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테리 프랫쳇 / 닐 게이먼 / 이수현
원제 : Good Omens
출판 : 시공사
출간 : 2019.02.11
아마존 프라임에 <멋진 징조들은2> 예고편이 떴다. 이 시점에서 이 책을 한 번 언급해주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어 -는 사실 농담이고 마침 다 읽고 났더니 그렇게 되어 있었다- 완독했다. 최근 읽었던 책들과 겹치는 순간은 '레이 선(Ley lines)'.
드라마 <Good Omens>은 정주행했던 터라 읽는 동안 해당 드라마의 이미지들이 자동재생 되었다. 벤틀리만 제외하면 상당히 원작을 충실하게 잘 반영했다고 생각 하는데, 조금 놀랐던 부분은 크롤리의 성수 목욕과 아지라파엘의 유황불 샤워는 드라마에서만 등장하는 장면이었다는 점.
이미 원작은 완결되어 있는 이 드라마의 시즌2가 무척 기대된다.
무언가에 관해 깊게 관심을 두고 이해한 사람은 그 주제를 가볍게도 다룰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적절히 힘을 빼고, 지나치게 무겁지 않게 그것을 다룰 수 있게 된 이야기꾼의 재담은 마치 화려하게 움직이는 한 판의 야바위 판과도 같다. 독자들은 빠르게 흔들리는 컵이 보여주는 환상에 홀린 채로 잠깐씩 나타나는 그것의 진실 또한 함께 받아들이게 된다.
잘 쓰여진 책이라고 생각한다.
즐거웠다.
- 화창한 날이었다.
- 날이면 날마다 화창했었다. 이때까지 일곱 날이 조금 더 지났고, 비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에덴의 동쪽에 모여드는 구름 떼는 첫 번째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 그것도 큰 폭풍이리라는 것을 예고했다.
- "솔직히 말하자면 좀 과잉반응 같아." 뱀이 말했다. "그러니까, 처음 저지른 죄잖아. 어쨌거나 나로선 선과 악의 차이점을 안다는 게 뭐가 그리 나쁜 지도 알 수가 없는걸."
"나쁜 일임에는 분명해." 아지라파엘의 말투에는 희미하게 자기 역시 그게 나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 점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는 기색이 묻어났다. "그렇지 않다면 자네가 얽혀 들지도 않았겠지."
- "나 보고는 그냥 거기 올라가서 말썽을 좀 일으켜보라고만 했단 말이야." 뱀이 말했다. 그의 이름은 원래 크롤리였지만 이제 이름을 바꾸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징그러운 존재가 아니라고 결정했다.
(역주 :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이 부분을 지나면 크롤리는 자신의 이름을 '기어 다니는 동물'을 의미하는 'Crawly'에서 '까마귀 숲' 또는 '영웅의 후손'을 의미하는 'Crowley'로 바꾼다. 영어로는 철자가 바뀌지만 한글로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둘 다 '크롤리'로 표기했다.)
- "그게 애들 연극 같다는 건 인정하겠지?" 크롤리가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 나무에다 화살표를 그어놓고 커다란 글씨로 건드리지 말 것이라고 해놓다니 그다지 교묘하다곤 할 수 없잖아? 그러니까, 왜 그 나무를 높은 산꼭대기에 올려놓든가 멀찍이 떼어놓지 않았느냔 말야? 정말이지 그분이 뭘 계획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지잖아."
- 그들은 빗방울이 최초의 꽃들을 상처 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당혹스러운 침묵에 잠겨 앉아 있었다.
- 그는 크롤리에게 걱정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잘한 거겠지?"
"자네가 나쁜 일을 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모르겠군." 크롤리는 냉소적으로 대꾸했지만, 아지라파엘은 그것이 비꼬는 말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 멀리 빗방울 듣는 숲 속에서는 눈부시게 타오르는 물건이 나무들 사이로 흔들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어둡고 폭풍우 치는 밤이 될 것이었다.
- 이것 역시 틀렸다. 15분 정도.
화석으로 발견된 공룡 뼈에 얽힌 일들은 모두 농담이었건만 고생물학자들은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
-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증명한다.
첫째, 하느님은 너무나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에둘러 움직이신다. 하느님은 우주를 두고 주사 위놀이를 하지 않으시는 도다. 홀로 형언할 수 없이 심원한 게임을 하고 계실 뿐. 요컨대 다른 참여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깜깜한 방 안에 들어앉아 아무것도 그려져있지 않은 카드로 무한대의 돈을 걸고서 포커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좀 더 애매모호하고 복잡한 게임을 하고 있는데, 정작 딜러는 규칙도 말해주지 않으면서 늘상 웃고만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둘째, 지구는 천칭자리다.
- 사실 지구 표면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 M25 도로의 형상이 '오데그라 odegra'라는 글귀를 이루고 있음을 아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고대 무대륙의 암흑 사제들이 쓰던 언어로 '위대한 적그리스도, 세상을 삼킬 그분을 찬양하라'라는 뜻이다. 매일 이 꾸불꾸불한 도로에서 폭주하는 수천 명의 운전자들은 물레방아에 붓는 물과 같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저급한 악으로 이루어진 안개를 끝없이 퍼뜨려, 몇십 킬로미터 반경의 초자연 대기를 오염시켰다.
- 그것은 크롤리의 괜찮은 업적들 중 하나였다. 이 업적을 완수하는 데 몇 년의 세월이 걸렸다. 세 번의 컴퓨터 해킹과 두 번의 주거 침입, 소소한 뇌물 먹이기까지 실패하는 바람에, 결국 비 오는 밤에 두 시간 동안 질척이는 땅에서, 수는 얼마 안 되지만 오컬트적으로는 매우 의미 깊은 이정표들을 옮겨 박아야 했다. 크롤리는 50킬로미터에 걸쳐 꽉 막힌 도로를 보며 나쁜 일을 잘 해냈을 때의 흐뭇한 심정을 만끽했다.
- "난 어떤 정치가를 타락시켰어." 리구르가 말했다 "소소한 뇌물쯤은 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지. 1년이면 녀석을 손에 넣게 될 거야."
하스투르와 리구르는 환하게 웃고 있는 크롤리에게 기대에 찬 시선을 던졌다.
"마음에 들 겁니다." 크롤리가 말했다. 그는 더 활짝 더 꿍꿍이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난 점심시간 45분 동안 센트럴 런던에 있는 '모든' 휴대전화망을 묶어뒀어요."
정적이 내려앉았다. 멀리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하스투르가 말했다. "그다음엔 무슨 일이 있었지?"
"이런,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요." 크롤리가 말했다.
"그게 다인가?" 리구르가 물었다.
"저기요, 사람들은-"
- 크롤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2만 명이나 꼭지가 돌았다고? 온 시내에서 핏줄 터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그런 다음 그들이 돌아가서 비서든 교통감시관이든 누군가에게 닥치는 대로 화풀이를 했고, 또 그들은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했다고? 온갖 종류의 사소한 보복이 이루어졌고, 그것도 '자기들이 직접' 궁리해내기까지 했다. 그날 내내 말이다. 부가 효과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 없이 몇천 몇만 개의 영혼에 희미한 녹이 슬었다.
- 그리고 갑자기 그는 지시 내용을 깨달았다. 질색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에다 으스스한 지식을 바로 집어넣지 말고 그냥 얘기하면 좋을 것을. 그는 어느 병원으로 달려가야 했다.
- 그런 식이었다. 세상 꼭대기에 올라앉은 것 같다 싶으면 갑자기 놈들이 아마겟돈을 일으키는 것이다. 대전 마지막 전투 천국 대 지옥, 3라운드, 한쪽은 완전 몰락, 항복 없음. 더 이상 세상은 없는 것이다. 세상의 종말이란 그런 뜻이다. 더 이상 세상이 없다는 것.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끝없는 천국 아니면 끝없는 지옥. 크롤리는 어느 쪽이 더 나쁜지 알 수 없었다.
- 아, 물론 정의상으로는 '지옥'이 더 나빴다. 하지만 크롤리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기억하고 있었고, 천국과 지옥 사이엔 공통점이 꽤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천국이나 지옥이나 괜찮은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점은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천국에서 얻게 될 지루함은 지옥에서 얻는 자극만큼이나 지독했다.
- 수다회 사람들은 대개 자기 부모나 조부모와 마찬가지로 구닥다리 사탄숭배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키워졌고, 솔직히 말해서 특별히 사악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인간이란 대개 특별히 사악하지 않은 법이다. 사람들은 그저 장화를 신고 사람들에게 총질을 한다거나, 흰 천을 뒤집어쓰고 사람들을 린치한다거나, 청바지를 입고서 기타를 연주한다거나 하는 새로운 사상에 휩쓸릴 뿐이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복장과 강령을 내리면 마음과 정신도 따라가게 되어 있다. 어쨌든 사탄숭배자로 '키워지면' 정작 그런 일에는 무뎌지는 경향이 있었다. 뭔가 사탄숭배자다운 일을 하는 건 토요일 밤만이고, 나머지 시간 동안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한 삶을 즐겼다. 게다가 메리 수녀는 간호사였고, 간호사들이란 자기들의 신념과 상관없이 간호사로서, 시계를 볼 틈도 없을 만큼 할 일이 많고, 긴급한 상황에서도 침착을 유지하며, 차 한 잔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 마련이다. 메리 수녀는 얼른 누군가가 왔으면 싶었다. 중요한 일을 해치웠으니, 차를 마시고 싶었다.
- 이 시점에서, 역사상의 중대한 승리와 비극들 대부분은 사람들이 선하거나 악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는 편이 인간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 보통의 다른 아이들은 사과, 공, 바퀴벌레 등등이 색색깔로 그려진 초급 독본을 통해 글자를 배웠다. 디바이스 집안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아나테마는 '그 책'을 통해 글을 배웠다. 거기엔 사과나 공 그림 같은 것은 없었다. 화형대에 매달려 타 죽으면서 유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그네스 너터를 그린 훌륭한 18세기 목판화는 실려 있었지만.
- 아나테마가 알아볼 수 있는 첫 번째 단어는 '근사한'이었다. 여덟 살 반의 나이에 '근사한'이라는 단어에 좋다는 뜻만이 아니라 '기준에 가깝거나 아주 비슷한'이라는 뜻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아이는 몇 명 없겠지만 아나테마는 그 극소수에 속했다.
- 아나테마가 큰 소리로 읽은 첫 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너희 도적들에게 말하노라. 너희에게 내 전하노라. 넷이 달려갈 것이고, 넷이 그 뒤를 따라 달릴 것이며, 셋은 하늘을 달릴 것이고, 하나는 불길 속을 달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것에도 멈추지 않으리니, 물고기에도, 비에도, 닻줄에도, 악마에도 천사에도. 그리고 네가 그들 뒤에 있을 것이다, 아나테마."
아나테마는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게 좋았다.
- 그녀는 이 시점에서 자기 아이들이나 11년 후를 넘어서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사건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인식하기엔 아직 너무 어리고 자기중심적이었다. 여덟 살 반의 나이에 11년이란 평생의 시간으로 보이는 법이다. (그 책을 믿는다면 정말로 그게 평생이 되겠지만.)
