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준녕
출판 : 허블
출간 : 2022.08.31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우선은, 현시대를 살고 있는 분들께 일독을 강력히 추천드린다는 점을 명확히 밝히고 시작한다.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이하 '막 너머')>은 아주 유쾌한 유머와 함께 시작한다. 전 우주에 현 인류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지성체임을 밝혀냈다는, 아인슈타인이 틀렸다는 발칙한 세기의 발견을 남긴 한 학자의 급작스러운 죽음이다. (어째서 이 부분이 유머가 되는지는 직접 읽어보시면 알게 된다)
그리고 급작스레 반전된 분위기. 지구 안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이들이 우주의 끝에서 발견해낸 미지의 '막'을 향해 희망을 쏘아 올리기로 결정한다는 것까지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수행하기까지 현실적인,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읽기가 괴로울 정도인 글들을 읽어나가고 있자면 이 작가가 정말 90년대 생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
점차 줄어드는 식량과 황폐화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유전자 변형을 감행한 한국. 고효율 고수명의 신인류란 결국 굶어도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작은 몸집의 아이들이 되었다. 조지 R. R. 마틴의 <나이트플라이어>에 등장하는 개량 인류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러나 그들도 <막 너머>에서와 같은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같은 결과를 맞았으리라.
피 튀기는 경쟁 끝에 아이들은 우주로 쏘아 올려지는 데 성공하지만,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무나도 '한국적인' 상황들에 읽는 내내 굳어진 얼굴을 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재미있다. 이후 세대를 거듭해나가며 막을 향하는 무궁화호의, <설국열차>를 떠올리게 하는 고립된 계 안에서의 생태계와 계급 문화 또한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극사실적인 디스토피아라니.
이렇게 다양한 인물 군상과 설득력 있는 전개라니.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리는 작품이다.
이후부터는 작품의 내용에 관한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아직 책을 읽지 않으셨거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신 분들은 여기에서 멈춰주세요.
처음 책을 덮을 때까지는 '아 재미있다', '여운이 남네'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묘하게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떠올랐다.
해서 하루 정도 지나 다시 마음에 남는 부분을 위주로 재독을 했고, 그 결과 나름대로는 이 작품에 대한 일종의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울리고 있는데, 작가는 매우 친절하게도 이미 초반부에 모든 것들을 언급해두었다. 무궁화 호 안에서 아이들이 세대를 거듭하며 점점 많은 것들을 잊어갔듯이, 독자들도 이미 작가가 알려주었던 사실들을 잊어갔을 뿐이다.
(혹은 내 안의 어떤 절망과 좌절이 이렇게 희망도 미래도 없는 해석을 내놓았을지도 모른다)
이후는 내가 얻은 해석에 관한 내용들이다.
1. 이아의 존재
"신인류가 버틸 수 있는 한계 속도로 5광년을 간다면, 단순 계산으로 약 70년 정도가 걸렸다."
"어떤 일로 기현이 저렇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려 했지만, 이미 우리의 거리는 0.1광년이나 벌어져 있었다."
기현의 영상을 기억하는가? 그의 영상이 무궁화호에 도착했을 때 이미 지구 상에 인구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5광년에 70년이라면, 0.1광년이면 겨우 1.4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 무려 100년 뒤에 그들을 따라올 우주선을 쏘아 올릴 수 있는 인류 따위는 없다. 그렇다면 지구에서 왔다는 '이아'의 정체는 무엇이며, 대체 왜 나타난 것일까?
이에 대한 내용을 말하기에 앞서, 자신이 260년을 생존해왔다고 말했던 할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려보자. 나는 이 사람이 우주선이 출발할 당시의 '나', 즉 통신실의 비밀을 알고 있는 1세대 선원 'L'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무궁화 호 내에서 이전 지구의 기억을 지닌 이들은 모두 소멸했으며, 남은 것은 '마지막'을 위해 세팅된 시나리오 뿐이라고 해석했다.
이아는 이육칠이 천장에서 훔쳐들은 가느다란 목소리의 주인공, 즉 선장이라고 본다. K가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진행되었던 계획들과 사과를 먹어본 적이 있다는 이아의 말, 260년 동안 임의로 고쳐왔던 선체의 내부를 모조리 꿰고 있는 이아의 모습 등이 이 해석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나는, 통신실의 비밀 만큼은 이아 역시 몰랐다고 본다. 그렇기에 그 단 하나의 사명에 짧은 생을 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2. 통신실의 비밀
"통신실에서는 매일 아이들에게 지구에서 온 편지를 읽어주었고, 아이들이 쓴 편지를 이진법으로 변환해 무선 신호로 지구로 보냈다. 그때는 몰랐다. 우주 방사능에 의해 멍청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반적인 전파보다도 매우 빠른 속도로 우주를 달리고 있었고, 당시 한국에서는 그에 맞는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제대로 된 통신 시설을 가동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매일 내가 컴퓨터로 받는 신호들은 이미 지구에서 코딩된 AI와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 아이들의 메시지를 제멋대로 해석해 내놓는 것이었고, 아이들이 지구로 보낸 메시지는 즉시 삭제되고 있었다."
