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데이비드 호킨스]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 - 모든 진지한 영적 구도자를 위한 깨달음의 길

일루젼 2022. 12. 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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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데이비드 호킨스 / 백영미

원제 : Discovery of the Presence of God 
출판 : 판미동 
출간 : 2008.10.09 


       

'데이미드 호킨스'라는 이름을 여러 곳에서 접해왔다. 이 책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아직 저자의 다른 저서를 읽어보지 못해 단편적인 인상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주셨으면 한다. 

 

먼저, 영성 개념과 체계들을 '의식 수준'이라는 하나의 지표로 수치화시켜 접근하는 방식이 무척 신선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와 <천사들의 제국>에 등장하는 5, 6, 7은 데이비드 호킨스의 500, 600, 700에서 따온 것일까 싶었다. 다만 이 수치의 측정법은 본문에 소개된, 일종의 오링 테스트와 유사한 방식인 것으로 보이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역시 하나의 주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초반부의 다소 현학적인 단어들 때문에 읽기를 포기하셨었다면, 일단은 질답 위주로 훑어 읽어보시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영성 도서들을 읽은 뒤에 다시 시도하신다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것이다. 

 

사람마다 얻어가실 수 있는 부분들은 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에고와 참나의 차이점과 그것을 구분하는 방법. 두 번째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최초이자 최후의 죽음의 순간에 대한 내용과 어떤 경우에도 잘못될 수는 없다는 위안. 세 번째는 답을 알 수 없는 영역을 나름의 기준으로 가늠하는 방식과 생각을 바라보는 법 같은 기법. 

 

언뜻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상충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째서 '잘못 될 수 없는'데 '적절한 방법'이 존재할 수 있으며 필요한 것일까? 그것은 각각을 사용자와 사용법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순이다. 조악한 예시이지만, 각각을 제품과 사용법으로 바꾸어 생각해보자. 제품은 다양한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그리고 사용법과 다르게 사용될 수도 있지만- 그것에 사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조금 더 추상화시켜서,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그것은 '그것'이고, 그 자체로 어떻게 되어도 '그것'이다. 

 

그러므로 '적절한 방법'의 진짜 목적은 지금 당신이 상대적으로 위치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표지판에 가깝다.

   

이 책에 완전하게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와닿는 바가 있었고, 한 영역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게 되면 점차 자신만의 것이 생기게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나'의 생각을 통한 것인지 '합치'에 의한 것인지를 알아나가는 과정이 깨달음으로의 길이라고 본다. 그 끝에 그마저도 놓을 수 있음이 진정한 죽음이리라. '아무 것도 없음'으로 '아무 것도 않음'이 아니라.  

 

개인적인 단상을 정리하는 것에 가까운 글이라, 이것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부디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제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되는 것은 대단한 영예입니다. 한국 사람들의 문화는 영적 가치에 대한 존중을 반영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함을 나타냅니다. 두 손을 맞잡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무드라 (몸짓)는 생명의 신성과 그것의 인간적 표현에 대한 앎을 나타내지요. 내가 만난 모든 한국인은 그들이 의식하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이미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봉헌에 의해 우리의 삶은 기도가 되고, 우리는 그로써 자신과 타인의 삶을 축성합니다. 나는 이 책이 한국인들에게 축복이 되는, 그러한 의도에 기여하기를 기도합니다.  

 


 

- 마침내 고통이 그치고 광채와 장려함 - 무한한 멎어 있음 stillness, 침묵, 심원한 무한한 사랑 Infinite Love의 평화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마음은 멍해진 채 경외감에 압도되었다. 그다음에 마음은 침묵하게 되었고, 그리고 사라졌다. 이후부터는 오직 현존 presence 만이 압도했고 전부가 개인적 의지나 동기부여 없이 자동적으로 출현했다. 그 상태가 사적인 자기를 영구히 대체했다. 침묵하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현존 presence에 의해 전부임 Allness의 전체성이 이전의 모든 의식 상태, 혹은 사적인 자기나 '나'에 대한 추정을 대체한다. 

 

- 흥미롭게도 육체는 동기부여 없이도 저절로 움직였고 자율적인 활동을 계속 수행했는데, 그것은 생각의 '생각하는 사람'도, 계획의 '계획하는 사람'도, 행동의 '행동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었다. 잠재성이 현실로 그 자체를 표현함에 따라 전부가 그 자체의 본질에서 일어났다. 이 조건을 가장 잘 묘사해 주는 것은 나타나지 않은 것 Unmanifest이 나타난 것 Manifest 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부터 삶은 저절로 펼쳐졌다. 그 상태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30년 이상 그에 대해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상태는 결국 명상과 고독과 거기에 적응하는 세월을 위해 보통의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 시골 오지로 옮겨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한 조건 안에서 이해는 저절로 일어났으며 그것은 생각을 동반하지 않았다.  

 

- 이렇듯 운동역학적 반응은 의식 수준(자신을 외적 '원인'의 피해자로 보는 일을 중단하고 자신의 힘을 유용하는 것)과 관계있었다. 연구와 관찰을 통해 모든 생명이 그 모든 표현 속에서 약에서 강에 이르는 내재적 에너지 수준을 반영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 스펙트럼은 측정 가능한 수치적 단계의 개발로 이어졌지만, 그 모든 생명의 수치적 지시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숫자가 요구됨으로 인해 이것은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 문제는 1에서 1,000까지의 범위를 갖는 임의적 단계의 실용적 이용을 가능하게 한 로그(밑이 10인)를 활용함으로써 해결되었다.