- 그는 "아마겟돈과 지옥의 승리를 위해서죠"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겟돈을 일으키려고 일하는 것과 아마겟돈이 정말로 일어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 물론 그는 직분에 충실했고 사람들의 짧은 생애를 비참하게 만드는 데 전력을 다했지만, 크롤리가 아무리 머리를 짜내봐야 사람들이 스스로 고안해 내는 것들에 대면 새 발의 피였다. 인간은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드는 재능을 타고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겠지. 그들은 수많은 문제가 산재해 있는 세상에 태어나, 그 문제들을 더 악화시키는 데 온 힘을 다 쏟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역스러움이 널리 퍼진 세상에서도 눈에 확 띌 만큼 악마적인 것을 찾아내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지난 천년기를 거치면서 '아래'에다 말하고 싶었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보십쇼, 지금 포기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디스건 판데모니엄이건 다 문 닫고 이리로 이사하는 게 낫겠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녀석들이 다 직접 하고 있는 데다가, 우리가 꿈도 못 꿔본 짓까지 벌인다고요. 전극이 쓰이는 일들 말이죠. 녀석들에겐 우리에게 없는 게 있어요. 인간에겐 상상력이 있다고요. 그리고 물론 전기도 있고.
- 그는 가서 종교재판을 보았고, 돌아와서 일주일 동안 술독에 빠졌다.
히로니뮈스 보스를 방불케 했다. 이 얼마나 위험한 미치광이들이란 말인가.
- 그런데 또 인간이란 지옥의 한도를 넘어설 만큼 사악하다고 생각할 참이면 또 가끔씩은 천국이 꿈도 꾸지 못할 미덕을 보여주기도 했다. 같은 인물이 양쪽에 다 연루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물론, 이게 바로 자유의지라는 물건이었다. 짜증스럽게도.
- 아지라파엘이 설명해주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게 둘이 처음 '협정'에 이르렀을 무렵이니까 1020년쯤이었나. 아지라파엘은 인간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할 경우 그건 그들이 원해서라는 점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반면 크롤리나 아지라파엘 본인 같은 이들은 처음부터 갈 길이 정해져 있었다. 아지라파엘은 인간이 철저히 신성해지려면 철저히 악독해질 기회도 같이 주어지기 마련이라고 했다.
- 크롤리는 이 문제를 한동안 생각해 보았고, 1023년쯤 되어서 말했다. 가만 그건 모두가 똑같은 조건에서 출발할 때만 가능한 얘기잖아. 안 그래? 전쟁터 한복판에 있는 지저분한 오두막에서 태어난 애가 성에서 태어난 애랑 똑같이 행동하길 기대할 순 없지 않냐고.
그러자 아지라파엘은 말했다. 좋은 지적이야. 낮은 곳에서 시작할수록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크롤리는 터무니없다고 말했다.
아지라파엘은 아니라고, 터무니없는 게 아니라 형언할 수 없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 아지라파엘은 책을 수집했다. 아주아주 정직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서점이 그저 책을 쌓아놓기 위한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고, 실제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전형적인 중고 책장사라는 허울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만 빼고 손님들이 책을 사지 못하게 막을 방법을 모조리 동원하곤 했다. 불쾌하고 눅진눅진한 냄새, 기분 나쁜 눈초리, 변덕스러운 개점 시간. 그는 이런 수단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능했다.
- 그는 오랜 시간 책을 수집해 왔고, 모든 수집가가 그렇듯 전문 분야가 있었다.
그는 두 번째 천년기의 마지막 몇 세기 동안 일어날 사태를 예견한 예언집을 60권 이상 가지고 있었다. 또한 오스카 와일드의 초판본을 무척 좋아했으며, 조판상의 오류를 딴 이름이 붙은 '악명 높은 성서들'을 세트로 갖춰놓고 있었다.
- 이 책들 중에는, 고린도서의 "불의한 자가 하느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를 "불의한 자가 하느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찍은 인쇄공의 실수 때문에 '불의의 성서'라고 불리는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 "흐음? 자네 고모라에 가본 적 있나?"
"물론이지. 넛맥과 으깬 레몬그라스를 곁들인 근사한 대추야자발효 칵테일을 마실 수 있는 멋진 선술집이 있었-"
"심판 이후에 말이야."
"아."
- 크롤리는 '사탄숭배자'라는 말을 경멸하듯 내뱉었다. 당연하게도 이 세상이 크롤리나 아지라파엘이나 가능한 한 오랫동안 즐기고 싶어 할 만큼 흥미진진한 곳이라는 사실 외에 그들 둘이 동의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어둠의 왕자를 숭배하는 일부 사람들에 대한 시선만큼은 완전히 일치했다. 크롤리는 언제나 이런 사람들이 창피했다. 그 사람들을 막 대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전투 장비를 갖추고 동네 자경단 모임에 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베트남 참전용사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은 언제나 맥 빠지게 열정적이었다. 역십자니 펜타그램이니 수탉 같은 물건을 다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악마를 신비화했다. 필요 없는 일들이었다. 사탄숭배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로지 의지력뿐이었다. 평생 펜타그램이 뭔지 모른다거나, 죽은 수평아리를 본 적이 없다 해도 사탄숭배자가 되는 데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치킨 마렝고를 먹을 때 말고는 수탉을 본 적이 없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 게다가 구식 사탄숭배자들 중 일부는 사실 꽤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복음을 외우고 이런저런 시늉을 해 보인 다음, 집에 돌아가 주중 내내 특별히 사악한 생각을 하는 일도 없이 온화하고 겸손하며 평이한 삶을 살았다.
- 그리고 그들을 뺀 나머지로 말하자면...
사탄숭배를 자칭하며 크롤리를 몸부림치게 만드는 족속들이 있었다. 그런 작자들이 하는 짓도 짓이지만, 그 모든 짓을 지옥 탓으로 떠넘긴다는 게 문제였다. 그들은 악마라면 천년이 걸려도 생각해내지 못할 만큼 역겨운 착상, 기능을 다 발휘하며 돌아가는 인간의 두뇌만이 품을 수 있는 어둡고 지각없으며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들을 생각해 낸 다음 "악마가 나로 하여금 이런 짓을 하게 했다"고 고함을 지르며 법정의 동정을 끌어냈다. 사실 악마는 누구로 하여금 무슨 짓을 하게 만든 적이 거의 없는데 말이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점이 일부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대목이었다. 크롤리가 생각하기에, 천국은 선의 샘물이 아니었고 지옥 역시 악의 저수지가 아니었다. 지옥이나 천국은 그저 거대한 우주적 체스 게임의 양편일 뿐이었다. 진짜 일류, 그러니까 진정한 고상함이나 진정 심장을 멈추게 하는 악은 인간의 마음에서나 찾을 수 있었다.
- 하지만 아무리 성실한 측량기사라 해도 자정에 측량 작업을 하지는 않는 법인데, 여기 잔디밭에 삼각대 하나가 다리를 깊숙이 박고 있었다. 꼭대기에 개암나무 가지가 달려 있고, 그 가지에 수정 펜듈럼이 매달려 있으며 다리 부분에는 켈트 룬 문자가 새겨진 경위의도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 마법에 관한 책을 보면 대개는 마녀들이 벌거벗은 채 일을 한다고 할 것이다. 이건 순전히 대부분의 마법서를 남자들이 썼기 때문에 나온 소리다.
- 아무리 옥스퍼드셔라고 해도 젊은 여자들이 캄캄한 밤에 혼자 나다녀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부근을 배회하던 어느 미치광이가 아나테마 디바이스에게 말을 건다면 봉변을 당할 것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그녀는 마녀였다. 그녀는 마녀였고, 따라서 분별력이 있었기에 수호 부적과 주문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런 물건 대신 허리춤에 30센티미터 길이의 식빵 칼을 꽂고 있었다.
- 아나테마는 그 작은 집을 가구가 딸린 채로 빌렸는데, 그것은 지금 집에 있는 가구들이 떨이 판매로도 팔리지 못하고 남은 물건이란 이야기였다. 상관없었다. 그녀는 여기에 그리 오래 살지 않을 것이다.
아그네스가 옳았다면, 아나테마는 '어디서든'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해답은 분명 '책' 안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예언들을 이해하려면 반쯤 미친 데다가 십자말풀이 사전 같은 정신의 소유자였던 머리 좋은 17세기 마녀처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집안의 다른 사람들은 아그네스가 외부인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모호하게 적어놓은 거라고들 했다. 자신이 가끔씩이나마 아그네스처럼 생각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아나테마는, 아그네스가 유머 감각이 넘치는 괴팍한 할망구였기 때문에 알아듣기 힘들게 적은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 메리 호지스, 왕년의 메리 로퀘이셔스에게 잘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명령에 복종하는 경향이었다. 그녀는 지시와 명령을 좋아했다. 세상이 좀 더 단순해지니까.
- 메리 호지스는 30년을 살면서 수많은 인생을 보았고 인류 태반이 한 주를 무사히 지내기 위해 무슨 짓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아무 환상도 품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식사는 좋았고 재미있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 그 후 그녀에게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엉망이 된 건물 안에 혼자 남아, 화재에 손상을 입지 않은 몇 안 되는 방에서 일을 하며, 귀 뒤에 담배꽁초를 꽂고 바지에는 석회 가루를 묻히고 수기에 적힌 비용과는 엉뚱한 답을 내놓는 계산기를 가지고 다니는 남자들과 입씨름을 하다가 문득, 전에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뭔가를 발견한 것이다.
그녀는 겹겹이 쌓인 어리석음과 남의 비위를 맞추려는 열의 밑에 숨겨진 메리 호지스를 발견했다.
- 그녀는 건축업자들의 견적서와 세금계산서를 해석하기가 아주 쉽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책을 몇 권 빌렸고, 재무학이 재미있을 뿐더러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녀는 로맨스와 뜨개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성 잡지를 버리고 오르가슴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성 잡지를 읽기 시작했으나, 곧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기억은 해두겠지만 이것 역시 로맨스와 뜨개질의 새로운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녀는 사업 합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잡지류를 읽기 시작했다.
- 그녀는 신여성에 대해 읽었다. 그녀는 자기가 구여성이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나, 어느 정도 생각을 해본 후 그런 호칭은 로맨스와 뜨개질과 오르가슴 같은 것들과 다를 바 없으며, 정말로 중요한 것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언제나 무채색 옷을 좋아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치맛단을 올리고, 구두굽을 높이고, 베일을 벗어던지는 것뿐이었다.
- 어느 날 잡지를 뒤적이던 중 그녀는 전국적으로 업계의 요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넓고 편리한 건물에 대한 수요가 대단히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 그녀는 그런 곳을 운영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잡지에 나와 있었다고 생각하며 밖에 나가서 "태드필드 장원, 회의와 경영 훈련 센터"라는 명호가 찍힌 편지지를 주문했다.
다음 주에는 광고가 나갔다.
압도적인 성공이었다.
- "그 가엾은 여성을 진정 끔찍한 상황에 내버려 두고 왔군." 천사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크롤리는 고슴도치를 들이받으려다가 비껴가며 대꾸했다. "오히려 예약이 두 배로 늘어날걸. 자기가 쥔 카드를 제대로 써먹고, 권리 포기 각서들을 잘 갈무리하고, 법적인 부분을 잘 정리해 낸다면 말이야. 진짜 총을 가지고 하는 솔선 훈련? 사람들이 줄을 설 거야."
- "눈에 띄지 않아. 적어도 우리에게는 일종의 보호색이랄까, 스스로도 모르는 새에 힘을 발휘해서 엿보는 심령 세력에게서 숨을 거야."
"심령 세력이라니?"
"자네와 나 말이야." 크롤리가 설명했다.
"난 심령계가 아니야. 천사들은 심령계가 아니라고. 우린 정신계에 속한단 말이야."
