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성일
출판 : 알마
출간 : 2020.04.30
빡빡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점점 더 하드한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다. 요 며칠간 불타올랐던 정리에 관한 열정은, 그나마 숨돌릴 틈이 있을 때 앞으로의 나날들을 준비하라는 속삭임이었던 걸까.
이런 상황도, 이런 상황이 빚어지게 된 일련의 조각들에도 사감은 없다. 그저 나의 상태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중이다. 무리라는 판단이 서면 다른 것들을 위해 나를 희생하지는 않으려 한다. 내게는 '내'가 있어야 세계도 존재하니까.
<별들의 노래>는 상당히 만족스럽게 읽었다. 저자가 직접 후기에서도 밝힌 바대로 '사회적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회와 부서지기 쉬운 연대, 그리고 깊게 감각되는 유대감과 안정에 집중해서 읽는 것도 한 방법이다.
또 다른 관점은 모두가 외면하고 있는 개개인의 심연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 것이다. 그것을 공유함으로써만 가능한 친밀감과 공감의 영역, 그로써 생겨나는 사회적 관계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면 이 소설은 더 이상 외계적 존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독자의 일상이기도 한 이야기가 된다.
물론 그런 레이어들을 모두 분리한 다음 남겨진 '러브크래프트'적인 관점에서 읽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조금 더 들어가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그 부분은 개개인의 취향에 맡기려 한다.
같은 글을 읽더라도 사람마다, 또 같은 사람이더라도 시기에 따라 제각기 다른 것들을 느끼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와닿는 문장, 일어나는 단상들을 남겨두는 것은 내게는 일종의 기념사진을 남겨두는 행위와도 같다. 그때의 나는, 이 책을 이렇게 읽고 이런 것들을 생각했었구나- 그리고 지금의 나는- 같은.
해서, 발췌문들에 흥미가 생기셨다면 해당 도서의 전문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아마 나와는 다른 문장, 다른 느낌을 얻게 되실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책이 '누군가의' 책들이 되어가길 꿈꾼다. 그리고 언젠가 어디선가 다시 하나로 만날 수 있기를.
-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는데 그쪽이 바로 눈을 돌렸다. 역 앞 광장으로 나갔다. 새벽에 대합실의 탁한 공기를 가르고 들어오는 샛바람에 비하면 아침의 바깥 공기는 오히려 온화하게 느껴졌다.
- 영준은 그 말을 하고서 자기 목소리에 질투와 원망이 실린 것을 눈치챘다. 강 선생도 그것을 느꼈는지 눈가가 조금 굳어졌다. 영준은 아까 받은 담배 두 개비 중 하나를 담뱃갑에서 조심스럽게 꺼냈다. 담배를 내밀며 이번에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려 말했다.
- "이 교회가 좋은 점이 뭐냐믄, 약산동 급식소가 가까워. 다리만 건너면 바로 나오거든."
- 영준은 교회 십자가 밑에 달린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시간은 열한 시 반이다. 다리 건너 약산동 급식소라면, 평소 가는 곳이 아니지만 위치는 알고 있다. 여기서 삼십 분 정도 걸으면 된다.
- 아까 먹은 단팥빵과 커피 기운이 남고 해가 높이 떠서, 급식소로 가는 길은 역에서 나와 교회로 갈 때보다 포근했다.
- 영준은 이 동네가 익숙지 않다. 역에서 지내기 전에는 이런저런 일로 오간 적이 있지만 사회인으로서 돌아다닐 때와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
- 일요일마다 빠짐없이 그랬듯 이 담배는 동산역 이웃들에게 나누어질 것이다. 영준은 강 선생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이야 들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 득이 되는 일이 아니다. 이웃들 사이에 은혜를 베풀고 목에 힘을 줄 수도 있겠지만 강 선생의 행동을 보면 그조차 아니다.
- "어려울 것 하나도 없어. 김 씨도 나처럼 할 수 있어. 내가 가르쳐줄 테니까."
