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오윤희] 삼개주막 기담회 - 3

일루젼 2022. 10. 1.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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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오윤희
출판 : 고즈넉이엔티 
출간 : 2022.06.20 


       

조금 아쉽다. 3권으로 압축해서 마무리 짓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청나라로 떠난 사신단의 이야기로 엮인 3권은 이전보다 훨씬 이국적인 분위기의 기담들이었다. 전체를 이어주는 메시지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지금 보이는 것만이 전부도 아니다'라고 볼 수 있는데, 이전까지 조각난 듯이 흩어져있던 기담들이 하나의 중심 주제로 모이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해서 개인적으로는 이번 권에서 '기담'이라는 대주제를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했다고 본다. 여기서 더 이어나간다고 하면 낙원 에피소드는 다소 겉돌게 되지 않을까 싶다. 또한 청으로 떠났던 사신단의 주목적이었던 황제 알현 및 기담 수집이 급작스레 툭 끊어진 채 다시 조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3권은 이전 권들보다 더 이미지가 강조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디선가 모티프들을 차용해 온 듯한 느낌도 있었는데, 워낙 강한 이미지들이 떠올라서 그렇게 느껴진 것 같다. <킹덤>이라거나, <두자춘전>, <화피>, <취화선> 등 각 에피소드마다 연상되는 작품들이 있었다. 저자는 기담 속 삶의 형태들을 통해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바들은 그리 다르지 않음을, 그래서 와닿고 느끼는 것들도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꼬집고 싶었던 모양이다. 몇 백 년이 지났어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여전히 여기 있다는 듯이.  

 

즐겁게 읽었지만, 아마도 여기서 그만 멈출 듯하다. 

끝. 

        

 


   

 

 

- 하지만 창대는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말수가 적은 건 선노미도 다를 바 없지만, 그의 과묵함은 때때로 단단한 벽처럼 느껴졌다. 마치 다른 이에겐 곁을 내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여 더 맘을 열기 어려웠다. 

 

- 문득 연암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갑작스럽게 침묵이 깨지자 다들 자다가 막 깬 듯한 얼빠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영재 선생은 청나라 심양으로 떠날 때 지은 시에서 '그림 같은 배에 올라타 피리 소리, 북소리를 들으며 이별한다'고 했어.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런 묘사가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

 

- "연나라 자객 형가가 진시황을 죽이러 갈 때 심경이랑 비슷할 것 같구나." 
'헝가'도 '진시황'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지 장복이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건 선노미도 마찬가지였다. 연암의 말뜻을 알 수가 없으니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나리께선 이 길이 초행이신가 봅니다."
문득 뒤에서 굵직하고 낮은 음성이 들렸다. 이제껏 조용히 배를 젓던 젊은 사공이었다. 노를 젓는 몸놀림처럼 목소리도 차분한 게 안정감이 있었다. 
"어찌 그리 생각하는가?"
 

- 연암의 물음에 사공이 조용히 웃었다. 
"형가가 진시황을 죽이러 역수(易水)라는 강을 건널 때 오지 않는 친구를 한참 동안 기다렸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친구를 기다린 것이겠습니까. 아마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란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던 게지요."  
말을 마친 사공이 고개를 들어 연암을 바라보았다.
"나리께서 헝가 생각을 하셨다면, 아마도 이번 출행이 처음이라 불안하신 게 아닌가 짐작했습니다."
연암은 살짝 감탄한 듯했다.
"그 말대로일세. 자네, 눈치가 빠른 데다 아는 것도 많군."

 

- "그러고 보니 사공은 참 묘한 직업이군. 매일 강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하니 말일세. 마치 두 세계를 이어주는 안내인 같네." 
사공은 이번에도 대꾸를 안 하고 넘어가나 싶었는데, 별안간 퉁명스럽다 싶게 불쑥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죠. 그런 겁니다, 안내인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함이 배어나는 말투였다. 
“특히 이 강의 안내인은요."

