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루돌프 슈타이너, 크리스토퍼 뱀퍼드] 인지학이란 무엇인가

일루젼 2023. 3. 1.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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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루돌프 슈타이너 / 크리스토퍼 뱀퍼드 / 조준영

원제 : What is Anthroposophy? 
출판 : 수신제
출간 : 2021.07.30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활동 중인 부분만 -혹은 그와 연결된 부분만- 활성화되어 보여진다. 이는 해당 플레이어가 감지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계의 범위와도 같다.

 

어쩌면 모든 것이 그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들이 상상하고 믿고 받아들인 것들만이 활성화되는 것은 아닐까. 아직 상상하지 못한 영역은 -혹은 잊혀진 영역은- 미완의 작품처럼 기본적인 법칙 하에 멈춰 있는 것은 아닐까. 

 

"진리는 보통 가정하는 것처럼 실재하는 어떤 것의 이상적인 반영이 아니라, 자유로운 활동에 의해 창조되는 인간 정신의 산물이다. 이 산물은 우리 스스로 창조하지 않았다면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식의 목적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개념적 형태로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반대로, 감각 세계와 결합하여 완전한 실재를 구성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최고의 활동, 그 정신적 창조는 보편적인 세계 과정의 유기적인 부분이다. 세계 과정은 이러한 활동이 없다면 완전한, 잘 싸여진 총체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진화와 관련하여 인간의 참여 없이 일어나는 우주적 사건을 그냥 심상으로 되풀이만 하는 수동적 방관자가 아니다. 인간은 세계 과정에 있어서 능동적 공동 창조자이며, 인식은 우주라는 유기체 안에서 가장 완벽한 연결고리가 된다."   

 

정당한 방법으로 상상하는 자는 창조의 권한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대다수의 이들은 다른 이들이 그려내는 판 위에서 등장인물로서 활동하게 될 것이다. 개개인은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가진 주인공임에도. 

 

아니,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 촬영되어 온라인에 업로드 된 영상은 언제 어디에서나 특정 조건만 갖춰지면 재생될 수 있다. 수많은 이야기와 캐릭터들을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근본적인 동원 - 일종의 전기나 인터넷망 같은 - 이다. 개별 캐릭터가 아닌 그 '동원'이 '나'라고 생각해 보자.

 

전기-전자가 흐를 때마다 생명력을 얻는 '무언가'는 어떤 전자가 흘러도 그렇게 움직일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는 '무언가'가 아니라, 어디로 흐를 것인가 하는 선택에서 온다. 그렇기에 저항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이 책에서 말하는 자아는 여타의 책에서 다루는 자아와는 다른 개념으로 보인다. 에고보다는 자의식에 가까운 듯한데, 후반부에서는 참나와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으니 읽을 때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이끌림을 느끼는 인물이라 평소보다 더 흥미롭게 읽었다. 다른 저작들도 찾아 읽어볼 예정이다. 

 


   

- 슈타이너는 강연이나 저서에서 "나는 스스로 체험하고 인식한 것만을 말한다."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즉 "진실된 내용은 체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지학은 어떠한 견해나 믿음에도 의지하지 않고, 본질적으로는 육신의 체험 못지않게 확실한 정신의 체험에만 기반한다는 그의 이야기가 사뭇 와닿는다.  

- 조준영

 


 

우리의 감정을 믿고 
우리의 의지를 발달시킬 수 있으려면,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과학뿐 아니라 철학과 심리학에서도 알 수 없다 하여 배제된 이런 질문들은 점점 더 장황해지고 무의미해져 가던 당시(아마 지금도) 꺼져가는 종교의 몫으로 넘겨졌다.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것이 슈타이너의 과제였다. 감각에 의존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에서 출발하여, 그는 사고하는 의식이 감각과 기존 개념세계의 문지방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들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그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는 이들 세계에는 수용적이고 직관적인 사고 활동이 통용되었다. 이를 우리는 살아 있는 사고, 현재적인 사고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고는 물질세계를 포함하여 정신세계들을 인지하는 데로 열려 있었다. 전통적으로 정신적 스승이 대중을 상대로 가르침을 시작하는 나이인 마흔이 가까워질 무렵, 슈타이너는 이 모두를 완수했다. 

 

- 슈타이너에 따르면,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사실들만을 가르쳤다. 사실 괴테와 관련한 경험과 첫 번째의 괄목할 만한 철학적 발견에 기초한 그의 이력은 끊임없는 연속성을 보여준다. 바꾸어 말하면, 그가 직접 이야기한 것처럼 슈타이너는 처음부터 인지학자였고 인지학을 가르쳤으며, 한 번도 여기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슈타이너가 실천하고 가르친 것이 인지학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돌프 슈타이너와 인지학, 이 둘은 서로 같은 말이나 다름없다.

 

- 인지학(Anthroposophy)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인간'을 뜻하는 anthropos와 '지혜'를 뜻하는 sophia, 두 단어가 합쳐서 된 말이다. 신지학(Theosophy: sophia가 '신'을 뜻하는 theos와 합쳐져서 된 말)이 신의 지혜 혹은 신성한 지혜를 의미하듯이, 인지학은 문자 그대로 '인간의 지혜' 혹은 인간적인 지혜를 뜻한다. 

 

- 인지학은 우리 안의 정신세계를 우주 안의 정신세계로 이끄는 인식의 길- 인지적 통로이다. 인지학은 마음과 감정의 요구로서 생겨난다. 인지학은 오직 이러한 내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한에서 정당하다. 자신의 영혼이 찾아내라 재촉하는 것을 얻은 이들만이 인지학을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이나 우주에 관한 질문이 배고픔이나 목마름과 같은 삶의 기본적인 욕구라 느끼는 이들만이 인지학자가 될 수 있다. 

- 인지학은 정신적으로 얻어진 통찰을 전달한다. 그 이유는 단지 감각지각과 지적 활동에 기반을 둔 과학과 일상이 종국에는 인생행로상의 한계나 장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뛰어넘지 못하면 우리의 영혼은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과학과 일상이 우리를 이러한 장애로 이끌어간다 해서 거기 머물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영혼을 통해서, 감각에 갇힌 지식이 끝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정신세계로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 때문이다. 

 

- 어떤 이들은 감각이 부여하는 한계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결정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이런 한계를 자각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바로 이러한 자각 안에서 감각 세계 너머로 진전할 수 있는 능력을 깨닫게 된다. 물고기는 물가로 헤엄쳐 간다. 물 밖에서 살 수 있는 물리적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이상은 갈 수 없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세상의 끝에 다다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경계에 이르는 동안 감각의 제한을 받지 않는 요소들 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영혼의 힘을 획득했음을 깨달을 수 있다. 

 

- 인지학의 기원이 헤르메티시즘이라고 보는 또 다른 근거는 슈타이너의 발달에 괴테가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수 학자들이 주장해 왔듯이, 괴테가 가진 상상력의 원천은 정확히 헤르메스적, 연금술적인 전통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괴테의 <초록 뱀과 아름다운 백합에 관한 동화(Fairy Tale of the Green Snake and the Beautiful lily)>가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의 화학적 결합(The Chemical Wedding of Christian Rosenkreutz)>의 변형이며, 그가 신비와 같은 장미십자회의 시들을 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이보다 덜 알려진 사실은, 자연과 대안과학 창조에 대한 괴테의 전반적인 접근이 헤르메스적이고 연금술적인 텍스트에 대한 깊이 있는 탐독과 변형에 기초하였다는 것이다. 슈타이너가 괴테를 모델로 한 이상 그 역시 이러한 전통의 일부분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지학은 서양 비교주의 발달의 정점이라고 하겠다. 

