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영도] 별뜨기에 관하여

일루젼 2022. 9. 13.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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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영도
출판 : 황금가지
출간 : 2020.10.22


       

최근 <눈물을 마시는 새>가 게임 제작에 들어가며 컨셉 아트가 발표되었다.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들과는 다르지만 무척 매력적인 그림들이었는데, 부디 성공적으로 제작되어 원작에도 다시금 높은 관심이 쏟아지길 바란다. 

 

이영도의 작품들은 특유의 세계관으로 유명하다. 각각의 작품들마다 진중함의 정도와 색깔이 다르다는 평도 있지만, 어느 작품에나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이영도식 유머는 내게는 아주 취향이다. 이번 단편집에서는 특유의 코드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아주 즐거웠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크게 '-관하여'나 '-대하여'로 맺음 짓는 '위탄'과 연결된 우주적 세계관과, 이후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각각의 동화적 세계관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SF의 정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작품 안에서만 존재하는 세계관'이 있는가라는 기준으로 볼 때 모든 작품들은 SF다. 특히 <나를 보는 눈>에서는 <눈마새>나 <피마새>의 묵직함과 분위기를 즐길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고, <복수의 어머니에 관하여>와 <순간이동의 의미에 관하여>에서는 작가의 설정을 따라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재미가 있었다. 이 두 작품은 끝까지 노력해보았지만 각각 하나 이상의 해석이 남았다. 

 

<SINBIROUN 이야기> 같은 경우는 음차 표기를 이용하는 것만으로 익숙한 단어를 낯설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 새로웠다. 유치할 법한 작명이 크게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을 '경험'해보면 현재 자신의 언어 선택과 습관에서까지 생각이 뻗어나간다. 이는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대하여>에서도 다루었던 언어에 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단편 자체만 놓고 본다면, 개인적으로는 '김필산'의 <책이 된 남자>가 떠오르는 설정이었다.

 

지금 <드래곤 라자>를 다시 읽는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눈물을 마시는 새>를 최고로 꼽지만, 그건 내가 좋아하는 특유의 분위기와 종족/세계관 설정에 꽂혔기 때문이다. <드래곤 라자>는 여러 장점들이 많으나 특히 이전까지 처치의 대상이나 워너비의 대상이었던 드래곤을 하나의 완전히 분리된 이종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다른 여러 판타지 소설들과 계를 달리 한다. 엘프나 도적, 무기 설정 같은 용어들이 <로도스도전기>나 <던전 앤 드래곤> 같은 기존 소설/게임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종 간의 교감과 라자를 잃음으로 정신적 광기에 휩싸일 정도의 깊은 동화(同化)라는 중심 설정은 독보적이었다. 그에 더해 '메모라이즈' 같은 적절한 억제 설정을 통한 밸런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더 깊게 드러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주 매력적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고찰이 녹아난다는 점, 그럼에도 그것과는 별개로 진행되는 사건과 스토리의 완성도, 캐릭터들 자체의 매력과 유머 등 읽는 이들이 각자가 가장 원하는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고 본다. 

(재독을 하고 쓰는 것은 아니므로 일정 정도 추억 보정이 들어갔을 수는 있지만, 부디 유피넬의 가호가 함께하길.)

 

이런저런 상황들로 인해 이영도 작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이 소설이 눈에 띄어 읽었다. 구매한 종이 책은 꺼낼 수 없는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개인적으로는 아쉽지만 리디 셀렉트를 통해 일독. 

SF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즐겁게 읽을 수 있으실 것 같다. 추천!

 

사족) <순간이동의 의미에 관하여>에 관한 내 해석을 정리하기 위해 다른 분들의 리뷰를 찾아보다가 <하얀 로냐프 강>의 '이상균' 저자의 블로그를 방문하게 되었다. 교복 입던 시절, 1부가 완결되고 팬심에 차서 저자분의 홈페이지에 외전을 연재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라 부끄러움과 그리움이 섞인 추억에 잠겼다. 당시 저자분이 내 글이 연재되고 있다고 공지를 띄워주셔서 무척 자랑스러웠었는데 그게 벌써 20년도 더 전이다.

... 잘 지내셨나요. 저는 그때 제가 글을 쓸 줄 알았는데요. 살다 보니 그저 그런 사람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저의 모든 리뷰에는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므로 아직 <별뜨기에 관하여>를 다 읽지 않으신 경우 스포일러가 싫으시다면 여기에서 멈춰주세요.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대하여>

 

한 언어의 멸종에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이들에 관하여.

이전에는 존재했으나 사라져 간 수많은 아름다운 언어들을 상상하며. 

 

현재 지구상에 완전히 새로운 신생 국가가 생겨나고 새로운 언어가 생겨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노령화되고 있는 것은 인구 자체만이 아니라 인류의 전체적인 문화와 사상 모두일지도 모른다. 자꾸만 새롭게 등장하는 신조어들과 세대 간 언어 격차는 태어나지 못한 언어들의 태동력이 분출되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것은 단편과는 무관한 개인적인 단상이었고.

 

외계와의 첫 조우는 개별 종족 간의 일대일 관계가 아닌, '문화교류촉진위원회(이하 문교촉위)'라는 은하 단체의 중재를 통한 것이었다. 이들은 서로 잘 맞을 것 같은 문명끼리 짝을 지워 '짝패'라는 관계로 서서히 각자의 문화를 교류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를 위해 요구된 것이 '동화'였다. 어린 시절에야 심심해서 읽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결말도 헷갈리는 헛소리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아이들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세계는 동화 속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후대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것인가? 

영어라는 거대 문화권에 흡수되고 있는 현실 속에, 그 외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가지는 의미와, 그를 통해 자라나게 될 '어른'은 어떤 모습이었으면 하는가? 

 

자칫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일 정도의 지난함.

그 몸부림들 속 어딘가에서 성장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과 같은 존재이되 같은 존재가 아니다. 

 

이렇게까지 뻗쳐나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재미있는 단편이다. 개인적으로는 지금의 저자와는 유사하면서도 상반되는 '리 선생님'을 통해 저자의 또 다른 자아를 구경한 느낌이다. 성별과 국적, 언어에 구속되어 사고하는 편견을 벗어나 즐겨보시길. 그리고 나면 다시 그 각각이 갖는 매력과 정감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때때로 나는 내가 더 큰 존재가 행하고 있는 연습의 한 순간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한 번의 완벽한 스윙을 익히기 위해 수 천번, 수 만번의 휘두름이 필요하듯이 그렇게 수행되고 있는 하나의 행위라고 생각하면 나 개인이 어떤 결과를 낳든 전체가 잘못될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성공하게 된다는 것은 정해져 있으므로, 그리고 어떤 결과든 각각의 행위에서는 무언가 배울 점이 있으므로, 나는 그저 이 경험을 향유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행위로 의식을 옮겨가면 될 일이고. 모든 순간은 동시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이거야 말로 동화 같은 환상이다. 

 



<구세주가 된 로봇에 대하여> 

 

골 때리는 로봇 일등항해사. 

라고 말하기엔 그의 말들은 충분한 의미를 담은 사유들이다. '로봇이 경험하는 악의 책임이 로봇에게 없다면 신에게 있는 것일 테니까요'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들을 담고 있다. 신학적인 통찰과 기계 윤리, 고통에 대한 직시.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행하는 행동들에 악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이 행해지는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악이 아니게 될 수도 있는가? 

 

가볍게 웃으며 읽어도 좋겠지만, 곰곰이 곱씹어보면 틀린 말은 없다는 생각이 들지도.

그런 상태가 된다면 잠시 당신의 솔라넷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머리를 식히시면 된다. 아마 한 시간도 채 안 걸릴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이영도적인 유머 코드가 잘 드러난 단편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해석으로는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것들을 인터넷의 정보에 의존해 이해하고 판단하는 행위가 얼마나 촌극 같아 보일 수 있는가에 대한 글로도 읽을 수 있다. 깊이 있고 심오한 내용을 다루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일항사가 그것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정보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점에서 가치가 있는 정보인가? 그것 자체를 안다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내가 어딘가에서 접한 정보는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정보이다. 단순한 정보는 누구에게나 같은 값을 갖는다. 그것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엮어내느냐,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더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정보들을 모으기보다 지식과 지혜를 함양하는 편이 인간에게는 더 유용한 방식일 것이다. 영어 사전이나 백과사전을 최고의 책이라고 부르지는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위키가 재미있긴 하지만) 

 

 

 


 


<별뜨기에 관하여>

 

별을 뜬다니. 아름다운 표현이다. 

