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빅터 프랭클 / 이시형
원제 : Man's Search for Meaning
출판 : 청아출판사
출간 : 2021.11.15
주초, 올해의 독서는 여기서 마무리하자고 생각했더니 오히려 수월하게 읽히기 시작했다. 하지 말자고 생각하면 하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심보다.
과거에 다른 표지로 읽었었는데, 마침 추천도 받았고 세부적인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새로운 표지로 재독 했다. 개인적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깊게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이 부분은 다소 조심스럽지만, 저자가 겪은 경험이나 그로부터 비롯된 사유들을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저자의 글은 자신의 체험담임에도 불구하고 기묘한 거리감이 존재한다. 이것은 저자가 정신의학자로서 스스로를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자 했기 때문에, 혹은 객관적으로 서술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생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로 인해 체험에서 비롯된 설득력 또한 옅어지게 된다. 어쩌면 이것이 외부자와 내부자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자신의 체험을 포장지 아래에서 어렴풋하게 윤곽만 암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은, 독자를 배려해서라기보다 그 자신이 그것과 마주하기 힘들어서로 느껴진다.
외부에서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 고립 상황에서의 '직접 체험'으로 세워진 방어벽. 나는 그가 주장하는 이론과 가치들이 혹독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살아야 하는 이유', 인간으로서 선택해야 할 '이상'을 말하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에는 제대로 감각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부조리, 모순을 인지하는 지금의 자신에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좀 더 나은 선택이 있었다'라고 건네는 위로처럼 느껴진다. 그런 상황이 지나고 난 지금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제시하기 위한 듯한.
그러나 스스로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건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가치 자체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인간이 목표할 가치로서 충분하다. 어떤 상황에서건 사람은 스스로의 행동 동기와 존엄을 선택할 수 있으며, 매순간 변화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것이 무척 어렵고 힘든 선택이라는 것에도.
최우선의 가치에 무엇을 놓을 것인가. 생존의 위협을 느낄 때 대다수는 그 자리에 '나'를 놓게 된다. 그러나 그 자리에 '우리'가 아닌, 더 큰 의미의 '나'를 놓을 수 있는가. 그것이 현재 인류가 마주한 가장 어렵고도 큰 질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왜 자살하지 않습니까?"
- 이렇게 물으면 어떤 사람은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재능이 아까워서라고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그저 간직하고 싶은 추억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이런 환자의 대답 속에서 프랭클 박사는 정신과 치료에 중요하게 적용될 수 있는 어떤 지침들을 발견하곤 한다.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엮어 하나의 확고한 형태를 갖춘 의미와 책임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프랭클 박사가 독창적으로 고안해낸 '실존적 분석', 즉 로고테라피의 목표이자 과제이다.
- 이 책에서 프랭클 박사는 로고테라피를 창안하는 계기가 됐던 자기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잔인한 죽음의 강제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그는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과 만난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 아내가 강제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았거나 가스실로 보내졌다.
- 우리는 먼저 정신 의학의 이론과 치료에 대한 빅터 프랭클의 접근법을 선배 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연구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의학자는 신경 질환의 특성과 치료에 우선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고통을 주는 혼란의 원인을 서로 모순되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비롯된 불안에서 찾았다. 반면에 프랭클은 신경질환을 여러 형태로 분류한 다음, 그중에서 누제닉 노이로제와 같은 몇 가지는 환자가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와 책임을 발견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성적인 욕구불만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프랭클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 바로 여기서 우리는 실존주의의 중심적인 주제와 만난다. 즉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으려면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만약 삶에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없다. 각자가 스스로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프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 why'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how'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을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지닌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과거 스토아학파는 물론, 현대 실존주의자들도 인정하는 이 기본적인 자유가 프랭클 박사의 이야기에서는 아주 생생한 의미를 갖는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중에 적어도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능력을 보여 준 사람들도 있었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환자들이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 출판사의 요청으로 프랭클 박사는 이 책에 로고테라피 기본 원리에 대한 간단하고도 명쾌한 해설과 참고 문헌을 첨부했다. 지금까지 정신 치료법의 제3학파(선구자인 프로이트를 제1학파, 아들러를 제2학파로 부른다) 이론을 담은 책은 대부분 독일어로 쓰였다. 따라서 프랭클 박사의 개인적인 경험을 담은 이 책에 로고테라피의 기본 원리와 참고 문헌이 첨부된 것을 무척 반갑게 여기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 고든 W. 올포트
-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아니면 이제 곧 끌려갈 친구의 목숨을 구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자기를 대신할 다른 사람, 즉 다른 '번호'를 수송자 명단에 집어넣는다.
