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네빌 고다드] 임모틀맨 2 - 네빌 고다드 강의

일루젼 2023. 2. 2.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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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네빌 고다드 / 이상민

원제 : The Immortal Man II
출판 : 서른세개의 계단 
출간 : 2022.11.11 


 

전작인 <임모틀맨 I>이 왜 I일까 궁금해했었는데, II권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리뷰에 댓글로 2권이 출간되었음을 알려주신 분이 계셔서 바로 구매했었는데, 실제로 읽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고 말았다. 

 

 

[네빌 고다드] 임모틀맨

저자 : 네빌 고다드 / 이상민 출판 : 서른세개의 계단 출간 : 2017.12.20 네빌 고다드의 를 읽고 저서를 조금 더 찾아 읽고 싶어져서 이 책을 골랐다. 책 말미에서 그의 강연을 엮어낸 책들 중에서 "약

illusionofmoon.tistory.com

 

 

 

<임모틀맨 II>에서 저자 네빌 고다드는 '약속'에 관해 말한다. 스스로는 '법칙'이라고 부르는 '네빌라이징'을 통해 누구나 안정적인 삶, 풍요, 긍정적인 상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것만이 삶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의 목적은 '약속'이다. '법칙'은 말 그대로 '법칙'일 뿐이며, 그를 통해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현실이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게 된 자는 자신의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  

 

'약속'이란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를 이상적으로 바로 세우는 것이고, 그를 통해 잠든 주를 깨우는 것이다. 네빌 고다드는 그를 위한 과정들을 '교정'이라고 부른다. 이때의 '이상'이란 그 자신에게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끊임없는 용서와 교정을 행하되 모든 것들은 일종의 '롤(역할)'일 뿐임을 강조한다.

 

흔히 윤리적으로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들은 모두 특정한 '상태'일 뿐이며 그것은 사라지지도 파괴되지도 않는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생명력이 없는 빈 세트장에 가까우나, 그 상태에 젖어든 이들이 그 안에서 맡겨진 역할을 수행하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나'이기도 하므로, 내가 그들을 보다 나은 상태로 끌어올린다면 해당 상태에 생명력을 주는 이들이 사라지고, 다시금 그저 빈 '상태'로 남겨질 것이라는 것. 그것은 '나'에 관한 교정이며 동시에 '구원'이다.

 

이는 <디바인 매트릭스, 느낌이 현실이 된다>에서 권했던 내용과도 유사하다. 불편해지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회피하지 말고 새롭게 만들어주라는 것.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생생한 상상과 이미 이루어진 순간의 느낌이라고 한다. 네빌은 '다 이루었다'는 느낌 속에 계속 머무를 수 있다면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설명한다. 

 

부정한 것들을 피하며 길을 닦는 자로 성취할 것인가. 

내맡김 속에서 이상을 창조하며 펼치는 자로 성취할 것인가. 

 

여러 길에 대한 다양한 가르침들이 존재하지만, 기본 원리에 대해 유사하게 설명하던 가르침들도 이 지점에 방향성이 갈라지는 듯하다. 

 

본문 중 '죽음이야말로 성장의 가장 영광스러운 상징'이라는 표현이 인상 깊었다. 개인적으로 <임모틀맨 II>에서의 네빌의 설명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기본 골조와 지향점에는 동의한다. 네빌은 이에 대한 예시로 한 알의 씨앗이 그 정체성으로서는 '죽음'인 싹 틔움으로써 번성하는 경우를 들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절대로 개별적인 정체성을 잃지는 않는다고도 설명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형태 전환보다는 융합이 더 적절한 예시가 아닌가 생각하는데 - 이를테면 난자와 정자가 각 개별 세포로서는 죽은 후 수정란이 되는 것처럼 - 그저 개인의 상념일 뿐이다. 내게는 진정한 변성의 의미로의 죽음이라면 더 넓은 관점에서의 자기희생처럼 읽히기도 했다. 

 

가장 난감하게 다가왔던 부분은 '오로지 아들을 통해서만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아서 조금 곱씹어가며 읽었는데, 현재로서는 '그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에 가깝게 이해하기로 했다. 즉 아들이란 내게서 나온 것이자 내가 창조한 것이며 동시에 내가 될 것이고 나를 낳은 것이다. 해서 아랫부분에서는 드러난 결과, 중간 부분에서는 정제된 금, 윗부분에서는 높고 낮은 유일자이자 통합자 -나이되 내가 아닌- 라고 받아들였다. 진정한 의미는 그 지점에 도달하여 경험한 자만이 알게 되는 영역이리라 생각한다.

 

한동안 고민했던 부분들이 거의 정리가 되었다. 옳은 것을 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훨씬 어렵기 때문에, 새로이 입은 옷에 익숙해져 자연스러워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그리고 언제나 깨어있지 않으면 누군가가 바라보는 대로 이끌려가게 되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계속 돌아오게 되는 지점은 갈림길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단 한 명의 아들도 남겨지지 않으리라는 저자의 약속이 무척 고마웠다.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이 선물이 축복과 울림으로 전해지기를. 

 

감사히 읽었다.   


   

- 사색에만 빠진 철학은 삶과의 괴리를 만들고, 현실의 이익에만 눈을 돌린 자기 계발은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실천적인 형이상학, 즉 현실에 도움이 되면서 삶의 의미를 명확하게 할 수 있는 책을 발간하고자 하는 것이 서른세개의 계단 출판사의 목표입니다. 계속 좋은 책을 발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네빌 고다드는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길을 제시해 줍니다. 실패를 겪고 있다면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며,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상처 주는 말을 하면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며, 원망이란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며,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어떻게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며,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마음자세를 취해야 하며, 떠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삶이란 것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이런 관점에서 네빌 고다드의 강의는 제가 생각하는 한, 삶에서 가장 실용적인 것을 가르치는 책입니다. 우리 삶이 마음 쓰는 생활이 전부라면, 마음 쓰는 법을 배우고 실천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진정한 형이상학자의 길은 어떤 은둔의 길이 아닌, 삶이라 부르는 것 한가운데에 놓여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듣는 자를 넘어서, 진실로 진리를 행하는 자가 되려 한다면
우리는 항상 자아의 관찰(self-observation)목적에서 생각하는 것(thinking from our aim),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으로부터의 분리(detachment from negative moods and thoughts)를 해야만 합니다.

 

하느님이 다른 필멸의 동물에게는 주지 않고 오직 인간에게만 준 두 가지 선물이 있다. 이 두 가지 선물은 마음과 말이다. 마음과 말이라는 선물은 가장 중요하고, 불멸성과 같다. 만일 이것들이 올바르게 사용된다면 인간은 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인간이 몸을 떠나게 될 때 그들의 안내인이 되어, 축복을 얻었던 신들과 영혼들이 모여 있는 극단으로 인도한다.  - <헤르메티카>

 

 

- 우리의 내면에서는 매 순간 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이 거대한 세상은 이 내면대화가 밖으로 펼쳐진 것이기에 내면을 잘 관찰해 보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피세요. 그래서 이 대화를 바꾸는 단순한 행위로 당신의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내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가 바로 당신의 본성입니다. 

 

- 당신의 세상이 어떤 모습이기를 바랍니까? 정말 당신이 원하는 그런 모습으로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자, 결핍 속에서 원하기만 하던 행위를 그만두고, 이제는 그것을 마음속에서 차지하십시오. 이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상태가 진실이라고 상상하기 시작하십시오. 이건 당신의 객관적인 희망을 주관적인(내면의) 세상에서 소유해 보는 겁니다.

 

- 가장 고귀한 관념을 품어보세요. 그리고 그렇게 품은 고귀한 모습들이 사실이라고 담대하게 받아들이세요. 이 가정 속에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걸어 나가세요. 물론 이렇게 하면 당신의 이성과 감각은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계속 사실이라고 고집하세요. 그러면 가정한 것이 현실이란 곳으로 단단하게 굳어질 것입니다. 

 

-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시험해 본다면 사실임을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어떤 것에 대한 증거가 있다면 그게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세상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보이는 현실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다시 보는 것입니다.  

 

- 이제 우리 안에 있는 이 거대한 힘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전 이것을 교정의 기술이라고 부릅니다. 하루동안 했던 일을 마음의 눈에서 떠올려봅니다. 아침의 첫 사건부터 시작해서 하루를 되돌아봅니다. 이 중에서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장면이 나타나면 그곳에서 멈추고 그 장면을 교정합니다. 당시의 일을 새롭게 다시 쓰는 겁니다. 과거를 내가 삼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과 일치하게끔 다시 썼다면 이제는 마치 내가 육신을 가지고 그렇게 행동했던 것처럼 상상 속에서 경험해 봅니다. 이것이 현실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낼 때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 이렇게 교정하고 상상 속에서 다시 체험한 것은 과거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교정한 모습으로 미래를 향해 가게 된다는 것을 저는 경험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만일 불쾌한 장면을 교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세상에서 다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무엇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해가 저물 때까지 분노를 지니고 있지 않을 겁니다. 그날의 마지막 시간에, 오늘 내가 겪었던 일들이 아무리 현실처럼 느껴지더라도 나는 그것을 확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새롭게 씁니다. 그래서 그 사건을 무효로 만들어 그것과 상응하는 변화를 외부 세상으로 이끌어냅니다. 

