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조지 R. R. 마틴 / 데이비드 팰럼보 / 김상훈
출판 : 은행나무
출간 : 2018.10.11
때아닌 소설 삼매경이다. <솔라리스>를 읽으려 했었는데 언제나 그렇듯 계획과는 달리 <나이트 플라이어>를 읽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나는 SF를 좋아하는 사람인가?'라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지만, 남겨놓는 기록들을 보면 그럭저럭 좋아하는 편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번에 국내에 번역된 판본은 하드 커버 일러스트 에디션을 번역한 것으로 언제나 감사하게 믿고 보는 김상훈 번역가 님의 번역이다.
(사실 18년도에 발간되었던 책을 지금 리뷰하는 것이라 이런 뒷북이 없다)
내가 즐겁게 읽었던 책들의 상당수를 이 분의 번역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또 옮기기가 쉽지 않았을 문장들을 눈에 걸리는 부분 없이 분위기까지 살려 번역해주셨다는 점에서, 언제나 감사히 읽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에 삽화가 있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자유롭게 상상하는 즐거움을 빼앗기기 때문이기도 하고,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유화 느낌의 일러스트들이 꽤나 매력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상상했던 인물들의 이미지와도 크게 다르지 않아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언제나 예외는 생기는 법이다. 멜란사 지얼의 검고 긴 머리카락이 아프로 스타일로 표현되어 다소 아쉬웠다는 점만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무척 만족스러운 제본이었다.
(책 옆면의 바코드 같은 문양들은 크게 두 패턴이었는데, 전체 옆면이 '나이트 플라이어'라는 것 이외에는 아직 의미를 잘 모르겠다)
판타지와 SF의 경계를 나누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대체로 SF라면 과학적 이론으로 뒷받침이 가능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현재 구현되지 않은 기술은 이론적 가능 여부와 별개로 환상의 영역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므로, 개인적으로는 엄격하게 구분하는 편은 아니다. 따라서 조지 마틴 옹이 'SF를 내놓았다'는 느낌보다는 이번에는 '우주 배경의 현대 판타지를 썼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텔레키네시스와 텔레파스는 SF인가 판타지인가?)
역자문을 읽어보면 <나이트플라이어>의 경우 영화보다는 원작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있는데, 원저자의 유명세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상당히 매력적인 글이었다. 발표 시기를 고려할 때 트릭이나 설정도 꽤 참신하며, 자유롭게 표현된 관념들도 눈길을 끈다.
즐겁게 읽었다.
- "하지만 도저히 무시하고 내버려 둘 수가 없더군. 그래서 시간 여유가 있을 때마다 난 연구를 계속했다네. 다른 외계 종족들의 우주 창조 신화와 비교 대조해서, 노르탈러시 말고도 유사한 신화를 가진 종족이 없는지 찾아봤던 거야. 그걸로 논문을 하나 쓸까 하는 생각도 있었어. 상당히 유망한 연구 분야 같았거든. 그렇게 해서 도출한 결과는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네. 흐랑가 인들의 경우에는 관련 신화가 전무했어. 흐랑가 인들이 부리는 노예 종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따져보면 이치에 맞아. 흐랑가 제국의 세력권은 인류 우주보다 더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니까, 거기까지 도달하려면 일단 우리 인류의 영역을 지나야 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은하계에서 우리보다 안쪽에 위치한 종족들의 신화를 들여다보니까, 볼크린 이야기로 넘쳐났던 거야."
- "핀디 인들은 볼크린을 이아-위비이라고 부르는데, 번역하자면 '허공의 부족' 내지는 '검은 무리'쯤 되겠군. 모든 핀디 부족들이 각각 똑같은 얘기를 하고, 그걸 믿지 않는 건 정신 결합능력이 없어서 벙어리나 다름없는 부족들뿐이었어. 볼크린의 우주선들은 엄청나게 크다더군. 그치들의 역사나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그 어떤 우주선도 능가할 정도로 말이야. 게다가 모두 군함이라는군. 300척의 우주선을 보유했던 랄라핀 휘하의 사라진 일족에 관한 얘기까지 있었어. 예의 이야위비이와 마주쳤을 때 몰살당했다는 내용이지. 물론 몇천 년 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세부는 명확하지 않지만 말이야."
