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에크하르트 톨레 / 노혜숙 / 유영일
원제 : The Power of Now
출판 : 양문
출간 : 2008.09.02
마음이 부평초처럼 떠돈다고 느껴지는 며칠을 보냈었다. 그 시간 동안 천천히 이 책을 읽었는데 완전히 실천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 순간에 충실하라는 말은 자주 미래를 대비하지 말고 흥청망청 현재만을 즐기라는 의미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갈망을 이해하고 그것을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형태로 실현하되, 결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모든 시작은 '망'이다. '원한다'가 생겨야 '행한다'가 따른다. 그러나 이 '원함'은 지금은 그렇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다는 것을 알기에 끌려가는 '도중'의 감각에 가깝다. 굉장히 미묘한 지점이라 일종의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설명이 어렵다.
충동이나 의지가 선행하고, 그것에 대한 몸의 반응이 감정으로 이어진다. 그에 따라 '행해야 할' 것을 이해하고 행하면 그 결과가 나타난다. 이것이 흐름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실 찰나에 모두 이루어지지만, 그 과정을 단면화하여 늘어놓은 것이 '시간'이다. 각 과정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다면 결과에 대해서는 고민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때, 불안이 파고들 여지는 없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 자체가 없다에 가깝다.
이런 자세는 그렇지 못한 경험을 겪었느냐 아니냐의 여부와는 관계없다. 이것이 '과거를 놓아주라'다. 과거에 믿음을 배신당하는 경험을 했다거나, 속아서 큰 손해를 본 경험을 했다고 해서 '지금' 모든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불안을 느끼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대비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타나는 결과를 받아들이면 된다. '기대한 결과'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이 지점은 어려운 부분이다. 현재 내가 있는 지점은,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단 그 상태를 받아들이고, '어째서' 만족스럽지 않은지를 살펴 다음 시도를 하는 정도다.
마치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모든 것을 최고의 경험과 선물로 받아들이는 자세.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는 자세.
이런 이들을 우리는 종종 '바보'라고 부른다.
내일도, 어제도 없는 사람들.
하지만 때때로 우연이 주는 '신의 한 수'를 놓을 줄 아는 사람들.
-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의 대화는 끊임없이 두 차원을 번갈아 오갈 것입니다.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이쪽 차원의 세계는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거짓된 세계'입니다. 인간관계의 갈등에서부터 국가 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태의 본성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를 밝히고, 나아가서는 그런 습성이 인간의 무의식에까지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왜 그런 사실을 알아야 할까요? 그것이 진정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님을 알 때 거짓을 거짓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진정한 변화는 있을 수 없고,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언제나 환상과 고통 속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의식의 심오한 변화에 대해, 머나먼 미래의 일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창조할 수 있는 변화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노예가 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옭아매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날의 삶 속에서 선연한 깨달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다루고자 합니다.
-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 체험하기 전까지는 비슷한 문장이 되풀이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그 체험이 여러분 안에서도 일어난다면, 여러분은 그 문장들이 강력한 영적 힘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이 책에서 가장 값진 부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구나 내면에 깨달음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때로 나는 여러분의 생각 뒤편에 머물고 있는 영적인 진리를 즉각 알아차리고 거기에 공명하는,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여러분의 진정한 자아를 향해 말을 걸기도 할 것입니다. 가끔씩 만나게 되는 표시는 잠시 읽는 것을 멈추고 명상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기호입니다. 물론 다른 부분에서도 여러분 스스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 때로는 단어의 의미가 선명하게 잡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고, 반대 의견이 마음속에 일어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읽어 나가다 보면 해답이 나중에 나올 수도 있고, 스스로 묻고 답하며 자기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도중에 저절로 해결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적인 헤아림만으로 읽지 마십시오. 내 안에 어떤 느낌이 일어나는지, 그 반응을 면밀하게 지켜보십시오. 내가 말하는 영적 진실을 여러분의 깊은 내면에서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여러분이 잊고 있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뿐입니다.
- 나는 '존재(being)'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편입니다. '존재'라는 단어는 '신'이라는 단어처럼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지만, 열린 개념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적어도 그 단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한함을 제한된 것으로 축소하진 않습니다. '존재'라는 말을 듣고 인간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배타적으로 독점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존재'야말로 당신 자신의 정수입니다. '존재'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의 현존 상태를 우선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이것이다', '나는 저것이다'라고 규정하기 이전의 생생한 '있음' 자체를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재'라는 단어는 당신 자신의 존재를 향해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말입니다.
