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강화길] 화이트 호스

일루젼 2023. 1. 2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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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강화길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20.06.12 


       

책더미 한 켠을 조심스레 허물었다. 지나간 것들은 떠나보낼 시기가 되었다고 느껴지는 것은, 행성 역행이 끝났다거나 음력 설이 되었다거나 하는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나를 휘감고 있던 것들이 '툭'하고 떨어져 나간 것만 같은 기분. 그래서,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내가 맞는지 스스로가 낯설어지는 기분. 

 

'강화길'이라는 작가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낯선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 작가는 이전까지 내가 반해왔던 작가들과는 결이 다른 스타일인데, 이런 느낌의 소설은 무척 드물다고 감히 표현하고 싶다. 잘 짜여진 미스터리나,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환상 소설이 아니다. 보다 현실적이고,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인데 기묘한 느낌이 남는 소설. 현대 작가 중에서는 '카먼 마리아 마차도' 정도가 떠오른다. '고딕' 소설. 강화길의 소설을 칭하기에 가장 적절한 표현은 아마도 '고딕' 소설일 것이다.

 

내게 <화이트 호스>를 남긴 문답은 이러하다. 

 

'너는 이 세계를 이해하고 싶니, 소유하고 싶니.'

'나는 이해하고 싶어. 왜냐하면, 사랑하거든.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는 세계를 보여줄게.' 

 

 

<음복> 

어째서 누군가는 이런 화법으로만 대화하게 되었을까.

있는 그대로 듣지 못하고 상대의 저의를 헤아려야만 하게 되었을까.

 

사실 이러한 은근한 의중의 표현은 언제나 살벌한 정치 상황과 엮여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곧 자신과 주변의 파멸을 가져올 때, 힘이 있는 자는 힘의 증거로써, 힘이 없는 자는 생존의 방도로써, '의중'을 숨기는 대화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지금은,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 이런 대화 방식을 사용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대화법은 같은 대화법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공기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주인공일까, 악역일까. 

모두가 의중을 넘겨짚지 않아도 되는 대화법을 구사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화자가 자신의 아이에게 '너만은 몰랐으면 좋겠다'고 가만가만 속삭이는 모습에서, '아무도 몰라도 되는' 사회를 그려본다.   

 

 

<가원>

삐뚤어진 사랑 표현이 남기는 상흔이 있다. 그것을 통해 얻어낸 성취는 주체로서의 성취인가, 객체로서의 성취인가. 

'건강하기만 하면 됐다, 너 하고픈 대로 살아라'라고 등을 밀어줄 수 있었던 이는 제 한 몸 건사하지 못하고 스러졌다.

그것은 개체의 문제일까 사회의 문제일까 종의 문제일까. 

 

때때로 이미 실패했다고 평가받는 이론들에서 숨막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그 '이상'으로서의 반짝임을 볼 때, 어째서 수없는 부나방들이 그것에 달려들었는가를 이해하게 될 때, 나는 아주 조금 공포를 느낀다.  

 

 

<손> 

화자의 서술을 따라가며 마지막까지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아마 당신은 틀림없는 한국인일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에서- 저자는 언제나 단 하나의 관점만을 제시하지 않는다. 독자는 상반되는 서술들 가운데 '진실'을 알고자 하지만, 애초에 '진실'은 하나가 아닐 수 있다. 조각난 진실의 파편은 모두가 '사실'이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은 때때로 숨 막히게 섬뜩하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 자체로 그 사람을 드러내기도 한다. 모두가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할 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는 어떤 존재로 비춰질까. 삶이란, 필연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와 피해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래서 민아는 어디로 갔을까.  

 

<서우>

손에서 등장했던 민아는 서우와 다른 아이일까.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내가 만들어낸 '그 사람'은, 실제 존재와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작가는 <서우>에서도, <화이트 호스>에서도 한번 생긴 고정관념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토로한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그렇게 보이기 마련이라는 듯이. 

 

그렇다면, 그 판단은, 완전히 순수한 오해이기만 한 걸까?

 

 

<오물자의 출현>

작가에 따르면 '오물자'라는 단어는 전라도 방언으로 '인형'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낯선 단어라 두 단어가 쉽게 연결되지는 않는데, 그보다는 '오물'이라는 단어가 훨씬 강렬하게 와닿기 때문인 것 같다. 

 

사회적 허용범위를 벗어나는 행동,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며 해석하는 수많은 시선들. 과연 <천국>이 진실일까? 나는 이마리와 김지우와 김미진 세 명 모두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그것들은 상충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삶이 한 가지 면만으로 압축될 수 없듯이, 그래서 위인전들은 언제나 각색될 수밖에 없듯이. 

 

 

<화이트 호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었기에, 나는 이 단어가 <손>에서 표현된 것 같은 비속어인 줄만 알았다. 그리고 뒤통수를 크게 맞고 말았는데, 작가가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으나 밥 딜런과 테일러 스위프트로 강조된 이 '동음이의어'는, 마치 남성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화이트 호스'와 여성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화이트 호스'의 대비처럼도 느껴졌다. 

 

이선아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관리인이 누구인지도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화자가 번개같은 내적 직관으로 깨달은 바는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것들.

노래를 부르는 사람, 쓰는 사람,

그러니까 오직 뭔가를 만드는 사람만이 바꿔낼 수 있는

새로운 의미,

그런 화이트 호스를.

 

 

<카밀라>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같은 느낌도 있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스포일러가 되는 걸까. 

발표된 작품에 대한 해석의 자유가 있으므로, 무언가를 접하는 자는 언제나 자신만의 해석을 가진다. 

 

나는 <카밀라>의 경우에는 읽히는 대로 읽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괴담 소설로 읽겠다면 그렇게 읽어도 좋겠고, 세상에 의해 존재를 부정당한 이들의 강제적 '지워짐'으로 읽어도 좋겠고, 이제는 존재의 가치를 잃고 사라진 이들의 환상성을 그렇게 표현했다고 이해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다양함이 강화길 작가의 매력이다.

어떻게도 읽어낼 수 있도록 만화경을 던져놓는, 그리고 이건 그냥 유리야라고 말해버리는.

