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도스토옙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일루젼 2022. 10. 31. 04:17
728x90
반응형

저자 : 도스토옙스키 / 김연경
출판 : 민음사 
출간 : 2010.02.26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현학적이고 긴 호흡의 독백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 -그에게는 이름이 없다- 은 대체로 그의 내부에서 이어지는 끊임없는 생각들을 기록해나간다. 그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의 대화와 논박들은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이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무척 정제된 문장들이다. 

 

작가가 주인공의 생각을 빌어 주장하고 싶은 바는 다음과 같다. 

'스스로에게 해로운 행위를 하는 자는 무엇이 진정한 이익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가정은 잘못 되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욕망할 수 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일일지라도, 그것을 알면서도 파괴 자체를 욕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불합리성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을 이루고 있는 한 기질이다. 그런 '열망'이 거세된 인간은 '이성과 합리'로만 이루어진 하나의 건반이요, 자유의지 따위는 사라진 인형이다. 

 

다만, '이익'이란 무엇인가? 모든 이들이 같은 것을 욕망할 때 그것은 '욕망'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다. 모든 이가 '안온함'과 '풍족함'이 이익이라고 생각할 때, 그렇지 않은 것이 이익일 수 있음을 역설하는 그의 목소리는 한 개인에게는 그에게만 존재하는 진리가 있음을 주장한다. 인간이 개체로서 가질 수 있는 개성은 거기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자유 의지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은 이성적 설계가 아닌 이 '부정'에서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금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가 된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결국 그것이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어지는 사색은 인간이란 무엇이며 나는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는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영역에서 무지 상태에서의 야만과 배움 이후의 야만의 비교 같은 도덕론적 영역으로 이어진다. 진정한 자유의지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은 본능마저도 거스를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하는 주인공의 논지는 신학적이기도 하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주인공이 겪는 고통은 그의 자아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발생한다. 그는 '이상'을 이해하고 있고 스스로에게 '마땅한' 것들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과 합치되지 않을 때, -그는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부끄러워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하지만 그대로 앉아 술을 홀짝인다- 그는 그런 자기 자신을 내외부에서 관찰하며 스스로를 수치스러워한다. 그 괴리를 스스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미치지 못하는 고통과 절망, 그럼에도 끊임없이 인식되는 '진실'을 회피하고자 그는 결국 지하로 내려간다. 

 

그렇게 잠겨든 지하에서도 그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어디에나 자신이 존재하는 한 그 자신을 지켜보는 자신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는가'라는 주인공의 질문은 작가 자신을 향한 자조적인 비난이기도 하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그 자신의 구차함과 비겁함을 어디까지 직시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디까지 내보일 수 있는가 하는 자기 한계적 고백이다. 1부에 비해 2부가 조금 더 읽기 수월한 것은 내부로부터의 관찰이 리자라는 존재를 통해 외부로부터의 관찰로 시점을 옮겼기 때문일 뿐, 1부와 2부는 여전히 같은 것을 고백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성향의 차이에 따른 호불호가 확실한 작가이지만, <지하로부터의 수기> 만큼은 일독을 권하고 싶다. 

끝.     

 


   

 

- 이 수기의 저자도 '수기' 자체도 물론 지어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우리 사회를 형성하는 여러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수기의 작가와 같은 인물은 우리 사회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을뿐더러 심지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에 속하는 성격 중 하나를 좀 더 또렷하게 뭇사람들 앞에 내보이고 싶었다. 이 자는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저 세대의 대표자 중 하나이다. '지하'라는 제목이 붙은 이 단편(斷片)에서 이 인물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견해를 소개하고 이런 인물이 우리의 환경 속에서 생겨난, 또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고 싶어 하는 듯하다. 다음 단편(斷片)에서는 이 인물의 인생에서 일어난 몇몇 사건을 담은 진짜 '수기'가 나올 것이다.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나는 아픈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란 인간은 통 매력이 없다. 내 생각에 나는 간이 아픈 것 같다. 하긴 나는 내 병을 통 이해하지 못하는 데다가 정확히 어디가 아픈 지도 잘 모르겠다. 의학과 의사를 존경하긴 하지만 치료를 받고 있지 않으며 또 받은 적도 결코 없다. 게다가 나는 아직도 극도로 미신적이다. 뭐, 의학을 존경할 정도로는 미신적이란 소리다. (미신적이지 않을 만큼은 교육도 충분히 받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미신적이다.) 아니, 나는 심술이 나서라도 치료 따위는 받기 싫다. 이런 심보를 여러분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뭐, 하지만 나는 이해한다. 물론 이 경우 이렇게 심술을 부려 대체 누구를 골탕 먹이려는지 여러분에게 설명할 재간은 없다. 의사의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그네들 얼굴에 '먹칠'을 할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아주 잘 안다. 그런 짓을 해 봐야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나 자신만 손해라는 걸 내가 제일 잘 안단 말이다. 

 

- 그저 괜스레 참새들이나 놀래는 주제에 그걸 자기 위안거리로 삼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시시각각, 심지어 울화통이 터져 미칠 것 같은 순간에도 속으로 수치스럽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란 놈은 입에 거품을 물고 으르렁거릴 때도 무슨 인형을 안겨 주든가 설탕을 곁들인 차라도 내오면 아마 금방 진정할 것이다. 심지어 마음속 깊이 감동까지 할 테지만, 분명히 나중에는 나 자신에게 이를 갈고 수치심 때문에 몇 달 동안 불면증에 시달릴 것이다. 원래 이게 나의 고질병이다. 

