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요아브 블룸 / 강동혁
원제 : The Guide to the Coming Days
출판 : 푸른숲
출간 : 2022.07.15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미리 떠들고 싶은 이야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위스키는 숙성 년수를 표기하기 때문에 '년산'이 아니라 '년'으로 표기한다는 점.
둘은 이 책은 영문판이 아직 없는 것 같은데, 역자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인가?!
둘 모두 번역에 관한 이야기인데, 첫 번째로 인한 아쉬움은 두 번째로 인한 놀라움으로 어느 정도 중화되었다. 음. 그래도 아쉽긴 하다. 위스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좋아하는 편이라, 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반짝반짝해진다.
<우연 제작자들>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요아브 블룸'은 영성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글을 쓰는 작가다. 그러나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고', 그 글의 구조가 매우 신선하다.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다른 소설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문제는 영문판도 없다)
이 책은 타인의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더 전에 '처음과 끝이 정해진' 원형의 시간이 설계되어 있다. 마치 <테넷>에서처럼, 시간이란 특정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굴레가 돌아가는 동안 존재하는, 움직임으로 인해 생겨난 '물결' 같은 것일 뿐이고 그 축에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지적 작가'는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모든 사건들을 '안배'할 수 있다. 이것은 전작 <우연 제작자들>과도 이어지는 흐름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큰 틀보다 흥미로웠던 점은 '경험 전달'이다. <매트릭스>에서 다루었던 것과도 유사하지만,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일상적인' 경험의 공유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경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뇌가 가소성을 가지고 있으며, 삶의 경험들로 변화해간다면. '경험'은 물질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특정 기억이 내 안에 존재한다면, 그것을 '추출'하는 것은 가능할까? 적어도 내 뇌 세포의 변화들을 기록해 '추적하는' 것은?
만약 추출이 가능해진다면, '기억'과 '경험'은 같은 것일까?
이 주제는 <유령 해마>에서도 이미 다루어진 부분이다. '기억'은 '나'라는 자아의 일관성을 유지시켜 주지만 '경험'이 되는 건 아니라고. 개인적으로도 두 작가의 해석에 동의한다. 그 순간의 '나'의 감정과 의식이 녹아들어 있지 않은 기억은, 그것이 '나'라는 인지는 가능하지만 '나'라는 일체감을 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경험'을 공유할 수 있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 하게 될까.
그렇게 쌓아진 시간과 공간적 한계를 넘어선 '경험의 축적'은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이에 관해 흥미롭고 긴장감 있게 써내려간, 하지만 적당히 가볍고 유머러스한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면 <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를 추천한다. 다 읽고 나서 잠시 등장한 인물들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설정은, 이 '경험'의 전달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극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이는 정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딜레마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공포증이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어렵고, 동시에 그런 문제가 있기에 경험하기가 어렵다. 타인의 경험을 통해 '할 수 있음'을 경험하는 것. 나는 이 부분에서 묘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이 책은 부분들을 뜯어볼수록 수많은 설정들이 녹아있다. 각자가 접해온 내용들을 대입해가며 읽어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일 것이다. 저자의 표현처럼, '모든 책은 암호를 해독하는 암호'이고, '모두가 조금씩 다르게' 읽을 테니까.
'책'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 자,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나를 데려가는 걸 잊지 마세요. 앞으로의 날들은 좀 정신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 책을 제대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나를 믿어도 됩니다. 그 점을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이 책을 가져다가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으세요. 하지만 정말로 필요할 때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때가 되면 뭘 해야 할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제 가세요.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겨우 1분, 1분 30초입니다.
또 만나요.
- "글렌피딕입니다." 스토시버그가 말했다. "30년산이죠. 아주 좋은 위스키예요."
그는 사랑스럽다는 듯 병의 경사면을 따라 손가락을 쓸어내렸다.
"깊은 맛이 나면서도 과일 향이 돌죠. 부드러운 꿀맛도 납니다. 훈연 향이 나는 뒷맛이 오래 가지요."
(리뷰자 주 : 위스키는 '년산'이 아니라 '년'이다. '년산'은 와인 등에서 그 해에 수확된 포도로 만들었음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1999년산', '1999 빈티지' 등이다. 위스키에 붙는 숫자는 숙성 햇수, 즉 오크 통이나 여타 통에서 그 리큐르가 보내온 시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30년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맞다. 예외적인 경우로 '글렌드로낙 1993년산' 같은 경우가 있지만, 이 경우에도 24년, 26년 숙성이라고 하지 '년산'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 "괜찮아요." 스토시버그가 말했다. "난 술을 많이 마시는데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울프한테 이 위스키를 받고 나서 한번 훑어봤어요. 꿀맛이 들어간 것도 그래서 알았죠. 하지만 세상에는 직접 경험해야만 배울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는 서랍에서 반짝이는 유리잔 두 개를 꺼냈다. "한잔 하실까요?"
