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재영 / 재영 책수선
출판 : 위즈덤하우스
출간 : 2021.11.24
출간되자마자 구매해 두고선 어딘지 모르게 마음의 짐처럼 노랗게 빛나고 있던 책을 이제야 읽었다.
'책 수선가'라는 직업이 한국에서는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우리나라에도 고문서들이 존재하니 복원 전문가나 보존가들은 많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것을 '업'으로 삼아 사업자를 낸 사람은 저자가 최초였던 모양이다.
미대를 졸업하고 북아트를 전공하다가 (도중에 그래픽 작업도 하고) 현재는 책수선을 하고 있다는 저자는 지금에 와서 보면 모든 조각이 하나하나 맞춰진 것 같은 시간의 단계들을 밟아왔다. 마치 그가 설명하는 책 수선의 각 단계들이 적절한 때와 시기가 있었던 것처럼, 하나하나 꼭 필요한 품이 들었어야 했던 것처럼.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내가 보내고 있는 이 시간들이 후에 어떤 의미로 재채색되어 엮일 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그리고 그렇게 덧씌워질 색들은 모두 자신 안에 품고 있는 것에서부터 나올 것이라고. 그러니 나는 매 순간을 가장 의미 깊게 보내고 싶다는 의도를 가지고, 그저 충만하게 누려나가면 되는 것 같다고. 만약 그 순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때는 적극적으로 그 시간을 바꿔나가면 된다고.
그 방향을 매번 자신이 가장 만족하는 쪽으로 선택하면, 그렇게 모인 선택들이 '나'를 그려내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가장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한 것들이 닮아간다면, 나와 가장 닮은 것은 당연히 나 자신일 테니까.
나에게도 '재영 책수선'에 맡기고 싶은 책이 있다. 오래된 벗도, 만난지 얼마 안 되어 내 부주의로 다친 책도 있는데,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을 읽으며 저자의 인품과 실력에 신뢰가 생겼음에도 편안하게 메일을 쓰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햇살이 아름다운 어느 날, 저자의 작업실에서 조곤조곤 미팅하는 내 모습을 그려본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달라진 모습으로 내 품으로 다시 돌아올 책들도.
내 직업은 책 수선가다.
책 수선가는 망가진 책을 수선한다.
나는 망가진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파손된 책의 형태와 의미를 수집한다.
- 책 수선가는 기술자다. 그러면서 동시에 관찰자이자 수집가다. 나는 책이 가진 시간의 흔적을, 추억의 농도를, 파손의 형태를 꼼꼼히 관찰하고 그 모습들을 모은다. 책을 수선한다는 건 그 책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런 모습들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 반 우스갯소리로 종이책은 부동산과 직결된 문제라고들 한다. 그만큼 책은 무게와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책은 이사를 할 때마다 견적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일본에는 책이 너무 많아서 무너진 집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커다란 책이나 전집이 지금 다시 나온다면 아마도 집에서 차지할 공간 걱정에 백 번은 더 고민하고 구입하거나, 애초에 포기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 "어렸을 적 친구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아요."
- 저 말을 듣는 순간 나 혼자서는 속으로 얼마나 벅찼는지 모른다. 개인 작업실을 열기 전까지는 학교 도서관에 소속된 직원으로서 장서들만 기계처럼 수선해 왔던 터라, 책 수선가가 책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감정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고 할까, 무감각했다고 할까. 도서관의 책들은 수선을 마치면 다시 선반이나 창고로 돌아가면 그만이라, 그동안 수선된 책이 사람들에게 어떤 감상을 줄 수 있는지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 직업이 책 수선가라고 하면 대부분은 책을 굉장히 아껴서 보고 흠집 하나 나지 않게 철저히 관리할 거라 예상한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전혀.
- 나는 어쩌면 책을 아끼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최악 중에서도 최악을 모아놓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책에다 연필이든 볼펜이든 가리지 않고 마구 밑줄을 긋거나 메모와 낙서를 하는 건 기본이고, 읽던 곳을 표시할 때는 페이지 모서리를 접는 걸 넘어서서 아예 페이지의 반을 접어버린다. 책이 잘 펼쳐지지 않으면 책등을 꾹꾹 누르기도 한다. 뭘 먹던 손으로 책장을 넘기거나 잡는 것도 꺼리지 않고, 바닥에 떨어뜨려 모서리가 찍히거나 흠집이 나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무거워서 들고 다니기가 힘들면 책을 반으로 쪼개기도 하고, 누가 책을 빌려갔다가 실수로 좀 망가트렸다고 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다. 아끼는 책이라 하더라도 급하면 냄비 받침으로 쓰기도 한다. (지금 한 문장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분명 속으로 비명을 지른 분들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미안해요.)
- 이런 태도는 흔히 책을 막 다룬다고 여겨지기 쉽고 책을 아낀다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놓이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약간의 억울함이 섞인 심정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것 역시 내가 책을 아끼는 방법이라고, 또 그 책을 앞으로 오랫동안 사랑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 또 이런 독서 습관은 책과 친해지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나는 보통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물건을 보면 지문이라도 묻을까, 망가트리면 어쩌나 괜한 걱정에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아서 괜히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관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완벽하게 말끔히 포장된 책과 종이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에 부담이 생긴다. 지금 저 책을 읽어야 하는데, 읽고 싶은데 어쩐지 펼쳐보기 부담스러울 만큼 깨끗한 새 책과 나 사이의 시작은 언제나 조금 데면데면하다. 좋은 물건을 사놓고는 상할까 봐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을 때의 느낌이랑 비슷하다. 그래서 한때는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중고책으로 구매하는걸 더 좋아하기도 했다.
- 예전에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심심해하는 친구의 아이에게 읽어주려고 좋아하는 책을 골라오라고 했더니, 세상에, 태블릿 PC를 들고 오는 게 아닌가. 자기가 좋아하는 책은 다 '여기'에 들어 있다면서 말이다. 다섯 살 어린이가 아주 능숙한 손놀림으로 화면을 터치해 가며 책을 한 권씩 로딩하는 모습은 적잖이 신선한 충격이었는데, 그날의 기억이 <유리 구두>를 수선하며 자주 떠올랐다.
- "이 책도 복원이 가능할까요?"
"이 책을 복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 두 문장은 그동안 의뢰를 받을 때 가장 먼저, 또 자주 들어온 말들이다. 그리고 선뜻 대답하기가 조금 어려운 질문과 요청들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복원'과 '수선'은 상당히 다른 범위의 작업들이기 때문이다. 아마 대부분의 의뢰인들은 '책 수선'보다는 '문화재 복원', '음원 복원' 등이 더 익숙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미팅을 해보면 의뢰인이 원하는 방향은 복원보다는 수선일 경우가 더 많다.
- 복원은 말 그대로 원본의 상태로 똑같이 되돌린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의 복원이 주는 매력이 분명 있지만, 또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만큼 원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선택할 수 있는 재료나 방법의 폭이 좁아져 변화에 융통성이 없어지고, 시간적, 경제적 한계, 그리고 자료가 남아 있는 정도에 따라 작업자가 할 수 있는 영역에도 제한이 많은 방법이다.
- 대신 수선은 작업 후 결과물이 원래의 모습과는 일부 달라질 수 있지만, 그만큼 열린 가능성들을 자유롭게 끌어안는 방법이다. 사라진 표지를 이왕이면 본인이 좋아하는 색으로 새롭게 만들어 넣을 수도 있고, 원본에는 없었던 색색의 귀여운 헤드밴드를 넣어 책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고, 나만의 표식을 넣어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책으로 만들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수선은 복원을 포함할 수 있지만 복원은 수선을 포함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일을 할 때 '복원'이라는 말을 조심스러워하는 편이다. 그리고 더 많은 가능성을 위해 '수선'이라는 표현을 더 지향한다.
- 제가 이 일을 처음 배운 미국에서는 이런 직업을 Book Conserva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 일을 하는 전문가는 Book Conservator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을 한국말로 번역하면 '책 보존/보존가'가 됩니다.
Conservator (noun) one that is responsible for the care, restoration, and repair of archival or museum articles.
-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당혹스러운 일인지. 결론부터 얘기하면 나는 풀질과 칼질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허당이 맞았다.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해왔던 풀질은 더 이상 종이를 튼튼하게 붙이기 위한 일이 아니었고, 칼질은 위험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동안 내가 흔히 접한 A4용지, 색종이, 노트, 책과 같은 지류는 대부분 새것이거나 최소한 거의 새것과 가까운 상태였지만, 일을 하면서 마주한 책과 종이들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 한때 '나는 망가진 책을 고치는 사람이야! 책 수선 이외의 것들은 내 본업이 아니야!’라고 믿었던, 아니, 믿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더라. 세무, 회계, 홍보, 상담 등등을 모두 외주로 맡길 만한 여유가 없는 1인 자영업자라면 결국 모두 다 내 본업이 맞고, 그렇게 생각하며 일을 해야 사업이 굴러간다.
