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주원준] 구약성경과 신들

일루젼 2022. 11. 23.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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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주원준
출판 : 한남성서연구소 
출간 : 2018.04.02 


       

반드시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일을 멈췄더니 삶의 리듬도 멈추는 기분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시간. 그 느낌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벌써 몇 차례나 같은 다짐을 했던 것 같은데, 이제 더는 새로운 책에 손을 대지 않고 소장 중인 책들을 줄여나가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아직 22년은 한 달하고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으니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볼 생각이다. 

 

<구약성경과 신들>은 주원준 저자가 구약 성경에 언급된 '신화적 언어'와 '상징'들을 해당 시기의 고대 근동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책이다. 핵심적인 여섯가지 상징을 각가의 챕터로 구분해서 살펴보는데,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도록 신학적 언어나 논리는 최대한 배제하고 서술한 듯 하다. 이후 발표된 <구약성경과 작은 신들>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으나 이번 저서와 마찬가지로 수메르의 신이나 당시 다른 종교의 신들과 유사-차이점을 들어가며 풀어가지 않을까 싶다. 

 

이 책 한 권으로 <길가메쉬 서사시>를 압축할 수 있다거나, 구약성경의 핵심 상징들을 이해할 수 있지는 않다. 히브리 어와 라틴 어, 그리스 어 등을 비교해서 살펴보기는 하지만 어학적인 근거는 조금 약하지 않나 생각한다. 이 책의 의의는 하나의 관심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해 나가는 방식, 즉 배타적으로 밀어내지 않고 포용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에 있다. 

 

대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번 책은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영향을 살피며 큰 흐름 안에서 대상을 조망하는 방식에 가까운데, 해당 종교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과는 다른 방향성이라 인상 깊었다. 해당 주제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접근법을 시도해보는 것은 어떤 영역에서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끝. 


   

 

-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신화적 세계에 살았다. 풀과 나무와 짐승에 영험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고 하늘과 산을 섬기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다. 합리주의와 과학의 언어에 익숙한 현대인은 이런 종교심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구약성경은 고대 근동 신화의 언어를 듬뿍 담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여섯 가지 표상, 곧 '하늘·달·바람·강·피·가시나무'는 구약성경에 흔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 표상들의 원래 의미는 고대 근동의 신화적 맥락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 이를테면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피의 신이었던 '다무' damu를 보자. 다무는 악령을 물리쳐 쫓아내고 apotropaic, 사람을 치유했다. 고대 근동인들은 질병이 악령을 통해 들어온다고 생각했으므로, 이 두 역할은 사실상 하나다. '생명력'을 상징하는 이 신은 고대 근동인들에게 널리 사랑받았다. 물론 야훼 하느님만을 따르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다무를 섬긴 적이 없다. 하지만 피에 대한 고대 근동의 종교심만은 고스란히 공유했다. 이스라엘인들한테도 피는 신령한 생명력을 상징했다. 그래서 피를 먹으면 안 되고,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피로 죽음의 영을 쫓아냈다. 

 

- '신화'는 과학과 합리를 거스르는 낡은 이야기가 아니다. 무지몽매한 자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오히려 신화는 '의미'와 '상징'을 표현하고 전달하기에 가장 적절한 이야기 방식이다. 성경은 객관적 '사실' fact 그 자체를 전달하기보다, 영원한 '진리' truth를 선포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는 신앙서다. 그래서 신화의 언어는 심원한 의미를 전달하는 성경과 잘 어울린다. 실제로 성경에는 신화의 언어가 풍부히 사용된다. 