 

- 이제 진정한 교정의 기술을 시작하십시오. 상대방의 외부 모습과 관계없이, 그리고 당신이 그 사람에 대해 그동안 어떤 관념을 갖고 있든 관계없이 당신 안에서 그를 고양시키는 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책무입니다. 이 일을 하게 되면 당신은 당신이 불쾌한 이유가 상대방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일 상대방으로 인해 불편한 감정이 일어났다고 생각된다면 당신 내면을 보십시오. 그곳에 불편함의 원인이 있을 겁니다. 

 

- 난 지금 내가 살고 싶었던 모습으로 살고 있나요? 내가 필요한 만큼의 수입을 얻고 있나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입을 갖고 있나요, 아니면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맞춰서 내 자신에게 한계를 씌우고 있나요? 형태를 재창조하는 토기장이의 능력에는 어떤 한계도 없습니다. 

 

 

단언컨대 실패에는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자연스러움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은 수많은 상태들을 거쳐가는 순례자입니다. 이 상태들은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순례자인 당신은 이것들을 지나갑니다. 여행자처럼 거쳐 갑니다. 당신은 한때 가난했다가 그것으로부터 나와 풍요의 상태로 옮겨갔더라도 가난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 상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지난밤 여러분은 어땠습니까? 분노를 지닌 채 잠에 들었습니까? 풀지 못한 문제와 짜증을 지닌 채 잠에 들었습니까? 아니면 그날의 모든 짜증과 문제들을 다 풀고서 침대로 들어갔나요? 그날 삶의 무대에서 펼친 연극 대본을 다시 쓰셨나요?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듣는 자일뿐 실천하는 자가 아닙니다. 

- 제가 주장하는 세 가지 명제는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개개인의 의식상태가 삶의 조건과 환경들을 결정한다는 것, 두 번째 명제는 인간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의식상태를 고를 수 있다는 것, 세 번째 명제는 우리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만일 당신이 현재 머물고 있는 상태를 모른다면 그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매우 간단한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자신 내면에 귀를 기울여 어떤 마음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관찰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하나의 상태는 그것 고유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이고, 그 상태는 인간 내면의 대화를 통해 그 고유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내면에서 말하고 있는 것에 주의 깊게, 그리고 비판 없이 귀 기울인다면 당신이 머물고 있는 상태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마음에서 들리는 대로 세상도 그 모습 그대로라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을 내면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셰익스피어는 <베니스 상인>의 포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유익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한지 아는 것만큼 쉬웠다면 작은 예배당은 큰 교회가 되었을 것이고 가난한 자의 오두막은 왕자의 궁전이 되었을 거야. 자신이 가르친 것을 따르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지. 옳은 일 하나를 행하는 것은 무엇이 옳은지 스무 개를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어렵지." 

 

- 잠시만 멈추고,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세요.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당신은 매 순간 아주 작은 내면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를 대단하다 생각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속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나요? 당신이 실제로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는 오직 신만이 듣고 있습니다. 외부에서는 그를 만나 반갑다고 말하기도 하고 만난 것에 대해 아첨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 당신은 속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나요?  

 

- 여러분이 내면을 관찰했으면 합니다. 당신 내면에서 실제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찰하십시오. 바로 그곳이 하느님이 보고 있는 곳입니다. 당신은 아주 작은 음성으로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속으로 말하고 있고, 그것들이 당신 주변의 세상으로 결정화되고 있는 중입니다. 

 

-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그냥 두세요. 그런 말들에 신경만 끄면 됩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분리의 상태가 일어나야만 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두고 싸우지 마십시오. 자기 정당화는 지옥에서 들리는 목소리입니다. 그러니 항상 자신이 옳다고 싸우지 마십시오. 인간에게서 치유하기 힘든 병이 있다면 자꾸 무엇이든 정당화하려는 행위입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지 마세요. 당신은 경험한 것을 알고 있고, 이 경험은 어떤 것으로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이것을 경험하고, 가장 영광된 모습으로 성취했다면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면 됩니다. 당신의 경험들은 모두 성서에 있습니다. 

 

- 진리가 이 세상에 나타날 때, 그는 평화가 아닌 칼을 가져다주기 위해 옵니다. 그는 과거 속에 당신을 묶어 놓았던 관습적인 배경들을 끊어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종교적인 관점에서의 진정한 발전은, 관습적인 하느님에서 경험의 하느님으로의 점진적 전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하느님을 직접 경험하여 그 경험이 모든 것을 통해 나타나게 될 때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면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의 의심도 들지 않습니다. 당신의 영원한 아들 앞에 당신이 섰을 때 기억은 돌아옵니다. 아들도 알게 되고, 당신도 알게 됩니다. 당신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세상 어떤 사람도 이 기억을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절대 경험한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 그렇기에 하느님은 모든 이들을 용서합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상태에 있을 뿐이란 것을 알기에 모든 이들을 다시 의롭게(올바르게) 만듭니다. 주가 이 모든 상태들을 창조했습니다. 이것은 블레이크가 했던 다음 말의 뜻입니다. "난 정의로운 자나 사악한 자나 궁극적인 상태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들 모두가 '영혼이 뱀을 따라 천상을 떠났을 때 선악의 치명적인 꿈 속에 빠지게 만들었던 잠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 

 

- 우리는 여러 상태들을 거쳐가는 순례자입니다. 그러니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동하는 방법을 완전히 통달하십시오. 당신은 어떤 상태가 아닙니다. 그랬던 적도, 앞으로 그렇게 될 리도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비난하고자 한다면 그 상태를 비난하십시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굳이 상태를 비난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저 그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을 다른 상태로 옮기면 그만인데 말이죠. 당신 자신을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기십시오. 사람들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신경 쓰지 말고,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일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태에서 당신이 원하는 다른 상태로 옮기는 일을 말합니다.

 

- 이것의 시작은 욕망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이 진짜 바라는 것입니다. 무한한 이 모든 상태들은 그저 인간의 욕망을 달래주기 위한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선하다고 생각한 그런 모습이 되기를 원합니까? 풍요롭게 되기를 원합니까? 이런 것들 모두는 상태들입니다. 당신이 그 자격을 갖추기 전에 먼저 그 상태에 들어가 머무십시오. 그 상태는 그것이 물질로 나타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곳을 차지하는 자이며, 당신은 그곳에 들어가 그곳에 거해야만 합니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그 안에 머물러 보겠습니다. 내가 양전자처럼 돌아왔을 때, 완전히 탈바꿈됩니다. 나는 그저 방향만 조금 바꾼 채 가던 것과 비슷한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상태는 너무나 진짜 같았기에 눈을 떠서 내가 다시 돌아와 있는 것을 봤을 때 난 놀라게 되고, 이 충격은 나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이제 난 더 이상 양전자가 아닌 전자로서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 후 사건의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 자신을 바꾸십시오. 이것을 직접 시험해 보는 방법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원하는 상태에 자신을 두십시오. 우리가 새 옷을 입으면 그게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이것처럼 당신은 그 새로운 상태가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까지 그 상태에 머무십시오. 옷가게에 가서 새 옷을 구입하고 5번가를 걷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알아채지는 못하지만 당신은 사람들이 마치 새 옷을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1-2주가 지나면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일이 새로운 상태에 들어갈 때에도 일어납니다. 새로운 상태에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자신을 어색하게 느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어색하게 생각할 거라 느낍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옳게 바로잡힌 의로운 상태가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계속 두르고 있으십시오. 이것이 자연스럽게 되는 순간 그 상태의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시공간 전부는 이미 놓여 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의 증가하는 부분만을 연속적으로 인식하는 것뿐이다." 

 

- 이 세상에는 무한하게 많은 상태들이 존재합니다. 당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란, 모든 상태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역할을 연기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소원한 상태가 이루어지게 하는 데에 필요한 상태들이 적당한 시간에 당신 주변에 나타날 것입니다.  

 

과거에는 다른 이들이 바뀔 필요가 있다고 믿으면서 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데에 공을 들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변화된다면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그들 안에 있고, 그들도 또한 내 안에 있고, 우리가 하나이기에, 이제는 깨어나서 나 자신을 신성하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신성하게 변화시킵니다.
변화시켜야 할 사람은 오직 자신뿐입니다. - <리액트>

 


- 여러분 중 많은 수가 최근에 죽는 꿈을 꿨습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징조입니다. 꿈은 에고에 관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자신을 둘러싼 한계를 깨고 그것보다 더 커지지 않으면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더 커진다는 것은 기존 한계에 대한 관점에서 본다면 죽음입니다. 당신은 하나의 상태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다른 상태로 옮겨갑니다. 바울이 "나는 매일 죽는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죽는 꿈을 꾼 사람은 감사해야 합니다. 매일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매일 그가 죽지 않았다면 성장하지 못했을 겁니다. 죽음은 성장에 대한 멋진 상징입니다.

 

- 당신은 변화를 위해 지금부터 계속해서 노력할 수 있지만, 진짜 변화는 오직 새로운 본성이 당신에게 완전히 접붙임 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건 선물입니다. 성경에는 "법칙은 모세에 의해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다."라고 쓰여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을 읽어보십시오. "교회들로 가서 이렇게 말하라. 나는 다윗의 뿌리이자 자손이며 찬란한 아침 별이다." 나는 뿌리, 자손 양쪽 다라고 말합니다. 뿌리와 자손을 동일하게 보았고, 그 가운데에 다윗을 두었습니다.   

