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보영] 역병의 바다

일루젼 2023. 5. 20.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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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보영
출판 : 알마 
출간 : 2020.05.30 


       

'Project LC.RC - 프로젝트 러브크래프트 다시 쓰기' 시리즈 대장정의 마지막 권이자 첫 권이다.

 

<역병의 바다>는 김보영 작가의 저작들을 찾아 읽다가 단권으로 구해 읽었던 책이었다. 당시에는 이 책이 시리즈 물이었다는 것도 몰랐고, 블로그도 닫아둔 상태였기에 따로 리뷰를 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얼마나 닮았는가>나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도 리뷰가 없...)

 

이전에 이미 읽었던 책이지만 블로그를 다시 열며 '이 시점 이후로 완독한 책만 리뷰한다'를 기준으로 세웠기 때문에, 또 같은 시리즈의 다른 책들은 모두 리뷰한 상태에서 이 책만 빼기는 조금 그래서, 재독했다. 

 

사족이 길었고. 

 

개인적으로는 다소 모호한 작품이라고 느낀다. 김보영의 색채가 강렬하지도, 러브크래프트의 색채가 강렬하지도 않다. 하지만 재미있고, 소름이 돋는다. 컨셉이 정해진 프로젝트성 글인데도 충분히 완결성을 가지며 흡입력 있다.

 

다만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모양이다. <거울>에 발표되었던 <노인과 소년>에서 같은 짜릿한 전율까지는 없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천재들도 범작을 발표한다. 그의 모든 작품이 걸작일 수는 없다'고 했다. 나는 <7인의 집행관>이나 <얼마나 닮았는가>, <진화신화> 같은 저서들이 훨씬 짜릿했다고 느끼기에 김보영 작가를 처음 만나는 분들은 기왕이면 이 책들로 저자를 접했으면 한다.

 

현과 무영의 관계는 저자의 다른 단편인 <0과 1 사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무영이라는 인물상은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중 <미래로 가는 사람들>의 성하와도 닮아 있다. 내가 멋대로 정한 중기 이후 김보영의 인물들은 대체로 닮은꼴이다. 그들은 남성과 여성의 경계에서 자신만의 신념에 따라 선택하고, 설사 그로 인해 무너지고 좌절하게 되더라도 매 순간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이들이었다.

 

인간다움에 관한 시각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전체적인 흐름과 크툴루적 존재가 동떨어져 버리게 된 점이 아쉽다. 인간이지만 오히려 인간답지 못한 이들과, 감염되어 변형되었지만 인간성을 유지하는 이들, 그리고 새로운 동지들을 자신들의 사회 안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의 모습들을 겹쳐 보여주기 위해 연결시킨 내용들이 '무심하고 절대적 악의를 가진' 존재와 그의 아이들과의 괴리를 낳고 말았다. 그의 아이들은 '그 존재'보다는 인간을 부쩍 닮아 있다. 

 

개인적으로 짐작하는 작가의 의도대로라면, 그 존재의 무심과 무의도는 존재 자체로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절대적 악의'였어야 했다. 그리고 그 영향력에 무력하게 침식되어 가는 인간들의 공포가 강조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존재를 제외한 이야기들은 생존을 위한 영역 확장과 이질적 존재를 기꺼이 맞아들일 수 있는 유연한 자기 인식 - 혹은 연민이나 동정 같은 인간성 - 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디까지가 '자'이고 어디까지가 '타'인가. 내가 너를 나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너와 나는 우리가 될 수 있는가. 인간은 얼마나 손쉽게 자신과 가까운 것들을 잘라낼 수 있는가. 그것은 자학인가 아닌가. 

 

이 경계를 흐릿하게 처리함으로써 그로테스크한 휴머니즘을 그려내는데는 성공했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후기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크툴루적인' 느낌이나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와의 연결성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내가 러브크래프트적인 느낌은 모호하다고 말한 것은 이런 점들 때문이다. 또한 하나로 잘 다듬어져 독자로 하여금 '꿰뚫리는 듯한' 전율을 느끼게 하는 작가의 특기가 잘 살아나지 않았다고 느낀다. <저 이승의 선지자>에서도 느껴졌던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물론 이것은 순전한 나의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다)

 

이런 것들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는 모순이며, 동시에 그 무엇도 무의미하다는 것이 메시지라면-

 

우리는 사실이지만 진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며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하우진들일지도 모른다.

