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히가시노 게이고] 환야 幻夜 1-2

일루젼 2023. 1. 31.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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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원제 : 幻夜 
출판 : 재인 
출간 : 2020.03.01 


저자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원제 : 幻夜 
출판 : 재인 
출간 : 2020.03.01 


 

읽으면서 <백야행> 느낌이 강하다 싶었는데, 같은 작가의 작품이었다. <백야행>을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음.

 

"백야"라는 단어를 사용한 장면이 있는 걸 보면 작가가 의식적으로 비슷한 구도를 선택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철저히 '생존'을 위해 빛과 그림자로 나뉘어졌던 <백야행>과는 달리 <환야>에서는 어둠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 경계를 그을 수 없는 밤이 퍼져나가는 희붐한 어둠. 그 위로 어지럽게 스쳐 지나가는, 혹은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환상들. <환야>는 그런 느낌이었다.

 

<백야행>의 유키호가 되풀이되는 절망 속에서 차갑게 얼어붙어갔다면, <환야>의 미후유는 스스로 블랙 박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슷해 보이는 구도는 그 차이로 인해 완전히 다른 색감을 띄게 된다. 소설의 결말 또한 그러하다. 

 

작가는 끝까지 미후유의 정체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데, 결말 또한 어느 쪽으로 생각하더라도 해석이 가능해지는 중의적 결말이라 무척 마음에 든다. 빛을 받아 반짝이던 뺨은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을까, 기쁨으로 물들어 있었을까. 그녀에게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씻어내고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본문 속에 등장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는 매우 매력적인 캐릭터다. 소설에서의 그녀도 매력적이지만, 아무래도 비비안 리가 연기했던 동명의 영화가 강렬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대사가 명대사로 꼽히지만, 개인적으로는 '내게는 아직 테라가 남아있다'가 더 인상 깊었다. 이 캐릭터가 언급됨으로써 <환야>의 1권은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데, 미후유가 미후유였다면 소설의 초반에 그녀가 목격했던 장면이 어떤 식으로 느껴졌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그녀의 선택은 오하라다웠다.  

 

의외로 섬뜩함은 느껴지지 않는 소설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그렇게까지 분명하게 목표를 정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다. -그녀의 선택과 행동들이 훌륭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 캐릭터들을 잠시 벗어나서 이야기하자면, 버블 시대의 붕괴와 한신 대지진, 사린 테러 사건 등 일본의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사건들을 등장 인물들의 생애 속에 잘 녹여내었다고 생각한다. 해당 시기,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그 일들을 어떤 식으로 겪었을지나 어떤 영향을 겪었을지- 그리고 그것을 외부 지방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바라봤을지 같은 미묘한 표현들이 잘 나타나 있다고 느꼈다. 

 

구매 후 1권을 찾지 못해 오래 묵힌 책이었는데, 마침 간사이 여행을 결정했더니 1권이 나타나 즐겁게 읽었다.

만족한다.       

 


 

- 마사야가 아버지의 자살을 예감하면서도 외면하려 했다는 말은 정확지 않다. 자살의 기미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연기했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누구를 향한 연기인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만일 눈치챘다면 자살을 막으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 깜짝 놀라 냉장고 문을 열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였다. 안에 들어 있던 식료품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조미료와 탈취제뿐이다. 매실장아찌 등의 밑반찬은 물론이고, 냉동식품, 소시지, 치즈, 캔 맥주, 심지어 마시다 남은 우롱차까지 전부 없어졌다. 이유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누군가가 훔쳐 간 것이다. 마사야는 집에 돈이 될 만한 것이 없다며 안심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책망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돈보다 중요한 것을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 마사야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녀를 대했다. 아버지를 잃은 사촌 누이를 대하는 태도로서는 거의 완벽했다. 

 

- 언젠가 아버지가 말한 적이 있다. 미즈하라네 공장의 경영을 그 아들에게 맡겼더라면 그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카운터 위 전화의 벨이 울렸다. 신지가 수화기를 들었다. 언짢아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살갑게 바뀌었다.

 

- 일일이 대답할 기력이 없다. 체력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랐지만, 그보다 정신적으로 견디기가 힘들었다. 요 며칠 사이에 대체 몇백 명의 비극을 맞닥뜨렸던가. 자신이 시신을 인간이 아니라 물체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대로 여기 있다가는 정신이 어떻게 될 것 같은 위기감을 그녀는 느꼈다.

 

- 지난 한 달간 가게 매출이 급감했다. 이유는 명백하다. 지하철 사린 사건 때문이다. 언제 테러에 희생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여간 급한 볼일이 아니면 사람들이 도심에 나오려 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거기에 희생자가 많이 나온 사건 직후에는 자숙하는 분위기가 생기므로 사치의 극을 달리는 보석 업계가 맨 먼저 영향을 받는다. 한신 아와지 대지진 직후에도 그랬다. 

 

- 그러고 보니 그녀도 지진 피해자였지, 하고 신카이 미후유의 뒷모습을 보며 아키코는 생각했다. 미후유가 중도 채용으로 '하나야'에 들어온 것은 지진 직후였다. 자세한 경위는 아키코에도 모른다. 처음에는 1층 매장에 있더니 2주쯤 지나 3층으로 옮겼다. 그런 식의 이동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다들 의아해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두 달 가까이 지난 지금은 그녀가 3층에서 일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아키코가 아는 한 한 명도 없다. 미후유는 보석에 관해 많이 알았고, 손님 응대에도 능숙했다. 외국어를 잘해서 외국인 손님이 와도 걱정이 없다. 이 불경기에 중도 채용될 만하다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 지진으로 부모를 잃었다고 들었지만, 미후유에게는 그늘이 없었다. 그녀 자신이 그 일에 관해 말을 꺼내는 법도 없다. 어지간히 심지가 굳은 여자라는 생각에 아키코도 그녀를 인정했다.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녀라면 도움이 될 말을 해 줄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힌트가 없는 건 아니야. 보고서에도 적혀 있듯이 장치는 지극히 단순하다. 중학생 수준의 지식만 있어도 간단히 만들 수 있어. 자네들도 여기 그려진 도면을 보면 금세 그 구조를 이해할 거야. 하지만 말이야. 과연 이런 걸 생각해 낼 수 있겠어?
반장의 말에 전원이 침묵했다. 가토도 마음속으로 동의한다. 어른이 되면 전자석이나 전기의 원리 따위는 일이나 취미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한 고스란히 잊고 만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원리는 단순하지만 실제로 기능하도록 하려면 파친코 구슬을 사용한 스위치든 전자석이든 적정한 조건을 갖춰야만 해. 아무 생각 없이 만들었다가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얘기야. 이번에 사건에 사용된 장치는 그런 점에서 상당히 잘 만들어진 모양이다. 범인이 장치 분야의 전문가거나, 그게 아니라면 시행착오를 거듭했을 거라는 게 과학수사연구소의 견해다." 

- "만약 수사 과정에서 지하철 사린 사건과 관련성이 드러나면 어떻게 하죠?" 
가토가 물었다. 
"그때는" 무카이가 일단 말을 끊고 슬그머니 한쪽 뺨에 미소를 지었다. "그때 가서 봐야지. 우리 쪽은 수순에 따라 수사를 진행할 뿐이야. 공안의 정보가 필요할 경우에는 어떻게든 빼내야겠지. 하지만 묻지도 않은 일을 우리가 굳이 알려 줄 생각은 없다." 
그렇군요, 하며 가토도 희미하게 웃었다.

 

- "그런 곳에는 간 적도 없어요." 
그녀는 정말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연기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와의 관계를 고백하던 하마나카 역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을 숨기고 있을까.

