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수현] 외계 신장

일루젼 2023. 4. 14.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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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수현
출판 : 알마
출간 : 2020.05.30 


       

Project Lovecraft Recreate. 

러브크래프트 다시쓰기 프로젝트. 

나는 이 시리즈를 김보영 작가의 <역병의 바다>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사실 러브크래프트라는 작가는 나에게는 아이작 아시모프 같은 존재다. 천재인가 싶기도 하지만 다소 고전스러운 느낌이 있는. 그래서 원작자 자체보다는 그에게 영향을 받은 작가들에 더 관심이 가는. SF라거나, 오컬트라거나, 혹은 다소 덕후스러운 무언가에 관심을 두면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작가, 러브크래프트.

 

사두고도 오래도록 손을 대지 않았던 Project LC.RC에 손을 댄 것은 전적으로 집정리 기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자 그대로 이 책이 내 발등을 찍었다는 의미이다. 손과 발과 등에 멍이 가시질 않는다

 

한동안 그런대로 꽤 잘 살고 있다고 자부했었다. 평온한 루틴, 고요한 일상을 누리며 적절한 관심과 열정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내가 외면하는 틈에 고여서 썩고 있던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이제서야 그것들이 불러왔던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아넘길 수 있었던 것들이 탁, 시야 끝에 걸려 끈적하게 가라앉는 순간들. 

 

어쩌면 이 책의 주인공인 김민서와 나는 유사한 경험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 장승과 솟대를 그려내고 굿으로 시를 써서 제출하던 꼬맹이는 평범하게 Project LC.RC를 즐겨 읽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책읽기보다는 책정리에 에너지를 쏟으면서. 그 이전으로 기억을 더듬어가면, 아마도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구경했을 굿판의 북소리가 내 심장소리와 합쳐지던 순간이 있다. 집에 돌아와서도 둥둥 한참을 같은 리듬으로 울려서 괴로워하며 잠들었던.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가 굿을 구경하시던 분이었던가?

어떻게 나는, 그 산 꼭대기에서 그 굿을 보고 있었던가...?        

 


   

- 나에게는, 미친 여자가 된다는 것이 언제나 죽기보다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 세상 여자들이 다 어머니처럼 살까 봐 두려워한다지만, 내 경우엔 더 그랬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었지만 내 어린 시절 기억의 첫 장면은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앉혀 놓고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누군가가 펄쩍펄쩍 뛰면서 기묘한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었다. 

 

- 당연한 귀결로 나는 논리와 이성을 중요시했고 내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는지 수시로 자신을 검열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 점술이나 초능력 같은 것은 다 콜드리딩이나 마술 같은 속임수라 여겼다. 

 

- 굿판을 쫓아다니는 연구자에게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는 말이 있다. 국문학자가 제일 많고, 그다음이 아마추어 민속학자, 그다음이 민속학자라고 말이다. 반은 한국에 의외로 '공식' 민속학이 적다는 점을 빗댄 농담이다.

 

- 떨떠름하지만 무속과의 인연이 그나마 내 얄팍한 자산이었다. 그러니 대학원에서 교수님이 너는 비평도 싫어하고 책 읽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예전부터 무속 연구는 경험이 있으니 그걸로 계속해보는 게 좋겠다고 했을 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전통이나 민속, 무속 같은 말이 붙으면 인문학치고는 지원금을 제법 노릴 수 있다는 것도 한몫 거들었다. 

 

- 굿판의 무당들도 굿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운 노래와 춤에 자부심을 드러냈고, 때로는 그 노력이 신점을 치는 능력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점사로는 제법 인기가 있지만 직접 굿을 하지 못해서 굿은 우리에게 돌리는 이들도 있다고 말할 때, 그들의 얼굴에는 경멸과 시기가 동시에 묻어나기도 했다. 

 

- "자기한테니까 내가 솔직 담백하게 털어놓는 건데, 우리 무당들이 사람들한테 상담해 주고 이러는 거는 사실 심리 상담, 정신 상담 뭐 그런 거나 다름이 없어요. 가끔 진짜로 뭐에 잘못 씌거나 부정 탄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날 찾는 사람들이야 다 뻔하지. 속 답답하고 푸념할 거 많고. 그런 걸 해결해 주는 거지. 그럴 때 말도 안 되는 소리 해가면서 사람들 속이고 돈 뜯고 그러는 거는, 그건 제대로 된 무당이 아니고."

