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서귤] 회사 밥맛

일루젼 2022. 10. 1. 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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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서귤
출판 : 아르테(arte) 
출간 : 2020.04.01 


       

표지의 저 공허한 동공이 마음을 깊게 울린다.

초점 없이 풀린 눈에 조건 반사적으로 흡입하는 카페인은 직장인들이라면 만국 공통의 모습이 아닐까.

 

회사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불특정 다수를 무작위로 마주하는 것과 특정 다수를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것은 각각의 고충이 있을 텐데, 힘들려고 치면 둘 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다. 하지만 한 번 심하게 틀어진다면, 그래도 계속 봐야만 하는 후자 쪽이 조금은 더 괴롭지 않을까 생각한다.  

 

<회사 밥맛>은 저자가 직장 생활을 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그날의 식사와 연결지어 풀어나가는 에세이다. 단락별로 짤막한 네 컷 만화도 곁들여져 있어 가볍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다. 뭐, 읽다 보면 입맛이 써지는 순간도 있지만 그럴 때면 맨 마지막에 다시금 등장하는 '그날의 메뉴'를 보며 씁쓸함을 정돈하면 딱 좋다. 

 

개인적으로는 본문과 네 컷 만화 사이의 약간의 뉘앙스 차가 기억에 남는다. 여러 가지 의미와 의도가 담겨 있겠지만, 나는 모두에게 일어날 법한 일이지만 항상 꼭 그렇지만은 않은 일도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 

울고 웃었던 속내를 털어내고, 오늘은 무슨 맛있는 걸 먹을지 고민하는 걸로 시간을 보내보자.

그럴 틈도 없었다면, 그런 순간이 오면 뭘 먹을지를 상상하며 힘을 내자. 

나를 잘 먹여 살리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 장래 희망이 회사원은 아니었다. 어릴 적 계획대로라면 이 나이쯤엔 이미 세계적 명성을 쌓은 작가가 되어 있어야 했다. 오늘도 세계적 명성 대신 회사 카페에서 적립금을 쌓는다. 어김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며 생각한다.

'오늘은 언제 퇴근할 수 있을까?'

출근하면서 퇴근을 기다린다. 

 

- 왜 회사를 다니냐는 질문에 선배가 한 대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내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이 일에는 이 회사의 임직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제품과 서비스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이 달려 있어."

선배는 오너 가와 연관된 사람도 아니고, 그저 한 평범한 직원이었다. 그 숭고한 사명감에 순간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밥벌이가 궁해서 마지못해 회사를 다니는 스스로가 속물처럼 느껴졌다. 

 

- 지금은 안다. 밥벌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냥 다른 사람이었다. 

 

- 회사를 다니는 지금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나쁘지 않은지 알지 못한다. 시절에 대한 평가는 대개 그 시절이 끝난 뒤에야 가능하다. 미래의 나는 회사에서의 지금을 아주 불만스럽게 이야기할 수도, 행복했다 입이 마르게 칭찬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시절의 한가운데를 지나느라 스스로가 행복한지 불행한지도 모르는 한 천둥벌거숭이의 근시안적 자기 고백이다. 

 

- 안녕하십니까. 안녕하냐는 말을 꼭 죄송하다는 말처럼 뱉던 때였다. 예의 바른 것과 주눅 든 것을 구분할 줄 모르던 시기였다. 내가 잘못해도 사과하고 남이 잘못해도 얼결에 사과했다. 

 

- 처음 노량진에 갔다가 육교 아래서 울먹였던 밤이 생각났다. <박물관이 살아있다>와 <그래비티>를 맞히려고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했던 게 아니었다. 그럼 뭐 때문이었을까?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직장을 잡아 안정된 수입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보면 결국 돈을 위해 공부한 셈이다. 회사에서 초성 퀴즈에 동원된 것도 돈을 버는 일이다. 나는 방금 내 전공을 활용하여 밥벌이를 했다. 부끄러울 일도 참담할 일도 아니다. 

 

- 오랜만에 미세먼지 '좋음'이 뜬 날이었다. 하늘은 푸르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 마침 토요일이고, 나는 회사에 가야 한다. 젠장.

 

- 출근길 지하철이 텅텅 비어 이루 말할 수 없이 쾌적했다. 십수 년을 2호선과 만나왔는데 오늘따라 그 모습이 너무 낯설어서 새로운 도시에 온 기분이었다. 회사 부근에 도착해서 한적하기 그지없는 카페에 들러 케일과 사과가 섞인 디톡스 주스를 샀다. 커리어우먼 기분이라도 내보려고. 디톡스 주스와 커리어와 우먼이 무슨 상관인지는 비밀.

 

- 사무실에 들어서자 먼저 출근한 과장님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따로 복장 규정이 없어서 평소에도 편하게 입지만, 주말 특근을 하는 날에는 최선을 다해 더 후줄근하게 입고 싶어 진다. 나도 소매가 해진 후드티와 고무줄 바지를 입고 왔다. 동네 백수 같은 차림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왠지 회사에 복수하는 기분이 든다.

