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Journal de deuil

일루젼 2022. 10. 18.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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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롤랑 바르트 / 김진영

원제 : Journal de deuil 
출판 : 걷는나무 
출간 : 2018.11.20 


       

롤랑 바르트는 내게 철학자라기보다는 작가로서의 인상이 훨씬 강한 사람이다. 그의 <애도 일기>를 이제야 읽게 되었는데, 그의 기이할 정도의 상실감과 그것을 표현해내는 유려한 문장은 그것들을 읽는 이들마저도 깊은 우울감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내가 생각하는 <애도 일기>는 다음과 같다.

자신의 감정을 오랜 시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감각하며 '정확히' 표현해내고자 노력한 흔적들.

롤랑 바르트는 이 글들이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마망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들은 '그가 본', 그리고 '그가 기대한' 마망의 모습과 그 상실로부터 오는 비애다. 물론 나는 그의 감정과 이 문장들이 의미가 없다거나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본질적으로 무언가를 '소유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상실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존재의 부재는 그 자체보다, 그 존재와 함께 있는 순간의 '자신'의 상실로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어머니의 사진을 대체하는 푼크툼과도 같다. 롤랑 바르트가 바라본 것이 어머니의 '본질'이었다면, 그것은 '앙리에트 벵제'의 본질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마망'의 본질일 것이다. 그런 것들은 모두 개인의 안에 내재화된 관념으로써만 실존할 수 있다. 어떻게든 표현해낸 관념들은 그것을 표현하고자 덧씌운 형태의 조잡성들로 인해 완전한 이상성을 상실하고 만다. 더욱 서글픈 것은, 타자와의 공유를 위해 부여한 바로 그 형태로 인해 주체와 타자는 절대로 같은 것을 감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체화가 진행될수록 왜곡과 오해는 깊어간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히려 추상화가 전달하는 '인상'이야말로 오히려 더욱 모두에게서 동일한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다. 

(롤랑 바르트는 이를 "나의 슬픔이 수렴되는 것, 일반화되는 것(키르케고르)을 나는 참을 수가 없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같은 것을 감각하는 것'과 '일반화되는 것' 사이의 섬세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하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둔감하게 살고 있다.) 

 

직전에 읽었던 책이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완전하고 완벽한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 불가해함에서 오는 절망.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절대적인 이해가 가능한가는 또 다른 레이어다. 그 자신이 그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확실한 '인상',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설명해나가는 것이 - 자신의 필터와 색으로 오염시켜서만이 무색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 우리의 본질적인 절망이며 축복이다. 

 

 

사족.  "나는 슬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슬퍼하는 것이다."(1977. 11, 30.) 나는 이 문장이 '슬픔'을 수동적으로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acte'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것을 더 깊게 파고들어가면 그가 슬픔 자체와 동화되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으나, 나 = 슬퍼하는 것이라는 동치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다른 부분들이 남아있다. 그는 모든 존재로서 '슬퍼함'을 행하고 있는 상태이다.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

 

 

 

- 1997년 10월 25일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날부터 롤랑 바르트는 <애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반 노트를 사등분해서 만든 쪽지 위에 바르트는 주로 잉크로, 그러나 때로는 연필로 일기를 써나갔다. 책상 위에는 이 쪽지들을 담은 케이스가 항상 놓여 있었다. 

 

- 이 글들은 완결된 -저자가 손수 마무리한- 책이 아니다. 이 글들은 바르트가 쓰고자 했을 어떤 책의 가정들, 그 작품을 완성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그래서 그 작품에게 빛을 던져주고 있는 텍스트이다. 

- 나탈리 레제 Nathalie Leger

 

- 이 책은 베르나르 코망 Bernard Comment 에릭 마티 Érie marty의 화해로운 공동 작업으로 태어났다. 
 


 

- 10. 27. 

SS: 내가 당신의 손을 잡아줄게요. 당신에게 휴식을 주겠어요. 

RH: 지난 반년 동안 당신은 완전히 지쳐 있었어요. 슬픔, 우울, 일 등등으로 당신도 그걸 잘 알고 있죠. 하지만 당신은 말을 안 하죠, 늘 그랬듯이. 