- “그렇게 되지 않을걸. 그 애는 적그리스도란 말이야! 이런 종류의... 자동방어력은 갖고 있지 않겠어? 자기는 알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지. 의심을 사지도 않을 거야. 아직은. 준비가 될 때까지는 의심은 적그리스도를 비껴가게 되어 있어. 마치, 마치... 뭐더라. 아무튼 그게 물 위를 미끄러지듯이 말이야." 그는 어색하게 말을 맺었다.
- 안목 있는 감식가를 위한 희귀본에 통달해 있는 소호의 많은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아지라파엘에게도 뒷방이 있었지만, 그 방 안에 있는 책은 보통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아는 고객을 위해 구겨진 종이로 싼 가방 안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비전적인 물건들이었다.
- 그는 특히 예언서들을 자랑스러워했다.
보통은 초판본.
그리고 모두 저자 서명이 들어가 있었다.
- 로버트 닉슨, 집시 마르타, 이그나티우스 시빌라는 물론이고 노오트웰 빈스도 있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오랜 친구 아즈라펠에게 마음을 담아"라고 적어주었다. 마더 십턴은 아지라파엘이 가진 책에 술을 엎질렀다. 한쪽 구석에 있는 기후 조절 보관장 안에는 파트모스의 신학자 성 요한이 떨리는 손으로 쓴 언제 어느 때나 베스트셀러였던 계시록의 원본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다. 아지라파엘은 성 요한이 괴상한 버섯들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감은 있지만 괜찮은 친구였다고 생각했다. 그의 수집품 중에 빠진 것은 <아그네스 너터의 근사하고 정확한 예언집>뿐이었고, 아지라파엘은 숙모님이 보낸 엽서에 붙은 우표가 희귀한 모리셔스 블루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조심조심 들고 가는 우표수집광처럼 그 책을 꼭 품고서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호텔 바 구석자리에 앉은 빨간 머리 여자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종군기자였다. 지금 그녀는 카민 진기베르라는 이름의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전쟁이 터진 곳이라면 어디라도 갔다.
글쎄. 대충은 그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전쟁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곳에 갔다. 그러니까 전쟁이 터질 때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 머치슨은 말하곤 했다. "그 쓰레기 잡지는 자기들이 대체 뭘 갖고 있는지 알지도 못해."
그러나 사실 <내셔널월드위클리>는 자기들이 뭘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종군기자'를 데리고 있었다. 단지 왜 그녀가 자기들에게 있는지, 또 지금 그녀를 데리고 뭘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뿐이었다.
- <내셔널월드위클리>가 세상에 내놓는 이야기란 보통 디모인에 사는 모 씨가 산 빅맥 버거 빵에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났다더라, 어느 화가는 그 빵에 대해 이런 감상을 남겼다더라, 혹은 엘비스프레슬리가 최근 디모인에 있는 버거로드에서 일하는 모습이 목격됐다더라, 엘비스의 음반을 듣다가 디모인에 사는 어느 주부의 암이 치유됐다더라, 미드웨스트에 횡행하는 늑대인간 떼는 빅풋에게 강간당한 고결한 탐험가 여인들의 자손이라더라, 그리고 엘비스는 이 세상에 너무 좋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1976년에 외계인들에게 납치당한 거라더라 등의 기사들이었다.
그게 <내셔널월드위클리>였다. 그들은 일주일에 400만 부를 팔았고, 그들에게 있어 종군기자의 필요성이란 UN 사무총장과 독점 인터뷰를 해야 할 필요성과 비등한 정도였다.
(원주 : 놀랍게도 이 이야기들 중 하나는 진실이다.)
- 그녀는 검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주 곧은, 길고 날카로운 검이었다. 아주 오래된 데다가 사용한 적이 없는 칼처럼 보였고, 화려하지도 않고 눈에 확 띄지도 않았다. 이건 마법 검이 아니었고, 강력한 신화 속 무기도 아니었다. 분명 썰고 자르고 베기 위해, 죽이는 편이 더 좋지만 그게 실패할 경우에는 수많은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불구자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검이었다.
- 그녀는 술잔을 비우고 한쪽 어깨에 검을 걸친 뒤 이제는 그녀를 빙 둘러싸고 있는 어리둥절한 파벌들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끝내게 되어 유감이군. 머물면서 당신들을 좀 더 알고 싶었는데."
방안에 있던 남자들은 갑자기 그녀를 더 알고 싶지 않아졌다.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은 불타는 숲의 아름다움과 같은 종류였다. 멀리서라면 찬미할 수 있겠지만, 가까이 다가가선 안 될 아름다움.
- "마녀들이 온 세상을 책임지게 되면 좋을 텐데. 모두가 건강식품을 먹게 하고 교회에는 안 가고 벌거벗고 춤을 추게 할 거 아냐." 아담은 돌멩이를 걷어차며 말했다. 건강식품만 빼면 그것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냥 우리가 제대로 일을 시작하게만 놔두면 분명 마녀들을 수백 명은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아담은 돌멩이를 또 하나 걷어차며 혼자 중얼거렸다. "옛날 고문관도 일을 막 시작하려다가 웬 멍청한 마녀 하나가 옷을 더럽히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을 거야. 틀림없어."
- 개는 충실히 주인님 뒤를 따라 걸었다. 지옥의 사냥개가 기대한 아마겟돈 이전 나날들의 생활은 분명 이런 게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녀석은 지금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 형태가 본질을 형성한다. 유전적으로 작고 초라하게 생겨먹은 개들에게는 그들에게 적당한 행동 양식이 있다. 형태만 작은 개가 되고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기를 기대할 순 없는 일이다. 작은 개의 모습을 띠면, 존재의 중심에 작은 개의 본질이 배어들기 시작한다.
개는 이미 쥐 사냥도 해보았다. 이제껏 살면서 제일 즐거운 경험이었다.
- "이 세 발 달린 건 뭐야?"
"그건 경위의라고 해. 레이선을 추적하는 도구지."
부엌에서 아나테마가 대답했다.
"레이선이 뭔데?"
-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놀라운걸. 사방에 보이지 않는 힘의 선들이 있는데 난 보지도 못하는 거잖아."
아담은 남의 말에 자주 귀 기울이는 편이 아니었지만 살면서, 아니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날의 삶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20분을 보냈다. 영 집아네는 나무를 만지거나 어깨 너머로 소금을 뿌리는 정도의 미신적인 행동조차 하는 사람이 없었다. 초자연적인 방향에 대한 긍정은 아담이 좀 더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에는 할아버지가 굴뚝을 타고 내려온다는 내키지 않는 구실을 댔을 때뿐이었다.
(원주 : 그 당시 아담이 힘을 온전히 쓸 수 있었다면 영 일가의 크리스마스는 중앙난방로에 거꾸로 쑤셔 박힌 시체를 발견함으로써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 아나테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직도 아담에게 이상한 점이 뭔지 집어내려 애쓰고 있었는데, 퍼뜩 무엇이 문제인지 깨달았다.
아담에게는 오라가 없었다.
- 아나테마는 오라에 정통했고, 충분히 집중만 하면 알아볼 수 있었다. 오라는 사람들의 머리 주위에서 반짝이는 빛 같은 것이었고, 그녀가 읽은 책에 따르면 오라의 색채는 사람들의 건강상태와 전반적인 안녕을 말해주었다. 누구에게나 오라가 있었다. 폐쇄이고 마음이 좁은 사람들의 오라는 희미했고 가장자리가 흔들리는 반면, 활달하고 창조적인 사람들의 오라는 몸 밖으로 몇 센티미터나 뻗어나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 어쩌면 내가 좀 피곤한 것일지도 몰라, 아나테마는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는 이렇게 보람찬 학생을 찾아냈다는 사실이 기쁘고 고마웠으며, 내친김에 친구가 편집한 얇은 잡지 <신 물병자리>까지 몇 부 빌려주었다.
이 잡지는 아담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뭐 최소한 그날의 인생은.
- 접대원들은 하나같이 절대 눈까지 번지는 법이 없는 반짝이는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카운터 뒤에서는 버거로드 제복을 입은 살집 좋은 중년 남자가 번철에 버거를 올려놓고 부드럽게 휘파람을 불며 행복한 모습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세이블은 카운터로 다가갔다.
"어서오세요-제이름은-마리예요." 카운터 뒤에 선 여자가 말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더블 블래스터 선더 빅건에 겨자소스를 친 감자튀김이요."
"마실-건요?"
"특제 걸쭉한 코코바나나 셰이크."
그녀는 계산기에 찍혀 있는 작은 그림문자 칸을 누른 다음(이런 가게에서는 더 이상 읽고 쓰는 능력을 요구하지 않았다, 미소는 요구했지만), 카운터 뒤편에 있는 통통한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더블선빅에 겨자감자, 초코셰이크요."
"으흠흠." 요리사가 입 안으로 흥얼거렸다. 그는 잠깐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치웠을 뿐 동작을 멈추는 일 없이 주문받은 ...
(원주 : 하지만 전 세계 모든 버거로드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독일의 버거로드는 루트비어 대신 라거를 팔았고, 영국의 버거로드는 미국 패스트푸드의 미덕(예를 들자면 음식이 나오는 속도라든가)을 모두 취한 다음, 주의 깊게 그 미덕을 제거했다. 음식은 주문한 뒤 30분이 지나야 나왔고, 온도는 실온과 같았으며, 그 이유는 오로지 그냥 둥근 빵과 버거의 차이를 분간할 수 있도록 사이에 끼워놓은 미지근한 양상추 이파리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버거로드 개척 판매원들이 발을 들여놓은 지 25 분 만에 총격을 당했다.)
- "지금도 바다 밑에 있는지도 몰라." 페퍼가 말했다.
그들은 금붕어 어항을 뒤집어쓰고 신비스러운 예복을 휘날리며 파도치는 바다 밑에서 신나게 지내는 아틀란티스인들을 생각했다.
"흐응." 페퍼가 한마디로 모두의 느낌을 정리해 주었다.
- 결국 그들은 '발견자 찰스 포트' 놀이를 했다. 고것들 중 한 명이 뼈대만 남은 우산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동안 나머지가 그 아이에게 개구리 비를 내리는 놀이였다. 아니면 그냥 개구리 한 마리라도. 그들은 연못에서 개구리를 한 마리밖에 찾아내지 못했다. 녀석은 나이 많은 개구리로, 예전부터 고것들을 알고 있었으며, 아이들의 관심을 연못에 뇌조와 창꼬치가 없는 대가쯤으로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녀석은 한동안 성질 좋게 상황을 참아내다가 결국에는 낡은 하수관 속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은신처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 그런 반면 이 물병자리 시대는 정말로 진짜였다. 다 큰 어른들이 이 시대와 정말로 존재하는 빅풋과 모스맨과 예티와 바다 괴물들과 서리 퓨마에 대해 수많은 책을 써냈다(<신 물병자리>는 이런 책들에 대한 광고로 가득했다). 신세계에 처음 발들인 코르테스발보아가 이 순간 아담과 같은 기분이었을까.
- 수백 년간 특정한 사람들이 아그네스 너터의 예언을 이해하려고 용을 썼다. 그들은 대체로 아주 지적이었다. 유전적인 흐름이 허락하는 한 아그네스에 가장 근접해 있는 아나테마 디바이스가 그중 최고였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 천사는 없었다.
