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윌리암 워크 앳킨슨] 신비주의 기독교

일루젼 2022. 10. 9.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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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기독교

저자 : 윌리암 워크 앳킨슨 / 윤민
출판 : 마름돌
출간 : 2022.80.15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았다. 이 책은 예수의 삶을 탄생부터 죽음과 부활까지를 다루되, 한/영 성경 구절들과 함께 짚어가며 신비주의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저자의 통찰을 담은 책이다. 다소 두꺼운 편이지만, 가독성이 좋은 편집과 꼼꼼한 감수로 끝까지 몰입도 있게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예수의 가장 큰 업적은 '가능함'의 표본으로 남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고결한 희생과 순종은 그 자체로 신격화되기 위함이 아니라 '인류' 중 한 사람으로서 '달성해 낸' 업적에 가깝다. 그러므로 모두가 그가 남겨준 '방법'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요 천국의 재림이 아닐까. 그의 삶이 기록으로만 숭배될 것이라면, 그의 가르침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조악한 예시이지만 일단 누구라도 '성공한' 플레이는 공략이 되어 남는다. 그리고 설사 지금의 나는 그대로 따라하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혹은 연습을 하면- '그대로' 할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게 된다. 나는 그의 선택이 육신을 입은 존재로서도 '할 수 있는' 선택임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그러므로 이미 '결과'는 정해지도록 만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구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지만, 특히 멘탈체까지 벗어던졌음을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일종의 원리로써 남았다는 것은 한 개인의 선택이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서도 '균질화' 되었을 때 가능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마스터들이 항상 같은 것을 선택하기에 원하는 결과를 빠르게 구현할 수 있다는 피터 마운트 샤스타의 설명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이는 이미 '정수(essensial)'로서의 자신을 구현해 '변수'가 사라진 단 한 줄의 '수식'과도 같은 것이다. 

 

사람은 선택으로 자기 자신을 구성한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단순히 어떤 언행을 했고 그 결과가 어떠했느냐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선택은 그 순간 그가 가진 모든 존재로서의 조건과 경험, 감정과 생각을 단 하나로 '정의해주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매 순간 일렁이기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혹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한 순간의 내가 얼마나 진심이고 얼마나 의욕에 넘쳤었는지가 반드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듯이. 그러나 자신이 결정한 대로 진실로 행동할 수 있는 자는, 그가 '선택하는 방식' 자체가 그를 설명해 줄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이럴 때 00이라면 어떻게 했을까'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로 정의될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진다면, 그리고 그것을 계획하고 온 대로 구현한다면, 그것이 해탈이자 하나의 개성으로써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레코드가 아닐까 싶다. 

 

원한다면 언제고 변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원하는 것을 정했다면, 언제나 그것이어야 한다. 

처음과 끝에서 모두 그것이 될 때, 당신은 그것으로써 완결될 것이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오컬티스트들 사이에서 현재까지도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는 에세네파(The Essenes)의 전통에 따르면 요한은 수도승 생활을 하던 기간 중 이 독특한 오컬트 형제단의 가르침을 섭렵했고, 도제 기간을 이수한 후 입문자가 되어 최고의 영성과 힘을 계발한 입문자에게만 허용되는 등급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는 소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에세네파의 가르침을 받고 입문할 자신의 자격과 권리를 주장하고 입증했고, 에세네 형제단은 이 총명한 소년을 보며 옛 히브리 민족의 선지자 중 한 명이 환생하여 요한으로 태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 에세네파가 특히나 중요시한 의례 중 하나는 입문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세례(Baptism; '물에 담근다.'는 의미)였다. 심오한 신비주의적 의미가 담긴 세례는 에세네파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의례였다. 요한은 사역할 때마다 설교를 들으러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세례를 거행했고, 훗날 교회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갓 태어난 아기에게 물을 뿌리는 형태로 이 의식을 재현하고 있다. 물질주의에 빠져 영적인 사안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일삼는 일반 대중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는 에세네파와 현대의 기독교를 연결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독교가 신비주의와 오컬티즘을 바탕으로 탄생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 에세네파는 환생의 교리, 신의 내재(內在; Immanence of God) 등을 비롯한 오컬트의 대표적인 진리를 신봉하고 단원들에게 가르쳤다. 강의를 계속 진행하면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기독교의 가르침 속에서도 에세네파 교리의 흔적을 여러 군데서 발견할 수 있다. 위대한 형제 세례 요한을 통해 에세네파의 가르침은 초기 기독교 교회에 전파되었고, 새롭게 부상하여 주류로 자리를 잡게 되는 이 종교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그때 이식된 나무의 가지는 오늘날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이 단순하고 짧은 구절에는 동양의 신비주의 형제단과 오컬트 단체뿐 아니라 서양의 비밀 단체 단원들에게도 잘 알려진 중요한 비의적 가르침(祕儀的: Esoteric Teachings)이 함축된 형태로 담겨있다. 동양의 신비주의 전통에도 소위 말하는 '동방박사'들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마스터 스승이 초보자에게, 힌두교의 구루가 제자에게 지식을 전하는 고대의 전통에 따라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요약해 보겠다. 이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우선 동방박사(Wise Men of the East; The Magi)가 정확히 누구였는지부터 알 필요가 있다. 그럼 이제 그들의 정체를 살펴보자. 

 

- 동양의 현명한 마법사들이 하늘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별을 나침반으로 삼아 유대 땅을 향해 여행했고, 이 별이 요셉의 오두막 위에서 정지한 것을 보고 비로소 아기 예수를 찾아냈다고 묘사한 주일학교의 그림책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이는 마치 몸 전체를 가리는 가운을 착용하고, 길고 흰 수염을 휘날리는 대머리 할아버지로 신을 묘사한 옛 화가들의 작품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일이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진리로 내세우며 믿으라고 강요하고, 믿지 않으면 지옥 불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라고 겁박하는 자들을 비웃는 회의론자, 무신론자, 냉소주의자들이 급증하고 있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 마법사들은 아기를 위해 준비한 신비스럽고 상징적인 공물을 바쳤다 -황금, 유황, 그리고 몰약. 첫 번째 상징물인 황금은 지도자에게 바치는 공물을 의미한다. 두 번째 상징물인 유황은 오컬트와 신비주의 형제단에서 우주의 지존을 대상으로 명상하고 사색할 때 사용하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희귀한 향료로, 경배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몰약은 육신을 가진 생명의 쓰라림을 상징하는 오컬트와 신비주의의 심볼  ... 

 

- 여기서 예수가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있었던 일에 관한 신약성경의 이야기가 끝난다. 그의 생애에 관한 성경의 다음 기록은 무려 17년의 세월이 흐른 후, 서른 살의 성인으로 자라난 예수가 세례 요한의 설교 현장에 나타난 사건이었다. 예수는 그 17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신약성경은 이 질문에 관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설명한 소년 예수의 활약상을 읽고도 그가 17년 동안 나사렛에서 아버지의 일이나 도우며 목수가 되기 위해 손기술을 연마했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자기 안에 내재한 힘을 발견한 마스터가 그 힘을 더욱 계발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 자기 안의 놀라운 신성을 인지한 사람이 이를 무시하고 물질이나 추구하는 평범한 삶을 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신약성경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않지만, 오컬트 전통과 신비주의 전설은 예수의 '잃어버린 17년'의 공백을 채워준다. 지금부터 독자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하겠다. 
 