 

- 이러한 견해는 슈타이너가 실재에 대한 인지학적 접근의 기반이자 원천이라 하여 평생을 두고 반복하여 되돌아간 <자유의 철학>에 아주 충분히 드러나 있다. 슈타이너에게는 이것이 첫 번째 '미가엘' 책 -그가 1879년에 시작되었다고 말한 천사장 미가엘의 새 시대에 관한 첫 책- 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지식 이론에 관한 정보나 단순한 합리적, 논리적인 설명을 담은 책이 아니라, 실천을 위한 책이었다. 오늘날의 명상 교과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이 책에서 그는, 이것을 두고 명상을 하면 당신은 내가(저자가) 했던 것과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주장한다. 당신은 사랑 안에서 자유와 참 '나'의 일치를 경험할 것이다. 당신은 세계 진화에 대한 당신의 창조적 참여와 도덕적 책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연구를 두고, 슈타이너는 역사의 지평에 처음으로 나타난 진실로 독립적이고, 비지능적인 사유라고 이야기했다. 이런 '새로운 사유'가 이 시기 그의 연구에 나타난 두 번째 방향이었다. 

 

- 이른바 "지식의 복음서"라 불리는 <제5 복음서>에 대한 강연들에서 그는 젊은 예수가 야훼의 정신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예언적 영감의 목소리인 바트콜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깨닫게 됐는지를 이야기했다. 바트콜은 이제 인류에게 예전과 같은 영감을 가져다줄 수 없었다. 성스러운 계시에 다다를 수 있는 능력은 사라졌다. 이를 알아차린 예수는 방랑을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을 벗어난 어딘가에서 그는 '이교도'의 성지 앞에 섰다. 예수의 나이 24세였다. 사람들은 불행과 괴로움으로 고통을 받았다. 성직자들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희생이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예수에게 무한한 사랑의 표출을 느낀 사람들은 그를 제단으로 내몰았다. 즉시 그의 영혼은 정신적 영역들로 전이되었다. 그는 인류의 모든 고통과 슬픔이 응축된 인간 영혼의 심연을 응시했다. 그러자 예수는 태양의 영역으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거기서 그는 바트콜의 지혜의 목소리, 변형된 목소리를 들었다. 이때 예수가 들은 말의 의미가 바로 슈타이너가 괴테아눔의 초석에 새긴 우주의 기도문이 되었다. 슈타이너는 '자아'의 해방과 정신세계로부터의 분리를 수반하는 악의 인식에 관한 이 기도문을 발설한 것이 "우리의 활동 과정에서 겪은 일 가운데 가장 숭고한 순간 중 하나"였다고 했다. 

 

- 괴테아눔의 점진적인 건설 외에도, 전쟁 시기에는 악을 극복하는 일이 새로이 강조되었다. 슈타이너는 악이 가지고 있는, 서로 별개이면서도 협력 관계에 있는 두 가지 힘 혹은 존재를 구분해 냈다. 그는 이 두 세력을 루시퍼(Lucifer)와 아리만(Ahriman)이라 불렀는데, 루시퍼는 정신세계로 물러나 천국으로 돌아가라며 지상의 인류를 유혹한다. 이에 비해 아리만의 역할은 인류를 반대 방향으로 물질세계, 경직된 사고, 두뇌가 만들어낸 거짓 천국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이 두 세력은 슈타이너가 생각하기에, 현대 문명의 모든 면에서 (인지학을 포함하여) 죽음의 힘은 제외하고 삶의 외양만으로 문화를 창조하는 일에 협력했다. 이 죽음의 문화의 실재는 인지학이 우리가 사는 특정 시대의 정신적 통치자인 대천사 미가엘을 돕기 위해 탄생했다는 사실을 점점 깨달아가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그에게 굉장한 확신으로 다가왔다.  

 

- 인지학은 인간의 정신을 우주의 정신과 연결하는 인식의 통로라는 정의를 반영하여 슈타이너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예수 안에서 깨달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인간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신들이 정신으로부터 지상까지의 통로를 어떻게 준비했는지가 아니라, 인류가 이제 지상으로부터 정신에 이르는 통로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이다." 

 

- 지상으로부터 정신세계에 도달하는 이 통로는 슈타이너가 평생 추구한 통로이기도 하다. 이는 인지학의 통로이다. 길을 가는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슈타이너의 이해는 깊어지고 진화했으며, 그의 경험은 더욱 광범위해졌다. 그는 변화하는 환경에 끊임없이 대응했다. 이는 슈타이너의 연구 배경이 급격히 변하였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는 기본 방향만큼은 결코 바꾸지 않았다. 첫 연구에서 마지막 연구에 이르기까지 그는 지상에서 정신세계에 이르는 통로 -보통 사람의 의식이, 인간적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의 기본적인 정신성, 곧 정신적인 본성에 접근할 수 있을 때에만 이용 가능한 그 통로- 를 찾고자 애썼다. 그가 이해하기에, 정신의 실재에 접근하고 이를 경험하는 것은 단순히 '다리'를 놓는 일 이상이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적절한 일이었다.

 

- 무엇보다 슈타이너는 당시 만연해 있던 경직된 주지주의에서 인지학자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는 감정과 마음의 영역을 새로이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비한 도구 없이 기억이나 상상력, 사랑, 꿈과 같은 인간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새 기운을 불어넣은 것이었다. 동시에 슈타이너는 대천사 미가엘의 징표하에 그를 도와 봉사하는 인지학의 임무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미가엘 시대의 과제는 마음이 사고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으나 이 주제는 마지막 두 해에 이루어진 강연들 곳곳에 명시적이지는 않으나 비중 있게 엮여 들어가 있다.  
 

- 크리스토퍼 뱀퍼드


 

 

자유는
에테르체의 내적인 근본 형태입니다. 

기억은
아스트랄체의, 꿈을 만들어내는 힘으로서
우리 안에서 생겨납니다.

사랑은
우리가 외부 세계에 아낌없이 헌신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생겨나는 지도적 힘입니다.

자유로운 느낌, 
기억의 힘(우리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리고 우리의 내적인 삶을 내주고 외부 세계와 하나 되게 하는 사랑의 힘. 

이 세 가지 능력을 내적으로 지니게 되면 
영혼에 정신이 스며듭니다.
  

- 이미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에테르체를 내부로부터만, 그리고 잠에서 깨어날 때에만 이런 식으로 경험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내부로 향해진 에테르체(녹색으로 그려진 부분)만을 경험합니다. 빨간 선이 나타내는 것, 곧 외부로 향한 에테르체에 대해서는 전혀 자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죽음의 문을 통과할 때, 자아와 아스트랄체는 에테르체와 일종의 융합을 이룹니다. 

 

- 에테르체의 이러한 전도를 통해 내부였던 외부는 우리에게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밖으로 천천히 움직입니다. 이 시점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우리에게 인상을 줍니다. 죽음 이전에 경험했던 세계를 사후에도 접하게 되리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세계는 사라지지요. 우리가 이승에서 겪었던 일을 죽은 뒤에도 똑같이 경험할 수 있으리라 상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이는 사실과 어떤 관련도 없습니다. 에테르 -형성하는 힘- 의 변형의 결과로써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지상의 삶의 내용과 비교할 때 거대합니다. 매우 다르기도 하고요. 

 

- 외부가 내부로 바뀌었을 때, 우리는 먼저 지상의 삶을 형성하는 모든 것,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나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이를 감각 인상과는 매우 다른 강한 인상으로 경험합니다. 예를 들어 장미의 붉음을 경험하기보다 장미의 붉음이 우리 내부에서 어떻게 개념화가 되었는지를 경험하는 것이지요. 