""그 이후로는 관측 시설들이 굶주린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서 파괴되어 버렸거든. 더불어 막에서 나오는 방해 신호도 점점 심해지고 있기도 하고."
"방해 신호라니?"
"아카데미에서 안 배웠어? 막에 다가갈수록 신호가 어그러져. 그래서 우리가 지구에서 직접 막으로 가고 있는 거잖아.""
이미 작가는 무궁화 호와 지구와의 통신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친절하게 다 설명해주었다. 통신실의 컴퓨터가 내놓는 것은 미리 프로그램되어 있던 대답들 중 랜덤하게 출력되는 문장들이었고, 가족들과 통신한다는 환상을 빼앗을 수 없었던 '나'는 이 비밀을 죽을 때까지 자신만이 간직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기에 직접 무궁화 호와 접촉한 다음 지구로 통신으로 보내기 위해 100년 뒤 지구에서 따라왔다는 '이아'가 나타나지만, 아무리 희망적으로 해석해보려 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미 굶주림으로 멸종해가고 있었던 지구에서 100년이나 지난 뒤 또다시 연락도 두절된 무궁화호의 뒤를 쫓을 우주선을 발사할 수 있었다? 도킹 후 메세지 전송 만이 목표였던 작은 우주선 안에서 태어났을 이아가 사과를 먹어본 적이 있다? 붙잡혀서 사형에 처해졌어야 할 이아가 먼저 약속의 장소에 도착해 있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아브만미르 시뮬레이션에 의해 예측된 '정해진 결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각자는 충실하게 자신이 맡은 바들을 수행하며 종말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전체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는, 완벽한 춤을 추면서.
3. 그렇다면 신은?
이육칠이 뻗은 손가락 너머로 마주한 신 - 인간적이고도 인간적인, 무언가로 가리워지고 지친 피부의 - 은 헬맷에 반사된 자기 자신의 얼굴은 아닌가. 이육칠이야말로 전 우주에 유일하게 존재한 지성체이자 하나의 종으로서 마지막 남은 개체, 유일무이한 1이다.
<막 너머>의 이육칠이 맞은 마지막은 최후의 네안데르탈 인이 맞은 것과도 다른 광막한 고립과 유일의 끝이었다. 네안데르탈 인들에게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적어도 번식이 가능한 이종의 개체가 존재했었으니까. 전 우주에 단 하나 뿐인 지성체,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한 명.
그야말로 신이 아닌가.
이 해석을 마주한 순간,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을 느꼈다.
그 순간 밀려오는 회한과 좌절, 이것을 위해 그들이 겪어야 했던 시간과 경험들이 '허무'가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결말이어야만 했나. 그렇다면 어떤 '다름'이 존재했었단 말인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들이 쏟아졌다.
그가 무엇을 보고 느끼건, 그것은 그 순간 오롯이 '나' 혼자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나였다.
이것이,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독자들이 각자 마주할 수 있는,
'막 너머의 신'이었다.
4. 하나와 1, 그리고 아브만미르
그렇다면, 이들은 시뮬레이션 속의 존재들인가, 밖의 존재들인가?
작가가 하나들과 1을 끝까지 분리해서 표현했던 것을 더 생각해보고 싶었다. 세대를 넘어서서 '하나'로 표현되는 희망과 이상, 그리고 '1'로 표현되는 평범함과 생존을 위한 열망은 결국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혹은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이자, 0과 1의 세계일 뿐임을 중의적으로 표현코자 했던 것은 아닐까.
아브만미르 시뮬레이션 안의 존재들이 다시 아브만미르 시뮬레이션을 개발하는 그 시점에 도달한다면, 그 다음과 그 다음과 그 다음은 어디로 수렴하는가?
이 작품을 쓸 때의 작가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하겠다. 이렇게까지 모든 것을 단 한 점에 응집시키는 극도의 고립을 표현하기 위해 그의 안에는 어떤 것들이 품어져야만 했을까?
그래. 그 응집이야말로 빅뱅이다.
그리고 우리는, 독자로서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 지구 생명체들은 277년 전, 자신들만이 전 우주의 유일한 생명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즉, 외계 생명체는 없었다.
'위대한 아브만미르 박사'가 알아낸 사실이었다.
- 아브만미르가 인간이 아니었던 석사 시절, 그는 늘어만 가는 학자금 대출과 교수들의 갑질 속에서 중국산 컵누들 한 개와 피클 한 종지로 연명하고 있었다. 하루는 컵 누들도 떨어져 잡초가 섞여 있는 싸구려 마리화나로 배고픔을 잊으려 했다. 그가 마리화나에 불을 붙이려던 그 순간, 사이비 교주의 신적 체험처럼 그의 머릿속에 박사 논문 주제가 떠올랐다. 그것은 중력 가속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신적인 수식이었다. 그 수식은 일명 '미하일 수식'으로 제29차 개정 교육과정을 거친 초등학교 과학 교과서에도 수록된 내용이니 굳이 여기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겠다.
