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겨울 외] 싫어하는 음식 : 아니요, 그건 빼주세요 - 띵 시리즈의 유쾌한 반란 만우절 특집판

일루젼 2023. 5. 4.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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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겨울, 고수리, 김민철, 신지민, 윤이나, 한은형, 안서영, 하현, 서효인, 김미정,

이수희, 정의석, 임진아, 김현민, 호원숙, 정연주, 박찬일, 김자혜, 이재호, 김민지, 허윤선, 봉달호
출판 : 세미콜론
출간 : 2022.04.01


       

직전 리뷰에서 저자를 착각해서 읽게 되었다고 했었는데, 거기에는 이 책도 약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때마침 함께 읽게 된 것이 <아니요, 그건 빼주세요>이었기에 순간 동명이인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라는 변명.

 

기존의 띵 시리즈에 참여했던 작가들이 모였다. 이번에는 '싫어하는 음식'이라는, 다소 보기 드문 주제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그 사연과 음식들이 무척 다양하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음식일지라도 맛깔나게 풀어나가는 저자의 '싫은 이유'를 따라가다 보면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 지는 않는다. 여전히 '그게 얼마나 맛있는데!'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상대방이 싫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혹 살다가 함께 그 음식을 먹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내 몫이 두 배가 될 테니 기쁘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정말, '싫어하는 것이 같은 순간'에는 좋아하는 것이 같을 때와는 다른 강렬함이 있다. "야, 너두?!!?" 

특히 그 싫어하는 것이 대부분은 '호'라고 느끼는 것일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내 경우에는 대게를 먹고 크게 탈이 났던 적이 있어서 약 3-4년 간 냄새도 맡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반전은, 냄새를 못 견디겠는데도 맛있었던 기억 때문에 계속 먹고 싶어 했다는 것. 그러던 어느 날 다시 탈이 나더라도 오늘은 꼭 대게를 먹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도전했더니 아무 일도 없이 맛나게 먹을 수 있었다. 음. 그저 그날의 대게가 상했던 거였나 보군. 이후로 묵호나 동해에 가서 선주가 바로 판매하는 대게를 사서 찜비를 내고 실컷 먹기도 하고, 고등어나 성대 회를 즐기기도 했다는 이야기. 

 

지금은 모든 식재료에는 나름의 '맛'이 존재하므로, 취향이 좀 아니더라도 그 '맛'을 감각하는데 집중해 보면 웬만한 건 즐겁게 먹을 수 있다 쪽이다. 특히 직접 요리해서 먹고 치우는 것을 무척 귀찮아하므로 남이 해준 음식이라면 일단 감사하며 먹는 편.

 

하지만 선택권이 있다면 -때때로 사회생활은 선택권을 박탈하기도 한다- 먹지 않는 음식이 '단 것'이다.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대부분은 다이어트 중이냐고 되묻는데, 좋아하는데 참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맛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고 말하면 당황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향미만 충분하다면 단맛 자체는 훨씬 줄여 놓아도 맛있게 느끼는 편. 

 

수분감 있는 과일을 좋아하는 편이라 물복숭아, 수박 등을 좋아하는데 이번 여름에는 폭염+폭우가 예상된다고 해 조금 슬퍼하고 있다. 이상 기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제로 웨이스트에 익숙해지려 노력하고, 해당 산업에 투자하거나 정책을 지지하는 형태로 관심을 표현하려 노력한다. 그래야 맛있는 물복숭아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산다는 건, 그리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건, 어쩌면 이런 일들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고, 그저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하는 것. 

 


   

- 저는 비빔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질척한 밥에 진짜 맛없게 비벼진 비빔밥을 먹은 후로 어쩐지 비빔밥과 친해질 수가 없었어요. 싫어하는 음식의 역사는 이토록 정말 사소한 경험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정말 맛있는 비빔밥을 맛보면 좋아하게 될 거라고요? 그냥 다른 거 먹을게요. 세상에 음식은 많고, 하나 정도는 마음껏 싫어해도 되지 않을까요? 싫어하는 음식에 대한 조금은 비뚤어진 신념, 거기엔 나름의 사연과 철학이 숨겨져 있습니다. 

 

- 여기 띵 시리즈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을 이야기할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네요. 뭔가 비밀 이야기를 몰래 듣는 기분마저 들고요. 호기심 뒤에 취향이, 취향 뒤에 가치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 좋아하는 것에 열광하는 만큼이나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아니요, 그건 빼주세요." 당당하게 말하고 싶은 모든 분들께 이 책을 건넵니다. 

 

- Marketer 홍수현

 

- 참으로 죄송한 고백을 이 자리에서 해야겠다. 고백의 대상은 지금까지 각종 강연과 행사 진행과 GV 자리에서 디저트류를 선물로 주거나 생일날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디저트류 기프티콘을 보낸 모든 분들이다. 그동안 참 많이도 받았는데...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선물로 받은 디저트류는 모두 충실히 맛봤다. 소중한 선물을 받았는데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보는 것이 도리인 법. 온갖 케이크와 초콜릿과 타르트와 구움 과자와 쿠키와 빵모두 빼놓지 않고 맛봤다. 문제는 여기서 내가 사용하고 있는 동사가 '먹었다'가 아니라 '맛봤다'라는 것이다.  

 

- 죄송하게도, 사실 나는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선물들은 모두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나눠 먹었다. 혼자서 다 먹을 수 없는 양이었을뿐더러, 단것을 먹을 수 있는 용량이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적은 나로서는 소화가 불가능한 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덕분에 나를 포함한 모두가 행복해했으니까, 선물을 준 사람들의 마음을 헛되이 하지는 않았던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 예외적으로 정말 굶주렸는데 당장 뭔가를 먹어야 하거나, 여행을 가서 이것저것 먹어보거나, 일행과 같이 있거나, 시험기간을 나거나, 아주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가끔 디저트류를 먹기도 했는데, 내가 핫초코를 홀짝홀짝 마시는 것을 보고 "무슨 일 있어?"라고 물어본 친구가 있다는 전설 같은 실화가 있다.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다.) 

 

- 음식 취향도 마찬가지여서 뚝배기불고기, 짜장면, 냉모밀 같은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짜장면이 달아서 싫다고 하면 놀란다. 짜장면이 달아? 하지만 짜장면은 달다. 냉모밀도 달고, 불고기도 달다.

 

- 디저트가 단 것은 이해가 되지만 -안 먹으면 되니까- 끼니가 단 것은 용납하기가 어렵다. 끼니가 달면 불쾌하니까. 

 

- 불쾌하다고? 단맛이 강조된 음식을 입에 넣을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은 불쾌감이다. 식욕이 뚝 떨어진다. 이걸로 배를 채우다니, 칼로리가 아까워. 이것보다 훨씬 맛있는 것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데. 나는 좀 짜든지 시든지 감칠맛이 나든지 맵든지 해야 맛있는 맛으로 인식하는 뇌를 가진 모양이다. 사람들이 단 걸 좋아하기도 하고 보기에도 워낙 예쁘고 멋진 디저트가 많으니까 여러 번 시도해 봤는데, 전부 한입 먹고 투항 깃발을 휘날려야 했다. 과일만 골라 먹거나 상큼한 부분을 골라 먹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얄궂게도 과일은 비교적 잘 먹는다.) 얼마 전에 친구와 함께 디저트를 먹다가 "이건 달지 않아서 괜찮다."라고 하자 친구는 세상에서 제일 어이없는 사람을 보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어떻게 '달지 않다'와 '괜찮다'가 인과관계로 연결이 되냐? 야, 나는 안 달아야 먹을 수 있어. 그 친구와는 어릴 때도 비슷한 대화를 자주 나누곤 했다. 어으, 그 달달한 프라푸치노를 어떻게 먹냐? 너는 그 쓴 아메리카노를 왜 돈 주고 마시냐? 

