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아디야샨티 / 정성채
원제 : The end of your world : Uncensored Straight Talk on the Nature of Enlightenment
출판 : 정신세계사
출간 : 2011.02.11
이 책을 읽고자 한 계기가 있었는데, 잊어버렸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진지하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행했던 것을 잊음으로써 얻는 장점이 있다. 그 일의 결과를 맞닥뜨렸을 때 감사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주는 선물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모든 것은 '바로 지금' 동시에 일어난 일이라는 느낌도 든다. 꿈에서는 말이 안 되는 것들도 곧 납득하게 된다. '아, 이건 이러저러해서 그런 거지'라거나 '아, 내가 이렇게 했었지'라고 말이다. 그 순간에 '과거도 함께 창조되는' 것이다.
과거는 모두 '지금 이 순간'의 내가 기억하는 꿈이다.
이것이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매달린 문장이다. 정확하게는, 다 읽은 후 내 안에 남은 문장이다.
이 과거에는 전생도 포함이 된다. 만약 누군가가 전생을 보거나 기억한다면, 그것은 그가 그것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거나 그것을 놓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저자의 표현이 마음에 든다. 과거는 시간순으로 차곡차곡 쌓인 벽돌 같은 것이 아니다. 원형의 구조로써 지금과 함께, 미래와 동시에 병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 꿈을 꾸고 싶다면, 그리하라.
그러나 그것은 '당신만의' 꿈이다.
나에게는 '나의' 꿈이 있다.
깨어날 때까지 이어질 '꿈'이.
"지금 당신이 꾸고 있는 꿈은 행복한가요?"
- 2004년 가을에 아디야샨티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영적 깨어남(spiritual awakening)에 대한 그의 독창적이고도 신선한 가르침의 방식에 놀랐다. 그는 자신이 속한 선가의 맥을 존중했지만 어떤 특정한 스승이나 구도 방법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신 그는 우리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들여다보고 자기 삶의 영역들을 두려움 없이 탐사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했다. 그는 또 영적 깨어남이 동굴 속에서 수십 년 동안 명상을 했다든가 특별한 행복을 입은 사람들 같은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나타나는 희귀한 현상이라는 말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나아가서 그는, 깨어남이 희귀한 현상이라는 이 신화야말로 실제로 우리 자신의 발견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진짜가 아닌, 스스로 부여한 제약을 믿게 되기 때문이다.
- 영적 깨어남은 더 이상 엘리트 수행자들만의 영역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손이 닿을 정도로 성큼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이다. 20년 이상 영적 지혜의 가르침을 책으로 펴내 온 출판인으로서 나는 깨어남에 대한 이 새로운 관심의 물결에 흥분되기도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개념에 흔히 따라다니는 혼란과 오해와 왜곡의 가능성에 조금은 염려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영적 깨어남'이라는 단어로써 서로 매우 다른 것들을 의미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 과정을 통해서 무엇을 얻게 되는지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 -무엇을 잃게 되는지- 까지도 알고 있는지를 자주 의심해본다. 거기에 더해서, 영적 깨어남이 점점 더 대중적인 현상이 되어가는 동안,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깨어남을 에고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을 보아왔다. 깨어남을 어떻게든 다른 사람보다 내가 낫다는 기분을 만끽하는 데에, 혹은 그들보다 '더 깨어 있음'을 주장하는 데에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를 가장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깨어난 사람은 어떠어떠하다는 자신의 관념에 맞지 않는 경험 -그것이 분노이든 우울증이든 가정불화 간에- 은 무조건 부인하려 드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 앞으로 나는 많은 단어와 맥락과 비유를 동원하겠지만 여러분은 내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깨우쳐 이해되어야만 하는 내용이라는 걸 잊지 마시길 바란다. 그 내용이 참된 것이 되려면 삶으로서 경험되어야 한다. 내 '이야기'는 결코 여러분 자신의 진면목을 알게 되는, 그 참되고도 직접적인 '경험'을 대신할 수가 없다. 여러분은 기꺼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스스로 물을 필요가 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이것을 나는 정말 알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다른 사람의 신념이나 의견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인가? 실제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믿고 싶은가, 혹은 무엇을 상상하고 싶은가?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이 한마디 의문은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 여러분이 이 의문을 깊숙이 들여다볼 때, 이 의문은 실제로 여러분의 세계를 파괴할 것이다. 또한 여러분의 모든 자아 관념을 파괴할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작용하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 스스로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여기던 모든 것, 세계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여기던 모든 것이 가정과 신념과 견해에 근거한 것일 뿐임을 알게 된다. 그것들은 모두 여러분에게 진실이라 교육되고 길들여져서 스스로 믿어버리게 된 것들이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꿰뚫고 그 실상을 깨달을 때까지 우리의 개체 의식은 계속 꿈속에 갇혀 있을 것이다.