- 어떤 사람이 의사에게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고 말하면 의사는 그에게 정신병원에 가보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이 머릿속으로 하나 이상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이 저절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릿속에서는 독백이나 대화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집니다. 거리를 걷다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미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단지 입 밖으로 큰 소리를 내지 않을 뿐이지요. 그 목소리는 뭔가 자기 의견을 내놓고, 추측하고, 판단하고, 비교하고, 불평하고, 좋아하고, 싫어합니다. 그때그때의 특정한 상황에 관련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가깝거나 먼 과거를 재현할 수도 있고,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연습하거나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는 아무런 견해도 갖지 말고 그저 듣기만 하십시오. 아무런 판단도 하지 말고 비난을 퍼붓지도 마십시오. 판단을 하거나 비난을 하면 똑같은 목소리가 뒷문을 통해 다시 들어오는 셈입니다. 목소리가 들리면, '아,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만 할 뿐, 거기에 끼어들지 않고 '여기'에 남아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생하게 깨어 있는 것이고, 이것이 자기 자신의 현존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이 아니며 마음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 에고에게는 현재의 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만을 중요하게 여길 뿐입니다. 이는 진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에고로 존재하는 한 우리의 마음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에고는 항상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를 살아 있게 하려고 합니다. 과거가 없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또한 스스로를 미래에 투사(投射)함으로써 계속적인 생존을 보장받으려 하고 거기에서 어떤 해방이나 만족감을 얻으려고 합니다. 에고는 말합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난 행복할 텐데. 저런 일이 생기면 난 평화로워질 텐데."
- 감정은 마음과 몸이 만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감정이란 생각에 대한 몸의 반응입니다. 몸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반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공격적이거나 적대적인 생각을 하면, 우리 몸 안에는 분노 에너지가 강화됩니다. 몸이 전투태세에 들어가는 것이죠.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몸을 움츠리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두려움이라고 부르는 몸의 반응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강렬한 감정은 신체 내부에 생화학적 변화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러한 변화가 감정이 가진 육체적·물질적인 면입니다. 대개가 자신의 사고 유형을 모두 다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자신의 감정을 지켜봄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 자신도 모르는 강한 무의식적 감정이 우연처럼 보이는 외부적인 사건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분노를 품고 있으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고, 또 그것을 표출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은 분노를 품고 있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뚜렷한 이유도 없이 신체적인 공격이나 언어적인 폭력을 당하곤 합니다. 나는 이런 것을 자주 목격해 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강한 분노를 발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분노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몸 안의 에너지장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몸이 말하는 바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러면 감정이 말하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 진정으로 당신 자신의 마음을 알고 싶나요? 그러면 몸을 들여다보십시오. 몸은 항상 마음을 충실하게 반영해서 보여줄 겁니다. 몸 안에 일어나는 감정을 바라보거나 느껴 보십시오. 마음과 감정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마음이 거짓이고 감정이 진실입니다. 당신의 감정 상태가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진실은 아니지만 그 당시의 마음 상태에 대한 상대적인 진실인 것입니다. 표면적인 생각과 무의식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은 아주 흔한 일입니다. 무의식적인 마음 활동이 아직 생각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무의식은 항상 우리 몸 안에 감정으로 나타나며, 우리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지켜보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생각을 지켜보거나 귀 기울이는 것과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생각은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반면, 감정은 물질적인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어서 주로 몸 안에서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 지금 당장은 이것만 말해두겠습니다. 만일 그때 주의를 집중하고 현재에 있을 수 있다면, 거기에 점령되지 않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지켜볼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강력한 영적 수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고통이 빠른 속도로 변화될 것입니다.
-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고통과 동일시하는 데서 벗어날 때 강력한 내부 저항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적인 고통을 짊어진 채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믿어 온 사람이라면, 특히 그 저항이 심할 것입니다. 업장의 무게에 눌려 헤매면서도 마음이 만들어낸 허구를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라고 믿어온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데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 때문에 강한 저항을 하게 됩니다. 불행한 자신에게 익숙해져서 그런 자신을 잃어버리는 미지의 모험에 뛰어들기보다는 차라리 고통 속에 있고 싶어 하고, 괴로움의 '몸체'로 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 만일 그렇다면 내면에서 일렁이는 저항을 지켜보십시오. 자신의 고통에 대한 애착을 지켜보십시오. 결코 방심하지 말고 불행에 뿌리를 둔 기이한 쾌감을 지켜보십시오.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은 충동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그것을 의식한 채 깨어 있으면 저항은 멈추게 될 겁니다. 그때 우리는 업장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증인으로 참석할 수 있습니다. 변화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이것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당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깨달은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래서 그와 함께 현존의 상태에 있을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고, 그 속도는 빨라질 것입니다.