- "다무시 인들의 얘기는 좀 다르지만, 그들은 볼크린의 존재를 글자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인다네. 알다시피 다무시는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만나본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외계 종족인데, 그런 그들이 나의 볼크린에게 붙인 이름은 '심연의 종족'이라네. 로이드, 정말이지 매혹적인 이야기였어! 실로 매혹적이지! 거대한 검은 도시를 방불케 하는 배들이 아무 소리도 없이 주위 우주보다 더 느린 속도로 천천히 움직이는 광경을 상상해보게. 다무시 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볼크린은 태곳적에 은하계의 핵에서 일어난 상상을 초월하는 전쟁으로부터 도망쳐 온 난민이라는군. 별들 사이의 허공에서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자기들이 태어나 진화한 고향 행성과 항성들을 버리고 영원히 방랑한다는 식이지."
- 젊고 건강하며 매사에 능동적인 멜란사는 다른 사람들은 상대도 안 될 정도로 활력이 넘쳤다. 모든 면에서 크다고나 할까. 그녀는 그 어떤 동료보다 머리 하나는 컸고, 몸집도 큰 데다가 풍만한 가슴과 긴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움직이면 칠흑처럼 검게 반짝이는 피부 아래의 강인한 근육이 물 흐르듯 약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식욕 또한 왕성해서 동료들보다 적어도 두 배는 더 먹는다. 그녀는 술을 마셔도 전혀 취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탑승 시에 가져와서 화물칸에 직접 설치해놓은 운동기구를 써서 매일 몇 시간씩 규칙적으로 운동했다. 출발한 지 3주째가 될 무렵에는 남자 승객 네 명 모두와 여자들 중 두 명과 섹스를 했다. 잠자리에서조차도 언제나 능동적이어서, 대부분의 파트너를 녹초로 만들었다. 로이드는 질리지도 않고 그녀를 구경했다.
- "난 개량된 모델이거든." 평행봉 위에서 운동을 하다가 그녀는 로이드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맨살 위에서 투명한 땀이 반짝인다. 길고 검은 머리는 머리 그물로 고정해놓았다.
(리뷰자 주 : 일러스트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 멜란사는 길고 검은 머리로 묘사되어 있는데, 다소 전형적인 아프로 펌 스타일로 그려져 있다.)
- "개량된 모델?" 로이드는 되물었다. 화물칸 안으로 그의 홀로그램 상을 투영할 수는 없었지만, 멜란사는 운동하던 중에 벽의 통신 장치를 써서 그를 불렀던 것이다. 어쨌든 그가 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로 멜란사는 동작 중에 정지했고, 두 팔과 등의 힘만 써서 공중에서 거꾸로 직립했다. "변형시켰다는 뜻이야, 선장님." 최근 들어 그녀는 로이드를 '선장님'이라고 부르는 버릇이 생겼다. "난 프로메테우스의 엘리트 계층에 속한 유전자공학의 마술사들 사이에서 태어났어. 그래서 개량되었던 거지. 내 몸은 보통 인간보다 두 배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써. 좀 더 효율적인 신진대사 능력과 좀 더 강하고 튼튼한 몸과, 보통 인간보다 5할은 더 긴 기대 수명을 갖고 있지. 우리 고향 행성 사람들은 인류를 극단적으로 재설계하려다가 끔찍한 실수 몇 가지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이런 식의 사소한 개량에는 도가 텄거든."
- "목에 걸고 다니는 그 수정 같은 건 뭔가?"
멜란사는 평소에 그것을 가슴 사이에 매달고 다녔지만, 운동을 하려고 옷을 벗을 때는 떼어놓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다시 집어 들고 목에 걸었다. 검은 장식 선들이 들어 있는 녹색의 조그만 보석에 은제 사슬을 단 목걸이였다. 보석이 자기 몸에 닿자 멜란사는 잠시 눈을 감더니 씩 웃으면서 다시 떴다.