 

- 아까 내가 심술궂은 관리였다고 말한 건 나 자신에 대한 거짓말이었다. 심술이 나서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나는 그저 청원자들과 장교를 상대로 장난을 좀 쳤을 뿐, 본질적으론 절대 심술궂은 놈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나의 내부에는 그와 정반대 되는 요소들이 아주 넘치고 또 넘친다는 것을 시시각각 의식해 왔다. 나는 그것들, 즉 그 정반대 되는 요소들이 나의 내부에서 그렇게 득실 거리고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그것들이 평생 나의 내부에서 득실거리면서 저어기 내 바깥으로 나가게 해 달라고 난리를 쳤음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내보낼 리가 있나, 일부러라도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그것들은 나를 수치스러울 정도로까지 괴롭혔다. 그러다 경련이 일 지경에 이르자 마침내는 신물이 났다. 어찌나 신물이 났던지! 설마 여러분은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뭔가를 뉘우치고 있다고, 내가 여러분에게 뭔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확신하건대,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나는 아무 상관없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 되지 못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숫제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심술궂은 인간도, 착한 인간도, 야비한 인간도, 정직한 인간도, 영웅도, 벌레도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 방구석에서 이렇게 연명하면서, '현명한 인간이라면 진정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오직 바보만이 뭐든 되는 법이다.' 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표독스러운 위안이나 하며 나 자신을 약 올리고 있다. 그렇다, 19세기의 현명한 인간은 정신적으로도 우선적으로 성격이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반면 성격이 있는 인간, 즉 활동가는 우선적으로 꽉 막힌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십 년 묵은 나의 소신이다. 나는 지금 마흔 살인데, 사실 마흔 살이라니, 이건 그야말로 한평생이 아닌가. 사실 이쯤 되면 늙을 대로 다 늙은 거다. 사십 년 이상 산다는 것은 점잖지 못하고 속되고 부도덕한 일이다! 성심성의껏, 솔직하게 대답해보라 - 누가 사십 년 이상을 산단 말인가? 누가 그런지 내 여러분한테 말해 주겠다. 바보와 불한당이 그렇게 산다. 나는 모든 노인장들, 이 모든 존경받은 노인장들, 백발이 성성하고 향기가 폴폴 나는 모든 노인장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 말을 해 줄 것이다! 온 세상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할 테다! 나는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 왜냐면 나도 예순 살까지 살 테니까. 일흔 살까지 살고야 말겠다! 여든 살까지도 살겠다...!  

 

- "즉 달달 소리를 내지 않고 또 괴상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좀 더 소박하게 신음할 수도 있지만 그냥 오기가 발동한 나머지, 또 적의에 사로잡힌 나머지 어리광을 부린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이지요. 뭐 그러니까 이 모든 의식과 치욕 속에 음탕함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올시다. '그래, 나는 너희에게 폐를 끼친다, 너희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집 안의 모든 사람들을 잠도 제대로 못 자게 한다. 그럼 그냥 다들 잠도 자지 말고 시시각각 내가 치통을 앓고 있다는 것을 느끼란 말이다. 나는 이전에는 너희들한테 영웅처럼 보이고 싶었지만 이제는 영웅은커녕 그저 더러운 인간에, 애물단지에 지나지 않는다. 뭐 그러면 어때! 나는 너희들이 나의 정체를 간파해서 정말 기쁘다. 너희들, 나의 비열한 신음을 듣는 것이 역겹지? 뭐, 얼마든지 역겨워하란 말씀. 자, 그럼 이제는 내 너희에게 더욱더 역겹게 달달 소리를 곁들어 주마...' 이래도 이해하지 못하겠소, 여러분? 아니, 이 음탕함의 온갖 섬세한 뉘앙스를 이해하려면 지적으로 심오한 성숙의 경지에 이르고 의식의 극단까지 가야 할 것 같군요! 비웃는 거요? 그렇다면 몹시 기쁘군. 나의 농담은 여러분, 물론 품격도 떨어지고 변덕스럽고 앞뒤도 안 맞는 데다가 자기 불신감마저 가미되어 있소. 하지만 실상 이건 내가 나 자신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오. 도무지 의식이 발달한 인간이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을 존경할 수 있겠소?

 

- 오, 만약 내가 오직 게을러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라면. 맙소사,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존경했을까. 비록 게으름일망정 뭐라도 나의 내부에 지닐 수 있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나 자신을 존경했을 것이다. 비록 하나라도 나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긍정적인 성질이 나의 내부에 있다면 말이다. 질문 : 대체 넌 뭐 하는 놈이냐? 대답 : 게으름뱅이. 과연 자신에 대해 이런 말을 듣는 것은 굉장히 유쾌하지 않겠는가. 확실한 정의가 내려졌다는 소리고, 또 나에 대해 말할 게 있다는 소리니까. '게으름뱅이!'라니. 정말이지 이건 하나의 직함이자 사명이며 또 이건 하나의 이력이다. 농담이 아니다, 정말 그렇단 말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제일가는 클럽의 명실상부한 회원으로서 끊임없이나 자신을 존경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내가 알았던 한 신사는 자기가 라피트를 잘 안다는 걸 평생 자랑스러워했다.

(리뷰자 주 : 샤토 라피트를 잘 안다는 건 자랑스러울 만한 일이다.)  

