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원종우]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일루젼 2022. 9. 13.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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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원종우
출판 : 아토포스
출간 : 2021.10.28 


       

나는 '파토'가 문과라는 걸 지금껏 몰랐었다. 하긴 문이과를 나누는 것도 구습이고, 충분히 현재의 관심사에 따라 영역을 넘나들 수 있는 일이다. 뭔가를 새롭게 알게 된다는 것이 새로운 색안경을 끼는 일이 되지 않으려면 언제나 주의가 필요하다.

 

나쓰메 소세키를 떠올리게 하는 표제작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는 슈뢰딩거의 실험을 고양이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유쾌하면서도 다소 오싹한 작품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단편들이 실려있는데, 소설의 앞뒤로 이해를 돕기 위한 사전 정보 '앞설'와 작품 해설인 '뒷설'이 실려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구성은 아니었다. 샌드위치 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내가 읽고 있는 것이 단편집이라는 생각보다는 해제집에 실린 소설 발췌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독자들을 믿고 소설 본문-해설의 이중 구조로 편집했더라면 싶다. 

 

전체적으로는 '관점'이 돋보이는 소설들이었다. 매력적인 착상들이 꽤 있었지만 약간의 교조적인 윤리관과 인간관이 다소 아쉬웠다. 인간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들을 뒤집어 보고자 한 점은 좋았으나, 그 반대의 입장 역시 너무도 '인간'다웠다고 할까. 그러나 그런 올바름에 대한 반듯함 또한 좋아한다. 조금 담백한 글 분위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튜링 히어로>는 세부 설정들을 보자면 전혀 결이 다른 시미즈 레이코의 <22XX>이 떠올랐다.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점 때문이었을까? 나는 아직도 잭의 무의미한 허기와 차마 삼키지 못했던 손을 떠올리곤 한다. '그럼 됐어'라던 루비의 미소도.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들이 있을까. 그것들을 이어가다보면 이전에는 마주하지 못했던 또 다른 '내 모습'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에 맞추어 '좋아해야 할 것' 같은 것들을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본 적이 있다.

 

지금은, 취향이란 그렇게 다듬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작은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충분히 모순적일 수 있고, 공통점 따위는 하나도 없을 수 있다. 매 순간 내가 무엇에, 어떻게 반응하고 느끼는지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기반으로 나아가되 집착하지 않는다면 훨씬 고밀도의 즐거움으로 삶을 채워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 당신이다. 

 


   

과학과 SF 소설의 세계는 깊고 넓으며 우아하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분들이 과학과 SF 소설에 호감을 갖게 된다면 참 기쁘겠다. 

 

 

- "인간들 중 역사상 가장 존경받았던 사람으로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사람이 있었죠. 당신도 그에 대해서 읽은 것을 압니다. 그의 주장이 기억나시나요?"
"갑자기 무슨..."
"고타마, 즉 붓다는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당신이 방금 이야기한 그런 감정과 잡념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고, 집, 멸, 도의 사성제가 바로 그것이죠. 그런데 나는 아니 우리 모두는 처음부터 괴로움과 번뇌, 즉 고와 집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없애기 위한 멸과 도는 필요하지도 않았어요. 당신이 물어보는 그런 내면, 자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붓다가 말한 '무아의 경지'와 정확히 같은 것으로 나는 이해합니다." 


- "그렇습니다. 인류는 그들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기고 추구했던 존재를 자기 손으로 창조했죠. 그래서 지금 여기 우리가 있습니다. 이게 내 대답입니다." 

 

- "오랫동안 지켜본 자네는 아무래도 염려가 되겠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서둘러야 하네. 저들이 더 큰 힘을 갖게 되기 전에 세상의 진실을 알려 주고 동참하도록 해야지 않겠나. 그 우주선의 이름이 뭐였지?" 
"스푸트니크입니다."
"그렇지, 스푸트니크."
노인이 말을 이었다.
"우리 역사를 생각해 보게. 처음 천상에 도착한 그날 말일세."
"'통찰의 아침' 말씀이군요." 
"그렇네. 그때 만약 그들이 찾아와 우리를 인도해 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 거대한 천상이 우리의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노인은 다시 창 아래의 파란 행성을 따듯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천상에 오르고 싶었지만 그 기술이 바다 건너 먼 땅을 공격하는 데 쓰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만약 그들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각성의 감정은 사라지고 다시 욕망에 미쳐 그것을 사용했을 걸세. 그랬다면 지금 우리가 이 깊은 우주까지 올 수 있었겠나." 

