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백승만]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 생화학무기부터 마약, PTSD까지, 전쟁이 만든 약과 약이 만든 전쟁들

일루젼 2022. 10. 13.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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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백승만
출판 : 동아시아
출간 : 2022.09.13


       

 

나는 지난 서포터즈 활동 도서로 <아주 구체적인 위협>을 골랐었다. 이 책도 흥미로워 보였지만 약대 교양 강의를 기반으로 한 책이라면 이미 학부 때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른 내용이 있을 것 같지 않아 좀 망설였는데, 최근 펜타닐 사태에 관해서도 다뤄졌나 싶어 따로 구해 읽어보았다. 

 

해당 내용은 없었지만 무척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의 강점은 '재미있다'는 점이다. 딱딱할 법한 내용이지만 소설처럼 인물을 강조한 일화로 설명하거나, 조금 더 넓은 시간 축에서 그 발견이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에 '그게 어쨌다는 거지?'라는 의문은 생기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해당 강의가 전공생 대상이 아닌 일반교양 강의가 아닌가 싶다. 학부 강의는 대체로 기반 지식을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진행되기 때문에, 이렇게 '궁금해 할 법한' 내용을 풀어가는 식으로 진행되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그 해석들은 저자의 시각이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타인의 시선으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경험을 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기에, 그것을 '자신의 것'과 구분해 바라볼 수만 있다면 독서는 유익한 점이 많다고 본다. 한 분야에 대해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자신도 모르게 한 저자의 관점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후반부는 아무래도 연구가 많이 진행된 내용들이다보니 여타의 교양서들과 겹치는 흐름이 있었지만, <서양의학사>나 <공기의 연금술>, <의미, 의학과 미술 사이> 같은 책들에 비해 확연히 읽기 쉬운 문장과 예시들로 쓰인 책이므로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추천한다. 

 

즐겁게 읽었다. 

 

 

 


 

 

테러범들은 갈수록 강력한 무기를 찾는다. VX라고 예외는 아니다. VX만 해도 충분히 위험한 독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더 강력한 독을 연구했다. 러시아에서 이런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망명 과학자들을 통해 알려졌는데, 그들은 이것을 '노비촉 novichok'이라고 불렀다. 노비촉은 1980년대에 개발되어 암암리에 사용되었다. 이 노비촉 때문에 2020년 다시 한번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의 야권 지도자이자 블라디미르 푸틴 Vladimir Putin의 정적, 알렉세이 나발니 Alexei Navalny의 중독 사건이다.  

나발니는 2020년 8월 20일 러시아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톰스크 Tomsk에서 모스크바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국내선이지만 러시아 영토가 큰 만큼 3시간 정도 소요되는 비교적 장거리 노선이었다. 그런데 비행기 출발과 동시에 나발니는 불편함을 느끼고 구토를 시작하더니 곧바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비행기가 이륙한 지 이제 갓 1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앞으로 2시간 50분을 더 가야 비행기가 착륙하기 때문에 죽음의 비행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긴급 상황에 따른 프로토콜이 있었다. 기장은 긴급 상황임을 승객들에게 알리고 가장 가까운 공항인 옴스크 Omsk에 부랴부랴 착륙했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응급의료진에게 나발니를 인계했다. 나발니가 의식을 잃은 채로 옴스크의 병원에 긴급 이송된 건 그가 쓰러진 지 2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당시 그의 증상이 잘 기록되어 있는데, 요약하자면 엄청나게 많은 양의 땀을 흘리고 있었고 호흡이 불안정해서 인공호흡기를 통해서만 숨 쉴 수 있었다. 심장이 너무 느리게 박동하는 것도 문제였다. 눈동자 역시 빛에 반응하지 않았다. 체온은 섭씨 34도였다. 

전형적으로 자율신경계가 되었을 때의 증상이며, 더 엄밀히 말하면 부교감신경계가 과활성화된 상태였다. 그는 무언가에 중독되었다.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그의 가족은 러시아 한복판에서 병원 진료를 받을 수는 없다며 독일 의료진을 수소문했다. 다행히 독일 의료진이 요청에 응했고, 그때까지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연명하고 있던 나발니를 베를린으로 이송해 치료를 시작했다. 그가 쓰러지고 31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최초로 처방한 해독제는 오비독심 obidoxime이었다. 이 물질은 앞서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 사건에서 해독제로 활약했던 프랄리독심과 유사한 물질이다. 1995년 일본이나 2020년 독일이나 사용하는 약물은 비슷했다. 다만 나발니는 조금 더 정성스럽게 치료를 받았다. 우선 혈액 검사를 통해 오비독심과 같은 농약 해독제는 그다지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아트로핀을 투여했다. 환자의 경과를 지켜보면서 열흘간 아트로핀을 지속적으로 투여하자 드디어 나발니의 의식이 돌아왔다. 체온이 올라가자 타이레놀 Tylenol과 같은 해열제를 처방했고, 마약류 진통제를 추가 처방하면서 통증을 줄여나갔다. 이후 나발니는 빠르게 정상으로 회복해 갔다.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 더 덧붙이고 싶은 말들이 길어 따로 발췌를 정리했다. 

 

우선 여객기의 회항에 관한 부분이다. 이는 케이틀린 도티의 저서에서도 언급된 내용으로, 기내에서 응급 환자가 발생했으나 처치가 불가능할 경우 비행기는 기장의 판단 하에 출발지로 회항하거나 가까운 공항으로 응급 착륙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환자가 사망한다면? 승무원들은 담요로 그 또는 그녀를 잘 감싸준 뒤 그대로 비행을 계속할 것이다. 당황스러울 수 있겠지만, 괜찮다. 어차피 짐 칸에는 운구 중인 또 다른 시신이 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절대 그런 일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차분히 심호흡을 한 뒤 애도의 마음을 보내자. 

 

나발니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나발니는 푸틴 주변인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반부패 운동으로 유명한데, 이 중독 사건 이전에도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받았었다. 그가 비행기 안에서 의식을 잃은 당시에는 사용된 약물이 무엇인지는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노비촉은 스크리팔 사건으로 이미 유명세를 떨친 러시아의 독극물질이었다. (참고로 VX는 김정남 사건에 사용되었다)

 

해당 도서의 핵심 주제는 '약물'과 '전쟁'이므로 해당 사건이 간략하게 요약해 언급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사건의 핵심은 나발니가 '어떻게' 독일로 이송될 수 있었는가가 핵심인, 무척 긴박하고 아슬아슬한 사건이었다고 본다.

 

나발니의 상황을 알게 된 독일 측은 메르켈 당시 총리가 직접 푸틴에게 그의 인도를 요청하려 했으나 핫라인이 닿지 않자, 핀란드 대통령을 통해 크렘린 궁과 연결된 통신에서 이송을 승인받는다. 이때 러시아와 연결이 되지 않자 응급 상황임을 확신한 독일은 의료용 항공기를 이미 러시아를 향해 띄운 뒤였다. 이후 도착한 독일 의료진과 옴스크 측 의료진 사이에서도 환자의 이송을 두고 실랑이가 벌어졌으나, 이미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는 설명 끝에 가까스로 22일 오전 8시경에 독일 베를린으로 비행기를 띄울 수 있게 된다. 이후 나발니는 18일 만에 의식을 회복한다. 기적적인 생환이었다. 

 

그의 상태와 관련해 독일 의료진들은 조심스럽게 독극물 중독 가능성을 주장하며 의심 약물로 노비촉을 거론했으나, 러시아 측의 공식 답변은 '아니다'였으며 나발니의 혼절은 췌장염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어느 정도 신체 기능을 회복한 나발니는 '나는 두렵지 않다'는 발언을 남긴 후 독일 및 기타 EU 국가들의 망명 제안을 거절하고 러시아로 복귀한 뒤, 귀국하는 항공편에서 내리자마자 체포되었다. 이것이 이 사건의 '요약된' 부분들이다. 

 

 

 


 


   

 

"The dose makes the poison" 
(Latin: dosis sola facit venenum - Paracelsus)

 

 

- 혈액 연구의 예에서 보듯이 전쟁과 질병, 의약품은 잘 맞춘 세 바퀴 물레방아처럼 엮여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는 꼭 혈액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제국주의 시절 아프리카 탐험가에게 지급된 기생충약, 제2차 세계대전 중 개발된 페니실린, 병사들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사용된 마약류 각성제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모르핀은 남북전쟁 당시 진통제로 더없이 소중한 약이었지만 정작 모르핀의 원료인 아편은 아편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스페인 독감은 제1차 세계대전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역설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전쟁과 질병은 끊임없이 교류하며 인류를 괴롭혀 왔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질병의 역사이기도 하다.  