하지만 그 유리에는 은칠이 되어 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

 

 

 

- 그러니 말해보자면, 고모가 그 집의 악역이었다. 집안마다 한 명씩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장례식장에서 다른 가족들이 일하는 동안 본인 앞으로 들어온 조의금을 세어보는 사람, 사정 뻔히 알면서 너는 성적이 어느 정도이고 취직은 언제 할 생각이냐고 묻는 사람, 너 친구는 있니? 살이 너무 짠 거 아니야? 운동을 해라 운동을, 응? 그리고 몇 년 만에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 이렇게 묻는 사람. 너는 아직도 용돈 받니? 우리 애는 이제 독립했는데, 너는 결혼은 안 해? 남자친구는 있니? 

결혼 후 첫 제사였다.

 

- 다른 날 같았으면 퇴근길에 사 온 저녁거리를 소파에서 다 먹어치운 뒤 남편의 무릎을 베고 누웠을 것이다. 그리고 76부작짜리 중국 드라마를 봤겠지. 후궁들의 암투를 그린 청나라 배경의 사극이었는데, 주인공을 함정에 빠뜨린 악역의 계략이 한창 밝혀지던 중이었다. 남편과 나는 그 드라마를 좋아했다. 주인공이 악역 못지않게 악독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황제의 아이로 속이기까지 했다. 아주 능숙하고 대담하게. 그 에피소드를 보고 우리는 매우 흥분했다. 와, 이제 다른 후궁들은 끝났다. 모두 다 죽을 것이다. 아주 처참하게 몰락할 것이다. 그런데 아이의 정체는 밝혀질까. 그래서 다들 모든 진실을 알게 되려나. 지금도 남편은 종종 이야기한다. 
"그만한 드라마가 없어. 참 시시해."

 

- 그러나 그날 저녁 나는 후궁들의 팔자를 궁금해하는 대신, 시댁 소파에 앉아 고모가 건넨 말의 저의를 파악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인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그녀가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오늘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아. 조카며느리가 이해 좀 해줘?"
순간 나는 살짝 날이 섰다. 늦게 왔다고 타박하는 걸까. 제사상 차리는 걸 안 도왔다고? 나는 그녀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체 뭘 이해하라는 거야?

 

- 하지만 사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우리는 칠 년이나 연애했는데, 그동안 그는 고모의 험담을 한 적이 없었다. 물론 원래도 그는 남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지 않았고, 가족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고모의 경우는 뭐랄까, 험담이 문제가 아니었다. 고모는 그가 내게 말해준 사람과 전혀 달랐다. 

 

- 그와 동갑인 딸이 하나 있다. 이름은 이정원이다. 정원은 남편과 달리 굉장히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수능에 실패하는 바람에 재수를 했고, 이후 어쨌든 약대를 졸업한 뒤 원하던 대로 멋지게 살고 있다... 실제로 정원이 멋지긴 한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해외출장을 핑계로 우리 결혼식에 오지 않았는데, 그날도 업무가 너무 많다며 얼굴을 내밀지 않았으니까. 그가 고모와 사촌에 대해 이야기한 건 이게 전부였다.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때만큼 그에게 화가 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는 거야?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어? 
그러나 그는 거실만 계속 둘러볼 뿐이었다. 새집 냄새가 아직도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주변을 살피는 그의 눈빛은 조금씩 자주 변했다. 염려하다가 안심하다가, 다시 살짝 불안해하다가 고민하다가.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의 걱정이 잠잠해지는 것을 보았다. 서서히 고요하게, 모든 그늘이 사라진 얼굴,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 나는 그녀가 '우리'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는 걸 느꼈고, 덕분에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생각해 보면 내가 시어머니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녀는 이십 년 넘게 간호사로 일했고, 그때도 요양병원의 야간근무를 자임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다. 사회생활에 능숙한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서 충분히 친절하고 다정한 마음을 전달할 줄 알았달까. 때문에 그녀를 만나고서 나는 남편의 일부를, 그러니까 내가 그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 건지 조금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물론... 그는 시어머니만큼 눈치가 빠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남편과 내가 결혼식을 가족들 앞에서만 작게 올리고 싶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흔쾌히 허락한 사람도 시어머니였다. 처음에는 그의 부모님 때문에 상처받을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내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 더 어려웠다. 결국 나는 엄마를 끌어안고 속삭여야 했다. 
"엄마가 나를 이해해 줘야지. 엄마가 아니면 누가 나를 이해해 줘."

 

- 한 명은 계속 말을 빙빙 돌려가며 공격하고 다른 한 명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 채 쾌활하게 웃는 그 기괴한 대화가 이들 사이에 아주 여러 번 반복되어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고모는 내 남편을 미워했다. 그리고 남편은 그걸 몰랐다. 

- 왜일까. 나를 향한 무례한 질문이나 시어머니를 향한 신경질적인 대답 역시 그런 감정의 일부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니까 왜일까. 어째서 그녀는 조카에게 그런 날카로운 심지를 품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 서른두 해. 그가 살아온 내내 고모에게 그런 시선을 받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문득 마음이 착잡했다. 고모가 비겁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다. 어른이 꼭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걸까.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때 그녀는 나름대로 그런 감정을 억누르려 매우 노력했던 것 같다. 
바로 그 어른이라는 이유 때문에.

 

- <음복> 

 

 

- 하지만 할머니는 가원을 싫어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녀는 명절과 제사 때에만 그 집을 찾았다. 평소에는 언급도 안 했다. 내가 거기서 뭘 하는지 묻지도 않았다. 제때 집에 돌아오고 학원 시간만 늦지 않으면 상관 안 했다. 박윤보가 뭘 하는지는 더더욱 관심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가원이 박윤보를 위한 것이라는 석당의 말은 결과적으로는 어느 정도 들어맞게 되었던 것 같다. 석당이 죽은 뒤, 형제들까지 모두 떠난 빈집을 관리하는 일이 박윤보의 몫이 되었으니까. 그 보상으로 형제들이 보내주는 돈이 박윤보의 유일한 수입이었다. 내게 콘칩을 사주고, 만화책을 빌려다 주고, 그가 담배를 사는...

 

- "울지 마." 그러더니 구구단표를 옷걸이로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다 외우기 전에는 이거 안 끝나. 그러니까 빨리 외워."

