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일레인 페이절스] 믿음을 넘어서 - 도마의 비밀 복음서

일루젼 2023. 1. 30.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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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일레인 페이절스 / 권영주
출판 : 루비박스 
출간 : 2006.10.30 


 

단 시간 동안 한 주제에 관해 몰아서 읽는 경우의 장점은 해당 주제에 관해 '보다 빠르게 주관'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번 경우에는 동일 저자의 책을 연이어 읽고 있는데, 가능하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저자들의 책을 이어서 읽는 편이 좀 더 효과적이다. 

 

같은 자료와 사건들을 놓고 각자가 자신들만의 근거와 해석을 주장하는 글들을 읽다 보면 자신은 어떤 주장이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하는지, 혹은 감정적으로 동조하게 되는지를 감각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므로 각 저자들과는 다른 제3의 시각을 갖추게 될 수도 있다. (다만 한 두 권을 읽고 자신만의 주장을 갖는 것은 조금 이르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역사의 경우 '진실'이란 존재할 수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오늘 평소 마시지 않던 음료를 선택해 마신 것이 훗날 돌이켜 보니 어떠어떠한 결과를 낳았다는 식인데, 그 순간 내가 그 음료를 선택한 이유에 관해서는, 그 순간의 나에게 묻더라도 별 것이 없을 확률이 높다. 어떠한 일이 있었는가에 관한 사료 자체의 객관성, 그 일을 경험한 자와 관찰한 자 사이의 시각차, 그 전후로 영향을 주고받은 일련의 다른 사건들, 해당 사건에 관계된 이들의 감정과 가치관과 알력 관계 등을 '전지적 시점'에서 알고 있더라도 그것은 '진실의 한 단면'이 될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단면들을 더듬는 것을 좋아한다. 

 

이 책은 저자 일레인 페이절스(혹은 일레인 페이젤)이 '어째서 도마복음이 아닌 요한복음이 사대복음으로 선택되었는가'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는 글이다. 그녀는 니케아 신경의 구성에 큰 영향을 미친 이레나이우스라는 인물에게 집중한다. 그가 겪은 스승의 비극적인 죽음과 박해, 험난한 상황 속에서 젊은 나이에 신도들을 이끌어야만 했던 책임감과 중압감, 분열을 막기 위한 공통의 적과 불안을 달래주기 위한 단순 명료한 약속 등의 필요성을 고려할 때, 그에게는 반드시 요한복음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요한복음은 그리 신뢰도가 높은 복음이 아니었다는 점도 다룬다. 다른 누가복음이나 마가복음, 마태복음과는 결을 달리 하는 부분들을 예시로 들며 가장 큰 차이점은 각 복음들이 "예수의 신성"을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느냐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요한복음만이 예수가 주님 그 자체의 현신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도마복음과 요한복음이 핵심적으로 대치하게 되는 지점이기도 한데, 도마복음은 그것이 '인간이 주님의 형상을 본따' 지어졌기 때문으로 우리들 역시 예수처럼 내면의 신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만이 독생자'이므로 신성이 없는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에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신성'이란 다시금 '창조'와 연결이 되며, 결국 그 힘은 '믿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믿음은 faith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리라는 확고한 '앎', 거기서부터 창조가 시작된다고 본다.

 

스쳐가는 잡념들이 많았지만 아직 공개적으로 쓸 정도는 아니라 이 정도에서 줄인다.

무척 즐겁게 읽었고, 한동안은 조금 다른 분야를 읽어볼까 싶다.  

 

사족. 초기 기독교인들이 받았던 박해와 오해는 14세기 그들이 타인에게서 보았던 것들과 무척 유사하다.

되갚음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저 의식하지 않을 때, 역사는 얼마나 쉽게 반복될 수 있는가에 관해 생각한다.   

자기 확신이 없는 믿음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잔혹할 수 있다. 자신이 믿는 가치에 흔들림이 없는 자는 그것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춰지는 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 단단함이 그렇지 않은 이들의 두려움을 자극할 뿐이다.

 

사족2.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게서 '나무에 열린 열매'를 본다는 문장이 눈에 걸렸다.

'사다리를 통하면 그곳으로만 갈 수 있지만 사다리를 버리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말을 접한 적이 있다. 

패스는 다양하지만 모든 곳으로 연결된 곳, 심연을 넘을 수 있는 곳, 들어 올려지는 곳은 그곳뿐이다.

히란야, 다윗의 별.             

 


   

- 역사학자 조너선 드레이퍼에 따르면, 디다케의 초기 버전에서 예수를 따르던 시리아의 한 집단이 여전히 유대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새 신자의 세례는 오늘날까지 유대 인들이 이해하듯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이방인(즉 이민족)을 정화시키는 '목욕'이었다. 드레이퍼는 이 영향력 있는 초기 문헌의 목적이 비유대인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제목에서 약속하듯 이민족에게 12 사도의 가르침을 제공하는 것이다. 디다케는 이민족에게 예수가 해석하는 히브리 성경의 '삶의 길'을 설명하고, 그 '길'을 따르기를 원하는 이민족이 세례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함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마지막으로 디다케는 예비자가 떡과 포도주라는 간단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 행위가 예배를 드리러 모인 '인간의 가족'을 '정부'와' (그의) 종 '예수'(그리스어 pais는 '자식'을 의미하기도 한다)와 이어줌을 알게 된다고 설명한다. 함께 떡을 쪼갬으로써 사람들은 하나님이 과거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모아 하나로 결합시켰음을 축하한다. 

 

- 요한복음의 저자 또한 바울과 누가 못지않게 (혹은 더욱 강하게) 예수의 죽음을 유월절과 연결시키려 하지만, 그가 기록하는 예수의 생애 최후의 며칠간은 다른 복음들과 차이가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유월절 전에"(요한복음 13:1)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음식을 함께 먹으므로 이 음식은 명백히 유월절을 축하하는 음식일 리가 없다. 이 자리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데, 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정교회, 침례교와 모르몬교를 막론하고 수백만의 기독교도에게 또 하나의 성례전(성사)이 된다. 게다가 요한복음에는 바울과 마가, 누가, 마태가 이야기하고 오늘날까지도 예배의 중심이 되는 최후의 만찬이 등장하지 않는다. 요한은 대신 예수가 전날(목요일) 밤에 체포되어 다음날 아침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 나는 요한복음을 읽을 때마다 강렬하게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열정에 가까운 신앙심을 경험하기도 했다. 열네 살 되던 해에 복음교회에 다니게 되었을 때, 나는 열기와 열의에 찬 집회, 그리고 신자들이 소중하게 받들던 요한복음에서 당시 내가 간절히 바라던 것을 발견했다. 자신이 '올바른' 집단, 하나님에게 속한 단 하나의 참된 '회중'에 포함되어 있다는 안도감을 얻었던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는 요한복음을 사복음 중에서 가장 영적인 복음이라 생각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신비로운 초자연적 존재이며,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요한이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애로운 은총을 보증하면서 동시에 "믿지 아니하는 자는 ... 벌써 심판을 받은 것" (요한복음 3:18)이라고 경고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가 자기 민족(유대인들)을 마치 자신과 무관한 것처럼, 악마의 자손들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장면들에 대해서도 특별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들' 중 하나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를 알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교회의 지도자들은 전도가 목적일 때를 제외하고 같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했다. 친한 친구가 열여섯 살에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을 때, 신자들은 그의 죽음을 가엾게 여기면서도 그가 유대인이고 새로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영원한 벌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고, 그들의 해석에 찬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었다.

 

-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세계가 더 이상 내가 머물 곳이 아님을 깨닫고 그 교회에서 나왔다. 대학에 입학한 뒤 신약성경을 원어로 읽기 위해 그리스어를 배우기로 했다. 신약성경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로 이 준엄하고 간결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복음을 새롭게 경험했고, 마치 처음 읽는 사람처럼 다음 전개가 궁금해서 책장을 넘겼다. 그리스어를 배우면서 호메로스의 시와 소포클레스 및 아이스킬로스의 희곡, 핀다로스의 찬가, 사포의 기원문을 읽었고, 종교적 감성이 다를 뿐 이들 '이교'의 작품 또한 종교 문학임을 알게 되었다. 

 

- '영지주의자'가 '아는' 사람, 즉 통찰의 체험을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한, 이들 문서 중 다수는 '영지주의적'이라고 묘사될 수 있다. 그러나 교부들은 대개 이 말을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소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 그러나 그 책에서 나의 의도는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어째서 이들 문헌이 '이단'이고 신약성경의 복음만이 '정통'이라고 못 박았는가? 누가 어떤 상황에서 이 같은 결정을 내렸는가? 동료들과 함께 답을 찾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는 초기 기독교를 형성한 정치적 문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 나그함마디 문서의 편찬, 주해 작업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의 시초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더 복잡해진 면도 있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보다 순수하고 단순한 '초기 기독교'가 아니라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였다. 예컨대 이제 여러 학자들은 1세기 말엽에 쓰여졌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요한복음이 예수의 정체를 둘러싼 격한 논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수개월간 요한복음과 도마복음(거의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을 것이다)을 비교한 끝에, 나는 요한복음이 격한 논쟁 중에 예수에 관한 특정 입장을 옹호하고 다른 입장을 반박하기 위해 쓰여졌음을 알게 되었다. 

 

- 예컨대 요한복음은 몇몇 중대한 부분에서 다른 신약성경 복음들과 대치된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요한복음이 예수의 생애 마지막 나날을 다르게 서술한다는 것을 살펴본 바 있다. 게다가 마가와 마태,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성전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을 내쫓은 사건이 예수가 마지막으로 취한 공적(公的) 행동인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최초의 행동이다. 세 복음은 모두 이 사건을 계기로 대제사장 일파가 예수를 체포하기로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 요한복음이 세 복음과 다른 또 한 가지(그리고 훨씬 중대한) 특징은 예수가 단순히 하나님의 종으로 태어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요한은 유대인들이 예수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요한복음 10:33)라고 한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은 실제로 예수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부활한 예수를 만난 도마가 마침내 그를 알아보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한복음 20:28)라고 외쳤다고 한다. 초기의 요한복음 논평 (240년경)에서 오리게네스는 다른 복음들이 예수를 인간으로 묘사하고 요한복음과는 달리 "그의 신성(神性)을 명백히 거론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그러나 마가복음과 마태복음 누가복음이 요한복음 및 바울의 편지들과 합쳐져 '신약성경'이 성립된 (160년에서 360년경까지 200여 년 이상 걸려) 뒤, 대다수의 기독교도들은 이들 세 복음을 요한복음에 비추어 읽고 이들 모두에 예수가 주님이요 하나님이라는 요한의 확신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들어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1945년 상이집트에서 발견된 복음들은 그와는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예컨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이 요한복음 대신 도마복음과 묶였더라면, 또는 요한복음과 도마복음 양쪽 모두 신약성경에 포함되었더라면 최초의 세 복음은 지금과는 매우 다르게 읽혔을 것이다. 도마복음과 요한복음은 각각 1세기 말엽 토의 또는 논쟁을 벌이던 서로 다른 기독교도 집단을 대변한다. 그들이 논쟁을 벌이던 문제는 이것이었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에 관한 좋은 소식(그리스어 euangellion, 즉 '복음')'이란 무엇인가?

 

- 그러나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이 예수의 은밀한 가르침을 해석하는 방향은 전혀 다르다. 요한에게 예수는 태초에 생긴 빛으로, 독특한 존재, 하나님의 '독생자' 다. 그는 예수를 "사람들의 빛"(요한복음 1:4)이라 하며, 예수만이 세상에 거룩한 참 빛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요한에 따르면 우리는 예수가 구현하는 참 빛을 통해서만 신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이와 다른 결론을 내린다. 예수가 구현하는 참 빛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할 뿐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사람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도마의 주장은 그로부터 1000년 후에 유대교(또한 훗날 기독교 신비주의)의 중심 테마가 된다. 

 

- 반면에 도마복음 해석에 열쇠가 된다고 생각되는 대다수의 말씀들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 능력을 타고난다고 시사한다. 우리가 도마라고 부르는 인물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가 신약성경의 사복음을 쓴 저자들처럼 사도의 이름을 빌려 그가 가르친 대로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도마는 자신의 독자가 베드로가 예수의 정체에 얽힌 비밀을 발견하는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마태는 여기에 예수가 자신을 바르게 안 베드로를 축복했다고 덧붙인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가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태복음 16:17) 

- 도마복음에서는 이 장면이 다르게 이야기된다. 도마복음에 따르면, 예수가 '내가 누구냐?'고 묻자 세 제자가 각각 다르게 답한다. 먼저 베드로가 마가복음 및 마태복음과 실질적으로 동일하게 답하여 "의로운 사자(使者)" 같다고 하는데, 이는 대개 그리스어를 쓰는 도마복음의 독자들을 위해 히브리어 '메시아'를 해석한 말일 수 있다. 다음에 마태가 "지혜로운 철학자" 같다고 대답한다. 이는 히브리어 '랍비(스승)'를 이민족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옮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도마가 "선생님 제 입은 선생님께서 누구와 같으신지 말할 수 없나이다"라고 답하고 먼저 나온 두 대답을 뒤엎는다. 그러자 예수는 "나는 네 스승이 아니다 너는 내가 나누어준 샘물을 마시고 취했다"라고 대답한다. 예수는 베드로와 마태의 답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대답이 저 차원의 이해를 나타낸다고 암시한다. 그 뒤 예수는 도마를 따로 불러 세 가지 비밀을 누설한다. 이는 '비밀 말씀'이 차고 넘치는 이 복음에도 기록될 수 없을 정도로 큰 비밀이다.  

 

예수께서 ... (도마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서 세 가지 말씀을 하시거늘 도마가 돌아오니 그들이 예수께서 무엇이라 하셨느냐 하고 물으나 도마가 대답하매 내가 너희에게 예수께서 이르신 것 가운데 하나라도 말하면 너희는 돌을 집어나에게 던질 것이며 돌에서 불이 나와 너희를 삼킬 것이니다. 

- 그렇다면 도마가 전하는 복음, '좋은 소식'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마가, 마태, 누가의 공관복음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 그러나 도마의 예수는 몇 가지 단서를 주기는 한다. 수많은 기독교도들이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하듯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판한 다음 이렇게 단언한다.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밖에 있으니 너희 자신을 알게 되면 너희는 알려질 것이며 너희가 살아 계신 아버지의 자식들임을 알게 될 것이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모르면 곤궁 속에 살 것이며 너희가 곤궁일 것이니라. 

 

-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은 또 다른 의문을 야기한다. 어떻게 해야 자신을 알 수 있는가? 도마에 따르면, 예수는 먼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그런 다음 '시작'으로 돌아가 그곳에 자리해야 한다고 한다. 이어 그는 더욱 기이한 말을 한다.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 하지만 어떻게 자신이 태어나기 전으로, 심지어 인간이 창조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나아가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무엇이 있었기에?   

 

- 예수는 그런 무지한 질문을 무시하고 대신 각 사람마다 감추어져 있는 빛을 보게 한다. "각 빛의 사람 안에는 빛이 있으며 그 빛이 온 우주를 밝히니 그 빛이 빛나지 아니하면 있는 것은 어둠이다." 즉 '온 우주'를 밝히는 내면의 빛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둠 속에서 살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내면의 거룩한 빛을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하다가는 정체성이 파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거울에서) 자기 모습을 보고 기뻐하나 너희보다 먼저 생겨난 ... 자기 형상을 보면 많은 것을 견뎌야 하리라." 우리는 자기만족 대신 소멸의 공포를 발견하게 된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신과의 만남에 대해 이와 유사한 경고를 한다. "모든 천사는 무섭다." 자기 자신을 그런 만남에 내맡기는 행위는 공포를 수반한다. 

 

천사가 와서 너를 더욱 사납게 심문하고 별처럼 불타며 너를 잡으려 달려들고 너를 창조하려는 것처럼 너를 구부리고 너 자신으로부터 너를 파헤친다.

- 2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기독교도들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야고보의 형제 요한으로,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그물 깁던 중에 예수가 부르자 바로 그물을 버리고 그를 따라나선 인물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요한은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복음 자체(또한 추가되었을 것이라 보이는 결말)에서는 저자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주장한다. 만약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라면, 어째서 복음에 그의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사도들'이나 '열두 제자'가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가? 만약 저자가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라면 어째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어째서 베드로를 대표자로서 인정하면서, 동시에 베드로의 지위를 폄하하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두둔하는가? 어째서 이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제자가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고, 그 권위가 복음의 진실성을 보장한다고 하는가? 과연 일개 갈릴리 어부가 기품 있고 철학적인 문장을 쓸 수 있었을까? 