-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황금빛 몽상이다. 오, 말해 달라, 누가 맨 처음으로 이런 의견을 내놓았는가, 인간이 추잡한 짓을 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진짜 이득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맨 처음 선언한 자 과연 누구인가. 즉, 인간을 계몽해 주고 진짜, 또 정상적인 자신의 이득을 보도록 눈뜨게 해 준다면 그는 즉시 추잡한 짓을 멈추고 즉시 선량하고 고결한 인간이 될 것이다. 왜냐면 계몽되어 자신의 진짜 이익을 이해함으로써 선(善)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꼭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세상의 어느 누구 하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선을 행하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식이다. 오, 정녕 젖먹이나 다름없도다! 오, 정녕 순수하고 순진한 아이인지고! 그래, 대체 언제, 첫째, 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인간이 오직 자신의 이익 하나만을 위해서 행동했던 적이 있었던가? 사람들이 뻔히 알면서도, 즉 자신의 진짜 이익이 뭔지 완전히 이해했으면서도 그걸 옆으로 제쳐 놓고 모험과 요행을 찾아 다른 길로 돌진했음을, 아무도, 아무것도 그걸 강요하지 않았건만 그야말로 지정된 길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고집스럽게 제멋대로 힘들고 터무니없는 다른 길을, 거의 어둠 속을 더듬듯, 개척해 왔음을 증명해 주는 수백만 개의 사실들은 대체 어찌할 것인가? 실상 그들로선 이 고집스러움과 제멋대로가 정말로 온갖 이익보다 더 유쾌했다는 소리가 아닐까... 이익이라니! 이익이란 무엇인가? 그래, 여러분은 인간의 이익이 대관절 어디에 있는지 완전히 정확하게 정의할 자신이 있는가? 만약 인간의 이익이 때때로 어떤 경우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라 불리한 것을 바라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틀림없이 그렇다면 어쩔 텐가? 만약 그렇다면, 만약 그런 경우가 있을 수만 있다면 법칙 자체가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경우가 있을까? 다들 비웃는군. 비웃어도 좋지만, 단, 여러분 다음 질문에는 대답을 해 주시길. 즉, 인간의 이익이란 것이 완전히 정확하게 계산된 것일까? 어떤 분류에도 포함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포함될 수도 없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실상, 여러분, 내가 알고 있는 한 여러분은 통계 수치와 경제학 공식의 평균치를 갖고 인간 이익의 총장부를 만든 셈이었다. 여러분이 말하는 이익이란 안락, 부유함, 자유, 평온 같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뻔히, 훤히 알면서도 이 총 장부에 반항하는 인간은 여러분 생각에, 뭐, 물론 내 생각에도 무지몽매한 작자거나 완전히 미치광이이다. 안 그런가? 하지만 정말 놀라운 건 이 점이다. 즉, 이 모든 통계학자들, 현자들, 인류애를 부르짖는 인사들이 인간의 이익을 산정할 때 항상 한 이 문명 덕분에 더 피에 굶주리게 된 건 아닐지라도 분명히 이미 예전보다는 더 고약하고 더러운 꼴로 피에 굶주리게 됐다. 예전에는 유혈에서 정의를 보았기에 평온한 양심으로, 마땅히 처단해야 될 자를 살육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유혈을 더러운 짓으로 여길지언정 어쨌거나 이 더러운 짓을 계속하고 있으며 그 정도도 예전보다 더 심해졌다. 과연 무엇이 더 나쁜가? 여러분이 직접 결정하시라. 흔히 말하길, 클레오파트라(로마 역사까지 들먹거려 죄송하다.)는 황금 핀으로 자기 여자 노예들의 젖가슴을 찌르는 걸 좋아했고 그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트는 걸 보면서 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여러분은, 이건 상대적으로 말해 야만적인 시대의 일이다, 그런데 (역시나 상대적으로 말해서) 지금도 핀으로 몸을 찌르는 일이 있는 걸 보니 지금도 야만적인 시대다.

(리뷰자 주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떠오른다. 그렇다. '이익'이란 과연 무엇인가? 다만 여기서 언급되는 핀으로 몸을 찌르는 일은, 합승 마차 등에서 일부러 몸을 기대는 남성 등을 저지하고자 여성이 부풀린 머리에 꽂았던 헤어핀을 빼서 찔렀던 문화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인간이 이따금씩은 야만적인 시대보다는 사물을 좀 더 분명히 보는 법을 배웠다고 할지라도 지금도 이성과 과학이 그에게 지시해 주는 대로 행동하는 법을 아직 완전히 익히지는 못했다, 하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러분은 어떤 낡고 고약한 관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상식과 과학이 인간의 본성을 재교육하여 정상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주면, 반드시 그걸 익힐 것이라고 전적으로 확신한다. 그때면 인간은 자발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말하자면 자신의 정상적인 이득과 정반대로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는 것은 자연스레 원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그때는 과학이 나서서 (이건 내 생각으론 좀 사치스러운 것 같지만) 인간에겐 실은 의지도 변덕도 없고 더욱이 이전에도 원래 없었다고, 인간은 그 자체가 피아노 건반이나 오르간 스톱과 비슷한 뭔가에 불과할 뿐이라고 가르칠 것이다, 하고 여러분은 말한다. 덧붙여 세상에는 아직 자연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는 일은 모두 절대 그의 욕망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진다, 하고. 따라서 이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기만 하면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게 될 것이며 사는 것도 굉장히 편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저절로 이 법칙에 따라 로그표처럼 수학적으로 분류되어 100만 8천 종에 이를 것이고 그렇게 연감에 기입될 것이다. 아니면 이보다 훨씬 더 훌륭한 방법으론, 지금의 백과사전 같은 편람과 유사한 몇몇 건전한 출판물이 나와서 모든 걸 정확히 계산해 주고 명시해 주면 세상엔 이미 더 이상 행동이라는 것도, 엽기적 사건도 없어질 것이다.  

 

- 그때가 되면 - 이건 모두 여러분이 하는 얘기다 - 새로운 경제적 관계, 즉 완전히 준비되고 역시나 수학적 정확성을 뽐내며 계산된, 완전히 기성품 같은 관계들이 나타날 것이고, 본질적으로 모든 질문에 대한 모든 가능할 법한 대답이 제시되기 때문에 모든 가능할 법한 질문이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그때야말로 수정궁이 건설될 것이다. 그때는... 뭐, 한마디로 말해서, 그때는 카간의 새가 날아들 것이다. 물론(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그때도 이를 테면 끔찍이 권태롭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절대 할 수 없지만(모든 것이 도표에 따라 계산되는데 뭘 하란 말인가?) 대신 모든 것이 굉장히 합리적일 것이다.   
(역자 주 : 칸의 새, 천국의 새.) 

 

- "실상 그러면 인간은 아마 당장에 뭘 욕망하는 일이 없어질 거요, 아마 정도가 아니라 거의 확실히 그럴 테지요. 아니, 도표에 따라 욕망하는 게 뭐 그리 좋겠소? 어디 그뿐이겠소. 인간은 그 즉시 인간에서 오르간 스톱이나 그 비슷한 뭐로 변할 거요. 소망도, 의지도, 욕망도 없는 인간이라면 배럴 오르간의 스톱이지, 무슨 인간이오? 여러분 생각은 어떻소? 이게 신빙성이 있는지 한번 따져 봅시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소, 없겠소?" 