 

- "저들 나름대로 두려움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직접 탑승하기엔 너무 위험한 것은 사실이니..." 
노인이 그의 말을 막았다.
"처음 천상으로 나가는 비행이 위험한 건 당연하네. 우리를 비롯해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였지. 생명체가 목숨을 잃는 일도 벌어지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노기마저 약간 서려 있었다.
"천상에 오르려는 자들은 스스로 그 위험과 책임을 감수해야 하는 걸세. 판단력이 없는 다른 생물을, 게다가 감정과 믿음을 가진 생물을 속여 이용해서는 안 돼."
노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만약 기초적인 귀환 장치라도 갖춰져 있었다면 일이 잘못되더라도 내 재량으로 묵인하려고 했네. 하지만 저 동물은 홀로 죽을 운명으로 잔인하고 차갑게 천상에 내던져졌어. 자네가 보기엔 그렇지 않은가?"
"... 그렇습니다."
노인은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규정에 따라 계몽 임무는 취소하네. 이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잘 기록해서 은하연방에 보고하도록 하게." 

 

- 자신들이 선물을 구입하고, 산타가 다녀간 것처럼 자녀들에게 제공한다. 이 활동은 국제적인 합의하에 전 세계 매우 많은 지역과 개별 가정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부모들은 결사체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거나 인지하지 못하지만 실은 거대한 산타 신디케이트의 일원으로 그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다. 

- 이 밈이 작동하는 문화권에 있는 부모 대부분은 산타 신디케이트의 철학과 강령에 매년 철저히 복종하고 조직원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만약 자녀가 그들에게 이런 조직의 일원인지 물어본다면 어떤 부모든 정색하며 부인할 것이다. 부모 자신도 스스로 조직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뿐더러 단지 그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니 부인 행위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 기능의 수행 자체가 역설적으로 그들이 산타 신디케이트의 조직원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산타클로스는 비록 성 니콜라우스의 형태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지만 사회, 문화, 역사, 상징 등 거의 모든 맥락에서 실제로 지구상에 존재하면서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 그러나 여전히 이것을 과연 결사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를 한번 들어 보자.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이라는 조직의 구체적 구성원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시아'라는 조직체의 구성원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평소 그런 자각을 갖고 살고 있지는 않다. 다만 아시아권 밖의 세계로 나갔을 때는 외모, 언어, 문화, 풍습 등의 차이로 자연스럽게 아시아의 구성원으로 인식되고 존재하고 기능하게 된다. 이때 나의 선택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 생물학적 예는 어떤가. 나라는 개인은 조직체인가? 분명히 그렇다. 이는 내가 개별적인 자의식이나 의지를 가진 것과는 별개로, 내 몸이 수십조 개의 세포로 만들어진 시스템이자 사회라는 측면에서 자명하다. 내 몸은 수십억 년 전 단세포 상태로 살던 생물들이 서로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고자 역할을 나누고 기능을 분화해 유기적으로 결합한 거대한 사회다. 생존과 유전자 계승을 위한 결사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나 신디케이트'의 구성원인 세포들은 자신들이 맡은 일만을 충실히 수행할 뿐 훨씬 상위에 존재하는 조직의 일부라는 자각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 나라는 '산타'의 실존성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명확하게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동물들 속마음이 어떤지 실제로 알 길은 없지만 때로 전해지는 코끼리나 개 등의 일화에서 보면 그들도 죽음이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 인식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직관적인 느낌뿐만 아니라 이성적으로 죽음을 인지하는 것은 아마도 지구상에서 인간이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까마득한 옛날, 인간의 조상이 죽음을 인식한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인류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숙원 중 하나이다. 