"왜?" 
순간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나는 궁금했다. 왜 학원을 세 군데씩이나 다녀야 하는지, 만화영화를 보는 일이 왜 쓸데없는 짓인지,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것이 왜 말도 안 되는 짓거리인지, 알파벳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왜 욕을 얻어먹어야 하는지, 아니, 제대로 읽어도 왜 칭찬을 받지 못하는 것인지, 어째서 그것이 당연한 것인지, 나는 알고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옷걸이로 구구단표를 탁탁 두드리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뭐해? 빨리 해." 

 

- 그때 그 마음. 
모르겠다. 십 년 뒤 벌어질 일에 대해 알았다면, 그 마음을 조금 덜 간직했을까. 그래, 십 년 뒤 내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 박윤보의 형제들이 석당의 집을 팔기로 결정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말이다. 그의 형제들이 그 돈을 모두 박윤보에게 주면서 "마지막이다. 이 돈으로 제발 무엇이든 해봐라" 이렇게 말하리라는 걸 알았다면? 그래서 엄마와 할머니가 그 돈에 대출금을 얹어 도심에 집을 사려고 했다는 걸 알았다면? 그리고 그해, 박윤보가 몰래 그 돈을 주식에 다 투자하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아니, 다는 아니다. 일부를 남겼으니까. 그는 그 돈으로 기타를 산다! 그리고 한 달쯤 됐을 때, 자신이 투자금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걸 수습하겠다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고 양육비를 제때 주기 싫어하는 내 아빠에게 전화를 걸고 엄마 명의로 몰래 대출을 받고... 

 

- 내가 그 모든 걸 미리 알았다면 할머니를 이해했을까. 할머니가 이러는 건 모두 다 나를 위해서라고. 나만은 다른 삶을 살았으면 해서 그런 거라고. 나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러니까 당신 자식의 발목을 잡은 새끼여서 혹독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내가 부디 다른 삶을 살았으면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그래서 내게는 도저히 미련하게 굴지 못하는 거라고. 그랬다면, 내게 대체 왜 이러는 거냐는 질문을 평생 마음에 묻고 살 필요 없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그러면 그때 그 마음을 덜 간직할 수 있었을까. 박윤보를, 내가 두들겨 맞는 동안 문 한 번 열어보지 않은 그 남자를 덜 사랑할 수 있었을까. 

 

- "이 집 팔렸잖아. 들어가도 되는 거야?" 
그가 대답했다. 
"그럼. 얼마든지 괜찮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말투였다. 그때 나는 이미 뭔가를 예감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앞으로 내가 그와 비슷한 남자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자신의 진짜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들. 어쩔 수 없이 부당한 현실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들.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제대로 해낼 수 있다고 믿는 남자들. 그들과 헤어질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 보니 겨우 이 정도 얄팍함에 자신을 갖는 남자들만 만난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에는 이런 남자들만 있는 것일까. 결국 나는 그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들 중 누구도 달라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 영어학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가방에 있던 학원비 봉투가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 하지만 하나는 알고 있다. 무엇이 진실이든, 그녀가 온종일 일했기 때문에,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 다녔기 때문에, 내게 윽박지르고 몰아붙였기 때문에, 때리고 실망하고, "유지해"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이 동네를 떠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게 되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것으로 밥값을 하게 되었다. 박윤보와 같은 남자들을 만나고 얼마든지 그들을 떠나고 다시 만나고 잊었다. 그런 사람으로 자랐다. 나만은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살게 되었다. 살고 있다. 그래. 정말로 안다. 사실 박윤보는 나의 인생, 나의 삶, 나의 미래를 자신의 무엇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 그래서 나의 웃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었던 거라는 것. 

 

- 하지만, 왜, 어째서. 
그 무책임한 남자를 미워하는 것이, 이 미련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힘든 것일까. 
왜 나는 항상 이 여자 때문에 미칠 것 같은가. 
왜 그때 그 마음이 잊혀지지 않는가.

 

- <가원> 

 

 

- 뒷짐을 지고 어깨를 살짝 구부린 채 걸었는데, 누구인지 영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귀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아이가 느닷없이 내게 툭 말을 건넸다. 
"뭐해?"
순간 묘하게 섬뜩했다. 분명 내 딸의 목소리였지만, 마치 누군가의 말을 대신 하고 있는 듯했다. 한동안 그 기분이 가시지 않았고, 솔직히 좀 두려웠다. 아이를 이렇게 키우는 것이 옳은 걸까.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들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런데 남편은 저 먼 곳에서 혼자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 그를 떠올리면 답답했다. 결국 어제 우리는 싸웠다. 그는 회사에 당장 인력이 없다며, 이대로 돌아가면 자신이 무책임한 사람이 된다고 했다. 

- "그럼 나는? 민아는? 우리한테는 무책임한 게 아니야?"
내가 따져 묻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자리 잡기를 원했던 건 당신이잖아."

 

- 모르겠다. 나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그때는 정말로 그 모든 것이 마땅한 일처럼 여겨졌고, 그러자 모든 면이 합리적으로 느껴졌으며, 심지어 내가 굉장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들었다. 나는 그와 함께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결혼한 거였다.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잘할 수 있다면 잘하고 싶었다. 그게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했고, 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 년으로 예정되었던 파견이 끝나가던 무렵, 그는 나와 상의 없이 근무 기간을 연장했다.