 

- "우리의 욕망이 오류투성이인 것은 대부분 우리의 이익에 대한 시각에 오류가 있기 때문이오. 우리가 이따금씩 순전히 허튼수작을 원하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은 탓에 그 허튼수작 속에서 뭐든 미리 제안된 이익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길을 보기 때문이오. 그래, 이 모든 것이 해석되어 종이 위에 계산된다면(이럴 가능성이 몹시 높은데, 자연의 어떤 법칙들은 인간이 절대 알아내지 못할 거라고 미리부터 믿는 것이 상스럽고도 터무니없기 때문이오.) 그때는 물론 이른바 소망이라는 것도 없어질 거요. 실상 욕망이 언제든 이성과 완전히 맞아떨어진다면, 그때 우리는 욕망하는 대신 이성에 따라 판단하게 될 것인데, 이는 예컨대 이성을 간직한 채로 터무니없는 것을 욕망하고 그런 식으로 뻔히 다 알면서 이성에 역행하여 자기에게 해로운 일을 바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언젠가는 이른바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의 법칙을 발견할 것이기에 모든 욕망과 이성이 정말로 계산될 수 있고, 이 때문에 농담이 아니라 진짜 도표와 같은 무엇이 작성될 수도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정말로 이 도표에 따라 욕망하게 될 거요." 

 

- 그렇다, 하지만 나로선 바로 여기에 난관이 있다! 여러분, 이렇게 개똥철학이나 잔뜩 늘어놓는 나를 용서해 주시길. 하긴 사십 년이나 지하 생활을 하고 있으니, 원! 허튼 공상을 늘어놓아도 좀 봐주시길. 그나저나 여러분, 이성이란 좋은 것이지만, 이건 틀림없지만, 이성은 오직 이성일 뿐이어서 오직 인간의 이성적 판단력만을 만족시킬 뿐이지만, 욕망은 삶 전체, 즉 이성과 온갖 긁적임을 포함하는, 인간의 삶 전체의 발현이다. 그 발현에 있어 우리의 삶은 종종 너저분한 꼴이 되기 십상이지만 그럼에도 삶은 삶이지, 한낱 제곱근 개평방법(開平方法) 따위는 아니다. 예컨대 내가 극히 자연스레 삶을 원하는 것은 나 자신의 삶의 능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이지, 오직 나의 판단 능력 하나만을, 즉 나의 삶의 능력 전체의 20분의 1 정도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아니다. 이성이 대체 뭘 알겠는가? 이성은 자기가 알아낼 수 있었던 것만을 알지만(다른 것은 아마 절대 알아내지 못할 텐데, 비록 이게 위안은 안 될지라도 이런 말을 못 할 이유는 또 어디 있겠는가?) 인간의 본성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오롯이 그 자체로 자기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으로써 행동하고 설령 거짓말을 할지언정 어떻든 살아가긴 한다. 나는, 여러분, 여러분이 나를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지 않을까 싶다. 여러분은, 계몽되고 지적으로 성숙된 인간, 한마디로 말해서 미래의 인간이 될 그런 자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뭘 욕망할 리는 없다, 이건 수학이다, 하고 나에게 반복해 주는군.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말로 수학이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백 번째 반복하거니와, 인간이 그냥 어리석다 못해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을, 심지어 자기에게 해로운 것을 일부러, 의식적으로 바라는 경우가 한 번, 정말 딱 한 번은 있다. 다름 아니라,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을 바랄 권리를 갖기 위해, 오직 현명한 것 하나만을 바랄 의무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다. 실상 이건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고 실상 이건 자신의 변덕에 불과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여러분, 우리 같은 인간에겐 정말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틀어 가장 이로운 것일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특별히 더 그렇다. 부분적으론, 심지어 우리에게 명백히 해를 입히고 이익에 관한 우리 이성의 가장 건강한 결론과 모순되는 경우에도 모든 이익들보다도 더 이로운 것일 수 있는데, 이는 어떤 경우든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소중한 것, 즉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개성을 보존해 주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 정말로 그 무엇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욕망은 물론, 그럴 욕망이 있다면, 이성과 합치될 수도 있으며, 특히 그것을 남용하지 않고 적절하게 이용한다면 유용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몹시 자주, 심지어 대부분의 경우 완전히, 또 집요하게 이성과 상치되고... 또... 또 그렇긴 하지만 이것도 유용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따금씩은 매우 칭찬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지? 여러분, 인간이 어리석지 않다고 치자. (정말로 한 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실상 인간을 두고 이런 얘기는 절대 할 수 없는데, 즉, 인간이 어리석다면 그때는 누가 현명하단 말인가?) 하지만 어리석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어쨌거나 괴물처럼 배은망덕하다! 이례적일 만큼 배은망덕하단 말이다. 내 생각으론 심지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는 두 발로 걷는 배은망덕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아직 전부는 아니다. 이것도 아직은 인간의 주된 결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주된 결함은 바로 지속적인 부정(不淨), 즉 대홍수부터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시기에 이르는 인간의 운명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 부정이다. 부정이 곧 무분별이기도 한데, 오래전부터 알려졌듯, 무분별은 다름 아닌 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슬쩍 훑어보라. 자, 무엇이 보이는가? 장엄한가? 하긴 장엄하기도 하겠지. 이를 테면 로도스의 거상 하나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가치가 있는지!  

(리뷰자 주 : 현학적으로 나열되어 있으나 이 독백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주장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학적이기도 하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무엇이며, '거부할 권리' - 즉 스스로를 '망가트릴 권리'가 없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이다. 모든 것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계산되는 세계는 욕망이 거세된 세계이다. 서로 다른 것을 원할 수가 없어지기 때문이며, 기실 '원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 누구든 사람은 오직 친구들이 아니면 아무한테나 털어놓지 못하는 추억이 있는 법이다. 친구들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그것도 은밀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끝으로,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털어놓기 무서운 것들도 있는데, 점잖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것들이 상당히 많이 쌓여있을 것이다. 즉, 심지어는 점잖은 사람일수록 그런 것들은 더욱더 많을 것이다. 적어도 나 자신만 해도 겨우 최근에야 예전에 있었던 나의 몇몇 모험을 회상해 보기로 결심했는데, 지금까지는 늘 어떤 불안마저 느끼면서 회피해 왔던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기억을 더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록하겠다는 결심까지 한 만큼 꼭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 즉, 나는 하다못해 나 자신 앞에서만큼은 완전히 솔직해질 수 있을까, 그 어떤 진실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곁들어 지적하자면, 하이네는 믿을 만한 자서전이란 거의 있을 수 없다고, 인간이란 스스로 자신에 대한 거짓말을 늘어놓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예를 들어 루소는 저 고백록에서 틀림없이 자신에 대한 거짓말을 늘어놓았고 심지어 허영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머리까지 굴려 가며 거짓말을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나는 하이네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한다. 그러니까 오로지 허영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스스로에게 온갖 죄를 덮어 씌우는 일이 이따금씩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하며, 심지어 이것이 어떤 종류의 허영심인지도 아주 잘 간파하고 있다. 하지만 하이네는 대중 앞에서 고백한 사람을 두고 얘기한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서 쓰는 것이고, 내가 독자를 대하는 듯한 투로 쓰고 있다면 그건 그저 보여 주기 위해서일 뿐이며 또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이 좀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엔 형식, 하나의 텅 빈형식만 있을 뿐, 독자 같은 건 내게 결코 없을 것이다. 이 점은 이미 일러뒀잖은가...