 

- 측정 수준 '1'은 이 행성에서 최초로 식별 가능한 생명(의식) 에너지(박테리아)를 반영했으며, 지구와 동물계를 통틀어 지상의 궁극적 가능성으로서 1,000 수준까지 이어졌다. 수준 1,000은 모든 인간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 붓다. 크리슈나와 같은 소수의 위대한 화신들만이 도달한 의식 수준임이 판명되었다. 에너지-스펙트럼 단계는 동물이나 인간 생명의 모든 가능성들의 의식 수준 측정을 숫자로 반영했다.

 

- 측정 단계상에서 600은 500대 후반으로 측정되며, 수많은 영적 스승과 이름난 성인을 포함하는 무조건적인 성스러운 상태를 비이원성의 깨달은 상태와 구별 지은 수준이었다. 500 수준은 주지화에서 경험적 주관성으로의 패러다임 변화를 가리켰고, 사랑의 다양한 수준을 나타냈다. 또한 세계 인구의 4.0퍼센트만이 측정 수준 500에 도달하고, 불과 0.4퍼센트가 540 수준(무조건적 사랑)에 도달한다는 것도 주목할 만했다. 의식 수준 600은 지극히 드물었다. 400대의 수준은 지성, 이성, 논리, 과학, 그리고 뉴턴적 패러다임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교육받은 구도자들에게 400대는 디딤돌이지만 종종 큰 장벽이기도 한데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아이작 뉴턴 경이 모두 499로 측정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200대와 300대는 온전성, 선의, 도덕성, 그리고 의도의 전반적 선함을 가리킨다.

(리뷰자 주 : <천사들의 제국>은 이 설정에서 기반한 것인가?) 

- 그다음에 의식 수준 200이 결정적이라는 중대한 발견이 이루어졌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과 거짓을 가르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또한 200 이상의 수준은 힘 power을 나타내고, 200 이하는 낮은 힘 force을 나타낸다는 것에 주목하게 되었다. 200 이하 수준은 명백한 이기주의로 전락하는데, 자부심, 욕망, 탐욕, 분노, 증오, 죄책감, 수치심, 무감정의 동물적 본능으로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측정 수준들은 또한 영적 통찰 능력, 감정성, 세계와 자기에 대한 지각과도 상관있다. 측정된 단계 및 그 상호 관련들이 지금 널리 알려진 '의식 지도'의 구성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리뷰자 주 : 개인적으로 power와 force는 힘의 사용점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의 차이라고 본다. 내가 의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 거기에 휩쓸리느냐.)

 

- 의식 수준 200으로 진화한 뒤에야, 기능적으로 영적 앎, 의도, 카르마적 책임의 능력이 있는 에테르 뇌가 출현한다. 순진하게 개인의 의식은 자기를 육체, 마음, 감정과 동일시한다. 그다음에는 행운이나 카르마적 '공덕'의 결과로서 영적 진실을 듣고 영감을 얻게 되며, 그리고 더 큰 행운이 따르면 영적 스승을 만난다. 스승의 오라의 높은 진동 주파수는 영적 제자에게서 발생기의 에테르 상위 영체들을 활성화시킨다. 

- 높은 영적 존재들에게 있어 에테르 뇌의 활성화는 쿤달리니, 혹은 영적 에너지가 상승한 결과인데 이는 상위 영체들과 에테르 뇌의 형성으로 귀착될 뿐 아니라 실제로 인간 뇌의 생리를 변화시켜, 이제는 들어오는 자극을 다르게 전달한다. 사람은 좀 더 '우뇌'적으로 된다. 의식 수준 200 이하에서 들어오는 자극은 감정 중추로 빠르게 퍼져나가는 반면, 영적 지향이 있는 사람에게서, 빠른 경로는 자극에서 전전두 피질로 그다음에 감정 중추로 간다. 크게 진화한 영적인 사람들에게서 들어오는 정보는 에테르 전전두피질을 통해 처리된 다음 유도 induction에 의해 뇌의 물질적 신경회로로 간다. 의식 수준 200 이하에서는 전전두피질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 전달이 감정 중추로 가는 직접적 경로에 비해 보다 느리기 때문에 동물 반응성이 지배적이다. 

 

- 다만 사람의 오라 안에서, 깨달은 스승 Enlightened Teacher의 의식의 고주파 진동을 그 암호화된 인식 Knowingness과 더불어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마지막 걸음은 되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한 최종성으로 직관되고, 그래서 그 최종성의 절대성에 대한 경악이 있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곧장 앞으로 나아가라. 모든 두려움은 환상이다."라는 인식이 떠오른다. 영적 의지로써 이 마지막 걸음을 내디딜 때 죽음이 경험되는데, 그러나 격렬한 고통은 아주 잠깐 지속될 뿐이다. 에고의 죽음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실제의 죽음이며, 이에 반해 육체를 떠나는 이전의 죽음들은 상대적으로 사소했다.  

