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알렉산더 케이] 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

일루젼 2022. 11. 1.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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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알렉산더 케이 / 박중서

원제 : The Incredible Tide 
출판 : 허블 
출간 : 2022.09.21

이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원제의 느낌이 살아나지 않는 제목이 조금 아쉽다. <The Incredible Tide>, 벗어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이 휩쓸릴 수밖에 없는 거대한 조류는 운명이기도 하고 변화의 물결이기도 하며 파멸의 해일이기도 하다. 개개인이 자기 혼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든 것들이 이어진 흐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을, 인류는 생존을 위해 자원을 얻는 거대한 바다의 조수에 기댈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거대한 흐름은 틀림없이 존재하며 그것을 감지하고 이해하는 자들이 다음 세대를 열게 될 것임을 내포하는 제목이었다고 생각한다. 파도는 부서지지만 끊어지거나 멈추지 않는다. 

 

그에 반해 <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이라는 제목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우울한 세계에서 고립무원으로 남겨진 한 소년의 생존기라는 느낌이 강하다. 코난이 티키를 통해 라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나, 하이하버에 그의 또래 소년 소녀들이 생존해 있다는 점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한 소년이 세계의 운명을 짊어지는 히어로, 혹은 절대 고독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인간성을 강조하는 느낌이라 조금 아쉽다.

 

알렉산더 케이의 작품은 처음 접했다.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들을 접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특정 세대의 대표작들을 잊혀지지 않게 번역해 소개한다는 일은, 독자 입장에서는 정말 의미 깊고 감사한 일이다. <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을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허블 출판사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마녀 산으로의 도주>도 한국어로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점은 인간의 '개체성'이 무척 희미하다는 점이다. 그는 뚜렷한 선악 구도가 아닌, 상황과 경험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모습에 집중했는데, 이 작품이 시대를 초월해 울림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인 듯 하다. 세계의 절반 이상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상황, 동력원들과 자원들은 고된 노동을 통해서만 겨우 사용할 수 있을 정도라는 '낯선' 세계관 속에서도 뚜렷한 현실감과 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인물들이 매우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개별적인 기질보다는 그 상황에서 '보통의 사람'이 충분히 취할 법한 사고방식과 행동 패턴을 보인다. 

 

이미 붕괴되었음이 확실한 체계의 잔재들을 그러모아 '신체계'를 유지하려는 인더스트리아는 일견 아집스러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절망을 겪은 이들에게 새로운 대체제를 제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억지스러움 안에서 어떻게든 '일상'의 환상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을 읽어내는 패치의 시각은 작가의 그것이기도 하다. 일단 '살아남아야' 그 다음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이들 간의 공감이다. 

 

그러나 그 모습들이 아름답지 않았음 또한 사실이다. 나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에 두는 것은 본능적인 영역이지만, 이후 자신의 안위와 발전을 위해 매몰된 시야를 가지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현 체제가 영원하리라는 믿음 하에 움직이는 것은 말 그대로 부서져가는 파도에 몸을 맡기는 행동이다. 소설 속의 주요 인물들은 다른 등장인물들과는 달리 모두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 흐름을 직시하고 있었다는 점, -설사 방향이 다를지라도- 그것은 그들이 대단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을 알고 자신을 움직이는 흐름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은 흔히 말하는 '깨어있는 자'와 겹쳐 보인다. 

 

개인적으로 소설 속에서 패치가 말하는 '귀를 기울이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조언'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그 조언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내용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조언 자체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방법론'일 뿐이다. 나침반은 목적지를 가리키지 않는다. 원하는 자와 원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나는 패치에게 자꾸만 희생양과 구세주의 모습을 겹쳐보게 되었는데, 그는 작가가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인물상이다. 그가 보여준 왼뺨을 맞고도 오른뺨을 내어주는 희생정신, 때를 기다리며 앞날을 예비하는 선견, 모든 면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보려하는 고결함 등이 그 이유이다. 또 그가 주장하는 정신의 힘 또한 현실에 매몰되지 않는 일종의 영성적인 가르침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이 아닌 코난을 다음 세대의 지도자로 이끄는 부분은 '브라이악 로아'로 대표되었던 이전 세대의 종말과 '코난'이라는 새로운 흐름의 탄생이라는 'tide'를 상징한다. 그 순간에 만스키와 패치가 함께 '들었'음은 거대한 쓰나미로 잔재들이 쓸려나간 다음 찾아올 '통합'에 대한 희망이기도 하다. 

