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아우구스테 레히너 / 김은애
출판 : 문학과지성사
출간 : 2017.07.15
오랜만에 눈에 띄어 일독. 개인적으로는 <니벨룽의 노래>보다는 <니벨룽의 반지> 쪽을 훨씬 마음에 들어 하는데, 비단 신화적인 요소뿐만이 아니라 지그프리트와 브륀힐데(브룬힐트) 간의 관계성도 '반지' 쪽이 훨씬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오페라도 좋지만 울리 에델의 <니벨룽겐의 반지>도 매력적으로, 특히 마지막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오는 음악이 인상적이다.
이 판본은 <니벨룽의 노래>를 기반으로 하되 독자의 연령층을 다소 낮추어 표현한 듯한 느낌이다. 아무래도 저자가 아동/청소년 문학을 다루어왔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니벨룽을 처음 접하는 분들께는 권하고 싶지 않다. 2부의 훈족의 유럽 침공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면 모르겠지만 여성들 간의 알력 다툼이 번져나가 국가적 비극이 일어난다는 형태의 단순화된 도식이 썩 매력적이지는 않다.
특히 불의 영혼을 다루던 대장장이를 그을음으로 더럽혀진 하찮은 이들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부터 이미 당대의 느낌을 많이 잃어버리고 있다고 본다. 제철 기술이 지금과 같지 않던 고대 시대, 청동이나 황동이 아닌 철을 순철과 강철로 제련해내는 기술은 신의 기술이었다. 니벨룽이 불을 다스리고 철을 벼려내는 자가 왕국을 이룬다는 전설 하에 흘러가는 이야기임을 제대로 짚어가며 따라가야, 기껏 찾아 읽는 고전적 즐거움을 더 강렬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원전 자체에 느끼는 약간의 아쉬움이라면 기독교-로마 문화가 끼친 윤색을 꼽을 수 있다. 여러 판본이 있지만 니벨룽 전설은 기본적으로 에다와 볼숭 사가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초인적인 힘이나 자연적인 신비함을 문명화된 힘이자 기독교적 질서를 상징하는 군터와 크림힐트가 각각 정복하고 있음을 보라. 용과 난쟁이, 전설의 검으로 상징되던 신화적 질서가 기독교적 질서 안으로 포섭되고, 이후 크림힐트의 원죄적 -여성적- 허물로 인해 기존 질서가 붕괴한다. 끝내 이방족인 훈족의 침략과 그로 인한 겁화마저도 그녀로 인한 것이었음이 암시적으로 들어가 있는데, 1부와 2부의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 후세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는 연구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볼 때 개인적으로는 브룬힐트에 관한 부분도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지그프리트가 초자연적인 남성의 힘이라면 브룬힐트는 그에 상응하는 여성적 힘이다. 이 둘의 조화로워야 했을 결합이 '인간적인' 두 남매와 얽히며 어그러지는 비극적 애달픔이 개인적으로 니벨룽에서 백미로 꼽는 부분이기에, 아무래도 나는 <니벨룽의 반지>를 더 편애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뻗어 나오는 하겐의 탐욕과 라인강의 황금으로 이어지는 허망함, 신들의 탐욕 또한 흥미롭다.
결론 : 풍월당의 <니벨룽의 반지> 세트를 읽어야겠다. 혹은 영화 <니벨룽겐의 반지>를 보셔라.
- 1. 이 책은 게르만 민족 대서사시 <니벨룽의 노래 Das Nibelungenlied>를 지은이가 산문 형식으로 평역한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2. 인명, 지명 등 고유명사의 표기는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 따랐다. 이 책에는 독일 지역을 비롯해 현재의 유럽에 해당하는 여러 나라의 인명, 지명이 다수 등장하는데, 중세 게르만 서사시라는 작품의 특성을 살려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독일식 표기를 따랐다. 다만, 지명의 경우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되도록 현재 두루 쓰이는 표기를 사용하였다.
- 중세 독일어로 된 원전에서 지크프리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줄거리가 진행되는 중간에 언급이 된다. 이 책에서는 사건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순차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 지크프리트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원전의 시작 부분은 이 책에서 3장부터 서술된다.