 

- 이제 지상에서의 인간 삶과 관련해서 오늘날 상식과 같이 생각되는 것들을 숙고해 봅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먹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외부 세계의 물질을 우리 자신의 유기체로 들여옵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물질을 변형시킵니다. 우리는 입에서부터 시작해서 물질이 우리의 유기체 전체를 통과할 동안 계속 이를 변형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섭취하는 물질은 우리의 전체 유기체 속으로 사라집니다. 더욱이 과학은, 우리가 물질을 섭취하듯이, 외부로 끊임없이 물질을 잃어버리고도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일례로 여러분이 손톱을 깎을 때나 여러분의 머리카락이 빠질 때(완전한 대머리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탈락으로부터 여러분은 인간의 육체가 어떻게 끊임없이 물질을 잃고 있는지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실로 인간은 항상 이런 식으로 물질을 잃게 되며, 실제로 7년쯤 지나면 완전히 재형성된다는 것은 오늘날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 거칠게 얘기하면, 물질에 관한 한, 여기 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든 것이 8년이나 9년 전에는 온 세상에 흩어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여기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최대 7년이나 8년 전부터 조합되어 왔을 것입니다. 만약 7, 8년보다도 더 전에 형성되었던 근육과 피 등이 모두 교체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다 나이를 많이 먹었으니 여러분의 몸은 이미 몇 차례의 재생을 거쳤습니다 그것은 거기 앉아 계신 여러분이 아닐 테죠. 만약 저 의자에 앉아 있는 모든 성분이 그 세월 동안 계속해서 유지되어 왔다면, 그것은 거기 앉아 계신 여러분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이 집이나 다른 장소에서 7, 8년보다도 더 전에 여러분의 근육 여러분의 혈액, 여러분 육체의 다른 부분으로 들여온 어떤 것도 여기 더는 앉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천천히 이들을 내보내거나 흘려왔습니다.

 

- 하지만 유물론적인 과학은 우리에게 뭐라 얘기합니까? 그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지난 7년간 우리는 계속 먹어왔습니다. 지난 7년 동안 먹은 것은 아직 여기 앉아 있습니다. 그 이전에 먹은 것은 더는 여기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저마다 심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은 이 심장의 물질적 재료가 7년이나 8년마다 새로 바뀐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론은 여하튼 간에, 실제로 9년마다 여러분은 새 심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략 오늘날의 사고가 이러한 일들을 이해하는 방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여기서 유물론적 양심 -우리들 각자가 지녀야 하는- 은 이렇게 주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린 모두 먹고 있다! 우리는 모두 외부 물질을 섭취했고 그 결과로 내부의 과정이 일어난 것이다." 

- 그렇긴 합니다만, 이런 더 깊은 과정이 여러분이 믿는 바처럼 더 깊은 인간 본질과 긴밀히 연결돼 있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섭취한 물질은 인간이 물질을 처리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미 처리되었습니다. 물질은 여러분의 유기체를 통과해 가지만, 여러분 존재는 본질적으로 이들과 융합되지 않습니다. 물질은 자극만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자극하는 과정들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먹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물질이 우리를 자극하거나 부추기는 만큼 우리의 에테르체 -지구가 아닌 우주와 연결된 에테르체- 는 활발해집니다. 음식을 먹고, 소화하고, 신진대사하는 동안 자극을 창조하는 과정들이 생겨나며, 이를 통해 여러분 안에 저항력 -에테르적 과정- 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내게로 들어와 물질적으로 변형되는 성분은 내 낡은 심장을 자극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에테로부터 새로운 심장을 만드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 잠자는 동안 자아와 아스트랄체가 바깥에 있을 때, 에테르체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훨씬 더 고도로 조직된 존재일 것입니다. 에테르체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정말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존재라면, 잠에 들 때 에테르체처럼 물질육체와 함께 뒤에 남겨진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찾아낼 것입니다. 우리가 뒤에 남겨두는 것을 연구한다면 에테르 혹은 형성하는 힘의 실체가, 실제로 지상적 의미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높은 의미들에서 모든 지혜의 전형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겠지요. 

- 그렇다면 진정한 지식의 관점에서 부인할 수 없는 것이, 밤에 우리가 우리의 물질육체와 에테르체를 남겨두고 떠날 때 뒤에 남겨진 이 두 육체는 그 속에 존재할 때의 우리보다 훨씬 더 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아와 아스트랄체에 관한 한, 우리는 각각 지구 진화에서 좀 더 최근의 단계인 지구와 달 단계의 산물입니다. 반면 에테르체는 그전의 진화 단계인 태양 단계로 거슬러 가고, 물질육체는 첫 번째 진화 단계인 토성 단계로까지 거슬러 갑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이들 태양 단계와 토성 단계는 훨씬 고도의 완성 단계에 와 있지요. 태양 -진화의 과정에서 우리의 에테르게에 축적된 지혜의 총합- 에 비한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의 자아와 아스트랄체 내부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 그럴 수 있으려면, 점차로 내적 수양을 통해 자신을 물질육체 때문에 중력의 영역에서 사는 것을 선호하는 존재에서 가벼움의 영역에서 사는 방법을 빛에 의하여 배우는 존재로 변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통해 지구와의 관계를 경험하는 대신 우주 공간과의 연계를 느끼는 존재로 자신을 변형시켜야 합니다. 점차로, 별이나 태양, 달, 그리고 우주 공간에 대한 명상은 초원에서 자라나는 식물들과 같이 우리에게 친숙해져야만 합니다. 

- 만약 우리가 지구의 자손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초원을 뒤덮은 식물들을 얕잡아 봅니다. 우리는 식물들을 즐기지만, 지상의 존재로서 중력의 압박을 받는 우리로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력에 잡혀 있는 지구인으로서, 우리는 지구 위에 서 있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다면 우주 공간만큼의 넓이와 우리를 연결할 수 있지요. 별이 흩뿌려진 천상의 초원까지 말입니다. 우리 의식의 현 상태에서 우리는 천상을 바닥이라기보다는 '천장'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일단 하늘이 우리 발밑에 있는 지구의 땅과 같이 친숙해지면, 우리는 예전에 우리가 물질육체를 쓰는 방법을 배웠듯이 에테르체 사용법에 대한 배움을 지상의 의식을 우주의 의식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제야 우리는 식물계를 이해하고 꿰뚫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식물들은 땅밖으로 밀어 올려지기보다 하늘로부터 끌어당겨지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그때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든 사물의 과거 -이 물질계가 지나온 실제 과거- 가 우리 육체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물의 과거상 -현재를 있게 한- 을 정신 속에서 보게 됩니다. 이미 아주 먼 고대로부터 인류에게 주어진 최초의 비전 입문은 우주로의 입문이었습니다. 첫 신비학교들은 이러한 우주 입문을 도왔습니다. 이러한 최초의 비법들을 전수하는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이른바 '카오스적 해석', '아카샤 연대기적 해석'이라 불리는 우주 에테르적 해석, 다시 말해 현재가 우리 눈앞에 불러들인 과거에 대한 해석을 가르쳤습니다. 실제적으로, 이와 같은 우주에 의한 입문이야말로 인류가 지상의 존재로 달성한 첫 단계의 입문이었습니다.

 

- 마찬가지로 비전 입문의 두 번째 단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려면 우리가 깨어날 때 아스트랄체와 자아가 물질육체와 에테르체 속에 스며들도록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에테르체와 물질육체 속에 혼을 불어넣습니다. 그것들에 우리 자신을 결합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에테르체의 무한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에테르체 속에 도달하는 만큼뿐입니다. 어쨌든 우리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것은 에테르체입니다. 우리가 뛰어난 직관을 발휘할 때마다 이 직관을 자극하는 것은 우주와 내적으로 연결돼 있는 에테르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깨어 있을 때 발달시키는 모든 직관과 비범한 재능을 우주를 거쳐 에테르체로부터 받습니다. 에테르체가 아스트랄체를 자극할 때마다 우리의 비범한 재능은 우주와 대화를 나눕니다. 