 

코난이 보여주는 당돌함과 젊은 치기, 패치가 보여주는 연륜과 고집과 현명함, 라나가 상징하는 자연과의 교감과 포용과 생산은 굉장히 익숙한 삼위의 구도다. 또한 한 문명의 파괴와 쓰나미(홍수), 기계 문명의 종말 등은 이제는 익숙할 레무리아와 아틀란티스를 떠올리게 한다.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땅에 살았던, 누군지 모를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이 책에 나온 내용은 이전에도 분명 일어났던 일이었을 것이다."라는 저자의 서문은 이 일이 이전에도 있어왔고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누구 하나 예외없이 휩쓸리고 있는 거대한 흐름임을 암시한다.

 

"우리가 만들어 낸 세계는 무척이나 서글픈 세계이며,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젊은이들이다. 그들의 정신은 여전히 열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을 위한 책을 쓰는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등장인물들이 듣는 내면의 목소리는 '하느님'일수도, '아카식 레코드'일 수도, 혹은 정말 어떤 '영'이나 언제나 존재했던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설명은 아마도 '양심의 소리'일 것이다. 아주 작게 속삭이는 그 소리에 조금씩만 귀를 기울이더라도 세상의 균형추는 조금씩 이동할 것이다. 

 

        

 


   

알렉산더 케이 Alexander Hill Key 

미야자키 하야오 등 많은 거장의 영감이 되었으며,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의 원형을 창조한 알렉산더 힐 케이(1904~1979)는 아버지가 화형 당하고 어머니가 의문사한 충격적인 유년기를 SF로 승화한 작가다. 시카고 예술학교 SAIC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삽화가로 활동하다가 작가로 전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해군 정보부에서 기계와 로봇을 다룬 경험도 그가 SF를 집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초능력과 핵전쟁, 외계인 같은 20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SF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사회적 차별과 대중의 가식에 대한 비판을 녹여내어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대표작인 <마녀 산으로의 도주 Escape to Witch Mountain>는 1975년, 1995년에 이어 2009년까지 세 번이나 영화로 제작되었고, 또 다른 대표작 <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 The Incredible Tide>은 전쟁으로 파괴된 지구를 무대로 했으며, <미래 소년 코난>으로 애니메이션화 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땅에 살았던,
누군지 모를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이 책에 나온 내용은 이전에도 분명 일어났던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단지 공상인지,
아니면 예언인지는
오로지 우리가 앞으로 하기에 달렸을 것이다.  

 

 

- 그는 똑똑히 기억했다. 이곳에 도착한 직후에는 얼마나 추웠는지, 또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하며 바위에 매달린 채 가만히 있다 보니,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섬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바닷새 한 마리도 없었다. 식량이나 물이나 옷이나 연료도 없이, 하다못해 칼 한 자루도 없이, 이렇게 황량한 바위 더미에서 어떻게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물론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기계가 거의 모든 일을 대신해 주고, 전자기기의 단추가 가득하던 세계의 안락함 속에 푹 파묻혀 살던 그에게는 지금과 같은 곤경 속에서 희망이 정말 없어 보였다. 코난은 머지않아 자기가 죽게 될 것을 알았다. 당연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어떤 목소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 그 목소리가 명령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아라. 너에게 주어진 지성을 이용하도록 해라. 너는 더 성장하고 배워야만 한다. 조만간 다른 사람들이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할 테니까.
그 목소리가 혹시 자기 근처의 어떤 곳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혹시 자기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인지, 그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목소리였고, 놀라우리만치 현실적이었다. 어쩐지 그 목소리를 들으니 문득 라나의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그분은 언젠가 이와 비슷한 말을 해서 코난을 깜짝 놀라게 했었다. 듣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가 필요로 하는 조언을 언제라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 이 작은 섬은 새로 생긴 곳이었다. 아마도 어느 바위산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 산의 나머지 부분은 이제 전 세계를 바꿔놓은 대홍수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어쩌면 이 작은 섬은 새로 생긴 땅, 즉 지각의 융기로 인해 생겨난 땅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인지 코난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이 작은 섬에서는 식물이 전혀 자라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주위의 얕은 물속을 들여다보아도, 워낙 새로 생긴 섬이라서 그런지 조개나 다른 바다 생물을 아직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썰물이 되면 길게 늘어진 해초를 찾아볼 수는 있었다. 아주 먼 곳에서부터 이곳까지 쓸려 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썰물 때는 간혹 물구덩이에 갇힌 물고기도 찾아볼 수 있었다.

