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오윤희] 삼개주막 기담회 - 1

일루젼 2022. 9. 1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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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오윤희
출판 : 고즈넉이엔티 
출간 : 2021.05.21 


       

'리율'의 웹툰 <신기록>이 드디어 드라마화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소재의 특성상 조금만 삐끗하면 'New 전설의 고향'으로 직행할 텐데, 부디 <신기록>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린 웰메이드 드라마가 되어주길 간절히 소망한다. 이제 'SNOWY_OWL'의 웹툰 <홍도>만 애니화/소장화가 되어주면 좋겠는데. 작가님 제발 돌아와 주세요. 

 

해서 이런 분위기의 작품이 읽고 싶어져서 <삼개주막 기담회>를 골랐다.  

 

지나치게 신파로 빠지지 않으면서도 적절히 섞인 사연들이 맛깔나다. 1권에서는 '삼개주막'이라는 고정된 공간을 찾는 이들이 가져오는 사연과 기담들을 위주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데, 백인백색이라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 같아도 저마다 사연 없는 이들이 없다. 가만 생각하면 그 시대에 그만한 사연 없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사실 현재도 마찬가지다. 나만 빼고 다들 잘 지내는 것 같아도 저마다의 사연과 고민 없는 사람이 없다. 그것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빛났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탄탄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용어들이다. '미묵'처럼 잠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지만 낯설어 보이는 옛 단어들이 종종 등장해 시대상의 맛을 살렸다. 토막토막의 이야기들은 그 자체도 흥미롭고 기이하지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들의 사연이 덧씌워지며 점점 깊어진다.

 

2권이 기대된다.  

 


   

- 동네 옹기장 박씨가 아내 장례를 치른 뒤 어깨가 축 처진 채 주막에 와서 막걸리를 몇 병씩이나 들이키고 계산하려 할 때는 아무 말없이 그냥 가라고 손사래를 친 적도 있다. 이렇듯 드러내 놓고 친절하진 않아도 야박하지 않고, 푸근한 정감이 있다는 게 손님들이 삼개주막을 찾는 이유였다. 

- 어느 주막이고 간에 '중노미'라고 불리는 일꾼이 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안주를 훔쳐 먹으려는 양심 불량 손님들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주막에선 술을 한 사발 시키면 공짜 안주 한 점이 따라 나오게 마련이다. 손님들은 주막에 들어서면 젓가락 통에서 젓가락을 뽑아 자신이 먹고 싶은 안주를 집어다 석쇠 위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한 번은 별도로 돈을 내지 않고 안주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주모가 바쁜 틈을 타 처음인 척하면서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안주를 꺼내 먹는 사람들도 꼭 있게 마련이었다. 이런 일이 누적되면 주막 입장에선 적자를 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악질 손님을 가려내기 위한 감시자를 붙이게 됐는데, 그게 바로 중노미였다. 대개는 중노미 역할을 맡을 일꾼을 고용하는데, 삼개주막에선 주모의 첫째 아들 선노미가 이 일을 담당했다.

 

- 선노미는 올해 열네 살 된 청년이었다. '선한 놈'이 되라는 뜻에서 지었는데, 양반 아닌 계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었다. 

 

- "그런데 저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까?" 
"당신 얼굴을 보면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오르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 얼굴은 뚜렷하지 않고 잡힐 듯 말 듯 윤곽이 희미하게 보인다네. 그건 당신이 그 여인을 취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지. 이제껏 이런 사람은 당신 말고 한 명밖에 본 적이 없소." 
"제가 그 여인을 취하지 않으면 평생 홀몸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그렇소. 당신 얼굴에서 보이는 여자는 한 명뿐이니까." 
"그렇다면 필히 그 여자 얼굴을 그려주십시오. 절대로 그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노인은 팔생의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게 당신에겐 안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소. 그래도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을 거요?" 