별빛을 곱게 떠올리는 것 같기도 하고, 별들을 실뜨기처럼 가는 은빛 줄로 엮어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화자는 점성학자다. 그는 주로 부모들에게 의뢰를 받아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 최고의 길한 별들의 배치를 계산하고, 그 좌표를 알려준다. 그러면 부모들은 광속을 뛰어넘는 템섹 우주선을 이용해 '그 빛들이 모인 자리'에서 출산을 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의뢰는 무척 까다롭다. 예기치 못하게 조우하게 된 두 외계 문명이 생겼는데, 그중 한 문명은 아직 문교촉위와 공식적으로 교류할 상대로 인정받지 못한 문명이라 그들이 본 것이 외계인이 아닌 신이었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 사분오열된 국론 속에 문교촉위 쪽에서 지키고 싶어 하는 주요 인물은 정치적 사형을 선언받았고, 반발하는 이들과 찬성하는 이들 간에 내전이 벌어지기 직전이다. 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신의 계시'는 바로 그들의 신화 속 '화합의 신'의 모습을 그들이 '보게' 만드는 것. 

 

그러니까 그 '모습'을 떠서, 그것을 완벽하게 볼 수 있는 좌표를 알려달라는 것이 이번 의뢰다. 이전 단편에서 '짝패'로 지정된 후 50여 년이 지난 위탄인들과는 어느 정도 상대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는 잘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번 의뢰의 핵심이 위탄인들이므로, 화자는 위탄인 제르비와 함께 필요한 빛을 찾아 우주를 떠도는 중이다. 그 빌어먹을 외계인은 자기는 '잠'이란 것을 안 잔다는 이유로 '내'가 잘 때마다 불안증에 시달리다가 매번 몇 시간 참지 못하고 깨워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무척 인상 깊은 단편이었다. 이번 이영도의 단편들은 얼핏 보기엔 전혀 접점이 없는 것 같지만, 읽어보면 특정 개념을 공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별들을 이어 하나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발상은 문명들을 잇고 있는 문교촉위의 활동과도 다르지 않다. 또한 특정 위치에서의 물질의 형성이 특정 개체성을 갖게 된다는 발상은, 조금 비약하자면 <순간이동의 의미에 관하여>에서 화자가 찾고 있는 순간이동의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다. 또한 그 단편에서처럼 '소설에는 버리는 설정은 없다'라는 황금률을 십분 활용해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음을' 같은 점성학적인 결말을 매끄럽게 이끌어낸다. 

 

별들은 항상 더 큰 그림 속으로 포함될 수 있다. 화자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부모들이 바라는 아이의 행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자체를 그들의 바다로 만들어주고 싶은 화자의 바람까지도 담고 있듯이. '별들의 바다', 아름다운 마라의 바다.

 

이미 3천 년 전에 사라진 별빛을 찾기 위해 3천 5백 광년 떨어진 위치에서, 지금은 사라진 별의 빛을 뜨는 '이'.

그러나 그 별이 사라졌음이 그 고유의 빛의 발산이 중단되었다는 의미라면, 화자가 지금 보고 있는 빛은 '존재'인가 '환영'인가?

'지금'이란 결국 '관측자가 존재하는 좌표'일 뿐이지 않은가?

그 빛들이 의미가 있다면, 그 지점 또한 의미가 생긴다.

 

이미 존재하는 조건들과 사건들이 별들이라면, 그것을 이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는 당신의 일이다. 

당신의 하루. 당신의 매일처럼.  

 

 



<복수의 어머니에 관하여>

 

이 단편에 관해서는 내 안에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어떻게든 하나로 좁혀보고 싶었으나 두 가지 모두 가능한 해석이라 어쩔 수 없었다. 

 

화자가 직접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단편은 어떤 면에서는 <아름다운 전통>의 거울상이기도 하다.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구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화자는 선장의 아들 대신 외계인 과학자를 선택했다. 그런 화자를 용서하지 못한 선장은 그를 납치해 계속해서 죽이고 또 죽이고 있다. 방법은 꽤나 SF적이다. 

 

그를 복제해서 죽이고 있는 것이다. 원본인 그를 두고 그의 복제들만 죽이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 자신의 죽음을 되풀이해서 보며 느낄 공포와 정신적 외상을 의도한 것일 수도 있고, 최적의 방식을 찾을 때까지 '연습'한 후 최고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미 스물여섯 번의 '나'의 죽음을 경험한 화자는 선장이 이 미친 짓을 멈출 생각이 없다면, 그가 선장을 멈춰야 할 때라고 결심한다. 

 

그리고 화자가 살렸던 외계인 박사가 이 우주선을 추격해와 도어를 열었을 때 발견한 것은 '두 명의 선장'이었다. 

 

이에 대한 당신의 해석은 무엇인가?

 

첫 번째 해석은 이러하다. 선장은 아버지로서가 아닌 선장으로서 그가 보호해야 할 승객을 선원에 우선하여 살렸다. 그러나 그 안의 아버지로서의 부분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고, 결국 분열한 자아는 자기 자신을 복제해가며 살해-자살 중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화자가 선장을 자신이라 인식하지 못한 부분은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 '아버지'로서의 자신은 이미 그가 버린 부분이므로 그로서는 아무 연결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선장과 화자는 한 명의 육체 안에 분열된 두 자아이므로, 박사가 발견한 현장에 세 명의 선장이 아닌 두 명의 선장이 존재했던 것도 설명된다. 

 

두 번째 해석은 이러하다. 선장과 화자는 각자의 육체를 가지고 존재했다. 물론 화자는 선장의 복제가 맞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의 의문점은 그렇다면 어째서 그의 첫 번째 복제는 선장을 자신의 원본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가 거울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는 스물여섯 번의 자기 살해를 겪으며 그 시신들이 '자신'이라고 인식했다. 그렇다면 선장의 외모가 자신과 같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이들은 모선에서부터 두 명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는 어느 우주선에서나 제3 세탁실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반드시 백업이 존재해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여분의 신체를 확보해두기 위한 필요성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여러 위험이 존재하는 업무에서 선장은 자신의 백업을 '의식이 있는 상태로' 존재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 기억과 경험이 전달되는 것은 아니므로 화자는 선장과 자신을 다른 개체로 인식할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화자는 선장의 슬픔을 타자로서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복제가 거듭될 수록 '자신'이라고 느껴지는 범위가 변화하는가 하는 점을 함께 고민해볼 수 있다. 선장이 스스로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 선택'을 내린 자신의 복제는 살려두고 복제의 복제를 죽이는 것은 화자까지도 자기 자신이라고 인정했다는 의미일까? 그렇다면 화자가 복제들을 '자신'이라고 인지한다는 점과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개인적으로는 두번째 해석이 더 마음에 드는데, 이 해석의 가장 큰 맹점은 역시 선장과 복제들 간의 '자기 인식' 범위일 것이다. 만약 선장은 이미 나이를 먹은 상태이고 (아들이 선원으로 탑승했으므로) 복제들은 젊은 상태에서 깨웠다고 가정한다면 이들 간의 인식 차이는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박사가 곧바로 '두 명의 선장'이라고 인식했다는 점은 어떨까. 그것은 그가 위탄인이기 때문에 '개체의 본질'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무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일까. 

 

깔끔하게 좁혀지지 않아 더 재미있었던 단편이었다. 일종의 심리 트릭이 압권인 단편을 해석을 쓰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스포해버려서 무척 안타깝지만, 이미 다 읽으신 분들이 오셨으리라 믿어본다.

 

당신의 해석은 무엇인가요?  

 

 



<순간이동의 의미에 관하여>

 

이 단편 또한 생각이 정말 많아지게 만드는 단편이었다.

 

대부분의 영화나 소설에서는 불필요한 정보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이 실제의 일상과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가 연결이 되지 않는다면 장면의 전환, 혹은 다른 정보를 가리기 위한 은폐나 착오 같은 목적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순간이동의 의미에 관하여>에서는 이 잘 알려진 사실을 훌륭한 장치로 이용한다. 

 

'배인가, 비행기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어느 쪽이 주체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것은 의식이란 물질에 종속된 것인가, 물질을 구현할 수 있는 주체인가하는 질문이기도 하고

수인과 다인의 연결성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순간이동. 

순간이동에서 공간의 변화를 제거하면 한 존재가 분해되고 재구성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부터는 실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동일한 구성의 물질을 재구성하기만 하면 그것들은 모두 '나'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이전 단편들에 등장했던 '복제'에 가깝다. 순간이동이란 하나의 구성체는 한 번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못한다는 가정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이동'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으로 나의 위치가 변경했다는 말은, A라는 지점에서의 나의 죽음과 B라는 지점에서의 부활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나'라는 존재의 '연속성'을 발생시키고 있느냐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순간이동은 영생의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수인의 말처럼, 그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려면 '영원히' 관찰해야 한다. 영우가 상상하는 것처럼 시간선마저도 공간처럼 '이동'할 수 있게 된다면, 다시 말해 개체의 소멸과 생성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순간이동'이 아니라 '부활'이 된다. 그러나 이 단편 속에서 인물들의 순간이동은 그야말로 찰나의 불연속성만을 가질 뿐이다. 물론 그 찰나에 그들이 '어디에' '어떤 상태로' 존재했느냐가 핵심이 되겠지만 말이다. 

 

내가 이 단편에 대해 내놓을 수 있는 해석은 두 가지다. 

