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조르조 아감벤, 모니카 페란도] 말할 수 없는 소녀 - 코레의 신화와 신비

일루젼 2022. 10. 3.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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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조르조 아감벤 / 모니카 페란도 / 지은현
출판 : 꾸리에 
출간 : 2017.04.27 


       

페르세포네 또는 코레에 관한 밀도 있는 글.

 

저자는 그녀와 데메테르를 일종의 복합적인 개념으로 보아 엘레우시스 비의와 연결시켜 해석한다. 

핵심 개념이 되는 비의 자체가 신비에 감싸여 있기 때문에, 코레의 개념은 마지막까지 흐릿하게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겨진다. 그가 가리킨 것은 페르세포네가 아니라 그 너머의 '생명' 그 자체로, 그녀를 통해 신과 신, 신과 인간, 인간과 동물(자연)을 이어준다. 그러므로 그녀는 여전히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연결' 그 자체이자 'core'가 된다. 

 

해서 이하의 해석은 무척 자의적인 것이자 사실 본 서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단상들이다. 이상까지의 내용에 관심이 가시는 분들은 <말할 수 없는 소녀>를 직접 읽어보시는 편이 더 도움이 되실 듯하다. 

 

비의라는 개념을 가지고 왔다면 영의 육화라는 개념 또한 함께 하게 된다.

영이 육이 아니라면, 영과 육을 이어주는 접착제 -혹은 그 연결지점- 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혼과 백을 나눈다면 백이 그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혼이 돌아간 뒤 남은 백이 그와 닮았으나 같지 않음은, 오랜 시간 함께  함으로써 탁본처럼 남는 흔적일 뿐 그 자체의 속성은 아니기에 서서히 스러져 지워지는 게 아닐까 하고.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신성을 갖추고 있으나 육화된 신들이다. 인간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으며 희노애락을 가진 존재들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나는 그 '살아있음', 무언가의 핵심을 이루는 생명력 그 자체, '코어'가 페르세포네-코레로 상징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의 정체성은 그 자체로 성립하는 이데아다.

그러나 그것이 물화되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구심점이 되는, 최초의 하나이자 연결점이 필요하다. 그것은 신의 숨결이라 할 수도 있겠고 생명이라 할 수도 있겠고 티핑 포인트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전자와 양성자가 특정 배열을 갖추어 물질이 되게 하는, 그 하나의 결합으로 자신과 같은 것들을 계속해서 늘려가는 그것. 

 

이는 저자가 제시한 씨앗의 개념과 유사하지만 조금은 더 본질적인 부분을 가리키는데, 씨앗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것이 가진 '발아 가능성', 즉 '잠재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가 어머니이자 딸로서 순환을 이어가는 것은 그것의 표면적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들이 결국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볼 때, 올림포스에서 지상으로 이어진 다음 하계로 연결되는 흐름은 땅 밑에 묻히는 것을 넘어 영계로의 연결로 해석할 수 있다. 영이 육을 입고 다시 벗는 과정이자 소녀가 아내를 거쳐 어머니가 되는 세 얼굴의 여신임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제우스의 딸이자 아내로서 디오니소스(디오뉘소스)를 낳았다고 보는 비의적 해석은, 이원성의 통합으로 비로소 등장하는 모나드를 상징한다. 

 

이래저래 갈래를 뻗어나가는 단상들을 정리해서 리뷰를 남기고 싶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았다.

지금 단계에서는 여기까지라고 생각하고 현 단계에서의 생각들을 기록해둔다. 

 

즐겁게 읽었다. 

        

 


 

 

 

모니카 페란도, 그것은 비의에서 무언의 질문이었다 - 앵그르지, 파스텔, 50x35cm

 

 

- 역자 주를 구분하지 않고 병기 발췌했음 - 

 

 

- 5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사전 편찬자 헤시키우스 Esichio는 에우리피데스 Euripide의 짧은 시 구절에 등장하는 한 "말할 수 없는 소녀 arretos kore"에 대해 언급한다. 헤시키우스는 그녀가 다름 아닌 바로 페르세포네라고 설명한다. 페르세포네의 더 흔한 별칭은, 다시 말해 환칭하면, "어린 소녀 ragazzina"이며(플라톤의 <파이드로스> 230b에서 사람들은 신전 근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작은 인형들을 코라이 korai라고 부른다), 그 어린 소녀는 그 자체로 말하여질 수 없다는 것이다.  