 

- 영적 몰두는 영적 의지(측정 수준 850)를 진실, 사랑, 연민, 지혜, 그리고 불편부당성인 신성 Divinity의 속성들과 정렬시킴으로써 에너지를 얻는다. 헌신은 사람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매기고 도움이 되는 것을 끌어당긴다. 신의 종이 된다는 것은 봉헌이며, 이로써 그 목표는 다른 모든 위치성, 매력, 혹은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들보다 우선하게 된다. 헌신과 몰두에 의해 길은 펼쳐지고, 드러남이 추정적인 인과적 획득을 대신한다. 봉헌은 의도에 의해서 대단히 강하게 ‘양’이지만, 과정으로서의 실현에 의해서는 '음陰'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행위는 재맥락화되고, 그 영적 본질이 외관을 통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헌신은 또한 사심 없는 봉사로 표현되며 이로써 감자 깎는 일은 더 이상 허드렛일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가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의도에 의해 축성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행위는 예배의 행위로 봉헌된다. 헌신은 통찰력을 열고, 이는 지각을 대체한다. 오직 헌신에 동반되는 내맡김에 의해서만, 의도된 행위는 그 자체가 창조 creation의 진화 자체의 자연발생적 펼쳐짐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신에 대한 헌신이 자기 이익에 대한 에고의 헌신을 대체하며, 사람은 전체적 장의 효과 혹은 귀결을 목격한다. 
 

- 깨달은 조건이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혹은 마음/지성으로 '획득'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구도자들은 실망한다. 그래서 그러한 상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따라서 목표로서 실용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현실에서 앞선 상태들은 강력하게 경험적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상태가 입증하고 반영하는 실상 Reality은 '사람이 이미 존재한다'는 명명백백한 현실에 따른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영적 제자는 이미 원초적인 필수적 성질을 만족시키고 있으며, 오직 동기부여와 몰두를 더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유일한 요구 조건은 먼저 존재하는 것이고, 그다음에 깨달음에 대해 들었을 것이며, 그다음에는 실현 가능한 목표로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을 어려워 보이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정보와 설명의 결핍인데, 왜냐하면 경험적으로 길은 본래 단순하기 때문이다. 비록 가끔씩 표면상으로 힘겨울 때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 삶의 목표로서의 깨달음 Enlightenment에 실제로 이끌리고 있는 드문 사람들은 그것이 이미 자신의 운명이기 때문에 (이는 진실로 측정된다.) 이끌리고 있다는 확인 가능한 실상에서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오직 미래의 골퍼들만이 골프 교습을 받고 있을 것이다. 

 

- 그래서 영적 수행의 핵심은 마음을 살찌우는 일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짐을 풀고 내려놓는 일과 부합한다. 깨달음 Enlightenment의 추구는 중대한 결정이다. 결정 자체는 그러므로 '양'의 위치와 비슷하지만, 결과적으로 과정 그 자체는 보다 본질적으로 '음'의 자세와 비슷하다. 보통의 에고는 '얼음' 쪽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는 반면, 이제 영적 의도는 '허용'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물속에서 발버둥치거나 헤엄치기보다는 물 위에 떠 있는 일과 비슷하다. 

 

- 비이원성을 통해 깨달음 Enlightenment을 구하는 영적 수행은 의도와 몰두의 귀결이다. 실제의 수행은 '행'의 문제라기보다는 하나의 '존재' 방식이거나 삶의 주관적 앎과의 정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를 들면 고전적 무드라(성스러운 수인)가 나타내는 것과 같은 자세이다. 주의 Attention는 내용과 세부에 대한 습관적 집중이라기보다는 장/맥락과 정렬되는 것이다. 직관은 비논리적인 것으로 지각되기보다는 귀중하며 드러내 준다. 또한 영적 수행은 본질적으로 '행'이라기보다는 알아채고 알게 되는 것과 더욱 비슷하다. 

 

- 보통의 마음에 단순히 '착한' 것으로만 비칠 수 있는 태도들이 영적 의도 및 몰두와 정렬될 때 매우 강력한 도구가 된다. 예를 들면 '모든 생명에 대한 선의'라는 금언을 엄격히 따르며 사는 것은 영적 의지 Spiritual will에 의해 에너지를 부여받았을 때 변형을 일으킨다. '모든 생명'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혹은 존재하는 전부의 신성함을 존중하고자 하는 결정은 연민, 기꺼이 용서하려는 자발성, 분별하기보다는 이해하려는 미덕과 더불어 영적 진화에서 강력한 태도들이다. 지속적인 내맡김을 통해, 지각은 본질의 식별 속으로 녹아든다. 

 

- 신성 Divinity에의 간구와 기도를 용이하게 하는 것은 겸손함에의 심원하고 깊은 내맡김이다. 이 겸손함은 에고/마음이 그 구조와 설계로 말미암아 본유적으로 진실과 거짓(본질과 현상)을 구별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진실한 인정일 뿐이다. 감정은 위치성들과 조건화를 반영하는 동시에 결정하므로 진실의 지표가 아니다. 

 

- 의식 수준과 카르마적 성향이 과거의 의지적 행위들의 귀결이라는 사실을 각성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보통의 세속적 삶에서 보상은 이득, 성취나 획득의 증명에 바탕을 둔다. 내맡김과 겸손함은 수동성과 동일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역설적으로 내맡김과 겸손함은 영적 의지 Spiritual will의 긍정적 행위이며 이를 통해 얻기보다는 '허용'에 긍정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 특정 의식 수준은 자석처럼 비슷한 것들을 끌어당기는 '개장'에 정렬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비록 사적인 자기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내 생각'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일정한 의식 수준에서 우세한 '생각들'일 뿐이다. 그것은 바닷속에서 수심에 따라 다른 종류의 물고기들이 모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람의 측정된 의식 수준이 일차적으로 자부심의 장에 있다면 장 자체는 개인과는 무관하게 지지하는 비슷한 생각들을 끌어당기는데, 이 생각들은 전반적 태도가 중립이나 수용일 때 우세한 생각들과는 전혀 다르다. 

