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구병모] 파과

일루젼 2022. 9. 22.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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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구병모
출판 : 위즈덤하우스 
출간 : 2018.04.16 


       

거꾸로 가는 기간에는 그에 맞춰 지나간 책들을 읽고 있다. 구병모 작가의 대표작으로는 <위저드 베이커리>와 <파과>가 자주 꼽힌다고 하는데, 구병모 작가를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그 두 작품 모두 읽지 않았던 터라 이번 기회에 <파과>를 선택했다.

 

노년의 여성 킬러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설명이 흥미로웠고, 나의 노년이 어떠했으면 좋겠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었다. 삶은 매 순간이 빛나지만 그 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언제나 그 반짝임이 빛을 바랄 때까지 이어진다. 수많은 동화와 이야기들에서 조연으로 사라지는 노년들을 주목해보고 싶었다. 노년에게도 삶과 욕망, 고단함은 존재한다. 

 

아쉬운 면을 꼽자면야 꼽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전형의 틀을 벗어나려 노력한 주화자의 설정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국어 사전을 탐독하며 하나하나 골라낸 듯한 우리말 단어와 표현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하나씩 모아 왔을 것만 같아 어딘가 찡한 느낌이었다. 

 

또 한국의 노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시선도 아팠다.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가볍게 흘려넘겼을텐데, 실상이 그렇다는 것을 알기에 더 서글펐다. 언젠가는 서지우가 아닌 이적요를 더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파과>를 읽는 동안 마음이 복잡 미묘했다. 

 

조각의 삶은 충분히 충실한 삶이었고, 나는 그녀의 선택들을 존중한다. 그녀의 마음과 감정들은 밖으로 표현되기 전까지, 오롯이 그녀에게 속해있는 동안에는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다. 조각의 감정들은 충분히 현실적이었고 그래서 더 안타까운 면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꼭 그렇게 투우와 강박사를 비교했어야 했을까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투우에 대해서는 이전의 서사가 얽혀있기도 하지만, 확실하게 '아이'라고 선을 그음으로써 조각이 특정 나이를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특성과 됨됨이에 매력을 느꼈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본다. 강박사의, 조금은 류를 떠올리게 하는 어른스러운 매력이 투우가 보여주는 치기 어린 애정 -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과 대비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지점에 대해서는 생각이 복잡하다.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아센바흐의 절제와 서글픔을 그의 입장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의 입장에는 반대 입장이 존재한다.

 

파과를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이런 점까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즐거웠다. 

        

 


   

- 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밀착을 넘어 연체동물의 빨판처럼 서로에게 흡착되다시피 한 생면부지의 몸 사이에 종잇장만 한 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 아이보리 펠트 모자로 잿빛 머리를 가리고 잔잔한 플라워 프린트 셔츠에 수수한 카키색 리넨 코트와 검정 일자바지 차림의 이 여성은 짧은 손잡이의 중간 크기 보스턴백을 팔에 건 차림으로 실제 연령 65세이나 얼굴 주름 개수와 깊이만으로는 여든 가까이 되어 보인다.

 

- 노년층이 도처에서 가까운 이들의 부음을 듣고 뒤늦게 신에 의탁하여 성경이나 불경을 읽는 건 흔한 일로, 거기서 더 나아가 고상한 지성미를 드러낼 만큼 남다른 임팩트가 있다고 하면 논어나 맹자 계통일 것이며, 더욱이 여성 노인의 경우 그녀가 보는 책등에 플라톤이나 자본론 내지는 헤겔 칸트 스피노자 같은 제목이 적혀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사람들의 경이와, 당신이 정말 그것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느냐는 일말의 의구심이 담긴 시선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자태가 혐오스럽지도 이색적이지도 않아서 타인들이 원하는 기준치 -실제 평균치와는 무관한- 에 들어맞아 어떤 이목도 끌지 않는 그녀는, 고개를 무릎에 닿을 듯 떨어뜨리고 루페 안에 확대된 글자를 짚어나가는 듯하다가 문득 안경알 밖으로 눈만 들어 대각선 좌석을 살핀다. 

 

- 복잡한 장소에서 일 마치고 코너를 돌 때는...

속도를 줄이거나 벽 쪽에 붙지 말고 바깥으로 원을 넉넉하게 그리라고 했지. 마주 오던 사람이랑 부딪혀 갖고 있던 걸 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여기 증거물 있으니 다 가져가세요 하게?