 

- 페스트와 천연두는 똑같이 인류를 괴롭힌 질병이고 지금도 생물테러감염병으로 분류되어 있다. 하지만 이 둘은 크게 다르다. 페스트는 세균(박테리아)이 감염시키지만 천연두는 바이러스가 퍼뜨린다. 세균과 바이러스는 사람과 핸드폰의 차이만큼이나 서로 달라서 접근법에서 차이가 크다. 일반적인 세균은 바이러스보다 훨씬 크고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적당한 영양분이 있으면 알아서 생존한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유전자와 약간의 필수 단백질만으로 구성된 아주 작은 개체로서 영양분보다는 주변의 살아 있는 세포에 기생하며 살아간다. 세균은 항생제로 죽일 수 있지만 바이러스를 죽이는 물질은 거의 개발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천연두가 더 위험한 것은 맞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겐 백신이 있다.

 

- 23세 병원 요리사인 알리 마오 말린 Ali Maow Maalin은 1977년 소말리아 난민캠프 근처에서 일하며 천연두에 걸렸다. 정확한 감염 경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천연두 백신을 위한 캠프에 사람들을 데려다주면서 걸린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그러나 말린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그가 천연두에 걸린 경로 때문이 아니다. 그가 천연두에 걸렸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데, 그는 지구상에서 '자연스러운' 경로로 천연두에 걸린 마지막 인물이다.

 

- 2011년 뉴욕 한복판에서 땅을 파다가 발견한 관에서는 정성스럽게 밀봉한 시신이 나왔다. 처음에는 살인 후 은폐한 시신이 아닐까 유추도 했지만 지나치게 밀봉한 시신은 혹시 보물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냐는 호사가의 관심 또한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철저한 조사 끝에 진단한 사인은 뜻밖에도 천연두. 150여 년 전에 죽은 이 시신은 천연두 바이러스가 새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밀봉되어 있었다.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갇혀 있던 사체가 떨어져 내려오고 사체 안의 천연두 바이러스가 해동될 수도 있다. 일반적인 천연두와는 조금 다르지만, 원숭이두창 monkeypox이 발병해 2022년 7월 세계보건기구가 비상사태를 선언한 것은 이 계열 바이러스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다. 

 

- 그런데 간단한 의문을 가져보자. 독으로 죽은 사냥감을 먹어도 괜찮을까? 먹는 사람도 독에 중독되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 흐른 후 유럽의 의사들은 이와 같은 사실에 의문을 가졌다. 저들이 쏘는 독은 어떻게 작용할지에 대해 연구하며 그 원인 물질을 찾았고, '튜보큐라린 tubocurarin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튜보큐라린은 위장관에서 흡수되지 않으므로 음식으로 섭취했을 때에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 1942년 캐나다의 의료진은 이 위험한 독을 환자의 전신마취에 이용했다. 보통 전신마취를 위해서는 마취 가스를 사용하는데, 가스관을 환자의 기관지에 넣는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정맥마취제로 수면을 유도한 후 가스관을 삽관한다. 그런데 우리의 기관지는 잠들어 있어도 우리를 지킨다. 호흡근이 수축하며 가스관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런 자율 반응 때문에 수면 마취가 힘들었는데 호흡근을 마비시키는 약까지 사용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정맥마취제로 수면을 유도한 후 호흡근 마비제를 넣어 근육을 이완하고 마지막에 삽관하는 방식이다. 

 

- 독일군은 각성제를 사용했다. 상품명 '퍼비틴 Pervitin', 성분명 '메스암페타민 methamphetamine'인 이 물질은 '필로폰 Philopon'이라는 일본 상품명으로 더 유명한 물질이다. 1887년 독일에서 먼저 합성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893년 일본의 약화학자인 나가이 나가요시 생산을 하면 가서부터다. 메스암페타민은 도파민과 구조적으로 유사하지만 뇌에는 더 잘 들어가는 물질이다. 그만큼 흥분 효과가 뛰어나다.

 

- 마약류 의약품이 각성제 용도로만 전쟁에 부역한 것은 아니다. 진정제 용도로 사용한 마약을 소개하려고 한다. 우리는 보통 마약이면 필로폰이나 아편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엄연히 다른 물질이다. 우선 법적으로 다르다.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마약류란 마약과 향정신성의약품 그리고 대마를 일컫는 표현이다. 마약은 아편이나 코카 엽에서 유래한 물질 또는 그 가공품이나 관련 합성 물질을 생각하면 되는데, 주로 모르핀 morphine과 헤로인 heroin, 코카인 cocaine 등이 해당한다. 향정신성의약품은 이런 마약과는 다른 구조의 물질이지만 중추신경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중독성이 심해서 따로 관리를 받는 물질이다. 앞서 언급한 메스암페타민이나 각종 수면제 등이 이에 해당한다. 효과도 확실하게 구분된다. 메스암페타민은 각성제로 주로 사용되고, 아편이나 모르핀 등은 수면제나 진정제로 주로 쓰였다. 

 

- 모르핀은 1804년 21세의 독일 약사 프리드리히 제르튀르너 Friedrich Serturner가 분리했다. 어리면 용감한 것일까? 이 겁 없는 청년은 그 귀한 아편을 그냥 팔아도 모자랄 판에, 물에 녹이고 산이나 염기를 가하고 끓이고 식혀서 아편을 성분별로 분리해 버린다. 그중 제일 그럴듯한 하얀 가루의 효능을 확인하기 위해 친구 세 명을 불러 함께 복용했는데, 용량에 대한 개념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과량 복용으로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위세척으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그 후 이 가루의 수면 효과가 무서웠는지 수면의 신인 모르페우스 Morpheus의 이름을 따 '모르핀 morphine'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한동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 아편에서 모르핀으로 트렌드가 바뀌며 중독자를 양산한 것처럼, 모르핀도 헤로인으로 변화하며 악명을 떨치게 된다. 모르핀이라는 단일 성분을 손에 쥔 학자들은 자연이 준 모르핀에 만족하지 않고 실험실에서 사용 가능한 시약들을 이용해 더 강력한 진통제를 개발하고자 했다. 그 결과 1874년 영국 런던의 한 병원에서 헤로인이라는 괴물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때는 다행히도 헤로인이 추가적으로 개발되지 않아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1897년 바이엘 Bayer이라는 독일 제약회사를 만나면서 헤로인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때 모르핀을 헤로인으로 전환한 사람은 펠릭스 호프만 Felix Hoffmann이라는 화학자였다. 바이엘 사는 중독성 없는 진통제라는 거창한 소개와 함께 헤로인을 시판했는데, 다행히도 같은 시기 개발한 아스피린 Aspirin에 집중하며 헤로인을 주력 상품에서 제외했다. 하지만 다른 회사들은 그러지 않았다. 헤로인의 세상이 온 것이다. 

 

- 아편, 모르핀, 헤로인에서 실패를 거듭한 과학자들은 이런 천연물이 아닌 순수 합성 물질을 통해 원하는 목표를 이루고자 했다. 당장 1939년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아편 수입이 막히자 페치딘 pethidine이라는 약물을 개발하게 되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약이 이렇게 뚝딱 만들어지지는 않는데, 순수한 합성 물질로 이런 약을 개발하는 것을 보면 독일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미국에서 콜라 수입이 막히니 환타를 뚝딱 만들어 냈던 독일이기도 하다. 어쨌든 전쟁이 끝난 후 페치딘은 전 세계에 소개되었고, 지금도 진통제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진짜 괴물은 이제 나오는 펜타닐 fentanyl이다. 펜타닐은 페치딘의 구조를 기반으로 1960년대에 개발된 약물이다. 주사로 맞아야 하는 다른 마약류 진통제와는 달리 파스 형태로 붙일 수도 있어 사용이 편리하며, 진통 효과는 모르핀의 100배나 되어 출산 시 무통 분만에도 사용된다. 구조식도 간단해서 약간의 화학적 지식만 있다면 쉽게 생산할 수 있고, 그만큼 화합물 가격도 싸다. 

 

- 작정하고 도파민을 숟가락으로 퍼 먹으면 어떻게 될까? 많이 먹으면 대사와 배설 과정에서 소비되고 남은 일부분은 뇌로 들어가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 뇌는 또 하나의 튼튼한 장벽을 가지고 있다. 혈액뇌장벽 blood-brain barrier, BBB이라고 하는 관문인데, 지용성 물질은 비교적 잘 통과시키지만 수용성 물질은 통과하기 어렵게 촘촘한 망을 구성하고 있다. 수용성 물질이 통과하려면 특별한 경로를 거치거나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가능하다. 도파민은 그렇지 못하다. 뇌 속 신경계에서 극소량이 만들어져 작용하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외부에서 혈류를 타고 들어와 뇌 안으로 들어가려면 BBB를 통과할 수밖에 없는데 도파민은 BBB를 통과하지 못한다. 
 