 

- 하지만 아무리 귀에 익어도 말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언어는 말로 해야 비로소 습득된다. 그런데 지금의 마사야에게는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다. 원래 말을 잘하는 편도 아니었다. 

- "오늘은 주먹밥을 뭘로 하실래요?" 
"아, 그렇지. 매실장아찌랑 가다랑어포 한개씩."
"매실이랑 가다랑어포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갔다. 마사야는 전갱이 소금구이를 먹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하루의 피로가 날아가는 순간이다. 아버지 공장에서 일할 때는 이렇게 행복한 시간이 거의 없었다. 공장의 경영 상태가 늘 위태위태했기 때문이다. 

- 방에 들어와 형광등을 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나야." 
"응."
"지금 가도 될까?"
"그래."
"그럼 앞으로 10분 후에."
그러고서 전화는 끊겼다. 10분 후라는 말은 그녀가 이 근처에서 전화를 걸었다는 뜻이다. 늘 그랬다. 그녀가 자기 집에서 전화를 한 적은 그가 기억하는 한 한 번도 없었다. 

 

- 그녀는 다양한 조사를 통해 그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헤어스타일이 멋진 여성을 발견하면 말을 걸어 어느 미용실에서 누구에게 머리를 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골라낸 몇몇 미용실에 직접 찾아가 본 끝에 선택한 사람이 아오에라고 한다. 
"몇 가지 조건이 있었어. 우선 독창성이 있을 것. 나이가 젊을 것. 자기 가게를 운영하지 않아야 하고, 무엇보다 아우라가 있어야 한다." 
"아우라?"
"그래. 앞으로는 그저 솜씨만 좋아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 손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뭔가가 있어야 하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손님을 얼마나 맹신하게 만드느냐가 승부의 갈림길이란 말이야. 그 미용사에게 맡기면 머리 모양을 보기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야. 그 미용사가 손을 댄 머리라서 멋지다. 그렇게 되어야지. 말하자면 미용사 자체가 브랜드가 되는 거야. 나는 당신에게 그럴 만한 아우라가 있다고 확신했어." 
열변을 토하는 미후유의 기세에 아오에는 압도되고 말았다. 미용계의 앞날을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여긴 적도 없었다. 여우에게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놀리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떨치기 힘들었다.

 

- 그녀의 얘기가 계속되었다. 단지 일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미용실이 살아남을 수 없다. 기술자와 경영자와 프로듀서의 자질이 요구된다. 

 

- 그녀가 난감하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리고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눌렀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뭘 더 알아야 하지?"
"가령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라든지요. 또 미용업계와 관련이 있는지, 어디에 사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그걸 알면 되겠어? 그럼 대답해 줄게."

- "전에 있던 가게는 왜 그만두었어요?" 
"음... 그건,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미후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싫증이 났다고 할까."
"싫증이 났다고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한 느낌이었어. 뒤집어 말하면 더는 할 수 없겠다는 한계를 느꼈지.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변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어." 
그녀가 눈을 치켜뜨고 그를 보았다.
"이런 설명으로는 부족한가?"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 "있잖아, 아오에 씨. 인간이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날 것 같아?"

또 뜬금없는 질문이다.
"나는 그런 거 믿지 않아요. 환생이니 전생이니 하는 거요."

"그런 뜻이 아니라, 일생에 몇 번이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지 묻는 거야. 예를 들어 결혼하면 인생이 바뀌잖아. 취직해도 마찬가지고, 그런 일이 대체 몇 번이나 있을까?" 
"글쎄요... 그런 의미라면 제 경우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도쿄로 올라와서 미용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가 처음일 거예요. 하지만 그 후로는 극적인 변화가 없었어요."
"그럼 슬슬 변화해야 할 때가 아닐까?"

- "전화라도 해 줬으면 좋았잖아. 휴일 전날에는 내가 거의 빼놓지 않고 오는데."  
그가 화장실을 나오기가 무섭게 치에가 말했다. 입이 비죽 나와 있다. 
"생각은 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어. 미안."
그래도 치에는 계속 부루퉁해 있었다. 싸구려 유리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사 온 듯한 스낵봉지와 주스 페트병이 놓여있었다. 달라도 너무 다르네, 하고 아오에는 생각했다. 우아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 "고마운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죠.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요. 예전 가게를 알던 사람이 여길 보면 서운해할 거예요." 
"여기도 훌륭한걸요."
"고맙습니다."
여주인은 미소를 지으며 생맥주를 마셨다. 인사치레라는 걸 아는 표정이다. 예전 가게는 지금보다 두 배는 넓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시절의 품격이 묻어 있었다. 그걸 인위적으로 재현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 그녀의 말에 따르면 예전 가게가 지진으로 무너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주변의 집들이 차례차례 타들어 가는 상황에서 전혀 손을 쓰지 못하고 결국 전부 타 버렸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몇십 킬로그램이나 되는 철판을 꺼내느라 죽을힘을 다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요컨대 옛날 집이 더 튼튼했다는 얘기죠. 예전 가게는 외국인이 살던 집을 개조해서 만들었거든요. 근방의 새로 지은 집들은 전부 무너졌어요." 
소가는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실제로는 최신 조립 공법으로 지은 집들이 더 튼튼할 테지만, 그런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다. 

- 치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돈으로 가게를 낸다는 건 께름칙한 일이다. 물론 독립하고 싶으면 착실하게 돈을 모아서 하라는 그 견실한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전의 아오이였다면 그녀의 그런 의견을 존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후유를 만난 후로는 치에의 말이 전부 어린애가 하는 말처럼 들렸다. 이 세상은 견실함만으로는 헤쳐 나갈 수 없고, 노력이 반드시 보답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으며, 성공하려면 어딘가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런 생각이 현실에 들어맞는다고 느꼈다. 

 

- 미후유를 만나고서 아오에의 여성관도 변했다. 그는 지금까지는 연인이 귀여웠으면 하고 바랐다. 치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후유에게는 전혀 다른 매력을 느낀다. 성인의 섹시함같이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녀와 있으면 날카로운 칼날을 마주할 때처럼 감각이 예민해지고, 자기 안의 뭔가가 고양되는 느낌이다. 말하자면 아오에는 모든 면에서 치에에게 부족함을 느꼈다. 그런 그의 변화를 치에도 눈치챈 듯했다. 어쩌면 그와 미후유의 관계를 의심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보니 어느 쪽이 먼저랄 것 없이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치에가 나를 만나러 왔을까 하고 아오에는 생각했다. 

 

- 이런 데서 뭐 하는 짓이냐고 나무라려고 했다. 하지만 케이스 안에 일렬로 놓여 있는 반지를 본 순간 그 말이 쏙 들어갔다. 그가 여태껏 본 적 없는 디자인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끈 반지는 보석을 입체적으로 배치한 디자인이었다. 루비 밑에 다이아몬드가 있고, 두 개의 사파이어가 위아래로 배치되어 있기도 했다. 그는 그 구조를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보석을 어떤 식으로 앉혔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관심이 있으신가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조금, 하고 그가 대답했다.
 
- 다카하루는 그녀를 사장실로 들였다. 그리고 내선 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일단 사장님 혼자 보세요."
그가 보석이나 귀금속에 정통한 부하 직원을 부르려 한다는 걸 그녀가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당황스러웠다. 부하 직원을 부르려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이유마저 간파하고 있었다. 그녀가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했다. 
"기술자를 불러서 이 디자인의 구조를 기억시켜 봐야 헛수고예요. 저희 말고는 아무도 이렇게 만들 수 없습니다. 아니,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이 구조는 이미 특허 출원이 되어 있고, 공개가 되었어요. 심사를 통과하는 일은 시간문제입니다." 
솔직히 말해 다카하루가 정말로 놀란 것은 이때였다. 디자인을 판매하러 오는 사람은 많았지만, 특허까지 준비하고 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 점을 이해하시고 자세히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미후유는 다시 케이스를 열었다. 그녀의 작품을 본 다카하루는 직감적으로 확신했다. 이건 물건이다. 
 