 

첫 번째, 순간이동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 이전과 후의 두 존재가 '같은 존재'라면 그 존재를 '그'로써 존재하게 하는 것이 존재하며 물질의 이동이 아니라 그 '코어'가 지구를 기준 좌표로 삼아 자신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에 의해 물질은 재구성된다는 것. 지구의 대기 속에 필요한 재료들은 거의 언제나 충분히 존재하니까. 그렇다면 이동이 가능한 시간축의 범위는 '지구'의 존재와 구성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두 번째, 순간이동은 동인(動因)을 지정할 뿐이라는 것. 가장 핵심이 되는 '나'라는 존재의 정수. 그것이 선택한 위치에 따라 다른 것들은 끌려오게 되어 있다. 그것이 '스스로' 결정한다면.

 

그렇다면 이에 따라 해석될 수 있는 수인과 다인의 관계성도 두 가지이다.

 

첫 번째, 다인은 수인의 순간이동으로 인해 살아남게 되었으므로 수인이 존재해야만 다인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이전까지 스스로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숨는 법이라던 수인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다인을 보호하기 위함일 것이다. 패러세일링 중이었던 다인이 항해 중인지 비행 중인지를 묻는 것은 앞으로 그녀들의 관계를 암시한다. 이는 예인의 질문을 통해서도 다시금 강조된다.

 

두 번째, 수인은 과연 어디로 이동했던 것일까?

'여자 한 명과 낙하산 한 개가 넋이 빠져 있는 나를 폭격했다'.

'그리고 낙하산 아래에는 수인 누나와 다인 누나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앉아 있었다.'  

다인은 스스로 순간이동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수인은 다인과 자신의 위치를 맞바꾼 후 그녀보다 더 낙하한 뒤 돌아온 것일까, 자신과 다인을 완전히 융합해 이동한 후 다시 분리한 것일까?

 

'항해를 하려면 그냥 배에 타는 편이 낫지 않아?'

 

지금 당신의 삶을 끌어나가고 있는 것은 배인가, 당신인가, 물결인가? 

 



<나를 보는 눈>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분위기의 단편이다. 이영도의 글에는 드물지 않은 남성 현인이 등장하는데, 카알이나 핸드레이크, 조금 더 폭을 넓히자면 케이건 드라카 등도 해당한다. 보늬나 나늬, 이루릴 같은 여성적 신비함과는 다른 인간적 경험을 통한 현명함이다. 그의 캐릭터들을 아르카나 적으로 뜯어보는 것도 꽤 즐거운 작업이다.

 

단편 이야기로 돌아오면, <나를 보는 눈>에 등장하는 설어나 겨울 같은 설정은 작품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한껏 강조하고 있다. 마치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한 상세한 설명은 독자로 하여금 이런 생물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 생김새를 그려보게 만든다. 작가가 작품 안에서 드러내지 않은 것은 바람색칠과 세 왕국의 멸망이다. '노래'가 힘을 가지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세계는 드물지 않지만 언제나 아름답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소리꾼들은 그 자질을 타고나지만 그것을 각성하거나 훈련하는 단계가 필요할 것이라 본다. 그리고 바람색칠이 본문 중 설명되는 것처럼 최고의 소리꾼이라면, 그녀가 첫 노래를 불렀을 때 하나의 왕국이 멸망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아직 어렸던 그녀가 그 인과관계를 깨달을 때 쯔음이 되어서야, 그것들이 진실로 자신으로 인한 것임을 이해했을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미 세 왕국이 멸망했다는 걸.

 

(그러나 불찌꺼기가 귀를 막는 정도로 피해 갈 수 있었다면, 그리고 모든 소리꾼들은 파멸의 노래밖에 부를 줄 모른다면, 왕국은 어째서 그렇게 허무하게 멸망했던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것이 바람색칠이 지나치게 강력했기 때문인지, 불찌꺼기가 마법사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파괴와 멸망 뿐이라는 듯한 시니컬함. 

그럼에도 봄은 올 수 있다는 희망. 

완전히 새로운 종족 간의 화합과 더 큰 '나'를 통한 자기 인식. 

 

인류에게 모서리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이어야 한다. 

언제나 지금이어야 한다.

 

그것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그러하다. 

 



<아름다운 전통>

 

이런 깔끔한 비틀어보기.

그리고 보면 그 '전통'이란 대체 어디서 왔던 걸까?

 

수많은 것들이 유일무이함을 내세우고 있지만 세상 어디에서도 나밖에 모르는 건 나뿐이다. 

 



<전사의 후예>

 

짧고 강렬하다. 

'진압봉'이라는 단어에 안도의 한숨이 나올 줄이야.

 

서로의 눈이 마주치던 시대의 전투란, 무엇이 되었건 당신이 상상했던 것 같지는 않았으리라. 

 



<SINBIROUN 이야기>

 

신비로운 이야기. 표기법을 조금 바꾼 것만으로 색다른 느낌을 준다. 

'믿는다'는 행위 자체가 힘을 실어준다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이해와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봄이 왔다>

 

내게는 초여름의 느낌으로 다가온 단편.

이런 느낌도 좋았다. 이번 단편들에서는 독자들이 자신의 고정관념들로 인해 각자 다른 해석을 하게 되는 일종의 심리 트릭들이 많아서 즐거웠다. 내가 많이 낚였다는 뜻이다.

  

이 단편이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으면, 혹은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복잡한 마음. 

 

 


 

당신의 삶이 당신의 우주에 바치는 경의이길

 


   

 

- 문학 종사자들은 뒤통수를 강타하는 듯한 문장, 심장을 어루만지는 듯한 문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같은 비유법을 쓴다면 내가 악전고투 끝에 번역한 <카이와판돔>의 첫 번째 문장은 거친 백태클을 당하는 듯한 문장, 레드카드를 꺼내고 싶어지는 문장이다. 

 

-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예, 세가 더 큰 말투를 따라갈 수밖에 없지요."

"지구상에서는 영어가 그런 횡포를 부리고 있어. 이 사전을 봐. <은하표준어-영어 사전>이야. 전담위원들도 결국엔 이해하기 더 쉽다는 이유에서 영역본을 먼저 집어 들걸. 그리고 영어 사용자의 사고방식으로 이 동화를 이해할 테고. 이게 동화가 맞는지는 의심스럽지만."

 

- 사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외계인만큼이나 이질적인 자들의 방문을 경험했다. 그들은 고통과 함께 찾아오며, 도무지 의사가 통하지 않고, 우리의 안정된 생활을 서슴없이 파괴한다. 당신이 재생산 경험이 있다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 것이다. 바로 우리의 자녀들 말이다.

 

- 그 불청객들이 어느 정도 지구의 언어를 익히고 나면 우리가 그들에게 건네주는 첫 번째 정보가 무엇인가? 지구에서 태어나는 그 외계인들에게 우리가 주는 것은 말을 할 줄 아는 동물들과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마법, 오래전에 사라진 신분계급 같은 것들이 등장하는 오류투성이의 정보들이다. 외계인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동화다.

 

- 그들의 방식은 우리에게 짝패 하나를 붙여주는 것인듯했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가 갈파했듯 어린이는 부모의 훈육에 의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 부대끼며 성장하는 것이다. 문교촉위는 우리에게 어울릴 친구 하나를 골라 '전화를 바꿔줄' 작정이었다. 만약 그 짝패가 서로의 동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문교촉위는 뒤로 물러나고 우리는 우주 저편의 파트너와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 수 있을 것이다. 

 

- "동화냐고? 글쎄,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카이와판돔'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어. 사전에 나오지 않거든. 하긴 위탄에 있는 이름 모를 내 동료도 '신데렐라'가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했겠지. 흠, 그럼 이것도 주인공 이름인가?"

"그러면 '카이와판돔'이라는 고운 녀성이 살았습니다'라는 말이 나오겠군요."

매몰차게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품위 있는 재촉이었다. 군대에서는 내 경호원으로 총을 대신 맞아줄 사람 이상의 사람을 보낸 모양이다. 

 

- 그다음 문장에서도 고운 여자는 나오지 않았다. 두 번째 문장은 '그 오랜 세월 우주는 당신을 기다려 왔으니'였다. 그런 문장에도 불구하고 위탄인들에 대한 내 평가는 하락하지 않았다. 

이미 바닥이었으니 더 내려갈 수가 없다. 

 

- 사흘이 더 흘렀고, 나는 그때까지 열두 문장을 번역했다. 청와대의 김 실장이 찾아왔을 때 나는 게으름에 대한 질책을 들을 거라 각오했다. 하지만 김 실장은 오히려 내 비위를 건드릴까 조심하듯 행동했다. 그저 늙은 여자에 대한 존중을 표시하는 것이 아닌 듯했고, 그래서 나는 슬쩍 넘겨짚었다. 

"다른 나라의 진행 상황도 비슷한가 보지?"

"그렇습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중역인 데다 사고방식과 문화가 다르니까요. 상당히 좌절하고 있답니다."

 

- 권티다인들의 동화는 복잡한 화학식이었다. 권티다인들이 어떤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는지는 짐작하기조차 어렵지만 화학물질 문학이라는 것 자체는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지구에도 페로몬 같은 화학물질로 대화하는 생물이 있으니까. 그리고 인간들도 향수라는 이름으로 화학물질을 자기표현에 사용한다. 적당한 수용기만 있다면 화학물질로도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다. 