- 사실 교감신경계와 부교감신경계는 잘만 조절하면 약이 된다. 고혈압 환자의 심장을 조절하거나 천식 환자의 기관지를 넓혀주는 물질은 지금도 약국에서 처방 하에 구입할 수 있는 약인데, 이런 약을 개발해 노벨상을 받은 인물도 있다. 그렇다면 저런 독가스에 대한 해독제도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해독제 아트로핀이 가장 대표적인 물질이다. 아트로핀은 비교적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성분이다. 벨라도나 belladonna라는 식물에서 나오는데, 예전부터 사람들은 이 추출물을 사용했다. 주로 미용 목적으로 눈동자에 뿌려서 눈동자를 크게 보이도록 했다. 그 시절의 서클렌즈라고 볼 수 있는데, 클레오파트라 등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과량 투여 시에는 2, 3일 정도 시야가 흐릿해지고 오래 사용할 경우에는 시력을 잃을 수 있어 주의를 요하는 약이었다. 그런데 1831년이 물질이 단일 성분으로 분리되면서 문제가 좀 심해졌다. 사람을 죽이는 독약으로도 쓰게 된 것이다. 

- 모든 약은 독이고, 독은 약이다. 양에 따라 달라진다. 무엇이든 사람에게 과량을 투여하면 곧바로 죽을 수 있다. 아트로핀도 그랬다. 특히 아트로핀이 강력한 부교감신경 억제제여서 미량의 독침으로도 죽이기에 충분했다. 벨라도나 추출물로 사용할 때는 이렇게까지 위험하지 않았지만, 단일 성분으로 분리되고 고농도로 사용하게 되니 이 물질의 어두운 면이 드러난 것이다. 

 

- 피리도스티그민 브로마이드는 원래 중증근무력증의 치료제로 개발된 약이다. 그런데 정작 이 약물의 기원이 피조스티그민 physostigmine이라고 하는 또 다른 극약이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1800년대 중반 유럽의 탐험가들이 아프리카 내지까지 들어가서 원주민과 교류했을 때, 그들은 '시련 심판'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CCTV가 없던 시절, 부족민 사이에 진실 공방이 벌어졌을 때 부족장이 작고 검은 열매를 내려준 것이다. 알칼라이드 독을 가진 칼라바르 콩 Physostigma berenosum, 그것을 먹고 살아남는 사람이 진실을 말한다는 개념의 심판이다. 이 심판이 근거가 있는지를 해석하기 위해 지금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와닿는 설명도 없고 근거가 빈약한 심판이라고 본다. 
 

- 전쟁이 세계를 좌우할 정도로 큰 변수이긴 하지만, 막상 전쟁을 좌우하는 것은 작은 변수들이다. 러일전쟁에서도 이러한 변수를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각기병에 시달린 일본군과 괴혈병에 시달린 러시아 군대다.

 

- 또한 각기병에 대한 치료법을 세계 최초로 알아낸 집단은 놀랍게도 일본 해군이었다. 다만 해군과 육군 간의 알력으로 인해 해군의 노하우가 육군으로 전수되지 않아 애꿎은 일본 육군만 고생한 것이다. 러일전쟁 중 일본군 사망자를 대략 8만 4,000명으로 추정하는데, 그중 각기병으로 죽은 사람은 2만 7,000명 내외다.

 

- 또한 일본은 만주 벌판으로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 다양한 채비를 했다. 처음 가는 지역에서 설사가 빈발하자 이를 막기 위해 설사약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는데, 훗날 러일전쟁 승리를 기념해 정로환 征露丸으로 명명했다. 지금에야 한자를 바꾸어서 정로환 正露丸으로 판매되고 있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가슴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그런 약이기도 하다. 
 

- 그림에서처럼, 하이드록시프롤린을 만드는 과정은 간단해 보인다. 산소만 딱 하나 넣어주면 된다. 보통 산소를 넣는 과정을 말 그대로 '산화 반응'이라고 부르는데, 화학적으로는 어려운 과정이다. 다행히 우리 몸 안에는 이 과정을 촉매해 주는 산화효소 proline hydroxylase가 있고, 우리 몸에는 산소가 많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이 무리 없이 일어날 수 있다. 또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다른 물질들도 함께 연계해 이 과정을 필사적으로 진행시킨다. 그런데 항상 그렇듯이 촉매는 조금만 존재한다. '촉매'는 자신은 변화하지 않은 채 반응을 중개하는 물질을 일컬으며, 보통 미량으로 존재한다. 효소도 촉매다. 

  

- 사람의 천적은 무엇일까? 호랑이? 사자? 빌 게이츠 Bill Gates가 2014년 그의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동물로 한정할 때 사람의 첫 번째 천적은 모기다. 매년 72만 명 이상이 모기로 인해 사망한다. 두 번째는 사람이다. 사람에게 죽는 사람이 대략 47만 명 정도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무심코 들리는 모기소리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된다. 사자 때문에 죽는 사람은 같은 발표 자료에 따르면 100명 남짓이다. 

(리뷰자 주 : 물론 아프리카 및 특정 국가들의 말라리아 상황과, 이제는 일상에서 맹수들을 마주치기 힘들어졌다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 로마는 중세 시대까지 말라리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바티칸에서는 콘클라베 conclave라는 방식으로 교황을 선출한다.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전 세계의 추기경들이 바티칸에 모여서 투표를 한다. 교황은 입후보 절차나 선거운동 없이 철저하게 무작위 투표로 선출된다. 물론 그전에 명망이나 야심 있는 추기경들이 알음알음 유력 후보로 인식되므로 완전한 무작위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추기경들은 1인 1표를 행사하며 차기 교황으로 적합한 추기경을 종이에 적어서 낸다. 본인 이름을 적는 사람들도 있었을 테니 과반을 얻는 경우가 쉽진 않을 터. 투표용지는 불태워지고 검은 연기가 굴뚝 밖으로 나온다. 투표는 다시 시작된다. 최종 1인을 뽑아서 흰 연기를 올릴 때까지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한 채 투표만 한다. 선출하기 전까지는 나올 수도 없다. 식사를 넣을 때를 제외하면 밖에서 들어갈 수도 없다.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된 곳. 그런데 그곳에 모기가 들어갔다. 
 

- '선교사들의 가루'는 시간이 지나며 '신코나 가루 cinchona powder' 또는 '키나 가루 quina powder'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종교적인 의미가 퇴색되며 약재가 나오는 나무인 신코나 나무 cinchona tree 또는 현지인들이 부르던 대로 키나 나무 quina tree의 이름을 따게 된 것이다. 말라리아가 계속 극성을 부리며 사람들은 갈수록 신코나 가루를 필요로 했다. 원래 말라리아 감염의 증상은 열이 나는 것이므로 신코나 가루를 복용하면 말라리아로 인한 열이 내렸는데, 나중에는 그냥 열이 나면 해열제로 썼다. 별 효과는 없었을 듯한데 위약효과 placebo effect와 함께 다른 약이 없었던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스피린이 해열제로 처음 소개된 때가 1897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 독일(당시 프로이센)은 바다를 통한 교역이 쉽지 않았던 탓에 이런 밀무역마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은 신코나 가루의 재고가 소진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신코나 가루를 해열제로 사용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신코나 가루는 말라리아 치료제지만, 말라리아의 고열 증상을 해결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다른 고열 증상에도 그냥 신코나 가루를 쓰고는 했었다. 해열제가 딱히 없던 시절임을 감안하자. 해열제가 필요해지자 독일의 학자들은 신코나 가루를 대체할 수 있는, 그리고 쉽게 공급할 수 있는 해열제를 찾게 되었다. 열심히 문헌을 뒤진 결과 그들은 1763년 영국의 에드워드 스톤 Edward Stone이라는 성직자가 버드나무 껍질 추출액을 해열제로 사용한 기록을 보게 되었다. 그 전에는 무심코 넘겼던 기록이지만, 신코나 가루의 공급이 끊긴 상황에서 그들은 본격적으로 그 기록을 검증했고 그렇게 버드나무 껍질을 아쉬운 대로 사용했다. 

- 이후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대륙 봉쇄령이 풀렸지만, 남아메리카에서 실어 오는 신코나 가루는 여전히 비쌌다. 반면 버드나무껍질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제 독일 학자들은 버드나무 껍질에서 해열 효과를 보이는 물질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마침 1800년대 초반은 약초에서 주성분을 분리하는 연구가 유행하던 때였다. 아편에서 모르핀이, 신코나 가루에서 퀴닌이 분리된 때가 각각 1804년, 1820년이었다. 

 

- 1828년 요한 부흐너 Johann Buchner라는 뮌헨의 약물학 교수가 드디어 버드나무 껍질에서 해열 효과를 내는 주성분을 분리했다. 그는 이 물질에 '살리신 salicin'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분리효율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5년 뒤 하인리히 머크 Heinrich Merck가 추출법을 개선하면서 살리신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장 하인리히 머크는 독일 다름슈타트 지역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 약국 고유의 비방이 생긴 셈이었다. 버드나무 껍질은 주성분 함량이 지역마다 다르고 추출하는 과정에서 순도에 차이가 나서 효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분리 과정이 확립되면 순수한 물질을 약장에 보관할 수 있으므로 사람 몸무게에 맞춰 조제만 하면 되는 셈이었다. 이후 머크는 약국 의약품 판매보다 원료 의약품 생산에 주력하며 지금의 거대 제약회사이자 화학회사인 머크 Merck사를 일궈내는 데 성공했다. 