- "이 위스키를 제대로 존중하세요. 이 술은 30년 동안 나무통 속에서 때를 기다려 왔습니다. 30년을요! 유리병 속에서 보낸 시간은 빼고 말입니다. 세상에는 40년, 50년 된 위스키도 있습니다. 이 술은 세상에 대해 좀 배운 술이에요. 오직 슈워츠먼 씨의 입에 들어갈 때만을 기다리며 그 오랜 시간을 보낸 거지요. 그러니까 흠뻑 취하겠다는 생각으로 마구 마셔 버리지는 마십시오. 술을 입안에 몇 초간 머금은 채 돌려 보고 씹어 보세요. 그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입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거예요. 맛이 아주 강하게 느껴지다가 참을 만해지고, 참을 만한 정도에서 흥미로움으로, 흥미로움에서 어떤 이야기로 바뀌어 갈 겁니다. 그리고 이 술은 정신을 딴 데 팔고 싶을 때가 아니라 정신을 안정시키고 싶을 때 쓰세요. 위스키는 인생의 본질이나 역할에 대한 대화를 할 때, 어느 저녁 사랑하는 사람과 조용히 눈길을 주고받을 때, 오랜 친구와 농담을 나눌 때 함께 마시기 위해 만들어진 입니다. 취하고 싶다면 보드카를 드세요. 위스키는 초보자에게 어울리는 술이 아닙니다. 우리를 둘러싼 거짓말의 층을 걷어 내기 위해 마시는 술이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혼자 위스키를 마셔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남자든 여자든, 누군가와 잔을 부딪치세요. 그 사람들이 뭘 마시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다음번에 위스키를 마실 때 떠올릴 만한 누군가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 남자는 가끔 그런 종류의 일을 하는 게 과연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 보았다. 아침에 일어나 얇은 정장을 걸치고, 폴리에스테르 바지 허리춤에 권총을 쑤셔 넣은 다음, 아무것도 없는 긴 널빤지를 '지킨답시고' 하루에 여덟 시간, 열 시간 열네 시간씩 수영장 옆에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데우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자리에 드는 인생. 말 그대로 다른 누군가의 인생에 주석으로 달리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 하루 24시간 경계심을 품고 똬리를 트는 대가로 돈을 주는 사람을 위해서, 경비원 신분으로는 결코 들어가지 못할 반짝이는 수영장 앞의 담장이 둘러쳐진 인적 드문 뜰에 자신을 배치한 사람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
-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르죠. 하지만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그 배가 정말로 이전과 같은 배인지 논쟁하기 시작했어요. 만일 같은 배라면 모든 게 교체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같은 배가 아니라면 그게 더 이상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게 된 시점은 정확히 언제냐는 거지요. 첫 번째 널빤지가 교체됐을 때? 100번째 널빤지가 교체됐을 때? 혹시 마지막 널빤지가 교체됐을 때는 아닐까요? 무언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는 뭡니까?
- 당신도 알겠지만,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리스 신화 속 영웅들의 배만이 아니에요. 모두가 바뀌지요. 단지 속도가 느릴 뿐입니다. 물건도, 장소도, 사람도, 성격이라는 구조적 판들이 행동이라는 대륙 덩어리 아래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모두가 분명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고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세상은 변화하고 반응하며 인과의 법칙에 응답하고 있어요. 배에서 태어나 한 번도 그 배를 떠나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우리는 우리가 고정된 채로 남아 있다고 확신하지요. 오히려 다른 모든 것이 우리 주변을 항해하며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어요. 바로 우리가 테세우스의 배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널빤지로 오래된 널빤지를 교체합니다. 사소한 경험을 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에 노출된 결과 지속적으로 변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는 건가요?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글 수는 없는 것처럼, 같은 사람을 두 번 만나는 일은 불가능할까요?
- 당신은 당신이 정말로 어제의 벤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 전의 그 벤과 말입니다. 어쨌건, 최소한 당신 안의 널빤지 하나는 그때 이후로 교체되었는걸요. 우리가 '나'라고 말할 때의 '나'가 무엇인지,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건 그 무엇보다도 우리 내면의 변화입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오직 우리가 인식하는 자신과 달라질 기회를 스스로에게 허락할 때, 우리가 정말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히 믿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 정체성 내면의 한 부분이 드러납니다.
- 그리고 당신은, 어쨌거나 변화를 무척 바라고 있지요. 난 당신에게 이야기나 해 주러 온 게 아닙니다. 도와주려고 왔지요, 이미 말했지만.
지금까지 몇 년째 당신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고 애써왔습니다. 자아의 깊은 곳에 뛰어들어 당신이 되고 싶은 남자가 되어 수면 위로 떠오르려고 했지요. 머잖아 저 문이 열리면 당신은 떠날 수 있게 될 겁니다. 널빤지 한 두 개만 바뀐 채 귀가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변화에 몸을 던질지 결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되겠지요. 청하지는 않았지만, 충고 하나 하겠습니다.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들을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의 이야기를 끝내지 마십시오.
- "아마존에서 나왔을 때," 벤처 부인이 말했다. "울프는 서구 사람들 중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어. 한 사람에게서 다음 사람에게로 경험을 전달하는 방법을 알아낸 거야."
그녀는 입을 다물고 침묵이 점점 자라나도록 놔두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환풍기가 웅웅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오스나트가 물었다.