 

- 50~60년 전부터 학자들은 수백 편의 논문을 통해 이 같은 물음들에 갖가지 답을 제시했다. 일부는 동명이인인 에페소스 출신의 대(大) 요한이 저자인데, 후대 기독교도들이 사도 요한과 혼동했다고 설명한다. 그런가 하면 복음을 증언하는 권위는 사도 요한의 것이 저자는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다. 또 열두 제자만큼 지명도가 높지 않은 별도의 제자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저자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 더욱이 요한복음의 저자는 베드로의 권위와 가르침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를 능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베드로를 예수의 첫 제자들 중 한 사람으로 그리면서도 마가와 마태, 누가가 강조해 마지않는 베드로가 처음으로 예수를 알아보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마가를 비롯해서 많은 기독교도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이야기가 베드로가 예수의 수제자이고 교회를 창시했음을 의미한다고 여긴다. 게다가 마태는 예수가 장차 베드로가 자신의 뒤를 이어 교회가 설 '반석'이 될 것을 약속했다고 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를 베드로가 초대 사도 계승자로서 모든 교황의 영적 시조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마태복음은 명백히 마가복음 및 누가복음과 함께 로마를 기반으로 하는 베드로의 의견을 반영한다. 하지만 베드로의 대표권은 훗날 신약성경을 이루는 네 복음 모두가 인정한다(요한은 마지못해 인정하는 것이기는 해도). 문자 그대로 '보편적인'을 의미하는 가톨릭 (catholic) 교회를 자칭하는 이들 집단은 2세기 중엽 이래로 오늘날까지도 로마 가톨릭교도와 대부분의 개신교도가 동일시하는 교회의 설립자로 인정받고 있다. 

- 그러나 요한은 도마가 주장하듯 우리가 예수와 같다(또는 예수처럼 될 수 있다)는 의견은 단호하게 반박한다. 예수는 오직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요한은 '독생' 또는 '유일무이한'을 뜻하는 monogenes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다.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한 사람뿐이고, 예수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신약성경의 다른 세 복음사가보다 더 나아가 예수가 고귀한 지위(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인자)로 승격한 사람일 뿐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 창세기 1장 26절에서 가르치듯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능력이 내재되어 있음을 부정한다. 요한은 오로지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우리가 거룩한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후대 기독교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요한에게 있어 이 같은 주장이 가장 중대한 관심사이므로, 그의 예수는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처럼 윤리적, 종말론적 가르침을 제공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는 산상수훈도, 행동 규범을 가르치는 비유도, 종말에 대한 예언도 없다. 대신 예수는 '나는(I am)'으로 시작되는 말씀으로 자신이 신임을 되풀이해서 주장한다(이는 요한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길, 진리, 생명, 빛, 포도나무, 생명의 물, 생명의 떡 등 예수가 자신을 빗대어 말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의 비유다. 요한의 예수가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로지 믿음 뿐("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으로, 이어 그는 믿는 이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5:12)라고 한다. 증오와 박해에 직면할 때, 이런 강한 연대감이 믿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 요한은 자신과 다른 식으로 예수를 보는 사람들에게 오로지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설파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죄 사함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연대, 죽음을 극복할 힘이라는 크나큰 보상이 약속된다. 도마의 수수께끼 같은 가르침 대신, 요한은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니 믿음을 갖고 구원을 받으라'라는 단순한 원칙을 제공한다. 그는 또한 가나의 혼례,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만나 나눈 이야기, 예수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 물을 청한 이야기, 빌라도가 죄수로 끌려온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은 것,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한 것, '의심하는 도마',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동산지기'로 착각한 것 등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도들이 사랑하고 되풀이 이야기해 온 장면들을 추가한다.

그리고 물론 승리한 것은 요한이었다. 

 

-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다수의 의심과 불안을 비웃고 그들의 말을 믿는 행정관들을 비난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악의 괴물이라고 부르며,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며 어린아이를 죽여서 그 고기를 먹는다고 비난한다. 축제가 끝나면 우리는 근친상간을 벌이고, 뚜쟁이 개들이 불을 꺼서 우리가 수치를 모르고 육욕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어둠을 선사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런 비난을 하지만, 굳이 진실을 알아내려 수고할 필요는 없다. ... 그들은 이 세상에 기독교도가 저지를 수 없는 범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신들과 황제들, 법, 도덕, 만물의 적이라고 생각한다. 

- 이레나이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아마 강조를 위해 몇 가지 세부를 첨가해서), 마르쿠스는 성스러운 진리가 벌거벗은 여성의 형태로 볼 수도 없고 형언할 수도 없는 공간에서 내려왔다고 주장했다. 진리가 남성의 형태로 나타났더라면 아마 세상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문자와 숫자를 통해 나타난 진리는 몸이 그리스 문자 24개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그리스도 예수'라는 신비로운 이름을 말했다. 이 문자와 숫자는 마르쿠스의 영적 스승 발렌티누스의 추종자들이 따르는 유대교 전승을 반영하는 것으로, 발렌티누스는 바울에게 비밀스러운 지혜를 전수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와 유사한 전승이 그로부터 1000년 뒤 신비주의적 성향을 지닌 유대인 집단들 가운데 '카발라'라는 이름으로 꽃을 피우게 된다.

 

- 카발라는 히브리어로 '전승'을 뜻하지만, 실제로는 전승을 크게 변형시켰다. 히브리 예루살렘 대학에서 유대교 신비주의를 연구했으며 이레나이우스에 비해 마르쿠스에 훨씬 동정적이었던 게르숍 스콜렘 교수는 카발라의 길을 택하는 이들은 "교조 신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체험과 직관"을 통해 신을 알려한다고 설명한다. 카발라주의자들 역시 다른 유대인들처럼 성경을 해석하지만, 그들에게 성경은 영적 탐색의 언어다. 1000년 뒤의 카발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마르쿠스는 '어떻게 하면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이해를 초월하는 신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가?'를 물었다. 마르쿠스의 환상은 온 문자(온 인간의 언어)가 거룩한 진리의 신비적 형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같은 확신은 많은 카발라주의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 야고보 외경이나 <사도 바울의 기도문> 같은 문헌들을 쓰고 번역하고 필사한 사람들은 일부 유대교 집단에서 황홀 상태를 야기하고 환상을 부르기 위해 사용한 기술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예수의 시대에 이집트에서 살던 금욕주의적 유대교 교파 테라페우타이파는 기도와 금욕, 금식, 찬송을 엄격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환상'을 볼 준비를 했다. 또 사해문서에서도 독실한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천사들과 함께 경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도문과 의식들을 찾아볼 수 있다. 

 

- 유대교의 역사와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또한 카발라가 등장하기 약 1000년 전에 융성했던 막대한 양의 신비주의 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헤칼로트 문서라 불리는 이들 문서 중 일부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더니"(창세기 5:24) 죽지 않고 하나님에게 갔다고 전하는 에녹을 중심으로 한다. 기원전 1세기 전부터 이미 에녹은 천상의 지혜에 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모범이었다. 한편 2세기부터 6세기에 융성한 이른바 메르카바(전차) 문학에 심취한 교파들도 있었다. 이들 문서는 천군이 찬양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날개 달린 천사들이 받드는 불의 전차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는 선지자 에스겔의 환상에서 유대교 교사들과 제자들이 발견한 힌트에서 비롯된 것이다. 

 

- 그렇다면 환상은 어떻게 해서 보이며, 어떤 환상이 신이 보여준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것을 판별할 수 있는가? 이 중요하고도 난처한 문제가 바로 기독교도들이 오래전부터 영의 식별 문제라 불러온 것이다. 하나님의 감화와 악의 세력에 의한 감화, 과도한 상상력의 산물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유대교도와 이교도, 기독교도를 막론하고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이 꿈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고 믿었으나, 한편으로 꿈이 또한 소망과 바람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레나이우스는 일부 선지자와 치유자, 교사(특히 다수의 기독교도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르치는)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발견하는 한편,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탄이 작용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르쿠스를 '사탄의 사도'라고 부르며, 그가 환상을 날조해서 사람들을 속여 돈을 뜯고 성적으로 이용한다고 비난했다. 

 

- 베드로는 아마 자기가 없을 때 예수가 한 말을 들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가 우연히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에게 일부러 않은 것을 자기가 알고 있다고 밝힌다. "너희로부터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말하겠노라." 그녀는 이어 자신이 오늘 환상 속에 예수를 보았다고 한다. 그녀는 놀라서 즉시 예수에게 환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물었다. "환상을 보는 자는 어떻게 해서 보나이까 혼을 통해서 이나이까 영을 통해서 이나이까" 주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혼을 통해서도 보지 않고 영을 통해서도 보지 않으며 둘 사이에 있는 정신을 통해서 봄이라 그것이 환상을 보는 것이니라." 

 

- 환상이 마음, 즉 의식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막달라 마리아는 환상이 자기에게 보여준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 중대한 지점에 파피루스가 파손되는 바람에 많은 부분이 소실되고, <구세주의 대화>에서처럼 예수가 사후에 일어날 일을 계시하는 부분만이 남아 있다. 사후에 영혼은 "일곱 개의 분노의 힘"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인간을 죽인 자여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공간의 정복자여 너는 어디로 가느냐?"라고 물으며 도전한다. 환상을 통해, 예수는 영혼이 이 적대적인 힘을 극복할 수 있도록 답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 이렇게 말하자 막달라 마리아는 입을 다물었으니 주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신 것이 여기까지였음이라 그러나 안드레가 말을 받아 형제들에게 이르길 너희는 이 여자가 한 말에 대해 하고 싶은 대로 말하라 적어도 나는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믿지 아니하니라 그런 가르침은 명백히 이상하니라. 

그러자 안드레의 형제 베드로는 “그분께서 정말로 우리도 모르게 은밀하게 여자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이냐 우리가 모두 저 여자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그분은 우리보다 저 여자를 아끼셨다는 말이냐?"라고 한다. 

그러자 마리아가 흐느껴 울며 베드로에게 이르되 형제 베드로 무슨 생각인가 내가 내 가슴속에서 꾸며낸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주님에 대해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가 하자 레위가 나서서 베드로에게 이르되 베드로여 너는 늘 성질이 급하여 우리 적들이 그러하듯 저 여자와 겨루는구나 주님께서 저 여자를 가치 있게 하셨다면 네가 누구이기에 저 여자를 거부하는가 주님께서는 분명히 저 여자를 잘 알고 계시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보다 저 여자를 더 사랑하셨음이라 오히려 우리는 부끄러워하며 ...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자

 

- 이처럼 마리아 복음의 저자는 참된 환상을 이레나이우스와 다르게 구별한다. 이레나이우스는 마르쿠스처럼 자기가 의심하는 예언자에 대해, 베드로와 안드레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말하듯, '이상한 생각'을 하고 그것을 '꾸며냈다'라고 했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예컨대 예레미야가 바빌로니아와의 전쟁(기원전 580년경)이 이스라엘의 패배로 끝날 것이라고 예언하자, 승리를 점친 예언자들은 그가 거짓된 예언을 했다고 비난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만을 말한다고 항변하고 그들의 예언은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 그러나 1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은 '예언의 증거'에서 확신을 얻었다. 그중에는 이레나이우스의 스승인 순교자 유스티누스도 있었다. '철학자'라 불리는 그는 젊었을 때(140년경) 진리를 추구하는 학생으로서 스토아학파에서 시작해서 소요학파, 피타고라스학파, 플라톤학파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 철학 교사를 찾아다녔으나 그때마다 환멸을 느꼈다. 그는 마침내 인간의 정신은 스스로 진실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실망하며 "그렇다면 과연 교사가 필요한가? 그들에게조차 진리가 없다면 어떻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 우리가 아는 한, 이른바 사복음 정경 체계를 수립하는 데에 가장 크게 공헌한 인물은 이레나이우스였다. 그는 우선 마태복음만을 읽는 에비온파나 누가복음만을 읽는 마르키온 파처럼 하나의 복음에만 의존하는 여러 기독교 종파들을 배격했다. 하지만 여러 복음을 인용하는 이들 또한 그에 못지않게 문제였다. 어떤 기독교도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복음서를 가지고 있다고 으스댄다. ... 그러나 실상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은 모두 불경으로 가득하다." 이레나이우스는 야고보 외경이라든지 마리아 복음 같은 '외경 및 비정통적 텍스트'들의 숲을 베어버리고 네 개의 '기둥' 만을 남기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모든 진리를 담고 있는 '복음'은 이 네 '기둥', 즉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썼다고 여겨지는 사복음에 의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선택을 변호하기 위해 "이 넷 외에는 더도 덜도 있을 수 없다"며 "우주에 네 개의 계가 있고 네 개의 큰 바람"이 있듯이 교회도 "오로지 네 기둥만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 한편 선지자 에스겔이 네 생물이 받들고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사복음에 의해 받들어진다(후대 기독교도들은 이레나이우스의 선례를 따라 이 네 '생물', 즉 사자, 황소, 독수리, 사람의 얼굴을 네 복음사가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레나이우스는 사복음은 자기들이 기록하는 사건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들(그는 그중에 예수의 제자 마태와 요한이 있다고 믿었다)이 썼기 때문에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각각 베드로와 바울의 제자였던 마가와 누가는 사도들에게 직접 들은 것만을 기록했기 때문에 틀림이 없었다. 

 

- 오늘날 신약성경 연구자들 중에서 이레나이우스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복음의 저자가 실제로 누구인지는 도마복음이나 마리아 복음의 저자만큼이나 확실하지 않다. 그저 모두 예수의 제자들이 썼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레나이우스는 요한복음을 훨씬 널리 인용되던 마태복음 및 누가복음과 하나로 묶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가장 위대한 복음이라고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이레나이우스에게 요한복음은 오늘날 기독교도들이 부르는 것처럼 제4의 복음이 아니라 '으뜸가는' 복음이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예수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임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은 요한뿐이었다. 신이 '육신'이 된 그 특별한 순간에 내려진 계시는 한낱 인간에 불과한 존재들이 받은 계시들을 능가한다. 이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물론 선지자들과 사도들도 예외가 아니다.  
 

- 헤라클레온의 주석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요한복음처럼 명료한 글에 주석을 단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대체 헤라클레온 같은 이단자가 장차 정통파 기독교의 시금석이 될 복음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후에 새로 발견된 문헌들을 연구하면서 나는 그런 의문이 무의식적으로 이레나이우스의 용어와 관점을 채택하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레나이우스를 통해 기독교도들은 그가 해석하는 요한복음(나아가 다른 복음도 모두)이 유일하게 올바른 해석이며 '정경적인' 해석임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는 그가 말하는 '진리의 정경'을 내세우고 '그리스 철학자들 간에 유포된 해석'을 거부했다. 그중에는 호메로스의 시를 우화적으로 읽어 제우스와 헤라 같은 신들이 우주의 요소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일부 스토아 철학자들, 또 호메로스의 시에서 윤회 등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자들도 있었다. 발렌티누스의 제자들 때문에 놀란 이레나이우스는 신자들에게 그런 식의 접근을 경계하고 명백한 의미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만일 모호하거나 난해한 부분이 있으면 의미가 명확한 부분을 바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 이런 '허황된 해석'을 몇 가지 살펴봄으로써 요한복음이 어떻게 해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요한복음은 문장은 단순 명료해도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공관복음(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맥락에서, 가장 먼저 요한복음을 높이 평가한 초기 기독교도들조차 그것이 세 복음과 상치됨을 지적했다. 예컨대 요한복음은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과 상인들을 공격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여기에서. 요한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요한복음 2:15)라는 부분을 추가해서 보다 폭력적인 장면으로 제시한다.

 

- 그에 비해 다른 세 복음에서 이 장면은 예수의 삶 종반에 위치한다. 마태와 마가, 누가에 의하면 이 사건을 계기로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체포해서 로마 당국에 넘기기로 작정했으므로, 논리적으로도 종반에 위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집트의 뛰어난 교부(훗날 이단으로 몰렸다) 오리게네스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요한이 "비록 항상 문자 그대로의 진실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영적인 진실이다"라고 설명했다. 즉 요한이 이야기하는 것은 상징적인 진실이다. 오리게네스는 심지어 독자가 위화감을 느끼고 그 의미를 따지도록, 그리고 이 이야기들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성령이 일부러 요한복음에 그런 모순을 집어넣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발렌티누스와 그의 제자들처럼 요한이 쓴 말(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말) 뒤에 숨은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이 복음의 제목은 "진리의 복음은 아버지로부터 그분을 아는 은총을 받는 이들에게 기쁨이다"라는 첫 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은총을 통해 우리는 신과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달리한다. 이 복음을 받으면 신을 몇몇 성경 이야기에서 묘사하는 "속 좁고 잔혹하고 쉽게 노하는 존재"가 아니라, "악이 없는 존재로서 사랑과 평온이 가득하고 인자하며 전지적인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진리의 복음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숨결이며, 하나님은 처음에 숨을 불어 살아 있는 존재들의 우주를 창조하고("그분의 자식들은 그분 숨결의 조각들이요") 이어 모든 존재를 신성한 근원의 품에 다시 끌어안았다. 이 복음의 저자는 "자기 안에서 신을 발견하고 신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이들에게 그노시스, 즉 영지를 행동에 옮길 것을 촉구한다. 

구하는 이들에게 진리를 말하고 실수로 죄를 지은 이들에게 이해를 이야기하라. 