-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잔혹한 폭력을 일삼고 도둑질을 하는 건 물론, 심지어 친구까지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 강제 수용소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글은 그동안 수없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비록 실제 일어난 일이더라도 그것이 한 개인의 체험과 관련된 경우에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앞으로 전개될 글에서 내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이런 체험의 명확한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 수용소 생활을 겪어 본 사람들을 위해 나는 그들의 체험을 오늘날 시각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수용소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 곧 아직도 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당했던 일에 대해 말해 주고, 그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한다.
-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가 겪었던 일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 안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으니까요. 밖에 있었던 사람들은 우리가 그때 무엇을 느꼈는지 그리고 지금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 당시 나는 막사 맞은편에 있었다. 바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창문 옆에서 얼어붙은 손으로 뜨거운 수프가 담긴 그릇을 들고 맛있게 먹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창밖을 봤다. 방금 전 밖으로 옮겨진 시체가 동태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다시 수프를 먹었다. 만약 그때 내가 정신과 의사로서 직업의식을 가지고 나의 감정 결핍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일을 기억해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그 일이 나에게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인간이 더는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정서와 감정의 둔화를 의미하는 무감각은 수용자들이 보이는 정서적 반응의 두 번째 단계에서 나타나는 징후이다. 수감자들은 마침내 매일같이 반복되는 구타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다. 이런 무감각을 수단으로 삼아 사람들은 곧 주위에 꼭 필요한 보호막을 쌓기에 이른다.
- 두 번째 단계의 주된 징후인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진다. 즉 내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과제이다. 저녁이 되어 작업장에서 수용소로 돌아올 때 수감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자, 이제 또 하루가 지났군."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된다.
- 그와 같은 긴장 상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에 끊임없이 집중해야 할 필요성과 결합돼 수감자들의 정신세계를 원시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밖에서 정신 분석을 배운 적이 있는 동료 수감자들은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퇴행' 현상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이것은 정신세계가 원시적인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그들의 소원과 욕망은 꿈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빵과 케이크,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이었다. 이런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꿈속에서나마 소원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꿈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 강제 수용소에 예술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뿐만 아니라 유머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더 놀랄 것이다. 비록 그 흔적이 아주 희미하고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만 지속되지만,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 수용소에서 사람 목숨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감정이 무뎌진 수용소 사람들도 병든 사람을 이송할 때에는 이곳에서 인간 존재가 얼마나 철저하게 무시당하는지를 느꼈을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번호뿐이다. 오로지 죄수번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 있는 것이다. 사람은 글자 그대로 번호가 됐다.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번호'의 생명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그 번호 이면에 있는 것, 즉 그의 삶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된다. 그의 운명과 그가 살아온 내력 그리고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운명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고, 대신 운명이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가도록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심각한 무감각 현상이 팽배해 있었다. 무감각은 수감자들의 감정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 때로는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생사를 가르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때도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해주기를 원했다. 이렇게 어떤 일의 실행을 회피하는 태도는 수감자가 수용소에서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 몇 분 동안 -이런 문제는 항상 몇 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는 지옥의 고문과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 탈출을 해야만 할까?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까?
- 그로부터 여러 주가 지난 후, 우리는 이 마지막 순간에도 운명의 신이 우리를 우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리는 인간의 결정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그것이 특히 생사와 관련된 문제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
- 하지만 인간의 자유는 어떤가? 어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에 아무런 정신적 자유도 없단 말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이론, 즉 인간은 여러 조건과 환경적인 요인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성격으로 이루어진 이 만들어 낸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로 사실일까? 인간은 이런 여러 요소들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제 수용소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수감자들이 보인 반응이 '인간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라는 이론을 입증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자기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없단 말인가?
-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예(이런 이야기는 종종 영웅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매일 같이, 매시간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보이는 심리적 반응은 어떤 물리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단순한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수면 부족과 식량 부족,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게 되는 것이다.'
-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릿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 "저는 저 나무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죠."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한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헛소리를 하는 것일까? 환각에 빠졌나?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나무가 대답을 하는지 물었다.
"물론이지요."
나무가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녀는 말했다.
"나무가 이렇게 대답해요. 내가 여기 있단다. 내가 여기 있단다. 나는 생명이야. 영원한 생명이야."
- 우리는 앞에서 수감자의 내면적 자아에 대한 최종 책임은 심리적, 육체적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감자의 자유의사에 따른 결정에 있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수감자들을 심리학적으로 관찰해 보면 내면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도덕적,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 둔 사람이 결국 수용소 안 타락한 권력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무엇이 '내적 소유'를 이룰 수 있으며 또 이루어야만 하는 것일까?