 

- 우리가 이런 것들을 볼 수 없다 해도 우리는 변함없이 그 속에 존재합니다. 언제나 우리 영혼의 삶은 우리의 물질육체와 에테르체로 스며든 깨어 있는 상태에서 우리의 아스트랄체와 자아 속에 있습니다. 

 

- 현시대가 요구하는 한 가지 것은 바로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우리 자신의 정신 -말하자면 내부에서 영혼을 비추는 정신- 을 편견 없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이후에, 제가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입문의 세 번째 단계 -자기 인식의 입문- 로서 이를 설명하게 될 때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 정신과학이 영혼에 대해 말할 때는 이러한 세 단계에 걸친 입문 -우주를 통한, 현인을 통한, 그리고 자기 인식을 통한 입문- 의 정신에 관해 터놓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신과학은 영혼 삶의 여러 경계를 가로질러 갑니다. 하지만 사랑 없이는 이 길로 단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해야 할 점은, 오늘날의 오성이야말로 그 정점에 이르면 사랑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아주 특이한 일이 생기지요. 

- 사랑으로써 물질육체, 아스트랄체, 에테르체, 그리고 자아로 표현된 실재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의 음성 같은 것을 흡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수호신 혹은 정신의 음성에 주의 깊게 귀 기울일 만한 선의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인간들이 정말 '우리 시대의 수호신'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필요한 진지함을 가지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 꿈에서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이 강한 이미지(像)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은 꿈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꿈속에서 말소리가 울릴 때조차도, 꿈에 나오는 것은 말의 이미지 특성 -어조나 억양- 입니다. 소리나 낱말은 영혼이 들을 수 있는 상들로 모두 변형됩니다. 이렇듯 꿈은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가닿을 수 있는 수많은 면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잠을 자는, 그리고 꿈을 꾸는 이 세 가지 의식 상태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실제의 정신적 존재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 자유는 에테르체의 내적인 근본 형태입니다. 
기억은 아스트랄체의 꿈을 만들어내는 힘으로서 우리 안에서 생겨납니다. 
사랑은 우리가 외부 세계에 아낌없이 헌신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생겨나는 지도적 힘입니다.

- 인간 영혼이 이 세 가지 힘에 참여할 때, 그리고 거기에 참여하는 정도만큼, 정신적 삶이 배어듭니다. 이 세 가지 힘 -자유로운 느낌, 기억의 힘(우리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리고 우리의 내적인 삶을 내주고 외부 세계와 하나 되게 하는 사랑의 힘- 이 완전하게 배어들 때 우리 영혼은 '정신화'됩니다. 이 세 가지 능력을 내적으로 지니게 되면 영혼에 정신이 스며듭니다. 이를 영혼의 올바른 뉘앙스로써 파악하는 것은, 인간이 그들의 영혼 안에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유, 기억, 사랑이 세 가지를 통해 정신이 내적으로 영혼 속에 녹아듦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인간 영혼이 정신을 보호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 우리는 이 모두를 우리 내면에서 생생하고 활기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필요한 내적 힘을 발달시키고 나면, 그때 충격이 찾아옵니다. 정신계로 통하는 문지방을 넘은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완전한 현실로 존재합니다. 

 

- 우리는 그런 생각과 관련한 최고의 진지함이 우리 영혼에 작용토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진지함을 정말로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신계로 넘어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라도 이 진지함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실로 정신계에 들어가 보고 싶다면 삶은 그 깊은 진지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정말로 원했기 때문이죠. (비계, 秘界) 입문학은 늘 이 진지함을 문화와 문명 안으로 불어넣으려는 시도를 해왔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가 다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 이 시대의 두드러진 징후로서 오늘날 교조적인 과학은 사람들에게 실재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온갖 도덕적 행위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의식해 갈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빨간색이나 흰색을 경험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자유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부인합니다. 우리는 현대 과학의 지배 아래 자유를 부인하죠. 왜죠? 현대 과학은 항상 더 먼저 일어나는 일이 나중에 일어나는 일의 원인이 되는 기계적인 측면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과학은 모든 일에는 분명 원인이 있다고 교조적으로 진술합니다.

 

- 우리는 외적인 방식으로 상을 형성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것들을 이해하는 남성 및 여성들로서 하나 된다면, 우리 대열 속으로 걸어 들어올 인지학이라는 존재의 살아 있는 형상과 내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사이를 움직이는 실제 존재로서의 인지학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인간이고, 인지학이라는 존재와 가까운 사이라면, 인류가 현시대에 그렇게나 필요로 하는 것을 정말 체험해보고자 하는 충동이 틀림없이 우리 안에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영혼의 눈을 위한 상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슴은 인지학이라는 존재에 대한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시대를 위한 최선의 충동이 될 수 있습니다. 

- 오늘 저는 인지학이 우리에게 주는 물질적 관점과 영혼적 관점에 정신적 관점을 덧붙이고자 했습니다. 정신적 관점은 겉으로 정신을 따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 영혼과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인지학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인간 영혼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지학에 대한 이런 본질적인 경험은 우리를 인지학과의 참된 만남으로 이끌어줄 명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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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교육자였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그는 젊어서 가정교사로 있었다.)과 타고난 정신적 재능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자신이 요청받았던 발도르프 학교들의 교과과정과 교육철학을 구축할 수 있었다. 191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처음 세워진 발도르프 학교로부터 일어난 자치 교육 운동은 그와 유사한 교육 운동 중에서는 세계 최대로 성장해 왔다. 

- 그는 비교(비의)주의자였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내적 세계의 대가였고,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통해서만 가르치면서도 그 자신이 항상 경의를 표한 많은 서구 정신적 전통의 후계자이자 역사가였다. 그는 '비의 기독교'라 일컬어질 수 있는 다양한 전통과의 연계를 명확히 밝혔다. 그와 동시에 세상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업적은 유일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그는 비의적인 목적 또한 지녔다고 사료되는 비의 기독교 위인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 그는 예술가였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건축가였고, 극작가였으며, 화가이자 시인, 그리고 오이리트미라 불리는 새로운 예술운동의 주창자이기도 했다. 

- 그는 전수받은 자였다. 정의하기 어려운 이 용어는 부단한 내적 연구를 통해 깨달음과 자각, 그리고 오직 세계와 인류만을 위해 정신세계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는 무욕의 경지를 달성한 사람을 가리킨다. 자신의 비전 입문을 위하여 19세기말의 신지학 및 신비주의와 초기적인 교분을 맺으며, 죽은 자들 및 장미십자회의 맥을 잇는 유체이탈의 대가들과도 의미심장한 조우를 가졌다.

 

- 그가 정신세계를 통해 알게 된 자신의 과제는 과학적 의식과 정신적 의식의 합일이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는 '지식의 위기'를 해결해야 했다. 지식의 위기는 일반적으로 말해 정신이 사실상 부인되었다는 사실에서 시작됐고, 아직도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오늘날까지도 정신의 실재는 과학적으로 불가해한 영역에 위치한다. 따라서 과학은 인간 정신과 영혼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들에 대답하지 못한다. 

 

- 하지만 그는 가르침을 시작하기 전에 결정적인 정신적 비전을 필요로 했다. 그때까지 그의 길은 그가 직접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세계로의 다리를 다시 놓는 급진적인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많은 것을 달성했다. 의식을 새로이 확장했고, 인간의 더 높은 자아, 즉 참 '나'의 불멸성을 직접 확인했다. 그러나 이는 모든 선입견과 기존의 문화 권력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고, 당시 기독교의 가르침과 실천 양식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치 유혹의 광야에 자신을 내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은총이 찾아왔다. 1898년에서 1899년에 걸쳐 그는 "정신적 직관과 함께한 기독교의 진화"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그는 "일상의 현장 이면의 내적 투쟁"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런 내적 시도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우주의 투쟁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점차 서광이 비추었다. 