 

- 카오스는 확인 및 예측이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정신화인데, 이는 선형적, 수학적 관점에서의 확인이나 예측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 즉 확인 가능한 패턴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맥락은 비국소적이며 확인 불가능할 뿐 아니라 국소적이며 확인 가능하기도 합니다. 인식 가능성은 패러다임의 반영이며, 이것은 전반적 맥락의 장 자체에 대한 의식 측정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없는 진짜 이유는 정확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의 결핍입니다. 

 

- 대다수의 세계 종교에서 유력한 영적 수행의 두드러진 형태는 경전 구절의 암송이며, 이는 또한 설교나 공부 모임들을 통한 교육적 가르침의 기초를 이루는 일이 많다. 또한 모든 종교에 공통된 것은 순례, 피정(안거), 종교적 축일 및 축제와 같은 집단적 수행과 신성 Divinity의 상징들인데, 신성은 조각, 그림, 영적인 영감을 불어넣은 기념물, 탑, 피라미드로서 형상 속에 우의적으로 묘사된다.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 바닥에 있는 미로의 기하학적 배열과 같은 회전 무늬조차도 영적 앎을 제고시키기 위해 이용된다. 이에 반해 이슬람교, 유대교, 동방정교회의 일부 종파는 성상이나 신성 Divinity에 대한 묘사를 피한다.

 

- 상당히 흥미로운 것은 반복적인 육체적 운동의 형태를 취하는 다양한 영적 수행들인데, 예컨대 차크라 계를 통해 육체적·영적 에너지 시스템을 통제하기 위해 설계된 다양한 수행에서의 호흡법들도 포함하는 다양한 요가가 그것이다. 고전 요가는 모두 지극히 높게 측정되며 사심 없는 봉사의 카르마 요가(915로 측정), 박티요가(935로 측정), 라자요가(935로 측정), 쿤달리니 요가(510으로 측정), 크리야 요가(410으로 측정), 하타요가(390으로 측정)를 포함한다. 그리고 자나 요가는 아드바이타, 혹은 비이원성의 길(975로 측정)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명상과 관상을 강조하며 붓다와 역사상의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의 길이다. 

 

- 많은 종교에는 또한 진언이나 반복되는 구절 혹은 기도의 수행이 있는데, 여기서는 특정한 소리(저 유명한 '옴'과 같은)나, 신의 이름의 반복을 강조하는 일이 많다. 가락을 타는 반복적인 물리적 영창과 수행의 부정적 측면은 인위적으로 변성된 의식 상태를 유도하는 것인데, 이는 사토리와 같은 신비적 조건으로 오인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갑작스러운 통찰의 번득임이나 절정의 경험을 유발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경험의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의식 수준의 향상이나 영적 앎의 진보로 표시되는 그 주관적 영향이다. 

 

- 실제에서 대부분의 구도자들은 늦든 빠르든 간에 다양한 기법과 수행에 관해 조사하게 되는데, 특히 탐구의 초기에 그렇다. 대개 그 결과는 성격, 생활방식, 이전의 영적 경험, 자신의 의식 수준과 양립되는 몇몇 수행에 대한 동시적 충실함이다. 또한 길을 가다 보면 영적 의심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이는 일정 기간 동안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으로 표현될 수 있다. 진실에 대한 탐구는 여러 가지 표현을 발견할 수 있고, 또한 표면상으로 모순되는 다양한 단계를 거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온전성과의 내적 정렬이 있고 내면의 정직함이 우세하다면, 그 결과는 우세한 의도와 정렬된다. 결국 궁극적 안내자는 사실상 내면의 참나이며, 일반적으로 참나는 영을 일깨우고 활성화하기 위해서라면 기쁘게 육체를 절벽 너머로 밀쳐 버린다고 한다.  

- 방식 1과 방식 2는 교육적인 반면, 방식 3은 순수히 주관적/경험적이며, 정신적, 심리적, 감정적 혹은 개념적이지 않습니다. 이 방식은 가장 빠르고 기본적이며, 단순한 '행'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단계는 매우 간단합니다. 먼저 완전히 그리고 깊이 이완합니다. 그리고 두 눈을 감습니다. 시야를 지켜보며 그저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어둠 속에서 무수히 많은 자잘한 빛의 알갱이들이 춤추는 현상('빛 알갱이 현상'이라고 하는)에 주목하십시오. 그 빛들과 하나가 되고(생각 없음이 뒤따릅니다.), 시야와 융합하십시오. 적절한 때에, 맥락이 바뀌는 동시에 깊어지기 시작합니다. 목격자와 관찰자 사이의 표면적 분리는 사라집니다. 사람은 국소적 관찰자가 없는 현상이 됩니다. 결국에는 오직 앎 자체만이 우세해지며, 전부가 자연발생적이고 비이원적입니다. 마음은 우회되고 자율적인 한마음 Mind에 내맡겨집니다. 수행과 더불어, 침묵의 생각 없는 상태와 '하나로' 있는 능력을 눈을 뜬 채로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다음에 침묵 상태 안에서 살아갑니다.  