"예를 들어서, 네가 정말로 브라질의 카니발에 갔다고 하자." 벤처 부인이 말했다. "넌 누군가에게 그 경험을 말해 주고 싶지만, 아무리 잘 전달해 봐야 그런 설명이 완전한 경험을 전달하는 데는 실패하리라는 걸 알고 있어. 그 색채며 냄새, 흥분, 어쩌면 혼란까지 아무것도 전할 수 없겠지. 세상에는 말로 전할 수 없는 것들이 있거든. 하지만 울프는 한 사람의 정신에서 다른 사람의 정신으로 경험을 옮기는 방법을 발견한 거야. 그 경험을 새로 전달받은 사람이 마치 경험의 주인이 된 것처럼 느낄 수 있는."
- "무슨 일이 일어났든, 무슨 일을 했든 그 경험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기술이 있다는 얘기다. 경험을 보존하는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지. 예를 들어 술은 특히 좋은 보존제야. 그래서 그토록 많은 기억과 경험이 와인, 위스키, 브랜디에 저장되는 거고. 하지만 경험은 사실 어떤 음식이나 음료에도 보존될 수 있다. 물은 예외지만. 물론, 빨리 썩지 않는 것에 보관하는 게 좋겠지. 기름, 식초, 꿀, 가끔은 설탕도 쓰고, 말려서 보관하는 곡식도 좋아. 꼭 한 발 양보하겠다면 피클에 보관할 수도 있고."
"그러다가 누가 그 음식을 먹으면..." 오스트가 느릿느릿 말했다.
"누가 그 음식을 먹거나 마시면, 그 경험을 얻는 거야. 마치 자기 경험인 것처럼 전달받은 경험을 떠올리게 되지. 그 사람은 상대의 경험 자체를 경험한 셈이 돼. 카니발에 갔던 게 되는 거야."
- "하지만 그건 그건 논리적이지 않아요."
벤처 부인은 외투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두 팔을 벌렸다.
"누가 논리적이라나? 하지만 이건 사실이야. 네가 지금 느끼고 있잖아. 어쨌건, 관심이 간다면 나한테 남아 있는 표본이 좀 있어. 비틀즈 공연을 보러 가서 무대 바로 곁에 서 있던 날 밤을 담고 있는 브랜디도 있고, 첫 달 착륙 텔레비전 생중계를 보존해 둔 사랑스런 레드 와인도 있고."
"지금 얘기하시는 건 기억 이식이에요." 벤이 말했다.
"아니, 기억이 아니야. 경험이지." 벤처 부인이 말했다. "경험은 단순한 기억을 넘어서는 거라고."
- "내가 하려는 말은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기억이란 사실과 숫자에 관한 것이라는 얘기야. 굳이 그걸 경험할 필요는 없지. 기억은 머릿속에 저장한 자료의 한 조각이니까. 경험은 완전히 다른 문제야. 경험은 사람을 변화시키니까. 우리가 파는 것도 그런 거란다. 정보가 아니라 변화."
- "어쨌거나 너도 사람들이 뭘로 만들어져 있는지 알고 있지? 사람들은 경험으로, 자신들이 겪어 온 모든 것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래, 물론 시작점은 있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우리의 성격이 형성되는 중심점으로서의 최초의 핵은 분명히 존재해. 하지만 우리의 경험과 선택이 우리를 만들어 나가고 변화시키지. 사람이 영웅이 되는 건 학교에서 영웅주의에 대해 배운 다음 나가서 용감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 아니야. 용감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지. 행동이야말로 사람을 만든다. 행동이 내면의 여러 부분을 움직이게 하고 사람을 짜 맞춰 그 자신으로 만드는 거야. 울프가 이해한 게 그 점이었어. 그게 울프의 천재성이었지. 울프가 팔았던 것도 그거고. 물론, 그냥 어느 장소에 가서 어느 행동을 했다고 주장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이곳에 오는 사람들도 있었어. 울프는 그 사람들을 관광객이라고 불렀지. 하지만 우리의 진짜 고객들은 변화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뭔가를 경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고소 공포증이 있었지만 스카이다이빙 경험을 사고 나서 그 두려움을 떨쳐 버린 사람들, 사회적 상호 작용에 익숙해지기 위해 그런 상황이 가득 들어 있는 작은 레드 와인병을 궤짝으로 사갔다가 치솟는 불안증을 멈출 수 있게 된 수줍은 사람들, 기업을 세운 경험을 사간 기업가들, 창의적 사고력을 일깨우고 싶어 예술가와 음악가들의 경험을 사간 사람들. 울프는 경험이 사람을 만든다는 점을 이해했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바꿀 방법을 제공했어. 그들은 여기에서 그냥 기억만을 얻어간 게 아니란다. 정신을 조금씩 조율한 거야."