 

- 그리스어로 Kópa. 처녀 혹은 소녀라는 뜻. 로마 신화에서는 프로세르피나, 코라라고도 불리며 그 외에도 수많은 다른 이름이 있다.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 사이에서 낳은 딸로 꽃밭을 거닐다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하계로 끌려갔다가 어머니 데메테르의 강력한 요구로 다시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하데스가 건넨 석류 씨를 먹는 바람에 하계를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1년 중 3분의 2는 지상에 머물고 나머지 3분의 1은(어떤 문헌에서는 1년 중반을 지내기도 한다) 하계에서 하데스의 아내로 지내게 된다. 코레는 씨앗을 뜻하는 영어 'core'의 어원이기도 하다. 해석자들에 의하면, 씨앗은 땅속에 묻혀 있다가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하고 다시 씨앗으로 땅속에 묻히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이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데, 대지의 여신의 딸인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하계로 내려갔다가 다시 지상으로 귀환하는 과정이 대지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순환을 상징한다고 한다. 엘레우시스의 비밀스러운 종교의식에서 페르세포네는 어머니 데메테르와 함께 풍요의 신으로 숭배되었는데 이때 그녀는 '코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 1941년, 칼 케레니 Károly Kerényi와 칼 구스타브 융은 암스테르담에서 <신화학 서론 Einführung in das Wesen der Mythologie>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목차만 얼핏 봐도 이 책의 내용이 제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은 기본적으로 두 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케레니가 쓴 것으로, 신성한 아이 Das göttliche Kind와 코레의 형상을 통한 신성한 소녀 Das göttlich Mädchen의 신화적 형상을 다루고 있으며, 이에 상응하는 심리학적 원형(<아동 심리학의 원형>과 <코레 형상의 심리학적 측면>)에 대한 융의 긴 해제 두 편이 함께 실려 있다. 이 책의 초판과 재판이 출간되었을 때 모두, 네덜란드는 나치의 점령 아래 있었다. 10년 후 스위스에서 책을 재출간했을 때 전쟁은 이제 끝나 있었고, 저자들은 짧은 서문에다 이 책이 2차 대전 중 네덜란드에서 발행일도 없이 점령 당국이 인식하지 못한 채 출간되었다고 썼다. 그러므로 진지하고 학문적인 것처럼 보이는 제목은 나치 검열관들의 주목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 

 

- 양성구유 兩性具有의 비결정성을 지닌 근원의 아이 Urkind 의 형상이 있다. 케레니의 근원의 아이 Urkind에 대한 연구는 자웅동체적 디오뉘소스의 형상으로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의 주제는 이것이었다. 근원적으로 비결정적인 것 das Ur-Unentschiedene, 근원의 아이 das Urkind".

 

- 융은 그 결과 해제에서 "아이의 자웅동체 ermatroditismo"에 대해 상세히 할애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결합 coniunctio 원형의 생명력을 환기시킨다. 융은 이렇게 쓴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그 기능적 의미에서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아직 도달하지 않은 목표를 가리킨다. ... 자웅동체성은 점차 갈등을 극복하는 구원자가 되었다." (그렇기에 국가사회주의자들에게 전적으로 들어맞음 직한 이 '상징'이 제공하는 바를 나치 검열관들이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 코레라는 "신성한 소녀"는 여인(어머니)과 소녀(처녀)라는 여성성의 두 본질적인 상 사이의 구분을 무화하는 동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불안하게 하는 비결정성을 나타낸다. 먼저, 케레니는 이 맥락에서 "처녀"가 (육체적이거나) 의인화된 의미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고 명시한다. 코레에 의해 대변되는 "원초적 요소"는 "처녀보다는 오히려 기녀 hetaera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케레니는 또한 엘레우시스의 두 신성 神性, 데메테르(여인)와 코레(딸)가 역설적으로 소녀인 동시에 여인으로 kai kores/kai gynakos 동일시되었다는 델로스 섬의 비문을 인용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는 이 동일시를 "한 개인은 죽어도 후손들 속에 여전히 산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케레니에 의하면 "융 교수가 정의했듯, 만유회복설 apocatastasis의 기본인 선조의 삶으로부터 되돌아오는 경험은 개인의 현재 삶이 장래 후손들에게 이어지므로 여인과 소녀 사이의 비결정성은 거의 무의미해져 버린다.

 

- hetaera. 기원전 3~5세기에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인 아테네를 중심으로 사용되었던 앗티케 그리스어 Attic Greek에서 hetaera는 "여성 동료"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법적인 아내와 대비되는 말로 쓰였으며, 따라서 기녀에서 첩까지의 전 범위를 망라했다. 
  