그렇게 말하던 이의 표정을 바로 어제인 양 떠올리며 그녀는 집에 닿는 가능한 한 복잡한 경로를 머릿속에 그린다.

 

- 헬스클럽에서 땀 흘리는 노인들은 어디서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다만 지역이나 소득 수준에 따른 차이가 있는데, 조각이 사는 동네는 반경 1킬로미터 내에 헬스클럽이 두 군데로 기구 상태가 대부분 오래되었으며 가짓수도 적은 데다 남녀 공용이라 그녀가 필요로 하는 기구는 언제나 남자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끼어들 틈이 없었고 운동 목적보다는 동네 사랑방처럼 보였다.

 

- 그러나 그 안착에 방해가 되는 것은 방역이라는 일의 특수성이었다. 병적인 습관이나 중독과는 성격이 좀 다르지만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계속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마약이나 도박과 닮았다.

 

- 방역 현장에서의 사망이 아닌 자의 반 타의 반의 은퇴와 휴식과 그 뒤 소일이란, 세상 무슨 일을 하고 어떤 회사에 다녔던 사람보다도 더 자신의 과거에 대한 강도 높은 부정과 삭제를 필요로 하리라는 게 조각의 생각이었다. 지속적인 상실과 마모가 그 본질인 생에 과거를 10년 잘라내든 45년 치 뭉텅이로 걷어내든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삶이란 끊임없이 지워져 백묵의 흔적만 남은 칠판과 같다는 사실이 달라지지 않으니 이제라도 얼굴에 철판을 깔다 천수까지는 안 바라고 비명횡사든 객사든 간에 적절한 시기에 세상을 떠나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가끔 들었는데, 막상 그런 호기로운 자세로 손 실장 앞에 나섰다가도 조각은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번번이 돌아서곤 했다. 

 

- 매력적인 일이라곤 생각 안 해. 누군가는 꼭 해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한다는 핑계도 대지 않아. 개개인의 정의 실현이라면 그거야말로 웃다 숨넘어갈 소리지. 하지만 말이다. 쥐나 벌레를 잡아주는 대가로 모은 돈을, 나중에 내가 쥐나 벌레만도 못하게 되었을 때 그런대로 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구나. 

그렇게 말했던 사람과, 함께 밥상을 나누고 머리카락에 싸락눈이 내려앉는 평범한 일을, 그녀는 잠시나마 그려본 적이 있었다. 상대방이 코웃음 칠까 입 밖으로 내보지 못한 소박한 풍경을, 바라선 안 되는 나날을. 

 

-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은 이거 오래 못 해. 그것이 분노가 되었든, 거짓말에서 비롯한 긴장이나 후회가 되었든 상관없어. 특히 모욕을 견디는 일이 제일 중요하지. 왜냐면 너는 여자고, 그만큼 현장에서 모욕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할 일이 많을 테니까. 

 

- 그러니까 여기서 피하면 안 된다고. 아무 때나 까지른다고 반사 신경이 좋은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지. 이게 만일 목표물이 제 분을 못 이기고 던진 거라면 어떡할 건데? 이때는 그냥 이마에 맞아야 한다는 걸 빨리 알아차리는 것. 보란 듯이 피하면 목표물이 팔푼이여도 의심하겠다. 최악의 경우는 물론 날아오는 걸 그대로 잡아버리는 거지만.

 

- 실제로 일하러 가서 확인해보면 사람들은 깜짝 놀랄 만큼 자기 방어나 경계 태세가 엉성했다. 대기업의 중역 이사같이 비서들이 차를 대신 운전해주는 사람들이나 경호 팀을 따로 고용한 연예인들은 안전 관리를 전문가에게 일임하여 그 자신은 오히려 느슨해지고 허술해졌다. 그래가지고서야 아무리 실력자가 곁을 지킨대도 소용없을 터였다.

 

- 주머니를 뒤집어 가진 것 다 털어줄 것처럼 생겼는데 인상과는 달리 뜻밖에 눈썰미가 있는 편이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눈 굴려서 살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도 안 불렀고 여기 저 말고 다른 사람 없습니다."