- 오컬트 전설에 따르면 예수는 방문하는 지역마다 만인의 관심을 끌었고, 그때마다 형식주의와 사제 계급을 비판하며 영의 빛을 두꺼운 베일로 가리는 결과만 초래하는 의식과 형식으로부터 주민을 해방하고 진리의 빛으로 이끌려했다는 이유로 해당 지역 사제들의 원성을 샀다고 전해진다. 그는 가는 곳마다 신성한 아버지와 인류의 형제애의 교리를 강조하고 가르쳤다. 그는 껍데기에 불과한 형식과 가식적인 의식에 얽매여 진리의 영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오컬트의 진리를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 신약성경을 공부하는 대부분 크리스천은 예수가 광야에서 체험했던 일을 크게 주목하지 않고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사역 초기 시절에 있었던 일 중 하나로 취급하며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신비주의와 오컬트 단체에서는 이 사건을 매우 중요시한다. 예수는 광야에서 그의 힘을 더욱 계발하고 인내력을 측정하기 위해 가장 힘든 오컬트 시험을 치렀다. 진짜 오컬트 단체의 모든 고급 단원들이 잘 알고 있듯이, '광야의 시련(The Ordeal of the Wilderness)'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오컬트 등급은 예수가 광야에서 체험한 신비스러운 사건을 재현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그럼 이제 오컬티스트들이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이 사건의 실체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 하지만 그는 아직도 자신의 영혼이 그토록 갈구하는 해답을 얻지 못했다. 발아래의 바위, 머리 위의 푸른 하늘. 저 멀리 보이는 모압과 길르앗의 높은 봉우리도 예수가 들었던 신비스러운 목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속 시원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 해답은 오직 자기 안에서 찾아야만 했다. 그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그는 외로운 광야의 한가운데에서 해답을 찾을 때까지 음식도, 주거지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료도 없는 상태에서 홀로 인내해야만 한다. 마스터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깨달음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혼자의 힘으로 얻어야 한다. 홀로됨이라는 지독한 체험과 영적 갈등, 세상이 중시하는 모든 것과 작별하고 버려지는 두려움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영의 지성소(Holy of Holies of the Spirit)라 할 수 있는 내면 깊은 곳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 자신을 위해 신비스러운 힘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는 최고 수준의 오컬티스트만이 지금 예수가 겪고 있는 시험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결국 진정한 오컬트 마스터답게 내면의 힘을 끌어내어 유혹자를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 신비주의 전통에 따르면 예수의 영은 그의 머릿속에서 두 개의 그림을 보여주며 그의 질문에 응답했다고 한다. 예수가 둘 중 어느 쪽을 택하든, 반드시 선택한 그림대로 운명이 실현되게 되어 있었다. 

- 첫 번째 그림은 예수의 영적 본능에 부합하고 그의 사역 임무를 지속하는 방향의 삶이었다. 하지만 이 삶을 택하면 그는 말 그대로 '애통하는 자'가 된다. 예수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 변함없이 진리의 씨앗을 뿌리며 가르침을 전파하는 자신의 미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자기가 심은 진리의 씨앗이 수백 수천 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싹을 틔우면서 세상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비전을 본다. 하지만 막상 본인은 권력자들의 미움을 사고 형벌을 받는다. 그는 자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죽음을 맞게 되는지도 보았다. 가시가 박힌 면류관을 머리에 쓴 채, 악질적인 두 범죄자 사이에서 십자가형을 받는 비참한 최후를 본 것이다. 세상 누구보다도 용맹스러운 예수조차 자신의 굴욕적인 최후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임무가 결국엔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통에 따르면 그 순간 상위 세상에 거주하는 지성체들이 내려와 그를 격려하며 희망과 의지를 불어넣어 줬고, 예수는 천상의 존재들에게 둘러싸여 그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  예수가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선원들은 그가 바람을 일종의 생명체로 여기며 말로 꾸짖었으며, 같은 방법으로 성난 물결도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컬트의 힘이 실현되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의 진술을 토대로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단어 자체에 힘이 담겼다는 오해가 생겨났다. 단어의 배후에 있는 정신력의 작용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은 예수가 실제로 바람과 물결에 말을 걸어서 타이르는 것으로 착각했다. 오컬티스트는 물질적인 상황을 다룰 때, 그 상황 자체가 일종의 지성체라고 상상하며 '대화'를 시도하면 오컬트의 힘을 그 방향으로 집중하기 훨씬 수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 이 이야기들을 읽으며 예수가 그저 '초능력을 발휘하여 기적을 행했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페이지를 넘기는 행태를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의 기적에 관한 신약성경의 기록 자체가 완벽하지 않지만, 기본적인 진리를 깨우친 독자라면 이 불완전한 내용 안에도 고급 오컬트 지식이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것이다. 왜 다른 사람은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지 의아하다는 생각마저 들 것이다. 하지만 고대의 법칙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정확하고 한결같이 작용한다. 같은 책을 읽더라도 읽는 사람의 수준에 맞는 이해할 수 있는 내용만 접수하게 되어있다는 사실... 책을 통해서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내가 책을 위해 바치는 것이 있어야 한다. 말 그대로 있는 자는 받게 된다. 이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기본적인 법칙 중 하나다.  

 

- 물 위를 걷는 경험을 한 베드로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믿음과 신념이 오컬트 힘의 발휘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볼 수 있다. 모든 오컬티스트가 믿음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내면에서 느껴지지 않으면 시도하지도 않는다. 오컬티스트는 일반적으로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기적이라도 강력한 믿음이 뒷받침되면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베드로 역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가진 상태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자연의 법칙을 이용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중력의 법칙을 초월하는 오컬트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의 감정이 믿음을 밀어내는 순간 그 힘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사건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오컬트의 핵심 원칙이 담겨있다. 

 

- 전통에 따르면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날(부활절: Easter Sunday) 오후,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사도 중 두 명이 예수를 만났다고 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두 사도는 예수와 함께 길을 걷고 같은 식탁에서 식사까지 했으나,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사도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기록은 일반적인 설명으로는 수긍하기 어렵고, 교회에서도 이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한 시도조차 않고 있다. 오컬트 전통에 따르면 예수는 아무에게나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처음에는 자신의 아스트랄체를 완전하게 드러내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는 두 사도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전부 드러냈고, 그제야 사도들도 그를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아스트랄체가 발현되는 모습을 목격한 경험이 있는 오컬티스트라면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대번에 이해할 것이다. 예수가 생전에 가졌던 육신을 통해 부활했다는 정교회의 이론은 예수가 죽는 날까지 매일 함께 생활했던 사도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 예수에게는 종족의 카르마(Race-Karma) 또는 세상의 카르마(World Karma)라는 짐이 없었기에 인류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집단 카르마(Collective Karma)를 겪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세상 모든 인간이 겪는 고통, 시험, 시련 등, 종족의 카르마에서 비롯되는 모든 비극을 피하며 살 수 있었다. 각종 박해, 육체적/정신적 고통, 심지어 죽음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세주로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그는 자발적으로 고통받는 운명을 택했다. 

 

- 예수가 인류의 구원자 또는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인류의 카르마를 짊어져야만 했다. 말 그대로 세상의 죄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아야만 했다.  

 

- 하지만 예수와 같은 신도 밖에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인류를 억누르고 있는 카르마의 짐을 덜어줄 수는 없다. 이건 신이 만든 우주의 법칙이다. 인류의 짐을 덜어내는 대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예수도 인류의 일원, 즉,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야 인류가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카르마를 함께 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자기희생이 의미하는 바다.

 

- 독자들이 예수의 자기희생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부분적으로나마 실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순수한 영, 자유로운 영혼이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자발적으로 필멸의 존재가 되어 온갖 고통, 슬픔, 시련, 죄악을 껴안고, 경험하고, 인류의 카르마에 영원히 짓눌리겠다는 살신성인의 선택을 한 것이다. 이는 세상에서 영적으로 가장 크게 성장한 사람이 할 수 있는 희생보다도 최소 천 배 이상 큰 희생이다. 예를 들어보자. 이건 마치 에머슨처럼 높은 영적 경지에 이른 자연주의자가 세상의 모든 지렁이에게 연민을 품은 나머지, 스스로 지렁이가 되어 그들을 계몽하겠다는 선택을 내리는 것과 같다. 이를 위해 본인 스스로 지렁이가 되기로 한 에머슨은 세상의 모든 지렁이가 수많은 환생을 통해 성장하고 인간의 수준에 이를 때까지, 억겁에 이르는 세월 동안 지렁이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카르마에 동참해야 한다. 예수가 인간이 되기로 한 것은 이것의 천 배에 이르는 희생이라고 보면 된다.