 

- 구약성경도 '배경'이 있다. 구약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배경을 알아야 한다. 어떤 대상을 안다는 것은 그 대상의 앞이나 뒤를 가능한 정확하고 자세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 고대 근동은 크게 네 지역으로 나뉜다. 수메르, 아카드, 바빌론, 아시리아 제국이 명멸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동부지역으로서 아카드 어로 대표되는 동부 셈어를 사용한다. 이집트는 언제나 크고 강력한 나라였다. 북쪽의 아나톨리아 반도의 히타이트 제국은 기원전 13세기까지 이 지역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이 세 지역은 크고 강한 제국을 이룬 경험이 있고, 저마다 독특한 종교 문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약소국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레반트(또는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은 대개 북서 셈어를 사용하였는데 주로 교역로 역할을 맡았다. 주변 제국들 사이에서 힘든 세월을 지낼 수밖에 없었던 레반트 지역에 위치한 작은 나라 가운데 이스라엘이 있었다. 이스라엘은 지정학적 요충지에 위치한 약소국이었다. 

 

- 이를테면,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하늘신'은 최고신이었지만, 유배 이전에 이스라엘인들은 하늘을 대개 '공간'의 의미로만 사용했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이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자, 그들의 최고신을 부르는 호칭 '하늘의 하느님'이 고대 근동 전역에 확산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인들은 이 호칭을 야훼 하느님께 드렸다. 유배 이후 문서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이 호칭에 담긴 신학적 의미는 일종의 '신학적 반론'이자 '맞대응'이다. 곧 페르시아인들은 그들의 신을 '하늘의 하느님'이라고 부르지만, 하늘의 참된 하느님은 야훼뿐이시라는 고백이 이 호칭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호칭은 고대 페르시아 종교의 껍질을 벗고, 야훼 신앙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 이렇게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고대 근동 종교의 표상을 탈신화화했다. 이를 '고대 이스라엘의 탈신화화'라고 부를 수 있다. 

 

- 다른 예를 들어 보자. 고대근동 신화에서 강의 신은 때때로 심판자의 역할을 맡았다. 구약성경에도 이런 예가 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는 '강'과 '심판'을 문맥상으로는 연결시켰지만, 심판자의 권능은 철저히 야훼 하느님께 돌렸다. 곧 주변 민족들, 특히 문화와 종교에서 훨씬 앞선 주변 선진국들의 신화에서 '강'이란 표상을 탈신화하여 야훼 신앙으로 소화한 것이다. 이렇게 야훼 신앙으로 재해석하여 소화하는 과정을 '재신화화(再神話化, Remythologisierung)라고 부를 수 있다. 

 

- 달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널리 섬기던 신이다. 그리고 왕권 신학의 상징이었다. 특히 신 아시리아 제국이 달신 숭배를 주변 나라에 퍼뜨리는 데 열심이었다. 그래서 달신 숭배의 영향이 구약성경에서도 발견된다. 이 달신에대해서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의 대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신명기계 신학자들 Deuteronomist은 달신 숭배를 직접적으로 경고했다. 달신에 마음을 뺏기면 안 된다고 소리 높여 지적했다. 반면 사제계 신학자 Priest들은 새로운 신학적 성찰로 달신 숭배를 넘어서려 했다. 그들은 달이 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태초에 만드신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달신 뿐 아니라 해와 땅 등, 주변 민족이 신이라고 떠받들던 것들 모두 야훼 하느님의 피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신학적 성찰을 집대성한 본문이 창세기의 첫째 장이다. 
 

- 400여 년 전 서거한 마테오 리치는 라틴어 '데우스'(Deus, 주님의 번역어로 '천주', 하늘의 주님)를 선택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이름을 '천주교'로 옮기고, 그 핵심 교리를 담은 책의 제목을 천주실의 하였다. 이 번역어로 말미암아 로마 가톨릭은 조선조 말엽 이 땅의 지식인들의 심성에 대단히 효과적으로 호소할 수 있었다. 일부 개신교 선교사도 선교 초창기에는 하느님을 '천주님'으로 불렀다. 사실 '하늘'은 거의 모든 종교에서 중요한 표상이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는 수메르 시대부터 줄곧 '하늘신'은 모든 신들의 아버지이자 최고신이었다. 그리고 하늘신이 좌정한 지고의 자리를 두고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유력한 신들은 격렬하게 경쟁했다.  