의사가 그렇게 말했을 때 비로소 그녀는 불안한 시선을 그에게로 고정시켰다. 그렇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내가 뭔 줄 알고 그리했느냐는 질문 대신, 그녀는 의사의 단정한 턱 선을 다만 물끄러미 올려다보면서 최소한의 의심과 경계를 풀지 않았는데, 그사이 점퍼 안주머니를 살폈을 것이 분명함에도 경찰을 부르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서 어쩌면 이 사람 자체가 진짜 의사 아닌 수상한 인물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억측하는 습관은 그녀에게 필수 생존 요건 같은 것이니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 닿을 만한 곳에 있을 법도 한 간단한 수술 도구 같은 것들조차 모두 용의주도하게 치워지고 없었다. 

 

- 여차하면 상대방한테 붙들릴 수도 있겠지. 가진 것 입은 것 다 뺏길 수도 있을 거야. 그런 상황에는 네가 생물학적으로 여자인 걸 잊어버리라고. 누가 네 몸 같은 거 보겠냐. 서로 그럴 정신 있겠냐. 털끝만큼이라도 판세를 뒤집을 만한 가능성이 있다면, 대책 없이 알몸으로 날뛰라고. 그러다 실패한다면 그건 너의 마지막 자존심과 망설임 때문일 거야.  

그러나 류가 말했던 상황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그녀는 어떤 업무에서건 심각한 실존의 위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 "뭘 찾고 계신지 모르겠는데 일단 날카롭거나 위험해 보이는 건 다 잘 치워서 모셔두었습니다. 여기서 소란을 일으키면 제가 원장님 뵐 낯도 없고 해서."

이쯤 되면 진짜 의사든 야매든 간에 세상살이의 얘기가 좀 통할 사람 같기는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직하게 밝힐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젊은 의사와 인생담이나 나누는 관계를 유지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 잠깐이나마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이룬 살점과 핏방울과 뼛조각들을 잊고 긴장이 풀린 채 따뜻한 꿈을 꿀 뻔했던 순간을, 링거 병의 파편을 신중하게 주워 담던 손가락과, 그대의 모든 죄를 사하노라는 듯한 소독약 냄새 섞인 미소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마음속에 피어오른 희미한 태동 같은 것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일상이 아닌 다른 세계에 접속했기 때문에 생겨난 작은 흥분에 불과하며, 거기 몸을 깊이 담그지 못하고 발만 살짝 적셨다가 돌아 나오는 데서 비롯한 아쉬움의 반영일 뿐이다. 

 

- 조각은 걷는 동안 문득 봉지에서 백도 한 개를 꺼내 코에 대본다. 꼭지와 머리에 날염한 듯한 홍조를 띠고 분홍에서 하양까지 바림이 이루어진 얇은 껍질은 벨벳 같으며 표면의 보송보송한 솜털도 과육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향을 가리지 못하는데 그 냄새에 콧속이 자극되어 혀끝에 남아 있던 미소의 쓴맛이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한다. 

 

- 그는 함부로 몸수색을 한 게 미안해질 만큼 우아하고 신중한 자태로 막내 비서의 안내를 받아 화장실로 걸음을 옮긴다. 그전 몇 차례 회장 수행 자리에서 보았던 J제약의 수석 비서보다 오히려 인상이 좋고 훤칠하기까지 한 데다 폴스미스 뿔테 안경에 휴고보스 정장 차림으로 이런 전달 업무에 익숙한 듯 어리바리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으며 가슴을 편 자세와 단정한 걸음걸이를 보아서는 길에서 아무나 막 주워 보낸 사람은 아닐 테고, 뭔가 꺼림칙하거나 뒤가 구린 물건을 주고받을 때 가능한 한 외부에 꼬리가 밟히지 않도록 임직원 이외의 낯선 사람을 임시 고용한대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 에이전시의 메인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에는 과거 15년간의 방역 관련 데이터가 들어 있었다. 업무 처리가 끝난 자료를 흔적도 없이 파기한다는 원칙은 어디까지나 의뢰를 따내기 위한 대외용 멘트일 뿐, 실은 크고 작은 의뢰인이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 녹취 음성과 동영상을 비롯해서 대부분 빠짐없이 문제가 생길 경우의 협박용으로 챙겨두고 있었다. 낱낱의 자료들은 공소시효가 지난 것도 많고 법률적 의미를 상실했더라도 그것들을 묶어 방송사 같은 데다 투척한다고 치면 사안은 결코 작지 않으며 지나간 사건이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가능성마저 있기에, 의뢰인의 발목과 동시에 에이전시의 발목도 잡을 수 있는 양날의 검과 같은 데이터였다. 