 

- 에베소서 4장에서 하나의 진리에 대해 말해주는데, 이건 하느님의 아들에 관련된 신비한 진리입니다. 그분은 아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다윗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분은 그대가 하느님의 아들을 알게 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아들을 보게 되고, 이렇게 아들을 보게 되었을 때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기 때문에, 그때 그런 앎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들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소망이 성취된 느낌을 사실로 받아들여 그 느낌에 완전히 휩싸여서 그곳에서 하는 행동을 현실로 믿는 상태까지 갈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 상상은 스스로 외부 세상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이 현실에 일어났다면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어떤 느낌일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마치 옷을 입듯이 이 느낌을 두르십시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인 것처럼 걸어 나가십시오. 마음속 비전에 믿음을 유지하고, 이것이 사실인 것처럼 잠드십시오. 보이는 것은 그렇게 보고 있는 자에게 사실이기 때문에 현실이 될 것입니다. 

 

- 당신의 이성과 감각은 지금 당신이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더라도 당신은 당신이 이미 원하는 모습의 남자, 혹은 여자라고 믿으면서 잠들 수 있습니까? 당신의 이성과 감각을 무시하고 당신이 원하는 모습이란 것을 담대하게 받아들이며 이 가정 속에서 잠들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반드시 현실로 이루어질 겁니다. 

 

-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기도할 때 이미 받았다고 믿어라. 그러면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런 형태의 기도만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라고 하는데, 당신은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간청하고 애원하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에 성공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원하는 것을 마음에서 차지해야만 합니다. 기도는 객관 세상의 소망을 내면 세상에서 자기 것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나는 내가 외부에서 바라는 것을 내면에서 가져봅니다. 그러면 이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내 세상에 와서 내 앞에 나타납니다. 우리 중 많은 수가 상상이 현실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상상했던 때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 세상을 보면서 우리가 상상이란 것을 통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창조했던 겁니다. 신문 1면을 보면 세상의 가장 끔찍한 일이 나와 있는데 이건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이런 것들을 창조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상상력을 통제하지 못했기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계속 이런 끔찍한 것에 영양분을 주었습니다. 당신의 경이로운 상상력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당신이 이렇게 할 때 이 땅 위에 하늘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 오늘 바로 시작하세요. 오늘 바로 교정의 기술을 배우세요. 하루의 끝에 그날을 다시 회고해 봅니다. 만일 그중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겼다면 그 부분을 다시 써봅니다. 다시 썼다면 그것을 연기해 보세요. 이렇게 다시 연기했다면 과거를 바꾼 것입니다. 이 순간은 과거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미래로 나아가 다시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 어제는 오늘의 미래입니다. 당신은 어쩌면 단지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의 순환고리를 통해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당신이 깨어나기 시작할 때 당신의 미래에서 과거를 마주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만일 이것을 바꾸지 않는다면 계속 과거를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이 반복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전 여러분이 깨어난 인류의 형제단에 들어갈 수 있도록 깨어났으면 합니다. 

 

-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것을 깨고 나오기 전까지는 시간의 순환고리가 당신을 계속해서 이전 행동으로 돌려놓고 돌려놓을 것입니다. 당신이 깨고 나오는 순간 당신은 깨어난 자들의 그룹에 들어가게 됩니다. 확실한 건, 당신은 지금 잠의 상태에서 만나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깨어난 상태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다 친밀하게 느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깨어났을 때 만나게 되는 깨어난 사람들만큼 친밀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이 지상에 없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 가게 되면 당신은 그들과 섞여서 하나가 됩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정체성을 잃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은 더 거대한 개별성을 향해 계속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결코 흡수되어 당신의 정체성을 잃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깨어나게 되면 항상 당신의 존재였지만 실낙(失樂)이라는 잠에 빠져 망각하게 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게 됩니다. 내면 인간 안에는 외부 인간이 결코 만지지도 상처를 주지도 못하는 아름다운 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깨어날 때 그들은 그곳에서 당신을 만날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애타게 당신이 그 순환 고리를 깨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저는 황금 실의 끝자락을 당신에게 쥐여주고, 그것을 공 모양으로 말아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 당신을 예루살렘의 벽으로 만들어진 하늘나라의 문으로 인도할 겁니다. 여러분을 대신해 제가 그 일을 해줄 수는 없고 단지 매일 교정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을 통해, 그리고 당신 내면의 활동을 관찰하는 것을 통해 황금 실의 끝자락을 둥글게 말아보기를 권하며, 그래서 내면의 활동에 상응하여 당신이 원하던 바깥세상의 활동이 일어나는지 보길 바랍니다. 

 

- 당신의 내면 대화를 유심히 살펴봤을 때 그 대화가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전제에서 쓰이고 있나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내면의 대화를 이 세상에서 당신이 나타내길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만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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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초반 강의의 핵심은 '상상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법칙이라고 말한다. 압둘라는 네빌에게 두 번의 죽음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여기서 죽음이란 과거의 시야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되는 경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단어이다. 첫 번째 죽음은 그가 뉴욕에서 바베이도스에 가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을 때이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사용해 소망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첫 번째 경험을 하게 된다. 이로써 상상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뒤바뀌게 된다. 압둘라가 세상을 떠난 후 네빌은 그가 압둘라에게 배웠던 '법칙'을 미국 전역에 강의한다. 그러던 중 그는 압둘라가 예언했던 또 한 번의 상징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약속이다.

- 네빌은 1959년부터 1260일에 걸쳐 일정한 내면의 경험을 갖는다. 그것은 자신 안에서 또 하나의 자아가 깨어나는 신비적이면서 상징적인 경험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것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에게서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이 경험은 그 해 여름에 시작되어 3년 반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이 경험을 겪은 후 1960년도와 1970년도의 강연에서는 법칙보다 약속을 더 강조했다.
"당신은 상상의 힘을 이용해서 자신의 환경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상상력을 이용해서, 큰 부를 얻거나, 유명해지거나,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란 존재의 진짜 목적은 단지 이것만이 아닙니다. 바로 약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 "당신은 문을 열고 새로운 곳으로 가게 됩니다. 우린 그 문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단지 그뿐입니다. 우리가 죽은 즉시, 다시 이 세상처럼 회복됩니다. 지금 이 땅에서 가졌던 것과 같은 문제를 지니면서 그 세상에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곳에서도 성장하고, 결혼하고, 이곳에서 지녔던 죽음에 대한 공포도 똑같이 지닌 채 죽습니다. 만약 약속을 경험하지 못한 채 죽음을 겪게 된다면 자신의 과업을 가장 잘 성취할 수 있는 장소를 골라, 그곳에서 태어나 죽고, 태어나 죽고를 반복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당신 안에 그리스도가 생겨나면 그때 당신은 부활의 아들이 되어 더 이상은 이 죽음의 세상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 그는 자신이 죽기 전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짧다는 것을 전 압니다. 전 이 땅에서 제게 주어진 일들을 다 마쳤기 때문에 이곳을 떠나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습니다. 약속은 이미 제게서 이루어졌기에 전 이 3차원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어디에 있든, 저는 지금 이곳에서 여러분들을 알아보는 것처럼 그곳에서도 여러분들을 알아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이란 무한한 끈 안에 묶여 있는, 하나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행복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원하는데 그것에 못 미친 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일시적으로 구원받는 느낌을 받습니다. 안도의 느낌, 후련한 느낌입니다. 물론 우리의 욕망을 버리거나 줄일 때도 원하는 것과 현실의 차이가 줄어들어 행복하고 평온한 느낌을 받기 때문에 많은 책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네빌 고다드는 우리에게 의식의 힘과 의식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진리를 전하고자 한 분이었기 때문에 의식을 이용해서 어떻게 외부를 조절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의식을 잘 조절하면 그 거대한 힘으로 인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실로 구원이고, 이것을 가져다준 무언가는 구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작은 구원이고, 네빌 고다드는 이렇게 삶에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을 법칙이라 불렀습니다. 

 

- 하지만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는데, 그것은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구원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만들고 사랑하는 관계를 얻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고 하여도 언젠가는 이것들을 다 두고 떠나야 합니다. 물질적인 것은 언젠가는 다 놓아버려야 하는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이런 일시적인 것에서 구원해 주는 궁극적 구원이 바로 약속이고, 네빌 고다드는 불멸의 시야를 얻는 것이라고도 말했습니다.

 

- 육신이 어떤 일을 당해 당장 숨이 멎고 죽더라도, 이 육신의 죽음과는 관계없이 여전히 삶을 계속 이어가는 존재가 있고, 심지어는 이 우주가 폭발해도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고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존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참자아, IAM이라고 합니다. 태어난 적도 없고, 죽지도 않는 참된 '나'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육신의 시선에만 속박되어 있기에 불멸의 자아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 불멸의 시야를 얻게 되는 과정이 약속의 과정입니다. 모든 고통과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되는 진정한 구원을 얻는 과정입니다.

 

- 나중에 모세는 요셉의 이름을 여호수아로 바꿨습니다. 여호수아는 예수를 히브리어 형태로 나타낸 말입니다. 예수는 '여호와가 구원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와 여호수아의 어원은 Yad He Vau) 요셉의 이름은 이제 여호수아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입니다. 