 



- "무슨 소리야. 다카하루 씨니까 이 나이라도 괜찮은 거지, 당신 같은 배불뚝이한테 누가 오겠어?" 
옆에 앉아 있던 그의 아내의 말에 웃음판이 벌어졌다. 

- 1년 전 홀연히 아키무라 집안으로 시집온 신부를 집안사람들은 그런대로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작년 여름 제사 때문에 모였을 때도 그녀의 적절한 처신과 분별력 있는 태도에 모두가 감탄했다. 젊은 사람이 대단하다, 저 정도면 다카하루의 반려자로 손색이 없다는 의견들이었다. 오늘도 미후유는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가사도우미 두 명에게 일을 지시하는 데도 빈틈이 없었다. 속속 찾아오는 친척들에게 인사할 때도 다카하루를 먼저 치켜세우고, 상대가 기분 좋게 느끼도록 대응하는 데 실수가 없었다. 

- 그러다 보니 그녀에 대한 평판이 좋은 건 당연하지만, 구라타 요리에만은 그런 상황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놀려 대는데도 싫어하지 않는 동생의 모습을 보며, 저 아이는 도무지 철이 들지 않는다고 한심해했다.

 

- "미안하지만 누나, 나는 가정을 꾸린다는 의식이 없어. 그녀와 최대한 함께 지내고 싶어서 가장 단순한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그녀에게 집안일을 시키거나 아키무라 집안의 고리타분한 전통을 강요할 생각이 없어. 결혼 후에도 그녀와 좋은 파트너 관계를 유지할 계획이야." 
다카하루다운 말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싶었지만 요리에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동생이 결혼할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도 기뻤다.

 

- 상대 여성과는 그 며칠 후에 만나게 되었다. 동생의 얘기로 미루어 활달한 커리어 우먼을 상상했다. 젊은 나이에 회사를 일으켰을 정도니 상당히 기가 센 성격일 터였다. 낡은 인습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온몸으로 어필할지도 몰랐다. 거기에 대해서는 일단 이러니 저러니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다카하루가 데려온 여성은 요리에의 그런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 신카이 미후유는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여성으로 보였다. 물론 묻는 말에 똑 부러지게 대답하고 자신의 의견이 분명한 점으로 미루어 심지가 굳은 성격인 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번번이 다카하루를 앞에 내세우려고 하는 태도나 나서려고 하지 않는 자세 등에 여성 기업가로서의 면모는 엿보이지 않았다. 긴장한 탓인가 생각하기도 했지만, 잠시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신카이 미후유에게는 여유가 느껴졌다. 결혼 상대의 누나를 만나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여유였다. 일부러 한발 물러서 약혼자와 그 누나가 나누는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 나쁘게 표현하자면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런 자리에서 사람은 어느 정도 연기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미후유의 태도는 그처럼 단순하고 본능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키무라 집안의 며느리로서 걸맞은 여성상을 미리 세워 놓고 완벽하게 그것을 연기하고 있었다. 적어도 요리에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다카하루에게 미후유가 평소에도 그런 사람이냐고 나중에 묻자 다카하루는 "약간 긴장했나 봐. 보통은 말이 조금 더 많아. 누나가 무서웠던 게지." 하고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카이 미후유는 긴장 따위는 하지 않았고 결코 나를 무서워하지도 않았다고 요리에는 생각했다.

- "그럼 꼭 한번 가봐야겠네." 
요리에는 약간 힘주어 말하고 나서 미후유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네요."
그녀가 선뜻 대답했다.
"저도 틈을 봐서 다녀오려고 했어요. 바빠서 계속 미루기만 했는데,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녀의 태도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아, 그래! 마침 나도 교토에 가고 싶던 참인데, 우리 같이 갈까? 이삼일 거기서 느긋하게 지내다 오자, 올케 고향도 구경할 겸." 
만일 미후유의 과거에 뭔가 비밀이 있다면 이런 제안을 껄끄러워할 터였다. 요리에는 그녀가 완곡하게 거절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미후유는 표정이 확 밝아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저도 형님과 함께라면 심심하지 않을 거예요."
요리에의 맥이 빠질 만한 반응이었다.
"그동안 교토도 많이 변했을 거예요. 물론 예전부터 있었던 이름 있는 가게들은 그대로겠지만요. 여기저기 안내해 드릴게요."
그녀의 말투에는 요리에의 제안을 회피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 "교토에 도착하면 가능한 한 간사이 사투리를 써 줬으면 좋겠는데." 
"네..."
"사람들에게 뭘 물어볼 때 그 지방 사투리를 쓰면 상대도 경계를 덜 하잖아."
"교토와 니시노미야는 미묘하게 달라요." 
"어머, 어떻게 다른데?"
"그건 저도 설명하기 힘든데... 아무튼 조금 달라요."

"그래도 같은 간사이니까 도쿄 사람을 대할 때보다는 마음을 열지 않을까?"
"글쎄요."
마사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귀찮아서 반박하지 않았다. 

 

- "지진으로 모든 걸 잃은 사람이 많아요. 재산이나 가족뿐 아니라 과거까지요. 과거라는 게 결국 사람들과의 관계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 한둘은 있는 법 아니야?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연하장 하나 오지 않는단 말이지."

- "네, 그녀가 마거릿 미첼 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작품론을 썼거든요." 
"아아..." 
마사야도 그런 제목 정도는 알고 있었다. 책이 아니라 영화 제목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영화를 본 적은 없었다.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스칼렛 오하라인데, 신카이 씨는 그 주인공에 무척 심취해 있었어요. 그래서 논문에서도 그녀의 삶을 철저하게 찬양했던 모양이에요. 조교가 너무 심했다고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 스토리도 모르고 주인공 여자에 대해서도 지식이 없었던 마사야로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상대도 그 점을 눈치챈 듯했다.
"미안해요. 쓸데없는 얘기를 했네요. 조금 더 도움이 될 만한 일이 떠오르면 다시 연락드리죠."
그러고서 그녀는 마사야가 고맙다고 인사하는 말도 듣는 둥 마는 등 전화를 끊었다.

 

- "확실치는 않지만 '화이트 나이트'라고 했던 것 같아요." 
"화이트 나이트..."
"잠 못 이루는 밤, 이라는 뜻이죠. 백야로 번역되기도 한다고 합니다만."
"백야...란 말이죠."

- 형사들은 뭐 때문에 나의 발자취를 쫓을까 하고 마사야는 생각했다. 그때 형사들은 그런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무의미한 일을 계속한다. 이 세상은 그렇게 무의미함이 모이고 쌓여서 이루어졌다. 

 

- 마사야가 이 가게를 선택한 것에도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이 부근의 어느 가게든 상관없었다. 하기야 이 가게 입구에 옛날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 "왜 그러고 있어. 기분이 안 좋은가?"

"아니요, 이렇게 멋진 밤은 처음인걸요. 환영 같아요."