그러나 별로 반갑지 않은 위안들. 애도는, 우울은, 병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은 나를 무엇으로부터 낫게 하려는 걸까? 어떤 상태로 어떤 삶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려는 걸까? 애도가 하나의 작업이라면, 애도 작업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존재, 아주 귀중해진 주체다. 시스템에 통합된 그런 존재가 더는 아니다. 

 

- 10. 27.

"두 번 다시 볼 수 없구나,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구나!"

그런데 이 말속에는 모순이 들어 있다.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라는 말은 영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 스스로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니!" 이 말은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어떤 존재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 10. 27.
빈소를 찾아온 너무 많은 사람들. 그럴수록 커지기만 하는 피할 수 없는 공허. 사람들 곁에서 혼자 누워 있는 어머니 생각. 한꺼번에 허물어지는 모든 것들. 

 

거대하고 긴 슬픔의 성대한 시작인 이 모든 것들.

이틀 만에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 아무런 거부감 없이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다.

 

- 10. 31. 
나는 이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결국 문학이 되고 말까 봐 두렵기 때문에, 혹은 내 말들이 문학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다름 아닌 문학이야말로 이런 진실들에 뿌리를 내리고 태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 11. 4. 
오후 여섯 시경 : 집 안은 따뜻하고, 편안하고, 밝고 깨끗하다. 열심히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나는 집 안을 정리한다(그러니까 나는 쓰라린 마음으로 즐긴다). 이제부터는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나는 나 자신의 어머니인 것이다.

 

- 11. 16.
나는 이제 가는 곳마다, 카페에서나, 거리에서나 만나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음이라는 시선으로, 그러니까 그들 모두를 죽어야 하는 존재들로 바라본다. 그런데 그 사실만큼이나 분명하게 나는 또한 알고 있다. 그들이 그 사실을 결코 알고 있지 못하다는 걸.  

 

- 11. 29. 
'애도'
나는 독백 속에서 AC에게 나의 슬픔에 대하여 설명한다. 나의 슬픔이 얼마나 혼돈스러운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하여, 그래서 나의 슬픔이 흔히 말해지는 그러니까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그런 슬픔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정신분석학적인 슬픔은 결국 시간의 흐름을 따르고, 변증법적으로 느슨해지고, 조금씩 사라지면서, 마침내 '화해에 이른다.' 하지만 나의 슬픔은 그렇게 즉시 정화되지 않는다. 나의 슬픔은, 그와는 반대로, 물러가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AC는 대답한다. 슬픔은 원래 그런 거라고(그러면서 그는 앎의 주체, 수렴의 주체가 된다).

나는 그 주체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나의 슬픔이 수렴되는 것, 일반화되는 것(키르케고르)을 나는 참을 수가 없다. 그건 마치 사람들이 나의 슬픔을 훔쳐 가버리는 것 같아서다. 

 

- 11. 30.

우울의 '순간'에 나는 매번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나의 슬픔을 실현하고 있다,고.

다시 말해서 : 애도의 온전한 강렬함 안에서

 

- 1978. 1. 16.

자꾸만 적어지는 기록들 - 그 대신: 절망 - 늘 갇혀 지내는 불쾌함, 그러다가 돌연히 습격해서 이 불쾌함을 중단시키는 절망감(오늘, 정망. 불쾌함에 관해서 쓰지는 말자).

 

모든 것이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그 어떤 내면의 허무가 버림받았다는 감정을 깨워낸다. 

다른 사람들, 그들이 보여주는 생의 의지, 그들의 세계를 나는 견뎌낼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리 있어야 한다는, 숨어 지내야 한다는 결심이 자꾸만 강해진다. (Y.의 세계를 나는 더 참아낼 수가 없다). 

 

- 1978. 3. 20. 
이런 말이 있다(마담 팡제라가 내게 하는 말) :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차츰 나아지지요 - 
아니,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 

 

- 1978. 4. 10.

위르트에서. 와일러의 영화를 보다. 베트 데이비스가 등장하는 <작은 여우들>

.어느 한 장면에서 딸들이 '파우더'에 대해서 말한다.

.어린 시절이 한꺼번에 다시 눈앞에 떠오른다. 마망. 분가. 모든 것이 다시 존재한다, 지금 여기에. 나는 여기 존재한다. 

-> 나는 늙지 않는다. 