 


한참 뒤에 덧붙이는 사족.

만약 거대한 존재란 인간적인 악의나 은원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거대하고 초월적인 영향력이라면.

어쩌면 그에 영향을 받으며 그것을 악으로 인식하는 것은 인간만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자연법칙과도 같은 거대함,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들에게만 문제가 되는 문제. 

 

그런 시선으로 본다면 <역병의 바다>는 충분히 크툴루적이지는 않지만 충분히 김보영적이다.  

 


   

- 한국 SF 작가 가운데 최초로 미국의 대표적인 SF 웹진 <클락스월드 clarkesworld>에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

 


 

- 각하, 이 편지가 과연 각하께 전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누구든 그날 그 마을에서 제가 목격한 일에 관심을 기울여줄 수만 있다면, 지치지 않고 편지를 쓰고자 합니다. 지금도 그날 밤만 생각하면 갈퀴 같은 손이 제 심장을 쥐어짜는 듯하고...

 

- 하지만 저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날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전까지는...

ㅇㅇ대학 생화학 박사

대한감염학회 연구위원

동해병자 국고보조사업 예산자문위원

오래된 종족으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지식인 모임 대표

하우진 올림

 

 

- 까똑, 하고 주머니에서 알림이 떴다. 카톡을 열어보니 언니의 메시지가 넘치도록 쌓여 있었다.

'10시에는 영어 유튜브 틀어줘. 시험 봐서 틀린 수대로 맞는다 그래.' '길거리 음식 절대로 먹이지 마. 우리 애 안 그래도 위장 예민한데 기생충 옮아.' '도착해서 사랑병원에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 우리 남편 고등학교 선배가 거기 원장이잖니. 혹시 애 물 갈아먹고 배탈이라도 나면 연락해야 하니까.' '참, 두 시에는...'

까똑, 소리가 한 번 더 들리자 나는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알람을 껐다.

 

- "엄마가 뭐래? 또 미친 소리 하지?"

"... 엄마한테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냐."

"안 오면 좋겠다아."

현이가 옆에서 내 허리를 답삭 끌어안았다. 나는 현이의 등을 토닥였다. 

"좀 귀찮아도 어른 될 때까지 잘 버텨봐."

"버티면?"

"음... 사업한다고 부모님한테 돈을 뜯어내서 탕진해 버린다든가, 아니면 유산을 미리 받아내고 해외로 튄 다음에 네 이모를 경호원으로 고용해서 연금을 주며 산다든가..."

 

- 자기가 오늘 피곤하고 기분이 나쁜 건 아내가 뭔가 자신에게 악의를 갖고 세상을 뒤에서 조종하기 때문이라고 믿는 얼굴이다. 

 

- '내가 뭘 하는 거야.'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 모든 것을 해봤겠지. 우연히 옆을 지나가는 낯선 사람이 떠올릴 만한 것은 다 해봤겠지.

 

- "제 남편은 배를 몰아요."

자기소개 시간이라고 생각했는지 여자가 말했다. 나는 '아, 저도 소싯적에 소형선박 자격증 따려고 공부한 적 있는데...' 같은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질 뻔하려는 걸 꾹 참았다. 

 

- "오늘 우리 가는 데다!"

현이가 화면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전광판에 강릉행 탑승 안내가 떴다. 사람들은 수군거리면서도 개찰구를 향해 관성적으로 발을 떼었다. 다른 경고 방송이 나오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그저 아직 뭔가 조치를 취할 만한 시간이 없었을 뿐일 것이다.

"빨리, 빨리 가자, 이모."

 

- 예기치 못한 일에는 생각이 느리게 움직이기 마련이다. 나는 자석에 끌려가듯 폴짝거리는 현이 뒤를 쫓았다. 

 

- 나는 나중에 계속 그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 그때 현이를 잡았더라면 설득했을 거라고. '현아... 무슨 일이 났나 봐. 다음 차 타자.' 하지만 현이는 그걸 아는지 내 손이 닿으려면 냉큼 빠져나가고 또 빠져나가곤 했다. 

 

- "지진 더 나면 좋겠다. 그래서 집에 가는 차 끊기면 좋겠다."