 

- 주매가 태어나 자란 곳은 이웃집 숟가락, 젓가락 개수까지 다 꿰고 있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간밤에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 다음 날 점심 나절이면 죄다 퍼질 정도로 작은 세계. 3년 뒤, 5년 뒤, 10년 뒤 자신의 미래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좁고 폐쇄된 세계. 주매는 그 세계가 너무나 갑갑했다. 정(情)이란 본성을 내걸고 타인의 삶에 막무가내로 침범하는 무례함도, 작은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부 세계에 대한 배타성도 주매의 목을 옥죄는 것 같았다.

 

- 그렇게나 그리던 강 건너편 세상이었지만, 막상 직접 가보고 나니 실망스러웠다. 거기라고 별 다를 바 없었다. 저와 비슷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이 비슷비슷해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비슷비슷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겉은 다 달라 보여도 사람 사는 건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주매는 허탈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멀리서 동경만 하는 게더 나았을 듯 싶었다. 그때는 강 건너편 상상 속 세계가 팍팍한 현실을 견디는 버팀목이 돼줬는데. 어쩌면 꿈은 이뤄지지 않는 편이, 언제까지고 그저 꿈으로 남아 있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강을 오가는 날들이 계속될수록 주매는 자신이 뿌리 없는 식물 같다고 느꼈다.

 

-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불그레한 저녁노을이 잠기면서 그 자리에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초가을에 접어들어 밤이슬을 머금은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선착장 주위를 에워싼 억새풀이 쌀쌀한 가을 바람에 이따금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스산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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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신도 예전엔 사람이었어요."
선노미가 쩔쩔매는 장복에게 말했다. 그가 흥분해 갑자기 벌떡 일어서기라도 하면 배가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릴까 봐 걱정되었다. 그동안 내린 비로 수위가 많이 높아졌을 텐데 배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러면 다 같이 강물에 빠져 꼼짝없이 물귀신이 되는 수밖에 없다. 그전에 어떻게든 장복을 다독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 달빛이 잔잔한 수면 위로 일제히 쏟아졌다. 거울처럼 잔잔한 수면이 달빛을 튕겨내며 반짝반짝 빛났다. 
휘익 휘익.
다시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한 강물 속이 밑바닥까지 똑똑히 들여다보였다. 마치 달빛이 강바닥을 비추는 것처럼. 
검푸른 수표면과 달리 깊은 강물 안은 화창하게 갠 맑은 하늘처럼 투명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강바닥에 뿌리내린 물풀들 사이로 형형색색의 물고기가 이리저리 헤엄쳤다. 

- 생전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에 주매는 입이 딱 벌어졌다. 아, 날마다 오가는 강물 속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구나. 정말 아름답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강바닥 곳곳에 무언가가 드문드문 깔려 있었다.

 

- "목적지를 알면 데려다주는 일은 쉽지.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원하는 목적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넋은 안내인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소." 
 

- 사신들을 따라 청나라까지 다녀오는 역관에게 따로 사례비가 지급되지 않는다. 대신 조정에선 청과 인삼 거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조선 인삼은 청에서도 최고로 치는 특산품이라 잘만 거래하면 꽤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 "여가탈입(閭家奪入) 때문이죠."
구복이 씁쓸하게 말했다.
"여가탈입이라고요?"

 

- "권세 있는 양반이 백성이 사는 집을 부당하게 빼앗아버리는 거지."

 

-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구복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달리 갈 곳이 없었으니까."

 

- "당연한 일이지. 절박한 상황이면, 때로는 너무나 명백한 경고를 무시하기도 한다네."

 

-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 집이 이상하다는 건 알았지만, 모두 무시했죠. 위험 신호가 보이는데도 보이지 않는 척, 들리는데도 들리지 않는 척, 사냥꾼한테 도망치는 꿩이 바닥에 제 얼굴을 처박는 것처럼 말입니다."

 

- 장안에 유행하는 소설을 필사하고 빌려주는 세책 장수 일을 하면서 그럭저럭 먹고 산다고 했다. 정한과 수호는 원래라면 양반가 자제로 곱게 자랐어야 했다. 하지만 기울 대로 기운 집안은 그들 아버지 대에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은 대를 거치면서 야금야금 줄었고, 급기야 먹고 살 일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고민하던 아비는 어쩔 수 없이 돈 많은 중인에게 양반 문서를 팔고, 중인 신분으로 전락했다. 