- 집에 있을 때는 밤에 침대에 누워 있으면 (그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딱히 할 게 없었으니까) 때때로 자신이 언제 망가질지 궁금해졌다. 내면의 뭔가가 터져 그가 마침내 자제심을 통제력을 잃게 될 때가 언제일지. 아무 죄 없는 종업원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관공서에서 진상을 부리거나 좌절감을 잔뜩 실은 주먹으로 벽이나 잘난 체하는 얼굴, 혹은 무심하고 불운한 탁자를 쳐 버리는 게 언제가 될지.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벤은 이 모든 광기에 대해, 지난 몇 년간 점차 익숙해진 이 모든 거지 같은 상황들에 대해 자신이 믿을 수 없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의 마음속 기관은 오래전부터 적응력과 갈등을 유연하게 회피하는 능력을 길러 왔다. 그 결과 내면의 불길은 참을 수 있는 온화한 수준으로 잦아들었다. 세상에는 온갖 기술이 있지만, 그중 벤이 갖추게 된 기술은 어떤 싸움을 해야 할지 현명하게 선택하고 전면적으로 화를 내는 상황을 피하는 능력이었다. 필요할 때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기민함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벤의 살갗 아래에서는 언제나 자기혐오가 부글부글 끓었다. '규칙에 따라서', '사회의 더 큰 이익을 염두에 두고 계속 살아가기 위해' 작은 욕망들을 죽이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내면의 증오심은 그의 축 처진 어깨와 남들의 판단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태도, 세상의 눈에 투명 인간으로만 보인다는 사실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을 조롱했다. 벤의 마음 한구석에 있는 무언가는 사회의 불안을 걷어차고 돌아서서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나 버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결국 그 존재는 별로 대단하지 않았다.
- 세상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워 인생을 이해하려는 그의 시도는 이따금 스스로 인정했듯이 딱히 성공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본능, 즉 행복을 추구하는 본능 또한 세상을 제대로 연구하면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1, 2년에 한 번씩 그는 '뛰쳐나가서' '인생의 진흙탕으로 두 손을 더럽힐'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영혼이라는 성의 문을 벗어나기 직전에 굴복하고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 그래도 가끔은 작은 지식 한 조각이 그의 인생의 한 모퉁이를 밝혀 주었다. 예를 들면, 외로운 고래에 관한 기사가 그랬다. 태평양 깊은 곳 어딘가에서는 과학자들이 52 헤르츠라는 별명을 붙인 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고 있다. 고래류의 다른 모든 개체가 15~25 헤르츠의 주파수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비해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고래만은 52 헤르츠로 노래를 부른다. 다른 어떤 고래도 녀석에게 응답하지 않는다. 그 고래는 다른 무리와 합류하지 않고 수십 년 동안 허공에 음을 발사하며, 아무 응답도 받지 못한 채 헤엄치고 있다. 벤은 그 기사를 읽고 의자에 깊숙이 기대 눈을 감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쩌면 벤 역시 그랬는지도 몰랐다. 벤 또한 자신만의 주파수로 방송을 하며, 다른 어떤 고래도 쓰지 않는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 우리는 모두 외로운 고래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주파수가 있다.
- "며칠 전 당신이 최근에 낸 책을 다 읽었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관해 당신과 협력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아직 전화 주신 분이 누구신지 모르겠는데요." 내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도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을 보내도록 하지요." 그가 말했습니다. "아마 스타일이 마음에 들 겁니다. 당신 책을 끝까지 읽자마자 나는 혼자서 '와, 이 녀석과 함께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적합한 사람을 찾고 있었거든요."
- "댁도 알겠지만, 인생이란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내야 해요. 뭔가 현실적인 걸 해야 하죠. 물질적인 것 말입니다. 당신네 작가라는 인간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그 모든 생각에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한들 그게 전부일 수는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뭐에 홀린 듯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됐죠. 사물의 본질을 숙고하기만 하고, 그것들을 하나도 실행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인생에는 현실성이 필요해요. 그 위에 자기 생각을 퍼 담을 수 있도록 말이죠. 그냥 글만 쓸 수는 없어요."
- "그렇다고 치죠. 하지만 제가 글을 쓸 때 그 글이 다른 사람의 글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하셔야죠. 모두가 조금씩 다르게 알아듣는다 해도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 글에 자기 목소리를 부여하고 싶어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목소리는 작가 자신의 것이어야 해요. 그러니까, 맞습니다. 저는 의미 있는 무언가를 쓰고 싶어요."
- "나는 이것보다 이상한 일도 봐 왔다. 그 책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는 동안 그 책이 주는 열매를 즐기는 건 어떠냐? 벤에게 지금 상황에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안내서가 있고, 나는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도움은 전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이 책을 포함해서 말이다. 물론, 너무 지나치면 안 되겠지만."
"너무 지나치면 안 된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벤이 물었다.
"앞으로 뭘 할지 알아보겠다고 2분에 한 번씩 그 책을 펼쳐 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말이야. 내 생각에 그 책은 특정한 상황에만 쓰도록 되어 있는 것 같구나.”
"왜 2분에 한 번씩 펼쳐 보면 안 되는데요?" 오스나트가 물었다. "도움이야 많이 받을수록 좋잖아요?"
"우리가 책을 많이 펼쳐 볼수록 책의 해답과 안내는 모호하고 불분명해질 테니까." 벤처 부인이 말했다. "책의 페이지 수와 단어의 개수는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안내가 필요한 문제도, 순간도 끝없이 많을지 몰라. 이 책은 분명 이상한 책이야. 하지만 그 안의 글은 바뀌지 않는다. 2분에 한 번씩 펼쳐 보면 책이 주는 해답은 우리의 모든 요청을 다룰 수 있을 만큼 일반적인 것이 되어야 할 거야. '예', '아니오', '그럴지도 모릅니다'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해 볼 만은 하네요'라는 식으로 말이지. 하지만 우리가 그 책을 정말로 필요할 때만, 예를 들어 열 번만 펼쳐 본다면 안내는 그만큼 더 구체적이게 될 수 있지. 벤이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처럼 말이다."
