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소상동아] 특공황비 초교전 1-6 (완)

일루젼 2022. 9. 25.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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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소상동아 / 이소정
출판 : 파란썸(파란미디어) 
출간 : 2018.09.13 


       

지난 주말은 초교전에 빠져서 보냈다. 다 읽고 나서 1부까지 나온 드라마가 있다는 것과 좋지 못한 일로 이슈가 되었었기에 후속작이 나오긴 어려울 거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매우 즐겁게 읽은 입장에서 무척 입맛이 쓴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 미리 마음에 걸렸던 부분들부터 꼽아보자면 '경국지색'이 아닐까. 강하고 영민하던 주인공이 자꾸만 연약해지고 보호를 받게 되는 부분도 그렇지만, -지치면 기대고 싶을 수도 있겠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것도 일종의 역하렘 느낌이다. 그들이 절체절명의 순간 내민 도움으로 일이 풀려나가기도 하기 때문에, 극적이라면 극적이지만 후반부에는 다소 공주 -실제로 수려왕이긴 하지- 가 되어버린 점이 아쉽다. 그래도 초반에는 그녀가 그렇게 도운 일도 있었으니 이해할 수 있다.

 

<채운국 이야기>나 <새벽의 연화> 같은 느낌도 있는데, 하지만 주인공 초교는 진심으로 자신의 이상을 위해 자신의 생명과 감정 모두를 걸었으며, 딱히 민폐를 끼쳤다기보다는 얽히고 설킨 은원 사이에서 다 함께 굴렀다는 점에서 충분히 멋지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물론 주연급 남성들 기준이고 조연들에게는 충분히 폐를 끼쳤지- 

 

극 초반부와 한 두번의 이벤트를 제외하면 등장인물이 이 세계로 오게 되었다는 부분은 통째로 없애도 크게 무리가 없을 법한 설정이다. 20대 후반에 8세 소녀의 몸으로 들어온 셈이니 정신연령 상 20년의 갭이 생기는데, 그런 점에서 남자주인공'들'보다 열 살 이상 연상이었다는 점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도 있다. -작가도 이를 의식한 것인지 후반부에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하나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국가 간의 정치와 모략을 이용해 자신의 세를 키워가는 초중반 부도 매력적이었고 각자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어가며 변해가는 과정들이 설득력 있었다. 모두가 한 번 이상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그 과정을 딛고 일어서는 자와 그대로 주저 앉는 자, 혹은 그에 사로잡히는 자로 나뉘는 점이 인상적이다. 또 오래 묵은 은원 위로 새로운 연들을 엮어가는 과정 또한 감동을 준다. -다소 작위적인 부분도 있지만, 그 점이 재미이기도 하다-

 

주 등장인물은 연순, 제갈월, 이책인데 제각각의 매력이 뚜렷하고 각자가 부각되는 시기도 다르기 때문에 마음 편히 인물들의 매력에 빠져 읽어나갈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묵향동후의 세 주인공들이 많이 겹쳤다. 첫째와 연순, 둘째와 제갈월(외모는 셋째), 셋째와 이책. 완벽한 연결이다. 

천하를 포기하고 한 사람을 선택한다니, 역시 스케일이 크다. 특히 제갈가의 넷째 공자처럼 좋아한다면 마음을 주지 않는 게 더 어려울 것 같다. 세 남자 주인공들 모두 절세가인들에 지모도 출중하고 초교를 사랑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본연의 모습대로 품어줄 수 있는 도량을 가진 이는 넷째 공자 뿐이었다. -전제 조건은 상대도 초교같은 사람이어야겠지 제갈월...!- 

 

개인적으로는 세 인물 모두가 황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자라난 인물들이기에 오히려 황좌를 저울질 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들이 살아온 궁에서의 삶은 속내를 읽혀서는 안되는 모략의 장이며, 언제고 차고 기울어 한결같이 좋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 한 순간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할까, 라는 의문은 오히려 그 안에서 살아 보았기에 품을 수 있는 의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자체가 목적인 자와 그것을 통해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의 이념 다툼 또한 주변 인물들을 통해 나름대로 잘 그려졌다. 

 

중국 특유의 호와 본명, 아호가 뒤섞여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여주인공의 이름에만 유의하면 크게 복잡할 정도는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암시적으로 '그'라고만 칭해진 초교의 속마음에서 첫째, 둘째, 셋째 중 누구인지를 묘사를 통해 연결하기가 더 까다로울 수 있겠다. 다 읽어나가다보면 초반의 첨가나 구가, 목합가 등 다양한 세력가의 인물들이 후일담에서 짜맞춰지는 재미도 느끼실 수 있다. 참고로 혹시나해서 약간의 사족을 덧붙이자면 현묵과 납란홍엽을 눈여겨 읽어야 연순과 우수와의 관계가 이해될 것이다. 

 

한 인물이 신념을 품었다면, 때로는 그로 인해 '선택지'라는 것이 사라지기도 한다는 점을 잘 그려낸 점이 마음에 든다. 그를 위한 인물의 고뇌나 번민이 깊게 그려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죽을 것을 알면서도 뜻을 지키고자 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좋아보였다. '어떤 순간에도 합치되는 선택'을 하고 싶지만 매번 쉽사리 꺾이고마는 지라 개인적으로는 무척 부러운 모습이기도 하고, 그런 '반짝임'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주변 이들의 마음을 끌어들일 수도 있겠다 싶어지기도 했다. 

 

반짝이는 천재를 다룬 이야기들은 많다. 그들은 스스로 무너지기도 하고, 세상 물정을 몰라 이용당하기도 하며, 그 기재를 사용해 뜻을 이루고 정점을 찍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무너지기도 하고, 모두의 사랑을 받기도 질시를 받기도 한다. 이 모든 결말들이 '천재'와 관련된 '흔한' 이야기들이다. 

 

모든 이야기는 처음부터 모든 결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을 어떻게 엮어나가느냐에 따라 천인천색의 이야기가 지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누구나에게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듯이,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하나가 아니듯이. 

 

때로는 이런 로맨스 소설도 좋겠지.

즐겁게 읽었다. 


   

 

- 운명은 종종 사람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내려 준다. 그러나 그 선택은, 단 한 걸음 차이로 바뀌기도 하는 법이다.

 

- 초교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한참 후에 갑자기 물었다.

"도련님께서는 금시 언니가 금촉 언니를 모함했다고 믿으시는지요?"
제갈월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금시가 그렇게 대담할 리도 없지만, 대담했다고 쳐 보자. 그렇다 해도 그 애는 이런 계책을 생각해낼 위인은 못 된다. 어쨌든 주순은 하인들 사이에서 어른 노릇을 하고 있는데,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았으니 체면상 그냥 지나갈 수는 없을 거다. 주순이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을 하나 닦달하는 거야 해서는 안 될 일도 아니고, 그저 그가 더러운 물을 내 청산원에 쏟아붓지만 않는다면야 상관없는 일이다. 아마 원 내에서 노비들끼리 암투를 벌였다는 거짓말로 자기 자신을 씻고 싶은 모양이지. 그렇게 나이를 먹어서도 다 헛일이야. 기억력도 좋지 않고."

 

- "도련님께서는 어째서 금시 언니를 도와주지 않으시나요? 장사원에서 언니를 때려죽일 수도 있잖아요."
"만약 그 애가 정말로 그런 일을 했다면, 나는 그 애를 도와주었을 거다. 하지만 금시는 지금 너무 쉽게 다른 이의 올가미에 빠졌지. 이것만 봐도 금시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다. 어리석은 자는 내 청산원에 남겨 둔들 아무 쓸모가 없지 않느냐."

 

- "사람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가시나무 속에 있는 것과 같으니,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야 사람도 망령되이 움직이지 아니하며, 움직이지 않아야 상처받지 않을 것이니라. 만약 마음이 움직인다면 사람도 망령되이 움직여 그 몸을 상하게 되어 고통이 뼈에 사무칠 것이며, 세상의 모든 고통을 맛보게 되리니..."

 

- "네가 지금 온전한 상태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네가 위씨이기 때문이다. 네가 그 천민들을 동정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네가 사람 사이 등급의 구분을 혐오하고 있는 것도 잘 알지. 하지만 네가 아무리 신분이라는 것을 미워한다 해도 말이다, 너는 결국 위씨 가문의 직계 자손이다. 바로 이 위광의 조카란 말이다. 네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누려 온 모든 것들은 문벌이 너에게 준 것이다. 네가 먹는 것, 쓰는 것, 의식주와 관련된 모든 것은 물론이고 신분과 지위까지, 모두 가문이 너에게 준 것이야. 이것만은 아무리 너라도 영원히 바꿀 수 없는 사실이지. 안온하게 모든 것을 누려 온 이에게는 그 안온함을 저주할 자격이 없다." 

위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상에 기댔다. 그의 가슴이 희미하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세상의 모든 풍파를 겪어 낸 듯했다. 
"세상 모든 것에는 존재하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오늘 위씨 가문이 변탑족을 도륙하고, 변탑족이 위가의 사람들을 도륙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바로 우리 위의 선조들이 계속 가문의 이익을 위해 분투해 왔기 때문이다. 300년 동안 우리 위씨 가문은 국토를 지키며 변방의 땅을 개간했고, 조정에 들어가 출사했다. 우리가 전쟁터에서 얼마나 무수한 공을 세웠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변탑족이 한가롭게 말을 먹이고 양을 방목하고 있을 때, 우리 위가의 자손들은 말을 달리며 활을 쏘고 병법과 경영의 방법을 배웠다. 그랬기에 우리는 온갖 모략과 암습을 피해 살아남아 칠대 문벌 중 하나가 되었고, 변탑족은 변방에서 노역을 하고 전 부족이 죽게 된 것이다. 얘야, 하늘은 항상 공평하단다. 하늘은 결코 누군가를 특별히 편애하거나 두둔하지 않아. 누군가가 무엇을 잃는다면 그건 그 누군가가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약하다는 이유로 강자의 괴롭힘을 저주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너는 지금 이곳에서 그들을 동정하고 있지만, 생각해 본 적 있느냐? 만약 위의 자손들이 모두 너와 같았다면 오늘 진황성 밖에서 죽음을 맞은 것은 네 형제자매들이었을 것이다." 
위서엽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거대한 바윗덩이가 가슴을 내리누르는 것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 그저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 "아, 숙부는 이미 늙었다. 너희들을 지켜 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장래에 숙부가 없어지면 누가 우리 가문을 보호하겠느냐? 내 아들이 사람들에게 살해당하지 않도록 지켜 줄 이는 누구고, 내 딸이 다른 이들에게 희롱당하지 않도록 지켜 줄 이는 누구일까? 과연 누가 그들을 지켜 줄까? 네가 지켜 줄 수 있을까?" 

 

- 하늘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사위는 고요했다. 초교는 마지막으로 붓을 내려놓고, 차를 마시며 도표를 가리켰다. 
"몽가는 결국 몽전 장군이 가문을 책임지게 될 거야. 그러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내가 보기에, 성금궁과 위씨 문벌보다는 제갈가를 조심하는 것이 옳아." 
연순이 눈썹 끝을 치켜세우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제갈회는 막 수도를 떠나지 않았나? 제갈목청은 근 몇 년 동안 서서히 장로회에 나오지 않고 있어.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제갈회에게 맡겨 처리하게 하고 있지. 이번에, 그도 손을 대려고 할까?"
"제갈목청, 그 늙은 여우를 소홀히 봐서는 안 돼."
초교가 고개를 흔들었다.
"제국에서 300년 동안, 장로회에 속한 가문들은 몇 번이고 바뀌었어. 지금 장로회에서 배라대제를 따라 초원에서 일어났던 개국공신은 제갈가밖에 없어. 제갈가는 권력의 균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풍랑이 이는 곳에 두지 않아. 목합씨처럼 자신을 과시하려 하지도 않지. 군왕이 권력을 회수할 때, 권력을 과시하던 자들부터 제거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거지. 그들 일족은 자신들을 보전하는 법을 알고 있어. 제국은 근 몇 년 동안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제갈목청은 계속 중용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는 누차 우환을 피한 것뿐이야. 그리고 그건 결코 운이 좋아서만은 아니지. 여기를 봐."

 

- "몇 달에 걸쳐 수집한 정보야. 제갈 일맥은 표면적으로는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서북의 식량이며 건초, 소금, 철광을 소규모로 몇 번이나 이동시켰어. 움직임이 크지는 않지만 상당히 자주였지. 제갈식諸葛息은 서한성으로 토지세를 징수하러 가서 두 달 동안 돌아오지 않고 있지. 위에서는 제갈식이 우둔하다고 여겨 기용하지 않으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달라. 서한성은 비록 작지만, 그 이웃이 바로 안명관, 우리가 연북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지, 요수, 부소扶蘇, 그리고 적수 교통망의 중추가 되는 곳이니 전략적으로는 아주 중요한 곳이야. 결코 무시할 수 없어. 그리고 여기를 봐. 지난달 8일 장로회는 제갈연의 종군을 비준했어. 제갈목청이 무엇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제갈가의 영향력이 큰 동남쪽 군영에 보내지 않고 서남쪽 군영으로 보냈을까? 서남은 서북과 이웃하고 있지." 

 

 


 

 

-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설원을 스치며 작은 회오리를 일으켰다. 흰 눈이 회오리를 따라 휘몰아치는 그 모습은 마치 운명의 윤회와도 같아 보였다. 올라가고, 다시 떨어지고,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하는. 

 

- 연순은 아정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아마도 나 한 사람뿐일 것이다. 그가 왜 아초를 구했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말이다. 아정, 앞으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제갈가가 이미 말려든 셈이니 판세는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밤에 지키는 자를 두배로 늘리고, 수상한 자를 발견하면 바로 죽이도록 해라." 
아정이 당황했다. 
"죽이라고요? 세자 저하, 그리해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을 테니 안심해도 좋다. 수상한 자를 죽인다 해도 시끄럽게 떠들어 댈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 연못의 물은 점점 더 깊어 가고 점점 더 혼탁해지고 있어.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유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연순은 어둑어둑한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움직일 때가 왔다."

 

- 방 안에 빛이 가득 찼다. 멀리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초교는 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밤바람이 창의 격자를 타고 불어와 그녀의 먹빛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초교는 고요한 눈빛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는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순이 이 불빛을 보기만 하면 그녀가 아직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만약 그녀에게 온다면, 사정을 아직 되돌릴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가 그녀에게 오지 않는다면, 그가 이미 마음을 정했고, 그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정원의 등불은 계속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은빛 여우 털로 만든 바람막이를 입고,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청삼은 흐트러진 상태였다. 아정이 그의 뒤에서 푸른 대나무로 만든 우산을 받쳐 그의 머리를 가려 주고 있었다. 흰 눈이 사락사락 우산 위로 떨어졌다. 바람이 땅 위에 쌓인 눈을 살며시 말아 올려 구석으로 몰아가며 그의 새하얀 장화며 외투의 옷자락을 스쳐 갔다. 
 