 

- <손>

 

 

- 실종된 여자들은 모두 마지막에 택시를 탔다. 그들의 행적은 택시에서 내린 이후 끊겼다. 시간대는 새벽 한 시에서 두시 사이였고 목적지는 주현이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렇게 네 명이 사라졌다. 이제 나는 택시 앞자리에 앉지 않는다. 오른쪽 뒷좌석, 운전사의 목덜미가 잘 보이는 자리에만 앉는다. 그들의 표정을 쉽게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택시 번호를 적은 문자를 보내거나 그에 관한 통화를 할 때, 그들의 옆얼굴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직접 목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이들은 두렵지 않았다.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건, 그래서 긴급 신고 번호를 눌러놓은 핸드폰을 몰래 꼭 쥐고 있게 하는 건, 일말의 불쾌감도 드러내지 않는 매끈한 얼굴들이었다. 물론 그들이 예의를 지킨 것일 수도 있다. 그들에겐 그렇게 기분 나쁜 행동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그러나 내 생각에 그들은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속내를 품고 있기에 그렇게 평온할 수 있는 거였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괜찮아. 저년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저 손가락을 부러뜨릴 수 있으니까. 어린 시절, 나를 가르친 어떤 선생님은 정직하지 못한 것보다 나쁜 건 매사 핑계를 대는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 때문에 택시를 탈 거면 여자 운전사의 차를 타라고 했다. 그녀들의 택시만이 안전하다고 했다. 여자는 그런 사업에 끼워주지 않으니까. 그래서 여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설사 말을 한다 해도 알아듣기는커녕, 겁에 질려 소리만 지를 테니. 이런 말들을 듣고 있으면 소문이란 진실보다는 어떤 바람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제발 실제로 그랬으면 하는 마음.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 그러면 적어도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 언제 마음을 놓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 

 

-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 쉽게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도 무례한 일일까.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나 이 어색한 죄책감은 아마 좌석에 등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는 익숙지 않은 자세 때문일 것이다. 평소에는 택시 안에서 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운전사가 대부분 남자였기 때문이다. 평소에 나는 항상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서 차 안을 주시하기 바빴다.  

 

- "언제부터요?" 
형식적인 반문 같았지만, 어쩐지 조심스러워하는 느낌도 들었다. 최근의 사건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내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동네에 대한 질문은 무엇이든 어쩔 수 없이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니까. 불쾌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려받은 기분이 들곤 했다. 지금 운전사의 질문처럼 말이다. 나는 대답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주현동에 살았다고. 주현동에 살지 않은 적이 없다고. 그 순간이었다. 운전사의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 여자의 말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밖을 바라보면서. 그날, 선생님은 내가 언젠가 큰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 했다. 그 말은 실현되지 않았다. 노력이나 선의와 상관없이 내가 의심받기 쉬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한번 생기면 거기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사람들이 그날 계단 아래의 선생님과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일은 없게 하겠다고 다짐하고 살았다. 어떤 일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해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일 때는, 알아서 처리했다. 무작정 참는 것, 상대에게도 이유가 있으리라 믿어보는 것, 혹은 이해하려 하는 건 내게 효과가 없었다. 

 

- 대신 마음 불편한 감정들을 버릴 수 있는 오물통이 하나 있다고 생각하자 일이 쉬워졌다. 나는 험악한 상상을 했다. 끔찍한 단어들을 읊었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이었기에, 나는 그걸 원하는 만큼 즐길 수 있었다. 이후 그것들을 오물통에 차곡차곡 버렸다. 통이 가득 찼다 싶으면 뒤집어 비웠다. 모두 쏟아버렸다. 좋았다. 매번 새 물건을 갖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 그렇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내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나와 전혀 닮지 않았지만, 그녀가 진짜 나라고 가리키는 그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건 나의 진짜 환상이 되었다. 나를 바라보며 어른들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예사롭지 않은 눈짓을 주고받았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뭔가 내 생각과 다른 말들이 소곤소곤 들려왔다. 어쩔 수 없다. 감당할 수 없다. 지속적인 관찰, 교화, 상담, 목소리만 낮췄을 뿐이지 그들은 내가 자리에 없는 것처럼 굴었다. 나 같은 아이는 그런 말들을 들어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 <서우>

 

 

 - 그랬다. 그녀는 열애설로 유명했다. 데뷔했던 스물네 살 무렵부터 결혼을 결정한 서른 살까지 그녀가 만난 남자, 그러니까 열애설이 난 남자는 열일곱 명이었고, 저 인터뷰는 열세 번째 스캔들이 나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그 시절 사람들이 그녀를 뭐라고 불렀는지 대부분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단어는 여기 적지 않겠다. 

 

- 당시 김미진은 지방에서 막 상경한 작가 지망생으로 소개되었는데, 이것은 사실이었으나 바로 그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그녀는 작가 지망생치고는 예뻤지만, 동시에 작가 지망생치고는 별로 지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문화비평가 W는 일간지 칼럼에서 이것이 바로 작가에 대한 대중의 편견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하며, 글의 말미에 미녀 작가들의 명단을 나열했다. (이후 그는 한국 작가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기사마다 전문가로 등장했다.)

 

- 물론 이런 해프닝은 <진실을 말해봐> 방영 기간 내내 벌어진 진짜 논란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그 논란의 중심에는 역시 김미진이 있었다. 그녀가 남자를 거절하는 방식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상대에게 미안해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도대체 그녀는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때문에 방송이 끝나면 김미진을 하차시키라는 시청자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제2화의 그 사건이 이 길고 긴 논란의 시작이었다.  

"아, 글쎄요? 재미가 없네요." 
이 멘트를 기억하는가? 그날 방송을 본 이들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설사 방송을 보지 않았다 해도 저 멘트를 모르기는 어렵다. 유명한 인터넷 짤방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으니까.

 

- 그녀를 바라보는 이진오의 얼굴에 수줍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망설였다. 그러다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있어요."
그건 꽤 어려운 철학 이론서였는데, 정의할 수 없는 정의에 대한 정의를 논증하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걸 이야기하는 이진오의 표정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약간 주저하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그의 태도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진지했다. 어쩌면 다소 유치할 수 있는 발언이었고, 시청자들에게 반감을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무언가를 그녀에게 전달하고 싶어 했다. 실제로 시청자들은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때의 이미지는 그의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거만하지 않았다. 공부를 막 시작한 (젊고 잘생긴) 남학생에게서 느껴지는 치기와 용기가 있었다. 매력적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동안 김미진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시선을 조금씩 움직였다. 그의 눈과 코, 입술과 속눈썹, 도톰한 귓불을 아주 천천히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뭐랄까, 어떤 근사한 작품을 감상할 때의 태도와 비슷했다.