- 크산텐 궁전에서는 지크문트 왕이 화가 나 큰 홀을 성큼성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지클린데 왕비는 창가에 앉아 금색 실이 끼워진 바늘을 들고 값비싼 허리띠에 수를 놓고 있었는데, 넋 놓고 있는 사이에 그만 허리띠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왕비는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건너편에 있는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지크프리트는 문 앞에 서서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백발이 성성한 고귀한 기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기사는 곧 홀을 나와 복도를 통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 "그 애를 두둔하지 마시오! 더 이상은 못 봐주겠소! 저 버릇없는 녀석은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자제하는 법을 배워야만 해요! 저 망나니 같은 녀석이 훗날 왕이 된다고 생각해봐요, 어찌 될 것 같소? 가장 뛰어나고 훌륭한 기사들과 최고의 가정교사들도 못 해냈소. 그러니 이제 남은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는 것 같구려." 분을 삭이지 못한 왕은 계속 말했다. "힘든 노동은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좋은 방법이지! 저 녀석을 대장장이 미메르에게 수련생으로 보낼 작정이오. 기술이 뛰어난 대장장이 미메르는 아주 엄격하기로 유명하오. 어쩌면 지크프리트를 가르치는 데는 대장장이의 검게 그 올린 주먹이 궁전의 가정교사들보다 훨씬 더 나을지도 모르겠소."
- 지크프리트는 진지하게 말했다. "울지 마세요, 어머니 제 소식을 다시 들으실 때는 제가 얼마나 많은 결투에서 이겼는가를 알게 될 것이고, 제가 다시 돌아올 때는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친 멋진 영웅이 되어 있을 거예요!"
지클린데 왕비는 지크프리트의 그런 허황된 자랑을 나무라며 말했다.
"그래, 언젠가 너는 용감한 기사가 되겠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선량하고 현명한 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당연하죠!" 지크프리트는 건성으로 약속했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미지의 드넓은 세계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 자리에서 일어난 지크프리트는 오른손에서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살갗 위로 피부 한 겹이 더 덮여 있는 것 같았고, 그 덮여 있는 피부는 절대로 상처가 나거나 떨어져 나갈 것 같지 않았다. 살갗 위에 어찌나 단단히 달라붙어 있던지, 마치 본래부터 몸에 붙어 있던 피부처럼 보였다. 깜짝 놀라 자기 손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지크프리트는 용의 피가 그 위로 흘렀던 것이 떠올랐다. 지크프리트는 낮게 탄성을 질렀다. 아아, 용의 피가 묻은 피부는 절대로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전설을 얼마나 자주 들어왔던가! 지크프리트는 걸음을 재촉하여 계곡으로 다시 돌아갔다.
-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몸집의 용이 축 늘어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검게 변한 혀가 입 밖으로 쑥 나와 있었다. 용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어느덧 멈추었고, 그 옆에 움푹한 웅덩이로 흘러 들어간 피가 작은 연못을 이루고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서둘러 옷을 홀딱 벗고 용의 피에 온몸을 담갔다. 앞으로 전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야. 이렇게 생각하니 지크프리트는 마음이 한껏 즐거워졌다. 곧 온몸 구석구석에 부드러운 새 피부가 단단하게 붙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순간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계곡 위쪽에 서 있던 작은 보리수나무의 가지를 흔들었고, 그 바람에 보리수나무 잎사귀 하나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나왔다. 나뭇잎은 살랑살랑 바람에 실려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더니, 지크프리트의 어깨 바로 밑에 가서 달라붙었다. 지크프리트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그 작은 부분에는 용의 피가 묻지 않았고, 따라서 상처로부터 안전할 수 없게 되었다. 지크프리트는 죽은 용의 목에서 칼을 뽑은 다음, 옷을 챙겨 입고는 말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말을 타고 출발하기에 앞서 산 위에서 한참 동안 들판을 내려다봤다. 따스한 햇살 아래 농가와 목초지, 밭이 평화롭게 펼쳐져 있었다. 지크프리트의 마음에 커다란 기쁨이 밀려왔다. 이제 농부들은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겠구나... 지크프리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난생 처음으로 깨달았다. 지크프리트는 깊은 생각에 빠져, 말이 가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을 느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 바로 건너편, 남자들 가운데에 금빛 갑옷을 입은 젊은 기사 두 명이 손에 칼을 들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니벨룽 왕국의 전왕의 두 아들 쉴붕과 니벨룽이었다. 쉴붕이 맨 먼저 지크프리트를 알아봤다.