('파우더'가 있던 그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새롭다')

 

- 1978. 4. 12일경

기록을 하는 건 기억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이렇게] 기록을 하는 건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망각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자기를 이겨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그 고통을. 돌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없는 그런 것. 

 

'기념비'의 필연성.

Memento illam vixisse.
 

- 애도.

가르데 Gardet

<신비학>, 24쪽

 

[빛의 깜박임, 빠르게 지나가는 밝음과 어둠, 궁극적인 어떤 것의 날갯짓]

(인도)

= "그 어떤 래디컬한 언명에 대한 그 무엇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확인, 경험으로 농축되어 지적인 것이 된 무지가 알고 있는 길."

.슬픔의 페이딩 fading = 사토리 Satoris (42쪽을 보라)

"그 어떤 흔들림도 없는 정신"

("일체의 주체-객체 구분이 폐기된")

 

- 1978. 5. 18.

사랑이 그런 것처럼 애도의 슬픔에게도 세상은 비현실적이고 귀찮은 것일 뿐이다. 나는 세상을 거부하면서,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 세상이 나에게 주장하는 것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다. 나의 슬픔을, 나의 삭막함을, 나의 무너진 마음을, 나의 날카로운 신경을 세상은 자꾸만 심해지게 만든다. 세상이 나를 점점 더 기운 빠지게 만든다. 

 

- 1978. 5. 31.

내가 필요로 하는 건 홀로 있음이 아니다. 그건 (작업의) 익명성이다.

 

나는 분석적 의미에서의 '작업'(애도 작업, 꿈 작업)을 진정한 '작업'으로 완전히 바꾸려고 하고 있다 - 글쓰기 작업.

 

그 이유는:

(사람들이 말하듯) 커다란 생의 위기(사랑, 애도)를 이겨내고자 하는 '작업'은 너무 급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 그런 작업은 나의 경우 글쓰기를 통해서만, 또 글쓰기 안에서만 비로소 완결될 수 있는 것이다.

 

- 1978. 6. 5

주체는 (이건 점점 분명해지는 사실인데) '인정을 받으려는' 목적을 따라서 행위를 하는 (애를 쓰는) 존재다. 

 

나의 경우를 돌아보자면, 지금 이 시점에(마망이 죽고 없는 지금) 나는 (내가 쓴 책들을 통해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 어쩌면 내가 틀린 건지도 모르지만 - 이 사실은 우울한 감정만을 내게 가져오는데, 그건 내가 이제, 그녀가 더 이상 곁에 없으므로, 처음부터 다시 인정을 획득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또 한 권의 책을 쓰는 일로는 그 인정을 얻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앞으로도 계속한다는 것, 책에서 책으로, 강의에서 강의로 이어지는 일을 계속한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만 하다(왜냐하면 그런 삶이 결국 내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너무도 뻔하니까).

(이제 모든 일들을 그만두고자 하는 노력들도 그 때문이다)

 

지혜와 스토이즘의 태도를 지니면서 (아직은 언제가 될지 분명하지 않지만) 작품을 만드는 일을 다시 시작할 때까지, 나는 (이건 분명하게 내가 감지하는 일인데) 마망에 대한 이 책을 써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하나 자명한 건 지금 내가 인정을 수여하고자 하는 건 마망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 '기념비'의 모티브다; 그런데:

기념비는 내게 변하지 않는 지속적인 것, 영원한 것이 아니다(나의 사유는 너무도 깊게 모든 것은 소멸한다, 라는 사실 속에 뿌리 박혀 있다: 심지어 무덤마저도 죽어간다). 기념비는 내게 어떤 액트 acte, 인정을 쟁취해내는 능동적 행위다.

 

- 1978. 7. 18.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

 

- (1978. 8. 10.)

프루스트, <생트-뵈브>, 87쪽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유형, 그러니까 우리가 상상으로 눈앞에 떠올리는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상상해볼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유형 그러니까 실제 réalité가 직접 우리에게 드러내는 어떤 것이다."

 

[그렇다: 나의 슬픔은 지극한 고통이나 외로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건 다만 추상적인 유형, 메타언어 안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그런 것들일 뿐이다. 나의 슬픔은 전혀 새로운 유형의 어떤 것이다.] 