(리뷰자 주 : 같은 사안에 관해 여러 번 점을 보는 것처럼.)
- 스테판은 의자에 앉은 채, 나무로 만든 의자 뒷다리에 몸무게를 싣고 앞뒤로 몸을 까딱거렸다. 그는 눈앞 테이블에 올려놓은 작은 병을 보며 그 형태의 우아함에 감동할 여유를 자신에게 허락했다. 맥캘란 30년산. 1등급 위스키다. 늙은이가 이번에는 전력을 다했다. 그가 저 안에 무엇을 집어넣었는지 알면 재미있을 것이다.
(리뷰자 주 : 맥캘란은 좋은 위스키다. 개인적으로 정말 무난하고 깔끔한 쉐리 싱글몰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스키는 '년산'을 쓰지 않는다!!!)
- "너한테 형편없는 특징들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아." 함께 옥상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녀가 말했다. "누가 너를, 너의 그런 면을 사랑하자마자 그 특징들이 짜잔 하고 좋은 게 되니까. 사랑받는 순간 너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라 귀여운 사색가가 되고, 동화 속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 돼. 터무니없는 데이터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라 철저하고 꼼꼼한 사람이 되지. 계속해서 실패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되는 거야. 알겠어?"
- "행복해지려면 꼭 알아야 할 네 가지가 있어." 그녀가 말했다. 머리 위로 햇빛이 반짝이며 그녀의 얼굴 전체를 비추었다. "딱 네 가지야. 너를 사랑해야만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 네가 사랑해야만 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 너는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 네게는 사랑할 능력이 있다는 것."
- 마침내 어느 날 밤, 그는 조용히 집에서 나와 술을 마시러 갔다. 그는 눈에 띄는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 바에 앉아서 술을 연거푸 주문했다. 보드카였다. 세 번째 샷을 마시자 고통이 조금은 무뎌졌고, 다섯째 잔을 마셨을 때는 건망증 비슷한 것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일곱 번째 잔을 마시자 모든 일이 전보다 몇 배는 강해져서 돌아왔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바에 앉아 있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자기 인생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 "당신은 몰라요. 당신은 아비털을 모르잖아요. 나만큼은 모르죠. 당신은 내가 느끼는 걸 느끼지 못해요. 당신은 그냥 바에서 내 옆에 앉은 또 한 명의 멍청이일 뿐이야. 당신은 절대 이해 못 해. 우리는 모두 실을 둘둘 감은 누에고치처럼 싸여 있으니까. 모두가 자기 자신밖에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한테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라고."
- "이 세상에서 정직한 사람을 찾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빌이 말했다. "정직함은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니까요. 정직해지려면 약속을 할 때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하지요. 모리스 씨는 사람들의 마음이 선하다고 생각합니까, 악하다고 생각합니까?"
- "나는 사람들이 선해지고 싶어 하지만, 늘 그런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자신의 행동이 자기 눈에는 받아들일 만하게 보이도록 현실을 왜곡하지요. 정직한 사람, 선량한 사람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행위를 살펴보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판단하는 솜씨가 형편없습니다. 선량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는 능력이 필요해요. 상상력이 필요한 기술이죠. 선량한 사람들은 보통 더 큰 상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 "좋은 호텔 주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빌이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은 손님의 관점에서 상황을 볼 수 있어야 하죠. 정직한 사람들이 손님 접대도 더 잘하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손님을 접대하는 사람과 정직한 사람은 둘 다 자신의 욕망과 거리를 두어야 하거든요. 욕망이 강하면, 자신의 욕구에 부합하는 모든 행동을 꼭 필요한 것처럼 보게 되기 마련이니까요. 또 그들은 다른 사람의 욕구와 가치관, 다른 곳에서 상황이 이해되는 방식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진실은 개인적인 것일 수 없어요. 진실은 모두가 만족시켜야 하는 어떤 표준을 설정합니다. 정직한 사람들은 '나의 진실'과 '그 사람의 진실'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저 진실이 있을 뿐이지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요." 모리스가 말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로버트 모리스 씨." 토머스 빌이 말했다. "그게 당신을 좋은 호텔 관리인으로 만드는 요소이지요."
- "뇌가 아는 건 그렇다 쳐도, 심장이 아는 건 또 다른 문제거든. 경험이 이미 너의 일부가 되었으니까. 지금 네 심장이 뛰는 건 네가 분노로 가득하기 때문일까, 열정으로 가득하기 때문일까? 나를 때리고 싶어, 안고 싶어?" 그는 낄낄거렸고, 오스나트는 목구멍으로 신물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늘 이런 식인걸, 자기야. 사랑은, 모든 사랑은 그저 면전에서 터져 버릴 적당한 순간을 기다리는 고통의 폭탄일 뿐이야."