"아니, 저 친구는 네덜란드의 왕자 지크프리트가 아닌가!"
쉴붕은 이렇게 말하며, 빼 들었던 칼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때마침 잘 왔군그래! 보물 나누는 걸 도와달라고 하면 되겠어. 우리 둘은 절대로 평화롭게 합의하지 못할 테니 말이야!"
"정 그렇다면!" 니벨룽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쩌면 제삼자가 보물을 나누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우리 둘 사이에서는 싸움만 일어날 테니 말이야."
그래서 그들은 지크프리트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한 뒤,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얘기했다.
- 지크프리트는 흔쾌히 승낙했지만, 한편으로 니벨룽의 기사들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왕은 그들을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고, 지크프리트에게 옆으로 와서 앉으라고 했다. 곧 쉴붕이 여러 보물들 가운데 놓여 있던 매우 값진 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우리를 도와주면 그 대가로 아버님에게서 물려받은 이 칼을 선물로 주겠소." 쉴붕이 말했다. "칼의 이름은 발뭉인데, 쇠가 되었든 돌이 되었든 용의 비늘이 되었든 그 어떤 것도 두 동강 낼 수 있소. 솜씨 좋은 난쟁이들이 벼리고 지하의 불에다 담금질한 것이오. 이 칼은 단 한 사람만 가질 수 있으니, 당신이 갖는 게 낫겠소. 그렇지 않으면 니벨룽과 내가 이 칼을 두고 평생 싸우게 될 테니까."
지크프리트는 발뭉을 받아 들고 칼날을 살펴보았다. 칼날이 어찌나 멋지고 날렵하며 쇠는 또 어찌나 낭창낭창하고 유연하던지, 대장장이 미메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칼도 그에 비하면 뻣뻣하고 볼품없어 보였다. 지크프리트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마음속으로 니벨룽의 왕들이 어쩌면 그리 나쁜 사람들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지크프리트는 금세 알게 되었다.
- 한동안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곧 두 형제간에 불만이 생겼다. 한 사람에겐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는 저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들은 광분해서 서로 싸우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모든 것을 지크프리트 탓으로 돌렸다. 지크프리트가 자신들을 속여 이익을 챙기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칼을 집어 들고 지크프리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것은 기사다운 행동이 아닐뿐더러 큰 실수였다. 지크프리트에게는 발뭉이 있었기에 힘들이지 않고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싸움을 좋아하는 두왕은 지크프리트를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고, 그것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풀밭 위에 죽은 채로 드러누웠다. 그러자 거인 보초병들이 끔찍한 괴성을 지르며 지크프리트에게 달려들었다. 지크프리트는 커다란 바위를 등지고 서서 엄청 빠르게 발뭉을 휘둘렀는데, 마치 여기저기서 번개가 번쩍이는 것 같았다. 움직임이 둔한 거인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은 몽둥이 하나만 가지고 있었을 뿐,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 그 말을 들은 군터 왕은 크게 만족했다. 지크프리트가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알아챈 군터 왕은 안심하고 다시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한편 지크프리트는 방금 전 브룬힐트와 몸싸움을 벌일 때 벗겨낸 그녀의 허리띠와 반지를 가지고 소리 없이 침실을 빠져나갔다. 몸싸움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웬일인지 지크프리트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애초에 군터 왕이 브룬힐트에게 청혼하러 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지크프리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브룬힐트는 이곳에서 영원히 이방인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방인들이 집 안으로 불행을 끌어들이는 법이다!