- 깨어남 혹은 깨달음에 관한 또 다른 커다란 오해는, 그것을 뭔가 신비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천지자연과 하나가 된다거나 바닷속으로 녹아든다거나, 또는 신과 합일된다거나 하는 경험을 기대할 수도 있다. 이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또한 깨어남이란 것이 무슨 엄청난 통찰, 예를 들어온 우주의 이치를 깨달았다든가, 또는 '실재'의 내부 메커니즘을 통찰했다든가 하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영적 깨어남이란 신비적인 경험을 하는 것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신비 경험은 물론 아름답다. 여러모로 그것은 '내'가 향유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그리고 가장 즐거운 경험이다. 이 '나'는 항상 무언가와 하나가 되기를 추구한다. 사람들이 몰두하는 많은 영적 수련법들은 실제로 무엇과 하나로 녹아든다든지, 신을 본다든지, 의식이 시공간을 넘어 확대되는 느낌을 갖는다든지 하는 다양한 신비적 경험을 얻게끔 고안되어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런 신비의 경험은 깨어남과는 다르다.
- 물론 이 신비 경험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경험이 무엇을 변화시키는 힘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 실제로 그것이 이런저런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도 흔하다. 많은 경우 신비 경험은 매우 긍정적인 측면에서 에고적인 자아의 구조를 극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그러니 물질적인 상대 세계에서 신비 경험은 가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깨어남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그것은 '나'의 경험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으로부터 완전히 다른 어떤 패러다임으로, 하나의 세계로부터 다른 하나의 세계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깨어 있는 사람은 여러분이 보는 것과 다른 세상을 본다는 뜻이 아니다. 여러분이 이 의자를 보는 것과 똑같이 깨어 있는 사람도 의자를 본다. 여러분이 자동차를 볼 때, 깨어 있는 그 사람도 역시 같은 자동차를 본다. 차이점이라면, 완전히 깨어나 있는 사람은, 즉 이원성의 베일 저편에 건너가 있는 사람은,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서로 다르게 보이거나 유별나게 보이는 물건들이 근본적으로 똑같이 인식된다는 점이다. 의자를 보지만, 동시에 자신을 의자와 별개의 무엇으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것, 느끼는 것, 듣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말 그대로 동일한 것의 한 현현인 것이다.
- 깨어남의 밀월여행이 하루가 되든 한 해가 되든 간에, 어느 시점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모든 것이 많이 달라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삶에서 우리에게 기준이 되어주던 것들이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우리가 붙들고 살던 신념, 우리 스스로를 정의해오던 신념이 이제는 텅 비어 있는 것임이,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임이 드러난다. 우리가 품어왔던 에고의 동기가 대부분 사라져 버린 까닭에 매우 큰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이전까지 삶 속에서 자신을 움직여왔던 거의 모든 것이 자기본위였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은 오로지 이 특별한 기간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꿈속과 같은 상태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비판하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가 꿈같은 상태에 있을 때는 삶을 뚫고 나아가게 하는 추진력이 매우 자기중심적이라는 뜻이다. 그때 우리의 행동 동기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원치 않는 것은 무엇인가?'
- '깨어남'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 그리고 바로 지금이다. 어제 일어난 일은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일과는 별 상관이 없다. 문제는 '내가 깨어나는 경험을 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깨어남이 바로 여기, 바로 지금 깨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어떤 이가 내게로 와서 "아디야, 나는 깨어나는 경험을 했어요"라고 말한다면 내가 그에게서 제일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것은, 그의 '마음'이 그 깨어남을 제멋대로 접수해버렸는지의 여부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깨어남을 경험한 '나'를 에고로서, 개인적인 '나'로서 이야기하는 거라면, 그것은 단지 또 하나의 환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진정한 깨어남이라면 우리는 그 깨어난 주체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깨어 있음(awakedness)이 '나로부터' 잠 깨어 일어난 것이다. '영'이 에고와의 동일시로부터 잠 깨어 일어난 것이다.
- 또한 우리의 마음이 믿는 것이 무엇이든, 해석이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은 말 그대로 몸과 마음속의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음도 알고 있다. 그러나 꿈속 상태의 중력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비록 존재의 진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에고를 믿고 있을 수 있다. 생각이란 게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절대적으로 거짓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믿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 깨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어떤 생각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게 우리가 할 줄 알던 것의 전부였다. 이거 아니면 저거였던 것이다. 하지만 깨어남이 잠시 스쳐 지나간 후에는 모든 게 사뭇 달라 보일 수 있다. 한 생각을 믿을 수도 있고, 그와 동시에 그걸 믿지 않을 수도 있다. 나눠 없는 관점과 상반된 어떤 행동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내적인 힘에 사로잡혀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아는 행동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처지와도 같다.
