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출판 : 엘릭시르
출간 : 2015.07.03
사쿠라바 가즈키의 <내 남자>를 무척 인상 깊게 읽었었기 때문일까. <야경> 또한 나오키 수상 후보였다는 것을 알고 나니 묘하게 나오키 특유의 분위기라는 것이 느껴지는 듯도 싶다.
내가 요네자와 호노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담백하고 담담한 서늘함이다. <빙과>나 <고전부>를 읽지 않아서인지 가볍다거나 따뜻하다거나 하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일본 특유의 느낌을 잘 살리면서도 절제되고 세련된 귀기가 있다.
<야경>은 단편집으로 동명의 단편을 포함한 6편이 수록되어 있다. 첫 작품으로 실린 표제작 <야경>에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선포한다.
'어디서부터가 비정상인가?'
그저 잘 맞지 않는 환경에 있었을 뿐, 이라는 흔한 비극이 어떻게 번져나가는지를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는 자칫 과하다 싶을 수 있는 선을 미묘하게 건드린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라고 불쾌해지면서도 문득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또 다른 나를 마주한다. 그런 일상 속의 기이함은 마지막 <만원>까지 평범함의 가면 속에서 선뜩하게 빛난다.
딱 잘라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은 남주인공들에 반해 대체로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서늘함이 다소 여성적이고 수동적인- 일종의 '한(恨)'처럼 느껴졌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대비가 언뜻 화려하게 보이는 야경과 그 뒤로 그늘진 어두움처럼, 마치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공격성을 그려내는 것 같았다.
<야경>을 발표할 시기에는 이미 기성 작가로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었기 때문인지, 중간중간 해외 독자를 의식한 듯한 서술들이 존재한다. 본문 중에서는 암시적으로만 표현하고 주석으로 다는 쪽을 더 선호하는 편이지만 <야경>의 경우는 그리 싫지 않았다. 조금 부적절한 듯이 눈에 걸리는 부분들이 전체적인 일그러짐을 더 강조하는 느낌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즐겁게 읽었다.
- 관할서 지역과에서 들은 인사 첫마디부터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묘하게 높고 나약한 목소리였다. 첫날에는 누구나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이 녀석의 경우는 도가 지나쳤다. 목둘레를 보면 어느 정도 단련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래도 약해빠진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타고난 몸의 선이 가녀리기 때문이리라.
- 신입이 미움을 받는 까닭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혈기가 왕성하다 보면 많건 적건 쓸데없는 일이 늘어난다. 늘어난 일은 동료를 위험에 빠뜨릴 때가 있다. 그래서 위험한 부서일수록 신입을 싫어한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다. 그 어떤 천방지축도 언젠가는 경찰 물에 익숙해져서 어깨 힘이 빠진다. 훈계로 끝내도 될 일과 사건으로 처리해야만 할 일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어쩌다 이런 녀석이 경찰이 되었나 싶은 사람도 삼 년만 지나면 쓸 만해진다. 때문에 고참이 신입을 굴리는 것은 연중행사 같은 일이지, 깊은 의미는 없다.
- 그래도 이따금 가망 없는 부류가 들어올 때가 있다. 채용시험에 합격해 경찰학교 훈련도 견뎌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결정적으로 경찰에 맞지 않는 게 눈에 보이는 놈들이.
- 예를 들어 경찰로서 지켜야 할 암묵적인 규칙, 마지막 선을 절대 이해 못 하는 인간이 있다. 구제할 길 없는 놈들과 내내 맞서는 동안 감각이 마비되는 것도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일이다. 윤리는 개한테나 던져주라고 생각하는 동료도 많다. 나 역시 털면 먼지가 나올 인간이다. 그래도 마지막 선이라는 게 있다. 때로는 그것을 잊을 때도 있고, 각오하고 뛰어넘을 때도 있다. 처음부터 그 선을 알지 못한다면 그런 인간은 경찰로 있어서는 안 된다.
- 자기가 본 것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인간도 이 일에는 썩 맞지 않다. 악인이란 소매치기 같은 자고, 경찰관이 나타나면 울며 사과하는 존재라고 믿는 자신의 경험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타입. 모든 사람들이 가죽을 한 겹 벗으면 속이 시커멓고, 사람이 하는 말은 전부 거짓말이라고 믿는 타입. 둘 다 빨리 그만두는 게 모두에게 바람직하다.
가와토 히로시는 어느 유형도 아니었다.
- 소심한 놈이다. 그저 야단맞는 게 무서웠던 것이다. 어린애처럼.
겁쟁이는 쓸모가 있다. 잘 키우면 겁 많은 성격이 신중한 경찰로 바뀔지도 모른다. 무모한 사람보다는 훨씬 낫다. 잘 안 된다 해도 내근으로 돌리면 잘 헤쳐나갈 것이다. 하지만 가와토처럼 소심한 놈은 안 된다. 저런 남자는 동료로 두기가 무서운 타입이다. 숨기려는 실수가 자물쇠 하나 정도라면 깜찍한 수준이다. 해는 없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런다는 보장은 없다. 이런 부하를 두는 게 처음은 아니다. 위가 불쾌하게 묵직했다.
