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호즈미 ] 나의 조반니 1-3

일루젼 2022. 8. 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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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호즈미 / 서현아
출판 : 소미미디어 
출간 : 2018.03.10 


     

저자 : 호즈미 / 서현아
출판 : 소미미디어 
출간 : 2018.06.01


              

저자 : 호즈미 / 서현아
출판 : 소미미디어 
출간 : 2018.10.25


       

<안녕 소르시에> 때도 느꼈지만 호즈미 작가는 타고난 재능과 노력의 딜레마에 관해 참 섬세한 감정선을 다룬다. 탄탄함과 담백함이 느껴지는 그림체도 장점이다. 이로써 한국에 번역된 호즈미 작가의 모든 책을 읽은 셈인데, 미완이라는 점을 감안하고서도 상당히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5권까지는 확실히 정발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래도 더이상 뒷권을 출간할 계획이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어디까지 가고 싶어?'

 

숫자로 정의내릴 수 없는 영역이지만 순위가 존재하는 세계.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이런 느낌이다. 제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열이 나눠지고, 유행이 오고 가는, 그렇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것들이 존재하는. 

 

호즈미가 그려내는 세계에서는 끝없이 성장해가는 재능있는 주인공은 없다. 제각기 타고난 한계들을 받아들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없는 부분을 부러워하면서 상처받고 아파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천재'는 존재한다. 나는 이 지점이, 치열하게 절망을 디뎌내고 일어선 범재에게 주는 희망인지 천재에게 건네는 위로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막연하게 전자가 아닐까 생각해 볼 뿐이다. 나는 전자에 공감하니까. 

 

 


 

 

나의 사심 담긴 두 곡과 

<나의 조반니>에 등장하는 두 곡

 

 

Damien Rice - Valcano

 

Erwin Schrott - Rojotango

 

 

 

LAYERS Classic - Liber Tango

 

HAUSER & Ksenija Sidorova - Libertango

 

Mstislav Rostropovich - Dvorák - Concerto in B minor Op. 104 

 


 

- 여섯 살 때, 할아버지가 남긴 낡은 비디오. 화면에 비치는 것은, 세계적인 첼리스트 레서 커티스와 현대 첼로 작곡가 조반니 바초니. 온몸을 울리듯 포효하는 그 모습에 매료되었다. 곡명은, '첼로여 외쳐라'ㅡ.

 

- "... 너는, 재능이 엄청 뛰어난 앤가 봐."

"무슨 소리야? 지금 누굴 놀려?"

"설마. 진짜 굉장하다고 생각해서 그래. 테츠오, 너는 태양의 냄새가 나. 햇빛을 가득 받고 자란 냄새. 따뜻한 가족들 품에서 사랑도 듬뿍 받고."

 

- "그런 거 아니니까... 진짜... 그렇게 선을 그어서 생각하지 마. 그러면 더 서글프단 말이야. 학교 애들도 다들 첼로 같은 건 알지도 못한대. 형도 이제 첼로를 켜지 않고. 게다가 너까지 그런 소릴 해버리면..." 

"... 천재의 고독이네. 너를 이해 못 하는 녀석들은 그냥 그렇게 살라고 해. 그 녀석들이 멍청한 거니까."

"뭐? 그러니까 난...!"

"그래도, 천재도 인간이야. 테츠오. 네게 내 인생을 줄게."

"무슨..."

"앞으로 너는 주위의 질투를 받기도 할 거야. 주위에서 너를 이해 못 할 수도 있고, 오해를 살 수도 있어. 남들과 공유할 수 없는 감정을 품게 될지도 몰라. 그래도 나만은 너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외롭게 하지 않겠어. 약속할게."

 

- '아... 유리코 씨가 또 켜고 있네. 아니, 듣고 싶지 않아. 이런 곡은...'

"어? 유리코 씨...?"

'그럼 이 곡은... 누가...'

"아, 어서 와. 테츠오."

 

-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수많은 첼로 곡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다는 대곡. 

그 곡은-

[나는 켤 수 없어.]

