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오노레 드 발자크] 미지의 걸작

일루젼 2022. 10. 21.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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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오노레 드 발자크 / 김호영

원제 : L'Elixir de longue vie / Le chef d'oeuvre inconnu 
출판 : 녹색광선
출간 : 2019.01.10 


       

        

이 책에는 발자크의 <영생의 묘약>과 <미지의 걸작> 두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영생의 묘약>을 다른 번역으로 읽어보고 싶어 선택했었는데, <미지의 걸작>이 충격적일 만큼 마음에 들어서 아주 만족스럽다. 읽은 것은 지난 주였지만, 카카오 사태로 인해 블로그도 불안정하고 감흥도 조금 가라앉힐 겸 지금에서야 리뷰를 쓴다. 

 

서문에 쓰인 편집부의 표현처럼, 발자크의 가장 큰 매력은 "인간의 욕망"을 선연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생동적이다. 때때로 섬뜩할 정도로. 일견 변덕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매 순간 자신의 욕망에 가장 충실한 선택을 해나가기에 설사 그와는 가치관이 다른 독자일지라도 그에게 설득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그의 인물들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캐릭터들인지도 모르겠다.

 

 


 

<영생의 묘약>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설정은 엘릭서를 '마심'이 아니라 '바름'을 통해 새로운 생을 얻는다는 점이다. 또한 작품 내에서 상세히 설명되지는 않았으나 돈 후안과 그의 아버지 모두 죽음 이후 그것으로 몸을 닦을 것을 부탁하므로, 아마도 죽은 뒤여야 제대로 작동하는 게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면, 그런 불안요소를 안고 가느니 아직 생전일 때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여러모로 합리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글의 초중반이 묘약의 존재만 제외하면 상당히 현실적인데 반해, 후반은 꽤 초현실적이고 풍자적이다. 모든 현상이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짐과, 인간은 자신 안에 없는 것을 볼 수 없음을 동시에 표현해낸다. 

 

인간에게 영생의 꿈은 시대를 초월한 열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 긴 시간동안 축적해나갈 경험이 과연 즐겁고 기쁘기만 할지? 그 열망 안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어'라는 마지막 순간의 후회와 스쳐가듯 짧게 지나가는 젊음에 대한 그리움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에 고정되어 정점을 찍은 다음에는, 그것으로부터 다시 풀려나오는 분해의 과정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때때로, 하나의 결정이 되어 영원성을 가진다는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가 아닌가, 그것은 광물계로 회귀하고자 하는 그리움인가 혹은 다음계의 광물계로 진일보하고자 하는 욕망인가 의문스러울 때가 있다. 

 

<골짜기에 피는 백합>까지 발자크의 글을 연이어 읽다보니 일시적으로 나에게도 그의 만연체가 스며든 모양이다. <영생의 묘약>은 <미지의 걸작>에 비하면 훨씬 문장 호흡이 짧고 으스스한 매력이 있으므로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미지의 걸작>

 

해당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생각하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아직 현대 미술에서와 같은 색채와 선 이론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 새로이 탄생한 루벤스 주의와 푸생 주의의 격렬한 대립을 소설을 통해 아름답게 정돈한다. 그의 결론은 현대 미술 이론의 결론과 거의 동일한데, 실제 사물에는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빛의 명암이 남기는 흔적을 우리의 눈이 '선'으로 인식할 뿐. 흔히 선화(데생)과 면화(색채)로 칭하는데, 지금 조금씩 미술을 배워가고 있는 입장이라 그런지 더욱 와닿는 문장이 많았다. 

 

특히, 프렌호퍼를 통해 표상되는 '절대적 이상성'에 대한 추구와 그 표현은, 감히 이 단편이 피카소에게 영향을 끼쳤기에 현대 추상화의 시류가 나올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싶을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작품 후반부에 실린 해석에 강력히 반박하고 싶은데, 나는 그가 '실제 인물의 미'에 굴복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실제'의 불완전함을 더욱 통렬히 깨닫고 진정한 '이상'은 절대 '표현할 수 없음'에 절망했다고 본다. 그의 흔들림은 자신의 카트린이 질레트보다 덜 아름다웠기 때문이 아니다. 그 자신도 때때로 그녀가 '곧 일어날' 때만이 그녀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절대적인 '미'는 누구도 구현할 수 없다. '똑같이'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표현으로도 그것은 '고정되는 순간' 자신의 절대성과 완전성을 상실한다. 그렇기에 그것을 다시 내면에 불러일으키는 추상성만이 그 '인상'을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있게 자극할 수 있다. 아름다움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은 대개 보편적이지만, 무수히 존재하는 취향만큼이나 '미'에 대한 감각과 기준은 개별적이다. 프렌호퍼가 그려내고 싶은 것은 그 누구에게도 '동일하게 절대적으로 감각되는 미'였다. 그리고, 그랬기에 그것은 '보편적인 상'으로서 존재할 수 없었다. 

 

나는 포르뷔스와 푸생이 볼 수 있었던 '발'에서 희망을 찾는다. 특정한 '형상'을 기대했던 그들에게는 자신 안의 '절대미'를 마주할 수 없는 안목이 없었고, 그들의 반응에 흔들렸던 프렌호퍼는 '그것을 볼 수 없음'보다 '그려낼 수 없음'의 의심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절대로 자신과 같은 것을 타인들은 볼 수 없으리라는. 푸생이 질레트를 화가의 눈앞에 드러낸 것을 잠시 후회했었다면, 프렌호퍼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것을 그것을 볼 수 없는 눈앞에 드러낸 것에 절망했다. 그에 대한 카트린의 대답은 질레트의 대사를 통해 나타난다. 내보여서는 안 될 것을 '확신한 승리'를 위해 내보인 그는 그녀를 잃었다. 

 

마지막 순간 프렌호퍼의 갈등과 내면 심리도 백미지만, 그 과정까지 흘러가는 그의 해박한 미술 지식과 미학적 가치관 또한 강렬하다. 특히 작품의 저작 시기를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그 놀라움은 몇 배가 될 것이다. 

 


 

며칠 동안 묵히는 동안 나름대로 난잡하지 않은 문장으로 감흥을 남겨보려 노력했지만, 현재로서는 여기까지인 듯싶다. 

언제고 다시 읽고 싶을 만큼 인상깊게 읽었다. 이번 계절 들어 읽은 책들 중 가장 감흥이 컸다. 

일독을 추천한다.  

 

 


   

 

- 발자크가 창조해 낸 수많은 인물들은 어떤 인물이건 간에 결코 미지근한 태도를 보여주는 법이 없다. 그의 작품들은 소설임에도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욕망 때문에 더욱 사실적인 생명력을 획득하게 된다. 인간의 결핍과 욕망을 무섭도록 직관한 그 통찰력이,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읽게 만드는 이유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발자크 자신이 결핍과 욕망을 쫓아 평생을 몸부림치며 살아왔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 발자크의 수많은 작품들 중 오늘날 독자들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와 아름다움으로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고심한 끝에, 두 가지 소설을 선정해 출판하게 되었다. 그 계기는 미국의 철학자 마샬 버만"한 시대가 단지 혼란과 불일치만을 보게 되는 어떤 것에 대해, 그다음 시대는 거꾸로 그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라고 이야기한 데서 기인한다. 두 소설 모두 발자크가 표현하고자 했던, 인간 안에 내재된 욕망의 모습들을 선명하게 잘 드러내고 있다. 

 

- 발자크 자신이 바라던 것들을 향해 걸어 들어가기를 단 한 번도 주저하지 않았던 것처럼, 두 편의 소설 속에서 그가 창조해 낸 주인공들 또한 불가능해 보이는 욕망 속으로 진격한다. 그리고 그 불가능의 세계와 격렬하게 충돌한다. 그토록 강렬하고 억누를 수 없는 욕구가 그들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종국에는 어디에 이르게 되는지, 독자 여러분은 아마도 제각각의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가령, 지나친 욕망은 해롭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파멸에 이른다 해도 어떤 것을 뜨겁게 욕망하기로 결심하거나. 