현이가 기차에 올라타며 내게 빨리, 빨리 하고 손짓했다.

"그러면 집에 안 가도 되잖아. 이모랑 둘이서 계속 살 수 있잖아..."

 

- 멍청한 자식. 여기 없는 척을 할 요량이었으면 문을 잠그지 말았어야지.

 

- 처참한 불행에 머리끝까지 푹 잠긴 생물, 그러므로 누구든 자신만큼 불행해져야 이 답답한 속이 시원해질 것 같다고 울부짖는 마음을.

 

- ... 어쩌면 오늘이 날인지도 모른다.

더 버텨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 고립되고 버려진 마을에서 내가 정도를 지켜야 할 이유가 더 남아 있을까? 행정도 사법 시스템도 우리를 포기했는데? 어차피 나는 어느 날 으슥한 골목에서 이런 몸싸움을 하다가 잘못 맞아 죽거나, 내게 원한을 품은 감염자에게 살해당해 죽고 말 것이다. 나는 뭘 지키려 애를 쓰는 걸까?

 

- 바다 저편에서부터 하늘이 밝아왔다. 수평선이 주홍빛으로 불탔고 청색 하늘 꼭대기에는 아직 손톱 같은 달이 머물러 있다. 이 썩어 빠진 시절에도 산허리에서 보는 풍경만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 집은 대부분 청기와를 인 단층집들이다. 기와지붕이 서녘의 푸른 어둠과 동녘의 주홍빛을 함께 받아 깊은 남빛으로 반짝였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동해안을 따라 도는 일출로를 제외하면 등대까지 오는 해맞이길 둘뿐이다. 두 도로가 폐쇄된 지도 삼 년이 지났다.

 

- 솔직히 무슨 일을 했어야 원한을 사지. 간혹 지휘자인 자신마저 병에 걸리면 마을의 치안이 무너지므로 어쩔 수 없다며 한 시간씩 한탄도 늘어놓는데, 됐으니 자기 포장만 안 해도 덜 귀찮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 많은 집들이 버려진 채 방치되어 있다. 드문드문 정돈된 집은 대부분 점집 아니면 상담소다. 한 줌도 안 되는 마을에 점집이 셀 수도 없다. 동네에서 소싯적에 주역이나 명리학 책 한 번쯤 읽어본 사람들은 다 점집을 차린 듯했다. 희망을 상상할 방법이 토정비결이나 사주밖에 남지 않은 동네다. 

 

- 그래, 하고 답하려다 돌연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고통은 사소한 계기로도 수시로 마음을 침범한다. 정신을 놓고 일하다가 돌아보면 늘 옆에 도사리고 있다. 

'내 조카는...'

그렇게 문자를 치자 화면 너머가 조용해지는 듯했다. 메시지가 몇 개 올라오다가 사라졌다. 현준 경사는 내가 이처럼 수시로 무너지는 것에 익숙한 몇 안 되는 사람이다.

 

- 처음에는 독감 정도로 생각했다. 일단 정부에서 마을에서 한 주쯤 더 지낼 것을 권장하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현이는 신난다고 바닥에서 구르며 여기도 저기도 다녀보자고 성화였다. 집에서도 나라에서 하는 말 잘 들으라고, 상황 좋아진 다음에 오라고 했다. 그리고 병은 순식간에 창궐했다.

 

- 언니는 아우성치며 내가 애를 죽였다고 매일매일 날뛰었다. 

 

- 그러다 언제였던가, 여느 때처럼 내게 한바탕 욕설과 저주를 토해내고 나서는 속이 풀렸는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이지 뭐니. 만약 네가 그때 애를 데리고 왔으면, 나하고 우리 그이까지 그 해괴망측한 병에 걸렸을지도..." 나는 순간 욕지기가 치밀어 바로 전화를 끊었다. 이후 다시는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 나는 밤마다 청량리역으로 되돌아간다. 콩콩 뜀박질하는 현이의 작은 손을 붙잡고 어른답게 타이르는 상상을 한다.

'아니야, 일단 집에 연락해 보고 다음 기차로 가자. 우리 한 시간만 더 역에서 놀자.'

'아니야, 여행은 언제든 갈 수 있지 않니. 오늘은 집에 가자.'

'아니야, 표를 바꾸자. 옆 동네로 가자. 옆 동네도 예쁘지 않니.'