 

 

   

 

 


 

 

- "... 형이 첼로를 그만둔 건 나 때문이었어?"

"아니야...! 내 뜻으로 첼로를 그만둔 거야. 너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 미워해도 되는데. 첼로를 그만두지 않고 내 팔이나 부러뜨리면 됐을 텐데. ... 미워. 이쿠미가 미워. 그 팔을 부러뜨리고, 그 녀석한테서 첼로를 빼앗아서, 그 녀석과 함께 바다에 처넣어서, 모두 없었던 일로 해버리고 싶어...! 왜냐면 그때 이쿠미가 연주하던 소리는, 내가 그렇게 동경하던 첼로 소리였단 말이야...! ... 나 미쳤나 봐, 형. 이쿠미는 친구인데, 내가 이상하지...?"

 

- "이쿠미는 테츠오가 연주하던 첼로 소리를 의지해서 이 바닷가에 떠내려 왔나 봐. 테츠오는 줄곧 첼로를 함께 연주할 친구를 원했고. 그렇기에 테츠오의 재능이 [괴물]을 깨워 버린 거지. 드보콘을 1년 만에 켜는, 친구의 얼굴을 한 [괴물]을..."

"... 바다에서 온 괴물이라. 칼립디스인지, 리바이어던인지."

"어떻게든 저 둘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으면 좋겠는데..."

"다른 꼬맹이... 이쿠미는 그렇다 쳐도, 타협 같은 걸 해버리면 테츠오는 그 순간 첼리스트로서는 죽는 거야."

"뭐...?"

"이 정도 사건으로 자기 기량의 한계를 느끼고 단념하는 사람은, 재능이 있든 없든, 첼로와 함께 살아갈 수 없어. 그만큼 잔혹한 세계야, 이쪽은. 각오가 없으면, 너처럼 차라리 그만둬 버리는 게 행복하겠지."

"... 그래도 저 녀석들은... 친구잖아..."

 

- "굴욕이지. 실력으로 따내지 않은 평가는. 하지만 그런 뽑기 운 같은 것만으로 살아남을 만큼, 이 세계는 호락호락하지 않아. 지금은 정확한 연주를 선호하고 추구하는 시대지만, 드보르작 시대에는 연주가 각자에게 개성이 있었지. 음악은 듣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이루어져. 쭉 혼자서 켜 왔던 네 연주에는... 그 의식이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어. 안됐지만 너를 제자로 삼을 생각은 없어. 네게서 희망을 봐줄 사람을 찾아가도록 해."

"그래도 나는... 당신이...!"

"너, 이 세계에서 사제 관계라는 게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르는구나? 사랑이 없으면 제자로 받을 수 없어."

 

- "그럼 지금 당장 나를 사랑해줘."

 

- '... 타고난 게 아니야! 이 녀석은 계산하고 있어! 이 정도까지 미묘한 표현을 모두 계산해서 만들어냈단 말이야?!' 

'따라올 수 있겠어?'

"... 그래. 아깐 정말 걱정하고 계셨다..?"

'하지만 신기하게 귀에 거슬리진 않아. 그건 귀에 거슬리지 않을 수준으로 누르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반드시 따라가고 말겠어! 따라잡아서, 이 소리를 뿌리부터 떠받치고 말겠어!'

 

- "너는 기교파야... 그것도 지독스러운."

"... 과연 예리하네."

"그 기교로 만들어냈구나. 정확하고 계산적으로, 자유롭고 개성적인 연주를. 대체 얼마나 연습했으면 그렇게까지-."

 

- "난 있잖아. 유리코의 연주가 정말 좋았어. 어릴 때부터 줄곧, 제자가 되기 전부터. 그래서 그 사람을 일부러 멀리한 적도 있어. 너무 멀고, 손이 닿지 않아서... 그 사람이 내게 관심이 없는 것도, 요만큼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도 슬프고 분해서 견딜 수 없었어. 내게 재능이 없는 것도. 그래서... '마녀의 저주'니 뭐니 하며 센 척도 했지만, 더 이상 오도 가도 못하게 되니까 비로소 이제 인정해야겠다 싶더라. 아이들의 그림이나 연주가 자유롭다는 건 어른의 환상이야. 나는 천재가 아니야. 연주에 독자성이 없어. 하는 수 없지, 나는 그런 걸 좋아하는 아이였으니까. 동경한다고 꼭 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아무리 갈망하고 원하는 존재라도- 자기가 아닌 뭔가가 되려고 하면... 괴로워."