 

- 결국에는 그러한 내적 상태가 우세해지며 사심 없는 행위가 저절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작용합니다. 그것은 카르마의 태엽을 감아 놓은 인형입니다. 그것은 결국에는 침묵의 평화로운 상태를 중단시키지 않고도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반응할 수조차 있습니다. 세상은 페르소나를 '너'로 지각하지만, 페르소나는 선형적 기능성일 뿐입니다. 그것은 대양에 이는 잔물결이나 파도와 같습니다. 관상과 더불어 참나 감각은 내용에서 맥락으로 이동합니다. 사람은 그다음에 라마나 마하르시가 투리야, 혹은 '제4의 상태'로 부른 침묵의 삶 속에 머뭅니다. 

 

- 그것은 오직 앎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것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어서 배울 필요가 아니라 주의할 필요가 있을 뿐이지요. 유용한 결정이나 선택은 일체에 대해 정신적으로 말하는 것을 그만두겠다고, 그리고 논평, 주장, 선호, 가치에 대한 진술을 끼워 넣는 일을 삼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평가와 가치 부여 혹은 편집과 논평 없이, 그리고 목격되는 것에 대한 선호를 갖지 않고 그냥 지켜보는 훈련입니다. 사람은 그다음에 현상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과 외관의 일시적 본성을 보는데, 이것은 보통의 정신작용으로는 인과의 연쇄로 개념화됩니다. 바보인 '척'하는 것은 유익한 수행이며 근본적 겸손함을 불러냄으로써 본질 Essence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모든 생각은 허영이고, 착각이며, 자만일 뿐입니다. 생각을 덜할수록 삶은 즐거워집니다. 사고는 결국 인식으로 대치됩니다.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실제로 어떠한 생각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신적 대화와 쓸모없는 지껄임을 그만두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 생존에 대한 걱정은 신에게 맡겨 놓으십시오. 육체를 던져 버리는 게 참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되도록 놔두세요. 엄격한 영적 수행 속에서 사람이 세속의 육체를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실제로 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가 계속 걷고 호흡할 것인지 여부를 목격합니다. 마지막에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있는 것을 신에게 내맡겨야 하지요. 그것이 섭리 Providence에 봉사한다면 이 육체적 삶은 지속되고, 그렇지 않다면 그칩니다. 결말은 섭리 Providence에 달려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어떤 헌신자들은 실제로 떠나고, 어떤 이들은 은거하고, 또 어떤 이들은 진지한 영적 몰두에 알맞게 생활방식을 조정합니다. 그러한 삶은 처리해야 할 쟁점들을 불러내는데, 예컨대 타인과 소유물과 생활방식에 대한 집착을 비롯하여 의무, 권리, 책임 등과 같은 개념에 대한 집착이 그것입니다. 결국 진정한 헌신자에게 영적 실상의 추구는 다른 모든 고려사항보다 우선합니다. 깨닫기 위한 몰두는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라는 결정을 포함합니다. 그런 상황으로 인해 불안해하고 도전받은 것처럼 느끼는 실체는 질문하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중대한 큰 결심을 할 필요성은 그것을 처리하기에 충분한 힘이 생기기 전까지는 올라오지 않습니다. 인위적 방식으로 영적 진보를 강제하려고 하는 것이 현명치 못한 까닭이 바로 그것이지요. 영적 진보를 촉진하는 것과, 그것을 강제하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 수많은 거짓된, 그리고 심각한 한계를 가진 영적/종교적 신념체계, 스승, 단체들이 있다. 에고/마음의 지각은 제한되어 있고 환상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우며 인상받기 쉽다는 것을 기억해 두는 게 좋다. 마음 자체는 진실과 거짓을 식별하지도, 혹은 데카르트의 레스 인테르나(코기탄스)와 레스 엑스텐사/엑스테르나를 식별하지도 못한다. 영적 온전성의 첫 번째 요구는 가능한 모든 방법에 의거하여 길을 확인하는 것인데, 그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 초기의 주된 문제는 진정으로 영적인 실상과 아스트럴, 불가사의 혹은 초자연적 영역들 간의 차이에 대한 앎의 결핍이다. 순진한 이들에게 후자의 대안은 경이롭고도 인상적으로 보인다. 이는 인간 경험에는 엄밀하게 물질적, 감정적, 정신적인 것 외에 놀랄 만큼 많은 분야가 더 있다는 발견으로 인한 것이다. 그 결과, '딱 들어맞는' 영독은 예전의 순진한 구도자나 초보자에게는 정말로 인상적이다. 또한 가능한 실상들의 새로운 차원 전체의 겉보기에 놀랍기 그지없는 경이로움으로 인해 곁길로 새는 것도 쉽다. 이른바 영적이라고 하는 대중적 베스트셀러 대부분이 사실상 허구이며, 그 평균적 진실 수준은 190으로 측정되는데, '다른 차원' 등에 대한 그릇된 환상을 미화하는 번지르르한 '영적' 잡지들 또한 마찬가지다. 역설적인 것은 그러한 것이 다른 공상적 차원은 말할 것도 없고, 이차원조차 아직 마스터하지 못한 순진한 구도자에게 매력적이라는 점이다. 

 

- 참여의 효과를 결정하는 것은 동기입니다. 활동이란 그저 사람의 '행'일 뿐, '존재'가 아니지요. 모든 표면적 사건들이 학습 기회가 되어 줍니다. 사람은 참여할 수 있고 그와 동시에 목격자/관찰자의 수준에서 현상을 경험하며 정신 내부에서 올라오는 것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분리와 무집착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리는 회피나 물러남으로 귀착될 수 있지만, 반면에 무집착은 결과에 이해관계를 갖지 않은 참여를 허용해 줍니다. 