- 아지라파엘을 처음 만난 사람들은 대개 세 가지 인상을 받았다. 그가 영국인이라는 인상, 그가 지적이라는 인상, 그리고 그가 아산화질소를 마신 원숭이 한 떼보다 더 게이스럽다는 인상. 이 중 두 가지는 틀렸다. 몇몇 시인이 어떻게 생각했든 천국은 영국에 있지 않으며, 천사들은 정말로 노력을 기울이고 싶어 하지 않는 한 무성애다. 하지만 그가 지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천사의 지력이었다. 인간의 지력보다 특별히 높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훨씬 폭이 넓으며, 수천 년간 갈고닦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 아지라파엘은 신실하게도 이 컴퓨터를 거래 내역 작성에 이용했으며, 그 내역서가 어찌나 꼼꼼하고 정확했던지 국세청에서 다섯 번이나 그가 어딘가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 중인 인물일 거라는 의심을 품었을 정도였다.
-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계산들은 어떤 컴퓨터도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가끔씩 옆에 놓아둔 종이에 뭔가를 휘갈겨 썼다. 그 종이에는 전 세계 여덟 명만이 이해할 수 있는 기호들이 가득했다. 그 여덟 명 중 두 명은 노벨상을 탔고, 나머지 여섯은 제 몸을 찌를 수도 있다는 이유로 날카로운 물건은 무엇 하나 허용받지 못하는 채로 침만 줄줄 흘렸다.
-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내 희망에 반하여 뉴기니에서 지정받았으며 머리 사냥꾼일 가능성도 있는 일등항해사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를 보였음. 밤 사이에 넓은 해저가 떠오른 것 같다. 여기엔 건물이 잔뜩 있는데, 그중 다수는 피라미드 같은 모양을 하고 있음. 우리는 어느 건물 앞에 좌초해 있음. 좀 기분 나쁜 동상들이 있음. 긴 예복 같은 것을 입고 잠수 헬멧을 쓴 온화한 노인들이 배에 올라와, 이게 다 우리가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승객들과 어울리고 있음. 부디 조언 바람.
- 선장은 펜을 집어 들고 적었다. "XXXV QVVX."
번역하자면 이런 뜻이었다.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을 찾았음. 고위 성직자들이 고리 던지기 놀이에서 이겼음."
- 지구 공동空洞설은 채석장에서 그리 잘 먹히지 않았다. 사이러스 리드 티드, 불워 리턴,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 같은 뛰어난 사상가들의 조사도 견뎌냈던 아이디어가 웬즐리데일의 이글이글한 안경잡이 논리의 풍랑을 맞아 위태롭게 구부러지고 있었다.
"전부 다 뻥 뚫려 있다고는 안 했어." 아담이 말했다. "전부 다 뻥 뚫려 있다고 한 사람은 없다고. 아마 거품이랑 기름이랑 석탄이랑 티베트 굴이랑 그런 것들이 다 들어갈 만큼은 땅이 있겠지. 하지만 그다음은 뻥 뚫려 있단 말이야. 그게 사람들 생각이라니까. 그리고 북극엔 공기가 빠져나갈 구멍이 나 있는 거지."
- "아, 내가 그 얘기 안 했던가?"
세 아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굉장한 이야기야. 너희들 티베트 알지?"
아이들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일련의 영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야크, 에베레스트 산, '메뚜기'라고 불리는 사람들, 산맥 위에 앉아 있는 몸집 작은 노인들, 오래된 사원에서 쿵후를 익히는 사람들, 그리고 눈.
"자, 아틀란티스가 가라앉았을 때 사방으로 떠났던 선생들 다 알지?"
아이들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중 몇 사람은 티베트로 갔는데, 지금은 그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어. 그들을 비밀의 스승들이라고 부르지. 원래 선생들이니까 그런가 봐. 그리고 그들에겐 샴발라라는 비밀 지하도시가 있고, 전 세계에 굴을 파고 있어서 세상 모든 일을 알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대.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사실은 고비 사막 밑에 산다고 생각하기도 해." 아담은 거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능한 권위자들은 티베트가 분명하다고 생각해. 어쨌든 굴을 파기에도 더 좋잖아."
- "난 그들이 온 군데에 굴을 파놨다고 생각하지 않아." 웬즐리데일은 끈질지게 반박했다. "그건 말이 안 돼. 티베트는 몇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고."
"아, 그래. 그렇단 말이지. 네가 마담 블라트바타타츠키보다 잘 안단 말이지?" 아담이 코웃음을 쳤다.
- 거의 다 됐다.
형태는 이해했다.
그는 아그네스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나 뛰어났던 것은 확실했다. 보통 천국이나 지옥은 예언자 유형을 탐지하여, 지나치게 정확한 예언을 하지 못하도록 그들이 접하는 정신 채널에 잡음을 집어넣곤 했다. 사실은 그럴 필요도 거의 없었다. 예언자들은 보통 주위에 울려 퍼지는 영상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 잡음을 만들어내곤 했다. 예를 들어 가엾은 성 요한에게는 버섯이 있었다. 마더 십턴은 에일을 마셨다. 노스트라다무스는 흥미로운 동양의 조제약들을 모아두었다. 성 말라키에겐 증류주가 있었다. 좋은 친구 말라키. 그는 사람 좋은 노인으로, 미래의 교황들을 꿈꾸며 앉아 있곤 했다. 물론 완전히 맛이 간 예술가였다. 증류 위스키만 아니었더라도 진짜 사상가가 될 수 있었으련만.
- 아지라파엘이나 크롤리가 마녀사냥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둘 다 그 존재를 승인하고 있기는 했다. 달리 표현하자면 둘 다 그 존재가 상급자들에게 승인 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녀사냥 군대는 이자라파엘의 요원 목록에 들어가 있었다. 뭐랄까, 아무튼 그건 '마녀사냥' 군대였고, 미국이 자칭 반反공산주의자는 누구든 도와줘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사는 자칭 마녀사냥꾼을 지원해야 마땅했다. 그리고 이 군대는 크롤리의 요원 목록에도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섀드웰 같은 사람들은 지옥의 신념에 눈곱만큼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좀 더 복잡한 이유에서였다. 지옥은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득이 된다고 생각했다.
- 독일에서는 튜턴족다운 완벽주의를 발휘하여 거대한 화톳불을 쌓고 태웠다. 자신들의 첫째가는 적 스코틀랜드 인들과 벌인 길고 지겨운 싸움 탓에 내내 폐쇄적으로 살아온 신앙심 깊은 스코틀랜드 인들조차 긴 겨울 저녁을 밝혀줄 화형식을 수차례 거행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인들은 도무지 열의가 없는 것 같았다.
- 아마도 이는 아그네스 너터가 죽은 방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죽음은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심각한 마녀사냥 열광에 종지부를 찍었다. 4월 어느 날 저녁, 똑똑한 티를 내며 사람들을 치료하고 돌아다니는 그녀의 습관에 열받은 폭도들이 그녀의 집에 도착해 보니 아그네스는 외투를 입고 앉아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굼뜨군요. 난 벌써 10분 전부터 불에 타고 있어야 하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한 다음 몸을 일으켜,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군중 사이를 천천히 가르고 오두막 밖으로, 마을 초지에 얼기설기 쌓아 올린 화톳불로 향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서투른 동작으로 장작더미 위에 기어 올라가 화형대를 등지고 팔을 뒤로 둘렀다.
- "잘 묶어요." 그녀는 놀란 마녀사냥꾼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마을 사람들이 장작 더미를 향해 다가들자 그녀는 불빛 속에서 잘생긴 머리를 들고 말했다. "가까이 모여요. 착한 사람들. 불길에 그을릴 정도로, 모두가 잉글랜드에 남은 마지막 진짜 마녀가 죽는 모습을 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가까이 와요. 나는 마녀고, 판결을 받지만, 아직 내 진짜 죄가 뭔지는 모르겠군요. 그러니 내 죽음을 세상에 대한 전언으로 삼지요. 말하노니 가까이 모여들어,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참견하는 이들 모두의 종말을 잘 새겨두길."
그녀는 미소를 짓고 마을 위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덧붙인 것 같았다. "댁도 마찬가지야, 멍청한 늙은 바보 양반."
- 이런 묘한 독설을 뱉은 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재갈을 물리는 대로 놔두었고, 횃불이 마른 장작에 닿자 오만하게 몸을 바로 세웠다.
군중은 점점 가까이 다가갔고, 그중 한두 명 정도는 자기들이 옳은 일을 한 것인지 어떤지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30초 후 마을 초지에서 폭발이 일어나 그 계곡에서 살아 있는 생명을 모조리 쓸어버렸고, 멀리 핼리팩스까지 그 불길이 보였다.
- 이 사건이 하느님의 징벌인지 혹은 사탄의 개입인지에 대해 수많은 토론이 뒤따랐으나, 나중에 아그네스 너터의 오두막집에서 발견한 종이쪽지를 보니 신적인 간섭이 있었든 악마의 간섭이 있었든 간에 물리적으로는 아그네스가 사태를 예견하고 페티코트 속에 숨겨두었던 36 킬로그램의 화약과 18 킬로그램에 달하는 못꾸러미의 힘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마녀란 남성지배 사회계급의 답답함에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저항한 똑똑한 여자들을 말하는 것뿐이래." 페퍼가 말했다. 페퍼의 어머니는 노턴 기술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래. 하지만 너희 엄마는 언제나 그런 말을 하잖아." 아담은 잠시 후에 말했다. 페퍼는 온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엄마 말이, 최악의 경우라봐야 마녀는 친생식 원칙을 숭배하는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들이었을 뿐이랬어."
"무슨 원칙? 그게 뭔데?" 웬즐리데일이 물었다.
"몰라. 5월제 기둥이랑 관계있는 거 아닐까." 페퍼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쳇, 난 마녀들이 악마를 숭배하는 줄 알았는데." 브라이언이 말했다. 이 말에 흔히 보이는 비난의 기색은 없었다. 고것들은 악마숭배라는 주제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다. 고것들은 모든 것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바보 같은 5월제 기둥보단 악마가 나은걸."
(원주 : 낮 동안에는 저녁에는 불안에 떠는 관리직들에게 '파워' 타로점을 쳐주었다. 습관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 "바로 그 점이 너희가 잘못 안 거야." 아담이 말했다. "그건 악마가 아냐. 다른 신이거나, 아무튼 다른 거야. 뿔이 달린."
"악마네." 브라이언이 말했다.
"아냐." 아담은 참을성 있게 다시 말했다. "사람들이 뒤섞어버린 것뿐이라고. 비슷한 뿔이 달린 것뿐이야. 이름은 판이라고 하는데, ..."
- "그게 무슨 뜻입니까?" 뉴턴은 물었다.
"아그네스는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예언만 했던 거예요. 이를테면 '베타맥은 사지 말아라' 같은 거죠. 이건 1972년에 대한 예언이었어요."
"비디오테이프 재생기를 예언했다는 겁니까?"
"아뇨! 아그네스는 그저 작은 정보 조각 하나를 주웠던 거예요. 그게 요점이에요. 대부분의 경우 아그네스가 쓰는 에두른 표현은 그 사건이 지나가서 모든 게 들어맞기 전까지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아그네스는 뭐가 중요할지 뭐가 그렇지 않은지를 몰랐고, 그래서 모든 예언이 마구잡이예요. 1963년 11월 22일에 대한 예언은 킹스린에서 무너진 집에 대한 거였어요."
"에?" 뉴턴은 정중하지만 감을 잡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날이잖아요. 하지만 아그네스의 시대에는 댈러스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반면 킹스린은 아주 중요했죠."
"아."