- 당신이 과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속에 저장된 지나간 '지금'에 대한 기억의 흔적입니다. 과거를 기억할 때 당신은 기억의 흔적을 재가동시켜 '지금'의 것으로 작동시키는 것입니다. 미래는 마음의 투사물로, 상상 속의 '지금'입니다. 미래는 언제나 지금으로 올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도, 당신은 그것을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그 자체로는 분명 실재하지 않습니다. 달이 제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 빛을 반사하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는 영원한 현재가 지닌 빛과 힘을, 그 실재를 희미하게 반사하는 것일 뿐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실재는 '지금'에게서 빌린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내용의 핵심은, 마음으로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깨닫는 순간, 마음으로부터 '존재'로, 시간으로부터 현재로 의식의 전환이 일어날 것입니다. 갑자기 만물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되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서 에너지가 내뿜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 문제를 만드는 것은 고통을 만드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스스로 더 이상 고통을 만들지 않겠다고 작정하십시오. 그저 그렇게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지극히 단순한 선택이지만, 그것은 다분히 혁명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지긋지긋한 고통을 겪지 않는 한 당신은 그러한 선택을 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의 힘을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러한 선택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더 이상 당신 자신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게 됩니다. 당신은 더 이상 아름다운 지구를, 당신의 내면 공간을, 집단적인 인류의 정신을 부정적인 문제로 오염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 목숨이 위태로운 긴급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경험을 해보았다면 그것이 하나의 문젯거리가 아니었음을 알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마음이 그것을 문제 삼을 만큼 한가한 시간이 없게 됩니다. 정말 긴급한 사태를 당하면 마음이 정지합니다. '지금' 속에 완전히 현존하게 됩니다.
- 불행하다면 그것을 생생하게 의식하십시오. 불필요한 판단이나 있는 그대로에 대한 저항, '지금'에 대한 거부가 당신의 내면에서 어떻게 불안과 불만, 그리고 긴장 등을 자아내는가 관찰해야 합니다. 당신이 거기에 의식의 빛을 비추면, 무의식적인 것은 무엇이든 녹아버립니다. 일상적인 무의식을 녹이는 방법을 알면 현존의 빛이 환하게 빛날 것이며, 깊은 무의식이 당신을 끌어내릴 때마다 거기서 벗어나기가 훨씬 쉬워질 겁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무의식은 너무 익숙해서, 처음에는 감지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자기 관찰을 통해 정신적·감정적 상태를 점검하십시오. '지금 나는 편안한가?'라든가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하십시오.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는 만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십시오. 내면을 올바로 인식하면 외부도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내면의 현실이 먼저이고, 외부의 현실은 그다음입니다.
- 그러나 질문에 즉시 답하지는 마십시오. 내면으로 관심을 돌리십시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십시오. 마음이 어떤 생각을 만들고 있나요? 어떤 느낌이 드나요? 몸속으로 주의를 돌리십시오. 어떤 것에 긴장하고 있습니까? 일단 배경에 깔린 고정된 불안감을 감지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당신이 어떤 식으로 현재를 부정함으로써 삶을 회피하고 저항하고 거부하는지 살펴보십시오. 사람들이 현존의 순간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은 실로 여러 가지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죠. 여러분도 연습을 통해 내부 상태를 점검하는 자기 관찰의 힘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 당신은 지금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 일을 하기로 동의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일을 하는 것에 불만을 갖고 저항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가까운 사람에 대해 말 못 할 원망을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당신이 발산하는 그런 에너지가 매우 해로운 영향력을 갖고 있어서, 실제로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거기에 눈곱만치라도 원망과 저항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십시오. 만일 있다면, 정신적·감정적 차원에서 관찰해 보십시오. 당신 마음이 이 상황 주변에 어떤 생각을 만들고 있습니까? 감정을 들여다보십시오. 감정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생각에 대한 몸의 반응입니다. 그 감정을 느끼십시오. 유쾌합니까, 아니면 불쾌합니까? 당신은 정말 그 에너지를 당신 내부에 갖고 있기로 선택한 겁니까? 당신은 정말 선택권을 갖고 있나요? 당신은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수도 있고, 따분한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가까운 사람은 정직하지 못하고, 화를 잘 내고, 무감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상관없습니다. 그 상황에 대한 당신의 생각과 감정이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도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그 상황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현존의 순간을 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당신은 불행을, 내면과 외부 사이의 갈등을 만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불행은 자신의 내면과 주변 사람들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속해 있는 공통적인 인간 정신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지구의 오염은 자신의 내면 공간에 대해 무책임하고 무의식적인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오염이 외부로 반영된 결과입니다.