 

- 사실 단것을 싫어하는 건 좀 이상한 일일 수도 있다. 음식이 달다는 건 먹었을 때 뇌의 쾌락 중추를 건드린다는 뜻이고, 웬만하면 싫어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탄수화물을 필수적으로 먹어야 하는 인간의 진화적인 해결책이랄까.  

 

- 그래서 심지어는 단것에 대한 선호도와 사회성의 관계를 다룬 논문이 외국에 있다. 단것을 선호할수록 사회적 관계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나 어쩐다나. 과연 과정이 엄밀한 연구인지, 논문의 타당성 검토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뜨끔해서 이러는 건 아니다. (통념과 다르게 꼭 날씬하거나 마른 건 아닌 것 같다) 

 

- 인터넷에는 한 번씩 "단 거 싫어하시는 분들 계세요?"라는 글이 올라오고, 밑에는 단맛을 가차 없이 규탄하는 댓글이 줄줄이 올라온다. 글을 올린 사람은 사람들이 실제로 단맛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놀랍게 여기거나 -단 걸 취향으로 싫어할 수가 있어요? 건강상의 문제로 조절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낀다.   

 

- 가만히 보면 댓글을 단 사람들도 세 가지 타입으로 나뉘는데, 맵고 짠 것을 선호하는 얼큰파와 모든 자극적인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싱겁파, 그리고 다 그럭저럭 잘 먹는데 단맛만 싫어하는 소외파다. 나는? 얼큰파와 소외파 사이에 있는 것 같다. 꼭 맵고 짠 것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맵고 짜면 일단 좋아할 확률이 높다. 하얀 국물보다는 빨간 국물, 달달한 간보다는 차라리 맵고 달달한 간. 평소에 자주 먹는 건 토마토나 버섯 같이 감칠맛이 좋은 재료를 이용한 음식. 딸기나 블루베리 같은 과일은 즐겨 먹지만 딸기잼과 블루베리잼은 좋아하지 않는, 고소한 견과류나 곡물의 맛을 충분히 달고 맛있다고 느끼는 자연주의 입맛. 

 

- 그러니까 단 걸 싫어하는 건 무슨 사회성에 문제가 있다거나 진화를 거부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단맛을 민감하게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쌀로 만든 떡도 충분히 달고, 갓 지은 밥도 충분히 달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정도면 딱 좋을 정도로 달다. 과일의 단맛은 향미가 풍부해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시지 않고 달기만 한 체리는 도저히 못 먹겠다. 단맛만 무자비하게 강조된 샤인머스켓도 별로 안 좋아한다.) 자연이 주는 단맛이면 충분한데, 설탕과 버터와 연유와 시럽을 들이부어놓으니 못 먹고 나가 떨어지는 것이다. 진화론적으로 말한다면 오히려 인간은 그런 인위적인 단맛을 즐기도록 진화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쾌락 중추의 반발이랄까. 음... 그러니까 탄수화물이 들어오는 건 좋은데, 이 정도까지 바란 건 아냐. 

 

- 김겨울

 

- 팀장이 되고서는 팀장도 없이 송년회에 참석해야 하는 팀원들을 보며, 위험한 정글 속으로 자식들을 등 떠미는 매정한 어미의 기분이 되어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 시절도 있었다. 자기는 가지도 않는 송년회에 팀원들을 보내다니. 하지만 그건 오로지 나만의 착각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팀원들은 놀랍게도, 송년회를 기다리고 있었고, 어느 정도 들떠 있었고, 드레스 코드 같은 걸 맞추며 깔깔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엔 근사한 상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약간의 기대도 하면서 말이다. (17년째 단 한 번도 선물 추첨에 당첨된 적이 없는 나는 그런 기대 같은 건 이미 버린 지 오래다.) 송년회를 좋아할 수 있다니. 그토록 사람들이 많은 곳을 즐길 수 있다니. 나는 마치 다른 언어를 쓰는 외계 생명체를 바라보는 기분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물론 그들은 나를 기이하게 자란 음지 식물처럼 바라보았겠지만.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길은 없었다. 적어도 나는 찾지 못했다. 가장 깔끔한 길은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회식 기피를 나의 한계로 인식하지 않고, 나의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 고난 극복 신화? 그런 건 얼마든지 당신에게 양보하겠다. 나는 나를 극복하지도, 친밀함에 편입되기 위해 무리하지도 않기로 했다. 일 앞에서 무리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너무 피곤하니까. 

 

- 신지민

 

- "심지어 매콤하다니까. 한 번만 먹어봐."
그 한 번만에 속아 포크를 집어 들고 페투치니 한 가락을 비장하게 돌돌 말아 입에 넣고 나면, 빠르게 배신감과 후회가 뒤따라왔다. 맵고 짜고 자극적인 모든 맛을 덮는 찐득한 하얀 맛을 떨쳐버리려 입을 헹군 다음, 이렇게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배신감이었다. 
"솔직히 진짜, 빨간 소스 파스타 하나 더 시켜도 돼?"

 

- 그래도 투움바 파스타 이후에는 만인이 사랑해서 내게 권하는 하얀 음식은 특별히 없었던 것 같다. 어른은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내가 먹는 것이 내가 된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건강상 필요에 의해 샐러드를 먹을 때도 오리엔탈 소스를 포기하지 못하지만, 흰 우유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던 두유를 의무처럼 먹기도 한다. 

 

- 윤이나

 

- 아빠가 언제나 그렇듯이 그날도 너무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에. 

- H씨는 늘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졸업을 한 딸이 원하는 게 있거나 말거나, 남(가족 포함)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내가 원하는 걸 먹는다. 내가 최고 존엄이니까. 여기서 '존엄'이란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한데, 돈을 버는 가장이라는 의미 하나, '먹는 거라면 내가 최고'라는 자부심 하나, 이렇게 두 가지다. 먹는 거라면 내가 최고라는 그의 자부심은 타인에 의해 인정된 바 없고, 그냥, 오로지, 절대적으로 그의 주장이다. 그래서 H씨의 이런 독단적인 외식 메뉴 선택과 식당 선정은 이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내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최고의 것을 먹이려는데 이 아니 좋을 수 있겠는가?" 정도로. 이게 바로 나의 아빠라는 분의 애티튜드다. 


- 씁쓸한 것은, H씨가 이렇게 독단적으로 선정한 식당들이 꽤나 괜찮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에 낸 적은 없다. 스스로의 긍지만으로도 차고 넘치므로 나까지 인정해 줄 필요가 없어 보였다.

 

- 그저 먹었다. 나는 맛이 없는 건 못 먹는다. 입맛에 맞지 않거나 맛이 없는 건 정말 한입도 못 먹겠다. 그래서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고 "아, 배불러."라고 말하는 편인데, 그가 고른 음식들에 대해서는 그런 적이 없다. 애석한 일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 그 이후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듣고 싶지 않은 건 듣지 않는다. 다년간의 자가 수련 끝에 자유자재로 음소거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내가 원하는 세계로 이동할 수 있다. 그래서 가상공간에 자신의 분신을 데려다 놓는다는 메타버스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건 내가 하던 건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고독하게 충만하다.' 
   