- <야경 夜景>
- 완만한 비탈을 따라 만들어진 전답은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밭에 파릇파릇하게 난 것은 토란 싹이리라. 가옥들의 인공적인 지붕 색이 이따금 툭 불거져 보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길은 강 옆을 달리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물살이 세 보였다. 그래도 제법 상류까지 온 듯했다. 보아하니 강에는 어살을 질러놓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햇볕은 여름 그대로였지만 벌써 은어가 알을 낳으러 바다로 가는 철이다. 강 일부를 대나무로 만든 간이 댐으로 막아 강을 내려가는 은어를 기다린다. 강변 폭으로 보건대 원래 조금 더 너른 강이지만 최근 가뭄이 이어져 물이 마른 것이리라. 어살은 강폭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강변에 오두막이 있다. 잡은 은어는 손님에게 대접하는 듯했다. 마침 점심때라 밧줄로 간단히 선을 그어놓은 주차장에는 몇 대의 차가 보였다.
- 안내받은 방에는 '용담'이라는 표찰이 걸려 있었다. 들어가 보니 장식단이 있는 다다미 열 장 짜리 방으로, 장식장에 놓인 가느다란 꽃병에는 협죽도 꽃이 꽂혀 있었다. 조화인가 싶었는데 만져보니 촉촉했다. 아무래도 방금 전에 가지째 꺾어온 모양이다. 다른 종업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꽃은 사와코의 마음씀씀이로 느껴졌다.
(리뷰자 주 : 나는 이 대목에서 협죽도를 이용한 독살이 등장하나 했다...)
- 그렇게 온화하고 즐거운 표정을 짓는 사와코는 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삶의 보람을 찾아냈다면 본인에게는 지금 이대로가 가장 좋을지도 모른다. 즉, 사와코를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은 그녀를 염려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다시 출발하고 싶다는 내 바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다다미 위를 걷는 기품 있는 동작에서 일 때문에 걸음걸이까지 고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뭔지는 몰라도 사와코에게는 당연히 용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전할 말이 있었다.
- 이 년 전에는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사와코는 완전히 위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태의 그녀에게 나는 계속 노력이 부족하다는 말만 했다.
-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저녁 식사로 모처럼 먹음직한 곤들매기가 들어왔는데 주방장이 튀김과 소금구이, 어느 쪽을 좋아하시는지 여쭤보고 싶다고 해서요."
- 사와코는 아닐 것이다. 사와코의 글씨는 안다. 동글동글하고 말랑한 글씨였다. 유서의 글씨는 활자로 착각할 정도로 단정하고 한 글자도 흐트러지지 않아 인간미가 희박했다. 이 년 전 실종 이후로 사와코의 성격이 아무리 변했다 해도 글씨마저 이 정도로 변할 리는 없다.
- "아니. 이 년 전의 나였다면 남의 유서 때문에 열심히 고민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사와코는 내 반론을 비웃었다. 차갑고 메마른 웃음이었다.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론은 변함없잖아?"
-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와코의 말대로 내가 이 년 전과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얼굴을 보고 그만 그리운 마음에 의지한 게 잘못이었어. 당신이 옳겠지. 이 서류는 단순한 장난일 거야. ...나도 그러길 바라."
사와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남아 있으니 그만." 그런 말을 남기고 유서와 나를 남겨두고 방에서 나갔다.
강한 바람이 한차례 불어와 나뭇잎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용담실을 가득 채웠다.
- 나는 이 년 전, 상사와 맞지 않아 괴로워하는 사와코를 보면서도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참아야 한다고 말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렇게 지독하게 심술을 부리는 사회인이 있을 리 없으니, 사와코가 고통을 호소해도 어리광이라고 내쳤다.
나중에야 그게 잘못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런 줄 알았다.
- 하지만 나는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 '일어날 리 없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배우지 않았던가? 어떤 일이든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런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다 보면 기우에 빠진다.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거의 있을 리 없는 일은 무시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길도 다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사와코에게 아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합리성보다 온정이 중요할 때도 있어...
- <사인숙 死人宿>
- 평소에는 조용한 경내에 야간 노점이 가득 들어서서 다코야키와 볶음국수, 닭꼬치를 팔고 있었다. 전부 그리 맛있지는 않다는 걸 안다. 더 맛있고, 더 싸게 먹을 수 있는 가게가 상점가에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나는 노점에서 파는 상품은 음식이 아니라 축제의 분위기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날이 저물자 둥근 전구가 여기저기에서 빛났다. 느긋한 환성이 끊이지 않았다.
- "잠깐 보고 가자."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기에 따라가자 에마에 부적, 제비점. 토령이 놓여 있었다. 하얀 초벌구이 토령으로 꼭지에 새끼줄이 묶여 있었다. 살짝 짓이긴 것처럼 일그러진 모양이다. 나무주걱으로 반듯하게 선을 그어놓았다. 아버지는 토령 하나를 손에 들고 재미있다는 듯이 실눈을 떴다.
"보렴, 유코, 이 방울, 석류 모양이야."
"석류?"
그때 나는 석류 이야기를 아직 몰랐다.
"케이크에 쓰는 나무열매잖아. 왜 절에 있어?"
(역자 주 : 에마. 신이나 신사에 소원을 적어 봉납하는 말 그림이 그려진 목판.)
- 아버지는 토령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귀자모신 이야기. 귀자모신은 밤이 되면 거리로 나가 아이들을 납치해 잡아먹는 나쁜 귀신 귀자모신을 혼쭐 내주려고 부처님이 귀자모신의 아이를 감춰버린다. 슬퍼하는 귀자모신에게 부처님은 설파했다.