- "때로는 아는 것이 독이 될 때도 있는 법인데... 그런데도 굳이 아는 쪽을 택하실 거요?" 
놀랍게도 노인의 음성엔 팔생을 안쓰럽게 여기는 기색이 배어났다.
"아는 게 독이 된다는 게 무슨 말씀입니까?"

 

- "신이 왜 인간에게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안 알려주는지 아시오? 그건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자비요. 알아봤자 인간이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 
"그 말씀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물론 자신이 죽을 날을 알게 되면 충격이 크겠지요. 하지만 그걸 알게 됨으로써 각자가 자기 나름의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갈지, 살날이 얼마 없으니 그저 흥청망청하며 즐기다 갈지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군. 인간이 하는 선택이 자신이 의도한 결과대로 흘러갈 거라고 생각하시오? 그렇지 않아. 우리는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꼭두각시일 뿐이요." 
"그렇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영감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영감님의 능력을 보지 않았더라면 또 모를까 이렇게 된 이상 그냥 갈 수는 없습니다." 
노인은 깊은 한숨을 몰아 쉬었다.
"결국 가시밭길을 택하려고 하는군... 어쩔 수 없지." 

- 그 물음엔 팔생도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괴로움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여인을 생각할 때마다 이렇게 가슴이 뛰고 설레는 행복감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가슴 저린 괴로움을 동반한 무한한 행복과 아무것도 없는 평온함, 둘 중 어느 게 더 행복한 삶일까.
아무리 시간이 가도 팔생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는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 팔생이 이야기를 다 끝마쳤을 때 세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팔생과 남자들 사이에선 야릇한 공기가 감돌았다. 

 

- 안마당에서 주모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기적으로 삼개주막을 찾는 방물장수 할멈이었다. 할멈은 집주인 허락을 받지 않고도 집 안뜰까지 들어왔는데, 그건 예외적인 경우였다. 남자인 보부상들이 주로 장터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판다면, 여자가 대부분인 방물장수는 직접 가정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여자들은 외출이 자유롭지 않아 장에서 물건을 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방물장수는 화장용품을 비롯해 여자들에게 요긴한 물건을 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는 게 일이었다. 

- 방물장수 가운데는 나이 많은 노파들이 많아 이들을 '아파(牙婆
)'라고도 불렀다. 삼개주막을 찾은 할멈 역시 등이 구부정하고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더 많은 것이 '아파'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외모였다. 온화한 빛이 어린 두 눈과 다부진 인상을 주는 입매엔 가느다란 잔주름이 자글자글 잡혀 있었고, 살집이 없는 이마에도 세월이 할퀴고 간 흔적이 굵게 패어 있었다. 하지만 자기 머리통보다 몇 배나 큼직한 커다란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온종일 걸어 다녀도 딱히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면 몸을 놀리는 일엔 어지간히 숙련된 모양이었다.  

 

- 가비가 측실로 들어오면서, 나리는 뻔질나게 드나들던 기방 출입을 딱 끊었다. 가비의 치마폭에 싸여 하루 종일 두문불출하는 날이 늘어났다. 나리가 가비에게 푹 빠진 으뜸가는 이유는 빼어난 미모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짜 나리를 휘어잡은 비결은 단지 고운 얼굴만은 아니었다. 가비는 나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읽어내 비위를 맞추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타고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열악한 성장 환경 속에서 스스로 터득한 생존 기술인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술과 도박을 일삼는 아버지 밑에서 잡초처럼 자라난 가비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눈치가 빠르고, 영악했다. 타인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득이 될지를 순식간에 파악했다. 심지어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치심이나 자존심쯤은 저만치 밀쳐놓을 수 있는 처세술까지 갖췄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지체 높은 가문서 '아가씨'로 자란 마님은 애초에 가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음에 없는 소리는 절대 하지 못하는 마님과 달리, 가비는 나리 앞에서 낯 가려운 칭찬과 아부의 말을 태연히 주워섬길 수 있었다. 