 

- 광야에서 예수가 자기의 신적 지위를 포기하고 인류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그는 곧바로 인류의 카르마에 동참하고 인류 고유의 몫인 고통, 슬픔, 유혹, 한계 앞에 벌거벗겨진 사람처럼 노출되었다.

 

- 예수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신이 아니라, 인류와 같이 물질 세상에 갇힌 신이 되었다. 이제부터 그는 세상 안에서 자신의 힘을 발휘하여 인류를 위해 노력하되, 다른 인간처럼 카르마 법칙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 이전까지는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각종 영향에도 노출되었다. 예를 들어, 그가 광야에서 개인적 야망이라는 악마(Devil of Personal Attainment)로부터 속세의 영광과 명예를 추구하라는 유혹을 받았던 일화를 생각해보자. 그에게 갑자기 이런 유혹이 찾아온 이유는, 그가 광야에 머무르는 동안 세상의 카르마를 받아들이고 카르마 법칙의 적용을 받는 인간이 되겠다는 선택을 내렸기 때문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더불어 살면서 날마다, 매시간 인류의 고통을 느끼며 형벌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세상에 태어나 존재했던 모든 인간, 인류 역사상 가장 악랄했던 인간마저 수많은 생을 통해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뉘우치고 카르마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구원을 받는 그날까지 고통과 형벌을 감내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운명이다. 모든 인간의 영혼 안에는 '그리스도 원리(Christ Principle)'가 새겨져 있다. 이 내면의 그리스도는 인간이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도록 영원히 자극하고 돕는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실체다. 뜨거운 지옥 불에 떨어진 인간을 꺼내 주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불과 필멸의 허상에 사로잡힌 인간을 해방하는 것, 이것이 진짜 구원이다.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물질이라는 진흙탕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다. 우리 내면의 신, 우리 안의 그리스도는 돼지의 몸으로 들어간 후 자기가 신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힌두 전설의 신과 비슷한 개념이다. 예수는 우리 영혼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 원리가 되어 우리는 돼지가 아니라 신이라는 깨달음을 주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고 있다.   

 

-  독자들은 진아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가? 내 안의 그리스도 원리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가? "어서 나오거라. 돼지 안에 계속 갇혀 있지 말고, 너는 본래 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서 나오거라!" '내 안의 신을 인식하고, 깨닫고, 해방하는 것'이 진짜 구원이다. 

- 오컬트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는 부활하여 한동안 물질 세상에서 머물다가 사도들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 상위 아스트랄계로 이동하여 그의 영혼이 물질 세상에 머무르는 동안 활용했던 아스트랄체와 정신마저 차례대로 벗어던졌다고 한다. 다만 가장 상위에 있는 아스트랄체만은 남겨두었다. 그가 만약 물질 세상에서 활동하기 위해 활용했던 모든 의복을 다 반납했더라면 그 즉시 그를 탄생시킨 원천인 유일한 영, 절대자와 다시 합쳐졌을 것이고, '예수'라는 존재는 유일한 영에 흡수되어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구세주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지막 의복은 남겨두었다. 최후의 인간마저 구원을 받는 순간까지 세상에 남아서 활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 예수는 세상에 계속 남아 인류를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영혼의 최상위 의복인 영적 정신(Spiritual Mind)은 그대로 유지했다. 따라서 그는 지금도 세상에 존재한다. 신과 하나이면서, 동시에 별개 존재인 상태로 남아 매 순간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구원하고 있다. 하지만 오해는 없기 바란다.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가 자신의 인격(personality)을 구성하는 하급 의복을 모두 벗어던진 순간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개성(individuality)은 사라지지 않았다. 즉, 이천 년 전에 살았던 인간 예수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의 진짜 본질인 그리스도 원리는 여전히 살아 우리 곁에 있다는 얘기다. 

 

- 영혼이 유일한 영, 즉 신에게 흡수되기 일보 직전의 상태까지 영적으로 진화하면 사람(person)은 사라지고 원리(principle)로서만 남게 된다. 하지만 이 원리는 '생명력이 없는 기계적 힘'이 아니라, 살아있고, 생각하고, 알고, 행동하는 생명의 원리다. 이 오컬트 가르침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 개념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컬트를 깊게 공부한 사람도 간접적으로나마 어렴풋이 이해하면 다행이라 할 수 있다.  

 

- 예수 그리스도 원리의 형태로 오늘날 세상에 존재한다. 이 원리는 엄연히 살아있으며, 생명체처럼 행동도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육신에 속해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원리는 인류의 삶과 어우러져서 하나가 되었으며, 물질 세상에 태어난 적이 있거나, 태어나서 현재 살고 있거나,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간의 정신에 깃들어 있다.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리스도도 언제나 그와 함께한다. 이는 예수가 세상에 왔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후에 태어난 사람뿐 아니라, 그가 오기 전에 태어나서 살다가 죽은 모든 사람에게도 공통으로 적용되는 얘기다. 예수 시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사실은 죽은 적이 없고, 단지 육신의 소멸 후 아스트랄계로 넘어갔다가 때가 되어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반복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역설적으로 들리는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스트랄계로 넘어간 그리스도(예수의 현재 상태)는 지금도 그곳에 있고, 우리가 사는 물질 세상에도 동시에 존재한다.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인간의 영혼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있고, 그는 매 순간, 모든 곳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아스트랄계의 그리스도는 육신을 벗어던지고 그곳에 온 영혼들이 물질을 향한 집착을 버리고,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목표를 세움으로써 전보다 나은 조건으로 환생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다. 한편 물질계의 그리스도 역시 지금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의 가슴과 정신 속에서 활동하며 우리가 높은 이상을 목표로 삼아 정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어느 곳에 머무르고 있든,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물질의 속박에서 영혼을 해방하고 참나를 깨닫는 것이다. 최후의 영혼이 이 목표를 달성하는 날까지 모든 인간의 가슴에 거하는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살고, 고통받고,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을 받을 것이다.

 