 

- 당신은 이미 늙었고 완고하며 현명함과는 거리가 멀지. 그렇게 무심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언제라도 내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당신의 머리를 쥐어 터트릴 수 있지. 당신은 방심할까. 당신은 막거나 피할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겠지. 시선의 속도와 마음의 움직임을 몸이 따라잡지 못하리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알겠지. 

 

-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뻗은 손을 슬그머니 거둬들여 입 맞추며 그는 다만 바라보았다. 끌어당겨 손가락에 감아보고 싶었던 머리카락 대신, 거기엔 푸석하고 건조하며 구불거리를 잿빛 머리카락이 손 닿지 않는 선반 위의 해묵은 먼지처럼 뭉쳐있었다. 그것은 기억과 호환되지 않는 현재였고 상상에 호응하지 않는 실재였으며, 영원히 괄호나 부재로 남겨두어야만 하는 감촉이었다.

 

- 류가 무엇을 어디부터 듣고 언제 이 앞으로 왔으며 그렇다면 왜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는지 따져 물을 경황도 없이 소녀는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니에요. 이 사람이 먼저, 나는.

 

- 류가 어깨를 떠밀자 소녀는 어디서부터가 우연이고 어디까지가 류의 계획인지 생각할 겨를 없이 머릿속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달렸다. 지금 터지면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될 것이고 그러면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확신에, 딸꾹질과 함께 목울대를 타고 넘어오는 울음을 늘키면서. 그러는 동안 머리꼭지를 데웠던 피는 어느새 제자리를 찾아가더니 바닷속을 유영하는 멸치 떼처럼 몸속을 떠다녔다.

 

- 소녀는 류가 그 남자와 그곳의 흔적들 그리고 남은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결코 묻지 않을 터였다. 듣는 순간 그 경이로움과 신묘함이 사라지리라는 것을, 그 뒤로 생긴 다른 일들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하게 될 터였다. 

 

- 그 바람에 폐지를 에멜무지로 지탱하고 있던 낡은 고무줄이 끊어지고, 안 그래도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던 상자와 스티로폼들이 쏟아져 바닥을 구른다. 

 

- 어째서 이런 중요한 순간에 목표물을 놓치고 타인을 도와버렸을까. 단지 몸이 불편한 노인이라서, 자신과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이 위험한 도로에서 신문지 한 장까지 포기 못하는 장면을 바라볼 때 자연히 생겨날 법한 동조와 연민의 감정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지금까지 그런 것 없이도 잘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본능이나 자연스러운 공감 능력이 다소간 떨어졌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지금은 지나치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 청력이 예전만 못한 상태에서 비명도 음악도 아닌 단발의 설타음이 바로 귓구멍에 침을 뱉듯이 들려올 정도면 아마도 환청이나 착각이겠으나 그렇게만 간주하기에는 거기 선명한 혐오와 경멸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아서 그녀는 걸음을 빨리하고, 바로 조금 전까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듯했던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길에 뛰어들었을 때, 골목 끝에서 사라지는 잿빛 옷자락 끄트머리를 본다. 그곳에 희미하게 감도는 푸제르의 잔향에 그녀는 고개를 기우뚱한다. 

그 아이가 어째서?

 

- 설령 그 증세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이 사람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도 그것은 노년의 증거가 되었으며 자신이 예순다섯의 노인이라고 새삼 확인 사살하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 앞에서는. 

 

- 만약 장 박사가 내과학회 세미나를 갔다면 다른 날을 잡아 오면 될 일이고, 세미나 또는 출장이었을 적에는 간호사들도 '사정상'이라 에두르지 않고 또박또박 분명한 목소리로 자랑스럽게 말하곤 하는데, 조각은 사정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그녀들의 고뇌와 혼란을 감지했다. 

 

- "조금 편찮으세요."

당연히 의사도 사람이고 몸이 아플 수 있지만 담당 환자 앞에서 대놓고 질병을 실토하지는 않는다. 기묘하지만 그것이 신뢰 문제와 직결되는 불합리한 고정관념이다. 

"조금, 이 아닌가 보네요."

조금이라면 목소리를 굳이 낮출 것까지야, 싶어서 조각이 중얼거리자, 박 간호사는 이 할머니가 장 박사와 내연 관계에 있다고 믿는 무리 가운데 하나이므로 노부인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직무상 비밀 준수 의무를 어기고 안타깝다는 얼굴로 자기 관자놀이를 두어 번 짚어 보였다. 그 동작으로 조각은 뇌혈관계 질환임을 알아차리며, 바로 어제까지 해우에게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던 걸로 보아 장 박사는 단순 질환 치료 차원이 아니라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실려 갔을 것이고 그렇다면 뇌출혈의 가능성도 있음을 짐작했다. 