 

- 슈타이너는 이렇게 회고한다. "진정한 기독교에 대한 의식적인 이해가 내 안에서 움트고 있었다. 세기가 바뀔 무렵 이러한 이해는 더욱 깊어졌다. 세기가 바뀌기 전에 간단한 내적 시험이 있었다. 이런 경험으로부터 마침내 나는 가장 심오하고 장엄한 지식의 향연 속에서 정신적으로 골고다의 신비가 실재하는 가운데 있게 되었다.

- 베를린에서 집필을 계속하며 노동자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슈타이너는 마리 폰 지버스(후에 그의 아내가 됨)를 만나면서 차츰 신지학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1902년 그는 독일 신지학협회의 사무총장이 되었고, 1913년까지 신지학 내에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해 2월에 신지학협회를 떠나야 했던 그는 인지학협회를 설립하여 1925년 사망하기 전까지 강연과 저술, 교육을 계속하며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

 

- 웨일스의 연금술사이자 신비주의자로 알려진 토머스(Thomas Vaughan)은 19세기의 이 '낭만주의적 인지학자들'(그들은 종종 이렇게도 불린다.)이 등장하기 한참 전인 17세기에 이미 인지학이란 말을 쓰고 있었다. 1650년 장미십자회 운동과 결부되어 중요한 문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던 본은 유지니어스 필랄레테스(Eugenius Philalethes)라는 필명으로 인지학적 신술 <인간의 본성과 사후 상태에 관(Anthroposophia Theomagica: A Discourse on the Nature of Man and His State after Death)>라는 짤막한 저술을 남겼다. 이 책에는 집필 목적이 "신의 지혜로 비춰본 인간 본성을 생각해 보는 일"이라 되어 있다. 

- 연금술과 신플라톤주의의 뉘앙스를 풍기는 위와 같은 17세기 자료는 인지학이란 말이 실은 이른바 '헤르메스적 우주론'의 약칭일 뿐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이런 신비학적 전통은 특히 르네 게농(René Guénon)이 지적한 것처럼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대우주'와 '소우주'라는 이중적 의미의 우주론적인 지식과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헤르메티시즘 -일반적으로는 서양의 비교(秘敎)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라는 단어는 신의 영역과 지상의 영역 사이를 중재하는 미묘한 상태에 대한 과학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는 신학의 영역인 신학적인, 즉 '제1원리'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 '헤르메스(Hermetic)'이라는 명칭은 그리스 신 헤르메스의 이름에서 나왔는데, 그는 신들의 전령이자 해석자로서 지팡이가 그의 주된 상징이다. 이런 의미에서 헤르메스는 이집트의 토트(Thoth), 로마의 머큐리(Mercury), 힌두의 부다(Buddha), 그리고 게르만의 오딘(Odin), 즉 보탄(Wotan)과 어느 정도 동일하다 할 수 있다. 헤르메스보다 세 배 더 위대하다는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Hermes Trismegistus)는 서양 신비주의 최초의 전설적인 스승으로서 땅과 달 아래, 그리고 하늘이란 세 영역의 지배자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린다. 이런 덜 중요한 신비 -우주론적이고, 따라서 파생적이기 때문에 위대한(혹은 신학적 신비와 대비하여 이렇게 불린다)- 는 원시의 인간 상태 -앤스로포스(Anthropos) 혹은 원형적인 인간 상태- 를 깨닫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것과 연결되는 정신과학은 앤스로포스를 지향하므로 '인지학적'이라 생각되는 것이 당연하다. 

 

- 슈타이너는 "후에 나는 이 <인지학>이라는 책 제목으로부터 이 이름을 따왔다."고 덧붙였다.(그러나 정말 이름뿐인 것이 침머만이 '인간의 관점'을 옹호하기는 했으나 그 자신이 대항하려 하는 헤겔식 '신지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추상적 방법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지학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인간의 관점'을 발견한다. 인지학은 인간의 관점에서 시작하는 정신적 행로 -정신적 인식의 행로- 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관점이란 무엇인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관점이란, 우리가 처한 세상 속에서 인간으로서 지금 있는 곳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너 자신을 알리는 델포이의 금언을 다시 한번, 우리 시대에 합당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즉 '우리가 누구인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으로부터 인간의 관점은 시작된다. 

 

- 1912년 루돌프 슈타이너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책을 한 권 쓰려고 했다. 그는 이 책을 끝낼 수가 없었고, 이 원고는 후에 단순히 <인지학 미완성 유고>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세 가지 다른 관점, 즉 인간 본성에 대한 접근법을 약속하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 괴테의 해석에 새로운 세계관의 기반을 덧대는 일과, 철학자들을 직접 상대하면서 괴테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성립될 수 있는 새 방법과 실천에 대해 "온전한 철학적 설명을 시도하는 일"은 사뭇 달랐다. 같은 기간에 슈타이너는 중요한 인식론적 저서 두 권, <진리와 과학>과 <자유의 철학>에서 이러한 기획에 착수했다. 

 

- 슈타이너는 우리가 할 일은 오로지 의식의 틀이 변화하고 온 세상이 바뀌는 체험임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사유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알아내기 위한 사유의 근본적인 조사에 기초를 두었다. 슈타이너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를 <진리와 인식> 서문에 아래와 같이 서술한 바 있다. 

- "진리는 보통 가정하는 것처럼 실재하는 어떤 것의 이상적인 반영이 아니라, 자유로운 활동에 의해 창조되는 인간 정신의 산물이다. 이 산물은 우리 스스로 창조하지 않았다면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식의 목적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개념적 형태로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감각 세계와 결합하여 완전한 실재를 구성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최고의 활동, 그 정신적 창조는 보편적인 세계 과정의 유기적인 부분이다. 세계 과정은 이러한 활동이 없다면 완전한, 잘 싸여진 총체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진화와 관련하여 인간의 참여 없이 일어나는 우주적 사건을 그냥 심상으로 되풀이만 하는 수동적 방관자가 아니다. 인간은 세계 과정에 있어서 능동적 공동 창조자이며, 인식은 우주라는 유기체 안에서 가장 완벽한 연결고리가 된다." 

 

- 괴테와 철학에 열중하는 것 이외에, 슈타이너는 이 기간에 문화적 아방가르드 삶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젊은 여류 시인 마리 오이게니 델레 그라치에(Marie Eugenie delle Grazie)의 객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 속에서 당대 가장 진보적인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한 젊은 오스트리아 시인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에도 자주 나갔다. 밤에는 급진적인 바그너학과 사람, 신지학자, 신비주의자와 온갖 파벌의 정치 사상가가 모여 있는 카페들(특히 그리엔슈 타이들 카페)에 앉아 연구를 해나갔다. 누군가 그곳 분위기를 묘사했다면 아마도 '니체 철학적'이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므로 그가 문화에 기울인 심혈이 괴테적인 면모와 좀 더 엄격한 철학적 면모를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니체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슈타이너는 바이마르의 괴테 기록보관소에서 연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니체 기록보관소에서 연구를 하기도 했다. 그의 <니체: 자유의 투사>나 1899년 논고 <철학 속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에서 이러한 연구의 결실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이 글들은 슈타이너의 저술 중 가장 급진적인 것으로, 이러한 개방적인 삶의 기간을 추단 하기에 알맞은 종류들이다.  