 


 

- "아! 그 얘기는 하지 맙시다." 젊고 잘생긴 돈 후안 벨비데로가 말했다. "이 세상에 영생하는 아버지가 한 사람 있는데, 불행하게도 내가 바로 그분의 아들이죠!" 
페라라의 화류계 여인들 일곱 명과 돈 후안의 친구들, 왕자조차도 두려움의 비명을 내질렀다. 이백 년 후 루이 15세 치하에서 풍류를 아는 사람들은 이런 도발적인 말에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란한 연회의 초반이라 사람들의 영혼이 아직 지나치게 온전한 상태였던 걸까? 촛불과 뜨거운 사랑의 외침, 금과 은으로 장식된 꽃병 형상, 포도주의 취기, 아주 매혹적인 여성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가슴 깊숙한 곳에 인간적이고 신적인 것에 대해 약간의 부끄러움이 남아 있던 걸까? 거품 이는 포도주의 마지막 물결 속에 연회가 완전히 잠겨버리기 전까지 남아서 투쟁하는 그 부끄러움 말이다.

 

- "나는 루비 한 개보다 이빨 하나가, 학식보다 권력이 더 좋아."

그는 종종 웃으며 이렇게 외치곤 했다. 이 다정한 아버지는 돈후안이 이야기하는 젊음의 경솔한 언동들을 듣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그에게 아낌없이 금을 쥐어 주면서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곤 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바보짓을 해도 네가 재미있는 것만 하거라."

그는 젊은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끼는 유일한 노인이었다. 아버지로서의 사랑은 눈부신 아들의 삶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노쇠함을 잊게 해 주었다.

 

- 이 자발적인 은둔자가 저택이나 페라라의 거리를 오갈 때는 마치 잃어버린 어떤 것을 찾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어떤 상념이나 추억과 싸우는 사람처럼 무언가에 몰두하면서, 온통 몽상에 잠겨 불안정하게 걸어 다녔다. 젊은이가 호사로운 연회를 베푸는 동안, 기쁨의 소리들이 저택에 울려 퍼지는 동안, 말들이 안뜰에서 앞발로 땅을 차는 동안, 시동(侍童)들이 주사위 놀이를 하며 서로 다투는 동안, 바르톨로메오는 하루에 빵 칠 온스만 먹었고 물을 마셨다. 약간의 닭고기를 주문할 때는 그의 충실한 동반자인 검은 스패니얼에게 뼈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시끄러운 소리들에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병을 앓는 동안 나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잠든 그를 갑자기 깨워도 이렇게 말하는 데 그쳤다. 
"아! 돈 후안이 집에 들어오는구나." 

 

- 지상에서 이처럼 편안하고 이처럼 너그러운 아버지는 결코 만나지 못하리라. 젊은 벨비데로는 격식 없이 아버지를 대하는데 익숙해 있었고, 버릇없이 자란 아이의 모든 결점을 다 갖추고 있었다. 그는 변덕스러운 화류계 여인이 늙은 애인과 사는 것처럼 아버지 바르톨로메오와 살았다. 미소로 그의 무례함을 용서받았고, 자신의 즐거운 기분을 팔았으며, 아버지가 마음껏 사랑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 병의 마개를 열면서 몸을 떨었다. 시신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을 때는 너무 떨려서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른 나이부터 방종한 궁정 풍속으로 인해 충분히 세속화된 젊은이였다. 우르비노 공작에 견줄 만한 숙고가 그에게 용기를 주었고, 강렬한 호기심의 감정이 그 용기를 더 자극했다. 나아가, 악마가 그에게 불어넣은 어떤 말이 마음속에서 강하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눈 하나만 적셔봐!' 

 

- 그는 생기로 가득 찬 눈을 보았다. 죽은 이의 얼굴에 심어진 어린아이의 눈이었다. 젊은 정기(精氣) 한가운데서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검고 아름다운 속눈썹이 보호하고 있는 그 눈빛은 여행자가 겨울밤 텅 빈 들판에서 발견하는 독특한 섬광들처럼 반짝거렸다. 이 타오르는 눈은 돈 후안에게 달려들고 싶은 것 같았다. 생각하고 비난하고 책망하고 위협하고 판단하고 말하는 것 같았고, 소리 지르고 물어뜯는 것 같았다. 인간의 모든 뜨거운 감정이 그 눈 안에서 동요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부드러운 애원이었고, 왕의 분노였으며, 사형수를 위해 은총을 구하는 젊은 여인의 사랑이었다. 또, 사형대의 마지막 계단을 올라가는 남자가 사람들에게 던지는 깊은 시선이었다. 이 생명의 한 조각 안에서 너무나 많은 생명이 번쩍였기 때문에, 돈 후안은 뒤로 물러났다. 그는 감히 그 눈을 쳐다보지 못한 채 방안을 서성거렸지만, 마루와 벽걸이 장식 융단에서도 그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열정과 생명과 지혜로 가득 찬 점들이 방 안에 흩뿌려졌다. 사방에서 그 눈들이 번뜩였고 그를 쫓아다니면서 짖어댔다.    

 

- 작은 영혼들은 위대한 영혼을 따르기 마련이라 생각하면서. 이따금씩 미래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을 값싼 동전 같은 우리의 소소한 생각들과 교환하려 하는 실수 말이다. 그들처럼 그도 발은 땅을 딛고 머리는 하늘에 둔 채 걸을 수 있었지만, 그는 앉아서 부드럽고 신선하고 향기로운 여인의 입술과 입 맞추며 쇠약해지는 것을 더 좋아했다. 마치 죽음처럼 그는 자신이 거쳐 가는 곳의 모든 것을 부끄러움 없이 집어삼켰고, 소유하는 사랑을 원했으며, 길고 편안한 쾌락을 즐길 수 있는 동양적인 사랑을 원했다. 그는 여자 중의 '여자'만을 사랑했기 때문에, 냉소가 그의 영혼의 자연스러운 태도가 되었다. 그의 애인들이 무아지경의 희열에 정신을 잃고 침대에서 하늘로 올라가려 하면, 그는 독일 학생처럼 심각하고 개방적이며 진지한 태도로 그녀들을 따라갔다. 흥분하고 정신을 잃은 애인이 '우리'라고 얘기할 때마다 그는 '나'라고 말했다. 

 

- 그는 매우 탁월한 방법으로 여자가 그를 이끌어가도록 했다. 또, 여자로 하여금 그의 심장이 무도회장의 첫 번째 여인에게 "춤추시겠어요?"라고 묻는 어린 고등학생처럼 떨린다는 말을 믿게 하는 데도 늘 뛰어났다. 하지만 그는 적절하게 포효할 줄도 알았고, 강한 검을 꺼내 연적인 기사들을 무찌를 줄도 알았다. 그의 단순함 속에는 조소가 숨어 있었고, 눈물 속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남편에게 "여행 장비 일체를 사주세요. 안 그러면 폐병으로 죽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여인처럼, 그 또한 언제든 울 수 있었다.

 

- 도매상인에게 세상은 봇짐이거나 유통 중인 지폐 뭉치다. 대부분의 젊은 남자들에게 세상은 여자다. 일부 여자들에게 세상은 남자다. 그리고 어떤 영혼들에게 세상은 거실이고, 집단이며, 동네이고, 도시다. 하지만 돈 후안에게 세상은 그 자신이었다! 우아함과 고귀함의 표본이며 매혹적인 정신의 소유자인 그는 자신의 배를 모든 해안에 정박시켰고, 누군가 자신을 이끌도록 내버려 두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데까지만 갔다. 

 

- 살면 살수록 그는 의심이 더 많아졌다.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그는 자주 용기가 무모함이 되는 것을 알아챘다. 신중함이 비겁함이 되고, 관대함이 교활함이 되며, 정의가 범죄가 되고, 섬세함이 어리석음이 되고, 성실함이 조직이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기이한 숙명으로 인해, 그는 진실로 올바르고 섬세하고 정의롭고 관대하고 신중하고 용기 있는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존경도 받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생각했다. '이 얼마나 냉정한 농담인가! 이것이 신의 뜻은 아니겠지.' 