(리뷰자 주 : 머크 인덱스의 그 머크다.)


- 파울 뮐러 Paul H. Müller는 스위스의 제약회사 연구원이었다. 그는 해충 구제를 목적으로 연구실에 틀어박혀 300개가 넘는 화합물을 만들다가 1873년에 이미 보고된 화합물을 다시 만들었다. 평소라면 선행 기술 조사 없이 만들었다고 상사에게 호되게 혼날 일이지만, 막상 이 화합물이 살충제로서 활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찾아내며 상사에게 칭찬을 받게 된다. 그렇게 DDT dichloro-diphenyl-trichloroethane의 신화가 시작되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던 해의 일이었다.

 

- 스위스는 영세 중립국이다. 추축국이든 연합국이든 가리지 않고 DDT를 팔 수 있었다. 그리고 이 DDT를 구입한 추축국 연합국은 DDT를 공중 살포하며 전투를 치르기 시작했다. 새로운 지역으로 진입해서는 DDT를 방사하며 모기가 있을 만한 지역을 초토화했다. 그래야 안심하고 이 지역을 정복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군사 기술은 민간에 개방된다. 기관총 회사는 스테이플러를 팔았고, 부식성의 우라늄 보관을 위해 개발되었던 테플론은 프라이팬 바닥에 사용되었으며, 우라늄 동위원소를 분리하던 초원심분리기는 지질단백질(HDL과 LDL)의 미세한 밀도 차이를 분석하는 데 사용되었다. DDT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때 말라리아 박멸을 위해 사용된 DDT는 전쟁 종료와 함께 농작물을 좀먹는 해충 구제에 투입되었다. 1873년에 만들었을 정도의 구조이니 얼마나 생산하기 쉬웠겠는가? 그만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으므로 또 그만큼 많이 썼다. 말라리아는 설 곳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인류 역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 DDT가 생태계에 미친 영향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잘 정리되어 있다. 익충이나 천적이 죽어서 생태계가 파괴되고 먹이사슬을 통해 DDT가 농축되어 고등생물들까지도 죽어나가는 현상이 발생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하기 위해 쓰인 레이철 카슨 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 Silent Spring>은 여전히 스테디셀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리뷰자 주 : 윌리엄 바이넘의 <서양의학사>에 따르면, 그뿐이 아니었다. "설상가상, 디디티에 내성을 가진 모기가 나타나기도 했다. 1969년이 되자, 말라리아 박멸 계획은 억제 계획으로 슬며시 이름을 바꿔 달았다.")  

- 하지만 어떻게든 사람들은 해답을 찾아냈다. 예를 들어, 닭의 수정란에 바이러스를 접종했을 때 바이러스가 수정란을 살아 있는 개체로 인식해서 잘 자란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는 동물 개체가 아니라 동물 조직의 세포만 떼어낸 후 세포에 접종하는 방식으로도 바이러스를 배양했다. 이러한 학자들의 노력은 독감 바이러스의 배양으로도 이어졌다. 결국 다양한 방법으로 바이러스 기반 백신을 생산해 시판한 것은 1940년대 초반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은 이제 막 개발된 독감 백신 덕분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스페인 독감의 악몽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 독감 치료제가 개발된 것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990년대 후반이다. 당시로는 작은 바이오 벤처인 길리어드 Gilead사의 연구원이던 재일교포 김정은 박사가 바이러스의 체내 침입 과정을 모방하여 오셀타미비어 oseltamivir를 개발했다. 오셀타미비어는 그전까지 사용되던 항바이러스제에 비해 탁월한 효능과 복용 편의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고, 적절한 개발 과정을 거쳐 로슈 Roche사에 기술이전되었다. 로슈 사는 '오셀타미비어'라는 복잡한 이름 대신 '타미플루 Tamiflu'라는 친숙한 이름으로 시판했고, 우리는 이 약을 급할 때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다. 타미플루의 개발을 바탕으로 로슈 사는 2009년 한 해에만 3조 원 이상의 수익을 올렸고, 길리어드사 역시 5,000억 원의 계약금과 연간 1조 원이 넘는 로열티를 벌어들였다. 그리고 C형 간염, 에이즈 등의 후속 치료제를 자체적으로 출시하며 바이러스 치료제 전문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지금은 길리어드사를 바이오 벤처가 아니라 전 세계 10대 제약회사로 분류하고 있다. 김정은 박사는 길리어드사의 화학 담당 부사장까지 지냈다. 

 

- 이제 우리는 백신과 치료제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독감에서 해방되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해마다 독감백신을 맞아야 하며, 그나마도 예측이 빗나가는 경우가 많아 백신을 맞아야 하는지조차도 매년 고민하게 된다. 독감 바이러스는 헤마글루티닌 hemagglutinin, H과 뉴라미니데이즈 neuraminidase, N라는 특징적인 단백질의 변이에 따라 분류된다. H는 18개, N은 11개의 돌연변이가 알려져 있다. 이론적으로 198개(18×11개)의 돌연변이가 가능한데, 실제로 모든 경우의 돌연변이가 다 나온 것은 아니므로 지금은 100여 종의 돌연변이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H와 N의 돌연변이 수도 점차 늘어나므로 돌연변이 또한 늘어날 것이다. 

 

- 의외로 바이러스 치료제는 거의 없다. 감기도 바이러스지만 감기약은 바이러스를 죽이지 못한다. 증상을 가라앉히면서 우리 몸의 면역세포가 감기 바이러스를 죽일 때까지 기다려야 할 뿐이다. 그 기간이 대략 일주일인데, 감기가 낫는 기간과 비슷하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낫지 않는 바이러스 질환이라면, 우리가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러다 죽는다. 그래서 증상이 심한 바이러스 질환에 대해서는 치료제를 개발하려고 시도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일단 바이러스는 너무 작아서 공격할 포인트가 적다. 바이러스와 대비되는 박테리아의 경우 세포벽도 있고, 표적 단백질도 많고, 유전자도 있어서 그럭저럭 타깃이 될 만한 지점이 꽤 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있으면서 자기만의 유전정보와 최소한의 단백질로 무한히 증식하려고 한다. 그만큼 우리가 공격하기 어렵다. 다행히 100년 넘게 바이러스에 대해 연구하면서 일부 질환에 대해서는 바이러스 치료제가 나와 있다. 치료제라기보다는 대부분 바이러스 증식을 억제하고 결국 면역세포를 죽이게 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치료 효과를 보니까 치료제라고 통칭해서 설명했으면 한다. 

 

- 독감 바이러스는 본문에도 언급한 것처럼 타미플루를 이용해 대처할 수 있다. 독감 바이러스가 증식하는 과정에 필요한 단백질을 억제하는 기전으로 개발되었다. 2019년에는 바이러스 유전자 증식을 억제하는 기전으로 조플루자 Xofluza라는 의약품이 국내에서 승인되었는데, 타미플루 이후 20년 만의 독감 치료제여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하루 두 알씩 5일 동안 꼬박 먹어야 하는 타미플루에 비해 한 번만 투여해도 되는 복약 편의성도 있다. 

(리뷰자 주 : Baloxavir. 아직까지는 이런저런 상황상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  하지만 인터페론은 '바이러스계의 페니실린'이 되지 못했다. 결정적인 부작용이 있었는데, 면역이 너무 활성화되면 그 자체로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급성으로 나타날 때는 '사이토카인 폭풍 cytokine storm'이 나타나 하루 만에 건강한 청년을 죽이기도 했고, 만성으로 나타날 때는 관절염 등 심각한 질환을 초래해 환자와 의료진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면역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인터페론을 사용하지만 면역이 높아지면 다시 부작용이 생기는 아이러니 속에서, 인터페론에 대한 기대는 조금씩 낮아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해답을 찾기 어려운 바이러스 질환에 대해서는 인터페론을 사용하고 있고 관련 기술도 좋아지고 있다. 사람들은 항상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 미국에서도 특히 급해진 사람은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 Thomas Edison이었다. 그는 당시 축음기를 내세워서 시장을 장악해 가고 있었는데, 이 축음기 제조에 페놀이 필요했다. 아무 걱정 없이 수입하던 페놀에 공급 차질이 생긴다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페놀이 조금씩 수입되기는 했지만 페놀 가격은 수요와 공급 법칙에 따라 너무 비쌌다. 결국 그는 발명왕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었는데, 미국 내에서 페놀을 생산해 낸 것이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지만 이런 재능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너무 많이 만들었다. 하루에 12톤 정도를 만들었는데, 이 정도면 축음기 제조에 쓰고도 남을 양이었다. 에디슨이 필요한 양은 9톤이면 충분했다. 페놀 재고가 쌓여가던 찰나, 에디슨은 페놀을 사갈 다른 회사를 찾는 데 성공했다. 휴고 슈바이처 Hugo Schweitzer가 책임자로 있던 미국 내 바이엘 지사였는데, 매일 3톤에 해당하는 양의 페놀을 사기로 계약했다. 1915년 7월 1일이었다. 그런데 한 달도 지나지 않은 7월 24일, 독일의 스파이 활동을 감시하던 미국 정보 당국에서 에디슨의 페놀이 슈바이처를 통해 독일로 흘러간 것을 포착해 냈다. 슈바이처가 에디슨에게 사간 페놀은 당시 가격으로 130만 달러 정도인데,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3,000만 달러(약 390억 원) 정도에 해당한다. 이 돈은 바로 독일 본국에서 들어온 활동 자금이었고, 이 활동 자금으로 페놀을 구입한 것이다. 물론 이때도 미국은 여전히 중립국이었으므로 법적으로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독일을 지지하지 않았던 미국인은 슈바이처에게 속아 넘어간 에디슨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에디슨의 계약은 곧 취소되었지만 페놀이 이미 독일로 넘어가고 난 이후였다.  