- "그리고 내연 엔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죠. 아그네스에게 자동차란 그저 웃기게 생긴 전차일 뿐이었어요. 우리 어머니만 해도 이 예언이 황제의 마차가 뒤집혔다는 얘긴 줄 아셨죠. 미래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를 알아야죠. 아그네스는 가느다란 관으로 거대한 그림을 보는 사람 같았어요. 그 작은 조각들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기반해서 훌륭한 충고처럼 보이는 말들을 적어 내려갔죠."
- "기억이에요, 그건." 아나테마는 말했다. "거꾸로 움직이기도 하는 거죠. 종족 기억은 말이에요."
뉴턴은 그녀에게 정중하지만 멍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아그네스가 미래를 '본' 게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거예요." 그녀는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본다는 건 은유적인 표현일 뿐이죠. 아그네스는 미래를 '기억한' 거예요. 물론 그렇게 잘 기억한 편은 아니었고, 본인의 이해를 통해 걸러질 때면 혼란이 일어나기도 했죠. 우린 아그네스가 자기 자손들에게 일어날 일들을 제일 잘 기억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이 아그네스가 써놓은 말들 때문에 어떤 곳에 가고 어떤 일들을 한다면, 그리고 아그네스가 쓴 내용이 당신이 간 곳과 당신이 한 일들에 대한 회상이라면 그건,"
"무슨 말인지 알아요. 하지만, 음,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어요."
- 크롤리에게 말해야 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말하고 싶은 상대는 크롤리였고, 말해야 하는 상대는 천국이었다.
결국, 그는 천사였다. 옳은 일을 해야 했다. 책략을 보면 훼방 을 놓는 것, 그게 그의 본질이었다. 크롤리가 정확하게 지적했다시피 애초부터 천국에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크롤리를 몇천 년간 알고 지냈다. 그들은 사이가 좋았다. 그들은 거의 서로를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때로는 각자의 상관들보다 서로에게 더 공통점이 많은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들 둘 다 이 세상을 우주적인 체스 게임의 말판으로만 보지 않고 그 자체로 좋아했다.
- 아지라파엘은 종이 더미가 쌓인 책상을 옆으로 밀고 너덜너덜한 카펫을 말아 올렸다. 카펫 아래 바닥에는 분필로 작은 원이 하나 그려져 있었고, 적절한 카발라 구절들이 원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천사는 초 일곱 대에 불을 켜서, 의식에 따라 원 주위의 특정 지점마다 한 대씩 세웠다. 그리고 향에도 불을 붙였다.
- "실례지만 어느 분과 대화하고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우리는 메타트론이로다."
"아, 그렇군요. 물론이죠. 아아, 좋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시트론 뒤셰보는 '톤톤 마쿠트', 즉 떠돌아다니는 '혼간'이었다. 그는 주술용 식물, 치료용 식물, 야생고양이의 일부, 검은색 양초, 특별한 말린 물고기껍질에서 채취해 낸 가루, 죽은 지네 한 마리, 시바스 리갈 반 병, 로스만 담배 열 갑, 그리고 <아이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1부가 든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는 칼의 무게를 가늠해 보고 숙련된 동작으로 검은색 수평아리의 머리를 잘랐다. 오른손이 피에 물들었다.
"'로아'가 나에게 내리시니." 그는 읊조렸다. "'그로스 본 앙게'가 내게 오시니."
- 수많은 좌초자들이 내놓는 소음, 즉 경적 소리와 엔진음과 사이렌과 휴대전화 소리, 그리고 영영 뒷좌석 안전벨트 안에 갇혀버린 어린아이들의 비명 소리로 이루어진 노래였다. 고대 무대륙의 암흑 사제들이 쓰던 비밀스러운 언어로 <그리스도의 적, 세상을 멸망시킬 분을 찬양하라>라는 영창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다. 끔찍한 오데그라 표지 같으니라고, 크롤리는 차를 빙 돌려 북환상선을 향해 달리면서 생각했다. 그래. 내가 한 짓이지. 실수였어. 그냥 평범한 고속도로가 될 수도 있었는데. 훌륭한 작업이긴 했지만, 정말 그럴 가치가 있었을까? 완전히 통제가 안 되잖아. 천국과 지옥은 더 이상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지구 전체가 마침내 폭탄을 맞은 제3세계 어느 나라 같아...
- 그러다가 문득 그는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딱 울리자 검은색 선글라스가 눈앞에 나타났다. 양복과 살갗에 묻어 있던 재와 그을음이 사라졌다.
알 게 뭐야. 기왕 갈 거라면 품위를 갖춰서 안 될 건 또 뭐람?
그는 부드럽게 휘파람을 불며, 차를 몰았다.
- "자아." 그녀는 누구라도 그녀의 원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다만 분노로 차가워진 말투 때문에 못 알아차릴 수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나에게 설명해줘야 할 것 같군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예요."
- "그러니까 제가 알고 싶은 건, 이 물고기가 다 어디서 왔냐는 겁니다." 경사가 물었다.
"말했잖아요. 하늘에서 떨어졌다니까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쾅! 5킬로그램짜리 연어가 앞유리를 뚫고 들어오지 뭡니까. 그래서 브레이크를 밟았고, 저걸 밟고 미끄러졌어요." 그는 화물차 밑에 남아 있는 귀상어의 잔해를 가리켰다. "그런 다음엔 '저기'에 처박혔고." 저기라는 건각양각색의 물고기로 이루어진 10미터 높이의 생선 무더기였다.
"술에 취하셨습니까?" 경사는 별 희망을 품지 않고 물었다.
"물론 술 같은 건 안 마셨어요, 대단하신 경찰 양반 댁들도 저 생선이 보일 거 아뇨?"
생선 더미 꼭대기에선 꽤 큰 문어 한 마리가 그들 쪽을 향해 촉수를 흔들고 있었다. 경사는 마주 손을 흔들고픈 충동을 억눌렀다.
- "아." 그는 막연히 다들 그걸 하고 난 뒤엔 샤워를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여자들만 하는 걸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비데가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을 품었다.
- "왜 안 된다는 거죠?" 뉴턴은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라는 점을 지적하려다가, 내면의 목소리가 충고하는 바에 따라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짧은 시간 안에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 아나테마는 어깨를 으쓱였다. 실용적인 검정 치마를 입으면서 하기에 쉬운 동작은 아니었다. "아그네스는 우리가 이번 한 번만 한댔어요."
뉴턴은 두 번인가 세 번 입을 뻐끔거리다가 겨우 말했다. "그럴 리가 그랬을 리가 없어요. 그것까지 예언했을 리가 없다고요. 믿지 않아요."
옷을 다 입은 아나테마는 카드 색인 묶음 쪽으로 걸어가더니 한 장을 뽑아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뉴턴은 그 카드를 읽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입을 꽉 다물고 돌려주었다.
- 그저 아그네스가 그 사실을 알고, 가장 투명한 암호로 표현해 놓았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예언이 수세대를 이어져 내려오면서 수많은 디바이스 가문 사람들이 여백에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들을 긁적여놓았다는 게 문제였다.
- 그리고 그 지점에서 모든 것이 와장창 무너졌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크롤리는 낙관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지독한 시기에 (그는 잠시 14세기를 회고했다) 그를 지탱해 준 흔들림 없는 확신이 하나 있다면, 그건 그가 결국은 빠져나오리라는, 우주가 그를 돌보아주리라는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 좋다. 그러니까 지옥은 그를 추격하고 있었다. 세상은 끝나가고 있었다. 냉전이 끝나고 진짜 대전이 시작되려 했다. 승산은 한 트럭분의 히피가 오슬리의 오리지널 LSD를 이겨낼 만큼도 없었다. 그래도 아직 기회는 있었다.
모든 게 적절한 때 적절한 장소에 있을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도 울렸다.
이 정도면 보행자 누구라도 그가 달려가고 있다는 경고를 받을 것이다. 그러고도 도망치지 못하면... 글쎄, 어차피 몇 시간 후면 다 죽을 텐데 뭐. 아마도, 어쩌면.
- 인도는 지독했다. 보행자용 지하보도는 더 지독했다. 최악은 템스 강을 건너는 부분이었다. 그나마 창문을 다 닫아놓을 선견지명은 있었으니 망정이지.
자, 아무튼 여기까지 왔다.
몇백 미터만 더 가면 옥스퍼드셔까지 쭉 뻗은 M40 도로에 들어설 수 있었다. 딱 한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다시 한번, 크롤리와 그 쭉 뻗은 길 사이에 M25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고통과 어둠의 빛으로 반짝이며 비명을 질러대는 띠 모양의 길. '오데그라'. 그 길을 건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원주 : 사실 이건 모순어법이 아니다. 어둠의 빛이란 자외선 너머에 존재하는 색채다. 전문용어로는 인프라 블랙이라고 한다. 실험을 통해 손쉽게 볼 수 있다. 실험내용은 간단하다. 튼튼한 벽을 골라, 머리를 숙이고, 돌격하라. 충돌의 순간 눈 안쪽, 고통 뒤편에서 튀어 오르는 빛깔, 죽기 직전에 볼 수 있는 바로 그 빛깔이 인프라 블랙이다.)
- "그리고 넌 태드필드를 더 낫게 만들 순 없어." 브라이언이 말했다.
"어쨌든 네가 여길 바꾼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 알 거고," 페퍼가 말했다.
"아, 그런 게 걱정이라면, 걱정 마" 아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너희 모두를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만들 수 있어."
- 아담은 자기 귀로 자기 입이 내뱉은 끔찍한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고것들은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개는 제 머리 위에 앞발을 올렸다.
아담의 얼굴은 제국의 붕괴를 그대로 의인화해 놓은 것 같았다. "아냐." 그는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돌아와! 명령이야!"
아이들은 도망치다 말고 얼어붙듯 멈춰 섰다.
아담은 멍하니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 아담은 입을 열어 비명을 내질렀다. 그것은 필멸의 인간이 지를 수 없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채석장 밖으로 울려 퍼져 폭풍과 뒤섞이고, 구름을 새롭고 불유쾌한 형상으로 응고시켰다.
- 비명은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그 소리는 물리학자들이 믿는 것보다 상당히 작다고 할 수 있는 우주 전체를 휘돌아 울려 퍼졌다. 천구들을 뒤흔들었다.
그 소리는 상실에 대해 이야기했고,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리가 멎었다.
무엇인가가 빠져나갔다.
- 아까까지 낡은 채석장 안에 서 있던 존재가 무엇이었든 간에, 지금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아담 영이었다. 좀 더 아는 게 많아진 아담 영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담 영이었다. 오히려 그전 어느 때보다도 더 아담 영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괜찮아." 아담이 조용히 말했다. "페퍼? 웬즐리? 브라이언? 이리 돌아와. 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다고. 이제 다 알았어. 그리고 너희가 날 도와줘야 해. 그러지 않으면 모든 일이 그대로 터져버려. 진짜 다 터져버린다고. 우리가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정말 그렇게 된단 말이야."
- "그러니까 너희가 하고 싶은 말은." 그는 최고로 의장 같은 말투를 끌어내어 결론을 지었다. "존슨 패거리가 고것들을 완전히 때려눕히건 그 반대건 별로 좋을 게 없다는 거야?"
"그거야." 페퍼가 대답하고는 덧붙여 말했다. "왜냐하면 말이지, 우리가 녀석들을 때려눕혀버리면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적이 되어야 하거든. 나랑 아담이 브라이언과 웬즐리랑 싸운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야." 그녀는 뒤로 물러앉았다. "누구에게나 기름덩이 존슨은 필요해."