 

- 세상 '속'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지요. 세상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집착하지 않는 상호작용은 내면의 에고 위치성들의 귀결인 습관적 방식과 태도를 드러냅니다. 남들이 동일한 환경에 대해 어떤 식으로 관계 맺는지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교육적입니다. 사람은 다른 성격형을 가지고 실험해 볼 수 있는데, 유연성을 가질 때 내면의 미개발 자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고전적인 '마치 ~ 인 것처럼 as it' 실험입니다. 사람은 추정 및 그에 따른 저항에 기초하여 상황을 회피하는 일이 많습니다. 유익한 수행은 상상 속에서나 일상생활에서 일정한 활동과 사람들을 즐기는 척하는 것인데, 그러면 향유하고 기뻐하는 능력이 내면에서 비롯된다는(즉 삶의 기쁨 joie de vivre)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집니다. 다른 태도와 성격형을 가지고 실험하는 것은 놀라운 내적 발견으로 귀착되지요. 이러한 형태의 '역할 연기'는 심리극의 집단 기법에서 활용됩니다. 

 

- 내맡겨지는 것이 고유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에고가 그 위치에서 짜내는 단물이나 보상으로 인해 가치 있다고 상상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료히 이해할 때 저항은 가라앉습니다. 자발성의 원리는 욕망하는 대상이나 조건에 대해서가 아니라 에고의 보상에 대해 적용할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을 포기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이렇듯 에고 위치성에는 치러야 할 값이 있으며, 자발성을 말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지요. 각각의 위치성은 그것의 실현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추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저것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착각을 제외하면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 에고는 한 점, 경험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경험자는 쾌락을 구하고 이득을 통해 생존을 구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경험자는 행복을 사람이 획득하고, 소유하고, 통합시키는 어떤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경험자는 '얻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경험자의 기능은 쾌락을 얻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경험자는 우연히 영적 지향을 갖게 되지 않는다면 영혼에 대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경험자의 목표는 달라지고, 경험자는 쾌락의 근원이 완전히 내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지속적인 쾌락의 근원이 자기가 아닌 참나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그 결과는 세계로부터의 독립이지요. 에고의 욕구 충족은 선형적 영역 내에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비선형에서 일어납니다. 쾌락과 행복을 구해 경험자에게 의존하는 일을 포기할 때, 사람은 행복의 근원이 자기 자신의 존재라는 것과 참나의 각성이 행복 그 자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 복잡성은 에고/마음의 지각입니다. 하지만 잘 드는 칼 하나로 수백 개의 대상을 잘라낼 수 있습니다. 단순한 하나의 행위가 필요할 뿐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에고의 모든 장애에서 풀려날 필요가 있는 단순한 핵심 개념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에고에는 단 하나의 중독이 있는데, 그것은 주관적인 쾌락/이득에 대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욕망과 투사된 가치, 매력적인 것들의 은밀한 대가입니다. 

 

- 영리한 에고는 임의로 골라낸 모든 것에서 은밀한 만족과 쾌락의 단물/보상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항상 동일한 목표의 반복일 뿐입니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과는 사실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자리는 '저 밖'에 있다고 상상되지만 사실 그것은 '이 안'에 있는데, 왜냐하면 쾌락 이득은 주관적이고 내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유일무이한 목표를 포기하는 것은 모든 행복의 본유적 제일 근원인 참나의 실상 Reality을 드러내 주고, 그리고 참나의 각성 Realizations은 모든 바람과 욕망을 종료시킵니다. 행복의 자리는 항상 오직 내면에 있습니다. 쾌락은 일시적입니다. 기쁨과 행복은 내면에서 비롯됩니다. 

 

- 감정과 생각들이 파도처럼 일어났다가 잦아드는 것이 눈에 띌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예상은 두려움을 바탕으로 미래를 통제하려는 노력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두려움, 통제, 예상은 경험함의 파도 앞면에 초점을 맞추는 일과 연관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물결이 정점에서 내려간 뒤에 10분의 1초 동안이라도 생각과 감정에 매달리는 것은 과거에 초점을 맞추고 매달리는 것이다. 초점은 파도가 '경험함'이라는 1만 분의 1초의 틈새로 부서지는 동안에 파도의 물마루 그 자체 위에 있을 필요가 있다. 이 1만 분의 1초의 '공간'을 탐지하는 것은 지체를 모르는 의식/앎의 내적 성질에 따라 가능하다. 지각으로 이것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지각은 정신작용과 똑같은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 의식 수준 200에서 동물과 인간은 성질이 변화하며, 이 수준에서 생명체는 그것이 있다는 식으로 자기 존재를 알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과 동물의 왕국에서의 의식 수준 분포에서 나타나는 주목할 만한 차이입니다. 의식 수준 200 이하에서 생명은 그 자체를 위해 존중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고, 따라서 타자의 생명의 가치 역시 그 자체를 위해 존중되지 않습니다. 의식 수준 200을 넘어야만 '타자'의 삶의 행복과 가치에 대한 배려가 정말로 솟아납니다. 그래서 200 이하에서는, 생활방식이 인간과 동물 모두 자기중심적입니다. 