-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손을 멈추고, 관계되는 이들에게 자신의 느낌을 충분히 설명하십시오.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의 마음이 그 상황의 주변에 만들어 내는 부정적 감정들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그릇된 자의식을 강화할 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무익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은 결코 어떤 상황을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안에 처박혀서 진정으로 변화되지 못합니다. 부정적인 에너지에서 나오는 모든 행동은 오염되어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더 큰 고통과 불행을 가져옵니다. 게다가 부정적인 내면 상태는 전염이 됩니다. 불행은 육체의 질병보다 더 쉽게 퍼집니다. 거기에 면역이 되지 않는 한, 고도로 의식이 깨어 있지 않는 한, 공명의 법칙에 의해 서로에게 잠재된 부정적 감정을 일깨우고 부채질합니다.
- 일상적인 무의식은 어떤 식으로든 '지금'을 부정하는 것과 연관됩니다. 물론 '지금' 이란 여기를 의미합니다. 당신은 자신의 지금 여기에 저항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항상 여기를 떠나 다른 곳에 가 있고 싶어 합니다. '여기'를 늘 못마땅해합니다. 당신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비추어 보십시오. 어디에 있든 완전하게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를 참을 수 없다면 불행해집니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그 상황을 벗어나거나 변화시키거나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이 세 가지 중에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 결과를 받아들이십시오. 자신의 내면을 변명, 부정적 감정, 오염된 마음이 없는 깨끗한 공간으로 유지하십시오. 어떤 상황을 떠나거나 변화시키는 행동을 취하기 전에, 우선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떨쳐 버리십시오. 통찰력에서 나오는 행동은 부정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행동보다 효과가 좋습니다.
- 만일 '지금 여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이 정말 아무것도 없다면, 그래서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면, 모든 내부 저항을 떨쳐 버리고 '지금 여기'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불행과 원망과 자기 연민을 사랑하는 거짓 자아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내맡김'이라고 합니다. '내맡김'이란 연약한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내맡기는 사람만이 영적인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맡김'을 통해 우리는 그 상황에서 내면적으로 자유로워집니다. 그러고 나면 노력하지 않아도 상황이 변화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 당신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까? 일어나서 지금 당장 그 일을 하십시오. 또는 그런 상황을 스스로 선택했다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기력하고 게으르고 수동적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십시오. 그것을 즐기십시오. 최대한 게을러지거나 무기력해지십시오. 만일 그 속으로 완전하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들어간다면 곧 거기서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속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쪽에서든 내부 갈등, 저항, 부정적 감정은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 미래를 기대하지 않고 현재에 저항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부지런히 움직이고 일하고 뛸 수 있습니다. 움직이고 일하고 뛰면서 그것을 완전하게 하십시오. 그 순간의 높은 에너지 흐름을 즐기십시오. 그러면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며, 더 이상 자신을 둘로 분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움직이고 뛰고 일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즐기게 됩니다. 아니면 모든 것을 제쳐두고 공원 벤치에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십시오. 마음은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일해야 한다.'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그 마음을 관찰하십시오. 거기에 미소를 보내십시오. 자꾸만 과거에 매달리게 됩니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과거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고 생각합니까? 과거의 공적이나 모험이나 경험, 또는 자신이 피해를 당한 일,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일, 당신에게 두려움을 주는 일 들에 대해 생각하거나 이야기합니까? 죄의식, 자부심, 원망, 분노, 후회, 자기 연민 등을 만들어 내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당신은 그릇된 자의식을 강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음속에 과거를 축적함으로써 신체의 노화를 재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말을 확인하고 싶으면 과거에 집착하는 주변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 매일 과거를 떠나십시오. 과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현재에 관련해서 꼭 필요할 때만 과거를 참조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의 힘과 완전한 존재를 느끼십시오.
- 현존의 순간을 받아들인다면 건강을 해치고 삶을 좀먹는 그와 같은 광기를 간단하게 멈출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호흡을 인식하십시오. 들이쉬고 내쉬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십시오. 당신이 현실에서 해결해야 하고 대처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입니다. 내년이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지금으로부터 5분 후가 아닌 지금 이 순간 당신이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이 순간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현재에 대처할 수는 있지만 미래에 대처할 수는 없으며 그래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 삶의 상황을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을 개선할 수는 없습니다. 삶은 근원적입니다. 삶은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존재합니다. 그것은 이미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삶의 상황은 우리의 환경과 경험을 포함합니다.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잘못은 그것을 존재의 대용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존재에 접근하는 유일한 지점은 '지금'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건축가가 기초공사를 소홀히 하고 건물을 올리는 일에만 시간을 할애하는 것처럼 목표에만 치중하고 있습니다.