"그래." 아담이 말했다. "내 생각도 그래. 누가 이겨도 좋을 게 없어.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한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개를, 혹은 개 너머를 응시했다.
"나한테는 무지 간단해 보이는걸." 웬즐리데일이 물러앉으며 말했다. "왜 그걸 정리하는 데 몇천 년이나 걸리는지 모르겠다."
"그걸 정리하려고 한 사람들이 남자들이었으니까 그래." 페퍼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 "왜 편을 갈라야 하는지 모르겠는걸." 웬즐리데일이 다시 말했다.
"당연히 편을 갈라야지. 모두가 무엇인가에는 편을 골라야 해." 페퍼가 다시 말했다.
아담은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그래. 하지만 난 자기가 자기 편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해." 그는 조용히 말했다. "가서 자전거를 끌고 나오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우리가 가서 몇 사람이랑 얘길 해봐야 할 것 같아."
- 군 기술자는 조수의 말에 동의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기록에 혼선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종의 계기 오류 탓으로 돌릴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M25 바로 위에 헬리콥터를 띄우면 헬리콥터 떡이 되어 떨어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빈티지 자동차가 아무 탈 없이 그 위를 달려갔다는 소리를 할 수가 있습니까?"
"아무 탈 없이 달려갔다고는 안 했습니다." 경관은 런던 경찰을 그만두고, 전력청에 다니다가 퇴직하고 최근 양계장을 시작한 형과 동업이나 할까 심각하게 고민하며 말했다. "불길에 휩싸였어요. 그런데도 계속 가더라고요."
"지금 우리 중에 누구라도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
누군가가 그렇게 운을 뗀 순간이었다.
(원주 : 사실이었다. 동시에 영상 700도와 영하 140도를 나타낼 수 있는 온도계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실제 정확한 온도는 양쪽 모두였던 것이다.)
- 높고 날카롭고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유리로 만든 하모니카 천 개가 각기 조금씩 음정이 틀린 채로 합주를 하는 것 같은 소리였다. 공기 분자 그 자체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 같은 소리였다.
- "지금으로선 도저히 구분해 낼 수가 없겠어요." 아나테마는 신음했다.
"구분해 낼 필요 없어요." 뉴턴은 광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아무거나 한 장 골라요. 아무래도 상관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그네스가 옳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이 모든 일이 아그네스가 예언했기 때문이라면, 지금 이 순간 어느 카드를 뽑든 그게 적절한 카드일 겁니다. 그래야 논리적이죠."
"말도 안 돼요."
"그런가요? 봐요, 당신이 여기 타고 있는 것조차도 아그네스가 예언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대령에게 뭐라고 말할지는 생각해 봤어요? 우리가 대령을 만난다면요. 물론 못 만나겠지만."
- "음." 아나테마는 무릎 위에 카드를 뒤집어 펼치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컴퓨터가 악마의 도구란 말이지? 뉴턴은 생각했다.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컴퓨터는 누군가의 도구여야만 했는데, 그가 확실히 아는 것이라곤 분명히 그의 도구는 아니라는 사실 뿐이었다.
- 우린 들어간다. 일을 해치운다. 나온다. 인간 본성이 제 길로 가게 놓아둔다. '죽음'이 말했다.
"난 이런 걸 상상하지 않았어." '전쟁'이 말했다. "철사줄이나 가지고 장난치려고 몇천 년이나 기다린 게 아니라고. 이런 건 도저히 극적이라고 할 수가 없잖아. 알브레히트 뒤러가 단추나 누르는 파멸의 네 기수를 그리느라 시간을 쏟은 건 아니잖아.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난 트럼펫이 울릴 줄 알았어요." '오염'이 말했다.
- 그러다가 '오염'이 느릿느릿 말했다. "있죠, 난 이런 곳이 될 줄은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뭐랄까, 대도시일 줄 알았죠. 아니면 큰 나라거나. 뉴욕이라든가. 모스크바라든가 아니면 진짜 아마겟돈이라든가."
다시 침묵이 흘렀다.
'전쟁'이 말했다. "그런데 아마겟돈이 어디지?"
- 너덜한 실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고 할 수 있는 상태의 섀드웰이 외쳤다. "보이냐고? 이 손가락은 말이다, 네놈을 네 창조주가 있는 곳으로 보내줄 수 있다 이거다!"
다이젠버거 병장은 얼굴에서 10센티미터쯤 떨어진 불그죽죽한 손톱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공격 무기로써 그 손톱은 상당히 등급이 높았다. 특히 음식 준비에 쓰이기라도 한다면.
- 심란한 암흑의 샘 위로 떠오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세 친구가 100퍼센트 인간이라는 점을 또렷이 의식하고 있었다. 전에도 옷을 찢어먹는다거나 용돈을 빼앗긴다거나 하는 등의 일로 친구들을 곤란에 빠뜨리긴 했지만, 이번 일은 집 안에 갇히고 방 청소를 해야 한다는 정도보다 훨씬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친구들 말고 달리 대안이 없었다.
"좋아, 우리에게 몇 가지 물건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칼 한 자루랑, 왕관 하나, 천칭이 필요해."
아이들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라고, 지금 여기서? 여긴 그런 거 없는데." 브라이언이 물었다.
"모르겠다." 아담이 말했다. "흠, 우리가 했던 게임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 다이젠버거 병장의 하루를 완벽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차 한 대가 정문 앞에 멈춰 섰는데 땅에서 몇 센티미터 위에 떠 있었다. 타이어가 없어서였다. 아니 도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차에 있는 것이라곤 푸른 연기 자락뿐이었고, 움직임을 멈추자 엄청나게 높은 온도였다가 식어내리는 금속에서 나는 핑 소리가 울렸다.
- "아지라파엘? 자네야? 옷차림 근사한데." 크롤리는 애매하게 말했다. 그는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마지막 50킬로미터를 달리는 동안 그는 1톤의 타오르는 금속과 고무, 가죽 덩어리가 온전히 기능하는 자동차라고 상상했고, 벤틀리는 그의 상상에 격렬히 저항했다. 힘든 부분은 전천후 타이어가 완전히 타버린 후에도 전체 덩어리가 계속 굴러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가 차에 타이어가 달려 있다고 상상하기를 그만두자 옆에서 갑자기 벤틀리의 잔해가 휘어진 바퀴테 위로 내려앉았다.
- 지평선 부근에서는 구름이 격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머리 위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공기를 찢는 것이라곤 가벼운 산들바람뿐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공기는 아니었다. 공기가 결정화한 것 같은 느낌이었고, 머리만 돌리면 새로운 단면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공기는 보석처럼 번득였다. 이 모습을 묘사할 만한 단어를 하나 찾아야 한다면, 머릿속에 저도 모르게 '우글거린다'는 말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아주 물질적인 형태가 될 최선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비물질적인 존재들이 우글거렸다.
- 아담은 위를 흘겨보았다. 어떤 면에서 머리 위에는 그저 맑은 공기뿐이었다. 다른 면에서, 초고감도로 확장해 보면 그곳에는 천국과 지옥의 주인들이 날개 끝을 맞대고 있었다. 특별한 훈련을 받은 자가, 그것도 바싹 다가가서 들여다보아야만 이 둘을 구분할 수 있었다.
정적이 그 손아귀에 세상이라는 거품을 쥐고 있었다.
- 건물 문이 돌아 열리고 네 기수가 걸어 나왔다. 이제 그들 중 셋에게서는 인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이제 그들 자신, 혹은 그들이 재현하는 모든 것을 모아서 만든 인간형 로봇 같았다. 그들에 비하면 '죽음'마저 소박해 보였다. 그의 긴 가죽 외투와 새까만 헬멧이 검은 예복으로 변하긴 했지만, 이런 것들은 하잘것없는 세부 사항일 뿐이었다. 해골이라는 것은 아무리 걸어 다니는 놈이라 해도 최소한 인간이기는 했다. 죽음이라면 살아 있는 모든 것 안에 숨어 있었다.
- "사실 저들은 진짜 진짜는 아냐." 아담이 급히 말했다. "사실은 그냥 악몽 같은 거야."
"그, 그치만 우린 자고 있지 않은걸." 페퍼가 말했다.
- "내 말이 그 말이야." 아담은 격려하듯 말했다. "진짜일 수가 없는 거잖아, 안 그래? 상식적으로 말야. 저런 게 진짜로 진짜일 순 없는 거라고."
- 아담과 '죽음' 사이의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웬즐리데일이 머리를 들고 움푹 팬 눈의 '기아'를 쳐다보았다. 웬즐리는 상상력을 조금 동원하면 끈과 나뭇가지로 만든 천칭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물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물건을 머리 주위로 빙글빙글 돌렸다.
'기아'가 방어하려고 팔을 내뻗었다.
다시 한번 섬광이 일었고, 은으로 만든 천칭이 바닥에 튀는 떨그렁 소리가 났다.
- '오염'은 이미 달리기 시작했지만, 달린다고 하기가 어색하다면 빠른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지만, 브라이언이 머리에서 풀고리를 빼내어 그쪽으로 집어던졌다. 원래는 그런 식으로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지만, 어떤 힘인가가 그의 손에서 고리를 넘겨받았고, 고리는 원반처럼 씽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이번에는 소용돌이치는 검은 연기 속에서 새빨간 불길이 타올랐고, 석유 냄새가 났다.
새까맣게 변색된 은관이 작은 소리를 내며 연기 속에서 굴러 나오더니 동전 같은 소리를 내며 한 바퀴 빙글 돌았다.
-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죽음'이 걸치고 있던 망토가 찢어지더니 날개가 펼쳐졌다. 천사의 날개였다. 하지만 깃털 날개는 아니었다. 밤의 날개였다. 창조의 성분을 잘라 그 아래 어둠으로 빚은 날개로, 그 속에서 아득한 빛만 몇 개가 깜박거렸다. 그 빛은 별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무엇인가일 수도 있었다.
하나 나는 저들과 다르다. 나는 아즈라엘, 창조의 그림자로 창조된 자. 그대는 나를 파괴할 수 없어. 그것은 곧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되리니.
그들의 눈싸움에서 피어오르던 열기가 희미해졌다. 아담은 코를 긁었다.
"아, 모르겠네. 뭔가 방법이 있겠지." 아담이 말하며 마주 웃었다.
- "내 기억엔 당신이 컴퓨터 기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과장이었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 사실은, 정말이지, 허풍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할 거라는 생각도 들 법한 과장이라고 할 수 있죠.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뉴턴은 눈을 감았다. "기만이었어요."
"거짓말이었단 얘긴가요?" 아나테마는 상냥하게 물었다.
"아,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진 않군요. 사실 컴퓨터 기사가 아니긴 하지만 말입니다. 전혀 사실은 그 반대죠."
- 허용이고 나발이고 어쨌든 그들에겐 맥주가 있었다.
불빛이 들어왔다. 문명은 혼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던 길을 멈추고, 신문사에 최근 사람들이 별것 아닌 일에 얼마나 과하게 흥분하는가에 관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 아담이 이제야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렸다. 크롤리를 선뜻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나, 아담은 마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크롤리의 모든 생애를 읽는 것처럼 그를 응시했다. 순간 크롤리는 진정한 공포를 알았다. 언제나 이전에 느껴본 감정이 진짜 공포라고 생각했는데, 이 새로운 감각에 비하면 그건 하잘것없는 두려움에 지나지 않았다. 저 아래 놈들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힘으로써 존재를 중지시킬 수 있지만, 이 소년은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의 존재를 없앨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마 아예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 "알잖아." 크롤리는 숙명론적인 우울을 뒤집어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가는 게 아니야.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게 늙은 공작이 총에 맞아서, 아니면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귀를 잘라버려서, 아니면 누군가가 엉뚱한 데다 미사일을 떨어뜨려서 시작되는 줄 알지. 그렇지가 않아. 그건 단지, 단지 전쟁과 아무 상관없는 구실일 뿐이야. 전쟁이 일어나는 진짜 이유는 서로를 참아낼 수 없는 두 편 사이 압력이 점점 높아지고 높아지다 보면, 무슨 일로든 전쟁이 날 수 있는 거야. 뭐든지 말이야. 어... 네 이름이 뭐지?"