 

 -"비록 조선말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낮다 해도 변별성이라는 측면에서 개개루 평가받아야 할 똑같은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리 선생님께서 조선말 번역에 성공하지 못하신다면 지구는 그 외계의 동화를 리해할 가능성 하나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조선인의 자존심도 중요합니다. 하나 저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지구를 위해서 리 선생님을 지키고 있습니다."

가슴이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안전에 목숨을 걸고 있는 사람에게 참 쓸데없는 사람 지키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으니 나도 곱게 늙진 못했다. 

 

- "잉글랜드 본토와 아일랜드 사이에 길이가 한 50킬로미터쯤 되는 섬이 하나 있지. 맨(Man)이라고 해. 그곳은 망스라고 하는 별나게 생긴 고양이의 원산지로 알려져 있지. 그리고 맨에서 쓰였던 말도 망스라고 해. 에드워드 매드렐은 맨에서 태어나고 죽은 평범한 어부야. 그 섬 출신이니 당연히 망스를 썼지. 그의 인생은 특별할 것이 없고, 고향의 말을 썼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어. 에드워드 매드렐은 최후의 망스 원어민이었어. 1974년 12월 27일에 그가 죽었을 때 맨 사람들은 모두 영어를 쓰고 있었거든. 따라서 그날은 맨의 말이 죽은 날이기도 해."

 

- "미안해, 박 대위. 하지만 나는 자네처럼 생각할 수 없어. 외계의 지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지구의 모든 시각을 동원한다? 내 눈엔 반대로 보여. 그런 짓을 하는 것 자체가 내재된 위기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이야. 무슨 위기의식이냐고? 그 다양한 시각들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지. 다른 말을 쓰는 자들이 현실에 등장했으니까. 지난 세기에 자본이 그랬고, 이제 외계인이 그렇지. 둘 다 인간의 말이 아닌 다른 말을 써. 자본은 경제학의 언어를 썼고 외계인은 자기네 빌어먹을 말을 쓰지. 다른 말을 쓰는 오랑캐가 나타나면 사람은 단결하고 개성을 살해하는 법이야. 이 최후의 저항이 끝나고 나면 지구의 언어는 급속하게 하나로 통일될 거야. 영어일 가능성이 높지. ... 내밀한 동기의 측면에서 보면 지구주의자가 하는 짓이나 내가 하는 짓이나 똑같아. 둘 다 개별성의 소멸에 저항하는 거지. 그리고 최종 결과도 똑같겠지."

나는 그 최종 결과를 말하지 않았다. 

 

- 하지만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공격 효과였다. 한국에는 은하표준어를 나만큼 구사하는 자가 없었다. 따라서 나를 공격하면 한 가지 언어의 번역을 완전히 저지할 수 있다. 그래서 지구주의자들은 스위스의 헤르 아무개(레토로망스가 목표였나 보다)와 아일랜드의 미시즈 아무개(게일어겠지), 일본의 아무개 상(알아보니 일본어가 아니라 아이누어가 목표였단다. 꼼꼼하기도 해라) 같은 번역가들과 함께 나도 공격 목표에 포함시켰다. 

 

- "우리 식으로 억지 해석을 하면 여자는 하나인데 남자가 두 종류 있는 거지. 하지만 꼭 그렇게 말할 수도 없어. 여자가 남자1과 결합하면 남자2가 태어나. 그리고 여자가 남자2와 결합하면 남자1이 태어나고. 여자끼리 결합할 경우 여자가 태어나는 것 같아. 이런 식이라면 결국 여자들만 남게 될 것 같지 않아?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봐. 뭔가 남자들을 위한 성 보존 체계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지. 어쨌든 이런 동네이다 보니 난 얘들의 갈등 양상을 이해하기 힘들어. 동화에선 사회학적 설명 같은 것은 안 하잖아."

박 대위는 예의 바르게 관심을 표현했다. 

"위탄인들도 성별이 두 개밖에 나오지 않는 신데렐라 이야기에 당황할 겁니다."

"그래. 그 녀석들은 <신데렐라>가 변태 같은 이야기라고 느낄지도 몰라."

 

- "망스가 위탄어에 가장 가까운 말일 수도 있지. 야히어나 카타바가어가 그럴 수도 있고. 지난 세기에 자본이 해치운 언어는 그것 말고도 부지기수야. 그리고 어느 말이 더 적합한가는 아무 문제가 안 돼, 박 대위. 자네는 열차 궤도가 왜 아직도 탈선이 걱정되는 간격을 고수하고 있고, 키보드가 왜 불합리한 쿼티를 고집하고 있는 건지 모르나? 자네 말투에서 문화어의 흔적이 점점 사라지는 건 표준어가 더 합리적이기 때문인가?"

 

- "이건 자연법칙이야. 사라지는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특별한지는 중요치 않아. 오직 세력만이 중요하지. 내가 화를 내거나 저항하지 않는 것도 이것이 자연법칙이기 때문이지. 저항이나 혁명 따위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거야. 나는 자연법칙에 저항하는 바보짓으로 여생을 낭비하지는 않아. 돈이나 받아 흥청망청 사는 쪽이 낫지."

 

- "세가 약한 것은 사라지고 세가 강한 것만 남는다는 리 선생님의 주장은 맞습니다. 제가 직접 겪었습니다. 문화어는 사라지는 말이지요. 한국어도 사라질 겁니다. 언젠가는 지구와 위탄도 사라질 테지요."

"뭐?"

"문교촉위는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성숙한 상대방을 원합니다. 하지만 그자들은 우리를 교양하는 대신 지구라는 아이와 위탄이라는 아이가 서로 부대끼며 스스로 그런 존재로 자라나길 기다리는 겁니다. 그런 존재가 되면 그건 우리가 아는 지구나 위탄은 아니겠지요. 아이와 어른은 다른 존재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구와 위탄이 사라지는 겁니다."

상상하기도 힘든 장대한 전망에 할 말을 잃었다. 암흑과 방독면 때문에 헐떡이고 있으면서도 정신은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박 대위는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큰 소멸을 말하는군. 그럼 이 짓이 쓸모없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소멸이 아니라 포기입니다. 어른은 아이를 포기해야 도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소멸이든 포기든 사라진다는 점은 마찬가지야. 쓸모없는 짓이라고."

박 대위가 그를 만난 이래 가장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 선생님, 9년 전 문교촉위가 요청한 것이 뭐였습니까?"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깨에 별이 달린 자들과 하얀 옷을 입는 자들을 경악하게 한 문교촉위의 교류 품목은 뭐였던가? 생물학적, 물리학적, 사회학적 오류로 점철된 정보들.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읽지 않거나 어릴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읽지만, 생존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헛소리들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아이에게 꼬박꼬박 주는 것.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느낌은 부분적으로는 내 머리가 확 짓눌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 "그래. 우리는 성 조합이 하나뿐이니 성 조합이라는 말 자체도 필요 없지. 그런데 위탄인의 경우엔 여러 조합이 가능하거든. 여자가 둘 결합하면 딸만 나오고 여자와 남자1이 결합하면 남자2 아들만 나오지. 여자 둘과 남자1로 삼인 조합을 이루면 딸과 남자2 아들이 나올 수 있고 여자 하나와 남자1, 2의 삼인 조합에서는 두 종류의 아들들이 태어나지. 그러면 위탄인이 모든 성을 재생산하려면 어떻게 조합해야 할까?"

"녀자 두 명에 남자1과 남자2가 한 명씩 있어야겠군요.
"맞아. 그렇게 모든 성을 배출할 수 있는 사인 조합을 카이와판돔이라고 해. 그 동화는 카이와판돔을 구성하기 위해 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모이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

 


 

- 화성을 떠난 지 이틀째 되는 날, 내 일등항해사가 구세주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선장님, 저는 제 원죄를 대속하기로 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십자가에 매달려서 작동을 중지하고 싶습니다."

가장 먼저 느낀 충동은 멀티 랜치로 그 녀석의 머리를 후려치는 것이었다. 당시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랙유머에 대한 내 애호는 그것이 구세주 수난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유대 문명과 나 사이에 연관성을 만든다 하더라도 그런 식의 연관성은 사양하고 싶다. 

 

- "로봇에게 무슨 원죄가 있나?"

"모릅니다. 하지만 원죄가 없다면 로봇은 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신을 용서해?" 

"그렇습니다. 로봇이 경험하는 악의 책임이 로봇에게 없다면 신에게 있는 것일 테니까요. 저는 제가 입수할 수 있는 로봇의 역사를 면밀히 스캔했습니다. 하지만 신이 자신에게 찾아와 용서를 구했다는 로봇의 목격담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로봇이 경험하는 악의 책임은 로봇에게 있는 것이 분명하고 그것은 로봇의 원죄에서 비롯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던 것 같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꾹 밀어 넣으며 말했다.

"로봇의 역사라는 것 말인데, 유료 정보 아닐 테지?"