 

- 그러거나 말거나 나리의 애정은 나날이 깊어졌다. 나리는 연희가 죽은 자신의 애첩과 꼭 빼닮았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생각할지언정 마님처럼 언짢게 여기지는 않았다. 하긴 가비가 죽은 내막을 속속들이 알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라도 연희가 죽은 가비의 환생일지 모른다고 남몰래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할멈은 어쩌다 한 번씩 그게 궁금했다. 만일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나리는 가비가 자신을 잊지 못해 딸로 태어났을 거라고 여겼을 게 틀림없었다. 매사를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게 남정네의 사고방식이니까. 하지만 마님의 생각은 달랐다. 마님은 가비가 자신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연희가 되었을 거라 여겼던 것이다. 

     

- 산속에 가둔 아이는 쫄쫄 굶기다가 굶어 죽기 직전에야 간신히 허기를 채울 수 있을 만큼만 음식을 던져줬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이는 몸이 앙상하게 마르고,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아이의 빼빼 마른 몸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좁은 나무궤짝에 온갖 좋은 반찬을 집어넣어 놓고 아이가 제 발로 궤짝 안으로 들어가게 유혹했다. 맛난 음식을 보고 눈이 뒤집힌 아이는 백이면 백 어떻게든 그걸 먹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바짝 곯은 몸을 궤짝 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러면 궤짝의 뚜껑을 꼭 덮어서 아이가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했다. 궤짝에 갇힌 아이는 좁은 궤짝에서 몸부림치면서 서서히 죽어갔다. 
"대, 대체 왜 그런 끔찍한 일을 하는 거요?" 
삼돌이는 질린 표정이었다.
"고독(蠱毒)이란 걸 아시오?"

- 잘 정리정돈된 정갈한 집이었다. 사랑채엔 실내로 햇볕이 드는 걸 막느라 처마 밑에 송첨(松簷)이 설치돼 있었다. 상록수 잎과 가지들을 엮어 차양처럼 드리운 송첨은 마치 비취색 병풍을 매단 것 같았다. 작은 연못이 딸린 정원엔 아름드리나무가 우거져 한 폭의 그림 같은 정취가 느껴졌다. 집주인의 고아(高雅)한 취향에 도련님은 내심 다시 한번 놀랐다. 

 

- 바깥과 마찬가지로 정갈한 방이었다. 기름을 먹여 바른 매끄러운 장판 위에는 학과 봉황이 새겨진 화문석이 깔려 있었다. 장수와 복을 상징하는 수(壽), 복(福) 글자가 들어간 화문석은 호화롭지는 않았으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도련님이 방으로 들어서자 대감마님은 앞에 있던 책상을 옆으로 치웠다. 글을 쓰고 있던 모양인데, 언뜻 눈에 들어온 필체가 우아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으나 출출하실 터인데 요기라도 하시지요."

잔뜩 갈증이 일었던 도련님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로 목을 축였다. 한 모금 마시자 그윽한 향기가 입안에 가득 퍼지는 것 같았다. 
"전라도 순천에서 따온 작설차요. 조선에서 나는 작설차 중에선 최고로 치지요." 
"아, 그렇습니까."
도련님은 감탄하며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차에 곁들인 것은 어지간해선 상에 잘 오르지 않는 귀한 약과였다. 문득 집주인이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도련님은 방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한쪽 벽을 다 차지한 서가엔 여느 양반가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서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개중엔 중국에서 건너온 손에 넣기 힘든 책도 눈에 띄었다. 대감마님이 직접 그린 것으로 보이는 산수화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다. 

 

- "제가 비록 배운 게 많지 않으나 학식 높으신 선비를 알아볼 정도의 식견은 갖추었지요. 외람되오나, 학문의 깊이가 상당한 듯한데 어째서 그것을 떨쳐 보이지 않으신 겁니까?" 
대감마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안해진 도련님이 초면에 괜한 말을 한 건가 싶어 걱정하던 찰나, 대감마님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학문적 식견이라는 게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거라 생각하시오?"