- 그 바위에 강물이 부딪히면서 물살은 급격히 약해졌고, 바위 뒤쪽으로 흘러든 강의 수면은 물결 한 점 없이 잔잔하면서도 매우 깊었다. 하겐은 능숙한 솜씨로 노를 저어 바위 뒤쪽을 향해 배를 몰았다. 금세 물살이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밤새 몸부림치던 폭풍우가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먼 하늘에 옅은 회색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곧 아침이 밝아올 모양이었다. 하겐은 망토를 벗어던졌다. 보물이 담긴 자루 하나를 앞으로 끌어당겨 묶어놓았던 끈을 풀었다. 그는 배의 가장자리에 기대서서 자루를 가득 채운 번쩍이는 보물들을 잔잔하면서도 시커먼 강물 속으로 천천히 쏟아붓기 시작했다. 값비싼 장신구가 번쩍이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물 위로 떨어진 보물이 바닥을 향해 천천히 가라앉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그러다 시커먼 심연이 화려한 보물을 꿀꺽 삼켜버렸다. 자, 그다음 자루! 그래... 그렇게 계속 물 밑으로 가라앉아라, 보물들아! 값비싼 장신구는 물귀신들이나 걸치라지! 마치 꺼져가는 별빛처럼 수많은 금은보화가 검푸른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날이 밝아오면서 강물은 점차 투명한 초록빛으로 변했다.
- 갑자기 저 아래 물속에서 뭔가 창백한 물체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더니 배를 향해 올라왔다. 가느다란 팔과 자그마한 손이 수면 위로 쑥 올라와 배의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이윽고 뭐라 형용할 수 없이 아리따운 얼굴이 나타나 하겐을 보고 활짝 웃고는 다시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 너로구나, 인어 아가씨."
하겐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다음 자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로 아래 물속에서 물의 요정 하나가 헤엄쳐 가는 모습이 보였다. 긴 금발이 물살에 흔들리며 반짝이는 파도처럼 요정의 얼굴과 어깨를 간질였다. 요정의 허리춤부터 발끝까지는 은빛 비늘이 뒤덮인 물고기의 형상이었다.
"기다려라, 내 너를 땅 위의 그 어떤 여왕들보다 더 부자로 만들어주겠다!"
하겐은 이렇게 소리치고는 보물 자루 하나를 번쩍 들어 요정 위로 쏟아부었다. 요정은 계속 헤엄을 치면서 우윳빛 얼굴을 들어 위를 한번 쳐다보더니, 무심히 손을 뻗어 쏟아지는 장신구들 중 하나를 받아 들었다. 그녀는 하겐을 향해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는 다시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가, 왔던 길을 되돌아 강 아래로 헤엄쳐 갔다.
- 하겐은 쉬지 않고 계속 보물을 강물 속으로 던졌다. 크림힐트의 보물들이 그렇게 라인 강의 물결 속으로 모두 다 사라져 갔다.
- 순간 크림힐트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가 에첼 왕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줍은 듯 재빨리 그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은 까무잡잡하고 갸름했다. 광대뼈가 살짝 도드라졌고 크고 특이하게 생긴 눈에서는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다른 훈족 기사들처럼 말안장 위에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한마디로 자유로웠으며 진정한 기사다웠다.
훈족인데도 참 잘생겼다고 생각하며 크림힐트는 신기해했다. 뤼디거가 크림힐트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저 사람은 에첼 왕의 동생 블뢰델린입니다."
- 크림힐트는 그 말에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백마 탄 기사 두 명이 크림힐트 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모두 황금 투구 위에 왕관을 쓰고 있었고, 차려입은 갑옷과 장비 들은 왕다운 화려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말을 타고 다가왔다. 크림힐트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에첼 왕과 고트족의 왕인 베른 출신의 디트리히이십니다."
옆에 있던 뤼디거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크림힐트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에첼 왕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에첼 왕이 다가오면서 그녀에게서 계속 눈길을 떼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에첼 왕은 말이 멈춰 서기도 전에 안장에서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섰다.