-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 경험을 글로 쓰거나 이야기할 때, 당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우리는 언제 석방되는지를 몰랐다. 내가 있던 수용소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형 기간은 불확실했으며 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저명한 연구 전문 심리학자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이런 삶을 '일시적인 삶 provisional existence'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 혹은 완성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퇴행 현상을 볼 수 있다.
- 예를 들자면 실직자가 이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고, 목표를 세울 수도 없다. 실직한 광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 보고서를 보면 그들이 아주 기이한 형태의 변형된 시간 감각 -내면의 시간-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은 실직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 수감자 역시 기이한 '시간 감각'을 경험했다. 시시때때로 자행되는 폭력과 배고픔이 하루를 꽉 채우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하루라는 작은 단위의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긴 단위의 시간, 예를 들자면 일주일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수용소에서 내가 한 번은 동료에게 하루가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얘기하자 그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한다고 했다. 우리의 시간 감각이 얼마나 역설적이었던가!
-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수용소의 어려운 상황을 자기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렇게 위대한 영적인 고지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세상일에서의 실패와 죽음을 통해서도 이런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들은 평범한 환경에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 낸다.
-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했고, 더 나아가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 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 저녁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막사에 모였을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밀하게 물었다.
"말해 보게, 자네 오늘 기뻤나?"
우리 모두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는 부끄러운 듯이 대답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아니야."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 이렇게 갇혀 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의학적인 용어로 '이인증 depersonalization, A'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얼마나 많이 꿈에게 사기를 당해 왔던가! 자유의 날이 와서 석방돼 집으로 돌아가고,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아내를 포옹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는 꿈, 그런 꿈을 꾸었다. 오히려 너무나 자주 꾼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그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자유의 날을 맞은 그 꿈도 끝이 나고 만다. 이제 그 꿈이 지금 실현됐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그 꿈을 믿을 수 있을까?
- 그렇게 심한 정신적 압박을, 그렇게 오랜 시간 받았던 사람에게는 자유를 얻은 후에도 그전과 똑같은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특히 정신적 억압 상태에서 갑자기 벗어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위험은 정신 위생학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잠수병과 같은 것이다. 깊은 물속에서 일하던 잠수부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올 때 가장 위험한 것처럼, 엄청난 정신적 억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
- 이런 심리적 단계에서 원색적인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야만성의 영향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됐으니 이 자유를 마치 특허를 받은 것처럼 잔인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제는 억압받는 쪽이 아니라 억압하는 쪽이 됐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이제 폭력과 불의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된다.
- 물론 이런 설명이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로고테라피에서는 환자가 삶의 의미와 직접 대면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렇게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깨우치게 도와주는 것이 정신병을 극복할 수 있도록 환자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 이제 내가 만든 이 이론에 왜 '로고테라피 Logotherapy'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얘기하겠다. 로고스 Logos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로고테라피 혹은 다른 학자들이 '빈 제3정신 의학파'로 부르는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 나가는 인간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본다. 내가 로고테라피를 프로이트 학파가 중점을 두고 있는 쾌락의 원칙이나 아드리안 학파에서 '우월하려는 욕구'로 부르는 권력에의 추구와 대비시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예기 불안과 같은 피드백 기제가 근본적인 발병 원인인 것 같다. 어떤 증세가 공포를 낳고, 그 공포가 다시 증세를 유발하고, 이번에는 반대로 그 증세가 공포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악순환의 고리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생각들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강박증 환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싸우는 것이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강박증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압력이 반대편의 압력을 더욱 높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증상이 악화된다.
- 이와는 반대로 환자가 강박증과 맞서 싸우기를 중단하고 대신에 아주 반어적인 방식 -역설 의도와 같은- 으로 그것을 비웃어 주면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고, 증세가 점점 약해지면서 결국에는 없어지고 만다. 이런 증상이 실존적 공허에 의한 것이 아닌 다행스러운 경우에는 환자가 자신의 신경증적 공포를 비웃는 데서 더 나아가 나중에는 아예 그것을 무시하게 된다.
-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예기 불안은 역설 의도로 좌절시켜야 하고, 과잉 의도와 과잉 투사는 역투사의 방식으로 좌절시켜야 한다. 하지만 역투사는 환자가 자신의 삶에 주어진 특정한 과업과 사명을 바라보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 자기 연민이든 멸시든 간에 환자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치료의 핵심은 환자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데 있다.
- 이것은 다음과 같은 올포트의 말에서도 입증된다.