허벅지 속 근육 한 줄기가 경련했다.
- 돈을 버는 법을, 아니 그보다 더 대단할지도 모를 무언가를 한밤중에 인적 없는 공원에서 가르쳐주겠다는 말에 대포 통장에서 장기 매매까지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다. 영준은 그러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하는 자신이 너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 어쩌면 모두 이유가 같은지도 모른다. 그저 반년에 걸친 역 생활에서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고 싶을 뿐일지도 모른다.
- 윤곽이 시야 가장자리로 스며드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술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시야의 경계에서 검은 윤곽이 얼굴을 들이댔다. 색깔 아닌 색깔의 눈이 살을 벗기는 듯한 시선으로 영준의 얼굴을 훑었다. 입이 열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그 안에 있었다.
- 영준은 어느새 별들 사이에 있었다. 우주는 어둡되 검지 않았다. 이름 없는 색깔들이 사방을 밝히고 있다. 처음 들어보는 기묘한 불협화음이 저 멀리에서 우주의 진공을 타고 영준의 뇌를 어루만졌다. 어둠과 색깔의 바다에 영준은 혼자 떠 있었다. 아니, 혼자가 아니다. 이제는 이름을 하나하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저 색깔들이야말로 영준의 친구요, 가족이었다.
- 운동을 한 지 너무 오래되었다. 딱히 병은 없지만 역에서 생활을 하니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숨이 가빠 도저히 뛸 수 없을 때까지 뛰었다.
-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강 선생이 공원 길가에서 당했을 일이 마치 영화 장면처럼 머릿속에 되풀이되었다. 반복될 때마다 마음속 영상은 조금씩 더 자세해졌다.
- "23바 0827."
흰 바탕에 파란 글씨로 쓰인 동산역 명판이 불 꺼진 빌딩 사이로 보이기 시작할 무렵, 영준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구체적인 상상이다.
- 그 순간 영준은 신기한 경험을 했다. 장 씨의 입이 움직이고 소리가 났지만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장 씨의 눈과 입술, 혀의 움직임이 마치 돋보기로 개미를 보듯 또렷이 보였다. 장 씨의 입에서 튀는 침 한 방울 한 방울이 눈에 잡혔다. 머리 깊은 곳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누군가가 빛을 비췄다. 영준은 알았다. 장 씨는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다. 오만 원이 아쉬워서, 사람의 생사가 걸렸을지도 모르는 일에 관해 속이고 있는 것이다. 매주 담배와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강 선생에 관한 일인데도. 뭐라 말할 수 없는 불편함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 가는 길 내내 짜증과 경멸이 섞인 시선들이 내리 꽂혔다. 출근하는 시민들 하나하나는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가 인도 옆을 지나가는 것을 슬쩍 보고 지나칠 뿐이다. 그러나 영준의 입장에서는 수백의 눈과 입을 가진 덩어리가 거대한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자기를 줄곧 쏘아보는 셈이다.
- 혼란스러웠다. 동산역에 돌아갔을 때 장 선생과 마주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길에서 생활하면 정신이 병들기 쉽다는 것은 상식이고, 영준은 그 실례를 몇 사람이나 알고 있다. 어쩌면 자기도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 목사의 나지막하고 끊임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영준은 다시 별이 가득한 하늘을 떠올렸다. 아무도 없지만 모든 것이 있는 색깔 아닌 색깔을. 기도는 어느새 사람의 말이 아닌, 어디서 들려오는지도 모를 음악으로 느껴지고 있다. 포근하다. 이제 춥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다...
- 역에서 몇 달 동안 지내며, 영준은 노숙 생활에서 가장 괴로운 것이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집도 없다. 직장도 없다. 몸은 있는데 그것을 계속 둘 곳이 없다. 역사 2층 자리도 일어나면 이미 내 것이 아니다. 지금의 처지가 바로 그렇다는 것을 영준은 깨달았다. 몸도 그렇지만 마음 또한 자리를 잡지 않으면 안 된다.