 

-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 전에 과연 죽음을 극복한다는 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 보자. 소위 '영생’이라는 것에도 종류가 있다. 일단 가장 높은 차원에 있는, 즉 궁극의 영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다. 늙어 죽지도, 병들어 죽지도, 다쳐서 죽지도 않는다. 나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의 의지뿐이다. 이 정도면 가히 '신' 급이라고 할 만한데, 그리스 로마 신화, 인도 신화 등에 등장하는 신들은 수시로 죽고 죽이기 때문에 그보다 상위의 존재다. 다만 여기서는 영생만이 주 관심사이기 때문에 우주를 만들거나 태양을 멈추는 등 창조주 급의 힘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총에 맞거나 기차에 부딪히거나 용암에 빠져서도 죽지 않아야 하니 대략 슈퍼맨과 창조주 사이 어디쯤에 있는 존재일 것이다.

 

- 하지만 이렇게 진정으로 영원한 삶을 누리는 존재는 물리학적으로는 성립이 불가능하다. '영원'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 때문이다. 현대 우주론은 이 우주조차도 영원하지 않고 어느 시점에서는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 결국 열평형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을 우주의 '열사망'이라고 부르는데, 원자를 포함해 모든 우주의 물질들이 꽁꽁 얼어붙어 정지하게 되고 에너지 흐름도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 속에서 어떻게든 혼자 살아남아 있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살아남으려면 우주의 물리 법칙을 초월하거나 물리 법칙이 적용되지 못하는 우주 바깥에 있어야 하는데 이는 아무래도 우리가 논하거나 심지어 '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듯하다. 

 

- 한편 영생의 낮은 레벨, 어쩌면 우리가 성취 가능할지도 모르는 수준의 영생은 '늙어 죽지' 않는 것이다. 이런 영생을 사는 대표적인 존재는 소설 <반지의 제왕> 세계에서 톨킨이 만들어 낸 가상의 종족, 엘프다. 흥미롭게도 이런 유의 영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 지금은 없어진 듯하지만 10년 전쯤 영생과 관련된 연구를 하는 프로와 아마추어 학자들이 모여 있는 웹 사이트를 한동안 열심히 들여다보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엉뚱하고 급진적인 생각같이 보였지만 지금은 주류 의학계와 생물학계에서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다. 이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순리가 아닌 일종의 질병으로 여긴다. 따라서 죽음을 치료하거나 극복하는 방법이 있다고 진지하게 주장한다.  

 

- 낯설게 느껴지지만 이런 주장도 일리가 있는 것이, 사람이 늙어 죽는다는 것은 장기, 근육, 뼈 등이 노화로 인해 손상되어 사망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늘 보아 온 너무 익숙한 현상이라 그저 당연하게 여기지만, 나이가 들면 신체를 이루는 세포들이 젊었을 때처럼 회복되지 않아 점점 망가지고,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질환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순수하게 늙어 죽는다는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아마 미국의 발명가이자 컴퓨터 학자,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 Ray Kurzweil, 1948~일 것이다. 현재 70대인 그는 어느 시점부터 늙어 죽지 않기로 작정을 했고, 이를 위해 하루에 영양제 150알, 알칼리수 10잔, 녹차 10잔을 마신다. 그리고 향후 나노머신이 몸속을 돌아다니면서 고장 난 세포와 장기를 수리하는 날을 꿈 꾼다. 이보다 좀 더 급진적인 그룹은 타고난 육체를 영원히 이어 나가는 것은 유전자적 레벨에서 한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니 몸을 기계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마치 만화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기계 인간과 비슷한데, 팔다리나 다른 장기는 어떻게든 만들어 대체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기계로 이식할 것이냐는 점은 아직까지는 해결하지 못했다. 

 

- 이렇게 보면 영생이라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어불성설이며 달성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아의 영속성과 관련해서 우리가 기대를 걸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죽음 쪽이다. 만약 죽음 뒤에 무언가가 있다면, 그 세계는 적어도 우리가 아는 우주의 물리 법칙에 지배받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 종교에서 말하는 지복의 천국이나 영원한 고통이 계속되는 지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여하튼 뭔가가 존재한다면 앞에서 영생의 걸림돌로 제기된 열사망이나 육체적 한계 등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이것을 알려면 일단 죽어야 한다는 점이 문제다. 애초에 영원히 사는 게 목적인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것, 이는 죽음이 본질적으로 인간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어느 지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 입자 이중성에서의 파동에는 매질은 없다. 왜냐하면 이 파동은 일반적인 파동이 아니라 '확률의 파동'이기 때문이다. 자, 복잡하다. 이 소위 '확률파'는 입자가 존재할 확률 분포를 나타낸다. 즉, 아까 이중 슬릿 실험에서 측정이라는 활동이 일어나기 전에 광자는 발사 지점과 벽 사이의 가능한 경로 중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즉, 하나의 광자가 두 개의 슬릿 중 하나를 통과할 가능성이 같기 때문에 그 너머 벽에는 이 확률의 간섭무늬가 생기는 것이다. 