- 사업자등록을 하기 위해 세무서를 찾아갔을 때는 난생처음 듣는 '책 수선'이란 직업 때문에 이걸 어느 업종 코드로 분류해서 등록해야 할지, 과연 예술이냐, 서비스냐, 출판이냐 등등을 놓고서 세무서 직원들끼리 작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웃지 못할 상황을 지켜보며 앞으로 내가 이 일을 하면서 감당하고 이해시켜야 할 벽이 어느 정도의 두께인지 막연하면서도 총체적으로 와닿는 기분이었다. (결국 서비스 업종으로 분류되었다.)
- 책이 가진 시간의 기억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위한 최선의 실마리들을 찾는 재미, 그리고 그 선택들로 인해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결국엔 분명 아름다운 책이 될 거라는 확신이 주는 쾌감, 그리고 그걸 온전히 믿어주는 의뢰인의 신뢰까지. 이 세 가지가 잘 맞아떨어지면 책 수선가는 짜릿함을 경험하게 된다. 이 책이 나에게 남긴 것처럼 말이다.
- 당신의 찢어진 센티미터는 어디인가요?
- 책 수선 의뢰 메일을 받을 때 많은 분들이 말머리처럼 꼭 미리 덧붙이는 말이 있다. '이건 그렇게 오래된 책이 아니지만...' '그렇게 심하게 파손된 건 아니지만...' 뒤에 이어지는 설명들을 보면 대부분 그 속뜻은 '그렇게 귀하거나 오래되었거나 많이 파손된 책이 아닌데도 수선을 해주나요?'라는 뜻이다. 아무래도 홍보를 할 때는 파손이 심해 수선 전후 모습이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책들 위주로 공개하다 보니 이렇게 조심스레 물어보시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대답은 언제나, "네. 물론입니다."
- 찢어진 부위의 주변을 1차적으로 정리하고, 찢긴 부분의 결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접착제와 잉크를 이용해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재접착을 해준다. 어긋나는 곳 없이 깔끔하게 잘 정리된 결과물을 확인하고 나면 또 한 번 안도의 한숨과 함께 수선이 마무리된다.
- 만약 가지고 있는 책의 표지가 실수로 1센티미터 정도 찢어진다면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할까? 만약 본인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는 책이라면 아마도 대부분은 개의치 않고 그대로 둘 거라 짐작된다. 아니면 손쉽게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버리거나. (중요! 만약 아끼는 책이라면 절대 테이프를 사용하지 말 것. 투명/박스/마스킹테이프는 종이책의 적이다. 중요하니까 다시 강조한다. 테이프는 종이의 적이다!) 아주 소중한 책이라면 아예 새 책으로 다시 구입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 나는 사실 첫 번째에 해당하는 편이다. 심지어 그게 아끼는 책이라 할지라도. 어쩐지 책 수선가가 본인 책은 잘 고치지 않는다고 말하려니 조금 민망하기도 하지만, 나는 파손된 형태를 좋아하고 수집하기 때문이다.
- 별것 아닌 것 같은 두 가지 일이 나의 찢어진 1센티미터라고 생각하고, 그걸 다시 잘 붙여놓으면 내 삶에도 다른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 믿는다. 남들이 보기엔 아무리 작고 사소해 보여도 본인에게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라면 마음에서 놓지 말고 더욱 윤이 나게 간직할 수 있는 오늘을 보낼 수 있기를.
- "이제 아흔이 가까워 오니 육신의 연약함도 느끼지만 그 아픔의 과정을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여정이라고 믿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지내는 중이야. 네가 보기엔 어떠니, 할머니 잘 살고 있는 것 같니? 허허."
책 <그때, 우리 할머니> (정숙진·윤여준 지음, 북노마드)에 적혀있는 글귀다. 이 책에는 당시 25세의 손녀, 윤여준 작가가 본인의 할머니인 정숙진 선생님의 시간을 그리고 기록한 여정이 담겨 있다.
- 찢어진 종이를 붙이고, 무너진 책등을 바르게 세우고, 사라진 조각을 채우면서 책이 잃어버렸던 기억을 회복시켜 주고, 새로운 커버나 지지대, 혹은 케이스를 만들어주며 책에게 새로운 시간을 약속하다 보면 사람의 인생처럼 책에도 한 권 한 권 각자만의 책생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사연들과 파손된 책과 주인의 추억, 그 책이 지나온 시간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 보통 책에 커다란 파손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 종이가 너무 나이를 많이 먹었다든가, 아니면 희귀 서적이라 원본에 큰 변화를 줄 수 없을 때는 책 자체에 적극적인 수선을 하기보다는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며 (설령 그게 망가진 모습일지라도), 앞으로의 안전한 보관에 더 중점을 두게 되는데, 그럴 때 봉투나 케이스, 혹은 박스 등이 그 대안이 된다. 이런 과정은 기술적으로는 '수선'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보존'의 영역에서 본다면 여전히 책의 시간을 안전하게 연장시키는 일로써, 책 수선가의 역할 중 하나다.
- 그 사실을 아는 순간 기분이 묘하게 요동쳤다. 물론 좋은 쪽으로. 세월이 아주 오래되었거나 깊은 사연이 있는 책이 아니더라도, 어쩌면 비교적 평범한 책도, 심지어 진열대에 놓여 있었으면 아무도 사가지 않았을 망가진 책이더라도 수선을 받으면 누군가에겐 새 책보다도 더 특별한 선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무척 낯설면서도 기분 좋게 다가왔다.
- 도서관에 소속된 책 보존 연구실을 떠나 한국에서 재영 책수선을 열고 개인 의뢰를 받기 시작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늘 내 마음속에는 작지만 큰 욕심이 하나 있다. 바로 책 수선도 옷수선, 구두 수선처럼 우리의 일상과 주변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이다. 아직도 책 수선은 워낙 알려지지 않은 분야라서 욕심을 채우기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비챠의 학교생활>이나 <관계자 외 출입금지>처럼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한 의도로 책 수선 의뢰가 들어오면 더 마음이 뛴다. 마치 책 수선가로서의 나의 욕심이 지치거나 꺼지지 않게 종종 찾아와 반짝여주고 가는, 나에게도 선물처럼 와주는 고마운 희망들 같아서.
- 의뢰인은 '책이 되지 못하고 아코디언처럼 펼쳐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고 하셨는데, 사실 나는 그 흐트러진 모습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서 제본을 풀어버리기가 내심 아쉬웠다. 그래서 평소보다 수선 전 사진을 더 열심히 찍어둔 책이기도 하다.
- 작업은 우선 의뢰인이 이전에 해놓은 실제본을 푸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손쉽게 가위로 실 중간중간을 끊어서 빼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실구멍으로 사용된 종이 부분이 최대한 상하지 않게 살살 풀어주었다. 의뢰인이 일부러 그러데이션을 고려해 색색의 실을 고른 마음이 아깝기도 했고, 그렇게 풀어낸 실들을 다른 책에 또다시 사용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다 보니 실을 풀어내는 일에만 두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잘 풀어서 정리된 실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 의뢰인이 알려주신 할아버지의 모습은 조용하고 은은한 호수 같은 분이었다. 말 그대로 천자문(千字文)을 한 글자씩 써오신 기록만 보아도 차분하고 꾸준하고 한결같은 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호숫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집을 짓는다면 차분한 할아버지의 모습과는 오히려 거리가 멀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뢰인도 화려하거나 장식적인 모습보다는 깔끔하고 정갈한 책을 원했기에 호숫가의 풍경을 은은하고도 단순하게 담아내는 게 중요했다.
- 사용된 종이가 마침 푸른빛이 돌았기 때문에 처음엔 물의 느낌을 담아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두 가지 까다로운 부분이 있었는데, 첫 번째로 이 종이의 푸른빛은 낱장일 때보다 여러 장으로 겹쳐질수록 더 강렬해져서 인상이 그리 온화하거나 차분하지 않았다. 형광빛이 도는 종이의 푸른빛은 오히려 냉정하고 공격적인 느낌이 들었다.
- 두 번째는 이 종이가 한지였다는 점이다. 흔히 출력용으로 시판되는 A4 크기의 제품으로, 표면은 한지 특유의 거칠고 굵은 질감이 도드라졌다. 한마디로 개성이 강한 종이였다. 그 자체로는 매력이 있지만, 다른 종이와 쉽사리 어울리기 힘들다는 단점이 되기도 한다. 이제 이 천자문의 집을 짓는 데 중요한 건 '이 개성 강한 종이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은은하게 물을 닮은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을까'가 되었다.
- 우선 형광 푸른빛 종이의 차갑고 공격적인 느낌을 완화시켜 줄 새로운 색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난색을 사용하면 자칫 형광 푸른빛의 느낌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 위험이 있어서, 난색이되 본문의 종이와 비슷한 명도의 미색 종이를 넣어 균형을 잡아주었다. 이처럼 똑같은 색이라도 앞뒤로 어떤 색들과 함께 구성을 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 책의 세계에는 풍문으로 유명한 망령이 하나 있다. 책을 망가트리길 좋아하는 이 망령은 일단 길쭉한 모양의 다섯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가닥들은 좀 더 큰 하나의 구멍으로 이어진다. 색깔은 거의 100퍼센트의 경우로 새하얗지만 망령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땐 약간 누렇거나 거뭇거뭇하게 변하기도 한다. 책 중에서도 특히 아주 오래된 책이나 값비싼 책들을 괴롭히기를 좋아하지만 다행히 스스로 책에 접근할 능력은 없어서 주변에서 조용히 기다리다가 책을 보려고 다가오는 인간의 손을 이용한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 망령의 뽀얀 겉모습과 손에 닿았을 때 느껴지는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 때문에 이게 책을 괴롭히는 나쁜 존재인지도 모르고 별 의심 없이 속아버린다.