- 방금 설명한 그리스도의 희생은 이천 년 전의 예수가 감수했던 육체적 희생보다 훨씬 큰 것이다. 그처럼 높은 영적 경지에 도달한 존재의 심정이 어떨지 한번 상상해보라. 인간이 조금만 고개를 위로 쳐들고 이상을 추구하면 언제든 자신을 구원하고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는데, 이를 외면하고 물질과 형이하학에 몰두하면서 고통을 자초하는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딱하고 답답하겠는가? 그처럼 어리석은 인간들의 가슴과 정신에 갇혀서 억겁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그의 처지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고문을 영원토록 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십자가형을 받으며 겪은 육체적 고통은 그리스도가 지금 겪고 있는 영적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잔혹성을 싸잡아 욕하지만, 막상 본인은 물질과 육욕을 탐하면서 평생, 날마다 십자가형보다 천 배 고통스러운 고문을 그에게 가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종교 분야의 저명한 어느 작가가 집필한 책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고자 한다. 몇몇 포인트를 제외하고 우리는 이 작가의 생각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Q. 오늘날에는 교회에서 이 (비밀) 교리를 가르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A. 기독교가 본래의 가르침을 대부분 망각했고, 이 가르침의 극히 작은 일부를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문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성경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긴 하다. 하지만 성경에 적힌 글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데, 지금은 그 내용이 유실되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수시로 언급한 '천국의 비밀(Mysteries of the Kingdom of God)'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는 이 비밀에 관한 완전하고 진정한 해석은 사도들에게만 전할 수 있고, 일반 대중에게는 우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할 수밖에 없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리스도는 왜 매번 고대의 신비주의 학교에서만 사용되던 '전문 용어'들을 동원하여 사도들과 대화를 나눴을까?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We speak wisdom among them which are perfect)"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왜 그는 신비주의 단체의 입문 과정에서 특정 등급 이상의 단계에 오른 사람들만 사용하는 전문 용어를 입에 올렸을까? 바울은 이 대목 외에도 여러 곳에서 비슷한 식의 전문 용어를 사용한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The wisdom of God in mystery, the hidden wisdom which God ordained before the world began, and which none even of the princes of this world know)." 그가 만인에게 공개된 통속적 기독교 가르침을 지칭하면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 리는 만무하다. 훗날 초기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바울의 직계 제자들은 그가 한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도 바울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 교부 중 가장 위대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c.150~c.215)는 '말씀의 신비(Mysteries of the Word)를 일반인에게 함부로 공개하는 것은 법칙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이 얼마나 많이 유실되었는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선량한 시민을 배출하는 데만 전념하고 있고, 성자가 탄생하는 것을 최대의 업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옛날 교회는 이보다 훨씬 큰 역할을 했다. 성자의 탄생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옛날에 성자가 되었다는 것은 교회가 소유한 비밀 지식을 받을 자격을 비로소 획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고대의 지식을 상실한 오늘날의 교회는 성자에게 그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옛날 교회의 교육 커리큘럼은 크게 정화(Purification), 깨달음(Illumination), 완성(Perfection)의 세 단계로 분류되었는데, 오늘날의 교회는 신도가 정화 과정을 마친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교회에서 나눠줄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한 말을 되새겨보자. "정화란 지식을 습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은 마이너스 상태에 불과하다. 세례를 통해 정화되고 소비밀 지식체계(Little Mysteries)에 입문한 사람, 즉, 자기 통제와 성찰의 능력을 얻은 사람은 그노시스(Gnosis: 영적인 사안에 대한 지식)의 대 비밀 지식체계(Greater Mysteries), 다시 말해, 신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얻을 준비가 된 사람이다." 클레멘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지식은 신앙보다 큰 것이다. 신앙이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에게 적합한 지식체계의 요약본에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은 과학적 신앙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제자 오리게네스(Origen: c.185c253)는 비합리적인 대중적 신앙에서 복음서에 기록된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물질 기독교'가 탄생하고, 그노시스의 지혜가 전수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영적 기독교'가 탄생한다고 설명했다. 역사 이야기를 기반으로 형성된 물질 기독교의 가르침에 관해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일반 대중을 가르치기 위한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까?" 하지만 그에 따르면 지혜로운 자들, 고급 가르침을 받을 자격을 입증한 자들에게는 상위 가르침이 주어진다고 한다. 엄밀히 말해 이 상위 가르침은 유실되지 않았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을 뿐이다. 교회는 영지주의의 지도자들을 숙청하면서 그 가르침까지 함께 버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지식은 오랜 세월에 걸쳐 보존되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자 하는 내용이 바로 이 지혜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삶에서 맞닥트리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 올바른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합리적인 규칙, 하늘에서 내려 준 진정한 복음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 내가 너희를 위해 더욱 신비스러운 지식에 관한 내용을 쓰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인 너희에게 이 지식을 전했다간 너희가 다칠 수 있음이 두려움이라. 이에 대해 용서를 구하노라. 이 지식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너희에게 함부로 전했다간 그 육중한 무게에 깔려 압사할 수 있음이라. 나는 심지어 하나님 나라의 일, 천사의 계급, 여러 종류의 천사와 만군(hosts), 권세(powers)와 주관(dominions)의 차이, 보좌(thrones)와 권세(authorities)의 다양성, 에온(aeon)의 위대함, 그룹(cherubim)과 스랍(seraphim)의 걸출함, 영의 숭고함, 주의 왕국, 그리고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지전능한 신의 장엄함을 이해하고 있으나, 나는 아직 온전함과는 거리가 멀고 바울 또는 베드로와 같은 사도에 미치지 못하노라.

(<이냐시오의 서한(Epistles of Ignatius)> 중에서) 

- 이냐시오는 또한 대제사장 또는 마스터 스승을 '지성소 입장이 허락된 자, 신의 비밀을 지키는 중책이 맡겨진 유일한 자'로 표현하고 있다. 

-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는 교회 이너서클의 고위급 신비주의자였다. 그의 글에는 신비주의 기독교를 암시하는 구문이 무수히 많이 발견된다. 그는 자신이 집필한 글이 영지주의 철학과 관련한 내용을 모은 것이며, 자신의 영적 스승인 폰타에무스(Pontaemus)로부터 받은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가르침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주께서는 이 신성한 신비주의 지식과 성스러운 빛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물론 받을 자격이 없는 다수에게는 이 지식을 공개하지 않으셨다. 이 지식을 받고 활용하여 자기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닌 자들에게만 공개하셨다. 하지만 이와 같은 비밀 지식은 문서가 아니라 구두의 형태로만 전달된다. 이것이 신의 방식이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8장 17절)" 구절을 내세우며 항변하는 자에게는 "숨겨진 것을 볼 줄 아는 자에게는 감춰졌던 것도 드러날 것이다."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이 예언하는 바이다. 자기에게 전달된 보물의 이면에 있는 것을 볼 줄 아는 자에게는 베일로 가려진 진리가 공개될 것이다. 다수에게는 감춰진 것이 소수에게는 드러날 것이다. 비밀 지식은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전달된다. 비밀을 전달하는 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이해했을 때 비로소 지식 전달이 완료되는 것이다. 내가 쓴 이 글은 나에게 이 지식을 접할 특권을 주신 은총으로 가득한 영에 비하면 너무나도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바쿠스의 지팡이(Thyrsus)에 맞은 사람에게는 자신이 전에 보았던 원형을 떠올리는 보조 이미지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여기서 '바쿠스의 지팡이'는 신비주의 형제단의 입문자들이 들고 다니던 신비스러운 봉을 의미한다. 입문식을 주관하는 사람은 새로운 입문자를 이 지팡이로 쳤으며, 그 후 최고 마스터가 새로운 입문자에게 지팡이를 수여했다.) 

- 예수의 사망 이후에 쓰인 책들을 보면 우화를 통해 가르침을 접하는 다수의 신자는 통속적인 가르침만 받을 자격이 있는 바깥(without)의 사람들이고, (이너서클의) 제자들은 사적인 자리를 통해 우화에 숨겨진 가르침을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도 그의 지혜를 듣고자 하는 일반 추종자보다 높은 경지에 이른 제자들에게는 사적인 자리에서 모든 것을 공유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진심으로 믿는 자에게는 현자와 서기관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 경전을 처음 읽고 나서 이해한 내용이 전부가 아니다. 대부분 사람은 그이면에 있는 진짜 의미를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나친다. 비밀 지식은 신비주의의 형상과 신성한 이미지를 통해 표현된다. 교회의 모든 이가 동의하는 한 가지는 '영적 법칙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모든 이가 법칙에 담긴 영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지혜와 지식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은총을 받은 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

(오리게네스의 <원리론(De Principiis)> 중에서) 

 

- 기독교 비밀 교리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초기 기독교 교부와 후계자들이 남긴 기록으로 더 많은 지면을 채울 수 있지만, 지금까지 인용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믿으므로 이 정도 선에서 마치기로 하겠다. 이 주제에 관한 이들의 설명은 명쾌하고 직설적이다. 무엇보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망 있는 인사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임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 기독교에 크나큰 불행이 닥친 것이다. 가짜 영지주의자들이 신비주의를 배반하고, 초기 기독교의 입문자들이었던 진짜 영지주의자들을 숙청하고, 그노시스(비밀 교리)를 거부하면서 교회는 초월 신학의 모든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카발라의 최고 진리로부터 멀어졌다... 가장 높은 수준의 절대 과학과 이성이 다시금 백성을 이끄는 토대가 되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고대에 그랬던 것처럼 진정한 종교와 정치가 선봉장이 되면 혼란에 빠진 사회도 구출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성한 형상을 불태우고 사원을 무너트리는 행위를 중단하라. 형상과 사원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돈이면 뭐든지 다 하는 자들은 예배당에서 쫓아내라.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악습을 중단하라. 지성과 신성의 질서를 되찾고, 오로지 아는 자들만 믿는 자들의 스승으로 인정하라.  