 

 


 

- 그 당시 나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나의 삶은 그때도 음울하고 무질서하고 야생에 가까울 만큼 고독했다. 나는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고 심지어 말하는 것조차 피하면서 점점 더 나만의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근무처인 관청에서도 아무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나의 동료들이 나를 괴짜 취급한다는 걸 아주 잘 인지했을 뿐만 아니라 - 줄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어쩐지 역겨움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내 머릿속엔 또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니까, 자기가 역겨움이 담긴 시선을 받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왜 들지 않는 것일까? 우리 관청 사람 중 하나는 얼굴이 심하게 얽어 혐오스러운 데다가 인상도 날강도처럼 험악했다. 나라면 저렇게 점잖지 못한 얼굴을 달고선 감히 누굴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또 한 사람은 제복이 너무나 낡아 빠져서 그 옆에 가기만 해도 벌써부터 고약한 냄새가 났다.  

 

- 그런데 이 양반들 중 아무도 옷에 관해서든 얼굴에 관해서든 저기 무슨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당혹스러워하는 일이 없었다. 이자도, 저자도 사람들이 자기를 역겨움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상상은 하지 않았다. 설령 그런 상상을 했다고 해도, 상부에서 그런 눈총을 보내지만 않으면 아무 상관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아주 분명히 알겠지만, 나는 무한한 허영심에 가득 찬 나머지 나 자신에게 너무 까다롭게 굴었고 그 결과 나 자신을 역겨움에 가까운 광포한 불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극히 잦았으며, 또 이 때문에 혼자만의 생각 속에서 나의 시선을 모든 사람들에게 투사했던 것이다. 예컨대, 나는 나 자신의 얼굴을 증오하고 그것이 추악하다고 생각했을뿐더러 거기에 뭔가 비열한 표정이 깃들어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의혹마저 품었기 때문에, 출근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내가 비열한 놈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품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능한 한 더 의연한 자세를 취하고 또 가능한 한 더 기품 있는 표정을 지으려고 괴로울 정도로 애를 썼다. '얼굴이 좀 못생기면 어때. 그 대신 기품 있고 표정이 풍부한, 무엇보다도 굉장히 지적인 얼굴이면 되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매력을 내 얼굴론 절대 표현할 수 없음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더 끔찍한 것은 내 생각엔 내 얼굴이 단연코 멍청이 같이 생겨먹었다는 점이다. 지성만 좀 깃들어 있어도 완전히 타협했을 것이다. 표정이 비열하다는 말을 들어도 수긍했을 것이다. 동시에 내 얼굴이 끔찍이도 지적이라는 말만 곁들어 준다면. 

나는 물론 나의 관청 동료들을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증오하고 또 경멸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을 좀 무서워했던 것 같다.

 

-  하지만 솜을 넣어 누빈 데다가 외투 깃이 너구리 털로 돼 있어서, 지위깨나 있는 하인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깃을 바꿔서 장교들처럼 해리(海狸) 깃을 달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고스친니 드보르를 돌기 시작했고 몇 군데를 둘러보고는 어느 값싼 독일제 해리로 낙찰을 봤다. 이런 독일제 해리는 아주 빨리 닳는 편이라 곧 볼썽사나운 꼴이 되지만 그래도 처음에 새로 샀을 때는 아주 점잖아 보이기까지 한다. 어차피 나로선 딱 한 번이면 되지 않는가. 값을 물어보았다. 어쨌거나 비쌌다. 철저한 판단에 따라 나의 너구리 털 깃을 팔기로 마음먹었다 

(리뷰자 주 : 해리(海狸)는 비버를 말한다.)

 

- 하지만 나는 방탕의 주기가 끝나면 토악질이 날 만큼 메스꺼워졌다. 밀려드는 회한, 나는 그것을 쫓아내려 했다. 너무나 메스꺼워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시나브로 익숙해졌다. 나는 모든 것에 익숙해졌는데, 다시 말해 익숙해진 정도가 아니라 어쩐지 자발적으로 참아 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을 화해시켜 준 출구가 있었다. 그건 '한결같이 아름답고 숭고한 것' 속으로 숨어드는 것으로서 물론 몽상 속에서의 일이다. 나는 끔찍할 정도로 몽상에 잠겼다. 

 