 

- 코난은 그때 일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난생처음 날것 그대로 먹은 물고기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돌멩이를 깨서 칼 대용품을 만들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차마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물고기를 이빨과 맨손으로 찢어 먹었고, 살점 하나하나를 맛있게 씹어 먹었다. 심지어 물고기의 육즙조차도 맛이 좋았다. 덕분에 한동안은 갈증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해초는 아쉽게도 물고기만큼 맛이 좋지는 않았지만, 코난은 머지않아 해초를 좋아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나중에는 또 다른, 그리고 더 맛이 좋은 해초들도 나타나서 작은 섬 주위에 뿌리를 내렸다. 그때부터 이곳의 삶은 일종의 도전이 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처음에는 전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던 일도 이제는 가능해진 것이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기만 한다면, 자기의 지혜와 에너지를 쏟아붓기만 한다면, 이곳에서 직면한 문제도 하나하나 해결할 수 있었다.  

 

- 라나는 이모가 이엉지붕 아래에서 바다 쪽으로 얼굴을 향한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수백 킬로미터 밖의 어디에선가, 마찰의 아버지인 스승님도 마찬가지 모습으로 서서, 자기 딸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 것이었다. 마잘은 메시지를 받는 데에 아주 뛰어나지는 못했다. 그래서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절차를 거쳐야만 그나마 뭔가라도 받을 수가 있었다. 어제는 거의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오늘은...

 

- 라나는 눈을 감고 속삭였다.

"제발 도와주세요, 하느님. 우리 이모가 스승님의 메시지를 받게 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오늘 저녁에는 뭔가 메시지를 반드시 받아야만 했다. 무역선이 이곳을 찾아온 만큼,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 "그래. 그 녀석은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발버둥 치고 있지. 그 목표를 이룰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앞으로도 그 녀석을 믿지는 마라." 
"쥐새끼처럼 약삭빠른 모양이죠, 아마?" 
"틀린 말은 아니지. 불쌍한 녀석이긴 하지만."
"예?" 코난은 틈새 너머로 노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그런 녀석을 동정하시는 건 아니겠죠!" 
"하지만 솔직히 동정이 가더구나. 이곳의 상황 때문에, 그러니까 신체제가 이제 시작하려는 일 때문에, 결국 많은 사람들이 가장 나쁜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게 되고 말았지. 낙인 죄수 가운데 믿을 만한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해. 내 생각에는 설령 기회가 있더라도 이곳을 도망치려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구나." 
"하지만... 하지만 그건 미친 짓이잖아요! 도대체 그 사람들은 어디가 잘못된 걸까요?" 

- 스승님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밤의 어둠 속을 바라보며 혹시 누가 오는지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다시 안심한 노인은 나지막이 말을 시작했다.