 

- 그러나 막상 장사를 하려니 그놈의 양반 근성이 뼛속 깊이 박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마음 먹어도 차마 시장통에서 젓갈 따위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다행히 지인 중 하나가 수호에게 세책 장수일을 권했다. 소설 읽는 걸 좋아하는 데다, 서체가 유려한 수호한테 딱 맞는 일이라면서. 수호로서도 그 제안이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책을 가까이할 수 있으니 그것만이라도 어디냐 싶었다

 

- 비가 며칠째 추적추적 내렸다. 압록강에서 발이 묶였을 때처럼 무지막지한 장대비가 아니라 끊어질 듯 한없이 이어지는 가느다란 빗줄기였다. 지붕 위로, 섬돌 위로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 말이 안 통해 연암이 손짓 발짓을 하는데 보기 답답했던지 만복이 통역을 자처했다. 국경을 자주 넘나들다 보니 웬만큼 청나라 말을 할 줄 알았다. 
"인형처럼 예쁜 사내를 데려오라시더니 정말이네요."

 

- '두창(痘瘡)' 혹은 '마마'라 불린 천연두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가장 무서운 전염병 중 하나였다. 병은 신분 고하도 가리지 않았다. 

 

- 천연두에 특히 취약한 건 어린아이였다. 걸리면 어른에 비해 목숨을 잃을 위험이 높고, 낫더라도 얼굴에 읽은 자국이 남았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천연두를 '마마신'이라 부르며 신처럼 모시기도 했다. 그래서 자식이 천연두에 걸리면 부모도 높임말을 썼다. 아이 몸 안에 마마신이 기거한다 여겼기 때문이다. 

- 질투가 심한 마마신은 다른 신을 섬기는 걸 몹시 싫어하는지라, 천연두 환자가 있는 집에선 제사를 건너뛰는 것도 묵인됐다. 퇴치 굿을 할 때도 감히 '퇴치'라는 말을 쓰지 않고 '마마신 별송굿'이라 부르고, 마마신이 무사히 타고 떠나시도록 환자 방 앞엔 짚으로 말을 만들어 바쳤다.

 

- 이런 정성도 마마신의 발걸음을 완전히 묶을 순 없었다. 어쩌다 한 번씩 기어이 마마신이 찾아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모두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했다. 일단 마마신이 방문한 집은 검은 천을 매단 새끼줄을 문 앞에 걸어 환자가 있음을 알리고, 그 가족들은 바깥출입을 삼가야 했다. 

 

- 춘삼은 이미 절망한 상태였다. 왜 하필이면 우리 집이냐는 한탄,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낫더라도 얼굴에 처참한 흔적을 남기고 갈 마마신에 대한 원망까지. 

 

- "환자가 나왔으니 먼저 마을에 알려야지. 이제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해." 
춘삼이 어렵사리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새끼줄에 검은 천을 매달아 대문 밖에 내걸었다. 검은 천을 본 마을 사람들이 지나다 뒷걸음질 쳤다. 이제 동네에 소문이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각오 단단히 해야 해.
효순에게 했던 말을 속으로 되뇌며 춘삼은 아픈 아들이 누운 방으로 돌아왔다.

 

- "자네들한테는 미안하네."
삼수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마을을 위해 희생하는 거라 생각하게."

- 효순이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문득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는 어쩐지 벽에 등을 기대고 허공만 쳐다보았다. 설마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가? 믿을 수 없었다. 
"혹시...?"
다 알고 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효순은 무서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춘삼은 아내가 할 말을 짐작했는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마을을 지키려면 때로는 희생자도 나오게 마련이지. 하지만 그 덕분에 마을 전체가 안전하게 유지되는 거다." 
그러니 이 일은 잘못이 아니라고,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아버지는 강조했다.
"알겠니? 오늘 네가 들은 얘기는 절대 다른 데서 하면 안 돼."

"왜요?"
"마을보다 저 자신이 더 중요한 이기적인 사람들이 꼭 나오기 마련이니까. 그들은 행여나 자신이 희생자가 될까 봐 규칙에 반대할 거야. 그러면 마을은 무너지고 만다.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돼." 