 

- 이 장에서는 우선 수메르 시대부터 '하늘'의 역할을 살펴본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하늘' 개념 변천 과정과 비교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고대 이스라엘의 하늘 개념은 유배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다르다. 유배 이전에는 고대 근동의 하늘 개념을 '탈신화화'하는 데 주력한 반면, 유배 이후에는 야훼 신앙으로 '재신화화'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 수메르 만신전에서 하늘신의 이름은 '안' AN이다. 안은 만신전의 최고신이었다. 이미 기원전 30세기경 파라 Fara 문서에 처음 등장하는 안은, 기원전 22세기 라가쉬 Lagas의 건축왕 구데아 Gudea 임금 시절에 최고신으로 언급된다. 2100년경 우투-헤갈 Utu-Hegal과 그의 형제 우르-남마 Ur-Namma에서 시작된 우르 Ur 제3왕조의 찬미가와 기도문 등에 안에 대한 제의가 풍부히 기록되어 있다. 

 

- 그런데 이 문자를 '딩기르' dingir라고 읽으면 '신'을 의미한다. 이 문자는 단수로 쓰이는데, 두 번 겹쳐 쓰면 '신들'이라는 뜻이다. 특정한 이름 앞에서 '신의 이름'을 알려 주는 쓰는 표지(한정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수메르어 문자는 한 글자를 두세 가지 방법으로 읽을 수 있다. 이 문자는 하늘을 뜻하는 최초의 문자이자 신을 뜻하는 최초의 문자다. 인류 최초의 문명은 신은 '하늘'이라고 고백했다.  

 

- 수메르 만신전에는 등급이 있었다. 수많은 신들 가운데 높은 등급의 신들을 '50 신들', 곧 '아눈나키' anunnaki라 하고, 그 가운데서도 높은 신 일곱을 '운명을 결정하는 일곱 신' dingir-nam-tar-ra 7-bi이라 했다. 일곱 신 가운데에서도 네 신들, 곧 안, 엔릴, 엔키, 인안나가 수메르의 가장 높은 신들인데, 그 첫째인 안은 '모든 신의 아버지'였다. 그 밖에도 안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수메르의 중요한 신들은 특정 도시의 주신이다. 안도 원래는 '우루크' uruk의 주신主神이었지만, 아내이자 금성의 여신인 '안나' Inanna에게 우루크를 맡기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만신전의 우두머리요, 아눈나키의 수장이자, 모든 신들의 아버지요, 운명을 결정하는 일곱 신 가운데 하나인 안은 '하늘'을 맡았다.

 

- 고대 근동의 동부와 서부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지만, 언어도 퍽 다르고 역사적 경험과 문화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하늘신이 최고신의 권위를 오랫동안 누린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이른바 동부 셈어를 사용하는 지역이다. 하늘신은 이 지역을 벗어나면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늘신의 특징을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 종교와 나머지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레반트 지역, 곧 북서 셈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훗날 풍우(風雨, 비바람의 신)가 최고신이 된 반면, 이집트에서는 전통적으로 태양신이 가장 중요한 신이었다. 

 

- 하늘신을 언급하는 북서 셈어 자료는 동부 셈어의 자료와 비교할 때 양과 질 모든 면에서 보잘것없다. 구약성경과 매우 밀접한 우가릿 신화에서 하늘은 중요한 신도 아니고 적극적 역할을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하늘은 그저 신들이 사는 '장소' 또는 '공간'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하늘이 신성을 지녀 '하늘신'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기는 하다. 그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  

- 첫째,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는 문헌에서 제물을 받는 대상으로 하늘신이 네 번 등장한다. 그런데 네 번 모두 단독으로 등장하지 않고, 언제나 "땅과 하늘"로 나온다. 이것만 봐도 하늘신은 최고신과는 거리가 있다. 

- 둘째, 신들의 탄생 계보를 전하는 문헌에 등장하는데, 비교적 상위의 신으로 나오지만 별다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여신인 태양신 샵슈 Sapsu가 '하늘과 심연'의 어머니로 나오므로, 이 족보에 따르면 하늘 신은 태양신의 아들이고 심연과는 남매간이다. (모든) '신들의 아버지'인 아누와 비교하면 차이가 많이 난다. 