-  검열관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것은 근원의 아이 Urkind 가 남성과 관련하여, 코레-데메테르 Kore-Demeter가 여성과 관련하여 갖는 비결정성이었을 것이다. 엘레우시스의 데메테르에 대해 분개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Clementedi Alexandria 교부는 부르짖었다. "내가 그녀를 어머니라 불러야 하는가, 아내라 불러야 하는가! metros e gynaikos" 소녀이면서 여인 kai kores/kai gynakos -즉 딸과 어머니 사이, 처녀와 여인 사이에서, "말할 수 없는 소녀"는 여성성,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에 대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의문에 붙이는 제3의 형상을 보여준다.  

 

-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Titus Flavius Clemens. 기원후 150~215. 로마의 클레멘스라 불리는 교황 클레멘스 1세와 구분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라고 알려져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교 신학자였으며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 신학교의 수장이었다. 오리게네스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 철학에 대해 깊은 이해와 존경을 보였다. 

 

- 그리스어 코레 kore (남성형 코로스 koros)는 정확한 연령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력"을 의미하는 어근에서 나온 이 말은 동물과 식물을 자라게 하는 추동력에서 비롯된다.(코로스 kores는 식물에서 "분지"를 뜻하기도 한다) 코레는 따라서 "늙은 소녀들 denaiai korai" 그리고 그라이아이 graiai, 즉 "백발들"이라고 불리는 포르퀴데스 Phorcydes처럼 늙었을 수도 있다. 아이스퀼로스 Aescylos는 코라이 korai를 "흰 머리를 가진 늙은 아이들 graiai palaiai paides"일 뿐만 아니라 살상 범죄에 대해 가혹하게 복수하는 여신들인 에리뉘에스 Erinyes라고 부른다(<자비로운 여신들 Eumenides>). 그것은 비극적 영웅들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아테나와 아폴론 같은- 이 길들일 모든 수단을 찾는 복수에 대한 무자비한 추구와 분노가 아이로 육화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나이 든 소녀들" 중 하나가 이암베 Iambe로 -이번에는 자애롭게- 코레(페르세포네) 신화에 등장하는데 그 소녀는 특히 탁월하다. 코레는 그 자체가 "말해져서는" 안 되는 삶인 만큼, 나이와 성 정체성, 가족 및 사회적 외관에 따라 정의될 수 없다. 

 

- 이암베 Iambe. 호메로스의 <데메테르 찬가>와 디오도로스의 <세계사> 등에 수록된 엘레우시스 신비의식 Eleusinian Mysteries 기원 설화에 등장한다. 이암베는 엘레우시스의 왕 켈레우스의 아내인 메타네이라의 노예였다. 잃어버린 딸 페르세포네를 찾아 그리스 전역을 떠돌던 데메테르 여신이 엘레우시스에 이르렀을 때 이암베는 우스운 이야기를 해서 여신의 시름을 덜어주었다. 데메테르와 디오뉘소스 숭배 의식에서 불리던 시가의 형식인 "이암보스 Iambus"는 그녀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 에르빈 로데는 엘레우시스 신비의식[비의] mistero eleusino이 "코레의 납치와 데메테르의 유랑, 그리고 두 여신의 재합일이라는 신성한 이야기"를 재현하는 극적인 행위, 혹은 더 정확하게는 "성스러운 찬가와 의례적인 문구를 수반하는 무언극"의 일종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엘레우시스 비의를 "입회극 Drama mystikon"이라 정의했다.

 

- 입회하다라는 동사는 어원학적으로 "닫다"를 뜻하는데, 눈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입을 닫아야 한다. 신성한 의식을 시작하는 초입에서 전례관은 "침묵을 명한다. epitattei ten siopen" 

 

- 조르조 콜리는 자신의 저서 엘레우시니아Eleusinia에서 엘레우시스 비의 입회자의 비밀 엄수라는 의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체 아테네의 인구가 입회할 자격이 있었는지를 묻는다' 여러 문헌들에 의하면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모든 이들이 (노예들조차도) 비의에 입회할 자격을 지녔음을 분명히 하는 데 반하여, 콜리는 이 의식을 관장하는 에우몰포스 가 Eumolpidae와 케뤼케스 가 Kerykes가 적어도 대비의 grandi misteri, 이른바 "관조 visione", 혹은 "에포프테이아 epopteia"라는 절정에 다다르는 의식에 관한 한 입회자들을 신중하게 선발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강조한다.  