 

- 한 순간에 방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군중들은 두려움에 떨며 돈 펠리페가 기절한 것을 보았고, 그의 아버지의 억센 팔이 그를 붙잡은 채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어떤 것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안티노우스의 얼굴만큼이나 젊고 잘생긴 돈 후안의 얼굴을 보았다.  

 

- 사랑스러운 몸매를 드러내는 매력적인 농촌 여인들은 백발의 노인들을 팔로 부축하고 왔고, 불처럼 뜨거운 눈빛의 젊은이들은 한껏 치장한 늙은 부인들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기쁨으로 몸을 떠는 부부들, 애인의 손에 이끌려온 호기심 많은 약혼녀들, 신혼부부들, 서로 손잡고 서 있는 겁먹은 아이들이 있었다. 서로 대조를 이루며 다채로운 색깔들로 빛나는 군중들, 꽃을 들고 여기저기서 반짝이는 군중들은 밤의 침묵 속에 부드러운 소요를 만들어냈다. 

 

- 성당의 커다란 문이 열렸다. 너무 늦게 도착한 이들은 밖에 머무르면서 세 개의 열린 문을 통해 멀리서 벌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오늘날 오페라의 신비로운 무대장식을 통해서도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즉, 새로운 성인에게 은총을 얻으러 몰려든 신앙 깊은 이들과 죄 많은 이들이 경의의 표시로 거대한 성당 안에 수천 개의 촛불을 밝혔고 그 빛이 건물에 마법 같은 모습을 더해주고 있었다. 검은 아치들, 기둥과 기둥머리들, 금은 장식으로 빛나는 깊은 공간의 제실들, 회랑들, 사라센 양식의 굴곡들, 우아한 조각의 섬세한 윤곽선들이 넘쳐흐르는 그 빛 속에서 각각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치 붉은 화로 속의 형상들처럼 변화무쌍하게 흔들렸다. 또, 성당 깊숙한 곳에서는 황금빛 성가대가 이 촛불의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 주제단(主祭壇)이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영예로운 자태로 우뚝 솟아 있었다. 

 

- 하지만 호화로운 금빛 램프들과 커다란 은빛 촛대들, 깃발들, 장식 술들, 성인들과 봉헌물들의 화려함은 돈 후안이 누워 있는 성궤(聖櫃) 앞에서 그 빛을 잃고 초라해 보였다. 이 무신론자의 몸이 보석, 꽃, 수정, 다이아몬드, 황금 그리고 세라핀의 날개처럼 하얀 깃털들로 장식되어 반짝였기 때문이다. 그의 시신은 그리스도의 그림이 있던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수많은 초가 그를 둘러싸며 빛을 발했고, 그 주위로 타오르는 듯한 촛불의 물결이 공기처럼 흐르고 있었다. 

 

- "Te Deum laudamus!"

 


 

 

- 1612년 말 십이월의 어느 추운 날 아침, 아주 얇아 보이는 겉옷을 걸친 한 젊은 남자가 파리의 그랑조귀스탱 거리에 있는 어떤 집 문 앞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아무리 쉬운 여자라 해도 첫 정부(情婦)인 여인의 집에 감히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연인처럼, 그는 한참 동안 거리를 걷다가 마침내 집 입구를 넘어 들어갔다. 

 

- 아래층 홀을 청소하던 늙은 여인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면서 왕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불안해하는 신참 궁(宮)처럼 계단마다 멈춰 섰다. 나선형 계단의 꼭대기에 다다른 그는 잠시 층계참에 머무르면서 아틀리에의 문을 장식하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형상의 문손잡이를 잡을지 말지 망설였다. 아마도 아틀리에 안에서는 '루벤스' 때문에 마리 드 메디시스 왕비에게 버림받은 앙리 4세의 화가가 작업하고 있을 터였다.  

 

- 젊은이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한창 젊을 때나 혹은 예술에 대한 사랑이 절정일 때 어떤 천재적 인물이나 걸작 앞에서 경험하게 되는 심장의 박동 같은 그런 깊은 감정을 느꼈다. 인간의 모든 감정에는 고귀한 영감에 의해 생성되는 시원의 꽃 같은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물론 그 영감은 항상 시들해져서, 행복은 단지 하나의 추억에 불과해지고 영광은 한낱 거짓말에 불과해지지만 말이다. 부서지기 쉬운 우리의 감정들 중 그 어떤 것도, 영광과 불행으로 점철되는 운명의 감미로운 형벌을 시작하는 예술가의 젊은 열정 같은 사랑과 닮은 것은 없다. 오만함과 수줍음, 모호한 믿음과 확실한 절망으로 가득 찬 그 열정. 

 

- 돈은 없지만 재기 있는 청년이 대가를 만나 심장이 강하게 고동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항상 가슴속에 현 하나가 부족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작품 속의 어떤 감정 하나가, 어떤 시적인 표현 하나가 빠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너무 일찍 미래를 낙관하는 허풍선이들은 그저 바보들에게나 재능 있는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이 점에서, 이 미지의 젊은이는 진정한 덕목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재능을 평가하는 기준이 일차적인 수줍음과 정의할 수 없는 순수함에 있다면 말이다.  

 

- 젊은이는 곧 한 그림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 그림은 이 혼란과 혁명의 시대에 이미 유명해진 것으로, 불행한 시절에도 성스러운 열정을 간직했던 몇몇 고집스러운 애호가들이 보러 왔었다. 이 아름다운 그림은 뱃삯을 내려하는 '이집트 여인 마리아'를 표현하고 있었다. 이 걸작은 마리 드 메디시스를 위해 그린 것이었지만, 그녀는 궁핍했던 시절에 그것을 다시 팔아버렸다. 
"자네의 성녀가 마음에 드는군."

 

- "그림이 괜찮아 보이십니까?" 
"허허!" 노인이 말했다. "괜찮냐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자네의 이 훌륭한 여인은 그럭저럭 요령 있게 그려졌네. 하지만 그녀는 살아 있지 않아. 자네와 같은 이들은 형상을 정확히 묘사하고 해부학 법칙에 따라 각각의 것을 제자리에 놓고 나면 모든 것을 다 했다고 믿는단 말이야! 자네들은 팔레트에서 미리 만들어진 살색으로 이 윤곽선을 채색하면서 한쪽을 다른 쪽보다 더 어둡게 유지하는 데에만 심혈을 기울이지. 그리고 테이블 위에 서 있는 나체의 여인을 틈틈이 바라보았기 때문에, 실물을 그대로 모사했다고 생각해. 스스로를 화가라 생각하고 신의 비밀을 훔쳐냈다고 생각하지!... 흠! 위대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통사법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만으로, 언어적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아! 자네의 성녀를 보게, 포르뷔스. 처음 보면 성녀는 근사해 보이네. 하지만 두 번째 보면 그녀가 그림의 배경에 달라붙어 있어 그녀의 육체를 둘러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네. 이것은 단 하나의 면만을 가진 실루엣이고, 절단된 외양이며, 뒤돌려 볼 수도, 위치를 바꿀 수도 없는 이미지일 뿐이야. 이 팔과 그림의 바탕 사이에 공기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가 없네. 공간과 깊이가 부족하기 때문이지. 물론, 투시법상으로는 모든 게 좋아. 대기 원근법도 정확히 지켜지고 있고. 하지만 그토록 칭찬할 만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아름다운 육체가 따뜻한 생명의 숨결을 받아 생기를 띠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네. 너무 탄탄하고 둥근 이 목에 손을 얹으면 마치 대리석처럼 차갑게 느껴질 것 같군! 아니야, 친구, 이 상아처럼 흰 피부 아래로는 피가 흐르지 않아. 그녀의 육체는 존재하지만, 관자놀이와 가슴의 투명한 황갈색 피부 아래에 그물처럼 얽혀 있는 혈관과 소섬유(小纖維)는 주홍빛 핏방울로 채워져 있지 않네. 이 부분은 꿈틀거리고 있지만, 다른 부분은 움직이질 않아. 삶과 죽음이 각각의 세부에서 서로 맞서고 있는 셈이지. 여긴 여자이지만, 저긴 조각이고, 나머지는 시체야. 자네의 창조물은 불완전해. 자네는 자네의 소중한 작품에 자네 영혼의 일부만을 불어넣었을 뿐이야.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자네의 손에서 여러 번 꺼졌고, 자네의 그림의 많은 부분이 천상의 불꽃을 거치지 못했어." 