 

- 이런 일이 생기면서 바이엘 사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비난을 받게 된다. 1918 년 전쟁이 마무리되자 패전국 독일의 아스피린 상표권은 승전국 미국의 스털링 Sterling사로 넘어갔는데, 바이엘 사는 이 상표권을 돌려받기 위해 76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결국 바이엘 사는 1994년 10억 달러를 지불하고서야 상표권을 다시 가져올 수 있었다. 

 

- 1880년대 로베르트 코흐가 세균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면서 리스터의 수술법은 더욱 지지를 받게 되었다. 페놀이 작용하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리스터의 방법은 이후 보편화되었으며, 미국에서는 리스터의 이름을 딴 구강 소독제도 출시되었다. 우리는 지금도 이 구강 소독제를 편의점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이름은 '리스테린 Listerin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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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과 고지혈증의 관계도 전쟁을 계기로 드러났다. 초원심분리기를 이용해 혈액 속 HDL과 LDL을 훨씬 더 정밀하게 분리하는 기술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초반 초원심분리기를 이용해 혈액의 세계를 보다 세밀하게 들여다본 사람은 존 고프만 John Gofman.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폭탄의 원료인 방사성 동위원소를 초원심분리기로 분리하던 사람이었다. 

 

- 페스트균이 직접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드물다.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오기까지 매개체를 이용하는데, 일단 쥐벼룩의 몸 안에 들어갔다가 쥐를 타고 사람에게 가까이 온다. 이후 쥐벼룩이 사람 몸에 붙어서 무는 순간 페스트균은 사람 몸에 들어간다. 일반적으로 림프절에 머물다가 3, 4일 이내에 폭발적으로 그 수가 늘어나며, 림프절이 부으면 육안으로도 이상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전에 온몸을 휘젓는 통증과 발열, 무기력감이 따라오기에 이미 환자가 되어 쉬고 있을 것이다. 신체 부위가 까맣게 변하는 증상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 상태에서 죽는 경우도 많지만 페스트균이 폐로 전이되면 비말을 통한 전염이 가능해서 대인 감염이 가능해진다. 페스트균이 쥐벼룩이나 쥐를 이용하지 않고 사람에게 직접 공격하는 단계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의 경우다. 보통의 경우 쥐벼룩은 쥐에게 기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서식한다. 쥐벼룩이 너무 많고 쥐들이 다 죽었을 경우에만 사람에게 올라탄다. 앞서 말한 것처럼 페스트균이 직접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자연적이지 않다. 자연적이지 않은 이러한 감염을 위해 731부대는 부단히도 노력했다.

 

- 1343년 유럽은 몽골 기마부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흑해 연안의 카파 성에서 연합군을 형성했다. 몽골 기마대는 그 명성에 걸맞게 순식간에 공격해 들어왔고 일반적인 기마대와는 다르게 공성전에서도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유럽 연합군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바다를 끼고 있는 카파 성을 공격하는 데는 내륙의 지배자 몽골군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두 전력의 대치가 길어졌고, 이 틈을 타고 제3의 세력, 페스트균이 끼어들었다. 전장에 널린 시체들은 페스트균에게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였던 셈이다. 

- 3년간의 공성전 후 몽골군이 물러가고 유럽 군대 역시 해산해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때 페스트균도 귀국행렬에 동참했으며, 해상으로 이동하는 배에서 훨씬 더 많이 증식했다. 밀폐된 공간이라서 그랬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에 안착한 페스트균은 그때부터 이탈리아를 초토화했고 3년간 유럽 대륙을 정복해 나갔다. 몽골군이 이루지 못한 유럽 정복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나간 것이다.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는 당시 유럽 인구의 30퍼센트 정도에 해당하는 2,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정도면 유럽 사회의 근간을 바꾸기에 충분한 규모다. 하지만 몽골군 역시 전쟁 이후 흑사병으로 피폐해졌다고 평가되고 있다. 유럽과 몽골 모두 패한 전쟁이었던 셈이다. 

 

- 전쟁 후 그들은 처벌을 받았을까?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다. 731 부대원 중 일부는 소련에 체포되어 자국민을 실험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받았다. 그러나 이시이와 같은 주요 인물들은 일본 본토로 일찌감치 귀국해서 안전하게 살았다. 물론 전범으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야 했지만 미국은 이시이에 대해 사면을 결정했다. 731부대의 의료 기록이 소련에 넘어가는 것만은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냉전이 갓 시작된 때, 미국과 소련이 국력 대결을 벌이며 상대를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시기였다. 731부대의 잔혹함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씁쓸하기만 한 전개였다. 이시이는 1959년 지병인 암으로 사망했다. 

- 731부대의 의료 기록을 넘겨받은 미국은 그 기록을 고이고이 모셔두고 분석했다. 그들은 731부대의 인체 실험 자료를 이용해 더 강력한 페스트균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이러한 연구는 1969년 관련 부서를 폐지할 때까지 이어졌다.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소련도 독일에서 넘겨받은 의료 기록과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페스트균을 더 강력하게 만들고자 애썼는데, 이 연구는 소련이 해체된 직후인 1992년까지도 이어졌다. 

 

- 질병관리청에서는 페스트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대응 지침을 마련해 놓고 있다. 로그인 없이 다운로드 가능한 자료로, 162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좋은 내용이 많아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대응 지침을 전체적으로 보자면 환자 발생 즉시 대응팀이 꾸려지고 환자 격리, 역학 조사, 검역 및 격리가 실행된다는 면에서 지금의 코로나19 대응과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잠복기를 7일로 규정하고, 접촉자에 대해 예방적 차원의 항생제 투여를 지시한다는 점. 항생제가 있다는 것이 이럴 때 좋다. 환자에게도 당연히 격리 치료가 이루어지며, 주로 항생제를 이용하게 된다. 독시사이클린 doxycycline과 시프로플록사신 ciprofloxacin, 스트렙토마이신 streptomycin 등이 주로 사용되는 항생제다. 

 

- 1796년 에드워드 제너 Edward Jenner는 알음알음으로 전해지던 노하우를 검증하기로 했다. 소를 키우는 사람들은 천연두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애꿎은 정원사의 여덟 살짜리 아들 제임스 핍스 James Phipps에게 소의 천연두 고름을 접종했다. 그것도 모자라 시간이 지난 후 이 소년에게 다시 사람의 천연두 고름을 접종했는데, 다행히 이 힘없는 소년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 이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동시에 소중한 실험은 곧 학회에 보고되었고, 이후 체계적인 검증을 거치면서 천연두 백신은 세상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 자연스럽지 않은 경로로 걸린 천연두 환자도 있을까? 있다. 바로 이듬해인 1978년 영국의 사진사 재닛 파커 Janet Parker가 그렇게 걸렸다. 그녀는 사진사로 활동하면서 실험실 사진도 의뢰받아 촬영했는데, 하필 그가 촬영한 헨리 베드슨 Henry Bedson 교수의 실험실에서는 천연두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바이러스는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었지만 지금만큼 철저하게 밀봉되어 있지는 않았다. 일반인이었던 파커 역시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사진을 촬영하던 중 천연두에 걸리고 말았다. 이후 그녀의 동선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격리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 격리 기간 동안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실험실 책임자인 베드슨 교수는 이 사실에 책임감을 느껴 자살했다. 파커도 발병 열흘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 천연두 박멸은 백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백신은 항상 부족했다. 백신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연두를 박멸할 수 있었던 것은 '포위 접종 ring vaccination' 전략 덕분이었다. 포위 접종이란 천연두가 빈발하는 지역이나 연관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접종시키면서 위험 지역의 천연두를 없애는 전략이다. 지금 관점에서는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선진국 위주로 접종이 이루어져 정작 천연두가 창궐하는 인도 등지에서는 항상 백신이 부족했다.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전략을 세운 후실행에 옮긴 윌리엄 페이지 William Foege는 2020년 생명의 미래상 Future of Life Award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의 이름을 노벨평화상에서 보는 것도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을 듯하다. 하지만 당연히 이 일은 그 혼자 한 것이 아니다. 우선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 후반,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쳐 천연두 박멸 프로그램을 함께 수행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한 사람은 빅토르 즈다노프 Viktor Zhdanov다. 그는 윌리엄 페이지와 함께 생명의 미래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 참고로 튜보큐라린은 <셜록 홈스 Sherlock Holmes> 시리즈에도 나온다. 셜록 홈스의 작가인 아서 코넌 도일 Arthur Conan Doyle 은 런던에서 개업한 의사였는데 환자가 많지 않아 다양한 시도를 했다. 기초 연구도 진행해서 비소에 관한 논문도 발표했지만 이후 소설에 흥미를 붙여 1887년 셜록 홈스라는 캐릭터를 창조해낸다. 로베르트 코흐도 그렇고, 그 시절 환자가 많지 않았던 의사는 참 대단한 일을 했다. 그런데 정작 도일은 독극물에 정통했음에도 불구하고 튜보큐라린에 대해서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 튜보큐라린은 셜록 홈스가 탄생한 첫 번째 소설 <주홍색 연구 A Study in Scarler>에서 등장한다. 소설이 전개되고 범인이 잡혀 자백하는 장면에서 범인은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화살촉에서 나온 독을 사용했다고 털어놓는다. 이어서 범인은 독을 알약 형태로 만들어 피해자에게 먹였다고 자백한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화살촉의 독 성분인 튜보큐라린은 먹어서는 그다지 독성이 없다. 화살촉의 독이 튜보큐라린이 아닌 다른 독이더라도 사냥용으로 쓴 독은 먹었을 때 독성을 띠지 않는다. 사냥은 먹으려고 하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 남아메리카 원주민이 사냥용이 아니라 전투용으로 새로운 독을 개발했다면 이해할 수 있으나, 그런 기록은 찾기가 어려우니 도일의 설정 오류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BBC에서 나온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마틴 프리먼 주연의 영국 드라마 <셜록 Sherlock>에서는 '분홍빛 연구'로 각색되어 나왔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이러한 설정 오류가 나타나지 않는다. 