- 기억을 잘 더듬어보면 대부분 한 번쯤은 이 망령을 마주친 적이 있을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말쑥한 정장 차림의 직원이 손에 이 망령을 끼고선 희귀 서적을 만지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지? 전시장에 갔다가 책을 넘겨보려면 꼭 껴야 한다며 이것을 건네받은 적이 있는지? 도서관에서 어떤 책들 옆에 이런 망령들이 놓여 있는 걸 본 적이 있는지? 맞다. 이 망령은 흰색 면장갑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
- 귀하거나 비싼 책을 볼 때 흰 장갑을 껴야 한다는 이 잘못된 편견은 대체 어디서, 언제, 누가 시작한 걸까? 영화나 드라마 같은 미디어 속에서 과장해서 연출한 장면이 현실에까지 잘못 퍼진 걸 수도 있고, 도자기나 그림 같은 미술품을 다룰 때 장갑을 끼는 모습을 보고 당연히 책에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손은 더러우니까 장갑을 껴야지'라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희귀한 책을 볼 때 하얀 면장갑을 끼는 건 (아니, 그 어떤 장갑이라도) 오히려 책을 더 망가트릴 수 있다. 희귀하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책을 만질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사실 맨손으로 만지는 것이다. 대신 손을 비누로 깨끗하게 씻고 핸드크림도 바르지 않은 채로!
-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 그렇게 닮아가게 되는 걸까. 아니면 앞으로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찾는다면 그렇게 어딘가 닮은 서로에게 끌려 만나게 되는 걸까. 이유가 무엇이든 참 신기하면서도 멋진 인연이다.
- 가끔 누군가의 손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책을 볼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서점에 입고될 때까지만 해도 인쇄소에서 한치의 다름없는 디자인으로 한꺼번에 대량으로 제작된 똑같은 책들이지만, 누군가가 사간 이후부터는 어떤 주인을 만나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식의 독서 습관으로 어떻게 보관되는지에 따라 실은 점점 각각의 특별한 책이 되어간다.
- 그중엔 다 읽고 난 후 별 미련 없이 버려지는 책들도 있겠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책 수선까지 받아가며 평생 주인 곁에서 귀하게 여겨지는 책들도 있다. 어쩌면 그런 책은 반려책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오랜 정이 담긴 책이라면 반려동물과 주인이 닮아 있는 것처럼 책과 주인도 책 수선을 통해 서로 닮아질 수 있지 않을까?
- 사실 이 책은 초판이라는 가치가 있기에 원본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는 게 다소 망설여지기도 했다. 판매나 수집 시장에서 책의 가치를 따질 때 가장 중요하게 판단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원본의 모습을 얼마나 잘 유지하고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이 책은 그런 용도의 수집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꿔보자는 제안을 수월하게 받아들이셨다.
- 평생을 함께하고 아낄 책이라면, 비록 반려동물처럼 살아 있는 생명체는 아니어도 사람과 책 역시 그에 못지않게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가 될 수 있다. 만약 그 관계 안에서 서로가 닮아가게 된다면, 책 수선을 통해 그렇게 된다면, 꽤 멋진 일이지 않을까?
- 흔히 '실수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적어도 책 수선가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부담스럽게도 책 수선에서는 많은 경우 실수를 하면 돌이킬 수가 없다. 어찌어찌 수습은 가능할지 몰라도 없던 일처럼 깔끔히 만회할 수 있을 확률은 아주 낮다. 운이 좋아도 보통은 원래보다 몇 곱절의 시간과 기술과 돈이 더 들어가기 때문에 책 수선에서의 실수는 절대 겪고 싶지 않은 작은 지옥이다.
- 그래서 망가진 책 앞에서는 어느 때보다도 집중을 하게 되는데 그 집중력으로 뜯어진 표지의 올을 하나하나 풀어 다시 잇고, 0.5밀리미터의 오차도 나지 않도록 정확히 치수를 잰다. 상태가 심각하게 좋지 않은 책에 붙어 있는 테이프들을 제거할 때면 휴대폰은 잠시 비행기 모드로 바꿔놓을 만큼 한껏 예민해지기도 한다.
- 하지만 일정이 바쁠 땐 그러기도 쉽지 않아서 가끔은 매일의 긴장감이 쌓이고 쌓이다가 막연한 불안으로 바뀔 때가 있다. 불안은 언제나 너무나 쉽고 빠르게 다른 장점들을 덮어버리기 때문에 일을 하다가 의뢰인의 책이 아닌, 얼마든지 다시 살 수 있는 재료용 종이를 잘못 잘랐을 뿐인데도 그런 실수가 유난히 잦은 날이면 그때부턴 알 수 없는 막막함과 초조함이 목구멍을 한가득 꽉 메우고 만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손끝이 떨리면서 종이를 자르는 칼날이 흔들리기도 한다.
- 그럴 때면 나는 잠시 하던 일에서 멀어진다. 컨디션에 따라 할 일을 정한다고 하면 좀 프로페셔널하지 않아 보이려나. 하지만 그러다 실수해서 돌이킬 수 없게 책을 망치는 것보다는 융통성 있게 난이도를 바꿔가며 작업하는 게 백번 낫다.
- 스트레스가 심하게 쌓였거나 컨디션이 무너진 날, 혹은 이런저런 이유들로 불안해서 집중이 잘 되지 않는 날에는 예민하게 다뤄야 하는 어려운 과정은 잠시 미뤄두고 간단하거나 어렵지 않은 밑작업 위주로 일한다. 딱히 집중하지 않아도 절대로 실수하지 않을 정도로 쉽고 익숙한 작업들 말이다. 예를 들어 구겨진 종이를 반듯하게 펴는 일이라든가, 떨어진 낱장을 다시 붙이는 일, 아니면 작업할 책을 분해하는 일 같은 것. 이런 일들은 도서관에서 일을 할 때부터 지금까지 2,000권에 가까운 책들을 수선해 오면서 가장 많이 한 기본적인 일들이라 자다 말고 일어나서 하라고 해도 실수하지 않을 그런 작업들이다.
- 그래서인지 신기하게도 불안할 때 이런 단순한 일들을 반복하다 보면 마음이 어느새 한결 정돈된다.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작은 성공과 만족감으로 불안을 조금씩 밀어내는 방법이다. 불안할 때마다 써먹는 이 방법이 열 번에 아홉 번은 통한다.
- 구겨진 종이를 펴고 떨어진 낱장을 붙이고, 책을 분리하고 해체하는 일은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책 수선이라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긴장감 높은 일을 하면서 유난히 불안이 커질 때마다 만들어보는 나의 초콜릿 크림 파이들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도 만약 일을 하다 알 수 없는 불안에 문득문득 괴로운 사람이 있다면 다들 각자의 초콜릿 크림 파이를 가질 수 있기를, 가장 쉽고 선명한 위안에 기댈 수 있기를 바란다.
- '재영 책수선'은 상호에 '책수선'이라고 적혀 있어서 그런지, '책'만 수선하는 곳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책뿐만이 아니라 다른 물건들에 대한 수선도 종종 맡는다. 책은 기본적으로 종이의 묶음이기 때문에 책 수선가라면 당연히 책과 함께 종이를 다룬다. 본문 종이가 아닌 양장본의 두꺼운 표지라 하더라도 그건 펄프가 뭉쳐져 있는 아주 두꺼운 종이인 셈이라 책 수선은 결국 기본적으로 종이를 어떻게 관리하고 수선하는지에 대한 분야다.
- 그렇다 보니 책 수선가는 무엇보다 종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종이에 대해 이해하려면 펄프의 두께와 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펄프의 두께와 결에 대해 이해를 하려면 다양한 원재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결국 책 수선가는 여러 가지 원재료들에 대한 이해가 많을수록 좋다. 예를 들어 닥나무로 만든 종이인지, 천으로 만든 종이인지, 대나무나 옥수수 수염 등으로 만든 종이인지,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종이(!)인지, 인공 합성물질로 만든 종이인지, 세세한 원재료와 물의 비율은 어느 정도인지, 그렇게 해서 나온 두께들은 얼마인지에 따라 최종적으로 만들어지는 종이의 느낌과 내구성이 많이 달라지기 때문에 각각의 종이에 맞는 처치와 수선용으로 필요한 추가재료들을 선택하려면 종이에 대한 넓고 깊은 이해가 꼭 필요하다.