 

- "그럼 자기의 특성을 살리고 그걸 최대한으로 발전시켜서, 그걸로 어떻게 승부를 걸지 생각하는 게 더 생산적이겠지? 범인(凡人)에게는 범인 나름대로 싸우는 방법이라는 게 있어."

 

- "'재능'이나 '천재'란 말을 들을 기회가 많이 있지만... 나는 가끔 그런 애매한 개념에 의문이 들 때가 있어. 나는 자유로운 연주를 좋아하는 타입이지만, 네 반주를 하는 건 즐거웠어. 적어도 지금 테즈카의 연주를 듣고 너를 '범인'이라고 형용할 사람은 얼마 없을 거야."

"... 고마워. 그나저나, 처음부터 맞춰냈다는 게 뜻밖이네. 그쪽에서도 몇몇 사람밖엔 맞춰 주질 못해서 유리코한테 엄청 깨졌는데."

"아... 그건 내 안에 있는 리듬이었으니까."

"뭐? 있는 리듬?"

"무슨 현대음악... 미니멀 같다 싶었어. 난 마이클 니만의 곡을 좋아하거든."

"... 난 조반니 바초니를 좋아하는데."

 

- "이렇게 듣고 있으니... 마치 천부적인 재능과 운을 타고난 것 같잖아. 소가 유리코의 유일한 제자는..."

 

 

 

 

 

 

 

 


 

- "5년 전에도 일본에 내가 있을 자리 같은 건 없었어. 지금도 굉장한 것은 유리코지, 내가 아니야. 나는... 하나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일본에 돌아온 거야. 아니, 하나도 아니지. 제로부터."

"큰 뜻을 품은 것은 가상하지만... 그렇게 잘 될까?"

 

- "... 틀렸어... 이런 건 내 연주가 아니야...!"

"하이페츠 증후군이야..."

(역자 주 : 압도적인 재능을 목격했을 때 평소보다 실력을 발휘 못 하게 되는 현상.) 

 

- "아무리 스승이 뛰어나도 제자까지 뛰어나다는 보장은 없는 게 이 세계지만..."

 

- "난 처음부터 알았어. 본선에 나갈 생각이 있는 사람이 자유곡으로 드보콘을 고르겠냐? 그 대회는 매년 자유곡에 엄격한 규정이 없어서 저마다 갖가지 곡을 켜지만 드보콘은 아무래도 본선을 위해 아껴두게 마련이지. 분해 죽겠네. 그런 식으로 기권까지 하니 더 굴욕이고. ... 이쿠미가 안 나왔다 해도 내가 본선까지 갔을 거란 보장은 없지만."

"그런 건..."

"그렇게 낙관적인 생각으로 돌아온 건 아니거든. 말했잖아? 시험하는 거라고. 형도 유리코도 토지 콩쿠르는 소규모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진짜 진지한 시험이었어. 그러니까 이게 내 실력이야. 지금의 진짜 실력. 과거의 성적이나 사사한 스승이나 그런 건 싹 비워 버리고 시작해야 돼. 그러기 위해 돌아온 거니까.

 

- "모세 환상곡이냐. 초절기교로 명성을 떨친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는 자기가 작곡한 이 곡을 하나하나 현이 끊어지는 돌발 사고를 당하면서도, 남은 G현만으로 끝까지 연주를 해냈다는 일화를 남겼지. ... 테츠오, 너는 왜... 이 정도의 실력이 있으면서, 왜... 왜 그런 연주를..."

"바보야. 원래 [모세 환상곡]은 G현만으로도 켤 수 있도록 만들었어. 그보다 그런 허풍을 넌 믿냐? 아, 진짜! 이거 어쩔 거야! 혼주 빠진다!"