- 이는 인간이 불을 발견한 순간과 같았으며, 제임스 딘이 처음으로 청바지를 입고 등장했을 때와 비견할 만했다. 이 수식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공학자들이 광속에 가까운 속도를 내는 추진기를 개발했다. 사람들은 이를 '아브만미르 추진기'로 명명했다.
- 미국 정부는 아브만미르 석사에게 매일 마리화나 3그램과 엑스터시, 그리고 은밀하게 맥도날드 치즈버거와 치킨버거 세트를 지급하며 연구를 도왔다. 그들은 뒤이어 석사에게 미하일 수식에 필적할 만한 발견을 한다면, 대학 종신 교수로 임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브만미르 석사는 그러한 미 정부의 도움에 충실히 응답했다. 그는 매일같이 두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연구에 매진했으며, 자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크푸드와 포르노, 약에 둘러싸여 살던 석사는 정확히 한 달 뒤에 기자회견을 열었다.
"아인슈타인이 틀렸습니다."
-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된 기자회견은 아브만미르가 발작을 일으키며 끝이 났다. 기자들이 쓰러진 그를 찍기 위해 앞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초동 대처가 늦어졌고, 10분이 지나서야 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끝내 사망했다. 사인은 운동 부족으로 인한 급성 심부전증이었고, 그의 마지막 유언은 '미치도록 외롭다'였다. 일부는 그 유언이 '외계 생명체는 없다'는 사실을 미리 안 아브만미르의 통찰이라 했지만, 대다수는 말 그대로 아브만미르가 미치도록 외로워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사후에야 박사가 된 아브만미르는 단 한 번도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 동정이었으니까.
-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발견은 7년이 지나서야 해석되었다. 예일 대학의 할리 킴 박사에 의해서였다. 그의 하드에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미 정부는 그의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기존에 없는 슈퍼컴퓨터를 만들어 내야만 했다. 처리해야 할 정보량만 해도 지금까지 제작된 세계 모든 컴퓨터의 연산량을 합한 것보다 수천 배는 많았다. 슈퍼컴퓨터를 만들기 위해서 미 복지 예산에 버금갈 만한 예산이 소요됐고, 전투기를 만들던 기술자들까지 동원되어 2년여에 걸쳐 컴퓨터를 제작했다. 이 때문에 미 국방 예산이 1퍼센트나 증가했고, 강력 범죄율은 3퍼센트나 상승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슈퍼컴퓨터로 과학자들은 그의 시뮬레이션을 실행했다.
-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태초는 무無였다.
무는 '무엇도 언제나 없었다'는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 자기모순적인 '시간'을 만들어 내야 했으며, 이로 인해 무는 사라졌다. 시간의 탄생점에 무수한 시간대가 엇갈리면서 서로 다른 시간대를 가진 '공간'이 나타났다. 그때 공간 사이에 무수히 분절된 선들이 만나 아주 작은 '점'이 생겼다.
아주 작은 점은 순간의 압력도 견디지 못하고 터졌다. 그렇게 그 아주 작은 점에서부터 우주가 탄생했다. 우주 전체로 빛이 퍼져 나갔으며, 순식간에 은하와 별이 만들어졌다. 연구진들이 시뮬레이션 속도를 빠르게 하자, 우리 은하가 생겨나며 그 가장자리에 태양을 중심으로 한 행성 집단이 등장했다.
- 말을 마치고 나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종이를 나누어 주었다.
'국가를 위해.'
종이 앞면에는 커다랗게 캐치프레이즈가 적혀 있었고, 뒷면에는 무궁화호의 단면과 함께 '막'의 탐사를 위해 우주 비행사를 모집한다고 쓰여 있었다. 아래에는 지원자의 인적 사항을 적는 항목과 함께 부모님의 서명란이 보였다. 상단에는 부모의 면담이나 질문은 받지 않는다고 명시해 놓았다.
- 공무원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부모가 사춘기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홀로 우주에 보낼까? 그것도 달이나 화성이 아니라 광년 거리에 달하는 우주의 끝으로 말이다. 한번 나서면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자식을 보낸다니. 아이를 미워하거나, 굶주림에 지쳐 입 하나라도 줄이려는 부모가 아니고서는 국가를 위한다는 대의에 아이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 정부에서 아이들을 우주에 보내려는 이유도 명확했다. 아무리 아브만미르 추진기를 단 우주선이라 하더라도 무한정으로 속도를 낼 수는 없었다. 인간을 태우고서 일명 '한계 속도' 이상으로 속도를 낸다면, 뇌의 전기 신호가 우주선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면서 의식의 공백이 발생한다. 그러면 몸의 분자 구조는 똑같지만, 의식 구조가 달라지며 전혀 다른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다. 즉, 기억도, 의식도 완전히 뒤바뀐 정신 이상자가 우주선에 떡하니 등장하게 되는데, 어느 누가 그 우주선에 올라타려 할까? 신인류가 버틸 수 있는 한계 속도로 5광년을 간다면, 단순 계산으로 약 70년 정도가 걸렸다.