 

- "비의(밀의) Mystery" 또는 "신비 Mystery"라는 용어는 라틴어 뮈스테리움 mysterium과 그리스어 뮈스테리온 mysterion에서 유래된 낱말이다. 대개 단수형 대신 복수형이 사용되는데 그리스어 복수형인 뮈스테리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유래에 따르면, 비의 또는 신비는 "비밀한 의식들 또는 교의들"을 뜻한다. 때문에 문맥에 따라 비교, 신비, 비의 비전 전수 의식, 신비 제전, 제전, 신비 종교, 신비주의 종교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 엘레우시스 비의.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숭고하고 장엄한 종교의식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1세기 때의 로마 철학자 키케로는 엘레우시스 비의에 참가한 뒤, "인간은 이 의식을 통해 야만적인 존재를 벗어나 교화되고 정화되어 문명의 상태에 이르게 되며, 행복하게 사는 것만이 아니라 더 나은 희망을 품고 죽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정작 엘레우시스 비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의식에 대한 비밀이 철저하게 지켜졌기 때문이다. 비의의 참석은 입회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었다. 또 그 의식에 참가한 사람들은 의식에 대해 절대 비밀을 지켜야만 했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의 정치가 알키비아데스는 비교의 비밀을 누설한 죄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후에 형 집행이 유예되었고, 엘레우시스 출신 비극 작가 아이스퀼로스는 그의 비극에서 비밀의식의 일부를 차용했다 하여 입회인들에 의해 몰매를 맞을 뻔하기도 했다. 

 

- 거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입회자들은 무언가를 배울 mathein ti 필요가 없이, 겪는 상태(변화된 상태)에 놓여있게 된다 pathein kai diatethenai"고 단언한다(<철학에 관하여> fr.15). 또 다른 구절에서 그는 "본디 가르침 to didaktikon이 무엇이며 본디 입회가 무엇인지 to telestikon"를 구분하며, "전자는 듣는 것을 통해 생겨나고, 후자는 지성 자체가 조명을 받게 pathein 될 때에만 발생한 autou pathontos tou nou ten ellampsin"고 한다. 미카엘 프셀로스는 이 두 번째 요소에 대하여 "입회자는 가르침 ou didaskarmenos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상 typoumenos을 받는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비의적 mysteriodes 요소를 엘레우시스 비의 입회와 유사하다고 일컫는다"라고 우리에게 전한다.
 

- 디아테시스(deiathesis, 배치 또는 (일시적) 상태)는 장소나 힘(능력) 또는 종류와 관련하여, 부분들이 가진 것이 갖는 질서를 뜻한다.

 

- 헥시스(hexis, 갖이 또는 상태)는 먼저, (1) 행위나 움직임(운동)처럼, '가지는 것'과 '가져지는 것'에 든 일종의 (힘의) 발휘 상태를 뜻한다. 왜냐하면 한쪽이 (어떤 상태를) 만들어 내고, 다른 쪽은 만들어질 때, 이 둘 사이에 ‘만듦’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옷을 가진(입은) 사람'과 '가져진(입어진) 옷' 사이에도 헥시스(갖이)가 있다.  

 

- 보존은 파괴 phthor와 대조된다. 전자의 경우는, 이미 잠재적인 것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서, "겪는다(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로 변화된다는 것이며, 전자의 경우는 잠재적이었던 것으로의 변화, 즉 그 자체 본성으로의 현실적인 변화를 말한다. 잠재성은 지각의 과정에서 필수적이다. 다른 잠재성과 마찬가지로, 지각은 어떤 특정한 종류의 활동을 위한 능력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반 원칙에 따르면, 이 능력은 그것의 적절한 행동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된다. 예를 들어, 볼 수 있는 능력은 본다는 것의 행위라는 측면에서 정의되며, 결국 그것의 적절한 대상인 색상으로 정의된다. 특정 유형의 활동에 대해 능력이 있게 된다는 것 이상으로, 지각의 잠재성은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 현실화될 때 완전히 소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특징으로 한다. 예를 들어, 보고 있는 행위에 관여하고 있는 경우에도 동일한 것을 보는 것과 볼 수 있는 능력은 결코 손실되지 않는다. 지각의 잠재적인 특성은 그 활동에 있어서 필수적이며 특유한 것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잠재성이 있게 된다는 것은 지각의 활동을 정의한다. 이것은 잠재성의 실현이 같은 대상에 대한 실현을 배제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각에 대한 잠재성을 보존이라고 지적했다. 본질적으로 지각에 대한 잠재성이 보존된다는 사실은 잠재성에서 행위로의 전환, 즉 변화를 포함하는 통상적인 과정과 구별된다. 지각할 수 있는 잠재성의 실현과는 대조적으로, 통상적인 변화에서 잠재성의 실현은 동일한 질과 관련한 어떤 추가적인 변화도 배제한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부분에서 잠재성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성격을 설명했으며 이로 인해 실제로 서구 철학의 주권에 관한 패러다임을 남겼다고 한다. 