넘어질 뻔한 이들의 발에 힘을 주고 병든 이들에게 손을 뻗어라.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지친 이들에게 휴식을 주며 일어서고 싶은 이들을 일으켜 세워라.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 또 한 가지 이레나이우스가 '사악한 해석'으로 거론하는 <십자가의 윤무>를 보면, '이단들'이 복음에 자기들이 꾸며낸 것을 덧붙인다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다. 익명의 발렌티누스주의자가 쓴 <십자가의 윤무>는 예수가 배신당한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노래하며 춤추는 장면이 요한복음에서 빠졌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요한복음이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기 몸이라 하며 떡을 주고 자기 피라 하며 포도주를 주는 장면을 일부러 생략했다고 지적한다. 신자들에게 '주의 만찬'을 축하하는 법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마태와 누가, 바울에게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그날 밤 전혀 다른 일이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한다. 

예수는 ...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 (요한복음 13:3-5)

- 요한에게 이는 예수와 성체를 나누어 먹으려는 사람에게 중요한(심지어 필요한) 행위다. 베드로가 스승이 한낱 종처럼 자기 발을 씻어주는 것에 항변하자, 예수는 그에게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라고 대답하고 이어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덧붙인다(요한복음 13:7-8). 예부터 많은 기독교도들은 이 장면도 마지막 만찬처럼 의식을 거행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으로 여기고, 이 장면을 재현한다. 그리하여 부활절 전 목요일에 교황은 예수의 역할을 맡아 추기경들의 발을 씻는 의식을 거행한다. 또 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지도자는 모르몬 '장로' 들의 발을 씻어주며, 그 밖에도 다른 많은 기독교 교파들(여러 정교회 교파와 일부 침례교 및 오순절교를 비롯한 개신교 교파들)이 똑같이 한다. 

- <십자가의 윤무>를 쓴 저자는 여기에 새로운 일화를 추가해서 요한의 이야기를 크게 바꿔놓는다. <십자가의 윤무>는 2세기에 요한복음의 영향을 받은 이야기 및 전승을 모아놓은 요한행전에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요한은 예수의 생애 마지막 밤에 관해 요한복음에서 기록하는 것의 다음 장면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함께 춤추고 노래하자고 했다고 한다.  
 

붙잡히시기 전에 ...  예수께서 우리를 모두 모아놓고 이르시되 내가 저들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아버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만나러 가자 하시니 우리가 다 함께 손을 잡고 둥글게 서게 하시고 당신께서는 가운데 서셔서 너희는 나에게 아멘으로 답하라 하셨노라. 

- 제자들이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가운데, 예수가 요한복음을 상기시키는 찬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버지께 영광을 하시니 우리는 그분 주위를 돌며 아멘으로 답하고,

로고스께 영광을 은총께 영광을 하시니 아멘이라 하고,

성령께 영광을 거룩하신 이께 영광을 ... 하시니 아멘이라 하고,

아버지를 찬양하고 어둠이 거하지 않는 빛을 찬양하나니 하시니 아멘이라 하고 ...

나는 나를 보는 너희에게 빛이요 하시니 아멘이라 하고,

나는 나를 아는 너희에게 거울이요 하시니 아멘이라 하고,

나는 나를 두들기는 너희에게 문이요 하시니 아멘이라 하고,
나는 나그네인 너희에게 길이요 하시니 아멘이라 하고 ...

위에서 거울에 관한 부분은 도마복음에서 가져온 것일 수 있으나 마지막 두 구절을 비롯해서 많은 부분은 요한복음에서 따온 것이다. 즉 이 찬가를 쓴 사람은 우리가 대개 도마복음과 결부시키는 가르침을 요한복음에서 발견한 셈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에게서 그들 자신을 발견하라고 촉구한다. 

 

내가 이제 받을 고통은 너희 자신의 것이니, 아버지께서 말씀(로고스)으로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시지 않았으면 너희는 결코 너희가 받을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너희가 어떻게 고통받을지를 알면 고통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처럼 <십자가의 윤무>에서 예수는 자신이 인간이 겪는 고통의 본성을 드러내기 위해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이는 고통을 의식함으로써 그로부터 놓여날 수 있다는 패러독스(부처의 가르침에도 있는)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는 또한 제자들에게 우주적 춤을 함께 출 것을 명한다.

"춤을 추는 이는 누구나 전체에 속하니 하시니 아멘이라 하고, 춤을 추지 않는 이는 누구나 앞으로 있을 일을 알지 못하니 하시니 아멘이라 하고 ..."

 

- 요한행전을 받드는 사람들은 위와 같은 노래를 부르며 손을 잡고 윤무를 춤으로써 성체를 모시고 예수의 고통과 자기 고통의 신비를 함께 축하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그것을 똑같이 따라 하는 기독교도들이 있다. 요한행전에서 요한은 다른 제자들에게 저마다 예수를 다르게 보는 것이 "이상하지도 않고 역설적이지도 않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기대와 능력에 맞게 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한 번은 베드로와 안드레가 요한과 야고보에게 물가에서 그들을 부르는 어린아이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내 형제가 나에게 요한이여 물가에서 우리를 부르는 저 아이는 무엇을 원하는가 하고 물어 내가 무슨 아이인가 하자 그가 저기에서 우리를 부르는 아이니라 하고 대답했다. 내가 형제 야고보여 바다에서 오래 지켜보느라 눈이 잘 보이지 않는구나 저기에 서 있는 저 잘생긴 사람의 기쁨에 찬 얼굴이 보이지 아니하는가 하자 그는 형제여 내 눈에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아니한다 하면서 배에서 내려 그 의미를 알아보자고 했다. 
 

- 그 과정을 통해 처음 세례를 받을 때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났음을 고백했던 사람들은 그 의미를 새로이 이해하게 된다. 한편 끝까지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마치 마리아가 요셉과 무관하게 예수를 잉태했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신자들도 많이 있다. 빌립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하고,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처녀 수태는 예수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세례를 받음으로써 밑으로 내려오신 "동정녀", 즉 성령을 통해 "거듭난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인간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가 세례를 받고 성령을 통해 영적으로 태어난 것처럼, 우리 역시 처음에는 육체적으로 태어났다가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을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도가 되었을 때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갖게 되었다." 즉 성부와 성령을 갖게 되었다. 

 

- 빌립은 그가 "사도들과 사도의 사람들"이라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이 신비를 모르고 심지어 그에 반발하는 등,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부활 역시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무덤에서 육신으로 되살아난 특별한 사건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처녀 수태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발생했던 사건이 아니라 영적 변화를 겪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의 패턴이다. 

 

- 발렌티누스 교파는 아마 그의 말을 기꺼이 시인하고, 그것이 어째서 문제가 되느냐고 되물었을 것이다. "우리가 너와 똑같은 신앙을 갖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를 이단이라 하는가?" 그들의 해석은 그의 해석과 달랐고, 뿐만 아니라 그들 간에도 서로 다르게 해석했다. 어째서 그런 차이가 교회를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하는가? 

 

-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 보편적 교회"에 마땅히 따를 수밖에 없는 다종 다양성을 지님을 이레나이우스가 몰랐을 리 없다. 이레나이우스는 오히려 신자들에게 일부 관점과 관행의 차이를 받아들이도록 장려했다. 예컨대 그는 마태복음만을 수용하는 에비온 파나 누가복음만을 수용하는 마르키온 파처럼 오직 하나의 복음만을 수용하는 이들을 비난했다. 한편 같은 유스티누스의 제자인 타티아노스가 여러 복음을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하고자 한 데 반해, 이레나이우스는 신자들에게 명백한 차이를 보이는 네 복음을 모두 수용하고 '사중복음'으로 결합시킬 것을 권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주교 빅토리우스가 수도의 모든 기독교도가 부활절을 한 날에 축하하게 했을 때에는 로마로 가서 그리스어를 쓰는 기독교도들을 고려해 달라고 설득했다. 이레나이우스 자신처럼 소아시아에서 이주한 그들은 전통적으로 부활절을 다른 날에 축하했다(오늘날도 그리스, 러시아, 에티오피아 세르비아, 콥트 정교회는 다른 날에 부활절을 축하한다). 

 

- 이런 물음에 대답하려면 우리는 이레나이우스가 신학 논쟁에 가담한 신학적 성향의 철학자가 아니라, 가혹한 박해에서 살아남은 갈리아의 기독교도들을 뜻하지 않게 이끌게 된 젊은이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레나이우스는 그의 정신적 아버지라 할 폴리카르포스 주교가 도피 중이던 지방 영지에서 체포되고 원형경기장으로 끌려 나와 군중이 욕설을 퍼붓는 가운데 벌거벗겨져 산 채로 화형을 당한 일을 잊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20여 년 후(177년경), 폴리카르포스의 명을 받아 선교 활동을 위해 간 갈리아에서도 그는 기독교도들이 당하는 폭력을 목격했다. 많은 기독교도들이 린치를 당하고,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교살되었다. <리옹과 비엔 교회의 편지 The Letters of the Churches of Lyons and Vienne>에 따르면,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 신앙을 포기하기를 거부한 30~50명은 사람들의 볼거리로서 맹수들과 검투사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 고문과 투옥 생활 끝에 연로했던 포티누스 주교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당시 아직 30대였을 이레나이우스는 남은 사람들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 뿔뿔이 흩어져버린 신자들을 하나로 모으고 교회를 폴리카르포스가 구상한 범세계 네트워크로 통합시킴으로써 신자들을 보호하려 한 이레나이우스에게 심각한 분열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모두 방해 요소였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심각한 분열을 불러일으키는가? 이레나이우스는 아마 '이단'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가 '이단'을 규정하는 방식의 영향으로,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특정 관념과 의견을 정통, 정설('바르게 생각하기'를 뜻하는 orthodoxy)이라 하고 그와 대치되는 관념을 이설('다르게 생각하기'를 뜻하는 heterodoxy)이라 여겨왔다. 그러나 단순히 어떤 관념의 철학적, 신학적 내용만으로 정설과 이설을 가리는 전통적 구분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이레나이우스가 특히 우려했던 것은 이들 '영적 교사'들이 제2의 세례로 신자들을 교회 내의 저마다 다른 집단에 입문하게 함으로써 교회의 결속을 위협한다는 사실이었다. 

 

- 빌립복음의 저자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진실을 알게 된 사람들을 구분함으로써 교회를 암묵적으로 분열시켰다. 그에 비해 이레나이우스는 발렌티누스 교파가 교회를 공공연히 분열시킨다고 확신했다. 그가 가장 문제삼은 것은 그들이 한 말이 아니라 그들이 한 행동, 그중에서도 그들이 '속량 의식(그 형태는 다양했다)'을 통해 신자들에게 제2의 세례를 준다는 점이었다.  

- 하지만 이레나이우스가 가장 크게 우려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같은 교사들이 모든 기독교도가 공통적으로 받는 세례가 사실은 믿음의 삶에 있어 제1단계에 불과하다고 한다는 점이었다. 그런 교사들은 세례 요한이 회개한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듯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들은 '요한의 세례'로 죄를 정화받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마가 및 마태, 누가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예언하며(마가복음 1:7-8, 마태복음 3:11 누가복음 3:16), 예수는 별도의 "내가 받는 세례'를 언급한다(마가복음 10:38). 이들 교사에 따르면, 이는 영적인 길을 나아가는 사람이 제2의 세례를 받을 것임을 의미한다. 

- 그들은 나아가 이 고차원의 세례가 예비자와 신의 관계에 큰 변화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최초의 세례에서 신자들은 그들이 천지를 창조한 조물주로서 경배하고 입법자이자 심판자로서 경외하는 하나님을 주(主)로 받들기로 서약했다. 그러나 그 같은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면 하나님은 아버지요 어머니, 만물의 근원, 즉 모든 이미지를 초월하는 유일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프톨레마이오스는 스스로 하나님의 종(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노예)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자식임을 알라고 한다. 예속에서 풀려나 바울이 말하듯 하나님의 자식이 후계자가 됨을 나타내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는 제2의 세례를 노예가 자유의 신분이 되는 법적 과정에 빗대어 '속량'이라 한다.  
  

- 지금까지 살펴본 '사악한 해석'의 예들을 돌이켜보면, 비록 그 시선은 적대적이어도 이레나이우스가 그들을 정확히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진리의 복음이나 십자가의 윤무, 요한 외경, 빌립복음 같은 혁신적인 글을 쓰고 받들던 사람들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대다수 신자들의 믿음을 암묵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발렌티누스는 신을 속 좁고 시기심 많고 화를 잘 내는 존재로 그리는 사람들과 자애와 연민을 가진 아버지로 이해하는 '은총을 받은 사람'들을 대비한다. 여러 학자들이 발렌티누스 교파의 세례 의식을 위해 쓰였을 것이라고 믿는 진리의 복음에 따르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식임을 알게 되는 사람은 또한 서로를 "참된 형제"로서 인식하게 되고 그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부어지며 그들 가운데 아버지가 완전히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한편 '십자가의 윤무'에 참가한 사람들은 원을 그리며 춤추고 예수 역을 맡은 사람의 말에 '아멘'이라 답하면서 예수와의 새로운 관계를 축하한다. 예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말하는 나에게서 너희 자신을 보고, 내가 하는 일을 본 다음에는 내 신비에 대해 입을 다물라. 너희는 춤을 추며 내가 하는 일을 생각하라. 내가 이제 겪을 인간의 고난은 너희 자신의 것이니 ...  

 

- 이레나이우스는 또한 "히브리어를 되풀이해서 읊는" 사람들도 있다면서 "Basema, Chamosse, Baonara, Mistadia, Ruada, Kousta, Babaphor, Kalacheit" 등 하나님의 비밀 이름(사실은 히브리어가 아니다)을 기록한다.

 

- 의식이 어떤 형태를 띠든 예비자는 대개 일련의 질문들에 답해야 했다. 세례 및 혼례 성사에서 제의적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뜻과 서약을 입증하듯("너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느냐?", "너는 이 남자(여자)를 남편(아내)으로 맞아들이겠느냐?"), 속량 의식에서 사람들은 '너는 누구냐?', '너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느냐?' 같은 질문을 받았다. 비교(秘敎)를 포함해서 많은 종교 집단들이 입문자에게 하는 일정한 질문들(국경 초소에서 여행자들에게 물을 법한)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도마복음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 같은 질문에 답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본 바 있다. 도마 파는 세례 때나 제2의 세례에서 이 같은 질문들을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저들이 너희는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거든 우리는 빛에서 왔노라 빛이 (처음) 생겨난 곳에서 ... 왔노라고 대답하고 저들이 너희는 누구냐고 묻거든 우리는 (빛의) 자식들이요 살아 계신 아버지의 선택받은 이들이라고 하고 저들이 너희 안에 계시는 아버지의 징표가 무엇이냐고 묻거든 동(動)과 정(靜)이라고 하라.  

 

- 사람들은 이 같은 질문에 적절하게 답함으로써, 자신의 영적 실체를 알고 있으며 '살아 계신 아버지', 또 그들 자신과 마찬가지로 빛에서 온 예수와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이레나이우스에 따르면 속량 의식의 형태는 각기 달라도 영적 재생의 체험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은 대부분의 영적 교사에게 공통되는 특징이었다. "그들은 완전한 영지를 받은 사람은 만물을 지배하는 힘 안에서 새로이 태어날 필요가 있다고 한다."  

 

- 그렇다면 이레나이우스는 어째서 요한복음을 보다 널리 수용되던 마태복음 및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하나로 묶고 그것이 사중복음의 없어서는 안 될 일부라고 주장했는가? 어째서 요한복음을 후대 기독교도들처럼 제4의 복음이 아니라 '교회의 복음'을 구성하는 으뜸가는 기둥으로 삼았는가? 그는 요한이, 오직 요한만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태생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 같은 고귀한 지위를 부여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유일무이하고 강력하며 영광된 태생을 선언하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라 하고 또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복음 1:3)라고 한다. 

 

- 이레나이우스에 따르면, 발렌티누스의 제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요한복음의 이 부분을 읽고 하나님과 말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에서 흘러내려오는 거룩한 에너지의 물결로 구상했다. 즉 위에 있는 무한한 근원이 거룩한 말씀이라는 축소된 형태로 나타나며, 거룩한 말씀은 또 사람 예수라는 보다 한정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 이레나이우스의 후계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하나님 = 말씀 =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순한 등식을 수립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기독교도들이 이 수학적이기까지 한 등식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여긴다는 사실은 그가 거 둔 성공을 여실히 입증한다. 이레나이우스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주만물을 창조한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드러낸다고 거듭 말함으로써 이 점을 강조한다. 이 대담한 해석이 사실상 정통파 신앙을 규정하게 되므로, 오늘날 요한복음을 그리스어 원본을 제외한 어떤 언어로 읽어도 그의 결론, 즉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람이 하나님의 권화"라는 주장은 번역에 힘입어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 헤라클레온은 선지자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요한에게도 물은 '영적 양분'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여자는 자신이 영적으로 목마름을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어떻게 해소할지 몰라서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러 온 것이다. 이때 '야곱의 우물'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종래의 방식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갈증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가 그녀 안에 존재하는 샘물을 알려주겠다고 했을 때 여자는 즉시 그의 말을 이해하고 "그런 물을 내게 주사"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 헤라클레온은 그에 대답하는 예수의 말("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이 엉뚱하다고 지적한다. 그녀의 요청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그녀가 결혼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어리둥절한 여자는 처음에는 그의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결혼을 하지 않고 여섯 남자와 동거해 왔음을 시인한다. 헤라클레온에 따르면, 예수는 그녀가 "신을 모르고 자기 삶에서 필요한 것을 몰랐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살았음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함으로써 그는 그녀에게 이미 거룩한 '동반자'가 있음을, 즉 그녀가 아직 깨닫지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르쳐준다. 예수는 여자에게 이미 자기 안에 갖고 있는 자질로 영적 상대자, 즉 '충만(그리스어 pleroma)'을 발견할 것을 명한다. 이것이 자기 존재의 본질적 일부임을 깨닫게 되면 그녀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거룩한 '혼례'로서 축하할 수 있다.   