- '모둠-버섯-전골'이라는 충만한 연대에 위해를 가하는 '버섯 모독'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겹도 없고, 결도 그다지, 갓이랄 것도 없고, 줄기의 식감도 별로인, 버섯의 위엄이 전혀 없는 게 팽이 아닌가. 하... 나는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 이런 의견을 장황하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는 말이다. 앞에서 짐작하셨겠지만, 내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 어떤 지지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친하지 않을뿐더러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공감을 해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음식이든 무엇이든 '호'와 '불호'에 대해 말해본 적이 없다. 좋다면 그냥 그걸 계속했고, 좋지 않으면 슬며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뿐이다.

 

- 시간이 흐르고 흘러 누군가에게 '호'와 '불호'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단순한 행위가 나를 이렇게 기쁘게 하는지 몰랐다. 그저 좋다고, 그저 싫다고 말할 뿐인데.

 

-좋아하는 건 좋아한다고 말하기. 싫어하는 건 싫어한다고 말하기. 감정이 격해졌을 때는 "너무 좋아."라거나 "너무 싫어."라고 말하기. 이게 이렇게 좋을 줄이야. 어떤 대상에 대해 "너무 좋아."라거나 "너무 싫어."라고 말하는 나는, 내게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내가 그런 '호'와 '불호'의 감정을 내보여도 될 믿음직한 사람이고, 마음을 터놓아도 되는 친밀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니까. '기꺼이' 말이다. "너무 좋아."라거나 "너무 싫어."라고 말할 때의 내가 그런 것처럼. 그래서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 약간 고개를 흔들며 얼굴을 찡그리고 발음하는 '너어어어무'를 좋아한다. 

 

- 내내 혼자 찌푸리다가 "팽이버섯, 너무 싫어."라고 말할 수 있어 좋았다. 

 

- 나는 H씨처럼 내가 절대미각을 갖췄다거나 맛에 관한 한 최고 존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너, 나는 나. 너의 상식은 너의 상식, 나의 상식은 나의 상식. 우리는 각각의 세계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가계(家戒)에서 태어나, 다른 모어(母語)를 배웠고, 다른 음식을 먹었고, 다른 책을 읽었다. 그런데 같을 리가? 그래서 나의 현실은 너의 현실과 다르고, 우리는 서로의 현실을 살 수 없다. 나는 우리 사이의 이 거리, 그 아득함이 좋다. 우리는 각자의 세계, 각자의 메타버스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팽이버섯이 싫다고 하는 순간, 잠시 차원이 왜곡되며 너와 나의 세계가 합쳐진다. 아주 잠깐이지만 말이다. 

 

-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 먹는 어복쟁반을 좋아하는데, 거기 나오는 팽이버섯 역시 싫었다. 한 점 한점 귀하게 건져 먹는 재료들이 정성스럽게 쌓인 그곳에 팽이버섯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복쟁반의 맑고 깊은 청아한 육수를 팽이버섯이 물들일까, 또 한 방울도 양보할 수 없는 이 육수를 팽이버섯이 흡수해 버릴까 재빨리 팽이버섯을 건져냈다. 식탁에 팽이버섯을 쌓고 싶지 않아서 팽이버섯을 빼고 달라했건만 우리의 말은 존중되지 않았고, 그러니 자력으로 제거할 수밖에. 

 

- 가장 난감한 것은 팽이버섯이 함께 끓여져 나오는 경우다. 게다가 맑은 국물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약맛 같기도 한 팽이버섯의 맛이 맑은 국물을 뒤덮으면... 먹을 수 없다. 그래서 갈비탕을 시킬 때는 팽이버섯이 들어가는지 묻고, 들어간다면 빼달라고 요청한다. 이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팽이버섯이 들어 있으면 어쩔 수 없다. 까탈스러운, '이상한 여자'가 되어야 한다. 다시 끓여달라고 한다. 살다 보면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는데 이럴 때도 그렇다. 주문받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이상한 여자다. 별것도 아닌 거 그냥 건져내고 먹으면 되는 게 아닌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별 것이고, 건져내고 먹어도 맛이 남아서 먹기가 싫다. 먹기 싫은 건 먹기가 싫다. 

 

- 이렇게 쓰고 있자니 나는 H씨의 딸이라는 걸 어떻게 해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너무 그였던 것처럼 나 또한 너무 나인 것이다.  

 

- 한은형

 

- 이만하면 절도 있는 동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칼날이 반도 들어가지 않아 머쓱해졌다. 내 서툰 칼질을 바라보는 손님의 불안한 시선이 느껴져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날 나는 일곱 시간 동안 총 스물세 통의 파인애플을 손질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손질이라기보다 조각에 가까운 행위였다. 

 

- 하지만 마냥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내 손이 빠르다고 해도 한꺼번에 몰려드는 손님들을 혼자 감당하기는 벅찼다. 피크 타임인 주말 오후에는 대기줄이 생기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꼭 하나씩 버럭 성질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내 안의 분노에 조금씩 잡아먹히고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너무 쉽게 화를 내고 너무 쉽게 짜증을 부렸다. 그들에게 나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인 것 같았다. 

 

- 그런데 그 내용이 너무 웃겼다. 토론의 주제는 다름 아닌 하와이안 피자였다. 가만히 들어보니 엄마와 언니는 피자가 느끼하기 때문에 상큼한 파인애플이 토핑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동생은 따뜻한 파인애플은 음식물 쓰레기나 마찬가지라며 열성적으로 반론을 펼치는 중이었다. 나만 그 대화를 듣고 있던 게 아닌지 바로 앞에 있던 젊은 커플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온라인에서는 매일 이런 놀이가 반복되고 있다. 민초단과 반민초단은 상대편에게 수시로 시비를 걸며 내부 결속을 다지고, 쌀떡파와 밀떡파는 박쥐처럼 양쪽을 오가는 중립파를 비교적 관대하게 포용하며 점잖은 싸움을 한다. 여름이면 이 구역의 싸움닭 딱복파와 물복파가 서로를 물어뜯으며 살벌한 전쟁을 벌이고, 겨울이 찾아오면 밤고구마파와 호박고구마파가 바통을 이어받아 뭉근한 세력 다툼을 한다. 

(리뷰자 주 : 중립, 쌀떡, 물복, 호박고구마.)

 

- 그것에 대한 호불호 자체가 하나의 밈으로 자리 잡은 음식들. 각자의 취향에 소속감을 느끼며 편을 갈라 티격태격 다투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들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움 흉내를 내는 새끼 고양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저 귀여운 장난 같은 이 가짜 싸움은 고양이의 성격을 형성하는 사회화 과정 중 하나다. 무는 척만 하려다가 진짜 물기도 하고 물리기도 하며 고양이들은 선을 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부터가 공격인지, 그 선을 아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도 동물 세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 하현 

 

- 그러나 이쯤에서 다시 먹어보면 다르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나이 먹으면 가지가 맛있어진다는 말에 콧방귀 뀌었지만, 지금은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좋아하게 됐다. 서른이 되면서 급격히 입맛이 너그럽게 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우스운 실험 이후 약 15년 만에 마시멜로를 사보았다. 요즘은 핫초코용으로 따로 판매하고 있어 소량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마시멜로 하나를 꺼내어 살펴보니, 완만한 곡선의 형태가 작은 설원처럼 아름다웠다. 처음에 서술한 대로, 마시멜로는 진짜 귀엽다. 이걸 좋아하고 싶어! 하지만... 역시나 맛이 없었다! 그렇게 싫었던 가지도 맛있어졌는데! 마시멜로는 과자 주제에 여전히 맛이 없다니! 