 

- 이것은 이마리와 상반된 견해였다. 그녀가 원한 건 여러 가지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저지르고, 무조건 이해받아야 한다고 여겼던 건(당연히) 술주정이었다. 이 대목은 매우 놀랍다. 왜냐하면 이마리의 글을 읽으면서 김미진에게 이입했던 모든 것이 뒤바뀌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김미진의 상황을 상상하며 느꼈던 모든 감정적 상태는 그녀 가족들을 위한 것이 된다. 그런데 김지우는 이 부분에서 예상치 못한 정보 하나를 추가한다. "김미진이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할 무렵, 술을 마시고 잠자리에 들어보라는 조언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이진오였다." 그리고 주장한다. "이진오는 김미진의 알코올 의존에 죄책감을 느꼈다. 김미진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 물론 약점은 있었다. 김지우의 이야기는 대부분 주변의 증언을 통해 완성한 것이었다. 그녀의 알코올 문제가 어느 정도였는지 진단한 기록 같은 건 없었다. 특히 촬영 스태프들의 증언이 빈약했다. 그들은 김미진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한다 해도 대부분 멀쩡한 모습을 떠올릴 뿐 촬영에 방해가 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 김지우의 이야기는 이진오와 그 변호사들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김지우는 이마리의 견해가 추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지만, 본인의 주장 역시 그 수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 김지우는 주장한다. "그녀는 알코올 중독과 오래도록 싸웠다. 그건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나약한 마음, 지독한 자기혐오와 싸우는 일이었다. 그녀의 공포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 그리고 김지우는 이마리의 의견에 드디어 동의한다. "어쨌든 김미진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진짜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였다."

 

- 당연한 말이지만 이마리는 김지우의 책을 비판했다. 이마리는 김지우가 김미진이 처해 있던 구조적 폭력을 축소하고 개인의 문제로 바꿔버렸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T경관이 현장에 늦게 나타났다고 해서 김미진이 쓰러져 있던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실수였다 해도, 경관이 찾아올 때까지 아무 조치 없이 그녀를 방치한 건 엄연히 폭력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다. 김지우는 반박했다. 김미진이 계속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이진오가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한 거라고 말이다. 이 뚜렷한 대비 때문에 두 사람의 글은 화제가 되었다. 독특한 현상이었다. 그들의 글을 읽고 누군가는 김미진을 안타깝게 여겼고 누군가는 넌더리를 냈다. 재미있는 건 이런 반응들이 김미진이 살아 있을 때 받았던 관심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이마리의 글은 <김미진 전기: 지옥에서의 삶>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나왔다. 김지우의 책은 다른 부분은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고 제3장만 주목받았다(제3장의 스캔본은 지금도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다). 어쨌든 두 사람의 책은 한 달 동안 베스트셀러 1, 2위에서 엎치락뒤치락했다. 아마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김미진의 소설 <천국>이 출간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 <오물자의 출현>

 

 

-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실종된 후 사람들은 말했다. 아마 이선아의 두 번째 소설은 컨트리 음악에 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녀가 실종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소설이 완성되기만 했다면 매우 대단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젊은 소설가를 향한 동정 어린 평가가 아니었다. 진실한 기대였다. 
특히 내게 그랬다. 

 

- 습작 시절 나는 항상 이선아를 흉내 냈다. 그녀처럼 쓰기를 원했다. 그리고 매번 실패했는데, 그때마다 그녀처럼 쓰는 작가는 오직 이선아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했다. 그래서 나는 등단한 후에도 이선아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 작가인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가르쳐줬는지 말하고 싶었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리고 곧 관두게 됐다. 왜냐하면 우선, 좋아하는 작가 이야기를 뭘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자의식과잉이라는 말을 들었고, 다음에는 자신만의 특별한 독서 목록을 감추기 위해 이선아를 이용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며, 또 그다음에는 과대평가된 이선아를 좋아하는 걸 보니 안목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작가가 없다고, 책에 관해서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 말하게 됐다. 그러자 또 이런 말을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척, 교묘한 전략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이후 나는 정말로 책이나 작가에 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상처를 입어서 그런 건 아니었고... 내가 전략적인 인간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껏 들은 말 중 가장 그럴싸해 보였다. 

아무튼.

 

-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는 말투였는데, 당연히 아니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도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치는 장난 따위는 안 했다. 그런 장난은 뒷감당에 아무 관심이 없는 애들이나 저지를 수 있는 거였다. 잡혀도 상관없고, 아니면 잡힌 다음 상대를 더 약 올리고 싶은 애들 말이다. 나는 그런 유형의 아이가 아니었다. 물론 후회는 된다. 뒷감당 따위 하지 않아도, 혼나고 망신당하면서도 빙글빙글 웃을 수 있다는 걸 몰랐던 거니까. 그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 지금은 초인종 좀 누르고 도망친다고 해서 망가질 세상이라면 그냥 망가지는 게 낫겠다 싶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그런 장난을 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대체 왜, 관심도 없는 사람을 밤중에 왔다 갔다 하게 만들겠나! 그것도 매일매일! 나는 혼자 있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것이 내가 그 집에 들어간 진짜 이유였다. 

 

- 그러니까, 나는 사실 슬럼프 자체는 별로 괴롭지 않았다. 원래 영감이 미친 듯이 샘솟는 유형의 작가도 아니었고, 많이 쓰는 편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않은 이유는, 오만하다, 거짓말하지 마라, 허세 부리지 마라, 이런 말들이 되돌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상상만 해도 싫었다. 왜냐하면, 그래, 솔직히 허세가 아닌 건 또 아니었거든. 

 

- 아니, 글이 안 써지는 건 어차피 즐거운 일이 아닌데 굳이 그 속내를 들켜가면서까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어차피 내 고통인데 굳이 누군가와 공유를 해야 하나...? 다들 대신 써줄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다음 장편소설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석 달을 놀았다. 같은 핑계로 석 달을 더 놀았고, 이후 석 달을 또 그렇게 했다. 그러자 장편소설은 어떻게 되어가냐고 묻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빚 독촉을 받는 기분으로 지내는 건 진짜 좀 괴로웠기에, 그 집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곳, 혼자 있을 수 있는 곳. 덕분에 나는 매일 아침 고요히 일어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거울을 보며 주문 외우듯 중얼거릴 수 있었다. 이것도 삶이다! 쓰지 않아도 내게는 삶이 남아 있다! 문학은 삶의 전부가 아니다! 물론 몇 분 후에는 그 비장함을 모두 잃어버린 채 거울에 비친 얼굴의 뾰루지를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이것만 없으면 완벽한데. 음. 진짜 아름다워.