- 나의 몽상이 대체 어떤 것들이었으며 내가 어떻게 그것에 만족할 수 있었는지 지금은 말하기 힘들지만 여하튼 그때는 그것에 만족했다. 하긴 실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만족하고 있다. 방탕에 젖고 난 이후엔 유달리 더 달콤하고 강렬한 몽상이 나를 찾아왔으며, 그때마다 회환과 눈물, 저주와 환희를 동반했다. 진정한 희열과 행복이 찾아들어, 정말로 나의 내부에서 손톱만큼의 냉소도 느껴지지 않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것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었다. 바로 이게 핵심인데 나는 그때 어떤 기적이 일어나 어떤 외적인 상황 덕분에 이 모든 것이 갑자기 활짝 트여 확장될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믿었다. 갑자기 훌륭하고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완전히 준비된(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나도 절대 알지 못했지만 무엇보다도 완전히 준비된 것이어야 한다.) 적절한 활동의 지평선이 펼쳐질 것이며 그러면 나는 갑자기 거의 월계관을 쓰고 백마에 올라탄 듯한 기세로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이다. 조연을 맡는 건 나로선 납득할 수 없었고 바로 이 때문에 나는 현실 속에서 아주 평온한 마음으로 가장 하찮은 역을 맡았던 것이다. 영웅 아니면 진흙탕, 중간이란 없었다. 이것이 나를 파멸시켜 버렸는데, 진흙탕 속에 빠져 있으면서도 다른 때는 영웅이 된다고, 영웅이 진흙으로 몸을 살짝 가리고 있을 뿐이라고 자위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흙투성이가 되는 것이 수치스럽겠지만, 영웅은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기엔 너무나 높기 때문에 오히려 진흙을 살짝 묻힐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방탕의 순간에도 '한결같이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 밀물처럼 나를 찾아들었다는 사실인데, 더욱이 내가 이미 방탕의 저 밑바닥에서 허우적댈 때면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키려는 듯 제각기 터져 나오는 격발처럼 ... 

- 나는 그들 모두를 용서해 준다. 또 나는 저명한 시인이자 시종무관이 되어 사랑에 빠진다. 어마어마한 거금을 받기도 하지만 그 즉시 인류를 위해 몽땅 내놓고 그와 동시에 전 민중 앞에서 나의 치욕을 고백하는데, 이건 물론 그냥 치욕이 아니라 '아름답고 숭고한 것', 뭔가 만프레드적인 것이 굉장히 많이 담긴 그런 치욕이다. 다들 엉엉 울면서 나한테 입을 맞추지만(이러지 않는다면 다들 형편없는 머저리이다.) 이 몸은 새로운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굶주림을 무릅쓰고 맨발로 길을 떠나, 아우스터리츠에서 반동주의자들을 분쇄한다. 이어, 행진곡이 연주되고 특사가 발표되고 교황은 로마를 떠나 브라질로 가는 데 동의한다.  

(역자 주 : 바이런(1788~1824. 영국의 시인)의 극시 <만프레드>의 주인공. / 1805년, 나폴레옹 1세와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말함.) 

 

- 여러분도 대충 다 아실 텐데? 여러분은 내가 그 많은 희열과 눈물에 대한 고백을 늘어놓은 이후에 이제 와서 이 모든 걸 만천하에 떠벌리는 것은 속물적이고 비열한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대체 왜 비열하단 말인가? 정말로 여러분은 내가 이 모든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이 모든 것이 뭐든 여러분의 인생에서 있었던 일과 비교해서 더 멍청했다고 생각하는가? 덧붙여 단언하거니와, 내 말도 영 얼토당토않은 것은 아니다... 비록 전부 다 코모 호수에서 있었던 일만은 아니지만 하긴 여러분이 옳긴 옳다. 사실인즉, 속물적이고 또 비열한 노릇이다. 하지만 제일 비열한 것은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이 따위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비열한 것은 내가 지금 그 사실을 또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됐다, 이래 갖곤 도무지 끝이 나지 않을 테니까. 계속 더 비열한 것이 나올 테니까...

 

- 하지만 내가 정말로 광분한 것은 이러고서도 갈 것임을, 일부러라도 갈 것임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기 가는 것이 미련한 짓일수록, 또 무례한 짓일수록 더더욱 갈 것이란 말이다. 뿐더러 거기에 가지 못할 만한 확실한 장애까지 있었다. 바로 돈이 없었던 것이다. 내 수중에 있는 돈은 탈탈 털어서 9 루블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중 7 루블은 내일 당장 아폴론에게 월급으로 줘야 했는데, 이자는 밥은 직접 해결하되 7 루블씩 받고서 내 집에 사는 하인이었다. 아폴론의 성미로 봐서 월급을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의 종양 덩어리 같은 이 깡패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제 얘기하도록 하겠다. 어떻든 나는 내가 결국엔 월급을 주지 않으리라는 걸, 대신 기필코 거기에 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 나를 이 학교에 집어넣은 건 먼 친척들이었다. 나는 그들 손에 좌지우지되면서도 그때까지 그들에 대해 아는 게 통 없었다. 온갖 꾸지람에 시달린 결과 이미 생각만 깊어지고 말수도 적어진, 모든 것을 기괴한 눈초리로 살펴보던 고아인 나를 그들은 학교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학우들은 내가 자기들 중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악의에 찬 무자비한 냉소로 나를 맞이했다. 하지만 나는 냉소를 참을 수 없었다. 또 그들처럼 그렇게 손쉽게 서로 잘 어울려 놀 수도 없었다.  

 

- '맙소사, 이것이 내가 어울릴 만한 집단이란 말인가!' 나는 생각했다. '또 나는 왜 이런 놈들 앞에서 바보 노릇을 자처하고 있는가! 그나저나 페르피치킨 녀석의 짓거리를 참 많이도 참아 주었다. 저 등신들은 나를 위해 이 식탁에 한자리를 마련해 준 걸로 무슨 큰 선심이라도 쓴 줄 알지만, 실은 저들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저놈들한테 선심을 쓴 것이란 말이다. 그런 것도 모르는 주제들이! '비썩 말랐군요! 그 복장은 또 뭐요!'라니. 오, 바지는 정말 왜 이 모양이야! 즈베르코프 녀석은 아까부터 무르팍의 누런 얼룩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이러고서 뭘 더 얻어먹겠다고!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모자를 챙겨 들고 일언반구도 없이 그냥 나가 버리자... 경멸의 표시로 말이다! 내일은 결투라도 신청할 거다. 비열한 놈들 같으니. 설마 내가 루블을 아까워할쏘냐. 하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할 테지... 젠장! 루블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다! 지금 당장 나간다...!’ 
물론 그러고서도 나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 나는 괴로운 마음에 라피트와 셰리주를 큰 잔으로 마구 들이켰다. 익숙지 않은 탓에 빨리 취기가 돌았고 취기가 돌수록 짜증은 더 커져만 갔다. 갑자기 저놈들을 아주 뻔뻔스럽게 모욕한 다음 확 떠나 버리고 싶어졌다. 마땅한 순간을 포착하여 본때를 보여 주자. 그럼 저놈들 입에서 내가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머리는 좋은 녀석이니 어쩌니 하는 말이 나올 테고... 또... 또... 한마디로, 빌어먹을 놈들이다. 젠장! 