 

- <에우데모스>에서 인용한 구절인, 입회의 경험과 비교되는 접촉 thigein 개념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이 사유의 완성이었다. 

 

- 우리로 하여금 신비의식에서 현존하는 "말할 수 없음"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은 이 두 구절 중 첫 번째다. 이 "말할 수 없음"은 비밀 교리를 전달하는 것에 대한 금지도 아니었고, 말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불가능성과 관련된 것도 아니었다. 기독교 연대기 편찬자들은 입회자들이 다음과 같은 "제례 주문"을 읊었다고 기록한다. "저는 금식을 했습니다.", "저는 퀴케온을 마셨습니다", "저는 그 상자 kiste에서 가져갔습니다.", "일을 마친 후, 저는 그 상자 안에 놓았고, 바구니 kalathos에서 상자 안으로 놓았습니다."

 

- 입회자들은 하루 동안 금식을 했다가 물, 귀리, 박하로 만든 퀴케온 kykeon이라는 죽 같은 음료를 마셨다. 이어 사제들이 가져온 바구니 속의 성물을 직접 손으로 만지고 나서 의례적인 구절을 소리 내어 외었고 사제들을 따라 신성한 노래를 불렀다. 

 

- 칼라토스 kalathos.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하던 갈대의 줄기 따위로 만들어진 원통형의 바구니. 곡물이나 과일을 담았으므로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리스 시인 칼리마쿠스는 바구니가 오면 여자들이 반기며 "데메테르, 위대한 이시여! 많은 양의 곡식을 하사하시는 여신이시여!"라고 외쳤다 한다. 

 

- 엘레우시스의 신성한 아이인 이악코스의 또 다른 이름이 디오뉘소스임을 상기하며 케레니는 쓴다. "데메테르가 바우보의 노출된 음부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정확하게 말하긴 어렵다. 우리는 신비의식에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간단히 다룰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데메테르가 본 것이 그녀를 웃게 만들었고, 그 광경이 음란한 동시에 우스운 것이었음은 확실하다. 입회자들이 "저는 금식을 했습니다. 저는 퀴케온을 마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장면을 기념하는 것이다. 비의가 납치에서 나온 비극 만들기 ektragodousai"라 했던 클레멘스의 악의적인 암시와는 반대로, 엘레우시스 비의의 공연은 -우리가 그것을 하나의 공연이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희극이지 비극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바우보가 등장하지 않는 데메테르 찬가에서 익살스럽게 위로하는 역할은 이암베가 맡는데, 그녀는 여러 농담을 걸어, 먼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여신을 미소 짓게 meidesai 하고는, 웃게 gelasai 만들어, 기분을 좋게 돌려놓는다(<데메테르 찬가>, 202-203). 

 