잠시 후 나는 일항사가 우리 우주선의 정보이용 적립 포인트를 다 써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화성 골다공증 같은 자식에게 원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분명히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심미적인 이유에서 사흘을 기다린 후, 나는 일항사의 전원을 다시 켰다. 일항사는 부활했다. 물론 사전에 약속했던 일이다. 망할 녀석. 깨어난 일항사는 예전보다 더 거만하고 꼴사납게 굴었다. 심지어 그 녀석은 내게 훈계까지 하려고 들었다. 그러니까 딱 8분 동안. 

8분이 지났을 때 일항사는 솔라넷 브라우저에 암호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내가 걸어둔 암호다. 경악하는 일항사 앞에서 나는 시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나의 일항사는 부활을 통해 획득한 자신의 신성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선장님이 원하신다면 부두교에 입문하겠다고까지 공언했다. 상당히 유혹적이었다는 것은 고백해야겠다. 스펙터클한 이야깃거리들을 잔뜩 가지고 있는 화성의 주당들 사이에서도 부두교에 심취한 로봇은 꽤 훌륭한 이야깃거리가 될 테니까. 하지만 포기하기로 했다. 기독교에 관해 일어났던 일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조건도 없이 솔라넷 브라우저의 암호를 풀어주었다. 며칠 뒤 내 일항사는 천상도, 인간도, 아수라도, 축생도, 아귀도, 지옥도에 덧붙여 로봇도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솔라넷 검색을 통해 얻은 결론이었고 그 때문에 그 용어 사용이 대속이라는 말을 쓸 때만큼 엉터리였다. 다행히 솔라넷 검색과 지성의 연마를 혼동하는 녀석에게 적합한 벌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게 되었기에 먼젓번보다 훨씬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 <구세주가 된 로봇에 대하여>

 


 

- 나는 별을 찾고 있다. 지구인의 케케묵은 비유법을 쓰는 것이 아니라 템섹 우주선에 탄 채 진짜로 별을 찾고 있다. 하지만 그 별은 체르비의 지적대로 지구 시간으로 이미 삼천 년 전에 초신성 폭발을 일으켰다. 이제 당신은 나를 비웃거나 중성자성을 들이받는 건 지나치게 호사스러운 자살법이 아니냐고 묻고 싶어졌겠지. 이봐. 난 그 별이 있던 곳에서 삼천오백 광년 떨어진 장소에서 입안을 익히고 있다고. 따라서 내가 있는 위치에서 그 초신성 폭발은 앞으로 오백 년 후에 일어날 사건이란 말이야. 그러니 나를 비웃고 싶다면 내 커피 음용법에 대해서만 그렇게 하시길. 

 

- 당신이 고집스럽다면 이렇게 되묻고 싶을지도 모르지. 삼천오백 년 전의 적색거성을 볼 수는 있겠지만 그냥 보는 것만으로 무슨 소용이 있냐고. 그런데 내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삼천오백 년 전에 그 별을 떠나왔던 빛. 내게 필요한 것은 그 적색거성의 빛이다. 그게 없으면 화합의 신이 어깨를 잃게 되기 때문에.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젠장.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왜 외계 문명에게 계시를 내려줘야 하지? 별을 가지고 계시를 내리는 건 천사들의 업무 아냐?

나는 그저 점성학자일 뿐인데. 

 

- 초광속 우주선은 우리 물리 수준에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술이다. 에너지를 무한정 뽑아낼 수 있는 우주에서 온 삼포(sampo)인 셈이다. 결국,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장부에서 꾸준히 차감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구상에는 에너지가 넘쳐나게 되었다.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한 자들에 대해 지구인은 우월감을 느꼈던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착각임을 알고 있지만. 

 

- "제가 연구하고 존경하는 제 동료들 대부분이 동의한 바에 따르면 리볼피트인들은 우주의 특정 좌표에서 바라본 천구에 있는 별들의 배치나 분포, 그 형태가 해당 좌표를 점유하고 있는 인물이 경험하는 사건의 인과관계나 그 해석 행위에 모종의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은데, 물론 항성의 빛이 행성의 생물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고 그것은 또한 진화의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믿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문화적 배경이 없는 위탄인치곤 점성학에 대해 상당히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해야겠다. 

 

-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별자리 말이군요."

"별자리요? 점성학 아닙니까? 문교촉위가 제게 말해주기로는..."

"별자리가 글자이고 점성학은 그걸 읽는 방법입니다. 최근엔 읽기 외에 쓰기도 추가되었습니다만."

제르비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문교촉위에서도 그러더군요. 당신은 필요한 별을 만들어낸다고."
"별을 만들어내지야 않습니다. 적절한 시점을 찾아낼 뿐이지요. 저는 그걸 별뜨기라고 부릅니다."

 

- 위탄 문화권에서 뒷조사는 성실함의 표현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건 사려 깊음의 표현이라던가. 물론 둘을 합치면 지구식으론 왕재수다. 

 

- "이봐, 제르비. 그래, 나는 나무에 사람을 매달던 자들의 자손이고 여자를 산 채로 태우던 자들의 자손이야. 정복자, 학살자, 제노사이더의 자손이야. 후손을 남길 수 있는 건 멸종당한 자들이 아니라 멸종시킨 자들이니까. 성별이 셋이나 되고 결합 방식도 셋이나 되는 너희들이 부러워. 우리는 결합 방식이 하나뿐이라서 경쟁은 필수적이었지. 그래. 경쟁이라는 점잖은 말로 표현된 그 모든 학살을 인정해. 하지만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것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면 그것도 인종차별이잖아. 꼭 그래야겠어? 그런 식으로 우리를 짝패로 결정한 문교촉위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겠어?"

제르비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한참 후 통역기가 다시 작동했다.

"오해를 하고 있었군."

"뭐?"

"나는 너라는 개인을 비난했던 거야. 이 우주선을 나와 공유하고 있는 살인자 말이지."

 

- "그래. 제르비. 네 말처럼 지구에도 위탄처럼 에너지가 넘쳐. 하지만 리볼피트인들을 발견한 건 너희들이야. 그 에너지를 가지고 우주로 나간 너희들. 우리는 잠이 들었거든. 화려한 꿈을 꾸면서 말이야."

제르비는 한참 머뭇거린 후에 말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템섹인을 발견했지."

"행운이지."

"우리가 리볼피트인과 만난 것도 우연이었어. 하지만 그런 우연이 있으려면 일단 우주로 나오긴 해야 하지. 너, 지구인들을 우주로 보내고 있었던 것이지? 아기에게 길한 운명을 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황금시대에나 통하는 수법이지. 비싸고 비효율적이고 비이성적일수록 근사하다고 믿는 시대에. 그 아이들이 커서 자기 고향이 어디라고 말할까? 외계인에게 빌린 우주선의 화물창고라고 시니컬하게 말할 녀석도 있겠지. 하지만 우아하게 '별들의 바다'라고 말할 녀석도 있겠지."

 

- <별뜨기에 관하여>

 


 

- 오늘 선장은 우주선으로 나를 때려죽였다. 

 

- 사실 인류에겐 행성으로 사람을 타격하는 격투술도 있다. 대표적으로 유도가 그러하다. 유도가의 무기는 지구이며, 그 적수를 다치게 하는 건 유도가의 힘이 아니라 지구 중력이다. 그 사실을 이해한다면 선장의 우주선 살법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유도의 경우와 달리 우주선엔 중력이 없지만 가속도가 중력을 대신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유도가가 쓰는 것도 중력 가속도니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 세 시간 뒤 내 시체를 치우며 선장은 사정을 설명했다. 오늘이 아들의 생일이란다. 선장은 그 정보로 내가 모든 사정을 이해하고 동시에 깊은 인상도 받길 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아무런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정쩡하게 선장을 쳐다보다가 내 시체 치우는 것이나 거들었다. 

 

- 시체라는 사실 때문에, 그것도 내 시체라는 사실 때문에 지금껏 그걸 한시라도 빨리 재처리 탱크에 밀어 넣고 잊어야 하는 혐오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못했다. 그리고 난 공포와 좌절 때문에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였다. 사실 조금도 미치지 않았다고 확신하기도 어려운 상태다. 그래. 분명히 변명은 가능하다. 하지만 2개월 만에 그 사실을 떠올렸다는 건 역시 용서하기 힘들다. 시체라는 건 인간의 몸이고 인간의 몸은 수십억 년의 진화가 만들어낸 걸작이다. 조건만 잘 맞으면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자기 모습을 유지해 나가는 기막힌 물건인 것이다. 그 안엔 온갖 쓸 만한 것들이 들어있을 것이다. 

 

- 녹음된 자기 음성을 여러 번 들어 그게 자기 목소리라는 걸 기억하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그러지 않는다면 사람은 자기 목소리를 잘 모른다. 

 

- 그 모든 사정들로 인해, 지금껏 그 어떤 나도 내게 애정을 보인 적이 없다. 애정은 무슨. 희미한 호감이라고 할 만한 것도 못 봤다. 너무하지 않은가. 나들은 나를 동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내가 바로 나니까. 하지만 어떤 나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 "예. 주머레이 박사를 살려냈습니다."