(엘리파스 레비의 <마법의 미스터리(The Mysteries of Magic; 아서 에드워드 웨이트 역)> 중에서)

 

- 이 즈음해서 독자들이 신비주의 기독교의 내적 가르침, 비밀 교리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비밀 교리란 다름 아닌 모든 시대에 걸쳐 소수에게 전파된 오컬트 철학과 신비주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다. 필자가 예전에 '요기 철학과 동양의 오컬티즘'을 주제로 진행한 일련의 강의와 이번 강의 시리즈에서 다룬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 임무 및 희생에 관한 특별 가르침'이 바로 이 비밀 교리의 골자다. 어떤 이름으로 어떤 이에 의해 전파되든, 진리는 언제나 진리다. 진리를 전하는 여러 스승이 걸친 껍데기를 벗겨내면 진리만 남는다.  

 

- 신비주의 기독교는 다양한 신학 체계를 무너트린 수많은 비판, 저항, 지식의 폭풍을 여러 차례 맞고도 아직 건재하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신학 체계도 최근에는 신비주의 기독교로부터 수혈을 받아 새로운 생명력을 얻고 있다. 신비주의 기독교는 신신학(新神學), 성서, 고등비평, 과학비평에도 함께 하자는 초대장을 보내고 있다. 이 진영들도 신비주의 기독교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각자의 사상을 더욱 강화하고 그 배후에 있는 원리의 진실성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신비주의 기독교에서 종교, 철학, 과학은 하나이자 같은 개념이다. 과학과 종교, 철학과 종교, 또는 철학과 과학 간의 갈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부 유일한 진리를 칭하는 다른 단어들에 불과하다. 진리는 하나다. 둘 이상일 수 없다. 이를 종교로 부르든, 아니면 과학이나 철학으로 부르든 상관없다. 같은 개념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진리다. 진리 이외의 것은 없다. 진리가 아닌 것은 허상(마야: Maya)이자 무(Nothing)이다. 진리의 반석 위에 세워진 신비주의 기독교는 사상체계의 안정성을 시험하는 강풍과 폭우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 종교의 창시자처럼, 신비주의 기독교는 언제나 존재했고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시작이 없는 시작과 끝이 없는 끝에 이르기까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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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 요한은 광야의 선지자로서 활동을 시작하기 약 30년 전, 유대의 산간지대에서 태어났다. 사제였던 그의 아버지는 현직에서 물러난 후, 부인과 함께 도시에서 먼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 이주하여 노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노년에 예상하지 못했던, 원하지도 않던 아들을 얻게 되었다. 부부는 신의 특별한 선물로 태어난 이 아이에게 히브리어로 '여호와는 자애롭다.'를 의미하는 '요하난(Johanan)'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 사제의 집안에서 태어난 요한은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선택된 소수에게만 접근이 허락되는 유대교의 내적 가르침 (Inner Teachings)을 열심히 흡수하면서 자랐다. 그는 유대교의 고위급 사제들만 알고 있는 카발라의 비밀, 히브리 민족의 오컬트와 신비주의 가르침을 두루 공부했고, 오컬트 전통에 따르면 특정 직급 이상의 사제와 그들의 자제들에게만 가입이 허용되는 히브리 신비주의의 이너서클에도 입문했다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요한은 오컬티스트/신비주의자가 되었고, 사춘기에 접어든 후 출가하여 '모든 빛의 원천인 동쪽을 바라보기 위해' 광야로 나아갔다. 다시 말해, 가족과 호화로운 생활을 포기하고 소박한 의복 하나만을 걸친 채 밀림으로 들어가 아주 기초적인 음식에만 의지하며 영적 의식을 닦는 인도의 브라만 또는 사제 계급의 자제들처럼 척박한 광야에 기거하는 수도승이 된 것이다. 요한은 약 서른 살이 될 때까지 광야에서 은둔자로 생활하다가 영의 계시를 받고 세상으로 나와 주님의 오심을 설파했다. 그럼 이제부터 그가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이전에 광야와 유대땅의 숨겨진 지역에서 15년간 어떤 활동을 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 - 에세네파는 요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수백 년 동안 존속해 온 고대 히브리 오컬트 형제단이다. 사해 동쪽 해안에 본거지를 두었던 에세네파는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단체에 속한 수행자들은 전국의 모든 광야를 누비고 다녔다. 에세네 단체는 규율이 매우 엄격했고, 무엇보다 최고 수준의 신비주의와 오컬트 의례로 유명했다. 단체에 새로 가입한 초보자(Neophyte)는 부분적으로나마 단원 또는 형제로 인정받기 전에 1년간의 도제 기간을 의무적으로 거쳐야 했고, 그 후 도제로서 2년을 더 보낸 후에 비로소 정식 단원이 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꾸준한 공부와 수련을 통해 단체 내에서 승급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단순히 시간을 채웠다는 이유로 승급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지식, 능력, 성취를 입증해야만 했다. 모든 진정한 오컬트 단체가 그러하듯이 자기를 구원하는 문제는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했고, 돈과 속세의 권력은 단체 내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 초보자, 입문자(Initiate), 고위급 마스터 (High-degree Master)를 불문하고 모든 에세네 단원은 단체의 규칙을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절대적인 무소유와 성적 금욕을 실천해야 했다. 오늘날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오페라(리하르 슈트라우스의 《살로메>>의 극적인 장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에세네파의 엄격한 규율을 생활신조로 삼았던 요한이 살로메의 성적 유혹에 역겨움을 느끼고 단체의 규칙을 깨는 대신 죽음을 택한 이유를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 신약성경의 번역자들은 아기 예수를 보러 먼 동양 땅에서 온 이들을 '동방박사' 또는 '동방에서 온 현자'로 옮겼지만, 마태복음의 그리스어 원본에는 “The Magi (뛰어난 마법사: 점성학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개역판의 주석에서도 그리스어 원어를 표기하고 있다. 권위 있는 백과사전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마태복음의 그리스어 원전에는 이들을 분명히 'The Magi'로 지칭하고 있고, '현자(The Wise Men)'는 성경을 영어로 옮긴 번역자들이 지어낸 표현이다. 성경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일반 대중은 '동방박사'와 '동양의 마법사'의 관계를 연결 짓지 못하고 있다.

 

- 'Magi'라는 단어는 페르시아, 칼데아, 메디아, 아시리아, 그리스의 언어를 거쳐 영어까지 오게 되었다. 'Magi'는 '기적을 행하는 자(wonder worker)'라는 뜻으로, 신비주의에 통달하고 오컬트 마스터의 지위에 오른 페르시아, 메디아, 칼데아의 고위급 사제를 일컫는 용어로 쓰였다. 고대 역사에는 이들에 관한 기록이 무수히 많다. 