"이 보석은 살아 있어. 지금까지 이런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이건 '속삭이는 보석'이라고 해. 사이(psi) 능력을 써서, 어떤 기억이나 감각을 각인 보존한 거지. 보석이 내 몸에 닿으면 잠시나마 재경험할 수 있어."
"나도 그 이론은 잘 알아. 하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쓰이는지는 몰랐군, 그럼 거기엔 뭔가 소중한 기억이 들어 있는 거야? 혹시 당신 가족의 기억이라든지?"
멜란사 지얼은 타월을 낚아채서 전신의 땀을 닦기 시작했다.
"내 보석에는 특별히 만족스러웠던 잠자리에서의 감각이 들어 있답니다, 선장님. 닿으면 흥분을 느껴. 아, 적어도 예전에는 그랬다고 해야 하나. 속삭이는 보석의 효능은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고, 이것 역시 예전만큼 세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아직도 가끔 느낄 때가 있어. 사랑을 나눴다거나 힘든 운동을 한 경우는 꽤 자주. 방금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 "이건 진짜라니까요." 텔레파스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애초에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 했어, 어쩌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일랑 집어치우십시오. 난 이...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안정적이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감히 어떻게 내 정신 상태부터 의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다른 사람들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은 아예 못 할 겁니다. 술에 절은 크리스토퍼리스가 어떤 추잡스러운 환상을 갖고 있는지 아십니까. 대널은 공포로 반쯤 맛이 가 있고, 기계밖에 모르는 로미 머릿속에는 금속과 빛과 차가운 회로밖에 없습니다. 정상이 아니죠. 지얼은 오만하기 이를 데 없고, 애거서는 하루 종일 자기 머릿속에서조차도 징징거리는 걸 멈추지 않고, 알리스의 머릿속은 워낙 공허해서 소처럼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삽니다. 그리고 당신, 당신은 다른 작자들과 접촉하거나 교류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안정적이라는 말이 나옵니까? 낙오자들입니다. 드브라닌, 당신 부하들은 모두 낙오자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유능한 텔레파스한테 불안정하거나 제정신이 아니라는 식의 터무니없는 낙인을 찍을 생각일랑 아예 하지도 마십시오." 그는 열에 들뜬 듯한 푸른 눈으로 드브라닌을 쏘아보았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 "선내를 돌아다니면서 테일하고 다른 사람들 마음에서 뭔가를 읽어낼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죠.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 테일이라는 건 사리에 맞아요. 테일은 1급이지만 난 3급에 불과하니까."
드브라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예민해졌다는 인상을 받았어. 자긴 다른 사람들 머릿속을 샅샅이 읽을 수 있다면서 별의별 얘기를 늘어놓더군."
"그런 건 무의미해요. 텔레파스는 주위 사람의 사념을 모두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건 전혀 못 읽는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예요. 느끼지도 못하는 타인의 감정이나 사념을 대신 상상해버리는 거죠. 신중하게 관찰해야겠네요. 텔레파시 능력은 그런 식의 히스테리를 유발해서 사념을 수신하는 대신에 거꾸로 방송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폐쇄된 환경에서는 아주 위험할 수 있어요."
- 그들은 일주일 전부터 나이트플라이어 호를 휩쓸기 시작한 체스 열(熱)의 마지막 희생자들이었다. 처음에 체스 세트를 꺼내 와서 시합을 하자고 사람들에게 권한 사람은 크리스토퍼리스였지만, 테일 라사머가 죽치고 앉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차례로 격파하자 다들 곧 흥미를 잃었다. 라사머가 독심 능력을 써서 이겼다고 다들 확신하고 있었지만, 텔레파스는 언제 폭발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예민한 정신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입 밖에 내서 그를 비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멜란사만은 별 어려움 없이 라사머를 이길 수 있었다.