'부모가 아이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 아이를 잃은 고통을 알았을 테니 앞으로는 사람의 아이를 먹어서는 아니 된다.'
-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치만 귀신은 원래 그런 거잖아. 먹으면 안 된다니, 그럼 죽으란 말이나 마찬가지잖아?"
아버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유코는 똑똑하구나. 네 말이 맞아. 그래도 귀자모신은 잘못을 뉘우치고 인간의 아이를 잡아먹는 짓을 그만두었어. 그만두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좋아서 먹었을 뿐이겠지."
"뭐야."
"그 후로 귀자모신은 육아와 출산의 신이 되었고, 석류를 든 모습으로 그려지게 되었어. 석류는 씨가 많아서 다산을 의미한단다."
"씨가 많아?"
"그래. 유코는 석류를 본 적이 없지?"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내 키에 맞추어 몸을 숙이더니 비밀스럽게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가을이 되면 둘이서 소풍 갈까? 석류나무에 열매가 맺힌 모습을 함께 보자꾸나. 잘 익었으면 따서 먹는 거야."
"정말?"
"그럼, 약속하자. 유코가 잊지 않는다면."
나는 입을 비죽였다.
"아니야, 아빠가 잊지 않아야지."
아버지는 내 머리에 다정하게 손을 얹었다.
"괜찮아, 유코에게는 가을이 먼 미래일지도 모르지만 어른에게는 내일이나 다름없거든."
-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좋았다. 아버지 말대로 내게 가을은 머나먼 미래였지만, 아버지와 나눈 약속이 기뻐서 견딜 수없었다. 가을이란 언제를 말하는 걸까, 구월이 되면 가을일까? 시월까지 기다려야 할까?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그해 여름은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 그리고 가을, 나는 석류를 먹었다.
아버지와 단둘이, 아무도 오지 않는 산속에서.
- 책배가 닳은 책에서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를 펼쳤다. 페이지에 자국이 나서 굳이 찾지 않아도 금방 펼칠 수 있다. 석류 이야기.
농경의 여신 데메테르에게는 페르세포네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어느 날, 페르세포네는 지옥의 왕 하데스에게 납치되고 만다. 페르세포네는 그곳에서 석류 열매를 받는다. 그녀는 그 열매를 먹고 만다. 지옥에서 음식을 먹은 자는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여신인 어머니가 딸을 찾으러 왔지만 규칙을 어길 수는 없었다. 페르세포네가 먹은 것은 석류 열매의 3분의 1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일 년 중 3분의 2는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나는 다르다.
가을이 되면 둘이서 소풍 갈까? 석류나무에 열매가 맺힌 모습을 함께 보자꾸나. 잘 익었으면 따서 먹는 거야. 귀자모신 사당에서 나눈 약속을 나는 잊지 않았다. 가을이 되면 어머니의 눈을 피해 나는 아버지와 만났다.
"유코는 정말 많이 컸구나. 그럼 갈까?"
약속은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나를 차에 태워 나무들이 색색으로 물든 산속으로 데려갔다.
석류는 아직 무르익지는 않았지만, 너무 이르지도 않았다.
- 나와 아버지는 하루 종일, 실컷 그 열매를 먹었다. 아버지의 촉촉한 입술이 더럽혀진 내 입술을 닦아주었다.
- 페르세포네와는 다르다. 나는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다. ...나는 아직 더 자랄 것이다.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그러니 사하라 나루미에게는 나만 있으면 된다.
- 어머니가 이혼을 생각한 이유는 알고 있다. 거의 혼자 힘으로 나와 쓰키코를 키워준 어머니에게는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람은 너무 아름답다. 과거에 아버지를 사로잡은 미모는 생활에 찌든 지금도 여전히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그런 사람이 제 발로 나루미에게서 떠나다니 기적에 가까운 기회였다.
- 그리고 지금, 나는 나루미 곁에 있다. 마음 밑바닥을 뒤흔드는 저 신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매일 나를 향한다. 사하라 나루미는 내 트로피다.
- 진짜로 책을 읽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지만 도서실에는 의외로 학생들이 많다. 그래서 쓰키코는 한참 당황스러운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내가 오히려 먼저 발견하고 가볍게 손을 들 때까지 몰랐던 모양이다.
- "역시 여기 있었네."
쓰키코가 빙글 걸음을 돌렸다. 샴푸 향기가 살포시 풍겨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어머니는 물러났다. 그러니 지금 나 말고 나루미 곁에 있는 아름다운 사람은 쓰키코뿐.
- 나는 어머니의 미모를 물려받았다. 쓰키코는 거기에 귀여움과 연약함까지 있다. 둘 다 타고난 매력이 될 수 있다. 즉 인정하기는 싫지만 동생은 내게 없는 매력을 가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 석류 이야기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페르세포네는 석류를 먹고 일 년 중 3분의 1은 하데스의 아내가 되었다. 하지만 하데스는 어느 날 아름다운 요정에게 반하고 만다. 자신을 약탈한 하데스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는 꼴을 페르세포네는 용서하지 않았다. 요정을 능멸하고, 저주하고, 잡초로 바꾸어버렸다고 한다.