"코난, 이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낙인 죄수의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야. 그 사람들은 너처럼 혼자 생존할 능력조차 지니지 못하고 있어. 어찌어찌해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 또는 구조되어서 여기로 온 사람들은 굶어 죽을 지경이었단다. 또 일부는 햇볕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반쯤은 죽은 목숨이었지. 나는 섬들 가운데 한 곳에서 구명 뗏목을 타고 출발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생존자를 두 명 더 구조했단다.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었을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고. 혹시 누가 도망치자는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그들은 여기 말고 어디로 가느냐고 반문할 거란다. 어쩌면 그 사람들 말이 맞는지도 모르지. 예를 들어 너 같으면 여기를 떠나서 과연 '어디로' 가겠니?" 

 

- "그러면 여기서 노예처럼 사는 게 좋다는 거예요?" 
"물론 좋다는 것까지는 아니지.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점수를 쌓게 되면, 나는 머지않아 3등급 시민이 될 거야. 그때부터 내 인생은 출세가도를 달리는 거지. 일단 적격 시민이 되고 나면, 여기도 상당히 살기 좋은 곳이라니까. 그때부터는 온갖 종류의 특혜를 얻게 되니까. 물론 그러려면 일단 연줄을 잘 잡아야 하고,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한테도 잘 보여야 하지. 저 패치 영감도 고분고분하게만 굴었더라면, 지금쯤은 최소한 2등급 시민은 되고도 남았을 거야. 하지만 워낙에 성미가 비뚤어지고 멍청하다 보니까, 사람들 앞에서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지껄이곤 하지. 그래서 저 양반은 점수를 얻기는커녕 오히려 항상 잃어버리고 있다니까. 내가 듣기로 지금쯤 마이너스 3,000점 가까이 되었다던데. 그게 도대체 상상이나 돼? 물론 이제는 저 양반에 대한 이야기도 일종의 농담이 되었지. 하지만 저 양반은 워낙 정신이 나가 있다 보니까, 그런 사실 따위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해. 그래도..." 

 

- 자기와 라나도 그 능력을 배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전쟁이 갑자기 확대되다 보니, 차마 그걸 배울 시간 여유조차도 없었다. 바로 그때, 코난이 기억하는 라나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자, 그는 그녀의 지금 모습을 보고 싶다는 거의 압도적인 열망에 사로잡혔다. 과연 정말로 볼 수 있을까? 

-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만약 자기 생각을 모조리 라나에게 집중한다면, 저 먼 거리를 거뜬히 넘어서 어떻게든 그녀를 볼 수 있을지 몰랐다. 비록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코난이 라나를 향해 생각을 집중한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오두막 안에 남아 탑에 올라간 마찰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조바심하고 있었다. 바다 저편의 이곳, 그러니까 먼 서쪽인 이곳에는 아직 햇빛이 남아 있었다. 물론 이제는 저녁의 냉기가 고지에서부터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지만 말이다. 라나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지금껏 약간 열어두었던 출입문을 닫았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코난의 영상이 짧게, 그러나 놀라우리만치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모습이 아니라, 그때보다 더 나이 많고 더 힘이 세어졌음 직한 모습으로 말이다. 심지어 이마에 새겨진 무슨 표식조차도 또렷이 보였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았더라면, 그리하여 자기 머릿속에서 다른 모든 생각을 지워버리고 그 영상에만 집중했더라면, 라나는 난생처음으로 코난과 원거리 접촉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 다른 문제가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하는 걸까? 
순간 코난은 오래전에 있었던 한 가지 일을 떠올렸다. 어느 날 저녁, 스승님은 마찰에게 전달 능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 "여기서는 시각화하는 방법을 배우는 게 필수란다."

스승님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았니? 네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나에게 말을 걸고자 한다면, 네가 나를 매우 열심히 생각해서 내 모습이 눈에 선해져야만 되는 거야."  
"하지만 아버지,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무슨 말이냐. 나는 항상 네 모습이 눈에 선한데, 네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말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그런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고요." 
마잘은 이렇게 항변했다.

"아버지는 그저 저보다 능력을 훨씬 더 많이 갖고 계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사람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내가 일찍부터 너를 직접 훈련시킬 걸 그랬구나.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너는 이제껏 정신을 사용하는 방법을 전혀 배우지 못했지. 오히려 그걸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던 거야." 