 

- 마법사들과 오컬트 기적 수행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이번엔 사전에서 이 단어의 정의를 찾아보자. '마법'을 의미하는 'Magic'은 'Magi'라는 고대의 호칭에서 유래되었고, '마법사'를 의미하는 'Magician'도 본래 'Magi 중 한 명'을 의미하는 'Magian'이었다. 웹스터 사전에 수록된 마법 (Magic)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Magi가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비밀 지혜; 자연에 내재한 오컬트의 힘:자연에 내재한 비밀의 힘을 다스리는 행위.

- 따라서 아기 예수에게 예를 표하러 왔다는 동방의 현자들, 즉, 마법사들은 동양의 신비주의와 오컬트 단체들을 대표하는 최고급 마스터들이었다! 오컬트/신비주의의 기적을 행하는 자들, 다시 말해, 동양 신비주의 오컬트 롯지(Lodge: 신비주의/오컬트 단체의 집회소를 의미하는 용어)의 지도자급 단원들이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마스터 중의 마스터인 위대한 존재가 인간의 육신을 걸치고 세상에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었다. 오컬티스트와 신비주의자들은 이 신성한 아기의 탄생을 가장 먼저 알아본 자들이 동양의 마법사, 그것도 신비주의 단체의 심장부였다는 사실에 관해 큰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신비주의'와 '오컬티즘'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치 불로 달군 유황을 삼키기라도 한 듯이 인상을 찡그리는 일명 크리스천들은 초기 기독교 역사에 담긴 예수의 탄생에 관한 사실관계를 다시 한번 곱씹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 마지막으로, 현대 천문학의 계산으로 로마 747년(기원전 7년)에 물고기자리에서 토성과 목성이 합을 이루었고, 이듬해인 748년 봄에 화성이 합류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위대한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1604년에 이를 최초로 계산했고, 현대 천문학에서 그의 계산이 정확했음을 검증하였다. 역사에 기록된 행성들의 배열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예수의 출생년보다 7년 전에 이루어지지 않았냐고 반문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는 신약성경 연대기를 다룬 현대의 문헌 또는 백과사전이나 참고자료에서도 예수가 탄생한 해를 추정한 기존의 계산에 몇 년에 해당하는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이 무렵에 있었던 사건들, 이를테면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 등록을 위해 베들레헴에 갔던 일 등, 성경 기록을 근거로 한 성서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예수는 서기가 시작되기 6~7 년 전에 태어났음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을 얘기해주고 싶다. 즉, 현대의 연구 결과도 신비주의 전통에 보존된 점성학적 기록의 진실성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 고국에서 최고의 현자로 대우를 받는 이 마스터들은 일동 바닥에 엎드려 아기 예수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롯지의 권좌에 앉을 자격이 있는 최고의 그랜드 마스터에게만 주어지는 경배를 보냈다. 물론 아기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아름답고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작은 손을 내밀었을 뿐이다. 하지만 오컬트 전통에 따르면 아기 예수는 무의식적으로 작은 오른 손가락과 엄지로 오컬트 마스터와 스승이 제자들에게 축복(Occult Benediction)을 내릴 때 취하는 모양을 만들어 내밀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교황이 신도들에게 축복을 내릴 때 이 손 모양(Papal Benediction)을 사용하고 있다) 아직은 몸집이 보잘것없는 마스터 중의 마스터가 자신의 첫 추종자들에게 첫 번째 축복을 내린 것이었다. 이 작은 마스터는 그랜드 롯지의 권좌보다도 더욱 높은 곳에 앉아 있었다. 그 권좌는 다름 아닌 어머니의 무릎이었다! 
 

- 그들은 예수를 다시 만날 때까지 그의 성장 과정을 조심스럽게 계속 지켜봤다. 마법사들이 예수를 다시 만났다고? 그렇다! 복음서에는 이 사실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예수의 생애에 관한 내용도 빠진 부분이 많지만, 동양의 신비주의 전통과 기록에는 성경에 수록되지 않은 예수의 활약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본문을 진행하면서 이 신비주의적 지식을 조금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아기 예수는 먼 곳에서 지켜보는 마법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한 청년으로 자라나게 된다. 

 

- 하지만 헤롯의 음모는 실패로 돌아간다. '꿈에서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고, 헤롯이 죽을 때까지 귀국해선 안 된다고 귀띔해주었기 때문이다. (신비주의 전통에 따르면 아기 예수를 만났던 마법사 중 한 명이 아스트랄체(Astral Form)의 형상으로 나타나 요셉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이에 요셉, 마리아, 예수는 헤롯의 분노를 피해 은밀하게 이집트로 피신한다.

 

- 일반 대중은 유대 교회의 가르침과 형식주의밖에 몰랐지만, 통속적 가르침의 배후에는 소수의 사제만 알고 있는 방대한 유대 오컬티즘과 신비주의 가르침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학식 있는 유대인들은 카발라 또는 유대교의 오컬트 지식을 자세히 공부했고, 유대교의 비밀 교리를 구성하는 이 지식체계는 여러 세대에 걸쳐 스승에서 제자에게로 구전되었다. 그의 부모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소년 예수는 비밀 교리의 수호자인 이 스승들을 만나는 일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 유월절을 기념한다는 것은 원래 아름다운 이상에서 출발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새 피의 축제로 타락해 있었다. 여호와가 피의 홍수를 보며 흐뭇해할 것으로 착각한 당시 유대인들은 매년 축제 기간에 25만 마리가 넘는 죄 없는 양을 죽여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이 야만적이고 삐뚤어진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살아있는 신을 모신다는 사원의 제단과 뜰은 무고한 생명의 피로 빨갛게 물들었고, 여호와의 식욕을 채워줘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허영심에 빠진 사제들의 손과 예복 역시 피로 범벅이 되어 백정의 모습을 흡사케 했다.

 