- 이런 식의 경험은 예가 얼마든지 있다. 여러분이 이러한 현상을 겪게 될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그런 일이 아주 흔하다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은 아니며, 오히려 어쩌면 이전보다 훨씬 나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가 일쑤다. 어떻게 하나의 생각을 믿으면서 동시에 그 생각을 믿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가운데 에고의 관점에서 말해대고 또 그렇게 하는 자신을 빤히 보면서도 어떻게 버젓이 그 짓을 계속할 수가 있단 말인가?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이쯤 되면, 대부분 사람들은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걸로 짐작하게 된다. "뭔지는 모르지만 한참 잘못된 것 같아." 여기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깨어남의 다음 단계일 뿐이다. 다음 장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최초의 깨어남이 곧장 지속적인 깨어남으로 굳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일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순간은 잠깐일 뿐이고 깨달음은 이내 흔들린다. 깨달음이 흔들린다면 그건 진정한 깨어남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교사들도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으며, 그 이유는 이미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진리를 보았다면 진리를 본 것이다. 진리를 2초 동안 보았든, 아니면 2천 년 동안 보았든 그 진리는 똑같은 것이다.
- 깨어남이 흔들리는 바로 이 단계에서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깨어남의 상태는 마치 누군가가 아무렇게나 눌러보는 조명 스위치처럼 켜졌다 꺼졌다 하는데, 당신은 그것을 통제할 힘이 없다.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마치 그와 같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여러분은 여기에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것과, 이런 일은 그저 자신의 행로의 다음 여정일 뿐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만일 여러분이 이 경험으로부터 도망친다면, 뒷걸음질을 쳐서 앞서의 깨어난 상태를 다시 찾아 헤매는 식으로 이 딜레마를 해결해보려 한다면, 그것은 여정의 이 부분을 피해서 돌아나가려고 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비록 어느 정도의 혼란과 고통이 있더라도 큰 상관이 없다. 깨어남 이후에도 흔들린다는 건 물론 고통스러운 일이다. 어떤 행동이 진실이 아님을 알면서 그렇게 행동한다는 건, 우리가 그 사실을 인식하는 한 더더욱 고통스러운 일이다.
- 지금 자신이 움직이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훨씬 예민해진 감각으로 느끼게 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 거슬러서 거짓으로 행동하게 되면, 우리는 그 거짓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움을 느낀다. 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하는 말은 그와 똑같은 말을 스스로가 옳다고 믿으면서 할 때보다도 훨씬 더 고통스런 내적 갈등을 불러올 것이다.
- 단단히 조건화된 영역이 존재하고 있어서, 적어도 처음에는 깨어남마저도 그곳을 뚫고 나갈 수가 없다. 우리는 아직 온전히 자유로워지지 않은 것이다. 이 삶의 조건을 다른 말로 하면 '카르마 karma'이다. 카르마는 동양에서 온 말로, 난해한 뜻풀이를 다 생략하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과'를 뜻한다. 그것은 삶의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받아들인 조건, 그리고 우리의 과거 경험에 비추어 좋아함과 싫어함이 이미 정해진 것들을 말한다.
- 삶의 조건은 대체로 우리의 가계나 우리가 살아온 생이나, 우리가 끌려 들어온 상황이나, 나날의 삶에서 얻은 경험으로부터 생겨난다. 부모와 사회가 자신들의 관점, 신념, 도덕 그리고 규범을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 심어주어 조건화시킨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어떤 것은 좋아하고 어떤 것은 싫어하게 되며, 어떤 상황은 원하고 어떤 상황은 원치 않게 되며, 명성이나 부나 돈 혹은 영성을, 아니면 사랑을 좇아 다니게끔 조건 지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삶의 조건에 포함된다. 이것은 어쩌면 컴퓨터 프로그램과 비슷한 데가 있다. 여러분에게 컴퓨터가 한 대 있고, 거기에 어떤 프로그램을 입력한다고 치자. 지금 여러분은 컴퓨터가 이렇게 저렇게 작동하도록 '조건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삶의 조건과 그야말로 똑같은 것이다. 삶의 여러 가지 상황과 성장과정, 그 밖의 모든 요소를 통하여 우리 인간은 이런저런 식으로 행동하도록 조건화되고 프로그램된다.
- 영적 교사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정직으로 이끌거나 권유한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에고는 내면의 분리 상태를 숨기기 위해 깨달음을 핑계로 삼으려는 강한 습성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를 미혹하게 하는가를 인식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런 식으로 반박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사람'이 없는걸요! 여기엔 개인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요. 에고라는 것도 '사람'이라는 것도 어차피 환영이기 때문에, 내면을 직시한다든지 할 '누구'라는 게 없단 말씀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깨어남의 관점에서 볼 때는, 모든 것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깨어남의 관점에서는 어떠한 문제도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굳이 해야만 할 어떤 일도 없는 셈이다.
"무언가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아직도 미망 속에 있는 겁니다."