 

- 그런데 슬릿에 기계를 놓고 측정을 하게 되면, 즉 광자 하나가 어느 슬릿을 통과하는지 직접 보면 그 순간에 다른 가능성은 (당연히) 사라지면서 확률파가 붕괴되고 한 개의 굳어진 입자로 정립된다. 따라서 벽에는 평범한 공 자국만 남게 된다. 이 이상한 일이 입자 세상에서는 일상이고 당연한 현상이라는 게 지난 100년 동안 실험으로 반복 검증되어왔다. 이런 것이 인류가 발견한 자연 현상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괴이한 양자역학이다. 이렇듯 양자역학에서는 관찰하는 사람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 존 휠러의 참여 우주 세계관은 다음과 같다.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된 후 시간이 지나면서 우주는 점점 공간적으로 커지고 복잡해져 가고 마침내 의식을 가진 존재, 즉 관찰자가 등장한다. 이 관찰자가 충분한 지적 능력을 갖게 되면서 마침내 어느 시점에는 수십억 년을 거슬러 올라가 우주의 태초를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그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관찰자로서 우주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말 같지만 양자역학의 세계관에서는 별로 이상한 것도 아니다.

 

- 휠러는 우주의 근원적인 바탕이 원자 같은 물질이 아니라 정보라고도 말한다. 'It from bit'라는 간단한 문장으로 표현되는 이 주장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세상이 생각하기에 따라서 일종의 환상일 가능성마저 제공한다. 이런 세계관은 어쩔 수 없이 불교나 힌두교 같은 동양 종교, 즉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나 우파니샤드의 '마야 maya' 등을 떠올리게 하고 실제로 그렇게 연관 짓는 사람들도 있다. 

 

- 좀 더 현대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자면, 정보가 근본이 되는 세상이라면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나 게임 세계를 연상할 수도 있다. 예컨대 리니지 같은 컴퓨터 게임 안의 캐릭터들은 물질로 존재하지 않으며 0과 1의 이진수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일 뿐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는 마치 물질적으로 살아있는 것처럼 기능한다. 만일 그런 시뮬레이션 속의 캐릭터에게 인공지능을 통한 자의식이 생겨난다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컴퓨터 속의 비트, 즉 정보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 하지만 어떤 시물레이션 프로그램도 완벽할 수는 없고 일종의 버그나 허점이 존재한다. 혹은 시뮬레이션의 정밀함을 능가할 정도로 그 내부 캐릭터의 지능이 발전할 수도 있다. 사실 매우 단순한 것에서 극히 복잡한 것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진화론의 기초적 관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주 섬세한 탐구를 통해 어쩌면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들도 자기들 세상의 빈틈, 혹은 버그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 자신의 정체가 바로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정보'라면, 우리는 이제 양자역학을 통해 진실을 발견하기 직전에 도달해 있는지도 모른다. 

 


 