"라사머는 그리 유능한 플레이어가 아냐." 그녀는 나중에 로이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설령 내 머릿속을 읽으려고 한들 무의미한 횡설수설밖에는 안 들릴걸. 개량된 모델은 모종의 정신적 훈련을 받기 마련이고, 나도 충분히 내 마음을 차단할 수 있어."
그런 일이 있은 후 크리스토퍼리스와 다른 몇 명도 멜란사에게 도전해보았지만 역시 완패했다. 마지막에는 로이드도 끼워달라고 부탁했다. 체스판을 앞에 두고 로이드와 진득하게 체스를 둘 용의가 있는 사람은 멜란사와 캐롤리뿐이었다. 그러나 캐롤리의 실력은 바로 전의 수조차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결국 멜란사와 로이드만이 정기적인 맞수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체스를 즐겼다. 이기는 사람은 언제나 멜란사였지만 말이다.
- 투영된 배열은 그녀가 해당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에도 변화를 거듭했다. 로미는 결정 구조를 가진 데이터 그리드에 둘러싸여 있었다. 줄줄이 늘어선 스크린들과 데이터 표시 패널들 위에서 수치가 열을 지어 행진하고, 기하학적 도형들이 장중하게 춤추듯이 움직인다. 이 매끄러운 검은 금속 기둥들이야말로 그녀의 컴퓨터 시스템의 마음과 영혼이 깃들어 있는 장소였다. 로미는 어스름한 실내에 앉아 즐거운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며 몇몇 단순한 루틴을 돌려보았다. 명멸하는 키들 위에서 번개처럼 움직이는 손가락들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아." 잠시 후 그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조금 뒤에는 그냥 "좋아"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마지막 시스템 체크를 할 차례가 되었다. 로미 쏘온은 왼쪽 팔목의 금속 소매를 걷은 다음 콘솔 아래로 집어넣었고, 튀어나온 단자들을 찾아내서 접속했다. 인터페이스.
황홀감.
데이터 스크린들 위에서 다채로운 빛을 발하는 잉크 얼룩 같은 것들이 뒤틀리며 융합했다가 다시 분리된다.
다음 순간에는 이미 끝나 있었다.
- 시스템은 완벽하게 가동 중이었다. 하드웨어 상태도 양호했고, 소프트웨어 시스템도 모두 계획대로 차질 없이 기능하고 있었다. 인터페이스 접속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지금까지 줄곧 그래 왔던 것처럼 그녀에게는 즐거움 그 자체였다. 시스템과 접속하면 그녀는 실제보다 훨씬 더 현명해지고 강해지며, 빛과 전기와 생의 활력으로 가득 찬다. 시원하고 깨끗하고 고양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체험을 하는 동안 그녀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작거나 약하지도 않다. 시스템과 직접 접속해서 자기 자신을 확장했을 때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딘가 달랐다. 순간적이나마 뭔가 차가운 것이 그녀를 건드렸던 것이다. 아주 차갑고 아주 무시무시한 존재. 그것이 곧 사라지기 직전, 그녀는 자기 시스템과 함께 짧게나마 그것을 뚜렷하게 보았던 것이다.
사이버네틱스 학자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쫓아냈고, 다시 작업을 개시했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 "방금 진정시켜놓고 왔어요." 메리지블랙은 같은 날 느지막한 시간에 캐롤리 드브라닌에게 보고했다. "사이오닌-4를 주사했으니까 며칠 동안은 감수성이 무뎌질 거예요. 필요하다면 더 주사하면 되겠고."
드브라닌은 충격을 받은 기색이었다. "몇 번 얘기를 나눠보면서 테일의 공포증이 점점 더 악화됐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유가 뭔지는 본인도 꼬집어 말하지 못하더군. 그래도 그렇게까지 능력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을까?"
초심리학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점점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으니까요. 테일 수준의 능력자가 선을 넘는다면 우리들까지 휘말릴 가능성이 있어요. 애당초 1급 텔레파스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하는 건지도. 정신 상태가 저렇게 불안정해서야 원."