 

- "모난 돌은 정을 맞는다고들 하지." 
뚱딴지같은 소리에 만복과 선미가 그를 돌아봤다.
"용주는 모난 돌이었어. 남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권위에 도전했으니까. 이르든 늦든 정을 피하기 어려웠을지 몰라."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그분은 저희 가족에겐 생명의 은인입니다."
연암이 용주를 비난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연암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를 헐뜯는 게 아니야. 나라에 그런 모난 돌이 더 많았더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으니까."

 

- 남들이랑 엇비슷하게 살아야지. 혼자서 너무 튀면 적을 만들기 쉬워.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튀는 인생을 살겠다고 작정한 건 아니었다. 다만 남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걸 자신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다. 

- 어린 시절, 연암이 다녔던 서당에 수재(秀才)라 불리던 또래 친구 경준이 있었다. 연암도 글 짓는 데는 자신이 있었지만, 개성이 두드러진 그의 글은 호불호가 갈리곤 했다. 반면 경준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썼다. 스승마저도 '저 아이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네' 하고 탄복할 정도였다.  

 

- 경준은 문장만 빼어난 게 아니었다. 한번 보고 들은 건 그대로 암기할 수 있는 비범한 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다들 외느라 힘들어하는 어려운 경전을 경준은 세상에 이렇게 쉬운 일이 또 있느냐는 듯한 번 보고 줄줄 암기했다.
타고난 천재로군.
연암은 때로는 경준을 부러워하고, 때로는 시샘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경준과 벗이 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느꼈다.
"그래 봤자 과거 시험도 못 보는데 다 무슨 소용이람." 

언젠가 경준의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연암은 그가 서얼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 안마당 한쪽 구석에 작은 텃밭이 눈에 띄었다. 엉성한 울타리 안으로 여러 종류 꽃이 소담하게 피어 있었다. 소담스러운 수국은 잎마다 이슬이 젖어 반들거리고, 눈에서 뽑아낸 것처럼 새하얀 옥잠화는 꽃잎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다만 석류꽃은 비바람을 이기지 못했는지 빗물로 질척거리는 진흙 땅바닥에 붉은 꽃잎을 점점이 떨구었다. 

(리뷰자 주 : 모두 7-8월 경에 피는 꽃들이다. 이렇게 계절감을 묘사하는 것도 매력적이다.)

 

- 저 멀리 버드나무 아래 수레가 구름 떼처럼 모여 있었다. 
원거리를 오가는 장사꾼들이 잠시 짐을 내려놓고 쉬는 곳인 듯했다. 나무 뿌리 위에 걸터앉아 웃통을 벗고 부채질하는 사람, 술병째로 나발을 불고 있는 사람, 막간을 틈타 골패 놀이를 하는 사람, 각양각색 천태만상이었다. 

 

- 거리엔 나귀가 끄는 태평차(太平车)가 여러 대 지나고 있었다. 한 태평차 안에서 여자들이 주렴을 걷고 내리는 게 보였다. 나이 든 부인과 젊은 부인. 모두 꾀꼬리 빛깔 푸른 윗옷에 주황색 바지를 입고 옥잠화, 패랭이꽃, 석류꽃으로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보아하니 한족 부인들인 것 같았다. 
"야, 여긴 정말 별세계네." 

 

- "너무 걱정하지 마. 넌 젊어서 하녀로 데려갈 사람이 있을 거야." 
한실이 하얗게 질린 향을 보고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한실은 함께 끌려오는 동안 친해진 나이 지긋한 아낙이다. 원래 양반집 종살이를 했다는 그녀는 눈치가 빠르고, 보고 듣는 걸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어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았다. 

 

- 박명원은 망연자실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새 가족이 생기리라 기대하며 가슴 부풀었는데 아내와 아이가 한꺼번에 저세상으로 가고 나니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를 더욱 힘들게 했던 건 사람들 입방아였다. 옹주를 홀대했다더라, 측실을 끼고도는 바람에 옹주가 임신 기간 내내 마음고생이 심했다더라, 그 때문에 옹주가 난산까지 가게 됐다더라. 그런데도 남편이란 작자는 출산 때도 나 몰라라 기방에서 술만 마셨다더라... 