- 그날 밤 보았던 하얀 나신은 말간 달처럼 아름다웠다. 누구든 분명 입술을 가져가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 <석류>
- 나도 뇌물 문화에는 제법 빠삭하다고 생각했다. 집주인이 임차인에게 심술을 부려서 푼돈을 뜯어내는 정도라면 드물지도 않다. 하지만 인프라 기업이 인프라를 끊어가면서까지 푼돈을 벌다니 금시초문이다. 얼토당토않은 나라에 왔구나 싶었다.
"항의해도 소용없겠지?"
"고장이라는 말이나 할걸요. 내버려 두면 한 달은 이 상태일 겁니다."
- 자재 반입 루트를 확인하려고 항구도시 치타공을 찾았을 때 사이클론의 직격을 만난 적이 있다. 방글라데시의 사이클론이 강력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일본의 태풍과 그리 다를 바 없을 거라 만만하게 보았다. 실제로 풍속은 초당 30미터 안팎으로, 그 정도 바람의 태풍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몇 번이나 경험했다. 하지만 사이클론이 무서운 이유는 풍력이나 강우량만이 아니었다.
- 사이클론이 지나간 뒤 거리에 있던 관목들이 무참히 말라죽기 시작했다. 현지 직원이 그것을 가리키며 태평하게 웃었다.
"저거 열기에 당한 거야."
"열기에?"
"사이클론 뜨겁다. 사무소 안에 있었으니 몰랐던 거야."
사이클론이 다가올 때 우리는 사무소로 피난했다. 그때 이상하게 덥다고 생각은 했지만 또 평소처럼 에어컨이 고장난 줄로만 알았다. 설마, 그 사나운 바람이 열풍이었을 줄이야.
"사이클론이 그렇게 뜨겁나?"
"그럼, 50도쯤. 그 바람을 맞으면 나무도 말라죽어. 보스도 조심해. 만약 밖에서 사이클론의 열풍을 맞으면 눈이 멀어."
- "기혼이었군."
"예, 아들이 태어나서 사흘 후에 싱가포르로 발령받을 예정이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는데 이런 꼴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뭐, 일본에 있어도 교통사고는 당하니까 일이 나빴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 팔자죠."
그는 내 죄책감을 꿰뚫어 봤을 것이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다카노인데 그는 나를 염려하며 떠났다. 무함마드 제라르의 장례식에는 참석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내가 이교도였기 때문이다. 지사의 예산 규모로는 그의 유족에게 충분한 위로금조차 줄 수 없었다.
- 이 짧은 대화로 나는 알람 아베드라는 인물을 헤아렸다. 그에게는 틀림없이 카리스마가 있다. 식견도 있다. 마을의 마타보르보다 정치적 리더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마저 든다. 또한 그는 경솔한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반면, 한번 결론을 내렸다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편협한 사람 같지도 않았다. 그가 이게타 상사도 OGO도 거부하는 데는 분명 논리적인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 이유를 끌어내야만 한다. 무심코 몸이 앞쪽으로 기울었다.
- "마타보르 알람, 저는 이 마을에 멋대로 찾아온 게 아닙니다. 오라는 편지를 받고 달려온 겁니다. 그건 당신 본의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마을 명의로 보낸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그런데 제 작은 질문마저 무시하다니 불성실한 것 아닙니까?"
알람은 처음으로 눈길을 떨구었다. 나는 재차 다그쳤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해결 못할 문제라면 포기하겠습니다. 요청은 취하하고 앞으로 두 번 다시 이 마을에 접근하지 않겠노라 약속드립니다."
이제는 대답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알람은 눈을 감았다. 마치 명상이라도 하는 기색이었다.
- "... 이 나라는 언젠가 그 천연가스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일억 수천만 명에 이르는 방글라데시 국민들이 풍요롭게 살기 위해 에너지 자원의 필요성은 반드시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그 자원은 언젠가 우리 자손들이 불을 켜고, 음식을 차갑게 보관하고, 지하수를 퍼올리는 데 필요한 것이다. 이게타 상사, OGO. 일본에도 프랑스에도 넘겨줄 수는 없어!"
허락만 된다면 혀를 차고 싶었다. 땅을 빼앗길까 봐 소박하게 회피하는, 단순한 농촌의 저항이라고 생각한 게 안일했다. 설마 보이샤크 마을에 이런 인물이 있을 줄이야.
- 머릿속 어딘가에서 이것은 이상하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몹시 희박해서, 나는 마치 기획을 음미하듯 샤하가 털어놓는 계획을 듣고 있었다.
-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오카야마가 고향이라, <빈고노쿠니 풍토기>라는 게 있는데, 거기에 비슷한 얘기가 나와요. 어느 날, 마을에 이방인이 찾아옵니다. 마을에는 가난한 형과 부유한 남동생이 살고 있었어요. 동생은 이방인을 재워주지 않았지만, 가난한 형은 흔쾌히 집을 빌려주고 식사도 대접했습니다. 사실 이 이방인이 역병을 관장하는 신이지요."
"흠."
"훗날 신이 돌아옵니다. 집을 빌려주지 않았던 부자와 그 일족을 역병으로 몰살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부자에게는 가난한 형의 집에서 시집온 딸이 한 명 있었습니다."
"이상한 얘기군요. 형의 집에서 동생 집으로 시집을 보내다니."