- 셋째, 맹세의 대상이다. 고대 도시 우가릿에서 발견된 맹세문들은 고대사회에서 맹세가 종교적 행위였음을 말해 주는데, 이 가운데 '하늘신'에게 맹세하는 것이 있다. 이 점은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 우리 정서와 퍽 닮았다. 

-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경우는 공간이라는 의미다. 특히 우가릿의 바알루는 '하늘의 바알루' Balu Samima라는 호칭을 지녔다. 이 말은 '하늘의 주님'으로 옮길 수도 있다. 이 호칭에서 '하늘'은 독자적 신성을 지녔다기보다는 바알루가 다스리던 영역이나 그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

 

- 이상의 특징은 히타이트의 하늘신 '네피쉬' nepis의 특성과 거의 같다. 그래서 우가릿 종교가 히타이트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네피쉬도 태양신이나 풍우신의 호칭에 '하늘의 신'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하늘신의 어머니가 태양신이라는 표현은 후르 Hurr인의 신화가 히타이트와 우가릿에 영향을 준 것이라 보기도 한다. 

- 히타이트와 매우 가까운 지역에서 후대에 발생한 그리스 신화도 비슷하다. 하늘신 '우라노스'는 대지의 신 '가이아'의 아들인데 훗날 어머니 가이아와 결혼하여 다양한 신들을 낳는다. 하지만 이 신들의 탄생 신화에서 등장하는 우라노스는 최고신이 아니다. 그 밖의 신화에서는 역할이 더 작다. 우가릿 신화처럼 이따금 맹세의 대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늘은 신들이 사는 장소, 신들이 회의하는 곳으로 나올 때가 가장 많다. 아래에서 다룰 구약성경의 하늘은 서부 셈족과 히타이트의 하늘신을 닮았다.

 

- 하늘을 뜻하는 히브리어 '샤마임 שָׁמַים'은 조금 특별한 단어다. 형태상으로 어미 때문에 쌍수형雙數形으로 보이지만, 특이한 어근 때문에 그 형태가 그렇게 보일 뿐, 언제나 복수형으로 쓰이는 낱말이다. 아카드 어, 아람어, 우가릿어 등 다른 셈어도 똑같은 어근의 낱말을 언제나 복수형으로 사용한다. 고대 근동인들은 하늘이 여러 겹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공통의 세계관이 이 낱말의 공통적 형태에서도 드러난다.

 

- 고전 그리스어 문헌에서 '하늘'을 의미하는 '우라노스' Οὐρανός는 형태론적으로 일반적인 남성 명사다. 하지만 신약성경 그리스어에서는 조금 다르다. 대략 삼분의 일 정도는 복수형으로 사용된다. 이렇게나 자주 복수형으로 사용되는 이유는 분명 히브리어의 영향 때문이다. 헬레니즘 시대가 도래하여 그리스어가 국제공용어 lingua franca가 되자, 일부 이스라엘인들은 점차 일상어로 그리스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신약성경도 그리스어로 쓰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히브리어의 흔적까지 씻어낼 수는 없었다. 신약성경과 거의 같은 시대에 쓰여진 필론과 요세푸스의 작품에서 이런 복수형이 쓰이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헬레니즘 교육을 제대로 받은 그리스식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대부분의 책에서 이 단어는 단수형과 복수형이 뒤섞여 쓰이는데, 이런 현상을 신약성경 그리스어의 히브리어적 특징 hebraism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말 번역에서는 '우라노스'의 복수형을 일일이 '하늘들'로 옮기지 않는다. 이들 사이에 의미상의 차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 음양설에서 해와 달은 양과 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해는 달보다 세고 크며 우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수메르는 정반대다. 달신 나는 태양신 우투의 아버지다. 분명히 달신이 태양신보다 우월한 존재다. 달은 왕권의 상징이었다. 맑은 밤하늘을 쳐다보라. 가장 밝은 달이 마치 임금이 되어 수많은 별을 거느리는 것 같지 않은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밤하늘의 달을 이렇게 생각했다. 달은 '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인간의 운명에 관한 신탁을 내리며, 정의를 판결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달신의 신학은 자연스레 왕권 신학과 연결된다. 