- 온실 안은 매우 따뜻했고 난초의 그윽한 향으로 가득했다. 그 향을 맡고 있노라면 취해 버릴 것만 같았다. 연순이 눈썹 끝을 살며시 올리더니 가볍게 물었다. 
"그럼 아초 생각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마음속에서 이미 계산을 끝냈으면서, 무엇 때문에 나에게 묻는 거지?"
초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조순아를 맞아들이면, 언젠가 죽음의 위험에 처하게 되겠지. 하지만 조순아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성지를 거역하고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이니, 백일하에 반역을 표시하는 것과 같아. 그렇게 되면 순식간에 죽음이 다가오겠지. 당신같이 총명한 사람이 무엇이 이익인지 저울질하지 못할 리 없겠지." 
초교는 잠시 말을 쉬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7년 동안, 그렇게 큰 모욕과 곤경도 모두 버텨 냈는데, 지금 여자 하나를 취하는 것은 별일 아니잖아? 황제는 스스로를 위해 빠져나갈 길을 찾아 진상을 덮으려고 할 테니, 우리도 이제 시간을 끌 필요가 없겠지. 그저 당신에게 사로잡힌 조순아가 가련할 뿐이야."
연순의 안색이 점차 변했다. 그의 냉담한 표정 속에는 은근한 외로움과 고통이 배어 있었다.
"이게 너의 진심인가? 아니면 나를 위해 원래 이런 계획을 세웠었나?"
"당신과 나는 오랫동안 화와 복을 함께해 왔어. 생사와 영욕도 예전부터 함께하게 되었고, 그러니 나는 당연히 당신을 위해 계획을 세우지." 
초교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더군다나, 어차피 당신도 똑같은 결정을 내렸잖아. 어젯밤, 당신이 나에게 귀띔해 준 거나 마찬가지잖아."
말을 들은 연순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담담하게 웃었다.
"아초는 과연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야."

 

-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그 말들은, 털어놓지 못한 그 마음은, 결국 세월의 먼지에 느릿느릿 덮여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과거의 그림자를 볼 수도 없게 되었다. 운명은 거대한 불과 같아, 아주 많은 경우 단 한 번의 기회만을 허락하곤 한다. 그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잡을 수 없는 것이다. 

 

- 등불은 희미하고, 별도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군영에 돌아왔을 때 초교의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 안에 들어갔다.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이 단숨에 내달리고 있었다. 진황성에 사는 이들은 모두 연극의 고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 대하의 황제가 목합씨 가문을 학살할 때, 삼황자와 십삼황자, 그리고 위씨 문벌의 세력을 빌렸다. 조철을 배제했을 뿐 아니라, 사람을 보내 갖가지 방식으로 그를 탐색하고 감시했다. 어찌 마음에 원한과 분노가 없을 수 있겠는가? 

 

- 영명한 황제는 마음이 좁고 철없이 구는 아들을 용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쓰디쓴 결과를 마음 깊은 곳에 억누르고 보복을 꿈꾸는 역신을 용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위를 꿈꾸는 황자는 분노를 표면적으로 표현하는 무능한 형제를 용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굴욕을 인내하면서도 살 길을 모색하며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경쟁자라면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 일개 궁술 교두가 감히 온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아웃 나라의 태자를 구타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녀 배후에 누가 있다고 여길지는 일목요연했다. 그녀도 오늘 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교는 조철이 분명 사람을 시켜 그녀의 내력을 조사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제갈월의 장검을 들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파월검은 검 중에서도 극품이었다. 검을 주조한 대사의 시문도 새겨져 있었다. 조철이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그가 자신과 제갈가 사이의 갈등을 알게 되면, 자신이 연순을 따른 것도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초교가 제갈석을 죽였기 때문에 갈 곳이 없어져 부득불 그 곤경에 처한 연북 세자에게 의탁했노라고. 

- "나는 지금까지 대동회가 배반할까 전전긍긍한 적이 없으니까. 연순은 연세성이 아니고, 결코 누군가의 바둑알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스스로의 마음을 따라 전투에 임할 뿐이다."
아정이 고개를 숙이며 냉담하게 말했다.
"세자께서 이리 말씀하시니, 속하는 실망스럽습니다."
"실망하여도 무방하다."
창틈으로 매서운 바람이 들어와 연순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점차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글자 한 글자, 아정의 귀에는 단호한 연순의 말이 뚜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먼저 사내가 될 것이고, 그다음에 너희들의 주인이 될 것이다."

 

- "너희들은 강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강한 무기를 지닌다 해도, 기껏해야 적 백을 상대할 수 있을 뿐이다. 강한 지모로는 천 명의 적을 상대할 수 있고, 강한 권력으로도 만 명을 상대할 수 있을 뿐이지. 진정한 강함이라는 것은, 마음이 굳세다는 것이다. 어떤 곤란이라도 이겨 내고, 백 번 부러지더라도 굴하지 않는 견고한 심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진정으로 강한 것이지. 진정한 강함을 갖추어야만 하는 일마다 순조롭게 이뤄낼 수 있고,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며, 마지막에는 정상에 올라 세상 사람들이 도달하지 못할 높이까지 이를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이 굳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것? 아니면 신념이 견고하여 영원히 탐욕을 모르는 마음? 모두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념이 있는 법이고, 백련의 절개라 하는 것은 전설에 불과한 것이다. 정말로 강한 사람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는 서신을 내려놓고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마침내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분은 이미 어른이 되신 것이다. 너희들, 이후로는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다시는 이런 것을 나에게 보이지 말거라." 

 

- "축하할 일이야."
우는 눈을 감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수년 동안 죄수처럼 보낸 삶도, 그분 마음 깊은 곳 인간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없애 버리지는 못한 것이다. 만약 그분께서 음울하고, 복수심에만 가득 차 사람을 전혀 믿지 않는 존재라면, 우리들은 단 한 명도 살아서 연북으로 돌아가지 못할 테니 말이다." 

 

- "만약 복수와 소중한 이를 지키는 일에 충돌이 발생한다면? 그때 저하께서는 어찌하실까요?" 
말을 들은 우의 눈에 갑자기 차가운 빛이 서렸다. 하집은 손을 늘어뜨리고 웃었다.

"우 아가씨께서는 분노를 가라앉히시지요. 나는 그저 가설을 이야기한 것뿐이니까. 다만 우리의 새로운 주인은 대왕 전하 같은 분이 아니시니, 그분의 품행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대동의 운명을 단 한 사람, 이러한 사람에게 맡긴다는 것이 너무 경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는 잠시 침묵하더니, 결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한가. 하지만 대동에게는 이미 퇴로가 없다."

-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데 가문이 존재할 수 있다더냐? 대하가 멸망한다면 제갈가는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나는 조씨 황실을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진황의 백성들을 위해, 대하의 백성들을 위해 이러는 것이다!" 
"그... 그렇게 위급한 상황입니까? 어르신께서는, 황성의 성벽은 견고하니 10만 대군이 사흘 연속 공격해 온다 해도 막아 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깥의 난민 정도야 한 시진이면 막아 낼 수 있다고요. 12사의 위장들이 도착하면 연순의 인마는 곧 무너지게 될 것이고, 이것은 그저 작은 반란에 지나지 않는다고요." 
"작은 반란이라고?"
제갈월이 차갑게 말했다.
"다들 연순을 바보로 여기고 있군. 그가 원병이 와서 포위를 풀 때까지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 같으냐? 그는 바로 도망칠 거다. 진황성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그때가 되면 누구도 추격할 수 없겠지. 이렇게 치밀한 사고력에 원한으로 가득 찬 자가 진황을 탈출하여 연북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 같으냐? 그는 연세성보다 만 배는 무서운 자다." 

 

- "도련님!" 
"놓아라!"
그때 몽둥이 하나가 제갈월의 머리를 타격했다. 제갈월은 얼굴을 찌푸리며 땅 위에 쓰러져 혼절하고 말았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어르신의 분부입니다."
주성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도련님의 말씀은 모두 옳습니다. 옳고 말고요. 하지만 우리는 문벌입니다. 문벌에는 문벌만의 규칙이 있는 법이지요. 게다가 도련님은 그저 연 세자를 제거하고 싶으신 것이 아닌지요?" 

 

 


 

 

- 직접 초교의 음식이며 잠자리를 보살펴 주었다. 또한 가문이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월칠 등에게 연락하려 하지도 않았다.  
아마 가문 내에서 제갈월과 대립하고 있는 이가 내 신분을 드러내어 제갈월의 지위를 위협할 구실로 삼을까 두려워서겠지. 
여기까지 생각한 초교는 냉소했다.

나는 이런 극단적인 생각으로, 나 자신을 속이려 하고 있구나. 사실 이 모든 일이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 초교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생각했다. 그녀는 그저 그 연유를 인정하고 직시하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그녀는 그저 눈을 감고, 조용히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번잡하지 않은 환경에서 나와 함께 있고 싶은 것뿐이겠지.
세속의 보통 사람들처럼. 제갈가의 주군이 아닌 그 자신으로, 연순의 수하가 아닌 초교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일 게다. 서로 대립하지 않고, 원한을 내려놓고,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을 지운 채, 그리고 그들이 속한 현실과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책임에서 벗어나서.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 이런 기회는 아마 이번 단 한 번뿐일 테니까. 

- 초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서 잠들고 싶었다. 어떤 일들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 괴로웠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에게 어떤 대답도 해 줄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들 각자에게는 원하는 길이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만의 출발점에 서 있었고, 8년에 걸쳐 서로에게서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들은 점점 더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되어 갔다. 
초교는 천천히 잠에 빠지면서 자조하듯 웃었다. 이런 생각들이 다 무슨 소용 있을까. 어쨌든 지금은, 그녀로서는 그에게 선을 그을 방법조차 없었다. 

- "류명준은 류희의 이런 행동에 동의했을까? 현양성에서 류가가 쌓아 온 기반을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셈일 텐데."

"류명준이 이 일을 지시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제갈월이 가볍게 웃었다.
"성아, 너는 머리도 좋고, 무예도 강하고, 반응도 빠르지. 하지만 너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류희는 반란을 일으킨 거야.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어제 저녁 제일 처음 염라대왕을 만난 것은 바로 류명준이었을 거다." 
"류희가 반란을 일으킨 거라고?"
초교는 살짝 당황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현양성에서 만났던 그 젊은이를 떠올렸다. 웃으면 새하얀 이가 드러나던 청년이었다. 꾸준히 연습하여 기마에 자신이 있다며 뛰어난 승마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류명준은 초교에게 조카를 소개하며 큰소리로 웃었다. 그때 류명준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류희는 아들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 "류희가 무엇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을까? 아마 류희는 일개 부호에서 멈추고 싶지 않았겠지. 벼슬길에 나가고 싶은 야심이 있었을 거다. 하지만 대하 정권은 외세를 배척하고, 칠대 문벌이 주도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으니 대하 조정에서는 기반을 닦기 어려웠겠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수십 년 안으로는 류가의 인물이 대하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는 힘들어. 그러니 류희는 승부수를 던지려 했겠지. 현양성 부유한 이들의 재물을 그러모은 후,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변당의 상류층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말이야. 이 정도 재물이라면, 이번에 변당에 모이는 귀족들 중에서도 류희를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군." 
제갈월이 상황을 하나하나 분석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말들은 초교의 귓가를 바늘처럼 찔러 왔다. 그녀는 제갈월처럼 이렇게 간단하게 결론 내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죽은 이들의 신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류희는 사실 대하의 사람인 것이 아닐까? 그리고 대하의 명을 받아, 대동회가 현양성에 오랫동안 만들어 놓은 기반을 뿌리 뽑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아닐까? 겸사겸사 대동회가 오랜 세월 쌓아 온 부도 점거하고 말이다. 물론 류희가 무엇 때문에 변당으로 향하고 있는지는, 초교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 어쨌든 제갈월은 지극히 총명한 사람이었고, 이 순간, 척후들을 통해 간밤의 학살극을 전해 들은 변당의 관원들도 제갈월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류희는 다른 세력들을 깨끗이 제거한 후, 재물을 합쳐 변당으로 향하고 있으며, 그의 목적은 변당에 귀순하여 관직을 사려는 것이라고.

 

- "이미 400년이 넘었어. 아마 생각지도 못했겠지. 저 나무가 대하의 역사보다도 오래되었다는 것을 말이야." 
그러더니 오목교 가장자리에 핀 작은 꽃을 가리켰다. 
"무슨 꽃인지 알아?" 
그 꽃은 연보랏빛으로, 꽃받침이 아주 작고, 바람 속에서 한들거리는 모습이 언제라도 날려 갈 것만 같았다.
"저 꽃 이름은 유안이라고 해. 한밤중에 피어나고, 새벽이 되면 시들어 버리지. 저 꽃은 평생 단 한 번 피어나, 아주 짧은 몇 시진 동안을 위해 1년의 세월을 견디는 거지."
은빛 술병 위에는 작은 꽃송이들이 각인되어 있었는데, 유안이라는 꽃과 아주 비슷해 보였다. 이책은 머리를 젖히고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초교에게 미소 지었다. 
"교교, 인생은 본래 쓰고 짧은 거야. 아침 이슬에 꽃으로 피어나도, 눈 깜빡할 사이에 백발이 되어 버리지.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때는 모름지기 누려야만 하는 거야. 좋은 시절을 헛되이 보내 버리지 마." 
초교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는 저 유안처럼 잠시 피었다 사라질지언정, 늙은 나무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아요."
 

- "만물은 자기만의 생존 방식이 있지. 유안은 고목의 삶이 평범하고 아름답지 않다고 웃겠지만, 또 동시에 알지 못하는 거지. 오랜 시간 동안 한 곳에 존재한다는 것 또한 지극히 아름답다는 사실을. 비바람을 버티며 세월에 무너지지 않는 것도 일종의 아름다움이야. 시간을 견디며 쌓아 가는 그 진귀한 아름다움을, 하루살이가 어찌 이해할 수 있겠어?" 
 
- "인생에 뜻을 얻었다면 마땅히 즐거움을 누려야 하리, 그대 손의 금잔을 비운 채 달을 바라보지 말게나."

(역자 주 :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장진주>의 한 구절.) 

- 부인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녀는 아마 평소에 거의 웃지 않는 모양이었다. 웃는 표정이 어쩐지 굳어 있고, 눈가에는 주름조차 지지 않았다. 그녀가 초교를 보며 말했다. 
"별거 아니다. 나는 그저 너를 보고 싶었어."
부인의 말은 도무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초교는 대체 이 부인을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궁에는 규칙도 많고, 사람도 너무 많았으며, 모든 이들은 대화를 나누더라도 본심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다. 초교가 속으로 부인의 신분을 추측하고 있을 때, 그 부인이 다시 말했다. 

 

- "너는 아주 착하구나."
초교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너를 칭찬하는 게 아니다. 너는 확실히 아주 착한 사람이야. 하지만 나는 네가 궁정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삶에는 본래 너무 많은 번뇌가 깃들어 있지. 하루 종일 진지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어서야 너무 재미없는 거 아니겠어? 교교, 충고하건대 언제나 그렇게 너무 진지하게 굴 필요 없어. 어지간한 것은 그냥 넘겨 버려. 눈은 한쪽만 뜨고 다른 쪽은 감고 있는 게 좋아. 임기응변과 스스로를 위로하는 법을 배워야 해. 너는 너무 피곤하게 살고 있어. 항상 그 너무 많은 일을 어깨 위에 얹고 살고 있잖아. 나는 네가 늘 기억했으면 좋겠어. 너는 여인이고, 이 세상에는 네 믿음, 네 신념 말고도 중요한 일들이 아주 많다는 걸.

- 이번에 연순이 돌아온 후 무엇인가가 달라졌다. 그들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졌지만, 무엇인가가 점점 변하고 있었다. 

 

- 연순이 방금 했던 말을 떠올리고 초교는 미소 지었다. 됐다. 아마 내가 지나치게 걱정하는 걸 거야. 남자들은 모두 그런 법이지. 자신의 연인이 전장에 나가 적진으로 돌격하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는 없을 거야. 지금 그가 가진 힘도 강해졌고, 그러니 연순은 나를 보호하려 하는 거겠지. 


- 초교는 그를 이해해야만 했다. 그는 그녀가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 보통 여자들처럼. 차를 마시고 꽃을 감상하며, 비단옷을 걸치고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그야말로 비단옷과 미식의 생활을 단지 그녀가 과거 고생했던 것을 보상하기 위해 그러는 것일 뿐이다. 비록, 그런 생활이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 그래도 초교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녀는 연순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그녀를 배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지켜 주려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꽤 편해졌다. 초교가 다시 잠을 청하려 했을 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창을 여니 냉기가 훅 끼쳐 왔다. 연순의 방을 향해 등불들이 몰려가는 것이 보였는데, 아주 다급해 보였다. 