- 많은 사람이 행복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행복은 미래에 올 수 없습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존중하고 인정하고 충분히 받아들이십시오. 지금 가진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가진 것에 대해, 있는 그대로에 대해, 존재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됩니다. 현재의 순간에 대해 감사하면서 지금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더없는 행복입니다. 그것은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 나면 언젠가 행복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 끊임없는 생각은 일종의 집단적인 병입니다. 그때 당신의 정체성은 완전히 마음의 활동으로부터 유래됩니다. '존재'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당신은 허약하고 끊임없이 갈망하는 마음으로 존재하며, 그로 인해 두려움이 가장 주도적인 기본 감정이 됩니다. 당신의 삶에는 정말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 실재로서의 당신 자신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존재'를 의식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부터 의식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여행에서 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일입니다. 부질없고 편집적인 생각에 갇혀 있는 엄청난 양의 의식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가 주의력의 초점을 생각으로부터 몸 안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무엇보다 먼저, 당신이 물질적인 육체라고 인식하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에너지 장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이 수행은 눈을 감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다가 '몸 안에 머무는 것'이 자연스럽고 쉬워지면 더 이상 눈을 감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의력을 몸 안으로 돌리십시오. 안으로부터 몸을 느끼십시오. 살아 있습니까? 손, 팔, 다리, 발, 당신의 배와 가슴속에서 생명을 느껴 보십시오. 몸 전체에 퍼져서 모든 기관과 모든 세포에 활기를 주는 미묘한 에너지 장을 느껴 보십시오. 신체의 모든 부분을 아우르는 하나의 에너지 장을 느껴 보십시오. 잠시 동안 내적인 몸에 집중을 하면서 느껴 보십시오. 그 느낌에 대해 생각을 만들지는 마십시오. 그냥 느끼면 됩니다. 주의를 집중할수록 느낌이 좀 더 분명하고 강해질 것입니다. 마치 몸의 구석구석까지 활기차게 살아나는 듯 느껴질 것입니다. 만일 시각적 인감각이 강하다면 자신의 몸이 빛나기 시작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미지는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영상보다는 느낌에 더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영상은 아무리 아름답고 강력하다고 해도 이미 형상화된 것이므로, 더 깊이 침투할 수 있는 여지를 줄여 버립니다. 내적인 몸에 대한 느낌은 형태도 없고 한계도 없고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당신은 계속해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일 이 단계에서 별다른 느낌이 없다면, 무엇이든 당신이 느낄 수 있는 것에 집중하십시오. 손이나 발이 약간 따끔거릴 수도 있습니다. 당장은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그 느낌에만 초점을 맞추십시오. 당신의 몸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이제 눈을 뜨고 방 안을 둘러봐도 됩니다. 하지만 몸안의 내적인 에너지 장에는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당신의 내적인 몸은 당신의 모습과 진정한 본질 사이에 놓인 문지방입니다. 그것과 접촉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고 두려워졌습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동물적인 본성을 재빨리 부정했습니다. 강력한 본능적 욕구에 의해 점령당할 것만 같은, 캄캄한 무지의 어둠 속으로 되돌아갈 것만 같은 위협을 생생하게 느꼈습니다. 신체의 특정 부분과 기능, 특히 성욕에 대한 수치심과 금기가 생겨났습니다. 자신들의 동물적 본성과 친숙하게 지내면서도, 있는 그대로를 허용하고 즐길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의식의 빛은 강하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 안에 숨어 있는 신성, 환상 속의 실재를 발견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을 육체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이 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갖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 종교가 생기자 이런 분리감은 '나는 나의 육체가 아니다'는 믿음으로 더욱 굳어졌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동서양의 수많은 사람들이 육체의 부정을 통해 신과 구원과 깨달음을 얻으려고 애써 왔습니다. 특히 감각적인 즐거움과 성욕을 부정하는 금욕과 금식, 갖가지 고행을 시도했습니다. 육체를 죄악시했기 때문에 육체에 고통을 가하고 처벌하기까지 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육신의 고행'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초월 상태에 들어가거나 혼이 자기 몸을 떠나는 경험을 통해 육체로부터 달아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많습니다. 붓다도 6년 동안이나 금식과 극단적인 고행을 통해 육신을 부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식의 수행을 포기한 후에야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육체를 부정하거나 혹사하거나 이탈하는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한 경험이 매혹적일 수도 있고, 물질적인 형태로부터 잠시나마 해방시켜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항상 본질적인 변화 과정이 일어나는 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변화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진정한 스승은 육체를 혹사하거나 이탈하기를 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병들고 늙어서 죽을 수밖에 없으며 조밀한 물질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인식하는 당신의 몸은 궁극적으로 실재가 아니며 당신이 아닙니다. 몸을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것은 탄생과 죽음 너머에 있는 본질적인 실재를 잘못 지각하고 있는 것이며, 마음이 지어내는 한계에 불과합니다. '존재'와의 접촉을 상실한 당신의 마음은 당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증거로 몸을 만들어 내고, 그 자신의 두려움을 합리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몸에서 등을 돌리면 안 됩니다. 마음은 무상하고 유한하며 죽음의 상징인 몸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냈지만, 그 몸 안에 당신 자신의 본질적이며 영구적인 실재가 숨어 있습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 다른 곳을 둘러볼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 내면의 몸이 아니면 어디에서도 진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몸에 저항해서 싸우지 마십시오. 그러면 당신 자신의 실재에 대항해서 싸우는 셈이 됩니다. 당신은 당신의 몸입니다. 당신이 보고 만질 수 있는 몸은 얇은 환상의 베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밑에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몸,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놓여 있습니다.