'아니야...'

'아니야...'

 

- 아무렴, 이해하고 말고. 얼마나 숨이 막히겠니. 나는 어느 날 밤 불현듯 악몽에서 깨어나 잠옷 바람으로 해맞이 길을 정신없이 달음박질쳐 올라간 적이 있다. 군인들이 봉쇄해 놓은 도로 앞에서 집에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치다가 붙들려 돌아왔었다. 그날 나는 죽은 물고기들 사이에 엎드려 밤새 울었다. 

 

- 그리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낯선 남자 하나가 버스에서 기운찬 발걸음으로 내려섰다. 먼발치였지만 깔끔한 회색 양복을 입고 작은 여행 가방을 든 멀끔한 남자였다. 

 

- 요괴가 내렸어도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 가게 주인 격일로 나와요."

내가 뒤에서 말을 붙이자 남자가 돌아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나와 같은 또래... 삼십 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대기업 사무직 회사원 같은 야리야리한 인상에, 몸은 호리호리했고, 매끈한 회색 양복에다 긁힌 흔적 하나 없는 새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다. 얼굴은 보기 드물게 잘생긴 데다 머리도 막 미용실에서 다듬은 듯 깔끔했다. 이 사람이 이 마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격렬한 이질감이 들었다. 

 

- 나는 굳은살 한 점 없는 새하얀 남자의 손을 보며 다시 한번 짙은 이질감을 느꼈다. 나라가 돌봐주고 보호해 주는 세계에서 온 사람. 이 사람을 따듯하게 감싸 안아 보호해주고 있을 안온하고 평이한 일상을 상상하니, 질투심에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 아이들은 몸에 진흙을 바른다. 서로에게 얼마나 병이 퍼졌는지 보이지 않도록. 새벽과 저녁의 어스름 속에 숨어서 노래하며 춤을 춘다. 우리가 예전에는 다 같은 모습이었다는 추억을 나누며. 이젠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만 안온했던 지난날을 애도하며.

 

- 전 씨는 마을이 격리되기 직전에 인터넷으로 방역복을 구매해 둔 사람이다. 지난 삼 년간 소주 사러 갈 때마저 그 옷을 입고 다녔다. 유난 떤다는 조롱에는 "환자가 되는 것보단 바보가 낫지!" 하며 응수했다. 지금도 누구와도 피부를 맞대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그 덕분일까, 전 씨는 해원마을과 바깥을 오갈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갖게 되었다. 

 

- "오늘은 육백 번대 털어 왔드래요. 마을 회관에 쟁여놓기 전에 몇 권 줄게요. 아무거나 골라 가져요."

 

- 전 씨가 요새 주목한 것은 지금은 폐교된 한중대 도서관에 버려진 책들이다. 따로 인수한 곳도 없이 방치된 데다가 한적한 산속에 자리하고 있어 고속도로로 빠져나가면 시내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이다. 처음에는 마을 회관에 비치한다는 명목으로 소설책을 빼내 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재미를 붙였는지 대학 도서관을 아예 마을로 옮겨 올 궁리를 하는 듯했다. 

 

- 마을에 병이 돌기 시작하고 인터넷에는 별의별 말이 다 돌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사실이기는 한 것들이 돌았다. 주민 대부분이 저학력이라든가, 무직이라든가, 가난하다든가, 그래서 비위생적인 습관이나 어떤 무식함으로 병균을 양산했으리란 말들이. 그러다가는 아무것도 없는 말들이 돌았다. 

 

- 그 무시무시한 악담으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다. '내게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바람을 넘어 기도에 가까운 의식. 무자비하게 말로 인간을 난자하면서 속내에서는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내게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그 기저에 있는 것은.

... 두려움.

하루하루 내딛는 걸음마다 살 떨리도록 심장을 비틀어 옥죄어오는 처참한 두려움.

 

- 목사는 예배 후 청소한다는 조건으로 소수 분파에 교회를 내주고 있다. 본인도 사이비 같은 면이 있는 사람이지만, 이상한 놈들이 흩어져 있는 것보다는 한데 모여 있는 게 낫다는 논리였다. 