 

- "너는 그걸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운 거야. 그런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떡하니 박아놓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지. 예를 들어 너는 눈이 먼 사람이 뭔가를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일단 시각화하는 방법만 배우고 나면...

 

-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스승님은 단순히 자신의 주장을 사실로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보다 더 큰 진리도 제공해 주었다. 코난이 보기에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어떤 마법의 문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

 

- 다음 날은 그 시작부터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코난에게는 이런 느낌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어젯밤에 느꼈던 뭔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다시 한번 그에게 찾아왔다. 이 두려움은 계속해서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텔릿이 찾아오자마자 스승님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성미 고약한 패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코난이 보기에는 노인도 뭔가 마음이 불편해 보였다. 할아버지는 이날 하루 대부분을 창고에 있는 제도용 책상 앞에 앉아서, 종이 대용품으로 사용되는 플라스틱 필름에다가 뭔가 알 수 없는 방정식을 줄줄이 쓰고 있었다. 

- "사람은 누구나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경우에는 도와야 하는 법이야.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크나큰 위험에 처해 있지 않니." 
"그러면 그냥 위험에 처해 있도록 내버려 두시라고요! 무엇 때문에 우리의 계획을 포기하면서까지 신체제를 도와야 한다는 거죠? 그놈들이 지금까지 한 짓을 좀 보세요! 전 솔직히 그놈들이 모조리 물에 빠져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봐요! 그놈들이 모조리 죽어버리고 나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좋아질 테니까요! 세상에 둘도 없이 더러운 놈들..."  
"코난! 내 말을 들어보라니까!"
"어... 예, 할아버지."

코난의 가슴에 찾아온 선뜩한 기운은 이제 뭔가 딱딱한 것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을 듣게 될지 짐작이 갔다. 그렇게 짐작을 하기만 해도 두려워졌다. 이제는 바깥도 어두워져 있었다. 불과 몇 분이면 두 사람은 보트에 나머지 짐을 모두 실어도 안전할 것이었다. 이제 스승님을 여기서 모시고 나갈 무슨 방법을 생각해 내지 않는다면... 
"아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내 결심이 바뀌진 않을 거다."

 

- 곧이어 코난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숙련된 뱃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사실이 무엇인가 하면, 한밤중에는 어떤 물체를 똑바로 쳐다보지 말고 오히려 비스듬히 눈가로 쳐다봐야 더 잘 보인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썽을 겪지 않은 채 수로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 "도대체 왜 우리한테 이렇게 하신 거죠?" 코난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치 한때 그를 구출해 주었던 목소리가 결국에는 그를 거짓으로 속이며 갖고 놀았던 것 같았다. "왜죠? 왜냐고요? 도대체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죠?"
코난의 외침은 지금 그가 느끼는 전적인 무력감에서 비롯된 고통스러운 토로였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스승님뿐만 아니라, 나아가 스승님 덕분에 장차 가능했을 법한 세계조차도, 심지어 라나조차도 모조리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순간만큼은 코난도 그 목소리의 대답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그 목소리가 대답을 내놓았다. 차분하고도 또렷한 목소리였다. 
"코난." 그 목소리가 말했다. "모든 일에는 그 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있는 거란다. 네 주위를 둘러보거라."

순간 코난은 이전까지는 한 번도 얻은 적이 없었던 어떤 놀라운 각성을 얻고 깜짝 놀랐다. 바닷물에 떠밀려 오면서 얻은 몸의 상처조차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몸을 떨면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 "아니, 너도 사실은 그렇지 않을 거다. 너는 다만 저 여자가 대변하는 사고방식이 싫은 거겠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싫은 건 사실이에요. 그 신체제에 관한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싫어요. 할아버지는 그렇지 않으세요?" 
"아니, 나는 그런 기분까지는 아니야." 
코난은 깜짝 놀란 나머지 손도끼를 떨어트렸다. "하지만...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놈들 때문에 무려 4년이나 죄수 노릇을 하셨잖아요!"