- 1921년, 독일 라인란트에 있는 마리아라흐 수도원의 오도 카젤 Odo Casel이라는 무명의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는 <신비 기념으로서의 전례 典禮 Die Liturgie als Mysterienfeier>를 펴냈다. “전례 운동"과 실천이라는 명목으로 가톨릭 교회 내에서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일종의 선언문이었다. 카젤에 따르면, 전례의 본질이 교리가 아니라 신비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전례의 참된 본질이 오랫동안 잘못 이해되었으며, 게다가 엘레우시스, 오르페우스, 헤르메스 비의 등의 이교와 발생적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보다 먼저 1918년에 <그리스 철학에서의 신비스런 침묵에 관하여 De philosophorum graecorum silentio mystico>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논문에서, 이 젊은 수도사는 이교의 신비의식이 말로 명확히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발설이 금지된 비밀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 이 환원할 수 없는 전례의 작용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교 비의는 아무것도 없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는 <황금당나귀 Asinus aureus> 끝 부분에서 이시스 비의 misteri di Iside에 자신이 입회하는 것을 묘사할 때, 거기서 발견한 구원을 "불안정한 precaria" 것으로 정의한다.(자발적 죽음에 준하는 불안정한 구원 ad instar voluntariae mortis et praecariae salutis) 여기에 확실성은 없으며, 다만 지하세계와 천상의 신들 사이에 매달려 있는 길을 어둠 속에서 또는 어슴푸레함 속에서 애매하게 나아갈 뿐이다. 이 신들은 주로 꿈속에 나타나며, 높음과 낮음, 빛과 그림자, 잠과 깨어있음 사이의 구분이 점점 불확실해지는 불분명하고 혼란스러운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들이 이끄는 구원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 라틴어에서 praecarius는 오직 "간청, 기도 praex"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구두로 요청하고, "물음 quaestio"과는 구분되며, 구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달성을 보장하기 위해 적절한 수단으로 요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quaestio(물음)이라는 말은 요청하면 항상 얻게 된다는 것을 통해 결국 '고문'을 지칭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그리스도교의 신비가 이런 의미에서 늘 효과적이라면, 불안정성은 이교 입회가 움직이는 모험적이고 야행적인 차원이다. 아풀레이우스의 소설은 비의 입회식에 대한 포괄적인 묘사를 제공하는 유일한 고대 문서이다. 하지만 소설 속 내용이라는 이유로 학자들은 늘 그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 그는 "난 죽음의 바로 앞까지 가서 페르세포네의 문지방에 한 발을 내디뎠습니다. 아직 돌아올 수는 있었으나 모든 요소(물, 불, 바람, 흙)에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나는 대낮처럼 환히 빛나는 태양을 보았습니다. 난 지하세계의 신들과 하늘나라의 신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향해 참배했습니다."라고 하며 가장 높은 입회의 수준인 영적 세계로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루키우스 역시, 그때 다른 놀라운 신비와 계시를 보았으나 그것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한다. 

 

- <황금당나귀> 절정에서 이시스는 주인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이른 시기의 종족인 프리기아은 나를 모든 신들의 어머니인 페시눈티아라고 부른다. ... 그리고 세 가지 언어를 말하는 시실리인은 프로세르피네라고 부른다. 엘레우시스인에게 나는 고대의 여신 케레스이고, 다른 자들에게는 유노, ... 그러나 매일 태어나는 태양신의 첫 햇살을 받는 에티오피아인은, ... 이집트인과 더불어, 나의 독특한 의식을 통해 내게 영광을 돌리며 여왕 이시스라는 나의 진정한 이름을 내게 부여한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저, 송병선 역, 매직하우스, 2007)

(리뷰자 주 :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딸이자 아내이자 어머니인 삼위일체로 이해하고 있다.)

 

- 그렇지만 잔니 카르키아의 탁월한 직관이 말하듯이, 소설 형태와 신비의식 사이에는 본질적인 관련성이 있을 뿐 아니라, 고유의 신비의 의미를 가장 잘 전달하는 것이 바로 소설 형태이기도 하다. 아마도, 소설은 처음으로, 비록 패러디 형태일지언정, 인간과 지상의 요소를 전달 수단으로 삼아 입회의 여정에서 생기는 주저와 불안, 희망과 탈선을 주인공의 모험과 험로險路에 정확히 대응시켜 신의 이야기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소설은 인물을 둘러싸고 엮이는 상황과 사건, 관계와 환경의 뒤얽힘과 동시에, 입회에서 그러하듯이, 설명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관조하는 식으로 마치 신비와 같은 인물의 삶을 구성한다. 오늘날 고대 신비의 메아리를 어디선가들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가톨릭 교회의] 장려한 전례의 효력에서가 아니라 소설 형태로 제공되는 극단적인 삶의 대단원에서이다. <황금당나귀』>에 존재하는 루키우스든 헨리 제임스 Henry James의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Lady>의 이사벨 아처든 소설은 삶 자체가 입회이면서 동시에 단 하나의 내용인 신비 mysterion 앞에 우리를 놓아둔다.  