- "자네는 두 체계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게 흔들렸어. 데생과 색채 사이에서, 엄밀한 냉정함과 눈부신 격정 사이에서, 그리고 옛 독일 대가들의 틀림없는 엄격함과 이탈리아 화가들의 적절한 풍요로움 사이에서 말이야. 자네는 한스 홀바인과 티치아노를, 알브레히트 뒤러와 파올로 베로네세를 동시에 모방하려 했지. 물론 그건 그럴듯한 야망이야! 하지만 어떻게 되었나? 자네는 엄격한 건조함의 매력도, 시선을 현혹하는 명암 효과의 마법도 얻지 못했어. 녹아버린 청동이 너무 약한 주형을 파열시키는 것처럼, 이 부분에서 자네가 흘려 넣었던 티치아노의 풍요로운 금색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보잘것없는 윤곽선을 파열하게 만들었네. 게다가, 그 윤곽선은 소멸되지 않은 채 베네치아풍 색채의 화려한 과잉을 억누르네. 자네의 형상은 완벽하게 그려지지도, 완벽하게 채색되지도 않았어. 그저 불행한 우유부단함의 흔적들을 여기저기 지니고 있을 뿐이지. 자네가 자네의 재능으로 두 개의 대립적 방식을 한데 녹여낼 만큼 뛰어나지 못하다고 느꼈다면, 둘 중 하나를 솔직하게 선택했어야만 했네. 그래야 생명의 조건 중 하나인 통일성을 얻을 수 있었을 거야. 자네는 그림의 배경에서만 진실하네. 자네 형상의 윤곽선들은 부정확하고 제대로 몸을 둘러싸지 못하며 배후의 어떤 것도 기대하지 못하게 하지."

 

- "저는 이 목을 나신의 상태에서 제대로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한 사실은, 자연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효과가 화폭 위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거죠..."
"예술의 임무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네! 자네는 비루한 모방자가 아니라 시인이야!"
노인은 난폭한 몸짓으로 포르뷔스의 말을 끊으며 격하게 소리쳤다. 
"다시 말해, 조각가라면 여자를 주조하는 순간 모든 작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자, 좋아, 자네 애인의 손을 주조해서 자네 앞에 놓아보게. 자네는 어떤 유사점도 없는 그저 끔찍한 시체 하나를 보게 될 거야. 자네는 결국 그 손을 정확하게 복제하는 대신 그것의 움직임과 생명력을 나타내 줄 인간의 끌을 찾으러 가게 될 걸세. 우리는 사물과 존재들의 정신과 영혼, 인상(人相)을 포착해야 하네. 그래, 효과! 효과를! 하지만 효과는 생명의 부수적 사건이지, 생명 자체는 아니야. 손, 아까 예로 들어서 다시 말하는 건데, 손은 단지 육체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포착해서 재현해야만 하는 어떤 생각을 표현하고 연장해 내는 것이야. 화가도, 시인도, 조각가도 원인과 결과를 분리시킬 수는 없네. 그 둘은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 속해있지! 진짜 투쟁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야! 수많은 화가들이 이러한 예술의 테마를 알지 못한 채 직관적으로만 성공을 거두지. 자네들은 여자를 그리지만 그녀를 보지는 못해! 그렇게 해서는 자연의 비밀을 손에 넣을 수가 없어. 자네들의 손은 스승의 작품에서 베꼈던 모델에 대해 사유하지 않은 채 그것을 재현할 뿐이지. 자네들은 형태의 내면으로 충분히 침잠하지 못하고, 우회하기도 하고 달아나기도 하는 그 형태를 충분한 사랑과 인내로 쫓지도 못해. 미(美)란 엄격하고 어려운 것이네. 결코 이런 식으로 도달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지. 그것의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고, 그것을 탐색하고 압축해야 하며, 그것이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긴밀하게 얽어매야 하네. 형태는 신화 속의 프로테우스보다 훨씬 더 붙잡기 어렵고 풍요롭고 굴곡 많은 프로테우스야. 긴 싸움을 거쳐야만, 미를 그것의 진정한 모습으로 드러낼 수 있지. 자네들! 자네들은 자네들 눈앞에 펼쳐진 형태의 첫 번째 외양에 만족하지. 혹은 기껏해야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외양에 만족해버리지. 하지만 승리하는 투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 패배해 본 적이 없는 그 화가들은 어떤 핑계들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네. 그들은 자연이 결국 진정한 영혼 속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끈질기게 매달리지. 라파엘로는 그렇게 했네."

 

- "그의 위대한 우월함은 내적 의미에서 비롯되네. 내적 의미는 그의 작품 안에서 '형태'를 부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지. 형태는 그림 안에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것이네. 그것은 관념과 감각을 서로 주고받기 위한 중개물이며, 하나의 거대한 시야. 모든 형상은 하나의 세계이네."

 

- 노인은 그가 생명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던 부분들을 따뜻하게 만들면서 말했다. 몇 개의 반점 같은 색들로 화질의 차이를 사라지게 했고, 열정적인 이집트 여인 그림에 필요했던 색조의 통일성을 복구시켰다.
"보게, 어린 친구, 결국 중요한 건 마지막 붓의 터치야. 포르뷔스는 그걸 백 번이나 시도했지만, 난 단 한 번으로 끝냈어. 우리 중 누구도 이면에 숨겨진 것의 의미를 알진 못하지. 이 점을 잘 알아야만 하네!" 
마침내 그 악마는 멈추었다. 그리고 침묵한 채 감탄에 마지않는 포르뷔스와 푸생을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이것은 아직 나의 '카트린 레스코' 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작품이면 아래에 서명할 만하지. 그래, 서명하겠네."

- "어제 저녁 무렵에 나는 그 그림을 끝냈다고 생각했지. 그녀의 눈은 촉촉이 젖어 보였고, 살갗은 떨리고 있었어. 땋아 늘인 그녀의 머리칼은 흔들리고 있었지. 그녀는 숨을 쉬고 있었다네! 그런데 평평한 화포 위에 실물의 입체감과 둥근 형태를 구현할 방법을 찾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 나는 햇빛에서 내 실수를 알아보았어. 아! 이 영광스러운 결과에 이르기 위해, 나는 배색 효과의 위대한 대가들을 철저히 연구했고, 빛의 왕인 티치아노의 그림들을 층층이 분석하고 뜯어보았지. 나는 그 최고의 화가처럼 먼저 부드럽고 농밀한 물감을 사용해서 밝은 색조로 내 그림의 윤곽을 잡았어. 음영이란 부수적인 효과일 뿐이기 때문이야. 이 점을 기억해 두게, 젊은 친구. 아무튼 내 그림으로 다시 돌아와서, 나는 투명성을 차츰차츰 감소시킨 반농담과 글라시를 이용해 가장 강한 음영들을 만들어 냈고 그것들이 가장 짙은 검정색이 될 때까지 계속했지. 일반적인 화가들의 음영은 밝은 색조와는 다른 성질을 지니지만 난 그렇지 않아. 그들에게 음영은 나무색이거나 청동색이고, 음영 속의 살색을 제외한다면 그것이 그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전부이지. 그들은 인물의 위치가 바뀌면 음영이 있던 자리가 지워지지 않고 밝아지지도 않을 거라 생각하지. 하지만 나는 가장 저명한 화가들도 다수 빠졌던 이 결함을 피할 수 있었어. 내 작품에서는 가장 강하고 두터운 음영 속에서도 흰 빛이 드러나지! 세밀하게 재단한 선을 그렸기 때문에 정확하게 그렸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무식한 인간들과 달리, 나는 내 인물의 외곽선을 무미건조하게 새기지 않았고 가장 세밀한 해부학적 세부까지 드러내 보이지 않았어.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는 선으로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야. 이 점에서, 조각가는 우리 화가들보다 진실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자연은 일련의 둥근 형태들을 내포하고 있고, 그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에워싸고 있지. 엄격히 말해, 데생은 존재하지 않아! 웃지 말게, 젊은이! 이 말이 자네에겐 아무리 이상하게 들린다 해도, 며칠 후면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될 거야. 선이란 인간이 대상에 대한 빛의 효과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야. 모든 것이 충만한 자연에는 선이 존재하지 않지. 사람들은 선으로 그리면서, 즉 사물들을 그것이 있는 배경으로부터 떼어내면서 형상을 만들지. 빛의 배분은 오로지 육체에 외양을 부여하는 데만 사용하고! 나 역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지만, 동시에 나는 그 윤곽선 위에 따뜻한 금색의 반농담 암영을 펴 바르네. 이 암영은 윤곽선이 배경과 만나는 자리를 정확히 지적할 수 없게 만들어 줘. 가까이서 보면, 이 작업은 희미해 보이고 정확함이 부족해 보이지. 하지만 두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모든 것이 확고해지고 멈춰 서고 뚜렷이 드러나네. 육체는 움직이고, 형태는 도드라지며, 모든 것의 주위로 공기가 순환하는 것이 느껴지지. 그러나 난 아직 만족을 못하네. 내겐 의심이 남아 있어. 아마도 단 하나의 선으로 그려서는 안 되겠지. 우선 가장 밝게 드러나는 부분에 집중한 다음 가장 어두운 부분으로 옮겨가면서, 배경을 통해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 거야. 우주의 신성한 화가인 태양도 그렇게 하지 않는가? 오! 자연, 자연이여! 일찍이 그대를 원근법으로 간파한 이는 누구던가? 이봐, 너무 많은 지식은 무지와 마찬가지로 결국 부정(否定)에 이르게 되지. 나는 나의 작품을 의심하고 있어." 

