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오윤희] 삼개주막 기담회 - 2

일루젼 2022. 9. 23.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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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오윤희
출판 : 고즈넉이엔티 
출간 : 2021.12.28 


       

이제는 바람이 차가운 것이, 완연한 가을이다. 

최근 약간의 퇴행기를 겪고 있다. 책도 가벼운 것만 읽히고 그림도 영 마음 같이 그려지지 않는다. 따져보면 시기가 시기인지라 이럴 때는 오히려 이전에 안 해봤던 것들을 해보자 싶어 마음을 내려놓고 날씨를 즐기고 있다. 

 

1권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집어든 <삼개주막 기담회> 2권. 

이번 편에서는 보다 본격적인 기담회가 되는가 싶지만, 가만 살펴보면 기담회 밖에서 흘러나오는 기담들이 더 많다. 몰입을 위해서인듯 한데, 구전하는 경우에도 막상 이야기가 시작되면 화자가 바뀌다보니 기담회에서의 이야기와 밖에서의 이야기가 딱히 구분이 되지도 않는다. 그러다보니 1권에 비교해 고정 등장인물들이 바뀌었다는 느낌 정도. 그럼에도 세시풍속이나 관련 용어들이 한자가 병기되어 다루어진다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극호이므로 만족한다.

 

조금 아쉬웠던 점은 본 이야기가 끝난 후 화자의 회고를 이용한 뒷이야기를 덧붙이는 구조가 매번 반복된다는 점. 처음 한 두번은 반전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등장인물에 대해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속내를 짚어볼 수도 있어 신선하게 느껴지겠지만 꽃노래도 삼 세 번이다. 같은 형식이 되풀이되면 본 이야기를 읽는 도중에도 대강 속사정이 어떠하려니 후담을 짐작하게 된다. 이미 예상한 형태의 휴머니즘은 도덕적 교훈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안타까웠다. 기왕 기담의 형태를 취한 바에야 몇몇 이야기 정도는 부러 사연을 덧붙여 풀지 말고 그대로 남겨두는 것도 좋았을 것 같다. 그렇게 구분을 두었다면 선노미가 가져와 풀어내는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이 겪는 이야기에 구분을 둘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싶어 다시금 아쉽다.  

 

그래도 한국 특유의 정서와 분위기를 잘 풀어낸 소설이라 생각한다.

즐겁게 읽었다.       

 


   

 

- "가면이라고?" 
말을 건 남자뿐만 아니라, 심드렁하게 대화를 듣던 다른 사람들까지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시골서 올라온 젊은이를 바라봤다.
"나례 때 쓸 가면인가?"

 

- 나례는 고려 때부터 전해져 온 악귀 쫓는 의식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각종 재앙을 불러오는 악귀를 쫓아내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한다는 게 나례의 취지다. 원래 궁중에서 시작된 나례는 조선 후기엔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돈 좀 있는 양반이나 양인들은 한 해를 떠나보내는 기념으로 성대하게 나례 연회를 열고, 연회장에 광대나 기생들도 부르곤 했다. 

 

- 섣달그믐을 맞은 한양 일대는 유난히 부산스러웠다. 집집마다 푸른 댓잎과 자형(紫荊: 콩과의 낙엽 활엽 관목) 나뭇가지, 익모초 줄기와 귀신 쫓는다는 복숭아 가지 따위를 한데 묶어 만든 빗자루로 창문과 문지방을 마구 두들겨대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잡귀를 쫓아내기 위한 의식이었다. 귀신이 싫어한다는 북과 방울, 징 소리까지 어우러져 거리 곳곳이 시끌벅적했다.   
 

- "아마도 광에 갇힌 여자는 산후병을 앓았던 것 같네." 
연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산후병은 아이 낳은 산모가 죽는 병 아닙니까?" 
너구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죽지는 않고 마음에 병이 드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들었네. 세종대왕의 여동생이신 정선 공주께서도 산후에 울증에 빠지셔서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셨다고 하더만." 
"그렇다면 광에 가둘 게 아니라 치료를 받아야 했군요." 
노루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애당초 아이를 낳기만 하면 저절로 애정이 생길 거라고 기대하는 게 잘못 아닌가? 어미라고 무조건 아이를 예뻐하라는 법은 없어."
여우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세현, 누가 자네 아니랄까 봐 또 그런 냉소적인 말을 하는군."