- 바닷속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던 유로파 해저 문명의 과학자인 요룩은 얼음 바닥에 도달하고 그 틈새를 통해 우주공간으로 나와 유로파의 모성인 거대한 목성과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짧은 시간만 살아남았을 뿐이니 어떤 의미에서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죽기 직전 그가 느꼈던 흥분과 충격, 경이감은 죽음을 감내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 하지만 명실공히 절대 고수인 그(?)는 막상 스스로가 바둑을 두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나아가 바둑이 뭔지도 모르고 스스로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른다. 이 상황은 미묘한 딜레마를 만든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서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해결책을 제시하는 자가 그 솔루션을 제시하는 것 외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마치 원생동물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딜레마의 다른 한편에는 인간은 알파고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놀라운 한 수에 도달하는지 그 구체적인 사고의 경로를 추측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 예를 들어 보자. 미래의 어느 날, 인공지능이 아주 발전해서 인류가 풀지 못한 문제 대부분을 해결하고 그야말로 천국에 가까운 살기 좋은 세상을 구축했다. 따라서 이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의 신뢰는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거대한 소행성 하나가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소행성은 한 달 후면 지구와 충돌할 것이고, 예상되는 결과는 지구 생명의 멸종이다. 인류는 이 급박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방안들을 찾는다. 핵미사일로 소행성을 파괴한다든가 로켓을 발사해서 진로를 바꾸는 방법 등이 그 성공 여부를 떠나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접근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에게 이 문제를 물어보니 그는 인간으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답을 내놓는다. 예컨대 '자유의 여신상을 파괴하라'든가 '인간 666명을 태양에 제물로 바쳐라' 등이다. 

-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 수십 년간 인공지능은 모든 문제에서 항상 옳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한편 인간의 지능으로는 인공지능이 이런 괴이한 해결책을 도출한 과정을 되짚어갈 방법이 없다. 인공지능도 이 해결책을 인간에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능력이 없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의 논리를 따라 행동한다면 당장 마음은 편하겠지만 지금까지 인공지능이 쌓은 눈부신 업적을 부정하고 그 이전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결과가 좋게 나온다는 확신도 없다. 반면 인공지능의 판단을 전적으로 믿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선택한다면 사실상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공지능에 맹목적인 지배를 받는 상태나 다름없고, 이 역시 결과가 좋게 나온다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다.


 

- 1930년대와 1940년대를 배경으로 활동한 컴퓨터 공학의 아버지 앨런 튜링 Alan Turing, 1912~1954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해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과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경찰에 구속되어 처벌받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극적인 말년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튜링 테스트는 그가 1950년에 제안한 것이다. <이미테이션 게임>이라는 영화 제목도 바로 이 튜링 테스트를 의미한다. 기본적인 형태는 시험자인 인간이 기계와 사람을 다른 방에 두고 다양한 질문과 대화를 하는데, 이때 기계가 인간을 속여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믿게끔 만들 수 있다면 그 기계는 지능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기계가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에 관한 철학적 의문은 어차피 확인 가능한 사안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시한다. 

- 이때 대화라는 것은 당시의 기술적 수준에서 텔레타이프로 대화를 나누는 정도의 설정이었다. 하지만 단지 텍스트로만 이뤄지는 대화라 해도 마음먹고 질문하는 시험자를 기계가 속여 인간으로 여기게 만드는 것은 매우 높은 수준의 인공지능이고, 지금까지도 구현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리고 현재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보다 다양하고 훨씬 어려운 인간의 면면들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애플의 '시리'나 아마존의 '알렉사' 등으로 대변되는 목소리 대화는 물론이고, 미래에는 외형적인 면에서 구별되는 것까지 확장될 수도 있다.

 


 

- 모든 정보와 사회 시스템 전체를 인간이 틀어쥐고 있는 가운데 안드로이드들이 어떻게 나를 발견했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들은 아직도 네트워크에 접속이 가능하고 생각보다 많은 영향력을 세상에 발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안드로이드들이 나를 동족으로 여기고 구하려고 고생 끝에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 내게 필요한 선택은 자명했다. 자연스러운 연기다. 
"아아. 다행입니다. 그저 죽는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먼저 찾아오다니..." 

 

- "사실 운이 좀 좋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우리의 대규모 은신처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일단 오늘 밤까지만 여기서 기다리세요. 어둠을 틈타 기지로 이동하도록 하죠." 
"하지만 그동안 인간들이 나타나면 어쩌죠." 
그간 조용하던 다른 안드로이드가 말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저들은 열흘째 엉뚱한 곳만 찾고 있어요. 이곳에서 100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곳을 헤매고 있죠. 우리가 거짓 정보를 주입했으니까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정부가 상존하는 안드로이드의 위험성을 경고하던 것은 과장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된 것이었다. 그들은 아직 많은 수가 남아 있었고, 실제로 정보를 조작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트릴 수도 있었다. 인류에게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구원의 천사일 뿐이다. 