- 나는 대학원에서 북아트와 제지를 전공하면서 이런 원재료들에 대한 이해, 종이에 대한 이해, 그리고 책에 대한 이해를 배우게 됐다. 운이 좋게도 책 보존 연구실에서 학업과 책 수선 일을 함께 병행하면서 그 이해들을 바로바로 더 깊은 경험으로 연결 지을 수 있었다. 연구실에서 일을 하며 가장 재미있었던 건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종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14세기에 그려진 지도 조각부터 프랑스 어느 가문의 화려한 인장이 찍힌 장서표, 왜 모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느 가족의 머리카락들을 담아놓은 종이봉투, 각종 오래된 광고지들과 장식용으로 쓰인 마블링 종이들, 오래된 사진, 금박으로 한껏 치장된 종이상자, 종이로 만들어진 인형, 그리고 천차만별의 상태인 수천 권의 책들까지, 대부분 아주 오래된 종이들이었고 덕분에 다양했던 종이의 쓰임새를 공부할 수 있었다.
- 지금도 (연구실에서 일할 때만큼의 빈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책이 아닌 종이들도 수선한다. 그런 의뢰를 맡기는 분들은 항상 책이 아니어도 의뢰가 가능한 지부터 먼저 조심스레 물어보신다. 그래서 가끔은 '작업실 상호를 재영 책수선이 아니라 '재영 종이수선'으로 해야 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참에 내 작업실은 책뿐만이 아니라 종이라면 모두 환영하는 곳이라는 걸 여기에다가 다시 한번 적어놔야지.
재영 책수선은 세상의 모든 망가진 종이들을 환영합니다!
- 책은 소모품일까, 아니면 비품일까? 비교적 쉽게 망가지고 닳는 종이나 실 등등으로 만들어졌고 자주 읽을수록 그만큼 망가지기도 쉬워서 내 손을 거쳐간 훼손된 책들을 보면 소모품 같다가도, 관심이 없었거나 오히려 너무 소중해서 읽지 않고 보관만 해 오랜 세월 동안 망가짐 없이 고스란히 잘 유지되고 있는 책을 보면 비품 같아 보이기도 한다.
- 이런 보관함을 만들 때의 묘미는 모든 치수와 재단이 딱 떨어져서 뚜껑을 스르륵 여닫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부드러운 압력이다. 잘 만들어진 함이라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보관함도 그런 면에서 잘 만들어졌다.
- 누구 한 명 빼놓을 것 없이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작가들이다. 그런데 이 이름들을 나열한 목록을 보면서 한편으론 웃음이 났다. 아이고, 어쩌면 이렇게 전부 남성 화가뿐일까. 이 책이 출간되었던 1982년도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성비가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시대였으니까. 그런데 '만약 이 책이 2021년도에 출간이 된다면?'이라고 상상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 이 책에 2021년도의 옷을 입혀줄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 찢어지고 더러워지고 망가졌던 부분들을 다시 튼튼하게 만들고 반듯한 표지를 새로 입히는 것에서만 그치는 책 수선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더하고 이야기해 보는 것, 책 수선가로서 욕심이 나는 바로 그 부분에 대해 한 번쯤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책 수선은 기본적으로 기술로 이뤄지는 분야라 결과물이 그 안에서만 평가될 때가 많다. 특히나 도서관 내 책 보존 연구실에서 장서들을 대상으로 일을 할 땐 기술력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한다. 얼마나 정교하고 좋은 보존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가 아주 중요한 능력이니까.
- 하지만 연구실에서 나와 재영 책수선 작업실을 열고 다양한 추억과 가치와 방향에 놓인 책들을 만나 오면서 한 가지 혼자서 다짐한 부분이 있다. 책을 고치는 일이지만 '수선'이라는 단어에만 갇히지 말자는 것. 수선이라는 '기술'에만 갇히거나 책을 다시 튼튼하게 고쳐내는 일에만 그치지 말고, 책 수선을 통해 책과 어울리는 다양한 마음과 의미를 담고 또 이야기해야겠다고, 이 일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다짐하게 된다. 의뢰인과 책의 소중한 추억을 담아내는 일도, 특별한 감상 없이 다시 튼튼하게 넘겨볼 수 있게만 고치면 되는 일도, 특별한 의미가 없던 책에 새로운 가치를 담아내는 일도 모두 책수선가의 일이다.
-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점차 관심이 멀어지게 되었는데 이따금씩 우연히 친구 집에서, 도서관에서 어릴 때 좋아했던 만화책을 보면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반가움에 손부터 먼저 뻗게 되고 주인공들의 이름이 줄줄이 기억나면서 아는 내용인데도 마지막까지 다 읽기 전에는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아마도 다들 많이 좋아했던 자기만의 그 시절 그 만화책이 각자 한 권쯤은 있을 텐데, 나에겐 한승원 작가의 <빅토리 비키>와 천계영 작가의 <언플러그드 보이>가 그렇다.
- 사실 그때는 어쩐지 좀 쑥스러워서 그런 감사한 말을 듣고도 드리지 못한 말이 있었는데, 늦게나마 여기에 글로 대신 남긴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설레고 반짝이는 밤하늘을 오랜만에 다시 떠올려볼 수 있어서, 또 그걸 만들어볼 수 있어서 덕분에 저도 함께 행복했습니다.
-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책이 최대한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걸 보는 경험, 그 설레는 마음을 위해 표지 속 그림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 책 속에 인쇄된 그림을 복원할 땐 원본에 사용된 안료와 질감, 그리고 밑바탕으로 쓰인 종이 재질에 맞춰 펜, 연필, 색연필, 아크릴 물감, 수채화, 그 외 각종 잉크들을 적절히 선택한다. 보통 책 복원 작업에서는 균일하고 동일한 색 표현과 변색을 최소화하고자 아크릴 물감을 많이 쓰곤 한다. 하지만 이 <해리 포터 시리즈>의 표지들은 두꺼운 종이 두께에 비해 내구성은 약한 재질이라서 아무리 물감을 얇게 칠한다 하더라도 완전히 마르고 나면 펄프 사이사이에서 딱딱하게 굳는 아크릴 물감보다는 좀 더 얇고 유연한 수채 안료가 더 적합하다.
- 어떤 재료를 쓸지 정하고 나면 그때부터 복원의 질은 온전히 수선가의 기량이다. 복원에 관해서는 2012년에 스페인의 어느 성당에 걸려 있던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그림 복원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예수가 그려진 그림의 일부가 오랜 세월 동안 습기에 지워지고 떨어져 나가 파손이 되었는데, 어느 아마추어 화가가 몰래 (!) 복원을 했다가 원본의 모습을 살리기는커녕 더욱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훼손해 전 세계적으로 비난을 샀던 일이다. 이 일화는 아마도 부족한 복원 실력이 불러온 처참한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예시일 것이다. (후일담으로, 처음엔 이 잘못된 복원이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복원한 화가를 향해 맹비난이 쏟아졌다. 그런데 오히려 그 절망적인 복원 실력 덕분에 불황에 시달렸던 그 지역이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어 지역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나는 복원의 질과는 별개로 이 일화를 무척 좋아한다.)
- 그림 복원 작업만큼 결과가 수선가의 미적 감각에 좌지우지되는 일이 있을까? 수선가, 혹은 복원가의 실력에 따라 그림은 복원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더 크게 훼손될 수도 있기 때문에 복원 작업은 그 시작부터가 매우 조심스럽다. 게다가 수채 물감은 아크릴 물감보다 마르기 전과 후의 색깔 변화가 크고, 물감을 칠할 종이의 질감이나 두께에 따라 잉크만 섞어 놨을 때 눈으로 보이는 색깔과 정작 종이 위에 칠했을 때 달라지는 색의 범위가 크기 때문에 원본 위에 칠하기 전에 시간을 들여 색상 테스트를 충분히 해보는 게 중요하다.
- 도서관에서 책 수선가로 일할 때는 한 권의 책 수선을 끝마칠 때마다 뒤표지 안쪽에다 작은 글씨로 작업을 끝낸 연도와 날짜, 그리고 그 책을 담당한 수선가의 이름을 적어둬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여러 수선가들이 함께 일하는 곳이라 각자에게 배정된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이 책임지고 수선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날짜와 이름을 남겨두면 나중에 혹시나 수선 후 책에 문제가 생겼을 때 쉽게 담당 수선가를 찾아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또 그 책이 언젠가 다시 망가져 수선이 필요할 때 마지막으로 고쳐진 게 언제였는지 확인하면 그에 맞춰 더 적절한 작업 방향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꽤 합리적인 규칙이었다.
- 날짜와 이름을 남기는 일은 사실상 책임 소재를 따지기 위한 이유가 가장 크기는 해서, 이렇게 말로만 들으면 형식적이고 딱딱한 일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이름을 남기면서 내가 느꼈던 기분은 오히려 두근거리는 설렘에 가까웠다.
-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작업실을 열고 개인 의뢰를 받기 시작한 후로는 그렇게 책에다 내 이름을 남기는 일은 사라졌다. 내게 의뢰로 오는 책들은 말 그대로 개인이 소장한 책이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그 책을 수선하고 작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주인이 있는 책에 타인의 표식을 남기는 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참 아리송하게도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가끔은 아쉬운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 든다.