"꼭 동생의 아내가 되었다고 볼 수는 없죠. 동생 집에는 고용인들이 많았을 테니까요. 어쨌든 형에게 빚이 있던 신은 화를 피할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띠로 만든 고리를 허리에 찰 것. 그것을 차고 있는 자는 형의 일족으로 인정해 살려주겠노라고요. 동생의 가족은 한 명도 남김없이 목숨을 잃었지만, 약속대로 띠로 만든 고리를 차고 있던 여자는 살아남았죠."
- 뒷이야기는 내가 받았다.
"그 후로 '가난한 형'의 자손이라고 표명하면 역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신앙이 생겼지요. 띠로 만든 고리는 점점 커져서 지금은 사람 키만큼 큰 고리를 통과하게 되었고요."
모리시타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야, 알고 계셨어요?"
"듣다 보니 생각났습니다. 소민 쇼라이 전설이죠?"
핸들에 손을 얹고 차차 어두워지는 방글라데시의 평원을 바라보았다.
"띠로 만든 고리가 아니라 케미컬라이트 막대인가. 그럼 우리가 역신이겠군요."
"... 아뇨. 그건 저희가 아닐 겁니다."
- "그나저나 <빈고노쿠니 풍토기>라고 하셨는데, 그건 좀 부정확하지 않습니까? 분명 구전설화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는 일본인이 늘고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주위에는 외국계 기업으로 간 사람은 일본 기업에서 견디지 못한 아웃사이더로 보는 이들이 많다. 나 역시 그런 편견을 떨쳐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 "꼭 그렇지도 않아요. 대학교까지는 일본에서 나왔습니다. 동양철학을 공부했던 게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느새 남아시아를 여행하고 있었죠. 그때 벵갈어를 배웠습니다. 이왕 그렇게 된 거 벵갈어를 살리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잘 안 돼서요. 맞아요, 이게타 상사에도 지원했습니다. 벵갈어는 어느 나라 말이냐고 묻더군요."
확실히 방글라데시 개발에 뛰어든 지금이라면 몰라도, 본사 인사 담당이 과거에 벵갈어 능력을 높게 평가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만일 모리시타가 내 부하였다면 제법 일이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국내는 포기하고, 친구 도움으로 OGO를 소개받았습니다. 그래도 두 달에 한 번은 일본에 돌아갑니다."
"그랬군요."
그만큼 자주 귀국한다면 단순한 향수가 이유일 리 없다. 아마도 가족이나 연인이 있겠지.
- "띠 고리 통과 의식도 본 적이 있어요. 여름이었는데, 근처 신사 경내에 큼직한 고리가 있었죠. 사람들 줄이 어찌나 길던지 짜증이 나서 중간에 길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잖습니까, 다코야키가 가장 큰 즐거움이었어요."
어딘가 흐뭇한 기색으로 말하는 그 광경은 나도 본 적이 있다. 띠로 만든 고리야 어쨌든, 잿날의 부산스럽고 들뜬 분위기는 일본을 떠난 지 십여 년이나 지난 내 가슴에도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반짝이는 전깃불, 철판을 달구는 불. 아이들은 인파 속을 누비며 달음박질을 친다. 그 특별한 날에도 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 <만등 萬燈>
- 소재를 자유롭게 맡긴다는 건 신뢰의 증표라 솔직히 기뻤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네 페이지짜리 기사가 가장 큰 고민거리가 될 줄 알았다.
아껴둔 소재가 없었다. 소재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짐작도가지 않았다. 괴담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 라이터를 직업으로 삼은 지 칠 년이 된다. 스포츠 분야 전문 라이터가 되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격투기, 복싱이나 레슬링에 강했고 검도나 유도 같은 무술 계통도 대강은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일을 시작했다. 장래에는 스모기사도 쓰면서 이름과 격을 높이고 싶었다.
- 그리고 차츰 깨달았다. 나는 스포츠에 대해 자세히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내가 아는 정도의 지식을 가진 사람은 넘쳐난다는 사실을.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지식의 결여는 보충하면 된다. 그런데 치명적이게도, 나는 특별히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화려한 월드 매치에는 달려들어도 처참한 무제한 승부나 오프닝 경기에는 흥미가 식어버린다. 기대의 유망주를 직접 발굴하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누가 한차례 떠들고 지나간 다음에 뒤를 쫓을 수밖에 없다. 요컨대 가장 잘하는 줄 알았던 스포츠 분야에서도 나는 표면적인 흥미밖에 갖지 못했다는 뜻이다.
- 그래도 재주는 있는 편이라 아무거나 쓸 수 있다. 속으로는 별 볼 일 없다고 비웃으면서도 칭찬해 달라는 소재를 칭찬하는 기사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일을 주던 선배는 그런 내 성격을 꿰뚫어 보았다. 몇 번이나 이런 충고를 해주었다.
"잘 들어, 팔방미인이 되지 마. 너는 재주가 좋으니 아무거나 쓸 수 있겠지. 하지만 정말 아무거나 쓰다 보면 미래가 없어."
그럼에도 나는 눈앞의 삼만 엔, 오만 엔을 쫓아 바로 그런 팔방미인이 되었다. 지난 일 년, 스포츠 쪽 의뢰는 한 건도 들어오지 않았다.
- 이러이러한 괴담에 대해 기사를 써달라는 의뢰를 받으면, 완성도와 속도는 프로에 버금간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마음대로 네 페이지를 써달라고 하면 손이 딱 멈춰버린다. 늘 있는 일이었다.