 

- 이 기간 내내, 가끔은 열정적으로, 또 가끔은 덜 열정적으로, 슈타이너는 신비주의와 신지학 모임 등에 호의적인 발길을 하였다. 그는 또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심령술, 초(超)심리학, 그리고 최면술의 최근 발달을 주시하였다. 그가 이러한 영역들에 접할 수 있도록 해준 이는 그리엔슈타이들 카페에서 만난 프리드리히 에크슈타인(Friedrich Eckstein)이었다. 슈타이너와 같은 나이의 에크슈타인은 바그너학파였고 채식주의자였으며 상징주의 철학가, 연금술사이자 음악가였다. 그는 신비주의에 있어 슈타이너의 첫 번째 외부 스승이었다. 슈타이너는 1890년에 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두 번째는 당신을 알게 된 일입니다." 그들은 비의(儀)의 물음들에 대해 논의하고 비교 서적을 함께 탐독했다. 슈타이너가 그 방면에 대한질문이 생기면 에크슈타인에게 가져갔다. 

 

- 아멘 
악들이 세를 떨칩니다
스스로를 떼어내는
내 자신임을 증언하고
다른 이들이 있어 생겨나는
이기심의 죄악을
일용할 양식 속에서 경험하나니
그곳은 하늘의 뜻이
다스리지 않는 곳,
인류 스스로
당신의 왕국에서 떨어져

당신의 이름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 이 시 -이른바 "대우주적 주기도문"- 는 기독교 신비주의에 대한 슈타이너의 정신적인 연구에서 비롯했다. 

 

- 비교주의자들은 미가엘이 1879년에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그전에 하늘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 승리한 대천사가 마침내 아리만 세력을 누르고 지상으로 쫓아버림으로써 그들은 이제 지상에서 고삐 풀린 것처럼 되었다고들 하였다. 미가엘을 돕는 인지학은 이들 세력을 무찔러야 했다. 이 전투는 무엇보다 "그리스도로 충만한 인간 관점의 중도를 가는 동안 정신적인 것의 탁월함을 주장할 수 있는 인지학자들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 세계에 이러한 비전을 알리기 위해 슈타이너는 역사 과정 안에 있는 정신적인 신비들을 풀기 시작했다. 그는 수많은 연속 강연을 통해 이 일을 해냈다. 이와 동시에 슈타이너는 죽은 자들과 협력하고, 산 자와 죽은 자의 공동체를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이에 대해 인간들은 문지방 양편에서 단일한 생명 실체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 "우리는 공동체를 창출한 원천을 깨달아 인지학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들 간의 분화(SM)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너무나 심화되었다. 어떤 경우는 너무 심해져서 그 모체마저 잊혔다." 


- 이런 분열과 파벌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서 슈타이너는 두 방면에 힘을 기울였다. 인지학의 새 정신적 중심을 만들어내는 일과 인지학의 새 언어를 창조하는 일이 그것이다. 첫 번째는 슈타이너를 회장으로 1923~24년 크리스마스 회의에서 창설된 일반인지학협회로 결실을 보았다. 슈타이너가 인지학협회에 실제로 참여하여 그의 '카르마'를 회원들과 연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연스럽게 정신적 중심의 상징으로서 괴테아눔을 재건축하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그 해의 정신적 주기와 함께하는 축제 주기에 대한 강연은 그가 구상한 인간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일종의 주요 악상을 제공했다. 

 

- 이제 그가 가르치는 인지학은 좀 더 현상학적이고 실체론적으로 되었다. 경험의 직접적인 표현이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처음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경험이 다시 해결의 열쇠로 부각되었다. 경험이란 지적 문제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 감정의 문제이다. 따라서 감정 역시 부각되었다. 인지적인 감정, 즉 사고하는 마음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 같은 맥락에서 슈타이너는 더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이야기는 그만의 경험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 정신세계를 향한 자신의 여행 기록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하고 회고하기 시작했는데, 이 여행은 실제로 죽은 자를 만난 경험에서 시작된다. 그가 언급한 영시(靈視, clairvoyant experience) 체험 중 첫 번째 구체적인 예는 아홉 살쯤에 자살한 여자의 영혼이 그에게 다가와 도움을 청한 일이었다. 이는 그의 일생에 걸친 과제의 서막을 알린 사건이었다. 그가 성장하면서, 사후 세계에 대한 질문-천상의 영역을 거치는 사후 여행과 재육화 과정뿐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의 공동체까지 그에게 가장 중요해졌고, 그는 반복해서 이 질문을 탐구했다.

 

- 크리스토퍼 뱀퍼드

 


 

- 인지학이 물질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다시 말해 "인지학의 물질적 관점")에 대한 생각이 여러분의 영혼에 떠오를 수 있도록, 오늘은 죽음의 문을 통과한 후에 경험하는 삶의 가장 첫 번째 양상만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지상의 삶에서 물질육체와 에테르 혹은 형성하는 힘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면, 이 연관성은 사는 내내 온전하게 지속되는 것이라고 막연히들 얘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사실 평범한 지상의 삶에서 평범한 인간의 의식은 잠과 꿈의 상태로 인해 단절됩니다. 그때는 아스트랄체와 자아가 물질육체와 에테르, 즉 형성하는 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지요. 반면 두 쌍(물질과 에테르 쌍, 아스트랄과 자아 쌍)은 각각 아주 긴밀히 결합돼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24시간에 한 번 돌아오는 정상적 수면 과정 속에서 일반적인 분리가 일어나지요. 물질육체와 에테르체는 아스트랄체와 자아로부터 분리됩니다. 그러나 물질육체와 에테르체는 불가분의, 상호 밀접한 관련을 지속하며, 아스트랄체와 자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쌍은, 말하자면 촘촘하게 짜여진 두 개의 통일체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 이러한 양상은 사람이 죽음의 문을 통과할 때 달라집니다. 그 시점에서 일어나는 일은 물질육체가 즉시 '벗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아와 아스트랄체, 그리고 에테르체 사이에 순간적인 연관성 -깨어 있는 삶에서는 결코 없었던 연관성- 이 만들어지지요. 이런 연관성은 불과 며칠 동안만 지속되며, 이는 사람이 사후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들을 만들어 냅니다. 

- 이 경험들은 무엇입니까? 사후 첫 경험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감각들과 그 감각들을 통합하는 오성을 통해 우리가 지상의 삶에서 흡수한 모든 것을 보는 동시에 그것들이 자신으로부터 사라져 가는 경험입니다.

 

- 일생 동안 우리는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리면 색깔이 있는 사물들을 본다는 사실에 익숙해집니다. 우리는 눈앞에서 사건과 과정이 오색찬란한 색깔로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러한 색깔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소 약화된 형태일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그 색깔들을 다른 감각 인상과 마찬가지로 기억 속에 집어넣습니다. 사실 우리가 자신을 관찰하는 데에 정직하다면, 예를 들어 방에 조용히 앉아 기억, 즉 우리의 내적 자아를 활동시킬 때에 우리가 내면에서 경험하는 것은 외적 인상의 흐릿한 반영물들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 이는 다음과 같이 일어납니다. 사후, 에테르체 전체가 장갑 한 짝이 뒤집어지듯 겉과 속이 바뀐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여기 빨간색으로 그린 부분이 안쪽을 향하고, 내부를 향했던 녹색 부분은 바깥쪽을 향하는 것입니다. 에테르체 전체가 훌떡 뒤집어집니다. 이러한 변형이 일어나면 에테르체는 놀라운 속도로 확장합니다. 거대해져서 우주 속으로 무한히 퍼져나가는 것이지요. 이렇게 나타낼 수 있습니다.(슈타이너는 빨간색으로 커다랗게 둥그런 테를 그리고, 그 둘레에 녹색 테를 그려 넣는다.) 