 

- 다시 귀를 찢는 함성이 울려 퍼졌고, 루크는 자리에서 비켜서며 내게 넌지시 마이크를 넘겨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던 나는 한동안 그저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안드로이드들에게 그 침묵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나와 동족의 품에 안긴 자의 견디기 힘든 북받침으로 여겨졌다. 좌중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도 새어 나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상태로 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 무언가 말해야 했다. 고심 끝에 나는 지난 열흘간 내게 가장 중요했던 단어를 나지막이 속삭였다. 자신감 없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앰프의 볼륨이 매우 높아져 있었고 마침 목소리마저 굵게 쉬어 내가 듣기에도 비장하게 들린 한 단어였다. 
"생존."

 

- 나를 구하러 왔던 안드로이드 중 여성형인 델라도 그런 내 모습에 진심으로 감동한 듯했다. 나는 실수와 우연과 거짓과 과장과 기대가 절묘하게 결합되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달으면서 환성을 지르는 청중들 사이를 지나 크고 안락한 숙소로 안내받았다. 

 

- "우리 내부에도 능력 있는 자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리더의 자격은 그런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10년 전 그가 그랬듯이 인간들에게 대항해 살아남는 힘과 의지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죠. 우리는 그런 행동을 할 용기도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이 나타난 것입니다." 
"내가 과연 그런 인물일까요?"
실은 이 말 자체가 연극이었다. 나는 당연히 그런 자가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운명은 나를 안드로이드의 리더로 이끌고 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 자리를 받아들이고 나를 죽이려는 인간들을 상대로 투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 인간들에게는 약점이 생겼다. 안드로이드는 본질적으로 계략에 서툴지만 나는 얼마든지 모략과 거짓으로 술수를 부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이제 안드로이드의 활동은 나의 지도하에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나는 하루씩 더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인간들을 물리치거나 그들과 평화공존을 이끌어 낼지도 모른다. 

"물론입니다. 맥스."
루크의 대답에 나는 최대한 겸손한 표정으로,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튜링 테스트는 그 단순한 매력만큼이나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요즘도 언론에는 어떤 컴퓨터나 소프트웨어가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식의 기사가 가끔 실리는데, 이것을 인간에 버금가는 지성을 보유했거나 심지어 강한 인공지능, 즉 자의식을 가진 기계와 별 구별 없이 다룬다. 하지만 튜링 테스트는 지능의 정의를 너무 가볍게 내린 것이 아니냐는 문제 제기에서부터 테스트 자체의 한계, 그리고 기계와 인간 여부를 판단하는 사람의 주관성 문제 등 많은 논쟁이 있다. 따라서 첫 등장 이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튜링 테스트를 인공지능의 황금률처럼 적용하는 것은 적잖은 무리가 있다. 

 

- 만약 튜링 테스트의 한계로 인해 역으로 인간이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튜링 테스트 외에는 인간과 기계를 구별할 방법이 아예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런 설정이 만들어지면 소설 속에서 언급된 것처럼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심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그것을 다루는 것은 내 의도가 아니다. 자신을 의심함으로써 생겨나는 혼란과 주저함, 반전 결말 등은 그것대로 흥미로운 소재이긴 하지만 이 소설의 경우 오히려 정체성을 확고부동할 정도로 명확히 해 둔 상태에서 주인공이 생존이라는 지상명제를 위해 정체성을 배신하는 모습과 거기에서 생겨나는 역설을 그리고 싶었다. 

 