- G는 이 프로젝트가 오직 한국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G의 '신인류 프로젝트'로 태어난 신인류는 우주 방사능에 상당 부분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고, 효율적인 음식 섭취 및 소화로 음식을 비롯한 많은 자원을 최대한 경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더불어 한국이 아니라면 이런 일을 국가 주도로 할 수 있는 국가는 지구에 없었다. 북한은 식량난으로 이미 자멸한 지 오래였고, 미국은 지구 밖의 일을 신경 쓰기에는 지구 내의 온갖 이해관계에 너무나도 얽혀 있었으며, 인권을 외치던 유럽 연합은 자국 청소년들을 우주로 보내지는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겉으로만 야만적이라며 규탄했을 뿐, 뒤로는 G에게 특사를 보내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었다.
-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떤 존재가 있든 없든, 그 존재가 위협적이든 친근하게 다가오든, 상관없었다.
내게는 우주가 유일한 탈출구처럼 보였다. 우리 가족으로부터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 이대로 성인이 된다면,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형처럼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쉬는 날도 없이 비료를 밭에 날라야 할 게 뻔했다. 나을 리 없는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저 목숨만을 부지하기 위해 수십 시간 동안 매일 일하면서 G의 초상화 앞에 물을 떠놓고 살려 달라 비는 어머니의 기도를 들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지옥과 진배없었다. 유일한 탈출구는 하나였다.
지구를 떠나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다.
- 기근 당시 우리 가족은 가난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우리는 가난했기 때문에 무언가 없음에 빠르게 적응했고, 굶주림에도 노하우를 발휘했다. 이 집주인 같은 가진 사람들이 공복에 물을 실컷 마시다가 염분 부족으로 쇼크사했다면, 우리 가족은 침을 오랜 시간에 걸쳐 삼켜냈고, 라면 하나를 잘게 나눠서 세 가족이 3일에 걸쳐서 먹었다. (내가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다.)
아이러니했다.
살아남은 이들이 가난한 이들이라니.
- 하나의 어머니는 대기근의 여파로 죽었다. 당시에 영양실조로 몸이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하나를 임신해야 했고, 중절 수술을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하나를 낳다가 죽었다. 하나의 집은 불과 30년 전만 해도 강남에서 살던 부자 중의 부자였다.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대리석 바닥으로 된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굶을 걱정은커녕 삶을 살아가는 데 큰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 한 끼 식비가 한 가정의 한 달 식비와 맞먹을 정도였으니 엄청난 부자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 그러나 식량 위기가 현실화되면서 하나의 집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하나의 아버지는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려 했으나 그 누구도 그에게 음식을 팔려 하지 않았다. 가족은 오랫동안 굶었고, 하나의 외할아버지, 할머니가 굶어 죽었다. G는 신인류 프로젝트를 실시함과 동시에 인구 증산 정책을 시민들에게 강요했고, 하나의 어머니는 배급받기 위해 하나를 임신해야만 했다.
- "사방이 다 막혀 있으니까 답답해서 죽겠더라."
나는 이 지구도 그렇지 않느냐고 말하려고 하다가 말았다. 대기라는 천장과 중력이라는 족쇄에 갇혀 약육강식이라는 생존 방식의 질서에 따라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굳이 말하지 않으려 했다. 나만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으니까.
- 식량을 140년 치가 아니라 40년 치만 준비하다니.
지구를 벗어난 순간부터, 아니 지구에 태어난 순간부터, 부족한 자원을 다수가 나눠 먹으려는 지구가 만들어진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를 먹고, 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100년 치의 식량을 횡령한 사람들도 그런 원리의 연장선상에서 벌인 일이었다. 우리는 보기 좋게 당했고, 누구를 원망할 수가 없었다. 문밖에 있는 그 누구도, 형섭이 그 사실을 감당하려 악역을 자처했다는 사실을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형섭이 가슴팍을 움켜쥐며 말했다.
"나, 사, 사실은 지, 지구에서 계, 속 살고 싶었어."
- 더는 말하지 말라며 입을 막고 싶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이 형섭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살렸는데도, 형섭의 마지막 순간을 지킨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형섭의 입술은 파랗게 질렸고,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너는 돌아, 돌아가..."
형섭이 그린 것은 지구였다. 그토록 떠나고 싶어 했던 지구 말이다.
- 아직은 서먹했다. 내가 아파트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가 내게 남긴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하나는 나한테 그랬으면 안 됐다. 나는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응."
그런데도 하나가 형섭의 작전에 흔쾌히 참석해주어 고맙기도 했다.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형섭은 우주선에 올라타기는커녕 그전에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하나는 주저하지 않고 하겠다고 했다. 개인적인 감정을 접고서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하나에 대한 존경이 뒤섞여 속에서 무언가가 솟구쳤다.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어쨌든 이 둘에 따라 계획의 성패가 정해졌다. 구인류처럼 키가 크고 피부도 하얀, 이 아이들의 손에 말이다.
-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는 기원전 1900년경, 헤브라이족의 추장이 죄인을 처벌할 때, 죄인의 머리를 삭발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머리가 원래 길이로 자랄 때까지 그를 죄인으로 낙인찍는 셈이었다.
