 뭐 잘못했나요?"

"아니란다, 아가야. 자기가 잘 간직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주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주는 게 아니란다. 저 실 몽당이는 네 거야."

 

- "할미가 설명해 주려던 게 바로 그 점이야. 내 장롱 서랍에 들어 있지 않으면 그건 네 것이 아니게 되고, 또 네게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된단다. 잘 들어라. 만약 오늘 저녁처럼 무서운 일이 닥치거나 하면, 반지를 빼서 네 침대 베개 밑에 넣어 두어라. 그런 다음 반지를 끼었던 집게손가락을 실 위에 갖다 대고 그 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거라."

"와, 신기해요! 그러니까 실이 저를 할머니께 데려다 줄 거라는 거죠?" 
"그래. 하지만 기억해 둬라. 비록 먼 길로 빙 돌아가는 것 같더라도 절대 실을 의심해선 안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네가 실을 잡고 있는 한 이 할미도 잡고 있다는 점이야." 

 

- "아니, 오늘 밤은 안 돼. 그럴 거였다면 진작 목욕을 시켰을 거야. 궁 안의 모든 사람들이 네 걱정을 하고 있을 거다. 그 사람들을 밤새도록 못 자게 하고 걱정시켜서야 되겠니. 자, 이제 아래층으로 내려가거라."

"할머니, 할머니가 '네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아서 참 좋아요. 여기가 우리 집이니까요. 여기를 우리 집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되지, 그럼, 아가야. 넌 언제나 이곳을 우리 집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자, 이리 온.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너를 데려다줘야겠다." 

"있잖아요, 한 가지만 더 여쭤 볼게요. 할머니가 이토록 젊어 보이시는 건 은관을 쓰셨기 때문인가요?" 
"아니, 그건 아니야. 오늘 아침 어쩐지 젊어진 기분이 들어서 한번 써 본 거란다. 게다가 이 늙은 할미가 은관 쓴 멋진 모습을 네게 보여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거고." 

 

- "할머니는 왜 자꾸 늙은 할미라고 하세요? 할머니는 하나도 안 늙으셨어요." 
"난 늙디 늙은 할미가 맞단다. 사람들은 참 어리석더구나. 아, 네가 그렇다는 건 아니야. 너는 아직 어려서 뭘 잘 모르니까. 아무튼 사람들은 왜 노인이라면 꼭 허리가 꼬부라지고 피부는 쪼글쪼글 주름지고 기운이 쇠약해지는 것만 생각하는지 몰라. 지팡이니 돋보기니 관절염이니 건망증이니 하는 것들과 연관 짓고 말이야! 참으로 어리석은 노릇이지. 나이가 든다는 건 그런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란다. 제대로만 나이 든다면 얼마든지 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거든. 인생에 대한 기쁨과 용기와 지혜와 함께 튼튼한 팔다리도 지닐 수가 있는 거야. 어쨌든 아가야,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늙은이란다. 그러니..." 

"그러니, 할머니를 보세요!" 
아이린 공주는 이렇게 외치면서 벌떡 일어나 할머니의 목을 얼싸안았다.

- "이제 그런 어리석은 소리는 다신 안 할게요. 할머니랑 약속할게요. 그런데... 막상 약속하려니까 좀 겁나네요. 어쨌든, 만일 제가 할머니께 어리석게 굴면 용서를 빌게요. 꼭요. 할머니, 저도 할머니처럼 나이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는 겁나는 게 아무것도 없으시죠?" 
"글쎄다, 설사 겁이 나더라도 그리 오래가진 않지. 어쩌면 한 이천 살쯤 먹으면 겁나는 게 하나도 없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말이다, 사실은 이 할미도 겁나는 게 있긴 해. 내 자식들을 위해서는 나도 때로 겁을 내고 걱정을 하게 된단다. 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아, 할머니! 죄송해요. 오늘 저녁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그래, 오늘 저녁에도 약간 그랬지. 하지만 네가 나를 진짜 고조할머니가 아니라 그저 꿈을 꾼 거라고 생각해 버렸을 때는 아주 많이 걱정했단다. 너를 탓하려는 게 아니란다 아가야. 너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 "그럼요, 할머니. 그런데 제가 사실을 말해 줬는데도 커디는 제말을 믿지 않으려고 해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믿고 싶은 만큼만 믿기 마련이지. 더 많이 믿는 사람들이 더 적게 믿는 사람들을 비난해선 안 돼. 너도 네 눈으로 그 일부를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믿지 못했을걸?" 
"네, 할머니. 그건 그래요. 할머니 말씀이 맞아요. 커디도 지금은 믿을 거예요." 
"글쎄다. 그건 모르겠구나." 

 

- "내가 할머니 무릎에 앉아 있잖아. 그런데도 안 보여?" 

 

- "아가야, 아직은 나를 드러낼 때가 아니라서 그랬단다. 커디는 아직 어떤 일들은 믿지 못해. 본다고 다 믿는 건 아니야, 그냥 보는 것일 뿐이지. 루티가 나를 보더라도, 그저 눈을 비비고는 자기가 본 것도 금세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허깨비를 본 건가 보다 생각할 거라던 말, 기억나니?"

"네, 생각나요. 하지만 커디는 다를 줄 알았어요."

"커디는 좀 다르긴 하지. 루티보다는 훨씬 마음이 열려 있는 아이니까. 나중에는 커디도 달라질 테니 어디 두고 보렴. 그때까지 잠시 오해를 받는 정도는 네가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은 다들 이해받고 싶어 하잖니. 그런 만큼 오해를 받게 되면 몹시 힘들어하고. 하지만 남들에게 이해받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단다."

"그게 뭔데요, 할머니?"

"남을 이해하는 것."

 

- "네, 할머니 말씀이 옳아요. 저도 공정할 필요가 있어요. 만일 제가 다른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으면 저부터가 이해받을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커디도 저를 믿고 싶어도 믿기지 않아서 그러는 거니까, 그걸로 화내거나 섭섭해하지 않을래요. 그냥 저를 믿어줄 때까지 기다릴래요."

할머니가 공주를 품에 바짝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역시 너는 이 할미의 손녀딸이야!"
 
- "아무렴, 지켜야 하고말고. 잘못된 약속이 아니라면 말이지. 자, 커디에게 입맞춤해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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