그녀가 요염하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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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단이 마련된 다다미방에서 도시로가 아직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징어가 떨어졌는지, 세 아저씨가 남기고 간 땅콩을 집어 먹고 있다. 마사야가 어지럽게 널린 것들을 치우기 시작했을 때 도시로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말은 그럴듯하네."
"네?"
"마에다 그 사람 말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하거라, 힘을 보탤 테니? 그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지껄인다, 이 말이다."
"그냥 하는 말이죠. 그 아저씨들도 형편이 말이 아닐 텐데요."

"아니야, 그렇지도 않을 게다. 마에다는 자잘한 일들로 제법 벌 거야. 네 아버지를 도와줄 정도는 됐을 텐데."

 

 

- 마사야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는 원래부터 그 세 사람을 믿지 않았다. 돌아가신 엄마도 그들을 싫어했다. 아버지만 돈을 쓰게 만든다고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 "좀 보여 줄래?" 
" ...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설거지 같은 건 내일 해도 되잖니. 지금 보여 줬으면 좋겠구나.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면 내가 꺼내 오마." 
마사야는 한숨을 내쉬고, 거품이 잔뜩 묻은 스펀지를 내려놓았다.

 

- 마사야는 올드 파의 뚜껑을 연 뒤 입에 대고 병을 기울였다. 입안으로 조르륵 흘러드는 액체에서 그때와 똑같은 냄새가 났다. 

 

- 유키오는 미즈하라 제작소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원래는 중고 선반 한 대로 시작한 회사였다. 그런 것을 고도성장기의 파도에 제대로 올라타 어엿한 금속 가공회사로 키워 놓았다. 유키오의 꿈은 거기서 더 발전해 대기업의 일감을 직접 하청 받는 회사로 만드는 것이었다. 재하청이나 재재하청으로는 미래가 없다고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 그 얼마 전까지 마사야는 가전 메이커의 기계부에서 일했다. 생산 설비를 제조하는 부서다. 고등 전문학교를 졸업한 지 2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런 그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공장 일을 도우라는 말을 꺼낸 이유도 유키오 나름의 계산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경영도 순조로운 것 같아 마사야로서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켜 보건대 그 시점에 이미 상당히 무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수출 제품을 대부분 현지에서 생산하는 것이 당시의 흐름이었고, 동남아시아가 경쟁 상대로 떠오르고 있었다. 국내 하청 업자가 일거리를 확보하려면 가격을 터무니없이 낮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에는 버틸 만한 체력을 제대로 갖춘 회사가 거의 없었다. 다들 눈에 보이는 숫자에 속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은행의 달콤한 말에 현혹되어 설비 투자나 사업확장에 매진한 이가 얼마나 많았던가. 

- 그래서 마사야도 아버지를 원망할 생각은 없다. 그 시절에는 모두들 들떠 있었고, 잔치가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하지만 지난 2, 3년 사이에 곤두박질친 회사 사정을 생각하면 마사야는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처음에는 그저 하루 이틀 일거리가 없을 뿐이라고 여겼다. 그다음에는 자신들 주변에만 일거리가 없는 거라고 여겼다. 그런 후에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여겼다.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산업 전체가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종업원들의 월급조차 줄 수 없는 상태였다.

 

- 비참한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던 그의 마음속을 스친 생각은 차라리 아버지가 죽어 줬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생명 보험을 들어 놓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목을 맨 아버지를 보았을 때는 솔직히 말해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올드 파병이 어느새 비어 있었다. 마사야는 병을 바닥에 놓고 굴렸다. 네모난 병은 고작 반 바퀴를 구르고 멈췄다. 벽시계를 보니 어느덧 날이 밝을 시각이었다. 

 

- "건재상이라니, 그건 왜?" 
"여기 그렇게 적혀 있잖아." 
마사야가 왜건의 옆면을 가리켰다. 
"아아, 그러네. 흐음, 건재상 차였구나."
미후유도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어디서 빌려왔는데?"
"그건 비밀." 
그녀가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어쩐지 찜찜하네."
"있지. 마사야. 세상에는 물건이 넘쳐나. 차도 마찬가지고. 넘쳐나는 물건을 돈을 내고 빌렸을 뿐이야. 그런 데 신경을 쓸 필요는 없어."

 

- "일할 때도 어디선가 보고 있지나 않을까 신경이 쓰여서 일에 집중할 수가 없어요. 이래도 피해가 없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도 경찰은 따분한 표정으로 피식거렸다. 
"정신적인 괴로움을 피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물을 느끼는 방식은 사람에 따라 제각각일 텐데 말이죠."
"하지만 이혼할 때는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다는 이유로 위자료를 청구하는 일도 있잖아요."
"그건 민사사건이고, 경찰서에 와서 그런 얘기를 하면 곤란하지." 
이제는 말투까지 거칠어졌다.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았다거나 위험한 일을 당했다거나, 그럴 경우에 찾아와요. 지금으로서는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요." 
"신변에 위험을 느낀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경찰이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는 건가요?"
"아, 그러니까"
경찰이 성가시다는 듯이 말했다.
"신변에 위험을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는 사람 나름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일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요? 댁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댁한테 해를 입히려고 한다는 증거가 어딨어?" 
대답을 하지 못하는 아키코에게 경찰은 웃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뭐,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니에요. 요는 이런 거지. 댁을 마음에 둔 남자가 어떻게든 댁의 마음을 끌려는 거 아니겠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행복한 일이에요. 댁이 상당히 미인인 만큼, 미인세라고 받아들이면 어떻겠어요? 그래그래, 미인세요. 미인세." 
미인세라는 말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경찰은 그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 경찰이 도와주지 않는 이상 스스로 제 몸을 지키는 도리밖에 없었지만, 상대의 정체를 모르니 방법이 없었다. 일단 쓸데없이 상대를 자극하지 말고, 너무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대책이라면 대책이었다. 

 

-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요. 
경찰의 무책임한 말이 귓가를 맴돈다. 무슨 일이 일어난 다음에는 너무 늦고 만다. 그리고 지금 이대로라면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난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반드시 일어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을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상대의 발소리에 몸을 떨며, 아키코는 뛰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아파트까지 계속 걸었다. 

 

- 신카이 미후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아키코와 동갑이지만 때로는 무척 어른스럽게 보이는가 하면 소녀마냥 천진스러워 보일 때도 있다. 지금은 후자인 듯하다

- 중앙로에 면한 케이크 가게 2층에 있는 카페로 갔다. 창가에 빈 테이블이 있어 그곳에 마주 앉았다. 아키코는 커피를, 미후유는 로열 밀크티를 주문했다. 

 

- 가게 안을 둘러보며 사쿠라기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디자인 반지 코너에 젊은 커플이 두 쌍 있었지만 어느 모로 보나 구경만 하러 온 사람들이다. 산다고 해야 3만 엔 정도 싸구려일 것이다. 신카이 미후유가 조금 더 잘 차려입은 남녀 쪽을 상대로 열심히 신상품 반지를 권했지만, 여자만 관심을 보일 뿐 남자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저래서는 살 리 없다고 사쿠라기는 판단했다. 