- 결국 나는 이번에도 선배에게 달려갔다. 선배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당부한 충고를 전혀 듣지 않은 나를 아직도 따뜻하게 맞아준다. 그리고 확실히 유능했다. 선배의 전문 분야는 주술이나 기도 같은 고전 오컬트로, 괴담은 전문에서 조금 벗어난 분야였다. 그런데도 바로 소재를 하나 내주었다.
- "이즈인데 헤이케일 리가 있나."
"그런가요."
선배에게는 이즈에서 패잔병이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칠 뿐이다. 전문 분야가 다르니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패잔병이라..."
감이지만, 괴담 책을 손에 드는 독자의 취향에는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소재를 다룬다고 해도 캐릭터는 더 고민해 봐야겠다. 무참하게 죽은 폭주족 아니면 일본군의 유령, 그렇게 꾸미면 폼은 나겠지...
- 문득 파일에서 시선을 들자 선배가 팔짱을 끼고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쓸 만한 소재가 아니라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마음이 변해서 직접 쓰고 싶어 졌나?
- 둘 다 아니었다. 선배는 이윽고 신음하듯 이런 말을 했다.
"아니, 역시 그건 그만두는 게 낫겠어."
"왜요?"
빈말로 그렇게 물었다. 선배는 윗몸이 풀썩 꺾일 정도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내 직감인데... 아무래도 그건 진짜 같아. 이제야 생각났어. 그 소재는 그래서 묵혀뒀던 거야."
"진짜라고요?"
심각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이런 건 또 잘한다. 내심 선배의 나쁜 버릇이 나왔구나 싶었다. 이것만 없으면 좋은 사람인데.
"그래, 가쓰라다니 고개에는 뭔가 있어. 뭔가가 존재한다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할까? 어지간히 신중한 자세로 덤비지 않으면 위험해."
- 선배는 이따금 이렇게 '믿음'에 가까운 소리를 한다. 나는 그때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궁금했다.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기는 싫지만,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은 바보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유령에 대한 글을 쓰는 건 좋다, 부추기는 것도 괜찮다. 그렇지만 그런 걸 믿어서 어쩌자는 말인가?
- 그때 나는 가쓰라다니의 사고를 '괴담'으로 각색하기로 했다. 달리 쓸 만한 소재도 없고, 시시한 소재를 그럴싸한 글솜씨로 속일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걸로 하기로 결심한 첫 번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선배의 미신 같은 표현을 웃어넘기고 싶었던 것이다.
- "가쓰라다니 관문에 대한 건 여기에 적혀 있다오. 글씨가 작아 난 못 읽으니 읽어주겠소?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마르네. 차를 끓여 와야겠어. 총각도 마실 거지?"
그 말을 듣고 허둥거렸다.
"아니, 커피를 한 잔 더 부탁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커피 한 잔으로 너무 오래 버텼다. 원래대로라면 정보료를 내도 시원찮을 판이니 추가 주문은 최소한의 예의다.
"좋소, 좋아."
- 가쓰라다니 관문은 후카네 성의자차마루가 호조 일족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관문이다. 즈난 정 전승에 따르면 자차마루는 의심이 많아, 가쓰라다니 관문에 철통 같은 문지기를 두고 이곳을 통과하려는 자를 전부 호조 일족으로 간주해 죽이도록 명했다. 왕래가 끊긴 사람들은 생활이 어려워져 자차마루를 극심히 원망했다고 한다. 이윽고 자차마루는 궁지에 몰려 자결했고 자차마루를 몰아낸 호조일족도 도요토미 일족에 멸망한다. 가쓰라다니 관문은 철폐되었고 과거를 엿볼 수 있는 유적은 오로지 길을 지키는 행신 석비 하나뿐이다. (즈난 향토유산 20선)
- "... 바깥양반이었다오. 평소에는 미덥지 못한 구석도 있었는데 그때는 얼마나 일을 척척 처리하던지. 나잇살이나 먹어서 주책이지만 이 사람하고 결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지. 다만 손녀를 달래는 게 힘들었어."
- "... 우리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사에카미였다오. 사에카미 님이 딸과 손녀를 지켜주셨다고 믿었지. 다만 그 때문에 사에카미 님의 목이 부러지고 말았어. 바깥양반은 똑똑한 사람이었다오.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바로 알아차렸으니까."
- <문지기>
- 길도 모르는 조후에 혼자 찾아가서 선배가 연필로 대충 그려준 엉터리 지도만 믿고 판장과 생울타리 사이를 헤매다가 겨우 도착한 우카와가 현관 앞에서 나를 맞아준 게 다에코 씨였다. 나이는 스물일고여덟 살, 아직 생활고도 묻어있지 않은 차분한 미소 속에 당당한 기품이 있는 신비한 사람이었다.
- 우카와가는 선대부터 다다미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가게와 거주 공간을 겸한 이 층짜리 기와집은 품격이 있었다. 기둥도 굵고 천장판에도 마디가 없어 화려한 멋은 없는 듯하면서도 난간에 섬세한 세공이 들어가 있었다. 바지랑대를 질러놓은 마당은 좁았지만 얼음장 같은 추위 속에서 겨울 동백이 짙은 초록빛 잎 사이로 붉은 꽃을 틔우고 있었다.