 

- 그렇습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내가 상상한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모두 나로부터 생겨납니다. 무엇이라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상상한 것은 당신 세상 안으로 들어와 공간이라는 장막에 모습을 투영시켜, 당신이 지닌 창조력에 대한 증거를 보여줄 겁니다. 당신은 이 일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계속해서 하는 중입니다. 당신이 지금 어떤 상상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것은 하느님의 활동입니다. 당신이 상상하는 것처럼 당신의 삶도 그렇게 될 겁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이 되고 싶나요? 하느님이 누구인지만 안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에 의해서 모든 것이 지어졌고, 그분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지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 멋진 세상은 그저 욕망을 달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당신이 누구인지 안다면 당신은 어떤 상태라도 들어가 그곳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상태들은 순전히 일정한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수단들일 뿐입니다. 


- 우리의 삶이란 것은 계속해서 마음을 쓰는 시간들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는 것도 마음을 쓰는 것이며, 우리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 것도 마음으로 겪는 것이며,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계속해서 마음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마음 쓰는 법을 가르치진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나 선생님도 "이것 하지 말라." "저것 하지 말라." 식의 말은 많이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써야 옳은 것을 하고, 옳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인, 마음 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삶의 한가운데에 있는 중입니다. 마치 운전면허 없이 고속도로 한가운데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 당신이 겪고 있는 것은 삶이란 꿈입니다. 당신이 지금 삶이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수록, 당신은 점차 삶이란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겁니다. 그런데 당신이 밤에 꿈을 꾸고 있을 때 지금 꿈꾼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깨어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당신은 꿈을 조절하면서 원하는 방향으로 꿈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삶이란 꿈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 인간은 오직 상상력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이고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도 그분 안에 있습니다. 인간의 불멸의 몸은 상상력이고, 그것이 하느님 그분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라 부르는 이 신성한 몸은 육신이란 겉옷 안에 묻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은 이 안에 묻혀 있는 인간의 상상력이 온전하면서도 완전하게 깨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생명에 대해 갖고 있는 개념들은 모두 이 하느님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가 그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나? 그러지 못했다면 그대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더라. 자신을 시험해 보라. 그래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지 확인해 보라." 우리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만일 그랬다면 우리는 그분이 어디에 있는지,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볼 것입니다. 

 

- 전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에 의해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도 저도 아닌 것이든 모든 것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을 알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관찰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만들고 있는 그분이 누구인지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전 그분이 제 안에서 하나의 꿈을 꾸고 있는, 꿈꾸는 자임을 알아냈습니다. 그 존재는 바로 하느님입니다. 그 존재는 제가 건너게 될 사건의 다리를 만들어서 아침이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저를 깊고 깊은 잠에서부터 표면 마음으로 데려옵니다. 오직 장엄한 마법적 존재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분은 저의 백일몽을 만드는 바로 그 꿈꾸는 자입니다.  

 

- 직접 시험해 보길 바랍니다. 믿음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썼을 때, 혹은 하느님, 주, 여호와라는 단어를 썼을 때 이 의미가 당신 외부에 있는 어떤 존재처럼 느껴졌다면 당신은 시험에서 탈락한 것입니다. 주, 하느님, 여호와는 당신의 상상력이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바울은 "내가 믿었던 사람이 누구인지를 안다."고 말했습니다. 디모데서를 펼쳐 읽어보십시오. "네가 내게서 들었던 진실한 말씀의 본을 따르라.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이 당신에게 맡긴 진리를 지켜라."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합니다. 그분은 성스러운 자이며, 당신이란 꿈을 꾸는, 꿈꾸는 자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선한 의지를 내는 순간뿐만 아니라 악한 의지를 낼 때조차도 신속히 당신의 명령을 이행합니다. 정말 어떤 의지를 내든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서 선도 악도 모두 나옵니다. 이사야 45장입니다. 귀 기울여 잘 들어보십시오. "나는 빛을 만들고 나는 어둠을 창조한다. 나는 행복을 만들며 나는 슬픔도 만든다. 주님인 나는 이런 것들 모두를 한다."

- 당신도 언젠가 제가 왜 소매 이야기를 하는지 알게 될 겁니다. 소매가 잘려 나갔을 때 주의 권능과 힘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일은 당신이 위로부터 태어났을 때 겪게 됩니다. 하느님이 다양한 색깔의 의복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때 벗겨진 소매는 가장 아름다운 연푸른색 빛을 띱니다. 권능을 가진 듯한 분이 소매를 잘라냅니다. 여러분도 이 말을 들어봤을 겁니다. "누가 내 소식을 믿었던가, 주의 팔이 누구를 향해 나타났는가?" 누구의 팔이 드러났습니까? 주, 그분의 팔입니다. 이것들 모두가 당신이 지닌 하느님에 대한 앎에 더해집니다. 하느님을 외부 어디선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인 그분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당신이 주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입니다. 세상에는 하느님 외에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 당신이 겪고 있는 것은 삶이란 꿈입니다. 당신이 지금 삶이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수록, 당신은 점차 삶이란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겁니다. 그런데 당신이 밤에 꿈을 꾸고 있을 때 지금 꿈꾼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깨어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당신은 꿈을 조절하면서 원하는 방향으로 꿈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삶이란 꿈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것이 꿈이란 것만 안다면, 당신이나 당신의 친구가 원하는 모습이 된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 후 믿음을 유지하는 것을 통해 꿈의 패턴을 변화시켰던 것처럼 당신의 삶도 그렇게 원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다시 말해 당신의 경이로운 상상력을 믿고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렇게 믿고 있는 만큼 당신의 세상 안에 모습을 나타낼 것입니다.

 

- 이건 여러분들 모두에게 드리는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제가 뱉은 말 중 한 마디도 취소하거나 바꾸지 않을 겁니다. 제 안 깊숙한 곳에서 이것 전부가 저에게 나타났습니다. 

 

- 만약 내가 상상을 하기 시작했고 상상하던 것이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 누구도 상상이 현실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을 나는 이미 상상 속에서 봤기 때문에 설사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 상상을 보여주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상상이 현실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게 됩니다. 내가 만약 사업에 관심이 있다면 상상이 현실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나는 전력을 다해 마음속에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팔 것입니다.  

 

- 성경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장엄한 꽃을 지칭하는 다양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복음서의 주인공을 인간의 상상력으로 보는 제 견해가 여러분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성경을 쓴 고대인들이 진정 의도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복음서를 오해해서 역사나 전기 혹은 우주론으로 생각했기에 자신 안에 있는 힘에 대해서는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무지의 잠을 자고 있습니다.

 

- 하느님이 내게 무엇을 주었나요? 내 삶의 모든 경험들을 주었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당신을 주었습니다. 내가 만나게 되는 남자, 여자, 아이 모두 아버지로부터 오는 선물이지만, 내가 사회를 대하는 태도와 내가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로 인해 그들은 내 안에서 특정한 느낌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깨어나 하느님의 시야가 열렸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은 눈에 보이게 된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나의 진짜 목표를 이뤄야만 합니다. 그것은 나를 보낸 하느님의 의지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내 안에서 타락하게 되었던 그들을 다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 저는 친구를 마음에 떠올려서는 마음의 눈을 통해 아주 멋지고 새로운 관념을 그 친구에게 입힐 것입니다. 잠든 자의 위치에 있을 때는 내가 상상하고 있는 것이 완전히 내면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소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눈이 열렸을 때 친구는 제가 원했던 그런 모습을 한 채 제 앞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잠든 자(깨어나지 못한 상상력)에게는 하나의 관념이었던 것이 깨어난 자(깨어난 상상력)에게는 객관적인 현실이 됩니다. 

 

- 저는 당신이 진정 꿈꾸는 자와 하나가 되길 바랍니다. 당신이 이 꿈꾸는 자와 하나가 된다면 당신은 바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꿈은 당신이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밤의 꿈이기도 하고 낮의 꿈이기도 합니다. 

- 사람들이 제게 묻습니다. "네빌, 비전(vision, 생생한 환영)이 뭡니까?" 그러면 저는 답합니다. "지금 여기도 밤에 보게 되는 환영만큼 환영의 세상입니다. 제가 보는 밤의 환영은 지금 이곳이 단단하고 실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입체적인 현실입니다. 이 세상 전부가 모두 생생한 환영인 비전입니다." 

- 블레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저 상상력을 비전(생생한 환영)의 상태까지 끌어올리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러면 끝난 것이다. 하지만 생생한 환영의 속성에 대해, 즉 상상력의 속성에 대해 사람들 대부분은 모른다." 바로 여기, 이 세상 전부가 생생한 환영의 상태이고, 당신이 이것 전부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 이 훈련은 우리가 보이는 것을 수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벗어나서 상상력을 적극적이면서 의도적으로 사용하게끔 합니다. 만일 당신 세상 안에서 이루고 싶은 이상적인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절대 그것을 최종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앞서 여성분이 했던 것과 똑같이 하십시오. 반드시 지금 당장 매일 하십시오. 결과물이 내일이나 모레 또는 일주일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그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 이 교정의 기술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보다 거대한 목표를 이루게 해 줍니다. 거대한 목표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존재를 내 안에서 깨우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경이로운 상상력이라고 부릅니다. 상상력이 깨어나면 신의 시선이 됩니다. 이 시선은 생각의 세상인 내부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보게 되는 순간 내가 이제껏 외부에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내가 신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처럼, 이 창조된 세상 전부는 내 안에 뿌리내려 있고 내 안에서 끝맺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순간부터 삶에서 진짜 목적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그분의 뜻은 바로 이렇습니다. "그분이 내게 준 모든 것을 하나도 잃지 않고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 예레미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일어나서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거기에서 나는 그대가 내 말들을 듣게 할 것이다. 나는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그의 물레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그가 진흙으로 만들고 있는 용기가 그의 손에서 망가졌더라. 하지만 그는 그것을 그가 보기 좋은 모습으로 다시 만들더라." 