 

- 다시 <마시멜로 이야기>를 읽고, 마시멜로 실험에 대한 정보도 찾아보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이 연구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각 가정마다 보호자가 자신의 아이를 대상으로 마시멜로 실험을 하는 일들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수많은 보호자들이 낙심했다나. 이쯤 되니 아마 나처럼 스스로를 실험해 본 아이들도 있겠다 싶어 진다. 

 

- 어릴 때의 인내가 미래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만족 지연'이라는 주제의 이 유명한 실험은 훗날 수많은 오류가 밝혀졌고 숱한 비판을 받았다. 이어 뚜껑 실험, 신뢰 실험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었고, 결국 보호자가 형성해 내는 환경 조건이 선택의 순간에 주요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이의 기질이 어른이라는 환경을 앞설 수는 없는 것이다. 

 

- 자기 계발서 장르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 그에 일부 공감하는 바지만 나는 이 역시 하나의 독서 경험으로서 여전히 즐기고 있다. 우당탕탕 마시멜로 실험 사건 이후로도 다양한 자기 계발서를 접하며 <마시멜로 이야기> 역시 성공을 위한 수많은 방법론 설파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시멜로 낙인이 찍혀 고통받은 아이들이 있지는 않았을까 뒤늦은 우려가 든다. 마시멜로 단 하나로 재단받기에는 무궁무진한 미래가 어린이에게 있지 않은가. 
"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과자 중 하나라구! 실험과 책에 이용됐을 뿐이야!"

 

- 이수희

 

- 책을 읽는 내내, 어릴 적 처음 보았던 낙지와 문어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어릴 적 상상했던 문어형 우주인들도 기억 속에서 호출되었다. 내 어릴 적 판단은 절반 정도 맞는 것이었다. 문어와 낙지는 고등생물에 가깝게 진화된 동물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기억력이 매우 좋으며, 뛰어난 신체 능력을 유지하고, 복잡한 감정 교류를 하며 친근감과 따듯함, 적대감과 공포 그리고 절망까지 느낀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인간과도 충분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했다. 굳이 말하자면 IQ가 70에서 90 정도? 어제의 문어는 그의 생의 최악의 마지막 날을 뜨거운 물속에서 고통받다가 생을 다하였겠구나. 조금 멍한 느낌이었다. 

 

- 얼마 후 두족류에 관한 다른 책도 찾아 읽게 되었다. 문어라는 동물이 인지기능, 친교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여러 고찰을 넘어, 개체마다 다른 각각의 성격과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에서 책을 잠깐 덮게 되었다. 더구나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는 항목에 이르러서는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문어는 사람을 구별하는데, 인간은 문어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 책을 다 읽은 이후, 꽤 오랫동안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과연 인간이 문어나 낙지를 먹는 것은 적절한가? 고등동물을 끓는 산 채로 물속에 넣어 숨통을 끊는 것이 요리일까? 우리가 그 잔인함을 너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 결국 나는 문어를 삼키지 못하게 되었다. 불과 한두 달 전까지 가장 사랑하는 음식 중 하나였던 문어와 낙지를, 입안에 넣고서도 전혀 삼킬 수 없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문어 요리를 보면 가장 먼저 책의 내용이 떠올랐고, 절규하며 나의 입속으로 사라졌을 고등동물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입에 넣어도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문어를 잘게 썰어 넣은 볶음밥을 먹었을 때, 그토록 좋아했던 파에야를 먹었을 때, 말랑말랑하고 풍부하던 문어의 식감이 모래알처럼 다르게 서걱거리기 시작했다. 굳이 먹고 싶지 않았고, 먹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 내 머릿속은 문어를 음식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배가 고프더라도 개 사료를 보고 식욕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신발을 보고 먹고 싶지 않은 것처럼, 더 이상 문어와 낙지 요리를 음식으로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누가 고무 지우개와 같은 맛의 식재료를 입안으로 넘기려고 하겠는가. 먹을 이유가 없었고, 먹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육식을 매우 즐기고, 회를 먹기도 하고, 치킨을 시켜 맛있게 먹기도 한다. 고기를 먹으며 소와 돼지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고, 치킨을 먹으며 병아리를 연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문어와 낙지로 만든 음식을 보면, 문어와 낙지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 왜 하필 문어와 낙지에만 그런 생각이 드냐고 묻거나, 육식은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개인의 취향이라고 답할 뿐이다. 
 
- 나의 변화는 문어나 낙지의 권리에 대한 신념이나 믿음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을 산 채로 끓는 물에 넣는 행위는 안 하면 좋겠다.) 책을 읽으며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 인식 변화는 내 잠재의식 속 어딘가에서 문어와 낙지를 식용 생물 리스트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그리고 일어난 변화가 그들의 맛을 전혀 못 느끼게 된 것이었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취향의 변화라고 생각했지만 취향을 넘어선 나의 근본 인식의 변화였다. 

 

- 가끔 우리는 사소한 특정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은 그를 변화시키려고 한다. 의지의 문제이니 고쳐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내가 문어와 낙지를 먹지 않게 되자 누군가는 내 입안에 문어 숙회를 억지로 집어넣기도 했고, 오징어라며 낙지 다리를 먹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도무지 삼킬 수 없었다. 먹을 수 없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었다. 

 

(리뷰자 주 : 나는 이런 행위가 심각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린 시절 나도 '왜?'라는 의문과 함께 굳이 싫다는 이에게 그걸 권해본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원치 않음을 솔직하게 밝힌 이에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고 자신의 입맛대로 '교정'하려는 시도는 상대에 대한 존중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내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아 조심하는 편이다.)

 

- 세상에는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할 수 없는, 하지 못하는 작은 일들이 존재한다. 어떤 행동을 절대 할 수 없는 각자의 이유들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취향의 뿌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취향보다 더밑에 자리 잡은 개인 간의 차이는 매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엄격하고, 그 차이의 원인을 알 수 없다. 음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먹지 못하고, 집이 아니면 자지 못한다. 그런 사람에게 굳이 우리는 권유와 강요 사이에서 그들의 취향 깊은 곳을 교정해주려고 한다. 
"그걸 대체 왜 못해?" 
누군가에게 그렇게 물어보고 싶은 순간이 돌아오면, 나는 행동을 멈추고 바뀌지 않을 나의 취향을 생각하며 혼자 중얼거려 본다.
“나도 사실 낙지와 문어를 먹지 못하는 사람이잖아."

 

- 정의석 

 

- 모르는 사이 어른이 되었다. 멀게만 느껴지던 그것이 실은 나 그 자체일 때, 입술 양쪽이 삐쭉하고 내려간다. 아차 하는 사이에 아뿔싸 할 시기를 놓쳐버린 기분. 이건 생각하지 못했던 어른인데, 이게 다 자란 거라니. 뭐 어쩔 수 없나 싶어 지금의 좋은 점과 지금이라서 다행인 점을 발견하려 들면, 지금이 너무 좋고 옛날은 끔찍하게만 느껴진다. 다들 비슷한가 싶어 주변 지인들에게 물어보면, 열이면 열 모두 내 질문에 물음표가 찍히기도 전에 대답한다. "절대 돌아가기 싫어." 이 한마디에는 저마다의 아찔함이 서려 있다. 

- 싫은 사람을 안 만나도 돼서 다행이야, 싫은 소리를 들어도 한 귀로 흘려버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다행이야,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은 시간에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야, 그 인간과 멀어져서 다행이야, 집을 나와서 다행이야, 사람 많은 곳에 안 가도 돼서 다행이야! 