  

- 일부 학자들은 이 같은 신학 논쟁이 본질적으로 정치적 성격의 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역사학자 에릭 페터슨은 많은 기독교도들이 성부를 황제와 성자를 주교와 성령을 '백성'과 연관시켰음을 지적하고, 성자가 성부와 완전히 동등하다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은 주교와 황제의 권위가 동등함을 암시한다고 한다. 

 

- 어리석음, 감상(感傷), 망상, 분노, 잔학성이 하나님의 진리로 위장된 것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대인들이 말하는 '영의 식별' 문제에 간단한 답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 것이다. 정통적 교리는 우리의 분별 능력을 불신하고 대신 분별해 주겠다고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기만에 능한가를 생각하면, 우리는 이에 대해 어느 정도 교회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작업을 면하고 싶은 마음에 전통적 가르침을 기꺼이 고맙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간단한 답이 없다고 해서 문제를 회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또한 종교적 권위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위험, 끔찍한 해악을 목격한 바 있다. 우리 대부분은 빠르고 늦고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삶이 중대한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스스로 길을 만들어야 함을 알고 있다. 내가 우리의 다양하고 풍부한 종교 전통(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공동체들)에서 사랑하게 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룩한 영적 발견의 증거다. 그런 증거를 통해 우리의 종교 전통은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말처럼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라고 힘을 북돋아준다. 

 

 


 

<도마복음>

 


이는 살아계신 예수께서 이르시고 디두모(쌍둥이) 유다 도마가 기록한 비밀의 말씀이라.

1. 그리고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 말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니라.

2. 예수께서 이르시되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하기를 그치지 말라 찾으면 마음이 어지러울 것이요 마음이 어지러우면 놀랄 것이고 만물을 지배할 것이니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래도록 산 사람은 난지 일곱 날 된 어린아이에게 삶의 장소를 묻기를 주저하지 아니할 것이니 그 사람은 살 것이니라 처음 중에 많은 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며 유일한 것이 될 것이니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눈앞에 있는 것을 알라 그리하면 신비가 너희에게 드러날 것이니 감추어진 것은 모두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6. 제자들이 그분께 여쭈되 금식을 하오리까 기도는 어떻게 하오리까 자선을 해야 하오리까 어떤 음식을 먹으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거짓말을 하지 말고 너희가 증오하는 일을 하지 말라 모든 일이 하늘 앞에 드러남이라 감추어진 것은 모두 드러나고 덮여 있는 것은 모두 벗겨지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이 먹는 사자는 복이 있나니 사자가 사람이 될 것이며 사자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았나니 사자가 사람이 될 것이니라.

8. 그리고 그분께서 이르시되 사람은 바다에 그물을 던져 작은 물고기로 그득한 그물을 끌어올리는 지혜로운 어부와 같으니 그가 그중에서 훌륭한 큰 고기를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작은 물고기를 전부 도로 바다에 던져버리고 큰 고기를 두었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모두 들으라 하시니라.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하늘나라는 지나갈 것이요 그 위에 있는 것도 지나갈 것이라 죽은 자들은 살아있지 아니하고 산자들은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죽은 것을 먹는 동안에 너희가 그것을 살아 있게 했느니라 너희가 빛 속에 있을 때 너희는 무엇을 하겠느냐 너희가 하나 된 날에 너희는 둘이 되었으나 너희가 둘이 될 때 너희는 무엇을 하겠느냐. 

1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를 누구와 같은지 빗대어 말해보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의로운 사자 같으시나이다 하고 마태가 대답하되 지혜로운 철학자 같으시나이다 하고 도마가 대답하되 선생님 제 입은 선생님께서 누구와 같으신지 말할 수 없나이다 하매 이에 예수께서 나는 네 스승이 아니다 너는 내가 나누어준 샘물을 마시고 취했다 하시고 그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서 세 가지 말씀을 하시거늘 도마가 돌아오니 그들이 예수께서 무엇이라 하셨느냐 물으나 도마가 대답하매 내가 너희에게 예수께서 이르신 것 가운데 하나라도 말하면 너희는 돌을 집어 나에게 던질 것이며 돌에서 불이 나와 너희를 삼킬 것이니라.

1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금식하면 너희 자신에게 죄를 부를 것이고 기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고 자선을 하면 영혼이 해를 입을 것이라 어느 나라에 가서 여러 곳을 다닐 때 사람들이 너희를 대접하면 그들이 주는 음식을 먹고 그들 가운데 병자의 병을 고쳐주어라 너희를 더럽히는 것은 너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너희 입에서 나오는 것이니라.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들은 아마도 내가 세상에 화평 주러 왔다고 생각할 것이니 그들은 내가 지상에 불화를, 불과 칼과 전쟁을 전하러 왔음을 알지 못하느니라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으면 셋은 둘과 둘은 셋과 적대할 것이며 아버지는 아들과 아들은 아버지와 적대할 것이고 그들은 홀로 설 것이니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어떤 눈도 보지 못하고 어떤 귀도 듣지 못하고 어떤 손도 만지지 못하고 어떤 마음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주리라.

 

18. 제자들이 예수께 여쭈되 끝에 대해 말씀해 주시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이미 시작을 발견해서 끝을 구하느냐 시작이 있는 곳에 끝이 있을지니 시작에 자리한 사람은 복이 있노라 그는 끝을 알고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니라.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너희가 내 제자가 되어 내 말을 들으면 이 돌들이 너희를 섬기리라 천국에 너희를 위해 나무 다섯 그루가 있어 여름도 겨울도 변하지 아니하며 잎은 떨어지지 아니하니 그들을 아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니라.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선택하리니 천 명에서 하나 만 명에서 둘이며 그들은 모두 하나로서 서리라.

24. 제자들이 여쭈되 당신께서 계신 곳을 보여주시옵소서 저희가 그곳을 찾아야 하나이다 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모두 들으라 각 빛의 사람 안에는 빛이 있으며 그 빛이 온 우주를 밝히니 그 빛이 빛나지 아니하면 있는 것은 어둠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형제를 네 영혼처럼 사랑하고 네 눈동자처럼 보호하라.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형제의 눈에 든 티는 보면서 너희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하니라 너희가 너희 눈 속에서 들보를 꺼내야 비로소 너희 눈이 밝아져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꺼낼 수 있으리라.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세상 한가운데 서서 육신으로 저들에게 나타났으나 모두 술에 취해 있고 목마른 자가 아무도 없었더라 내 영혼이 인간의 자식들을 생각하고 괴로웠으니 저들은 마음이 눈이 멀어 보지 못하니라 저들은 빈 몸으로 세상에 와 빈 몸으로 세상을 떠나고자 하니라 지금은 저들이 취해 있으니 포도주를 떨쳐버릴 때 비로소 저들이 회개하리라.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육신이 영으로 인해 생겼다면 경이로운 일이나 영이 육신으로 인해 생겼다면 경이 중의 경이니라 그러나 나는 이 풍요가 이 곤궁 속에 거하게 된 것이 경이로우니라.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세 신이 있으면 그들은 거룩하며 둘이나 하나가 있으면 나는 그것과 함께 있느니라.

31. 예수께서 이르시되 고향에서 환영받는 선지자는 없으며 아는 이의 병을 고치는 의사는 없느니라.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두 사람 모두 구멍에 떨어지리라.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36.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침부터 밤까지 밤부터 아침까지 무엇을 입을지 걱정하지 말라.

37. 제자들이 여쭈 저희에게 언제 나타나시며 저희가 언제 뵈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니 너희가 수치를 느끼지 아니하고 옷을 벗고 벗은 옷을 어린아이들처럼 발로 밟을 수 있으면 그때 너희는 살아 계신 분의 아들을 볼 것이며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러 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듣고자 했으며 그것을 너희에게 말해줄 사람은 달리 없으니 너희가 나를 원하나 찾지 못할 날이 올 것이니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지식의 열쇠를 가져다 숨겨두었으니 그들은 들어가지 못했고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할지니라.
 

 

    

 

더보기

 

-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신자들은 세례를 '계명(啓明)'이라 했는데, 왜냐하면 "세례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이해의 빛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낡은 옷을 벗고, 목욕하고, 새 옷을 입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는 것 같은 이런 단순한 일상적인 행동은 매우 강력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 나는 가끔씩 예배에 참석하면서 그 힘을 새롭게 경험하게 되었다. 개신교도로서 성장한 나는 의식을 겉치레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를 통해 다양한 문화와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단일한 공동체로 통합된다는 것, 그들의 에너지가 새로이 재생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행위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물음에 대답하기란 쉽지 않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모든 '초기 기독교도들'에게 공통되는 단 하나의 명확한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1세기의 증거(그중 대다수는 신약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를 보면 그런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각 집단마다 세례를 다르게 해석했으며, 사람들은 함께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주의 만찬', 즉 성찬을 기념하면서도 대개 거기에서 단일한 의미를 찾지 못했다.

 

- 예컨대 <12 사도의 가르침>을 보면, 일부 초기 집단이 스스로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유대인과 구분되는 '기독교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에게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예수를 하나님의 율법 토라의 해석자로 경배하는 유대인들이었다.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및 누가복음보다 10여 년 앞서 시리아에서 쓰여진 이 문헌은 그리스어로 '가르침'을 뜻하는 '디다케(Didache)' 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하나님의 율법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이른바 황금률의 '부정적인' 버전을 제시한다. "삶의 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너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다른 사람이 너에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라." 그 밖에도 디다케에는 약 10여 년 후에 마태와 누가 또한 예수의 말씀으로서 전할 말씀들이 인용된다. 

 

너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

너를 증오하는 자들을 사랑하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도 내밀어라.

누구든지 네게 청하는 자에게는 거절하지 말고 주어라.

다만 저자는 신약성경에는 없는 신중한 조언을 덧붙인다.

"누구에게 줄 것인지를 알 때까지 너의 돈이 손 안에서 땀 흘리게 하라."

 

- 디다케는 이처럼 십계명과 예수의 산상수훈을 조합해서 '삶의 길'이 요구하는 바를 정립한다. 저자는 또한 이를 확대해서 미성년자(특히 어린 남자 노예들이 많았다)와의 성관계, 낙태, 신생아 살해 등 여러 신앙심 깊은 유대인들이 이교도들이 날마다 저지른다고 여기는 죄악을 금한다. 

 

- 너희는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마라. 어린 소년들과 성교하지 말고 ... 주술을 쓰지 마라. 낙태하지 말고, 갓난아기를 죽이지 마라. ... 궁핍한 자들을 내쫓지 마라.

 

- '죽음의 길', 특히 "가난한 자들을 내쫓고 고통받는 자들을 억압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부당한 판결을 내리는 '부자들의 변호인'의 길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한 다음, 이 익명의 저자는 마태복음의 예수처럼 '완벽' 해질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달리 디다케는 완벽함이 "주님의 멍에를 온전히 짊어지는 것", 즉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만일 완벽해질 수 없다면 능력껏 하라는 보다 실질적인 조언을 덧붙인다.

 

 -기도는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원하는 말로 끝맺는다. "은총이여 오소서, 이 세계에 종말을 내려주소서 ... Maran atha! (그리스도여 오소서!) 아멘." (오늘날까지도 일부 기독교도들은 이 고대 아람어 구절을 쓴다.) 드레이퍼의 분석에 따르면, 이들 유대인은 예수를 '하나님의 종'으로 숭배하고 그의 강림이 세상의 종말에 이스라엘이 구제될 것을 나타낸다고 믿는다. 

 

- 그러나 테르툴리아누스의 비꼼도 기독교의 '신비 의식'이 입문자에게 사람의 살을 먹게 한다는(비록 상징적인 행위에 불과하다고 해도) 충격적인 사실을 지우지는 못한다. 포도주를 사람의 피로서 마시는 행위는 이교도들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테지만, 코셰르('정결한') 자체가 음식에서 피를 남김없이 뺌을 의미하는 독실한 유대인들에게는 특히 혐오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 성체는 당대의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어쩌면 전형적인 고대 신비 의식으로 인식되었을지도 모른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이교도들이 성체를 업신여기고 기독교도들이 이른바 비교(秘敎)에서 매일 벌이는 괴이한 의식을 모방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유스티누스는 '마귀들'(그리스와 로마, 이집트, 소아시아의 신들)을 섬기는 사원을 관장하는 사제들이 세례와 유사한 '씻기' 의식을 거행했음을 인정했다. 또 페르시아의 신 미트라와 그리스의 신 디오니소스를 받드는 사제들이 예수와 유사하게 그들 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유스티누스는 마귀들이 '인간을 기만하고 유혹해서' 기독교가 비교와 다를 바 없다고 믿게끔 하기 위해 기독교 의식을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4세기부터 기독교가 예수의 탄생을 태양신 미트라가 탄생한 12월 25일(이 무렵, 동지를 지나면서 낮이 길어지고 힘을 잃었던 태양이 새로이 소생한다)에 축하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유스티누스의 우려는 더욱 커졌을 것이다.

 

- 예수가 '유월절 양이 되었다'는 믿음에 의해, 요한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정오)"(요한복음 19:14. 유월절 양은 금요일에 준비하는 것이 관례였다)에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고 고문을 당한 뒤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한다.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예수의 죽음은 세부 하나하나가 모두 예수가 속죄양이 되었다는 확신을 극적으로 전달한다. 그리하여 예수가 제물로 바쳐지는 유월절 양처럼 유월절 첫날 저녁에 해가 지기 전에 죽었음을 강조하고자 로마 군인이 예수의 옆구리에 창을 찔러 확실하게 숨을 끊었다고 주장한다. 그 순간 옆구리에서 "피와 물"(요한복음 19:34)이 나오는데, 이는 예수의 희생이 그를 따르는 이들이 '인자의 피'로서 마시게 될 물 섞은 포도주를 제공함을 보여준다. 요한은 군인들이 예수가 죽은 것을 알고 그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고 덧붙인 다음, 출애굽기에서 유월절 양을 준비할 때 뼈를 꺾지 말라고 한 대목을 인용한다. 이 같은 지시를 예언으로 여기고, 그는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9:36)라고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한다. 마지막 만찬 자체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지만, 요한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을 먹고 자신의 피를 마시라고 했다고 전하며, 예수의 여러 제자들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 요한복음이 옹호하는 입장과 동시에 반대하는 입장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요한은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요한복음 20:31) 하고자 복음을 기록한다고 단언한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요한이 반대하는 것 중에는 하나님의 빛이 예수 뿐 아니라 모든 사람(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안에서 발한다는 도마복음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 도마복음은 요한복음처럼 예수를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이 허락한 자기 자신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자 하라고 권한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에 통합된 교회의 토대가 된 것은 요한복음이지, 각 개인이 저마다 하나님을 찾을 것을 강조하는 도마복음이 아니었다. 

 

- 우리는 이들 문헌에서 기독교 내에 다양한 집단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후대의 '공인' 된 기독교 역사에 의해 효과적으로 은폐된 탓에, 우리는 하버드 대학원에 와서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대체 복음'들은 누가 언제 썼는가? 이들은 우리에게 친숙한 신약성경의 사복음 및 다른 문헌들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어떻게 다른가?

 

- 나그함마디 문서를 통해 우리가 받은 도전은 지적일 뿐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도 했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당시 나는 그 같은 비밀문서를 "광기의 나락과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이라고 공격한 리옹 주교 이레나이우스(180년경) 등 교부들의 저술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으므로 최근에 발견된 이들 문헌은 왜곡과 허위로 가득할 뿐, 별 가치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뜻밖에도 영적으로 강력한 힘을 지닌 문서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컨대 맥레이 교수가 번역한 도마복음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이끌어내면 너희가 이끌어내는 것이 너희를 구할 것이요,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이끌어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이끌어내지 아니하는 것이 너희를 멸할 것이니라." 이 말씀이 갖는 힘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을지 가르쳐주는 대신,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을 요구한다는 데에 있다. 나는 충격과 함께 이 같은 시각이 얼마나 '마땅한지' 깨달았다.