- "근데 그거 어디서 본 거예요?"
"네?"
"어느 자리에서 보셨냐고."
영준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방금 진술한 대로면 말이에요. 피해자 바로 옆에 있었다는 얘기거든?"
"네?"
- "잘 생각해 봐요."
영준은 그렇게 되풀이하는 형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형사의 눈은 길을 걸을 때마다 꽂히는 행인들의 시선과 같다. 영준이 빨리 없어져줬으면, 나랑 관계없는 곳으로 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눈빛이다.
- 그때 거울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 형사에게는 안 보이는 것인지? 영준은 머릿속에서 얼굴로 밀어 닥쳐오는 압력과 열을 느꼈다. 거울 속 영준의 눈과 입에서 검은 것이 흘러나왔다. 아니, 검은색이 아니다. 온갖 색깔이 섞여 밤하늘처럼 빛나는 어둠이다. 영준은 꿈속에서 분명 알 것만 같았던 그 색깔들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순간 애썼지만, 도무지 말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곧 알았다. 빛나는 어둠이 방안에 퍼져 나갔다. 담배 연기가 퍼지는 것과도 안개가 깔리는 것과도 다른, 깊은 밤하늘의 조각이 접견실의 허공을 잠식하는 모습이었다.
- 영준은 자기가 무엇을 했길래 경찰이 번호판을 조회해 주었는지 이모저모로 생각을 해보았지만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저 경찰관과의 사이에 친근감과 온기만을 느꼈을 뿐이다. 그때는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지금은 그것이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웠다.
- 영준은 터미널을 돌았다. 몇 달 동안 자기를 괴롭혀온, 찌르는 듯한 시선이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어젯밤 목욕을 했을 때보다 깨끗해진 기분이 들었다.
- 영준은 상인이 "어서 오세요"하고 던지듯 건네는 인사말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 "어이구, 엄청 기르셨네.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그 말을 듣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확 올라왔다. 눈물이 차올랐다. 어깨가 떨렸다. 이발사가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영준은 울먹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냥... 깔끔하게 잘라주세요."
- 카페 안도, 두 잔 째 커피도 따뜻했다. 커피를 마셨는데도 기분 좋은 졸음이 찾아왔다. 눈이 감겼다가 떠지기를 반복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영준의 눈앞에 별이 가득한 하늘이 펼쳐졌다. 무언가가 노래 같은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 가슴이 아직도 터질 것 같았다. 범인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일말의 성취감은 공포와 불안의 검은 물 위에 떨어진 깃털처럼 가라앉아갔다.
- "걱정하지 마.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둘이 구별이 안 돼. 나머지는 천천히 가르쳐줄게. 한꺼번에 너무 많이 알아도 안 좋아요."
- "저건 상태가 어때요?"
목사가 혀를 차고 대답했다.
"공감 능력이 생쥐 수준이라 아예 연결이 안 돼. 벽에 부딪히는 것 같더라고. 깨부숴야 돼."
-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수연은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영준은 책을 읽는 줄 알았겠지만, 사실 둘은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 형제자매들은 꽉 막힌 짐승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그저 살아갈 뿐이다. 함께 살아줄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을 찾으며...
- "김 씨, 그나저나 내가 이불 못 지켜줘서 어떡하지. 당장 오늘 뭐 덮고 잘 거야?"
영준은 대답했다.
"저는 이제 추울 일이 없어요."
- "러브크래프트는 20세기 사람이었지만 18세기 영국 보수당 같은 수구적 정치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소설에서도 그랬지만 특히 서한들을 보면 러브크래프트가 당대에 만연한 인종차별을 그저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한 술을 더 떴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오늘날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를 차용하고 확장하는 작가들은 이런 요소들을 잘라내거나, 비판하거나, 전복합니다. 크툴루 신화의 팬 중에는 타자로 취급받는 것이 어떤지 잘 아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러브크래프트 소설을 읽을 때 책벌레 백인 남자 주인공들보다는 괴물이나 기인들에게 더 이입하곤 합니다."