- 이전에는 자아와 아스트랄체가 에테르체 안에 있었는데, 이제 둘은 우주 속으로 확장되는 에테르체를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물을 다른 쪽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일부였지만 이전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던 모든 것이 이제 안쪽을 향합니다. 이전에는 내부로 향해 있었던 것 -지상에서 사는 내내 우리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 이 이제 바깥쪽을 향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더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것은 우주 속으로 흩어집니다. 살아 있을 때 색깔, 소리 등을 지니고 있었던 모든 것은 이제 밖을 향해 흐릅니다.
 

- 사물들은 물질적으로 존재했을 때보다 평화롭지 않습니다. 이승에서 정원에 심어놓은 장미들은, 송이송이 아름답습니다. 저마다 평화롭지요. 우리가 그 평화 안에서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그러나 이제 장미 정원은 매우 다른 존재로 변합니다. 정원은 그때에 사건들이 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지상의 삶에서 우리의 시선은 송이에서 송이로 미끄러지듯 옮겨 다녔습니다. 우리가 송이에서 송이로 움직일 때 우리는 영혼 안에서 그것들의 표현을 만들어냈습니다. 첫 번째 장미 한 송이, 다른 송이, 또 다른 송이. 이제 그 장미들은 마치 장미가 아닌 관념으로, 곧 내적 실재로서 살아 있는 생성의 과정과도 같이, 번개처럼 빠른 파동 속을 오가며 서로 맞물립니다. 이는 우리가 사건들의 바다 속에 있는 것처럼 우리 내적 삶으로 들어옵니다. 

 

- 그러면 우리 앞에 어떤 것, 지상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던 것이 나타납니다. 지상의 삶이 되어가는 것, 이 지상의 삶이 점진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보이지요. 이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어린 시절에서부터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알게 됩니다. 지상의 삶에서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지요. 자신으로부터 떠올라, 또 다른 두 번째 자아가 되어 우리의 첫 번째 자아가 아동기의 단순한 개념과 사춘기의 더 복잡한 개념 등을 어떻게 점진적으로 만들어갔는지를 관찰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어린 지구인의 탄생을 내부로부터 지켜봅니다. 우리는 이승의 삶이, 이 지구적인 존재가 시시각각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 가는지를 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사실상 우리 지상의 삶 전체가 우주로부터 형성된다는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실로,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무한의 우주로 퍼져나가고, 우리 자신은 그 위에서 바깥쪽으로 확장함에 따라 우리는 지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형성된 것들 역시 우주로부터 형성 -조립-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우리는 지상에서의 인간 삶에 적합한 개념을 발전시키기 시작합니다. 
 

- 오늘날 정신적인 삶을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그것은 충분히 편견 없을 이목을 통해서만 보입니다. 우리 문화의 가장 중요한 측면에 관한 한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는 영혼이 상실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소멸은 19세기 후반에 점점 더 분명해졌습니다. 한마디로, 영혼은 우리 현대 문명에서 빠져나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에 내적인 삶을 일깨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문명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경험의 공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고독 속에서 이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 대체로 우리는 현대 생활의 중요한 흐름에 대해 깨어 있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 19세기에 시작된 객관적 관찰 따위가 주목했어야 할 여러 일들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런 일들은 우리의 정신적 삶에서 생겨나는 것에 강력한 주의를 요청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현상들은 점점 더 주목받지 못한 채 간과되고 있습니다.  

  

- 루돌프 슈타이너의 정신 연구에 기반한 인지학적 우주론에 따르면, 현재 우리 지구는 일곱 단계의 진화 과정 중 네 번째 단계에 와 있다. 이들 단계는 의식의 단계들이자 이러한 '지구-우주'의 전개에 있어 진화의 순간들이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이들 일곱 단계를 토성, 태양, 달, 지구, 목성, 금성, 그리고 벌컨이라고 명명했다. 이들의 관계에 관한 기술은 슈타이너의 여러 저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신비학 개요>와 <정신의 계급과 물질계(Anthroposophic Press, 1996)>의 2부 "실재와 환상 진화의 내적 양상"에 잘 나와 있다. 

 

-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에테르체는 응축된 지혜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아와 아스트랄체의 지혜를 에테르체로 들여오고 싶다면, 에테르체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곧 부본(副本)이 필요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거울상을 조금이라도 보기 위해서는 거울에 비친 부본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물질육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서 있을 물질적인 바닥이 없으면 설 수 없는 것과 같이 에테르체가 물질육체와 접하여 사방에서 '부딪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의 에테르체 안에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에테르체가 물질육체 속에서 짝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에테르체 속에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에테르체의 내적 삶은 공중에 둥둥 떠다닐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에테르체 안에서 살고, 정상적인 지상의 삶을 위해 그 지지대로 물질육체를 필요로 하는 영혼의 삶을 살아갑니다.

- 이런 영혼의 상태로는 광물계에만 다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이 없는 것으로만 뚫고 들어갈 수 있지요. 식물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에테르체를 물질육체 없이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물질육체 없이 우리의 에테르체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 일단 별들이 초원과 같이 익숙해지면, 우리가 우주 공간을 저 높이 우리의 존재가 서 있는 땅으로 만드는 만큼, 우리는 에테르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항상 에테르계를 경험하지요. 그러나 비전 입문 없이는 인지적으로 그 속에 스며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실 모든 인간이 에테르계를 경험합니다. 만약 우리가 아스트랄체의 반대편 짝을 찾고 있다면, 그 짝인 에테르체는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현존하는 것에 주목하게 하는 일이 바로 정신과학의 문제입니다. 

-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밑에 있는 바닥을 볼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위에 서 있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사실 여러분은 그 위에 서 있을 것입니다.(바닥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과학적 방법으로 바닥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서 여러분에게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칩시다. 여러분은 변함없이 그 바닥 위에 서 있을 것입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 오늘 저는 정신과학의 도움을 받아 이 세 상태의 특성을 설명해보려고 합니다. 깨어 있는 낮의 의식에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 육체 기관들, 또 육체와 연결된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때에야 일상의 깨어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날 때 자아와 아스트랄체가 물질육체와 에테르체 속에 잠긴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알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빠르지만 확실하게 지각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우리의 사지를 지배하는 힘, 기관을 지배하는 힘, 그리고 내적 사고를 펼쳐나가는 힘을 어떻게 회복하는지 체험할 수 있지요. 이 모두는 깨어 있는 상태가 물질육체와 연결돼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과학의 관점에서 에테르체 속으로 잠수해 들어갑니다. 피의 순환 속으로, 그리고 근육의 긴장과 이완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 힘은 에테르체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럼으로써 그 힘은 강해집니다. 꿈을 꾸게 하는 힘은 그 자체만으론 약하고 무력합니다. 이 힘만 있을 때는 꿈속의 상은 급속히 지나가 버립니다. 그 힘은 물질육체와 에테르체 속에 관여하여 그 두체의 기관들을 사용할 때 강해집니다. 

- 꿈을 만들어내는 힘이 강해지면 무엇을 할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기억 회상을 만들어냅니다. 기억은 물질육체와 에테르체 속에서 육화 된 꿈의 힘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질육체 속으로 잠수해 들어간 꿈의 힘은 물질계의 배열 속에 편입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 힘은 꿈과 같은 혼란스러운 자료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물질계 안에서 회상을 만들어내며, 기억 자료를 형성합니다. 
우리가 잠으로부터 꿈과 꿈의 힘을 육체로 가져오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습니다. 물질육체 안에서 꿈의 힘은 기억의 힘, 회상의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 가만히 앉아, 감각의 외부 세계로부터 벗어나 여러분의 기억이 작동하도록 해보십시오.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그것들을 고요하게 하고 영혼으로 채워보세요. 환상을 자극하는 이 기억들이 제멋대로 움직이게끔 두십시오. 이 경험에서 여러분 내부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물질육체와 에테르체를 통해 강화된 꿈의 힘입니다. 이때의 꿈의 힘은, 물질육체와 에테르체 바깥에서 아스트랄체에 의해 ... 
 