- 앞으로 며칠에서 몇 주일 동안은 이 수행을 해보십시오. 주의력을 온통 마음과 외부 세계에 빼앗기지 마십시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면서 가능할 때마다 내면의 몸을 느껴 보십시오. 내면에 뿌리를 내리십시오. 그러고 나서 당신의 의식 상태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질적으로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지켜보십시오. 언제라도 좋으니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일이 있을 때면 그 시간을 이용해서 내면의 몸을 느껴 보십시오. 그러면 차가 막힐 때나 줄을 설 때도 매우 즐거워질 수 있습니다. '지금'과 동떨어진 생각을 하지 말고, 내면의 몸으로 더 깊이 들어감으로써 '지금'에 침잠하십시오. 내면의 몸을 인식하는 기술은 당신의 삶을 전혀 새로운 삶, '존재'와 영원히 연결된 상태로 발전시킬 것이며,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삶의 깊이를 더해줄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몸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는 마음을 지켜보는 자로서 현존하기가 쉽습니다.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더 이상 당신을 동요시킬 수 없게 됩니다.
-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즉시 내면으로 들어가서 몸안의 에너지 장에 최대한 집중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이것은 오래 걸리지 않으며 단 몇 초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도전을 받는 그 순간에 해야 합니다. 조금만 늦으면 정신적·감정적 반응이 일어나면서 당신을 점령할 것입니다. 당신이 내면에 주의를 집중하고 내면의 몸을 느끼면, 의식이 마음으로부터 물러나 즉시 고요해지면서 현존하게 됩니다. 만일 그 상황에서 어떤 대응책이 필요하다면 좀 더 깊은 차원에서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막연하게 불안하고 무겁고 위축되어 있거나 감정도 아니고 신체적인 감각도 아닌 어중간한 느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중요한 것은 그 느낌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인식하는 것입니다. 주의력은 변화의 열쇠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집중은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력은 한 줄기 빛과도 같습니다. 완전히 집중된 의식의 힘은 모든 것을 그 자체로 환원시킵니다.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는 유기체 안에서는 감정이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감정은 존재의 표면 위에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물결이나 파문과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몸 안에 있지 않을 때는 어떤 감정이 며칠이고 몇 주일이고 당신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다른 감정들과 만나 함께 섞여서 업장이 되고, 기생충처럼 오랜 세월 동안 당신 안에 살면서 에너지를 파괴하고, 육체적으로 질병을 일으키고, 당신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를 기울여 그 감정을 느끼면서 스스로를 지켜보십시오. 비난이나 자기 연민, 원망과 같은 불만스러운 마음의 유형에 매달려 있지 않은지 점검하십시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 미래에 대해서도 용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미래를 통제할 수 없다는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란 불만을 버리고 슬픔을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일단 당신의 불만이 거짓 자의식을 강화할 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자연스레 그렇게 됩니다. 용서는 삶에 저항하지 않고 삶이 당신을 통해 살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고, 삶의 에너지 흐름이 극도로 제한되며, 그 결과 육체적인 질병이 생기곤 합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용서하는 순간, 마음으로부터 힘을 되찾게 됩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마음의 본성이며, 마음이 만들어 내는 거짓 자아는 투쟁과 갈등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마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십시오. 몸 안으로 들어가서 '존재'로부터 발산되는 활기찬 평화와 고요를 느끼십시오. 예수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용서하라."고 했던 말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 면역 체계를 증강시킬 필요를 느낄 때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간단하지만 강력한 자기 치유 명상이 있습니다. 특히 병이 날 것 같은 징후를 느낄 때 사용하면 효과가 좋고, 이미 병에 걸렸다고 해도 일정한 간격으로 확실하게 집중해서 사용하면 역시 효과가 있습니다. 어떤 형태의 부정적 감정이나 생각에 의해 당신의 에너지 장이 붕괴되는 것 또한 막아줄 것입니다. 그러나 매 순간 몸 안으로 들어가는 연습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시적인 효과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 명상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잠시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그리고 특히 밤에 잠들기 전이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당신의 몸에 의식을 흐르게 하십시오. 등을 바닥에 대고 똑바로 누워 눈을 감으십시오. 처음에 잠시 동안 주의력을 집중할 신체 부위를 선택하십시오. 손, 다리, 팔, 발, 배, 가슴, 머리 등 아무 곳이나 좋습니다. 최대한 강렬하게 그러한 부위들 안에서 생명력을 느끼십시오. 각 부분에 15초 정도씩 주의를 집중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몇 차례 파도치듯이 온몸에 의식이 흐르게 하십시오. 발끝에서 머리까지, 그리고 다시 거꾸로 돌아가십시오. 1분 정도만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 다음 몸 안 전체를 하나의 에너지 장으로 느끼십시오. 그 느낌을 몇 분간 유지하십시오. 그동안 몸 구석구석까지 확고하게 현존하십시오. 때로 마음이 당신의 주의력을 몸에서 끌어내서 어떤 생각 속에 빠지게 한다고 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 다시 몸 안쪽으로 주의력을 돌리면 됩니다.