"우린 외계 종족하고 의사소통을 시도할 거잖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자네도 잘 알 텐데, 볼크린은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조우한 그 어떤 외계 종족보다 더 이질적일 게 뻔해. 따라서 조금이라도 소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1급의 능력이 필요했어. 성공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걸 배울 수 있을지 상상해보라고!"
- "자네 능력으로 보기엔 어떤가?" 드브라닌이 말했다. "자네도 공감 능력자 아니었어?"
"그건 내 관할이에요." 그녀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지난주에 그치와 섹스를 했어요.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진단을 하거나 상대방의 초능력을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는 그게 최고니까.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조차도 아무 확신도 얻지 못했어요. 라사머의 마음속은 혼돈 그 자체고, 그가 느끼는 두려움은 ... "
- "이건 진지한 질문인데, 그치에 관해 뭐라도 아는 게 있어요? 우리가 탄 이 나이트플라이어 호는 도대체 어디서 온 거죠?"
"나도 모르네." 드브라닌은 시인했다. "실은 한 번도 물어볼 생각을 안 했어."
그의 연구 팀 구성원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서로를 흘끗 쳐다보았다.
"한 번도 물어볼 생각을 안 했다." 크리스토퍼리스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이 배를 골랐던 겁니까?"
"마침 빌릴 수 있었거든. 행정 협의회는 내 연구 계획을 승인하고 필요한 학자들을 할당해줬지만, 학술원의 우주선까지는 빌려주지 못했어. 예산상의 제약도 있었고."
애거서 메리지블랙이 신랄하게 웃었다. "브라닌 대장님이 방금 한 얘기를 아직도 이해 못 한 사람들을 위해서 설명하자면, 학술원은 볼크린 전설을 발굴해낸 드브라닌의 외계신화학 연구를 높이 평가했지만, 실제로 그걸 찾으러 간다는 계획에 대해서는 뜨뜻미지근한 반응밖에는 안 보였다는 뜻이야. 이 소규모 탐사는 어차피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날 거라고 예상한 거지. 그래서 우리 대장님이 만족하고 고무될 정도의 조촐한 예산만 할당하고, 아발론에서 사라져도 별문제가 안 되는 인재들만 파견해줬던 거야."
- "대체 뭘 숨기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
멜란사 지얼이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리자 그녀는 씩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로이드 선장은 완벽해. 기이한 임무에는 기이한 인물이 적격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여기서 수수께끼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린 지금 몇 광년이나 되는 거리를 날아가서, 은하계의 핵에서 출발해서 인류가 전쟁을 한 기간보다 더 오랫동안 은하계 외각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가설상의 외계 우주선을 따라잡으려는 참이잖아. 그런데 다들 로이드 코에 점이 몇 개 있는지 세어볼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기분 나빠하는 거야?" 멜란사는 식탁 위로 상체를 내밀고 브랜디 잔을 다시 채웠다. "우리 어머니 말이 옳았어." 그녀는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정상인들은 정상 이하가 맞아."
- "난 그녀의 이성(性) 클론이거든. 어머니는 30년 동안이 배를 홀로 몰고 다니다가 따분해졌던 거야. 난 그녀의 반려자이자 연인이 될 예정이었다네. 나를 만들어내는 일은 완벽한 소일거리가 될 수 있었고 말이야. 하지만 어머니는 어린애를 기를 인내심까지는 없었고, 나를 직접 키우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었어. 그래서 복제 과정을 완료한 뒤에는 태아 상태인 나를 영양 보급 탱크 안에 밀봉하고 컴퓨터에 연결해놓았던 거야. 컴퓨터가 내 선생 노릇을 해줬네. 출산 전에도 출산 후에도 말이야. 실제로는 출산한 게 아니지만 정상적인 태아였다면 이미 태어났을 시점을 훨씬 지난 시기까지도 나는 탱크 안에 남아서 성장했고, 학습했다네. 출산을 인위적으로 늦춘 상태로,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맹목적으로, 관을 통해 영양을 공급받으면서 말이야. 나는 사춘기에 도달했을 무렵에야 해방될 예정이었네. 그녀는 그때쯤이면 내가 반려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 "당신도 인류에 관한 어머니의 의견에 공감해?" 메리지블랙이 물었다.