- 이런 상태에 들어앉아 있는 학생을 붙잡아서 절대 차원에 묶인 관점만을 고수하는 편집 증상을 멈추게 한다는 건 매우 힘이 드는 일이다. 깨어남에 종종 수반하는 위험 중 하나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에 집착하는 경향성이다.
- 자기 성찰이라는 질문 작업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글로 적어가는 작업이 도움이 되었다. 깨어남 이전은 물론 깨어남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렇게 해왔다. 어떤 동일시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마다, 나는 종이와 연필을 들고 커피숍을 찾곤 하였다. 그리고는 거기 앉아서 그 문제에 관하여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일어난 일을 적는 작업은 내가 '동일시의 반복'을 초래하는 생각의 패턴 속으로 파고드는 데에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어떤 생각, 어떤 신념이 나를 붙잡고 있는지, 그리고 그 생각 속에 담긴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찾아낼 수 있었다.
- 예를 들어 우리가 바보같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다면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참 멍청한 짓을 저질렀어.' 만약 여러분이 사소해 보이는 그런 생각을 하나 골라 정말로 그 속을 들춰보기 시작한다면, 생각과 느낌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어느 한쪽은 다른 한쪽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된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라는 '생각'은 어떤 '느낌', 즉 당혹감이나 분노 같은 느낌을 동반한다. 거기서 우리는 그 생각이 품고 있는 세계관,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동일시로 끌어들이는지를 살펴볼 수가 있다.
- 이런 형태의 질문 작업을 단지 정신적 수준의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정신적 수준에서만 이해하려 들 것이다. 문제는, 정신적 수준은 종종 감정적 수준과 동떨어져 있는 수가 많다는 점이다. 마음으로는 어떤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갈등을 겪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질문 작업에서는 몸과 마음, 즉 느낌과 생각 두 가지를 다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생각이 어떤 느낌을 일으키는지, 또 어떤 생각이 '느낌으로부터' 생겨나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순환고리이다. 하나의 생각은 하나의 느낌을 만들어내고, 그 느낌이 다음의 생각을 또 그 생각이 그 다음 느낌을 만들어낸다.
- 노트와 연필을 가지고 커피숍을 찾을 때마다, 나는 그 동일시가 되풀이되는 순간을 초래한 생각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가려내어 그것에 대해 적어나가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 생각이 정확히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그 속을 들여다봐야 했다. 도대체 어떤 믿음 위에서 그 낱낱의 생각이 - 그것이 비난이든 당혹감이든 무엇이든 간에- 느낌의 수준에서 생겨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조준해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고 나서는 느낌 속으로 들어가 '그 느낌을 느끼도록' 나 자신을 내맡겼다.
- 우리가 어떤 것의 본래 모습을 깨달았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그에 관해 우리 자신에게 속삭이는 '이야기'가 사라져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제 그것은 환영으로 '보일' 뿐만이 아니라 환영으로 '느껴진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 이야기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 달라붙어야 한다고 말해준다. 고요한 가운데 질문 작업 아니면 희생자가 되기,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스스로의 관념과 신념에 갇힌 희생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느낌 속으로 파고들 것인가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렸다.
- 질문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모든 신념이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이 이걸 했어야 한다, 또는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등의 나의 '생각'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들이 실제로 했던 어떤 행동과, 그들이 했어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그 행동은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견해는 그 반대쪽과 똑같이 진실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양극단의 생각은 상쇄되어 없어진다. 만일 반대되는 생각이 내가 믿는 생각과 똑같이 옳다면, 그 생각의 구조물은 송두리째 무너져버린다. 나의 의견과 다른 어떤 의견이 똑같이 존재할 권리가 있다면 어느 쪽 의견이 옳다고 말할 수가 없게 된다. 그 양쪽이 모두 참이든가, 아니면 모두 거짓인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반대되는 것들 사이의 내적 균형이 이루어지고 생각은 더 이상 양분되어 대치하지 않게 된다. 생각이 이런 식으로 균형을 이룰 때, 사고 과정의 양분된 구조는 비로소 힘을 잃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 우리는 자신이 깨달은 모습 그대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하며, 어떤 상황에서든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의 그 힘을 이해하고 알아차리기 시작해야만 한다. 그런데 대중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면, 거의 어김없이 누군가가 찾아와 말을 걸어오곤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저번에 진실과 정직 등에 대해 이야기한 거 기억하시죠?"
"네, 기억합니다."
"있잖아요, 강연이 끝난 뒤에 어떤 여자가 주차장에서 말하기를, 자기가 그간에 나에 대해서 품어왔던 별의별 험한 생각들을 이젠 다 털어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네요. 정직이란 이름으로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되면 진실이라는 주제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다. 너무나 오해하기가 쉬운 주제인 까닭이다.