- 현재 나라는 어른은, 하루씩 일상을 좁히며 살고 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좀 더 다양하게 지내볼 걸 그랬나 싶다. 좋은 걸 더 좋아할 걸, 싫은 걸 자세히 보며 오히려 우스워할 걸 하면서, 의미 없는 후회를 한다. 지금의 나는 좋아하고 아는 것에만 몰두하려 한다. 피하고 싶은 건 피하고, 피하지 못했다면 눈을 뜬 채로 잠시 전원을 끄면서 지낸다. 대부분 집과 작업실만을 오가며, 일주일에 한 번 친구를 만나기로 하면 '이번 주는 좀 바쁘겠군.' 하면서. 안심되고 예상되는 나날을 노곤노곤하게 지내고 있다. 

 

- 삼십 대 중반의 어른이 프리랜서라면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른다. 나의 성향은, 나의 식문화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만나기 싫은 사람을 더는 만나지 않는 것처럼, 아예 못 먹거나 너무 싫어하는 음식을 만날 기회 자체가 적다. 애써 안 좋은 생각을 꺼내는 데도 이제는 에너지가 필요하고, 아는 맛을 만끽하기에도 남은 내 삶은 짧게만 느껴진다. 

 

- 나의 선호에 따라 끼니를 정할 수 있고, 누군가와 만날 때에도 서로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 보게 된 지 꽤 되었다. 어느 정도 서로를 알게 된 후에는 만나자, 보고 싶다는 말을 "하이볼 앞에서 만납시다."라거나 "우리 슬슬 빵 산 쌓아야지." 하며, 우리의 다음을 지난번과 비슷하게,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그린다.

- 따끈따끈한 호감이 생긴 이가 맑은 표정으로 하필 내가 못 먹는 음식을 먹자고 제안할 때면 나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지만, 이때야말로 내 음식 취향을 솔직히 말할 차례이며 서로의 차이를 좁혀가는 계기로서 설렘 포인트가 된다. 사람이 이상하게 착하면 묘한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다. 관계는 아무도 모르게 불투명해진다. 이제 막 친해진 사람이 "장어 좋아하세요? 잘하는 집을 알아요." 하고 신이 난 표정으로 말할 때, "제가 장어는 못 먹어서요. 장어 좋아하시는군요." 하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나와 다른 지점을 그로부터 발견하면서, 나는 절대 겪지 못할 맛을 행복으로 삼는 이의 하루를 상상하면서.

 

- 나는 따지자면 플렉시테리언 (평소에는 비건이며, 상황에 따라 육식을 하기도 한다.)이라 고기 먹기 싫다는 말을 하기 어려울 때는 잠시 멍하게 육식을 하곤 하는데, 그게 패티라면 좀 참기가 어려워서 고백해 버렸다. 나, 다진 고기를 잘못 먹어. 새우를 먹는 건 비건이 아니라는 말은 타이밍을 놓쳐 하지 못했지만 잘 놓친 것 같다. 

 

- 싫어하는 건 오히려 만나기 쉽지 않다. 어른이 돼서 좋은 이유야 많지만 딱 하나를 꼽자면, 싫어하는 것을 나의 힘으로 안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하지만 어른이라서 더 진해지는 게 있다. 나이가 들고 나의 생활이 생기면 이제는 잊을 만한 기억들은 안 떠오를 줄 알았는데, 그게 그렇지 않았다. 떨쳐버리고 싶은 것들은 끝내 내 안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잊기 싫은 소중한 장면은 생각하면 할수록 닳듯이 사라진다.  

 

- 임진아

 

-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싫어하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소셜 미디어에 구태여 싫은 것을 공유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저 좋은 것을 더 좋게, 예쁜 것을 더 예쁘게 올릴 뿐이다. 부정적인 이야기는 공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인 것도 같다. 

- 하지만 사람은 때로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보다 싫어하는 것을 말할 때 알 수 없는 활력이 돌기도 한다. 천재적 광기마저 번뜩일 때도 있다. 자신이 무엇을 그리도 못 견디는지, 다종다양하고 디테일하게 짚어내는 사람을 보면 흥미롭고도 경이로운 동시에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성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나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느라 무언가를 싫어하는 내 마음을 구긴 채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까다로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예민한 사람 취급받기 싫어서. 

-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먹는 것에 그리 큰 호오가 없다. 태생적으로 식탐이 강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들이 극도로 싫어하는 퉁퉁 분 라면이나 짜장면도 맛있게 먹는 편이다. 그만큼 간이 잘 배어들어 있어서다.  

 

- 상대적으로 음식의 양이 적기 때문에 먹는 양과 속도를 제어할 수 있고, 단품 요리는 천천히 씹어 먹으면 소화에 크게 무리가 없다.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맛을 느끼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내게도 미식 문화의 챕터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

 

- 이러한 식습관 개선은 자연 식물식으로까지 발전했다. 되도록 불을 쓰지 않고, 소스를 첨가하지 않은 자연 상태의 식물과 과일을 먹는 것. 이 시기에는 어쩌다 사람들과 뷔페를 가게 되어도 다른 음식에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샐러드와 과일, 약간의 해산물 정도로도 식사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먹으니 식후에 침대로 직행할 필요도 없어졌다. 신기하게도 음식을 절제하기 시작하니 삶 전체가 미니멀하게 바뀌어갔다. 진정한 미니멀리즘은 무엇을 먹는가의 문제로부터 출발한다. 내가 비로소 내 몸과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기분에 자신감도 붙었다.

 

- 내가 나를 알게 되니 내 몸이 나에게 화답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이건 거의 나와의 화해에 가까웠다. 내가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으니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된 것만 같았다. 새벽에 치킨을 먹고 싶을 때 주문을 하는 게 사랑이 아니라, 다음 날 소화불량으로 부대낄 나를 생각해서 자제하는 것이 더 큰 사랑이었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가 약속이나 한 듯 힘주어 말하던 "나를 사랑하라."라는 명제가 거창한 게 아니라 이러한 자제와 분별의 태도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것은 뷔페가 아니라 탐욕에 눈이 멀어 나 자신을 너무나 몰라주었던 과거의 나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 김현민

 

- 가끔 아이들이 나이 든 엄마가 음식을 하며 수고하는 것 같아 음식을 포장해 올 때가 있다. 요즘 배달음식이 엄마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만족도가 높다는 것이다. 말로는 "편리하구나. 잘도 싸 왔구나." 하면서 같이 먹지만 돌아서면 그 크고 작은 플라스틱 용기들을 정리해서 버리느라 품이 들어간다. 속으로는 이게 과연 편리인가? 하는 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파는 음식들은 처음에는 맛이 있는데 다시 연거푸 먹고 싶지는 않다. 내 손으로 내 입맛에 맞게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 최고의 호사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아파트 단지에 가면 쓰레기 분리수거 자리에 배달 음식 용기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그걸 보면 외면하고 싶어 진다. 그리고 지구가 파괴될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 나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건 참을 수 있지만, 맛없는 건 절대로 안 먹는다. - 박완서 산문집 <호미> 중에서

 

- 어머니의 글처럼 나도 맛없는 것은 먹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가 한 음식은 맛이 없더라도 그 재료가 아깝고 미안해서 먹는다. 그러니 음식 재료를 아끼는 마음에서라도 정성 들여 음식을 해야 하지만 성공률은 8할 정도이다. 그것도 후하게 말해서. 제때에 먹지 않은 음식은 냉장고에 쌓이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버리게 되는 것이다. 한 끼 한 끼 양을 맞추어 신선도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냉장고 정리를 주기적으로 하며 재고 정리를 해야지 하지만 긴장을 풀어버리면 금세 엉망이 된다. 