"아니. 난 사람이 좋아.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만 그걸 선택한 건 내가 아니니까. 나는 내게 가능한 유일한 방법으로 인간의 삶을 경험한다네 - 대리 만족을 통해서 말이야. 평소 나는 엄청난 양의 책, 음악, 홀로 드라마 따위를 소비하네. 소설이든 연극이든 역사든 장르를 가리지 않아. 드림더스트를 흡입해본 적도 있지. 어쩌다가 용기를 내서 승객을 태울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승객들이 살아온 인생을 최대한 많이 흡수하려고 한다네."
"24시간 내내 이 우주선을 무중력 상태에 놓는다면 더 자주 승객을 태울 수도 있지 않나요?" 로미 쏘온이 지적했다.
"사실이야." 로이드는 예의 바르게 맞장구쳤다. "하지만 행성에서 태어난 사람들 대부분은 내가 중력을 불편해하는 것 못지않게 무중력 상태를 못 견뎌하더군. 인공 중력 발생 장치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안 쓰려는 선주의 배에 타려는 승객은 극소수라네. 드물게 그걸 시도하는 경우에도 결국은 앓아눕거나 진정제에 절은 상태로 남은 여정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그래 봤자 소용없어. 기밀식 환경 보호복을 입고 부양식 의자를 타고 나가면 승객들과 직접 교유할 수 있다는 건 나도 아네. 실제로도 그래 봤지. 그랬더니 내 참여도는 느는 게 아니라 도리어 줄어들더군. 다들 나를 신체장애자, 거리를 두고 조심스레 대해야 하는 인물로 대하거든. 그건 내 목적과는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고립 쪽을 선호하는 걸세. 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런 식으로 내 배에 탑승한 외계인들을 연구한다네."
"외계인들?" 노스윈드가 당혹한 어조로 되물었다.
"내겐 자네들 모두가 외계인이야." 로이드는 대답했다.
- "그 어떤 인간 텔레파스도 그런 수준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네.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설령 한순간만이라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동감이야." 억센 체구를 가진 외계 공학자가 대답했다. "그런 인간 텔레파스는 존재하지 않아."
"그럼 가스 행성인의 소행이라는 건가?" 로미 쏘온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 우주선 밖으로 나가보니 마치 어떤 거대한 짐승이 별들을 한 입 베어 문 듯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멜란사 지얼은 나이트플라이어 호 곁에서 부유하는 그녀의 썰매 위에서 별들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항성 간 심우주에서도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별들은 차갑게 얼어붙은 광점들이다. 깜박이지도 않고, 준엄하며, 같은 항성임에도 불구하고 대기를 통해 춤추며 깜박이는 것처럼 보일 때보다 훨씬 더 냉랭하고 무정한 인상을 준다. 지표(指標) 역할을 해주는 주성(主星)이 아예 없다는 사실만이 그녀가 어디 있는지를 알려주는 증표였다. 사람이 탄 배는 결코 멈춰 서지 않는 항성계들 사이의 간극. 볼크린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오래된 우주선들을 몰고 느리게 나아가는 공간. 아발론의 태양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별자리들은 모두 낯설었고, 자신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도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뒤쪽이든 앞쪽이든 위쪽이든 간에, 별들은 모든 방향을 향해 끝없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래쪽, 바꿔 말해서, 그녀가 딛고 서 있는 썰매 바닥과 나이트플라이어 호 너머의 공간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이질적인 별들이 더 펼쳐져 있을 것을 기대하며. 그러자마자 그 베어 문 듯한 광경이, 거의 물리적인 힘으로 그녀의 시선을 직격 했던 것이다.
멜란사는 밀물처럼 몰려오는 현기증에 저항했다. 그녀는 나락 위에 떠 있었다.
- 검게 아가리를 벌린, 별빛도 없고 광막한 우주의 구멍 위에
허공.