 

- 달신 숭배에서 초하루는 무척 중요했다. 달이 서서히 기울다가 그믐이 되어 밤하늘에서 사라지면, 달이 저승에 갇혔다고 생각했다. 달의 죽음이다. 하지만 초하루가 되면 달은 부활한다. 밤하늘에 손톱만큼 달이 보이기 시작하는 매달 초하루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종교적 절기다. 뒤에서 보겠지만, 구약성경에서도 초하루는 매우 중요하다. 

 

- 또한 달신은 태양신과 별신과 함께 '천체의 삼신론' astral triad을 이룬다. 물론 달신이 중심이다. 뒤에 나올 나보니두스 임금의 비문에서 보듯, 달, 해, 별과 임금을 함께 묘사한 것은 신 바빌론 제국 이전의 메소포타미아에서 비교적 흔하다. 

 

- 달신의 다양한 역할 가운데 '정의의 수호자'는 일찍이 태양신으로 넘어갔다. 고바빌론 제국의 함무라비 임금은 법전을 태양신에게서 받았다. 그런데 태양신의 위치는 달신에 비해 불안한 듯이 보인다. 수메르의 태양신 우투는 남신이지만, 셈족의 태양신 '샤마쉬'Samas는 본래 여신이다. 우가릿 신화에서도 태양신 '샵슈' Sapsu는 여신이다. 그런데 달신 난나와 신이 합쳐졌듯, 우투와 샤마쉬도 융합되어 훗날 하나의 신으로 이해된다.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샤마쉬는 남신이 되어 버렸다. '태양신'의 성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태양신의 성전환은 구약성경에 그 흔적을 남겼다. 성경 히브리어에서 태양을 뜻하는 '셰메쉬'는 남성 명사도 되고 이따금 여성명사도 된다. 그 역사적 이유를 이런 배경에서 찾기도 한다. 달신의 위치가 천 년 넘게 굳건한 반면 태양신에 대한 이해는 급변했다. 두 신의 지위가 확연히 다르다. 

 

- 모세오경에 십계명은 두 번 나온다(탈출 20장: 신명 5장). 그런데 장소가 다르다. 탈출기에서는 시나이산(19장)이지만, 신명기는 호렙 산(4장)이다. 탈출기의 '이집트 탈출 전승'은 대체로 신명기보다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곧 신명기계 신학자들은 탈출기의 '시나이 산 전승'을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반 일월성신 신학'을 강하게 주장하던 신명기계 신학자들에게 '시나이'라는 이름은 불편했을 것 같다. 이 이름 자체가 메소포타미아의 대표적 달신인 '신' Sin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앞서 보았듯 '시나이' 산의 이름은 '나의 신' Sin-ai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신명기 저자는 이 이름을 호렙으로 바꿈으로써 달신 숭배를 연상할 수 있는 이름을 피하려고 한 것 같다. 그래서 '시나이'를 '호렙'으로 대체한 전승이 구약성경에 자리 잡게 되었다. 

 

- 하느님이 나흘 만에 만드신 하늘, 땅, 해, 달은 수메르 시대부터 대제국의 주신들이었다. 수메르 만신전의 가장 중요한 일곱 신은 하늘, 바람, 산, 물, 달, 태양, 금성) 마치 원로원처럼 세상의 운명을 결정했다. 이미 기원전 30-28세기에 일곱이라는 숫자는 수메르에서 경제 · 정치·종교적으로 중요한 개념으로 발전했다. 비록 이 일곱 신들의 이름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지만, 그들의 권위는 바빌론과 아시리아 시대에도 변하지 않았다. 