- 그럴싸한 말이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곧 석연치 않은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이 세계가 이미 이렇게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걸까? 내 마음에 들고 이치에 맞는 말만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 콜드리딩이 뭔지 내가 몰랐을까. 그러는 선배는 핫리딩이 뭔지는 아시나요 비아냥대고 싶기도 했지만.

 

- 사실 그랬다. 무당들은 영리했다. 원래 영리한 사람들인 데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눈치도 빨랐다. 정식 교육 수준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연구자의 언어를 다 꿰고 있었으며, 연구자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차리고 거기에 맞춰주기도 했다. 공부만 해온 어수룩한 연구자들쯤이야 그들의 손바닥 안이었다. 그러니까 경험 많고 노련한 무당이라면 학계에서 통할 만한 주제를 뽑아내고 그에 상응하는 자료를 제공하는 데에도 나보다 훨씬 나을 수 있다. 굿판 어딘가에서 마주쳤던 민속학자 선생님도 비슷한 조언을 했다. 그 조언에는 무당들이 내어주는 대로 받는다 해서 그게 가짜는 아니라는 변명이 붙어 있었다. 

 

-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거슬렸다. 

 

- 시작이 언제였는지 딱 잘라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전부터 시야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뭔가가 마음에 걸리는데, 당장 생각은 나지 않고 계속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처럼. 마음 한구석에 얼룩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걸 돌아보지 못하고 계속 의식만 할 때처럼.

 

- 그러나 그건 나중에 돌이켜 보았을 때의 이야기다. 

 

- 순간 이상한 곳에 떨어진 듯한 기분이 엄습해 왔다. 꿈속에서, 아주 당연하게 우리 집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있다가 갑자기 어? 우리 집은 이렇게 안 생겼는데, 깨닫는 순간처럼. 

 

- 추임새를 넣다 보면 피곤했다. 초반에 몇 번이나 굿이 있다고 연락을 해주면서도 느물거리며 접근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친해지자고 하지 않는 걸 보고 안심했던 게 무색하게 피곤했다. 그의 도움을 받은 연구자들이 나중에 연락을 끊거나 피한다면, 그게 다 배은망덕하고 사람됨이 모자라서만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태도였다. 우리는 면전에서 무녀들을 꼬박꼬박 만신 萬神 님이라 높여 불렀다. 원래는 존경을 담아 큰 무당에게만 붙이는 말이라지만, 아무 존경심 없이도 다 선생님이 되고 사장님이 되는 세상이 아니던가. 

 

- 그러나 말을 하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 "게다가 굿도, 그 양반 굿은 그걸 굿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싶게 다르거든. 내가 잘 모르겠는 부분도 많고. 외국 샤머니즘에서도 이것저것 빌려다 쓰나 보던데, 내가 영어를 알아야 말이지."

"그래요? 그거 정말 재밌는데요. 요새는 다들 내가 제일 전통을 지키는 무당이다 내세우기 바쁜데."

"내 말이. 필요하면 뭐든 쓴다고 당당하게 말씀을 하시니까 어째 더 믿음이 가더라고."

 

- 무속에도 독경 讀經 이라는 형태의 의식이 있었다. 꼭 경전을 보고 읽는 건 아니고 외워서 읊기도 하는데 충청도 쪽에서 많이들 했다. 제일 많이 쓰는 경전은 불교의 다라니경이나 도교의 옥추경. 장엄하고 그럴싸한 소리가 나는 데다 아무나 알아듣기도 힘들고 알아들어도 그 나름대로 좋은 말이 가득해서가 아닐까 싶다.

 

- 나는 별생각 없이 폰을 만지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만신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를 정면으로 보는 형형한 두 눈이 말로만 듣던 호랑이의 눈 같았다. 아니, 호랑이가 아니다. 이글거리는 금빛 불덩이 속에 가늘게 세로로 찢어진 검은 동공. 뱀의 눈이다.

 

- '야, 그거 진짜면 땡잡았네, 김민서. 베스트셀러 쓸 수 있겠다. 환각 버섯도 있음?'

썩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웃음이 나오기는 했다. 카를로스 카스타네다라는 사람이 있었다. 미국의 인류학자인데 1960년대에 학위를 따기 위해 조사에 나섰다가 만난 야키 인디언 돈 후앙을 만나 샤먼으로 수행을 했고, 그 경험을 쓴 책이 초대박 베스트셀러가 되어 떼돈을 벌었다고 했다. 한국에도 번역서가 나왔으나 출판사는 정신세계사. 학술서라기보다는 '그쪽' 책이라는 인상이 짙었다. 어쨌든 그 책을 일부 읽은 사람들끼리 농담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샤먼은 이런 신비로운 약물도 비전 여행도 없어서 어쩌냐. 우리도 베스트셀러 쓰고 싶다, 뭐 그런 농담. 