 

-  '영지주의자'가 '아는' 사람, 즉 통찰의 체험을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한, 이들 문서 중 다수는 '영지주의적'이라고 묘사될 수 있다. 그러나 교부들은 대개 이 말을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소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마이클 윌리엄스는 '영지주의'라는 용어를 그만 써야 한다고 하고, 캐런 킹은 그 말이 갖는 여러 함의를 보여준다. 

 

- 나는 또한 다년간의 연구를 통해 요한복음이 매우 단순하고 호소력 있는 문장으로 쓰여 있기는 해도 그 의미는 결코 명백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요한복음을 읽은 첫 세대 사람들 (90~130년경)마저 요한복음이 참된 복음인지, 신약성경에 포함되어야 하는지를 두고 의견 대립을 보였다. 초기 기독교도들 중에서 요한복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로고스 복음', 즉 거룩한 말씀 혹은 이성 (그리스어 logos에서 인용)의 복음으로 받들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이성적(alogos)'이라고 조롱했다. 반면 요한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요한이 하는 이야기가 마태와 마가, 누가와 상당 부분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실제로 요한복음을 나머지 세 복음과 비교한 결과, 단순한 표현상의 차이를 넘는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또한 성전 당국이 이 사건이 있은 직후에 예수를 체포했다고 한다. 반면 요한복음은 이 중대한 행동을 서두에 넣어서 예수의 사명이 하나님의 경배를 정화하고 새롭게 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또 예수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요한복음 2:15)라는 세부를 첨가해서 과격함을 더한다. 다른 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이 행동이 어떤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예수가 체포되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가 체포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요한은 마지막에 다른 복음에는 없는 놀라운 이야기를 삽입하고 예수가 친구인 나사로가 죽자 그를 되살렸다고 한다. 이에 놀란 유대당국이 예수를 죽이기로 했고, 대제사장들은 심지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했다. 요한은 성전의 정화 이야기처럼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에 보다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 이렇듯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들과 이야기를 다르게 전하지만, 3세기 이집트에서 살았던 뛰어난 교사, 요한복음을 처음 옹호한 사람 중 한 명인 오리게네스는 요한이 "비록 항상 문자 그대로의 진실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영적인 진실이다"라고 주장했다. 오리게네스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뛰어난 건축물이 그러하듯 겉은 단순하지만 그 실체는 장대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냈다고 칭송한다.  

 

- 그러나 다른 복음들 역시 예수가 신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컨대 마태와 마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가 실질적으로(유전적으로) 하나님과 같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기독교 전통 안에서 성장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도 모든 복음이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혹은 같은 테마를 다르게 전달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이 유사한 관점을 공유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들 복음을 공관(문자 그대로 '함께 보는' )복음이라고 한다. 대학원에 와서 이들 복음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면서 나는 비로소 예수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이라는 요한의 주장이 얼마나 파격적인지를 깨달았다. 

 

- 오늘날의 기독교도들은 마가와 다른 복음사가들이 사용하는 '하나님의 아들', '구주' 등의 호칭을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여기지만, 사실 마가의 시대에 이들은 인간의 역할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1500년 뒤에 이들 호칭을 영어로 옮긴 기독교도들은 그것들이 예수의 독특한 신성을 나타낸다고 믿고 대문자를 사용했다(신을 말할 때 첫 문자에 대문자를 쓰는 영어의 특징은 그리스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가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예수를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며, 이는 그가 마가의 주장처럼 성령의 권능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릴 왕이라 해도 변함이 없었다. 

 

- 도마복음은 누가와 마태, 요한을 따르던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아마도 1세기에 번성했던 집단일 '도마 교파'가 받들던 가르침을 담고 있다. 1940년대에 처음 도마복음을 읽은 학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도 나오는 예수의 말씀도 다수 있지만, 동시에 명백히 공관복음과는 다른 전승에 기인하는 말씀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마복음이 어디에서 쓰여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여러 학자들은 시리아와 연관된 이름들을 근거로 시리아에서 쓰여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리아어로 쓰여졌을 것이라 여겨지는 도마행전(200년경)에 따르면, 도마는 인도에서 전도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인도에는 지금도 도마를 교조로 모시는 도마 교파가 남아 있다.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도마는 본래 이름이 아니라 아람어(예수가 썼을)로 '쌍둥이'를 의미한다. 헬무트 쾨스터 교수가 지적하듯, 도마복음은 아람어 별명으로 불리는 그의 이름이 유다였다고 설명한다(단 그를 숭배하는 이들은 '가롯 유다'와는 다른 인물이라고 반드시 덧붙인다). 또한 이 제자가 도마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도마복음과 요한복음 모두 '도마'를 그리스어로 옮겨서 그가 '디두모('쌍둥이'를 뜻하는 그리스어)'라 불렸다고 주장한다. 

 

- 요한은 분명 텍스트의 세세한 내용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마복음의 내용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 및 누가복음과 상이한 요한복음의 가르침 중에는 도마복음과 흡사한 부분이 많다. 실제로 두 복음을 비교한 학자들은 가장 먼저 그들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예를 들어 요한과 도마 모두 독자가 마가를 비롯한 다른 복음들이 전하는 기본적인 이야기를 안다고 가정하면서, 자신의 복음을 통해 예수의 은밀한 가르침을 전한다고 주장한다. 요한은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날 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거의 다섯 장씩이나 되는 가르침을 중간에 삽입한다. 그의 복음에만 등장하는 이른바 고별 설교(13~18장)는 제자들과 예수가 주고받은 대화와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마복음 또한 "살아 계신 예수"가 한 "비밀의 말씀"을 전한다고 주장하고 "디두모 유다 도마"가 이를 기록했다고 덧붙인다. 

-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은 예수가 은밀히 제자들에게 주었다는 가르침의 내용도 유사하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이 예수가 다가오는 종말을 경고했다고 하는 데 반해,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은 그가 대신 시작(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을 강조했다고 하고, 예수를 태초에 생긴 거룩한 빛이라 한다. 도마복음과 요한복음 모두 이 태초의 빛을 통해 예수가 우주만물과 이어진다고 역설한다. 요한복음이 말하듯, "만물이 그(로고스, 즉 빛)로 말미암아 지은 바(되었기)"(요한복음 1:3) 때문이다. 쾨스터 교수는 이 같은 세부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두 저자가 동일한 자료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마가와 마태, 누가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세상에 내려온 사람인 반면, 요한과 도마에게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빛이다.

 

- 두 복음은 지상에서의 신의 존재를 서로 보완하는 방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지만, 대신 대립적인 방향으로 해석한다. 요한은 예수만이 거룩한 빛을 구현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빛이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한다는 도마의 주장을 반박한다. 물론 요한의 의견이 우세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요한복음이 다른 세 복음과 함께 신약성경에 편입된 후, 요한이 제시하는 예수의 이미지가 주도권을 잡더니 심지어 '기독교의 가르침'을 정의하게 되었다. 신약성경의 '사중복음'을 옹호하는 기독교도들은 도마복음 '비밀스럽고 정당치 않은 여러 다른 문헌들'과 더불어 같은 가르침을 공격하고 신자들에게 그런 가르침을 이단으로 배격하기를 요구했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 전통의 역사에서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 요한복음(그리고 도마복음)이 얼마나 파격적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마가복음과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 예수가 어떻게 서술되는지를 살펴보자. 셋 중에 가장 먼저, 즉 예수의 사후 약 40년 뒤에 쓰여진 (70년경) 마가복음은 예수가 누구인가가 중심적인 수수께끼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정체의 비밀을 논하고 발견했다고 전한다. 

 

- 이어서 마가는 베드로가 예수를 신이 보낸 메시아, 문자 그대로 '기름 부음을 받은 이(즉 장차 이스라엘 왕이 될 사람)'라 하면서도 앞으로 있을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가 자신이 고난을 겪고 죽어야 한다고 설명하자, 베드로는 충격을 받고 항변한다. 그는 '기름 부음을 받은 이’가 예루살렘에서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죽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에서 마가는 예수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외치고 마지막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른 뒤 죽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로마군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가복음 15:39)라고 단언한다. 백부장 같은 비유대인에게 '하나님의 아들'은 신적 존재를 나타낼지 몰라도, 마가 같은 예수의 유대인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처럼 이스라엘의 인간 왕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대관식에서 합창대가 성가를 부르며 왕이 왕관을 쓰는 순간신의 대리인, 신의 사람 '아들'이 된다고 선언하는 가운데, 왕은 신의 총애를 뜻하는 기름 부음을 받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마가복음의 첫머리는 신이 예수를 미래의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마가는 그리스어로 썼으므로, 히브리어 '메시아'를 그리스어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이')'로 옮겼고, 이것이 훗날 영어로 옮겨지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 

- 한편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을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구약성경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개 단순히 '사람'을 의미한다(히브리어에서 ben adam은 '아담의 아들'을 뜻한다). 예컨대 여호와는 선지자 에스겔을 거듭 '인자'라고 부르는데, 이는 종종 불사의 생명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예수가 자신을 '인자'라 할 때, 그도 역시 단순히 인간이라는 뜻으로 그 말을 쓰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잘 알던 당대 사람들은 또한 '인자'를 선지자 다니엘이 본 환상에서 하나님의 왕좌 앞에 나타나 권능을 받은 신비로운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인식했을 수 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 7:13–14) 

마가복음에서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묻자 예수는 "내가 그니라 인자가 ...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라고 대답한다(마가복음 14:61-62). 이로써 마가의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임을 주장할 뿐 아니라, 다니엘의 비전을 인용해서 자신이 (혹은 어쩌면 훗날 나타날 어떤 다른 사람이) 다니엘이 환상에서 본 '인자' 임을 암시한다. 마태와 누가는 마가를 좇아 예수를 미래의 왕(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으로도, 또 거룩한 권능을 받은 사람('인자')으로도 묘사한다. 

- 그러나 이런 호칭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나사렛 예수가 독특한(심지어 초자연적이기까지 한) 지위를 지닌 인물이라는 확신을 표현하기 위해 전통적 표현을 빌렸을 뿐이다. 그런데 누가는 예수가 죽은 뒤에 비로소 신이 유례없는 은총을 베풀어 그를 부활시켰고, 그럼으로써 그를 '승격'시켜 메시아일 뿐 아니라 '주(主)'이기도 하게 했다고 시사한다. '주'는 본래 유대교 전통에서 철저하게 여호와에게만 사용되는 이름이다. 마가복음보다 10~20년 뒤에 누가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대담하게도 모든 인간들 중에 오로지 예수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럼으로써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사도행전 2:36) 했음을 증명한다고 선언한다.

 

- 반면 누가복음보다 10여 년 뒤에 쓰여진 요한복음은 예수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원한 말씀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우리가 요한이라 부르는 저자는 아마 자신보다 앞서 예수가 신적 존재임을 믿은 기독교도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보다 50여 년 앞서 사도 바울은 아마도 초기 찬가를 인용해서 예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빌립보서 2:6-7) 

- 누가가 예수를 신적 존재로 승격된 사람으로 그리는 반면, 요한은 바울이 인용하는 찬가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사람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온 (일시적으로) 신적 존재로 그린다. 한편 바울은 예수가 주임을 믿는 사람들이 성령의 감화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고린도전서 12:3). 그로부터 60년 후, 바울을 존경하는 시리아의 주교 안티오크의 이그나티우스는 자신이 곧 순교할 것을 예견하며 "내 주의 고난을 본받기"를 열렬히 희망한다고 썼다. 그런가 하면 소아시아의 비티니아 총독 플리니우스는 의심이 가는 인물들을 조사한 뒤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내는 서신(115년경)에서 이 기독교도들이 "마치 신을 찬양하듯 예수를 찬양하는 찬가를 부른다"고 했다. 어쩌면 바울이 알고 있던 것과 같은 찬가이지 않았을까. 

- 일부 역사학자들이 마가복음(68~70년)을 마태복음 및 누가복음(80~90년경), 그리고 요한복음(90~100년경)과 비교하고 요한복음이 고등 그리스도론, 즉 예수를 보다 고등한 존재로 보는 견해로의 이행을 나타낸다고 생각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들 역사학자는 그런 견해가 1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니케아 신경처럼 예수를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라 선언하는 구절들에서 절정에 이르렀다고 지적한다.

- 그러나 예수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단순한 진화 패턴을 따르지 않는다. 요한의 주장은 거의 2000년 가까이 정통파 기독교의 교의를 사실상 규정해 왔지만, 당대에 보편적으로 수용되지는 않았다. 또 예수의 신성을 주장하는 바울 및 요한의 견해가 마가와 누가, 마태의 견해보다 우세한 것은 사실이지만, 요한복음과 대략 같은 시기에 쓰여진 도마복음은 그와 유사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그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도마복음 요한복음의 보다 친숙한 패턴과 다른 패턴을 보이므로, 먼저 그것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하고 넘어갈 점이 있다. 이 책에서 비록 전통에 따라 도마, 요한이라는 이름과 '저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는 해도, 실제로 이들 복음서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도마복음의 저자는 사실 저자라기보다는 편찬자(혹은 둘 이상의 편찬자들)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도마복음을 '지은' 것이 아니라 전해 내려오는 말씀들을 모아 기록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이나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처럼 도마복음에 서로 모순되는 말씀들이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예컨대 도마복음에도 요한복음처럼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암시하는 말씀들이 있다. 그런 말씀은 신의 선택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을 반영하여 선택받은 사람만이 신을 알 수 있다고 가르친다.

 

- 하지만 도마는 예수가 은밀히 다르게 이야기했다고 주장한다. '제자들이 여쭈되 죽은 자들이 언제 부활하며 새로운 세계가 언제 오나이까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기다리는 것이 이미 왔으나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니라.' 제자들이 또다시 하늘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자, 도마의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기다린다고 오지 아니하니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님이라 아버지의 나라는 지상에 펼쳐져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

- 누가복음에는 다른 신자들도 도마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곳에 있다고 생각함을 알 수 있는 구절들이 있다. 실제로 누가는 도마복음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20~21) 

- 어떤 사람은 "너희 안에"를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있는 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뿐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구현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새 개정판 성경은 전자, 즉 예수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100년 전 <하나님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에서 레오 톨스토이는 기독교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이곳에 실현시키기 위해 강제와 폭력을 버릴 것을 촉구했다. 한편 20세기 작가이자 트라피스트회 수도사인 토머스 머튼은 톨스토이의 주장에 동의하되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적인 의미가 아니라 신비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 이렇게 도마복음은 몇몇 부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거의 2000년 뒤의 톨스토이나 머튼과 유사하게 해석한다. 이 테마는 나그함마디 문서보다 50여 년 전인 1896년에 역시 이집트에서 발견된 막달라 마리아 복음(이하 마리아 복음)에서도 다루어진다. 마리아 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누가 여기다 저기다 하며 너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하지 말라. 인자가 너희 안에 있으니 그를 따르라"라고 한다. 그러나 누가는 이 말씀을 자기 복음에 넣은 것도 잠깐, 곧 이 같은 입장에서 후퇴해서 마가복음의 종말론적 경고로 끝을 맺는다. 인자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신적 존재가 아니라 멸망의 날에 모든 사람을 소환, 심판할 공포의 심판관이다.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누가복음 21:34-36)

- 이에 비해 도마복음 요한복음은 예수의 메시지를 다르게 이해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은 이렇게 예수의 비밀 가르침에 관해 입장이 유사한 것 같아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적이고 중대한 문제, 즉 그 빛을 찾는 방법에 있어 정반대의 답을 제시함을 알 수 있다. 먼저 도마복음을 살펴보자. 도마복음은 하나님에 이르는 길을 구하는 이들에게 답을 가르쳐주는 대신 수수께끼 같은 단서만을 준다. 도마의 '살아 계신 예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길을 찾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 말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이 탐색은 그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그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하기를 그치지 말라 찾으면 마음이 어지러울 것이요 마음이 어지러우면 놀랄 것이고 만물을 지배할 것이니라." 이렇게 예수는 그들이 찾는 것을 발견하는 데 필요한 내적 수단을 이미 가지고 있음을 시사함으로써 구하는 이들을 격려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이끌어내면 너희가 이끌어내는 것이 너희를 구할 것이요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이끌어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이끌어내지 아니하는 것이 너희를 멸할 것이니라." 