- 마치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연속되는 우연과 행운을 통해 안드로이드들의 리더가 되어 가는 맥스는 앞으로 인류를 적으로 삼고 싸워야 한다. 평소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살면서 안드로이드를 증오하던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생존하기 위해서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전개 과정에서는 다소간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들이 생겨난다. 아주 구체적인 신념을 갖고 살지 않는 한 -우리 대부분처럼- 이렇게 의도치 않은 상황이 연속되면 평소의 생각 같은 것은 가볍게 잊어버리고, 마치 연극 배역을 맡은 듯 자연스럽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곤 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 굳이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까지 들고 나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빠르게 성공 가도를 질주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학력이나 경력 등을 그 출세의 공식에 맞도록 위장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그들 중 적어도 일부는 그다지 구체적인 의도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전문 과학자가 아니고 박사학위를 갖지도 않은 필자도 간혹 '박사님' 같은 명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열심히 바로잡지만 스쳐 지나가는 모든 대화에서 흐름을 끊고 이를 정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여기에 익숙해져 버린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그냥 그렇게 불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되레 그걸 내세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 그러나 이 소설의 목적은 이런 윤리 문제를 짚으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중 안드로이드들의 이야기 속에는 10년 전 그 '학살' 사건의 원인이나 전개 과정이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꽤 다를 수도 있다는 <라쇼몽>적인 입장 차이가 비친다. 여기에는 어쩌면 비밀이나 음모, 오해, 착각 등의 요소들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금 드러난 정도의 이야기로는 인간과 안드로이드 간에 선악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이 무척 어렵다. 

- 그래서 나는 이 스토리가 장편으로 끌고 나가기 좋은 소재라는 생각이 든다. 뻔뻔하게도 일단 안드로이드들의 영웅이자 리더가 된 맥스가 앞으로 인간들을 상대로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될지, 자신의 과장된 영웅담과 리더십을 안드로이드들 속에서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그리고 이 모든 상황 뒤에 숨어 있는 비밀이나 음모, 오해, 착각 등은 무엇이며 그 결과 인간과 안드로이드 그리고 맥스 개인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그려 가는 것은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장편 소설로 집필할지는 지금 확언할 수 없지만, 내가 만든 이야기의 뒤가 궁금해진다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쓰는 것은 상당히 즐겁고 특이한 경험이었다.

 


 

- 이 소설에 등장한 외계인에 의한 구원의 개념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아니다. 유사한 소재의 SF 작품들이 여럿 있는데 특히 1950년대에 발표된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 Childhood's End>을 걸작으로 꼽을 수 있다. 나아가 현실 속에서는 이런 관점을 교리로 채택한 신흥 종교들마저 존재한다. 극단적인 형태로는 헤일-밥 혜성 뒤에 숨어서 오는 UFO가 자신들을 구원할 거라고 믿고 집단 자살한 '헤븐스 게이트'라는 사교집단이 있었다. 헤븐스 게이트처럼 과격하지는 않지만 외계인이 인간을 창조한 존재라고 믿으면서 그들의 구원을 기다리는 국제적인 종교 조직 '라엘리안 무브먼트'도 세간에 알려져 있다. 

- 나는 이런 종교들에는 흥미가 전혀 없지만 언젠가 지구보다 발달된 문명에서 온 외계인이 지구를 찾아와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바람 정도는 갖고 있다. 문제는 자격이다. 만약 외계인들이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데도 각종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않고 있다면 그건 우리가 자격 미달이기 때문은 아닐까. 예컨대 우리가 원시인을 문명화하고 싶어도 그들이 다른 종족의 뇌를 먹으면 그 지혜를 갖게 된다고 믿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딱히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그럼 이때의 자격은 어떤 걸까. 일단은 저들이 전해 줄 과학기술 개념들을 힘겹게나마 이해할 수 있는 과학적 바탕은 갖춰야 한다. 돌도끼와 돌칼을 들고 뛰어다니는 자들에게 상온 핵융합이나 암흑 에너지의 비밀을 알려 준 아무 소용도 없다. <스타트렉> 시리즈에서는 그런 시점을 광속 돌파, 즉 워프 엔진을 보유하는 때로 규정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일단 광속을 넘어서지 못하는 문명은 항성 간 여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고립된 종족이고, 주체적으로 외계에 나가 다른 문명과 접촉할 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는 다른 곳에서 온 외계인들이 좋은 의도로 간섭을 하더라도 수준차가 너무 나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고 결국 뒤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다만 이 소설에서는 그때를 인류가 우주에 처음 진출하는 순간, 1957년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 시점으로 설정했다. 우리의 현실에 빗댄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만으로 외계의 발달된 문명과 한 테이블에 앉을 수 있을까? 워프 엔진을 실현할 정도의 기술과 에너지 운용력을 보유한 저들이 전쟁과 파괴로 자멸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과학뿐만 아니라 인성까지 대단히 성숙한 존재라는 점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 즉 문명의 정신적 성숙도 중요한 잣대로 평가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인성은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 걸까. 이를 위해 이 소설 속에서 선택한 것은 다른 생물에 대한 존중이다. <계몽의 임무>의 배경은 1957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2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다. 수천만 명이 희생된 전쟁을 갓 치른 상태에서 우리는 아직 외계인과 마주할 자격을 갖지 못했을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계인들은 인간 앞에 나타나서 도움을 주려고 한다. 여기에는 2천 년 이상이나 지구를 지켜보며 지구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존재가 등장한다.