 

- 상상은 아버지인 주가 활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 잠시 서서 제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관찰해 봅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나요? 아니면 이것과는 거리가 있는 훼손된 모습인가요? 그렇다 해도 난 그것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저 그것을 토기장이인 내가 보기에 좋은 모습의 용기로 다시 만들 뿐입니다. 
 

- 사람들이 '상상력'이란 단어에 대해 정의한 것을 보겠습니다. 성서는 이것을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는 토기장이로, 하느님 아버지로 정의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의미를 정확하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형체를 가진 대상을 알아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인지된 감각을 통해서이다."라고 말합니다. 인지된 감각입니다. 전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말하게 된다면 저는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지된 감각입니다. 따라서 당신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말하자면 그것이 실재입니다. "만일 존재하지 않다면 그것은 상상력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실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은 인지된 감각이 아니란 말입니다.  

 

-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 현실이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며, 소유했다는 감정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의 비율에 맞춰 실현됩니다. 만일 어떤 것이 당신에게 자연스럽게(naturalness) 느껴지지 않았다면 당신의 본성(nature)이 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내 이름으로 요청하라는 말은 내 본성(자연스러움)으로, 다시 말해 내 개성으로 요구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할 때면 당신은 당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 이미 되었다고 자연스럽게 느껴야만 합니다. - <리액트>

 

- "내가 이미 먹었는데, 그렇다면 왔었던 것은 누구였느냐?" 그리고는 간교한 속임수를 써서 자신을 속였던 것이 아들 야곱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말을 잇습니다. "너에게 주어야 할 축복을 이미 야곱에게 주었고, 나는 그것을 취소하지 못한다. 그가 축복받았기에 모든 이가 그를 섬길 것이다." 

 

- 이 책의 앞부분에는 방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방주를 아랫부분, 중간 부분, 윗부분 세 개 층으로 지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방주를 어떤 거대한 건물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방주의 크기를 생각해 보세요. 모든 동물들의 암수 쌍, 선한 것들은 7쌍, 게다가 이것들을 40일 밤낮 먹일 충분한 음식까지, 이것들을 다 실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방주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그 이야기입니다. 

 

- 자, 이 방주에는 세 개층이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현실이란 층, 그리고 현실이라는 것들에 대한 마음의 해석이란 층,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 이야기에 대한 영적인 완성이란 층입니다. 이렇게 셋이 아래층, 두 번째 층, 세 번째 층을 구성합니다. 여기 두 번째 층의 완벽한 예시가 있습니다. 지금 이 방은 현실입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세요. 이곳이 내게는 감옥이라고 가정해 보세요. 내가 이곳에서 나갈 수 있나요? 현실을 꿰뚫고 나가는 방법을 안다면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방주이고, 모든 것이 인간의 상상력 안에 존재하고, 인간의 상상력과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을 안다면 나는 상상력으로 어떤 벽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눈 깜짝할 사이에 이 단상이 아닌 바깥 도로에 서서, 이 단상을 볼 수 있습니다. 

 

- "어떻게"라고 묻지 마세요. 길과 방편은 당신이 들어간 상태 안에 이미 다 갖춰져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의 상태에 들어가면 그 상태는 외부로 나타내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다 갖추고 있습니다. 멋진 상태를 고르십시오. 그리고 그것 속으로 곧장 들어가서 그곳에서 거주하십시오. 전 이것을 상태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소망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소망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지금 당신은 현실들이 당신을 둘러싸서 당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는 현 상태로부터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렇게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당신의 상상 속에서 다른 상태로 들어가서 그곳으로부터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현실들은 그 새로운 상태에 정박될 것입니다. 

 

- 블레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정의로운 자나 사악한 자나 궁극적인 상태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선악의 치명적인 꿈에 빠져들게 한 잠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영혼은 하나의 상태를 생각해 보다가 자신이 그것에 빠져서 그것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부자일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그저 상태들일뿐입니다. 어떤 상태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곳에 들어가 있는 이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 가난이라는 상태에 들어가 있는 이는 '가난하다'라고 말하기 전에 '나는(I am)'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부자다.'라고 말할 때의 '나는(I am)'과 '나는 가난하다.'라고 말할 때의 '나는(I am)'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부의 상태를 점유하고 있는 것과 가난의 상태를 점유하고 있는 존재는 똑같은 나(I AM-ness)입니다. 당신은 어떤 상태라도 들어갈 수 있으며, 그 상태에 있는 존재가 하느님입니다. 당신은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이 상태들을 걸치고 있습니다. 

- 하지만 당신은 계속 일관된 마음을 가져야 하며, 믿어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우리는 그대가 하느님의 성스러운 자임을 믿고 알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후에 가져야 하는 것은 믿음이 나타내는 것보다 더 단단한 것인 경험입니다. "우리가 믿고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믿어서 그 믿음으로 나아가봐야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그 후에 개인적으로 경험을 얻게 됩니다.

 

- 만일 첫 번째 명제가 진실이라면 개개인의 의식상태는 그가 겪고 있는 삶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왜 자신의 의식상태를 보다 좋은 상태로 변화시키지 않을까?"

 

- 그런데 이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 여러분에게 이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기법을 전해주고자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는 상태를 떠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습관에 갇혀 있습니다. 

 

- 그저 시간이 지나는 것만으로, 어떤 변화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결과가 일어나기 위해서 하나의 의식 상태가 필요하다면, 만약 그 의식 상태가 없다면 결과가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만일 무언가를 현실에서 찾아내기 전에 내가 그것을 먼저 의식에서 인식해야만 한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이란 오직 그 의식의 상태를 획득하는 것뿐입니다.

 

- 의식상태란 한 사람이 사실로 믿고 받아들이고 동의한 것의 총체입니다. 이렇게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 사실일 필요는 없습니다. 틀린 것일 수도 있고, 절반만 진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아니면 미신이거나 선입견일 수도 있습니다. 그저 그 사람이 믿고 있는 것들 모두가 그의 의식 상태를 구성합니다. 이것은 그가 머물고 있는 집입니다. 그가 이 집에 머물러 있는 한, 비슷한 문제들은 계속해서 주어질 것이고, 그가 사는 환경들은 계속해서 그대로일 겁니다. 세상 어디론가 도망칠 수 있지만, 이런 물리적 이동이 그가 머물고 있는 의식의 집에서 나가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계속 비슷한 문제를 겪게 됩니다.  

 

- 성경은 이 집들을 주의 저택이나 도시, 혹은 방이나 윗방으로 묘사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단어들은 개개인이 머물고 있는 의식의 상태를 묘사하는 데에 쓰였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곳으로부터 나와서 윗층으로 가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가라는 뜻입니다.

 

- 당신이 내면에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외부에서 무엇을 알고 무엇을 행동하는지 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당신이 내면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때 당신은 그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만일 삶에 대한 당신의 반응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 본 적이 없다면, 그래서 당신 내면의 행동을 전혀 모른다면 당신은 당신 세상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당신의 상태를 알게 되었다면 당신은 그저 그것을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 사랑으로 충만한 상상력은 오직 사랑스러운 것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존재가 당신 안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면 당신은 세상 어떤 것도 완전히 객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모든 것이 주관적으로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은 낯선 사람이란 없습니다. 당신은 처음 만나는 사람조차도, 완전히 낯선 자가 아니란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를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그가 스스로 당신의 세상 안으로 들어올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 "내가 그를 부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나에게 오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내 생명을 뺏지 않는다. 나 스스로 내려놓을 뿐이다." "당신이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 선택했었다." 이 상태에 오면 당신은 상처를 받지 않게 됩니다. 당신은 이전에 세상을 향해 드러냈던 모든 분노를 극복하게 됩니다. 당신은 잠자고 있는 자들을 더 이상 비난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에 그저 혼돈의 꿈을 꾸고 있을 뿐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기법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사용해 보십시오. 저는 보이는 것들에 굴복하는 수동적 마음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지난밤 여러분은 어땠습니까? 분노를 지닌 채 잠에 들었습니까? 풀지 못한 문제와 짜증을 지닌 채 잠에 들었습니까? 아니면 그날의 모든 짜증과 문제들을 다 풀고서 침대로 들어갔나요? 그날 삶의 무대에서 펼친 연극 대본을 다시 쓰셨나요?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듣는 자일뿐 실천하는 자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단지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라, 그대가 듣는 자일뿐 실천하는 자가 아니라면 그대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고는 돌아서자마자 자신의 생김새를 잊어버리는 자와 같다. 만일 그대가 바로 잊어버리는 듣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라면, 그 행실로 인하여 축복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자유의 법칙을 자세히 살펴서 자신을 해방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해방시킬 때 그대는 그 행실로 인하여 축복받을 것이다." 야고보서 1장에서 이 이야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이 세 가지 명제를 믿으세요. 믿으셨다면 이젠 해보십시오! 나가서 제가 내면의 대화에 관하여 했던 말을 실천해 보십시오. 이건 정말 가장 위대한 기법입니다. 귀를 기울이세요. 당신이 듣기 원하는 것만을 들으세요. 상상의 손으로 친구의 상상의 손과 맞잡은 후에 그가 얻어낸 행운을 축하해 주세요. 만일 당신을 축하해주고 싶다면 사람들이 당신을 축하하게 하십시오. 고개를 숙이지 마세요. 고개를 세우고 축하를 받으세요. 