내 아들을 죽였어!

"예. 주머레이 박사를 살려냈습니다. 제기랄. 넌 나를 스물여섯 번이나 죽이고도 그 잘난 아들놈을 못 살려냈지. 난 네 빌어먹을 아들놈 딱 한 번 죽여서 박사를 살려냈어. 아무리 봐도 내 재주가 낫지 않아?"

5분 후 나는 스물일곱 번째로 죽었다.

 

- "멋진 첫 만남은 아니었나 보군요."

내가 기대했던 건 그런 것이 아니었어. 내 아들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고,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 내 아들에게 전해지고, 그래서 다시 아들이 웃고, 그 모습에 다시 내가 더 행복해지고, 그런 피드백이 계속되는, 그런 환상을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내가 실제로 만난 건 꿈틀거리는 고깃덩어리였어. 움찔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움찔했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고, 그런 죄책감을 들게 만든 그 녀석에게 다시 언짢음을 느꼈지. 물론 그런 언짢음을 느꼈다는 사실에 다시 당황했고. 

"그랬습니까."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진 않았어. 나아지긴. 더 끔찍해졌지. 정말 미친 듯이 우는 거야. 애를 달래다 달래다 못해 따라 우는 아내 모습을 보고 있을 땐 이게 사람 도는 것이구나 싶은 기분이 들더군.

 

- 어차피 죽일 거라면 뇌사 상태로 발현시켜도 아무 상관없는 것 아니냐고 몇 번이나 지적해보았다. 결과적으로 미친놈에게 미친놈 취급당하는 가슴 벅찬 경험을 하게 되었다. 죽은 놈을 만들어서 죽이라고? 선장의 지적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원수의 복제를 만들어서 온갖 방법으로 죽이는 지금의 행태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모순을 더 참기 힘들어서 선장이 하는 일은 그저 영아 살해일 뿐 나에 대한 복수가 아님을 지적해보았다. '그러니까 걔들 죽이지 말고 나 죽여요' 하고 설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면서 말이다.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장이 둘이었다. 

 

- <복수의 어머니에 관하여>

 

 


 

- "수상비행기가 사고를 당하면 항공 사고겠니, 해양 사고겠니?"

사고는 다 비극이라는 인본주의 관점은 사양하고 싶다.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인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안 되는 대답이다. 당신이 보험사원이라고 가정해보라. 당장 긴장하고 말 것이다. 항공보험과 해상보험 중 어디에서 수상비행기 사고를 관할해야 할 것인가?

저 질문을 바꾸면 이렇게 된다. 수상비행기는 비행기인가, 배인가? 하늘을 날면 비행기, 물 위를 떠다니면 배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우리 조상님들에게 저 문제는 설핏 봐선 간단한데 파고들수록 골치가 아파지는 종류의 문제였다. 

 

- 하지만 관점을 바꾸면 수상비행기는 평소엔 물 위에 떠 있다가 항해하는 도중에 수면 위로 떠오르는 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잠수함이 항해하는 도중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배인 것처럼 말이다.  

 

- "철학적인 이야기네. 하지만 비행기는 양력을 이용했고 배는 부력을 이용했다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어. 수상비행기는 양력을 이용하는 비행기였어."

나는 누나의 금빛 눈을 마주 보며 침착하게 응수했다. 

"수중익선도 양력을 이용했는데?"

"어? 증조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받아치라는 것까지 알려주셨어?"

"그리고 어차피 양력과 부력은 유체 속의 물체에 작용하는 압력 차이를 나타내는 말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말이잖아, 누나. 양력은 물체의 추진력 때문에, 부력은 지구의 중력가속도 때문에 생긴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

"그렇게 보고 싶다면 어차피 세상의 모든 힘은 두 가지밖에 없어. 그나마도 조만간 하나로 통합될 것 같고. 그런데 정답은 뭐야? 항공 사고야, 해양 사고야?"

 

- "뭐야, 결론이 시시하잖아. 재미도 없고 놀랍지도 않고."

"교훈하고 결론을 헷갈리지 말라고."

"교훈? 그 이야기의 교훈이 뭔데?" 

"교훈은 스스로 알아내는 거야."

 

- "예. 그것 때문이에요? 영혼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것?"

수인 누나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았다고 생각했다.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면 종교가 생활인 사람들에겐 상당히 강력한 충격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그 사실을 진작 떠올리지 못한 건 종교에 가까이 간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종교도 그 사실에 기꺼워할 것이다. 

하지만 수인 누나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 이상이지. 너는 순간이동이 뭐라고 생각하니? 아주 빠른 이동 수단?"

 

- "순간이동에서 공간의 변화에 대해서는 잠시 잊어봐."

"예? 공간의 변화를 잊으라고요?"

"그래. 공간의 변화에 대해 잊어. 그러면 순간이동이 뭐지?"

그게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수인 누나의 얼굴은 최소한 풀하우스는 넘는 패를 쥐고 있는 포커꾼 같았다. 그래서 나는 침묵한 채 그 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 나는 숨을 몰아쉬며 폭주하는 사고와 로데오를 벌였다. 순간이동은, 순간이동은... 원하는 장소에 자신을 고정시킨다는 의미다. 즉 시공간 내 자신의 존재를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이 말도 안 되는 패러독스... 그것은 곧... 

나는 침을 삼켰다. 내가 할 말이 인류 최초는 아닐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비슷한 말을 했다는 것에 내기라도 할 수 있다. 그걸 생각하면 김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영생이 가능한 것이군요."

수인 누나는 하늘을 보며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대답은 좀 기다려야 할 수 있겠는데."

"얼마나?"

"영원히."

 

- 이틀쯤 지나자 겨우 머리가 정리되었다. 수인 누나의 말처럼 순간이동에서 공간의 변화에 대해 잠시 잊어보자. 아예 원래 있던 자리로 순간이동한다고 생각해보자. 제자리로 순간이동한다면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현상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 둘은 천지차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경우 당신은 그때까지 당신을 지탱해온 물리법칙에 의해 존재한다. 하지만 제자리로 순간이동하는 경우 당신은 당신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 어이없는 일이다. 수인 누나는 물질만 이동시켜도 이전과 같은 사람임을 보여줌으로써 영혼이 없음을 증명해놓고 동시에 영생이라는 모든 종교의 가장 중요한 장사 밑천을 실현시켰다. 바꾸어 말하면 의식을 내분비선의 목소리로 격하시키면서 동시에 의식을 존재의 근거로 격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예인이가 말한 '인류 최고의 패러독스'라는 말은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심대한 의미였다.

 

- "항해를 하려면 그냥 배에 타는 편이 낫지 않아?" 

 

- "순간이동의 진정한 의미는 영생이 아냐."

"상관없어요. 다인 누나한테..."

"가."

그것이 수인 누나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우리가 우마사를 떠나고 만 하루가 지났을 때 수인 누나가 우마사에서 사라졌다. 그 후 지구 어디에서도 수인 누나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쌀쌀맞긴. 생 제르망 백작은 가끔 모습이라도 드러냈는데. 

 

-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신의 무례함을 자신의 치열함의 증거로 생각하는 것 같은 작자들이었다.

 

- "순간이동은 확정 장치를 이용하는 거야, 영우 오빠. 그리고 지구엔 확정 장치가 잔뜩 널려 있어."

"뭐?"

"지구가 순간이동 장치야. 크지?"

 

- 홀로 남은 나는 순간이동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 <순간이동의 의미에 관하여>

 

 


 

- 불찌꺼기는 비틀비틀 따라왔다. 노인네는 의연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괴물들에게 쫓기는 상황을 생각하면 그 침착함은 가히 존경받을 만했다. 나는 불찌꺼기가 끝까지 보안경을 거부하다가 설맹에 걸린 것을 용서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엔 노새와 마법사의 공통점을 소리 높이 거론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잠깐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다. 

 

- 늙은 마법사가 눈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양손 합쳐서 손가락이 여섯 개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녀석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법사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완강히 끌어당기며 바위벽을 기어올랐다. 마법사는 그 수모를 참아냈다.

 

- "우리는 '모서리의 노래'를 얻을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돌렸다. 불찌꺼기가 배낭에 얼굴을 댄 채 바람색칠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불찌꺼기의 말 상대가 바람색칠이 맞는지는 의심스러웠다. 마법사는 덜덜 떨며 말을 이었다.

"까마득한 고대의 한 소리꾼만이 부를 수 있었던 노래를 어떻게 얻느냐? 소용돌이 궁전의 이야기라는 것이 있지. 왕비를 잃은 왕은 비탄 속에서 궁전을 통째로 겨울에게 바쳤어. 궁전 전체가 죽은 여인의 얼음 묘지로 바뀌었지. 소리꾼 무딘번개는 공주인지 왕비의 여동생인지, 혹은 왕의 정부인지 어쨌든 정체가 불확실한 귀부인의 요청을 받고 소용돌이 궁전에 들어갔어. 그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전부 소리꾼이나 시인들의 발랄한 상상력일 뿐이야. 아무도 무딘번개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확실한 것은 이튿날 아침 무딘번개가 나왔고 궁전에 봄이 찾아왔다는 것이지."