 

- 약혼반지 코너에서는 하타케야마 아키코가 삼십대로 보이는 남녀에게 반지 몇 가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이쪽은 그나마 기대할 만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구경 삼아 와서 약혼반지를 몇 개씩이나 손가락에 끼어 보는 손님은 많지 않다. 게다가 보아하니 남자는 옷차림에 돈깨나 들인 것 같다. '하나야'에 올 작정으로 옷을 갖춰 입었을 것이다. 문제는 하타케야마 아키코가 얼마짜리를 파느냐 하는 것이었다. 저 아가씨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곧잘 가격이 낮은 물건을 권하곤 한다. 손님이 망설인다면 상황을 봐서 끼어드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 안 그래도 불경기인데 한신 아와지 대지진에 지하철 사린 사건까지 겹쳤으니 손님의 발길이 멀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플로어 매니저인 하마나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그가 네모난 얼굴에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무슨 말을 한다. 뒤따라오는 중년 남녀는 사쿠라기도 본 적이 있다. 급성장한 디스카운트 숍의 사장 부부다. 남편은 뚱뚱한 몸을 버버리 양복에 밀어 넣고 번쩍거리는 롤렉스 시계를 찼다. 온몸을 에르메스로 휘감은 아내는 스타일도 자세도 나쁜 데다 화장이 촌스럽기 짝이 없다. 명품이 울겠다고 사쿠라기는 볼 때마다 생각한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은 어떤 물건을 찾으십니까?" 
사쿠라기가 사장 부부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두 사람에게 미소를 던지는 비율은 5 대 1. 말할 것도 없이 아내 쪽을 중시한다.

- 하마나카가 두 사람을 VIP 코너로 안내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사쿠라기는 싸구려 물건이나 팔아 돈을 버는 인간들이 저렇게 으스대다니 '하나야'의 간판이 울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어디선가 감사합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신카이 미후유가 가게 로고가 찍힌 쇼핑백을 조금 전의 커플에게 건네는 참이었다. 살 리 없다던 사쿠라기의 판단이 틀린 셈이다. 디자인 반지로는 크게 돈벌이가 되지 않지만, 팔리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 

 

- 물건 하나 건졌다고 사쿠라기는 신카이 미후유를 보며 생각했다. 1층 매장에서 느닷없이 옮겨 왔을 때는 어떨까 싶었는데 손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이 뛰어났다. 전에는 유명한 부티크에서 일했다는데 왜 그 가게를 그만두었는지는 알 수 없다. 치명적인 결점이라도 있나 했는데 지금으로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아무튼 하타케야마보다는 한결 유능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타케야마 아키코는 여전히 반지 하나 파는 데 시간을 질질 끌고 있다.

 

- 그제야 사태를 이해한 하마나카가 크게 소리쳤다. 
"상품을 정리하고 빨리 아래로 대피해요. 진열장 잠그는 거 잊지 말고."
그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 점원들은 이미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손님이 별로 없어서 밖에 나와 있는 상품도 별로 없었다. 점원들이 손수건을 입에 대고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쿠라기를 데리고 내려갔다. 누가 작동시켰는지 경보기가 울렸다.

 

- 하마나카가 VIP 코너에 있던 부부를 계단까지 안내하는 모습을 보고 아키코는 신카이 미후유의 어깨를 쳤다. 
"빨리 내려가자."
"그래."
미후유가 계단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아키코가 "이쪽이야." 하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상행 전용 에스컬레이터의 비상정지 스위치를 눌렀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가 멈추자 그리로 내려갔다. 과연, 하고 감탄하며 아키코는 그녀를 따라갔다. 

 

- 가토는 점원들이 진술했듯이 최근에 그녀들 주변을 맴돈다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아무래도 신경 쓰였다. 염소계 가스는 물론 위험하긴 하지만 확실하게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물질은 아니다. 그렇다면 범인의 목적이 '하나야'에 있는 누군가를 겁주는 데 있지 않을까. 그런 음습한 방식은 여직원들이 말한 수수께끼의 인물과 이미지가 맞아떨어진다. 참고인 조사를 할 때 "변태로군." 하고 중얼거림으로써 지하철 사린 사건과의 관련성을 기대하던 공안 놈들을 언짢게 만들긴 했지만 말이다. 
 
- 상대가 지정한 장소는 스이텐구 근처에 있는 어느 호텔의 티 라운지였다. 웨이터라기보다 갸르송이라고 부르는 편이 어울릴 것 같은 검은 복장의 사내가 세련된 동작으로 가토와 니시자키를 구석 자리로 안내했다. 메뉴를 본 가토가 자신도 모르게 벌렁, 몸을 뒤로 젖혔다.

"이것 좀 봐. 커피가 한 잔에 천 엔이나 해!" 
"호텔이니까 당연하죠. 아마 리필은 무제한으로 해 줄 겁니다."
"그래? 그럼 적어도 두 잔은 더 마셔야겠군." 
가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회사원으로 보이는 양복 차림의 남자가 많다. 가토도 양복을 입었지만, 그들이 입은 것과는 명칭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옷으로 보였다. 외국인도 많다. 차분히 앉아 있을 만한 분위기는 아니다.
"왜 이런 곳을 선택했을까?"
"볼일이 있어서 이 근처에 와 있답니다. 그리고 평소에 자주 이용하는 곳이라나요."
"커피 한 잔에 천 엔이나 하는 곳에 자주 온단 말이야? 보석점 점원이 그렇게 월급이 많아?"
"잘은 모르지만, 독신 여성들은 돈이 좀 있나 봐요. 게다가 거품 경제 시절에는 사치깨나 부렸을 텐데 그 버릇이 어디 가겠어요?"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으면 고생 좀 하겠군." 
"제 생각도 그래요. 하지만 상당히 미인이니 달려드는 남자도 많을 거예요."
"미인인 건 사실이지만, 나는 사양하겠어. 다부진가 하면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단 말이지." 
"걱정 마세요. 그쪽은 가토 선배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테니까요."
니시자키가 얄밉게 받아치는데 커피가 나왔다. 가토에게는 향기도 색깔도 일반 찻집의 커피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마셔보니 실제로 맛있다. 

 

- 흰 투피스를 입은 신카이 미후유가 걸어오고 있었다. 모델처럼 자세가 바르고 걸음걸이도 아름답다. 게다가 의연한 품격마저 감돈다. 정말 평범한 보석점 점원이란 말인가 하고 가토는 새삼 감탄했다. 

- "가게는 내일부터 영업을 재개한다면서요?" 
"네.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이미지 회복을 위해서도 더 열심히 하려고 해요."
그녀가 가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 것 같은 눈이다. 가토는 커피잔으로 손을 뻗었다.
"오늘 이렇게 시간을 내주십사 한 이유는, 실은 아주 미묘한 문제를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장소를 신카이 씨에게 정하시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고요."
"무슨 일인데요?"
미후유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가토는 하마나카를 체포했을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이 여자는 몹시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사뭇 당당해 보인다. 겨우 며칠 사이에 충격에서 벗어난 것일까. 
"며칠 전 하마나카 씨의 집을 수색해서 증거물을 여러 개 압수했어요. 그것들을 바탕으로 하마나카 씨를 심문하던 중에 뜻밖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로열 밀크티가 나왔다. 미후유는 고맙다고 말하고 일단 한 모금 마셨다. 가토의 눈에는 털끝만큼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하마나카 씨의 말이,"
미후유의 표정에서 사소한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그는 말을 이었다.
"그가 노린 사람은 신카이 씨 하나였대요. 게다가 일방적으로 신카이 씨를 좋아한 게 아니라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였다고 주장했습니다."
미후유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니, 무표정한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잠시 가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눈을 두 번 깜박거린 후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무슨 뜻인가요?"