 

- 포르뷔스가 대답했다. "프렌호퍼 선생은 마뷔즈가 가르치고자 했던 유일한 제자이지. 프렌호퍼는 그의 친구이자 구원자이자 아버지가 되었고 마뷔즈의 열정을 충족시키는 데 그의 보물 대부분을 바쳤네. 그 대가로, 마뷔즈는 그에게 입체감의 비밀을 물려주었어. 인물들에게 그 놀라운 생명, 우리에게는 영원한 절망인 그 '자연의 꽃'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 말이야. 마뷔즈는 '그 입체감 기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엔가는 카를 5세의 입장식 때 입고 갈 꽃무늬 다마스 의복을 팔아 술을 마신 후 대신 꽃무늬를 그려 넣은 종이옷을 입고 그의 군주를 수행한 적도 있었지. 마뷔즈가 입은 옷의 독특한 화려함이 황제를 놀라게 했는데, 황제는 그 늙은 술꾼의 후원자에게 그 옷에 대해 칭찬하려 하다가 그것이 속임수라는 것을 알아채게 되었네. 프렌호퍼는 우리의 예술에 열정적으로 빠져 있는 인물이고, 다른 화가들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본다네. 그는 색채에 대해, 선의 절대적 진실성에 대해 깊이 성찰했지. 하지만 탐구가 지나쳐서, 탐구의 대상 자체를 의심하게 되었어. 절망의 순간들에, 그는 데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선으로는 오로지 기하학적 형상들만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 이것 또한 지나치게 절대적인 사고야. 왜냐하면 색채가 아닌 선과 어둠만으로도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지. 이는, 우리의 예술이 자연처럼 무한한 요소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네. 데생은 골격을 부여하고, 색채는 생명에 해당하지. 그런데 골격 없는 생명은 생명 없는 골격보다 더 불완전한 것이라네. 여하튼, 이 모든 것보다 더 진실한 무언가가 있네. 바로, 화가에게는 실천과 관찰이 전부라는 것이야. 또 추론과 시정(詩情)이 화필과 싸우면, 화가이자 광인인 저 어르신처럼 결국 의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지. 그는 위대한 화가이지만 불행하게도 부자로 태어났지. 그것이 그를 헤매게 했네. 그를 모방하지 말게! 작업하게! 화가는 손에 붓을 쥐고서만 성찰해야 하네." 

 

- "아!" 그가 소리쳤다. "자네들이 이토록 완벽한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겠지. 자네들은 여자 앞에 있으면서 그녀의 그림을 찾고 있어. 이 그림에는 너무나 깊은 공간이 있고 그 안의 공기도 너무 진짜 같아서, 자네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와 그것을 구별할 수 없을 거야. 예술이 어디에 있는가? 없어졌지, 사라졌어! 자, 이것은 여자의 형체 그 자체라네. 육체의 경계를 이루는 실물선과 색깔을 내가 잘 포착하지 않았나? 물속에 있는 물고기처럼 대기 속에 있는 물체들이 우리에게 나타내는 것이 바로 이런 현상 아니겠는가? 윤곽선이 배경에서 얼마나 잘 도드라져 보이는지 보게. 이 등 위에 손을 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칠 년 동안 햇빛과 물체의 결합 효과를 연구했었지. 이 머리카락들에 빛이 넘쳐흐르고 있지 않은가? 내 기억에, 그녀는 분명 숨을 쉬었어! 이 가슴이 보이나? 아! 누가 무릎 꿇고 그것에 경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살결이 꿈틀거리고 있어. 그녀는 곧 일어날 걸세, 기다려보게."

 

- "그녀는 완벽하게 아름다워."

그때, 푸생은 구석에서 잊혀 있던 질레트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나의 천사?"
갑작스레 다시 사랑에 빠진 화가가 그녀에게 물었다.
"나를 죽여줘!" 그녀가 말했다. "내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한다면 나는 파렴치한 년일 거야. 왜냐하면 난 당신을 경멸하니까. 당신은 나의 인생이야. 하지만 당신은 이제 내게 혐오감을 일으키지. 이미 난 당신을 증오하고 있는 것 같아."

 


 

- 내부로, 형태의 이면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야 한다. 사실적 재현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대상의 내적 발화들을 포착해야 하고,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영혼인 그것, 육체 위를 구름처럼 떠다니는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 아울러, 대상의 외관을 모사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의 내적 의미와 생명력, 영혼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선', 즉 데생보다 '색채'가 더 중요하다. 발자크는 17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프렌호퍼의 입을 빌어 당대 뜨겁게 달아올랐던 '색채 논쟁'과 관련해 데생 옹호자들(푸생 파)보다 색채 옹호자들(루벤스 파)의 손을 들어준다. 그보다 수십 년 앞서 칸트 Kant가 <판단력 비판>(1790)에서, 회화의 본질은 '선묘(線描)'이고 '색채'는 감각을 위해 대상을 생기 있게 만들어줄 뿐 진정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고 확언한 것과 정반대 되는 입장이다. 마치 색채 주의자 로제 드 필 Roger de Pile의 주장을 복기하듯, 발자크-프렌호퍼는 회화에서 데생이란 언어에서의 문법과 마찬가지로 화가가 익혀야 할 기본 기술이며, 화가는 색의 사용을 통해서만 회화를 '시(詩)'의 경지로, 진정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 이처럼 발자크는 '절대 회화'라는 꿈 혹은 강박증에 사로잡힌 한 예술가의 초상을 매력적인 이야기로 풀어냈다. 또, 절대적으로 완벽한 예술작품, 생명이 담긴 예술작품의 추구는 어쩌면 자신의 영역에서 최상의 경지에 다다른 예술가가 필연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는 암시도 슬며시 흘리고 있다. 따라서 앞서 제기했던 추측과 달리, 애초에 회화에 대한 발자크의 사유는 비재현적 회화나 비구상 회화까지 나아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프렌호퍼가 그의 그림을 통해 비재현적이고 비구상적인 추상화를 시도했다는 해석은 다소 무리한 해석 또는 억측일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그가 마지막에 경멸의 미소를 보였다 해도, 그는 그전에 이미 화가들의 지적을 받아들였고 자신의 실패에 괴로워했다. 이 또한 그가 과장된 연기를 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지만, 결국 그는 다음 날 자신의 그림을 불태워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니까, 절대 회화의 추구 끝에 일종의 물활론적 사유에 빠져 있던 그는 그림 속 여인이 아니라 진짜 살아 있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순간, 자신의 헛된 꿈 혹은 강박의 실체를 깨달았을 것이다. 십 년 동안 자신이 한 일이라곤, 살아 있지 않은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헛되이 덧칠하고 또 덧칠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오로지 관념만이 지배하던 자신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비로소 실재에, 현실에 눈을 뜬 것이다. 