- 나는 하나에게 이어서 여러 가지를 말했다. 처음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내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시 태어나게 했다고 생각해라. 아마 2, 3일 후면 적응할 것이다. 평생 해야 할 일이니, 죄책감을 느끼면 안 된다. 모두의 생존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살인을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우리의 행위는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었으니까. 괜찮아야 했다. 그러나 그때 굵직한 비명이 들려왔다. 공기총이 남자를 완전히 죽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귀를 막았지만, 비명은 끊어지지 않았다. 소리가 손을 뚫고서 고막을 그대로 때리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프레스기에 찍혀 곤죽이 될 때까지 빠르게 죽여달라 빌기 시작했다. 이어 들려오는 짓이겨지는 소리와 갈라지는 비명이 머릿속을 휘젓는 것 같았다. 어지러웠다.
- 칠칠팔이 차마 스팀기에 넣지 못하고, 대신 반장이 넣은 그 옛 아이는 어떤가. 살겠다고 울음을 지르던 그 아이를 지금 우리가 먹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그것을 왜 막지 못했을까? 아니다.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어디까지나 내 상상일 뿐이었다. 오지 않을 상상, 와서는 안될 상상.
- 그런데 왜? 저 여자는 혁명을 원하는 걸까? 상위 직급인 데다, 배를 곯지도 않을 텐데. 무엇이 아쉬워서 목숨을 거는 걸까?
- 어딘가 망가져 버린 모습이었다. 뇌의 한 부분이 사라져 버린 느낌. 아니면 우리가 매일 먹는 감자 같은 모습. 자신이 먹혀도 찡그리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어떤 표정도 짓지 않는 그런 이상한 모습 말이다. 생각이 번뜩 스쳤다.
죽은 사람의 양분을 받고, 열매를 맺는 감자도 막 너머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만약 얻을 수 없다면, 감자는 왜 우리와 함께 가고 있는 걸까?
- "넌 할 수 없어. 너도 알고 있잖아. 여긴 시작점부터가 잘못됐다는 걸."
- "네가 뭘 알아? 네가 우리에 대해서 무얼 아느냐고? 하루 일 못 나가면 굶어서 죽을 고통을 네가 알아? 상위 직급이 우리 삶을 어떻게 알아?"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하고 감자만으로 연명하는 우리 인생을 상위 직급인 그가 알리는 없었다. 그는 우리와 다르게 삼시 세끼 모두 챙겨 먹고, 하루 일하지 않았다고 해서 굶어 죽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K는 눈을 똑바로 뜬 채로 내게 말했다.
"너희 삶은 몰라. 그래도 여기가 부당하다는 건 알아."
"뭐가? 배부르게 잘 먹고, 잘살아서, 키도 그렇게 크면서? 뭘 알아?"
갑자기 K는 지퍼를 내리더니 우주복을 벗었다.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K의 속살이 드러났고, 나는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K가 말했다.
"고개 돌려."
"뭐야?"
"고개 이쪽으로 돌리라고."
K의 목소리는 음산했다. 나는 눈을 뜨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K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나는 천천히 눈을 떴고 K의 나체를 보았다. K가 읊조리듯 말했다.
"난 너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걸까? 없는 걸까?"
- 나는 동물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아카데미에서 수업 자료로 나온 그림으로만 봤을 뿐이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인간이 지구의 모든 자원을 독점했고, 그 탓에 수백 종의 동물이 멸종했다고 말했다. 선생은 덧붙여 지구에 존재했던 동물들의 이야기를 했다. 지구에는 하루 수백 킬로그램의 음식을 먹어야 하는 동물들이 있다고 했다. 그중에는 몸 크기가 자그마치 사람 30명을 합쳐 놓은 것보다 큰 동물이 있었는데, 몸무게만 해도 수십 톤에, 지상에서는 중력을 이기지 못해 물에서 살아야 했다고 한다. 수 톤의 플랑크톤을 물에서 걸러 먹기 위해 이빨이 퇴화하고, 그 자리에 수천 개의 흰 수염이 자랐다. 상상하면 할수록 완전히 비효율적인 동물이었다.
- 아카데미에서 나는 그러한 동물의 이야기를 듣고는 가장 먼저 '무궁화호에 같이 타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둘째로는 '그렇게 많이 먹어야 하니까 멸종했지' 하고 조롱했고, 셋째로는 그런 동물이 과연 지구에 존재했을까 의문을 품었다. K도 그런 존재 중 하나였다. 정말로 그런 존재가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K가 다소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에 대해 궁금해할 점이 많다는 걸 알아. 다만, 나도 너처럼 여기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둬."
K의 사타구니 위쪽에는 남성의 성기가 달려 있었다. 거기까지였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바로 아래쪽에는 여성의 성기를 닮은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가슴도 도드라지게 튀어나와 있었다.