 

- 세계적으로도 트렌드가 바뀐다. 두 곳이 핵심으로 떠오르는데, 한 곳은 '황금의 삼각 지대 golden triangle'라고 부르는 미얀마, 라오스, 태국 등의 동남아시아 지역이다. 원래부터 유명한 아편 산지였던 데다가 중국 공산당이 마약을 금지하자 중국 내 전문가들까지 옮겨 와 각성제 등의 마약류 향정신성의약품까지 생산하면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현재도 아프가니스탄을 제외하면 이 지역의 생산량이 가장 많다. 2017년 개봉한 영화 <킹스맨 The King's Man> 2탄의 부제가 '골든 서클 golden circle'이다. 이 영화에서 악역인 포피 애덤스가 캄보디아에서 양귀비를 생산하는 것은 지역적으로 봤을 때 근거 있는 설정이다. 두 번째 지역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아프가니스탄인데, 역시 파키스탄과 함께 '황금의 초승달 지대 golden crescent'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전통을 자랑한 지역이었다. 

 - 대항해시대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의 신대륙 발견(1492년)과 바스쿠 다가마 Vasco da Gama의 인도항로 개척(1498년)과 함께 시작했다. 중국 등에서 육로를 통해 향료를 수입하던 베니스 상인들로서는 상권이 위협받는 시작이었다. 400년간 독점해 오던 향료 무역이지 않았던가? 그들은 항해 선단을 꾸려 인도 현지에 사신단을 파견해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중단해 달라고 외교적으로 노력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dinand Magellan의 함대가 3년간의 세계 일주를 마친 1522년, 26톤의 향신료와 함께 스페인 세비야로 돌아온 것은 이러한 베니스의 우려를 확인시켜 준 사건이기도 했다.

- 그런데 향료는 왜 비쌌을까? 사실 향료만 비싼 것이 아니었다. 중세 시대 왕이나 귀족들은 설탕을 작은 성이나 탑처럼 조각해서 연회를 장식하며 자신의 부를 과신했고, 담배는 왕실에 바치는 선물이었으며, 소금 salt은 '월급 salary'의 어원이 될 정도로 귀했다. 생산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회에서 중요한 재화는 비쌀 수밖에 없다. 그러면 질문을 바꿔보자. 향료는 왜 중요한 재화일까?

 

-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로마제국의 전성기 이후 유럽은 꾸준히 더러워져 갔다. 상하수도 시설이 정비되지 않아 거리에 분변이 쌓였고 음식 보관이 어려워 썩기 일쑤였다. 파리의 지하철이나 뒷골목에 가본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빛의 도시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냄새에 놀라고는 한다. 향료는 이처럼 악취를 감춘다는 측면에서 필요했다. 둘째, 음식의 재료로도 향료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궁중에 전해지던 요리법에는 귀한 향신료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가 비교적 자세하게 적혀 있다. 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세 번째 이유가 따로 있었다. 페스트였다.  
 

- 화합물의 구조가 밝혀지고 1년 후인 1934년 또 다른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지는데, 설탕에서 간단한 화학반응을 거쳐 비타민C를 생산하는 방법이 개발된 것이다. 타데우시 라이히슈타인 Tadeus Reichstein이라는 화학자가 개발한 방법으로, 지금 봐도 훌륭한 공정이다. 이 방법은 설탕에 효소를 처리해 다섯 단계 안에 비타민C를 만드는데, 설탕 100그램을 비타민C 40그램으로 전환하는 효율을 보여준다. 그의 공정은 곧바로 제약회사인 로슈 Roche사에 기술이전 되었으며, 사람들은 싼값에 로슈 사의 비타민C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렇다면 식단을 바꿔보면 어떨까? 다카기는 항해 중 수병들에게 다양한 식사를 제공하게 했고, 당시 유행하던 백미 대신에 현미로 밥을 먹였을 때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쌀밥 대신 보리밥을 제공했을 때도 문제가 해결되었다. 도정한 백미 대신 현미 또는 보리를 지급하면 되니 쉽게 풀리는 문제였다. 한 건 했다. 그런데 의무관이 식사에 손대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당장 지금 시대 군의관이 행정보급관과 취사병에게 가서 식단을 바꾸라고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것도 비싸고 질 좋은 백미 대신 거칠고 맛없는 현미나 보리라니. 당장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오고 SNS에 인증사진이 나돌지 않을까? 그 당시에도 비슷했다. 가난한 청년들이 흰 쌀밥 먹고 싶어 입대했는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군의관이 식사를 바꾸겠다는 것을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적어도 식단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병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세련됨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세련됨이 다카기에게는 있었다. 

 

- 다카기 역시 영국 해군이 카레 가루를 스튜로 만들어 빵과 함께 먹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다카기는 각기병에 시달리는 일본 수병들을 위해 영국식 최신 요리라는 홍보와 함께 카레 스튜를 도입했다. 다만 빵 대신에 백미로 만든 쌀밥을 유지했으므로, 카레 스튜 대신에 카레라이스가 만들어진 셈이다. 카레라이스는 일본 수병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국물을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카레라이스는 약간 흔들려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귀한 백미를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걸 섞어준다니 돈 가지고 장난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쌀밥 한 그릇에 간장 한 종지로 배를 채우는 건 너무 심심한 식사였다. 

 

- 1910년 스즈키는 드디어 그 성분을 규명하고 '오리자닌 Oryzanin'이라는 이름을 붙여 시판까지 했다. 1910년이면 유럽에서 비타민B1이 규명되던 시기다. 최근에는 누가 최초인지를 따질 때 논문의 발표 연도뿐만 아니라 실험노트에 적힌 실험 시기까지 확인한다. 그러므로 비슷한 시기에 행해진 100년 전의 연구 결과를 누가 먼저라고 단정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럴 때 노벨상은 공동 수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하는데, 1929년 에이크만이 비타민B1으로 노벨상을 받을 때 스즈키는 수상하지 못했다. 스즈키의 논문이 일본어로 쓰여 학계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의견도 있고, 당시 일본의 국력이 그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의견도 있다. 

 

- 모리 린타로 森林太郎는 '모리 오가이 森鷗外'라는 필명으로 더 유명한 소설가지만, 군의관으로서의 경력도 훌륭했다. 도쿄대학교 의대를 최연소로 졸업하고 강력한 육군에 도움이 되기 위해 독일로 유학해 당시 세균학의 새 장을 열었던 로베르트 코흐와 함께 연구했다. 그가 독일에 남았다면 세계를 놀라게 할 업적을 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 다카기와 모리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해군인지 육군인지의 차이도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그들이 유학한 나라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다카기는 영국에서 공부했는데, 영국은 이미 1700년대부터 제임스 린드 등의 노력으로 괴혈병을 해결했던 나라다. 그들은 레몬즙을 보충하는 것만으로도 괴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치료법은 보리나 밀가루를 보충해 각기병을 치료한다는 다카기의 전략과 일맥상통했다. 