- 박명원은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들에 경악했다. 나중에 가만 보니 거짓 풍문을 키운 건 악의만은 아니었다. 분명 소문을 퍼뜨린 사람 중 몇은 임금이 끔찍이도 아꼈던 옹주와 결혼해 '금성위(錦城尉)'로 봉해진 자신에게 질투와 시기심을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악의 없이 뜬소문에 가담했다. 심심풀이 소일거리로, 혹은 남들이 다 하니까 저도 따라서. 
그 사실을 깨달은 박명원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 한낮의 성경 거리는 시끌벅적했다. 식당과 주점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고, 사람들이 요란하게 떠들며 식사를 했다. 식당은 외양이 조선과 조금 달랐다. 대개는 붉은 난간에 푸른색 격자무늬 창문이 달려 있었다. 갖가지 무늬가 그려진 기둥은 분칠한 벽과 대비돼 더 화려해 보였다. 가게 안 층층 선반엔 똑같은 모양의 놋쇠로 된 술통이 여러 개 진열돼 있는데, 술통마다 술 이름을 표시한 붉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기다란 탁자에 접이식 의자를 놓고 둘러앉은 사람들은 채소나 고기 볶은 요리를 두고 술병을 기울였다. 

- 지필묵이나 잡화 같은 걸 파는 가게도 장사가 한창이었다. 선노미는 걸으면서 여러 번 귀를 후볐다. 아까 들었던 대포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웅웅 울렸다. 여기선 아침에 일어나 점포 문을 열 때 으레 종이 딱총에 불을 붙여 가게 문 여는 소리를 낸다고 했다.

 

- 덕분에 하인들은 낯선 거리를 신나게 쏘다녔다. 말은 안 통했지만, 옆 탁자 손님들이 먹고 있는 걸 손으로 가리켜 계란 볶음밥을 주문해먹고, 나무 아래 노점상에서 여섯 푼 주고 음료수도 한 사발 사서 나눠 마셨다. 예전에 역관 홍명복이 '양매차(楊梅茶)'라고 일러준 그 음료는 소귀나무 열매를 볶아 만든 것이라는데, 맛이 새콤달콤했다. 잘 먹고 난 일행은 부른 배도 꺼트릴 겸 시내 관광에 나섰다. 

 

- 한 아이가 손에 든 열매를 반으로 쪼개 선미에게 먹으라는 듯 내밀었다. 나리들이 그걸 가리켜 '빈랑'이라는 야자열매라고 했던 것이 얼핏 기억났다.

 

- 제일 대장 격으로 보이는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해서 쳐다보던 셋은 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은 이곳까지 오는 도중 줄곧 들었던 '청심환 주세요'였다. 조선 청심환이 효험이 좋다는 게 알려져 청나라 행인들은 조선 사신만 보면 그 말부터 입에 올렸다. 이미 다녀온 사신들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어 박명원에게 가짜 청심환을 넉넉히 가져가라고 조언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 밤에 본 성경의 풍경은 낮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번화가 거리 양쪽에 늘어선 점포는 이미 모두 문을 닫았고, 문밖에는 청색, 홍색, 주황색 등 색색의 등이 불을 밝혔다. 양의 뿔을 고아서 만든 투명하고 얇은 막을 씌운 등으로, '양각등(羊角燈)'이라 불린다고 홍명복이 설명해주었다. 
"사실 양각등 불이 켜진 건 저도 처음 봅니다. 한밤중에 여길 돌아다닌 적이 없어서요."

(리뷰자 주 : 양각등은 현재 전해지는 실물은 없지만, 조선에서도 썼던 듯하다. 괘등의 다른 말이라고 한다.) 

 

- 그걸 계기로 화제는 청나라 기담으로 흘렀고, 장한칭이 청나라 기담집 '요재지이(聊齋志異)’중 한 편인 ''화피(画皮)' 이야기를 연암에게 소개해줬다. 왕씨 성을 지닌 서생이 미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그 미인의 정체는 미인 얼굴 가죽을 쓴 요괴였다는 내용이었다. 이야기 속 요괴는 사람 얼굴이 그려진 가죽을 쓰고 때로는 노파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도사가 되기도 하며 사람을 현혹한다고 했다.