- 로빈 D. 로스 외 <크툴루 컨피덴셜>
- H. P. 러브크래프트는 새로운 호러의 지평을 개척한 작가이지만, 온갖 차별과 혐오의 악취를 풍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차별과 혐오를 걸러내서 좋은 점을 유지하고 발전시킨 것은 지난 백 년 동안 호러 작가들과 독자들이 이뤄낸 업적이다. 러브크래프트 호러의 역사는 부정과 수정이 계승만큼이나 중요한 역사이고, 여기에는 수많은 작가와 독자들이 기여했다.
- <별들의 노래>에서 러브크래프트와의 차별점으로서 계속 염두에 둔 점은 사회적 타자의 인간성이다. 그 정의상, 타자는 다른 타자와의 사이에서만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타자는 사람이 될 기회를 계속 노리고 있고, 그것이 찾아왔을 때 놓치지 않으려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노숙자 김영준이 원하는 것도, 외계에서 찾아온 빛과 소리들이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것, 사람이 될 기회다.
- 어느 공원에서 노숙인들과 며칠 지냈던 경험이 도움이 되었고, <한겨레 21>의 "나는 노숙인을 보았다"(김준호)를 비롯한 기사들이 많은 참고가 되었다. 러브크래프트 작품 중에서는 <인스머스의 그림자>와 <시간의 그림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러브크래프트의 여러 후계 작가 중 하나인 램지 캠벨의 <샤가이에서 온 곤충들 Insect from Shaggai>도 아이디어를 주었다.
- 영준은 강 선생을 잘 알고 있다. 동산역 이웃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좋은 사람이다. 새로 오는 사람이 텃세에 시달리지 않게 챙겨주고 상담역을 자처하기도 한다. 수완이 좋아서 어딘지 모르지만 일단 나갔다 오면 다른 사람들 몫까지 챙겨 오곤 한다. 동산역에서 일요일은 강 선생이 담배를 주는 날이다. 영준이 지난여름 동산역에 처음 왔을 때 이것저것 가르쳐 준 것도 강 선생이다.
- 그러나 그것은 박애 정신 내지 넓은 오지랖이었다. 강 선생이 일요일 아침에 하필 자기를 콕 찍어서 교회에 꼬지를 나가자고 한 것은 의외였다. 영준이 물어볼까 말까 하는 차에 강 선생이 다시 말을 걸었다.
- 청년은 벤치로 다가와 고개를 건성으로 한 번 꾸벅 숙이더니 봉지와 보온병을 영준과 강 선생 사이에 내려놓았다.
"목사님이 갖다 드리래요."
그러고는 곧바로 뒤돌아 다시 교회 안으로 뛰어갔다. 현관문이 쿵, 하고 무겁게 닫혔다.
- 청년이 둘 사이에 놓고 간 봉지 안에는 종이컵과 빵이 두 개씩 들어 있다. 보온병을 여니 믹스커피 냄새가 향긋하다. 영준은 컵에 커피를 따라 강 선생에게 건네고 자기 몫의 빵을 꺼내 한 입 깨물었다. 커피보다 달콤한 팥소가 입안을 칠했다.
"고향이 어디신데요? 인심 좋은 데 사셨나 보네."
강 선생이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좀 멀어."
짧은 말에 우수가 섞여 있다. 영준은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커피를 더 따랐다. 이 정도로 잊을 수 있는 추위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영준은 바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회 마당을 건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고급스러운 회색 정장을 입은 젊은 여자가 혼자 정문을 향해 가는 것을 보고 다가가려는데 강 선생이 팔을 잡았다.
"지금 저기 저 사람 따라가는 거지?"
"제일 적당해 보이잖아요?"
강 선생이 혀를 찼다.