 

- 나는 빈 예배당에 들어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올렸다. 종교는 없다. 신도 믿어본 적이 없다. 그런 게 있다면 이 마을 주민은 기도가 아니라 항의 시위를 해야 맞을 거다. 단지 기도는 신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입 발린 전도에 마음이 동한 뒤로는 간혹 와서 명상이나마 하는 편이다. 

 

- "무영 씨, 오늘 김순자 씨네 애를 죽도록 팼다믄서."

"안 죽였어."

"감염자들 사이에서 자기 소문이 쫙 퍼졌어. 순자네가 화가 단단히 나서 노발대발하고 있어. 알잖아, 순자네가 애 오죽 아끼는 거."

"그 애새끼가 내 목을 졸라 죽이려고 했다는 말은 안 퍼진 모양이네?"

 

- "오늘은 집에 있어, 무영 씨. 날도 꿀꿀하고 다들 예민해져 있는데 이런 날 돌아다니다가 경 칠지도 몰라."

집에 붙어 있으라는 말을 아침 댓바람부터 세 번이나 듣는군. 하지만 쉬기는 해야 하는 날이다. 밤새 정신 나간 어린애를 쫓아다니느라 한숨도 못 잤으니까.

 

- 잡아봤자 팔 만한 상품이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해원산 고기를 시장에 내놨다간 광화문에 시위 인파 모일 일이었다. 그래도 마을에는 일이 필요했고 스스로 생산한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주기적으로 좋은 날을 잡아 윤희네 배를 타고 인근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돌아와 집집마다 배급을 한다. 

 

- "배는 고기를 잡으려고 띄우는 거야, 무영 씨. 괴수를 잡으려고 띄우는 게 아니라."

윤희가 부드럽게 말했고 나는 황망하게 웃었다.

"무슨 이상한 소리야. 나 그런 생각 안 해. 그냥 답답해서 바람 좀 쐬고 싶어서 그래."

"그러면 더 안 돼. 마을엔 수입 끊기고 망한 집안이 한둘이 아냐. 놀러 갈 사람 태울 자리는 없어."

남편 기가 팍 죽은 것에 반비례해서 윤희는 한층 똑 부러지고 단호해졌다. 요샌 밥도 잘 먹는 듯,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사람이 건강해 보였다. 

 

- "우리 다 어떤 면에서 조금씩 미치고 말았지. 다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을 겪었고."

 

-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 무영 씨.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그래도 내가 무영 씨를 우리 배에 태울 일은 없을 거야."

 

- 기운찬 목소리. 찬찬히 뜯어보니 아까 얼핏 보았을 때보다도 더 잘생긴 사람이었다. 배도 안 나왔고 키도 훤칠했고 이목구비도 뚜렷했다. 감염자 아니면 소금 바람에 찌들어 주름이 자글자글한 사람들만 보다가 도시물 먹은 매끈한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가족은 있을까, 아내나 아이는 있을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 마치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자기 혼자만 알게 되었고, 그 비밀을 혼자만 품고 있기에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툭, 하고 돌이 얹혔다. 이 사람에게 가졌던 호의를 포함하여 애인이나 가족에 대해 물어볼까 하며 두근두근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차게 식었다.

 

- "추하죠."

내가 말을 끊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추해졌어요. 하지만 추함은 악과 관계가 없어요. 둘은 서로 빗댈 것이 아니에요."

우진은 돌연 말을 멈추고 다리를 꼬고 앉아 퉁명스러운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기분이 팍 상한 기색이었다.

"그렇기는 하죠."

 

- 나는 그제야 이 멀끔한 외모의 남자 마음에 단단히 둘러쳐져 있는 벽을 보았다. 세상에 제 머릿속밖에는 없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자신의 말에 예,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청중이 가장 익숙한 소통 대상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착잡한 기분으로 이 사람에게 가볍게나마 가졌던 호감을 차곡차곡 접어 거두었다. 

 

- 인간은 어째 그 모양이냐고 한탄하는 줄 알았는데 말 저변에서 묘하게 다른 의도가 느껴졌다. 마치 그게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하는 듯한. 그래서 자기가 느끼는 두려움이 정당하다고 변명하는 듯했다. 

 

- "무영 씨, 오늘은 집에 있는다고 안 했어?"

순간 위화감이 엄습했다. 나는 집에 있겠다고 하지 않았다. 집에 있으라고 한 건 이 친구다. 오늘 밖에 나다니지 말라고. 그런데 왜 나는 오늘 집 안에 있어야 하는 거지?