 

 


 

- 번역이 끝났어도 여전히 번역이 안 된 채로 마음 안에 남아 있는 단어 하나가 있다. '슬픔'이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애도 일기'라는 어두운 텍스트의 밤하늘에 저마다 다른 광도의 별들로 흩어져 빛나는 이 단어를 정확히 무엇이라고 옮겨야 했을까. 애도, 우울, 고통, 비참, 무거운 마음... 그런 번역어들은 저마다 상황에 따르는 의미를 지시해도 그 의미들은 모두가 어쩐지 모자라고 과녁을 빗나간다. 바르트라면 이 단어를 '부유하는 시니피앙’ 또는 '환유의 시니피앙'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 분명한 건 이 단어의 주인이 사랑을 잃어버린 주체, 사랑의 상실 때문에 고독해진 주체라는 사실이다. 사랑은 바르트에게 관계, 즉 '맺어져 있음'이다. 사랑의 상실은 그래서 이 맺어짐의 끊어짐이다. 맺어졌던 것이 끊어지고 나면 끊어진 자리가 남는다. 바르트는 이렇게 쓴다. "나의 슬픔이 놓여 있는 곳, 그곳은 다른 곳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라는 사랑의 관계가 찢어지고 끊어진 바로 그 지점이다."(1977. 11. 5.) 며칠 뒤에는 또 이렇게 쓴다: "이 순수한 슬픔, 외롭다거나 삶을 새로 꾸미겠다거나 하는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슬픔.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벌어지고 파인 고랑" (1977. 11. 9.) 사랑의 맺어짐이 끊어져서 벌어지고 파인 고랑은 부재의 장소다. 그 사람이 이제는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공백의 공간, 사랑의 주체가 갇혀 있는 상처의 공간이다. 

 

-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사랑의 상처, 부재의 파인 고랑을 치유하는 두 가지 유형을 양립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프로이트다. <애도와 멜랑콜리 Traver und Melancholie>가 그것이다. 애도의 주체와 멜랑콜리의 주체는 다 같이, 처음에는, 상실의 상처 안에 머물면서 사랑의 리비도를 다른 사랑의 대상으로 이동시키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애도는 차츰 이 상처를 인정하고 자기 안에 품으면서 상처에 대한 자기 책임성을 인정하면서) 내면성의 자아의식을 회복하고 현실 원칙이라는 자기 보존의 메커니즘을 따라서 사랑의 리비도를 또 다른 사랑의 객체로 이동시킨다. 프로이트에게 애도 작업은 상실의 사랑으로부터 새로운 사랑으로 건너가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리비도의 경제학이다.  

- 반면 멜랑콜리는 프로이트에게 병리적이다. 멜랑콜리는 상실의 상처를 인정하고 껴안기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그 상처를 떠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상처에의 집착은 상실의 대상에 대한 애통이 아니라 상처를 당한 자기 자신에 대한 거부,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되는 자기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에 대한 비난이며 고발이다. 다시 말해 멜랑콜리는 상처받은 자기, 상처 받아서는 안 되는 자기, 상처 받을 수 없는 자기에게 집착하면서 다른 사랑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자기 안에 고여 있는 리비도 현상이다. 프로이트는 이 정체 상태의 리비도를 비경제적인, 그래서 병리적인 나르시시즘으로 규정한다. 

 

- 바르트의 슬픔은 애도와 멜랑콜리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건 바르트의 슬픔이 애도와 멜랑콜리와는 다른 원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애도와 멜랑콜리는 서로 양립적이기는 해도 하나의 원칙에서 만난다. 그건 상실된 대상의 '대체'다. 애도는 다른 사랑의 대상으로, 멜랑콜리는 자기 자신으로, 상실된 사랑의 대상을 대체한다. 애도와 멜랑콜리는 다 같이 교환의 경제학을 따르는 슬픔의 작업이다. 하지만 바르트에게 사랑의 대상은 경제학의 대상이 아니다. 사랑의 대상은 바르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존재다.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이 상실되었으므로 그 상실이 남긴 부재의 공간 또한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파인 고랑'으로만 남는다. 하지만 이 파인 고랑의 부재 공간은 역설적이다. 그것은 대체할 수 없는 그 사람이 더는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절대 공백의 공간이지만, 그 절대 부재성은 그 공간이 오로지 그 사람 자신으로만 채워질 수 있고 또 채워져야 하는 공간, 그 사람이 반드시 귀환해야 하는 공간임을 역설적으로 방증하기 때문이다. 이 부재의 역설이 바르트의 애도 공간을 특별한 공간으로 만든다.  