 

- 주말에는 구내식당을 운영하지 않기 때문에 회사 근처의 지정된 식당에서 법인카드를 사용하고 영수증을 내야 했다. 문제는 지정 식당이 갈수록 줄어든다는 점이었다. 처음 예닐곱 군데였던 것이 지금은 두 군데밖에 남지 않았다. 김치찌개 아니면 칼국수.

 

- 사골 국물에 다진 고기를 넣은 안동국시 스타일의 국수. 나름 동네의 맛집으로 검색되는 가게다. 국물은 슴슴하고 담백한 편이고, 면은 중면을 사용한다. 이것만으로는 존재감이 약하다고 볼 수 있는데, 승부수는 겉절이다. 수분이 꽉 들어찬 어린 배춧잎에 고춧가루 양념이 버무려진 이 겉절이는 무슨 비법이 숨겨져 있는지 유달리 상큼하고 달달했다. 다만 다진 마늘이 많이 들어가 있어 평일에는 냄새 걱정에 양껏 집어먹질 못하는데, 오늘은 뇌를 마늘에 절여버릴 작정으로 두 번이나 리필해 먹었다. 

 

- "오늘 빡세게 끝내고 제발 내일은 나오지 말자."

말끝에서 마늘 냄새가 났다. 나는 잠시 울고 싶어졌다. 과장님은 새벽 1시가 됐든 2시가 됐든 오늘 모든 일을 끝내고 내일은 절대 나오지 않겠다는 각오를 세운 것이다. 코딱지가 좋냐, 방귀가 좋냐 급의 선택지이기는 하지만 나는 하루 무리하고 하루 쉬는 것보다는 이틀로 나누어 적당히 일하는 걸 선호한다. 하지만 과장님의 스타일을 따라야겠지. 긴 하루가 될 것 같다.

(리뷰자 주 : 나는 약간 충격을 받았는데, 정말 이틀로 나누어 출근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시나요...? 한 번에 끝내고 반나절이라도 이어서 쉬는 게 낫지 않나요...? 아. 나는 그래서 지금 같은 근무 형태를 선택한 모양이다.) 

 

- 나는 세상 둘도 없는 패션계의 '무나니스트'이자, 투머치 놈코어룩을 즐기는 '레이트 어답터'다. 보통은 검정 슬랙스나 레귤러핏 청바지, 아이보리색 맨투맨 등 기본템을 주구장창 돌려 입고, 어쩌다 나름 과감한 쇼핑을 해도 그 대상은 작년 시즌쯤 패션피플들이 입기 시작해서 올해 들어 너도나도 걸치는 보편적인 아이템으로 한정된다. 

 

- 명란크림우동은 이 가게의 대표 메뉴다. 직접 뽑아 쫀득하게 삶은 생면과 짭짤한 명란소스의 조화가 일품이다. 소스에 들어간 각종 버섯은 다채로운 향과 씹는 맛 담당. 송송 뿌려진 쪽파는 크림의 느끼함을 잡아준다. 토핑으로 새우튀김 추가는 필수. 커다랗고 통통한 새우를 한 면만 소스에 살짝 담갔다가 꺼내 먹으면 촉촉하면서도 바삭한 식감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맛.

(리뷰자 주 : 채식 지향으로 선회한지라 먹어볼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어딘지는 궁금하다. 나무? 우동 카덴?)

 

- "서대리, 왜 야유회는 늘 뷔페야? 내년엔 좀 다른 거 먹자."

어머나, 그럼 내년에는 부장님이 준비하시면 되겠네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꾹 누르고 웃었다. 어디서 본 얘긴데 입에 음식물을 넣은 채로 '뒤질래요?'라고 말하면 '드실래요?'처럼 들린다고 한다. 

 

- "아이디 카드를 빌려 달라고요?"

E 과장의 목에는 멀쩡하게 제 아이디 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가 계면쩍은 듯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제가 짜파게티가 먹고 싶어서요. 대리님은 오늘 밖에서 나가서 드셨죠?"

 

- 이제야 이해가 갔다. 회사 구내식당의 점심 식사는 한 아이디 카드당 한 끼만 무료로 배식 받을 수 있다. 오늘 나는 밖에서 돈가스를 먹고 왔으므로 구내식당에 아이디 카드 기록이 남지 않았다. E 과장은 제 몫의 밥을 먹고도 짜파게티를 또 먹고 싶어서 내게 부탁을 해온 것이다. 흔쾌히 목줄을 건네줬다. 그는 점심시간이 15분밖에 안 남았다며 걸음을 서둘렀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기뻐 보였다.

 

- E과장은 규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 회사에서는 이런 그를 보고 경탄과 놀림을 섞어 '칸트'라고 부른다.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웃들이 시계를 맞출 정도로 시간에 엄격했다는 철학자. 그런 그가 밥을 한 번 더 먹기 위해 타인의 아이디 카드를 빌린 것은 꽤 파격적인 시도임이 분명했다. 

 

- 일을 하는데 갑자기 큰소리가 들렸다. 팀장님이 E 과장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보고 날짜가 갑자기 당겨졌는데 그가 그 기간 안엔 불가능하다며, 퀄리티가 보장되지 않은 보고서를 내놓을 수는 없다고 버틴 모양이었다. 