- 항해부에서 이성 간 대화 금지령을 공표하고 나서, 중성이 있다는 소문이 간간이 들리긴 했다. 중성은 남녀 성기를 모두 몸에 달고 있다고 했는데, 반장은 그런 존재는 없다고 말하면서, 있다고 해도 금방 비료가 될 것이라 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칠칠팔은 달랐다. 그날 그는 이발소에서 퇴근하던 길에 내게 말했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나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거야."
"왜?"
"저들이 내놓는 기준이 의미 없다는 걸 증명해 주는 존재니까."
그렇게 말한 칠칠팔은 이제 죽었다. 아니, 비료가 되어 다른 아이로 무궁화호에서 태어날 것이었다. 칠칠팔이 과연 K를 만났을까? 만났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그가 말했던 대로 K를 보고 정말 좋아했을까?
- "손님 밀려 있는 거 안 보여? 너도 스팀기에 들어가고 싶어?"
가윗날이 서 있었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반장은 가위를 더 깊이 들이밀었다. 목을 스쳐 피가 날 것만 같았다. 반장의 눈알이 옆으로 굴렀다. 눈알을 따라가자, 구멍에서 감찰실 선원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반장은 심한 욕을 뱉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 하나가 고개를 빼고서 나를 보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는 마치 스팀기처럼 손님들을 기계적으로 쳐내고 있었다. 내가 반장에게 욕을 듣고 있는 사이 K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몸에 묻은 머리카락을 털었다. 아까의 간절함이 잔뜩 담긴 표정은 상위 직급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K는 가벼운 눈인사와 함께 사라졌고, 나는 주머니에 든 머리카락 다발과 K가 건넨 배급표 다섯 장을 손에 쥐었다.
- "도대체 이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게 뭐야? 권력?"
K는 천장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도 따라서 고개를 들었다. 벽에는 온갖 기계 설비가 매달려 있었다. 전기선이 아래로 늘어져 있어 그것을 눈으로 따라갔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방이 어디와 이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유."
- K의 표정이 이상했다. 전과는 다르게 굳어 있었다. 어떤 무기로도 부수거나 뚫을 수 없는 철판처럼 보였다. 나는 K의 눈을 보고서 말했다.
"정말 그거 하나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어도 괜찮아?"
"나는 그렇게 믿어."
"그럼, 너 때문에 죽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상관없어?"
"심하게 들리겠지만, 죽어도 마땅한 사람들이야."
"뭐?"
"아무런 위기의식도 없이, 지시한 대로만 살다가 죽으라는 명령에 그냥 죽는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은 40세 전에 죽든, 40세에 죽든 똑같아."
그의 말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역시나 K는 우리 같은 하층민들과는 생각 자체가 달랐다.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든 사람이 누군데? 내가 어릴 때부터, 무궁화호는 엄격한 규칙과 규율로 모두의 생존을 강조했다. 내가 이렇게 무궁화호 자체에 반발심을 느끼게 된 것도 아카데미에서의 교육 때문이 아니라 칠칠팔과 함께 겪은 하층민에 대한 멸시와 모욕, 그리고 배고픔 때문이었다. 나는 K에게 말했다.
"속단하지 마. 이게 전부 누구 때문인데. 너 같은 상위 직급들 때문이지."
"누구 때문은 없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은 거지. 아니면, 아주 오래전에 생명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말이야. 이상하지 않아? 막 너머의 신은 전지전능하다면서 뭐든 할 수 있다고 하잖아. 근데, 우린 왜 이렇게 사는 거지?"
K는 긴 팔로 주위를 휘저었다.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분명 세계 자체에 결함이 있는 거야."
- 내가 반문하려 했으나, 옆방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앳된 목소리였다. 얼핏 들으면 소녀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끝음이 지나치게 낮았다.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저씨..."
- "끝이에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이아는 스팀기 버튼을 누르던 하나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아의 행동을 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K가 말하던 자유도, 먹을 것이 없다면, 살아 있지 못한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 아닌가? 너무나도 머리가 혼란스러워 나는 칼날을 지나쳐 가려는 이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이아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서 말했다.
"전 지구에 통신을 보내야 해요.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우리가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라 말하던 K를 떠올렸다. 그러나 정작 우리야말로 희망을 박살 내버리는 존재였다. 나는 말했다.
"우리가 건재하다고 지구에 알리는 게 목적이잖아. 그런데 이렇게 여기 자체를 망쳐버리면 어떻게 해?"
이아는 눈을 똑바로 위로 치켜떴다. 자기는 마치 당연한 선택을 했다는 듯이.
"상관없어요. 저는 여기 있으면서 봤어요. 여기 사람들은 전부 다른 사람을 죽이고 먹으면서 살아남고 있어요. 지구는 그런 무궁화호의 모습을 원하지 않아요."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어."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어차피 지구는 무궁화호가 막에 도착하기 전에 멸망할 거고요. 어쩌면 이미 멸망했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전 남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해요."
- '그래서, 변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무엇을 위해? 나는 무엇을 위해 죽으려 하는가? 이제 사는 이유는 찾지 않으려 했다. 죽음의 이유를 찾아야 했다. 나는 칼날을 지나쳐 이아에게로 달려갔다.