그제야 생각이 났다. 저건 '유혹자의 베일', 검은 가스 구름의 집합체일 뿐이다. 딱히 무슨 실체를 가진 것도 아니고, 외연의 별빛을 가로막고 있는 은하계 규모의 오염 지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광활하다는 느낌을 넘어서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멜란사는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듯한 감각이 몰려오는 것을 자각하고 억지로 시선을 뗐다. 그것은 그녀와 연약한 나이트플라이어 호의 은백색 선체 아래에 펼쳐진 심연이었다.
- "그런데도 지금은 강하게 저들을 느낄 수 있어?"
"그건 오래전, 아주 오래 전의 얘기예요." 초심리학자가 대꾸했다.
"사념을 투사할 수 있어? 저들에게 말을 걸어봐, 애거서 저들 정체가 뭐야? 저기 중앙 부분에 있는 거야? 어두운 부분에?"
"그래요." 메리지블랙은 이렇게 대답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새되고 발작적인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드브라닌은 그녀의 몸 상태가 지극히 안 좋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요, 드브라닌, 저 중앙 부분이 맞아. 파동은 바로 저기서 오고 있어요. 문제는 당신 생각이 틀렸다는 점이지만 저건 '저들'이 아냐. 당신이 찾아낸 전설은 모두 거짓말, 헛소리에 불과했던 거예요. 당신의 볼크린을 이토록 가까이서, 이토록 근접해서 목격한 사람은 역사상 우리가 처음이라고 해도 난 놀라지 않을 거야. 다른 목격자들, 당신의 그 기록들을 남긴 외계인들은 단지 저 존재를 느꼈을 뿐이라고요. 먼 곳에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이나 계시를 통해서 볼크린의 성질에 관해 조금 느꼈던 거고, 그런 인상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해석했던 거죠. 우주 함대, 전쟁, 영원히 우주를 나아가는 종족, 그런 것들은 모두 모두-"
- "그렇겠죠." 메리지블랙이 말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죠?" 그녀는 갑자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처럼 느낄 수가 없어서 그래요. 지금은 정말 뚜렷하게 느낄 수 있어. 평소 텔레파스들은 이렇게 느끼는 거군요. 특히 에스페론을 잔뜩 주사한 텔레파스는."
- 2017 년에 은행나무에서 출간된 <조지 R. R. 마틴 걸작선-꿈의 노래>를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잘 알겠지만, 마틴은 HBO의 대하 판타지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원작인 <얼음과 불의 노래>(1996~) 시리즈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훨씬 전인 30대 시절부터 이미 SF작가로서 부동의 명성을 쌓고 있었다. 특히 <천 개의 세계(The Thousand Worlds)> 시리즈로 명명된 미래 역사를 구성하는 <샌드킹>, <십자가와 용의 길>, <스톤시티>, <비터블룸> 등의 단편들은 화려하면서도 서정적인 마틴 SF의 정수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어릴 적부터 사랑해 마지않던 호러 장르의 에센스 -미지의 것에 대한 동경, 두려움- 를 내포한 걸작들로 애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으며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 이 단편들 대부분이 발표된 1970년대 후반은 스티븐 킹과 피터 스트라우브를 위시한 거장들의 활약에 힘입어 미국 출판계에서 호러 장르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시기였으며, 영어로 쓰인 흡혈귀 소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극찬을 받은 마틴의 호러 장편 <피버 드림>(1982)이 처음부터 하드커버 단행본으로 출간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런 시대적 상황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세기 미국 남부의 증기선 문화를 극명하게 묘사한 <피버 드림>은 순수 호러 소설로 분류되지만, 마틴이 이 장편의 집필에 착수하기 직전인 1980년에 발표한 중편 <나이트플라이어(Nightflyers)>는 상술한 <천 개의 세계> 시리즈에 속한 SF 모험담이면서도 SF 호러의 융합 장르인 호러 SF를 처음부터 뚜렷하게 의식하고 쓰인 시금석적인 걸작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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