 

- 수메르 사람들은 이 일곱 신의 이름에 따라 날의 이름을 지었다. '태양신의 날', '달신의 날' 하는 식으로 부른 것이다. 그래서 일곱 날이 한 주기가 되어 큰 신들의 이름이 반복되는 시스템을 만들어 날수를 헤아리고 살았다. 일곱 날을 한 주로 삼으면, 네 주마다 28일, 곧 태음력의 한 달이 꼭 맞게 돌아간다. 이런 면에서도 '7'과 '4'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상징수다. 일곱 날마다 순서대로 일곱 신들의 날이 순환되는 체계, 곧 '일주일'은 이렇게 수메르인들의 손에 의해 태어났다. '7일 시스템'의 전통은 로마 시대로 이어졌다. 로마인은 로마식으로 이 체계를 토착화했다. 대응하는 로마 신들의 이름으로 일곱 날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래서 '화금수목월일토(Mars, Venus, Mercury, Jupiter, Moon, Sun, Saturn)'의 '로마식 일주일 체계'를 사용했다. 

 

- 창세 1장에 따라 현대 이스라엘인들은 지금도 일주일의 이름을 이렇게 부른다. 'Sun' day, 'Mon' day가 아니라 '첫째 날', '둘째 날',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무슬림도 이런 체계를 사용한다. 유다인과 무슬림 모두 일곱째 날은 '안식일'로 부른다.   

- 여기서 각 요일의 이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다. 현대 세계에서 요일의 이름을 쓰는 방식은 크게 둘로 나뉜다. 천체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식과 숫자에 기반해서 부르는 식이다. 로마의 후손들인 서유럽 국가들은 대체로 천체의 이름에 기원을 둔 이름을 쓴다. 하지만 성경 전승에 충실하려는 유다교와 이슬람교에서는 성경을 따라 '첫째 날', '둘째 날' 하는 식의 숫자로 부른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의 전례 라틴어에서는 일요일을 주일'(Dominica = "주님의 날")로, 평일은 저마다 '둘째 날'(feria secunda), '셋째 날'(feriatertia) 하는 식으로 불렀다. 이는 분명히 창세기를 따라 부른 것이다. 포르투갈어와 그리스어 등에서는 아직도 이렇게 부른다. 동아시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천체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중국과 베트남은 숫자에 기반을 둔 '성경적' 방식을 쓴다. 

 

-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야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루아흐를 탈신화했다. 한편 그리스어로는 루아흐를 숨, 영, 바람 등으로 다양하게 옮길 수 있다. 그리스어의 이런 언어적 특성을 사용하여 칠십인역은 루아흐를 다양하게 옮겨 탈신화화를 심화했고, 신약성경은 바람과 성령을 구분해서 이런 탈신화를 더욱 가속화했다. 이런 전승 전체를 기반으로 후대에 성령론이 발전할 길이 열렸다. 

 

- 엔키는 선하고 좋은 신이다. 그림을 보면 엔키의 어깨너머로 물고기가 노니는 강물이 흐르고 그의 모자에는 식물(생명의 나무)이 자란다. 수염이 긴, 자애로운 할아버지 인상이다. 엔키는 이 지역에 정기적으로 홍수를 일으켜 비옥하게 만드는 풍요의 지하수신이요, 언제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 문제를 해결해 주며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신이었다. 대표적인 선신이기에 대중에게 무척 사랑받았다. 이렇게 영향력 있는 엔키가 강물의 신성을 굳건히 대표했기 때문에 이 두 강의 신성은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 같다. 

 

- 이 의미에서 보듯 구약성경에서 '강의 신'은 사라졌지만, '심판'의 의미는 그대로 남았다. 히브리 성경을 적은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이 낱말에서 강의 신을 연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지만, '신적 심판'이라는 뜻은 그대로 사용했다. 이런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표현이 바로 '에드의 날' 글자 그대로이다. 옮기자면 '강의 심판의 날'인데, 문맥에 따라 '환난의 날' 또는 '재난의 날' 등으로 옮긴다.  