"그래서야 겁줘서 뺏는 거나 매한가지지. 꼬지 안 한다고 굶는 것도 아닌데..."
영준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강 선생이 계속해서 타일렀다.
"나랑 있으면 그럴 필요 없어. 김 씨는 저기 저 사람들한테 담배나 좀 얻어와."
그렇게 따져가면서 빌릴 거면 당초에 왜 구걸에 가까운 짓을 한단 말인가. 담배나 술 따위 아까 받은 돈으로 사면 되지 않느냐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강 선생은 벌써 정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 "또 아는 분들이에요?"
강 선생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뭔가 아주 멀리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 내내 얼굴에 가득하던 웃음은 사라져, 아주 진지하고 조금은 슬픈 표정이 되어 있었다. 영준은 재차 물었다. 강 선생이 잠에서 깨기라도 하듯 머리를 떨고 대답했다.
"어, 아니. 첨 보는 사람들."
- 장 씨가 말을 마치고 영준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거짓말이라고 따져봤자 의미가 없다. 영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까 봉투에서 꺼내 주머니에 넣어둔 오만 원 권을 꺼내 장 씨에게 내밀었다. 장 씨가 어리둥절해하며 쳐다봤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네?"
장 씨가 돈에 손을 뻗쳐왔다. 영준은 재빨리 돈을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얘기해주지 말아요. 안 들어도 괜찮으니까."
"뭐야,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장 씨가 당장 걷어차기라도 할 기세로 자리에서 확 일어섰다. 영준은 앉은 채로 무릎을 감싸 안아 배를 가리고, 고개를 들어 장 씨와 눈을 마주쳤다. 장 씨의 얼굴에 잠시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장 씨가 옆 바닥에 가래침을 소리가 나도록 뱉고 말했다.
"듣기 싫으면 그만인데, 모처럼 생각해서 이 밤중에 2층까지 올라왔구먼. 사람 그렇게 놀리는 거 아니야."
영준은 그 목소리에 실린 두려움을 느꼈다. 왜 장 씨가 거짓말을 할 거라고 확신했던 걸까? 장 씨는 왜 저렇게 겁을 먹은 걸까? 장 씨가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보며 영준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영준은 퍼뜩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홱 들어 목사를 쳐다보았다. 목사의 얼굴에는 아까의 온화한 눈과 인자한 미소가 더 이상 없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색깔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시커먼 구덩이 같은 입안에서는 별들이 빛나고 있다. 저것은 보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영준의 뇌 깊은 곳의 무언가가 비명을 질렀다.
- 이렇게 정신이 나가고 마는 것일까. 현실과 망상의 경계가 없어져, 동산역 이웃들에게도 동정의 눈길을 받게 되는 것일까. 영준은 어라 남지도 않은 힘을 쥐어짜 확 일어서며 말했다.
"공원에 다시 가야 돼."
- 그 그리움에 영준의 마음이 달구어졌다. 저 멀리 밤하늘에만 있는 줄 알았던 색깔 아닌 색깔, 빛 아닌 빛이 마음속에서 세게 불타올랐다. 머리가 뜨거워졌다. 영준은 더 간절히 마음속 빛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몸이 자유로워졌다. 영준은 하늘로 솟구쳤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서로 수십 수백 광년씩 떨어진 외로운 별들만이 무수히 박힌 밤하늘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색들, 평온한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그 그리운 하늘로...
- 강 선생의 이마에는 탄 듯한 자국이 나서 김인지 연기인지를 뿜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였던 그 몸의 죽음을 보고, 영준은 지금까지 있는 줄도 몰랐던 깊이의 슬픔을 느꼈다.
-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부터가 두려웠다. 눈 뒤에서 흐느적거리다 스며 나오는 색깔들이 두려웠다. 머리의 열이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정신이 멀쩡한 것이 두려웠다. 아니, 정신이 멀쩡하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 경찰서에서 형사를 상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때 느껴진 친밀감이 없었다. 오랫동안 아는 사이였던 것 같은 그 기분이 들지 않았다. 순간 벽을 들이받은 것 같은 반발감이 느껴졌다.