- 예수는 세계 각지를 돌면서 여러 오컬트 및 신비주의 단체의 가르침과 지혜를 널리 습득했다고 한다. 예수는 인도, 이집트, 페르시아를 비롯한 오컬트 가르침의 중심지인 이국땅에 몇 년씩 머무르면서 다양한 형제단과 단체에 입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이집트의 일부 단체는 그곳을 찾아와 함께 공부한 젊은 마스터의 전통에 관해 얘기하고 있으며, 페르시아와 인도의 신비주의 단체에도 그런 기록이 남아있다. 심지어 티베트와 히말라야 산맥 깊은 곳에 숨겨진 수도원에도 언젠가 그곳을 방문하여 동양의 지혜와 비밀 지식을 배우고 떠난 젊은 마스터의 전설과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그뿐 아니라 브라만, 불교, 조로아스터교의 전통에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신비스러운 진리를 설파하고, 사제 계급과 형식주의, 그리고 모든 형태의 카스트 제도와 제약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인도와 페르시아의 여러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산 젊은 스승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예수가 약 21세부터 30세까지 인도와 페르시아, 그리고 주변 국가에서 사역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생애 마지막 3년 동안 진리를 설파했다는 오컬트 전설의 내용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 잠시 후 천상의 조력자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광야에 홀로 앉아있는 예수에게 두 번째 비전이 나타났다. 그는 하산하여 세상으로 돌아간 후, 자기가 바로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아이자 유대의 왕이며, 선택받은 민족을 승리로 이끌고 구원할 자임을 선포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주위에 모여든 백성들은 그가 선지자들이 예언한 이스라엘의 구세주라고 칭송하며 경배했다. 그는 거대한 군대를 이끄는 선봉장이 되어 예루살렘을 향해 힘차게 진격하고 있었다. 지휘관이 된 예수는 강력한 오컬트의 힘을 활용하여 적장의 생각을 읽어냈고, 적군의 모든 움직임과 의도를 미리 파악하여 백전백승의 전과를 올리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군사들 손에 무기를 쥐여주고 식량을 보급했다. 오컬트의 힘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적군을 섬멸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결국 로마를 유대 땅에서 추방했고, 적군의 패잔병들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국경 너머로 달아났다. 나라를 되찾은 예수는 먼 조상인 다윗이 앉았던 권좌에 앉았다. 그는 선정을 베풀며 이스라엘을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성장시킨다. 이스라엘의 막강한 영향력은 사방으로 뻗어 나갔고,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스, 심지어 한때 유대인들이 두려워했던 로마마저 무릎을 꿇고 이스라엘의 속국이 된다. 그는 전쟁의 대승을 기념하는 어떤 행사에서 화려한 전차에 올라타 예루살렘의 거리를 당당하게 행진한다. 한때 로마의 황제였던 카이사르는 이스라엘 왕의 노예가 되어 전차의 후미에 밧줄로 묶인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뛰어오고 있다. 솔로몬의 궁정에 버금가는 예수의 궁정은 세상의 중심이 된다. 예루살렘은 세계의 수도가 되며, 나사렛의 예수, 다윗의 아들, 유대의 왕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자, 영웅이자, 반신반인으로 숭배를 받는다. 어느새 그는 신이 되어있었고, 그의 조국 이스라엘은 신이 거주하는 도시가 되어있었다. 이 모든 장관이 선명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 예수가 이미 지니고 있는 오컬트 힘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활용하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이 실현될 수 있었다. 전통에 따르면 예수에게 두 번째 비전이 주어지던 순간, 인류 역사를 통틀어 권력을 좇고 휘둘렀던 모든 위인의 욕망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를 덮쳤다고 한다. 먹구름처럼 예수를 둘러싼 채 욕망의 진동을 동시에 퍼부었다는 것이다. 생전에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자들의 정령도 떼를 지어 몰려와 그의 귀에 대고 권력의 달콤함을 속삭였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많은 어둠의 힘이 한 사람을 겨냥하여 총공세를 펼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예수처럼 위대한 마스터가 그 순간 유혹에 굴복했더라도 그를 탓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 하지만 그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내면의 힘을 최대한 끌어내 유혹자들을 밀쳐내고, 의지를 발휘하여 황홀하고 달콤한 비전과 악의 무리를 엄하게 꾸짖어 증발시켰다. "너의 주이자 마스터마저 시험하다니! 어둠의 악령들이여, 썩 꺼지거라!" 

 

- 마스터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 거센 바람과 성난 물결은 곧바로 잠잠해졌다. 곧 뒤집어질 기세로 흔들리던 배도 안전한 곳에 정박했고, 한숨을 돌린 선원들은 부러진 돛대를 보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수작업을 하면서도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바람과 물결마저 순종하게 만드는 이 자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물질적 상황을 정복할 수 있는 인간의 힘, 믿음을 통해서만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의지의 힘을 이해하고 있는 신비주의자 예수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이여 뭐가 그리도 두려웠단 말이냐?" 

 

 -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의 망상 정도로 치부하며 설명을 서둘러 끝낸다. 이 두 사람이 정신병자가 아니었음을 신약성경에서 분명히 암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컬트 전통에 따르면 이 두 사내는 어떤 심령 현상, 즉, 흑마법을 이용하여 영혼을 소환하는 위험한 실험을 하다가 악령들에게 빙의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유대 전통의 강령술(Jewish Necromancy), 또는 주술을 통해 육신의 소멸 후 아스트랄계에 거주하는 지성체를 소환하는 실험(Invocation and Evocation of Disembodied Astral Intelligences by means of Conjuration)을 함부로 시도했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이들은 아스트랄계에 거주하는 지성체들을 물질계로 불러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소환된 존재들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자기들을 불러낸 자들의 육신을 강제로 취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광인 취급을 받게 되었고, 결국엔 사회에서 격리되어 벼랑 곳곳에 형성된 동굴까지 쫓겨온 것이었다. 이곳은 망자들을 묻은 묘지가 밀집된 구역이기도 했다. 여기서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겠지만, 대부분 사람이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 기적에 관한 오컬트의 명확한 설명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 두 사내가 처한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한 예수는 곧바로 오컬트의 힘을 동원하여 이들의 육신을 점령한 아스트랄계의 존재들을 퇴마하는 작업을 개시했다. 얼마 후 근방의 언덕에서 비명이 들려왔고, 한 무리의 돼지가 언덕을 향해 달려가더니 벼랑 아래로 떨어져 익사했다. 복음서에서도 이 대목을 아주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귀의 무리가 두 남자에서 빠져나와 돼지 안으로 들어갔고, 공포에 질린 돼지들이 물을 향해 질주하며 자살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 마귀들을 '더러운 귀신'이라고 구체적으로 칭하며 지금 당장 두 사람의 몸에서 '나오라'고 명한다. 일반 독자를 위한 내용은 아니므로 그 이유까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오컬트의 고급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은 아스트랄계의 존재들을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왜 돼지라는 매개가 사용되어야 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그나마 정령의 실체를 인지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는 이런 비판을 면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는 오래전부터 주술을 활용하여 망자와의 접촉을 시도하거나 아스트랄계의 존재들을 소환하는 흑마법의 위험성을 신도들에게 경고해왔다. 

- 오컬트 과학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물질 세상 이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세상에 대해서도 소상히 설명한다. 각각의 세상마다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있다. 아스트랄계는 육신과 결별한 존재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이들이 물질 세상으로 함부로 옮겨져서는 안 된다. 오컬트에서는 또한 고대와 중세 시대에 횡행했던 흑마법, 즉, 아스트랄계에 거주하는 하급 정령을 소환하는 모든 행위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다. 심령학을 탐구하는 현대의 일부 연구가들이 이런 경고를 무시하며 위험을 자초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아스트랄계와 관련한 현상에 함부로 관여하는 일이 없기를 당부하는 바이다. 예전에 심령학을 거대한 기계에 비유한 작가가 있었다. 기계의 작동 원리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가까이 다가갔다간 톱니바퀴에 끼여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톱니바퀴에 얽히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 오컬트 전설에서는 또한 예수가 갈보리에서 처형된 후, 3일 동안 예루살렘과 주변 지역에서 최근에 사망한 사람들의 정령이 나타나고 여기저기서 목격되었다는 초기 기독교 교회의 전통도 뒷받침하고 있다. 당시 많은 유대인 망자들이 아스트랄체의 형태로 나타나 자기가 생전에 살았던 집과 인연이 있는 현장에 나타났고, 유족과 친구들이 이들을 목격했다고 한다.   

 

- 신비주의 기독교 내적 가르침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내용은 예수의 삶과 관련한 미스터리다.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통속적 가르침은 마스터의 위대한 삶에 관한 불완전한 그림만을 제시하며, 신학자들은 이 불완전한 그림을 토대로 거대한 교리의 벽을 세웠다. 예수의 삶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신비주의 단체와 오컬트 형제단의 가르침 중 중요하고도 큰 하나의 줄기를 형성할 뿐 아니라, 다른 가르침의 뿌리이자 원천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강의에서는 이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뤄보도록 하겠다. 
 