- 참나무와 향엽 나무는 구약성경에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거룩한 나무다. 이 두 나무에 얽힌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심도 비슷한 점이 많다. 참나무를 뜻하는 히브리어 '엘론'과 향엽 나무를 의미하는 '엘라'는 '높다', '세다', '첫째 가다'를 뜻하는 고대 셈어 어근에서 파생한 단어다. 그래서 이 나무들의 이름을 직역하자면 '드높은 나무' 또는 '우두머리 나무' 정도 될 것이다. 이름에서 이미 거룩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 그런데 이 두 나무에 대한 구약성경의 태도는 양면적이다. 이 나무 주변은 거룩한 장소로서 매우 긍정적 이미지다. 하지만 이 나무로 만든 우상을 거론할 때는 무척 부정적이다. 우선 긍정적인 면부터 보자. 참나무는 야훼 하느님의 성소와 관련되어 자주 등장하는 거룩한 나무다. 창세 12장에서 스켐의 성소는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이었다. 

 

- 한편 중세를 거치며 가시관의 '가시'는 그리스도 수난의 극치점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해석되었다. 그래서 중세 교회 미술에서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가시덤불'로 현현하신 하느님이요, '가시관'을 쓰신 그리스도이니, 거룩한 말씀을 '가시' 안에 모시는 것이 온당하다. 그리하여 13세기까지 성경의 테두리 장식이나 성화의 테두리 등에 가시 장식이 즐겨 사용되었다. 이 나무는 이렇게 후대 교회의 역사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심이 머무는 자리가 되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구세사의 가시나무'라 할 수 있다.  

 

- 이 책을 마무리하며, 필자는 '의미와 상징의 일치'를 중점에 둔 성경 번역에 대한 생각을 독자와 나누고 싶다. 성경 언어학자로서 화두를 제시하는 심정으로, 앞으로 성경 번역에서 상징과 의미의 일치'를 더 깊이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의미와 상징'이 성경 언어의 본질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본 대로, '가시'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길가메쉬 이야기>에서부터 중요하게 쓰인 진리의 상징이다. 고대 근동 종교라는 거름을 듬뿍 받고 자라난 이스라엘의 종교심도 이 '가시'와 관련이 깊다. 하느님의 현현에 사용된 이 '가시' 상징은 '그리스도의 가시관'에서 절정에 달하고, 이후 교회 역사에서 늘 핵심적 상징으로 명맥을 이어 왔다.  

 

- 그런데 우리말로는 이 가시나무들을 저마다 떨기나무', '가시나무', '대추야자' 등으로 옮긴다. 이런 번역은 '사실적 일치'에 잘 부합한다. 키가 큰 가시나무는 우리말로 대추야자에 가깝고, 작은 가시나무는 관목, 곧 떨기나무에 가깝다. '식물학적 동정(생물의 속과 종 등을 결정함)' 또는 '수종樹의 일치'에 중점을 두면, 이렇게 번역해야 옳다. 이런 번역은 사실 자체나 과학적 지식에는 부합하지만 결과적으로 히브리 성경과 우리말 성경의 상징체계를 다르게 만든 것 같다.  

 

- 성경은 진리와 의미를 전달하는 책이다. 성경의 언어는 사실 fact 그 자체보다는 진리 truth와 신앙 faith에 중점을 둔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나무의 정확한 번역은, 그 '수종樹種'의 일치보다는 그 나무에 얽혀 있는 의미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성경이 전달하는 진리는 그 상징 세계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과 신들(개정판)
고대 근동 신화와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구약성경과 신들』. 고대 근동 종교에 뿌리를 둔 신화적 표상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최고신, 고대 근동의 달신 숭배, 구약성경의 바람, 강을 향한 종교심, 구약성경의 피에 대한 심성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학이나 종교학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구약성경의 배경에 대해 관심 있는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도록 평이하게 서술하였다.
저자
주원준
출판
한님성서연구소
출판일
201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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