- 번갯불이 사라지자, 그곳에는 금빛 불로 만들어진 젊은이가 하나 서 있었다.
"오 이런, 그분이네." 아지라파엘이 말했다.
"누구?" 크롤리가 물었다.
"하느님의 목소리, 메타트론."
- 붉은 존재는 마치 넌 나중에 구입하겠다고 점찍어놓는 것 같은 눈길로 크롤리를 짧게 바라보더니, 아담을 응시했다. 그 존재가 입을 열자 백만 마리의 파리들이 죽자 사자 달아나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듣는 사람들에게 줄칼이 척추를 훑고 지나가는 느낌을 선사하는 웅웅거림.
- "그러면, 아담 영." 메타트론이 말했다. "물론 우리는 이 시점에서 네 도움에 십분 감사할 수 있겠다만, 아마겟돈이 반드시 지금 일어나야 한다는 점을 덧붙여야겠다. 잠시의 불편은 있을지 모르나 결국은 궁극적인 선으로 가는 길이니."
"아하, 그러니까 세상을 구하기 위해 파괴해야 한다는 말이군." 크롤리는 아지라파엘에게 속삭였다.
- "난 왜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 수많은 물고기랑 고래랑 나무들이랑, 그리고, 그리고 양이랑 그런 것들이 다 타버려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아담이 말했다. "그것도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말이죠. 그냥 누가 더 센 패거리인지 알아내려는 것뿐이잖아요. 우리하고 존슨 사이와 마찬가지야. 어느 한 편이 이긴다고 해도 반대편을 정말 때려눕힐 순 없어요. 정말로 그러길 원하진 않으니까. 그러니까, 영원히는 당신들은 모든 걸 다 다시 시작할걸요. 계속 이 둘 같은 이들을 사람들에게 보내서," 아담은 크롤리와 아지라파엘을 가리켰다. "사람들을 휘저으려고 하겠죠. 사람들은 남들이 와서 휘저어놓지 않아도 충분히 힘들다고요."
- 크롤리가 아지라파엘 쪽으로 고개를 돌려 속삭였다. "존슨파라니?"
천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초창기 분파 같은데. 영지주의 분파처럼 말이야. 오피스파 같은, 아니 오피스파가 아니라 세트파였나? 아니지, 콜리리디언을 생각하고 있는데. 맙소사. 미안, 너무 많아서 기억해 내기가 힘들어."
(역주 : 오피스파와 세트파 둘 다 초기 영지주의 분파로, 오피스파는 창세기에 나오는 뱀을 중시했고 세트파는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 세트를 중시했다. 콜리리디언은 동정녀 마리아를 여신으로 모신 분파다.)
- "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놓고선, 그 사람들이 인간처럼 행동한다는 이유로 화를 낸다는 게 뭐 그리 멋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당신들이 사람들에게 죽은 다음에 모든 게 가려질 거라는 말만 그만하면, 다들 살아 있을 때 가려내려고 노력할지도 모르죠. 내가 책임을 맡는다면 난 사람들이 훨씬 오래 살게 만들 거예요. 므두셀라처럼요. 그럼 훨씬 더 재미있을 거고 사람들은 자기들이 환경이며 생태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다 생각하기 시작할지도 몰라. 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 환경 속에 있을 테니까."
- "생각해 봤는데 난 그걸 원하지 않아요." 아담은 반쯤 몸을 돌려 고것들에게 격려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몇 가지는 바꿀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사람들이 계속 나에게 와서 언제나 모든 것을 가려내라고 해댈 거고, 쓰레기를 다 없애고 자기들을 위해 나무를 더 만들라고 할 텐데, 그래서 좋을 게 뭐 있겠어요?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해 자기 방을 치워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요."
- "넌 네 방을 치워본 적이 한 번도 없잖아." 뒤에 서 있던 페퍼가 말했다.
"내 방에 대해 얘기한 게 아니잖아." 아담의 방은 카펫이 보이지 않은 지 몇 년은 지난 상태였다. "내가 말하는 건 일반적인 방이야. 내 방이 아니라 비유라고. 비유 삼아 한 말이란 말야."
바알세불과 메타트론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 "어쨌거나." 아담이 말했다. "늘 지루하지 않게 페퍼랑 웬즐리랑 브라이언이 할 일을 생각해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지금 갖고 있는 것 이상의 세상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고맙지만 사양이야."
메타트론의 얼굴에 아담의 기이한 논리를 겪는 사람들에게 흔히 보이는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네가 너 스스로를 부인할 수는 없다." 메타트론은 마침내 말했다. "들어보아라. 너의 탄생과 운명은 위대한 계획의 일부다. 사건은 이렇게 일어나야만 한다. 모든 선택은 이루어졌다."
"도전은 조오은 것이지만." 바알세불이 말했다. "도전이 용납되지이 않을 만큼 중요한 일도 있지. 이해해야만 한다아!"
- "난 아무것에 대해서도 도전하고 있지 않아요." 아담이 합리적으로 말했다.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거죠. 사실을 지적한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싸움은 그만두고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고 말이죠. 당신들이 간섭하고 휘젓지만 않으면 사람들도 충분히 생각을 하고 세상을 엉망으로 만드는 일도 그만둘지 몰라요. 꼭 그럴 거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은 있다고요." 아담은 양심적으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 "말도 안 된다." 메타트론이 말했다. "너는 위대한 계획에 거스를 수 없다. 생각해야 해. 네 유전자 속에 들어 있는 일이야. 생각해 봐라."
아담은 머뭇거렸다. 어두운 저류는 언제나 다시 흐를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그 새된 속삭임은 그렇다, 바로 그렇다, 결국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 있다, 너는 계획의 일부이니 계획에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무척 길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아담은 지쳐 있었다. 세상을 구하는 일은 열한 살짜리의 몸을 몹시 혹사시켰다.
- "실례합니다만." 천사가 말했다.
셋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 위대한 계획 말입니다. 그건 형언할 수 없는 계획이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위대한 계획이다." 메타트론이 단호하게 말했다. "잘 알 텐데. 세상이 6천 년간 이어지면 결말을..."
"네, 네. 그게 위대한 계획이라는 건 알겠어요." 아지라파엘은 정중하고 공손하게, 그러나 정치 회합에서 달갑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는 답을 들을 때까지는 물러나지 않으려 하는 사람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말을 이었다. "그저 그 계획이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가 맞는지 묻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 시점에서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것뿐이에요."
"중요하지 않다!" 메타트론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같은 게 분명하다!"
- 분명하다고? 크롤리는 생각했다. 사실은 알지 못하는 거구나.
그는 바보처럼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 "그럼 100퍼센트 보장하실 수는 없다는 거죠?" 아지라파엘이 물었다.
"형언할 수 없는 섭리란 말 그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메타트론이 답했다. "분명 위대한 계획은,"
"하지만 위대한 계획도 형언할 수 없는 섭리 전체 중에서는 아주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요." 크롤리가 끼어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섭리의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는 거죠."
- "쓰여 있다아!" 바알세불이 노호했다.
"하지만 어딘가 다른 곳에는 또 다르게 쓰여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크롤리가 말했다. "읽을 수 없는 곳에 말이죠."
"커다란 글씨로." 아지라파엘이 말했다.
"밑줄도 쳐서 말이죠." 크롤리가 덧붙였다.
"그것도 두 줄이나." 아지라파엘이 덧붙였다.
"어쩌면 이건 세상에 대한 시험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크롤리가 말했다. "당신들에 대한 시험일 수도 있고, 안 그래요?"
"주께선 그분의 충실한 종들을 시험하지 않으신다." 메타트론은 그렇게 답했지만, 목소리에 근심이 깔려 있었다.
- 다들 아담 쪽을 돌아보았다. 아담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아담이 말했다. "난 뭐라고 쓰여 있는지가 왜 문제인지 모르겠네. 사람들에 대한 것도 아닌데, 그런 건 언제든 줄을 그어 버릴 수 있어."
산들바람이 비행장을 휩쓸었다. 머리 위에 모여 있던 천공의 주인들이 신기루처럼 파문을 일으켰다.
창조 이전에나 있었을 법한 정적이 깔렸다.
- 침묵을 깬 것은 마담 트레이시였다. "그 사람들 이상하지 않았나요."
진심은 "그 사람들 이상하지 않았나요"가 아니었다. 그녀가 정말로 말하려던 바는, 비명이라면 모를까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두뇌는 놀라운 회복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 사람들 이상하지 않았나요"라는 말은 빠른 회복 과정의 일부였다. 그녀는 30분만 지나면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 "끝난 거지?" 아지라파엘이 말했다. 크롤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끝이 아닐 것 같은데."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아담이 금언처럼 읊었다. "당신들 둘에 대해선 다 알아. 걱정 말아요."
- 아담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면 사람들이 고래를 죽이는 일을 멈출까?"
아나테마는 멈칫했다. 그렇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좋았으리라.
"그리고 사람들이 고래들을 죽이기 시작하면 나에게 뭘 어쩌라고 할 건데?" 아담이 말했다. "아니. 난 이제 이 일에서 빠질 거야. 내가 그런 식으로 간섭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멈추지 않을걸.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일은 고래를 죽이면, 죽은 고래를 얻게 된다는 사실 뿐이야."
- 사실은 뭔가 그럴싸한 무기를 들고 마왕을 대면하는 편이 훨씬 훨씬 끔찍했다. 그럴싸한 무기를 들면 약간이라도 희망을 품게 될 테고, 그래서 상황은 더욱 나빠질 테니.
- 아지라파엘은 검을 치켜들었다. 갑자기 마그네슘 막대처럼 검에 불이 붙으면서 훅 소리가 났다.
"한번 방법을 배우면, 절대 잊지 않는 법이지."
아지라파엘은 크롤리에게 미소 지었다.
"꼭 말해두고 싶은데, 우리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러면... 난 자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선의의 불꽃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 "맞았어." 크롤리는 씁쓸하게 말했다. "덕분에 즐거웠다."
아지라파엘은 손을 내밀었다. "자네와 알고 지낸 것, 멋진 일이었어."
크롤리는 그 손을 잡았다. "이만 다음을 기약하자고. 그리고... 아지라파엘?"
"응."
"난 늘 자네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선 제법 나쁜 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 기억해 줘."
- 아지라파엘과 크롤리의 외투가 솔기를 따라 죽 찢어졌다. 기왕 할 거라면, 진짜 모습으로 가는 편이 좋았다. 깃털이 하늘을 향해 펼쳐졌다.
흔히들 믿는 바와 달리 악마의 날개는 천사의 날개와 똑같다. 좀 더 잘 다듬어져 있을지는 몰라도.
- "그러니까 자네 말은." 크롤리가 말했다. "그분이 이 모든 것을 계획하셨다는 거야? 처음부터?"
아지라파엘은 세심하게 병 주둥이를 문질러 닦은 다음 크롤리에게 돌려주었다.