- 진실은 매우 높은 수준의 것이다. 진실은 한낱 놀이거리가 아니다. 우리 안에 무엇이 진실이냐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 속에 담긴 것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라는 쓰레기통을 다른 이의 머리에다 쏟아붓는 일이 아니다. 그런 것은 모두가 환영이며, 왜곡이고 투사다. 진실이란 우리가 가진 견해의 보따리를 누군가에게 풀어놓는 일이 아니다. 그런 것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진실이 아니다. 실은 그런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진실로부터 몸을 숨기는 방법들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음이란 '모두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식의 어리석음을 더 이상 고집할 수가 없게 된다. 어쩌면 정말 모든 이가 나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나를 사랑하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는 법이다. 그 반면에 일단 온 세상에다 자유를 주어버리고 나면, 그때 여러분은 스스로의 자유를 찾아 나선 긴 여정의 끝자락에 가 닿게 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떼려야 뗄 수없이 연결되어 있다.
- 자기가 알고 있는 진리를 누구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 스스로에게 진실한 것이 정말 중요하다. 자기 스스로에게 진실할 수 있으면, 여러분은 어느 누구와도 진실해질 수 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과 진실해야 한다는 데에 과도하게 무게를 두는 건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 그것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출발점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게 온 마음으로 진실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모든 비난을 넘어서, 모든 분별을 넘어서, '해야 한다' 혹은 '해서는 안 된다' 따위를 넘어서 그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가? 할 수 있는 진정을 다하여, 아직 갈등을 겪고 있는 자신의 어떤 부분에서도 물러서지 않으며,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이용하여 자유와는 거리가 먼 것들로부터 숨으려 하지 않고, 거기에까지 다다를 수 있는가?
- 그것은 정말이지 진실함의 문제이다. 이미 말했지만 이것은 자아개발 프로그램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진실함'과 '정직'의 수준을 이해했다면, 그 진실함과 정직은 바로 존재가 가지는 절대적 본성의 나타남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처음엔 이토록 자신에게 진실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게 될 수도 있고, 자신의 많은 부분이 자기가 깨달은 바와는 너무나 멀어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야말로 깨어남이 향해가는 방향이다. 깨어남은 깨어나지 않은 것이 있는 쪽으로, 그 속으로 움직여가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진실함이다. 여러분이 자신에게 진실하기만 하면 이 움직임은 반드시 일어난다.
- 결국 깨달음은,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면,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일도 회피하지 못하게끔 만든다. 깨달은 관점에서는 삶의 어떤 부분으로부터도 고개를 돌리기가 어렵게 되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해진다.
- 말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만약 우리가 숨어 있던 곳에서 나오면, 부인으로부터 벗어나면, 우리는 연인을 잃고 친구도 짝도 다 잃게 될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깨달았다고 해서 반드시 삶이 자기 뜻대로 풀려간다는 어떤 보장도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삶은 이전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삶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펼쳐지리라는 뜻은 아니다. 결국 그것은 진실함에 관한 것이다.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에서, 모든 차원에서 진실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 깨달음은 그저 도피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초월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삶, 우리의 관계를 만날 수 있게 되는 '존재 상태'이다. 삶은 그 자체가 관계일 뿐이다. 만물의 궁극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삶이란 '하나(One)'의 '하나'에 대한 관계이며, '영(Spirit)'의 '영'에 대한 관계이다. 그때 존재하는 것은 관계의 '나타남'이다. 관계의 춤이요, 삶의 춤이다. 그리고 이 춤마당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숨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혹 여러분이 어떤 것으로부터 숨으려 하면, 예를 들어 어떤 풀리지 않는 관계나 혹은 견디기 힘든 직장생활 속에서 그 문제를 다루지 않고 부인하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게 된다. 결코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지 못한 채 덮어버리기로 한 영역은 결국 타인에게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똑같이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 어쩌면 그렇게 들릴 수도 있다. 마치 내가 "이것이 여러분이 할 일이다, 마땅히 이렇게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더 나은 인간이 될 것이고,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건 전혀 나의 관점이 아니다. 내 말은 단지, 깨어난 의식은 그 자체의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의식은 어떤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숨지도 않는다. 그것은 삶의 어떤 부분도 회피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 완전히 깨어난 상태는 궁극적으로 완전히 삶에 몰입하기 때문에 어떠한 두려움도 없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진실함으로부터 솟아나서는 자신의 방향대로 움직여 간다. 이러한 영적 삶의 차원으로부터 움츠러들게 하는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마음속에 자리한 두려움, 즉 에고의 환상을 지어내게 하는 두려움 뿐이다.