- "하마나카 씨가 그런 식으로 접근한 적도 없었습니까? 그러니까, 그, 치근대지 않았냐는 뜻입니다." 
"그런 일은..."
그 순간 미후유의 얼굴에 변화가 나타났다. 비로소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뭔가 짐작이 가는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요, 짐작이라고 할 것까지는..."
"사소한 일이라도 좋으니 말씀해 보세요. 사건과 관계없다고 판명되면 앞으로 이런 종류의 질문은 일절 하지 않을 것이고, 불쾌하게 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저희는 신카이 씨의 사생활에 개입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뜻입니까?"
"바에 가자고 했거든요. 조금 더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다면서요."
"그런데 신카이 씨가 거절했나요?"
"늦은 시간이었거든요.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마셔 봐야 재미도 없고요."
"그렇군요."
직업이 직업인 만큼 상대가 하는 말의 진위를 파악하는 데는 자신이 있는 가토였지만, 신카이 미후유에게서는 이렇다 하게 파악되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든지, 아니면 그녀의 연기력이 뛰어나든지, 둘 중 하나다. 
"직장의 다른 여성 분에게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마나카 씨가 유혹한 적이 있느냐는 뜻입니다."
글쎄요, 하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그런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요."

- 바지와 티셔츠 차림이다. 이름이 유코라는 건 다른 손님이나 그녀의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알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대개 안채에 들어가 있지만 홀 쪽이 붐비면 나와서 일을 거들기도 한다. 요리는 유코의 아버지가 도맡아 하는 듯했다. 과거에는 유명 요릿집에서 요리사로 일했다고 한다. 마사야는 처음 도쿄에 왔을 때 과연 이 지방 음식이 입에 맞을까 싶어 불안했는데, 이 집을 알게 되면서 그런 걱정을 덜었다. 

 

- 손님 하나가 텔레비전을 보며 손뼉을 쳤다. 응원하는 구단이 득점한 모양이다. 물론 자이언츠일 것이다. 마사야는 한신팬은 아니지만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간사이 사투리를 썼다가 괜스레 트집이 잡힐까 봐서다. 미후유는 빨리 사투리를 고치라고 성화다. 간사이 사투리가 유리할 때도 있지만 불리할 때도 있으니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구분해서 사용하면 좋겠다고 한다. 실제로 미후유는 자유자재로 표준어와 사투리를 구사한다. 굳이 밝히지 않으면 그녀가 간사이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정도다.
"표준어 그까짓 것, 간단해. 영어나 프랑스어를 배우는 거랑은 다르다니까. 어차피 일본말이잖아. 게다가 텔레비전에서 매일 흘러나오니까 싫어도 귀에 들어오기 마련이고, 그걸 귀담아들으면 돼."  

 

-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미즈하라 제작소의 말기와 똑같다고 마사야는 생각했다. 여러 명이던 종업원을 한 명 한 명 해고하고 일의 규모를 축소한다. 상황이 나쁜 쪽으로 흘러가는 악순환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물론 후쿠타의 심정은 이해한다. 마사야도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이 공장에 기술자가 세 명이나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 한 명이면 충분하다. 마사야의 솜씨를 본 후쿠타도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그건 그런데, 그 부품은 대체 뭘까.

 

- "아 참, 그리고 이거."
유코가 조그만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단것 좋아해요?"
"싫어하진 않아."
"그럼 이것도 특별 서비스."
그녀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 '오카다'를 나와 5분 정도 걸어가면 아파트가 나온다. 2층짜리 조그만 건물이다. 도쿄로 올라왔을 당시 마사야는 무직이었다. 보증인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살 곳을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만일 혼자였다면 이곳 사정에 어두운 마사야로서는 대책이 없었을 것이다.  

- 잠시 후 싸구려 초인종 소리가 났다. 마사야는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그녀는 이 아파트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마사야에게도 그녀가 사는 집 열쇠가 없었다. 신카이 미후유는 티셔츠 위에 청재킷 차림이었다. 하의는 청바지, 마사야네 집에 올 때는 여성스러운 옷차림을 하지 않는다. 머리도 단정하게 빗지 않는다. 

 

- "일은 어때?"
"그게, 좀 이상하게 돌아가네."
마사야는 후쿠타 공업의 상황을 미후유에게 이야기했다. 그녀가 심각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눈을 반짝거렸다. 
"그러니까 마사야의 솜씨를 인정했다는 얘기잖아? 그거 잘됐다."
"하지만 나 때문에 두 사람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는걸."
"그게 어때서? 이 세상은 약육강식, 약자가 먹히는 건 어쩔 수 없어."
마사야는 대꾸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는 그도 안다. 하지만 어쩐지 께름칙했다. 

 

- "마사야." 
미후유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가 그렇게 다른 사람을 걱정할 처지는 아니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대지진이 일어났던 날, 도시로를 죽인 순간부터 자신의 인생은 달라지고 말았다. 
 
- "이게 뭐야, 케이크?"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이 밝은 목소리를 내면서 미후유가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봉투로 손을 뻗었다. 
"어머나, '하모니'의 슈크림이네! 어쩐 일이야, 마사야도 이런 걸 살 때가 있어?"
"사지 않았어. 식당 여자애가 줬어.”
"식당 여자애?"
순간 미후유의 눈이 빛났다.
"아아, 그 예쁘다는?"
"예쁘다고 하진 않았어."
"그랬나? 아무튼 마사야에게 관심이 있나 보네."
"그런 거 아니야."
"숨길 필요 없어. 나쁜 짓도 아닌데, 뭐. 한 개 먹어도 돼?"

"그럼."

 

- 처음부터 아오에를 지명했다. 소개자 칸이 비어 있어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알았는지, 또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그때는 아오에도 몰랐다. 구태여 물어본 적도 없다. 그 후로 한 달에 한 번은 왔고, 차츰 그 간격이 짧아졌다. 미후유는 미용실 내에서도 다소 화제가 되었다. 틀림없이 모델이나 연예인, 아니면 최고급 클럽의 호스티스일 것이라고 젊은 여자 종업원들이 수군거렸다. 저런 미인이 평범하게 살 것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아오에도 생각했다. 

 

-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고 물어본 적은 있다. 미후유의 대답은 "평범한 일이에요."였다. 손님이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깊이 파고들지 않는 것이 철칙이다. 

 - "일 끝나고 잠깐 시간을 낼 수 있어요?" 
미후유가 그렇게 물은 것은 지난번 왔을 때였다. 한창 머리를 손질하는 중이었다. 아오에는 약간 놀라서 거울 속의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쿡, 웃었다. 
"안심해요. 데이트하자는 거 아니니까. 의논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제게 말입니까?"
그래요. 하고 거울 속의 그녀가 눈을 살짝 치켜뜨며 그를 봤다. 그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요염하다는 말은 이런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고 아오에는 생각했다. 

- 미용실에서 2, 3분쯤 걸어가면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녀는 안쪽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오에는 자세를 바로잡고 다가갔다. 의논할 일이 있다고 했지만, 어차피 대수롭지 않은 일일 거라고 단정했다. 결국 단둘이 만나고 싶다는 얘기겠지. 이런 식으로 손님이 유혹해 오는 적이 드물게 있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귀찮은 일이 생기면 가게에 폐가 되고, 치에가 알면 더욱 골치 아프다. 

 

- 그러나 상대가 신카이 미후유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 수수께끼에 싸인 미녀의 정체를 알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물론 남자로서의 욕망도 가슴속에 잠재되어 있다. 그런데 음료를 주문한 후 미후유가 꺼낸 얘기는 상상 밖의 것이었다.