 

- "그래. 아니야."

윤희의 손가락에 핏발이 섰다. 이 사람이 온 힘을 다해 붙들고 있는 게 저놈이 아니라 나라는 점에서, 누구를 지키려 하는지는 명백했다.

"같이 먹고 자는 내가 그걸 모르겠어? 

 

- "그래도 아주... 친절한 사람이야..."

 

-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이 사람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이, 생명력과 지성을 포함하여 사람을 살게 만드는 모든 것이 공포로 다 산화된 듯했다. 

 

- "우린, 널, 봐주고, 있었어. 서무영."

"무슨 뜻이야?"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물었다.

"봐주고 있었다고? 우리라니, '우리'가 누구지?"

"우리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자들. 우리의 적을, 너는 '적'에 속해 있었어, 서무영. 내가 온 힘을 다해 막아주고 있었어, 내가."

"'적?' 적이 누구야? 나 말고 또 누가 적이지?"

"내가 맨 앞에서 막아주었지. 내가. 내가, 너를. 내가, 너를. 내가 너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온 힘을 다해 막아주었건만."

 

- "이제는 널 지켜줄 사람이 없을 거다. 서무영. 이 마을에 더 이상 네게 호의를 베풀 사람도 없을 거다."

"..."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오늘 내로 이 마을을 빠져나가는 게 좋을 거다."

 

- 바위섬에서 검은 먹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나는 벼락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꼼짝도 못 하고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무엇인가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되물어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 시선만으로 나는 온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 액정 너머는 조용했다. 뭘 쓰는 표시가 났다가 사라졌다가 했다. 전화를 걸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화상통화를 하든가. 나는 후회했다. 문자로는 현준 경사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냐며 웃고 있는지, 아니면 음산하게 낯빛을 바꾸며 거짓말을 꾸미고 있는지. 

 

- 눈에서 피가 사라지자마자 나는 금세 내 기억을 의심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뜨고는 문자를 쳤다.

'왜 자꾸 나더러 집에 가라고 하는 거야?'

 

- 현이는 많이 울지도 않았다. 마치 고작 이 별것 아닌 잠깐의 움직임 하나를 위해서 지금까지 그 고단한 생을 유지해 왔다고 말하는 것처럼. 내 아이는 어디서 죽음을 배웠을까. 생이 어느 날 끝나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에게서 배웠을까. 

 

- 그리고 나는 서서히 깨달았다. 이 아이는 그들의 것이다. 더 이상 내 것도, 이 지상에 속한 것도 아니다. 

 

- 나는 목놓아 울었고 그들은 다시 기다렸다. 이들은 현이가 자신들의 것임을 안다. 하지만 내게도 조금은 자격이 있음을 안다. 그만큼은 기다린다. 하지만 아이를 내게 줄 생각은 없었다. 

 

- 그 눈이 말하는 듯했다. 너는 그 해안가에 널린 물고기 시체처럼 하찮고 조악한 것이다.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며, 우연히 제가 의미를 갖고 태어났다고 착각한 먼지 부스러기에 불과하다. 이제 너는 무엇 때문에 네가 태어났고, 살아 있었고, 고통받았고, 소망을 품었고, 발버둥 쳤는지도 모르는 채 무의미하게 끝장나버릴 것이다. 다시는 존재하지 않고 세상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너는 살아 있거나 죽어 있거나 아무 차이도 없으며, 오늘 나와 마주한 것만으로도 그 정신이고 몸이고 다 부스러져 없어지고 말 것이다.

 

- 감당할 수도 어찌할 수도 없는 극상의 존재와 마주하고 있는 것보다도, 저 거대한 존재의 안에 어떠한 초월적인 정신세계도 없으며, 동정심도 이타심도, 세상을 어찌해 보겠다는 희미한 철학조차도 없다는 확신이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저것이 내 목숨을 앗아갈 때엔 하다못해 쾌락조차도 없이, 몰아치는 폭풍이나 내리꽂히는 눈보라 같은 무심함으로 가져가리라.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아무 상관도 없이.

 

- '집에 붙어 계시고, 혹시 지금 밖에 계시면 당장 서로 오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

적, 우리, 적, 우리, 적...