"욕구의 초점이 갈등으로부터 사심 없는 목표로 옮겨지면 노이로제 증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전체적인 삶이 보다 건강해질 수 있다."
- 하지만 이것 하나는 명심해야 한다. 낙관적인 생각은 명령이나 지시를 받아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모든 가능성과 모든 희망에 대해 가리지 않고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희망에 적용되는 것은 나머지 두 가지에도 적용되는데, 말하자면 믿음과 사랑도 명령하거나 지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 유럽 사람의 눈에는 미국 문화가 인간에게 '행복하기를 끊임없이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 이유가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인간적인 현상인 웃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을 웃게 하고 싶으면 그 사람에게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면 된다. 즉 우스운 이야기를 해서 그를 웃겨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게 웃음을 강요해서는 진정한 웃음을 끌어낼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카메라 앞에 선 사람에게 '치즈'라고 말하기를 강요하는 것과 같다.
- 이제 의미에 대한 질문 그 자체로 돌아가 보자.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로고테라피 치료 전문가는 우선 환자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직면했던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에 내재된 잠재적인 의미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전 생애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여기서는 환자의 삶 전체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 유사한 예로 영화를 들어 보자. 영화는 수천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장면마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의 최종적인 의미 역시 임종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최종적인 의미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의미가 각 개인의 지식과 믿음에 최선의 상태로 실현됐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그 시련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 따라서 나는 이렇게 권한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 적절하게 행동할 기회와 의미를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은 실제로 우리 삶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잠재적 가능성 그 자체도 큰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기회를 써버리자마자 그리고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키자마자 단번에 모든 일을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그것을 과거 속으로 보내고, 그것은 그 속에서 안전하게 전달되고 보존된다. 과거 속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모든 것들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저장되고 보존된다. 사람들은 그루터기만 남은 일회성이라는 밭만 보고, 자기 인생의 수확물을 쌓아 놓은 과거라는 충만한 곡물 창고를 간과하고 잃어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수확물에는 그가 해 놓은 일,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용기와 품위를 가지고 견딘 시련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나이 든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은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이 과거에 실현시킨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 사람이 쓸모 있느냐 없느냐 하는 조건에 기반을 둔 것은 절대 아니다.
-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이런 유용성은 그 사람이 사회에 이로운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기능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춰 정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사람이 이루어 낸 성과를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행복한 사람, 특히 젊은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요즘 사회의 특징이다. 실제로 이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가치를 무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차이를 애매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 만약 이런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가치가 오로지 현재 그 사람이 지닌 유용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히틀러의 계획에 따라 자행된 안락사, 즉 나이가 들어서, 불치의 병에 걸려서,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해서, 혹은 고통스러운 어떤 장애 때문에 사회적으로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사람들을 죽였던 '자비로운' 행위에 대해 변명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오로지 개인적인 모순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인간의 존엄성을 단순한 유용성과 혼동하는 것은 개념상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개념상 혼동의 근원은 현재 대학 캠퍼스는 물론, 정신 분석 치료실까지 널리 퍼져 있는 현대의 허무주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심지어는 정신 분석을 훈련하는 과정에서도 그런 세뇌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
- 나의 관심은 '주인의 목소리'를 그저 흉내 내기만 하는 앵무새를 키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횃불을 독립적이고, 독창적이고,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영혼에게 전달하는 데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해보자. 배고픔이라는 절박한 압박이 점점 커짐에 따라 개인의 차이는 모호해지고, 그 대신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표현하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 나타나게 된다.'
- 감사하게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일을 몰랐다. 그의 환자는 빅토리아풍으로 호화롭게 디자인된 침상에 누워 있었지 아우슈비츠의 오물더미 위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말과는 달리 강제 수용소에서 '개인적인 차이'가 모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차이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돼지와 성자의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그런 것을 경험한 후 우리는 더 이상 '성자'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됐다.
- 여러분은 우리가 굳이 '성자'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저 '훌륭한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소수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소수의 반열에 합류하려는 도전 의지를 본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지금 아주 좋지 않은 상태에 있고, 우리 각자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더욱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경계심을 갖자.
- 하지만 내가 볼 때, 정신 분석에는 이보다 훨씬 잘못되고 위험천만한 가정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범결정론이다. 범결정론은 어떤 조건이든지 그 조건에 대해 자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인간관을 의미한다.
-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거대한 인간 집단의 행동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자료를 통해서 얻은 사실뿐이고, 각 개인의 특성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채로 남아있다. 어떤 예측이든 거기에는 그 사람이 처한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이 반영되어 있다.
- 그러나 인간 존재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에게는 그런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 나는 살아 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 우리 세대는 실체를 경험한 세대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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