연암이 여우를 향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세현'이라 불린 여우는 고개를 삐딱하게 숙였다. 
"냉소적인가요? 하지만 어미도 저절로 되는 건 아닙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만들어지는 거죠."
연암이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세현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 '어머니는 날 낳기 전에 어땠을까.'
선노미는 태어나 처음으로 처녀 시절 김씨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 "엄마가 당연한 거 아냐?"
남편은 힘들다는 유순의 말이 이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자기는 아기 돌본 적도 없으면서. 유순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불평을 애써 삼켰다. 한편으론 남편 말이 맞고, 자신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엄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그곳의 수장인 수찬관은 발생한 사건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을 총괄했다. 그중 제일 중요한 업무가 실록 편찬이었다. 실록은 중앙 및 지방 관청이 행정 업무를 기록한 시정기 사초를 바탕으로 만들었는데, 사초에서 어떤 글자와 글귀를 뺄지 결정하는 산삭(刪削) 과정을 담당하는 것도 수찬관이었다. 

 

- "글은 말보다 오래가지. 그게 글의 힘일세. 우린 역사를 바꿀 순 없어도 역사를 기록할 순 있어." 
 
- "바꿀 수도 없는 일을 기록해서 뭘 어쩐답니까."
무력감이 밀려왔다. 자신이 어찌할 수도 없는 국가 중대사를 그저 알고만 있으라니. 할 수 있는 게 고작 기록밖에 없다니. 그건 바꿀 수도 없는 미래를 알려주고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있으란 말과 마찬가지로 가혹했다.
"그게 춘추관에서 일하는 자가 할 소린가. 그렇다면 사초는 왜 쓰고 실록은 왜 만드는가."

- "하지만 실록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고, 이건 미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점에선 마찬가지야."

 

- "왜... 저였을까요?"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원호가 마침내 운을 뗐다.
"대감께선 25년이나 춘추관에 계셨습니다. 하지만 책자를 본 적 없다 하셨지요. 그런데 왜 저한테 나타난 걸까요. 왜 제게 그런 일을 알려준 걸까요." 
원호는 아무래도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라도 되는 비밀을 알게 된 것이 자신에게 그런 가혹한 짐을 떠맡긴 책자가 원망스러웠다.
"운명은 사람을 가리질 않네."

- 어쩌면 이것이 글의 힘인지도 모른다. 글은 무력하지만, 무력하지 않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보이지만, 어쩌면 모든 것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런 글의 힘을 전하는 것이 100여 년 뒤 망국(亡國)을 앞둔 기록하는 자의 사명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인지도 모른다.  

 

- "글공부하는 거요. 저 같은 애가 글 배워봤자 어디다 쓰겠어요."

선노미가 고개를 숙였다. 무광은 선노미를 빤히 내려다봤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무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는 첩이야."
선노미가 놀라 무광을 올려다보았다.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 난 벼슬을 못 해. 그래서 비관도 많이 했다. 공부를 그만둔 적도 있지.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 싶어서."
모든 걸 내려놓은 듯 담담한 목소리다. 이분도 그런 아픔이 있었구나 싶어 선노미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뭔가를 배우는 목적이 꼭 과거를 보고 벼슬을 하는 것이어야만 할까? 좋아서 할 순 없는 걸까?"

- 그런 생각은 이제껏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다들 뭔가 필요하기 때문에 배우고, 공부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언문을 배우니 어떻더냐. 재밌었지?"

"네."
선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그것만으로도 공부할 이유는 충분해. 그리고 하나 더."

무광이 선노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만약 춘성이 글을 알았더라면 계약서에 그렇게 손쉽게 지장을 찍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배움은 힘이다. 세상을 살아나갈 힘."

 

- 얼마 전 주막집 앞으로 가마바탕에 올라탄 기생이 지나갔다. 가마바탕은 지붕 있는 가마인 유옥교(有屋轎)와 다르게 지붕이 없는 가마다. 지붕 있는 가마는 남편 벼슬이 당상관 이상인 귀부인들만 타게 돼 있어 신분 낮은 기생이 이용할 수 있는 가마는 가마바탕 밖에 없다. 하지만 색기로 먹고사는 기생에게 외양이 드러나는 가마바탕은 오히려 이동수단으로서 제격이었다. 

 

- "진짜 야무지게 잘 땋았네."
여자가 복이 머리를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한참 어린 여자애 머리 모양새에 열을 올리는 자신이 쑥스러웠는지 변명처럼 '부모님이 머리 만지는 일을 하셨거든' 했다.