 

- "밖에 무슨 일이지? 이렇게 늦었는데 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온 거지?"
"아, 아가씨께서 모르셨군요. 전하께서 오늘 밤 장군들과 함께 밤을 새워 군대의 일을 토론한다고 하셨어요. 아마 동쪽 전장의 작전 방안 같은 것을 짜시려는 것 같아요. 장군과 대인들이 전하의 방 근처에서 아주 오래 기다리셨다고 해요." 
초교는 그만 얼이 빠지고 말았다. 창밖에서 바람이 거칠게 불어와 그녀의 옷을 펄럭였고, 머리카락도 바람을 따라 춤을 추었다. 초교는 아주 연약해 보였다. 

- "아가씨께서는 누구를 물으시는 건지요? 저 월칠의 안부를 물으시는 겁니까? 저는 아주 잘 지냅니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얼마 전엔 부인도 얻었어요."  
그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초교는 조금 난처했지만, 여전히 웃으며 답했다.
"정말 축하해야 할 일이네." 
"월칠, 가서 우소에게 천천히 가라고 해라. 부주의하게 눈구덩이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전하고." 
월칠이 고개를 돌려 나무 아래의 남자에게 말했다.
"도련님, 우소는 서북 출신입니다. 도련님께서 우소를 걱정하시는 것보다는, 제가 말을 전하러 가는 길에 눈구덩이에 빠질 것을 걱정하시는 것이 맞을 텐데요." 
제갈월이 눈썹을 올리며, 눈빛에 노기를 띠었다. 월칠은 서둘러 손을 들고 연달아 말했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속하가 가겠습니다. 도련님께서 속하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고 표현하는 것도 참 좋은 일이지요." 
말을 마친 월칠은 제 말에 올라타더니, 말고삐를 잡고 나는 듯이 달려갔다.

- 사실, 겨우 두 달 남짓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왜인지 모르게 초교는 아주 오랫동안, 정말이지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최근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대하와 전쟁을 시작한 후로 수많은 일들이 몰아쳐 왔다. 특히나 연순과의 사이는 날로 틈이 벌어지고 있었고, 제갈월이 과거에 했던 말은 하나하나 진실이 되어 갔다. 그녀는 이제 발걸음조차 내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지금 그를 다시 보게 되니, 수많은 생각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도저히 자신의 마음을 정리할 수 없었다. 그들의 관계는 너무도 부자연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황무지의 한 그루 외로운 나무처럼. 

- "그쪽 내부에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이지?"
제갈월이 갑자기 입을 열었는데, 뜻밖에도 기밀에 속하는 정보를 물었다. 초교는 깜짝 놀라 기이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제갈월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설마 연북군의 정보를 탐문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너희 쪽 사람이 나를 이곳으로 유인했다."
제갈월이 천천히 말했다.
"누군가가 내 손을 빌려 부대 하나를 제거하려 하는구나 추측했지. 다만 그게 네 부대일 줄은 몰랐다."
예상했던 바이긴 했지만, 실제로 이 말을 듣고 나니 초교의 마음속에 분노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쥔 채 땅만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다. 이번에는 나를 만났지만, 다음엔 조철일 수도 있으니까."

- 그녀는 술 주전자를 들어 그에게 한 잔 따른 후,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제갈월이 그것을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술잔을 든 초교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예전에는 결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녀도, 이 사람의 정신을 미혹시키는 음료를 좋아하게 되었다. 초교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며 술잔을 들었다. 
"당신의 술을 빌려서, 당신에게 한 잔 권하겠어."
제갈월은 짙은 눈빛으로, 술을 들지 않고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초교는 단숨에 술을 마시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 한 잔은, 당신이 누차 나를 죽이지 않았던 은혜와 도움의 손길을 주었던 은덕에 감사하기 위하여."
1년 동안 보지 못하는 사이에 초교는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가느다란 눈썹, 그리고 아주 커다란 눈, 그러나 그 눈은 마치 안개에 뒤덮인 것 같아 도저히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제갈월은 술잔을 앞에 두고 마시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냄비 안에 넣으며 눈도 들지 않고 말했다. 
"식사할 때는 그냥 식사를 하도록 해. 말을 너무 많이 늘어놓지 말고, 연극이라도 하려는 것이 아니면."
 

 - "나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약간의 좌절 정도는 나를 무너뜨리지 못해." 
제갈월은 웃기만 했다. 외투의 모피가 그의 푸르스름한 턱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너무도 잘생긴 나머지 조금 사악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두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 초교는 갑자기 깨달았다. 제갈월은 자신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연순조차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 직시하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제갈월은 그녀에 대한 것이라면 작은 실마리도 놓치지 않고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녀의 꿈, 그녀의 신념, 그녀의 희망, 그녀의 즐거움, 그리고 그녀의 번뇌까지도...

- 제갈월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날카로운 전투 감각도 있고, 무술의 고수기도 했다. 또한 예술적으로 계책을 세우는 사람이었고, 든든한 가문의 배경도 있었다. 그러나 초교는 단 한 번도 그를 제대로 꿰뚫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그는 대체 무엇을 바라며 살아온 것일까?
연순은 복수를 원한다. 대하를 밟고 천하를 쟁패하고 싶어 한다. 조철은 황위에 올라 부국강병을 이루고 일세의 영민한 군주가 되기를 원한다. 이책은 대하를 쳐서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여 변당의 웅대한 기세를 다시 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제갈월은, 그는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제갈월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아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 그녀는 상무당에서 함께 공부했던 남자를 바라보며 한가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제갈 대도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사실 세상 사람 모두 다 알거든!
"헛되이 다녀온 것이 아니네. 다녀온 보람이 있어."

 

- 그는 그녀의 마음이 변했다고 탓하고, 마음을 다른 이에게 주었다고 탓했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만약 그의 핍박과 계획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영원히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영원히 그만의 아초였을 것이다. 그가 직접 그녀를 한 걸음 한걸음 떼밀었고, 그녀로 하여금 그의 진짜 모습을 보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가 어찌 배반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일까?  

 

 


 

 

- 전사들의 얼굴에 희미한 공포와 두려움이 있었지만, 뒷걸음질 치는 이는 없었다. 하소는 초교 곁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형제들, 저들을 백성에게 한 걸음도 다가서게 하지 마라!"

"분투!"
거대한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고함에 사람들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 상대편은 마치 거대한 바다 같았다. 그들을 향해 5천 명이 돌격하는 모습은 작은 파도에 지나지 않아 보였고, 흡사 자살하려 달려 나가는 모습 같아 보였다. 모두 멍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절망하여 참혹하게 비명을 지르던 연북의 백성도, 용음관의 연북 대군도, 대하의 정예병이며 장수들도, 그리고 조양까지도. 그들 중 그 누구도 초교가 이 정도 인원으로 10만 대군을 정면 공격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양의 대군이 든 무기는 바다를 이루고 있었고, 그들 진영은 마치 차갑고 음산한 지옥의 땅 같았다. 

- 그러나 잠시 후, 모두 초교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 이곳은 평원, 초교에게는 의지할 요새가 없었다. 대하병이 용음관 아래까지 오면 별수 없이 백성들까지 전투에 끌어들이게 될 테니 초교는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돌격해야만 등 뒤 무고한 백성들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 조양은 살짝 충격을 받았다.

 

- "어찌 된 일이지? 당수관이 9월 16일에 공격을 받았는데, 어째서 우리가 이 소식을 전혀 몰랐다는 말이냐?
정원이 몸을 일으켜 노한 소리로 외치자 전령병이 황급하게 대답했다.
"병사들 모두 관내에 포위당해 있었습니다. 적들의 기세가 흉악한지라, 주위의 군현들이 모두 공파당했고, 소식을 보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서남 부근 다른 군현의 관원들과 백성들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냐? 어째서 상황이 이 정도가 될 때까지 전혀 소식을 전하지 못할 수가 있는 것이냐?" 
전령병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살며시 연순을 한번 보더니, 한참 후에야 작은 소리로 답했다.
"서남 지대는 바로 상신 고원입니다. 그곳은 지금 열 중 아홉 집은 비어 있습니다. 모두 초 대인을 따라갔으니까요. 남아있는 이들은 밖에 있는 적들이 초 대인을 구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들의 존재를 숨겨 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단 한 사람도 보고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곳의 관리들은 모두 백성들에게 사로잡혀 묶여 있습니다."
 

- "속하가 소식을 들었을 때는, 변당의 수군이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일찍이 당수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성문이 열리자 그들이 상륙하였고, 지금 용음관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끌고 있느냐?"
"그... 그게... 변당의 황제입니다."
"인원수는 얼마나 되지?"
"10만보다 적지 않습니다."

- 연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가, 곧 다시 제왕의 위엄을 회복했다. 마치 방금 전까지 산 정상에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책? 네가 직접 왔다고?
"즉시 병사들을 정돈하라. 제1군, 제2군 전원을 집결시키도록, 내가 이끌고 용음관으로 가겠다!"

- "전하, 9월 16일에 당수관을 공격한 자들이 변당 쪽 사람들일까요?"
"그럴 리 없지."
연순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변당은 연북에서 멀지. 이책이 아초와 내가 화뢰원에서 충돌한 그날 바로 소식을 들었다 해도, 16일에 당수관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 다른 세력이 적시에 소식을 알고 암중에 변당에 통지한 것이겠지. 그리고 자신들이 먼저 당수관을 공격한 후, 뒤따라온 변당에게 길을 열어 주었을 것이다." 
정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가 그럴 수 있습니까? 대하입니까? 불가능합니다."
"누구냐고?"
연순이 눈을 차갑게 빛내며 천천히 말했다.
"이렇게 가볍게 연북 경내에 나타날 수 있는 자가 누구겠느냐?"

 

-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

- 그 순간, 모두 참지 못하고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리도 수많은 세력이 소리 소문 없이 연북 경내에 출현했다니. 오늘 그들과 만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두려운 장면이 벌어졌을 것인가? 연순은 달랐다. 그는 결코 걱정하지 않았다. 적들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바로 연순의 군대를 막아 이책에게 퇴로를 만들어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그는 상대의 신분도 짐작하고 있었다. 비록 달갑지 않고, 놀랍기는 했지만, 연순은 희미한 쾌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좋다, 나에게 한순간의 불찰이 있었으니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계산하고 있었지. 그는 연순을 막아서기 위해 마땅히 밝은 곳에 몸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연순은 자신의 사람을 스스로 놓아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가 구하게 할 수는 없었다.

- "철유, 세상에 누가 너에게 이런 것들을 해 줄 수 있을 성싶으냐?"
철유가 멈칫하더니, 한참 생각한 후에야 꾸물거리며 답했다.

"아마도 어머니만이 해 주실 것 같습니다. 제 아내도 이렇게는 해 주지 못할 것입니다."
이책이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지. 이렇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본래 많지 않지."

"폐하, 누군지 아시나요?"
이책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고개를 돌려 멀리 희디흰 눈보라 속에 숨어 있는 아득한 산맥을 바라보았다. 이책의 목소리가 슬며시 흔들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의심만 하고 있었지만, 이젠 확신하게 되었다."

- 운명은 기구하고, 올가미는 곳곳에 있다. 모든 이가 몸에 비단실을 맨 인형과 같이 이미 정해진 궤도를 따라 걷고 있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미리 이 종국의 서막을 알리려 하겠는가? 

 

- 이책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그것은 오랜 세월 실의에 빠져 있던 끝에 얻은 듯한 그런 평온함이었다. 
제갈월, 나는 너에게 미치지 못하는구나.

- 날이 새기 전에 눈이 멈췄다. 태양이 다시 나오기 전, 대지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높은 산봉우리 위, 펄럭이는 푸른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새하얀 올빼미가 날개를 펼치며 먼 곳에서 날아왔다. 남자가 팔을 내밀자, 이 청해 고원에서 가장 흉악하다는 날짐승이 온순하게 그의 팔에 내려앉았다. 올빼미는 온통 새하얗고, 꼬리에만 길게 피처럼 붉은 깃털이 셋 있었다.

- 우리는 모두 하늘이 연출하는 뻔한 연극의 배우에 지나지 않지. 그 연극에서는 나도 벗어날 수 없었고, 연순 역시 벗어날 수 없었어. 그러나 너는, 너만은 용기를 내어 그 모든 것에서 하나하나 벗어났다. 또한 용기를 내어 그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지. 나는 결국 너에게 지고 말았다. 나는 너에게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어. 

 

- 이책의 피리 선율은 기이할 정도로 경쾌했고, 아래 백관들의 울음소리와 뒤섞이니 묘하게 골계미가 있었다. 손체는 궁전 아래에 서서 허무맹랑한 짓을 하는 이책을 바라보았다. 귓가에 울리는 즐거운 곡조는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쓸쓸하게 들렸다.

- 궁 안의 길은 길고 쓸쓸했다. 양편의 높은 담장 너머로 간혹궁 밖의 맑은 향이 풍겨 왔다. 이렇게 밝고 아름다운 햇빛 아래, 누구의 마음 깊은 곳에 가벼운 물결이 일고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매일 밤 자정이면 찾아오는 적막한 안개를 깨트리고, 적적한 궁중의 가는 먼지까지 가라앉게 하는 것일까. 이책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희미하게 취한 눈으로 이 세상의 모든 깨어 있는 것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 초교는 알지 못했다. 바로 3년 전, 그녀가 첨가에 팔려 갔던 때 누군가가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갔다는 것을. 그날의 햇빛은 참 맑았다. 그는 옷자락을 나부끼며 조용히 나무 아래 서 있다가, 그녀와 거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쳤었다. 

 

- 겉으로 평온해 보인다 해도, 물아래로는 셀 수 없이 많은 격렬한 소용돌이가 있는 것이다.

 

- "이 몇 달 동안, 계속 생각했어요. 대체 나는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내가 너무 천진난만했던 것일까... 저는 제가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좀 더 문명화된 사회제도를 건설할 수 있을 거라 믿었죠. 대동회가 이야기하던, 온 세상을 모든 이가 공유하는 사회를 꿈꾼 것은 아니에요. 저는 그저, 가난한 사람들도 밥을 먹고 다른 이의 노비가 되지 않는 세상을 바라고 있었어요. 권세를 가진 자들이 하층의 백성들을 위해 법률을 제정하기를 바랐던 것뿐이에요. 그 누구라도,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없는 사회를 바랐는데... 물론 저도 알고 있어요. 사회는 단계를 뛰어넘어 나는 듯한 속도로 전진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항상 누군가는 사회가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도록 인도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어 있죠. 단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더라도, 조만간 멀리까지 갈 수도 있을 테니까요. 맨 처음에는 위대한 이상 같은 것은 없었어요. 그저 도망쳐서 잘살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저는 연순을 알게 되었고, 연순에게서 연북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제 심장은 점차 살아나기 시작했죠. 저는, 제가 이 세계에 온 것에도 아마 어떤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마 어두운 가운데서도 하늘의 뜻을 받은 것일 거라고. 하지만 제 소망은 무너지고 말았어요. 그리고 그건 제가 너무 자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죠. 저는 제 역량이 아주 크다고 생각했고, 아주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고, 수많은 이들을 지켜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최후의 순간이 왔을 때, 저는 제 힘이 아주 작다는 것을 깨달았죠. 가족들이며 친우들은 하나하나 저를 떠났고, 저는 그들을 지킬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어요.”
이책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슨 말인가 하려 했다. 그러나 초교가 그를 제지했다. 그녀는 이책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 "폐하, 저는 좋은 지도자가 아니에요. 수려군의 전사들은 의지가지없는 상태에서 저를 믿게 되었죠. 하지만 저의 존재는 그들을 한 번 또 한 번 위기와 전쟁으로 밀어 넣었고, 피를 흘리며 죽어 가게 했어요. 제가 약속했던 체제와 생활은, 지금의 저로서는 실현할 방법이 없어요. 저는 그저 그들을 한 번 구했을 뿐이었는데... 제멋대로 그들을 저와 함께 용감하게 싸우게 하고 상처투성이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래서는 안 되었던 거예요. 지금 저는... 제가 처음에 연순에게 순종했더라면, 차라리 수려군을 해산하게 했다면,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혼례도 치르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어요." 
초교의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눈가를 붉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웃으며 이야기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어떤 큰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데 말이에요. 아내를 얻고, 아이를 낳고, 즐겁게 늙어 가고... 그런 것도 또 다른 삶의 방식인 것을 그저 제가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에요. 그들은 죽었고, 어떻게 해도 다시 살아 돌아올 방법은 없어요. 제 손에는 피가 가득 묻어 있고, 어떻게 해도 씻어 낼 수가 없어요." 