 

(리뷰자 주 : 나는 이 해석에 반대한다!! 프렌호퍼는 한순간이나마 자신의 진실한 이상을 의심했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던 것이다. 각자가 볼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움은 그 자신의 내면에만 존재함을 잊고, '볼 수 있는 눈'을 갖추지 못한 이들 -물화한 미만을 찾는 눈을 가진- 에게 자신의 카트린을 드러내놓은 것에 대한 후회 속에, 그래서 그녀를 잃었음에 대한 슬픔 속에 죽어갔다고 본다. 이는 발자크가 최초로 마무리했던 끝, 질레트의 대사에서도 잘 드러나있다. 발자크가 덧붙인 이후 내용은 그에 관한 부연 설명이다.) 
 
- 마침내 <라 벨 누아죄즈>를 완성한 프렌호퍼는 그날 저녁 아무도 보지 못하게 그림을 벽 속에 숨기고 벽돌로 막아버린다. 그 사이에 그림을 본 사람은 화가와 모델, 화가의 부인, 그리고 화가를 도운 소녀뿐이다. 따라서 소설 속 그림은 보는 관점에 따라 '미지 inconnu'의 걸작일 수도 있고(비구상 그림을 시도한 경우) '미완 inachevé'의 걸작일 수도 있지만(물활론적 강박의 결과 물일 경우), 영화 속의 그림은 말 그대로 '미지의 걸작'으로 영원히 남게 된다. 

 

- 요컨대, 영화에서 그림이 분명하게 살아 있는 시간은 그것이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모델이 화가의 눈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순간, 화가가 그 모델을 바라보며 펜과 붓을 고르고 종이를 준비하고 종이 위에 선 하나를 긋는 순간, 그림은 잉태된다. 그리고 아틀리에라는 자궁 안에서 긴 인고와 투쟁의 시간을 겪은 후 비로소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한다. 탄생 후, 그림은 생과 사의 중간태에서 생명력을 하나의 기억처럼 새기며 존속한다. 화가와 함께 그리고 모델과 함께 살아 있던 시간 덕분에, 과거의 모든 삶이 소환되고 현재의 모든 감정들이 하나로 집약되던 그 강렬했던 '살아 있음'의 기억 덕분에, 그림은 화가의 영혼과 모델의 영혼을 생명의 흔적처럼 간직한 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영화는 소설에서 암시되었던 비구상적 회화를 넘어, 화가도 모델도 아닌 그림이 주체가 되는 회화 혹은 화가와 모델이 각자 주체가 되어 그림을 향해 나아가는 회화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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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사람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노동 강도로 글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그 글들은 문학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방대한 세계를 구축해냈다. 그가 창작한 소설들을 집대성한 <인간 희극>은 90편이 넘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등장인물만 2,000명에 이르는 한 사회의 축소판이다. 언젠가 그가 나폴레옹의 초상화 아래에 적었던 '그가 칼로 이루지 못한 것을 내가 펜으로 이룰 것이다'라는 문구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놀라운 것은, 삶의 파국이 거듭 되는 순간에도 그의 창작열은 집요하게 불타올랐다는 점이다. 어쩌면 로댕과 츠바이크는 실패 속에서 더욱 굳건해지는, 인간의 질기고도 강인한 집념을 발자크에게서 발견해 낸 것인지도 모른다. 

 

- 우선 책에 첫 번째로 실린 소설 <영생의 묘약>은 호색한의 대명사 돈 후안(Don Juan)을 통해 영원한 삶이라는 불가능한 영역을 욕망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매우 방탕하지만 어찌 보면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이 캐릭터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선사하여 여러 형태의 작품으로 창작되곤 했다. 스페인 작가 티로스 데 몰리나가 1630년에 돈 후안 이야기를 소설화했고, 프랑스 작가 몰리에르는 <동 쥐앙 또는 석상의 잔치>라는 극을 썼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작곡해 큰 성공을 거두었고, 현대 러시아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은 발레 <돈 주앙과 몰리에르>를 창조해냈다. 끊임없이 상대를 유혹한 후 그것이 달성되는 순간 여자를 버리는 행위를 거듭하다가, 종국에는 자신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끌려간다는 것이 돈 후안의 일반적인 줄거리이다. 그런데 발자크는 이 일반적인 돈 후안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줄거리로 늙음과 죽음에 관한 흥미로운 소설을 만들어냈다. 발자크의 돈 후안은 우연히 손에 넣게 된 영생의 묘약을 통해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고 부활을 꿈꾸는 인물로 그려진다. 

- 이 책의 두 번째 소설이며 표제작이기도 한 <미지의 걸작>은 '미술'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소설의 주인공은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작을 완성하고자 하는 노화가(프렌 호퍼)이다. 16세기에서 17세기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루벤스, 렘브란트, 티치아노, 홀바인, 뒤러, 라파엘로 같은 실제 대가들의 화풍을 언급하면서(작품에 등장하고 언급되는 화가들은 주인공 프렌호퍼를 제외하고 모두 실존했던 화가들이다), 발자크는 주인공 프렌호퍼의 입을 통해 자신의 해박한 미술이론을 한껏 펼쳐 보인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상상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이야기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 

- 완벽한 형태와 본질에 도달하려 했던 화가의 이야기는 출간 당시보다 후대로 갈수록 더 많은 이들의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폴 세잔은 이 소설을 읽은 직후 깊은 감명을 받아 "프렌호퍼가 바로 나다!"라고 외쳤고, 피카소는 1930년경 기꺼이 이 소설의 삽화를 맡아 그렸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영화 작가들의 영화 작가'로 불리는 프랑스 감독 자크 리베트가 이 소설에 영감을 받아 <누드 모델 La belle noiseuse>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소설이 단지 예술가들에게만 영감을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 출간을 앞두고 그의 동지인 엥겔스에게 '유쾌한 역설로 가득한 소설'이라며 이 책을 꼭 읽어보기를 권했다. 발자크 소설의 애독자였던 그는, 발자크를 부르주아 사회의 단면을 가장 예리하게 파헤치는 작가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엥겔스 또한 <발자크론>을 쓰면서 그를 위대한 리얼리스트로 칭하였다.  


2019년 1월
녹색광선 편집부

 


 

- 프란츠 포르뷔스(Frans Pourbus, 1569-1622): 17세기 초를 대표하는 초상화가 중 한 사람으로, 앤트워프에서 출생했으며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동명의 아버지와 구분하기 위해 '소(小) 포르뷔스(Frans Pourbus le Jeune)'라고도 불린다. 뛰어난 초상화 실력 덕분에 유럽 전체에서 명성을 얻었다. 앤트워프에서 견습생활을 마친 후, 네덜란드의 스페인 총독 궁정을 거쳐 이탈리아 만토바 궁정에서 채용되어 활약했는데, 루벤스도 이 시기에 만토바 궁정에서 활동했다. 이후, 1609년에 마리 드 메디시스를 따라 파리로 가서 작업을 하였다. 미지의 걸작의 내용과는 달리(루벤스 때문에 마리 드 메디시스에게 버림받은 앙리 4세의 화가라는 표현), 그는 죽을 때까지 마리 드 메디시스의 궁정화가로 봉직했다. 작품에 드라마틱한 상황을 표현하거나, 풍경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상의 의상이나 장신구 등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방식의 초상화를 다수 남겼다. 