- 무선제본(떡제본)을 실제본으로 바꾸는 일은 보통 책의 페이지 수에 비례해 작업 시간이 결정된다. 책등의 접착제를 모두 제거한 뒤 낱장으로 분리된 페이지들을 실제본에 적합한 순서로 짝을 맞춰 배열한 다음, 맞춰놓은 그 짝이 한 장의 종이가 되도록 서로 이어주고, 그렇게 이어진 페이지들을 다시 여러 개의 묶음으로 나누어 정리한다. 그런 뒤 그 묶음들을 실로 엮어주면 180도 짝짝 눌러 펼쳐보아도 망가지지 않는 튼튼한 실제본이 된다.
- 서너 문장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이 간단해 보이는 작업은 한 장 한 장 풀칠과 완전히 건조되기까지의 기다림, 다림질, 압을 줘서 눌러놓는 시간, 세심한 재단, 그리고 실로 엮기 등등의 과정들을 거쳐야 해서 실제로는 많은 시간과 품이 들어간다.
- 본인의 소중한 추억이나 기억이 담겨 있는 책들을 의뢰하는 분들은 수선이 완료된 책을 다시 만났을 때 그 책에 얽힌 어릴 적 추억이나 사람과의 기억이 다시 생생히 살아난 것 같아 반갑기도, 때론 그립기도 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사실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건 책 주인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고쳐진 책의 모습과 선명해진 기억은 일렁이는 파도를 타고 수선가인 나에게도, 또 그 책을 온라인에서 사진으로만 접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가닿는다. 그 파도는 우리가 잊고 지냈던 오래되고 소중한 기억들을 건드린다. 무뎌진 감각들을 깨운다.
- 재영 책수선은 앞서 소개한 책갈피나 액자처럼 책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지류도 함께 작업하고 있다. 사진, 그림, 엽서, 편지지와 같은 물품이 의뢰로 들어오는 경우도 생각보다 잦다. 그중에서도 빈도가 높은 부류의 물건들이 바로 '굿즈'다. 비록 나는 요즘 인기가 많은 배우나 가수는 잘 모르지만 그 어느 때보다 케이팝의 영향력이 국제적으로 크다는 것, 그리고 그만큼 '굿즈'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굿즈가 팬들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도.
- 본인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굿즈가 파손이 되어 의뢰를 하는 경우는 대부분 상담 미팅을 하러 와서 물건을 꺼내는 모습만 보아도 그분에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 쉽게 느낄 수 있다. 몇 겹이고 꽁꽁 감싸 안전하게 포장을 해온 모습과 행여 어디라도 흠집이 날까 조심조심 건네는 손길에는 굿즈를 향한 온 마음과 정성이 담겨 있다. 가장 많이 들어오는 굿즈종류는 아이돌의 포토 카드나 바인더, 또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인이 담긴 포스터나 책, LP 케이스 같은 물건들이다.
- 앞으론 종이책이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책 수선 일은 전망이 괜찮겠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가끔은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종이책이 (혹시나 정말로) 사라진다면, 그럼 나는 그땐 굿즈를 수선해 보겠다고. 종이 굿즈 전문 수선가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소중함을 다루는 의미에서 책과 굿즈, 그 둘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 이 여섯 권의 책을 맡기신 의뢰인은 <빨강머리 앤>의 저자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열성팬이다. 그가 집필한 다양한 책들을 수집하시는데 이 <빨강머리 앤 시리즈>도 그중 일부다. 이 책들은 1963년 육민사에서 낸 국내 최초의 <빨강머리 앤> 번역본 1권(앤의 청춘)과 이후 육민사가 창조사에 인수된 후 이어서 출판된 시리즈(전 5권)다. 번역자로 작년에 타계하신 신지식 선생님의 성함이 적혀 있는 것도 많은 분들에게 반가운 부분일 것 같다.
- 의뢰인이 처음 작업실을 방문하셨을 땐 창조사에서 출판된 1~4권뿐이었다. 희귀 서적들인 만큼 원본의 모습을 최대한 해치지 않는 선에서 보완을 하고 앞으로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개별 케이스를 제작하는 쪽으로 일단 전체적인 수선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자꾸만 이대로 진행하기엔 시리즈에서 빠진 마지막 한 권(5권)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 마지막 5권이 있다면 이 귀한 책들을 좀 더 완벽한 한 세트로 작업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자꾸 맴돌았다.
- 그렇게 미팅을 끝내고 한 달쯤 지났을까, 의뢰인이 방방곡곡을 뒤져 빠져 있던 마지막 5권뿐만 아니라 육민사에서 출간된 최초의 번역본 1권까지 수집했다는 연락을 주셨다. 세상에! 그 연락을 받는데 내가 다 기뻐서 모니터를 앞에 두고 절로 박수가 쳐졌다. 비록 그러면서 지연이 생기고 다른 작업과 뒤엉켜버려 일정이 뒤로 많이 밀려버리긴 했지만(정말 일정이 너무 많이 늦어졌는데, 되려 매번 먼저 양해를 해주시는 의뢰인에게 많이 죄송하고 또 많이 감사하다.) 그래도 이렇게 귀한 책을 온전한 한 세트로 작업할 수 있게 되다니 정말 다행이다. 만약 내가 책수선가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살면서 이 <빨강머리 앤> 시리즈를 만날 수 있었을까? 계속해서 지브리 스튜디오의 앤만 기억하며 살지 않았을까?
- 어쩌면 평생 접해보지 못했을 귀한 책들을 책에 진심인 의뢰인들 덕분에 나는 이렇게 매번 쉬이 가까이서 만난다. 어디 그뿐인가? 심지어 구석구석 뜯어보고 들여다보고 맘껏 만지고 넘겨볼 수도 있는걸. 나는 책 수선가이기에 누릴 수 있는 이 즐거움이 내 삶에서 오래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 종이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책 수선가는 점점 더 많아져서 훨씬 더 많은 책들이 오랫동안 튼튼한 기억을 가질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렇게 책 수선이 우리의 일상과 보다 가까운 일이 된다면 참 좋겠다.
- 둥글게 휜 커버는 장시간 강한 압력을 가해 다시 평편하게 펴주었고, 보강제가 떨어져 나가 제본이 헐거워진 탓에 제멋대로 흐느적거리던 책등은 망치로 두들겨가며 단단하고도 아름다운 곡선의 형태로 잡아주었다. 낡거나 분실된 헤드밴드도 색색의 새것으로 모두 교체를 해주었고, 많이 닳아 흐릿해진 표지의 겉싸개와 제목 부분은 지난 세월과 꼭 닮은 색을 제조해 다시 채워 넣고 광을 냈다. 이외에도 찢어진 페이지 다시 붙이기, 분해된 표지와 본문 합체시키기, 드문드문 묻은 오물을 약품으로 세척하기 등등의 과정들을 거쳐 책은 사전이라는 본래의 역할로 돌아갔다.
- 책 수선 일을 하다 보면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의뢰가 들어오는 책들 중엔 본인이 어릴 때 좋아했던 동화책이나 소설책이 꽤 많은 편인데, 이런 책을 맡기는 의뢰인들에게는 거의 동일한 요구사항이 하나 있다. '책 속에 남아 있는 낙서는 지우지 말 것'.
-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에게 낙서는 없애고 싶은 책에 대한 훼손이 아니라 기억이고 추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책을 읽던 순간을 기억해 내고, 책의 내용을 떠올리고, 더 나아가 본인의 어린 시절까지 추억할 수 있게 해주는 낙서들은 그 책을 읽는, 아니, 그 책을 경험하는 또 하나의 방법인 셈이다.
- 그 흔적들을 지우지 않고 간직함으로써 의뢰인만의 특별한 기억장치가 작동하는, 세상에서 단 한 권뿐인 책이 되는 일, 꽤 멋지지 않은가? 꼭 어릴 때 보던 동화책에 그려진 삐뚤빼뚤 귀여운 낙서가 아니더라도 전공책에, 소설책에, 사진집에 남아버린, 지금 당장은 지워버리고 싶은 어떤 흔적들이 어쩌면 수십 년 후에 다시 펼쳤을 때 즐거운 기억장치가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아, 맞아. 라면 먹으면서 읽다가 여기 국물이 튀었지. 봄바람이 좋던 늦은 밤이었는데' 하며 순간 그날의 달큰한 봄밤의 향기가 코끝에 다시 불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호로록 라면을 끓여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 종이를 다시 붙이는 일이 왜 그렇게 비싸냐고 말을 듣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내 노동에 비해서는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건 대부분 말 그대로 그저 찢긴 부분에 풀칠을 해서 덧붙이면 된다고 쉽게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 어느 과정보다도 높은 집중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바로 찢어진 종이를 붙일 때다.
- 어떤 때는 자세히 들여다보아 뜯어진 섬유질의 결을 하나하나 풀어서 다시 이어주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종이가 있고, 또 어떤 경우엔 접착제가 묻은 붓질 한 번에도 후드득 조각이 나서 쓸려나갈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종이가 있기 때문이다. 종이의 찢어진 상태에 따라 사용되는 보강제 역시 재질과 색깔, 두께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서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찢어진 종이를 다시 붙이는 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한, 그런 예민한 작업이다.