- 그때 영준은 이름을 들었다. 사람의 말이 아닌, 그 아름다운 불협화음이다. 그 한마디 이름과 함께 주변이 어두워졌다. 가로등도, 헤드라이트도, 거리의 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이던 강물도, 모두 사라졌다. 대신 사방이 별로 가득 찼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지독한 두통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 아름다운 불협화음이 흐르는 이 어둠 속에서는 전동섭의 공포 어린 신음이 오히려 조화롭지 못하게 들렸다.
- 영준의 머릿속에는 이제 정체 모를 생명체가 깃들어 있었다. 그 어둠 아닌 어둠과 소리 아닌 소리에 느끼는 간절한 그리움도, 영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생명체의 것이었다. 이 지구에서 살아가기 위해 인간의 몸을 필요로 하는...
- 영준은 많은 것을 배웠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이상하고 무서운 이야기들이지만, 머릿속에 자리 잡은 형제 덕분인지 모든 것이 담담하게 받아들여졌다. 영준은 성산시, 한국, 지구, 우주에 관해 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빠른 속도로 배워 나갔다.
- 토요일 밤 꿈결에 보았던 빛나는 눈의 형체도, 피씨방에서 잠들었을 때 본 윤곽도, 처음에는 강 선생이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수연과 이야기를 하고서야 영준은 그것이 사실은 자기였음을 알았다. 머릿속의 형제였다고 해야 할까? 수연이 폐객차에서 말한 대로 이제는 그 둘을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여하튼 빛 아닌 빛, 아름다운 불협화음은 먼 밤하늘이 아니라 영준의 안에 있었던 것이다.
- 노숙 생활을 하면서 제일 괴로운 것은 자리가 없다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영준은 이제 혼자 있을 때도 둘이다. 목사도 수연도 다른 형제자매들도 자기와 이어져 있다. 끝없이 따뜻한 온기로 가득한 깊은 어둠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색깔들로.
- "어이구 고맙게 뭐 이런 걸 다... 옷도 새로 사 입고 머리도 깨끗하게 깎았다 했더니, 어디 취직이라도 한 거야?"
"아뇨, 가족을 만나서..."
최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는 못 살아도 가끔 이렇게 도와줄 식구가 있으면 좋지... 여기 사람들한테는 그것도 드물잖어, 알다시피."
영준은 웃어 보였다. 순간 최 선생의 얼굴이 굳었다. 손에 받아 든 담배 세 갑이 바닥에 떨어졌다.
"왜 그러세요?"
최 선생은 입을 벌렸지만 말을 하지 못하고 영준의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겁을 잔뜩 먹은 표정이다. 흘러나오는 어둠이 보인 모양이었다. 머릿속 형제는 완전히 깨어난 후로 강해졌는데 영준은 그것을 감추는 데 아직 익숙지 않았다.
- 그렇다고는 해도 민감한 사람 같으니! 영준은 입을 살짝 벌렸다. 색깔을 말할 수 없는 어두운 빛이 마치 담배 연기처럼 최 선생의 귀로, 입으로, 코로, 눈과 눈꺼풀의 틈새로 스며 들어갔다. 최 선생은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주름진 눈시울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처럼 일그러졌던 표정이 오래지 않아 편안해졌다.
- 영준은 다시 웃어 보였다. 최 선생이 따라 웃더니 땅에 떨어진 담배를 주워 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말했다.
"거기 남은 담배는 이웃들한테 돌릴 거지? 강 선생처럼."
"네."
"무리하지 말어. 돈 없는 거 서로 다 아는데."
영준은 "네, 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 선생은 아직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웃으며 영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손에 든 담뱃갑의 비닐 포장을 풀며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 이마가 따뜻해졌다. 영준은 박 씨가 형제자매와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해하며, 박 씨의 머리를 향해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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