 

-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 푸생은 고전주의를 주도한 17세기의 가장 유명한 서양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8세가 되는 해에 파리로 가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는다. <미지의 걸작>에서 발자크가 상상한 부분이 바로 이 시기에 해당된다. 르네상스 미술인들은 '수학'이 그들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학문이라 여기고 건축, 회화, 조각에 수학을 적용한다. 푸생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 수학적 원리를 적용한 소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고전주의자답게 역사의 한 장면을 선택해서 그리는 것을 선호했으며, 드라마틱한 상황 하에서 인물의 감정이 생생히 드러나는 작품들을 다수 남겼다. 명확한 형태를 보여주는 그의 작품에 대해 세잔은 '자연에서 푸생을 재현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은 후대에 역설적이게도 푸생에게 세잔과 대비되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17세기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벌어진 '색채 논쟁'은 푸생주의 (데생 옹호)대 루벤스주의(채색 옹호)의 대립으로 평가된다. 푸생을 추앙하던 궁정 수석 화가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과 루벤스를 숭상하던 비평가 로제 드 필(Roger de Piles)이 색채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다. 이 논쟁은 선을 중시한 푸생의 화풍과 색을 중시한 루벤스의 화풍 중 '어느 것이 더 예술적 가치가 있는가?'라는 논쟁으로 17세기 내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다. 이탈리아 중심의 남유럽 회화와 플랑드르 중심의 북유럽 회화를 하나로 종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화려함과 드라마틱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의 그림들은 강렬한 색상, 빛과 어둠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준다. 수준 높은 인문학적 지식과 화려한 언변으로 외교관으로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왕족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세 폭 제단화인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는 앤트워프에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을 위해 그려졌는데, 이 작품들로 루벤스는 플랑드르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 그림들은 일본 지브리 사의 유명 애니메이션인 <플란다스의 개>에서 주인공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었던 그림들이기도 하다. 1621년 루이 13세의 어머니이자 앙리 4세의 왕비였던 마리 드 메디시스가 루벤스에게 그녀의 생애에 관한 24개의 대형 연작들을 의뢰한다. 그는 그녀의 일생을 신화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 총 21개의 연작이 완성되었고, 이는 그의 모든 미술적 기교가 집대성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미지의 걸작>에서는 포르뷔스가 루벤스 때문에 마리 드 메디시스에게 버림받았다고 설명되는데, 실제로 두 사람이 마리 드 메디시스 왕비를 위해 활동한 시기는 거의 겹치지 않는다. 다만, 루벤스의 마리 드 메디시스 연작이 지니는 명성이 포르뷔스의 마리 드 메디시스 초상들보다 더 우위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암시한 듯하다.


-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édicis, 1573-1642):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 귀족 집안인 메디치 가문 출신의 프랑스 왕비, 앙리 4세의 부인이자 루이 13세의 모후다. 이탈리아어로는 마리아 데 메디치(Maria de' Medici)라고 부른다. 

- 앙리 4세(Henri VI, 1553~1610): 프랑스의 왕. 낭트칙령을 통해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존을 추구하였다. 1589년 즉위해 1610년 광신적 가톨릭교도 라바이약(Ravaillac)에게 암살당할 때까지 통치했다. 

 

- '이집트 성녀 마리아'를 가리킨다. 354년경 이집트에서 태어난 그녀는 열두 살 때 집을 나와 알렉산드리아에서 17년간 창녀로 살았다. 서른한 살이 되던 해 순례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고, 예루살렘에 건너가서도 순례자들을 유혹하며 돈을 받는 생활을 계속했다. 얼마 후 그녀는 예루살렘 성당에서 신비스러운 힘을 느끼고 자신의 삶을 참회하며 고행자로 살기로 결심했고, 요한 세례자가 살았던 광야로 가서 47년간 야생의 열매를 먹으며 속죄의 삶을 살았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뱃사공에게 몸을 팔아 예루살렘으로 가는 뱃삯을 대신했다. 푸생도 '이집트 성녀 마리아'의 데생을 그린 바 있다. 

  

- dégradation aérienne: 직역하면 '대기의 점진적 약화'이나, 여기서는 '대기 원근법(perspective aérienne)'을 가리킨다. 대기 원근법(大氣遠近法)이란, 공기의 작용으로 물체가 멀어짐에 따라 빛깔이 푸름을 더하고 채도가 감소하며 물체 윤곽이 희미해지는 현상에 바탕을 두고 원근감을 나타내는 표현법을 말한다.

 

-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le Jeune, 1497-1553): 독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며, 특히 초상화 예술의 전통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화가로 평가받는다. 바젤, 이탈리아, 런던 등지에서 명성을 얻고 영국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된다. 서양 미술사에는 두 명의 한스 홀바인이 있다. 아버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Ancien, 1465-1524)과 아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le Jeune, 1497-1553)이다. 좀 더 유명한 아들 홀바인은 독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며, 특히 초상화 예술의 전통을 그 정점으로 끌어올린 화가로 평가받는다. 모델에 대한 냉정하고 예리한 관찰과 정확한 세부묘사, 풍부한 빛, 명쾌한 화면 구성 등이 특징이다. 독일과 스위스에서 이미 명성을 얻었으나, 영국으로 건너가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된다. 그가 영국에서 그린 그림의 모델들은 헨리 8세 시대의 드라마를 이루던 인물들이다. 절대 군주 헨리 8세, <유토피아>의 작가 토마스 모어, 토마스 모어의 정치적 숙적이었던 토마스 크롬웰과 같은 인물들이 한스 홀바인에 의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헨리 8세의 네 번째 결혼에 한스 홀바인의 초상화가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재상이던 토마스 크롬웰은 '클레페 공국의 앤'을 왕비로 추천하면서 한스 홀바인이 그린 앤의 초상화를 헨리 8세에게 보여주었다. 왕은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고, 결혼은 성사되었다. 그러나, 왕은 실제 신부의 얼굴이 초상화와는 다르게 아름답지 않다며 격노했고, 결국 토마스 크롬웰은 왕의 총애를 잃고 만다. 홀바인이 얼마나 인물의 장점을 잘 살리고 단점을 훌륭하게 보완하여 그렸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c.1488-1576):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 16세기 베네치아 화파를 완성한 거장이다. 빛의 표현에 뛰어났으며, 풍부한 색채감을 보여 주는 걸작을 다수 남겼다. 16세기 중엽 서양 미술사의 중심 도시 중 하나였던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화가다. 조반니 벨리니에게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았으며, 동문이며 스승이기도 한 조르조네에게도 영향을 받게 된다.(이 시기의 두 대가의 화풍은 꽤 비슷해서, 하나의 작품을 두고 과연 두 화가 중 누구의 작품인지에 대한 논의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조르조네가 일찍 사망한 것과 달리 장수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찬란한 빛의 묘사가 돋보이는 <성모승천>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티치아노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또한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관능적인 포즈와 도발적인 시선으로 유명하다. 색채를 단순히 많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가장 순수하다고 여겨지는 색채를 결정하여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훌륭한 화가에게는 오직 세 가지 색, 검은색, 흰색, 빨간색만 필요하다." 살아생전 큰 명성을 얻었기에, 후원자들이 줄을 섰다. 그는 종이에 예비로 밑그림을 정교하게 그리지 않은 채 캔버스에 직접 간략한 스케치만 하고 작품을 그렸는데, 그에게는 구도의 균형을 잡고 조화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색채'였기 때문이다. 유럽 화단에서는 "형태는 미켈란젤로에게서, 색채는 티치아노에게서 배워라"라는 말이 오랫동안 전해져 왔다.

 

-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 수많은 자화상을 남긴 독일의 화가로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로 불린다. 구텐베르크에 의해 촉발된 인쇄물 유통망을 활용해 자신의 작품을 유럽 전역에 판매했고,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독일 미술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화가. 북유럽 미술에서 최초로 르네상스를 성취한 화가로 평가된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판화가, 작가로도 활동하며 다방면에 두각을 나타냈다. 회화 작품을 통해 이미 명성을 얻은 상태에서 판화를 통해 그 명성을 더욱 드높이고, 대중적인 성공도 함께 거두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1498년 제작된 목관 연작 <요한 묵시록>으로, 이것은 유럽 목판화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일컬어진다. 이 작품은 16점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묵시록의 네 기사>가 특히 유명하다. 정밀한 선으로만 표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명암과 질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에라스무스는 '검은 선의 아펠레스(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화가)'라며 그의 표현력을 칭송하기도 했다.