 

- 나는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지루해졌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철학 이론과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도식이 계속 등장했는데, 이게 문학 논문인지 공학 논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한국어 논문인지조차 의심스러워서 중간에 표지를 두 번이나 확인했다. 아, 진짜 진심으로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간신히 이해한 걸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화이트 호스는 하늘에서 내려온 영적 존재, 혹은 구원이나 선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체스터턴은 그 뜻을 활용하여 시를 썼다. 
전통적이고 신화적인 발라드.
그러나 이 결론만으로는 이선아가 책 속 밑줄 옆에 왜 '화이트호스'라는 메모를 적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힌트도 되지 않았다. 백마 탄 왕자님의 의미만 쓸데없이 깊이 알게 된 것 같았다. 

 

- 그녀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인터폰을 대충 한번 쳐다보며, 욕실에 있을 테니 만일 벨이 울리면 불러달라고 했다. 그때 다시 보겠다고 말이다. 인터폰이 저절로 작동하는 걸 직접 보기 전에는 내 말을 믿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따져보면 그럴 만하다고도 생각했다. 저 사람 입장에서는 소설가랍시고 들어와 있는 사람이 멀쩡한 인터폰을 타박하고, 동네 애들을 흉보고 있었으니까. 옛날 책들을 꺼내 바닥에 늘어놓은 채 빈둥대고, 정리정돈은 물론 청소도 하지 않고. 

 

- 흠.
내가 생각해도 그녀가 굳이 나를 믿을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오해를 바로잡을 방법은 현장을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그래,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나는 중얼거리며 거실 소파에 누웠다. 나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고, 벨은 조만간 또 울릴 테니 말이다. 그때를 기다려야 했다. 그녀는 그전까지 나를 절대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타인에 대한 판단을 끝낸 사람에게는 이런저런 설명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 첫 장편소설을 출간할 즈음, 나는 꽤 긴장해 있었다. 그 작품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지만 혹평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미 몇몇 문예지의 리뷰 코너에서 등단작인 단편소설에 대한 거센 비판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남자 두 명이 폐쇄된 도시의 방 안에 갇혀서 죽어가는 설정이었는데, 죽음을 다루는 태도가 지나치게 낭만적이라고 했다. 남자 캐릭터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나. 어떻게 등단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장편소설을 쓴 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듣게 되리라 생각했다. 내가 열심히 쓴 작품을 다른 사람들도 소중하게 여겨주면 좋겠지만 세상살이가 뭐 그렇게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장편소설을 출간하며 바짝 긴장했던 것이다.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상처받지 않을 준비를 했다. 나는 생각했다. 사람이 어떻게 칭찬만 받고 사니. 소설가가 작품 좀 비난당했다고 유치하게 화내면 안 되지. 소설가라면 자고로 대범해야지. 그릇이 커야 돼. 그리고 또 생각했다. 왜 화를 내면 안 되는데! 열받는 건 열받는 거지. 내가 무슨 보리수나무 밑에 앉아 있나. 필요 없어. 데스 노트를 쓸 거다. 매일 밤 부두 인형을 끼고 춤을 출 거다. 

 

-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고 나면 고상하지 못한 짓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죄책감도 들어서 도서관에 가 철학책 같은 걸 대출하곤 했다. <소수자의 문학을 위하여>나 <작가의 영도> 같은 책, 그리고 '저자의 죽음' 같은 표현이 난무하는 그런 책들. 물론 끝까지 읽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어쨌든 책이 나오던 시기, 나는 나름대로 생각이 많았다. 툭하면 다짐하듯 되뇌었다. 그 소설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은 없다. 나보다 더 많이 고민한 사람은 없다. 나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고, 내게 진실된 이야기였고, 그래서 썼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나만이 안다. 내가 뭘 했는지 나는 안다. 이건 내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모든 것은 내 예상과 달랐다. 

 

- 사람들은 내 소설을 지나치게 좋아했다. 

 

- 현대인의 복잡한 내면을 그려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똑같은 심정이었다. 물론 그때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해석의 가능성은 무한한 법이니까. 그리고 나는 운이 좋았다. 누군가는 좋은 소설을 쓰고도 혹평을 받았고, 누군가는 아예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잘 쓴다고 해서 모두 소설가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버티다 못해 사라지는 작가들도 수두룩했다. 대체 무엇이 작가를 작가로 만드는 것일까. 그건 대체 무엇일까.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운이 좋다는 건 알았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뭐랄까. 그래. 그건 화이트 호스였다.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 그럼 어떻게 한단 말인가. 느닷없이 찾아와서 나를 공주처럼 대하는데, 굳이 아니라는 말을 할 필요가 있나. 알아서 내 발을 털어주며 손을 잡아 계단 위로 이끄는데, 엉덩이를 붙이고 있어야 되나. 물론 나는 작은 컵케이크를 만들었을 뿐이지만, 사람들이 그걸 10단짜리 대형 케이크로 생각하는 걸 굳이... 해명해야 하나?  

 

- 문제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건 좋았는데, 가끔 내가 진짜로 그런 사유를 추구하는 작가라는 생각에 휘말릴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혼자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시켜놓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였다. 예술은 고결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작품이 훌륭할 때 그 작가도 함께 고결해지는 것인가, 고결함은 읽어낼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인가. 에스프레소를 다 마시고 나면 위가 쓰렸고, 그런 나날들이 이어지면서 점차 소설을 쓰기가 어려워졌다. 화이트 호스. 정말 대단한 선물이었다. 약속된 구원. 기다림. 오늘밤. 그러면 밥 딜런의 화이트 호스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의미였을까.  

 

- 이선아도 찾아 헤맸던 걸까. 흙투성이가 된 손바닥을 털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는 찬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무언가를 갖고 싶었던 건 아닐까.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것들. 노래를 부르는 사람, 쓰는 사람, 그러니까 오직 뭔가를 만드는 사람만이 바꿔낼 수 있는 새로운 의미, 그런 화이트 호스를.