(역자 주 : 혼주. 첼로 앞판과 뒤판을 잇는 막대 모양의 부품. 현의 장력으로 고정되어 있다. '사운드 포스트', 이탈리아어로는 '아니마(혼)'라고도 한다.)

 

- "... 이제 와서 우리가 친한 척할 필요가 있어? 지금 우리 사이에 첼로를 빼면 뭐가 있지?"

 

- "콩쿠르 심사위원이었던 지인에게 들었어. 그레고르 피아티코르스키의 정서, 야노스 슈타커의 기교, 미샤 마이스키의 장대함... 부분 부분에 보이는 기존 연주가의 모방은 그 자체의 퀄리티는 물론 높았대. ... 그만큼 너의 탐욕과 천박함이 더욱 부각됐다고 하더군. 테츠오. 자기가 동경하는 연주가의 연주를 그대로 재구축하고, 남의 옷을 짜깁기해 네 몸에 두르니 기분 좋았어?"

 

- "나는 말이지. 기량을 연마하기 위해 모방하고 연습하는 것까지 부정하진 않아. 회화나 음악 모두 모방이나 모사는 자기 표현력을 향상하는 수단의 하나니까. 하지만 모방은 어디까지나 모방이야. 남의 기법을 아무리 흉내내 봤자, 그걸 어떻게 씹어 삼키고 해석하고 소화하느냐가 훨씬 중요하지. 그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기술은 확고한 자기 피가 되고 살이 돼. 네가 한 짓은 남의 기술을 제대로 씹어 삼키지도 않고 관객에게 뱉어낸 것에 불과해. 그런 것을 굳이 네 연주로 들을 필요가 있을까? 로스트로 포비치의 연주를 듣고 싶으면 로스트로 포비치 본인의 것을 들으면 되지. 객석에 앉은 사람을 바보 취급하지 마! 모든 연주는 연주가와 청중이 존재해. 그게 콩쿠르든 콘서트든. 내가 지난 5년 동안 입이 닳도록 말하지 않았어? 그런 기본적인 것도 이해 못 한다면, 나는 정말 이 녀석을 파문하는 수밖에."

 

- "그러니까 잘못했다고 하잖아! 시험해 보고 싶었단 말이야, 어떻게 해서든! 애초에 따지면 그 곡의 매력은 정밀한 대위법과 칸타빌레 아냐?! 그게 더 작곡가인 베토벤의 의도에 부합한다는 생각도 들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내 개성 같은 건 오히려 방해만 된다고! ... 뭐, 기회는 이때다 싶은 생각도 전혀 없지는..."

"이 자식이 다 알고 그랬단 말이지!"

 

- "처음에는 당신 제자라는 걸 숨기고 출전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뜻하지 않게 발각돼서... 그래도 그만두지 않고 그 연주를 밀어붙인 건 사실이야. 스승의 얼굴에 먹칠하는 짓을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여간, 꼭 이럴 때만 순순히 사과한다니까. 그런 태도로 나오면 나도 더 이상 화낼 수도 없고. 다 알면서 그런 거지? ... 아무튼 됐어. 사실 얼굴에 먹칠할 정도도 아니고. 표현자로서 당연한 호기심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듣는 사람이 어떤 연주자의 기법을 차용했는지 알아차리게 한 것은 네 실수야. 반성해!"

 

- '나는 그때까지 나도 테크닉만은 누구 못지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보잘것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마 착각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에만 오면 세계가 달라진다, 나는 달라질 거다'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디에 있어도 나는 여전히 나였다.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되고 싶었다.' 

 

- "필요 없어. 여기 온 후로는 늘 그러면서 첼로 연습도 제대로 안 봐주잖아. 나는 당신 제자가 되려고 여기 왔어. 그런 건 안 해줘도 되니까 첼로만 가르쳐 줘."

"... 이제 연습할 체력도 안 남았잖아. 대체 몇 시간을 켠 거야."