- 크림힐트는 에첼 왕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깊이가 있고 부드러웠다.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본 순간, 이 남자라면 거대한 훈족의 나라를 세우고 통치할 능력이 충분하리라는 것이 납득되었다. 그에게서 엄청난 권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구릿빛 피부는 따뜻해 보였고, 두 눈동자는 동생과 마찬가지로 검게 반짝였다. 몸집은 거대했으며 생김새는 그가 태어난 비밀에 찬 아시아의 나라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졌지만, 신기하게도 끔찍하다거나 싫은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크림힐트는 그동안 가졌던 공포스러움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크림힐트는 고향에서 배운 궁정의 법도에 따라 에첼 왕에게 손을 내밀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닌 듯 여겨졌고, 어쩌면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지크프리트를 생각했다. 그가 죽지만 않았더라면, 훈족의 왕비가 되기 위해 이곳에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 춤이라도 춰야 할 것 같군! 그건 다가올 죽음의 무도회를 위한 연주였다. 그러나 하겐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부르군트 일행은 배를 타고 라인 강을 건넌 뒤 마인 강으로 이어지는 군사 도로를 달려, 동쪽으로 프랑켄 지방을 통과해 도나우 강 쪽으로 내려갔다. 열이틀째 되는 날 마침내 도나우 강변에 도착해 휴식을 취했다. 도나우 강을 건너는 배가 근처에 정박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하겐은 그 배를 찾기 위해 혼자 말을 타고 강변을 돌아다녔다. 이쯤에서 저들은 도나우 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 그러면 드디어 훈족의 나라가 시작된다.
- 하겐은 말을 타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는데, 어디선가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작은 개울이 눈앞에 나타났다. 개울의 물줄기는 강변의 풀숲 사이를 굽이굽이 흐르다가 다시 덤불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하겐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눈앞에 갈대숲이 병풍처럼 펼쳐졌고 갖가지 수초가 우거져 있었는데, 그 뒤편에서 여자들의 웃음소리와 재잘재잘 수다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겐은 조심조심 말에서 내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관목 덤불 사이로 이상하게 생긴 옷이 몇 벌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온통 눈처럼 새하얀 깃털로 만들어진 옷이었다. 갈대숲을 헤치고 좀 더 살펴보니, 작은 연못 속에서 백조의 요정 셋이 목욕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겐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요정들이 벗어놓은 옷을 가져갔다. 그것을 본 요정들은 깜짝 놀라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옷을 빼앗겨 물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요정들은 심보 고약한 하겐에게 제발 옷을 돌려달라고 달콤한 목소리로 간청했다. 요정 중 하나가 하겐 가까이로 헤엄쳐 와서는 금빛 눈동자로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하겐을 쳐다봤다.
"하겐이여, 저희들의 옷을 그만 돌려주세요." 요정은 살랑살랑 간드러지게 말했다. "그러면 제가 훈족의 나라에서 당신들의 운명이 어찌 될지 예언해드리겠습니다!"
- 요정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 위로 고개를 내민 채 갸우뚱 흔들었고, 그러자 수면 위에 펼쳐진 머리카락이 금빛과 녹색으로 반짝거렸다.
"당신은 훈족의 나라에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운명입니다." 요정이 말했다. “제말을 믿으셔도 됩니다. 저는 당신같이 용맹한 장수에게 거짓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거든요."
이 말을 하며 요정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하겐을 쳐다보았고, 그 표정은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겐은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알겠는가, 요정의 말이 맞을는지! 보통 요정들이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한 번은 죽을 목숨, 그것이 이르든 늦든 하겐에게는 별 상관이 없었다...
- 두 번째 요정의 머리카락은 숯처럼 검고 길었다. 얼음장처럼 반짝이는 파란 눈동자를 가진 두 번째 요정은 화난 표정으로 하겐을 쳐다봤다.