- '경험자'는 에너지를 소모하며, 그 결과 인간은 에너지의 재생 및 기능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수면을 필요로 한다. 명상과 관상에서 초월해야 하는 것은 이 경험자의 집중이다. 경험자는 신기한 일과 '흥미로운' 데이터를 갈망하고, 에고는 감정의 서커스를 지속적으로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것에 대해 열심히 반응한다. 경험자의 우회에 있어 삶이라는 변화무쌍한 멜로드라마에의 관여와 참여는 유혹적이다. 

- 에고의 민감하고 열성적인 '경험자' 측면은 무대 중앙에 서려하고 자기의 내면의 '명사'로서 연기하려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자'는 '나', '나 자신'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그래서 큰 가치와 쓸모가 있다고 여겨지는 진행 중인 이야기의 남/여 주인공이다. '경험자'는 자기의 자기애적 관여의 초점이며 그로 인해 심리적 에너지와 우선순위를 크게 부여받는다. '경험자'는 행위의 행위자, 생각의 생각하는 자, 그리고 행동과 결정의 은밀한 작인으로서 신뢰받는 주연배우다. '경험자'는 승리자이며 피해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자'는 삶의 핵심, 근원, 정수, 원인이며 따라서 존재 그 자체에 대해 중심적이고 결정적이라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 '깨달음 Enlightenmen'이라 불려 온 것의 상태 혹은 조건이 찬양되는 반면, 그 정확한 본성에 대해서는 비유적으로 언급되었을 뿐이었고, 그래서 그것은 또한 '신화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지고', '궁극' 혹은 '절대'와 같은 용어들은 상상으로 정교해진 미화와 공상을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다. 깨달음 Enlightenment의 상태는 덧씌워진 것이 아니며 어떤 성질의 덧붙임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주체가 그 상태이다. 이와 비슷하게, 그러한 조건 혹은 상태가 하나의 '주장'은 아닌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적인 주장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 말로 표현되는 것은 단순히 그 상태에 관해 보고하는 사실들에 관한 진술인데, 이것은 다시 한번 그 근원 Source의 실상 Reality에 대한 확인일뿐이다. 그래서 깨달음 Enlightenment의 상태는 또한 성취가 아니며 달성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과장 가능성을 훨씬 넘어서 있는 그 상태를 미화하여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상태의 휘황한 본성에도 불구하고, 묘사는 본질적으로 신성의 실상 Reality of Divinity을 재확인하는 의사소통의 목적에 기여한다.

 

- 이는 800 이상의 의식 수준에서부터 일어나고 높은 문들을 통과할 때 재발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800 이상의 의식 수준부터는 인류의 집단 무의식에서 유래하는 부정적 영역들이 도전받고 초월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도전받는 위치성들이 사적인 카르마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즉 개인의 카르마가 아니라 인류의 전체적인 카르마적 유산 자체의 반영으로서의 개인인 것입니다. 

 

- '보통의' 구도자가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초보자나 중간 정도의 구도자가 내일의 깨달은 현인이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이런 장벽을 넘었다는 것은 다음번에 그것을 돌파하는 것을 한층 쉽게 만들어줍니다. 이런 걸 '로저 배니스터 효과'라고 부르지요. 모든 돌파는 다음 주자가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데' 이용할 수 있는 진동하는 궤적을 남깁니다. 큰 장벽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힘과 진실 Truth의 꺾일 줄 모르는 위력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내적 인식 Knowingness 이 필요합니다. 깨달음 Enlightenment을 구하는 이들은 모든 유용한 확인된 진실, 지식, 그리고 이용 가능한 격려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영적 노력은 사전 경고 없이 예기치 못한 큰 도약을 가져올 수 있지요. 그런 정보를 사전에 알아 두는 것은 크나큰 지혜입니다. 
 


 

- 이제까지의 설명은 언어로 옮기기가 다소 까다로운 정보에 명확함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보는, 다양한 수준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이며 진화하는 의식 단계들에 대한 묘사를 통해 어느 정도의 친숙함을 제공해 줌으로써 위안을 준다. 또한 도중에 일어나는 표면적 장애들이 정상이며, 사실상 그러한 것이 본유적으로 사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의식 수준이 갖는 특징의 귀결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안심이 되기도 한다. 

- 잠재력의 진화적 출현은 전반적으로 보상과 확인이 되는 이행으로서 일어난다. 하지만 불쾌한 과도기 또한 있으며 그러한 것 또한 예상해야 한다. 소원하고, 몰개인화되고, 아니면 '나 같지 않은' 느낌이 드는 시기들이 있을 수 있다. 또한 혼란스럽거나 '멍'하거나 혹은 와해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시기들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맥락과 그 경험적 친숙함의 변동에서 비롯되는 적응과정 및 주관성의 습관적 감각으로 인한 것이다. '현실감' 혹은 자기 정체의 감각이 점차로 확장되며 "나는 누구다."에 관한 이전의 신념체계를 변화시키는데, "나는 누구다."는 "나는 무엇이다."로 변형된다. 그러므로 가치, 목표, 그리고 시간과 노력의 우선순위에서 점진적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과도기는 일시적이며 기도와 영적 수행, 그리고 특히 관상적 생활방식의 도움으로 이행은 용이해진다. 