그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놈들을 미워하셔야죠!" 
"얘야, 나는 그 사람들을 미워할 수가 없단다. 오히려 나는 그 사람들 대부분에 대해서 존경심을 갖고 있어." 

 

- "그래, 코난." 스승님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네 말이 전부 옳아. 하지만 네가 한 가지 모르고 있는 것은, 그 사람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 나름대로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지. 가진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기계 몇 대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말이야. 인더스트리아는 그 기능의 상당 부분이 마비된 상태였고, 지금도 마찬가지 상태야.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리고 몇 대뿐인 기계를 계속 돌리기 위해서는 가장 단호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는 가장 힘이 센 사람, 즉 내놓을 것이 가장 없는 사람이 권력을 지니게 되는 법이니까."

스승님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렇게 이어나갔다.

"단지 그중 몇 사람만 가지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는 마라. 인더스트리아에도 훌륭한 사람들이 일부나마 있고, 그 사람들의 행동은 오로지 칭찬만 받아야 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야. 그렇기 때문에 내가 굳이 정체를 드러내면서까지 그 사람들에게 재난을 경고해 준 거다. 반면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 "저 사람은 그냥 내버려 둬라. 나를 그냥 패치 늙은이로 생각하게 말이야. 그렇게 하는 편이 더 쉬울 거다. 저 사람은 신체제에 철두철미하게 헌신하고 있지. 왜냐하면 저 사람한테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그것뿐이거든. 단순히 이성에 호소한다고 해서 네가 저 사람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우리의 도움 없이도 본인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도록 내버려 둬라."  

 

- "그 목소리가 나한테 어떻게 하라고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도 죽은 목숨이기는 마찬가지였을 거고요, 만스키 의사 선생님. 왜냐하면 그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당신을 바다 한가운데서 구출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 일에 대해서는 분명히 고맙다고 말한 걸로 아는데." 그녀가 딱딱거렸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네 녀석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정신이 나갔어." 
"그러면 당신은 이제부터 정신이 나간 사람들하고 어울려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거요." 스승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오래전부터 바로 그 목소리의 인도를 받아온 사람이니까." 
코난은 깜짝 놀라며 스승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처음에는 그 목소리를 무시했었지. 그러다가 결국 한쪽 눈을 잃고 말았단다. 그때 이후로는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게 되었지."

- 만스키 의사 선생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 그 하느님이 지금 당신에게 말도 걸고 조언도 해준다는 뜻인가?" 
스승님은 흰 눈썹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어째서 나 '혼자만' 받는 특별한 도움이라는 거요? 당신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들을 모조리 잊어버린 모양이군. 그런 지혜는 우리 가운데 누구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않소?" 
그녀는 또다시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그냥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된다는 건가?" 
"그럼 또 뭐가 있겠소? 우리 각자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내면의 귀를 가지고 있는 거요. 물론 우리가 원한다면 말이오. 만약 우리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하면, 우리가 결국 그 귀를 들리지 않게 방치했기 때문일 거요."

 

- "하지만 전달 능력자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도시 밑에서 균열이 깨질 때를 즉시 알게 될 거요. 워낙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드러나는 두려움을 감지하지 못할 리는 없겠지." 

 