- 나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삶에서 조화롭지 못한 어떤 측면을 회피하고 있다면, 부인을 계속하는 삶의 바로 그 측면, 바로 그런 종류의 회피가 영적인 깨어남을 막아서게 되리라는 것이다. 수행의 초기에는 그 영향이 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더욱 성숙한 깨달음이 열릴수록 부인이 허용될 여지는 점점 더 줄어든다. 사람들은 대개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우리 대부분은 일단 깨달음을 얻기만 하면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불편하게 여겨지는 일들을 다루지 않고 회피해도 되게끔 해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 '깨달은 에고'라는 상태를 창조해내기 시작한다. 깨달은 에고만큼 정 떨어지는 것도 없다. 그것은 '나는 깨달았다' 혹은 '나는 깨어났다'고 생각하는 에고이며, 깨어남의 실현으로 얻어낸 얼마간의 에너지를 가지고 또 하나의 우월한 자아의 느낌을 지어내는 에고이다. 나는 그동안 확실한 깨어남의 순간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 깨달음을 자기가 직면하기를 원치 않는 모든 것을 무시해버리는 데에 이용하는 것을 보아왔다.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디야, 하지만 여기엔 에고가 없어요. '나'라는 게 없다 이 말씀입니다. '나'가 없으니 아무것도 할 게 없지요."
- 그들에게 내가 묻는다. "좋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가끔 무의식적으로 꿈틀거리는 불가사의한 움직임도 당신 안에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겠죠?" 그러면 그들은 말한다. "글쎄요, 그건 맞을지 몰라도 그런 현상에 대해 반응할 누군가가 없다는 거죠. 이 모두가 저절로 펼쳐지는 현상이니까요.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 관여할 생각을 낸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꿈속의 망상이지요."
- 이런 공간, 즉 모종의 통찰을 붙들고서 자신을 숨겨줄 공간으로 빠져 들어가 버린 사람은 거기까지 뚫고 들어가서 만나기가 어렵다. 진정한 깨어남의 상태에 있을 때는, 우리는 결코 자신이 깨달은 바를 자신의 어떤 면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것을 존재의 빛 속으로 맞아들인다. 우리가 혹시 무의식적으로 해대는 자신의 행동을 간과해버리는 수단으로써 깨달음을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 즉시 자신이 지금 미혹된 상태에서 행동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 내가 가르치는 동안 지금껏 보아온 바로는, 이렇게 노골적인 우월감 속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지, 또 자신이 아는 그대로 다른 이들도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애쓴다. 그들은 남들이 자기 말에 동의하는지, 아니 그보다 더 먼저, 자신이 깨달았다는 걸 남들이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려 든다. 그들은 심지어 내가 가르치고 있는 단상 위로 뛰어 올라와 마이크를 움켜잡고는, 청중을 향해 자기식의 진리를 설하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은 도저히 뚫고 들어가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하지만 세월이 충분히 지나면, 그때는 삶이 그들을 꿰뚫고 들어갈 것이다. 삶에 멋진 점이 있다면, 우리가 진실이 아닌 차원에서 행동할 때 삶은 결국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시점에선가 그 삶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스스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결국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된다. 영원히 미혹에 빠져 살게 되는 일 따위는 없다. 삶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다. 깨어남 이후에 어느 정도의 우월감은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선가에 '공모에 취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깨어남 자체에 내재된 에너지와 아름다움에 잠시 도취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만일, 깨어나는 순간 에고의 구조가 정말 용해되었다면, 도취될 어떤 에고도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대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남아 있는 에고 구조의 어떤 부분이 깨어남을 실현한 것을 두고 한껏 도취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단지, 노골적으로든 교묘하게든 간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거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라. 여러분이 그 때문에 무서워한다고 해서 그 현상이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며, 그것을 믿고 그것을 따라 한다 해도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 넘기도록 하라. 많은 사람들이 겪게 되는 깨어나는 과정의 일부로서 말이다.
- 삶이 보여주려 애쓰는 것을 우리가 보려 들지 않을 때는, 보아야만 할 그것을 우리가 기꺼이 보려 할 때까지 삶은 그 강도를 높여갈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삶은 그 자체로서 우리의 가장 큰 우군이다. 자주 쓰는 말로, 삶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스승인 것이다. 학생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잘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우리가 삶을 겪어낼 때에만, 삶이 우리를 위하여 거울을 들도록 스스로 허용할 때에만 우리는 자신을 명확히 볼 수 있게 된다.
- 혹 깨달음이 최상의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간혹 즉각적인 깨어남을 얻기도 한다. 그들은 겪어내야만 하는 업력의 관성이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장밋빛 여정이 아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가 가고 싶은 길만을 따라, 깨달음의 길이 어떠해야 한다는 관념을 강화해주는 길만을 따라가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깨어남으로 향하는 경로에는 멋진 순간들, 심오한 순간들, 그리고 깨달음이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좀 거친 길이기도 하다. 그것은 깨닫고 싶노라 외치는 사람 모두가 다투어 선택하는 길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깨어남을 원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실제로는 깨어나기를 바라고 있지 않다. 그들은 그들 자신만의 각색된 깨어남을 원한다. 그들이 실제로 바라는 것은 자신의 '꿈꾸는 상태' 속에서 정말로 행복해지는 것이다. 하긴 그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이 진화해온 수준이라면 말이다.