 

- '하나야'라는 이름에 아오에의 경계심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그러나 마음을 열 정도로 힘이 있지는 않았다
"우리 미용실을 자주 찾으시는 건 압니다. 하지만 당신을 믿을 만한 근거가 없어요."
그의 말에 미후유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 내가 당신을 속이기라도 한다는 말이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하나 물어볼게. 내가 터무니없는 사기꾼이라 치고, 당신한테 이런 제안을 해서 내게 무슨 이익이 있지? 다시 말하지만, 돈은 내가 낼 거야. 당신은 한 푼도 낼 필요가 없어. 연대보증을 서라고 하지도 않을 거야. 즉 내 얘기가 거짓이라 해도 당신에게는 아무 피해가 없단 말이야. 안 그래?" 
아오에는 받아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이 옳다. 위험 부담은 전적으로 그녀의 몫이다. 경영에 실패할 경우 아오에는 고개를 숙이고 원래 있던 미용실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사라진 돈은 돌아오지 않는다. 
"자금이 정말 당신 돈인가요?" 
아오에는 말을 조금 돌려서 물었다. 그 질문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신카이 미후유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 하지만 미후유는 미용실 개업으로 화제를 옮기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얻은 장사의 지식이나 손님과의 밀고 당기기, 시장을 확대하는 방법 등을 다양한 일화를 곁들여 가며 얘기할 뿐이었다. 그런 얘기들이 아오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화술도 능했다. 자기 얘기를 일방적으로 하지 않고 언제나 그의 의견과 감상을 물었다. 또한 그저 묻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의 대답에서 화제를 넓히거나 문제를 더 깊이 파헤쳤다. 그래서 얘기가 끊일 줄을 몰랐고, 시간이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가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이 각각 한 병씩 비었다. 
"어디 가서 한잔 더 할까? 내일은 미용실이 쉬는 날이잖아."

음식점을 나오면서 미후유가 말했다. 식사비는 그녀가 치렀다. 이대로 돌아가면 먹고 튀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오에 자신이 그녀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좋아요,라고 대답하자 그녀가 손을 들었다. 아오에의 등 뒤에서 다가온 택시가 두 사람 앞에 섰다.

- "있잖아, 우리 쇼핑하러 가자." 
"오늘은 좀 봐줘. 너무 피곤해." 
그러고서 벌렁 드러눕는데 발끝이 텔레비전 받침대에 닿는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좁다.
"아이참, 같이 가기로 약속했잖아."
치에가 아오에의 몸을 흔들었다.

 

- 이 여자는 아직 어린애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어른 여자가 아니다. 진짜 여자도 아니다.
아오에는 신카이 미후유의 목덜미에 있던 점 두 개를 떠올렸다.

 

- 마사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낀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는지, 그녀가 도달하려는 목적지는 어디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 마사야는 미후유의 목덜미에 나란히 있는 점 두 개를 떠올렸다. 후쿠타 공업의 기술자였던 야스우라는 이상한 여자에게 걸려 직장을 잃었다. 그 여자의 정체는 수수께끼로 남았지만, 야스우라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여자의 특징이 목덜미에 있는 점 두 개라고 한다.

 

-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그녀라면 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후쿠타 공업은 한때 은세공 작업을 주로 해서 금속 가공 설비가 남아 있다. 그러니까 마사야도 미후유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녀가 그 같은 사실을 알고 그 공장을 마사야에게 추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나아가 마사야의 일자리를 확보하려고 비슷한 기술이 있는 야스우라에게 덫을 놓았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 유코가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혼자 산다면서, 청소랑 빨래 같은 건 어떻게 해요?"
"빨래는 기분 내킬 때 하고, 청소는 한 적이 없어."

가끔 여자가 와서 해 준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방이 더러우면 건강에 좋지 않은데."
그리고 유코는 얼굴을 찡그리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다음에 내가 청소하러 갈까요? 나, 정리 정돈이라면 꽤 자신 있는데."

 

- 저런 여자와 살면 어떨까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해 보았다. 유코에 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라면 착실하고 안정되게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큰 모험을 하지 않을 테니 일확천금할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크게 오르기를 기대할 수 없는 수입으로 소박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녀라면 그런 생활에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일이 없지 않을까. 소박한 생활에서도 기쁨을 찾고 나름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않을까. 적어도 자신에게 팽팽한 긴장감을 강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 

 

- "제가 강적이라고요?" 
"그럼, 강적이지. 그 예쁜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보면 어느새 이쪽에는 불리하고 그쪽에만 유리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있으니 말이야." 
"이번 계약이 '하나야'에 불리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걸요." 
미후유가 그를 노려보았다. 물론 적의가 담긴 눈길은 아니다.

"당신의 그런 무기에 현혹되지 않으려고 늘 조심했으니까. 덕분에 이만저만 피곤한 게 아니야. 그래선지 와인 맛이 각별하긴 하군." 
"저야말로 긴장했어요. 이 정도로 큰 거래가 될 줄은 몰랐거든요." 
"당신 입에서 그렇게 겸손한 말이 나오다니 의외인걸. 보석장신구 업계를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휘두르는 당신도 긴장할 때가 있나?" 
"저도 보통 사람이니까요."
그녀가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식사할 것을 염두에 두고 립스틱을 얇게 바른 듯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입술은 요염하게 빛났다. 

 

- "당신이 그 반지를 보여 줬을 때는 상당히 놀랐어. 콜럼버스의 달걀이라고 할까. 지금껏 전혀 없었던 발상이었어. 과연 여자구나 싶더군."

"감사합니다."
그녀도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일은 그 반지를 들고 불쑥 내 앞에 나타난 거였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업자들, 분수를 모르는 디자이너 등등 별의별 사람이 약속도 없이 나를 만나러 오지만, 직원용 엘리베이터 안에서 기다린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었어."
"아키무라 사장님이 반드시 나타날 만한, 그러면서 쉽게 피할 수 없는 장소를 생각하다가 결국 그렇게 하고 말았어요. 그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당신은 우리 가게에서 일한 적도 있으니까 내 행동 범위를 얼마간 파악했던 거지. 놀랍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체험이기도 했어. 엘리베이터 안에서 애원하다니,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어. 아마 마지막이기도 하겠지." 
"저도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요."

 

- "좀 놀랐어요." 
"그런가? 별로 놀란 표정은 아닌데." 
"많이 놀랐을 때는 그런 표정을 지을 여유도 없는 법이죠. 아니면 저를 놀래려고 농담하신 건가요? 그렇다면 리액션을 좀 더 확실히 보여 드릴 걸 그랬네요." 
"자네는 만만찮은 여자야."
드라이 마티니 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다카하루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식으로 말을 돌리면서, 실은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하고 있겠지. 자, 이 상황에서 뭐라고 대답하는 게 최선일까, 하고 말이야."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입술이 요염하게 빛났다. 
"제가 더없는 악녀라도 되는 양 말씀하시네요."

 

- "천만에, 나는 자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내가 여태 독신인 이유는 단 하나, 머리가 좋은 여자를 만나지 못해서야. 자네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아. 그리고 머리가 좋은 여자는 만만찮은 법이지. 그래, 보기에 따라서는 악녀라고 오해받을 수도 있겠군." 
미후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가볍게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칭찬인가요? 혹시 제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머리가 나쁜 여자라고 경멸하시는 거 아니에요?"
"말 돌리기는 그쯤하고 대답을 들려줬으면 좋겠어." 

- "성형은?" 
"그것도 가능하겠죠."
미후유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아름다워지는 거예요."
"요컨대 그 마법의 터널이 자네가 그리는 꿈의 형태라는 말이군."
"굳이 말하자면요." 
"하지만 그건 여성의 필요에 대응할 뿐이잖아. 남자는 무시하나?" 
"저는 결과적으로 남자의 욕망에도 부응하는 셈이라고 봐요. 남자는 터널의 출구 앞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러면 아름다워진 여자들이 하나씩 나타나는 거예요." 
"남자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그렇게 확신해요."
미후유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아닌가요?"