나는 고개를 숙였다.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면 내 편이라고 믿기로 하자. 그쪽이 조금 더 기분이 좋으니까.

 

- 나는 휴대폰을 이리저리 돌리며 액정을 소매로 연신 닦아내며 꾹꾹 눌렀다. 전송이 한참을 멈추더니 오류가 나며 꺼졌다. 저쪽에서 낮은 한숨이 들렸다. 

 

- "... 우리 집으로 와. 숨겨줄 테니."

제발 가라. 이것만 가고 다시는 안 움직여도 좋으니 가라, 제발.

"오늘 지나면 일 벌인 사람들은 다 잡혀갈 거야. 그때까지만 숨어 있어. 집에 들어와 있어."

아냐.

"그게 아냐..."

"... 집에 들어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 한참 만에 내 핸드폰이 울렸다. 흔들어보았지만 액정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기에서 버튼이나 수화기나 다이얼을 없앤 자식은 천국에 못 갔을 거야. 나는 아마도 받기 버튼이 있었을 자리를 더듬으며 건드렸다.

 

- "그 남자 말이 먼저 나가게 해서는 안 돼. 우리 쪽 말이 먼저 외부에 나가야 해."

 

- 나는 말을 마치고 머리를 붙잡고 웅크렸다. 이제 할 만큼 하지 않았을까? 빌어먹을 신이여, 거기에 있는 게 무엇이든, 이제 되지 않았는가? 이만하면 난 충분히 정신을 붙들고 있지 않았던가? 제발 자신을 놓아달라고, 풀어놓아달라고, 포악한 야수처럼 날뛰는 정신을 이만큼 오래 붙잡아두고 있었으면, 신이라도 내려와서 잘했다고 상이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

 

- 내가 이리도 미쳐버리고 말았는데,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같이 미친 사람들끼리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행운이 있기를. 가엾은 사람. 

 

- 배는 원래 물에 뜨게 되어 있는 물건이 아니야. 

 

- 윤희는 배를 정박하거나 돌리는 방법은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윤희는 선착장에서 나를 조용히 눈으로 배웅했다. 이해하고말고. 윤희의 눈이 내게 말하는 듯했다. 제 발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의 마음을. 최소한 거기는 이전에 살던 지옥과는 다른 곳이니. 적어도 신선하기는 하니.

 

- 저기까지만 버티면 된다. 

 

- 한 치 앞도 안 보이던 어둠이 걷히고 사방이 불꽃이 연이어 폭발하는 무지갯빛으로 변했다. 빗줄기는 희미해지고 하늘은 눈을 똑바로 들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빛났다. 바다 전체가 색종이를 뿌린 만화경처럼 영롱한 빛을 뿌렸다. 바위섬의 기암괴석들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였다. 적어도 이 풍경만은, 내가 일생 보아왔던 그 어떤 풍경보다도 찬란했다. 

 

- 그래, 알고 있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마저 띄우며 더할 나위 없는 확신으로 중얼거렸다.

 

- 언젠가 저는 결국 이 공포에 기력을 다 빼앗겨 죽게 되리라는 예감을 합니다. 

 


 

-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서 내내 고심한 것은 '무엇이 크툴루이며 코스믹 호러인가'였다. 

 

- 무엇이 '크툴루 같다'는 느낌을 만드는 걸까?

 

- 하지만 이내 그게 아닌 줄을 알았다. 물리적인 실체가 있고 맞서 대적할 방법을 상상하는 순간 그 이야기는 전혀 크툴루 같지가 않았다.

 

- 지인들과 대화하다가 내린 하나의 결론은 '절대적인 악의를 가진 전능한 것이 있고, 그 앞에서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무력한 인간이 체험하는 공포'였다. 하지만 무력함은 내 취향이 아니었기에, 무력하지 않고도 무력해질 방법이 무엇인가 고심하게 되었다. 

 

 

 

 
역병의 바다
한국의 대표 SF 작가들이 오마주와 전복으로 다시 창조하는 H. P. 러브크래프트의 세계 김보영, 김성일, 박성환, 송경아, 은림, 이서영, 이수현, 홍지운 그리고 최재훈 9인의 작가가 호러문학의 거장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을 오마주하며 2020년 우리의 현실 속 공포와 경이를 그려냅니다.
저자
김보영
출판
알마
출판일
202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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