"프리스쿨 애들의 연주는 굉장했어. 나와 비슷한 또래 아이들인데 나보다 기술도 좋고... 그러면서 즐겁고, 자유롭고... 나는 시간이 없어. 좀 더, 좀 더 연습하지 않으면... 안 그러면... 그 녀석에게..."

"아무것도 안 먹겠다면, 그만 자."

"유리코 씨! 왜 안 가르쳐 주는 거야. 제자로... 제자로 받아주겠다고 했잖아..."

 

- "테츠오, 돌아갈래? 네가 그 모양이면 여기 데려온 의미도 없고, 이런 상태로는 카요 씨한테도 면목이 없어. 돌아갈래?"

"데려온... 의미? 무슨 소리야... 미안해! 이제 불평하지 않을게! 시키는 대로 다 들을게!"

"... 진정해, 테츠오."

"... 사랑해 줘. 사랑할 수 있으면 제자로 받아 준댔지...? 사랑할게. 나는 얼마든지 당신을 사랑할 테니까...!"

"진정해! 잘 들어! 첼로는 말이지, 자기 관리가 소홀하면 다룰 수 없는 악기야. 허리를 지점으로 삼아 몸을 앞으로 숙이고, 상체로 감싸듯 연주해야 하는 이 악기가 얼마나 연주자의 몸에 부담을 주는지 알아? 하물며 네 몸은 아직 성장하는 중이야. 지금 허리나 팔, 목에 주는 과도한 부담은 앞으로 네 연주 인생을 좌우할 수 있어. 무턱대고 많이 연습하는 게 최선의 방법은 아니란 말이야! 뭣보다 소리는 마음의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데 이렇게 집중력이 바닥난 상태로 연주를 하면 뭐 해! 돌아가지 않겠다면 먼저 이곳 생활에 적응부터 해.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자."

"... 그래도... 어디 있어도 나는 여전히 나란 말이야. 잠잘 때도... 꿈속에서도... 줄곧 머릿속에 울려. 이쿠미의 소리가... 연습하지 않으면 불안하단 말이야!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무서워! 나는 계속... 이대로가 아닐까 하고..."

"... 너는... 너 자신이 싫어?"

 

- "싫어... 이렇게 시시한 연주밖에 못 하고 시시한 소리밖에 못 내...! 당신이 그랬잖아. 내 연주는 CD 같다고! 이제 싫어, 이런 나는...! 이쿠미가 되고 싶어! 소가 유리코가 되고 싶어! 나도... 나도... 나도 천재가 되고 싶었어!!"

"내가 CD 같다고 했던 건... 그때, 내 앞에서 했던 연주 이야기야."

"... 그 말이 그 말이잖아..."

"아니야. 너는 내 앞에서 연주할 때는 전혀 볼품없었지만 매년 그 별채 1층에서 혼자 켤 때의 '첼로여 외쳐라'는 솔직히 좀 괜찮았어.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고... 그냥 혼자서 켜고 있는데도, 누군가를 향해 외치는 것 같아서. 내 앞에서도 그런 식으로 연주하면 좋을 텐데 생각했어. 하지만 너는 줄곧 혼자서만 체로를 켜서 그런지 남 앞에서 켜면 아무래도 위축되는 것 같더군. 아무리 듣고 아무리 켜도 너는 내 앞에선 달라지지 않았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이 길을 걷는 한 남 앞에서 연주하는 것은 피할 수 없어. 고향 히요시에서 음악학원이라도 차리고 혼자 조용히 첼로를 켜며 사는 게 행복하겠구나 생각도 했어. 그것 역시 첼로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니까. ... 그래도 네가 내게 사랑해달라고 했을 때,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어."

 

- "이 녀석이 뛰어난 재능 앞에서 자기 힘으로 운명을 굴복시킬 생각이라면, 나도 그걸 보고 싶어. 분명 그건 웬만큼 재능 있는 아이를 제자로 삼는 것보다 재미있을 거라고. 감히 나를 그리 생각하게 만든 것은 운도 우연도 아닌 다름 아닌 네 힘이야. 테츠오, 너는 분명 첼로가 너를 버리더라도 네 스스로 첼로를 버리지는 못하겠지?"