- 이와 같이 우리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자신의 현 존재로 사물 속에 뛰어들 수 있는지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비록 그 경험은 무의식으로 남아 있다 하더라도 말이죠. 어찌 됐든 자아 자체는 분명 깊은 잠에서 빠져나와 물질육체와 에테르체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정신과학적인 입문만이 이러한 과정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우리의 기억에 관한 한, 꿈의 힘이 물질적인 존재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방식은, 우리가 일상적인 관찰을 이해하려 할 때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이와 같은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제가 <어떻게 더 높은 세계를 인식하는가>에서 기술했던 방식으로 상상을 발달시켜 가면서, 그 상상과 함께 관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상상과 함께 관찰하는 법을 익히고 나면 자아(자는 동안 우주의 사물과 과정에 머무르던)가 물질육체와 에테르체 속으로 어떻게 잠겨드는지 관찰하는 법을 익힐 수 있습니다. 또한 잠의 어둠에서 빠져나올 때 자아가 겪는 변형을 관찰하는 법도 익힐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인간이 오늘날과 같은 발달을 이루기까지 자이는 잠의 어둠 속에, 영혼의 어둠 속에 잠겨 처음에는 무력한 듯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자아가 물질육체와 에테르체 속으로 뛰어들면서 자아는 거기서 스스로 강해집니다. 자아는 물질육체와 에테르체가 열어놓은 경로들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자아는 피의 힘을 제어하고 피의 내적 능력을 통해 작용합니다. 

- 이는 깨어 있는 낮의 의식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아는 물질육체와 에테르체 속에 잠긴 채 드러납니다. 자아는 인간 내면에서 자유로운 요소로서 짜 넣고 움직이는 무엇입니다. 자아는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고,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아가 드러날 때의 특징적인 모습은 무엇일까요? 

- 자아가 나타나는 때에 인간성 속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만약 매일 밤 자아가 우리를 떠나 바깥 우주의 사물과 과정 속으로 빠져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존재나 다른 과정으로 통하는, 이를테면 다른 한편이 되어보는 능력을 결코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자아는 실제로 거기에 잠깁니다. 깨어 있는 의식 속에서 자아가 우리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면 자아는 외부에서 얻은 사랑하는 능력을 우리 안에 전달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여러분의 내면생활 깊은 곳에서 영혼의 세 가지 능력으로 솟아나게 됩니다. 이 세 가지 힘은 바로 자유, 기억의 삶, 그리고 사랑의 힘입니다. 

 

- 이것의 결과는 전 생애에 미칩니다. 일단 우리가 기억과 사랑 -아스트랄체에 의해 우리 내부를 관할하는 기억의 능력, 자아에 의해 주어지는 사랑의 능력- 사이에 내적인, 살아 있는 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되면 확실히 무언가 멋진 일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살아가면서 직접적으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그 사람의 기억을 간직합니다. 그 사람의 상을 우리의 영혼 속으로 가져오는 것이지요. 

 

- ... 단계들 중 하나는 바로 죽은 자들에 대해 우리가 간직할 수 있는 기억에 달려 있습니다. 기억을 생생하게 유지하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물질계와 정신계 사이의 문지방 너머로 이어지는 통로에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살아 있는 사람을 응시하는 것과 똑같이 죽은 사람이 남긴 모든 것인 상을 응시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아스트랄체와 자아의 해방을 체험할 것입니다. 

-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거나 혹은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이 아직 곁에 있는 것처럼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 있는 의식 속에서 죽은 사람의 상(이미지)을 그에 대한 사랑과 연결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한때, 생전의 그 사람에게서 받은 감각 인상의 도움으로만 느꼈던 것이죠. 우리는 이 모두를 우리 내면에서 생생하고 활기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필요한 내적 힘을 발달시키고 나면, 그때 충격이 찾아옵니다. 정신계로 통하는 문지방을 넘은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완전한 현실로 존재합니다.

 

- 이는 인간이 정신계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 중의 하나입니다. 정신계는 사물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경외감만을 느낄 수 있는 것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것들을 이해하는 때라도 우리는 경외감과 어느 정도 진지한 내면의 엄숙함을 가져야만 그것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신계로 통한 문지방을 넘어서는 하나의 예입니다.
  

 

 

 

 

 
인지학이란 무엇인가
루돌프 슈타이너는 1923년 7월 스위스 도르나흐에서 열린 인지학협회의 국제모임에서 회원들에게 인지학이란 실제로 무엇인지, 인지학의 임무는 무엇인지에 대해 3일에 걸쳐 강연하면서, 인지학의 길을 세 가지 관점(물질적, 영적, 정신적 관점)에서 이야기했다. 크리스토퍼 뱀퍼드는 이 강연 내용에 슈타이너가 정신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걸어간 길을 덧붙여 What is Anthroposophy?를 출간하였고, 이 책이 바로 이번에 번역 출간되는 〈인지학이란 무엇인가〉의 원서이다. 초자연적인 체험을 통해 초월적인 세계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슈타이너는 인간의 본질을 정신세계까지 확장시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인간 속에 숨 쉬고 있는 우주의 이치를 이해하고, 인간의 본질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슈타이너의 끊임없는 노력은 인지학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우주 속의 정신세계로 이끄는 인식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한다. 슈타이너는 강연이나 저서에서 “나는 스스로 체험하고 인식한 것만을 말한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즉 “진실된 내용은 체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지학은 어떠한 견해나 믿음에도 의지하지 않고, 본질적으로는 육신의 체험 못지않게 확실한 정신의 체험에만 기반한다는 그의 이야기가 사뭇 와닿는다. 인간 실존의 길을 밝히다 발도르프 교육은 100년 넘는 시간 동안 1000여 나라에서 꾸준히 성장한 교육 운동이며, 한국에서도 20여 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15개의 발도르프 학교와 200여 개의 발도르프를 지향하는 유아기관이 운영되고 있을 정도로 미래 교육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발도르프 교육 운동은 그 바탕 철학인 인지학(Anthroposophy)의 이해로부터 목표와 방법을 찾고 있는데, 인지학은 근현대 유물론적 합리주의와는 사뭇 다른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어 많은 이들이 정확한 이해에 어려움을 겪는 실정이다. ‘인지학’이라는 개념의 핵심 의미가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다름 아니므로 인지학의 이해는 전적으로 그 인간관 이해에 달려 있다. 이 책은 인간의 구조 자체가 3원적임을 제시하면서 각각의 차원에서 정의되고 발현되는 인간 본성을 설명한다. 슈타이너가 직접 말년의 정돈되고 완숙한 인간관을 제시한 강연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무엇보다 사후와 새로운 출생 사이, 영계의 실재를 전제로 윤회하는 인간 삶이 여러 생을 거치며 어떻게 고유한 개성과 삶의 과제를 형성하는지를 인지학적으로 밝히고 있다. 여러 종교의 전유물이었던 사후 세계와 현생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이를 통해 인간 실존 과제를 밝히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동양에서 지천명(知天命)으로 일렀던 그 성숙한 의식에 이르는 길을 밝히고 개인 각자의 삶의 과제를 발견하는 능력의 개발을 돕는 것, 그것이 발도르프 교육의 핵심이며 이를 통해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인간’ 형성을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문화 운동의 보편 가치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발도르프 교육의 보편 가치와 이념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저자
루돌프 슈타이너, 크리스토퍼 뱀퍼드
출판
수신제
출판일
2021.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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