- "그것들은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책임을 벗어나기도 힘들겠지요."
 
- 사실 사람의 삶이란 아주 많은 경우 이러한 것이다. 당사자는 혼란스러운데 옆에서 방관하는 이의 눈에는 모든 것이 훤하게 보이곤 한다. 아주 많은 일이 사실은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그저 마음속의 집념이나 고집을 지키느라 좋은 시절을 낭비하게 되는 것뿐이다.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 해도 자신에게 일이 닥치면 똑같이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가끔은, 그저 한 걸음 앞으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이후의 모든 것이 천지가 뒤바뀌듯 바뀌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 "초 대인이 우리 변당에 있는 한, 제갈월은 분명 대하를 떠나 청해로 돌아가지 않는다. 제갈월이 청해로 돌아가지만 않으면 연순은 취미관을 무시할 수 없고, 전군을 일으켜 응명관을 공격할 수도 없겠지. 대하가 멸망하지 않으면 우리는 쉬면서 힘을 기를 시간과 기회를 벌 수 있어. 더군다나 초 대인과 연순, 제갈월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우리는 분명 양쪽에서 정치적인 지지를 얻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국내 세력에 이상한 동태가 보인다 해도, 그들은 모두 어쩔 수 없이 다른 두 나라의 태도를 고려하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어린 폐하의 황위는 안정되고, 아무 걱정도 없을 것이다. 정안왕 등이 설령 정치에 손을 대려 한다 해도, 이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거기에 더해 수려군의 전투력은 극히 강하지. 충성심은 말할 것도 없고, 결코 폐하의 낭군보다 못하지 않아. 제왕의 군대가 되기에 가장 훌륭한 군대다. 초 대인 자신도 군사와 정치적인 재능이 지극히 뛰어난 사람이며, 대동회 잔당 세력의 추앙도 받고 있지. 대임을 맡을 수 있는 능력에, 폐하에 대해 정도 의리도 있는 사람, 그리고 본래 혈친이 전혀 없는 사람이며 여자, 야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 자, 폐하의 정치를 보좌하는데 있어 지금 세상에 이런 사람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나?" 

 

- 영왕은 곁에 있는 요람 안에서 착실하게 자고 있었다. 입 끝이 살짝 올라간 것이, 제 부친을 아주 닮아 있었다. 
초교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녀는 촛불 하나를 조용하게 태우고 있었다. 촛농이 늘어지고, 불빛이 희미하게 붉은빛으로 깜빡였다. 마치 여자의 눈물이 볼에 바른 연지를 타고 흘러내리듯.

그녀의 손에는 두툼한 서신이 들려 있었다. 서신은 잘 봉해져 있었고, 아직 뜯지 않은 상태였다.

- 초교는 두 시진이 넘도록 그저 앉아 있었다. 손체의 말이 다시 한번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두 어린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들에게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이 망연해 왔다.
"교활한 자식." 
초교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그 사람의 눈이 떠오른 듯,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며, 그때 살짝 올라간 눈썹 끝, 그 교활한 입매가 다시 떠오른 것처럼.
그 사람은 정말이지 요괴만큼이나 영리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천하 사람을 다 계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째서 자기 자신은 계산하지 못했던 것일까?

 

 


 

 

 

- 그녀는 이미 아주 오랫동안 이렇게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사람은 역시 너무 많은 것을 가지면 안 되는 모양이다. 일단 행복을 한번 맛보고 나면,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성아, 약속해 줘. 일을 끝낸 다음 다친 곳 없이 돌아온다고."

초교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 머리를 들어 그를 보며 말했다.
"나한테 화나지 않았어?"
제갈월이 쓰게 웃었다.
"화를 내면, 가지 않을 거야?"
초교는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이미 이 일로 여러 번 다투었다. 이별할 때가 다가온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이 위험한 화제를 계속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 "어떻게 해도 말릴 수 없을 거라면, 잘 배웅해 주느니만 못하지."
제갈월이 갑자기 팔을 벌려 그녀를 끌어안고, 턱을 그녀의 이마에 대고 속삭였다.
"성아, 조철이 병사들을 이끌고 서남으로 들어갔어. 형세가 위급해 내가 가서 도와주어야 해. 지금 서남 일대가 연북군에게 점령당했고, 변당과 대하 사이의 길은 막혀 있는 상태야. 이후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적시에 도와줄 수 없을 거야. 변당 국내 상황이 어떠하건, 우리가 알 방법이 없지. 너는 최선을 다하되, 일단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돌아와."

 

- 이 판세는, 연순이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 낸 것임에 틀림없었다. 

"연북의 실력은 결코 겉에 드러난 그 정도가 아닐 거야. 연북의 진정한 힘은 아직 응명관 밖에 숨어 있겠지."
"대인, 제갈 대사마께 알려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초교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가 생각하지 못할 리 없다."
 

- 연순은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정안왕비와 맹약을 맺었으니 연순은 어쩔 수 없이 한수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정안왕비가 정말로 당경으로 진격해 들어가 정안왕의 후대가 황위를 계승하면, 연북군의 퇴로도 끊기는 셈이다. 때문에 연순은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보기 흉하게 패해서도 안 됐다. 그는 초교를 이용해 변당의 내전을 길게 끌어, 스스로의 퇴로를 확보해 두어야 했던 것이다. 

 

- "내가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 네 이번 생이 나에게 속하지 않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는 것을. 너는 빛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고, 나는 피비린내 나는 꿈을 너무 많이 꾸고 있었지. 그래서 나는 네가 나에게 굴복하기를 내 명을 듣기를, 평생 나를 따르기를 바랐다. 안타깝게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웃었다.

 

- 어떤 목적이건 무엇인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그리고 그는 이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평범한 인생을 바라는 사람은 없는 법. 관건은, 기회가 눈앞에 펼쳐졌을 때 정말로 그것을 잡을 수 있는가겠지."
어둠 속, 연순의 목소리는 의기소침하게 쉬어 있었다. 마치 몇 번의 윤회를 거친 노인 같은 목소리였다. 그는 황금빛 가죽을 깔아 놓은 침상에 누웠다. 서탁 위에 엎질러진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향을 풍기고 있었다. 연순은 소리 없이 입 끝을 들어 올리며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제갈월, 너는 잡을 수 있겠느냐?"

- "할 수 없습니다." 
제갈월은 자신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단호한 눈길과 침착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제갈목청의 머리는 하얗게 세어 있고 피부도 쭈글쭈글했다.

 

- 제갈월은 한 걸음 한 걸음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타인에게 그가 정말로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날이. 
패업이 아니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도 아니었다. 가장 존귀한 지위에 올라 외롭게 억조창생을 굽어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그녀가 살아 있는 것이었다. 그가 볼 수 있는 곳에서 그녀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강해져야 한다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러나 만약 지키고 싶은 것이 사라진다면, 그가 했던 모든 일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이번 생만큼은, 결코 스스로 후회할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 그는 막사의 발을 올리고 은빛 월광에 감싸인 군영을 걸어 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로 불어왔고, 그는 갑자기 전에 없이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천하는 잃어도 다시 얻을 수 있다. 군대도 무너지면 다시 재편하면 된다. 그러나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오지 않는다.
조철이 떠나기 전 했던 말이 다시 한번 귓가에 메아리쳤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아도 좋다.'

 

- 그의 친구는 형제에게 배신당한 후 앞뒤로 공격을 받아 패배를 거듭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만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보러 왔다. 대국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저 말을 하기 위해서.
군영 밖에는 군대가 이미 집결하여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갈월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앞으로 성큼 나아가 말 위로 뛰어올랐다.

 

- 만 리에 걸친 강산, 황제의 권력, 모든 것이 눈앞에 있었다. 그는 감히 잡을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잡고 싶지 않았다.

 

- "청해군이다!"
누가 먼저 고함을 지른 것일까. 모든 이들이 서로 얼싸안기 시작했다. 무수한 병사들이 머리를 감싸고 통곡했다. 죽음에서 살아남은 전사들이 먼 곳의 지원군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청해군은 그들에게 응답하며, 귀청을 찢을 듯한 돌격 구호를 외쳤다.
"대인! 우리는 살았습니다! 변당은 살았습니다!"
낭군의 통령이 피를 뒤집어쓴 채 달려와 흥분하여 초교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청해왕께서 오셨습니다!"

 

- "폐하, 출발할 때가 되었습니다." 
연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동쪽에 치솟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만 보아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결국은 왔다. 

- 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음 깊은 곳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끈이 갑자기 끊어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고요한 반향과 함께 텅 비어 버렸다.
아마도 연순의 잠재의식은 그녀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연순은 제갈월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천하와 미인, 예로부터 도저히 고르기 어려운 선택이 아니던가.
연순이 내려놓지 못한 것을, 제갈월은 결국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는 위엄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갈월이 결정을 내렸다. 자신도 정해 놓은 길을 가야만 했다.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린다 해도, 결국은 스스로 선택한 길인 것이다. 

- 인생은 백 년에 지나지 않고, 흰 말이 달려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빨리 지나가기 마련이지. 사랑에 연연할 수도 없고, 머뭇거리며 방황할 시간도 없는 법. 후회하며 돌아볼 여유는 없는 것이다... 

 

- 북풍이 불며 대설이 분분히 흩날렸다. 홀로 가는 이는 외로운 그림자를 남기고, 짝을 이루어 가는 이는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세력, 지위, 금전, 권력 등은 심지가 굳세고 강인한 의지를 가진 이라면 언제든지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진실한 사람에게만 그 몫이 돌아가게 돼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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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된 일이지? 재판정에 폭파 장치가 있다니?" 
초교는 몸을 일으켜 신속하게 창고 안에서 손에 맞는 무기와 장비를 찾은 후, 밖으로 질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M국은 근본적으로 R국의 X부대를 신임하지 않아. R국을 마음대로 할 수 없을까 봐 두렵기도 하고, 일이 폭로될까 봐 그렇기도 하지. 그래서 재판정 안에 내비게이션용의 위치 추적기를 설치해 둔 거지. 시간이 되면 포탄이 발사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제4감옥은 산산이 무너져 여긴 평지가 되어 버릴 예정이었던 거야. 증거와 나를 포함해서 말이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일단 내가 바로 탄약 배치 전문가에게 통지하고, 특수부대에 증원을 요청해서 M국에서 온 자를 통제해 보겠어."
"이미 늦었어." 

 

- 초교는 깊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바로 나에게 헬리콥터를 준비해 주고, 사람들을 해산시켜. 지금 네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증거물을 화 사령관에게 전달하는 거야. 이건 소시가 목숨을 걸고 구한 증거고, 초능력자 특공부대원 열네 명의 목숨과 바꾼 증거야. 그리고 그건 전 세계에서 M1N1 바이러스로 인해 목숨을 잃은, 앞으로 잃을 사람들의 생명이기도 해. 그게 모두 네 손안에 있는 거야. 결코 착오가 있어서는 안 돼." 
이양은 잠시 멈칫했다. 저 멀리 먼지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이고, 사람들은 여전히 조급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초교의 여윈 얼굴에 떠오른 결연한 눈빛을 보자 이양의 마음속에 한바탕 쓰라린 감동이 일어났다. 그는 한참 후에야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해내겠어. 초교, 조심해야 해."

 

- 초교는 작은 걸상 위에 조용히 앉아 때때로 아궁이에 장작을 던져 넣었다. 타오르는 장작불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비췄다. 초교는 자고 있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음 깊은 곳이 시큰해 왔다. 그러나 아무리 안타까워한들 무슨 소용 있을까? 초교는 영문도 모른 채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시대로 오게 되었고, 이 형월아라는 작디작은 몸 안에 갇혀 버렸다. 그간 익힌 무예며 기술은 모두 사라진 상태인 데다, 이 비천한 신분으로는 스스로를 지키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지금 타인을 구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 초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인간답게 행동하고 싶더라도, 반드시 힘을 가늠한 후에 행해야 하는 법이다. 지금의 초교는 그렇게 커다란 짐을 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제갈월은 짙은 녹색의 연꽃이 수 놓인 연녹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어깨까지 풀어헤친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흰 얼굴은 옥처럼 매끈했고, 눈동자는 먹처럼 검었으며, 입술은 보통 사람과 다르게 짙은 붉은빛이었다.

 

- 다음 날 오후, 대설이 그치고 오랜만에 날이 맑았다. 청산관 유리 기와 아래 계단 옆에는 눈처럼 새하얀 옥으로 만든 개 두 마리가 있었다.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개 위에는 눈꽃이 두툼하게 쌓여 있었는데, 하인들은 그 곁을 지나가면서 단 한순간도 개에게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혹시라도 개와 눈이 마주쳤다가는 해를 입을까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 금시錦偲는 검은담비 털로 만든 조끼에 꽃가루를 뿌린 붉은 능라 치마를 입고, 연분홍 허리끈을 졸라매고 있었다. 종일 제갈월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이 소녀는 아직 열세 살을 넘지 않았지만 이미 늘씬하고 아름다운 미녀로 자라나는 중이었다. 금시는 지금도 새하얀 눈이 쌓인 땅에 서서 아낌없이 미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평소 주인의 시중을 들 때는 항상 온순한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개를 끌어안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모두 더 꽉 끌어안아라, 도련님께서 이 옥은 살아 있는 것이라, 사람의 기운을 받아야만 더욱 투명하게 윤이 난다 하셨다. 너희들 천한 노비들은 절대 게으르게 굴어서는 아니 된다. 만약 누구 한 사람이라도 게으름을 부린다면, 너희 모두 정호의 악어 밥이 될 줄 알아라."

(리뷰자 주 : 옥은 사람의 살에 닿아있으면 더 선명한 색이 된다 하여 귀부인들이 일부러 하녀들에게 자기 옥팔찌를 차고 있게 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 제갈월이라는 사람은 본성이 교활하지도 않고, 악랄하게 손을 쓰는 편도 아니었다. 최소한 그날 사냥터에 모였던 귀족 소년들에 비하면 그랬다. 그러나 심성이 메마르고 냉정한 편인데다 자신감이 극히 넘치다 보니 자신 이외의 사람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신앙을 가졌을 리 없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불경을 읽기 시작한 것일까? 
 

- 제갈월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칠흑처럼 새까만 눈은 마치 깊은 바다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표정으로 초교를 응시하더니, 마침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훌륭하군, 어린 나이에 글자를 그만큼이나 알고 있다니. 누구에게 배웠느냐?"
초교는 첫 구절을 읽은 순간 바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마음속으로 대비했기에, 이 순간 당황하지 않고 생긋 웃으며 답할 수 있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련님. 저는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오라버니와 언니들을 따라 배웠답니다."

 

- "도련님께서 성아에게 작은 말을 한 필 내어주신다면, 스스로 말을 달릴 수 있습니다." 
제갈월이 미소 지으며 측근인 주성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춧빛 작은 말 한 필이 끌려왔다. 말의 키는 아주 작았지만 그래도 초교보다 한참 높았다. 모두 흥미진진한 눈초리로 초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조금쯤은 그녀의 불행을 바라는 것도 같았다.