'나,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세에 지울 수 없는 색으로 나를 그렸다'

그의 바램대로 그는 사후에도 명성을 잃지 않았다. 그의 판화는 전 유럽에서 끊임없이 복제되었으며, 뉘른베르크에는 뒤러의 동상이 세워졌다.  

 

-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1520):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화가이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흔히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불린다.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조형, 감정, 빛, 공간 표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504년, 그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는 피렌체로 이주하고, 이곳에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다른 두 천재(다 빈치, 미켈란젤로)와는 달리 온화하고 상냥한 성품에다, 뛰어난 미남이라 교황을 비롯한 고위층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르네상스 절정기의 대가답게, 그의 그림은 고전주의를 완성한 것으로 칭송받으며 19세기 전반까지 아카데미의 규범으로 받들어지게 된다. 특히 <아테네 학당>은 플라톤, 유클리드,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이 학당에 모인 것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또한 만년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미완성으로 남긴 <그리스도의 변용>에서는 기존의 고전양식을 해체하고 바로크 양식으로 이행하려는 싹이 엿보이기도 한다. 교황청의 건축, 미술 분야 감독을 맡고 있던 라파엘로는 37세에 갑자기 요절한다. 그가 상당히 마음에 들어 추기경 직위까지 내리려 했던 교황 레오 10세는 그를 애도하며 국장을 치르고, 유해를 로마 판테온에 안치한다. 

 

- 얀 마뷔즈(Jan Mabuse / Jan Gossart, 1478-1532): 플랑드르 회화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을 도입한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많은 플랑드르 화가들처럼 벨기에에서 태어나, 1503년엔 앤트워프 화가 조합에 소속되어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508년경 로마로 파견되어 고대 조각, 르네상스 건축에 대해 공부를 시작하는데, 이후 이탈리아 화풍을 조금씩 작품에 도입한다. 즉, 고전적 건축물을 배경으로 신화적 인물을 즐겨 묘사한 작품들을 Demo 남기게 된 것이다. 그는 전통과 새로운 흐름 안에서 혼돈의 시간을 보내며, 15세기 플랑드르 화가들의 회화 전통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새로운 양식도 받아들인 균형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고전적 주제와 누드화를 즐겨 다루었고, 후기 고딕의 관능성에 정밀한 사생을 결부시킨 마니에리스트로 보는 이들도 있다. 

 

- 조르조네(Giorgione, 본명 Giorgio Barbarelii, 1478-1510): 16세기 베네치아 미술의 혁신을 불러온 장본인이다. 시적이고 암시적인 풍경화로 당대 미술의 혁신을 불러왔으며, 그가 이룬 성과를 티치아노에게 계승하였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더욱 신비하게 남아있는 화가이기도 하다. 1477 년 이탈리아 베네토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베네치아로 건너가 12세부터 조반니 벨리니의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는다. 벨리니는 당시 베네치아 화파를 이끌고 있던 화가였고, 조르조네는 벨리니로부터 색채에 대한 선택과 색을 다루는 법을 익힌다. 대표작인 <폭풍우>에서 그는 풍경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을 처음으로 시도한다. 도시의 풍경을 인물만큼 중요한 요소로 격상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그림 속 요소들은 수수께끼 같은 의미를 품고 있어 여전히 의미하는 바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다. 전체적인 이미지를 따뜻한 빛으로 밝게 처리한 기법은 오늘날 '조르조네스크'라 불린다. 32세로 페스트에 걸려 생을 마감했는데,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입한 새로운 양식은 같은 시대의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 르 코레주(Le Correge / Antonio Allegri, 1489-1534): 본명은 안토니오 알레그리, 코레주 지방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르 코레주'라 불린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최전성기를 대표하며, 명암법, 빛, 채색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다. 코레주는 색과 빛을 사용하여 보는 사람의 시선을 형태의 방향으로 유도해내는 방식의 명화들을 남겼다. 즉 빛의 배치에 따라 감상자의 시선은 밝은 쪽으로 인도되었고, 이로 인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을 살릴 수 있었다. 그의 대표작인 <성모승천>은 파르마 성당의 둥근 돔(쿠폴라) 천장에 그려진 그림이다. 중앙의 밝은 빛 표현과 숙련된 원근법을 통해 실제로 성당 천장에 뚫려있는 구멍으로 성모가 승천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그의 그림은 이후 18세기 로코코 회화의 섬세함과 낭만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 16세기 후반 베네치아의 화가, 티치아노에게 영향을 받아 화려한 색채의 대형 장식화를 주로 그렸다. 

 

- physionomie: 프랑스어 physionomie는 단순한 '얼굴 생김'이나 '표정'을 뜻하는 것을 넘어, 사물과 존재의 특별한 외적 형상인 '인상(人相)'을 가리킨다. '인상'은 사물, 인간, 자연 등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들의 외적 형상을 뜻하는데, 그 외적 형상은 반드시 정신이나 영혼 등 내적 특질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 누벨바그 감독 중 한 사람인 자크 리베트 Jacques Rivette는 평소 발자크의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그는 1991년에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을 각색해 240분에 이르는 긴 장편영화 <누드 모델 La bellenoiseuse>을 내놓는다. 프랑스어 제목 'La belle noiseuse(라 벨 누아죄즈)'는 '아름다운 싸움꾼'이라는 뜻으로, 영화 속에서 화가 프렌호퍼가 완성하고 싶어 하는 그림의 제목이기도 하다. 인트로에서 밝히듯 소설로부터 자유롭게 영감을 받아 만든 이 영화에서, 리베트는 소설 속 프렌호퍼가 꾸었던 절대 회화의 꿈, 살아 있는 그림의 꿈을 다시 구현하고자 한다.  
 
 

 

 

 

 

 

 

 
미지의 걸작(양장본 HardCover)
발자크Balzac의 소설 『미지의 걸작Le chef d'oeuvre inconnu』은 회화에 대한 그의 철학적 사유를 소설로 풀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그에 관한 개인적 견해와 전망을 내놓으며 끝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자크는 『미지의 걸작』에서 분명 시대를 앞서간 사유를 보여준다. 첫 출간 당시 불과 서른두 살이었던 젊은 소설가가 문학이 아닌 회화와 관련해 당대 첨예하게 대립되던 사고들을 담아내고 나아가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 보여준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후대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이 짧은 소설로 인해 커다란 충격을 받거나 특별한 영감을 얻은 것도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이 일군의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열광을 넘어, 그리고 “문자로 묘사된 최초의 추상화” 혹은 “추상 회화의 문학적 기원”이라는 평가를 넘어, 수많은 독자들을 사로잡고 매혹시킨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절대 회화’ 혹은 ‘살아 있는 그림’이라는 인류의 아주 오래된 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예술작품, 즉 실재에 대한 재현이 아니라 실재 그 자체로서 우리와 함께 현존하는 예술작품은 사실 인류가 선사시대에 동굴 벽화를 그리면서부터 꾸어 왔던 꿈이다. 실재와 너무나 똑같아서, 혹은 실재보다 더 강렬한 진실성과 존재감을 담고 있어서 그 자체로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는 예술작품에 대한 꿈 또는 상상. 소설은 이 보편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꿈에 대한 추구를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드라마틱한 서사로 풀어낸다. 젊고 패기만만한 젊은 화가 니콜라 푸생. 그는 유명화가 포르뷔스의 집에서 천재 '프랜호퍼'를 만난다. 프랜호퍼는 최고의 회화 실력을 가진 화가로,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걸작 <카트린 레스코>를 10년에 걸쳐 비밀리에 그려왔다. 작품은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았지만, 젊은 푸생은 이 작품을 본다면 자신도 진정한 걸작을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그림의 완성을 앞두고 보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이국땅으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프랜호퍼. 아직 완성되지 못한 <미지의 걸작>을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푸생은 자신의 애인이자 뮤즈인 아름다운 '질레트'를 이용하여 프렌호퍼에게 해서는 안 될 제안을 하게 되는데…
저자
오노레 드 발자크
출판
녹색광선
출판일
201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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