 

- 어딘가 잘생긴 매를 닮은 노인이 내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을 때, 나는 단박에 그 사람이 좋아졌다. 전체적으로 엄격하고 단정한 데다가 매서운 기운이 감돌아, 장군이라고 해도 믿을 인상이기는 했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았다. 아니, 무섭기는 했으나 나에게 해를 끼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황을 무시하고 나에게 친절한 모습 때문이라면 내가 너무 단순하겠고, 품위 있고 당당하면서도 한참 어린 나에게까지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 좋았다고 해두자. 

 

- "미치는 게 무섭소?"

"네? 네, 네, 무섭죠. 너무 무서워요."

그러자 경자 만신은 다시 물었다.

"왜?"

나는 조금 멍해졌다. 세상에 그 누구도 죽는 게 무섭냐고 묻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것은 당위였다. 보통은 미치는 게 무섭다는 마음도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 "미친다는 말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지 않소. 미쳐서 더 괴로울 때도 있고, 미쳐서 오히려 편해질 때도 있지."

 

- "신을 받아들일 때까지 이 년을 꼬박 앓았지. 엄청나게 아팠어요.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다고 생각할 만큼 아팠어서, 지금도 가끔은 내가 그때 이미 죽고 그동안은 계속 죽은 후의 삶을 살고 있나 하기도 해. 어쩌면 열네 살 때부터 지금까지 쭉 미쳐 있는 것도 같고." 

반듯반듯한 경자의 말을 들으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신병을 진짜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신병을 앓은 무당들의 고통은 진짜 같았다. 

 

- "게다가 신령님이 내려오시고 나니까 무서운 게 없어지더라고. 호랑이도, 역병도 내 신장님에 비하면 가소로웠으니까. 그 후로는 가난도, 배고픔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무섭지가 않았어."

그 말을 듣고 내 두려움도 훨훨 날아갔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 간략한 과거사는 내가 이전부터 의심하던 신병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다른 나라에서 샤먼에 해당하는 사람은 남자도 많건만 한국에서 무당이라고 하면 자동으로 여자를 떠올릴 만큼 성별이 치우쳐 있는 것이 과연 이런 경험들과 무관할까. 신병이 와서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고통스럽기 때문에 신병이 온다. 오랫동안 신병과 신내림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많은 여자들에게 탈출구가 되어줬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지라도.   

 

- "해결될 때까지 얼마든지 더 있어도 돼. 도울 만한 여유 있어서 돕는 거니까 그렇게 전전긍긍 미안해할 것도 없고."

여유가 있어서 돕는다는 말은 사실이겠지만 그래도 선뜻 받아들일 수야 없었다.

 

- "괜찮으시다면! 제가 조사를 해볼까요? 아직 오늘, 내일 시간이 있으니까요."

금단의 집에 다시 가고 싶어 안달이 난 건 아니지만 경자 만신에게 보답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다시 내가 뭔가를 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활력도 생겼다. 물론 내가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초등학생처럼 애쓰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고 있기는 했다. 

 

- 그래서 이야기는 내가 소중하게 부여잡고 있는 그 기억의 순간으로 넘어간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었고, 내 옆에는 옥색 치마 연보라색 저고리 차림에 부채와 방울 그리고 소독약과 토치로 무장한 노만신이 서 있었다. 소독약과 토치가 다가 아니었다. 우리의 짐에는 손전등, 방독면, 식초, 베이킹 소다, 락스, 알코올, 미니가이거 계수기, 미니 소화기, 미니 산소통 그리고 각종 청소 도구가 들어 있었다. 

 

- "그 옷은 좀, 거추장스럽지 않으시겠어요?"

옥색 치마가 먼지 구덩이를 쓸고 다닐 것 같았다. 그러나 만신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건 우리의 전투복이니까." 

 

- 새로운 눈으로 집 안을 다시 구경하다 보니 내가 기록으로만 읽은 사람들이 다 이 집에 살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 피난처여야 하고 쉬는 곳이어야 할 집이 가장 위험하다는 건 얼마나 사람을 갉아먹는 일인가. 우리는 바깥에서 스치는 사람들을 경계하다가 집에 들어가서 긴장을 푼다. 문을 잠그는 것만으로 바깥에서 들어올 위험을 막을 수 있다는 듯이. 그러나 위험이 그 문 안에 있을 때는 어찌해야 할까. 