 

- 사람들 사이에서 한바탕 찬탄과 놀람의 외침이 들려왔다. 제갈월은 새하얀 옷을 입은 초교가 마치 눈을 뭉쳐 놓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든 채 말 위에 올라타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말을 채찍질했다. 
 
-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사려 깊고 신중한 성격을 타고났어요. 처음에 그 애가 나를 믿게 하려고, 정말 시간을 많이 들였죠. 근 몇 년 동안 그 애가 주군의 곁에서 지켜 주지 않았다면, 연북의 일맥은 예전에 이미 끊겼을지도 몰라요. 그 애는 정말 키워 볼 만한 인재예요. 그러니 당연히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중이지요." 
"네가 계속 신경 쓰고 있으니 나는 그저 안심이다. 나는 이번에 진황성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춘세를 징수해서 상납해야 하니, 어서 연북으로 돌아가야 해. 내가 없으면 조정이나 늙은 파도가 너무 많이 챙기려 들 거다. 아직 정식으로 직무를 이어받지는 못했지만, 연북은 연씨 가문의 땅이다. 연북을 과거처럼 풍요롭게 만들 수는 없지만, 주군께서 왕위를 계승하실 때 난장판이 된 연북을 드리지는 않을 것이다." 

 

- 그러한 후성의 원안 그윽한 대나무 숲, 흑포를 입은 젊은 공자가 앉아 있었다. 스물이 넘지 않아 보이는 그는 얼굴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별과 같은 눈동자에 곧은 콧날, 검과 같이 날카로운 눈썹에 먹처럼 검은 머리까지. 등으로 늘어뜨린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검은 비단이며 검은 장포는 점잖으면서도 품위 있어 보였다. 장포에는 붉은 금빛으로 기린을 수놓은 후, 그 주변에 상서로운 구름을 그린 후 회송의 비단을 덧대어 두었다. 또한 사슴 무늬를 그린 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는데, 장화의 아랫부분에도 푸른 구름무늬가 있었다. 

- 청년은 청석으로 만든 작은 탁자 앞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그의 곁에서 향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탁자 위에는 칠현금과 서책 몇 권, 그리고 청옥으로 만든 술병과 유리잔 하나가 있었다. 유리잔 양쪽으로는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었는데, 한눈에도 귀한 물건임이 분명했다. 겨울이었지만 온천이 흐르는 애랑산 주위는 따뜻했다. 한바탕 맑은 바람이 불어와 청년의 얼굴을 스치고는 한적한 대숲으로 향했다. 청년은 백옥같이 흰 손가락으로 유리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대신 별과 같은 두 눈을 살며시 가늘게 뜨고 담담하게 말했다. 

- "창오조蒼梧鳥가 아닙니까! 세자 저하, 길을 잃은 창오조 새끼입니다. 이 새는 낯가림 없이 사람의 마음과 통하는 진귀한 새라고 하더군요. 아주 많은 이들이 길들여 키우는 새입니다! 이렇게 작은 창오조는 처음 봅니다." 
"그러한가?"
연순은 공중에서 돌고 있는 작은 새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작은 새는 지저귀며 궁금한 듯 몇 번 날갯짓을 하더니, 연순의 손가락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보드라운 작은 부리로 가볍게 연순의 손바닥을 쪼았다. 붉은 눈알을 굴리는 것이 이미 연순을 친숙하게 여기는 태도였다. 아정이 신기해하며 감탄사를 내뱉으려는 순간, 갑자기 우지끈 소리가 들렸다. 연순이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진귀한 작은 새는 울음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이리 쉽게 사람을 믿다니. 내가 죽이지 않는다 해도 너는 언젠가 다른 이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연순이 몸을 곧추세우고 검은 장포를 펄럭이며 누각과 정자 사이로 사라졌다. 거센 바람에 눈이 분분히 흩날려, 작은 새의 시체는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며 보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꿈속의 풍경인지 아니면 전생의 기억이나 환상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이 세계에 온 지 벌써 8년이나 지났다. 8년이라는 시간은 아주 많은 것이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한 사람의 사상, 신념, 동경과 분투, 그리고 이상까지도. 

 

- 그는 몸을 일으켜 다탁 앞으로 다가가 찻잔에 차를 따랐다. 맑은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차는 영남에서 막 보내온 공차로, 황제는 차를 좋아하지 않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영남은 비단과 찻잎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이 차의 이름은 홍녀라고 하는데, 듣기로는 아름다운 처녀가 새벽에 혀끝으로 채집한 찻잎을 사용해 만든 차로 지극히 진귀한 것이라고 했다. 차의 맛 자체는 보통의 차보다 대단히 좋을 것은 없었지만, 차를 마실 때의 그 느낌만은 확실히 좋았다. 
 

 


 

- "아주 명백하지, 목합씨에게 경고하고 있는 거야. 목합서풍의 죽음을 조철에게 미루지 말라고." 
초교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가면 위씨 문벌이 이 죄를 떠맡게 되겠지. 황제는 이일을 빌려 위씨 문벌과 목합씨 간의 암투를 조장하려는 걸까?"
"아마도."
연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합씨가 너무 발호하고 있어. 하지만 그들이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질 때는 더욱 비참하게 떨어지겠지. 서른 해 전의 구歐씨처럼 말이야."

 

- "아초, 아까 토달이 뒤에서 너를 기습할 때, 어째서 피하지 않았지? 네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는데."
초교는 고개를 돌려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신이 뒤에 있었잖아."
 

- 바깥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장막을 때리고 있었다. 연순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입술 끝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참 바보 같은 질문을 했군."

"이만 갈게."

 

- 초교는 그가 뒤에 있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적에게 등을 내주었다. 그가 뒤에 있었기에, 그녀는 어떤 방비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있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그는 그녀 앞에서만 눈을 감고 쉴 수 있었고, 그녀 역시 그의 앞에서만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 "아초, 고맙다. 너에게 나는 여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 7년이 지났다. 언젠가 그를 다시 보게 되리라 생각했지만, 이런 방식이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제갈월도 분명히 그녀의 목에 난 상처를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대립하고, 서로를 향해 검을 뽑고, 활을 당기고. 언제 어디서건 그들은 운명이 정해 놓은 적이었다. 

 

- 7년, 그 후로 7년이 흘렀다. 어둠 속에서 초교의 낮고 묵직한 숨소리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 제갈월, 당신, 마침내 돌아왔구나.
당신은 모르겠지, 내가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 하늘의 별조차 스치는 바람에 추워 보였다. 그 바람은 스산한 피비린내를 담고 있는 연북의 바람이었다. 

 

- 그러나 그는 그녀가 그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오늘 직접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가 입으로는 그녀가 스스로를 아낄 줄 모른다고 몇 번이나 탓했지만. 

- 그는 그들이 처음 만난 날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그는 사부를 따라 유랑하던 중 진황성에 도착했고, 서묘가의 소연에서 도망치다가 주인에게 잡혀 맞고 있는 여자 아이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때 우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아주 마르고 작았던 여자아이. 오랜 기간 영양 부족으로 피부는 누렇게 떠 있고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우의 커다랗고 검은 두 눈은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력이 충만해 있었다. 우의 눈을 본 순간, 오도애는 깨달았다. 이 아이는 분명히 성공할 것이다. 몇 번을 실패하건, 이 아이는 살아 있는 한 언젠가 분명히 도망치고 말 것이다. 

- 과연 보름 후, 여성 외곽의 주점에서 그들은 다시 우와 마주쳤다. 우는 배를 곯아 겨우 숨만 쉬는 상황에서도 구걸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사부는 그녀를 거둬들였고, 천극산에는 어린 사매가 하나 생겼다. 그리고 오도애에게는 평생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근심이 하나 생긴 셈이었다. 

 

- 그들은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하고픈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으면서, 그날이 오면 천하는 대동을 이루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게 될 것이다. 노비도 없고, 전쟁도 없는 그런 세상이 반드시 올 것이다. 
 
 - 초교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그녀는 위경의 손에 들린 보검과 땅에 흩어진 칼과 쇠뇌 등을 보고 있었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저기, 나 말고도 무기를 지닌 사람이 또 있는데. 송결은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위경은 당당하게 외쳤다.
"네가 어찌 감히 나와 비기며 허세를 부린단 말이냐. 황성안에 무기를 가지고 들어왔을 뿐 아니라, 감히 본 공자에게도 거칠게 굴었으니, 오늘 누가 감히 너를 변호하려 들지 보겠다. 송참장, 자네가 보기에 이 일을 어찌 처리해야 하는가?"

  

- 송결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손가락이 잘린 이후 성정이 크게 변한 위경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때 갑자기 맑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검은, 내가 그녀에게 가져오라 한 것이다."

칠흑 같은 전마가 몸을 곧추세운 채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 제갈월은 검은담비 털로 만든 긴 외투를 입고 말을 달려 서서히 초교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아예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높은 곳에서 초교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대체 나를 얼마나 기다리게 할 셈이냐? 어서 내놓아라."

초교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제갈월의 냉담한 두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교차하는 두 사람의 눈길 사이를 스쳐 갔다. 마치 아주 오래된 바람이 시간의 궤도를 따라 불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의심들, 그 탐색들, 그리고 그 원한들. 그 모든 것은 궤도상에 빽빽하게 선 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비석 같은 것들이었다.

 

-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아주 잠시에 불과한 시간이 지나갔다. 초교는 아주 오래전 상원절 그날처럼 천천히 손을 내밀어, 들고 있던 보검을 제갈월에게 건네주었다. 

 

- 제갈월은 땅에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 사내들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너에게 검을 가져오라 하였더니, 여기서 위 공자의 수하들과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단 말이냐. 정말이지 법도도 모르고 하늘 무서운 줄도 모르는구나. 연 세자는 이렇게 하인을 가르치더냐?" 
무예를 연마한다고? 위경의 안색이 변해 즉시 화를 내려했다. 그러나 갑자기 제갈월이 고개를 돌리더니,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자."
제갈월이 말을 몰아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송결은 뒤에서 공손히 배웅했고, 초교는 위경을 불타는 눈으로 노려본 후 제갈월의 뒤를 따랐다.

 

- 정자 안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검은담비 털로 만든 긴 외투를 입은 남자의 얼굴은 준수하고, 검과 같이 날카로운 눈썹에 눈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여자는 열대여섯 정도로 흰여우 털로 만든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천지의 정기를 받아 속세를 떠난 듯한 느낌을 풍겼다. 이 두 사람은, 바로 막 현문도를 떠나온 제갈월과 초교였다.

"너를 구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위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된 것뿐이니, 너는 감사할 필요가 없다." 
초교는 고개를 들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에게 감사할 생각은 전혀 없어."
제갈월이 웃었다.

"여전히 이런 성격이군. 그 후로 7년이나 지났는데, 보아하니 연순이 너에게 약삭빠르게 구는 법을 전혀 가르쳐 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당신도 마찬가지야. 보아하니 와룡산의 현자들이 당신에게 어리석음이란 것이 무엇인지 전혀 가르쳐 주지 않은 모양이네. 여전히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거만하다니." 

 

- 말이 떨어지자마자 제갈월이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갑자기 몸을 뒤로 뺐다. 동시에, 본래 조용히 서 있던 초교가 번개처럼 앞으로 달려 나가 재빨리 제갈월을 낚아채려 했다. 제갈월은 팔을 뻗어 초교의 공격을 막아 낸 후, 두 손을 나누어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초교는 재빨리 손을 빼더니, 발을 굴러 즉시 정자 밖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얼어붙은 호수 위로 내려앉는 순간, 호수 위에 쌓여 있던 흰 눈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초교는 푸른 면포에 싸여 있던 잔홍검殘红劍을 뽑아 들었다. 검날이 사납게 번쩍이며 마치 구름 속을 노니는 용처럼 제갈월을 덮쳐 갔다. 그녀의 검법은 기이하고도 자유로웠고, 그녀의 검을 따라 하늘을 가득 채운 눈이 뒤엉켜 춤을 추었다. 

 

- 제갈월의 손에는 어떤 무기도 없었다. 그는 손 가는 대로 정자 주변에 활짝 핀 매화 가지를 하나 꺾었다. 흰 매화 송이송이가 갑자기 피어올랐다. 멀리서 보면, 하늘을 가득 채운 눈보라 속 얼어붙은 벽호 위, 두 힘찬 그림자가 은백의 세상에서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두 사람의 초식은 악랄했지만, 그 안에는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경쾌한 아름다움이 숨어 있었다. 거센 바람이 어지러이 불어오는 가운데, 천지간은 눈안개로 자욱하고 호수가의 매화는 분분히 흩날려 떨어졌다. 붉은 매화와 흰 눈이 서로를 스치며 함께 하늘을 가득 채웠다. 

 

- "예전에도 당신은 나에게 속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었지. 7년이나 지났는데도 이렇게 깨달은 바가 없는 건가?"
제갈월이 차갑게 웃으며 무시하듯 입을 비죽였다.

"아무리 너라도, 영원히 그렇게 자신할 수 있을까?"
똑같이 예리한 비수 한 자루가 제갈월의 손에 들려 있었고, 그의 칼끝은 초교의 등에 닿아 있었다. 제갈월이 약간만 힘을 준다면, 초교는 바로 급소를 찔릴 것이다. 바늘 끝과 바늘 끝이 마주한 것처럼 서로가 대등했고, 이렇게 된 이상 승부를 가리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며 얼음처럼 차가운 눈보라가 두 사람의 얼굴을 때렸다. 두 사람은 아주 가까이 서 있었고, 서로의 호흡을 느낄 수 있었으며, 두 사람의 피부 역시 서로 맞닿아 있었다. 멀리서 본다면 두 사람이 서로 끌어안고 다정스럽게 속에 품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터였다. 그 둘 사이의 분위기가 얼마나 일촉즉발의 상황인지 알 수 있는 것은 눈보라 속에 피어난 매화뿐이었다. 

 

 - 제갈월은 손을 풀고 몸을 날려 뒤로 후퇴한 후, 매화나무 아래 떨어져 있던 잔홍검을 줍고 냉정하게 말했다. 
"기다리겠다. 네가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이 검을 찾으러 오너라."

- 이틀 후, 팔공주 조순아의 급계례 예식이 있었다. 아는 조철과 같은 모친 소생으로, 당금 황가에서 가장 총애받는 공주였다. 자연히 그녀의 급계례는 대대적으로 치러질 예정이었다.

(역자 주 : 고대 중국에서 여자가 만 15세가 되면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던 의식, 성년이 되어 혼례를 치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급계례', '계'라고도 부른다.)  

- 초교는 차를 마시는 연순 옆에서 예물 목록을 읽고 있었다. 목록 상단에는 공손하고 예의 바른 축하의 말이 몇 마디 적혀있고, 아래에는 예물이 적혀 있었다. 화전의 옥으로 만든 여의한 쌍, 금과 옥으로 만든 사자 네 마리, 회송의 비단 여덟 필. 너무 귀중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너무 초라한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지위와 관계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것들이었다. 

- 초교는 고개를 저었다. 순아가 이 예물을 받고 어떤 기분일지 초교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순아가 연순을 사모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황성의 상류층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황후 목합나운이 이 일에 관여하려 든 적도 있었지만, 순아의 성격으로 연순을 제외한 다른 이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황제조차 그런 일에는 관여하지 않으려 했기에, 이 어린 공주는 거침이 없었다.
"아름다운 정원에 계수나무 가지, 달이 죽산 위로 떠오르네. 아초, 기회가 되면 우리 정말 변당에 가 보자. 그리고 그 유명한 죽산주를 맛보자고." 

- 천하에 이름 높은 소근 지방의 방식으로 자수를 놓은 옷이었다. 찬란한 황금빛 비단실로 이무기가 도사리고 있는 모습을 수 놓았는데, 발톱은 사납고 눈빛은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했다.