 

- 즈베르코프는 어느 휘황찬란한 여자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그는 그녀한테서 사랑 고백을 받아 냈고(물론 말[馬]처럼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절친한 친구, 즉 농노 3000명을 가진 아무개 공작이자 경기병 장교인 콜라의 도움이 특히나 컸다는 것이다.

"그런데 농노 3000명을 가진 그 콜랴라는 친구는 왜 여기 없는 거요, 당신을 배웅하는 이 마당에." 하고서 내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벌써 취했나 보군." 트루도류보프가 마침내 내 존재를 인정해 주기로 했는지, 경멸스럽다는 듯 내 쪽을 흘겨보았다. 즈베르코프는 말없이 나를 벌레처럼 뜯어보았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시모노프는 더 서둘러 샴페인을 따르기 시작했다.

 

- "왠지 당신은..." 그녀는 갑자기 말을 꺼냈지만 이내 멈춰버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녀의 음성에는 이미 뭔가 다른 떨림이 배어 나왔는데, 그것은 아까처럼 날카롭고 거칠고 반항적인 것이 아니라 뭔가 부드럽고 수줍은 것, 갑자기 나마저도 왠지 수줍어지고 미안해질 만큼 수줍은 것이었다. 
"어떻다는 거야?" 나는 상냥한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당신은요..."
"어떻다고?"
"당신은 왠지... 꼭 책을 따라 하는 것 같아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고 그녀의 음성에서는 갑자기 또 뭔가 냉소적인 것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의 지적에 나는 바늘에라도 찔린 듯 통증을 느꼈다. 이런 걸 기대한 건 아니건만. 

 

- "이것으로 지상에서의 너의 기억도 끝나는 거야. 다른 사람들 같으면 아이들이나 아버지나 남편이 무덤을 찾아 주겠지만, 너한테는 눈물 한 방울 흘려주는 이도, 한숨을 쉬어 주는 이도, 명복을 빌어 주는 이도 없고 온 세상을 통틀어 네 무덤을 찾아 주는 이도 아무도, 정말 아무도 없을 거야. 너의 이름은 너라는 사람이 결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숫제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이 지상에서 깡그리 사라질 거라고! 진흙과 늪 속에 잠긴 무덤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날 때면, 너는 밤마다 관 뚜껑을 두들기며 '선량한 이들이여, 잠시라도 이 세상에서 살게 해 주세요! 이 몸은 살긴 살았으되 삶이라는 걸 보지 못했답니다. 내 삶은 걸레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센나야 광장의 선술집 술독에 빠져 버렸거든요. 선량한 이들이여, 잠시라도 이 세상에서 살게 해 주세요...!'라고 외치지 않을까."  

 

-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내가 그녀의 영혼을 송두리째 뒤집어놓았고 그녀의 심장을 박살냈다는 예감이 들었으며, 그 확신이 강해질수록 더 빨리, 가능한 한 더 열심히 목적에 도달하길 바랐다. 놀이, 이 놀이가 나를 매혹시켰던 것이다. 하긴 꼭 놀이 하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내 말투가 빽빽하고 억지스럽고 심지어 책을 읽는 것 같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는데, 한마디로 말해 '꼭 책을 따라 하는 것처럼'이 아니고선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당황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사람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 것이고 이렇게 책을 읽듯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알았고 또 그런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효과를 보자 갑자기 겁이 더럭 났다. 아니, 결코, 지금까지 결코, 나는 이 같은 절망을 목도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  나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서 그만 진정하라고 타일러 볼까 싶었지만 그럴 엄두는 못 낼 것이라는 느낌이 들자 갑자기 온몸이 오한 같은 것, 아니 거의 공포에 사로잡혔고 어떻게든 잽싸게 떠나 버리자는 생각에 더듬더듬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캄캄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빨리 끝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성냥갑과, 손대지 않은 새 양초가 꽂힌 촛대가 만져졌다. 빛이 방 안을 밝히자마자 리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더니, 어쩐지 일그러진 얼굴에 반쯤 미친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거의 넋이 나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 곁에 앉아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 "요 사흘간 나를 특히나 괴롭힌 것이 뭔지 알아? 그때는 내가 네 앞에서 무슨 대단한 영웅인 양 굴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너덜너덜한 실내복이나 걸친, 비렁뱅이처럼 추잡한 꼴을 갑자기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어. 방금 나는 너한테 가난 따위는 부끄럽지 않다고 말했지만, 똑똑히 알아 둬, 부끄러워. 무엇보다도 부끄럽고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두려워. 도둑질을 했다고 해도 이보다 심할 순 없을걸, 원래 난 허영심이 많은 놈이라서 꼭 살 껍질을 싹 도려낸 것처럼 공기만 닿아도 고통스러울 테니까. 하필이면 이런 실내복을 걸친 채 성질 사나운 개처럼 아폴론한테 덤벼들었을 때 나를 찾아온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리라는 걸 정말 지금도 깨닫지 못했어? 너를 부활시킨 자, 전에는 영웅이었던 자가 옴 투성이에 털북숭이 똥개처럼 자기 하인한테 덤벼들고 그 하인 놈은 오히려 주인을 비웃는 장면이라니! 또 아까 창피당한 여자처럼 네 앞에서 그만 눈물까지 흘렸으니, 이 때문에라도 나는 너를 절대 용서하지 못할 거야! 그것도 모자라 지금 너한테 이런 걸 주저리주저리 고백하다니, 이 때문에라도 역시 절대 너를 용서하지 못할 거라고! 그래, 네가, 너 혼자 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해. 하필 그때 네가 나타났으니까, ... "

 

- 하지만 왜 그럴듯하지 않다는 건가? 첫째, 나는 이미 사랑을 할 수도 없었는데, 거듭 말하거니와 내게 있어 사랑한다는 것은 폭군처럼 굴며 정신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동안 다른 형태의 사랑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그 결과 지금은 사랑이란 그 사랑의 대상에게 폭군처럼 굴 수 있는 권리, 그것도 그 대상이 자발적으로 선사한 권리라는 생각마저 더러 하게 됐다. 나의 이 지하의 몽상 속에서도 사랑을 오직 투쟁으로만 상상해 왔고, 그랬기에 내게 있어 사랑은 언제나 증오에서 시작하여 정신적 정복으로 끝났지만 그런 다음 내가 정복한 그 대상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또한 상상할 수 없었다.  