 

- 양념을 지나치게 많이 한 음식을 싫어한다. 무엇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음식을 싫어한다.  

 

- 호원숙

 

- 매콤한 매운탕이라 빨간 국물이었으니까 훠궈나 마라탕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국물 맛을 조금 더 진하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다시 당근이나 씹을 뿐. 

- 똑같이 못 먹는 음식이 여럿 있어도, 유난히 "당연히 먹을 줄 알아야 하는데 왜 못 먹냐?" 하는 타박을 들으면서 크다 보면 나도 그 음식에 집착하게 된다. "진짜 싫어!" 하면서 증오하다가, "왜 나만 못 먹지?" 하면서 자책하다가, 다시 먹어보고 "역시 별로야." 하고 또 포기하다가. 그렇게 성인이 되고 고향을 떠나와 타박을 덜 듣게 된 후에도 혼자서 꿋꿋이 생선회와의 싸움을 계속해왔다.

- 푸드 에디터가 된 후로는 더더욱 열심이었다. 음식에 대한 글을 쓰는 입장에서 못 먹는 음식이 있다는 것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느 스시집이 맛있다고 하면 가보고, 쌈장에 버무려서 깻잎에 싸 먹으면 맛있다거나 묵은지와 감태가 잘 어울린다고 하면 혼자 조용히 시도해 보고, 여행을 가서 날생선에 속하는 메뉴가 있으면 먹어보는 식이다.

 

- 정연주

 

- "그래, 이 맛이야!" 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무려 40년 전의 단무지 맛이었다. 중학교 앞 라면집의 단무지, 단무지에도 옛날 레시피라는 게 있는 것인가. 놀랍게도 오래전 맛 그대로였다. 이건 확실하다. 잊고 있었던 맛을 소환해 주었다. 

 

- 단무지는 일본식 절임이다. 군산에서 유명한 나라즈케(울외절임)처럼 일본이 패전 후까지 남기고 간(정확히 말하자면 살아남은 잔재랄 수 있다. 김치와 절임은 다르다. 김치에는 보존제며 신맛 내는 물질을 쓸 필요가 없다. 유산발효를 하며 잘 익으면서 보존성을 어느 정도 가진다. 하지만 단무지는 피클에 더 가까워서 김치처럼 깊게 익지 않는다. 물론 보존성도 떨어진다. 아주 짜게 담그지 않는 데다가 상온에서 유통하는 경우가 많아 방부제를 넣지 않으면 일찍 못 쓰게 된다. 일본이 두고 간 것은 다꾸앙이고, 우리는 이것을 단무지로 만들어 소비한다. 이름만 다르지 않다. 맛과 속성이 많이 바뀌었다. 

 

-그래서 그 단무지 이름이 뭐냐고? '얇무지'라는 상표를 쓴다. 아쉽게도 소포장을 스무 개쯤 묶어서만 판다. 리뷰를 보니, 쓴 이들이 전부 분식집이나 배달 전문 식당들이다. 가정용은 고려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마트나 슈퍼에도 안 나올 것이다. 스무 개를 한꺼번에 사서라도 먹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있다. 적어도 옛날 단무지 맛을 기억하는 이들은 나처럼 만세를 부를 것이고, 그 이후 세대들은 '맛있는 걸.' 하고 동의하리라 믿는다. 

 

- 정식에 다꾸앙을 줄 때는 물론 무료다. 메밀국숫집이나 온갖 일본식 메뉴를 다 파는 밥집에도 대개 다꾸앙이 있다. 유료인 경우도 있고, 온메밀국수에 찬으로 딸려 나오는 경우도 봤다. 물론 더 달라면 대부분은 돈을 내야 한다. 그래도 짜장면에는 주겠지, 하고 일본에서 유일하게 짜장면을 일상식으로 먹는 도시인 도호쿠 지방의 모리오카시에 간 적이 있다. 아쉽게도 생마늘 간 것과 초생강 비슷한 걸 주었다. 생양파도, 춘장도, 물론 다꾸앙도 없었다. 

 

- 일본의 다꾸앙은 실존 인물인 '타쿠안(沢庵)'이 처음 만들어서 다꾸앙이 되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설이다. 한국의 단무지와 다꾸앙(다쿠앙즈케가 풀네임이다.)은 이름만큼 다르다. 한국은 아삭한 맛, 새콤달콤과 적당한 염도와 노란색이 기본이다. 일본은 며칠 말린 무를 써서 상당수는 꼬들하게 담그고 단무지보다 훨씬 짜며 노란색과 흰색이 고루 있다. 

- 냉정하게 말해서 단무지든 다꾸앙이든 이 '노란 일본식 무절임'은 한국인이 훨씬 더 많이 먹는다. 통계는 모르겠지만 장담한다. 농담이라고? 아니다. 한국은 단무지를 만드는 기다란 무를 엄청나게 생산한다. 하지만 시중에서는 절대 볼 수 없다. 우리 같은 전문식당이 주문을 해도 채소상이 못 구한다고 한 적이 있다. 절대 시장에 안 나온다. 가락시장에도 없다. 내가 아는 한에는 그렇다. 우리가 먹는 보통의 무와 거의 같은 양을 재배한다고 알고 있다. 엄청난 양이다. 다 어디 갔을까. 가정이나 식당에서 이 기다란 무, 그러니까 단무지용 무를 생으로는 쓰지 않으니까 안 파는 것이다. 이 무는 밭에서 바로 실려서 공장으로 간다. 절여서 냉동을 하기도 해서 연간 판매가 된다. 

 

- 우리는 깍두기를 그리 많이 먹지 않는다. 1년에 깍두기 열 접시도 안 먹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깍두기는 집에서는 잘 안 담그기 때문이고, 식당에서도 탕집을 빼고는 배추김치에 밀려 눈칫밥을 먹는다. 아마도 단무지가 깍두기보다 소비량이 훨씬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리뷰자 주 : 나는 배추김치보다 깍두기 파.)

 

- 박찬일

 

- 그러니까 나의 가장 지독한 적은 멀미와 구역질, 그리고 어지럼이다. 평생 그 셋을 두려워하며 살았다. 어려서부터 멀미가 심해 고통받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닫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은 뒤에는 이석증을 앓았다. 어지럼을 모르는 이들을 질투하며, 달팽이관을 새로 사서 바꿔 끼울 수 있다면 살고 있는 아파트라도 기꺼이 내놓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물론 과장이다. 공동명의라서 못 그런다.) 아침마다 슬로모션으로 일어나고, 치과나 피부과에 가서 드러누울 때면 공포에 휩싸여 쩔쩔맨다. 개가 기지개를 켜듯 머리를 아래로 확 숙이는 '다운도그' 자세를 하지 못해 사랑하는 요가도 그만뒀다. 
 
- 영양제라는 세계에 접속하게 된 것도 이석증 때문이다. 칼슘과 마그네슘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 알약들을 삼키려니 웩웩이 걱정되고, 그러니까 다시 구역질과 어지럼의 굴레인 것이다. 