- 전자책은 아무래도 찢어질 위험도 없고, 언제든 낙서도 깨끗하게 지울 수 있을 테니 어쩌면 어떤 아이들에게는 동화책이 <유리 구두>처럼 종이 질감과 같은 촉각의 기억으로는 남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지만, 아쉬운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거짓말일 것이다.
- 의뢰인에게는 <유리 구두>에 남아 있는 작은 낙서 하나까지도 지우고 싶지 않은 소중한 기억인 것처럼, 책이 망가졌다고 해서 그 책과의 추억까지 흠집이 나는 건 아니다. 그건 그 오랜 시간을 책과 주인이 함께 견뎌온 우정이라고, 그건 정말이지 또 다른 사랑이라고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그 시간과 사랑 안에서 책 수선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 '수선' (修緖) 「명사」 낡거나 헌 물건을 고침.
'복원' (復元/復原) 「명사」 원래대로 회복함.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어대사전)
- 이 두 줄의 사전적 설명만으로도 '책을 수선한다'와 '책을 복원한다'의 의미 차이가 금방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복원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왜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운 지도 조금은 눈치를 챘을 것이다.
-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수선'이란 말을 언제 듣게 될까? 혹은 쓰게 될까? 구두 수선? 옷 수선? 이불 수선? 그 외에 또 다른 경우가 있을까? 수선과 비슷한 의미의 단어로 '수리'도 있지만, 수리는 보다 기계적인 물건을 고치는 데 사용하는 말이고 수선은 천과 직조물을 고치는 데 적합한 표현이라고 한다. 씨실과 날실이 얽혀 한 장의 천을 만들어내듯 종이도 섬유질이 서로 얽힘으로써 한 장의 종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나는 '책 수리'보다는 '책 수선'을 고르게 되었다.
- 책을 보존하는 일에는 꽤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복원과 수선, 수리, 더 나아가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그 포맷 자체를 바꾸는 일까지 포함되지요. 저는 제 일이 보다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가깝게 느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옷 수선, 구두 수선과 같이 좀 더 친숙한 표현인 수선을 선택했지만, 가장 정확한 명칭은 '책 보존가'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 책이 출판된 연도를 생각하면 책등에 적혀 있는 제목이 디지털 인쇄가 아닌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즉, 납이나 동으로 만든 특정 서체의 활자 조판을 통해 제작이 되었다는 말인데, 그럼 동일한 서체를 알아내어 컴퓨터로 인쇄하면 되는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서 첫 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 우선 셀 수도 없이 많은 서체들 중에 눈짐작으로 동일한 것을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설령 알아낸다 하더라도 과거에 활자 조판용으로 나온 서체의 모양과 크기는 우리가 요즘 컴퓨터에서 설정해서 보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서체를 적용시킨다 하더라도 그 결과물이 같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같은 12포인트의 가라몬드(Garamond) 서체를 골라도, 과거 조판용으로 나온 12포인트의 가라몬드 서체는 지금 우리가 디지털로 사용하는 서체보다 대개 크기가 조금씩 더 크고 모양의 디테일이 다르다.
-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원본에 사용된 글자를 스캔받아 컴퓨터 그래픽 툴을 이용해 모양을 하나하나 따고 다듬어 벡터이미지로 바꾼 후, 다시 동판을 제작해서 책 표지 위에 찍어내는 과정을 거치게 됐다.
- 예전에 잠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을 했었는데, 일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매일 모니터를 보며 그래픽 프로그램을 쓰는 일이 참 힘들고 어렵고 적성에도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책 수선을 시작할 때 '이 일은 적어도 디지털 툴을 다루진 않겠구나!' 하고 좋아했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
- 내가 일한 부서처럼 파손된 책이나 희귀 서적을 직접 수선하는 일까지, 필요한 목적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책을 다루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연구실에 재빨리 취직을 했고, 그곳에서 처음에 계획했던 것보다 열 배나 더 긴 시간인 3년 6개월을 일했다. 예정보다 긴 기간 동안 일을 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무엇보다 책을 수선하는 일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접하게 되는 다양한 파손 형태들이 무척 흥미로운 데다가, 그걸 제한 없이 언제든 실컷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 두 번째는 '속성으로 필수 기술만 쏙쏙 배우고 그만둬야지!'라고 생각했던 나의 다짐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일을 시작하고 일주일 만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연구실로 출근한 첫날 한 일과 그날의 당혹스러웠던 기분이. 첫 출근을 해서 내가 가장 먼저 배운 일은 '풀질'과 '칼질'이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면 '붓으로 접착제를 바르는 방법'과 '칼로 종이를 자르는 방법'인 셈이다.
- 아니, 잠깐만. 칼질과 풀질을 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던가? 심지어 나는 허구한 날 온갖 '도구질'을 해야 하는 미대를 졸업하고 왔는데? 내가 풀질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허당처럼 보이나?
- 나름 섬세하거나 꼼꼼한 작업에는 자신감이 있었던 터라 그 순간에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당혹스러움을 조목조목 표현하기에 당시 나의 영어 실력은 부족했고(지금 생각하면 어찌나 다행이었는지), 어쩐지 무서웠던 상사의 첫인상까지 더해져서 찍소리도 못하고 손에 붓과 칼을 쥐고 그저 시키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 새 종이와 오래된 종이를 다루는 데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사람으로 비유해서 말하자면, 단순한 감기더라도 건강한 사람이 걸렸을 때와 그렇지 못한 사람이 걸렸을 때 그 위험도가 다른 것과 같다. 똑같이 한 번의 칼질을 하더라도 새 종이에서는 속도나 칼날의 날카로운 정도가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다. 새 종이는 그런 외부 조건들을 어느 정도 견뎌낼 힘이 있다는 말이다.
- 하지만 오래된 종이들은 그렇지가 않다. 새 종이를 자를 때와 같은 속도로 칼질을 했다가는 일부분을 덩어리째 날려 먹을 수도 있고, 종이를 자르는 게 아니라 아예 부숴버리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종이가 한 장이 아니라 어느 정도 두께를 가진 여러 장일 경우엔 더 많은 변수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더 많은 위험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선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 풀질도 마찬가지다. 종이의 나이와 상태에 따라 필요한 접착제의 종류와 점도가 각기 다른데, 붓을 이용해 풀질을 ...
- 책 수선가로 일을 하다가도 1년에 두세 번은 꼼꼼한 세무사가 되어야 하고, 매번 발 빠른 마케터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 이달의 우수 영업사원이 되어야 할 때도 있고, 밤이고 낮이고 친절 상담원이 되기도 한다. 하루에 주어진 시간은 여전히 똑같은데 책임져야 할 본업은 많아진 셈이다.
- 표지에 여러 활자를 이용하여 즐거움을 주되 안정감이 있는 최적의 위치를 선택하는 일은 늘 고민이 많이 되지만 그만큼 완벽한 위치를 찾아냈을 때의 짜릿함 역시 커서 좋아하는 과정 중 하나다.
- 그리고 이 책에는 숨겨놓은 장식이 하나 있다. 이 장식의 영감이 된 장면은 오래전, 비록 프랑스 오페라는 아니지만, 친구와 함께 연극을 보러 간 기억에서 가지고 왔다. 공연이 막 시작되려고 할 때 조명이 켜지면서 극장 내 먼지들이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던 순간, 그 아름다움에 마음을 온전히 빼앗겼던 적이 있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장면이 계속해서 선명하게 떠올라 나도 이 책 어딘가에 그런 반짝임을 살짝 숨겨놓고 싶어졌다.
- 운이 좋게도 이 책은 배면이 고르게 정리되지 않은 방식으로 만들어져서 표지에 좀 더 넓은 마진이 생겼다. 덕분에 작은 반짝임을 숨겨놓을 공간도 좀 더 여유로워졌다. 어떤 형태의 반짝임을 넣을지 고민하다 이왕이면 원본의 표지에 사용된 문양을 이용하기로 했다. 금박의 위치를 보면, 곁에서 봤을 때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곳이라 책장에 꽂아놓거나 책상 위에 올려두었을 땐 아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책을 들었을 때, 펼칠 때, 움직일 때 잠깐씩 드러나며 빛을 낸다. 그늘진 곳에 살짝 놓아둔 반짝임, 이 책에 꼭 담고 싶었던 작은 빛이다.
- 이번 책처럼 수선과 동시에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내야 할 때는 책을 어떻게 해석하고 방향을 잡아 나아갈지에 대한 고민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 그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의뢰인과 함께 논의를 거치면서 서로 주고받는 제안과 선택들이 조화를 이루는 순간도 즐겁지만, 이 책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황은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 결과물들이 모두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엔 완성된 책이 의뢰인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는 걱정도 크다. 하지만 다행히도 책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흔적들과 기억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에만 온전히 집중을 하다 보면 그런 걱정이 조금씩 옅어진다.
- 코로나19로 바깥 외출이 껄끄러워지다 보니 의뢰나 미팅이 취소되거나 연기되어 일정들이 뒤죽박죽 되기도 했다. 재료 판매처들이 휴업에 들어가거나 해외배송이 기약 없이 오래 지연되면서 속절없이 기다려야만 했던 나날도 있었다.