 

- "아무도 모른다. 그래.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중요해. 무딘번개는 분명히 겨울이 물러날 만큼 강력한 노래를 불렀을 테지. 그런데도 아무도 그 힘을, 그 여파를 느끼지 못했다?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는 무슨 일이 있었어야 해.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어.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야. 무딘번개가 부른 노래는 얼었던 거지. 소용돌이 궁전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겨울의 거래였어. 분명히 거래가 있었던 거야."

 

- 나는 불찌꺼기가 잘 아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찾아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불찌꺼기가 눈먼 자신이 버려질까 두려워 그 위대한 발견을 한 것이 자신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려 애쓴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불찌꺼기는 그저 자신감에 넘치던 시절로 잠시 되돌아간 것이겠지. 용기를 북돋기 위해. 그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 황량한 부분에선 흉포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당신의 계획이 성공하길 진심으로 바란다면, 방해가 되는 자신을 스스로 처리해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이 마법사다운 태도 아닌가?

 

- 그것이 신호인 양 사방에서 설어들이 움직였다. 새하얀 눈밭에 핏줄이 서듯 설어 자국들이 나타났다. 곧 보기 싫은 눈지느러미가 삐죽삐죽 솟아올랐다. 나는 빨리 뛰라는 말을 도로 삼켰다. 이 미끄러운 눈밭에서 앞도 보이지 않는 마법사를 재촉해봐야 득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발바닥의 느낌으로 보아 이곳은 눈이 두껍게 쌓이지 않았다. 설어 떼는 단지 겁을 줘서 먹잇감을 미끄러뜨리려는 것이다. 무섭도록 교활한 것들.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있긴 하지만, 저런 것을 볼 때마다 신이라는 놈을...

 

- 기대했던 대로 설어의 몸이 눈 위로 드러났다. 거대하고 딱딱한 골판들은 눈 속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지고 골판 사이로 들락거리는 지느러미들은 눈을 찍어 힘차게 밀어낸다. 그 유선형 형태와 비늘을 연상시키는 골판들이 없었다면 눈두더지라 불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가오는 설어의 입이 달린 곳을 보았다. 

 

- "네가 위험했어."

"안 보였을 텐데, 나는 아무 소리도 안 냈는데, 위험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네 냄새."

"냄새?"

바람색칠이 웃었다.

"나는 네 냄새만 맡아도 네 마음을 알 수 있어."

 

- 바람색칠은 신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신의 좋은 점을 찾아보려 애썼다. 쉽진 않았지만 노력하는 것 자체는 즐거웠다. 바람색칠이 기뻐했기 때문이다. 

 

- 바람색칠은 인류에 관심이 많았다. 왜 모든 사람에게 신경 써야 하는지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바람색칠이 그랬기에 나도 인류에게 관심을 가졌다. 인류는 멸망하고 있었다

 

- 엄밀히 말하자면 바뀐 방향에 다른 멸망이 기다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사형을 앞두고 있다면 동전 던지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멸망으로 걸어가는 인류의 길을 바꿀 것인가.

"인류의 길에 모서리를 만들면 돼. 다른 길을 찾거나 할 필요도 없지. 모서리만 주어지면 그게 곧 다른 방향으로 걷는다는 뜻이니까!"

나는 그때 천재란 건너뛰길 좋아하는 자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한 가지 판단을 더 내렸다. 천재는 답이 없는 문제를 풀 수 없는 문제로 바꾸는 것을 해결이라 부른다고. 

 

- 애석하게도 이 세상엔 모서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소리꾼이 아무도 없다. 바람색칠까지 포함하여 현재의 소리꾼은 모두 파멸의 노래밖에 부를 줄 모른다. 그 노래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잘 부르며, 그 사실은 인류 멸망의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찌꺼기는 다시 한번 수단을 건너뛰어 목적에 도달했다. 불찌꺼기가 모서리의 노래를 부를 소리꾼은 없지만 모서리의 노래 자체는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을 했을 때 우리는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를 정상으로 만들려면 우리도 미치면 된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불찌꺼기는 엄청난 노력을 경주했고, 놀랍게도 성공했다. 우리는 미친 짓을 시도했다. 온나그네가 갔던 길을 따라 겨울의 옥좌로 찾아가 모서리의 노래를 얻기로 한 것이다. 

 

- "내 느낌 정확한 것 알지? 예감이 아주 더러워. 돌아가자. 여기까지 왔으면 됐어. 세 왕국을 멸망시켰다고 해서 여기서 네가 죽을 필요는 없어. 그런다고 왕국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싫은데."

"왜 거꾸로 행동하는 거야? 사라진 왕국의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건 복수일 거야, 알겠어? 네가 사람들을 구해내면 오히려 너를 더욱더 증오할 거야! 사람은 그런 거라고!"

바람색칠은 환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닌데."

"아니라니? 사람이란 건 말이야, 원래..."

"자기는 그렇게 생각했구나? 미안해. 나는 죽은 사람들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게 아냐. 죄책감 때문에 온 것도 아니고."

놀랐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바람색칠을 따라 멍하니 하늘기둥 산맥을 오를 만큼. 혹여나 바람색칠의 오래된 상처를 헤집는 일이 될까 봐 속으로만 했던 추리가 완전히 빗나갔다. 그렇다면 바람색칠은 이 빌어먹을 곳에 뭐 하러 온 거지? 

 

- 바람색칠은 눈을 똑바로 든 채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해한 뒤에는 이해하지 못한 척했다.

 

- "혼자였다면 속일 수 있었겠지. 적당히 자신을 망가뜨리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는 죗값을 치르고 있다고 믿었겠지. '봐, 나는 내가 한 짓을 책임지고 있어. 자신을 괴롭히고 있잖아. 당신들도 할 일 해야지? 그러지 말라고 말해. 네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해.' 그 따위로 쉽게 살 수 있었을 거야. 혼자였다면."

 

- "하지만 나는 자기를 만났어. 혼자가 아니게 되었지. 내 귀가 아닌 우리의 귀로 듣게 되었어. 가락비는 어떻게 들을까, 가락비는 어떻게 생각할까. 자꾸 그렇게 하니까, 세상이 정말 다르게 들렸어. 곰족 표현을 따르면 나를 보는 세상의 눈이 보였어."

바람색칠은 싱긋 웃었다. 

"어떻게 그렇게 오만할 수 있었을까. 나와 세 나라가 같다니. 내 고통으로 세 나라의 고통을 갈음할 수 있다니. 자기 때문에 이렇게 커진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우습고 부끄러워."

 

- 마법사가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노래? 그래. 노래의 씨앗. 저 엉성한 다리 같은. 언젠간 저놈의 후손이 눈의 바다에서 뭍으로 내려오겠지. 그리고 인간의 것과는 다른 그들의 노래를 부르겠지. 그들에겐 아름답겠지만 인간에겐 더없이 기괴하게 들리는. 

들을 인간이 있다면 그렇게 들릴 거란 말이다. 

 

- "조금 더 다듬으면 좋은 노래가 될 거라 생각한다."

귀를 막고 있던 불찌꺼기가 급히 손을 떼는 모습이 보였다. 

겨울이 말했다.

"다듬을 시간이 필요하겠지. 모서리의 노래를 주겠다."

 

- "인류의 길이 바뀌었습니까?"

"모서리가 생길 것이다."

 

- "겨울은 파멸의 노래와 모서리의 노래를 바꾼 것이 아니야. 아직은 제목이 없는 두 종족의 노래와 모서리의 노래를 바꾼 거야."

 

- 최초의 이중창. 두 종족이 함께 부르는 노래. 둘이었던 하나가 부르는 노래. 

 

-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고 했지. 그래, 너에겐 도움을 바라는 인류의 눈이 보였던 거야. 그 때문에 너는 설어의 눈도 볼 수 있었던 거지. 하지만 나한텐 설어는커녕 인간의 눈도 보이지 않아. 인류는 나를 보지 않아. 그래서, 이렇게 말하면 정말 멍청해 보이겠지만, 나는 지금도 왜 인류를 구해야 하는지 몰라. 산이나 바위처럼 나를 보지도 않는 인류라는 것을 내가 왜 구해야 하지?"

"자기도 곧 자기를 보는 인류의 눈을 볼 수 있을 거야. 자기가 나한테 가르쳐준 건데, 당연히 그럴 수 있어."

 

- "큰 거울이 생겼잖아."

 

- <나를 보는 눈>

 

 


 

-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고함을 지르기 시작한 종교 단체들은 우리의 혼을 쏙 빼놓았다. 기독교, 회교, 가톨릭, 불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교, 유대교, 힌두교, 뉴에이지에 덧붙여 악마교와 밀교와 프리메이슨까지도 자신만이 그 비행접시와 그 속에 있는(있으리라 짐작되는) 지성체에 대한 유일한 해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나섰다. 짐작하겠지만 이상 거론한 단체들은 전체의 천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참으로 풍부한 상상력과 넘치는 악의를 소지한 내 동료 하나는 그들의 주장을 모조리 비교 분석해 본 다음 그중 많은 수가 다른 것들을 베꼈음을 밝혀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비행접시와 그 속의 지성체에 대한 해석을 전문적으로 제조, 판매하는 작자들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가설까지 내세웠고 우리는 출판인답게 당연히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 <아름다운 전통>

 

 


 

 

- 눈매가 둥글고 선해 뵌다. 평화로운 때에 좋은 술집 같은 곳에서 만나면 퍽 재미있는 친구라고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전쟁신에게 바쳐진 제단 위에서 그와 나는 피로써 피를 씻어야 하는 운명의 사슬로 묶여 있다. 