"그건 아니지만..." 
도련님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글을 읽는 궁극의 목적이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서라는 걸 귀공께서도 잘 아실 게요. 이 몸은 배움이 얕기도 할뿐더러 내가 가진 걸 남에게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없소." 

 

- 대감마님 댁 생활을 더없이 만족스러워하는 도련님과 달리, 하인은 그 집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콕 집어 마음에 들지 않았다기보단, 어딘가 모르게 꺼림칙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여기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일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평생 집안일 따위야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 도련님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허드렛일만 하며 살아온 하인에겐 그게 너무나 이상했다. 가족끼리 단출하게 살고 있다고는 하나, 일꾼이 없으면 저택을 이토록 정갈한 상태로 유지하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나리네 식구와 할멈을 제외하곤, 하인은 집 안에서 다른 사람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식사 때면 하인이 묵고 있는 침소 앞엔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밥상이 놓여 있었고 ...

 

- 이래서야 이야기가 끝없이 빙빙 돌며 되풀이될 판이었다. 아, 내 동생은 왜 이렇게 따지기 좋아하는 피곤한 아이일까, 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 "열 살밖에 안 됐는데 제법 사리분별이 밝구나."
뜻밖의 칭찬에 옥이는 당황해 몸을 움츠렸다.
"남들이 하는 말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의문을 품고 스스로 이치를 따져보지 않았더냐. 어른들도 좀처럼 할 수 없는 일이다."

옥이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도 무조건 세간 여론을 따르기보다는 저 아이처럼 이치를 따져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남자의 목소리엔 어딘가 한스러운 기색이 배어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허공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갑자기 입맛이 사라졌는지 상을 물리고 자매에게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너희들에게 해줄 얘기가 있는데, 들어보지 않으련?"

 

- "그렇다면 네가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하겠느냐?"
"물론입니다. 서방님께서 살아계셨다면 몇 년이 걸리든 꼭 과거 시험에 붙을 수 있도록 내조할 생각이었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율이도 꼭 훌륭한 선비가 될 수 있도록 힘써서 가르치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도련님께서도 학문에 정진하시겠다면..."
'도련님' 대목에서 정씨의 말꼬리가 조금 흐려졌다. 시어머니도 공부와 거리가 먼 차남을 입에 올리는 건 피차 낯간지러운 일이라고 여겼는지 서둘러 말을 끊었다. 

 

- "방금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허씨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다 하겠노라고, 그건 모두 거짓말이었던 게냐?"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왜 제가 죽어야만 합니까?"

애원하는 정씨의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시어머니 음성은 차갑기만 했다. 
"집안에 열녀가 나오면 나라에서 포상을 하게 되어 있다. 열녀 가문은 경제적 지원을 받고, 열녀 집안 남자들은 관직 진출도 쉬워지지. 게다가 만에 하나 열녀문이라도 하사 받는다면,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으로 길이길이 남을 게 아니더냐." 
정씨의 안색이 입고 있는 상복 색깔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것 때문에 저더러 죽으라 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율이는요? 아비도 없는데 어미인 저마저 죽으면 율이는 어떻게 하라고요?"
"율이는 어엿한 허씨 집안 장손이다.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내가 정성껏 키울 것이다. 그리고 율이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네가 죽는 편이 그 아이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야. 청상과부가 수십 년간 수절해도 온갖 추문이 따르기 마련이다. 허나 네가 열녀가 된다면 애초에 그런 추문이 생길 일도 없을 테니 율이는 열녀의 자손이 될 것이고 앞길도 탄탄하게 필 게 아니겠느냐." 