 

-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마의 땀이 식었다. 엄청난 걸 발견한 기분이었다. 아니, 발견한 것이 맞았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바꿀 수 있을지 몰랐다. 바로 내 이야기를!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이럴 수가 일 년 만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메모를 해야 했다. 이 기분이 날아가기 전에, 이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뭔가를 기록해야 했다. 나는 빠르게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신발 밑창에서 질퍽한 무언가가 뭉개지는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나는 발을 들어 올렸다. 흙과 함께 뭉쳐진 송진 덩어리가 신발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며 그 자리에 섰다. 다시 짜증이 밀려들었고, 뭘 쓰고 싶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쓰기 싫었다. 그저 빨리 돌아가 씻고 싶을 뿐이었다. 

 

- 뭐 살다 보면 생각나겠지. 진짜라면. 
내가 진짜를 발견한 게 맞는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집에 돌아가야 했다.

 

- 나란히 앉아 찬물을 마시며 함께 음악을 들었다. 주황빛 노을이 지며 햇살이 부엌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녀에게 이 집에서 나가야 할 것 같다고,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부엌으로 들어오는 햇빛, 부드럽게 퍼지는 음악, 손끝에 와닿는 유리컵의 차가운 촉감, 어쩐지 쓸데없는 말로 그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노래의 후렴구에서 익숙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화이트 호스. 그렇다. 이후 내가 찾아보게 될, 바로 그 노래의 구절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어렴풋하게, 어쩌면 내가 화이트 호스의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 이후를 계속 찾아다니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건 찰나에 스쳐 지나간 작은 예감일 뿐이었고, 그 순간 진짜 중요했던 건 따로 있었다. 

 

- 노래가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네가 이끌어줄 사람이 아니야. 나는 공주가 아니고, 이건 동화도 아니란다. 나는 너의 화이트 호스가 필요 없단다.  

 

- <화이트 호스>



- 완전히 해가 뜨지는 않았지만 밤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시간. 그때가 가장 고독했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밀려들었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요. 사람은 너무 오래 살아요. 그렇지 않나요? 그 일이 벌어진 건 바로 이런 상념에 잔뜩 젖어 있을 때였습니다. 두 여자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어요. 한 명은 검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왔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한 대단한 미인이었습니다. 외국인 같았지만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가늠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한 명은 동양인이었지만 얼굴빛이 시체처럼 차갑고, 어쩐지 살아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어요. 단발머리에 반짝이는 목걸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형광등 불빛에 목걸이가 반짝거려서 바로 인상에 남았습니다. 그들은 다정해 보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어요.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그때 매우 피곤했고 어서 일을 마무리한 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으니까요. 약간 몽롱한 상태였죠. 그래서 그들이 물 한 병을 집어 들고 제 앞에 다가왔을 때도 약간 멍했습니다. 추웠는데도 말이죠. 네, 추웠습니다. 그들이 다가오자 너무 추웠어요. 저는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어서 아침이 오면 좋겠다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그 순간은 생생합니다. 목소리가 제 머릿속에 웅웅 울려 퍼졌거든요. 메아리 같기도 했고, 전파를 타고 퍼져나가는 전자음 같기도 했어요. 저는 처음에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어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흔들고 손으로 뺨을 살짝 때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들렸어요. 계속 들렸어요! 

- 머리가 짧은 여자가 말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살 수 없어. 이건 사는 게 아니야."
그러자 외국인 여자가 대답했죠.
"나도 더 이상 너를 설득하고 싶지 않아."

 

- 외국인 여자가 계속 말했습니다. 단지 나는 너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고 싶었어. 네가 그 인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줄 알았지. 그리고 덧붙였어요. 너를 사랑한다. 정말 너를 사랑한다. 머리가 짧은 여자가 웃었습니다. 그런 말들이 너무 달콤해서, 그런 것들에 자꾸 의지하며 덧없는 시간을 보내온 것 같아. 끊임없이 감정을 소모하며 단 한순간의 편안함도 없이. 그런데 이제는 그런 시간을 영원히 갖게 된 거야. 영원히 이렇게 지내야 한다는 거지. 무엇보다 
"삶이란, 누군가에게 선물 받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야."

 

- 그들은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몽롱해졌고, 눈을 떴을 때 외국인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어요. 머리가 짧은 여자 혼자 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지요. 곧 해가 뜰 시간이었습니다. 퇴근할 시간이었지요.

 

- <카밀라> 

 




- 인생의 보람을 꿈꾸게 한 작가다. 어떤 경우에도 중요한 것은 삶을 위한 문학이지 문학을 위한 삶이 아니라는 생각도 그가 하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문학을 위해 삶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삶이 아름다워지기 위해 문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어쩐 일인지 강화길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자주 하게 되었다. 논문에서 박완서를 다룬 횟수만큼 비평에서 강화길을 자주 다룬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저 하나의 길을 차분히 걸어가는 기분으로 두 사람을 좇으면 되었는데, 최근에 강화길의 고백("나는 박완서 키드였다")을 읽고는 한결 안심이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박완서가 앞서 나아갔고, 이제는 여럿이 함께 갔으면 싶은 그 길로. 그러나 솔직히 그 길을 걷는 일이 수월하지만은 않았고, 그래서 약간의 각오가 필요했다고 강화길은 적어두었다.

 

-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박완서는 여전히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작가로 존재했다. 왜냐하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시선과 대립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소설이 세련되지 못하고, 예스럽고, 젊고 신선하지 않으며, 세태의 풍속 묘사에 불과하고, 그저 편하게 읽힐 뿐 전혀 아름답지 않은 문장으로 가득하다는 시선과 싸워야 했다. 그건 내 안에 자라나던 그럴싸해지고 싶은 욕망과 싸우는 일이기도 했다. 나도 아름답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나의 진짜 목소리에 졌다."  