 

- 김자혜  

 

- 이상한 일이다. '자취 요리'를 주제로 책도 낸 적 있는 사람이 혼밥을 싫어한다니, 자취 요리야말로 혼밥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 아니었던가? 마치 ‘술은 마셨지만 음주 운전은 하지 않았습니다.'처럼 느껴지겠지만 나는 거리낌 없이 해명할 수 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나는 혼밥을 상당히 즐기던 사람이다. 얼마나 즐겼었냐면, 동네별 유명 맛집 뽀개기는 기본이고 혼자 고급 미슐랭 레스토랑에 가서 고독한 미식가처럼 세 시간 넘게 코스 요리와 와인 페어링을 즐기기도 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셀 수 없이 여러 차례. 마음 맞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먹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혼자 먹는 게 음식의 맛과 그 식당의 분위기를 훨씬 더 잘 즐기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런 곳은 누구나 혼자서도 잘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이의를 제기할 분들을 위해 좀 더 언급하자면, 혼자 투플 한우 등심을 구워 먹은 적도 있다. 혼자 와인바를 가본 것은 당연하고. 그렇다면 대체 왜 지금은 혼밥을 싫어하게 되었을까. 

(리뷰자 주 : 와인바나 위스키바는 원래 혼자 가는 거 아니었나요... 1인분을 팔지 않으면 눈물을 머금고 단품을 먹거나 위를 준비해 2인분을 주문합시다.)

 

- 가장 큰 이유는 경험의 축적이겠다. 한참 혼밥을 즐기던 시절의 나는, 혼자서 밥을 먹음으로써 느껴야 하는 부담스러운 시선보다 그 음식을 먹어서 얻는 즐거움이 더 컸다. 게다가 사람들은 사실 남에게 그다지 관심이 있지 않다는 것을 점차 깨달아갔기에 부담은 갈수록 적어지고 새로운 맛, 새로운 식당에 대한 욕망은 자꾸 커가던 시기였다. 그러나 세상의 일이라는 게 대체로 그렇듯 경험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쌓이게 되면, 역치가 높아져버려 만족감이 점차 줄어든다. 

 

- 그럼, 이제는 맛있는 음식을 찾지 않을까? 그건 아니다. 요즘 식당들의 맛이 전반적으로 상향 평준화된 덕도 있는 데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맛집 레이더는 여전히 잘 작동한다. 맛의 끝판왕을 찾지는 않아도 중간 보스는 여전히 때려잡는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히 '그 식당이 너무 궁금해, 그 음식을 꼭 먹어보고 싶어.'가 아니라 '그 음식을 먹으며 너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가 주가 되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음식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과의 시간에 집중하게 되었기에 이 음식이 대화의 흐름을 끊을 만큼 거슬리느냐 아니면 대화를 더 즐겁게 해 주느냐가 중요해진 것이다. 

 

- 애석하게도 요즘 나에게 혼밥은 일상이다. <모쪼록 최선이었으면 하는 마음>을 쓰던 때는 혼자 집에서 우아하게 요리도 해 먹고 이따금 주변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파티를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사치다. 새내기 의사, 인턴으로 불리는 시절을 지나는 나에게는, 요즘은 '전공의 특별법 - 주 80시간 초과 근무 금지, 연속 근무 36시간 초과 금지, 당직 최대 주 3회, 10시간 이상 오프 보장, 주 1회 24시간 오프 보장 등'이 적용되어 예전보다는 좀 살 만하다고 하지만, 실제 병원에 머무는 시간은 (휴게 시간이라는 유니콘 같은 시간 때문에) 법이 준수된다고 해도 주당 90시간이 넘는다. 법이 준수되지 못하는 과에서는 한 주에 112시간 넘게 일한 적도 있다. 일주일은 168시간인데 말이다. 


- 병원에서 삼시 세끼 끼니를 해결하는 날이 많은데, 코로나 시대를 맞아 직원 식당은 대화를 금지하고 있으며 모든 테이블이 혼밥 좌석으로 바뀌었다. 그렇지 않아도 쏟아지는 업무와 언제 응급한 상황이 생길지 모르는 병원의 특성상 밥은 혼자 먹는 것이 당연시된다. 그나마도 빠르게 먹고 자리로 복귀해야 한다. 특별한 약속이 없다면 저녁까지 먹고 퇴근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수면 시간을 보장하는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직원 식당의 밥이 그럭저럭 먹을 만하며 무료라는 것이다. 때로는 꽤 맛있기도 하다. 그래서 혼밥을 무척 싫어하지만, 자주 한다.

 

- 요즈음 내 인생의 최대 화두는 나를 혼밥 하지 않게 해 줄 환경을 스스로 나에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제 곧 인턴이 끝나면 레지던트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근무지를 고를 때 내 기준에 가장 중요했던 요소 중 하나는 근무 시간이었다. 퇴근 후 저녁이 있는 삶, 주말이 있는 삶, 누군가를 만나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삶, 예전처럼 집에서 저녁을 손수 지어먹을 수 있는 삶을 살게 해 줄 직장을 원했다. 나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좋다는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 직장이 내게 보장해 준 것들 -부연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직장, 주변 사람들의 선망 어린 시선, 적어도 국내에서는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를 해줄 수 있다는 믿음,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의료 시스템, 대기업 특유의 복지 혜택 등- 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혼밥을 하며 그마저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닌 음식을 먹는 일의 연속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가 뜯어말렸지만, 나는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앞으로의 미래에 주어질지 아닐지 알지도 못할 보상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일은 인턴의 시간으로 족하다. 정시 퇴근을 보장하는 곳에서의 새 삶을 선택한 이유다. 

 

- 이재호

 

- 꼼짝도 하기 싫고 집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휴일에 최소한 한 번은 외출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흔치 않은 경우다. 일조량이 짧은 겨울일수록 무기력함은 심해진다. 이렇게 집에만 있다가는 주말을 아무렇게나 써버린 걸 후회하거나 기분이 아주 가라앉고 말 텐데, 하는 걱정은 안온하고 따뜻한 이불속에서 사라진다. 그렇다. 나는 집에 있을 때대체로 누워 있는 유형의 인간이다. 

(리뷰자 주 : 그렇게 집에만 있는 것이 주말을 가장 아름답게 소비하는 방식 아니던가요.)


- 아침식사는 주로 토스트 한 식빵과 직접 내린 커피 한 잔으로 가볍게 먹는다. 어릴 때부터 이어진 습관이다. (물론, 커피는 아니었지만.) 주로 빵이나 시리얼등을 먹는 아침 습관을 평생 들이다 보니, 아침부터 쌀밥과 국, 각종 반찬 곁들인 푸짐한 식사에 익숙지 않다. 꼭 한식이 아니더라도 아침부터 무거운 음식을 먹는 건 영 내키지 않는다. 대충 차려 먹고 나면 시간은 11시쯤이다. 남들 점심 먹을 시간에 아침 먹었으니 밥 생각은 없어야 할 텐데, 다음 끼니는 몇 시에 무얼 어떻게 먹을 것인지 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설거지하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생각해 보자. 

 

-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우리 집은 다른 집들과 아주 큰 차이점이 있다. 바로 '집밥'을 차려 먹을 수 없다는 점이다. 아마 식당을 운영하면서 집과 업장의 위치가 멀어 퇴근이 늦는 자영업자라면 공감할지도 모른다. 고작 주말 동안 집에서 밥을 먹기 위해 고민하며 식재료를 사기도 싫고, 요리하고 싶지도 않다. 쌀은 물론이고 심지어 밥솥도 없다. 소금, 후추, 마늘, 고추 등 기본적인 양념이나 식용유, 간장, 설탕, 식초 등등 하여간 자취생들도 기본적으로 찬장에 갖추고 있을 아이템들이 우리 집에는 없다는 얘기다. 

(리뷰자 주 : 나도 쌀, 밥솥, 김치, 식용유 등이 없다.)