 

- 에드가 빈트에 따르면 "한 도상해석학자가 르네상스 회화에서 잃어버린 주제를 재구축하고자 시도하면서" 역설적인 과제에 직면한다. "어둠의 장막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 목적을 위해서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지만) 단지 시간적인 거리뿐만이 아니라, 은유를 사용한 모호성이 위대한 르네상스 정신의 회화를 덮고 있으므로, 그는 화가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에서 더 벗어나 숨겨진 주제와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비록 이 작품들이 필요에 따라 어둠과 신비를 고려한 문화적 맥락이 낳은 것이긴 하지만, 도상해석학자는 작가의 의도에 반하여 "명확성을 향해 분투해야" 한다. 심미적으로 말하면, 의미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이 예술의 향유에 장애물이 된다는 데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 이런 편견에 대해서, 엘레우시스의 비의에서처럼, 로렌초 로토 Lorenzo Lotto 나 티치아노 Tiziano의 알레고리를 상기해보는 것이 좋겠다. 그들의 그림은 면밀한 해석자가 밝혀내야만 하는 숨겨진 교리적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비로운" 게 아니라, 엘레우시스 비의가 그렇듯, 그 속에 있는 형식과 내용의 결정 불가능성 때문이다. 제3의 요소 내용과 형식 사이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것는 당연히 신비로운데, 왜냐하면 그 안에 숨겨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당시 후원자들 과학자들의 견해와는 별개로, 이러한 이미지들은 담론적 수준에서는 말할 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유와 관조가 일치하는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것은 내용이 이제 베일을 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라틴어 동사 "coincidere"의 문자적 의미 그대로, 그들이 "같이 일어나면서(일치하면서)" 축소되고 조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조해야 하는 것은 순수한 외양이다. 말할 수 없는 소녀가 자신을 드러낸다. 

(리뷰자 주 : 비문이다. 형식과 내용의 결정 불가능성 때문에 '신비하다'라고 이해했다.)

 

- 로렌초 로토는 이탈리아의 화가다. 초기에는 경직된 화풍과 차가운 색조의 그림을 그렸으나 1526년경 베네치아로 돌아간 뒤에는 티치아노의 열정적인 색조와 웅장한 구도에 영향을 받았다. 후에 레마르케로 이주한 뒤에 그린 <로사리오의 성모>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같은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힘찬 구도로 신비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좋아하던 티치아노는 <아르테미스와 악타이온>, <악타이온의 죽음>과 같은 신화를 많이 그렸다. 순결한 여성을 상징하는 아르테미스의 나체를 본 사건 때문에 악타이온은 저주를 받아 사슴이 됐고, 결국 사냥개들에 의해 죽음에 이른다는 비극적 신화다. 티치아노의 그림은 단일하게 파악되기보다 알 수 없는 신비함 속에 가려져 있다.  

 

-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러한 그림들에 묘사된 지식을 담론적으로 제시할 수 없다. 필요한 경우에만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뿐이다. 

 

- 르네상스 알레고리들이 모든 의미에서 현대의 많은 철학 논문들보다 풍부한 사유의 표현을 제공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회화가 본래의 이론적 토대로, 그러한 관점 안에서 회귀하는 것일 뿐 아니라 사유의 본질 자체에 대한 조명으로 귀착되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보티첼리 Botticelli와 티치아노의 그림들은, 피치노 Ficino 나 피코 Pico의 글을 통해 명확해질 필요가 있기는커녕, 반대로, 우리들로 하여금 그 논문들이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사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케레니가 썼듯이, "보티첼리의 그림(<비너스의 탄생 Lanascita di Venere>)에는 <호메로스 찬가> 만큼이나 살아있는 신화들로 가득하다."

 