(리뷰자 주 : 이무기에게 발톱이...? 그는 번왕 격이니 오조룡이 아니었을까. 중국은 황제는 칠조룡, 독립적인 번왕이나 태자는 오조룡을 썼다. 조선이 사조룡을 쓰게 되었다는 것은, 따라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 쓸쓸한 장화도에 전마 한 필이 묵묵히 서 있었다. 초교는 효기영의 간편한 군장에 푸른 바람막이를 걸치고, 먼 곳 화려한 등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안색은 담담했지만, 냉정하게 무엇인가를 자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고, 천지간은 온통 외롭고 고즈넉했다. 바람이 그녀의 앞머리를 말아 올리며 여윈 얼굴을 더욱 처량해 보이게 했다. 

 

- 이 길은, 나 자신을 위해 선택한 거야. 처음부터 돌아갈 길이라고는 없었어. 그저 앞으로 갈 수밖에 없지.

삶은 나에게 후회할 권리를 주지 않았어. 나는 결코 내 쓸모없는 감정으로 당신의 앞길을 막을 수 없어. 갚지 못한 원한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불안해하면서, 어찌 남녀의 정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연순,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야.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당신이 대업을 완성하고 천하를 호령하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연약한 사람만이 슬퍼하고 무능한 사람만이 원한을 품는 법, 나는 아니야. 나는 슬퍼하지 않아. 나는 결코 슬프지 않을 거야. 

 

- 초교는 평온한 얼굴로 남자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침내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그저 살아남고 싶습니다. 언제나 그래 왔습니다."

조철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너는 한마음 한뜻으로 나를 따르도록 해라. 그 누구도 더 이상 너를 상처 입히지 못할 것이다." 
초교는 눈 위에 무릎을 꿇었다. 
"감사드립니다. 황자님!"
 
- "그러니 다음에 나를 만나면, 그때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제갈월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극도로 노여운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나지막하게 물었다.
"지금 황성을 나가면 너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인데, 이후 나를 어떻게 죽일 생각이지?"
초교가 고개를 돌리더니, 제갈월을 향해 찬란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은 연순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어쨌든 나는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지 않아. 아니면 우리, 도박을 하나 할까?" 
제갈월은 차갑게 초교를 바라보며 조소했다.

 

- "당신은 우리가 진황성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어 제대로 땅에 묻히지도 못할 거라고 믿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확신하고 있어. 우리는 진황성을 빠져나갈 거야. 그것도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라, 깃발을 흩날리고 북을 치면서 나갈 거야. 서몽에 사는 사람 전부가 알 수 있도록, 연북의 백성 모두가 알도록 말이야. 그들의 왕이 돌아왔다는 것을!" 
그 순간, 초교의 얼굴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마치 찬란한 햇빛 아래 서 있는 것처럼. 
그녀는 기적 같은 광휘를 발하며, 이 칠흑 같은 어두운 밤에 그렇게 빛나고 있었다.

- 초교가 품고 있는 것은 온 마음을 다한 신뢰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완벽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갈월은, 찬란하게 웃고 있는 초교를 보며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그녀의 미소가 눈에 거슬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빛나고 있는 그녀가 사무치게 원망스러웠다. 
어째서 그녀가 저렇게 신뢰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란 말인가?
초교는 그를 바라보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제갈월, 지켜보라고!"

- 이 밤은 제갈월의 일생에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었다. 그 후 수년이 흐른 후에도 그는 때때로 이 밤 초교의 표정을 떠올리곤 했다. 자신만만한 그녀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그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제갈월, 지켜보라고! 
그는 정말로 지켜보았다.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는 마치 한바탕 바람처럼, 한 조각 구름처럼 경쾌하게 그의 곁에서 멀어져 갔다. 그는 그렇게 떠나가는 초교를 지켜보았다. 8년 전의 그 밤, 그녀는 그에게 외쳤다. 
'제갈월, 임석을 죽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가 믿고 있던 세상이 변하여, 혼란스러운 난세의 격류가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을 말아 올리고, 그들의 걸음걸이를 어지럽히고, 그리하여 그들이 한때 꾸었던 꿈을 버릴 수밖에 없게 된 후, 그는 항상 후회하며 그 밤을 기억하곤 했다. 그 순간 그가 그 후에 벌어질 모든 일을 알았더라면, 그는 초교가 떠나도록 가만히 지켜보았을까? 아무 말도 없이 그녀가 떠나게 두었을까? 
그러나 이 세상에 만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 초교도 지금은 알지 못했다. 오늘 그녀의 행동은, 전멸의 위기에 처한 서남진부사의 병사들을 구하고, 새로운 연북 정권을 구원했을 뿐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 속한 무장 세력을 처음으로 얻게 해 주었다는 사실을. 
이 순간 서남진부사의 병사들은 마음속으로 이 아름답고 가냘픈 소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이후로 그들은 그들의 주인을 따라 남북을 옮겨 다니며 싸울 것이다. 그들의 철기는 주인을 위해 온 서몽 대륙을 쓸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결사의 각오로 스스로의 맹세를 지킬 예정이었다. 아무리 어렵고 고달픈 상황에 처한다 해도, 초교를 향한 충성심은 활활 타올라 평생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초교는 수년 후 전 대륙 사람들에게 '수려왕秀麗王'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될 긴 여정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 물처럼 차가운 달이 공기 속에서 더욱 쓸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종종 아주 사소한 말들이 역사를 바꾸곤 한다. 말하는 자도 신경 쓰지 않고 듣는 자도 마음 깊이 담아 두지 않는 말들. 다른 중요한 일 앞에서 그 말들은 마치 거대한 강 속 한 알의 모래처럼,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구석에서, 그 작디작은 모래가 홍수를 막기 위한 수문으로 기적처럼 흘러 들어가 수문을 무너지게 만드는 최후의 한 알이 되는 것이다. 수문이 무너져 홍수가 덮쳐오면, 사람들은 놀라고 당황하여 하늘을 욕하면서, 그 재난이 자신들이 내뱉은 사소한 말들에서 싹을 틔웠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 변창은 모르고 있었다. 그날 밤, 아정은 조승을 호위할 인마를 직접 뽑지 않았다. 아정은 연순이 기습당한 사건으로 당황한 나머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이 일을 자신의 부하에게 맡겼다. 그는 200근에 달하는 커다란 칼을 휘두를 정도로 무예가 뛰어난 무사였다. 이 사내는 아정이 별것 아닌 임무를 자신에게 맡긴 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손을 크게 휘두르며 높은 소리로 외쳤다. 원하는 자는 아무나 가도록 해라! 

 

 


 

 

- 서쪽으로 기우는 석양이 금빛 찬란한 광휘를 흩뿌리고 있었다. 연순은 말 위에 앉아 고요한 눈길로 초교를 바라보았다. 그는 검은 군장을 입고, 병사들과 똑같은 모양의 검은 가죽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사람 전체가 날카로워 보였다. 연순은 올해 스물 하나에 불과했다. 젊고, 마르고, 꼿꼿하고, 잘생겼다. 찬란한 빛을 숨기고 있는 검은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같았다. 
사람을 늙게 하는 것은 세월이 아니다. 누군가의 삶을 성숙하게 하는 것은 경험이다.

- 마치 이 8년 동안의 세월이 다시 덮쳐 오는 것만 같았다. 진창에 빠졌던 남자는 그 피 웅덩이에서 몸을 일으켜, 이제 그 길고도 고된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차가운 북풍이 불어오고, 머리 위의 매는 사납게 날갯짓하고 있었다. 연북 고원이 새로운 주인을 환영하고 있었다.  
 
- "십사황자님께 보고 드립니다. 이미 잡아 온 민간인의 입을 통해 정확하게 조사했습니다. 성 안에 있는 수비군은 제국의 반란군인 서남진부사고, 그들을 통솔하는 장수는 여자로, 역시 제국의 반역자인 초교입니다." 
"초교라고?" 
조양이 아주 평온한 어조로 그녀의 이름을 되풀이했다. 조양은 눈을 가늘게 떴다. 채 1년도 되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것만 같았다. 조양은 연순이 진황을 탈출하던 그날 밤의 일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조철이 초교를 가리키며 했던 말 역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해 두거라. 저 여자는, 장래 대하에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우리가 잃은 땅을 수복하고 강산을 통일하려 할 때, 저 여자는 아마 쉽게 넘을 수 없는 높은 산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일곱째 형인 조철은, 불세출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나 임기응변이라는 것을 몰랐고, 권모술수에도 능하지 않았다. 조철과 같은 자는 난세에 태어난다면 미증유의 일을 할 수 있지만, 조정에서는 영원히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조양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철의 안목은 지극히 정확했다. 그날 조철의 말 그대로, 마침내 오늘 초교와 이렇게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 "무슨 향이기에 이렇게 좋지?" 
연순이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안색이 변해 서둘러 초교를 문가로 밀어내고, 찻주전자를 향로 안에 부었다. 향로에서는 흰 김이 나왔고, 연순은 서둘러 창을 열었다. 초교가 미간을 찡그렸다. 
"연순, 뭐 하는 거야?"
연순이 손을 두드리며 나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방에 있는 건 좋지 않아. 가자."

 

- "새로 보내온 소합향이야. 반 조각을 태웠는데, 사향 성분이 있더군."
"사향?"
초교는 향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기에,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사향이 뭐가 문제인데?"
시녀 난향이 생글거리며 설명했다.
"아가씨, 여인은 사향을 맡으면 안 된답니다. 사향을 많이 맡으면 아이를 가지기 어렵거든요. 전하께서는 당연히 긴장하실 수밖에 없지요."
 

- 그의 그 검은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초교는 그저 빠져들 것만 같았다. 그의 눈빛은 소용돌이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유로워 보였지만, 그 안에는 활활 타오르는 불이 있었다. 아마도, 그래, 아마 그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안개비 내리는 강남의 변당에서, 그는 그녀를 안고, 자신의 오만함과 분노를 억누르며 나지막하게 말했었다.
'나도 네가 필요하다.'

- 그 말은, 그의 입에서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결국 그녀에게 있어 일종의 시련이 되었다. 그녀가 평생 노력해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악몽이 되고, 영원히 대답할 수 없는 농담이 되어 버렸다.
"제갈월, 전장의 검에는 눈이 없고, 조정의 풍운은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지. 스스로를 잘 보살피도록 해."
제갈월이 따뜻하게 웃었다. 평소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대전 중앙의 여신상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런 것들로 상처 입지는 않아."
모든 이에게는 자신만의 사혈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이를 제압할 수 있는 성씨가 있었다. 그러니 그에게는 사혈이라는 것이 없을 것이다.

- 하소가 다시 두어 번 부른 후에야 그녀는 겨우 평온한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오늘 일은 모두 보지 못한 것으로 해줘."
이 말이 떨어지자 모든 이들은 즉시 상황을 이해했다. 초교 일행은 계속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와 동시에, 몽풍도 마침내 변장하고 길을 가던 제갈월 일행을 따라잡았다. 그녀는 몰래 외투를 벗어 제갈월의 시위에게 건넨 후 옷을 갈아입고, 태연자약하게 제갈월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물건은 전했어요." 
제갈월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움직였다. 몽풍은 웃음을 머금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재빠르게 이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보통 말이 끝나자마자 가 버리는 사람은 두 종류다. 하나는 이 일에 근본적으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 또 하나는 다른 이에게 자신의 떨리는 속마음을 들키기 싫은 경우. 

- 연순, 당신을 알기까지 10년의 세월이 걸렸어. 그리고 그동안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 과거의 일은 모두 바람결에 흩어져 버린 거야.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어떤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아, 남아 있는 것은 그저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후회뿐이야. 
"아초, 과거의 맹세를 잊은 건가?"
연순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초교는 냉랭하게 웃으며, 무시하듯 눈썹 끝을 치켜세우고 말했다.
"당신이 우리가 꾸었던 꿈을 배반했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그 맹세를 지켜야 하는 걸까?"

 

- 날카로운 화살이 연순의 심장을 꿰뚫은 것 같았다. 차가운 바람이 그 안으로 스며 들어왔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머금고. 
마침내, 그녀가 이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과거의 그녀는 아무리 달갑지 않더라도, 아무리 분노하더라도, 언제나 그런 기분을 마음속에 숨기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지금, 이 적막한 천지에, 이 처량한 땅에서, 그녀는 마침내 그에게 이런 말을 하고 만 것이다. 

 

 



 - 초교는 품에 손을 넣어 네모난 옥패를 하나 꺼냈다.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아련해졌다. 이 옥패는 그날 오팽성 전 성주의 저택에서 제갈월과 싸울 때 그녀가 빼앗은 것이었다. 그 싸움 이후 그녀는 무희인 척하다가 그에게 들켰고, 제갈월은 그녀에게 옥패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초교는 울컥해 있었기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저택 안 호수에 던져 버렸다고 이야기했다. 저택의 하인들은 밤새도록 호수의 물을 빼내며 옥패를 찾았지만, 결국은 찾지 못했다. 연북을 떠나던 그날, 그녀는 아무 물건도 챙기지 않았지만, 이것만은 지니고 나왔던 것이다.

- 세월이 흐르고 기억은 그 옥패처럼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눈물이 고인 눈이 쓰라려 왔다.
기억 속을 맴돌다 보니, 결국은 떠날 때의 그 얼굴까지 떠올랐다. 비록 이 강산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의 생사가 나뉘더라도, 여전히 그들 사이에는 뒤엉킨 가문과 나라의 원한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물며 그녀의 이런 몸과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갈 자격이 있을까?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을까?

 

- 초교는 두 눈을 감고 옥패를 던졌다. 그 한순간에 수만 갈래의 생각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하늘은 그녀와 그를 농락했다. 결국 그녀와 그는 아무 사이도 아닌 것이다.

 

- 그녀가 몸을 돌리려 했을 때, 귓가에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거문고의 줄을 튕기는 듯한 소리였다. 초교가 당황하여 고개를 돌려 보니 나무 아래로 옥이 발하는 빛이 두 줄기 보였고, 그 두 줄기 빛은 바로 그녀의 두 손으로 떨어졌다. 
투명하게 윤기 나는 옥패들. 모양은 물론이고 그 새하얀 빛깔까지도 똑같은 것이 분명 짝을 이루는 옥패였다.

- 초교는 갑자기 넋이 나가고 말았다. 격렬한 고통이 그녀의 척추를 타고 그녀의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고통은 뜨거운 용암처럼 그녀의 목구멍을 조금씩 태우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자신의 동작이 너무 클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고통은 그녀의 눈으로, 입으로 새어 나와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 그녀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슴은 격렬하게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녀는 간신히 그 고통을 기억과 함께 마음 깊은 곳에 억누르고, 단단히 봉했다. 희미하게 그녀의 생각은 과거로 날아갔다. 가느다란 기억의 실들이 먹으로 그려 놓은 듯 엷은 그림자를 하나 짜 냈다. 그 사람의 옷자락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 긴 눈썹이며 눈에 어떤 마음을 담고 이 옥패를 던졌던 것일까. 


- "다 마시지 못하면, 이 식사는 내가 내지 않는 걸로 하고, 바로 한바탕 두들겨 패고 관청으로 데려가게."
아이는 말을 듣자 활짝 웃으며 즐거운 듯 자리로 돌아갔다. 초교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어린아이가 어떻게 한 항아리를 마실 수 있다고?"
"직접 겪어 보게 하지 않으면, 저 애는 그게 뭔지 알 수 없겠지."
제갈월이 냉담하게 말했다.
"고생을 한 번 해 보면, 이후로는 기억력이 좋아질 테니까."
말을 들은 초교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이 느려졌고, 그의 뒤에 떨어지게 되었다.

- 제갈월은 몇 걸음 가다가 초교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가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초교는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그를 쫓았다.
고생을 한 번 해 보면, 이후로는 기억력이 좋아진다? 하지만 제갈월, 당신은? 