 

- 절대 남의 시선을 안 끌 평범한 남자라니. 화피의 주문은 쉽지 않았다. 차라리 눈에 띄는 미녀를 그리라면 그게 더 쉬웠다. 아니면 반대로 깜짝 놀랄 만큼 못생긴 추녀거나 하지만 평범하다는 건 특징이 없다는 말이고 그건 가장 구현하기 어려운 특징이었다.

 

- 벽에 걸린 저 얼굴을 그린 사람이 쓰던 걸까? 안핑은 생각을 가다듬고 머리에 떠오르는 얼굴을 하나씩 종이에 그렸다가 찢고, 그렸다가 찢기를 반복했다. 그러길 몇 차례나 반복하는 동안 평범한 남자의 얼굴이 점점 더 뚜렷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 여기서 굴욕적인 세월을 보내는 동안 계속 생각했소. 어쨌든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고. 살아만 있으면 희망이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지. 

- 돌이켜보면 나는 겁쟁이였소. 몇 번인가 탈출에 실패하자 그냥 안주하고 말았지. 현실을 바꿀 의지는 없으면서 상황이 나아지리라 헛된 꿈을 꾼 거였소. 

- 당신도 알겠지만, 화피의 명령을 따르는 건 세상에 죄를 짓는 일이오. 나는 세상에 죄를 짓는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죄를 짓고 있었소. 내 존엄성을, 신념을, 화가로서 추구해 왔던 예술 세계를 스스로 죽이고 있었으니까. 

 

- 탈출하려면 당신 눈도 믿지 마시오. 눈에 보이는 걸 믿지 마시오. 요괴가 변장한 얼굴에 속지 마시오. 화피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것 뿐이오. 

 

- 안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에서 여자의 형상이 안 보이니 오히려 모든 게 분명하게 보였다. 젊은 여자 홀로 폭우를 뚫고 이런 외진 산속에 올 리가 없다. 그리고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단 말인가! 그렇다, 저 여자는 요괴가 틀림없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화피가 변장을 한 것이다. 

 

- 어머니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서 집에 돌아가자꾸나. 네가 좋아하는 요리들 해주마."

안핑은 그리운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막 다리를 움직이려는 순간, 편지에서 읽었던 글귀가 다시 경고처럼 떠올랐다.

당신 눈을 믿지 마시오. 

 

- 휘이이잉. 
모든 게 끝이 나자,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이 상처 난 안핑의 두 눈을 어루만졌다.
 

- "물론 눈에 보이는 풍경 같은 건 그릴 수 없었지요. 대신 할아버지께선 마음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그리셨습니다."

보이는 것을 찍어낸 것처럼 정교하게 그리는 기술은 사라졌지만, 대신 표현력이 깊어졌다. 안평의 상상이 빚어낸 산수화와 인물화는 어딘지 모르게 묘한 울림이 있었다. 마치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 것 같았다. 

 

- "저도 타고난 재능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 같은 표현력은 나오지 않더군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지만, 눈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걸 방해하는 것 같았죠." 

 

- 천장에는 벌거벗은 어린아이들이 색색으로 채색된 구름 위에서 뛰놀고 있었다. 발그레 화색이 도는 아이들 살결은 만져보면 따뜻한 온기가 돌 것 같고 손마디와 종아리는 살이 포동포동 쪄서 마치 끈으로 잘록하게 묶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공중에 매달린 것 같은 아이들 등엔 작은 날개가 달려 있었는데, 제법 우량한 아이들 체중을 견디기엔 턱없이 작아 보였다. 
"아악!"
문득 천장을 올려다본 젊은 만주족 여자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나이 지긋한 만주족 부인은 떨어질 것 같은 아이를 받치려는 듯 제 치마폭을 확 펼쳤다. 
"허허, 이렇게나 사실적인 그림이라니!"

연암이 감탄해 중얼거렸다.
 