- "티키." 그녀가 속삭였다. "티키, 저 아래로 내려가서 배 주위를 빙빙 돌아 봐. 내가 너랑 같이 가더라도 겁은 내지 마. 지금부터 나는 너의 일부가 될 테니까. 어서 가, 티키! 날아가!" 
제비갈매기가 어깨 위에서 날아오르자, 라나는 눈을 감고 자기 정신을 저 앞으로 투사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이전에도 이런 일을 무려 두 번이나 했던 적이 있었다. 맨 처음 했을 때에는 겨우 세 살이었고, 그 일이 워낙 쉽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기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그러니까 전쟁이 격화되기 전에 식구들이 머물던 여름 별장 근처의 풀밭 가장자리에는 어떤 작은 동물이 한 마리 있었다. 라나로서는 처음 보는 털북숭이 야생동물이었다. 그 동물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몰랐다. 어쩌면 얼룩다람쥐일 수도 있었고, 또 어쩌면 작은 토끼일 수도 있었다. 여하간 그 짐승을 보자마자 얼마나 신이 났던지, 그녀는 한마디로 정신이 그 짐승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라나는 바로 그 짐승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작은 발에 와닿는 풀을 느꼈고, 씰룩거리는 콧구멍으로 그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 다른 냄새도 났고, 다른 소리도 많이 들렸다. 예를 들어 나뭇잎 소리와 갖가지 새소리처럼 안전한 소리, 그리고 육중한 발걸음 소리처럼 안전하지 못한 소리. 두려움도 있었고, 곧이어 사람과 동물 양쪽 모두의 순간적인 당혹감도 있었다. 순간 그녀는 다시 자기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다시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었다. 

- "그건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오. 전화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 장치인 거요. 나에게 때때로 조언을 전해주는 그 목소리 역시 일종의 연결 장치인 거고. 어쩌면 그건 나를 보호하는 영일지도 모르오. 어쩌면 나 자신의 영인지도 모르고. 누가 알겠소? 하지만 분명한 건 연결 장치라는 거요.

"헛소리! 그까짓 게 당신을 뭐랑 연결시킨다는 거야?"

"바로 나와 지식의 샘을 연결해 주는 거요. 그 지식의 샘이 바로 일부에서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존재요."
그녀는 또다시 코웃음을 쳤다.

"또다시 그놈의 하느님 타령이로군! 이제는 혼이며 영이며 하는 것까지 곁들여서 말이야. 그럼 당신은 이 세상에 혼이며 영이며 하는 것들이 정말로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건가, 늙은이?"
"그야 당연하오. 그것이야말로 나에게서 유일하게 중요하고도 지속적인 부분이니까."

 

- "내 말 똑똑히 들어. 나는 단순히 그냥 의사가 아니라고. 나는 외과 의사이고, 그것도 제법 실력이 있는 편이야. 수술을 하다 보면, 사람의 몸을 구석구석 칼로 가르게 마련이지. 한두 번이 아니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그런데 나는 이제껏 사람의 몸 안에서 영이니 혼이니 하는 것은 발견한 적이 없었고, 그런 것이 들어 있을 만한 장소도 발견한 적이 없었어." 
스승님이 웃었다. "아마 앞으로도 발견할 수는 없을 거요, 의사 선생."
"뭐가 재미있다고 웃는 거지?"
"왜냐하면 당신이 한쪽 차원에서 그토록 찾아 헤맸던 대상은 오히려 다른 쪽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오."
"그따위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까! 당신도 그 존재를 절대로 증명할 수 없을걸!"
스승님은 양손을 펼쳤다. "그러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거요, 의사 선생?"

 

- "하지만 '당신'이야말로 중요한 존재요." 노인이 주장했다. "그러면 당신의 존재에는 어떤 목적이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소?"

 

- "새라는 놈은 사실 천사와도 유사성이 있는 거요."  

 

- "다만 나는 한 가지 궁금한 거요. 일단 우리가 하이하버에 도착하고 나면, 신체제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어떻게 달라질지 여부가 말이오." 
"나는 신체제의 충실한 시민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충성을 지킬 거라고!" 
"하지만 신체제가 멸망한다면 어쩔 생각이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예를 들어 추종자도 하나 없는 상황에서 신체제가 과연 존속할 수 있겠소? 인더스트리아에 머무는 동안 나는 젊은 사람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었소. 사실상 거기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제법 나이 많은 사람들뿐이었지. 예를 들어 당신처럼."