- 다만 내 눈에는 그 집에 뭔가가 결여된 것처럼 보였다. 주방에 응접실, 게다가 위패를 모셔놓은 방까지 구경했지만, 필요한 게 반듯하게 놓여 있을 뿐이지 인간미가 없었다.
- 우카와 가게에서는 중고 다다미를 취급하지 않는다. 원래 중고 다다미는 돈을 받고 파는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시게하루는 처음부터 그것을 팔 셈이었다. 중고를 팔 거냐는 말에 화를 냈으니 아마도 신제품으로 속여서 손님에게 팔 속셈이 아니었을까?
- 나는 법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젊은 나이에 걸맞게 법의 정의를 믿고 공정함을 중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시게하루의 사기 행위에는 화가 치밀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확증이 없다. 그 시점에서 시게하루는 단순히 중고 다다미를 받아 왔을 뿐이다. 아무리 하숙생에게 냉담하다지만 시게하루는 화재로 길거리에 나앉은 나를 받아들여준 은인이다. 스파이 짓까지 해서 좀스러운 경범죄를 폭로하기는 꺼려졌다. 나는 아무것도 못 본 셈 쳤다. 뱃속에 앙금처럼 남은 불쾌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지만.
- 툇마루 문을 활짝 열고 발을 내려 방에 바람길을 터놓았다. 모처럼 산들바람이 불어 처마 끝 풍경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다에코 씨는 유카타 차림으로 손에 부채를 들고 있었다.
- 군데군데 바람이 든 별로 신선하지 않은 수박이었다. 맛을 모르는 학생이라 배부르게 따질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희희낙락 크게 베어 물었다. 다에코 씨는 한입 먹고는 "어머나" 하고 일어서더니 작은 병을 들고 돌아왔다.
"이걸 쓰세요."
"이건?"
"소금이에요."
"어라. 수박에 소금을요? 왠지 이상한데요."
- 부끄럽지만 나는 수박에 소금을 쳐서 먹는 방법을 몰랐다. 정체 모를 물건을 멀찍이서 구경하는 원숭이처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소금병을 쳐다보기만 했다. 다에코 씨는 그런 나를 보고 살짝 웃었다.
"이렇게 먹는 거예요."
삼각형으로 비죽하게 자른 수박 끄트머리에 소금을 한 번 치더니 입을 작게 벌려 아삭 베어 먹는다. 나도 주뼛주뼛 흉내를 냈는데 그때까지 수박이 그토록 맛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렇구나. 이거 좋네요. 맛있어요."
"이상한 분이네요."
다에코 씨는 이번에는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 변호사라는 직업상 나도 많은 금융업자를 만났다. 그들의 성격이나 기호는 다양하지만 이상하게도 눈 하나는 비슷했다. 상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려는 눈이다.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얼굴로 돈을 빌려놓고 빌릴 때와 갚을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발뺌한다. 몇 차례 그런 꼴을 당하다 보면 다들 그런 얼굴이 된다고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남자가 알려주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는 그 말이 대개 맞는다.
- 작은 달마에는 한쪽에만 눈동자가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카와 다에코가 나와 함께 산 달마일지도 모른다. 내가 산 달마는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만원 성취의 의미로 두 눈을 그려서 절에 바쳤다. 하지만 우카와 다에코의 달마가 어찌 되었는지는 들은 바가 없다.
(역자 주 : 일본에는 두 눈이 없는 달마 조각상을 사서 소원을 빌 때 한쪽 눈을 그려 넣고 소원이 성취되면 나머지 눈을 그려 넣어 사찰에 바치는 관습이 있다.)
- 당시 나는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오로지 공부만 하려고 해도 장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만 의미 없이 길어지고 성과는 희박한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식욕도 없고 잠도 얕고, 사람도 만나지 않아 학교 친구들에게도 걱정을 끼쳤다. 시험 기간이라 대학에서 강의를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초조함에 박차를 더했다.
- 몇십 분이나 걸었을까. 다에코 씨가 불쑥 멈춰 서더니 입을 열었다.
"후지이 씨. 고개를 들고 잠깐 봐요."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꽃 터널 안에 있었다.
- 운치 있게 자란 가지에 새하얀 꽃이 무수히 피어 있다. 그것을 본 순간 귀에는 새 소리가 코에는 향기가 되돌아왔다.
"하아... 아름답네요."
나는 신음했다.
"마침 좋을 때라서요. 한창때네요."
- "이건 벚꽃이 아닌 것 같군요."
내가 딱딱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다에코 씨는 난처한 듯 웃었다.
"목련이에요. 백목련이죠."
"아아."
이게 목련이라는 겁니까, 라는 말은 부끄러워서 차마 하지 못했다. 나는 대학 4학년이나 되어서 목련꽃도 못 알아볼 정도로 무식했던 것이다.
- "문제가 있나요?"
끝없이 이어질 듯한 꽃길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나는 친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사정을 술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희 집은 지바에서 어업을 하는데 아무래도 요새 어획량이 적어 여태처럼 학비를 대주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어획량만 문제가 아니었다. 오래도록 힘겨운 일을 해온 아버지가 무릎이 고장 나서 예전처럼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당장 급한 학비나 하숙비는 어떻게든 되겠지만 앞으로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아무래도 초조하네요. 어떻게든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싶은데 제게는 대학을 졸업한 뒤까지 계속 공부할 수 있는 시간도 돈도 없습니다."