 

- 아무리 높이 잡아도 일흔은 되지 않아 보였고, 눈을 감고 목소리만 들으면 그보다 더 젊었다. 말씨도 우아하고 쓰는 단어도 품위가 있어, 이전에 지나가듯이 말한 가난과 배고픔과 무작스러운 시댁 이야기가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무당을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이런 노인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이런 여성도 본 적이 없었다. 내 할머니와 전혀 다를 뿐 아니라 내 어머니와는 더더욱 달랐다. 

 

- "그랬구먼. 그래서 그렇게 미칠까 봐 두려워했어."

아, 그랬다. 그렇게 간단했다. 

경자는 가만히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어떤 일은 그냥 일어나지요."

"네... 네?"

"공부하는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뭔가 아귀가 딱딱 맞게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유난하던데, 민서 씨도 그렇지 않나? 이래서 저렇게 됐고, 그래서 그렇게 됐고. 다들 그렇게 딱딱 떨어진다 생각하고 싶어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 그렇게 생각하려다간 더 힘들어져. 일은 그냥 일어나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 그는 우주의 냉정한 진실을 그렇게 투박한 몇 마디로 요약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사실 권선징악은커녕 인과 관계도 없다. 우주는 이치에 닿지 않고, 세상은 인간에게 무관심하며, 모든 일은 인과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어디에도 의미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하찮은 존재다. 그게 너무 가혹해서 우리 모두가 가장 구석진 곳에 애써 뚜껑을 눌러 닫아 처박아두고 외면하는 현실이다. 

 

- 하지만 무당이란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는 존재가 아니었나? 종교란 다 그런 게 아닌가. 내가 지금 가난하고 힘든 건 전생에 죄를 지어 그렇다고 설명하고, 그러니 지금 잘 살면 나중에 보답을 받으리라 믿고,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다짐하고. 내가 고통스러웠던 만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잘 살 거라고 위안하기 위한 우리의 환상.

 

- 뻔하디 뻔한 말. 사람들 크게 등쳐먹지 않고 살아가는 점쟁이라면 누구나 할 만한 말들. 그게 우리가 듣고 싶어 한 말이었으니까. 네 고통은 무의미하지 않다는 말이. 그러나 경자 만신은 다르게 말했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아요. 할머니나 어머니나, 내가 고통받은 만큼 민서가 잘 살겠지 생각하고 마음 편히 떠나셨을 테지. 그걸로 된 거야. 그분들 고통은 민서 씨 책임이 아니야. 대단한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토록 냉담하게 다정한 말이라니.

"민서 씨의 고통도 어머니나 할머니 탓은 아닐 테지."

 

- "누구 탓이 아니라는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말이 아니야. 인간이라는 게 어찌 앞도 뒤도 없이 홀로 존재하겠나. 또 어찌 인간만이겠는가. 만물이 다 서로 얽혀 있고, 서로서로 영향을 미치지. 다만 신을 받아들인다는 건 그런 걸 아는 거라네. 나보다 훨씬 더 큰 게 있다는 걸 알고, 내가 우주의 티끌이라는 걸 아는 것.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해봤자,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걸 알면 자유로워지지."

나는 그 아리송한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이건 또, 불교 철학인가.

"그리고 자유로워지면 비로소... 혼돈을 볼 수가 있지."

경자 만신은 빙긋 웃으며 손에서 모래를 털어내는 시늉을 했다. 

 

- 구멍은 나에게 나 있었다. 

 

- 더 고통스러운 건 그런 상태로도 의식이 끊어지지 않고 오히려 렌즈처럼 선명하게 내 고통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생각을 할 수 있었고, 모든 감정을 다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제일 끔찍한 건 내 머릿속에 울리는 속삭임이었다.

이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도망칠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희미한 위화감이 남아 있었다.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지? 그게 내 생각인지,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계속 나를 비웃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세상이. 전부. 

 

- 우주는 나에게 무관심하며, 내가 우주의 티끌처럼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은 두려우면서도 나를 자유롭게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주가 나에게 무관심하지 않다면... 악의를 품고 나를 괴롭히며, 그 모습을 보고 즐거워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나는 평생 미친 여자가 되는 것을 무서워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미쳐서 정신을 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아무것도 무섭지 않고 고통스럽기 않게. 내가 가진 게 있다면 전부 다 줘도 좋으니까. 