- 내면의 몸과 접촉하기가 어려울 때는 호흡에 먼저 집중하는 것이 더 쉬울 겁니다. 그 자체로 효과적인 명상이 될 수 있는 의식적인 호흡은 당신을 점차적으로 몸과 만나게 해 줍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몸속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복부가 약간씩 팽창하고 수축하는 것을 느끼십시오. 만일 그것이 눈에 보인다면 눈을 감고 자신이 의식의 바다라고 불리는 발광체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러고 나서 그 빛 속에서 호흡하십시오.
- Q. 나는 명상을 해 오고 있습니다. 수련회에도 여러 번 참가했습니다. 영성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고, 아무 저항이 없는 상태 속에 있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진정하고 지속적인 내면의 평화를 찾았느냐고 묻는다면, 내 솔직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왜 나는 그것을 찾지 못할까요? 그것을 찾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A. 당신은 아직도 평화를 외부에서 찾고 있으며, 그런 방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다음번 모임에서는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새로운 기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몰라, 늘 그런 식이 아닌가요? 당신에게 말하겠습니다. 평화를 추구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상태가 아닌 다른 상태를 추구하지 마십시오. 지금 속에 있지 않을 때, 당신은 내면의 갈등을 겪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저항하게 됩니다. 평화롭지 못한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당신이 스스로 평화롭지 못하다는 것을 완전하게 인정하는 순간, 불화는 평화로 변화될 것입니다. 완전한 수용은 당신을 평화 속으로 데려갑니다. 그것이 내맡김의 기적입니다.
- 당신이 세상에서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소명을 느끼는 것은 매우 숭고한 일입니다. 하지만 외부에만 초점을 맞추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좌절과 실망을 경험할 것입니다. 인간 의식의 철저한 변화가 없다면 세상의 고통은 밑 빠진 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자비가 일방적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고통이나 결핍을 공감하고 도우려는 바람은, '모든 고통은 근본적으로 환상에 근거한다'는 생명의 영원한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균형이 맞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이 하는 일에 평화가 흘러들고, 원인과 결과의 차원에서 동시에 영향을 줄 수 있게 됩니다.
- 무지에 싸인 사람들이 자신과 지구를 파괴하고 계속해서 다른 생명체들에게 무서운 고통을 가하지 못하도록 운동에 참여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어둠과 싸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무의식과 싸울 수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그런 노력을 한다면 반대 극성이 더 강해질 뿐입니다. 그들은 더 단단히 방어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어느 한쪽에 동화될 것이고, 적을 만들 것이며, 그 결과 스스로 무의식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입니다. 당신이 아는 바를 퍼뜨림으로써 세상의 인식을 높여야 합니다. 적어도 적극적으로는 저항하지 마십시오.
- 어떤 사람들은 '내맡김'이라고 하면 패배와 포기, 삶의 도전 앞에서 무기력하게 물러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떠 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내맡김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무 대책 없이 수동적으로 참고 지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계획을 세우지 않고 긍정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내맡김은 삶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따른다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지혜입니다. 당신이 삶의 흐름을 경험하는 유일한 장소는 '지금'이므로, 내맡김이란 지금의 순간을 무조건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에 대한 내면의 저항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저항은 마음의 판단과 부정적 감정을 통해 있는 그대로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세상살이가 잘못 돌아갈 때 그렇게 말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것과 지금 있는 것 사이에 격차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고통의 틈새입니다. 세상을 충분히 경험한 사람이라면, 살아가면서 일이 잘못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고통과 슬픔을 겪지 않으려면 온전히 내맡기기 위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자마자, 당신은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존재와 연결됩니다. 저항은 마음입니다. 내맡김은 순수한 내적 현상입니다. 외부적으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고, 상황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사실, 내맡긴다고 해서 모든 상황을 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단지 '지금'이라 불리는 미세한 조각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 진흙탕에 빠졌을 때 "좋아, 단념하고 진흙탕에 빠져있겠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내맡김은 단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직하지 못하거나 불유쾌한 삶의 상황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 자신을 속이고 진흙탕에 빠져 있는 것이 괜찮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기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것을 충분히 알아차리십시오. 상황 자체에 어떤 식으로든 이름표를 붙여 단정 짓지 말고, 지금의 순간 속으로 주의력을 좁히십시오. '지금'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저항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순간의 '있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고 나서 진흙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취하십시오. 그러한 행동을 나는 긍정적인 행동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분노, 절망, 좌절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행동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지금'의 순간에 이름표를 붙이려 들지 말고, 계속 내맡기는 연습을 하십시오.