"사법시험이란 게 그렇게 어려운가요?"
"오 년 십 년 공부는 당연하고, 이십 년이나 걸려 합격한 사람도 있습니다. 학생 신분으로 합격하는 건 꿈같은 얘기죠."
- 힘겨운 노력 덕에 성적은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 회전도 빠르다고 할 수는 없고 사고의 유연성도 부족한 편이라 등용문을 한 번에 통과하기에는 다소 실력이 부족하다고 통감도 하고 있었다. 뭐가 부족한지 알아도 그것을 어떻게 해야 채울 수 있는지 눈에 보이는 대책이 없었다. 괴로운 시기였다.
- "뜻대로 안 되는 게 세상일이에요. 진창 속에서 몸부림치는 괴로운 날들도 있겠죠. 하지만 후지이 씨, 긍지를 잃어서는 안 돼요. 가슴속에 자부심만 굳게 품고 있으면 어떤 불행도 견뎌낼 수 있어요.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했잖아요? 전 그걸 지켜봤어요. 하늘도 분명 지켜보고 있었을 거예요... 오늘은 정성껏 소원을 빌어요."
- 목련도 몰랐던 나는 당연히 알지 못했지만, 그날은 조후진다이지 사찰 축제날이었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 절의 참배로는 산문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오랫동안 하숙집 2층에 틀어박혀 있던 내게는 눈부신 광경이었다. 정정한 노파도 있는가 하면 깡패 같은 젊은이도 있고, 관광객으로 보이는 단체도 있는가 하면 인파 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다에코 씨의 볼일이라는 게 이거였나. 그렇게 이해한 것도 잠시, 나는 다에코 씨를 놓칠까 봐 도라지 무늬 비단 기모노만 바라보며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경내 구석에 설치된 공양소였다. 아직 눈동자가 없는 달마가 사람들 손에 넘어가는 가운데, 공양소에는 두 눈이 그려진 달마가 속속들이 들어왔다. 너무 혼잡스러워 앞이 꽉 막혀 있다 보니 콩주머니처럼 달마를 던져 넣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다에코 씨는 딱히 그곳을 보여줄 생각은 없었는지 걸음을 멈춘 나를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 아마도 저 달마들에게도 저마다 어떤 소원을 담았을 것이다. 만원滿願은 이루어졌고, 달마는 성취를 지켜보았다. 무수한 소원과 성취를 두 눈으로 보니 신비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내 학업이 결실을 맺을까?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까? 내게 중요한 일은 오직 그뿐이었다. 분명 난관이기는 하지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이렇게 많은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내게 길이 없을 리 없다. 생각해 보면 비논리적인 자신감이었지만 울적하게 발밑만 바라보던 날들에 문득 훈풍이 불어와 나쁜 꿈이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 "달마를 골라요."
기분 탓인지 들뜬 목소리로 다에코 씨가 그렇게 권했다.
"후지이 씨처럼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이제 하늘의 도움만 기다리면 돼요. 이곳 달마 시장은 굉장히 유서가 깊으니 분명 영험할 거예요."
위로의 말도 순수하게 가슴에 닿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초봄의 경내에서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말씀은 그래도 그렇게 훌륭한 부인을 만나셨으니 부럽습니다. 저도 장차 아내를 얻어 검소하게나마 둘이서 사는 게 꿈입니다."
"훌륭한 부인?"
시게하루는 콧방귀를 뀌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학생 양반, 올해 몇 살이지?"
"하아, 스물둘입니다."
"스물둘이라.
그렇게 되뇌더니 천박한 미소를 지었다.
"그 나이면 조금 더 인생살이가 뭔지 알 만도 한데. 뭔지는 몰라도 까다로운 시험을 본다는 것 같으니, 그런 여유가 없는 건 안 됐다고 하면 안 된 일이지만."
말로만 안쓰럽다고 하면서 됫박을 탁 내려놓았다. 시게하루는 제 손만 바라보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술이 센 것도 불행이지만 마누라가 훌륭한 건 더 나빠."
"나쁜 일입니까?"
"학생 양반한테는 어렵겠지만."
- 졸업 후 사 년이라는 세월은 내게 노도와 같은 시간이었다. 사법 연수생을 거쳐 선배 변호사 사무소에 들어가 잔심부름을 하면서 업무 기초를 배웠다. 재학 중에 합격했다는 이유로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이목을 끌어 사무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옮길 곳을 찾다가, 뒤를 돌봐준 선배가 그 정도면 독립하는 게 낫겠다고 도와주어서 개인 사무소를 차릴 수 있었다.
- 난방 기구라고는 화로밖에 없는 절에서 경문을 들으며 나는 문득 그가 어떻게 다에코 씨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도 알 길은 없으리라. 사람들한테는 저마다 예기치 못한 운명이 있고, 그것을 꼬치꼬치 캐묻는 짓은 실례되는 일이다.
- 에어컨에서 나오는 온풍에 서류가 펄럭였다. 의자가 너무 낡아 작년에 가죽 의자로 바꾸었다. 지난 십 년, 다행히 많은 사람들에게 업무 능력을 평가받아 사무소 경영은 궤도에 올랐다. 결혼해서 딸을 얻었다. 옷과 음식 취향이 바뀌었다. 나는 나이를 먹었다.
- <만원 滿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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