- 그래도 제자들은 계속 묻는다. "금식을 하오리까 기도는 어떻게 하오리까 자선을 해야 하오리까 어떤 음식을 먹으오리까?" 이것에 대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답이 제시된다. 예수는 예컨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마태복음 6:3-4)라고 한다. 금식할 때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태복음 6:17)라고 하고, 또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태복음 6:9)라며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 그러나 도마복음은 다르다.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금식을 하거나 자선을 해야 하는지 묻자, 예수는 선문답으로 피답한다. "거짓말을 하지 말고 너희가 증오하는 일을 하지 마라 모든 일이 그분 앞에 드러남이라." 즉 진실을 발견하는 능력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도 제자들이 "저희가 당신을 믿자 하오니 당신이 누구인지 가르쳐주옵소서"라고 하자, 예수는 이번에도 대답을 회피하고 스스로 생각하라고 한다. "대답하시되 너희는 하늘과 땅의 얼굴을 읽으면서 너희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읽는지 알지 못하느냐."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플로티노스는 "저들은 늘 우리에게 '신을 보라!'고 하면서 어디를 볼지, 어떻게 볼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 창세기에 따르면 "태초에 빛이 있었다". 도마에게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이 태초의 빛의 형상으로 창조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까지 창세기를 읽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도마는 태초의 빛에서 '대단히 경이로운 인간'이 나타났다고 암시한다. 이 빛의 존재는 즉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 창조한 아담의 원형이다. '빛의 아담'은 모습은 인간이지만 동시에 신이기도 하다. 예수는 여기에서 우리가 우리 안에 영적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암시하는 것이다. 리옹 주교 이레나이우스(180년경)는 이런 식으로 "인간을 만물의 하나님이라 하고 빛이라 하고 은총 받았다 하고 영원하다 하는 '이단들'을 경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레나이우스가 여기서 이단이라 치부하는 것, 즉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모두 안에 감추어져 있어 하나님과 모든 인간을 은밀히 잇는다는 생각은 훗날 유대교 신비주의 전통의 중심 테마가 된다. 도마의 예수는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이 거룩한 빛에서 나왔다고 한다.

 

- 예수는 마지막으로 도마에게 "내 입에서 마시는 자는 누구나 나와 같이 될 것이라 내가 그가 되고 감추어진 것들이 그에게 드러나리라"라고 한다. 나는 이것이 이 복음을 '쌍둥이' 도마의 것이라고 하는 상징적 의미라고 생각한다. 도마가 시사하듯, 우리는 '살아 계신 예수'를 만날 때 우리와 예수를 일란성 쌍둥이로 인식하게 된다.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고대 문헌들 중 시리아의 도마 전승에 속하는 또 하나의 문헌 <강건한 사람 도마의 책>에서 '살아 계신 예수'는 도마(그리고 암묵적으로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네가 나의 쌍둥이 형제이고 참된 벗이니 네 자신을 살펴보고 네가 누구인지를 알라 네가 내 (쌍둥이 형제)라 불릴 것이므로 ... 네가 비록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해도 ... 너는 자기 자신을 아는 자라 불릴 것이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자기 자신을 알게 된 사람은 동시에 만물을 알게 된다. 

- 도마복음을 읽은 다음 다시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복음은 명백히 유사한 언어와 이미지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유사한 '비밀의 가르침'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요한은 이 가르침을 도마와 다르게 해석한다. 그렇다면 혹시 요한은 도마의 가르침을 반박하기 위해 복음을 썼을까? 수개월간 이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두 문헌에 관한 다른 학자들의 연구를 조사한 끝에 나는 마침내 확신을 얻었다. 그레고리 라일리가 지적하듯 요한은(오직 요한만이)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요한복음 11:16)를 도전적, 비판적으로 묘사한다. 라일리에 따르면, '의심하는 도마'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요한이다. 요한의 목적은 어쩌면 신심이 없는 거짓된 교사(또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해석)를 풍자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 그러나 1세기 기독교도 모두가 예수가 베드로를 후계자로 지명했음을 인정하거나 이들 집단과 동일시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요한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복음은 아무도, 심지어 베드로마저도 요한 자신이라 여겨지는 수수께끼의 이름 없는 제자만큼 예수를 잘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요한은 베드로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자주 등장시키지만, 베드로의 지위는 항상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다음이다. 요한에 따르면, 이 제자는 복음에서 기록하는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 예컨대 그는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한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 곁에 앉았고, 예수를 배신할 사람이 누구냐고 차마 직접 묻지 못한 베드로가 그에게 대신 묻게 한다. 또 유다와 베드로가 예수를 배신 ... 

 

- 사람들은 요한의 메시지, 또는 마가나 도마, 여러 사도들의 메시지 중에서 어떤 것을 믿을지 어떻게 결정했을까? 여러 기독교 집단들은 각기 특정한 사도 또는 제자를 받들고 그를 영적 시조로 선언함으로써 그들의 가르침을 선택하고 확인했다. 50~60년에 이미 바울은 여러 집단의 구성원들이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고린도전서 3:4)라고 한다고 불평한다. 요한과 베드로, 마태, 도마, 막달라 마리아 등 여러 사도에 대해 이야기를 쓴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드는 사도를 예수가 가장 아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기 집단의 우월성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베드로를 대표자로 인정하면서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영적 이해가 베드로를 능가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른 이들이 저마다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컨대 도마가 베드로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한다는 도마파의 주장을 알고 있는 듯, 처음에 예수 안에 신이 존재한다는 데에 대해 도마와 의견을 같이하다가도 마지막에는 도마에 관련된 일화 세 편을 통해 도마파의 주장을 반박한다. 

- 요한복음은 도마복음과 마찬가지로 창세기 서두를 상기시키며 태초 이래로 거룩한 빛, "사람들의 빛이 비쳤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에서 우리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신의 이미지를 통해 직접 신과 접할 수 있다는 도마의 주장을 부정하려는 요한의 의도가 드러난다. 그는 곧바로 거룩한 빛이 세상을 뒤덮은 짙은 어둠을 꿰뚫지 못했다고 무려 세 번씩이나 강조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복음 1:5) 게다가 참 빛이 세상에 와서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한복음 1:9-10), 또 그 빛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한복음 1:11)라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이 거룩한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사렛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14) 그러므로 이제 일부 사람들은 요한처럼 의기양양하게 "우리가 그의 영광('광채', '광휘'를 뜻하는 히브리어 kabod)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요한복음 1:14)이라고 선언할 수 있다. 이렇게 불가시적 신이 특별한 현시의 순간에 가시적 실체가 되었다. 후에 요한의 이름이 붙여진 한서신은 "우리가 그를 눈으로 본 바요 ...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요한 1서 1:1)라고 주장한다. 
 
- 이제 우리는 요한의 메시지가 도마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도마의 예수는 제자들 각자에게 내면의 빛을 발견하라고 하는 데 비해 (각 빛의 사람 안에는 빛이 있으며...), 요한의 예수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요한복음 8:12)라고 한다.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하늘나라에서 와서 그곳으로 돌아가리라"라고 하고 스스로 "우리는 빛에서 왔노라"라고 말하라고 가르친다. 반면 요한의 예수는 '위에서 온 유일한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우선하는 정당한 권위를 갖는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요한복음 8:23),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요한복음 3:31) 

 

- 마가와 마태, 누가는 도마를 단순히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만 언급한다. 반면 요한은 그를 '의심하는 자'로서 특별히 거론하고, 그가 예수가 누구인지, 그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부인한 것으로 묘사한다. 요한은 이어 부활한 예수가 도마에게 모습을 드러내어 그를 꾸짖고 그를 무릎 꿇게 했다고 한다. 지난 2000년 동안 대다수 기독교도들은 이 이야기를 근거로 도마가 유난히 우둔하고 믿음이 없는 제자였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요한이 살던 시대의 많은 기독교도들은 도마를 예수의 '비밀 말씀'을 위탁받은 특별한 사도로서 숭배했다. 그레고리 라일리는 요한이 도마파와 그들의 가르침을 폄하하려는 실제적(또 논쟁적) 목적에서 도마를 이렇게 묘사했다고 주장한다. 요한에 따르면, 예수는 증거를 요구하지 않고 보지 못하고 믿는 이들을 칭찬하며 자기 경험을 근거로 진실을 증명하려 한다며 도마를 "믿음이 없는 자"라 꾸짖는다(요한복음 20:27-29 참조). 

- 요한은 도마에게 대다수 기독교도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이미지(의심하는 도마)를 부여하기 위해 세 편의 일화를 소개한다. 먼저 도마는 나사로를 부활시키기 위해 유대에 간다는 예수의 말을 믿지 않고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한복음 11:16)라고 한다. 여기에서 도마는 예수의 말을 의심하고 그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 두 번째 일화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기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자신을 믿으라고 촉구하면서 그들의 '거처'를 준비하고 신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한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요한복음 14:2-4) 그러자 제자들 중에서 도마만이 항의한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한복음 14:5) 여기서 요한의 예수가 이 무지하고 우둔한 제자에게 답하는 말은 아마도 요한이 예수의 특별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 마지막 일화에서 예수는 심지어 죽었다 되살아나서까지 도마를 꾸짖는다. 누가는 부활한 예수가 가롯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났다고 하고(누가복음 24:33-36), 마태 또한 그가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 성령의 힘을 주었다고 한다(마태복음 28:16-20). 그러나 요한만은 "디두모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요한복음 20:24)라고 한다. 

- 요한에 따르면, 도마가 놓친 것은 매우 중대한 장면이었다. 여기에서 예수는 열 제자를 축복한 다음 그들을 자신의 사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 20:21). 예수는 또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성령의 힘을 부여하고, 죄를 사하거나 그대로 둘 권한을 위임한다. 이 이야기에 함축된 의미는 명백하다. 이 장면에서 빠진 도마는 사도가 아니며, 성령을 받지 못했고, 죄를 사할 힘이 없다. 게다가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한 예수를 만난 이야기를 듣고 그는 그 뒤 영원히 그를 '의심하는 도마'로 낙인 찍을 (요한이 앞장서서) 말로 대답한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한복음 20:25) 그로부터 1주일 후 부활한 예수가 다시 한번 나타나 도마에게 믿음이 없음을 꾸짖고 믿음을 가지라고 명한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 20:27) 이에 마침내 도마는 승복하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한복음 20:28)라고 고백한다. 

- 이 장면은 요한이 가하는 최후의 일격이나 다름없다. 도마는 마침내 깨닫고, 예수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한복음 20:29)라고 훈계한다. 그리하여 요한은 자신의 복음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스스로 입증할 수 없는 것, 즉 요한이 증언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믿어야 하며, 만일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입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장면은 요한에게 회심의 장면이지 않았을까? 여기에서 도마는 경험적 진실을 위한 탐색(그의 '불신')을 포기하고 요한에게 자기 복음의 핵심이 되는 진실을 고백한다. 도마 파는 요한의 메시지를 명확히 인식했을 것이다.

- 본명이 리처드 베이커인 미국인 노사는 우리에게 젊었을 때 보스턴을 떠나 일본 교토의 절에 들어가 스즈키 슌류 노사의 제자가 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도마복음을 알았더라면 불교 신자가 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날 아침 선 수련자들 앞에서 간결하면서도 예리하게 사도신경을 해설한 데이비드 수사가 고개를 저었다. 도마복음을 비롯해서 몇몇 비정통적 복음은 신비주의적 면이 있기는 해도 본질적으로는 교회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아빌라의 성 테레사(테레사 데 헤수스)나 십자가의 성 요한네스 같은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의 저술에 나옵니다." 

- 나는 내 생각은 다르다고 말했다. 우선 아빌라의 성 테레사와 십자가의 성요한네스, 또 17세기 독일 신비주의자인 야코프 뵈메 등은 그들의 '계시'가 정통적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혹은 적어도 일치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주의했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신과의 동질성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하는 열쇠라고 가르친다. 뛰어난 학자이며 런던 대(大) 랍비의 열세 번째 아들인 테오도어 가스터는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이 신과의 연관성을 말하여 돼 절대로 신과의 동질성을 말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유대교 신비주의자는 마르틴 부버처럼 '나와 너'를 말할 수는 있어도 결코 '내가 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에 비해 힌두교에서는 예컨대 tat thvam asi(문자 그대로 '너는 저것'을 의미하는)처럼 그것이 가능하다." 

 

- 물론 정통파 유대교 및 기독교는 신과 우리 자신의 동질성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자력으로 신을 추구하는 일을 방해하거나 적어도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기독교도나 유대교도로 성장한 사람들 중 일부가 서구 전통에서 찾지 못한 것을 다른 곳에서 보완하려 하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매사추세츠 주 스펜서에 있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을 지낸 바 있고 50년 이상 시토 수도회에 소속되어 활동해 온 토머스 키팅 신부는 현대 과학뿐 아니라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 전통과의 대화를 통해 그가 말하는 '향심 기도(Centering Prayer)'를 심화하고자 한다. 키팅 신부에 따르면, 불교의 명상에는 신성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경험적 방법으로 기독교 전통을 보완해 줄 있는 몇몇 요소가 있다. 1940년대의 베스트셀러 <칠층산 The Seven Storey Mountain>을 쓴 유명한 트라피스트회 수도사 토머스 머튼 또한 이와 유사한 시각에서 불교 전통을 바라보았다. 이렇듯 독실한 기독교도들 중에도 신을 추구하려는 충동이 넘쳐흘러 단일한 전통의 경계를 넘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다. 

 

- 누가가 복음을 기록하기 몇십 년 전, 그의 스승 타르수스의 바울은 갑자기 예수가 밝은 빛 속에 나타나 자신을 특별한 대리인으로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예수의 제자들은 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또는 적이요 첩자로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생전에 예수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음에도 그때부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대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apostolos)'라 칭하며 죽을 때까지 성령이 직접 자신을 인도한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코린트(고린도)의 기독교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낙원으로 이끌려" 갔으나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은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고린도후서 12:2-4)이므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한편 복음의 속편 격인 사도행 전에서 누가는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났다가 40일 후에 천국으로 올라간 뒤에도 성령은 그의 무리에게 계속해서 은사(카리스마), 즉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고 앞일을 예언하고 심지어 죽은 자를 되살리는 힘을 주었다고 전한다. 

 

- 당시에도 많은 기독교도들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성령에 감동"(요한계시록 1:10) 되어, 즉 황홀 상태에서 본 놀라운 환상들을 묘사하는 요한계시록 또한 썼다고 믿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그의 이름도 요한이다)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요한계시록 1:9) 밧모 섬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천상의 바다 위에 수정처럼 빛을 발하며 주가 보좌에 앉아 있고 천사들이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요한계시록 4:1)의 비밀을 읊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바울과 달리 자신이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다. 그의 기록이 계시록이라 불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 즉 환상과 계시가 있었기에 비로소 기독교 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성령의 힘이 어디까지 작용했는지를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성령의 감화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 때 (게다가 그중에는 경쟁, 심지어 대립관계에 있는 이들도 있었다), 누가 성령의 힘을 입었고 누구는 거짓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는 이레나이우스는 물론 오늘날의 기독교도들 또한 고민하는 문제다. 사도 시대가 지난 뒤에도 사람들이 직접 계시를 받을 수 있는가? 

 

- 오늘날 점차 많은 카리스마파 기독교도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또 이레나이우스와는 달리 성령이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예를 들어 오순절 교회의 신자들은 스스로를 사도신경에서 누가가 기록하는 사도들과 동일시한다. 누가에 따르면, 오순절 축제에서 성령이 "불의 혀"(사도행전 2:3)처럼 사도들에게 임해서 그들에게 힘을 주었다. '새로운 예언'의 일원들, 즉 몬타누스파도 틀림없이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몬타누스주의자는 "유일하신 성령의 힘을 절기와 시대에 한정시키고자 하는 자들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 

- 신이 처음 말한 각각의 문자는 처음에는 자기 성질도, 다른 문자의 성질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각각은 전체의 일부인데도 자기 소리가 이름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망상이 극복되고 "이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소리로 합쳐져 한 목소리로 찬가를 부를 때"에 비로소 "만물이 회복될 것이다." 우주 자체가 "그 찬양 소리의 영광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모든 사람이 이를 직관적으로 인지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 터뜨리는 첫 울음소리도, "곤경에 빠지거나 비탄에 잠겨" '오' 하고 신음하거나 부르짖는 소리도 거룩한 이름을 모방한다. 사람들은 신에게 기도하며 도움을 청할 때 본능적으로,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이 소리를 낸다. 또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며 입을 모아 '아멘(히브리어로 '그렇게 되기를'을 뜻하는)'이라 할 때, 그들의 일치된 목소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종국에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로 회복될 것을 예기하는 것이다.

 

- 이레나이우스는 마르쿠스가 사기꾼임을 밝히기 위해 그의 가르침을 세밀히 조사했다. 친구의 부탁을 받고 한 일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신자들을 모으고 입문 의식을 수행하며 '영적' 기독교도들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주는 마르쿠스의 활동이 그 지역 기독교도들을 하나의 교회로 단결시키려는 이레나이우스의 노력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레나이우스는 마르쿠스가 마술사요 적그리스도의 사자이며, 환상을 날조하고 영적 능력을 가진 척해서 사탄의 사도라는 진짜 정체를 숨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오함을 살펴본다'는 마르쿠스의 주장을 조롱하고, 입문자들에게 독자적으로 계시를 구할 것을 권한다고 비웃었다. 

 

- 그러나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신을 구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를 입증한다. 그런 '비밀문서'를 쓴 사람들 뿐 아니라 그것을 읽고, 필사하고, 경외한 그 외의 많은 사람들까지 신을 구하고자 했다. 그중에는 이레나이우스가 그런 문서들을 매도하고 200년이 지나도록 수도원 도서관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던 이집트의 수도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367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그는 이레나이우스를 숭배했다)는 부활절 서신을 통해 이집트의 수도사들에게 그런 문서를 모두 파기할 것을 요구했다. 다만 그가 구체적으로 "용인 가능", 심지어 "정경"이라고 거론한 문서들은 예외였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경과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아마도 성 파코미우스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아타나시우스가 소각을 명한 책들을 몇십 권 거두어 높이 약 2미터에 이르는 육중한 단지에 봉해서 나그함마디 근처의 산 중턱에 묻었다. 이 문서들은 그 뒤 1600년이 지나 무함마드 알리라는 이집트의 농민이 우연히 발견할 때까지 감추어져 있었다.  