"... 못 해... 첼로가 없는 삶 같은 건 나는 몰라."

"나도야. 그 점에서는 나도 너도 같구나. 확실히 현시점에서 너는 천재가 아닐지도 몰라. 그리고 너는 너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순 없어. 하지만. 네가 너라는 것을 희망으로 만드느냐, 절망으로 만드느냐는 네게 달렸어.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숙여야 할 때를 알고 받아들여. 조바심 내지 말고 자신을 연마하며 기회를 기다려. 계단을 뛰어넘을 수 없다면 한 발 한 발 착실하게 올라가. 그리고, 내게 사랑을 구걸하기 전에 먼저 너 자신을 사랑해. 그게 내 제자가 되는 첫 번째 조건이다."

 

- "너, 프리스쿨에서 다른 아이들과 잘 못 어울리는 것 같던데. 사람들과의 교류도 소홀히 해선 안 돼. 사람들은 독불장군에겐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아. 모든 면에서 능가하는 천재를 이기고 싶으면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야 해. 노력을 지속할 수 있도록. 다양한 것들을 흡수할 수 있도록. 위기일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위기는 반드시 찾아오는 법. 그럴 때 도움의 손길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돼라."

 

- '그 사람이 [사랑이 없으면 제자로 받지 않는다]고 했던 말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았다.'

 

- "보잉을 부드럽게 하려면 팔에만 신경 써선 안 돼. 광배근에도 부담이 가지. 개인의 체격에 따라 중심을 좌우 어느 쪽에 둘지도 달라져. 그런 자기 특성이나 특징을 이해하고 연주에 적합한 상태로 자기 몸의 긴장감을 조화시키는 훈련이지. 네 연습량을 보면 언제 몸이 망가질지 몰라. 그렇게 된 다음엔 늦어. 음악가는... 디스토니아의 위험도 있으니까."

"디스토니아..."

"손이나 손가락에 근육 수축이 일어나는 운동장애야. 의도와 관계없이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일명, '음악가의 직업병'이지. 자, 테츠오, 이리 와. 밸런스볼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 '유리코는 조금씩 조금씩 내가 오랫동안 첼로를 계속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르쳐 주었다.'

 

- "나는 어떤 음악도 기본은 [민속 음악]이라고 생각해. 현대 악곡이나 고전도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을 위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만든 거야.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고 어떤 문화 속에서 태어났는지 이해하면 그 곡이 태어난 상황을 알 수 있지. 그게 곡 해석이라는..."

 

- "정서 교육이야. 왜냐면 너는, 작곡가가 되고 싶잖아? 밤중에 몰래몰래 쓰는 거 알고 있어. 난 말이지, 테츠오... 너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어. 아직은 이쿠미 녀석과 있었던 일이 더 중요하겠지. 하지만 그건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해소될 날이 올 거야. 하지만 그 후로도 네 인생은 이어져야 해. 네가 봐 둘 것이 산더미야. 쌓아야 할 경험도. 난 원래 너를 연주가로 만들고 싶어서 제자로 받은 게 아니야. 남몰래 곡을 쓰지 않아도 돼."

"... 알았어."

 

- "저 녀석이 연주가로 살려한다면, 다른 방향으로 지도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저 녀석이 지향하는 것은 작곡가야. 이쿠미와의 일을 겪고 의도치 않게 연주가의 길을 걸었을 뿐이지. 사실 내가 저 녀석의 스승 노릇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아."

"... 혹시, 그래서 제자로 받아준 거야?"

"테츠오는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야."

 

 - "근본적으로? 그게 뭔데?"

"자부심. 작곡가가 됐든, 연주가가 됐든, 표현자는 자기 긍정감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 착각이라도 좋아. 자기 감각을, 센스를 표현하려는 사람은 그걸 뒷받침할 자부심이 필요해. 지난번 콩쿠르에서 마지막 순간에 무너진 것도 원인은 그런 부분에 있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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