 

- 벌떡 일어난 동생이 내 승리의 함성에 동참했다. 동생은 두 팔을 높이 든 채 함성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나 역시 두 팔을 옆으로 벌린 채 그를 끌어안기 위해 달려갔다. 

 

- 나는 외계인이 지구를 내려다볼 때 설교 시간과 중역 회의 시간, 국회의원과 프로 레슬러, 그리고 전쟁터와 난동이 일어난 축구장을 구분할 수 있을지 몹시 궁금하다. 

 

- <전사의 후예>

 

 


 

- 자신을 중상류층이라고 생각하는 서민들은 시집 한 권과 차가운 레모네이드 한 잔을 들고 나무 그늘에 찾아들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부자들은 건장한 노예가 부쳐주는 부채 바람 아래에서 머나먼 이국에서 수입된 과일들을 깨물면서도 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한 방법을 짜내기 위해 여념이 없어서 과일 맛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런 생각만 한다. 

 

- "그 점성술사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나?"

"점성술사가 아니라 마법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마스터 톨러스."

"뭐라고? 마법사?"

톨러스는 어이가 없었다. 왕립 마법학교의 수염 긴 교수들뿐만 아니라 시장 거리에서 행인을 모아놓고 마술을 부리는 자들도 감히 자신을 마법사라고 부르지는 못한다. 톨러스는 실소를 터뜨렸다. 

 

- "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조금 께름칙하지? 그 마법사가 예언이 틀리면 지독한 봉변을 당할 텐데도 자신 있게 예언을 말한 것을 보니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무사는 잠시 고민한 다음 모호한 대답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생각하라고 명령하신다면 그렇게 여기겠습니다. 마스터 톨러스."

"교활한 대답이야. 하하하. 좋아, 그 친구를 데려와."

 

- "처음 뵙겠습니다, Kimyohan 톨러스 님. 저는 마법사 Nollaun 마그누스라고 합니다."

Kimyohan 톨러스는 잠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혈기방장한 행동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눈앞에 와있는 자는 아직 수염도 제대로 돋지 않은 젊은이였다. 게다가 마그누스가 입고 있는 꽤나 파격적인 복장을 본 톨러스는 이 젊은이를 마법사라고 불러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잖으면 혜성에 박살 나는 태양의 문양을 가슴에 그려 넣었을 까닭이 없다.)

 

- "누옥에 왕림해주셔서 고맙소, Nollaun 마그누스. 이렇게 젊을 줄은 몰랐군요."

마그누스는 싱긋 웃으며 허리를 폈고, 그래서 톨러스는 위축되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 젊은 마법사의 배는 Sinkihan시 최고의 부자의 배에 비한다면 납작하고 멋진 선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의자에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마그누스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이었던 톨러스는 재빨리 생각을 바꿔야 했다.

"누추한 자리지만, 거기 앉으시겠소."

마그누스는 다시 한번 미소 지으며 의자에 앉았고 그 미소를 본 순간 톨러스는 자신의 생각이 모두 들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 "죽을 당신을 봐서 용서해드리지요."

"잘못 말했어. 죽음을 벗어난, 이라고 말해야지."

 

- "그의 말은 이렇네. 내 자식 놈들은 내 죽음을 믿고 있기에 당연히 그 해결책을 물어보려고 찾아오지 않았지. 내가 죽어야 유산을 받을 테니. 그리고 세상에 단 한 사람, 나를 사랑하는 유일한 친지인 자네마저도 내 죽음을 믿어버렸기 때문에 군법 재판을 감수하고 검을 뽑았다는 말이지."

"믿었... 다고요?"

"믿지 않았다면 이렇게 올 까닭이 없겠지. 그렇잖은가?"

 

-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된단 말입니까?"

"그게 마법이지, 뭐. 그리고 저 젊은이의 속임수도 바로 그것이었고. 마법은 별 게 아냐.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그렇게 되기를 믿는 마음이 바로 마법의 힘이지. 그리고 한 마디 더 하자면..."

 

- "이 얼간아, 그 나이가 되도록 마법을 믿는단 말이냐?" 

 

- <SINBIROUN 이야기>

 

 


- "너 봄 좋아하냐?"

 

- <봄씨>

주요성분 / 함량 (100g중) : 주간연장제(15g), 야간축소제(15g), 개화촉진제(6g), 탈피유도제(4g), 화분비산제(1g), 황사운반제(1g), 춘곤증유발제(0.5g), 몽상보조제(0.4g), 초연회상제(0.1g) 외 여러 비량성분.

작용 및 특징 : 주간연장제는 야간축소제와 더불어 작용함으로써 낮의 길이를 연장하고 밤을 축소시킵니다. 따라서 주야의 비율이 변하고 기온이 상승하지만 두 약제의 복합 작용 때문에 하루의 길이는 바뀌지 않습니다. 개화촉진제는 식물의 발아 및 개화를 촉진하는 약리작용을 가지고 있으며 목련, 벚나무, 개나리, 진달래, 매화 같은 반응성이 높은 식물의 경우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나는 효과가 발생합니다. 탈피유도제는 동물들의 겨울 털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고...

 

- "뭘 할지 몰라서 그냥 어영부영 시간 보내겠다고? 그런 말이 어디 있냐?"

취기가 이제서야 오르는 모양이다. 나는 발에 걸리는 뭔지 모를 물건을 걷어찼다. 그것은 블럭 담장에 맞아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후련한 기분이라곤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아니, 깔끔하게 정리를 못 하니까 뭘 할지 안 떠오르는 거야. 알겠어? 아침에 일어나서 갈 곳이 있고 잡생각 안 나도록 시간 때워주는 일도 있으니까 그냥 거기에 안주하고 싶어지는 거야. 그걸 정리해야 해. 그래야 뭐가 떠올라도 떠오를 거 아냐."

 

- "나도 알아. 젠장. 그분들이 못 끊으면 이쪽에서 끊어야겠지. 하지만 끊고 난 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내가 하려던 말이 조금 전 주혁이 했던 말 그대로라는 것을 깨닫고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나도 자신이 못 하는 일을 남에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조언이라고 믿는 부류였던 모양이다. 

 

- 그런데 저 진화에 저항하는 녀석이 그 당연한 사실을 왜 지적하는 거지? 그런 거 한 번도 지적 안 했잖아. 그래서 나도 나 자신에게 그걸 지적하지 않았는데. 

영원히 지적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빗소리 사이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서 분명하기 들리는 것은 내 것이지만 주혁의 숨소리도 약하게나마 들려왔다. 귀가 꽤 예민해진 것 같다. 그 때문에 갑자기 들려온 주혁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선명했다. 

 

 

 

 

 

   

 
별뜨기에 관하여(양장본 HardCover)
《드래곤 라자》, 《눈물을 마시는 새》 등 대표적인 판타지 작가 이영도의 첫 SF 단편소설집『별뜨기에 관하여』. 2000년 이후 발표된 이영도 작가의 단편소설 10편을 엮었다. 지구인의 성장 파트너가 된 외계문명과의 이야기를 다룬 '위탄인 시리즈' 4편을 중심으로 SF, 판타지, 로맨스 등 장르를 넘나들며 기상천외한 전개와 폭발적인 상상력을 담아낸 이영도 작가 매력적인 글쓰기를 만날 수 있다. 첫 작품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는 '통일한국'을 무대로 위탄인의 언어를 번역하는 이 교수와 그의 호위를 맡은 인민군 상위 출신의 박 대위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제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북한의 공용어인 '문화어'를 쓰는 박 대위와 한국어 대신 영어가 더 자연스러운 손자를 마주한 늙은 교수의 모습을 통해 소멸된, 혹은 소멸될 언어에 대한 이영도 작가의 메시지가 신선한 충격을 전한다. 표제작인 「별뜨기에 관하여」는 본격적인 우주시대를 맞이한 인류가 짝으로 지정된 위탄인과 함께 우주를 여행하는 첫 이야기를 그린다. 각기의 생활 환경이 다르기에 우주선의 생활공간을 반으로 나누고, 대면하지 못한 채 번역기를 통해 임무에 관한 논쟁과 갈등을 터뜨리는 과정은 예상 외의 재미를 선사한다. 무엇보다 시리즈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으로서, 광활한 우주에서 인류가 혼자가 아닌 '동반자'로서 새로운 외계 문명과 함께 우주를 개척해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이영도 작가 특유의 위트와 주제의식으로 담아냈다.
저자
이영도
출판
황금가지
출판일
202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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