- 우리는 이따금 타격을 무디게 해 줄 사람, 영혼에 어느 정도 질서를 부여해 줄 사람, 이 모든 혼란에 어느 정도 선명함을 가져다줄 사람만을 원한다는 사실도.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늘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랑이 언제나 혼란을 억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오래된 혼란을 새로운 혼란으로 바꿔 놓는다. 약간 더 위로가 되는 혼란, 약간 더 마음을 휘젓는 혼란.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 진짜 질서란 없다. 언제나 균열이 남아 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 균열을 품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 세계를 두루 여행하고 무수히 많은 경험들을 수집하고 나니 평범하고 사랑이 가득하며 머리가 막 벗겨지기 시작한 끌어 안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찮은 일상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벤처는 폭죽처럼 그녀를 하늘로 쏘아 올릴 폭풍 같은 모험을 원했다. 하지만 그는 착하고, 그녀를 잘 안아 주고, 허세가 없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와의 행복을 찾아야겠다는 욕구 외에는 원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그 점이 자신을 갉아먹는다고 느꼈다. 밀랍과 깃털로 만든 상상의 날개가 그 때문에 녹아가는 것 같았다. 상어들과 뛰어놀고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개조한 오토바이를 타고서 사막을 가로지르는 데 익숙해지고 나자, 헌신이라는 선명한 풍경에 자리 잡은 단순한 사랑은 지루하고 숨 막히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영혼은 대담한 삶에 굶주려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떠났다. 그리고 다른 사람, 두 번째 사람과 결혼했다.
- 사랑 대신, 그녀는 흥미를 유지하게 해 주고 피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사람을 찾았다. 그는 그녀를 가지고 놀 수 있었고, 그녀는 그를 가지고 놀 수 있었다. 사랑은 약자들, 애정에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핵심은 계속해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 사람은 누구나 오랜 길을 걷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 길 전체를 걸어온 사람을 보지는 못한다. 반항적으로 머리를 늘어뜨리고 돌에 무릎을 부딪혀 멍이 든 소녀, 하이킹을 한 끝에 웃으며 물웅덩이에 뛰어드는 십 대 청소년, 남자들의 영혼에 파고드는 길을 찾아가는 차분한 눈의 여자. 아무도 그 모두를 알지는 못한다. 오늘 처음 나타나 그녀를 본 사람은 속으로 지금 보이는 모습이 그녀라고, 그녀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낡은 운동화와 빛바랜 셔츠, 지나치게 통통해진 아래팔과 곱슬머리 가발 같은 머리카락, 고생이 묻어나는 몸이 바로 그녀라고. 요즘 그녀는 그렇게 보이니까. 그에게 제시되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니까. 하지만 그녀의 눈 뒤쪽에서는 새로 산 하이힐을 신던 바로 그 소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눈을 빛내면서, 드레스에 바람을 가득 실은 채 속삭이듯 움직이며, 대체 그가 무엇을 봤기에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왜 황홀감보다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지 궁금해하면서.
- 몸과 영혼이 함께 나이 드는 것은 성숙함이다. 하지만 몸은 자신만의 여행을 이어 가고, 영혼은 제자리에 머문다. 그렇게 노년은 찾아온다. 몸의 느낌과 영혼의 느낌 사이에서 벌어져만 가는 간극은 언제나 가슴을 저리게 한다.
- 그래서 오스나트는 어느 새인가 해변으로 나와 감초 사탕을 씹었다. 어린 시절의 끝자락에 찾아오는 맨 정신의 섬세한 거미줄을 엮어서, 그렇게 만든 생각의 침대 위에 떠 있었다. 그때에야 세상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자연스럽게 구는 것, 타고난 운명을 마냥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고서는 그녀의 운명이 정확히 무엇이고 그녀가 타고난 환경이란 무엇인지 설명해주려 들었다. 자기들은 그냥 안다면서. 바로 이런 현실에 대한 반응이 오스나트에게는 세상에 대한 최초의 이해였다. 그녀는 경이로운 감정이 세상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세상의 무관심에서부터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나이였다. 그 시절 그녀에게, 생각이란 언젠가 한 번이라도 적용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통찰력의 혼합물이었다.
- 그녀는 홍해의 해변을 따라가며 조개껍질을 줍는 소녀처럼 틀에 박힌 표현들을 주워 모으고 세상에 진짜 신념이란 없다고, 그저 자기 정당화가 있을 뿐이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자의식이 없는 사람들과 일부러 자의식에서 풀려나 무지를 선택한 사람들 사이에 과연 차이가 있는지 말없이 고민하거나.
- 모든 결정이 '운명적'이었고, 모든 우정이 '용감하고 영원한' 것이었으며, 모든 사랑이 '위대했다'. 사람들이 이 모든 말을 너무도 높은 강도로 소리쳐 댔기에 그녀는 그 말들을 하나도 믿을 수 없었고, 언어는 흐릿해져 갔다. 그중 진실을 말하는 단어는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끝내줄' 때는, 사실 그 무엇도 '끝내주지' 않으니까.
- 그래서 그녀는 에일라트로 다이빙을 하러 갔다. 그녀가 살면서 내린 훌륭한 결정 중 하나였다. 그녀는 물속에서 고요함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오스트가 몰랐던 새로운 조합이 있었다. 조용한 긴장감, 아름다운 위험. 그녀의 두뇌는 통제력을 발휘하고 경계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 심지어는 약간 겁을 먹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 제대로 숨 쉬기 위해서. 그녀는 1미터씩 수심이 깊어질 때마다 위험도 커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호흡에 깃든 율동감과 고요함, 그녀가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바다 속 파도에 실려 위아래로 깐닥거리는 방식에, 그 모든 것에 명상적인 성질이 깃들어 있었다. 상반되는 것들이 조합될 수 있다는 사실, 그런 모순이야말로 무언가를 너무도 아름답고 경이롭고 신비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오스나트는 전율했다. 고요한 긴장이라니,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 우리는 수백만 가지의 다른 존재를 꿈꿀 수 있지만, 단 한 번의 인생을 살 수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실망감으로 얼어붙는다. 꿈이 곁에 있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애써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게 되자, 그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가 문득 명료해졌다. 다른 모든 계획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그녀의 인생이었다.
