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재훈
출판 : 한빛비즈
출간 : 2022.04.20
매력적인 데포르메. 간략하게 그린 것 같지만 인체 구조에 대한 이해가 잘 녹아든 그림들이다.
원전을 토대로 작가 자신의 이해를 덧씌웠다는 <올림포스 연대기>는 이전의 단권 <그리스 로마 신화>와는 결을 달리한다. 각각의 에피소드에 중심을 두기보다는 전체적인 흐름과 계보를 정리하는 쪽으로 방향성을 잡은 것. 물론 단권으로 출간된 만큼 방대한 내용을 어느 정도 축약/윤색한 부분은 있지만 충분히 작가의 견해상 그렇게 갈릴 수 있는 부분들이라 본다.
사실 이 책을 지금 읽을 생각은 없었는데, <말할 수 없는 소녀>를 읽고 코레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던 도중에 눈에 띄어 충동적으로 선택했다. 막상 코레(페르세포네)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은 함정.
그리스 로마 신화는 굉장히 인간적인 신들에 관한 이야기들임에 동의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럼에도 알레고리적인 해석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메티스가 제우스에게 흡수되어 그의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되었다는 부분은 <의식의 기원>에서 다루었던 신화 시대 양원성의 목소리와도 연결지어 볼 수 있다. 현대인들에게 머릿속의 목소리는 흔히 정신 질환의 증상으로 이해되곤 하지만, 사실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생각이 '목소리'의 형태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또, 행성을 상징하는 신들의 올림포스 등장 순서 또한 토목화금수로 기본적인 칼데안 오더와 같은 흐름이다. 루미너리와 세외 삼행성은 좀 더 생각해 볼 부분이 있겠지만 <신들의 계보>의 순서와 연결은 큰 줄기로 보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렇게 혼자만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더듬어가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기분 좋게 읽었다.
- "다른 신들처럼 티탄의 아들이었던 제우스만이 시작과 끝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남성이었지만 불멸의 님프이기도 했다. 그래서 넘쳐흐르는 고독 속에서 제우스는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집어삼키려고 위협을 가했던 아버지 크로노스의 아들로 태어나기 이전의 삶을 보았다. 제우스는 그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왜 그렇게 흉포해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로베르토 칼라소,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의 결혼>
- "두 번째로 그분께서는 윤이 나는 테미스와 결혼하셨고, 그녀가 호라이 여신들을 낳으니, 이들이 필멸의 인간사를 관장한다. 오케아노스의 딸로 외모가 사랑스러운 에우리노메는 그분께 볼이 예쁜 3명의 카리테스 여신들을 낳아주었다. 그분께서는 또 많은 것을 양육하는 데메테르의 침상으로 가시니 그녀는 흰 팔의 페르세포네를 낳았다. 제우스께서는 또 머릿결이 고운 므네모시네를 열망하셨다. 그녀한테서는 황금 머리띠의 무사이 여신 9명이 태어나시니, 그분들에게는 축제와 노래의 즐거움이 마음에 드셨다."
-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 그리스 신화는 어떤 원전을 언제 읽느냐에 따라 느껴지는 감성의 차이가 확연합니다. 어린 나이에 주로 접하는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을 때는 그것이 편저자가 발췌하고 엮은 내용이라는 걸 의식하지 못한 채,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러 신들이 펼치는 역할극과 영웅들의 이야기에만 몰입했습니다. 신들의 면모를 통해 자기 안에서 발굴하고픈 역량을 찾아가며 갖은 역경을 이겨내는 영웅들의 모습에서 인내와 용기를 배우면서 말이죠.
- 다음으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 비극과 호메로스의 서사를 통해 좀 더 적나라한 모습의 그리스 신화를 접했을 때는 이면에 도사렸다가 출몰한 인간 본성의 부조리를 체험했습니다. 은유와 알레고리라는 얇은 베일을 걸친 채 사춘기 소년의 예민한 부위를 건드리는 예술가에게 하릴없이 약한 감성을 유린당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때 신화에서 받은 느낌은 한마디로 말해 "숱한 신과 영웅들의 당혹스러운 일대기에는 지당한 도덕률도, 일관된 맥락의 교훈도, 그 흔한 권선징악의 규칙도 없다"였습니다.
- 이렇듯 우리가 문학, 예술, 역사, 철학을 막론하고 세계 문화를 향한 창을 열고 있는 한 그리스 신화의 감성에 젖은 습한 공기를 피할 방도는 없습니다.
- 헬리콘산 무사이 여신들로부터 직접 신들의 계보를 전해 들었다고 너스레를 떨며 <신통기>를 작성한 헤시오도스와 오비디우스, 아폴로도로스 같은 초기 기록자들의 원전을 대조해가면서 이야기의 조각들을 맞추다 보니, 전에 보았던 편집본과 문학작품과 영화들이 각색해서 알려준 것과 다른 종류의 그리스 신화 여정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되었습니다. 원전의 토대 위에 작가 특유의 주관을 얹어 새로운 신화의 길을 닦은 걸로 정평이 난 것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수작은 앤드루 달비의 <디오니소스>와 로베르토 칼라소의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의 결혼>이었습니다. 여러 평론가들은 이 수려한 작품들을 그리스 신화에 대한 독창적이고 새로운 해석이라고 했지만, 책장이 닳도록 반복해서 읽고 메모하며 내린 결론은 그리스 신화를 다룬 어떤 콘텐츠보다 충실하게 원전의 심연으로 침잠해 들어가 그 안에 가득 찬 무의식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인 걸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 신화의 실상은 인간이 성장기에 맞이하는 사리 분별의 관문을 넘지 못해 차마 제도의 언어로 구현하지 못하는 욕망의 배앓이라는 것을, 그래서 신화는 지엄한 신의 보편적 계명과 달리 정형화된 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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