그렇게 여러 번 고생을 했는데 어째서 당신의 기억력은 아직도 좋아지지 않은 걸까?


- 호수에는 등불이 가득, 금빛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초교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담담한 고통이 어려 있었다. 초교는 제갈월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느릅나무는 신통력이 있다고 해. 특히 오래된 나무일수록 영험하다고 하던데. 몸에 지니고 있는 귀한 물건을 나무에게 바치면 가족과 친우의 평안을 지킬 수 있다고 해. 그런데 이게 사실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어."
제갈월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믿어?"
초교가 다시 속삭였다.

- 제갈월이 눈을 천천히 가늘게 뜨며 가볍게 말했다.
"믿지 않아."
초교는 그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아 보였다.
믿지 않는다고? 

- 초교는 천천히 손을 내밀고, 새하얀 손바닥을 천천히 폈다. 그녀의 눈동자는 별처럼 빛나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고통이 배어 있었다. 그녀가 다시 속삭였다.
"정말로 믿지 않아?"

- 제갈월이 고개를 숙이니, 투명한 옥패 둘이 보였다. 세월이 스쳐 가고, 갑자기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히고 말았다.

- "폐하를 속여 밥을 얻어먹으려 할지도 몰라요. 그러니 좋은 황제 폐하가 되셔야 해요. 제가 돌아왔을 때 저에게 다 털리지 않도록 말이에요." 
말을 들은 이책이 서둘러 탁자 위의 네모난 봉투를 집어 들더니, 안에 든 은표를 꺼내 절반 이상을 품 안에 다시 넣고 중얼거렸다.
"궁핍해져야 돌아오겠다고? 그럼 너에게 돈을 많이 주면 안 되겠군. 아니면 이가 다 빠진 노파가 되어서야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초교는 아연하여 실소했다.
"폐하께서 이러시는 것을 보면, 전혀 황제 폐하 같지 않잖아요."
"황제는 인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너는 내가 얼마나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는지 모르는군. 내가 조금이라도 돈을 더 쓰려고 하면 그 늙은이들이 매일 내 앞에 와서 울면서 난리를 친다고. 동쪽에 가뭄이 들었네, 서쪽에 굶어 죽는 이가 나왔네 하면서 내가 매일 배추 겉대나 먹고살지 않는 것을 억울해한다니까. 나에게 좋은 것은 하나도 허락하려 하지 않고, 이 돈도, 내가 잇새로 간신히 아낀 거라니까. 그런데 너는 나에게 감사하며 은혜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나를 비웃으려 하다니?" 
변당의 하늘은 지극히 쾌청했고, 구름 한 점 없었다. 이책의 여우 같은 눈에 햇빛까지 비치니, 어쩐지 더욱 교활해 보였다. 초교는 변당의 문무백관을 대신하여 한숨을 쉬었다. 
"폐하 같은 황제를 만나다니, 그들이 대체 얼마나 운이 없는건지 모르겠네요."

- "아직 끝까지 가지 못한 길이야. 다른 변수가 있을 수도 있어. 두려워?"
바람이 호수의 푸른 물을 스쳐 가며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도생강의 맑은 향이 풍겨 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망설임의 장막을 뚫고 점차 짧은 문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두렵지 않아."
그는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 하소는 짙은 남색의 조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진중하고 말쑥한 분위기는 여전했고, 얼굴에도 고난을 겪으며 단련해 낸 품위가 살아 있었다. 매향은 정자 밖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초교가 입은 바람막이 옷자락이 가볍게 펄럭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람을 맞으며 서 있기만 했다. 정자는 아주 높았고, 아래로는 태청지의 물이 빠져나가는 수로가 있었는데, 그 수로는 물이 흐르는 시내처럼 조성되어 있어 맑은 물이 졸졸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뒤에서 하소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게서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 "하지만 믿건 믿지 않건 우리는 오랫동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투를 치렀고, 나는 항상 우리가 가장 친한 친우라고 생각해 왔어. 나는 떠났지만, 결코 모두를 버린 것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하소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지난날과 다름없이 평온했고, 과거 전장에서 소리치던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달랐다. 그는 고요하게 말했다.
"저는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를 생각하셔서, 당신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을 안배해 주시려고 했던 것이겠지요. 그것들을 저는 모두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소는 처음으로 초교를 당신이라고 부른 셈이었다. 그는 조용히 초교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이 몇 년 동안, 저는 당신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을 직접 보아 왔습니다. 마음속에 어떤 고통이 있는지 저는 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그때 제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절대로 당신을 그 지경까지 몰아넣지는 않았을 겁니다. 설사 서남진부사가 도적떼로 전락하여 몰살당한다 해도, 당신에게 그런 책임을 지게 하고 연왕에게 대항하게 해서는, 그래서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초교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녀와 연순 사이에는 본래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갈등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마 서남진부사가 없었다 해도 분명 다른 원인으로 조만간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그저 그 문제가 폭발하는 시기가 언제 오느냐 정도의 차이였을 것이다.

 

- 그러나 하소는 그녀에게 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 이야기했다.
"당신은 그저 젊은 여인인 것을. 그때는 우리 모두 그 점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온화하게 웃었다. 마치 어른이 자신의 아랫사람을 보는 듯한 태도였다.
"폐하께서는, 당신이 과거를 완전히 버려야만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대인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원망하거나 소원하게 느껴서가 아니라 그저 모든 부담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위해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나뭇잎 위에 맺혀 있던 이슬이 맑은 소리를 내며 초교의 새하얀 신발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살며시 미간을 찡그리기 시작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동이 밀려왔지만 가슴은 어쩐지 쓰라려 왔다.
"변당이 따뜻하다지만, 지금은 추운 계절이니 아가씨께서는 일찍 들어가십시오."
 
- "하 오라버니."
하소가 당황하여, 재빨리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초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오랜 세월을 함께하면서 누차에 걸쳐 생사의 고비를 함께 겪었으니... 하 오라버니는 나에게 있어 전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가족 같아." 
숲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하소의 눈빛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여전히 같은 자세를 유지하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는 곧 서남쪽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아마도,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겠지요."
그는 과연 알고 있었다.
초교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녀는 말없이 서 있는 하소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 끝까지 쓰라린 마음이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려 정자를 내려왔다. 막 몇 걸음 걸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교, 건강에 주의해야 한다."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하소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조용히 서 있었다.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휘날리고 있었다. 남색 조복 위에는 푸른 구름무늬가 있었고, 허리에는 푸른 띠를 매고 있었다. 이미 꽤 낡은 것이 바로 수려군에 있을 때부터 사용하던 요대였다.

 

- '보통 은혜와는 다르니, 그럼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은 어때? 변당에 남아 네 몸과 마음을 모두 나에게 바치는 거야.'
언제였던가. 그가 그녀 앞에 서서 웃으며 이런 말을 했던 때는.

- 그녀가 조양에게 포위당해 있을 때, 그는 위급한 순간에 달려왔다. 온몸에 먼지를 가득 묻히고,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품에 안고 몇 번이고 말해 주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괜찮아...' 

- 그녀가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있었을 때, 그는 밤에 석류를 들고 찾아와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교교, 어째서 너는 네 스스로를 놓아주지 않는 거지?'

- 깊은 궁 차가운 밤, 그가 술에 취해 찾아왔었다. 그는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에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결국은 웃으며 말했다.
'부아의 몸매가 너보다 훨씬 좋았다고.'

-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 숨겨 둔 금기 같은 것이었다.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도 타인도 속이면서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인지, 이제 와서는 알 수 없었다. 

하늘의 차가운 달이 맑은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길가의 해당화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연지처럼 붉은 꽃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흔들리며 초교의 옷이며 머리카락으로 떨어졌다.


- "폐하, 다른 사람을 좋아해 보신 적 있나요?"
햇빛 찬란한 밀하거의 정원, 그들은 거리에서 궁으로 옮겨 심은 해당화 나무 아래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적극적으로 여인들의 초상화를 고르고 있는 이책을 바라보며 의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지!"
이책이 눈썹 끝을 치켜세우며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
"어제는 염리궁의 우아를 아주 좋아했지. 피부는 비단 같고, 특히나 그 긴 다리는... 감히 뭐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만, 그만!"
초교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잘랐다.
"제 말은요, 그런 좋아하는 거요. 그러니까, 꼭..." 
이책이 그녀를 흘깃 보더니 무시하듯 말했지.
"제갈가의 그 넷째 개새끼가 너를 좋아하는 그런 걸 말하고 싶은 모양이지?"
초교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울컥하여 외쳤다.
"그래요! 그런 거! 그게 왜요?"
"내가 뭐라고 했나?"
이책은 코웃음 치더니, 계속 고개를 숙인 채 그림을 고르다가 한참 후에야 갑자기 "응."이라고 답했었다.

- 초교는 당황해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이책은 귀찮다는 듯 대답했지. 
"네가 지금 내가 제갈가의 넷째처럼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있느냐고 물었잖아? 대답해 준 거야."
"네? 좋아해 본 적이 있다고요? 제가 그걸 왜 몰랐죠?"
이책은 하늘을 보며 웃더니, 아주 찬란한 표정으로 말했었다.
"본 황제의 심사를 어찌 네가 가볍게 꿰뚫어 볼 수 있겠느냐. 너에게 쉽게 내보이고 말 것이라면, 본 황제의 체면이 어찌 되겠느냐?"
초교는 제법 흥미를 느끼는 듯 계속 물었었다.
"폐하가 좋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그냥 그래."
이책은 건들거리며 답했다.
"몸매도 보통이고, 성격도 좋지 않아. 그리고 쓸데없는 일에 고집부리는 것을 좋아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야. 나를 좋아하지를 않더라고." 
"네?"
초교는 살짝 멍해졌다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그럼 왜 그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이책은 아주 말끔한 표정으로 웃었던가.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에 둔다는 거야. 말을 한들 무엇한다지? 게다가..." 
이책의 어조가 바뀌고, 살짝 말을 멈췄었지. 태청지에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흩뜨렸고, 그는 고개를 들어 멀리 호수를 바라보았어. 그의 눈빛이 한순간 흐릿해지는 것을 나는 보았지.

 

- "게다가, 아마 평생 그녀에게 말할 기회가 없을 거야."

당시 초교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통해 아주 아주 먼 곳을 바라보듯이. 그때의 초교가 생각했던 사람은 오동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는 부 공주였다. 낙왕을 위해 이책과 혼례를 치르기로 되어 있던 그날 죽었던 모용부아. 

그녀는 그때 조금은 연민에 젖어 생각했었다.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이책도 아마 점잖은 사람이었을 거라고.

 

-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람이 불어왔다. 그렇게나 차갑게, 아주 차갑게. 붉은 해당화 꽃잎이 떨어지며 하늘을 가득 채우며 나부끼는 모습은, 마치 꽃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바람이 스쳐 가는 가운데, 하늘 아래 피눈물 같은 붉은빛만이 흩날리고 있었다.  

- 제갈월은 아주 화가 났을 것이다. 이 서신 안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까? 화가 나서 그녀를 욕하고 있을까? 그녀를 원망하고 있을까? 아니면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을까? 
아마 모든 내용이 다 있을 것이다. 그녀는 황홀한 마음으로 그날 밤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달빛이 밝던 그 밤, 계수나무가 가볍게 흔들리는 가운데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맑은 눈빛으로, 천천히 말했었다. 
'아직 끝까지 가지 못한 길이야. 다른 변수가 있을 수도 있어. 두려워?'
그때의 바람은 그렇게나 부드러웠는데. 날씨도 따뜻했지. 그녀의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여 마치 날아가려는 나비 같았다. 그녀는 당시 마음에 맺혀 있던 모든 것을 던지고, 조용히 미소 지으며 두렵지 않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온화하게 웃기 시작했다. 

- 그가 그렇게 웃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어색해하지 않고, 울컥하지도 않고, 말다툼을 하지도 않고,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 그는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달빛 아래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의 손은 얼마나 세게 그녀의 허리를 감아 쥐었던가. 그의 입술은 그녀의 부드러운 향기를 쓰다듬으며, 수년간 동경해 오던 달콤함을 빨아들였다.

 

- 세월은 그들을 이미 갈래갈래 자르고 갈라놓았다. 운명은 허무하게 아득하고, 마치 황무지에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모든 것을 태우지 않으면 결코 꺼지지 않았다. 세상에 영원히 고요함이란, 안녕이란 없는 것처럼. 

 - 쌀쌀맞은 땅거미가 깔리는 당경성 밖 황량한 도로를 한 무리의 일행이 다급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전방에서 한 사람이 달려왔다. 가장 앞에 있는 자색 옷의 남자가 말을 멈추고 상대편 말이 빠르게 달려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상대편은 나는 듯이 달려오더니, 그를 보자 쿵 소리가 나도록 말에서 뛰어내려 외쳤다.

"도련님!"
이 밤은 확실히 편안히 자기에는 틀린 밤이었다. 어두운 밤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계획을 짜면서 조용히 다음 날의 성대한 의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은 이렇게나 길었다.

 - 국자대전에는 백발이 성성한 여남왕이 떨리는 어조로 선황의 유조를 읽고, 부들부들 떨면서 대전의 옥계단 위를 향해 절했다. 초교는 황금빛 꽃무늬가 있는 아홉 빛깔 길복을 입고 있었는데, 옷에는 봉황이 나는 모습이 수 놓여 있었다. 머리에는 열여덟 마리의 황금 봉황이 달린 보관을 쓰고, 허리에는 황금빛 휘장과 자색 인끈, 벽옥이 달린 요대를 차고 있었다. 영혼 혼례식이었기 때문에 길복은 검은색을 주조로, 어두운 푸른빛, 어두운 자색, 어두운 초록빛, 어두운 붉은빛, 빛, 잿빛, 짙은 남색, 차가운 등황빛, 은빛, 이 아홉 가지 빛깔을 이용하고 있었다. 옷 위에는 먹빛으로 난새와 봉황을 수놓고, 그 옆으로 황금빛 구름무늬를 자잘하게 수놓았다. 목걸이 역시 묵석, 남보석, 월광석, 화전옥 위주로 장식하고 있어, 사람 전체가 장중하고 고풍스러워 보였다. 또한 조금은 우울하고 억눌린 기분도 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가까이서 볼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였다. 

 

- 화려한 길복을 찢어 버리는 것을 보았다. 길복 안에서 은빛 갑옷이 드러났다. 머리에 가득 달려 있던 진주며 비취 등도 그녀는 대강 떼어 내고, 푸른 두건으로 머리를 묶은 후, 하소가 끌고 온 말에 올라타 수려군 전사들을 이끌고 달려갔다. 
황성 내외의 15만 수비군은 이미 단단하게 진을 치고 대비하고 있었다. 군장을 입은 초교의 얼굴에는 더 이상 적막하고 냉담한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불 속에서 부활한 봉황처럼 높이 날아오르는 듯한 광채가 그녀의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검을 휘두르며 고개를 들고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성문을 열어라!"
그 순간, 그녀는 마치 천지가 처음 열릴 때 생겨난 빛과 같이 너무나 아름다워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픈 충동을 느꼈다.
 
- 온 천지가 용광로가 된 것 같았다. 만물이 땔감이 되어 타오르고, 난세는 영웅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모두가 바라는 그 날카로운 검이었다.