"우리 언니는 당신에게 거짓 예언을 했어요. 당신은 뻔뻔스러운 파렴치한이에요." 두번째 요정이 하겐을 마구 놀려댔다. "당신에게 나쁜 예언을 하면 옷을 돌려주지 않을 게 뻔하니까 거짓말한 거라고요. 이제 제가 진실을 말해드리죠! 당신들은 두 번 다시 라인 강을 볼 수 없을 거예요. 모두 훈족의 나라에서 죽음을 맞게 될 테니까요."
말을 마친 두번째 요정은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날렵한 동작으로 헤엄쳐, 언니 요정을 따라가 버렸다.
- 세 번째 요정이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고불고불한 붉은 머리카락이 너울대는 불꽃처럼 얼굴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초록색 눈동자는 에메랄드처럼 영롱한 빛을 발했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세 번째 요정의 달콤한 목소리가 지저귀는 새처럼 재잘재잘 들려왔다. 그녀는 말하면서도 천천히 헤엄을 쳐 하겐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당신들 중 단 한 사람만 살아서 라인 강변으로 되돌아오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 사람이 당신은 아니죠. 당신이 섬기는 왕들 중 한 사람도 아니고요. 그 사람은 바로 궁정의 신부님입니다. 그렇게 많은 용감한 장수들이 모두 목숨을 잃게 되다니 정말 안됐네요!"
그러고는 마지막 요정까지 자취를 감췄다.
- 게르만 민족 최고의 대서사시 <니벨룽의 노래>
게르만 민족의 대서사시이자 중세 기사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니벨룽의 노래>는 그 작자와 연대기가 불분명하다. 유럽의 민족 대이동이 시작된 4~5세기 무렵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전해 내려오던 영웅 설화와 전설들이 13세기 초 영웅서사시의 형태로 완성되었다고 알려졌을 뿐, 정작 이것을 집대성한 작자가 누구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도나우 강 주변 지리에 밝은 오스트리아 태생의 기사나 음유시인, 혹은 주교의 궁에서 지내던 어느 필사자에 의해 문학적으로 집대성되었다고 추정할 뿐이다. <니벨룽의 노래>는 5세기경 동방의 훈족이 라인 강변에서 부르군트족을 멸망시킨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궁정을 이상적으로 그리며 등장인물들의 언행을 미화하기 일쑤였던 당시 여타의 궁정 기사 문학들과는 달리, <니벨룽의 노래>는 정치적 음모와 배신, 암살 등 그리 모범적이거나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중세 궁정의 역사적·정치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서양 문학 연구자들은 이 작품을 '궁정서사시'가 아닌 '영웅서사시'로 분류한다. 특히 동시대의 다른 궁정서사시와 차별되는 이 작품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꼽는다면, 궁정 내부의 갈등이 마지막에 가서 화합과 조화를 도모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고, 파멸로 치달으며 참혹한 비극으로 끝난다는 데 있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대체로 아서 왕의 전설을 소재로 한 프랑스 궁정서사시 문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 청중들은 <니벨룽의 노래>를 통해 게르만 민족의 영웅 설화를 바탕으로 한 독일 문학을 처음 접하게 된다.
- "내가 고전어 전공 교수이고 수업 시간에 고전어로 된 원전들을 학생들과 함께 강독하지만, 작품 전체를 모두 다 읽혀야 할 때는 학생들에게 레히너의 책들을 추천한다. 한국 독자들에게도 꼭 소개가 되었으면 하니, 네가 이 책들을 번역했으면 좋겠다. 원작의 내용이나 뉘앙스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분량과 문체로 원작 이상의 감동과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유일한 단점은 한번 손에 잡으면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손에서 놓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먼 나라 한국에서 온 제자가 번역한 책을 꼭 보고 싶다던 슈피라 선생은 이제 고인이 되었지만, 그분 덕분에 레히너와 그녀의 작품들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하게 되었다.
- 아우구스테 레히너 (1905~2000) 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청소년 문학 작가이다. 인스부르크에서 태어나 인스부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을 전공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청소년 문학을 집필하여 책으로 펴냈다. 레히너는 고대와 중세의 신화와 영웅 설화를 새롭게 작업하여 총 24권의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그를 통해 가치 있는 고전들을 청소년과 일반 대중들에게 확산 및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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