- 선노미는 이 모든 일을 감내하기엔 아직 어렸다. 그 일이 벌어지는 동안 연암이 곁에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만이 겪은 지옥이라는 게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누군가 잡아주지 않는다면 이대로 땅속으로 꺼질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서 버텨야 할지도 몰랐다.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려야 했다. 두 사람이 자신의 한쪽 팔씩 잡아 일으켜주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게 고백이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다면 그게 신이든, 누구든 자신의 말을 먼저 들어주어야 했다. 선노미는 그렇게 두 사람에게 팔을 내밀기로 했다. 간신히 그의 입이 열렸다. 

- "불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행운이었죠."
어떻게든 위로하려 한 말에 만춘은 오히려 미소를 띠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일부러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 하는 말 같았다.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행운이었다고. 
"처음엔 다들 절망했습니다. 목숨을 끊는 이도 있었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앞이 안 보이는 게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행복이라는 걸 알게 됐답니다." 

 

- "사람의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난데없는 질문을 받자 연암이 얼른 대답을 못 하고 얼버무렸다. 대답은 만춘이 해주었다.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이죠. 왜 내 집은 저 사람 집보다 작을까, 왜 내 얼굴은 저 사람만큼 아름답지 못할까, 왜 내가 가진 건 이웃보다 적을까, 하면서요."

 

- "하지만 앞이 안 보이니 아예 그런 비교를 할 필요가 없지요." 

 

- "처음엔 두 눈 멀쩡하던 때와 비교해 적잖이 불편했지요 그러나 차츰 익숙해지다 보니 사는 데 늘 눈이 필요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더군요. 이젠 딱히 힘들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눈이 멀고 나서야 깨달아지는 게 있었습니다. 세상엔 아름다운 것들보다 차라리 안 보여서 잘됐다 싶은 흉한 것들이 더 많다는 걸 말입니다." 

- "산매탕(酸梅湯)이라고 합니다. 조린 매실에 꿀을 넣고 끓였다가 식힌 것이죠. 여름철 원기회복에 좋다고 하니 드셔 보시지요."

(리뷰자 주 : 산라탕은 먹어본 적이 있는데, 산매탕은 어떤 식감일지 궁금하다.)

 

- 소현세자는 눈이 맑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물을 삐딱하게 보는 법이 없었다. 열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이 본 것을 편견 없이 받아들였다. 생김새도 낯설고 생각하는 것도 다른 외국인 선교사가 하는 말도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 문득 조금 전 소년이 했던 이야기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눈먼 자들이 사는 마을 자신들이 꼭두각시가 됐다는 자각은 하지 못한 채 낙원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을 사람들. 어쩌면 소현세자가 십여 년 만에 고국에 가서 맞닥뜨린 현실도 그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세상의 변화는 전혀 보지 못한 채 자신들이 속한 작은 세계가 전부고, 최고라며 생각하고 살았던 조정 대신들은 넓은 세상을 구경한 소현세자에겐 어쩌면 맹인들 같아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개주막 기담회 3(케이팩션)
한국 전통 기담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삼개주막 기담회』의 세 번째 이야기. 삼개주막에서 만난 괴짜 선비 박지원과 선노미가 이번엔 청나라 사행길에 올랐다. 의주에서 시작된 그들의 여정은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 통원보를 지나 연경으로 이어진다. 실제 박지원의 청나라 사행길을 기록한 ‘열하일기’를 모티브로 한 소설은 실제 여정에 픽션인 기담을 절묘하게 결합해 읽는 재미가 더욱 쏠쏠하다.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에 오른 사절단 일행은 뱃사공으로부터 첫 번째 기담을 듣는다. 선노미는 너무 무서운 나머지 ‘청나라에 괜히 따라왔구나……’ 후회한다. 청나라 여행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토록 오싹한 기담이라니, 뒤이어 이어질 선노미와 괴짜 선비의 발걸음이 몹시도 기대된다. 얼굴을 제멋대로 바꾸는 ‘화피’ 요괴부터, 눈이 아플 정도로 새빨간 핏빛 비단에 얽힌 저주까지. 조선땅을 넘어 청나라에서 펼쳐지는 더 새롭고 더 기이한 이야기들이 기다린다.
저자
오윤희
출판
고즈넉이엔티
출판일
2022.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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