 


 

 

- 알렉산더 케이의 생애와 활동


알렉산더 힐 케이 Alexander Hill Key (1904~1979)는 주로 청소년용 과학소설을 발표한 미국 작가다. 본래 미술을 전공하고 삽화가로 활동하다가 작가로 전향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주 산악 지대에서 생활하면서 그곳을 무대로 한 작품을 여럿 발표했다. 초능력과 핵전쟁과 외계인 같은 20세기 중반의 전형적인 과학소설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사회적 차별과 대중의 편견에 대한 비판 같은 요소를 곁들여서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케이의 발언은 그의 작품 세계를 대변하는 동시에, 여러 대표작에서 반복되는 주제를 요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리가 만들어 낸 세계는 무척이나 서글픈 세계이며,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젊은이들이다. 그들의 정신은 여전히 열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을 위한 책을 쓰는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과의 차이 


오늘날 이 소설을 이야기하려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미래소년 코난>(1978)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원작과 각색의 차이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이미 애니메이션 전문가의 단행본이 나와 있으므로 참고할 만하다. 다만 이 자리에서 원작자인 케이의 입장을 대변해 말하자면, 그 정교한 작화와 뛰어난 연출과 상상력 풍부한 각색 등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은 원작의 깊이를 모두 전달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은 재난을 딛고 일어서는 희망에 초점을 맞춘 반면, 케이의 원작은 재난을 초래한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에 여전히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은 차마 케이가 이야기하지 않은 곳까지 줄거리를 끌고 갔지만, 특히 뒷부분의 전원생활과 농경 공동체에 대한 목가적인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미야자키만의 취향이라고 해야 한다. 이에 비해 케이가 묘사한 하이하버의 현실은 애니메이션보다 훨씬 더 엄혹해 보인다. 

 

어쩌면 케이의 소설과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의 관계는, 미야자키의 또 다른 걸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원작 만화와 각색 애니메이션의 관계와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저 유명한 애니메이션은 원작 만화의 전반부까지의 내용에 불과하며, 원작 만화의 후반부는 의외로 훨씬 더 암울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만 보면 미야자키의 메시지가 단순히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공존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원작 만화의 결말은 상당히 다르다. 

 

그러니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기와 기억조차도 약간은 퇴색한 지금에 알렉산더 케이의 소설을 읽는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유머와 박력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원작이 영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이 처음 간행된 반세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전쟁과 테러의 위협이 수시로 제기되는 현실 하에서는 재난과 생존에 관한 케이의 진지한 고민의 깊이가 의외로 우리에게도 잘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박중서

 

 

 

 
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허블 워프 시리즈 2)
★미국 교과서 수록 작가★ ★루이스 캐럴 어워드 수상작★ 냉전 시대의 인간 본성을 표현한 디스토피아 걸작 SF 미야자키 하야오의 〈미래 소년 코난〉 원작 소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모두가 그 시작을 부정해온 신냉전 시대가 도래했다. 팬데믹의 여파로 아직 그 회복의 길이 요원한 현세대의 상처에 희망과 회복이 되어줄 포스트 아포칼립스 SF를 소개한다. 저자 알렉산더 케이는 미국 교과서에도 수록될만큼 북미에서는 널리 알려진 작가지만, 한국에서는 이번이 최초 출간이다. 『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미래 소년 코난〉 원작 소설. 저자의 또 다른 대표작은 세 차례나 영화화될 만큼 그는 모험 액션 SF 장르에서 일가견을 인정받아왔다. 또한 이 책은 냉전 시기인 1970년에 창작된 현대 신냉전 시대에 대한 예지적인 클라이파이로서 기후재난과 복잡하게 얽힌 국가 갈등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 속의 해일은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촉발되었으며 모든 권력의 상위에 군림한다. 이 소설이 북미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이유 중 하나는 핵전쟁의 공포와 긴장이 반영된 암울한 세계에서, 두 소년 소녀가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숭고한 초월성으로 무장한 채 무작정 세계를 구원하는 쉬운 결말을 택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거대하고 파괴적인 재난 이후의 세계에서 더욱 강조되는 인간의 왜소함과 외로움, 무력함에서 비롯된 슬픔과 같이 가장 원초적인 고민과 취약한 본성들을 새롭게 보여준다.
저자
알렉산더 케이
출판
허블
출판일
2022.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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