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박상희 (munge)
출판 : 예담
출간 : 2014.09.10
누군가의 필터를 거쳐 해석된 것들은 그 존재를 닮는다.
그렇기에 글도 음악도 그림도 생각도, 모든 창작물들은 닮을 수는 있지만 온전히 같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처음 미술에 흥미를 가졌을 때는 어째서 이렇게 각양각색의 기본서들이 존재하는 것인지 의아했다. 학과가 존재하니 '기본' 커리큘럼에 관해서는 동일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정답이 없는 세계에서의 '기본'이란 무엇일까?
선 연습, 형태 관찰, 빛의 이해...
이들은 대다수의 화풍에 공통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여타의 다른 학문들과 다른 점이라면, 이것들을 모른다고 해서 그림을 그리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점. 그러나 어찌저찌 그리다 보니 나온 결과물이 아니라, 의도대로 표현한 결과물을 얻고 싶다면 꼭 필요한 지식들이기 때문에 '기본'이라고 불리는 게 아닐까.
그것들을 연습하고 체득하는 방식이 다양할 뿐, 필요로 하는 부분은 공통적인 것 같다.
내면적인 이해와 해석이 가능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표현 기술의 숙련도 - 다시 말해 시간이 결과를 보여준다.
<마구마구 드로잉>은 기존의 다른 작법서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구도를 잡고, 형태를 잡고, 선과 면을 입히는 방식이 아니라 다소 극단적인 크로키 방식으로 일상물들을 그려보라는 것. 인체가 아닌 생활 사물을 크로키로 그린다는 것이 낯설 수 있지만,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가장 강렬하게 눈에 들어오는 특징들을 잡아내는 연습을 '일정량' 이상, '재미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재료에도 제한이 없어 펜 드로잉으로 선만 따도 되고, 색연필이나 마커, 물감으로 색을 이용해 표현해도 된다.
일상 속에서 자주 접해 '이미 안다'고 생각한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표현해본다는 것은 일종의 고정관념 해체 작업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볼 줄 아는 눈이 생기면,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자신의 그림 속 단점이나 실수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무엇보다 잘 그리려 애쓸 필요도 없고, 꼭 지켜야 할 형식도 없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빈 노트나 연습장을 펼치고 끄적끄적 눈에 들어오는 대로 소품들을 하나 둘 그려보는 건 어떨까. 저자는 한 자리에서 진득하게 100개를 그려내는 연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지만, 취미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하루에 하나씩 그려나가는 그림 일기로 시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100인 100색이니까.
- 프로그램 소개 : 10명의 인원이 그룹을 이뤄 각자 작은 소품을 10개씩 준비합니다. 꼭 인원 10명이 모일 필요는 없습니다. 5명이 20개씩 소품을 준비한다거나 12명이 각자 8-9개씩 준비한다던지, 사람 수와 상관없이 오브젝트 100개 이상을 모으면 됩니다. 물론 혼자서 해도 좋습니다. 특히 이 책에는 혼자서도 할 수 있도록 100개의 오브젝트 사진 소스를 준비하였습니다.
- 모두 테이블에 모여 앉아 각자 준비한 오브젝트를 가운데 모아놓고 하나씩 그리기 시작합니다. 인원 중 한 사람은 진행자 역할을 맡아 스톱워치를 1분이나 2분 간격으로 알람이 울리도록 설정해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알람이 울리면 그리던 오브젝트를 끝내고 다음 오브젝트를 그려 나갑니다. 그리고 또다시 알람이 울리면 또 다음 오브젝트로 넘어가는 방식입니다. 시간은 3분이나 5분 등 그림 그리는 사람들의 성향이나 수준에 따라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습니다. 1분씩 하다가 벅차다 싶으면 2-3분씩 하기도 하고, 여유 있게 5분씩 하다가 너무 느슨하다 싶으면 다시 1분으로 설정하는 식으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유기적으로 진행하면 좋습니다.