"지금 논문 써요? 회사에는 회사의 타이밍이라는 게 있어요."

팀장님은 분통이 터진다는 듯이 말했다. E 과장은 박사 출신이었다.

"이럴 거면 학교로 돌아가세요 그냥!"

E 과장은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었다.

 

- 2주 뒤 E 과장은 위에서 지시한 날짜에 보고를 했다. 한 사람의 예리한 모서리가 회사라는 망치에 맞아 깎이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 예전부터 기획팀에서 불만이 많았다. 왜 자기들만 매일 실장님과 밥을 먹어야 하냐고. 팀장님들이 모여 가위바위보로 순번을 정했다. 총 네 팀이라서 한 팀만 주 2회 당첨이었다. 다행히 거기에 걸리지는 않았다. 아침에 팀원들과 모여서 미리 대화 지분을 나누었다. 누구는 영화, 누구는 드라마, 누구는 책.

 

- 소문은 금세 퍼졌다. 남자인 E 과장이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우리 부서 최초였다. 반응은 크게 둘로 갈렸다. 부모 도움 없이 애를 둘이나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겠느냐, 용기 있게 나섰으니 응원해줘야 한다는 편이 하나. 분명 속셈이 있다, 개인 사업할 시간 벌면서 여차하면 다시 회사로 돌아올 수 있게 머리 쓰는 거 아니겠냐는 편이 둘. 

 

- 사람들이 E 과장에게 대놓고 물어보지 못해서 은근슬쩍 나에게 돌려 물었다. 그럴 때마다 매번 모른다고 답했다. 나와 그는 최근까지 2년간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그런 걸 터놓고 얘기할 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 "진짜 돌아오실 거예요?"

E 과장은 '정말 몰라서 그러나, 알고도 이러나?' 하며 내 속을 가늠하는 표정이었다. 

 

- 이전에 속해 있던 부서가 잘 나간다는 소문이 돌면 괴로워하고, 자기 결과물을 비판하면 바로 발끈한다. 그의 안에 야망뿐 아니라 열등감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는 걸, 알고 싶지 않았지만 일하면서 알게 되었다. 과연 나만 보았을까. 그도 보았다. 석사라는 스펙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옹졸한 우월감. 유학파에 대한 적개심. 영어를 써야 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느끼는 거의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 

 

- 2년을 둘이서만 일한다는 것은 세 번 정도 바닥을 내보인다는 의미다. 우리가 껄끄러운 이유는 상대가 목격한 자신의 바닥이 싫어서다. 다행히 지하철역에서 우리는 반대 방향이었다. 나의 바닥을 아는 이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덕담을 건넸다. 

 

- D 대리는 내가 회사에서 말을 놓은 몇 안 되는 동료 중 하나다. 취미나 좋아하는 게 비슷해서 곧잘 통했고, 프로젝트 몇 개를 같이 하는 동안 가까워졌다. 지금은 팀이 달라졌지만 가끔 점심을 함께하는 사이가 됐다. 내가 파악한 그녀는 사명감 내지는 소명 의식이 높은 사람이었다. 세상에 공헌하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요즘은 퇴근하고 노무사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일단 1차 시험까지는 회사와 병행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래도 두 가지를 같이 하려니까 많이 힘드네."

 

- 문득 나는 어떤 종류의 충동에 휩싸였다. 너의 기분과 심정에 공감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퇴근길 대중교통에서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와 다시 책상에 앉을 때의 노곤함을 나도 매일 느끼고 있다고. 시간이 부족해서 좋아하는 예능도 드라마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알고 있다고. 야근 때문에 오늘의 분량을 마치지 못할 때 오는 스트레스와 초조함을, 나도 견디고 있다고. 

 

- 회사에는 지금껏 내 작품 활동을 알리지 않았다. 언제 어느 순간 누구에게 약점이 될지 몰라 두려워서였다. 

'말하고 싶다. 즐거운 만큼 많이 힘들다고 말하고 싶어. 공감하고 이해받고 토로하고 싶다.'

 

- "사실 나도..."

D 대리는 내가 회사에서 말을 놓은 몇 안 되는 동료 중 하나였고, 이제 막, 작가로서의 나를 아는 유일한 회사 사람이 되려 하고 있었다. 

 

- 이 책의 첫 단어를 쓴 지 2년이 지났다. 그동안 두 번 퇴사를 결심하고 두 번 단념했다. 여섯 번 정도는 회사가 마음에 들었다. 

 

- 어제는 스스로가 대견하고 오늘은 스스로가 초라하다. 이 불친절한 변덕을 견디며 매일매일 성실히 밥벌이를 하는 자신에게 칭찬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회사 밥맛
정신을 차리고 나니 오후 네 시였다. 여태 점심을 먹지 못해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가까운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려는 나를 선배가 막았다. “이렇게 개처럼 일했는데 아무거나 먹으려고?” 매일 가는 회사, 매번 다른 고난, 매일 다른 ‘회사 밥맛’ 이야기
저자
서귤
출판
아르테(arte)
출판일
20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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