- 스테판의 얼굴이 눈앞에서 움직이며 그의 방어를 깨려고 했다. 벤은 자신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형체에 꿈속에서처럼 반응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발차기, 막기, 치기, 발차기). 한편 벤의 다른 부분은 옆으로 물러서서 '이렇게 싸우는 사람이 대체 누구지? 나인가?' 하고 궁금해했다. 오랜 시간에 걸친 훈련, 여러 달에 걸친 훈련이 쏟아져 나왔다. 벤은 눈을 노리고 오른쪽으로 휙 움직이고, 왼쪽으로 몇 가지 동작을 했다. 왼쪽으로 발을 옮기자 상대방의 빈틈이 드러났다. 잘 봐, 저놈의 왼쪽 다리가 발차기를 준비하고 있어. 그는 손을 들었다. 저 아래를 공격할 좋은 기회야. 이 모든 일이 자연스럽고 정확하고 매끄럽게 일어났다.
- 일단, 신뢰를 좀 쌓읍시다.
당신은 여기 저장고에 앉아서 허락을 구하지 않고 이 책을 읽고 있어요. 괜찮습니다. 나는 당신한테도 읽힐 운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속임수를 쓰려 하고 있어요. 과정을 모두 건너뛰고 곧장 결과를 얻으려는 거지요. 세상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나 같은 책을 가지고 있더라도요. 그런 식의 묘기로 당신과 내가 모두 당황하는 일은 없도록 합시다.
- 어렸을 때 당신은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누구에게도 그 일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믿었습니다. 무슨 일이 발생하는 당신에게만 속해 있는 한 전부 안개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고요. 당신은 그 일을 언어로 표현해 누군가에게 말할 때에만 그 일이 구체화되어 현실이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당신은 이 스펙트럼의 반대편으로 넘어갔습니다. 당신은 상황을 최대한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그 만족감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행위는 놓아 버리기로 했고요.
- 그야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실제로 가닿을 수는 없으니까요. 당신은 조용히 그런 전제를 세웠습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그 말을 당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듣고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말은 오직 당신 안에서만 반향을 일으키는 의미로 여러 겹 싸여있지요. 우리 모두의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무한의 틈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의 친구를 진정으로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늘 거의 얼추, 그저 비슷하게 이해하는 것일 뿐이지요.
-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껍질은 의도가 담긴 언어, 눈짓, 몸짓으로 암호화된 우리의 생각을 뿜어냅니다. 수용자를 둘러싼 갑옷은 언어와 몸짓을 해독해 최초의 암호와 비슷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생각으로 번역하지요. 우리는 혼자입니다. 우리가 무얼 하든 상관없어요. 우리는 혼자일 때만 진실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평생 동안 그 껍질을 꿰뚫을 수 있는 사람을 간절히 찾아다닙니다. 너무도 친숙해서, 그들과 함께 있을 때면 혼자 있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을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발명해 냅니다. 우리는 평생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남자에게 입을 맞춥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완전히 평범한 남자 혹은 여자의 껍질로 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입맞춤이 충분히 깊어지고 단단해진다면 언젠가는 그들의 껍질에 금이 가고 부스러져 진정한 사랑이 그 틈새 사이로 빛날지 모른다고 기대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때가 오기까지 영원으로부터 힘을 얻는 거창한 말들을 사용하지요. 나의 사랑, 나의 인생, 나의 세상. 하긴, 어느 날밤 누군가의 곁에 누워 그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그 사람의 귀에 친근하게 "나의 타협책... 나의 소중하고 임시적인 타협책..."이라고 속삭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 "제가 이해한 게 맞다면," 벤이 말했다. "훈련 과정을 거칠 이유는 사실 없었던 거네요. 해야 할 일이라고는 저 병들 중 하나를 마시는 것뿐이니까요. 그럼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 아닌가요?"
"그래." 벤처 부인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 말이 맞아. 나도 언젠가 울프에게 그렇게 말했어. 하지만 내 생각에, 울프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사람들과 상호 작용하는 걸 좋아했거든. '각자가 조금씩 달라.' 언젠가는 울프가 그렇게 말하더구나. '가능하다면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 낫지.' 모두가 사용하게 될 단 하나의 경험을 만드는 것이 효율적인 길이었을지 몰라. 하지만 울프는 경험을 풍부하게 만드는 문제에 관해 늘 효율성을 지지한 건 아니었어. 다만 이번에는 그 경험이 울프 자신의 경험인 거야."
- 그 자신을 프리랜서 경험자라는 단순한 신분에서 권력의 전당 가장 안쪽에 있는, 뭐든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일종의 정상까지 나아가게 해 줄 능력을 전해 줄 테니까 말이다. 칵테일에 들어 있는 경험의 도움을 받으면 그 누구보다 강한 자가 될 수 있는데, '충분히 강한' 정도에서 만족할 이유가 있을까?