 

- '하나님의 환상'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사람들마다 다르게 생각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황홀 상태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하려 함을 의미했다고 여기는데, 바울이 천국에 올라갔다는 이야기는 그가 이것을 경험했음을 시사한다. 단 바울은 자신의 환상이 무의식적인 것이고, "그때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린도후서 12:2)라고 주장한다. 반면 '하나님의 환상'은 예배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유대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은 매주, 심지어 매일 예배를 드리는 중에 신비적 언어를 사용한다. 예배가 절정에 이르러 회중은 선지자 이사야가 천상에서 천사들이 부른다고 하는 노래를 함께 부름으로써 천사들과 하나가 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이사야 6:3) 이사야에 따르면, 이것은 그가 환상을 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들은 노래다. 

 

- 야고보 외경과 비슷한 환상을 기술하는 일부 문서는 이사야나 에스겔처럼 자신들이 직접 그런 환상을 보았다고 시사한다.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문서들 중에는 환상을 일으키기 위한 구체적 기술을 묘사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런 기술이 항상 성공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베드로 계시록에서 베드로는 사람들이 죽일 것 같은 기세로 돌을 들고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즉시 부활한 예수에게 도움을 청한다(아마도 기도를 통해). 그러자 예수는 겁에 질린 베드로에게 

손으로 눈을 가리고 무엇이 보이는지 말하라 하셨다. 그렇게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렇게 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아뢰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해보라고 이르시니, 내가 햇빛보다 더 밝은 새로운 빛을 보고 내 마음속에 두려움과 기쁨이 찾아들었다.  

순간 시간이 정지되고, 베드로는 귓전에서 사람들이 고함을 치는 소리를 들으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환상을 본다. 공포와 비통함에 비명을 지른 베드로는 '살아 계신 예수'에게 영적인 것은 죽지 않음을 배운다. 

 

- 1896년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마리아 복음에서 안드레와 베드로는 이레나이우스가 고민한 것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환상을 보는 장본인의 시각에 따른 답을 듣게 된다. 마리아 복음은 일부 지도자들(베드로와 안드레로 대표되는)이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공격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첫머리는 소실되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마리아 복음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인자가 너희 안에 있으니 그를 따르라 그를 찾는 자는 그를 찾아낼 것이니 그러므로 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말하는 환상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자들은 "자기 안의 신성을 어떻게 찾을지 알지 못하고 자기들도 예수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슬퍼하며 몹시 흐느껴 울더라." 그러자 막달라 마리아가 일어나 "그들의 마음이 선을 향하게 하더라."  

울지 말라 슬퍼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그분의 은총이 언제나 너희와 함께하며 너희를 보호할 것이니 그분께서 우리를 예비하시고 인간으로 만들어주셨으니 그분의 위대함을 찬양하자. 

그러자 베드로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매여 우리는 주님께서 너를 여자들 중에 가장 사랑하셨음을 알고 있노라 네가 기억하고 있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달라 너는 알고 우리는 모르는 것 우리는 듣지 못한 것을 알려달라. 

 

그러던 어느 날 유스티누스는 이런 문제를 고민하며 바닷가를 걷다가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그에게 고대 히브리 선지자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들의 예언이 예수의 삶에 의해 입증되었음을 설명했다.  

 

먼 옛날, 사람들이 철학자라 하는 그 어떤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의로운 사람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성령에 의해 장차 있을 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예견했다. 진리를 보고 이야기한 것은 성령의 감화를 받은 이들 선지자뿐이다. 그들은 논리적인 증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증언하는 진리는 그런 증명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있었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보면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노인은 "이렇게 말한 뒤 다른 곳으로 가버렸고 ... 나는 그 뒤로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즉시 내 영혼에 불이 밝혀졌고 선지자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벗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나를 사로잡았다." 

- 유스티누스는 기독교도 집단과 접촉해서 결국 "선지자들을 통해 예수에 관해 모든 것을 예언한",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밝혀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 철학자'가 된 그는 트리포라는 유대교 철학자에게 자신들이 믿는 것이 "무의미한 비유나 근거 없는 말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하며 크나큰 권능을 지니고 은총이 넘쳐흐르는 말씀"임을 입증하겠다고 나섰다. 이 말을 듣고 트리포의 벗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야유했으나 유스티누스는 자신이 확고한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놓았다. 예컨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은 거의 500년 뒤 마리아가 예수를 낳음으로써 실현되었다. 그는 또한 다윗과 이사야, 스가랴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이 예수의 탄생과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유다의 배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상세하게 예언했다고 주장했다. 트리포와의 공개 토론에서 유스티누스는 구체적 예언과 그것을 실현시키는 사건의 상관관계를 면밀하게 제시하고, 이는 성령에 의한 예언과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해야만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그런 '예언의 증거'를 비판하는 이들은 유스티누스 같은 기독교도들의 주장이 오류를 바탕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 때문에 기적이 아닌 것을 기적이라 착각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사야의 예언을 그리스어 번역으로 읽고 그것이 "처녀(그리스어로 parthenos)가 잉태할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스티누스 자신도 인정하듯이, 유대교 해석자들은 이사야가 본래 히브리어로 쓴 말이 실제로는 "젊은 여자(almah)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이는 왕에게 후계자가 생긴다는 가까운 미래를 예언하는 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스티누스와 이레나이우스는 그 이래로 많은 기독교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주장에 납득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대의 예언들 예수의 탄생과 죽음, 부활이 예견 되었고, 이들이 성령의 감화에 의한 것이었음이 실제 사건에 의해 입증되었다고 굳게 믿었다. 이 같은 증거는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 억지소리에 불과하지만,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입증하는 증거다. 유스티누스는 그 확신에 자기 목숨을 걸었고, 자신이 철학적 사변을 버리고 과학자의 실험처럼 경험적으로 입증 가능한 진리를 찾았다고 믿었다. 

 

- 예언의 증거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예언과 계시를 가려내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이레나이우스는 '선지자들'의 글에 '사도'의 글을 일부 더했다. 유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이레나이우스도 그들이 진리의 증인으로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말하는 신약성경은 아직 편찬되기 전이었으므로, 유스티누스와 이레나이우스를 비롯해서 당시 기독교도들에게 성경은 히브리 성경, 즉 구약성경이었다. 신의 진리가 구원의 역사에 드러난다는 그들의 확신은 구약성경과 유스티누스가 말하는 "사도들의 회고록", 즉 신약성경의 복음을 잇는 본질적인 연결고리를 마련해 주는 셈이다.
 

- 이레나이우스는 물론 사람들이 거룩한 진리의 계시를 구하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었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럴 생각도 없었다. 종교 전승이란 그들의 지지자들이 그것을 되새기고 상상을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변형시켜 나갈 때에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레나이우스와 그의 뒤를 이은 교회 지도자들은 모든 신자가 '사중복음', 그리고 이레나이우스가 말하는 사도전승에 복종하게 하려고 했다. 그때부터 교회 지도자들은 훗날 신약성경이 되는 복음들과 일치하는 계시만을 승인하게 되었다. 그 후 수세기 동안 이들 복음은 온갖 기독교 미술과 음악, 시, 신학, 전설 등을 낳았다. 그러나 성테레사나 성 요한네스 같은 위대한 성자들조차 이런 경계를 초월하 기는커녕 밟지 않으려 조심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전통적 성향의 기독교도들은 정경의 지침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악 또는 마귀에 의한 사악한 거짓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레나이우스는 모든 '비밀문서'를 없애고 사복음 정경 체계를 수립하는 것만으로는 기독교를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 발렌티누스와 제자들은 신약성경 정경이 수립되기 100년 전에 이미 이 새로운 '사도' 문헌들을 창세기 및 선지자들의 예언서와 함께 위치시키고, 예수의 말씀을 구약성경과 동등한, 또는 심지어 우월한 권위를 갖는 것으로 경배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과 함께 공부하는 로마 귀족 여성 플로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의 말씀이 실재를 이해하는 유일하게 틀림없는 방법"이라고 썼다. 이레나이우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교파는 성스러운 신비를 논하면서 바울의 서신들과 마태복음 및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자주 인용했다. 그중에서 그들이 거듭 인용하며 "최대한도로 이용"한 것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요한복음이었다. 이레나이우스가 발렌티누스의 "가장 존경받는 제자"라고 한 헤라클레온은 현재 알려진 신약성경 주석 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명한 요한복음 주석을 쓰기도 했다. 


- 그 자신이 시인이었던 발렌티누스는 성경, 특히 요한복음의 강렬한 이미지를 사랑해 마지않았다. 후대의 정통파 기독교도들은 발렌티누스의 가르침을 은폐하려 했지만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글들을 보면 그가 예수의 성전 정화를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빛을 비출 때 성령이 거하기에 적합하도록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파괴한다는 비유로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는 꿈에 갓난아이가 나타나 자신이 로고스, 즉 요한이 말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거룩한 말씀이라고 선언하는 계시를 통해 영적 각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 이레나이우스가 말하는 '사악한 해석'을 몇 가지 살펴보고 그가 이의를 제기하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레나이우스는 발렌티누스가 진리의 복음을 썼다고 했는데, 만약 이것이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문서와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처음으로 발렌티누스가 "감추어진 신비,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칭송했는지를 알 수 있다. 

 

- <진리의 복음>은 이어 요한복음의 서두를 상기시키며 "아버지의 말씀 ... 한없이 다정하신 예수께서 만물에 들어가 만물을 뒷받침하시고" 최종적으로 “아버지께, 그리고 어머니께 되돌림으로써 만물을 하나님에게 회복시킨다"고 한다. 

- 또 이 복음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에게서 (혹은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보느냐는 우리가 볼 필요가 있는 것, 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에 좌우된다. 왜냐하면 신은 "형언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존재"이나 우리의 이해는 말과 이미지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말과 이미지는 우리의 인식을 제한하거나 확장시킬 수 있다. 따라서 신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지만, 이 복음의 저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미지를 환기하는 동시에 하나님 어머니를 언급하기도 한다. 게다가 예수에 대해 마태 및 누가('선한 목자' )와 바울('지혜의 감추어진 신비'), 또 요한('아버지의 말씀')에서 낯익은 이미지를 차용하는 한편, 다른 이미지를 제시하기도 한다. 신자들이 대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이미지를 희생적 죽음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여김을 시인하면서, 그는 대신 '나무에 열린 열매'로 볼 것을 제안한다. 이 나무는 다름 아니라 에덴동산에 심은 지혜의 나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열매는 먹는 사람을 아담처럼 파멸시키는 대신 그에게 참된 지식을 준다. 이때의 지식은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신이 그들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고 그들이 자기 안에서 신을 발견하는 상호 인식의 앎(그리스어 gnosis와 결부되는)"이다.
 

- 그런가 하면 요한은 "또 한 번은 예수께서 나와 야고보와 베드로를 당신이기도 하시던 산으로 데려가시니 그분께서 그 어떤 인간의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빛에 둘러 쌓이심을 우리가 보았다"라고 하고, 후에 "또다시 우리 셋을 산으로 데려가시니 그분께서 멀리서 기도하심을 우리가 보았다"라고 한다. 그때 요한은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심에 나를 보시지 못하도록 조용히 다가가 등 뒤에 서는데", 그 순간 그의 눈에 예수가 갑자기 모세가 본 여호와처럼 변모한다. "옷을 입지 아니하시고 ... 사람처럼 보이지 아니하셨으며 ...그분의 발이 밝게 빛나며 땅을 비추시고 그분의 머리가 하늘에 닿아 그 무서운 광경에 내가 놀라 소리쳤다." 그러자 예수가 즉시 돌아보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도마를 꾸짖는 말로 그를 꾸짖는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 요한복음은 '사악한 해석'의 또 한 예가 되는 요한 외경도 낳았다. 이레나이우스도 읽은 것으로 보이는 이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책은 또 다른 익명의 저자가 요한의 이름으로 요한복음의 속편으로서 쓴 것이다. 요한 외경의 첫머리에서 예수의 사후에 "야고보의 형제요, 세베대의 아들 요한은 성전 쪽으로 가다가 어떤 바리새인을 만나는데, 그는 이 '나사렛 사람'이 요한과 다른 신자들을 속이고 "너희의 귀를 거짓말로 가득 채우고 너희가 조상의 전통에 등 돌리게 했다"라고 비난한다. 요한은 "마음속으로 심히 슬퍼하며" 발길을 돌려 외딴 산속으로 달아난다. 그곳에서 홀로 두려움과 의심과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온 천지가 빛을 발하며 세상이 뒤흔들렸다." 놀라고 겁에 질린 요한의 앞에 이 세상 것이 아닌 빛이 보이더니 그 안에 온갖 형태들이 나타나고, 예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요한아, 요한아, 너는 어째서 놀라고 어째서 겁을 내느냐? ...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는 그이니라. 나는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아들이니라." 잠시 후 충격을 극복한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빛을 발하며 성부와 성자, 성령을 비롯한 온갖 형태로 나타나는 이로서 인식한다. 이때 성령은 여성('영'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ruah의 성에 의해)으로, 따라서 성스러운 어머니로서 그려진다. 

 

- 그러나 예수는 요한을 이 환상으로 위로한 다음, '만물의 아버지 하나님'은 사실 사람의 모습으로 이해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신은 "만물의 위에 계시며 그 어떤 눈으로도 볼 수 없는" 순결한 빛 속에 순수함으로써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신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간의 이해를 완전히 초월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신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요한 외경>의 저자는 요한복음의 언어를 차용해서 이 질문에 답한다. "내가 그분을 이해할 수 있는 한(어느 누가 그분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 하나님은 빛이요, 빛을 주시는 분이며, 생명이요,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 ... " 하지만 이어지는 대화에서 부활한 예수는 요한의 질문에 천지창조 이전에 거룩한 존재 안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와 악의 기원, 그리고 인간의 본성과 영적 운명 등에 관한 놀랍고 신기한 이야기로 답한다. 

 

- 그러나 이레나이우스가 거론하는 '사악한 해석' 중에서 으뜸은 요한 외경과 유사한 의문을 제기하는 어느 요한복음 주석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만물의 시초'는 무엇인가? 프톨레마이오스로 알려진 이 주석의 저자에 따르면, "주님의 사도 요한은 만물의 시초, 즉 아버지께서 어떻게 만물을 만드셨는지를 설명하고자 첫머리에서 거룩한 존재의 원(原) 구조를 밝힌다(단 모르고 보는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다)". 이는 '제1오그도아드(ogdoad)', 즉 거룩한 에너지가 방사된 최초의 여덟 형태로 구성되는데, 훗날 카발라주의자들이 말하는 신성한 세피로트(sephirot)와 유사하다. 그러므로 발렌티누스 교파는 요한복음의 서두에서 신과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거대한 폭포에서 지류로 물이 흘러들 듯 위에서 떨어지는 거룩한 에너지의 물결로 보았다. 

- 이레나이우스는 요한복음의 서두에서 숨은 의미를 찾으려는 이 같은 노력들을 배격하고 독자들에게 이 주석을 길게 인용한 것은 "이를 이용하는 자들이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성서를 악용해서 자신들이 꾸며낸 것을 뒷받침하려 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만약 요한이 거룩한 존재의 원구조를 밝힐 작정이었다면 명확하게 설명했을 것이고, 그러므로 "그들의 해석은 명백히 오류다." 이레나이우스는 이어 요한복음의 참된 해석을 제시한다.

 

- 이레나이우스가 제시하는 단일한 '보편적 교회'의 비전은 그의 소망을 반영할 뿐, 갈리아에서 그가 알고, 소아시아와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며 보고 들은 교회들의 실상과는 사실상 무관했다. 여행 중에 이레나이우스는 그가 말하는 이단들의 저항에 맞닥뜨렸다. 세례 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그의 말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고 한다. 
 
우리 또한 네가 말하는 신앙을 받아들였고, 우리 또한 세례를 받을 때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동정녀에게 나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그 이래로 우리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의 기본적 가르침을 넘어 영적 성숙을 얻고자 노력했다.

-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으로 사실상 처음으로 이들 '이단'의 주장을 직접들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우선 빌립복음을 살펴보고 발렌티누스주의 교사인 저자가 자기 무리와 '보다 단순한' 신자들을 어떻게 비교하는지 보자. 우리가 빌립이라고 칭하는 이 저자와 그의 무리는 순교자 유스티누스가 로마에서 흔히 행해졌다고 설명하는 절차와 유사하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즉 예비자는 과거의 죄를 회개한 다음, 사도들이 전수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 확인하며, 신앙을 고백하고 그에 따라 살기로 약속한다. 그런 다음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 성부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마지막으로 새 옷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은 뒤 성체를 먹는다. 빌립 또한 유스티누스처럼 세례가 영적 재생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이 신비를 통해 리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

- 그러나 유스티누스와는 달리 (나아가 내가 아는 어떤 다른 초기 기독교도와도 달리), 빌립은 이어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혹은 일어나지 않는가)를 묻는다. 세례는 누구에게나 동일한가? 빌립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세례가 그저 입문의 의미만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물에 들어갔다가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다시 나와 '나는 기독교도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간혹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령을 받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신비를 경험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그 차이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사가 아니라 예비자가 가지고 있는 영적 이해의 능력에서 비롯된다.