- 내맡김은 조치를 취하고, 변화를 유도하고, 목표를 성하는 일과 얼마든지 함께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맡김의 상태 속에서는 완전히 다른 에너지, 다른 특성이 당신의 행위 속으로 흘러듭니다. 내맡김은 당신을 존재의 근원적인 에너지에 연결해 주며, 당신의 행위에 존재가 주입되면 생명 에너지가 활기를 띠고 당신을 지금 속으로 더 깊이 데려갑니다. 무저항을 통해 의식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당신이 무슨 행동을 하든, 무엇을 창조하든, 그 성취도가 비교할 수 없이 향상됩니다. 열매가 저절로 열릴 뿐만 아니라 그 질도 뛰어납니다. 우리는 이를 '행함이 없는 행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 내맡김의 상태를 '나는 더 이상 신경을 쓸 수가 없다'거나 '더 이상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와 혼동하지 마십시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러한 태도는 숨겨진 원망이 담긴 부정적 감정으로 오염되어 있으며,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면을 쓴 저항일 뿐입니다. 내맡길 때 안쪽으로 주의력을 돌려서 저항의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십시오. 아주 주의해서 살펴야 합니다. 한 줌의 저항이 생각이나 감정의 형태로 어딘가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 Q. 폭력이나 공격 같은 것에 직면했을 때는 어떻게 무저항의 자세를 유지할 수 있나요?
A. 무저항이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떠한 행위이든 무의식적인 반작용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동양에서 무술 연마의 지침으로 삼는 상대의 힘에 저항하지 말라 이기기 위해서는 유연해지라는 경구에는 심오한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 Q.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내맡기라고 말하면, 여전히 '어떻게'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A. 저항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십시오. 저항이 일어날 때, 거기 있으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어떻게 저항을 만들어 내고, 상황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어떻게 분별하고 있는지 관찰하십시오.
- '지금'을 미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드는 짓을 계속한다면, 당신이 만나거나 관련된 모든 사람들도 결국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인간관계와 당신이 대하는 인간 존재는 늘 이차적인 것이 되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어 버릴 것입니다. 물질적인 이득이나 권력, 육체적 쾌락, 혹은 에고의 만족 등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존재 자체보다 우선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 내맡김이 인간관계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는지 살펴보죠. 당신이 배우자나 가까운 누군가와 다투거나 갈등을 겪는 상황이라면, 상대방이 당신을 공격할 때 당신 자신이 얼마나 방어적이 되는지를 지켜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공격할 때는 당신 자신이 얼마나 공격적이 되는지를 느껴 보십시오. 당신 자신의 관점과 의견을 얼마나 고집하는지 지켜보십시오. 당신이 옳고 상대방이 그르다는 주장의 뒤안에 도사리고 있는 정신적·감정적 에너지를 느끼십시오. 그것은 에고의 마음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를 인정하고, 최대한 충분히 느끼면서 의식하십시오. 그러면 어느 날 말다툼이 한창일 때, 당신은 갑자기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냥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기만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내맡김입니다. 반응을 하지 말라는 것은 '나는 이 모든 유치한 무의식을 초월했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말로만 "좋아요. 당신이 옳아요."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태도는 저항의 자리에 에고의 우월감을 대신 앉힌 것에 불과합니다. 당신 안에서 세력을 얻기 위해 다투고 있는 마음의 감정 에너지 전부를 떠나보내야 합니다.
- 에고는 교활합니다. 바짝 경계하고, 확고하게 현존하면서, 당신이 정말 자기주장을 완전히 버렸는지,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는지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갑작스럽게 매우 밝고 선명하고 깊은 평화를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내맡김의 상태에 있다는 명백한 신호입니다. 저항하지 않는 상태에 그대로 머물면서, 상대방의 마음자리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지켜보십시오. 마음의 입장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게 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대화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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