 

- 차가운 바람이 귓가를 계속 스쳐 갔다. 그녀는 다시 한번 이책이 죽기 직전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인 말들을 떠올렸다. 
'내가 죽으면, 조정에는 대란이 일어날 거야. 첨씨 남매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하고, 황실의 종친들이야말로 진정 늑대들이지. 손체는 사람됨이 과격하지. 만약 이상한 동태가 보이면, 상대들의 계교를 미리 알아채고 역이용하면 돼. 내가 너에게 준 반지를 가지고 한수로 가도록 해. 서소가 반지를 보면 네 명을 들을 테니까. 철유의 낭군도 네 지휘를 들을 것이고, 만약 가능하다면 기회를 봐서 조정에 있는 각 번왕의 첩자도 뿌리 뽑아 줘. 그렇게 되면 일거양득이라고 할 만하겠지. 그리고 제갈가의 넷째 말인데, 그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 일단 너와 관련된 일이면 바로 백치로 변해 버리니까. 그때가 되면 그에게 굳이 일깨워 줄 필요도 없을 거야. 아마 그가 병사들을 이끌고 너를 빼앗으러 올걸. 우리 변당 사람이 적게 죽게 될 터이니, 겸사겸사 그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좀 보이긴 해야겠어. 교교, 너는 평생 너무 많은 것에 얽매여 살았어. 만약 나의 죽음 때문에 다시 한번 네 발이 묶이거나 하는 일이 생긴다면, 나는 구천에서도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없을 거야. 너는, 결코 나를 실망시켜서는 안 돼.' 
초교의 눈가가 시큰해 왔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말 엉덩이를 채찍질했다. 광야에선 두 군대가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서소는 병사들 앞에서 마치 전쟁의 신처럼 군장을 입고 커다란 칼을 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커다란 깃발이 펄럭였는데, 깃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반역자를 죽이고, 간신을 베어라.

 

- 영균 원년 10월 초파일, 왕은 거짓으로 황위에 오른다는 말로 정안, 단경, 화양대공 등이 거병하도록 유인하였다. 그들이 18만을 이끌고 한수관에 도착하였다. 오는 길 내내 따르는 이들이 운집하였고, 신남금직영 부장 방해, 전서서군 상장 전여가, 석조부통령 류모백, 회성참장 주경, 한수장군 서소 등이 잇달아 휘하에 귀순하여 병력이 40만여에 이르렀다. 파죽지세로 경사로 쳐들어왔다. 왕이 소식을 듣고, 길복을 벗고 갑주를 입은 후, 남창문을 열고 군사들을 이끌고 적을 맞이하였다. 
방회해, 전여가, 류모백, 주경, 서소 등이 왕의 깃발을 보자 즉시 간신을 벤다는 깃발을 세우고, 창끝을 적에게로 돌렸다. 왕이 활을 들어 화살을 쏘고 군사들을 이끌고 돌진하니, 베어 버린 적만 3만여에 달했고 나머지는 모두 투항하였다. 정안왕 주윤은 서장군의 검 아래 죽었는데, 그 해 쉰일곱이었다. 
이틀 후, 왕은 봉인을 궁문에 걸어 두고, 여자의 몸으로 감히 권력을 취할 수 없다는 명목으로 태묘 앞에 무릎을 꿇고 선황께 명을 거두어 주시기를 청하였다. 다음 날 영균제가 도착하여 왕과 변당의 은의에 감동하여 특별히 그 주청을 윤허하고 태황귀비의 칭호를 거두었으며, 변당의 일등세습왕을 제수하고 옥책과 금보, 일품 망포를 내리시며, 봉호를 수려라 하시었다.   

<당서 수려왕전 일백이십칠권>

 

- 석양은 핏빛이었고, 초목이 무성한 들판은 강철과 같았다. 손체는 높고 웅장한 성벽 위에 서서 초교가 하소, 평안 등의 호위를 받으며 성을 나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황금빛 황무지 위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아름다운 여인이 말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막 금고에서 풀려난 매처럼, 흰 소매를 거대한 날개처럼 펄럭이며 날아가고 있었다. 
저분은 매였어. 누구도 저분의 날개를 부러뜨릴 수는 없는 거야. 저분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저분을 머무르도록 강박할 수는 없는 거였어. 
이 순간, 손체는 그 친우가 수년 동안 고집부렸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저러한 인물을 보았으니, 과연 천지로 하여금 저 사람을 위해 빛을 발하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 제갈월은 금포를 입고 다리목에서 높디높은 말 위에 앉아 있었다. 방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도련님, 초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인마 한 무리가 지평선에 나타났다. 흰 바람막이를 입은 여인이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바람을 맞으며 맨 앞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 "아가씨, 아가씨께서 저까지 속이시는 줄 알았잖아요. 아가씨가 정말로 안 오실 줄 알았다고요." 
청청, 평안 등이 기뻐하며 달려와 헤어진 후 소식을 서로 물었다. 평안은 특히 그날의 전투를 생생하게 묘사하며 의기양양해했다. 하소는 가족이 없고 변당에 남기를 원하지도 않아 초교와 함께 가기로 하였다. 그와 월칠 등은 비록 만난 적은 없었지만, 서로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곧 친해졌다. 
오로지 제갈월만이 차갑게 질린 안색으로 그 자리에 서서, 매향과 서로를 알뜰하게 챙기는 초교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를 얼마나 악물었는지, 꼭 부러질 것만 같았다.
 
- 제갈월이 그녀를 노려보더니 날카롭게 추궁했다. 
"그럼 왜 나에게 미리 소식을 전하지 않고, 내가 병사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와서 허탕을 치게 만든 거지?"
초교는 고개를 움츠리고 눈알을 굴렸다.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직도 실토하지 않으려 하고!"
"이책이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어. 능력이 되면 그에게 가서 따지든가."
제갈월이 한참 동안 이를 갈더니, 결국은 차갑게 말했다.
"너희들이 분별 있는 것을 내가 알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내가 병사들을 이끌고 이책의 소굴을 다 쓸어버리고, 네가 누구 황비가 되는지 보려고 했을 거다!"
허풍을 떨기는, 초교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겉으로는 아주 분별 있게 말했다.
"그거야,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어? 난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질 거야. 난 절대 변절하지 않아."
제갈월은 무시하듯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이 남자의 자존심을 세워 준 모양이었다.

- 그녀가 다가가 차를 한 잔 따라 주며 물었다. 
"잘 잤어?"
"그럭저럭."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몰래 내 방에 들어와 한숨을 쉬거나 하지 않았으면 더 잘 잤겠지."
초교는 얼굴을 붉히며, 눈을 살짝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배고프지?"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금은 좀 고팠는데,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
초교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룻밤 하루 낮을 꼬박 자느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당연히 배가 고프겠지. 주방에 음식을 준비하라고 이를게."
"그럴 필요 없어."

 

- 제갈월은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무서워할 필요 없어."
달빛은 고요하고, 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 방으로 돌아온 후, 제갈월은 침상에 앉아 한참 동안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초교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적당한 때를 찾아, 두 사람은 각자의 전부를 상대방에게 주어야 했다. 
그래, 이 생각은 아주 괜찮아 보였다. 밤길을 많이 걷다 보면 귀신을 만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잠을 많이 자면 꿈도 많이 꾸게 되는 법이다. 사람이 일을 할 때는 깔끔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 마땅히 직접 핵심으로 들어가서 결론을 내려야 했다. 때가 되면 속마음을 털어놓고... 전부를... 철저하게...

- 깊은 밤, 그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생각에는 바로 오늘이 그때인 것 같았다.
제갈월은 본래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일단 결정을 내린 이상, 그는 서두르지도 않고 여유를 부리지도 않으면서 전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 착실하게 이행했다. 어떤 일이 발생한다 해도, 그의 마음을 변하게 할 수는 없을 터였다. 

- 그는 일단 목욕을 하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후,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 보았다. 거울 속의 남자는 검과 같은 눈썹에 별과 같이 반짝이는 눈이 준수해 보였고, 영웅적인 기개도 있었으며, 얼굴이며 자세,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는 자존감이 한껏 높아진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조금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앉아 차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 차는 이미 식어 있었다. 그는 청화백자 찻잔을 계속 들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잠시 후 자신이 할 말이며 행동 등을 세세하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 아주 자세하게 생각하여 결론을 내린 후, 또 상대방이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여러 가지 상황을 설정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가 어떻게 응대할 것인지, 어떻게 화제를 바꾸어 갈 것인지, 어떻게 그런 분위기로 만들 것인지도 고민했다. 자신이 주동적으로 행동하되, 모든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었다. 
좋아, 문제없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막 문을 열려고 했을 때, 누군가가 그의 방문을 열었다.

 

 

 




- 당신은 나를 괴롭힐 수 있을까? 당신은 나를 괴롭힐 수 있을까? 당신은... 
그는 눈을 감았다. 그 맑은 목소리는 마치 파도처럼 사방팔방에서 그에게 밀려왔다.
나는 너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주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생각한 가장 좋은 것들을, 너는 원하지 않았지.

- 초교는 수많은 백성들과 병사들을 거느린 채 성문 앞에 서있었다. 
제갈월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온몸에는 먼지가 묻어 있고, 짙푸른 바람막이는 핏물로 얼룩져 있었다.
"무엇하러 온 거야?"
"나에게 속한 것을 되찾으러 왔지."
초교의 눈이 점차 붉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눈가가 시큰해 오는 것을 겨우 참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 정말로 익살맞은 일이었다. 꿈에서도 불가능한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세상 사람 누구도 머리가 깨지는 한이 있어도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6년 동안, 서몽의 세력들은 한도 끝도 없이 싸워 댔다. 열흘에 한 번 소규모 전투가, 한 달에 한 번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 서로 증오하며 이를 갈아 댔던 그들이 뜻밖에도 손을 잡고 적에게 함께 대항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사람이건 아니면 후세 사람이건, 이 전쟁에서 변당 수려왕의 역할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 그녀는 과거 상신의 주인이었고, 연북 고원의 수호신이었다. 대연 황제 휘하의 제일가는 심복이었고, 북삭문 밖에 몰려온 대하 백만 대군을 막아 냈다. 지금 그녀는 청해왕의 아내인 동시에 변당의 친왕이었다. 그녀의 남편과 북지 대하의 권력자 조철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친우였고, 그녀의 부하 장수들은 대부분 상신 고원 출신이었다.
 

 - 견융이 병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을 때, 북지 대하는 수수방관했다. 변당 황제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고, 회송 역시 다른 속셈이 있었다. 대연 내에서도 적극적으로 대항하자는 파와 그저 방비만 하자는 파로 나뉘었다. 뚜렷하고 정확하게 미래의 판세를 예견한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그녀는 견인들의 무서운 야심과 기세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과거의 모든 은원과 냉정하게 결별하며 전략적으로 사고했다. 그리고 자신의 계책을 위해 적극적으로 동분서주했고, 여러 세력을 연합했다.

 

- 그녀는 이번 연합군을 결성하는 데 있어 가장 훌륭한 협조자가 될 운명이었다. 그녀만이 각 세력 간의 충돌과 갈등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결코 사라질 리 없는 서로의 의심도 잠시나마 억누를 수 있었으며, 최소한 표면적으로라도 어려움 없이 연합군을 이뤄 내도록 재촉할 수 있었다. 그 안에 복잡하게 뒤얽힌 관계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도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어코 해냈다. 

 

- 5월 23일, 북악관은 다시 한 번 서몽 대륙 전체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네 나라가 화뢰원에 모였고, 병력은 총 120만에 달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 연합군은 전투를 총괄할 대장을 뽑았다. 대연은 자연스럽게 연순을, 청해는 제갈월을 추천했다. 북지는 북지의 각 나라를 평정하고 있는 조철을 추천하는 파와 계속 변경에서 맴돌며 연북과 전투를 벌이는 조양을 추천하는 파로 나뉘었다. 변당 황제 이수의는 직접 참전하지 않았지만, 손체는 이수의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매일 전서구를 날려 폐하께 고명한 작전 계획을 지도받으면 된다면서. 

- 각종 의견이 서로 양보 없이 맞서는 가운데, 각 세력의 참모관과 외교관들은 막사 안에서 거의 주먹다짐을 할 정도로 심각했다. 그들은 이틀 동안이나 다투면서도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손체가 수려왕 초교를 이 전투의 총군사로 삼자는 의견을 냈고, 모든 이가 조용해졌다. 

- 초교는 청해왕비였지만, 명의상으로는 변당의 친왕이었다. 그녀와 이수의의 관계며 그녀가 당경을 지켰던 공적을 떠올리면 변당 입장에서는 자연히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으나, 제갈월이 곧 자신의 아내를 지지하는 것을 선택했다. 조철이 제갈월에게 맞장구를 쳤고, 조양은 그저 조철과 연순만 아니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찬성했다. 다만 대연은 이 제안이 나온 후 다음 날 아침에야 겨우 황제의 의견을 표명했다. 
"이의가 없다."

- 한참 후, 조철이 입가를 끌어올렸다. 오랫동안 북지에서 전투를 벌이며 수많은 북지의 나라들을 토벌하고, 거대한 가업을 새로 세운 그가 조양을 보며 웃었다. 
"천하란 이리 넓고 기묘한 법이군, 저 세 사람조차 손을 잡았구나. 이제 너와 내가 다툴 이유가 더 있겠느냐?"

 

 

 

 

 

 

 

 
특공황비 초교전 세트(전6권)
웨이보 화제성 압도적 1위! 2017년 중국 드라마 시청률 1위 <특공황비 초교전> 정식 한국어판 소설 2017년, 중국은 물론 한국의 드라마 덕후들을 휘어잡은 화제의 드라마 <특공황비 초교전>. 총 67부작으로 마무리된 이 드라마는 방영 당시 인터넷 방송 조회 수 470억 뷰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또한 중국 사이트 웨이보에서는 ‘초교전’ 관련 검색과 조회 수가 역대 드라마 기록을 모두 경신할 만큼 뜨겁고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의 시즌2가 확정됨에 따라 원작 소설에 대한 관심도 날로 높아졌으며 한국 연재 사이트에서도 10만 여명이 구독 중이다. 《특공황비 초교전》은 특공대원인 초교가 타임슬립하여 가상의 고대 국가 대하제국의 비천한 노예 소녀로 깨어나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그녀는 자신이 모시는 제갈부의 넷째 도련님 제갈월, 대하제국에 볼모로 온 연북의 세자 연순과 얽히게 되면서 처참하고 어두운 권력과 암투의 세계에 뛰어들게 된다. 부당하고 부조리한 신분제를 개혁하려는 초교의 강한 신념, 연씨 일족을 모두 참수시킨 대하황제에 대한 연순의 증오, 자신을 속이고 배신한 초교 때문에 괴로워하는 제갈월의 연심. 이 소설 속에서는 각 인물들이 품고 있는 감정들이 뒤섞이며 강렬한 전투 속에 녹아든다. 또한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원작소설만의 섬세한 감정선이 돋보인다. 죽여야 하는 적, 믿어야 하는 친우, 이 당연하고 의심해 본 적 없는 관계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고 여러 위기를 거치자 초교의 마음에는 균열이 생겨난다. 세 사람은 서로에게 갖고 있던 우정, 복수심, 원한, 사랑 등의 감정이 변화하며, 그 틈으로 들어선 애증이라는 낯선 감정에 휘둘린다. 《특공황비 초교전》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초교의 의지와 천재적인 작전술, 누구보다 강한 통솔력과 뛰어난 전투력으로 군대를 승리로 이끄는 초교의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지독하게 깊은 사랑과 원망! 끝을 향해 가는 대서사시! [줄거리] 꿈속의 풍경도, 전생의 기억도, 환상도 아니다 잔인한 인간 사냥 게임에서 살아남아라! 고대 국가 대하제국의 노예 소녀로 타임슬립한 특공대원 초교.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귀족의 재미만을 위해 이용당하는 파리 목숨과도 같은 노예 생활. 초교는 부당하고 부조리한 신분제를 피해 자신의 운명을 찾아 떠나려 한다. 한편 황제에 의해 가족들이 몰살당하자 대하제국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로 진황성을 초토화하는 연순. 초교는 그를 도와 모반을 일으키고 연북으로 향한다. 제갈월은 자신을 속이고 떠난 초교를 향한 애증으로 그녀를 뒤쫓는데…….
저자
소상동아
출판
파란미디어
출판일
2018.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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