- "난쟁이들보다도 못한 새끼들."
그 여자는 이미 정신을 잃은 사람을 발로 차대며 말했다.
"일도 안 하고, 놀기만 노는 쓸모없는 놈들."
매번 이런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우리보다는 나은 상황이라 믿었는데. 한 면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백팔은 익숙한 듯 앞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지도 않았다. 백팔을 비롯해 모든 유전자 인간들이 그랬다. 모두 명령에 순응하며 갑판으로 나아갔다. 육십구가 읊조리듯이 말했다.
"일하지 않는 인간과 일할 수 없는 인간은 다른 건데..."
- "... 알고 있었어. 심지어는 내 몸 상태까지도 말이야. 그때 나는 다 끝났다고, 처형당할 거라고 믿었는데, 부선장은 이아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면서 하던 대로 하라고 했어."
"대체 왜?"
“그건 나도 몰라. 그런데 확실한 건 두 가지야. 그들도 나름의 계획이 있다는 것과, 우리는 절대 항해부의 계획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거야. 갑판부와 미리 합의된 대로 내가 뭐라도 하려고 했지만, 그것만은 항해부에서 직접 나서서 막았어. 우리는 항해부 구역 일부를 점거하기도 했지만, 치안 유지대장 손짓 한 번에 다들 머리나 몸이 터져서 죽었어."
- K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무기력함이 잔뜩 피어올랐다. 움직일 수 없는 몸과 바꿀 수 없는 환경, 그리고 우리의 선택마저도. 모두 어떤 거대한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체념은 지독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K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쉬는 거야. 그래야 무언가를 바꾸든, 파괴하든 할 테니까."
K는 나를 자리에 다시 눕히고는 내 어깨를 세게 쥐었다. 일어나지 말라는 신호 같았다. 나는 결박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K가 방을 나가며 말했다.
"믿어보자. 우리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 침대에 결박당한 사람처럼 3일을 꼬박 앓아누웠다.
배고픔이 해결되자, 몸에 있는 모든 세포가 영양분을 갈구하는지 열을 내었다. 열이 떨어지지 않자 K는 나를 공기 샤워실에 던져두고는 경과를 지켜보았다. 샤워 기회를 뺏긴 조직원들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중얼거렸다.
"어차피 죽을 거."
공기들이 내 몸을 스치며 열을 빼앗았고, 나는 너무도 추운 나머지 열어달라고 문을 두들겼지만,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발가벗은 채로 몸을 떨던 나는 기억을 잃었다.
- 작은 빛이 그곳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구멍에 눈을 대었다.
"이게 뭐야?"
문 너머에는 우주선에 매달리다시피 떠다니는 컴퓨터 한 대가 있었다.
"사실이었어요."
- 이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벽에 다가가 무언가를 꺼내 왔다. 우주복이었다. 이아는 내게 우주복을 입히려 했으나, 나는 이아에게 우주복을 받아 스스로 입었다. 낑낑거리기는 했으나, 입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 몸에 딱 맞게 우주복이 설계되어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나는 항해부가 우리에게 일을 더 많이 시키기 위해 그런 것이라 믿었다.
- 이아가 안전성을 검사한 뒤에 자기 몸과 나를 끈으로 연결했다. 이아가 나를 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아가 문을 열자, 우리는 밖으로 빨려 나갔다. 우주선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별빛이 청색에서 적색으로 변해갔다. 어지러움과 함께 경이로움을 느꼈다. 선장 L이 말하던 천국이 이런 걸까? 이아가 말했다.
- 이아가 모니터 아래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깜빡거리더니 모니터가 팍 하고 꺼졌다가 켜졌다. 이아는 모니터를 손으로 훑더니 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구에 전송됐어요."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다니.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기뻐야 했지만, 기쁘지 않았다. 헬멧 유리에 내 얼굴이 반사되어 보였다. 입으로는 웃고 있었으나, 눈만 보면 마치 우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순간을 각자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아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울음에 가까운 웃음소리만 낼뿐,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곤 죽음뿐이었다. 항해부가 반란을 진압하고서 우리를 모조리 처형하든, 낮은 확률로 반란에 성공하든, 우리는 막을 나아가는 그 과정에서 모두 죽을 것이다. 이아가 슬픈 눈을 하고서 물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지구인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 "배터리에 남은 에너지로는 질문 세 가지가 한계예요. 아저씨께 특권을 드리는 거예요."
모니터에 까만 선 하나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주어진 특권에 가슴이 떨려 왔다. 지구인들과 이렇게 소통할 수 있을 줄 몰랐다. 그들은 살아 있을까? 지구는 무궁화호보다 수천만 배는 더 크다는데, 그곳 사람들은 이제 굶주림에서 벗어나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잠시 고민 끝에 말을 꺼내려 하자 이아가 규칙 한 가지를 설명했다.
"예, 아니요로 답할 수 있는 질문만 하세요. 그 이상은 에너지가 부족해서 답변을 받을 수 없어요."
- "지구인들은 이제 배를 곯지 않나요?"