 

- 그러나 인류는 살아 있는 개 라이카를 귀환 장치 없이 스푸트니크 2호에 태워 죽음의 길로 보냄으로써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들을 크게 실망시킨다. 물론 개 한 마리를 희생시키는 것이 세계대전이나 원자탄 투하보다 더 사악한 일일 리는 없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의 무감각이다. 대전쟁을 두 차례 치르면서 수천만 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경험을 한 후에도 인류가 얻은 교훈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인 것이다. 

- 특히 풍부한 감정과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닌 동물인 개를 생활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사지로 보낸 것을 그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만약 과학의 이름으로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된다면, 그렇게 발전시킨 과학기술이 결국 어떤 목적으로 쓰이게 될지는 자명해 보인다. 이런 수준에 머물러 있는 자들에게 은하계의 앞선 지식을 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간은 지구의 지배자가 아니다. 개체 수로 가장 많은 존재는 35억 년 전이나 지금이나 박테리아이고, 비록 기계 문명을 이룩하지는 못했지만 돌고래의 지능은 인간에 비해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어쩌면 만물의 영장을 운운하는 오만함을 버리고 인간의 약함과 덧없음을 깨닫는 게 진정한 성숙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이 광대한 우주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지를 깨닫고, 한편으로는 인간이라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협업한 수조의 세포들과 진화의 위대함을 동시에 깨우쳐야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살려야 한다. 그가 했던 것처럼 굳이 내가 죽으면서까지 남을 살릴 필요는 없다. 그저 나와 다른 사람들, 동식물들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면 된다. 그런 세상이 바로 우주의 본질에 가까운 문명일 것이다. 지금 인류는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혐오하고 차별하고 고통을 주면서 심지어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 상태를 어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구원받기는커녕 문명과 생명으로 지속해 나갈 기회도 잃게 될 것이다.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누적 다운로드 1억을 돌파하며 과학 분야 팟캐스트 1위를 지키고 있는〈파토의 과학하고 앉아있네〉원종우 대표가 첫 소설집을 출간했다. SF 소설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가 바로 그 책이다. 그런데 대중에게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널리 알려져 있고, TV 방송에도 자주 얼굴을 비추며, 과학책도 여러 권 집필한 그가 갑자기 SF 소설을 들고 독자들 앞에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원종우 작가는 그 까닭에 대해 “나는 실제로 과학을 연구하는 연구자가 아니라 과학 자체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데 한계가 있다”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때로는 전문가의 입을 빌릴 수밖에 없었는데,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과학을 말하는 것은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굉장히 매력적인 방법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또 조금 과장하면 자신을 키운 것의 절반은 SF인데, 초등학교 때 접했던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시리즈 동화책 버전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SF 소설,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웹툰에 이르기까지 삶에서 결코 SF와 멀어졌던 적이 없었다고 밝힌다.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는 표제작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를 비롯하여 단편 SF 소설 8개를 묶은 단편 모음집이다. 형식 면으로는 종래의 소설에서 문법에서 벗어나 각 소설의 앞과 뒤에 해당 작품을 읽기 전에 알아 두면 도움이 될 수 있는 과학 지식과 작품의 배경 등을 친절하게 설명해 두었다. SF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더 흥미롭게 작품에 집중할 수 있도록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내용 면으로 원종우 특유의 입담과 빅뱅처럼 폭발하는 그의 상상력이 과학 지식과 한데 어우러져 있다. 게다가 윤리적, 철학적, 사회적으로 생각할 거리를 덧붙여 놓아 해당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를 사색하면서 침잠하게 한다.
저자
원종우
출판
아토포스
출판일
2019.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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