 

- 이것이 정말 하늘나라의 왕국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스러운 내부교감을 통해 왕국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전차를 타고 가거나, 버스를 타고 가거나, 그 어떤 시간에도 왕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친구와 대화를 하며 수다를 떨면서도 그저 상상 속에서 당신이 그에 관해 들었던 좋은 소식으로 그를 축하해주고 있다면 친구를 축복하면서 당신은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후 상대방이 친절하게 대답하는 것을 들어보세요. 이 순간 당신은 그를 축복한 것입니다. 당신이 그의 마음 구조 안에서 하나의 변화를 만들어 ...

 

- 현재와는 반대의 속성에 들어가서 그것의 일부가 되는 인간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라고도 합니다. 전 어떤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을 용서합니다. 그래서 그를 그곳에서 건져 다른 상태에 놓습니다. 그는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얼마나 많이 내 형제를 용서해야 하나요, 주여?" 여기서 형제는 여러분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감각의 인간이 있기 때문에 용서에 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감각의 당나귀 위에 올라타고 있습니다. 내가 과거의 상태로 돌아갈 때마다 얼마나 자주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입니다. 일흔 번을 일곱 번만 하지 마십시오. 나는 지금 내가 원하는 그 사람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 설득될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어쩌면 처음 하자마자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나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설득하는 데에 하루가 걸릴 수도, 일주일이 걸릴 수도, 한 달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성과 감각이 거부하는 순간에도 나는 계속해서 그 가정이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사실로 고집할 수 있습니까? 힘은 내 안에 있지, 바깥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가정은 외부로 모습을 나타낼 것입니다.  

 

- 바깥으로 내뱉는 말은 우리 안의 진심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이 보고 있는 것은 외부인간이 아닌 내면의 인간입니다. 우리 주변의 세상으로 단단하게 굳어진 것은 바로 이 내면의 말입니다. 세상 전부는 내면의 대화가 굳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내면에서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 시편 50장에서는 "자신의 대화를 옳게 만드는 자에게 나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합니다. 만일 아침, 점심, 저녁 계속해서 내면의 대화를 통제해서 꿈 세상까지 지니고 간다면 자신이 만들고 있는 세상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 그런데 만일 당신이 계속 언쟁하는 분위기에 있으면서 그 분위기를 계속 즐기고 있다면 단지 마음속 언쟁에서 끝나지 않을 거란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건 계속 부풀어져서 단단한 결정이 되고 당신의 세상에 현현되어 나타날 겁니다. 사랑스러운 내면의 대화를 계속해나간다면 얼마 후에 행복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굉장히 행복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저를 믿으세요. 당신을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에 관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 있는 그대로 당신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법칙에 관해 어떻게 그것을 증명했는지도 있는 그대로 말했습니다. 이 일은 당신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겁니다. 법칙을 가지고 지금 당장 실천하세요. 그리고 사랑스러운 대화를 계속한다면 시편 50장의 약속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분은 당신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줄 겁니다.

 

- 하느님의 구원을 간단히 말하자면 당신이 하느님으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구원을 그렇게 보여줍니다. 그분은 오직 한 분뿐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왔었고, 지금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깨어남이 일어나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됩니다. 당신의 이름이 바뀌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메리, 스탠리, 존입니다. 하지만 약속이 성취되면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여전히 스탠리, 메리, 네빌로 거리를 걷고 있지만 당신은 참된 자신을 알게 됩니다. 이 이야기 전부는 당신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 날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실제로 알게 될 겁니다.

 

- 이것은 신의 뜻에 당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상향이 선명하게 정해졌다면 계속해서 이 상상 속의 행동을 반복하십시오. 그래서 당신이 이것에 영향을 받아 성취된 소망이 마음을 지배하게 만드십시오. 이 관념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아 이것에서 생각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될 때 보십시오. 그때 당신 외부의 세상이 변화를 겪고 있을 것입니다.

 

- 당신이 가난의 상태에 들어갔다면 가난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그곳에 계속 있다면 마지막 한 방울까지 가난이란 경험을 마시게 될 겁니다. 당신이 들어가는 상태가 어디이든 그곳에 머문다면 계속해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것들을 마시게 될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신이 머물러 있던 상태에서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들은 잊어버리세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이제껏 나왔던 모습으로, 그리고 앞으로 완성될 모습으로 다 계획했습니다. 당신에게 왕국을 주는 것은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구해서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무언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도, 무언가에 대한 보상으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이건 공로 없이 얻게 되는 선물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이걸 잃을 일도 없습니다. 변경할 수 없는 선물입니다. 당신에게서 이 선물을 뺏을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당신에게 이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누구도 그걸로 협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것이며 시간에 맞춰 오고 있는 중입니다.

 

- 이 선물은 다름 아닌 하느님 자신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에게 왕국을 줄 때 하느님은 당신에게 그분 자신을 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왕국이란 어떤 영토에 기반한 왕국이 아닌, 하나의 성품이자 하나의 완벽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이 몸을 두르고 있다면, 당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완벽해집니다.  
 

- 11월에 그는 10월 15일자 과학 뉴스 레터를 제게 보내왔습니다. 그곳에는 코넬대학 물리학부 교수인 리차드 파인만이 쓴 양전자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는 20년 후 이 논문으로 인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양전자는 반전자(反電子)이다. 그건 모든 면에서 반대라는 의미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뒤로 움직인다. 양전자는 그것이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움직이고, 잠깐 전에 있었던 곳으로 달려간다. 도착했을 때는 너무 세게 튕겨 나와 그것의 시간 감각이 뒤바뀐다. 그리고는 가지 않았던 곳으로 다시 움직인다." 

- 이건 제 말이 아니라, 파인만 교수의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작년에 이것으로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파인만 교수는 말했습니다. "양전자는 뒤쪽을 향할 뿐만 아니라, 전하도 뒤쪽을 향한다. 이것은 양전자이며, 음이 아닌 양이다. 그런데도 전하를 띠고 있다." 처음으로 이것이 이론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이론과도 수학적으로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것을 직접 사진으로 찍지는 못하다가 한 사람이 우주선(cosmic ray) 연구를 하던 중 양전자를 찍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두 개가 하나의 점에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것은 양전자이며 튕긴다면 방향을 바꿔서 바뀐 경로를 계속 가게 됩니다. 반면에 이것이 너무 세게 튕긴다면 반대방향으로 바뀌어 전혀 가지 않았던 곳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 이걸 이런 식으로 보십시오. 세상 전부는 무한한 상태들이고, 당신은 불멸의 존재입니다. 당신이 이 중 하나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당신이 들어간 상태는 생명을 얻어 살아납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부지불식간에 어떤 끔찍한 상태에 들어갔더라도 책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하나의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모르기에 당신을 비난할 뿐입니다. 단지 당신이 들어간 상태가 그것이 지니고 있는 것들을 외부로 나타낸 것뿐입니다. 

- 당신이 가난의 상태에 들어갔다면 가난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그곳에 계속 있다면 마지막 한 방울까지 가난이란 경험을 마시게 될 겁니다. 당신이 들어가는 상태가 어디이든 그곳에 머문다면 계속해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것들을 마시게 될 겁니다.

 

-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신이 머물러 있던 상태에서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그저 하나의 상태일 뿐이란 것을 안다면 그곳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단지 하나의 상태인 것을 모른다면 당신은 그 상태를 자신으로 여겨서 당신이 그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이 작은 몸뚱이를 나 자신으로 여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몸뚱이란 옷은 다 닳아서 결국 벗을 날이 오게 됩니다. 이렇게 육신을 벗어던졌을 때 나를 알던 친구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죽은 게 아닙니다. 우리는 죽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과 피란 의복을 입은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자 생명이다."라는 말처럼, 그 불멸의 존재는 하나의 상태에 들어가 그곳에 머물면서 그 상태에 생명을 불어넣어 부활시킵니다. 

- 당신은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상대방의 동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상대방을 다른 상태로 옮겨 놓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자신의 다리로 걸을 수 없는 한 남자 가사원의 문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대에게 줄 금과 은이 내게는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나는 그대에게 주니, 일어나 걸으라." 그러자 그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 이건 한 불구자가 일어나 걷게 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구의 상태에서 이렇게 바로 일어나 걷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자립하지 못하고 있는 친구를 당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모습으로 떠올려볼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이 상태이다."라는 말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입니다. 그를 하나의 상태에서 꺼내서 다른 곳으로 넣으십시오. 당신은 불멸의 존재입니다. 당신이 어떤 다른 상태에 빠질 때에만 당신은 변화됩니다. 그러면 당신이 예전의 상태에 있을 때 당신을 잘 알던 사람들은 도대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의아해합니다. 하지만 하나의 상태를 차지하고 있던 불멸의 존재인 당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 인간은 결백한 천상 상태를 떠나 창조를 경험하기 위해 경험의 세계이자 어둠의 학교인 이 세계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이 육신의 옷들을 생산하고 증식시키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순진무구한 결백의 상태에서 시작해, 경험을 통해 상상력의 깨어남으로 이어집니다. 이 상상력이 완전히 깨어나면 상상력은 예수라는 신성한 몸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입니다. 