도와줘.

 

- 복장도 눈에 익었다. 옥색 치마 위에 검은색 철릭을 걸치고, 흰머리에는 검은색 전립을 쓰고, 손에는 오방신장기를 들었다. 다만 본래 신장거리에서 모시는 신령은 동서남북중앙 다섯 방위를 지키는 수호신인 오방신장일 터인데, 지금 경자가 부르는 신령은 뭔가 달랐다. 오방신장기의 색깔은 파란색, 하얀색, 빨간색, 검은색, 노란색이었으나, 그것은 깃발이 아니라 사슬이었다. 이중나선의 사슬. 경자가 흔들지 않아도 제멋대로 살아 움직이며 허공을 수놓는 오색의 사슬. 아니 사슬 모양으로 배배 꼬인 뱀이었다. 차르륵 차르륵 쇳소리와 함께 만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떤 신장이 내 신장이냐! 어떤 신장이 내 신장이냐! 옳다, 이제 오셨구나!"

뱀은 다시 불꽃으로 변했다. 

 

-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게 되자 고통이 사라졌다.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옆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까마득한 절벽 가장자리에 섰을 때 같은 현기증이 따라왔다. 내 몸, 혹은 몸 없는 나는 무중력 상태에 떠 있었다. 주위는 캄캄하고 막막했다. 허공, 아니면 우주일까. 이대로 계속 홀로 떠 있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때, 뭔가가 나타났다. 평온하고 무감각해졌던 마음이 다시 요동을 쳤다. 어둠보다 더 검은 눈이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위아래가 없다지만 '그것'이 나를 '내려다본다'는 감각만은 선명했다. 그 눈은 나를 현미경 아래에 놓고 핀셋을 뻗어 한 장 한 장 벗겨내려 했고, 차가운 무관심과 비웃음 섞인 적의를 함께 쏟아부었다. 그 중압감만으로도 나는 바르작거리며 나뒹굴어야 했다. 

 

- 이윽고 다른 것이 나타나 그 눈의 관심을 빼앗았다. 똑같이 거대한 뭔가였다. 그것도 나에게는 무관심했지만, 정말로 무관심했기에 내 숨을 틔워주었다. 그것의 적의는 내가 아니라 검은 눈에게 향해 있었다. 

 

- "만신이 무슨 뜻인지, 선생은 알 텐데."

그 와중에도 머리에 쑤셔 박아 놓은 지식은 자동으로 풀려나왔다. 만신이란 그 몸에 모든 신을 다 내릴 수 있는 존재였다. 모든 무당의 시조가 그랬다고 한다.

 

- "나는 유난히, 특별한 신까지, 내려받을 수 있지만 대가가 없지는 않다오."

 

- 나는 눈을 뜨고 토했다. 토하면서 울었다. 

머릿속이 부분 부분 공백이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에서의 일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꿈속의 일이었을까. 무엇이 내 환상이고, 무엇이 실제 일어난 일일까. 알 수가 없었다.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왜 일어난 건지, 어떻게 된 건지. 

 

- 어쩌면 본래 그런지도 모른다. 위험은 늘 곁에 있고, 집안이 안전하다는 생각은 다 진실을 가리기 위한 어리석은 환상일지도 모른다. 

나쁜 일이 그냥 일어난다면, 좋은 일도 그냥 일어난다.

 

-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울고 싶어 진다. 그리고 경이롭다. 왜 그랬을까. 안 지 며칠밖에 안 된 어린 여자를 위해 왜 그렇게까지 해준 걸까. 나에게 그럴 가치가 있을까. 

 

- 애초에 그건 어머니와 할머니를 투영하고 내 죄책감을 덧입힌 환상이라고 설명했다. 상관없다. 나는 만신이 나를 구해준 것만은 어떤 층위에서건 진실이었다고 믿는다.

 

- 나는 쉽게 뭔가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원래도 의심이 많은 데다 끊임없이 뒤집어 생각하도록 훈련도 받았다.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갖췄다고, 받아들이기 싫은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제법 자부하고 있었다. 논리적으로, 정연하게, 세계를 이전과 같은 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구역질이 나도록 생각했다. 상담가의 말이 맞을 거라고. 경자 만신이라는 인물은 애초에 너무나 내 이상의 구현이었으니까. 내 마음이 만들어낸 존재가 맞을 거라고. 내가 연약한 정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존재일 거라고.