- 피치노는 15세기에 플라톤의 모든 책들을 번역한 피렌체 사람으로, 인간의 중심성과 보편성이 인간 존엄성의 주된 근거가 된다고 믿었다. 피코는 1496년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연설>이라는 글에서 피치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이 완전한 우주를 만들기 위해 모든 정신적, 물질적 존재를 창조했으나 인간은 맨 마지막에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은 이미 완성된 질서 안에 어떤 정해진 자리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어떤 피조물의 성질도 가질 수 있는 자유를 가졌으므로 그가 무엇을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식물, 동물, 천체, 천사, 나아가 신과도 일체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우주에는 초월적 힘이 존재하고 천상계와 지상계의 존재 사이에는 신비한 감응 관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 기원 후 3세기에 플로티노스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창시되고, 6세기까지 존속한 철학사조인 신플라톤주의를 말한다. 그러나 플로티노스 자신은 플라톤에 보이는 정치적 실천적 관심은 별로 없으며, 신학적·형이상학적 국면에 집중하여, 그리스 철학만이 아니라 그의 스승 암모니오스 삭카스를 매개로 오리엔트, 이집트의 신비학에서도 많은 것을 계승한다. 5세기에는 프로클로스가 이 전통을 계승하고, 플라톤 해석사에 획기적 업적을 남겼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 학술의 계승과 함께 수학, 천문학 등 자연과학의 발전에도 기여했으며, 이 전통이 르네상스와 함께 서방에 복귀해서 앞서 말한 피치노 등의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를 낳았다. 독일 관념론을 신플라톤주의의 독일적 변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콜리는 데메테르에 대한 숭배가 "종교적인 신성한 영역과 동물적인 영역 간의 긴밀한 관계를 수반했다는 풍부한 직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데메테르에 대한 상은 엘레우시스 비의에서는 "여주인 Pornia"을 연상시키거나 아르카디아에서는 "동물들의 여신"으로 숭배한 "여신"을 암시한다. 의문이 되는 '말할 수 없음'의 기원은 따라서 "동물과 신의 다양한 형태의 결합"과 관련되는 "신화의 특정한 기본적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크레타에서 황소는 파시파에 Pasifae와 결합하며, 아르카디아에서 말의 형상을 한 포세이돈은 데메테르와, 뱀의 형상을 한 제우스는 레아 Rhea와 맺어졌다가 나중에는 페르세포네와 결합한다. 더욱이 우리가 만일 디오뉘소스와 미노타우루스의 동일시를 받아들인다면, "아르카디아에서 교접해서 낳은 딸인 데스포이나(즉, 코레)와 엘레우시스에서 뱀의 형상을 한 제우스가 결합해서, 이미 크레타에서 짝짓기 해서 최초로 태어난 바 있는, 즉, 신-동물이 잔인하게 결합된 형태의 같은 자식을 낳았다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그는 '여러 이름'을 가진 신, 디오뉘소스다."  

 

- 페르세포네를 찾아 헤매던 데메테르는 아르카디아를 지날 때 추근거리는 오빠 포세이돈을 피해 암말로 변신해 말떼 속에 숨었다. 그러나 말의 신이기도 한 포세이돈은 수말로 변해 데메테르와 교접했다. 임신한 데메테르는 신마神馬 아레이온과 데스포이나를 낳았다. 데스포이나는 페르세포나의 변형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암말 머리를 한 모습으로 아르카디아에서 숭배되기도 했다. 

 

- 오르페우스 문헌에서, 코레는 뿔을 가지고 있다(keroessa, <호메로스 찬가> 중 <오르페우스 찬가> 29. 11). 그리고 제우스는 뱀의 형상으로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biasamenos kai tauten en drakontos schemati (G. Colli, La sapienza greca, vol. I, (Milano 1977) 382.) 

 

- 고대의 증언과 근대 학자들에 따르면, 디오뉘소스는 엘레우시스 비의에 존재했다. 소포클레스의 희곡에서 데메테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악코스는 이미 디오뉘소스와 동일시되었다. 그리고 콜리가 썼듯, 디오뉘소스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며 더불어 신이고, 그럼으로써 인간이 수행하는 양극단의 지점임을 명시한다." 

 

- 그리스어로 동물 zoon은 오직 "살아있는 존재"를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에 신은 의심할 여지없이 "살아있는 존재"였다. (비록 신의 삶 zoe이 "최상이고 영원하다 artiste kai aidos 하더라도") 모두가 "동물"로서, 즉, 살아있는 것으로서, 사람과 신은 교통한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과 성적으로 결합하고자 하는 경우 동물의 형상을 취하는 것이다. 

 

- 사람은 신과의 관계를 정의하기 위해 다른 살아있는 존재를 죽이는 살아있는 존재이다. 엘레우시스에서 입회하는 동안에는 어떤 희생 제의도 없었는데 (agallein은 희생 제의에 속하는 어휘가 아니라 "장식하다, 즐거움을 주다"라는 뜻이다) 그것은 동물에서 사람(그리고 신), 그리고 사람(그리고 신)에서 자신의 동물성을 합일하고 분리하는 시초 자체가 의문시되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소녀"가 그 시초이다. 여인과 소녀, 처녀와 어머니 사이의 혼동과 비결정적인 간극을 허물듯, 그녀는 동물과 인간 사이 인간과 신사이를 분리시키는 간극도 그렇게 허물어뜨린다. 

 

- 그리스인들은 동물성과 신성에 접근했지만, 자율적인 영역으로서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동물과 신 모두에서 우리를 분리하였고,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인간이라는 형을 언도하였다. 신비의식 속에서 그리스인들은 신과 동물이라는 인간 조건의 극단을 경험했다.

 

 

 

 

모니카 페란도, '영혼이 이제 막 태양의 빛을 저버렸을 때' - 재생지, 푸른 크레용, 24x1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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