- 깨달음을 향한 진지하고도 실질적인 열망은 꿈꾸는 상태를 좀 더 기분 좋게 해 보려는 욕구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깨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에든지 기꺼이 온몸을 던지려는 열망이다. 깨달음을 향한 진정한 열망이란, 완전한 깨어남을 가져다줄 수만 있다면 훌륭한 것이든 끔찍한 것이든 그 무엇이라도 좋다고 하는 간절한 내면의 기도이다.
- 여기서 내 개인적인 깨어남에 대해 시시콜콜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진 않다. 다만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은, 그때 깨달아진 것이 그 이후로 다시는 흐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깨달음은 결코 잊히지 않았다. 한 번 열려버린 틈은 다시는 닫히지 않았다. 또 그것과 동시에 육신의 차원에서 일어난 현상이 있었다. 여기서는 그 부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육체적인 혹은 에너지적인 이 현상은 대개는 깨어남의 한 부분이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 중의 일부를 깨어남이 있기도 전에 경험하는 사람도 있고, 그 이후에야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깨어남을 경험했는지 못했든지 간에 모두에게 해당한다.
- 우리가 존재의 진정한 본성을 깨달을 때는, 즉 존재 자체가 자신에게 깨어날 때, 깨달음에는 거의 항상 어떤 에너지적인 요소가 수반된다. 여기서 에너지적인 요소라는 것은 우리의 심신 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아주 심대한 재조율 현상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마음속에 일종의 재배선이 일어나며, 감정적인 차원에서는 느끼고 인식하는 방식에 재배선이 일어난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 몸 안의 모든 에너지 체계가 흐르고 움직이고 경험되는 방식에도 아주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 깊은 깨달음과 함께 일어나는 가장 흔한 에너지적 변화 중 하나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날로 우리의 심신 체계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심신 체계가 외부의 어딘가로부터 유입되는 에너지를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 대신 의식이 정말 깨어나게 되면 방벽과 장애물, 곧 내부의 둑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막대한 에너지가 방출된다. 사실 '에고'의 구조가 용해될 때는 언제나 에너지의 방출이 일어난다. 우리는 꿈꾸는 상태, 즉 에고의 분리 상태는 그 자체가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집어삼킨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에고가 용해되기 시작하고서야,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껴안고 살아온 분리된 인식을 계속 지탱하기 위해 얼마나 큰 에너지를 소모해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 이 에너지가 열리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가장 흔한 현상의 하나는 불면증이다. 심신 체계는 안에서 휘돌고 있는 이 원초적 에너지에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깨어남 이후 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심신 체계가 '고속주행'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인간의 내부 메커니즘, 즉 마음과 육체와 미묘한 신체(subtle body)가 밀려드는 새로운 에너지에 적응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러한 적응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깨어남 이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신 체계 안에서 일종의 따라잡기 작용이 개시되는 것을 발견하고, 꿈꾸는 상태가 용해됨에 따라 새로운 에너지가 유입되는 것을 소화해내고 적응하느라 밤낮으로 애쓰게 된다.
- 보통은 불만이 있고, 그것이 경험됩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어떤 판단도 없지요. 그게 진짜 열쇠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간다거나 주의를 끊어 없애버린다는 게 아니라 어떠한 판단하는 생각도 없다는 겁니다. 대개는 먼저 그것이 오고, 그것이 경험되고, 그에 대해 판단하는 생각이 없고, 그리고 그것이 지나갑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으로 간주 되질 않는 것입니다. 거기엔 어떠한 형태의 부차적인 생각도 없어요. '아차, 불만스러워하면 안 되는데'라든가, '어째서 불만을 품게 됐지?' 혹은 그와 비슷한 어떤 생각도 말입니다. 거기엔 모두 생각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불만을 만들어내는 것은 생각이니까요. 하지만 그것들은 사실이 아님이 보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직시하면 불만은 사라집니다.
- 적어도 나의 삶에서만큼은 내가 아직 특정한 능력을 갖지 못했던 순간들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땐 그냥 그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능력이 나올 수 있게끔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조차도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 당시에는, 나는 그러한 능력을 갖는 방법을 알려줄 사람을 그림자조차 찾지 못했던 겁니다.
- 이런 말은 사람들이 구하는 그런 강력한 영적 가르침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모든 건 제때가 있는 법입니다. 모든 건 제자리가 있어요. 에고는 도무지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배하고 있는 건 '삶'이지요. 무언가가 있어서 우리에게 힘을 주어 단번에 자신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고, 깨어나기 위해 보아야 할 모든 것을 보게끔 도와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사람들의 정상적인 경험을 역행하는 겁니다. 모든 건 때가 있어요. 당신은 그걸 맘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말은 듣고 싶지 않겠지요? 우리 마음이 원하질 않으니까요.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내 마음대로 한다는 느낌을 뒷받침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한다는 느낌을 뒷받침해주지 않는 건 무엇이든 철저하게 외면하지요.