그러자 깜빡이는 선이 뒤로 밀리더니 어떤 글자가 적혔다. 내가 이아를 보자, 이아가 글자를 읽어주었다.
"예."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지구인들이 더는 굶주리지 않는다니.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곳을 떠나온 것일까? 나는 질문을 토해내듯이 이어갔다.
"우리는 지구로 돌아가야 하나요?"
"아니요."
예, 아니요로만 대답하니 물으면 물을수록 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미 무궁화호와 관련해서는 마음 정리를 마쳤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질문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아가 뒤에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지막 하나 남았어요."
나는 머리를 쥐어 짜낸 끝에 마지막 질문을 했다.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커서는 깜빡거렸지만, 대답이 적히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나는 다른 질문을 하려고 했을 때, 모니터에 단 하나의 글자가 적혔다. 적힌 글자는 나도 읽을 수 있었다.
'1'
그 순간, 갑자기 모니터가 완전히 꺼져버렸고, 다시 켜지지 않았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모니터를 잡았으나, 연결 부위가 끊어지면서 컴퓨터는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내가 컴퓨터를 붙잡으려 했으나 이아가 날 말렸다.
"이제 끝났어요. 그냥 두세요."
<작가노트>
글을 쓰는 과정은 이래.
일단 나를 끄집어 내야 해. 이미 난 너무 많은 글을 써서, 내가 모르는 내가 필요하거든.
이건 매일, 매 순간 해야 하는 일이야. 나 자신을 고문하지 않고는 이제 글은 나오지 않아.
한계까지 몰아붙여, 사랑을 하고, 상처받고, 만성적인 우울에 친구들이 떠나가고, 세상의 불합리함에 비명을 내질러. 그러고는 내가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서 방황을 하고, 술을 마시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으니.
절벽에 몰린 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해, 아주 원초적이고, 야생적인 나 말이야.
거기서 끝나지 않아. 그렇게 발견한 나를 정성스럽게 요리해야 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야. 올바른 정신으로,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로 집도해야 하거든. 감정이 들어가선 안 돼. 마치 외딴곳에서 처음 만난 환자를 대하는 것처럼 냉정해야 하지. 나를 자르고, 엮고, 이어 붙이고, 더는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순간까지.
이 과정은 계속 돼.
당신에게 내어놓는 과정은 또 달라. 많은 용기가 필요해. 내게서 떠나간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내가 내어놓은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아닌 모든 것이다. 떠나간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해. 죽은 사람을 잊으려 몸부림치는 산자들처럼 말이야.
의사 선생님이 물었어. '목숨보다 그게 더 소중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대답하면 온몸이 묶인 상태로 어디에 갇힐 것 같았거든. 비트겐슈타인이나 푸코 같은 철학자의 유언은 이제 중요하지 않아. 나는 그래. 이 글을 쓰다가 내가 죽더라도 이 글이 누구 하나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내가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이제 믿기로 했어.
잠깐 우울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자.
- 장편 심사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받은 작품이 있었기에 순식간에 끝났다. 장편 응모작들은 단편 응모작들에 비해 작품의 규모와 스펙트럼이 오히려 작아진 느낌을 주었다. 진부하거나 낡은 상상력, SF의 무늬만 약간 두른 그냥 소설, 특정 작가의 영향을 받은 듯한 작품, 무엇보다 대사로만 줄줄이 이어질 뿐 서술과 묘사는 아예 생략된 작품도 없지 않았는데 대사의 양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서술형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아 기본기가 다져지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우수한 단편에 비해 우수한 장편이 나오는 타율이 적은 것은 SF도 마찬가지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은 갈증을 해갈해 주는 큰 비와도 같은 작품이었다. 다른 응모작과 확실한 단차가 느껴진다고 할까. 우주선이 등장하고 소년·소녀들이 선발되는 이야기가 도입을 이루지만 이 소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 계급과 수저의 세계, 소년원과 수용소의 세계다. 생존을 향한 주인공의 질주가 주는 몰입감이 대단하기에 마지막 문장을 통과하는 순간 독자는 이 모험을 함께 치러낸 듯한 확장감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하나의 인생을 살아본 느낌,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내는 다성적인 목소리, 외부의 변화에 맞물려 주인공의 성격적 특징이 변화해 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장편이 주는 즐거움인데, ...
- 김보영
- 이 소설은 설득력 있게 어려운 과업을 돌파해 나간다. 무엇보다 이만한 길이의 작품을 제대로 알고 장악하여 쓴 악력이 대단하다. 생존투쟁이 주를 이루기에 소설의 정서는 어둡지만 작가는 한편으로 유머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 내가 읽은 라면박스 2개 분량의 원고들, 이 원고 안에는 모두 '미래'가 심어져 있었다. 공포와 매혹으로 얼룩져 있는 이 플래시포워드 Flashfoward의 소설에는 쉽게 희망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반짝이는 순간을 품고 있었다. 당선 유무와 상관없이 응모해 주신 모든 분들은 '미래형' 시제의 소설을 썼다. 앞으로의 창작의 순간에 동료 창작자로서 응원과 박수를 보낸다.
- 김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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