-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는 외부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게 아닙니다. 영원한 영혼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배움은 그저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을 떠올리는 것일 뿐이지요."
- "제가 하임 울프와 함께 공부하는 동안, 하임 울프는 제게 몇 가지 아이디어를 이야기했습니다." 스테판이 말을 이었다. "배움이란 잊힌 기억을 되찾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사실은 잊힌 기억이라는 내용이었죠. 그렇게 보면 경험은 사실 '떠올리지 못함'이라는 공간에서 '떠올림'이라는 공간으로 기억을 이전하는 것일 뿐입니다."
"결정론에 관해 얘기하는 거로군." 보스가 지친 듯 말했다.
"아뇨, 아닙니다." 스테판이 말했다. "울프에 따르면,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가능한 기억의 길은 하나만이 아닙니다. 모든 가능성이 우리 안에 기억으로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걷고 싶은 기억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기시감이란 그저 '떠올리지 못함' 구역에서 '보통' 구역으로 '새어 나온' 기억일 뿐입니다. 우리는 4차원에, 시간이라는 차원에 갇힌 채로 삶을 살펴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런 제약을 넘어서서 다음 차원에서 우리를 바라본다면, 그는 우리가 이미 기억하고 있는 것들과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 사이에 아무 차이를 두지 않고 기억의 진행 전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 "미래를 예언한다는 거군."
"예언은 역방향의 기억이니까요."
- 스테판은 그들이 고용주와 피고용인이라는 예전의 관계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눈앞의 남자가 그 사실을 알아채기 전부터 말이다. 그들은 대등한 상대였다. 스테판이 내민 것은 사업 제안으로 둘러싸인 협조 요청으로 둘러싸인 도전장이었다. 그는 다른 모든 경험보다도 매력적인 선택지를, 궁극의 미끼를 제시했다.
- "뭐가 문제예요?" 그녀가 그를 붙든다. "왜 그래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요."
그녀는 벤을 스테판에게서 떼어내 옆으로 데려갔다. 스테판은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의 눈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얼굴이 거의 뭉개졌지만, 다른 모든 것 때문에 통증조차 작게만 느껴졌다.
"대체 왜 그래요?" 그녀는 벤의 어깨를 잡는다. "방금 그건 뭐냐고요?"
- "왜 다들 날 싫어했을까요?" 그가 목이 멘 소리로 말한다. "왜 다들 나한테는 관심을 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는 조용히 울었다. 그가 몰랐던 일부가 녹아내리며 밖으로 흘러나왔다.
"저 녀석을 봐요. 저게 나였어요." 그가 마침내 말한다. "저 녀석을 보라고요. 저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고 싶었어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원했던 건 다른 사람들하고 같아지는 것뿐이었어요.”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은 상상 속의 존재니까."
- 그는 두 손을 조심스럽게 움직여보았다. 일어나려 애썼다.
그는 옆으로 돌아눕는 데 성공했다. 두 다리를 구부리고 일어선 자세를 취했다. 네가 거둔 성공을 생각해. 그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네가 이룬 모든 일들을 생각해. 네가 가진 모든 것들을, 네가 얻어낸 것들을, 네가 정복한 것들을 기억하라고.
- 성공을 생각해.
네 안에 있는 모든 강한 것들을 떠올려.
너는 패배하지 않았어.
이건 정말로 너한테 일어난 일이 아니야. 저놈들 소행이지. 정말로 일어난 일이 아니야. 그는 앞으로 몇 발을 더 내디뎠다가, 오래된 꿈속에서처럼 권총을 꺼내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주변의 사람들이 흩어지고 물러났다. 그는 계속해서 발을 끌며 걸어갔다.
- 모든 책은 암호를 해독하는 암호다.
책이 암호인 이유는 아무도 그 책이 쓰인 방식대로 정확하게 그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조금씩 다르게 읽는다. 독자가 해독한 내용은 암호를 적용한 사람의 의도와 절대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책은 작가의 내면에 있음에도 작가 자신도 몰랐던 것을 해독해 주기도 한다. 암호를 작성하는 와중에 말이다.
- 이 책은 15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쓰였으며, 초고를 쓴 뒤 거의 열두 번의 개고를 거쳤다. 이런 오랜 과정의 이면에는 모두에 의해 해독될 수 있으며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직접, 어느 순간에든 말을 걸 수 있는 책을 내가 쓸 수 있으리라는 잘못된 생각이 놓여 있었다.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브렛 워쇼] 미식가의 디테일 - 비슷비슷 헷갈리는 것들의 한 끗 차이 (0) | 2022.08.27 |
---|---|
[공여사들] 눈치껏 못 배웁니다 일센스 - 이메일 작성법부터 엑셀 기본기까지 친절한 선배 공여사들의 직팁 모음집 (0) | 2022.08.24 |
[호즈미 ] 나의 조반니 1-3 (0) | 2022.08.23 |
[오츠이치, 오이와 켄지] 고스 GOTH (0) | 2022.08.16 |
[요네자와 호노부] 안녕 요정 (0) | 2022.08.07 |
[이우만] 새를 만나는 시간 (0) | 2022.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