- 첫 요리가 나왔다. 성게알과 새우로 만든 오르되브르다. 맛있겠다 하며 미후유가 포크를 들었다. 아오에도 포크를 들었지만, 요리에 손을 대기 전에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맛을 음미하는 것처럼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이 여자에게는 엄청난 힘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아오에는 생각했다. 형사 사건의 중요한 증거물에 관한 정보를 힘으로 비틀었다. 

 



- "나와의 관계도? 설마..."
"그래, 그건 아직 모를 거야. 하지만 내가 숨기는 일이 있고 따로 애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의심은 품었을 수도 있어. 아무튼 골치 아파. 그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탐정 따위를 고용할지도 몰라." 
"그건... 곤란하잖아." 
"그러니까 선수를 치자는 거지."
미후유는 요리에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 세상에 약점이 없는 인간은 없어. 일단 상대의 약점을 쥐면, 어떤 식으로 나오든 안심이잖아."
이런 말을 할 때면 그녀의 온몸에서 냉기를 품은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 마사야는 한기를 느꼈다. 

- "원하는 게 뭔지는 알겠는데, 내가 알아낼 수 있을까."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해. 걱정 마 마사야는 알아낼 수 있을 거야. 내가 눈독 들인 남자니까."
"하지만..." 
마사야는 자신이 없었다. 사진 속 여자는 씩씩하고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만일 약점을 못 찾겠으면 만들어 내면 그만이야. 별일 아니지."
"약점을 만들어 내다니, 어떻게?"

- "이런 식으로 말하면 당신은 공감하지 못하겠지. 결국 내 직감일 뿐이니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를 느꼈어. 제대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흔한 표현을 쓰자면 여자의 직감이랄까." 
마사야는 분위기를 맞추듯이 웃어 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녀의 혜안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아까 방에서 화장을 고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내가 이런 데서 뭘 하는 걸까."
요리에가 마티니 잔을 불빛에 비춰 보려는 것처럼 들어 올렸다.
"모처럼 이렇게 멋진 곳에 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야경에 둘러싸여 있는데 왜 탐정 흉내나 내고 있을까 하고 ..."

 

- "왠지 자꾸 신경이 쓰여. 지금 그 여자 머릿속은 마사야 생각으로 가득할 텐데, 마사야에게도 말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러자 마사야가 전화기에 대고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려워. 그 사람도 나름대로 일정이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마사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정말 이상해, 마사야를 만나지 못해서 안달일 텐데 말이야."
미후유의 말은 지나치게 단정적이었다. 그러나 그 단정이 반드시 빗나간 것도 아니라는 점이 이 여자가 무서운 이유이기도 하다.

 

-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직접 전화해 보면 되잖아."
"내가 전화할 아무런 명분이 없으니까 그렇지. 그래서 마사야에게 부탁하는 거야. 당신한테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대체 뭘 그렇게 두려워하지? 요리에 씨가 잠시 집을 비운다고 당장 뭐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어쨌든 일단 마사야가 전화해 봐. 그리고 뭐든지 알아내면 내게 연락해 줘. 알았지?"

- 사체가 발견되어 수사관이 동원되면 공개적으로 미후유 주변을 수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가토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별개 문제다. 

- 솔직히 말하자면 가토는 신카이 미후유에 관한 수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과거, 그녀의 목적, 더 나아가 이면에 감추어진 얼굴, 그 모두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고, 수사에 진척이 있으면 당연히 찾아올 최후 대결에도 자기 외의 사람이 발을 들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 왜 그런 생각이 들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신카이 미후유리는 여자를 자신만 눈여겨보았다는 자부심 때문일까. 그런 이유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내가 그 여자에게 빠졌을지도...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보고서를 앞에 두고 가토는 히죽 웃었다.

- 위협하기는커녕 오히려 은혜를 베풂으로써 그에게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각인시켰다. 그 여자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이 추리에 따르면 미후유의 그늘 뒤에 숨은 공범은 아오에가 아닌 다른 인물이다. 아오에를 실제로 만나 보고 나서 가토는 자신의 추리에 자신감을 얻었다. 아오에는 미후유의 꼭두각시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단순히 사업상의 일일 뿐이다. 금속 가공 기술자라는 조건을 빼고 보더라도 그는 범죄에 가담할 만한 그릇이 아니다. 

 

- 아오에에게 신카이 미후유의 과거에 관해 물었지만,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아오에가 오늘 있었던 일을 미후유에게 알리는 것이 그의 노림수였다. 그녀는 가토라는 형사가 자신의 과거를 캐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어떤 행동을 취할까. 미후유의 정체를 파헤치려면 공범을 찾아내는 것이 빠른 길이다. 그렇다면 그 숨은 조력자는 어떤 경우에 행동에 나설까. 


- 그 여자는 과연 이 귀찮은 형사를 어떻게 요리하려 들까. 
그 순간을 상상하자 가토는 몸이 떨렸다. 두려워서가 아니다. 그 마성의 여자가 본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몹시 기대되기 때문이었다. 

 

- 사진 속의 요리에는 옅은 보라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녀는 베이지색 바지 정장 차림이고, 그녀 옆에 찍혀 있는 마사야는 회색 니트 위에 흰 셔츠재킷을 걸쳤다. 배경은 도내에 있는 유명한 호텔 로비, 다른 사진에는 체크인하는 요리에의 뒷모습이 찍혀 있다. 그리고 둘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장면도 있었다. 
"숨어서 찍은 것치고는 상당히 깨끗하게 나왔지?"
미후유가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 짓는다.

 

- 두 사람은 늘 만나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있었다. 그래도 점원에게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미후유는 그들을 등지고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선택했다. 
"사진을 찍는 줄은 전혀 몰랐어."

- 스칼렛 오하라 같은 여자.

- 미후유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조금 전에 갑판으로 나가는 걸 보았다고 했다. 그는 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미후유가 흰 드레스 차림으로 바람을 맞고 있었다. 
"뭐 해, 그런 차림으로?" 
아키무라는 자신의 코트를 벗어 아내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고마워요, 하며 미후유가 코트의 앞자락을 여몄다. 그녀의 등 뒤로 레인보우 브리지가 보였다. 오늘 밤은 계속 조명을 켜 놓을 모양이다. 그 빛을 받아 그녀의 두 뺨이 빛나고 있었다.
 

 

      

 

 

 
환야 1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소설『환야』제1권. 1995년 1월 일본을 강타한 한신 아와지 대지진과, 같은 해 3월 일본 지하철에서 일어난 사린가스 사건을 시대적 배경으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화려했던 일본 경제의 거품이 사그라들고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 불황이 지속되던 1990년대 말, 욕망과 관능이 꿈틀대는 거대도시 도쿄의 어둡고 축축한 뒤안길이 공간적 배경이다. 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남자 마사야.그리고 그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여자 미후유. 가족과 삶의 터전을 모두 잃은 두 사람은 새로운 삶을 찾아 함께 도쿄로 떠난다. 이후 미후유는 타고나 미모와 재능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며 성공의 계단을 오르고, 마사야는 미후유의 그림자로 살면서 그녀의 성공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해 나간다. 모든 일이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라던 미후유가 정략결혼이라는 핑계로 다른 남자와 결혼한 뒤 마사야는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철저히 짓밟고 농락했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우연한 사건으로 미후유를 알게 된 경시청 형사 가토는 그녀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의문을 품고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그녀의 비밀에 점차 다가서는데…….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
출판
재인
출판일
2020.03.01
 
환야 2
“비록 그녀와의 밤이 환상일지라도…….” 한신 아와지 대지진에서 밀레니엄 전야까지 세기말, 그 어둡고 불안한 시대의 뒤안길을 걷는 두 젊은 영혼의 처절한 행로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
출판
재인
출판일
20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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