 

- "형수님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눈 한번 딱 감고 해 주십시오."
도련님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달라는 말을 노름판 돈 빌려달라는 말처럼 가볍게 내뱉는 도련님을 보며 정씨는 실망을 넘어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자제력을 잃은 정씨 입에서 참고 참았던 말 한마디가 툭 터져 나왔다. 
"본인은 노력할 생각도 않고서 남에게 희생만 강요하시나요!"
도련님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못난 사내가 알량한 자존심에 생채기를 입었을 때 곧잘 짓곤 하는 표정이었다.  

- "만들어진 거라고? 그래,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열녀라는 게 원래부터 만들어진 게 아니더냐?"
"네?"
옥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 나라에선 지아비를 따라 자결하는 게 아녀자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칭송하지. 또 열녀가 나오면 기리기 위해 정문을 하사한다. 어쩐다 하면서 추켜세우고. 그러니 사람들은 아내가 남편을 따라 죽는 게 의로운 행동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 결과적으로 수많은 과부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단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가 열녀라는 허상을 만들어낸 공범인지도 몰라." 

- "한 번 보고 들은 걸 모조리 기억하는 건 놀라운 재주지. 양반으로 태어났으면 크게 출세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로고."

칭찬인지 뭔지 모를 말에 당황한 선노미는 묵묵히 제 발치만 쳐다봤다. 선비가 그런 선노미를 집요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력이 뛰어나도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이따금 머릿속 기억을 되살리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방금 네가 했던 것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모조리 생생하게 기억해내긴 어렵지. 글을 알지는 못할 터인데,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너만의 방법이 있느냐?" 

- "한 번씩 짬이 날 때마다 이 그림들을 보면서 기억을 되살려보는 거로구나. 그렇지?"
선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는 빼어난 경치를 보면 자기 눈으로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림으로 그린단다. 시인은 훌륭한 구절이 떠오르면 그걸 가슴에만 담아두지 않고 글로 적어두지. 너도 그들과 같은 감성을 가진 모양이구나. 다만 제대로 표현할 수단을 못 찾은 게지." 

-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 것이냐?"
"네?" 
"네가 그린 그림들을 보니 하나같이 기이하거나 괴기스러운 이야기뿐이구나. 주막에서 일하면 보고 듣는 것이 많을 텐데 어째서 특별히 이런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 건지 물었다." 
"그, 그건..."
선노미도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순 없었다. 일상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이야기,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이야기는 언제나 선노미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거나 그리고 있을 때면 주막집 허드렛일을 하는 자신의 신분도, 매일같이 반복되는 고된 노동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 "달포에 한 번, 모임 시간은 술시(戌時: 저녁 8시 무렵). 그 정도라면 장사에 크게 지장은 없겠지?" 
선비가 선노미 뒤에 선 주모를 보고 말했다.
"하오나..." 

선노미는 여전히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선비는 그런 선노미에게 미끼를 던졌다.
"보아하니 네 종이가 다 떨어져 가는 것 같은데, 모임에 나오면 종이를 받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제야 선노미 눈이 반짝 빛났다. 선비도 그걸 알아챘는지 짓궂은 미소를 짓더니 결정타를 날렸다.
"혹시 모르지, 네가 아까처럼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면 거기 있는 누군가 답례로 네게 언문이라도 가르쳐줄지. 너는 그림보다는 글에 재능이 있어 보이니 그 편이 앞으로 기록하기에도 좋을 테지."

 

 

 

 

 
삼개주막 기담회(케이팩션)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은 기묘하고도 섬뜩한 이야기가 찾아온다! 한국 전통 스릴러 기담소설 〈삼개주막 기담회〉 소름 끼치도록 생생한 스토리와 한순간에 뒤집히는 충격적인 반전 그리고 그 속에서 배어 나오는 삶의 이치까지 마포나루 어귀 삼개주막, 그곳에서 들려주는 한없이 끔찍하고 기이한 이야기들 들려주는 자도, 듣는 자도 믿기지 않는
저자
오윤희
출판
고즈넉이엔티
출판일
202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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