 

-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나를 지켜야 할 공포는 실재했다는 뜻이 아닌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늘 내 등 뒤에 있는 두려움은. 

 

- 그러니 사실은 이미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해도, 상관없다. 그때 보았던, 눈이 멀 듯한 불꽃의 신. 그 신을 내게 강림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미친 여자가 되는 게 무섭지 않으니까. 

 


 

- 러브크래프트는 이상한 작가다. 작가 개인을 호명하기보다는 러브크래프트 풍의 소설, 아니면 크툴루 신화, 코스믹 호러, 위어드 픽션이라고 해야 할 것도 같지만, 아무튼 이상하다. 내 취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데도 꽤 오래전부터 재미있어했다는 점이 가장 이상하다. 스무 살 무렵에 러브크래프트 단편집을 번역해 볼까 친구와 머리를 모은 적도 있었으니 꽤 매료된 것도 같은데, 정작 내가 어떤 부분을 좋아하나 생각하면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 나 같은 사람이 적지는 않았던 걸까. 시간이 흘러 이제는 한국에도 작가 전집이 번역되어 나왔고, 어느새 <전지적 독자 시점> 같이 빅히트를 친 웹소설에서도 자연스럽게 크툴루 신화를 써먹는다. 그런 한편으로 정작 나는 러브크래프트의 좋은 점은 잘 떠오르지 않고 싫은 점은 빨리 떠오르게 되어버렸으니, 이제는 이 작가와 더더욱 인연이 없을 것도 같았다. 

 

- 그러다가 몇 년 전, 두 편의 중편 소설을 보았다. 빅터 라발의 <블랙 톰의 발라드>와 키즈 존슨의 <벨릿보의 드림퀘스트 The Dream-Quest of Vellitt Boe>였다. 둘 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다시 써낸 중편 소설이었고,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다시 썼다. 빅터 라발은 흑인 주인공을, 키즈 존슨은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원작을 전복 재현했다. 뒤이어 세계환상문학상 앤솔로지 부문을 수상한 책 <어둠 속을 걷는 여자 She Walks in Shadows>도 알게 됐다. 다양한 여성 작가들만 모아서 러브크래프트 다시 쓰기를 시도한 기획이었다. 

 

- 매력적이었다. 현시점에서 러브크래프트의 한계점들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그렇다고 굳이 지우려 하지도 외면하지도 않고 내 관점을 덧입힐 수 있다는 것, 그럼으로써 이 세계를 '더 풍성하게 만든다'는 생각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 운 좋게도 이 기묘한 기획안을 알마 출판사에서 받아주셨다. 아이디어 넘치는 안지미 대표님의 제안으로 생각지 못하게 크고 아름다운 프로젝트로 확장되기까지 했다. 저 분이 크툴루 소설을 쓰면 어떤 게 나올까, 궁금했던 작가님들이 난데없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주신 데다, 최재훈 작가님이 표지 그림에 그치지 않고 따로 그래픽노블로 참여하시기로 했다. 모든 책이 만들어질 때 가장 필요하고 힘든 작업인 실무 조율과 편집은 유승재 편집자님이 맡아주셨다. 

 

- 한국에서는 무당이라고 하면 자동으로 여성을 떠올리는데,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다른 나라에는 남성 샤먼이 적지 않다. 기왕이면 나이 든 여성과 젊은 여성이 나오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기에 더 잘 맞는 소재라 생각했다. 

 

- 어떤 종교든 개인 차가 있겠으나, 적어도 내가 만나고 본 무속 관계자들은 세상의 생각과 다른 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턱없이 혐오하는 것도, 턱없이 신비화하는 것도 전형적인 타자화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나는 한때 굿판을 돌아다니며 논문을 쓰려 애쓰던 시기가 있었고, 이 소설에는 그 시절의 파편들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물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도 실존 인물은 아니다. 

 

- 끝으로, 1인칭 화자는 가장 믿을 수 없는 화자라는 점을 기억해 주시길.  

 

 
  

 

 

 

 
외계 신장
한국의 대표 SF 작가들이 오마주와 전복으로 다시 창조하는 H. P. 러브크래프트의 세계 김보영, 김성일, 박성환, 송경아, 은림, 이서영, 이수현, 홍지운 그리고 최재훈 9인의 작가가 호러문학의 거장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을 오마주하며 2020년 우리의 현실 속 공포와 경이를 그려냅니다.
저자
이수현
출판
알마
출판일
202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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