 

- 푼크툼은 죽은 자가 귀환하는 순간이다. 프루스트에게 할머니가 돌아오듯 푼크툼의 순간에 죽은 어머니는 바르트에게 '온전한 현존'으로 귀환한다. 바르트가 이 순간을 사진 안에서 만나는 건 당연하다. 사진을 다만 표층의 기계적 모사로만 알았던 프루스트와 달리 바르트는 사진의 인덱스 index적인 본질을 알고 있었다. 사진 이미지는 단순한 모사 이미지가 아니라 유령 이미지다. 유령이 죽었으면서 살아 있는 존재이듯, 빛의 자국들이 그려놓은 사진의 접촉 이미지 안에서 이미지와 이미지의 대상은 등과 배처럼 맞붙어 있다. 사진은 말하자면 부재 속의 실재라는 있을 수 없는 존재의 실존이 기술적으로 그러나 마술적으로 구현된 이미지이다. 죽은 자의 귀환은 프루스트에게 여전히 은유적이지만 푼크툼의 순간은 실제적이다(지각적으로는 허구이지만 시간적으로는 진실인’). 푼크툼의 순간에 죽은 자는 실제로 귀환한다. 바르트는 죽은 어머니를 실제로 '다시 만난다. 그래, 이게 마망이야.'라고 바르트는 경이에 차서 외친다. 그런데 이 마망은 누구일까? 푼크툼의 순간에, 죽은 자가 귀환하는 순간에 온전히 되돌아와 현존하는 것은 무엇일까?  

- '겨울 정원의 사진'은 이상한 모순의 사진이다. 그 사진은 1915년 태어난 바르트는 결코 어머니임을 알아볼 수 없는 사진, 1989년 다섯 살 소녀였던 어머니의 사진이기 때문이다. 푼크툼은 말하자면 외적 유사성으로 확인되는 어머니와의 해후가 아니다. 그건 어머니의 '본질'과의 만남이다. <밝은 방>에서, 또 <애도 일기>에서 바르트는 이 어머니의 본질에 끊임없이 매달린다.

- 푼크툼의 순간은 바르트의 시선이 외적 유사성의 강박에서 벗어나 선함과 순결함이라는 어머니의 본질과 해후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푼크툼의 순간은 다만 어머니의 본질만이 체험되는 사건은 아니다. 죽은 어머니와 온전하게 해후하는 푼크툼의 순간을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세 사람의 이름과 더불어 예증한다. 하나는 이미 언급했던 프루스트의 '마음의 간헐'의 순간이다.  

 

- 이 책은 2009년 쇠유 출판사에서 발간한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에 대한 번역서이다. 가장 친밀한 외국어가 독일어인 역자는 이 책의 독일어 본을 번역 텍스트로 삼았다. 이후 불문학자인 변광배 박사가 번역 원고를 불어 원본과 대조-감수하는 수고를 해주셨고, 꼼꼼한 박숙희 편집자가 영어본과 비교 점검하는 수고를 더했다. 그래도 오역과 서투른 번역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문가들과 바르트를 사랑하는 독자들의 매서운 질정을 바란다. 


 

  

    

 

 

 

 
애도 일기(리커버 에디션)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어버린 슬픔을 기록한 롤랑 바르트의 에세이 『애도 일기』가 새로운 디자인을 입은 리커버 에디션으로 출간되었다. 텍스트를 재해석한 판형과 아름답고 처절한 슬픔의 감성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표지로 명저의 소장 가치를 높여 선보인다. 이 책은 20세기 후반 가장 탁월한 프랑스의 지성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일기이다. 인문학과 문학 독자들이 꾸준히 읽고 해석하는 롤랑 바르트의 스테디셀러 중 하나로, 진입장벽이 높은 바르트의 저작들과 다르게 가장 폭넓은 층의 독자를 아우르는 명저로 알려져 있다.
저자
롤랑 바르트
출판
걷는나무
출판일
201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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