 

- 이 상태는 정말 그에게는 중요한 겁니다. 어떤 상태이든 그곳에 누군가 들어간다면 이 상태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것을 반드시 펼쳐내야만 합니다. 제가 만일 히틀러의 상태에 들어갔다면 히틀러가 했던 일을 똑같이 저지르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이건 하나의 상태이고, 내가 의식적이 든 무의식적이든 그곳에 들어가게 된다면 히틀러의 역할을 반드시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운 자이든 사악한 자이든 어떤 절대적인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들 모두는, 영혼이 창조의 뱀을 따라 천상을 떠났을 때 들어갔던 잠의 상태 안에 있을 뿐입니다. 

- 이것들 모두가 단지 상태들이라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당신은 원하고자 하는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당신은 마지막 순간에 완전히 죄가 사해져 의롭게 될 것입니다. 무죄가 됩니다. 영적인 죄사함입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당신에게 와서 당신이 이런저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왕국에 들어가지 못할 거라고 겁을 주더라도 무시하십시오. 왕국은 당신이 대가를 지불해서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국을 당신에게 주는 것은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 왕국은 당신이 지불해야 할 것이 없는 선물입니다. 당신이 어떤 착한 일을 했다고 주는 보상이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생각하기에 당신이 좋은 일이 있다고 해도, 이건 단지 하나의 상태일 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 세상 안의 좋은 상태들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하기보다는 친절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타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을 때 그 사람이 받는 상처보다 제가 받는 상처가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전 차라리 친절한 상태에 있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언젠가 결국 당신은 선물을 지닌 채 완벽하게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선물은 하느님 그분입니다. 세상에는 하느님 외에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 미국의 헌법을 세운 분들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우리의 헌법을 세운 분들은 미래의 일로 믿지 않았고, 그것을 현재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정부의 이상적인 형태를 알고 있었으며 이것을 현재의 사실로 믿었습니다. 후버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연설했습니다. 연세가 지긋하면서도 명예롭고 훌륭한 사람인 그는 이렇게 공화당 정당연설을 했습니다. "다양한 정부 형태를 경험하고, 혁명들과 전쟁들을 치룬 우리의 정부들, 사실상 이 국가들의 흥망성쇠는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진 생각들의 흥망성쇠의 관점에서 기술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우리는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예언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식 상태들의 변화를 통해 당신과 제가 정부들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바뀌길 원합니까? 자신을 바꾸십시오. 

 

-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을 용서하는 것을 배우세요. 그들은 모두 자신의 역할을 다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 눈에는 도둑들이, 그리고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게 보입니다. 그들은 제 바람이 이루어지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할 일이란, 원인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확장해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두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 창세기 25장을 보겠습니다.

"네 태중에 두 민족이 있고,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투리라. 하나는 다른 하나를 다스릴 것이고, 어린 자는 나이 든 자를 지배하리라." 

- 첫째는 감각의 인간입니다. 저는 이 방과 방 안의 모든 것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감각 인간입니다. 형체가 있는 대상을 인지하는 것을, 전 인지 감각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지하는 것을 상상력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는 이 상상력을 두고, 군림하게 될 운명을 지닌 둘째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인간이며, 하늘나라에서 온 주입니다. 

- 첫 번째 인간은 지상의 인간이며, 먼지로 지어진 인간입니다. 두 번째 인간은 하늘나라에서 온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 안에 이중적 상태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지로 지어진 인간인 육체적 인간과 동시에 상상력의 인간인 영적인 인간, 즉 불멸하는 인간을 지니고 있습니다.

 

- 이런 이중성을 지닌 인간에 대한 그림을 지니면서 모든 것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인간에 의해서 창조되는지를 이해해 보십시오. 그러면 육체적 인간이 그저 상태일 뿐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육체적 인간의 행동 모두를 용서하게 됩니다. 하나의 근원 존재가 이 상태들의 역할 모두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도둑이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자와 도둑에게 판결을 내렸던 자는 같은 존재입니다. 살인자와 피해자는 단지 역할일 뿐이며, 그것 안의 존재는 하나입니다. 


-  스스로 사기꾼이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더 쉬운 길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소매치기라 불리는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역할이며 그들은 연기합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의 역할을 멋지게 소화하고, 그들 중 한 명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게 되는 것의 도구가 되어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연기했을 뿐이니, 전 그들을 용서해야 하지 않을까요? 

- "네 태중에 두 민족이 있고,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투리라. 하나는 다른 하나를 다스릴 것이고, 어린 자는 나이 든 자를 지배하리라." 어린 자는 두 번째 인간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자입니다. 바로 당신의 경이로운 상상력을 말하며, 하느님입니다. 그 외의 다른 하느님이란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온 주입니다. 그를 두르고 있는 외부 인간은 내면 인간의 명령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사람들 모두가 상태들 안으로, 무한한 상태들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 당신이 이것을 이해하게 됐을 때 세상의 모든 존재를 용서하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배역을 연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법칙을 이해한다면 세상 사람 모두가 당신의 꿈을 이루게 해주는 도구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무한한 상태들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당신은 두 번째 인간의 참모습을 인식해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 이 방의 형체를 가진 것들, 예를 들어 벽에 걸린 것들이나 의자들, 이런 것들에 대한 내 인식들 모두는 나의 감각적 인간에게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난 이제 이런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상상력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내 감각이 말하고 있는 것들을 대신해서 나는 무엇을 원할까? 이제 그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그 안에서 삽니다. 그러면 나는 그 상태 안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 그저 단순히 하나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생각은 느껴져야만 합니다. 생각이 우리 안에서 일정한 감각들, 일정한 활동을 일깨워서 현실에 힘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느껴져야만 합니다. 이미 사실이라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이 느낌이 당신 안에서 이런 감각들을 일깨울 때까지 그 안에서 사십시오. 상상력은 영적인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신 내면에 있는 창조자입니다. 

 

- 단순히 생각을 품는 게 아닙니다. 생각은 반드시 당신 안에서 감각이라는 느낌을 만들어내야만 합니다. 반드시 느낌이어야만 합니다. 이 일이 현실이 되었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이 느낌을 잡아낼 때까지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처칠이 말했듯, '분위기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지, 미래가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위기와 느낌은, 원하는 미래보다 선행됩니다. 

-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것에 대해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원하는 것을 가졌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만일 원하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이것이 성서의 내용입니다. 내가 이미 원하는 모습의 남자라고 느낄 수 있고 내가 이미 원하는 모습의 여자라고 느낄 수만 있다면 이 느낌은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는 느낌 없는 생각'과는 달리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내가 너를 만질 수 있게 (느낄 수 있게) 이리 가까이 오너라, 아들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핵심은 느낌에 있습니다. 에서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에서는 털로 뒤덮인 첫째이자 외부 인간입니다. 야곱은 털이 없는 상상의 인간이자 내면 인간입니다.  

 - 우리의 이 경이로운 세상 안에서 우리는 무한한 상태이며, 모든 이들은 이 중 하나의 상태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상태에 있는 자는 다른 상태들에 있는 자들과 같습니다. 오직 한 명의 연기자만이 있습니다. 하느님만이 연기를 하며 존재하고 모든 존재 혹은 모든 사람들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상태 안에 있으며 모든 상태 안에 있는 그분의 이름은 IAM입니다. 

- 어떤 이는 도둑의 역할을 골랐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일어나서 일을 하러 나가는 것보다 그게 더 쉽다고 여겼습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그가 의도적으로 이 일을 했다면 본인의 역할을 선택했던 겁니다. 아니면 어떤 다른 버릇으로 인해 이 상태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는 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이 점이 바로 하나의 역할을 선택할 때 잘 고려해야 할 사항입니다. 역할은 치러야 할 값이 있기 때문에 그는 그 값을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과는 별개로, 당신의 소망이 실현되는 데에 그 사람이 이용되기도 합니다. 

 

- 당신이 무덤에 묻혀 있는 모습을 봤다면 당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의식의 확장을 나타냅니다. 더 커다란 상태에 들어갈 때 당신은 하나의 상태에서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은 이 육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도 죽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닌 확장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무덤에 묻혀 있는 자신을 보게 되면 당신은 옛 믿음에 대해서는 죽은 것이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새로운 관념이 당신 자신을 확장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새 인간이 살 수 있게 옛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겁니다. 

 

- 씨앗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땅에 떨어져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만일 땅에 떨어져 죽음을 맞지 않는다면 새로운 열매는 열릴 수 없습니다. 그저 예전의 모습만 간직한 채 그대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만일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음을 맞는다면 풍성한 열매를 가져옵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꿈을 전혀 두려워 마세요. 죽음은 '의식의 확장이라는 신비'에 있어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상징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계속 확장하고, 확장하고, 또 확장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인간의 경이로운 상상력이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깨어나게 되는 그것이 바로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그가 보게 될 것은 잠들어 있는 광대한 세상입니다. 잠들어 있는 사람들, 어떻게 그들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그저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중이고, 아름답게 배역을 소화하고 있는 중입니다.  

 

- 저는 사람들이 매우 다양하고 멋진 역할들을 소화하고 있는 이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깨어 있다고 착각하면서 나에게서 무언가를 가져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들의 이런 행위는 내가 나아가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전 제 세상에 들어왔던 도둑들을 용서합니다. 심지어 제가 받아야 할 것을 주지 않고 제 돈을 갈취해 간 사람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그걸로 인해 저는 제스스로 굳건히 서게 되었고, 단 한순간도 세상 사람들에게 기대지 않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의 길을 가게 하세요. 그들은 모두 깊은 잠, 아주 깊은 잠에 든 채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 그곳에 있다가 다니엘서 7장에 묘사된 것처럼, 절 무한한 사랑, 즉 옛적부터 함께 있으신 이(Ancient of Days)의 앞에 데려갔습니다. 그분이 저를 보더니 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무엇인가?" 저는 바울이 했던 말로 대답했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 그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자 그분이 저를 감싸 안았고, 우리의 몸은 융화되어 하나가 되었습니다. 