- 하루를 건강하게 살아내는 용기, 월세를 생각하면 답답하지만 그래도 한 달을 더 버텨보는 용기, 사랑하는 이들과 만나고 싶은 마음보다 서로의 안전을 우선하는 용기, 코로나19로 갑자기 취소되거나 어긋나는 일정들에 실망하더라도 다시 다음 일을 도모하는 용기. 당장의 내일과 다음 주와 다음 달 일정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해나가는 일에 큰 그림을 그리려면 아무래도 예전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해진 시대가 온 것 같다.
- 그 용기들의 시작이 크지 않아도 좋겠다. 우리 모두 건강히 오래 걸어가야 하니까. 그래서 예전보다 힘을 빼고 작고 사소한 다짐들만 챙겨보려고 한다. 일단 하루에 물을 500밀리리터씩 더 많이 마시고 90초씩 하던 플랭크를 10초씩만 더 늘리기.
- 일기장 원본의 표지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분위기로든 새롭게 작업이 가능했다. 표지는 책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일기장의 새 표지만큼은 무엇보다도 정숙진 선생님을 닮은 모습으로 만들고 싶었다.
- 여든이 훌쩍 넘은 연세에도 언제나 정갈하고 따뜻한 자세로 주변 사람들에게 온기를 전하신 분, 어릴 적 단정한 한복을 입은 사진 속 모습, 옹골진 표현들로 쓰인 큰 울림의 문장들. 책과 사진에서 그런 선생님의 모습들을 확인하면 할수록 내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노란 산수유 꽃이 떠올랐다. 여러 송이의 작은 꽃들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봄날이면 우리에게 늘 따뜻한 향기를 전하는 꽃.
- 그렇게 새 표지는 일기장을 포근히 감싸는 구조의 하드커버 위에 산수유 꽃의 모습을 닮은 박(형압)이 새겨진 옷을 입게 되었다. 이번 박 작업은 하나의 금속틀을 기계에 넣어 똑같은 모양의 패턴으로 반복하는 방식이 아닌, 기본 점, 선, 면을 이용해 하나하나 꽃잎과 꽃대를 만들어 그림을 그리듯 한 송이씩 완성해 나가는 방식의 핸드툴링으로 진행했다.
-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필요한 환경이 달라진다. 가파른 계단보다는 평평한 경사로를 찾게 되고 허리나 무릎이 아프면 지팡이나 휠체어에 의지를 한다. 필요하다면 병원이나 전문 요양기관의 보호를 받기도 하고 더위와 추위에는 더욱 조심하게 된다. 대체로 다른 사람이나 장비의 도움이 많이 필요해진다는 말이다.
- 그런데 이건 살아 있지 않은 책도 마찬가지다. 오래된 책일수록 책장에서 여러 권의 책들 사이에 끼워 세워놓기보다는 여유 있게 바닥에 눕혀놓는 것이 낫고,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을 땐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케이스 같은 안전장치가 필요할 때도 있다. 해가 지날수록 습기와 햇빛에 더욱 취약해지기 때문에 매 계절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 이런 관리만 제대로 되어준다면 책은 강하다. 상태에 맞게 적절한 관리만 계속 잘해준다면 이집트의 피라미드만큼이나 오래 남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수선하는 일은 망가진 부분을 회복시키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책이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앞으로의 방향을 안내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
- 원본이 이미 많이 낡은 상태라 슬립케이스를 제작한다고 해도 책을 바로 케이스에 넣었다 뺐다 하기에는 위험했다. 하드커버가 아닌 이상은 마찰에 의해 책 표지나 배면이 쉽게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위험을 줄여줄 속케이스가 필요한데, 이 책은 동서남북으로 한 꺼풀씩 펼쳐 열리는 구조의 속케이스를 만들고 각 면들은 제목과 저자, 출판사 정보들을 이용하여 굵고 큰 패턴으로 꾸며주었다.
- 처음엔 '거 참, 다들 빡빡하게 일하네'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그렇게 함으로써 각각의 도구 관리가 훨씬 수월해진다. 행여 도구로 인한 실수가 있더라도 그 관리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에 꽤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걸 일을 하면서 점차 느끼게 됐다. 책 수선가라면 철저한 도구 관리는 작업을 할 때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태도 중 하나라서 그렇게 한번 정해진 자리와 도구들을 가지고 계속 일을 한다는 건 도구 관리와 책임감을 배우기에 썩 괜찮은 방법인 셈이다.
- 각자의 스테이션에 준비되어 있는 도구통에는 보통 가위나 붓, 칼, 자, 연필, 사포, 지우개, 본폴더, 마이크로 스패츌러 등등이 들어 있다. 상사는 각각의 도구가 어느 스테이션 소속인지 구별하기 위해 색 테이프로 표시를 해놓았는데, 내 자리의 도구들은 모두 빨간색의 테이프를 두르고 있었다.
- 그 연구실은 상당히 오래된 곳이어서 내가 배정받은 자리는 그전에는 다른 수선가가 일하던 자리였고, 그전에는 또 다른 수선가의 자리였고, 그렇게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누군가의 첫 스테이션이었을 것이다.
- 커버 역시 면지에 사용된 밝은 미색을 닮은, 잔잔한 호숫가의 모래사장이 떠오르는 색을 골랐다. 특별한 장식을 원하지 않은 의뢰인의 취향에 따라 커버는 그대로 남겨두고 할아버지께서 천자문을 쓰셨던 연도만 뒤표지 하단에 작게 은박으로 넣어주었다.
- 인터뷰를 할 때마다 꼭 '지금까지 수선한 책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책마다 그들만의 사연이 있다 보니 이 질문에는 딱 한 권의 책을 골라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만약 지금까지 수선한 책들 중 가장 큰 책은 무엇인지 묻는다면 바로 이 책을 꼽을 수 있다.
- <The Manchester United Opus>는 1878년 철도 노동자 조직에서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져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역사를 한 권에 담은 책으로, 그 크기나 무게가 모두 엄청나다. 지난 128년의 역사를 (출간연도 기준) 한 권으로 담으려고 했으니, 대체 얼마나 많은 페이지가 필요했을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 나무로 만들어진 케이스를 제외한다고 해도, 가로세로 길이가 각각 60센티미터에, 두께는 14센티미터, 무게는 37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이 책은 건장한 성인 두 명이 함께 들고서야 겨우 작업실로 운반이 가능했다. (2리터 생수병이 한 통에 2킬로그램이라고 하니, 이 책은 대충 큰 생수병 18~19병의 무게와 같다.)
- 크기와 무게도 놀랍지만 모양새 또한 누가 봐도 제작비를 아끼지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을 만큼 화려하다.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손으로 직접 바인딩한 제본, 가죽 표지, 실크 코팅된 200그램의 두꺼운 내지, 6도판 컬러 인쇄, 길이가 200센티미터까지 펼쳐지는 게이트폴드(Gatefold) 페이지, 은박을 입힌 배면, 개별 유광 코팅이 된 2,000장 이상의 이미지들, 8밀리미터 두께의 나무 케이스, 케이스를 하나하나 감싸고 있는 실크 천. 전 세계 9,500부 한정으로 출판된 이 책들을 (그중에서 이 책은 715번째다) 한 권 한 권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그 과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 그런데 이 책을 만드는 데 고생을 한 건 제작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책의 앞 페이지에는 출판 당시 맨유의 감독이었던 알렉스 퍼거슨과 '맨유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바비 찰튼의 친필 사인이 들어가 있는데, 이들이 9,500부 모두에 직접 사인을 하는 데에는 꼬박 두세 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 이렇게 만들어진 책의 가격은 당시 5,870달러 정도였고, 지금 환율로 따지면 한 권당 최소 660만 원 이상이 된다. 스페셜 에디션(한정판)이라는 꼬리표만으로도 대충 짐작은 했지만 정말이지 여러모로 놀라운 책이다.
- 그리고 나는 책 수선가로서 파손된 책의 상태를 보고 한 번 더 크게 놀랐다. 보통은 책 수선 면담을 위해 의뢰인이 책을 들고 작업실을 방문하지만 이 책은 크기와 무게 때문에 옮기기가 쉽지 않아 반대로 내가 책이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 책은 여러 오염, 특히 기름 성분에 취약하다. 기름기가 닿은 종이는 더욱 빨리 변색될 뿐만 아니라 한번 오염이 되고 나면 원상복구를 시키기도 어렵다. 얼핏 생각하기에 사람 손에는 세균과 유분이 많으니 귀한 책을 볼 때는 장갑을 껴서 손의 유분으로부터 종이를 보호하는 게 옳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도 왜 책 보존 전문가들은 희귀 서적을 볼 때 장갑을 끼면 안 된다고 하는 걸까? 그건 설령 장갑이 유분으로부터 종이를 보호하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 외의 단점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 일단 우리가 흔히 보는 흰 면장갑이 손의 유분을 잘 차단시켜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장갑을 끼면 손의 유분이 천에 스며들게 되고 결국 종이에 닿게 된다. 특히나 면은 기름 흡수를 아주 잘하기 때문에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신속하게 손의 유분을 종이로 옮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장갑을 끼면 손의 체온이 올라가서 맨손일 때보다 더 많은 땀과 유분이 나올 수 있다.