 

- 그에게서만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한마디였으나 나는 당신 어머니가 아냐,라고 그녀는 토를 달지 않는다. 

 

- "복숭아가, 달고 맛있더군요. 저쪽 시장에서 어르신들 파시는 게."

조각은 이미 시작한 말을 도중에 멈추지 못한 채, 다만 자기의 말들이 조악한 질감과 형태가 있어서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대로 과자처럼 바스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첫 어절을 떼면서는 뭔가 의도를 담고 한 말이 아니었지만 말을 하는 동안 왠지 거기에 모종의 위협이 담긴 것처럼 상대방이 받아들일 여지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 그 이상의 뜻을 나타내려던 게 아니었는데, 맥락과 개연성에 따라서는 전혀 다르게 들릴 수도 있다.

'나는 당신 부모님 이미 찍어놨고 얼굴 다 알아.'

 

- 그러나 강 박사는 눈앞의 노부인에게서 위악의 기미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모른 척하고, 다만 웃으며 동의한다. 

 

- 그러는 동안 조각은 자리에서 일어설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을, 그보다는 좀 더 명확한 감정으로 사실은 선뜻 일어서고 싶지 않았다는 자신의 속내를, 이 자리에 앉아서 듣고 싶었던 건 과일의 당도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의 목소리였음을 깨닫는다. 그가 유연하게 받아넘기지 않고 설령 그녀의 의중을 잘못 접수하여 내 부모는 건드리지 마,라고 내뱉었던들 그녀는 소중하게 그 음성을 들었을 것이며 듣기를 넘어 자기 안에 모셨을 터다. 어쩌면 당신은, 그늘 받이에 속한 인간의 상처를 목격하고서도 기꺼이 꿰매었을 뿐만 아니라 이토록 침착하기까지 하며 초조와 분노 한 점 보이지 않고 다만 이처럼 평범하고도 동등하게 한 명의 환자를 돌보듯 할까. 

 

- 언감생심이며 단 한순간이라도 그 장면에 속한 인간이 된 듯한 감각을 누릴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 조손이 담긴 화폭을 바라보며 당지 않은 행복을 대체 추구하는 심리가 사실은 강 박사를 향한 모종의 열망을 인정하지 않기 위한 노력임을 어렴풋이 안다. 갓 쪄낸 떡처럼 따뜻하고 말랑한 가정을 다만 곁눈질로 부러워함으로써 자시의 자리를 거듭 확인하기 위함이다. 설령 자신이 업자가 아닌 보통의 여인이라도, 여인보다는 노부인으로 불리는 게 더 어울리는 입장인 이상, 이런 감정이 그리로 향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업자가 아니었다면 그를 만날 일이 없었겠다. 

 

- "자기 스스로도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는 알고 있지?"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것의 본질이 두려움인지 수치심인지 모호하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고, 뭐가 됐든 네가 참견할 일도 아니야."

 

- 그녀는 투우의 상기된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올려다본다. 이 아이는 강 박사보다 두세 살 정도밖에 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강 박사를 볼 때와 같은 비중을 가진 눈으로 이 아이를 볼 수 있는가 하면 그런 일만은 있을 수 없다. 그녀는 비로소 정신이 맑아지고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자리를 분명히 인식한다. 

 

- 검은 양복을 입고 흰 띠를 팔에 감은 그의 어깨, 곧은 등과 다리를, 내내 바라봐서 미안합니다. 그 어깨에 손을 얹어보고 싶어서, 등에 뺨을 대어보고 싶어서, 아니 그 모든 것들을 하기 원한다는 열망보다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감촉을 상상해보아서, 미안합니다. 

 

-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얘기는 이걸로 끝이야." 

꽁초를 눌러 끄는 류의 손짓이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그때 10개월 된 아기를 업은 조가 다가와 그들이 마주 보고 앉은 작은 탁자에 과일 접시를 내려놓았다. 사기 접시 바닥이 상의 유리 덮개에 닿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만큼 조용한 몸짓이었으며 그 얼굴은 침착하고 다정했을 것이 틀림없지만 조각은 고개 들어 그녀를 바라볼 수 없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류가 강경하게 나왔을 때 마침 그녀가 들어선 걸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봤지, 들었지? 내 잘못 아니야. 