- 반면에 모리는 독일에서 공부했다. 독일은 당시 코흐가 감염병의 원인을 찾아내면서 세계적으로 학계를 선도하고 있었고, 모리 역시 이에 자극을 받아 각기병 또한 감염병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당시의 분위기로 짐작해 보면 모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질병이 감염병은 아니다. 자신이 틀렸다면 일찌감치 인정해야 하는데, 자존심 높은 육군 군의관은 죽을 때까지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금 더 배웠다고 해도 자연의 진리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할 뿐이다.  

- 모기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모기를 배양해야 하고 적절한 동물을 모기에게 제물로 바쳐 피를 빨리도록 해야 했다. 세상의 모기가 한 종류인 것도 아니어서 어떤 모기가 말라리아를 유발하는지 추정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였다. 자칫 잘못하다 사육하는 모기가 본인을 물 수 있는 위험한 실험이기도 했다. 이런 어려운 실험을 하나부터 열까지 수행하며 1897 년 중간체가 모기라는 것을 밝혀낸 사람은 로널드 로스 Ronald Ross라는 인물이다. 그는 인도에 주둔하던 영국 군의관이었다. 로널드 로스는 1902년, 알퐁스 라브랑은 1907년 말라리아 전파 경로를 규명한 공로로 각각 노벨상을 단독으로 수상했다. 같은 주제로 노벨상을 수여하는 사례가 드물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시에 말라리아가 얼마나 위험한 질환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실제로 훌틴은 그해 여름 준비를 마치고 사비로 브레빅 미시온을 찾았다. 26세의 파릇파릇한 청년은 어느덧 흰머리가 가득한 70대의 노년이 되었지만 열정은 그대로였다. 46년 만에 다시 방문한 이 노인을 현지 주민은 따듯하게 대해주었다. 이런 환대가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1951년 사체를 발굴하러 왔을 때 보여준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를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7년 발굴을 도운 사람은 1951년 발굴을 목격한 사람의 손녀딸이었다. 세대를 거슬러 홀틴은 뜻깊은 협조를 받았다. 
 

- 살리신은 다시 한번 진화한다. 1838년, 24세의 젊고 야심찬 약물학자 라파엘 피리아 Raffaele Piria는 버드나무 껍질에서 고생 끝에 추출한 살리신에 산과 열을 가해 가수분해를 하고 산화반응까지 수행하면서 당시로서는 처음 보는 물질을 분리했다. 산화를 거쳤으므로 화합물이 산성 작용기를 가진 것은 분명했고 살리신에서 나온 물질이었으므로 '살리실산 salicylic acid'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물질은 기존의 살리신보다 해열 효과나 진통 효과가 좋았다. 그래서 관절염에도 어느 정도 사용이 가능했고 살리신보다 더 유명해지게 되었다. 단점도 물론 있었다. 화합물이 비싸다는 것. 버드나무 껍질 추출액이나 살리신만해도 충분히 비쌌는데 여기에 부가가치가 더 붙은 화합물이니 어쩔 수 없었다. 

 

- 이러한 가격 문제는 1859년 살리실산을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방법이 알려지면서 완전히 해결되었다. 독일의 화학자인 헤르만 콜베 Hermann Kolbe와 그의 조수인 루돌프 슈미트 Rudolf Schmitt는 석유산업의 부산물인 페놀에 간단한 시약인 수산화나트륨과 이산화탄소를 가하고 열을 가하면 살리실산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발표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과정이 놀라운 이유는 세 가지다. 

 

- 우선, 그전까지 살리실산을 얻기 위해서는 버드나무를 찾아 껍질을 분리하고 물과 유기용매 등으로 살리신을 분리한 후 가수분해를 하고 산화반응을 수행하는 번거로움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데 그럴 필요 없이 화학자들이 손쉽게 그 귀한 살리실산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었다. 값싼 것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 비싸게 파는 것이 사업의 본질이다. 의약품 생산이라고 특별히 다를 것은 없다. 이 방법이 개발되면서 살리실산의 가격이 기존의 10분의 1로 내려갔다. 이처럼 가격이 내려가면 관련 연구자들 입장에서도 연구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진다. 예나 지금이나 연구비는 부족하다. 

- 두 번째 이유는 당시의 화학 기술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열악했기 때문이다.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Dmitri Mendeleev가 주기율표를 제안한 것이 1869년이다. 원소가 가지는 기본 특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던 시절에 얻은 쾌거이니 교과서에 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반응을 콜베 - 슈미트 Kolbe-Schmidt 반응이라고 부르며 일반화학 시험 문제로 만나고 있다. 

- 이 반응이 가지는 세 번째 의미는 살리실산의 구조를 파악했다는 점이다. 그전까지는 구조를 모르는 채 약으로 썼다. 효과만 좋으면 되니까. 그런데 이제 구조를 파악하게 되니 간단한 변형을 가해서 더 좋은 물질로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그전에는 자연, 즉 버드나무가 주는 물질을 고생 끝에 분리해서 썼다면, 이제 더는 버드나무 껍질을 벗기러 장비 챙겨 떠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화학 공장으로, 부설 연구소로 출근해서 어떻게 구조를 변경할 것인지를 고민하면 될 일이었다.

- 펠릭스 호프만 Felix Hoffmann은 그렇게 구조를 변경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1897년 바이엘사에서 의약품 개발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목표는 좋은 진통제를 찾는 것이었다. 당시 살리실산은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던 진통제였다. 특히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이 살리실산을 정기적으로 복용했다. 관절통을 줄이는 데 이만한 물질이 없었다. 다만 정기적으로 복용하기에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약이 쓰다는 점이었다. 약간 쓴 정도가 아니라 심각하게 써서 구역질을 유발할 정도였다. 마침 호프만의 아버지도 같은 불편을 호소하고 있었다. 

 

- 아스피린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약이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연간 4만 톤 넘게 생산되어 600억 정 이상 판매된다. 전 인류가 1년에 10알씩 먹는다는 이야기다. 기네스북에도 가장 많이 판매된 약으로 등재되어 있다. 1960년대에는 우주비행사에게도 지급되었는데, 미국과 소련 양쪽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었다. 

 

- 페니실린을 언급하면 보통 알렉산더 플레밍 Alexander Fleming이 우연히 찾아낸 약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플레밍이 그 약을 찾기 위해 10년 넘게 헤맸고, 다시 10년 동안 잊힌 후 다른 사람들이 다시 10년의 추가 연구를 거쳐서 개발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10년의 시간들' 이전에, 100년의 시간 동안 사람들이 미생물과 싸워온 일 또한 이야기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 히틀리는 플로리의 손을 바라보았다. 플로리의 손에는 작은 서류 가방과 약간의 샘플이 있었다. 이 샘플을 확보하기 위해 그간 얼마나 울고 웃었던가? 하지만 이제는 때가 왔다. 안내원이 다가왔고 밖으로 비행기가 보였다. 서둘러 탑승하자 비행기는 독일 항공망에 포착될까 조심스럽고 빠르게 이륙했다. 런던의 하늘이 멀어지고 뉴욕의 하늘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1941년 6월 27일이었다. 

 

- 제멜바이스가 제1병동 의대생들에게 손을 염소 chlorine 소독 후에 들어오도록 시정명령을 내린 1847년부터 제1병동의 사망률은 1.2퍼센트로 급감했다. 교과서를 새로 쓰고 병원장으로 승격시켜도 모자랄 업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제멜바이스는 의대 교육 시스템을 부정한다는 근거 없는 모함을 받아 병원에서 쫓겨났다. 그 후 그는 다른 병원을 전전하다 자신의 성과를 부정하는 사람들과 잦은 마찰을 일으켰다. 그리고 정신과 병원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동료의 조언을 받아 정신과 병원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자신을 입원시키고, 사실상 감금하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고, 입원하는 과정에서 입었던 손의 상처로 인해 2주 만에 사망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인 1865년이었다.

 

- 제멜바이스가 억울하게 죽던 1865 년, 스코틀랜드의 저명한 외과의 조지프 리스터 Joseph Lister도 유사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외과에서 활동했으므로 상처를 절개하는 수술이 빈번했는데, 아무리 봉합을 잘해도 일주일 뒤에 상처에서 붉은 반점이 생기고 곪아서 터지는 상황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학생 때 참관한 외과 수술의 대가 로버트 리스턴 Robert Liston의 수술에서는 이런 문제가 심하지 않았다. 그는 다리 하나를 28초 만에 자르는 당대 최고 속도의 외과의사였다. 리스터 본인도 실력은 자부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는 남자였다. 리스터는 수술을 정교하게 하기 위해, 그즈음 개발된 마취제도 사용하고 있었다. 환자의 고통을 줄여가며 천천히 정확하게 봉합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환자는 예전보다 더 많이 죽었다. 문제가 뭘까?  

 

- 병동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Florence Nightingale은 1850년대 우크라이나 반도에서 벌어진 크림전쟁에 간호장교로 참여했다가 야전병원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사력을 쏟았다. 당시 야전병원은 죽어나가는 사람의 수가 40퍼센트에 육박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는데, 간단한 상처로 병원에 들른 사람들마저 죽는다는 것이 치명적인 한계였다.  
 