"그럴 수도 있잖나. 그럴 수도 있다고. 뭐 언제나 그분에게 물어볼 수는 있겠지."
"내가 기억하기로는." 크롤리는 생각에 잠겨서 대답했다. "뭐 우린 대화라고 할 만한 걸 해본 적이 없지만, 아무튼 그분은 직접적인 답변을 주는 편이 아니었는데. 사실, 사실은 아예 대답을 안 하시잖아. 그저 미소만 지으실 뿐이지. 네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그거야 사실이잖아." 천사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잠시 대화가 끊기고, 둘은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기억해 내는 듯 생각에 잠겨 먼 곳을 바라보았다.
- "실례합니다만, 이 부근 어딘가에 검이 한 자루 있어야 하는데요, 어쨌든 제가 듣기로는 그렇습니다만, 혹시..."
아지라파엘은 당황한 것 같았다. 그는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뒤지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일어서서야 겨우 자신이 몇 시간 동안 검을 깔고 앉아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손을 뻗어 검을 집었다. "미안해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칼을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 국제 택배 모자를 쓴 밴 운전사는 그럴 것 없다고, 누군가는 내가 물건을 제대로 수거했다는 서명을 해줘야 하니 두 사람이 여기에 있어줘서 다행이라고, 그나저나 오늘은 정말 대단한 날 아니냐고 말했다.
아지라파엘과 크롤리 둘 다 그의 말에 동의했고, 아지라파엘은 밴 운전사가 내민, 왕관 하나, 천칭 하나, 검 한 자루가 올바른 순서에 따라 수령되었으며 흐릿한 주소로 배달되어 알아볼 수 없이 뭉개진 계좌번호에 청구될 것이라고 쓰여 있는 서류철에 서명을 했다.
- 그녀는 평생 예언에 따라 살아왔는데, 이제 예언은 없었다. 분명 선로 끝에 다다랐는데 아직도 계속 달려가야 하는 열차 같은 기분일 것이다.
이제부터 그녀는 모든 일을 놀라움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 얼마나 행운인가.
전화벨이 울렸다.
- 그는 다른 사람을 깨우지 않으려고 가능한 한 조용히 부엌 안을 돌아다녔으나, 내는 소리마다 요란하기만 했다. 낡은 냉장고 문은 최후 심판을 알리는 벼락 소리 같은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부엌 수도꼭지는 쥐 오줌처럼 찔끔찔끔 물을 흘리면서도 소리만은 옐로스톤 공원의 올드페이스풀 간헐천 못지않게 요란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역사의 여명 이래로 다른 사람의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한 모든 인간이 그러했듯 설탕 없는 인스턴트 블랙커피를 만들었다.
(원주 : 호색가이자 문인으로 유명했던 지오반니 쟈코포 카사노바(1725~1798)만은 예외에 속한다. 회고록 12권에 밝힌 바, 그가 '항시' 가지고 다니는 가방 속에는"빵 한 덩어리, 특상품 세비야 마멀레이드 한 통, 나이프, 포크, 그리고 휘젓기용 작은 숟가락, 가공하지 않은 모직물로 조심스레 싼 신선한 달걀 2개, 토마토, 작은 프라이팬, 작은 소스팬, 주정 증류기, 보온용 냄비, 이탈리아식 가염 버터가 담긴 양철통, 본차이나 접시 두 장이 들어 있었다. 또한 나의 호흡과 커피를 위한 감미료로 꿀벌집 한 조각도. 나의 독자들은 이 모든 것을 말하는 나를 이해하리라. 진정한 신사란 언제나 신사답게 아침식사를 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어디서나 스스로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 "모르겠는걸.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절대 확신을 할 수가 없단 말이야. 계획 안에 또 계획이 있으니."
"뭐라고?"
"흠." 이 문제에 대해 머리가 아파올 때까지 생각했던 크롤리는 대답했다. "그 모든 것에 대해 의아해해 본 적 없어? 알지, 자네 쪽과 우리 쪽, 천국과 지옥, 선과 악, 그런 구분들 말이야. 그러니까, 어째서지?"
천사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내 기억으로는 반란이 있었고-"
"아, 그렇지. 그런데 그 반란이 왜 일어난 거지? 응? 굳이 일어날 필요가 없었잖아, 안 그래?" 크롤리는 눈에 광기를 띠고 말을 이었다. "엿새 만에 우주를 하나 만들 수 있는 존재라면 그런 사소한 일이 일어나게 놔두지 않았을 거야. 일어나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물론."
"세상에, 정신 좀 차려." 아지라파엘은 미심쩍은 투로 말했다.
- "그건 별로 좋은 충고가 아니야. 전혀 아니지. 자네도 앉아서 정신 바짝 차리고 생각해 보면 아주 이상한 생각들이 떠오를 텐데. 이를테면, 왜 인간을 호기심 많게 만들어놓고서 커다란 네온 손가락이 깜박이며 '이게 그거야!'라고 외쳐대는 곳에다 금지된 과일을 심어놓는가 하는 생각이라든지."
"네온 같은 건 기억에 없는데."
"비유일 뿐이야. 내 말은, 그들이 그 과일을 먹기를 원한 게 아니라면 왜 그랬겠느냐는 거지. 응? 모든 게 어떻게 되어갈지 보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어. 그게 다 거대하고 커다란 형언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계획의 일부일 수도 있다고. 전부 다 말이야. 자네, 나, 그 녀석, 모든 것이 다. 직접 만든 게 다 제대로 돌아가는지 보려는 무진장 거대한 시험이었을 수도 있잖아?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단 말이야. 이건 거대한 우주적 체스 게임일 수가 없어. 그저 아주 복잡한 솔리테어야만 하지. 그러면 귀찮게 답해줄 필요도 없고 말이야. 우리가 그걸 이해해 버린다면 더 이상 우리가 아닐 테니까. 왜냐하면 모든 게 다- 다-"
- 형언할 수 없으니까
오리들에게 먹이를 주던 사람이 말했다.
"그렇지. 맞아, 고마워요."
- 문득 크롤리가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
"모르겠는데." 아지라파엘이 대답했다. "뭐, 아무튼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어."
크롤리는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그들은 다시 리츠로 갔고, 신비롭게도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최근에 있었던 분투가 현실에 예기치 않은 부산물을 남겨놓은 모양이었다. 그들이 점심을 먹는 동안 역사상 처음으로 버클리 광장에서 나이팅게일이 울었으니. 차들의 소음 때문에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나이팅게일은 바로 지금, 그곳에 있었다.
- 마녀사냥 하사관 섀드웰의 세계에서 지난 10년간 일요일 점심은 변함없는 순서로 이어졌다. 그는 담뱃불에 망가지기 직전인 자기 방탁자 앞에 앉아, 마녀사냥 군대 도서관에 있는 마법과 악마학에 관한 낡은 책 중 한 권을 넘겨보곤 했다. <네크로텔레코미니콘>이라든가 <리베르 풀바룸 파기나룸>, 혹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고전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같은 책을.
(역주 : 사자의 전화번호부. 테리 프랫쳇의 디스크월드 시리즈에 나오는 책이며, 네크로노미콘의 패러디. / '노란 종이의 책'이라는 뜻의 라틴어, 닐 게이먼의 '샌드맨' 시리즈에서 악마를 소환하는 책으로 나온다.)
(원주 : "책 중의 책, 놀라운 지침서. 진심으로 추천함" - 교황 이노센트 8세.)
- 아담은 개에게 눈을 찡긋했다.
개는 산울타리에 난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아담은 잘 들리도록 크고 뚜렷하게 "개, 이 나쁜 개야! 멈춰! 이리 돌아와!"라고 외치며 그 뒤를 쫓아 기어갔다.
무엇인가가 끝나가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세상이 끝난다는 것은 아니었다. 여름이 끝나갈 뿐이었다. 또 다른 여름이 오겠지만, 이런 여름은 결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러니 최대한 즐기는 것이 좋으리라.
- 그는 들판을 반쯤 가로지르다가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가 뭔가를 태우고 있었다. 그는 재스민 장 굴뚝으로 솟아오르는 흰 연기를 보고 한숨 돌렸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아담은 다른 사람들은 놓칠지도 모르는 것들을 들을 수 있었다.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마녀의 깨지는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이롭지 않을 만큼 많이 알고 있는 누군가가 뱉는 나지막하고 솔직한 깔깔거림이었다.
- 별장 굴뚝 위에서 흰 연기가 몸부림치며 엉겼다. 한 순간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 시간, 아담은 연기 속에서 잘생긴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300년이 넘도록 지상에 보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아그네스 너터는 아담에게 눈을 찡긋했다.
- 닐 게이먼 : 우린 <멋진 징조들>을 재미 삼아 썼어요. 이걸 보고 싶어 하거나 출판하려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도 안 했죠.
테리 프래쳇 : 놀이거리쯤으로 생각했으니까요.
닐 게이먼 : 그리고 이 책의 성공과 인기에 둘 다 놀라고 말았죠.
테리 프래쳇 : 우린 "이 책이 돈을 벌 수 있을까 몰라"라고 말하고 있었거든요.
- 사이파이(www.scifi.com)와의 인터뷰 중에서
- 테리 프래쳇은 1948년 4월 28일 영국의 버킹엄셔 비콘스필드에서 태어났다. 프래쳇은 학교가 아니라 도서관에서 주된 교육을 다 받았노라고 공언하며, 라틴어보다 목공 일이 재미있을 것 같다면서 기술학교에 들어갔다가 열세 살 때 쓴 단편소설 <하데스 사업>이 학교 잡지에 실리면서 글쓰기에 재미를 들였다. 이후 저널리즘에 흥미를 느끼고 1965년 학교를 떠나 <벅스> 신문사에 들어갔는데, 편집자인 피터 밴더 반 듀렌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첫 장편 <카펫 사람들>을 소개했고 이를 계기로 이후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 편집자 콜린 스미스와 만났다.
- 자, 이렇게 쭉 적어놓고 보면 이런 두 사람이 어쩌다 함께 소설을 쓰게 된 걸까 궁금해지지 않는가. 물론 이 책을 쓴 1989년에는 두 사람 다 정상급 작가가 아니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스페이스보이저>라는 그저 그런 잡지에서 일하던 닐 게이먼이 작가로서는 처음 인터뷰를 받아보는(<카펫 사람들>이 출간된 다음 해였으므로) 테리 프래쳇과 점심 약속을 잡았을 때였다. 만만찮은 재기와 입담을 자랑하는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고, 곧 절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5년 후인 1989년에 놀이 삼아 한 권의 책을 같이 써보기로 했다. 본격적인 집필 기간이 9주밖에 걸리지 않은 이 유쾌한 종말 이야기는 작가들을 놀라게 하며 17주 동안 <선데이타임>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고 아직도 전 세계에서 팔리고 있다.
- 공저를 두고 누가 어느 부분을 썼는지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던지면 작가들은 "나는 단어를 썼고, 그 친구는 자간을 채웠지요... 물론 그 친구는 다르게 말할 거라는 걸 명심하시고."(테리 프래쳇, <컴퓨서브 SF/판타지 포럼>에서)라는 식의 장난기 어린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 어쨌든 이 책은 좋은 작가 두 명이 힘을 합쳐 시너지를 낸 드문 경우로, 작가 본인들도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지 않을까 싶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다시 한번 함께 책을 써볼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몇십 년 동안 꾸준히 받으면서도 두 사람 다 공저에는 부정적이었다. 물론 쭉 좋은 친구로 지내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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