 

- 박완서의 소설에는 '참혹한 전쟁의 증언' '여성의 내밀한 고백' '생생한 세태의 묘사' 같은 꼬리표가 붙고는 한다. 그것들이 박완서 문학의 핵심을 건드리는 말이기는 해도, 단언컨대, 매우 불충분한 평가다. 어쩌면 이 라벨들은 한국문학사가 오랫동안 찬미해 온 '아름다운 문장으로 쓰인, 고도로 미학적인 여성-문학'이라는 상투적인 (그러나 권위 있는) 기준에 박완서의 문학이 부합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시혜적으로 주어진 평가는 아닐까 하는 심술궂은 의구심을 나도 느껴본 적이 있다. 그러나 무엇이 여성다움이고 무엇이 아름다움인가. 나는 박완서 소설의 일상과 세파의 악다구니를 들여다보며, 징그러울 정도로 솔직한 문장들을 바라보며, 이것이야말로 내 안의 여성 독자가 가장 전율하며 동감하는 '문학성' 그 자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름다우려는 문학이 삶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꾸려는 문학이 아름답다고 박완서의 문학은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더 아름다운 문학이 있지 않으냐고 말하는 주변의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진짜 목소리"가 이끄는 곳으로 가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강화길이라는 작가가 탄생하였고, 나는 우리 세대의 박완서가 될 수 있을 한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강화길이 "어떻게 박완서가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당당하게 반문할 때, 나는 통쾌하면서도 두려웠다. 이제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규범적 통념들과 맞서야 할 것이고, 박완서가 외면하지 않으려 진력한 '일상'과 '세태'의 문학적 가치를 입증해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 바로 그런 소설이야말로 역사의식, 시민의식, 정치의식을 품을 수 있음을 예시해야 할 것이고, 마침내는 그곳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이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여자, 쓰(이)는 여자, 선택하는 여자>, 신샛별 

 


- 상당한 피로와 염증을 느꼈다. 신인 작가 입장에서 꽤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글도 있었고, 그간 내가 여성으로서 받아온 어떤 평판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글도 있었다. 그러던 중 테일러 스위프트가 이렇게 노래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내 머리가 비었다고 말하지. 하지만 나는 떨쳐버릴 거고, 절대 멈추지 않을 거야.' 또 이런 노래도 들었다. '너는 지금 나를 괴롭히지만 난 언젠가 큰 사람이 될 거고, 너는 바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내가 노래를 못한다고 흉이나 보겠지.' 이후 나는 그녀의 노래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자연스레 가사가 진행되는 방식에 흥미를 느끼게 됐다. 사실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그러니까 자기만의 '스타일'이란 대체 무엇일까. 균형감각을 유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라는 인간과 캐릭터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간격이 존재하나. 아니, 그 거리는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 '나'라는 일인칭 화자에 의해 진행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사람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일은, 나의 이야기를 또 다른 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요소는 대체 무엇인가. 사실 이 질문들은 그간 소설을 쓰면서,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지금까지도 자문해 온 것이다.  

- 어느 하루였을 것이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시간이었다. 열한 시 열두 시 무렵이었던가 살짝 배가 고팠지만 움직이기 귀찮아서 계속 이불속에 누워있었다. 습관처럼 노래를 틀어놨다. 그때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뭘 하고 있느냐고 해서 노래를 듣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아, 나 그 노래 좋아. <화이트 호스>."
순간 나는 친구가 음악에 대해 꽤 잘 아는 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고, 바로 되물었다.
"왜? 뭐가 좋은데. 왜 좋은데. 어떻게 좋은데?"

"어... 밥 딜런하고는 완전히 다르게 썼잖아? 의미를 아예 바꿔버렸지."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이걸 써야겠어." 

-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첫 문장을 쓴 뒤 이어 결정했다.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할 거야. 귀신에 시달리는 이야기가 될 거야. 고택에 갇힌 이야기가 될 거고, 고딕 스릴러가 될 거야. 화이트 호스의 의미를 찾는 이야기가 될 거야. 화이트 호스의 역사는 집의 역사가 될 것이고, 이곳에 머문 사람들의 기억이 될 거야. 그들의 기억에 따라 화이트 호스의 의미는 달라질 거야. 왜냐하면 쓰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에 의해 그 의미는 계속 바뀔 수밖에 없으니까. 그게 그들이 하는 일이고,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지. 바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지. 하지만 나는 내가 실패하리라는 것을 알아. 이미 실패하고 있으니까. 결코 다다르지 못할 거고, 아마 나는 평생 고택 안을 헤매며 살게 되겠지. 바싹 말라죽겠지. 부유하는 하나의 기억이 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찾아다닐 거야. 그것이 내가 하는 일이고, 이것이 나의 사랑이니까. 

그래.

정말 사랑해.

 

- 그리하여 이번 소설집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 그 집에 머무는 사람들의 이야기.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고리를 끊고, 의미를 바꾸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모든 실패와 모순과 애착이 만드는 희미한 틈새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삶에 대한 이야기.

 

- 다시는 작가의 말을 이렇게 길게 쓰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내게는 소설로 충분하다.

  

 

삶을 주어진 운명처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비릿한 증오를 물려받지 않기 위해

세상을 자신만의 의미로 다시 쓰려는 여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누군가는 영영 알지 못할 이야기

여성들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시작되는 지독하고 아름다운 고딕 스릴러

 

 

 

 
화이트 호스
2020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소설가 강화길의 두번째 소설집『화이트 호스』. 작가는 긴장감 넘치는 서사 속에 여성에게 가해지는 혐오와 폭력의 문제를 절묘하게 녹여내며 다른 누구도 아닌 강화길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을 선보여왔다. 이제 강화길은 여성의 신체에 가해지는 위협뿐만 아니라 소문과 험담, 부당한 인식과 관습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성을 교묘하게 억압하는 거대한 구조를 파헤친다. 마치 유령처럼 설핏 드러났다가 모습을 감추는 이러한 구조를 강화길의 인물들이 감지하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질감의 서스펜스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 「화이트 호스White Horse」에서 강화길은 여성을 구속하는 말들을 자신만의 의미로 다시 쓰겠다는 작가로서의 다짐을 드러낸다. ‘백마 탄 왕자’를 연상시키는 이 단편의 제목은 G. K. 체스터턴의 시집에 등장하는 시어이자, 밥 딜런과 테일러 스위프트가 자신의 음악에 활용한 상징이기도 하다. 이 단어가 강화길 소설에 이르러서는 어떤 의미로 변모할까.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부단히 자기 갱신한 끝에 한국 여성 스릴러를 대표하는 작가가 된 강화길의 다음 소설을 기대하게 만드는 단편이다.
저자
강화길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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