-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와 하나가 된 자는 그와 하나의 영이 된다. 하나의 몸, 하나의 영, 하나의 희망, 하나의 주,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 하나의 하느님 그리고 모든 것 위에 있으며 모든 것을 통해 모든 것 안에 있는 아버지가 된다." 이런 합일 속에서 저는 저의 개성을 잃지 않은 채 무한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나라는 개성도 지니고 있으면서,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아주 강렬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하느님은 진정 사랑입니다.

 

- 우리가 만일 부름을 받고 하느님의 몸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면 이런 힘을 부여받게 됩니다. 인간에게 알려진 지혜와는 다른 지혜가 주어질 겁니다. 이건 어떤 학문적인 지식과는 다른 본래부터 우리가 지니고 있던 지혜입니다. 그날 밤 그분의 몸속으로 들어가며 느꼈던 짜릿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후에 전 무한의 권능(Infinite Might,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 앞에 섰습니다. 그분은 입을 움직이지 않았지만 전 그분이 "이제 해야 할 시간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푸른 피를 내려놓으라." 그리고 무한한 힘이 제게 "해야 할 시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전 경이로운 이들이 모여 있던 공간에서 빠져나와 다시 한번 이 작은 육신의 옷에 갇힌 제 자신을 보게 됐습니다. 이것은 온갖 약점들과 온갖 한계들을 지닌 아담의 옷입니다. 이런 접붙임 이후 30년이란 잉태의 기간, 혹은 배양기간은 1929년 7월부터 시작해 1959년까지 계속됐습니다.

 

- 다윗은 누구입니까? 다윗은 인류에 대한 상징입니다. 만일 모든 세대의 사람들과 그들이 한 경험들, 이것들을 가지고 거대한 하나의 전체로 융합해 만든다면 이것들이 모두 모여 인격화된 응축된 시간은 불멸하는 청년인 다윗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모든 세대, 그리고 그들의 모든 경험들이 인격화된다면 성서의 다윗이라는 불로불사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바로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 예수는 주님인 여호와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손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는 "나는 다윗의 뿌리이자 자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손자와 할아버지를 하나의 존재로 본 겁니다. 하느님이 하느님 자신을 낳고 있는 중입니다. 하느님은 인류에게서 인간 안에 묻혀 있는 것을 끄집어내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 안에 묻힌 것이 무언가요? 하느님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그렇게 품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무르익었을 때 하느님은 자신을 내놓습니다. "나는 그대들을 한 명씩 모을 것이다. 오, 이스라엘의 백성들아." 

 

- "그대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 일을 완성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언제 그 일이 일어난다고 했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분이 당신 안에 있는 그분의 아들을 드러내는 날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라는 것을 밝힙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버지를 밝히게 되는데 오직 아버지만이 아들을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아들을 보게 된 순간,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일이 다 마쳐져서 완벽해졌을 때 당신이 아들을 볼 것이고 아들이 당신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말하게 되기 때문에, 하느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정체를 나타냅니다. 

 

- 당신 안에는 상상 속 행위들을 지켜보는 자가 있습니다. 신의 세계에서 그들은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듣고 있습니다. "거대한 영원 속에서 죽음 -모든 것이 나타났다가, 증가했다가, 다시 줄어들기 시작하고 사라지는 이곳은 죽음의 세상이다- 을 응시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것을 단지 그렇게만 보고 있는 자에게는 가장 두려운 결과를 낳는다. 심지어 고통, 절망, 영원한 죽음까지도. 하지만 신의 자비는 이것을 뛰어넘어 예수 몸 안의 인간을 구원한다." 당신이 그 짓을 저질렀을지라도(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짓을 저질렀을지라도) 신의 자비는 당신을 구원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에게 자신을 접붙일 때 당신의 모든 과거는 지워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과거가 더 이상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했다면 싫어할 일들을 당신은 나가서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과는 관계없이 당신의 멋지고 고귀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 이 세상의 결과들은 영적인 원인을 지니고 있지 세상의 원인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원인이라는 것은 그저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이것은 망각하는 기억이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확물을 보고도 상상의 힘을 믿기를 거부합니다. 자신이 한가한 시간에 그런 것을 상상했다는 것을 조금도 믿지 못합니다. 그렇다 해도 상상 외에 일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상상했기에 일어난 일일 뿐입니다.

 

-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습의 남자 또는 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은 하느님이 당신을 계획했던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그분 자신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에게 자신을 주는 그 시간은 갑자기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접붙임과 싹 틔는 것 사이에는 배양기간이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접붙임 이후 30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30세쯤 가르치기 시작했더라."라고 적혀 있습니다. 

 

- 신문 1면을 보면 세상의 가장 끔찍한 일이 나와 있는데 이건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이런 것들을 창조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상상력을 통제하지 못했기에 아침, 점심, 저녁 계속 이런 끔찍한 것에 영양분을 주었습니다. 당신의 경이로운 상상력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당신이 이렇게 할 때 이 땅 위에 하늘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 믿음이 더해진 상상력은 우리의 세상을 만드는 토대입니다. 제가 상상력이라고 말했을 때 무얼 의미했을까요? 전 하느님을 의미했습니다. 인간은 오직 상상력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이고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인간의 불멸하는 몸은 상상력이고 그것이 하느님 그분이며 예수라는 신성(神性, divine body)입니다. 

 

- 당신은 인간이 상상했던 것의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인류는 달에 도착하는 방법을 찾기 전에 달에 가는 것을 먼저 상상했어야 합니다. 상상하지도 않았는데 현실로 나타난 것은 세상에 없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은 현실이 되기 전에 먼저 여러분과 제가 상상을 해야만 합니다. 객관적인 현실은 오직 상상을 통해서 만들어질 뿐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보다 고귀한 세상을지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상상은 현실을 창조할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상상하고 그것이 현실이라 믿는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 하느님은 상상을 통하여 창조하고 있고, 상상할 수 있는 우리 인간은 하느님이기에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창조행위입니다. 

 

-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또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제 내면으로 데려와서 제가 보는 내면의 눈으로 보게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동로봇처럼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 육체의 눈은 떠져 있고 그들은 깨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깊은 잠에 든 채, 계속 같은 행동만을 반복하고 있는 중입니다. "깨어나라! 오, 잠든 자여, 꿈의 땅으로부터." 당신이 깨어나게 되면 깨어난 인류의 모임에 들어가게 됩니다. 제 스승인, 나이가 지긋했던 압둘라는 그들을 '형제들(The Brothers)'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신이 깨어날 때 당신은 신성한 자의 모습이기 때문에 영광된 존재가 됩니다.

- 인간에게는 태어날 때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태어남은 어머니의 육신의 자궁에서 나오는 작은 태어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자궁, 거대 자궁, 창조의 자궁을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 그분은 나를 창조해 완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분은 나를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나를 세상이란 곳으로 보냈습니다. 이때 두 가지 선물을 줬습니다. 하나는 그분의 마음이라는 선물이고 다른 하나는 말이라는 선물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사용했던 두 가지입니다. 

- 이 선물을 지혜롭게 사용한다면 나의 소망이 모두 성취된 곳으로 인도될 겁니다. 계속해서 이 선물을 지혜롭게 사용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내가 죽었다 말할 때 나는 이 육신을 떠나 두 가지 선물을 현명하게 사용해 다른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내가 깨어난다면 반복의 고리를 끊고 그것을 넘어 영원의 세계로, 축복받은 이들이 있는 곳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 오늘 교정을 시작하세요. 반복의 순환고리가 끊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내면의 눈이 떠지는 것을 보십시오. 당신이 눈을 뜨게 되면 세상 어떤 것도 이렇게 눈을 뜨는 것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가치관, 삶의 의미는 변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세상의 모든 부를 다 갖다 줘도 그렇게 떠진 눈과는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또 가장 위대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찬사와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런 위대한 사람들조차도 모두 깊은 잠에 든 채 반복의 트랙을 계속 걸으며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하는 것뿐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것을 끊어낼 것입니다. 

 

 

 

 

 

 
임모틀맨 2
네빌고다드의 다음 문장이 임모틀맨2편의 내용을 가장 잘 보여준다. “당신이 겪고 있는 것은 삶이란 꿈입니다. 당신이 지금 삶이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수록, 당신은 점차 그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겁니다. 그런데 당신이 밤에 꿈을 꾸고 있을 때, 지금 꿈꾼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깨어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때부터는 꿈을 조절하면서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꿈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 겁니다. 이것은 삶이란 꿈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지금의 삶이 꿈이란 것만 안다면, 당신이나 당신 친구가 원하는 모습인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 믿음으로 걷는 것을 통해 꿈의 패턴을 변화시켰던 것처럼 당신의 삶도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다시 말해 당신의 경이로운 상상력을 믿고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믿고 있는 만큼 당신의 세상 안에 모습을 나타낼 것입니다.” -임모틀맨2편중에서 이 책은, 꿈과 같은 삶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깨울 수도 있고, 그 삶이란 꿈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조절할 수 있게 해주는 네빌고다드 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다.
저자
네빌 고다드
출판
서른세개의 계단
출판일
202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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