 

- 앞서 말한, 휴일에도 최소한 한 번은 외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분 전환은 둘째 치고라도, 의식주의 '식'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쉬는 날에 최소 하루 한 번은 외식을 해야 끼니 해결이 가능하다. 평소라면 이미 주초부터 모든 것을 결정했을 터. 화요일에 퇴근하면서 '주말에 뭐 먹지?' 계획 세우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겨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가기 너무너무 귀찮다!  
 

- 배달시켜 먹으면 되지 않냐고? 나는 여기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 카레집 하기 전에도 우리 집은 1년에 한 번 배달음식 시켜 먹을까 말까 했다. 가끔 특정 치킨이 먹고 싶은데 집 근처에 없을 때 정도. 근데 요즘은 1인 가정이라도 일주일에 한 번 배달시켜 먹으면 적게 시켜 먹은 거라더라. 배달 라이더들의 수도 눈에 띄게 급증했다.  


- 김민지

 

- 싫어하는 음식에 대한 앤솔러지 참여는 고민이 되었다. 덜 선호하는 음식이 있을 뿐, 딱히 싫어하는 음식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크림 파스타를 토마토나 오일 파스타에 비해 덜 선호할 뿐이지 싫어하지 않고, 자장면보다 짬뽕을 더 선호할 뿐이지 자장면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고수나 내장, 물곰탕처럼 기묘한 식감, 날음식처럼 호불호가 갈리는 식재료나 음식도 나는 대체로 '호'다. 

 

- 첫째, 아무 음식에 트러플 오일을 넣는 것. 인위적인 향이 나고 대체로 가격이 비싸지지만 글쎄? 둘째, 아무 음식에나 치즈를 넣는 것. 대체로 저렴한 치즈이며 캡사이신의 맛을 중화시키는 용도이다. 셋째, 남은 소스에 밥을 볶아 먹는 것. 이미 충분히 먹은 소스에 밥까지 먹어야 한다니. 차라리 흰밥과 된장찌개로 마무리하는 게 새롭다. 단, 압구정 '최가네버섯샤브매운탕'처럼 신선한 채소를 다져 넣고 성실하게 만든 볶음밥은 예외다.  

 

-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은 비즈니스 클래스의 기내식도 있다. 일본항공(JAL)에서 전채로 내놓은 9칸짜리 도시락은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눈이 상큼했다. 내가 경험한 최고의 기내식은 터키항공의 기내식이었다. '플라잉 셰프', 셰프가 함께 탑승해 조리를 해준다는 콘셉트로, 모든 코스의 가짓수를 다양하게 두어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 디저트 역시 이스탄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디저트 가게를 작게 옮겨놓은 것처럼 다양했다. 잠시 기내라는 걸 잊을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 한가득이라, 비행기가 아니라 마법의 양탄자를 탄 기분을 잠깐이나마 느꼈다.  

 

-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다 추억이 되었다. 기내식 대신 찾던 공항의 식당 중에는 이미 사라진 곳도 있다. 바이러스가 전 지구를 점령한 후 나는 조금 불행해졌는데, 더 이상 새로운 감각으로 나를 채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낯선 곳을 걷고 낯선 곳에서 낯선 음식을 먹는 게 너무 좋았다.  

 

- 허윤선

 

- 누구에게나 사연 하나씩은 있다. 이래서 안 먹고, 저래서 싫고. 그것이 어릴 적 가업과 관련된 경우가 종종 있다. 전남 완도에서 어부의 딸로 자란 아내는 멸치를 먹지 않는다. 일부러 멀리하는 건 아니지만, 일부러 찾지도 않는다. 원래 잡으려던 녀석이 아닌데 그물에 걸린 멸치를 사시사철 말려 먹고 볶아 먹고 튀겨 먹고 무쳐 먹었다고 한다. 그러니 멸치의 멸 자만 들어도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질 수밖에. 비슷한 이유로 처남들은 미역을 먹지 않는다. 그것도 모르고 가족 여행 갔다가 해장하라고 새벽에 북어미역국을 끓여 내놓았는데 둘 다 국에는 손도 대지 않는 것을 보고 어찌나 섭섭했던지. 하긴, 미처 생각 못한 내 잘못이지. 
 
- 전남 해남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고 부른다. 촉촉하고 보드라운 물고구마가 많이 나는 고장으로, 거기선 '감자'가 물고구마다. 어릴 적 해남에서 도시로 유학 온 아이를 우리는 '물감자'라고 놀렸는데, 사실 그때 우리는 그 감자가 진짜(?) 감자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인지, 부모가 농사짓는 해남 친구는 고구마는 물론 감자 또한 먹지 않았다. 

 

 - 봉달호


  

 

 

 
싫어하는 음식: 아니요, 그건 빼주세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론칭한 이후 꾸준히 출간을 이어오고 있는 세미콜론 음식 에세이 ‘띵 시리즈’. 그동안 치즈, 고등어, 라면, 훠궈, 평양냉면, 짜장면, 카레, 삼각김밥과 같은 한 가지 분명한 음식부터 조식, 해장 음식, 그리너리 푸드, 프랑스식 자취 요리, 엄마 박완서의 부엌, 용기의 맛, 병원의 밥, 식탁 독립 등 좀 더 폭넓은 음식 관련 주제에 이르기까지, 애정이 듬뿍 담긴 음식에 관한 푸드 에세이 시리즈로 자리매김해 지금까지 열여섯 권을 출간했다. 현재 계획되어 있는 근간으로 바게트, 돈가스, 팥, 아이스크림, 멕시칸 푸드, 소설가의 마감식, 직장인의 점심시간 등 열네 가지 주제가 더 있으며, 이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2022년 4월 1일 만우절, 거짓말처럼 선보이는 이번 열일곱 번째 띵 시리즈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 아닌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함께 싫어하고 싶은 마음’으로 22인의 작가들이 모였다. 모두 앞서 언급한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책을 출간했거나 출간이 예정되어 있는 띵 시리즈 작가들이다.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눈동자가 커지고 목소리를 높여온 작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주제는 다름 아닌, ‘싫어하는 음식’. 고수, 오이처럼 특정 재료를 싫어하는 사람이 식당에서 주문할 때 “아니요, 그건 빼주세요.” 하는 이 한마디를 제목으로 삼았다. 좋아하는 대상과 그에 대한 마음을 다룬 에세이는 정말 많다. 좋아하는 것을 힘껏 좋아하는 그 마음만으로도 분명 기분이 좋아지고 긍정적인 기운들이 마구 차오른다. 물론 띵 시리즈도 그런 맥락에서 탄생했다.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 미디어에도 대부분 좋아하고 아름다운 것들만 골라 전시하는 데 익숙한 편이고, 우리는 의외로 ‘싫어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접근해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싫어하는 음식’ 앤솔러지에 참여한 작가 대부분이 원고를 넘기며 “그동안 싫어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생각하거나 글로 써볼 기회가 흔치 않았던 것 같다.”고 이야기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물론 ‘좋은 게 좋은 것’이고, 좋은 것만 옆에 두고 보기에도 시간은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단순히 “그냥 싫어.”가 아니라 “너무 싫어.”라고 말할 수 있기까지는 수많은 내적 근거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취향을 너머 한 사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가치관으로까지 이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싫어하는 음식에 대한 역사는 길든 짧든 하나쯤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거창한 결심이나 선언으로부터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경험에서 시작되어 인생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저자
김겨울, 고수리, 김민철, 윤이나, 신지민, 한은형
출판
세미콜론
출판일
2022.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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