 

- 빌립은 바울의 갈라디아서를 상기시키며, 많은 신자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라 여긴다고 한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이들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믿음 속에 희망과 사랑, 이해 (영지)를 향해 자라나야 한다. 

믿음은 우리가 뿌리를 내릴 흙이요, 희망은 우리에게 양분을 주는 물이며, 사랑은 우리를 기르는 바람이다. 그리고 영지는 우리를 여물게 하는 빛이다. 
 

- <십자가의 윤무>에서 묘사하는 춤 자체가 일종의 속량 의식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최초의 세례는 거의 모두 물의 세례인 반면, 이레나이우스에 따르면 이 영적 교사들이 행하는 제2의 세례는 통일된 형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정해진 형태가 없어서 교사들은 저마다 자기 식대로 그것을 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비적 통찰을 지닌 교사들의 수만큼 속량의식의 종류가 있다." 

- 이 문제를 상세히 검토한 이레나이우스는 이 제2의 세례에서도 물로 세례를 주되 기원문이 다른 경우도 있다고 기록한다.

어떤 이들은 ... 예비자를 물속으로 데려가 그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미지의 하나님, 만물의 아버지 이름으로, 만물의 어머니 진리에게, 예수께 강림하신 유일한 존재 (성령)에게 결합과 속량, 그리고 천사들과의 교통으로"라고 기도한다.

- 그런가 하면 속량 의식을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진 삶과 결합하는 일종의 영적 혼례"로 거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신과 자신을 이어주는 존재의 일부와 하나가 됨을 의미했다. 이레나이우스는 또한 “히브리어를 되풀이해서 읊는" 사람들도 있다면서 "Basema, Chamosse, Baonara, Mistadia, Ruada, Kousta, Babaphor, Kalacheit" 등 하나님의 비밀 이름(사실은 히브리어가 아니다)을 기록한다. 기원을 마치면 참가자들은 축도를 올리고("이 이름이 거하는 모든 이에게 평화가 있기를"), 예비자에게 향유를 부은 뒤 모두 함께 '아멘'이라 한다. 또 모든 의식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위대함"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구원이므로 이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해방' 된 것이다. 

 

- 그러나 이레나이우스는 그 같은 관행이 기독교도들을 분열시키는 것을 보고 크게 우려했다. 그는 "그 어떤 교회 개혁"도 이들이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영광된 육체를 토막 내고 파괴"해서 야기한 피해를 보상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그들의 '속량'은 속량이 아니라고 공격했다. 이들 영적 교사들은 사탄의 감화를 받아 "세례가 하나님에의 재생임을 부인하고 신앙을 버린다." 다른 신자들과 공유하는 것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사람들을 자기들의 소규모 집단에 끌어들임으로써 이들 교사는 각 교회 내에, 나아가 전 세계의 교회 내에 수없이 많은 잠재적 분열을 조장한다. 이레나이우스는 이런 일을 하는 영적 교사나 예언자는 모두 이단자에 사기꾼, 거짓말쟁이라고 단언한다. 그가 무려 다섯 권에 이르는 <이단들을 반박함>을 쓴 것은 회중에게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기를 그만두고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이레나이우스는 성경의 참 의미를 설명할 것을 약속하고 자신이 가르치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 그가 당면한 일차적 문제는 이것이었다. 모든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받는 세례가 신앙의 삶에서 예비 단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재생'을 가져온다고 설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초보자들에게 필요한 기초적 가르침이 아니라 '신앙의 모든 것'을 전달한다고 설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레나이우스는 이 같은 문제에 답을 제시함으로써 정통파 기독교 신앙의 뼈대를 수립하는 데 이바지했다. 어떤 계시를 없애고 어떤 계시를 남겨놓을 것인지, 그리고 (이쪽이 아마 더 중요할 텐데) 남겨놓은 것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관해 그가 회중에게 제시한 지침을 근간으로 훗날 신약성경과 그가 말하는 '진리의 정경'이 수립된다. 그리고 이는 나아가 정통파 신조의 틀이 된다. 물론 이 모든 일이 이레나이우스 한 사람의 업적은 아니다. 오히려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먼저 지적했듯, 이레나이우스는 사도전승에 크게 의지했으며 여러 사람들의 노력의 산물을 편입시켰다. 그러나 그가 취한 행동은 그의 후계자들을 통해 이후 2000년간 우리가 알아온 (그리고 알지 못한) 기독교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소리와 정적, 촛불의 불빛과 어둠 속에서 마치 예배가 밀물처럼 밀려와 우리를 휩쓸고 우리 위에서 물결치는 것 같았다. 바닷물이 빠져나갔을 때, 나는 전처럼 과거의 순간에 집착하지 않고 사랑과 감사의 물결에 실려 딸아이에게,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그리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다가갔다. 우리 자신의 삶에 일어난 일로 이 모든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충격을 받았으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와 음악, 의미와 환상 속에 엮어 넣었기 때문이다. 성탄 축하 예배는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전승을 형성해 온 세대들의 뒤를 이어 앞으로 형성할 세대들을 통해 유지될 것이다. 

- 그러나 오늘날 이레나이우스와 같은 질문을 할 기독교도들은 많을 것이다. 영적 이해가 인간의 경험에서 비롯된다면, 결국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고 그러므로 거짓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레나이우스에 따르면, 인간의 경험이 신의 실재와 유사하다고 여기고 우리가 각자 자기 경험을 통해 신에 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추론하는 것은 이단이다. 발렌티누스 교파는 요한복음에서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면서 말이 인간의 경험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투사시킨 것을 신학이라 착각하고 "저마다 자기 경험을 확인하고자 하면서 성경에서 자기들이 꾸며낸 것만을 발견"했다. 반면에 이레나이우스는 우리가 자기 체험에 관련되어 할 수 있는 말은 전부 신과 무관하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간의 감정과 정신의 작용, 의도, 발언을 전부 그럴듯하게 쌓아 올려 하나님에 대해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거짓말을 했다. 그들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 자신들이 경험하는 일을 모두 거룩한 '말씀'에 귀속되게 했다. 만약 이 이단들의 주장이 옳다면 계시가 필요 없을 것이다.

 

"각자가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묵인하고 보전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라면 여호와가 오실 필요가 없어 보인다."  

- 이레나이우스가 문제 삼는 것은 그가 말하는 이단들이 예수의 유일무이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그를 우리 자신과 함께 인간 측에 놓으려 하는 경향이다. 그의 주장은 그와 정반대 되는 것이다. 하나님, 그리고 지상에 나타나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사고와 경험을 완전하게 초월한다.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에 맞서 이레나이우스는 예수의 초월성이 다른 모든 인간과 그를 구분한다고 주장한다. 

 

- 그렇다면 이레나이우스는 그가 구원의 가능성을 좌우한다고 믿은 이 중대한 복음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서 지킬 수 있었는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여러 영적 교사들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 그는 단호한 조처를 취해서 신자들에게 그의 적수들이 번번이 인용하는 "수많은 합당치 않은" 비밀 글들을 모두 파괴할 것을 요구하고 기독교도들 사이에 유포된 모든 '복음' 중에 네 개만이 진짜라고 선언했다. 이런 두 가지 중대한 (그리고 후에 입증되듯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조처를 취함으로써 이레나이우스는 신약성경 정경을 수립하는 주요 인물이 되었다('정경'의 어원이 되는 그리스어 kanon은 본래 '자'를 뜻하는 목공 용어로 대개 벽이 똑바른지를 확인하는 추 달린 끈을 말했다). 

 

- 그러나 이레나이우스와 그가 반대하는 세력 모두 "세례를 통해 받은 신앙의 정경"에서 출발하는데, 어떻게 해야 모든 신자로 하여금 그의 뜻대로 예수가 신의 권화임을 믿게 할 수 있는가? 이레나이우스는 '이단'들이 즐겨 인용하는 복음으로 그들이 그릇됨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요한복음에서 차용한 언어로 세례의 가르침을 재구성함으로써 '진리의 정경'을 확립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생겨난 언어가 훗날 니케아 신경을 비롯한 신경들의 토대가 된다. 그렇다면 예수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요한의 가르침은 어떻게 해서 이레나이우스가 원하는 대로 정통파 신앙의 시금석이 되었는가?  

 

- 요한복음의 의미가 명확하다면 이 물음에 보다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초기 기독교도들에게 요한복음은 심각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레나이우스가 투덜대듯 발렌티누스의 제자들은 "번번이 요한복음을 인용"하는 데 반해, 정작 '교부들'은 요한복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중에는 심지어 이레나이우스의 스승 세 명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십중팔구 자신의 스승 폴리카르포스 주교가 아예 요한복음을 몰랐을 것임을 알고 있었을 테지만, 우리가 아는 한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간다. 그런가 하면 이레나이우스가 우러러보던 또 한 사람의 순교자 안티오크 주교 이그나티우스도, 로마의 기독교 철학자인 순교자 유스티누스도 요한복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이레나이우스는 '새로운 예언' 운동을 반대하는 일부를 포함해서 일부 기독교도들이 요한복음을 배격한다는 이야기는 언급한다. 어쩌면 그는 요한복음을 이단이라 공격하고 실제 저자가 요한의 대적인 이단자 케린투스라고 한 로마의 교사 가이우스의 주장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그러나 요한복음을 '교회 중심적' 기독교도들에게 처음 소개한 사람은 이레나이우스가 아니었다. 그보다 몇 년 앞서 유스티누스의 제자인 시리아 사람 타티아노스는 요한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을 비롯한 몇몇 문헌을 조합해서 '복음'을 썼는데,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복음을 보면 그것이 널리 읽혔음을 알 수 있다. 이레나이우스에게 요한복음은 고향 소아시아에서 물려받은 전승의 일부였다. 그는 그것을 옹호하고 "주님의 사도 요한"이 에페소스에 살 때 그것을 썼다는 전통적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기독교도들이 그에 대해 의혹을 갖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 즉 이것이 이레나이우스가 요한복음 첫머리에서 차용한 언어로 재구성한 '진리의 정경'이다.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셔서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셨다. 그리하여 성경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고 한다." 신을 이 세상, 특히 그 결점 및 고통과 거리가 먼 존재로 높은 곳에 위치시키는 대신, 이레나이우스는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이 세상을 통해 나타나며, 심지어 '육신이 된 말씀 예수 그리스도'로서 이곳에 몸소 거하기까지 한다고 주장한다.  
 

- 두 가지 유형의 개종 체험은 이처럼 차이가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상호 배타적이지는 않다. 전자의 경우, 구원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후자는 "신과 자신의 본성을 모르고 파멸적인 행위를 하던 사람"이 최종적으로 점차 신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신과의 관계가 필요함을 깨닫는 과정이다. 헤라클레온은 첫째 유형의 개종을 경험하는 사람은 둘째 유형도 경험할 수 있다(최종적으로는 경험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로부터 200년 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앙이 이해를 구한다"고 한 말은 둘째 유형을 의미한다. 

- 헤라클레온에 따르면, 대부분의 기독교도들은 성경의 이미지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향이 있다. 그들은 신을 이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석판을 준 입법자, 예수를 낳은 거룩한 아버지로 여긴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체험하는 사람은 이런 종래의 이미지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 이미지를 굳이 배격할 필요는 없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거룩한 실재를 가리키는 수단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종교적 언어(그 밖에 다른 많은 언어를 포함해서)는 그런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을 예수의 말처럼 "영과 진리로"(요한복음 4:23) 예배하게 된다.

 

- 이레나이우스가 4세기에 신경의 틀이 될 신학적 명제를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본적 확신을 명확히 하고자 한 데 비해, 발렌티누스 교파는 그 같은 신학적 명제에 훨씬 덜 중요한 의미를 두었다(부인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에게 그것은 영적 이해를 위한 필수적이고 확실한 토대가 아니라 기초적 가르침에 불과했다. 

 

- 주교들이 찬성하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승인한 니케아 신경은 이후 모든 기독교도들이 황제가 인정하는 유일한 교회, 보편적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공식 교조가 된다. 니케아 공의회가 열리기 1년 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한 통계에 의하면 당시 제국의 기독교도들 절반에 해당하던 '이단 분파들'을 법으로 말소하려 했다. 그는 모든 '이단들 및 분파주의자들'이 가정에서조차 회합을 갖는 것을 금하고 그들의 교회와 전 재산을 보편적 교회에 넘길 것을 명했다. 발렌티누스, 마르키온, 몬타누스 등의 교사를 따르는 많은 기독교도들은 이 법을 무시했고 행정관들은 대체로 집행하지는 않았지만, 그 같은 법률은 보편적 교회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페터슨에 따르면, 이 같은 주장은 아타나시우스가 황제들의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한 것과 연결되며, 나아가 중세 서유럽에서 황제와 교회의 관계를 규정하는 세력 다툼의 뒤에도 자리하고 있었다. 반대로 성부가 성자에 우선함을 인정하는 아리우스의 교리는 수백 년 동안 일부 동방 교회에서 변형된 형태로 살아남았다. 이들 교회는 교회 문제에 대한 황제의 권력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훗날 국교회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같은 분석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니케아 공의회 이후 몇십 년간 아타나시우스 측과 아리우스 측 사이에 극심한 마찰이 계속되었음은 분명하다. 이는 콘스탄티누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까지 끌어들이고 제국 전역의 주교들과 회중들을 분열시켰다.   

 

- 그 결과, 이후 40년간 아타나시우스의 지위는 아리우스 파(그는 아리우스광(狂)이라고 불렀다)의 공격을 받아 매우 불안정했다. 처음에는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로서 그를 지지하던 콘스탄티누스는 그로부터 7년 후, 그의 적들 편을 들어 아타나시우스를 면직한다는 주교단의 결정을 승인했다. 아타나시우스는 망명길에 올랐다가 337년에 콘스탄티누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 복권되었으나, 2년 뒤 또다시 주교단에 의해 면직되었다. 그는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기고, 카파도키아의 그레고리우스 주교가 그를 대신해서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되었다. 10여 년 후 그레고리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지위를 되찾았으나, 겨우 3년 만에 또다시 면직되고 또 다른 카파도키아 주교가 그를 대신했다. 이 세 번째 라이벌이 5년 뒤인 361년에 목숨을 잃은 뒤, 그는 또다시... 

 

- 아리우스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모방할 것을 촉구했다면, 아타나시우스는 이런 노력이 어려울 뿐 아니라 불가능하며 신성모독이기조차 하다고 단언한다. 그는 "신은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도록 인간이 되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구원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렇게 아타나시우스는 신과 접하고자 하는 사람은 말씀을 통해야 한다는 이레나이우스의 가르침을 확대했다. 즉 먼저 세례를 받은 다음, 신경에 담긴 정통적 신앙을 고백하고 성사(정통파 신자들이 교회에서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얻을 수 있는 "불멸의 약")를 받아야 한다. 

 

- 박해를 받는 동안에도 기독교 신앙은 제국 전역의 도시에서 점점 더 두각을 나타냈다. 3세기에서 4세기 초엽까지 개종자의 수가 2~3배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자체적으로 교회를 세우는 집단까지 생겨났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에 뒤이은 기적과 같은 사건들을 보고 기독교 신앙이 진짜임을 믿게 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313년 이후로 장차 황제의 것이 될 교회의 일원이 되어 득을 보려는 사람은 물론, 그동안 기독교에 관심은 있었으나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생각해서 세례 받기를 망설였던 사람들까지 교회로 몰려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개종자들이 원한 것은 구원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 로마 제국의 질서에 대항하는 급진적 대안이던 이 종교에서 이제 많은 사람들은 가정과 교회뿐 아니라 인간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새로운 인간관계의 비전을 보았다. 

 

- 이런 선택 행위(이는 '이단'을 뜻하는 heresy의 본래 의미다)를 고려할 때, 우리는 정통적 교리로써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진실과 거짓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무엇이 참된 것, 그리하여 우리가 서로 이어지게 하는 것, 실재와 연관되는 것이고, 무엇이 얄팍하고 이기적이며 사악한 것인가? 어리석음, 감상(感傷), 망상, 분노, 잔학성이 하나님의 진리로 위장된 것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대인들이 말하는 '영의 식별' 문제에 간단한 답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 것이다. 정통적 교리는 우리의 분별 능력을 불신하고 대신 분별해 주겠다고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기만에 능한가를 생각하면, 우리는 이에 대해 어느 정도 교회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작업을 면하고 싶은 마음에 전통적 가르침을 기꺼이 고맙게 받아들인다.  

     

 

 

  

 
믿음을 넘어서
-
저자
일레인 페이절스
출판
루비박스
출판일
200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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