 

- 나는 언제까지나 감히 품어서는 안 되는 꿈에 대해 말하지 않을 테니까... 심지어는 당신이 없더라도.

 

- 이런 때에 더욱 선명해지는 죄악감이란 이를테면 물을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 같은 사소한 것에조차 심장이 술렁인다는 사실이었다.  

 

- "그러든가.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발을 꼼지락거리는 이불 속은 그 어느 때보다 무방비했다.

"너도 나도, 지켜야 할 건 이제 만들지 말자."

지금 이렇게 두 팔을 둘러 오히려 조금 전보다 포옹을 견고히 하면서 할 말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조각은 잠자코 들었다. 그가 그렇게 믿고 말한다면 그의 말이 옳을 것이었고, 팔에 깊은 힘이 들어간 것은 이 기이한 제사(祭祀)의 순간 높아진 체온과 더불어 두 사람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함께 하기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임을 뜻했다.

 

- 이 순간 그녀는 모든 사소한 결격사유들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자기 몸만큼이나 불안한데, 아무리 구조가 단단하고 성분이 단순 명료하다 해도 사람의 영혼을 포함해서 자연히 삭아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존재하는 모든 물건은 노후된 육체와 마찬가지로 연속성이 단절되며 가능성은 협착된다. 

 

- 문득 뺨을 타고 흐르다 귓바퀴를 따라 도는 한 방울의 땀에서 살짝 흔들림이 느껴지며 그것이 격철이 후퇴하는 진동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고 조금 전까지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총탄이 날아와 박히는 모습을 본다. 

 

- 그러니까 저건 투우가 아닌 셈인데, 그 아이는 지금 이유는 모르지만 뭔가를 있는 대로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상태이기 때문에 숨어서 저격할 만한 성격은 못 된다. 

 

- 그리고 서로의 목을 긋는 게 아니라 다만 감싸 안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연상하다 문득 그녀는 아무 이유도 근거도 없이, 그저 숲을 거닐다 자연스레 순하고 연한 풀을 밟아 나가듯 이런 중얼거림이 입 박으로 흘러나온다. 

 

- 그녀는 자기가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배회하던 숲의 이름이란 어쩌면 기억이었던가를, 투우가 무엇을 종용하는지를 알 수 없다. 아마 묻지 않으면 결국 모르고 말아 버릴 그 무엇.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아닌 자신의 희미하고 질척이는 그림자가 마음속에 있어서 방랑하는 기억의 목록을 도열하고 가두어진 말을 입 밖으로 소환해내는 것 같다. 

 

- 원장은 이런 장사를 할 때의 감대로 노부인을 처음 보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미 견적을 냈는데, 암만 생각해도 그녀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기품 있는 노년의 CEO 내지 중요 인사와는 거리가 멀었고 자신을 남다르게 꾸미는 일에 무관심한 건 물론, 디너파티에 초대받아 와인 잔을 들면서 손톱이나 반지를 드러내는 일과도 인연이 없어 보였으며, 지금은 마치 친구네 아들 결혼식에 초대받아 뭐부터 구색을 갖춰야 할지 모르지만 하여간 뭔가 아무것도 안 바르기에는 예의가 아닌 듯하여 어쩔 수 없이 나온 어수룩한 모양새였다. 

 

- 예산은 넉넉한데 자신에게 무엇이 적합한지를 모르는, 뭔가를 처음 해보는 어머님들이 종종 저지르는 오류다. 

 

 

 

 

 

 
파과(양장본 Hardcover)
한국 소설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60대 여성 킬러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통해 새로운 여성 서사를 써내려가며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구병모의 소설 『파과』를 다시 만나본다. 40여 년간 날카롭고 냉혹하게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아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爪角)’. 한때 ‘손톱’으로 불리던 그녀는 40여 년간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으며, 날카롭고 빈틈없는 깔끔한 마무리로 방역 작업을 처리해왔다. 하지만 몸도 기억도 예전 같지 않게 삐걱거리면서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는다. 노화와 쇠잔의 과정을 겪으며,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고 평생을 되뇌어온 조각의 마음속에 어느새 지키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 생겨난다. 버려진 늙은 개를 데려다 키우는가 하면, 청부 살인 의뢰인의 눈에서 슬픔과 공허를 발견한다. 삶의 희로애락을 외면하고 살아온 조각의 눈에 타인의 고통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조각의 마음에 온기가 스며드는데…….
저자
구병모
출판
위즈덤하우스
출판일
201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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