- 이 프로그램은 시간 설정을 빌미 삼아 많은 양의 드로잉을 한 번에 몰아서 집중하여 그려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100개의 오브젝트 드로잉을 통해 짧은 시간 내에 스케치북 한 권을 꽉 채워 완성함으로써 멋진 그림으로만 스케치북을 채워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서 벗어나 나도 스케치북 한 권을 온전히 채웠다는 성취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한 번 성취감을 맛본 뒤에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 어쩌다 한 번씩 찔끔찔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여섯 시간 동안 100장의 오브젝트 드로잉을 그려봄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넘어 드로잉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는 데 좋은 훈련이 됩니다. 물론 며칠에 걸쳐 완성해도 되지만, 한 번쯤은 몇 시간이 걸리든 완성할 때까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각오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해보기 바랍니다.
- 짧은 흥미로 대여섯 개의 드로잉을 그리다 관두고 또 며칠, 몇 주가 지나 서너 개의 드로잉을 그리다 마는 등 짧은 호흡으로는 어떠한 실험도 어떠한 탐구도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때로는 스스로를 의도적으로 밀어붙여 한고비의 귀찮음을 넘기고 추진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드로잉에 집중하는 경지에 오르게 됩니다. 지켜도 그만, 아 ㄴ지켜도 그만인 알람 소리에 긴장하여 조금은 인위적인 리듬감에 자신을 내몰다 보면 이내 '폭풍 몰입'을 하게 됩니다.
- 이 프로젝트는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이, 더 잘 그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림을 어떻게 그릴 것인지 막연하게 고민하고 걱정하고 조심스레 접근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짧은 시간에 그 사물에 대한 특징을 즉각적이고 즉흥적으로 잡아내 좀 더 본능적인 드로잉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잘 그리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아니 오히려 어설프게 잘 그리려고 애쓴 그림보다 급박하게 몰아쳐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해 실수처럼 그린 그림에 더 애정이 가기 시작합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본성을 반영한 듯 자신을 닮은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오브젝트들을 마구마구 그리다 보면 너무나 익숙해서 좀처럼 드로잉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흔한 일상의 사물들이 슬슬 재밌게 여겨집니다. 별거 아닌 오브젝트 드로잉일수록 새로운 관심 포인트를 찾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오브젝트 드로잉만큼 재밌는 소재도 없을 정도입니다. 처음에는 시간 내에 특징을 캐치해 그리기도 바빴던 과정이 점차 익숙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여유를 부리며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게 됩니다. 이때부터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바라보던 사물의 형태를 벗어나 특정 특징에 포인트를 두는 것입니다. 사물의 색에 초점을 맞춰 강조한다든지, 사물의 표면에 새겨진 로고나 텍스트에 포인트를 준다든지, 빛에 의해 생긴 명암의 라인에 디테일을 준다든지, 사물의 디테일보다는 하나의 덩어리로 특징을 잡아낸다든지. 점차 드로잉에 콘셉트가 만들어집니다.
- 그림을 어느 정도 그려본 사람들은 오히려 더 새로운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런 오브젝트 드로잉은 초보자들이나 할 법한 프로그램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순간 어쩌면 오브젝트 드로잉은 하찮은 것이 되고 맙니다. 이미 많이 해봤던 거라며 새로운 탐구 없이 그저 해오던 방식 그대로 대강 쓱싹쓱싹 그린다면 이 프로젝트에 흥미를 갖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익숙한 것, 별것 아닌 것에서 새삼스레 발견하는 새로운 시선만큼 드로잉을 즐겁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임해 꼭 자신만의 시선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 오브젝트를 옆에 두고 그리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대로 따라 그리면 되니까요. 하지만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그림은 재미없기 마련입니다.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사물의 특징을 강조해보세요. 위의 오브젝트에서 흥미를 끄는 포인트는 어디인가요?
- 같은 사물이라도 내려다보는 각도에 따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환경에 변화에 따라, 사용하는 드로잉 재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느낌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매번 그릴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드로잉을 그려나갈 수 있고요. 처음 채웠던 책과 그 다음에 채운 책을 비교해보세요. 스스로의 성장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사물의 형태에 대한 디테일은 무시하고 물체가 가진 실루엣을 덩어리로 묘사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기존에 알고 있던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관찰해보세요. 디테일이 사라진 오브젝트들은 익숙하고 평범한 모습이 아닌 새로운 매력을 발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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