- "아니, 아버지는 가체를 만드셨고, 어머니는 수모(首母)였어."

"수모라고요?"
"응, 양반가 아씨와 마님 머리를 매만져주는 사람이야. 혼례 때 머리 치장도 해주고." 

 

- 가체는 제작에 손이 꽤 많이 가는 물건이었다. 가체 재료로 쓸 수 있는 털은 사람 머리칼밖에 없는데, 사람마다 머리칼이 굵은 사람도 있고, 가는 사람도 있고, 곱슬곱슬한 사람도 있고, 쭉 뻗은 직모인 사람도 있어 재료가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가체에 쓰일 모발 재질을 똑같이 만들기 위해 황밀, 송진 등을 섞어 만든 특수한 약물에 수집한 머리카락을 담그고, 씻고, 탈색한 뒤 곱게 펴 같은 색으로 염색해야 한다.

- 머리칼을 붓으로 골고루 검게 칠해 염색한 뒤에도 아직 할 일은 남아 있다. 입수한 머리칼 길이가 저마다 들쑥날쑥해서 고르게 길이를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긴 머리는 끝을 다듬고, 짧은 머리는 촛농을 이어 붙여 길게 만들었다. 이런 기초 작업을 거친 긴 머리칼을 가지런히 빗어 둥글게 실타래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윤기 나는 광택을 입혔다. 거기다 비녀와 보석 장식으로 치장할 때도 있다.

 

- 이토록 정교한 수작업을 거쳐 완성된 가체는 그 값이 어지간한 집한 채보다도 비쌌다.

 

- 달분은 남편 조수 역할을 하며 머리 만지는 법을 익혔다. 가체를 만든 건 남편이라도 남녀가 유별한 터에 그걸 쓸 여자들 머리까지 직접 매만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달분이 대신 그 일을 맡았다. 

 

- "아버지는 세상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가체를 만드는 분이야. 그런 아버지를 둬서 자랑스럽지?"
어느 날, 달분이 어린 춘복의 머리를 땋아주며 말했다. 곁에서 달분의 말을 듣곤 장삼이 고개를 저었다.

"가체를 만드는 게 아니야. 내가 만드는 건 꿈이고, 욕망이지."

'욕망이요?"
"그래, 욕망.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아. 사람들은 무언가를 가지면 만족하지 않고 그보다 더 귀한 걸 꿈꾸지. 내가 하는 일은 그들이 계속 욕망을 갖도록 만드는 거야." 
"욕망이 커질수록 돈을 더 벌겠네요?"

달분이 웃었다.
"그럼 세상에 다시없는 가체를 만들어요. 사람들 모두 다 갖고 싶어 하게 말이에요."

 

- 가체를 만드는 데 제일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부분은 질 좋은 머리카락을 구하는 것이다. 부모에게서 받은 신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들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 그러니 가체 장인이 구할 수 있는 머리칼은 대개 승려들 것이다. 때로는 사형수나 형편이 어려운 여자 머리칼을 얻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칼은 열악한 위생과 나쁜 영양 상태 때문에 질이 좋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 거부의 주문을 받아들이고 나서 장삼은 질 좋은 머리칼을 구하기 위해 사방에 수소문했다. 재료 제공업자들에게 길한 일을 앞두고 만드는 물건이니 사형수 머리칼만은 절대 안 된다, 가난한 여자가 굶어 죽지 않으려고 내놓은 푸석한 머리칼도 사절이다, 신신당부했다.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 끝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머리칼을 입수했다.

 

- "왜 기이한 이야기를 수집하냐는 내 물음에 너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울고 웃었다고. 너도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울고 웃었다고. 그렇지?"
"네."
"왜인지 아느냐?"
선노미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거기에 인생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꿈과 애환이 서려있기 때문이야."

- "인생이란 기이한 일의 연속이지. 우리 인생 자체도 하나의 기담이다."


- "어쨌든 너는 내게 기담이 뭔지 가르쳐줬다. 그러니 함께 기담을 수집하러 가지 않겠느냐?"

- "기담회에서 너는 선비들과 교류하며 언문을 배웠다. 그만큼 네가 성장했다는 뜻이지. 이번 여행길에는 네가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경험한 후엔 네가 얼마나 더 성장할지 어떻게 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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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오윤희
출판
고즈넉이엔티
출판일
2021.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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