- 나는 언제나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본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내가 말하는 것 말고, 당신의 경험을 말이에요. 그때 비로소 모든 게 바뀌기 시작한다고요.
- 내가 전생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아주 깊은 깨어남을 얻은 사람들 가운데는 전생 같은 걸 전혀 보지 못한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생을 아는 것이 필요조건은 아니에요. 나는 신비주의자가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경험들이 간혹 찾아오곤 했던 기간은 수개월에 걸쳐 짧게 지나갔고, 그 후로는 어쩌다 한 번씩 찾아오지만 일관성은 없어요. 그러니 그런 일이 꼭 일어나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거지요.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흔히 일어나기도 하고요.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은 -만약 그 경험이 진실하다면- 대개 그것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어서이고 또 그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어서지요.
- 불교 수도원의 한 여성 원장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깨달음의 모범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전생 따위는 없어요. 왜냐면 깨달음은 자취를 남기지 않으니까요. 그것은 모든 걸 깨끗이 태워버리는 불과도 같아요. 카르마의 흔적이 남지 않죠."
- 그녀의 말인즉, 만일 당신이 전생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도 당신은 거기서 자신이 얼마나 웃기는 얼간이였는지를 보게 될 거라는 거였죠. 난 그 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게 내 경험과도 맞아떨어졌고요. 반드시 특급 얼간이였던 꼴만 본 건 아니라 해도 몇몇 경우엔 특급 얼간이보다도 훨씬 더 우스운 꼬락서니를 보기도 했지요. 내가 본 많은 전생들은 혼돈의 순간 해결되지 못한 카르마가 갈등을 빚어내는 순간들이었어요.
- 만약 당신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거라면 대답은 '그렇다'예요. 나는 이 생애에서와 비슷한 일을 이전에도 몇 번이고 거듭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전생에 대한 갑론을박이나 전생의 작용 같은 건 알지 못하고, 또 이런 일들에 어떤 일목요연한 인과관계가 있는지 어떤지도 알지 못해요. 전생에 대한 나의 경험을 말하자면, 그게 사실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그걸 전생이라 하는 까닭은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알아듣기 때문이에요. 내 진짜 경험을 말하자면, 그건 동시적으로 병존하는 생애들에 더 가까운 거예요.
- 그건 이런 식입니다. 가령 당신이 밤에 꿈을 꿉니다. 그 꿈속에서 당신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꿈속에서 기억하기 시작합니다. 그게 온갖 전생일 수도 있겠죠. 가령 당신이 오십 가지의 전생을 아주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기억했다고 칩시다. "아, 이런 삶이 있었어, 저런 삶이 있었어." 그것은 당신에게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로 보입니다. 그리고는 꿈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은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리죠. "야, 그거 참 대단한 꿈이었어. 나는 내가 이 모든 전생을 경험한 사람이 된 꿈을 꾸었어."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죠. "가만있자, 내가 그 모든 전생을 꿈으로 꾸고 있었어, 한꺼번에 말이야. 그 모든 꿈은 이제 방금 내가 꿈꾼 거잖아. 내가 꿈을 꾸기 전까지 그 꿈은 존재조차 없었잖아." 내가 전생을 보는 건 바로 이런 식의 관점입니다. 나는 전생을 과거로 보지 않아요. 왜냐면 그것들은 모두 동시에 일어나고 있고, 모두 동시에 상호작용하기 때문이죠.
- 모든 사람은 정확히 자기가 믿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믿는다면 바로 그렇게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명심할 것은, '객관적 현실', 즉 만물이 따르게끔 정해져 있는 객관적인 작동방식 같은 건 없다는 거예요. 그것은 당신이 그렇게 작동한다고 꿈꾸고 있는 대로 작동하죠. 그것이 유일한 작동방식입니다. 바로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유일한 현상이에요. 그러니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믿는다면 그것이 그를 통해 의식이 꾸고 있는 꿈이란 뜻이 됩니다. 하지만 그 꿈은 다른 꿈에 비해 조금도 더 중요하거나 타당하지 않습니다.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라 바틀렛] 타로 상징 사전 - 56가지 타로 덱으로 알아보는 타로의 역사와 상징 (0) | 2022.10.04 |
---|---|
[조르조 아감벤, 모니카 페란도] 말할 수 없는 소녀 - 코레의 신화와 신비 (2) | 2022.10.03 |
[줄리아 카메론] 아티스트 웨이 - 중년 이후의 삶에서 창조성과 의미를 발견하기 (0) | 2022.09.19 |
[조 비테일] 미라클! 코칭 - 조 비테일 박사의 '시크릿' 코칭 대화록 (0) | 2022.09.01 |
[에크하르트 톨레]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0) | 2022.08.21 |
[디팩 초프라] 디팩 초프라의 완전한 행복 (0) | 2022.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