- 우선 예수의 영혼은 보통 사람의 영혼과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예수의 탄생은 순결한 탄생(Virgin Birth)이었다. 대중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정녀의 몸을 통해 태어난 탄생'이 아니라, 제2강에서 자세히 다뤘던 오컬트 관점의 순결한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예수의 영혼은 신의 손으로 갓 만들어진 영혼이었다. 따라서 그는 우리처럼 무수히 많은 환생을 통해 다양한 생명의 형태를 거치고 체험하면서 천천히 성장하는 영혼이 아니었다. 영혼의 원천에서 갓 나온 그에게는 단 한 점의 흠결조차 없었다. 그래서 '순결한 영흔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 보통 사람과 달리 예수에게는 전쟁이 없었고, 전쟁에서 쌓은 카르마나 업보의 짐도 없었다. 그는 세상에 묶인 것이 하나도 없는 깨끗한 영혼이었다. 전생에서 떠안은 욕망과 충동이 현생에서 수면 위로 떠 오르려고 하는 압박도 없었다. 그는 완전하게 자유롭고 속박 없는 영혼이었다. 본인의 카르마는 물론, 인류라는 종족과 세상의 카르마에서도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 그에게는 카르마라는 짐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을 구속하는 욕망과 야망의 굴레에도 얽매일 일이 없었다. 속세의 권력이나 영광을 얻겠다는 욕망도, 생각도 없었으며, 따라서 이에 따른 고통과 슬픔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가 원했더라면 카르마와 윤회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관찰자 또는 조력자의 입장에서 인류를 위해 얼마든지 노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위의 인용문들을 읽고 나서도 초기 교부들이 윤회, 환생, 카르마의 교리를 믿고 가르쳤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있는가? 초기 교회가 환생과 카르마의 교리를 가슴으로 품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가? 왜 이 교리를 인도, 이집트, 또는 페르시아에서 수입한 해괴한 것으로만 취급하고, 외래 사상이 교회를 괴롭히고 있다며 불만을 호소해야만 하는가? 환생과 카르마는 본래 기독교 내적 가르침의 일부였고, 한동안 배척되었다가 이제야 비로소 복원되어 정당한 대우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 서기 6세기경, 환생과 카르마의 교리는 일부 교회 권력자들의 입김에 힘입어 불법화되었다.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The Second Council of Constantinople; 서기 553년)는 이 교리를 이단으로 규정했고, 이 시점부터 교회는 이를 불경한 것으로 취급하며 검, 화형대, 지하 감옥을 앞세워 기독교에서 추방했다. 하지만 이 교리의 횃불은 교회로부터 가장 많은 탄압을 받은 알비파(The Albigenses)의 희생으로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보존되었다. 환생과 카르마라는 기독교의 본래 교리를 믿고 버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백여 명의 알비파 신도들이 교회의 서슬 퍼런 독재에 의해 순교하는 운명을 맞았다. 

 

- 진정한 오컬트 철학은 세상에 단 하나만 있으며, 사방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진리를 파악하고 나면 모든 종교와 철학의 비밀 가르침을 푸는 열쇠를 구할 수 있다. 하나의 열쇠로 굳게 잠겨있는 수많은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가 있다는 것이다. 요기 스승들은 수천 년 전에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었고, 그 이후 지구에 출현한 현자들은 이 위대한 스승들이 처음에 전한 진리의 가르침을 다시금 제시하고, 입증하고, 실행으로 옮겼다. 
 

- 이 구절에서는 모든 신비주의 가르침의 중요한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관용, 자선, 사랑을 설파하고 있다. 자기네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자들에게만, 자기네들의 세계관에 맞춰 살고 행동하는 자들에게만 관용을 허락하는 정교회의 사상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교리다. 예수의 교리는 온 세상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인류의 형제애다. 예수는 신의 사랑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신은 의로운 자와 의롭지 못한 자 모두에게 사랑을 베푼다. 이것이 바로 영의 천국을 성취하고자 하는 모든 이가 추구해야 할 완벽한 사랑의 개념이다.  
 

- 이 구절에서 예수는 교회에 속한 일부 '선량한 자들이 형식에 집착하고 표면적인 것을 숭배하면서 독실한 척하는 행태'를 꼬집고 있다. 진정한 신비주의자였던 예수는 종교를 앞세운 모든 형태의 위선을 경멸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행위를 꾸짖었다. 

(마태복음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마태복음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1)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태복음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태복음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태복음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태복음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태복음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신비주의 기독교
이번에 출간하는 책의 저자 윌리엄 워커 앳킨슨(William Walker Atkinson; 1862~1932)은 생애 마지막 30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본명과 여러 예명으로 약 100권의 책을 집필한 미국의 변호사, 사업가, 작가이자 오컬티스트다.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08년에 ‘세 명의 입문자(Three Initiates)’라는 익명의 저자(들)가 출간한 책, 《The Kybalion》을 통해서다. 국내에도 《헤르메스 가르침-키발리온》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이 책에는 고대 이집트의 현자, 헤르메스가 아주 오래전에 인류에게 전파한 것으로 알려진 가르침을 일곱 가지의 우주 법칙을 중심으로 해설한 내용이 담겨있다. 개인적으로 많은 영감을 주었던 책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추가적인 정보 확인을 위해 인터넷을 검색했고, ‘세 명의 입문자’가 바로 윌리엄 워커 앳킨슨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저자의 이름을 알게 된 후 그가 출간한 책들을 검색해봤다. 그의 전문 분야는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했다. 환생과 카르마, 사후세계, 힌두교의 호흡 기법, 요기 철학, 신비주의 기독교,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기타, 장미십자회의 비밀 가르침 등의 전통적인 오컬트 분야뿐 아니라, 인간에 내재한 정신의 힘, 그리고 그 힘을 계발하고 올바르게 활용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실용적인 책도 많았다. 이 책의 제목인 《신비주의 기독교-오컬트 마스터, 예수의 비밀 생애와 가르침》의 원제는 《Mystic Christianity, or The Inner Teachings of the Master》다. 기독교를 다루는 책에 ‘오컬트’와 ‘신비주의’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당황하는 독자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컬트라는 단어가 ‘컬트’와 뉘앙스가 비슷해서 사이비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컬트와 컬트는 어원부터가 아예 다르다. 오컬트는 라틴어 ‘occultus’에서 유래된 단어로, ‘비밀, 감춰진 것’이라는 뜻이다. ‘Mysticism’ 역시 ‘비밀, 비밀스러운 것’을 의미하는 단어다. 고대인들은 신비주의 학교(Mystery Schools)의 입문 과정을 통해 비밀 지식을 얻게 된 입문자를 ‘Mystes’라 불렀다. 종교와 철학에도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기본 지식이 있고, 소수에게만 접근이 허락되는 비밀 지식이 따로 있다. 이번 책에서 다루는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에서 얘기해주는 것이 예수가 전한 가르침의 전부가 아니다. 비밀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독실한 신자들도 많다.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감을 잡게 되겠지만, 고대인들이 고급 지식을 비밀로 취급하고 글로 기록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보호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소수가 그 지식을 독점하고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을 소유할 자격을 입증하지 않은 사람에게 공유했다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선량하지 않은 사람이 지식을 자기중심적으로 곡해하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고, 개인적인 출세의 발판으로 삼으면 선량한 사람이 피해를 본다. 이건 우리 주변에서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도 이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반 대중에게는 우화(비유)의 형태로 가르침을 전했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선정한 열두 제자들에게는 사적인 자리에서 우화의 해석과 기적에 담긴 비밀 등을 따로 전수했다. 그는 심지어 제자들에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면 안 된다.”는 경고까지 했다. 자격을 입증하지 않은 자들에게 고급 지식을 나눠줬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예수의 신비스러운 삶과 그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전달한 비밀 가르침을 쉽게 풀어서 해설한 이 책을 읽고 나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진정한 의미를 점차 깨우치게 될 것이다. ‘구원’과 ‘부활’처럼 대다수 크리스천이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들의 진짜 의미, 예수의 자기희생이 인류에게 준 영향, 예수가 행한 수많은 기적의 원리, 예수의 ‘동정녀 탄생설’에 관한 오해와 오컬트의 설명, 신학자들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의 차이점 등, 형이상학적인 주제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왜 이게 중요한지에 관한 구체적인 해답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식을 받아들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할 준비가 된 독자에게는 이 책이 성장을 이루고 다음 여정의 방향을 제시하는 소중한 보물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저자
윌리엄 워커 앳킨슨
출판
마름돌
출판일
2022.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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