- 물론 나이팅게일의 업적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야전병원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 관계자들을 직접 설득했는데, 이때 글로만 작성된 문건이 아닌 그림으로 구성된 통계 자료를 제시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녀는 통계의 힘을 깨닫고서 일반인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원형 도표 등을 이용했다. 수치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부상의 심각성에 따라 분류하고 그 결과를 통계로 처리하는 치밀함까지 보여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나이팅게일의 장미'라고 불렀다. 엑셀도 잘 다루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저 경의를 표할 뿐이다. 

 

- 독일 학자들은 기생충을 염색하고 관찰하면서 기생충만 선택적으로 염색하는 시약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생충을 염색한다면 그 염색약에 독한 물질을 연결해 그 기생충을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학자들은 기생충 염색약 구조를 변화시키면서 적당한 물질을 찾고 너무 독해서 약으로는 한계를 보였던 비소를 연결했다. 그러고는 아프리카 수면병을 치료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수면병의 원인 기생충인 파동편모충은 이 약에 죽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생 끝에 만들어 놓은 약이 아쉬워 다른 기생충과 균에게 효과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오랜 노력 끝에 매독균을 비교적 선택적으로 사멸시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살바르산 salvarsan'이라는 이름의 인류 최초 합성 매독 치료제가 시판되었다. 1910년의 일이다. 살바르산의 어원은 '구원 salvation'과 '비소 arsenic'에 있다. 맹독은 어느덧 구원의 신약이 되어 '마법의 탄환'으로 불리고 있었다. 살바르산을 개발한 사람은 파울 에를리히 Paul Ehrlich 다. 그는 이미 그 직전인 1908년에 면역 과정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수상한 면역학의 거장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마법의 탄환으로 두 번째 노벨상을 받았을까?  

 

- 프론토실 Prontosil이라는 상품명을 붙였다.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력했고 다양한 균을 치료할 수 있었다. 예전이었으면 손도 쓰지 못했을 환자들이 이 빨간 약을 투여받고 살아났다. 이 환자들 중에는 도마크의 여섯 살 딸 힐데가르데 Hildegarde Domagk도 있었다. 성탄절 준비를 하다 바늘에 찔린 것도 위험한데 바늘이 손을 관통해 손목 안에서 부러지는 끔찍한 사고였다. 바늘이야 수술로 제거했지만, 불안한 예감은 항상 적중한다. 힐데가르데에게서 감염증이 나타났고 곧이어 패혈증으로까지 악화되었다. 다른 희망을 가지기 힘든 이 상황에서 도마크가 선택한 것은 '아빠 찬스'. 그는 자신의 딸에게 프론토실을 투여해 완치시켰다. 1935년 12월의 일이었는데, 그에게는 아마 더할 나위 없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 주식시장에서도 내부자가 주식을 사면 호재로 본다. 하물며 아버지가 딸을 치료했다는데 더 이상의 시그널이 필요할까? 이미 1932년에 합성된 이 기적의 신약에 대해 유럽 전체에 소문이 파다했다. 바이엘사에서는 특허를 신청했고 승인을 받았다. 관련된 구조를 대부분 합성해서 활성을 확인했고, 좋은 화합물은 대부분 특허를 걸었기에 다른 회사에서 따라올 우려도 없었다. 30년째 이어진 기초 연구가 드디어 대박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프론토실의 색깔을 따라 '기적의 빨간 약'으로도 불렸는데, 전 세계에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 바이엘사의 꿈을 깨뜨린 건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였다. 루이 파스퇴르는 죽어서도 독일을 방해한 셈이었다. 하지만 바이엘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 덕에 좋은 약을 값싸게 사용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 도마크는 프론토실을 개발한 공로로 1939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었다. 다만 나치 정권은 정치적인 이유로 자국 과학자들에게 노벨상 수상을 금지했고, 도마크는 이 상에 지명되었다는 이유로 일주일간 감옥에 갇혔다. 이후 마지못해 노벨상을 거부한다는 서류에 서명한 그는 전쟁 후인 1947년, '마지못해' 거부했다는 상황을 인정받아 뒤늦게 노벨상 수상식에 참가했다. 이런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다른 수상자들보다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안타깝게도 상금은 수령 기간 1년이 훌쩍 지나서 받을 수가 없었다. 

 

-  초기에는 회의적이었다. 외과의사가 찾아낸 정신병 치료제라니. 그런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심지어 우연히 찾아냈다니 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신병 전문의들이 체계적으로 검증하면서 논란의 항히스타민제가 실제 정신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결과가 확실해진다. 그렇게 프랑스에서 최초의 정신병 치료제 클로르프로마진 chlorpromazine, CPZ이 시판되었다. 이 정신병 치료제는 미국에서도 시판되었는데, 처음에는 의사들이 사용을 주저했다. 그들은 기존에 익숙했던 상담을 더 선호했고, 무엇보다도 물질이 정신을 조절한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도 컸다. 

 

- 하지만 이 기적의 신약을 판매하려는 회사 SK&F도 집요했다. 제약회사는 이 약을 팔기 위해 의사들을 설득하기보다 주 정부를 설득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당시 정신병 환자들은 완치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평생 주에서 운영하는 정신병원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주 정부 예산에 갈수록 부담이 되고 있었다. 제약회사는 이 점을 노렸다. 즉, 평생 주에서 관리할 것이 아니라 약으로 완치시켜 정신병원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략은 주효했고, 주 정부가 의사들을 설득하면서 차츰 클로르프로마진은 자리를 잡아갔다. 

- 우리나라에서도 PTSD 환자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2015년 7,000명 수준이던 PTSD 환자는 2020년 1만 명을 넘었다. 절대적인 수치 못지않게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도 중요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완치가 어려우니까 계속 누적된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트라우마는 많다. 당장 2014년에는 국립중앙의료원에서 PTSD 관리를 위한 가이드라인 개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연구의 직접적인 계기는 대한민국 긴급구조대나 국제구조대의 PTSD를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처참한 시신을 목격하는 것 자체로도 충격인데 그것을 수습해야 한다거나 죽어가는 시신을 목격하는 것은 잊지 못할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도 폭력, 성적 학대, 재난 등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 우리는 토니 스타크도, 브루스 웨인도, 존 람보도 아니다. 히어로가 아닌 우리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히도 지금은 PTSD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시대다. 그러므로 혼자서 강해지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약한 것이 맞다. 그만큼 다른 이와 아픔을 공유했으면 한다. 람보도 마지막 남은 전우마저 암으로 잃은 후에 자신만의 전쟁을 시작했으며, 배트맨은 알프레드밖에 없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토니 스타크와 페퍼 포츠의 관계처럼 잔소리할 사람이 조금은 있다. 앞서 언급한 임상시험 결과도 MDMA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MDMA를 사용한 상담치료를 강조하고 있다. 모든 것을 약으로 해결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풀어내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환자가 경험한 상황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바라보며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많은 PTSD 환자는 자신이 PTSD 증상을 보인다는 것을 부정한다. 자신은 정상인데 불운했거나 나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러면서 자신을 치료하자는 지인의 도움을 냉정하게 뿌리치며 자신을 더욱 고립시킨다. 그런데 PTSD는 비정상이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 중의 하나다. 그러므로 자신이 특정한 트라우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본인이 먼저 느끼고 도와달라고 해야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 있다. 자신의 아픔을 가까운 누군가와는 공유했으면 한다. 우리 사회가 그 정도는 성숙했으니 말이다.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지난 수백 년간, 전쟁, 질병, 약은 서로 잘 맞물린 세 바퀴처럼 역사를 이끌어 왔다. 무통 분만에 쓰이면서도 2017년 미국에서만 2만 8,000여 명을 중독으로 사망하게 한 펜타닐, 제국주의 시절 아프리카 탐험가에게 지급된 기생충 약, 제2차 세계대전 중 개발된 페니실린, 병사들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사용된 마약류 각성제는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남북전쟁 당시 진통제로 더없이 소중하게 쓰인 모르핀의 원료, 아편은 아편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간 스페인 독감은 역설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하는 데 일조했다. 미국의 한 여성은 바닥에 떨어진 지폐를 줍고 왜 온몸이 마비되었을까? 교향을 선출하는 자리에서 추기경들이 왜 하나둘 죽어갔을까? 검은 비닐봉지와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왜 도쿄 지하철이 마비되었을까? 가미카제 특공대는 왜 비행 직전 일왕이 건넨 차를 마신 걸까?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군은 왜 아군 기지를 폭격했을까? 1분 만에 수강 신청이 마감되는 인기 강의 교수이자 약학자이기도 한 저자는 다소 자극적이지만 갖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곁들여, 아편부터 펜타닐까지, 메스암페타민부터 ADHD 치료제까지, 피조스티그민부터 PTSD 치료제까지, 약의 관점에서 역사의 그림자와 일상의 기원에 대해 서술한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수많은 전쟁, 질병, 의약품, 인물은 역사에서 미친 존재감을 자랑할 것이다. 이들이 펼치는 기나긴 악연의 역사에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
저자
백승만
출판
동아시아
출판일
202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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