- 그럼 라텍스 장갑을 끼면 안 되냐고? 물론 그것도 안 된다. 맨손으로 종이의 상태와 무게를 직접 가늠할 수 있을 땐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종이를 조심스럽게 넘긴다든지, 만지기를 멈춘다든지 한다. 하지만 장갑을 끼면 손끝 감각이 ...
- 책 수선을 할 때는 보통 책의 내용에 맞춰 수선 방향이나 디자인을 정할 때가 많다. 특히 도서관 장서라든가, 희귀 서적일 경우엔 책을 소유한 개인이나 단체의 개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오직 책에만 집중해서 수선의 기준을 정한다. 책이 출판된 연도를 감안해서 새로 덧대어질 재료의 재질이나 색상을 고르고, 책의 내용에 맞춰 당시 유행하던 비슷한 부류의 책을 참고하여 수선을 하는 등 책 자체가 수선의 기준이 되는 편이다.
- 하지만 개인 의뢰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책이 모습을 마음껏 바꿀 수 있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럴 땐 그 책을 수선하러 온 정성을 담아 주인과 닮은 반려책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 책 수선가의 의도가 십분 녹아들었던 책 한 권을 소개하려 한다.
- 초판이라는 책의 가치를 생각해서 너무 가벼운 책이 되지 않도록 겉싸개는 천보다는 가죽을 사용했는데, 그중에서도 의뢰인의 세련되고 온화한 느낌을 닮은 카멜색의 가죽을 선택했다. 보다 완성도 높은 만듦새를 위해 원본에는 없었던 미색의 가름끈과 갈색 패턴의 헤드밴드도 추가했다. 워낙 얇은 두께의 책이었기 때문에 세심하게 고려한 부분들이 많았는데, 수선 방향과 잘 어우러진 것 같다.
- 수선의 마무리 단계에서는 완성된 책의 면면들을 꼼꼼히 다시 살펴본다. 본문의 종이 넘김은 괜찮은지, 제본에 사용한 실의 텐션이 적당한지, 면지의 접착은 고르게 되었는지, 실제본인만큼 180도 펼쳤을 때에도 무리가 없는지 등등 내부를 점검한다.
- 이제 외부 점검이 이어진다. 책등과 커버 사이의 홈은 선명하고 깨끗한지, 커버의 넘김은 괜찮은지, 작업 중에 먼지가 묻거나 긁히지는 않았는지, 전체적인 느낌은 어우러지게 잘 나왔는지, 구석구석 확인하고 맵시가 날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꼼꼼히 다시 한번 매만져준다. 그렇게 모든 점검이 끝나고 나면 완성이다.
- 의뢰받은 (게다가 다른 데서는 이제 구할 수 없는) 책에 실수로 물이라도 엎지른다면? 과자를 먹고 제대로 씻지 않은 손 기름이 책에 스며들어버리면? 들고 옮기다 바닥에 떨어트려 모서리라도 꽝 찍힌다면? 들고 있던 볼펜을 떨어트려 글자 위에 줄이라도 그어진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 이미 망가진 책을 다루다 보니 작은 실수에도 상태가 더 안 좋아질 가능성이 많아서 일하는 동안만큼은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설령 서점에서 똑같은 걸로 얼마든지 새로 살 수 있는 책이라 하더라도 의뢰인들의 추억과 손때가 똑같이 담긴 책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실수를 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 이런 것들도 일종의 직업병이려나? 하지만 이런 긴장감은 대체로 내게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외면하거나 피하고 싶지는 않다. 덕분에 실수하지 않고, 꼼꼼하게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니까.
- 다만 긴장이 주는 부담이 오래 지속되거나 퇴근 후에도 풀어지지 않고 쌓이면 곤란하다. 보통은 퇴근하고 맛있는 저녁을 만들어 먹거나 시시껄렁한 시트콤을 보면서 긴장을 풀고 부담감을 털어내곤 한다.
- 내가 사랑하는 영화 <줄리 & 줄리아>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 줄리가 일진이 사나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초콜릿 크림 파이를 만들며 남편에게 오늘 하루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푸념하면서 자기가 왜 요리를 좋아하는지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비록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날을 보냈다 하더라도 적어도 집에 와서 초콜릿 크림 파이를 만들기 위해 달걀 노른자와 초콜릿, 그리고 설탕과 우유를 함께 섞다 보면 그 반죽이 되직해진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안심이 된다는 말. 나도 그 마음이 뭔지 너무 잘 안다.
- 사실 종이로 만들어진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보려면 그렇게 멀리 과거로 갈 필요도 없이 당장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책상 위를 한번 쓱 훑어보기만 해도 된다. 다 읽지도 못하고 쌓아놓은 여러 권의 책들, 탁상달력, 구깃구깃한 영수증, 메모지, 휴지, 한 개도 안 맞은 로또 종이, 누군가의 명함, 언제 도착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택배 상자, 새 작업실 월세 계약서, 공책, 읽다가 만 선풍기 설명서, 씹던 껌을 뱉어놓은 포장지 등등. 별로 크지도 않은 책상 위에만 해도 열두 가지 종류의 다른 종이들이 놓여 있다.
- 내가 책 보존 연구실에서 누군가의 머리카락이 담겨 있는 오래된 봉투를 행여 망가트릴까 손끝을 바들바들 떨며 수선했던 것처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씹다 버린 껌을 싸놓은 이 포장지도 어찌어찌 운이 좋게 살아남아 수 세기가 지난 후 미래의 어느 지류보존가로부터 몇 년경의 어느 회사의 껌 포장지인지 분석당하며 조심조심 수선을 받을지도 모른다.
- 우선 외관을 보자면, 함의 앞면에는 의뢰인이 직접 쓴 '小字典(소자전)' 글씨를 그대로 본을 떠 제목으로 넣었다. 필체 특유의 귀여운 느낌을 해치지 않은 선에서 함과 잘 어울리도록 형태를 다듬었고, 함의 등과 뒷면에는 약간의 장식을 더해 균형을 잡았다. 전체적인 톤과 배색은 의뢰인이 말씀하신 차분하면서도 산뜻한 느낌에 맞춰 짙은 남색과 미색으로 골랐다.
- 작업이 시작되면서 우선 흔하디 흔한 원본의 모습은 모두 지우기로 했다. 책에 실린 그림들이 근현대 미술품인 만큼 화이트큐브의 갤러리나 미술관을 닮은 커버를 만들기로 했다. 화이트큐브는 이제 살짝 구시대적이고 권위적인 개념이라는 점에서도 50명의 남성 작가 목록을 볼 때 느낀 위화감과도 어떤 의미로 잘 맞아떨어졌다.
- 마침 본문의 첫 페이지에 정사각형의 그림이 있어서 그 부분을 화이트큐브 속에 걸린 액자처럼 활용할 수 있었다. 책표지는 새하얀 캔버스 겉싸개로 감싸고 인쇄된 그림 부분만 보이도록 구멍을 내어 액자처럼 실제로 유리를 끼웠다. 표지를 넘겼을 때 나오는 면지들 역시 다양한 지류를 겹겹이 사용했는데, 빛에 반사될 정도로 화려한 금색을 메인 컬러로 활용해 최대한 밀도와 공간감을 높여주었다. 표지부터 마지막 면지까지 넘길 때마다 서로 쌓이고 비치면서 나타나는 두께와 밀도들이 작지만 특별한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 수선 전후 사진을 얼핏 보기엔 전혀 다른 책이 된 것 같기도 한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어떤 의미로 보일지 궁금하다. 책에 실려 있는 50명의 작가들과 어울리는 근사한 책이 된 것 같아 보일까? 아니면 오히려 그 과도한 모습이 조금은 우스워 보일까? 전시를 통해 이런 경험들을 관객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글로만 남기게 되어 아쉬움이 크지만, 언젠간 더 많은 책 수선과 그 너머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가 생길 거라 기대해 본다.
- 수선을 무사히 끝내고서 책에다 사인을 할 때의 후련함, 예전에 그 책을 담당했던 다른 수선가의 이름 뒤에 내 이름을 적어놓을 때의 묘한 감동, 도서관에서 책을 구경하다 언젠가 봤던 표지 같은 기시감에 뒤표지를 펼쳐보았는데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발견했을 때의 신기함, 희귀 서적만 모아두는 층에 전시되어 있는 책 캡션에 담당 수선가로 내 이름이 적혀있을 때의 뿌듯함 등등. 수선을 하다가 실수를 한 경험보다는 이런 좋은 기억들이 더 많았기 때문일까? 같이 일하던 다른 동료들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책에다 내 이름을 남기던 그 순간들을 좋은 감정으로 기억하고 있다.
- 내가 그 책을 작업했다는 건 사진과 의뢰서를 통해 충분히 기록으로 남긴 하지만 그거야말로 형식상 남는 흔적일 뿐, 문장 마지막에 온점을 찍는 마음으로 뒤표지에 내 이름을 기록해 두는, 도서관에서 일을 할 때와 같은 기분을 느낄 기회가 더 이상은 없다는 게 내심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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