 

-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 모든 것을 돌이켜 보면 어쩐지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돌이켜 보면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일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 '수기'는 여기서 끝내야 되지 않을까? 내 생각으론 이런 걸 쓰기 시작한 것 자체가 실수였다. 적어도 나는 이 소설을 쓰는 내내 부끄러웠다. 다시 말해, 이것은 문학이 아니라 교도 감화를 위한 징벌이다. 사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령 내가 지하의 구석방에서 정신적인 부패에 시달리고 환경의 결핍을 맛보며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유리되어 허영심 가득한 분노나 키우고 그럼으로써 정작 삶을 놓쳐 버린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것은 맹세코 재미없는 일이다. 소설에는 주인공이 필요한 법인데, 여기서는 일부러 반(反) 주인공에게나 걸맞은 특성만 몽땅 모아 놓았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이 불쾌한 느낌을 준다는 점인데, 이는 우리 모두 삶으로부터 유리된 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너나 할 것 없이 다 절뚝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나 많이 유리되었는지 진짜 '살아 있는 삶'에 대해서는 때때로 어떤 혐오감마저 느끼고, 또 이 때문에 누가 우리에게 이걸 상기시키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다. 실상 우리는 '살아 있는 삶'을 노동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거의 업무로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다들 속으론 책에 따라 사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는 쪽에 동의한다. 왜 우리는 이따금씩 옥신각신하는 걸까, 왜 변덕을 부리는 걸까, 대체 왜 뭘 요구하는 걸까? 우리 자신도 왜인지는 모른다. 어떻든 우리의 변덕스러운 요구를 들어준다면 우리는 오히려 더 나빠질 것이다. 자, 시험 삼아 우리에게 가령 자립성을 좀 더 많이 주고, 우리 중 아무나의 손을 풀어 활동 범위를 좀 더 넓혀 주고, 보호의 강도를 좀 더 낮춰보라, 그러면 우리는... 분명히 말하지만, 당장에 우리를 다시 원래대로 보호해 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자, 여러분은 나한테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면서 두 발을 쾅쾅 구를 것이다. 나도 잘 안다. "당신 자신의 얘기만, 당신의 비참한 지하 생활 얘기만 할 것이지, 감히 우리 모두라고 둘러대진 말라."라면서. 죄송하지만, 여러분, 이 모두란 말로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실상 여러분이 감히 절반도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을 내 삶에서 극단까지 밀고 나갔을 뿐인데, 여러분은 자신의 비겁함을 분별이라 생각하고 이로써 스스로를 기만하면서까지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보다는 훨씬 더 '생기로운’ 셈이다. 그럼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보라! 실상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한다, 지금 대체 어디에 살아 있는 것이 있는가, 그것은 대체 무엇이며 또 그 이름은 무엇인가? 우리를 단 한 권의 책도 없이 홀로 남겨 둬 보라, 그럼 우리는 당장에 갈팡질팡하고 어리둥절해질 것이며, 어디에 합류해야 하고 무엇에 따라야 할지,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할지, 무엇을 존경해야 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할지 통 모를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조차, 자신만의 진짜 육체와 피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한다. 이것이 너무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나머지, 지금까지는 존재한 적도 없는 무슨 보편 인간이 되려고 안달복달한다. 우리는 사산아, 더욱이 이미 오래전부터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아버지에게서 태어나는 존재이며, 또 이것이 우리는 점점 더 마음에 든다. 취향에 맞는 모양이다. 조만간 우리는 어떻게든 관념으로부터 태어날 궁리를 할 것이다. 하지만 됐다. 

 

 


 

 

- 셋째, 간질병을 간과할 수 없다. 첫 발작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여하튼 작가가 된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 동안 주기적으로 간질 발작에 시달렸다. <백치>의 미시킨 공작, <악령>의 키릴로프에 이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스메르쟈코프를 통해 형상화되는 간질 발작이 몹시 생생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간질병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선사한 것은 말하자면, 순간의 미학 혹은 '문턱의 시간'이다. 간질 발작이 시작되고 의식이 완전히 명멸하기 직전의 순간을 작가는 세계의 모든 비밀을 꿰뚫을 수 있는 순간이라고 했다. 이 절대적인 황홀경의 체험은 동시에 죽음의 체험이기도 하다. 한 인간으로서도 무척이나 귀중했을 삼십 대를 감옥에서 썩게 만든 공상적 사회주의, 더 근원적으로 유토피아를 향한 꿈이야말로 간질 발작의 절정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또한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난뱅이들, 술주정뱅이들의 광기에 가까운 몽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진리의 깨달음이든 일확천금의 획득이든 천년왕국의 도래든 그것은 찰나적인 한순간에 신기루처럼 반짝하다가 곧 사라진다. 

 

- 끝으로, 도박에 대한 열정을 지적해야겠다. <노름꾼>에 직접적으로 표현된바, 도박은 돈 자체보다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시험 및 도전의 동의어이다. 승부가 나기 직전, 도박자는 사형대에 묶여 있는 순간이나 간질 발작 직전의 순간처럼 은유적인 죽음을 - 예의 그 황홀경 및 파국의 순간을 - 체험한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세계문학전집 239)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지하로부터의 수기』. 최초의 실존주의 소설로 여겨지는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세계에서 전환점이 된 소설로도 꼽힌다. 자기만의 세계 '지하'에 세상에 대한 싸늘한 경멸을 품은 채 살아온 한 남자의 독백과 경험담이 수기의 형태로 펼쳐진다. 젊은 시절 하급 관리로 사회생활을 했지만 친분 관계도 거의 없이 모든 이들을 혐오하는 남자는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복수할 궁리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지하에 틀어박혀 있다. 세상에 대한 경멸과 증오는 자신을 향한 저주로 바뀌는데….
저자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10.02.26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