 

- 자기는 때로 혼란이나 부조화를 느낄 수도 있는 반면, 참나는 항상 '내'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를 아는데, 왜냐하면 실상은 항상 신의 섭리 Providence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헌신자는 길을 잃은 것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길을 잃는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문제는 그러한 상태 자체가 아니라 통제의 상실 및 익숙함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 의식의 무한한 장은 전부를 포함하며 가능한 모든 경험적 범위나 상태들과 조화를 이룬다. 장은 본유적으로 조화로운 균형 속에 있고 이로써 모든 이행하는 상태를 포함한다. 전체적 장은 스스로를 교정한다고 묘사할 수 있고, 그 결과 그것은 보상적 방식으로 그 자체를 재정렬시킨다. 모든 변동은 한시적이고 일시적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날씨는 변하지만 성층권의 대기 균형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 주관적으로, 진보하기 위해 필요한 전부는 인내심, 기도, 과정에 대한 믿음, 그리고 저항의 내맡김이다. 혼란은 날씨 변화와 같은 것이며 인내심과 더불어, 그리고 또한 다음 단계로의 진입과 더불어 개는 일시적 조건이다. 다음 단계에서 혼란스러운 조건은 초월된다. 신성한 조화는 알맞은 때에 평형을 회복시킨다. 전부가 실제로 신성한 질서 Divine Order 속에 있다. 신에게 "잃는다."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데, 그것은 테니스 공이 일시적으로 튀어올랐다고 해서 중력이 공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이행이나 변화는 창조 Creation의 실현된 표현인 진화의 펼쳐짐의 귀결이다. 과정은 내적이자 외적이며, 모든 순간은 새로운 것의 출현을 나타낸다. 삶은 의식 진화의 움직이는 첨단에서 영위되고 있으며, 그래서 모든 경험함은 덧없고 일시적이다. 

 

- 의식의 진화는 다양한 방식을 취할 수 있다. 그것은 느릴 수도 갑작스러울 수도 있으며 혹은 정연한 방식으로 진행하다가 갑작스럽게 도약할 수도 있다. 중대한 이행은 개념적 사고를 버릴 때, 그리고 '경험함'에 대한 흥미나 에고/자기의 경험자 '가장자리 및 그 처리 기능'들과의 동일시가 더불어 포기될 때 일어난다. 선형적 개념들과 이미지 너머에는 처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마음/자기는 침묵하게 되고, 대신 비선형적 맥락이 우세해진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에고/마음은 생각한다. 장(의식)은 안다. 그리고 참나는 있다. 

 

- 즉 어떤 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것으로 있음에 의해 실현되며, 그것으로 있음은 정확히 그것이 의미하는 바의 실현이다. 존재가 그 의미다. (이 닮은 750의 의식 수준에서 일어난다.) 

- 이 상태는 또한 침묵하는 기층으로 식별될 수 있는데 거기서 생각들이 저절로 출현한다. 그것은 장 혹은 모체인 선험적 조건으로 탐지될 수 있고, 생각의 출현보다 찰나를 앞서 있다. 그것의 '자리'는 날치가 뛰어오르기 직전의 대양의 자리와 유사하다. 모든 생각은 저절로 일어나며 그것이 완전히 형태를 갖추기까지는 인지되지 않는다. 

- 생각이 일어날 때 생각은 에너지의 희미한 꿈틀거림과 같으며, 불분명한 형상에서 보다 상세하고 확인 가능한 완성태로 급속히 이동한다. 그 과정은 매우 빠르다. 침묵하는 장 자체를 식별하는 데는 예리한 주의와 통찰력이 요구된다. 방법은 생각의 특이성에 대한 관심을 거부하고 그것을 인지하거나 읽어내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것이다. 의지로써 의도하지 않는다면 생각은 끊임없는 지껄임과도 같으며, 생각을 재미있는 것으로 혹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으로 애지중지하는 것은 에고의 허영일 뿐이다. 의식의 흐름과 사고 내용의 유혹적인 매력을 우회하고 초월하기 위해 그러한 것의 중요성에 대해 겸손해지는 것은 가치의 투사 없이는 99퍼센트의 생각들이 전적으로 지루하고 진부하다는 것을 신속하게 드러내 준다. 생각이 마술에서 풀려나면 관심의 철회에 따라 그 매력은 줄어든다.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반양장)
『의식혁명』을 통해 인간의 의식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선구자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최신작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 호킨스 박사는 과학자이자 의사로서 전 세계를 아우르는 영적 스승으로, 영적 진실의 탐구와 전파를 위해 쉼없이 노력해왔다. 이 책에서 그는 스스로를 속박하는 의식의 허상을 넘어 내 안의 진정한 신, '참 나'를 발견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판미동의 〈데이비드 호킨스 시리즈〉 첫 번째 책이다. 깨달음의 길에 이르는 길을 성공적으로 추구하는데 필수적인 정보와 더불어, 그 정보를 구도자 개인의 영적 진화의 내적 상태에 적용하는 실용적인 지침 및 방법을 제공하였다. 매 장마다 이어지는 구도자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에고, 참나, 깨달음 등 영적 수행의 여정에서 품게 되는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알려준다. 영적 구도자들이 추구하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영적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고 확인 가능한 진실의 수준들을 측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호킨스 박사는 이러한 '영성'의 측정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책에는 다양한 영적 스승들과 문헌의 의식 수준을 측정한 수치를 싣고 있으며, 각 장의 진실 수준의 측정치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의식 수준 측정법을 수록하여 영적 구도자들의 깨달음의 길을 돕고 있다.
저자
데이비드 호킨스
출판
판미동
출판일
200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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